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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

by 은총가득 2020. 12. 12.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벧전 2;9-11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로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구원 받은 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나라를 위한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 혼 육을 하나로 통일하여  온전한 순종과 사랑으로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녀된 우리는  실제로는 자신의 영속에 왕이신 주님을 모셔둔 채,  자아의 열심으로  주님 일을 한다고 동분서주 바쁘답니다. 이것은 사역에 얽매인 사역의 종이 될뿐....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전술에 넘어간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 영속에  뒷방 늙은이처럼 갇혀 계시고.....


우리의 자아는 시퍼렇게 살아서  혼과 몸은 성공적인 목회, 성공적인 삶을 살겠다고 혼신을 다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무지 주님과 상관없다고 하십니다.(마7;21) 진정 주님의 사람은 주님을 영안에 모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죽이고 영,혼,육의 세계를 온전히 주님께 이양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3요소인 영의 세계, 혼의세계와 몸, 즉 육신의 세계.... 쉽게 말하여 영과 혼과 육이 국가라면  세 국가가 삼국통일 되어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 ㅡ 오직 주님 뜻대로 다스리시도록 맡겨 드리고 순종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될 때, 비로소우리는  왕이신 주님과 함께  왕같은 제사장이 되고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고 그분의 절친한 친구가 되고  만왕의 왕이신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 영, 혼,육을  하나로 통일 시켜 영원 무궁한 주님의 거룩한 나라,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서   그의 아름다운 덕을 온 만방에 선전합시다.  그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할렐루야! 마라나타~!
예은목   

 

 

 

왕 같은 제사장(벧전2:9)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망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매일 부딪히는 현실적인 삶에 필요한 지혜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근원적인 고민에 대한 답을 기초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두 가지 해석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왕 같은 재사장들’ 로 번역된 부분은 헬라어 성경에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 라고 나옵니다,(벧전 2:9)

이 구절은 ‘왕의 제사장’ 혹은 ‘왕과 같은 제사장’ 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실레이오스라는 형용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는 이 단어가 ‘왕과 관련된’ ‘왕의’ 라는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고려하면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는 

‘왕의 제사장’ 혹은 ‘왕에게 속한 제사장’ 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왕’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우리는 왕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는 바실레이오스를 ‘왕과 같은’ 혹은 ‘왕적인’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들’ 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서 올바르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루터의 발견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이 구절에서 종교개역의 횃불을 높이 들게 했던 중요한 고리를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른 바 ‘만인 제사장 교리’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카톨릭교회의 사제들만이 제사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되었다는 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일하게율법을 지킴으로써나 다른 이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의 발견이었습니다.

(빌3:9)

그래서 모든 신자는 누구의 공로나 중보 없이 오직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4;16)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카톨릭의 사제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곡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 27:51)

이로써 모든 중보의 직을 취하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따라서 우리는 제사장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한 신앙으로써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사장 나라의 은유

 

칼빈(1509-1564)은 본문의 ‘왕 같은 제사장들’ 이라는 표현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의 나라’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6)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적 선택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겔 20:5)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진리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은 민족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섬김을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회복하게 되기를 바라며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중재자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겔 38:16)

이것은 구약 시대에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 5:12)

인간이 자신의 어떠한 능력과 선함으로도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였습니다, (사 59:2)

 

제사장의 주요 직무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고 이로써 죄로 말미암아 불결해진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레 4;3. 20) 이와 동일한 원리로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출 19:6)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 

셋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이라는 것입니다.(신 4:3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민족에게는 주시지 않는 남다른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사 2;3, 미 4:2)

이것은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4:6)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경건입니다.

따라서 경건은 단지 삶의 모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존재의 울림입니다.

만약 교회에 이러한 율법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진리보다 세속적 시류에 더 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교회를 본받는 대신 교회가 세상을 본받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와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 나라가 되었듯이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 교회는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었습니다. (마 18:18)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구원받지 못한 나라와 민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야야 합니다. (마 5:44, 눅 6:28)

자신들에게 주신 많은 하늘의 신령한 자원과 이 땅의 자원들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인데 왕과 같은 제사장입니다. (벧전 2: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동등한 왕의 지위를 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우 만물의 왕이심 

첫째로 하나님의 만물 위에 뛰어난 통치주이시라는 사실입니다.(고전 15:24)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시는 통치주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그분의 우주적 통치를 완성할 도구인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십니다.(엡 1:22)

 

왕국은 왕을 중심으로 모든 질서들이 세워진 나라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백성들이라면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왕이 가지고 있는 선한 통치 이념이 나라 구석구석에까지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까?

모든 백설들이 거기에 복종하고 그 통치 아래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왕의 통치가 다른 나라에까지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저들의 행복이 결국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맛보지 못한 진리를 맛보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행복을 알기 때문입니다.(벧전 2;3)

그래서 우리는 이 참된 행복을 그들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 사랑을 힘입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고자 합니다.(롬 14:8, 고후 5:16)

 

신자로서의 존재의 울림은 바로 이렇게 사명을 따라가는 삶과 인격 속에서 울려 퍼집니다.

