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에 소개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우리 모두도 일곱 교회에 다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연관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전해드린 말씀을 다시 한 번 요약해보겠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소개된 “에베소”는 ‘인내’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힘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일세기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로마황제숭배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많은 인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끝까지 인내하여 신앙을 지킨 사람은 칭찬받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중도에 로마와 타협한 사람은 책망 받았습니다. 칭찬과 책망은 자신의 의대로 나타난 결과들입니다.
두 번째 소개된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매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합니다. 덩어리가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더욱 많은 향기를 발합니다. 부서진다는 것은 자기희생적인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희생없이 불가능합니다.
서머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많은 희생과 손해가 따르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고도 따랐습니다. 서머나 교회에서 지도자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였다고 소개되었습니다. 이를 바라본 성도들은 많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로마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당하는 환난입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한 것 때문에 당한 궁핍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려는 이유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요하고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이보다 더 큰 부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환난과 궁핍이 따를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주일날 근무를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장기화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수입이 감소한 상황에서도, 교회에 각종 헌금을 드려야 하고, 주일날도 교회에서 섬기는 일 때문에 육신이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다”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약속 때문에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소개된 “버가모”는 ‘망대’ 즉 ‘높여졌다’는 뜻입니다.
버가모에는 세계칠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 신전이 높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해발 240m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전의 외양이 보좌같이 보였다고 하여 “사단의 권자”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버가모”는 종교적으로 ‘이중결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버가모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사랑하며, 이방신도 사랑한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처럼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그리스도인도 있었지만,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고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한 이중결혼입니다.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은 계시록 2장 18절부터 23절까지 말씀을 중심으로, 제목은 19절에 근거하여 “아노니”입니다.
두아디라 지명이 소개되면 성경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지요? 자주장사 루디아입니다.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입니다.
루디아는 어느날 빌립보 지방에서 사도바울을 만났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와 어느 간수의 집안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이들이 유럽교회의 모태, 즉 유럽 땅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가 됩니다. 사도행전 16장 12절부터 15절까지 내용입니다.
행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행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행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소아시아 지역의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 지명의 의미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두아디라 여인 루디아가 희생제물이 되어, 유럽에 복음화 되는 일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한사람 희생제물이 많은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한 여인 이세벨(계2:20)을 용납함으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음하고, 우상제물을 먹음으로 많은 악영향이 나타났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소개된 일곱 교회 중,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 교회는 크게 두 부류의 삶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루디아처럼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하여 칭찬받은 사람과, 이세벨처럼 자기희생을 거부하여 책망받은 사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은, 루디아처럼 주님의 의도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은, 선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19절입니다.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았다는 것은,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찬받은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소개되었습니다.
첫째, 사업입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로부터 남동쪽으로 약64km 쯤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번창한 상업도시였습니다. 주요 특산품은 옷감과 구리였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상인조합이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출세를 하고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상인조합에 가입은 필수조건이었습니다.
조합원이 되면 사업은 마음껏 할 수 있는데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강요당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의식(고사)에 참여하여야 하고,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업을 하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상인조합에 가입하지 아니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주님께서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사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참석하기 위해서는 가게 문을 닫아야 합니다. 시장이나 상가에서 내 집만 가게 문을 받으