이것은 어떤 행사나 거대한 구호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와 구원의 비밀을 알아감으로써 삶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변화될 때 비로소 신자로서의 존재의 울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공동체

둘째로 교회가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엡 3:10, 골 1;25)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분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섬겨야 할 대상은 크게 하나님, 세상, 그리고 교회 자신입니다.

첫째로는 교회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시 99:5, 요 4:29)

둘째로는 교회는 세상을 섬깁니다.(마 5;13∼14)

셋째로는 교회는 교회 자신을 섬깁니다. (엡 4:11-12)

 

신자를 통해 세상이 구원받게 하심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통해 이 세상이 구원받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눅 19:10, 행 1:8, 롬 1:14)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홀로 감당하시기에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경륜을 펼침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과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미 4:2)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제대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의 통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삶으로써 성경 진리를 보여주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는 지식을 세 저장고에 두셨습니다.

성경과 목회 사역, 그리고 신자의 마음입니다.

성경이원천적 보고라면 목회 사역과 신자의 마음은 거기서 발견된 지식을 풍성하게 하고 적용하는 저장고입니다.

 

신자의 탁월한 지위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롬 8:16-17, 11;13, 엡 1:8)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탁월한 신분을 부여받고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의 성취에 이바지 하게 됩니다.

그것은 천사도 살펴보기를 흠모할 만한 값진 것이었습니다. (벧전 1:12)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경륜은 너무 위대해 보여서 실제 우리의 아주 사소한 삶과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세상의 뛰어난 권세를 가진 정치가도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종교 지도자도 아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기껏해야 랍비나 선지자로 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요 1:38, 49, 4:19)

그러나 그분의 삶 전체는 존재의 우림의 연속이었습니다.(마 7:28-29, 막 1:22)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어중간한 태도로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어중간한 삶이 무난하게 사는 요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구원해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뿐더러 끝내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길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결국이 무엇이겠습니까?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단지 세상의 행복을 누리게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단지 세상의 행복을 누리게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히3;1, 12:22)

그 행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승리의 확신

성경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섬겼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히 12:1)

그것은 그들이 발견한 하늘나라의 가치가 너무나 높고 고귀하기 때문이었습니다.(히 11:6)

잠시 고난 가운데 눈물을 흘릴지라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빌 3:18-21)

왜냐하면 진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 편에 서 있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복음 때문에 박해를 당할지라도 이 세상이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잠시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신이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번성하는 악인들은 들판 위에 베인 풀처럼 잠시 있다 사라지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번성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시 37:2, 90:6)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현재적인 삶 속에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불안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진리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보다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을 행해 들려주어야 할 존재의 울림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들려주는 존재의 울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신자는 온 땅과 만물 위에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움으로써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함으로써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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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란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는 핍박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지만 자기의 권리부분만 알고있지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은 쏙 빼고 알고있습니다.이 부분을 집중 질문하여 보면 정말 각각 대답이 다릅니다.오해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무엇이고 왕이며 제사장인가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 당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성도’라 합니다. ‘聖徒’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을 ‘코데쉬’라고 하는데 “잘라낸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성도’라는 말 대신 ‘선민’이란 말을 썼습니다. “선택받은 백성”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택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짚어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받은 자가 되었다면 아브라함 이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모두 버림받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선택에는 배타성이 있느냐는 소리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셨을 때는, 노아 가족을 제외한 당시 사람들 중 누구도 선택받은 무리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노아의 가족들만이 선택받아 홍수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머지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사실 이 물음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인간들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살았습니다. 홍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배타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선택하려 하심)을 소홀히 여기고 응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하지 않았기에 선택받은 자의 무리에 속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벧전2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신분을 말씀합니다

주님이 택하여 주셨고, 

신분을 높혀주셨고, 

주님나라에 백성삼아 주셨고, 

주님과 화목하여 가까히 갈 수 있는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① ‘택하신 족속’ 이란 말은 

‘게노스’라는 말로 ‘혈통’또는 ‘출생’을 가리키는 말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진정으로 택함을 받은 족속은 혈통이나 민족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선택된 자들입니다.이런 자들이 천국 갈자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혈통으로 따지면 우리는 택하시 족속이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제물되시고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 자성소에서 단번에 제사를드려 나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또 나를위해 기도하심을 믿고 신인하면 믿는 자가 택하신 백성입니다.

 

② ‘왕 같은 제사장’ 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을 통치하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왕은 다스릴 나라와 백성이 있어야하며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고난만 격고 오히려 도망만 다녀야 했던 것처럼 성도는 오히려 고난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스릴 것이 또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셋째로 자기에게 있는 달란트를 다스려야 합니다.

 

③ ‘거룩한 나라요’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현 직책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룩한’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린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선별하신 존재들임을 시사합니다. 그중에 제사장역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의 중계자 입니다. 나의 죄를 예수로 제물삼고 하나님께 피를 드려서 매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물과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예수의 피로 제사를 잘드려야 죄인이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상대도 하지않습니다. 상대하는 것은 피를 가진 제사장입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한생명을 죽인 피를 하나님앞에 보여주어야 죄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곧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바라보십니다. 예수안에서 거룩해 지시길 원합니다.

 

④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소유된’ 의 헬라어 ‘페뤼포이에신’이란 말은 

특별한 값을 지불하고 획득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신 언약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인간대표 아담이 마귀와 도박을 하여서 자신뿐 아니라 후손 모두를 마귀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을 원래대로 복귀할 값이 없어서 영원한 마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인간몸을 입고 오셔서 마귀에게 죽으심으로 그값을 치루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와 마귀의 종에서 자유인이되게 하셨고 믿는자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인류의 대표로 죽고 피흘리시고 다시살아 나셨습니다.이제 그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였는데 자기가 죄의종에서 벗어난 것과 예수께서 마귀를 박살 낸것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가 이켜서 우리는 자유자라고 외쳐야 합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950년대나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필리핀이나 오지의 밀림 속에서 일본 패잔병들 가운데 그 때까지 동굴 속에서 몇 년, 혹은 십여 년씩 숨어서 지나던 사람들이 발견되곤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기사는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에 누더기가 된 옷차림을 한 이들이 구식 소총을 들고 동굴 앞에 서 있는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패잔병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숨어서 극도의 불안한 생활을 하며 때때로 마을에 몰래 내려와 식량을 훔쳐먹거나 도마뱀을 잡아먹고 열매로 배를 채운 것입니다. 쓸모 없게 된 녹슨 소총을 소중하게 간직한 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불행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항복을 했습니다. 그 동굴에서 나오세요. 밝은 곳으로 나오세요" 분명하게 복음을 알려 주어야 할 소명(召命)자들이 바로 우리들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과 책임을 잘 감당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때 "왕같은 제사장"이란 단어만 보고 다음에 있는 핵심단어를 보려고도 않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위의 네 가지 신분을 주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불러내어’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과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권리만 보지마시고 우리가 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보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값없이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여서 소리만 쳐주면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내 가슴판에 깊히 새기고 밑줄을 쳐놓으셔서 주님의 부르시에 영광돌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지냈었으나, ‘만세전에 예정하신 뜻대로’ 불러내셨다는 사실과 불러내시고 네 가지 신분을 부여하신 목적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스” “아레타스”라는 말인데 ‘찬미’ 또는 ‘탁월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속성과 그 사역을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음 번에 귀한 손님을 모시고 다시 갑니다. 혹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데리고 찾아갑니다. 왜 그 곳에 다시 갑니까? 전에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맛을 알기 때문에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움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자주 배반하고 그 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자신의 자비로움과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주십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마냥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학생이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게 될 때 청소년 범죄가 생겨나게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게 될 때 그 가정에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산돌로 세워진 신령한 가정의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제사장입니까? 구약에는 택한 레위족속이 있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과거 구약시대 때 제사장들이 했던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없이도 우리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제사장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그 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언제든지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놓고 그분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 분은 여러분을 만나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9절에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왕같은 권세와 권위와 능력을 함께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몸을 드려라 그런데 구약시대 제사장은 소나 양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리고,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제사장인 우리는 무엇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가?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시대 제사장의 의무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특권만 생각하고 책임은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되게 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큰 특권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특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책임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책임이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안에서 부름받은 거룩한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뿐만아니라 거룩한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제 세상을 살면서 고난이 오고 슬픔이 있어도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음으로 축원합니다


 

삶은 행복 만들기(벧전 2:4-10)

 

인간의 삶은 행복 찾기의 여정이다. 우리가 행복을 찾으려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이 찾는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곁에 머무는 것이다.

먼저는 자신이 찾는다. 자신이 행복을 찾을 때 옆에 사람이 중요하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행복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친구를 잘 둬야 한다. 청년 때에는 반려자를 잘 만나야 한다. 장년이 되어서는 친구를 잘 둬야 한다. 사람을 찾을 때 조건이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좋은 사람이란 감사할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사람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곁에 머무는 방법이다. 이 방법만이 확실하다. 이는 행복이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곁에 머무는 것이 행복한 이유가 있다. 사람은 힘도 주지만 동시에 견디기 힘든 짐도 된다. 하나님은 오로지 힘만 되시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왔다. 하나님을 만나면 행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신다. “하나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다.

그럼 왜 하나님을 만나는데 행복하지 않은가? 하나님 만나는 것을 힘이 아닌 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는 것보다 짐이 되기 때문이다. 주일날의 가족의 애경사보다 예배가 짐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한다. 예배 드리는 자유가 없다. 숨어서 예배를 드린다. 죽기를 각오하고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힘이 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많이 아팠다.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몸일 때가 많았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에는 힘이 솟구쳤다. 아버지께서도 많이 아프셨다. 아버지께서 생사를 넘나들 때 예배가 탈출구였다. 예배를 드리면 온 가족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때 예배는, 감사는 당연하고 눈물은 필수였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이 많았던 이때가 가장 행복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도가 짐이 되었다. 본래 기도는 삶에 최고의 에너지 공급원이다. 피자를 화덕에 들어갔다 나오면 맛있는 피자가 되어 나온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기도하면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나온다.

 

신학생 때부터 기도원에 자주 갔다. 아들이 어릴 적에는 아들과 수유리에 있는 영락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 사역을 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 이는 삶과 신앙에 힘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할 때, 하나님께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할 때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다. 

오늘 베드로는 자신의 사역에 하나님께서 힘이 되심을 체험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길 권면한다. 그가 하는 권면은 세 가지다.

먼저,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
다음으로, 나아가는데 그치지 말고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분에서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행복이 있다. 베드로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그리스도인에게 행복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의 부유함으로 사는 것 아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미지근함이 아니라 뜨거움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야 한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거룩한 제사장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야기 한다. ‘모퉁이 돌’이라고 한다. 그 모퉁이 돌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저 버려진 돌일 뿐이다. 즉 아주 사소한 돌이다. 하지만 믿는 자에는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다. 주춧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짐 덩어리로 여겼다. 그 결과 버렸다. 즉 예수님을 버린 돌로 만들어버렸다(7절).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라고 말한다(8절).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오롯이 짐이 될 뿐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중 하나만 있다

하나는 소중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소한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소중한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소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 즉 사소한 분으로 여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분이라고 말한다.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기초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요즘 예수님은 진보와 보수하는 이념보다 못하다. 예수님을 진보와 보수의 이념 주장에 지렛대로 삼을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생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의 관심은 개혁이다. 보수의 관심은 조국 퇴진이다. 그 결과 예수님은 진보와 보수에 비해 하찮은 분, 사소한 분이 되었다.

진보와 보수보다 사소해진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다. 세상에 생명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 이념은 생명에 새 발의 피다.

 

세상에서 사소하게 여기는 이 예수님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대통령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아니다. 법무부장관이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가? 그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나라와 우리들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하게 여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사소하게 여긴다. 이 사소하게 여기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어주는가?

첫째,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한다(9절).

둘째,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10절).

셋째,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게 한다(10절).

숫자 ‘0’은 사소하다. 그러나 ‘0’이 어떤 숫자의 뒤에 붙으면 위대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그러하다.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예수님이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예수님처럼 중요한 분이 없다.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절박하게 찾는다. 그때는 세상 누구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인생을 인생답데 만든다. 세상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만들어주셨다.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옮겨주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도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 시간 관리, 식사 하는 것,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 남을 배려하는 것, 언제나 감사하는 것 등이다. 이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이 사소한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신광철은 그의 책 《인문형 인간》에서 사소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어도 좋다. 세상은 사소한 것들의 집합이다.”

세상은 사소한 것들의 집합소라고 한다. 모두 사소하다. 이 사소한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소한 것에 어떻게 목숨을 거느냐가 중요하다.

 

왜 사소한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드는가?

언제나 중요한 것은 사소한 것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소풍 때마다 보물찾기를 했다. 보물은 나무 위, 바위 뒤, 수플 속에 숨겨져 있었다. 보물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곳에 숨어 있었다.

위대함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안에 숨겨져 있다. 위대한 생명은 사람들이 돌처럼 취급한 예수님 안에 숨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큰 것을 좋아한다. 권력을 좋아한다. 이념을 좋아한다. 이념 안에 생명 없다. 거창한 것 안에 보석을 숨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큰 것은 살핀다. 반면, 작은 것은 무시한다. 저의 첫 차는 티코였다. 한 번은 일이 있어 가족과 함께 시청 앞에 있는 호텔에 갔었다.

호텔 앞에 도착하니 제 차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저 손짓으로 지하로 내려가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큰 차였던 그랜저에는 문도 열어주고 인사도 90도로 했다.

사람은 작은 것을 무시한다. 그럼 예수님은 어떠신가? 예수님은 작고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기신다. 예수님은 지극 히 작은 자에게 한 것에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작은 어린아이가 당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 19:14).”

그 이유는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세상 사람들도 사소해 보이는 사람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땅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무시한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버스를 타고 대구를 간다. 타는 시각은 오전 6시 40분이다. 타는 장소는 동서울터미널이다. 터미널에 도착할 때쯤 되면 주로 복음성가가 들린다. 두 다리가 잘린 한 남자가 스피커 뒤에 앉아서 구걸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푼돈을 구하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만약 높은 사람이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남보다 더 잘 보이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털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 1,000원짜리 한 장 놓고 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남자를 그냥 지나쳐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소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뭇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이렇게 뭇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사랑하신다. 우리는 죄인 중 괴수다. 사소해 보여도 아주 사소해 보인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사랑하신다.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소해 보이는 것에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없어 보이는 사람만 무시하지 않는다. 무한정 있는 시간도 무시한다. 사람들이 시간을 무시하는 이유가 있다. 시간은 ‘무한 리필’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간은 무한리필 된다. 무한리필 되지만 지나가면 휘발성처럼 날아간다.

 

‘시간 벌레’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시간 벌레는 시간을 좀먹는 존재를 일컫는다. 시간 벌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시간을 의미 없이 허비해 버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시간 벌레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시간충’이 된다. ‘시간 벌레’가 되면 인생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인생이란 아름답고 만족스런 나를 가꾸는 것이다.

그 다음, 자기 관리다. 사람들은 자기를 가꾸지 않는다. 치열하게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 그저 외모를 꾸미는 데만 치열하다. 우리가 가꿀 것은 인격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적 관리를 해야 한다. 지금은 지식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식사회에 그리스도인은 지식 관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 영적인 관리에만 신경을 쓴다. 지적 관리가 중요하다. 지적관리는 영적관리는 함께 가기 때문이다. 지적 성장없이 영적 성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인생의 열매들》이란 인문학 수필을 읽었다. 김형석 김태길, 안병욱의 글들을 ‘마음의 열매들’, ‘삶의 열매들’, ‘지혜의 열매들’이란 주제로 엮은 책이다. 읽으면서 지적 관리가 영적인 울림까지 줌을 경험했다.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시간 관리, 자기 관리가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마치 작은 배의 키가 몇 십만 톤 되는 배의 방향을 결정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사소한 것을 한 번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부모는 어린아이의 사소한 것을 신경쓴다. 사소해 보이는 먹는 것, 배설하는 것, 잠자는 것이 어린아이의 성장을 결정한다. 어린아이는 사소한 것을 통해 성장한다. 어린아이에게 넘어짐은 사소하다. 이 사소한 넘어짐을 2만 번 넘어져 본 후에야 혼자서 걷는다.

 

사람들이 왜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가?

 

미국의 한 학자가 거짓말을 조사했다.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은 8초에 한 번꼴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8초에 한 번 꼴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사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거짓말 한 번 했을 때 크게 여겼다면 더 이상 거짓말 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한 단어’는 크지 않다. 수많은 단어 중 한 단어, 수많은 문장 중 한 단어는 사소하다. 이 한 단어 때문에 명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단어 빠지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사소해 보이는 한 단어가 위대한 단어다.

이 작은 한 단어가 엄청나다는 것을 아는가?

한 단어만 바꿔도 놀랄만한 영향력이 나타난다. 로버트 치알디니는 그의 책 《초전설득》에서 선거에서 단어의 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단 하나의 단어를 바꿔서 발생한 해결책 선호도의 차이는 22%라고 한다. 이는 참가자의 성별은 9%, 정치 성향 8%보다 훨씬 높다. 즉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보험회사에서 보험을 팔 때 단어만 바꿔도 보험 계약 건수가 확 올라간다.

“당신이 ‘퇴장’할 때 당신의 생명보험금이 ‘입장’합니다”라고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보험을 계약했다고 한다.

한 단어의 힘이 엄청나다. 사소한 것, 작은 것 힘이 대단하다. 작은 소년 다윗이 서인 거인 골리앗을 이겼다. 그것은 몇 마디 되지 않은 말 때문이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믿음의 몇 단어가 한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한 작은 소년이 민족을 찬란한 영광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와 같이 사소해 보이는 한 단어가 위대하다.

단어만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은 높은 건물이 아니다. 가장 작은 미술품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품은 2015년 5월 15일 1억7936.5만 달러에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연인들’이다. 우리나라 미술품의 최고가는 2018년 김환기 화백의 ‘붉은 점화’로 85억이다.

미술품은 크기가 아주 작다. 건물이 비하면 조족지혈 정도다. 그 이유는 사진작가인 윤광준이 그의 책 《심미안 수업》에서 잘 말해준다.

뉴욕의 어느 미술가로부터 전 세계의 부가 몰려 있는 월스트리트의 부자들이 마지막에 하는 일이 그림 수집이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 중’ 그림만큼 강렬한 쾌감을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명심하며 살아야 말이 있다.

“사소한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예수님도 사람에게 버린 바 되셨다(2절). 그 말은 사소한 존재였다는 것을 뜻한다. 고귀했으면 절대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긴 예수님이 우리를 버려진 인간에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셨다. 우리를 보배로 만들어주셨다.

버려진 자녀에게 택하신 자녀로 만들어주셨다. 종 자녀에게 왕의 자녀로 만들어주셨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식으로 만들어주셨다.

 

최근 핫한 사람 중 한 명이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이국종이다. 그도 사소해 보일 수 있는 한 마디에 인생이 바뀌었다.

바로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하는 말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자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 국가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었다. 그럼 간호사의 반응이 싸늘했다. 다른 병원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는 여러 군데 병원을 찾아 헤매던 중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주는 의사를 만난다. 그 의사는 중학생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고 놀라운 말을 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그 의사는 정성껏 치료한 뒤 진료비도 받지 않았다. 그리곤 한 마디 덧붙였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사소해 보이는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인생을 인생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사소할 뿐이다.

안에는 불덩이가 들어있을 수 있음이다. 그 안에는 금광석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소한 것을 업신여기면 안 된다. 도리어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사소해 보이는 것은 현재다. 이 사소해 보이는 현재가 인생을 인생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거스틴이 ‘현재’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이 순간을 떠나서는 우리라는 것도 없고 세계도 인생도 없다.

이 현재의 순간을 놓쳐버릴 때 그것은 바로 인생을 놓쳐버린 것이 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가장 사소한 이 순간을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최선을 다하는 인생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하나님은 최고의 인생으로 만들어주신다.

저는 여러분이 세상이 사소하게 여겼던 예수님을 통해 위대한 사람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명심하길 원한다.

또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

사소함을 사소함으로 여기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귀중하게 여겨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드러나도록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축복한다. 

 

신앙생활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벧전2:11,12)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1-12절 

사람들은 후회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후회’다. 죽기 전에도 가장 많이 후회다.

죽기 전에 후회 하는 것 중 두 가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가 ‘나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다’.
둘째가 ‘나는 그렇게 까지 일할 필요는 없었다’다.

미국 역대 대통령의 영적 스승이었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는 ‘더 기도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저는 목회하면서 독서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

 

우리가 후회를 하는 이유가 있다.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저는 안목이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물건 구입이다. 물건 구입에는 안목이 꽝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안목이 있어야 한다. 친구를 사귀는 데도 안목이 중요하다. 첫 직장 입사에는 안목이 더욱 중요하다. 배후자 선택에는 안목에 의해 달려 있다.

결국 인생의 미래와 삶의 질을 결정짓는 것은 안목이다.

 

안목이 중요하다

그럼 ‘안목’이란 무엇인가? ‘보는 눈이다.’

우리가 살면서 가져야 할 눈은 사람을 보는 눈이다. 그 다음이 물건을 보는 눈이다. 며칠 전 잠실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양말 10켤레를 1만원에 구입했다. 싸다고 생각했기에 과감하게 구입했다.

집에 와서 다시 안목 없음을 확인했다. 순면이 아니라 나일론이 섞여 있었다. 즉각 환불 하러 갔다. 환불이 안 된단다. 포장지를 뜯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으로 교환도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지금 한 구석에 쳐박혀 있다.

한 번 실패한 양말을 구입하기 위해 중고나라를 뒤졌다. 중고나라에서 닥스 상표의 눈에 뛰였다. 기분 좋게 양말을 구입했다. 물품이 도착한 뒤 풀어보니 썩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짝퉁이었다. 이 양말도 한 구석에 잘 모셔져 있다.

며칠 뒤 아들과 이마트에 갔다. 생수와 워셔액을 구입하러 가는 도중, 마트 입구에 양말이 놓여 있었다. 그 양말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손으로 만지는 순간, 맘에 쏙 들었다. 하지만 쌓여 있는 두 종류의 양말들 때문에 구입을 포기했다.

안목이 꽝이라 실수 연속이다. 후회가 막심했다. 정작 맘에 드는 것은 구입도 못했다. 안목이 없으면 고생이다. 안목은 꽝이 아니라 탁월해야 한다.

 

안목 부재는 실패로 이어진다

한국 국가대표 축구가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카타르에 0-1로 패배했다. 저는 이 경기를 통해 감독의 안목 없음을 발견했다.

실력은 우리가 앞서 있었다. 감독이 상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니, 게임을 느슨하게 풀고 간다. 전진패스가 아니라 백패스만 했다. 그 결과 패배했다. 이와 같이 안목이 없으면 패배한다. 패배하면 후회한다. 안목은 경기나 삶의 후회를 가져온다.

 

칼을 쓰려면 칼을 오랫동안 갈아야 한다

안목 부재는 왜 발생하는가? 두 가지다. 하나는 칼을 쓰는 시간보다 칼을 가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을 쓰는 시간보다 칼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그래야 나뭇결에 따라 아름다운 대패질을 할 수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도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나무를 할 수 있는 8시간이 주어지면, 6시간은 도끼를 간다.”

또 다른 하나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소장이 김용섭은 그의 책 《실력보다 안목이다》에서 누구나 갖추기 원하는 네 가지의 안목을 이야기 한다.

첫째. 킨사이트(keen-sight)로 꽁꽁 숨겨져 있는 것도 찾아내서 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한다.
둘째. 크로스 사이트(cross-sight)로 단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엮어 붙여 그 속에 숨은 놀라운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안목을 말한다.
셋째. 포사이트(fore-sight)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고 구체화하는 안목을 말한다.
넷째. 인사이트(in-sight)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말한다.

안목을 갖되 남다른 안목을 가져야 한다. 본질을 꿰뚫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거칠 것이 시행착오다.

저는 양말 구입의 두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세 번째에 제대로 된 양말을 보는 눈이 생겼다. 이와 같이 시행착오는 남다른 안목을 갖는데 반드시 거쳐야 한다.

 

 

안목은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하다

우리가 물건을 구입하는 데만 안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력을 쌓는 데도 안목이 중요하다. 미래를 이끌 수 있는 것을 실력을 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실력을 쌓는다.

물건 구입과 실력을 쌓는 데만 안목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삶을 사는 데만 안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안목이 필요한 곳이 있는데 바로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목이다. 즉 영적인 안목이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나온다. 그는 영적인 안목이 턱없이 부족했다. 세상적인 안목은 남달랐다. 청년 때 이미 부자가 되어 있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꽝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을 돈 때문에 놓쳤다. 우리가 가져야 할 진짜 안목은 세상적인 안목이 아니라 영적 안목이다.

 

부자 청년은 심각하게 고민했던 구원을 받으려 예수님께 나왔다. 하지만 영적 안목이 꽝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 대신 언젠가 사라질 재물을 선택했다.

부자 청년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안목이 없었다. 마가복음 10장에 야고보와 요한의 안목이 나온다. 그들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는 것이었다(막10:37).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4-45).”

예수님에 대해 안목이 없으니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께 보여주지 않을 추태를 보여주고 만 것이다.

 

지금은 공감이 중요한 시대다. 저는 공감도 꽝이다. 부자 청년도 공감이 꽝이었다. 예수님과의 공감이 꽝이었다. 그가 공감이 꽝이니 안목도 꽝이었다. 안목이 꽝이니 삶도 꽝이 되었다.

남다른 안목을 갖고 살아야 한다. 안목이 없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모른 체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중요함을 모른 채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신앙과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신앙생활 할 수 있다.

안목이란 ‘보는 눈’이다. 생각할 수 있는 힘이다.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보는 눈이 있을 때 ‘나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2019년 1월 말에 안동에 있는 시찰회에서 세미나를 인도했다. 그 날 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이 맛있었다.

그중에서도 김치가 최고였다.

김치를 먹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김치를 맛있게 담는데도 안목이 필요하구나’.

김치를 담을 때도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는 안목의 중요성을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 베드로는 성도들이 신앙생활 할 때의 가질 안목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여기서 안목은 ‘하나님의 눈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눈을 갖는 것 쉽지 않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의사가 소통되어야 한다.

공감(empathy)이란 ‘퍼씨(pathy)’는 ‘길(path)’, ‘엠(em)’은 ‘안’이라는 뜻이 묶여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만일 다른 사람의 길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간 길을 걸어 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공감과 사촌 관계에 있는 ‘의사소통(communication)’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의 뜻은 ‘공동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다.
이 단어는 라틴어 ‘코무니카레(communicare)’에서 유래했다. 공동으로 나누려면 같은 땅위에 함께 모여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안목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전해져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공유됨이 있어야 한다. 공유됨이 없으면 영적인 안목은 결국 꽝이 된다.

 

악은 안목 없음의 결과다

성도들은 가질 안목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거의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면 안목의 정욕대로 살아간다. 그럼 종국에서는 악이 표출된다.

안목 없이 하는 신앙생활은 악이 종착역이 된다. 이는 안목이 꽝이라는 반증이다.

전에 많이 듣던 말이 있다. 가장 선하게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악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적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적인 것에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한다.

저는 늘 반대였다. 나의 이익을 제대로 챙겨 본 적 없다. 손해에 손해를 밥을 먹듯이 했다. 지금 교회는 권리금도 주고 들어왔다. 제가 하던 교회는 그냥 주고 왔다.

손해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또 다른 하나는 ‘나는 바보가 아닌가?’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

신앙인이 가질 안목이 있다. ‘이익이 나느냐? 손해가 되느냐?’가 아니다. 가진 안목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는가? 들어 있지 않은가?’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안목이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이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타인 중심적이어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 추구다. 그 결과 정욕적이다(11절). 그 결과 악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 이유는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는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목적이 자기 안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육체 정욕이 아니라 영적이어야 한다.

나아가 악행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행실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인 분명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왜 신앙생활은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1절에서 신앙생활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한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한다. 15년 전만 해도 성도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했다. 주일 날 물건 구입하는 것도 금했다. 기타, 드럼 등 악기 사용을 금했다. 육체의 정욕을 쫓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일련의 조치였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왜 금지를 중요시했는가?

신앙생활의 목적이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방황’이다.

방황이란 말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삶이 상황마다 흔들리도록 한다.

저는 방황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방황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한다. 자신이 할 일을 해내지 못한다. 하던 것도 도중에 하차하는 것이 다반사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의 특징이 있다. 삶이 주체적이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삶이 주체적이지 못하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를 한다. 그렇지 않은 학생은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녔다.

제가 몸이 몹시 아플 때 어머니와 누나 등에 이끌려 기도원을 다녔다. 신앙이 성장하자 제가 주체적으로 기도원을 다녔다. 어떤 것이든 목적이 분명하면 끌려 다니지 않는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한 삶의 목적이 분명했다. 목적이 분명하니 복음 증거하는데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결국 잡혀 로마로 압송되는 배 안에서 복음을 증거 했다. 로마 감옥 안에서 복음을 증거했다.

요나는 그 반대였다. 그는 사명에 대한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에 다시스로 피해 도망갔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의 악독을 외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도 있었다(요나서 1장 2절).

전에 배웠던 목사님께서 3월부터 다시 배우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며칠 전 만나니 다른 사역과 공부를 해야 하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도 삶의 목적이 분명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주저없이 바치려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데리고 올라갔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서도 목적이 분명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망설이지 않았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기뻐하셨다. 그가 죽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짐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목적이 분명해야 답을 갖고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분명한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유익을 위한 목적이 분명한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신앙생활에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최근에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문제로 그리스도인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고 있다. 진보와 보수 한 쪽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욕하고 헐뜯는다.

이는 신앙인의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관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그 위기는 다른 위기가 아니라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기 떄문이다.

자신의 유익이거나 진영논리의 사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변화를 추구한다. 이익이나 진영 논리가 뒤따르면 안 된다, 그럼 언제든지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반드시 변질된다는 것이다.

변질의 특징이 있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음식물이 변질되어 썩으면 버려야 한다. 사람이 변질되면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변질된 가룟 유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바울이 변질된 순두게와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변화가 발전이라면 변질은 퇴보라는 사실이다. 아니 변질은 버려짐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목적도 마찬가지다. 목적이 변질되면 소망이 없다. 사울이 변질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셨다. 가룟 유다가 변질되었을 때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변질이 안 되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떠나 어부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셨다. 이는 베드로가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실망만 했기 때문이다. 실망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변질은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면 신앙생활 할 때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한다.

‘어제 산 것처럼 오늘도 살아간다.’

저의 삶의 원칙 중 하나가 어제 멋지게 살았던 삶을 오늘도 살자는 것이다. 어제 최선을 다했으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어제 절실함으로 살았다면, 오늘도 절실함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가를 결정짓는 것은 목적이 분명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목적이 분명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목적이 흔들리면 신앙생활도 흔들린다. 목적이 방황하면 삶도 방황한다.

목적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게으름이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다. 게으름, 불평, 원망의 삶에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을 말 가운데 하나가 불평이다. 이 불평은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알리바바 그룹 회장인 마윈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 불만이 많다는 것은 이를 해결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미래의 기업가는 불평하는 사람이 아닌 이 불만들을 풀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올 것이다”

초대교회도 불평이 있었다. 불평이 있을 때 공동체가 깨질 수 있다. 사도행전 6장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초대교회를 시작할 때였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진다는 불평을 지나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사도행전 행 6장 1절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사도들은 이때 목적을 분명히 했다. 사도들이 해야 될 사명을 분명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사도들은 이런 일이 있은 뒤 집사들을 택한다.

그것이 3절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겼다”.

목적이 분명하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자기들 문제와 헬라파 유대인 과부 문제 그리고 일꾼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자 불평이 떠났다.

 

오늘 베드로도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것이 21절이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이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을 보게 해야 된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비방하던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바뀌어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도 미래가 암물해진다.

그리스도안의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중 하나가 세상 사람들의 본이 되는 것이다. 본이 되려면 세상 사람들과 삶이 다름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가 본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본이 되었다. 본이 되었던 바울이 자신만만하게 한 권면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 3:17).

본받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이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한다(12절). 그들에게 악행 아니라 선행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을 본받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삶 쉽지 않다. 하지만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이유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답으로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정답으로 사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 사람들이 오답으로 살고 있다. 오답으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응 오답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정답으로 사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생황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라(12절)“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쉽지 않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공기청정기와 같아야 한다.

 

우리나라를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공기청정기다. 옛날 우리나라는 ‘삼한사온’이 뚜렷했다. 지금은 ‘삼한사미’가 뚜렷하다. 사흘 추운 뒤 나흘 미세먼저가 찾아온다. 이런 나라에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기청정기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공기청정기처럼 살아야 한다. 세상의 악과 정욕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야 한다.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것은 공기청정기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고장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악한 생각을 정화시키는 공기 청정기와 같은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공기청정기처럼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인간의 그림은 작은 그림이다. 하나님의 그림만이 큰 그림이다. 나의 욕망을 위한 것은 작이 작은 그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림은 크고 큰 그림이다.

 

자기를 위한 그림은 정욕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그림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감동받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악행’이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니 한방에 잠재울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저 사람 때문에 예수를 믿고 싶다고 만들어야 한다.

공기청정기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인 자신이 공기청정기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된다. 세상을 숨 쉬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세상은 오염시키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공기청정기인 그리스도인을 원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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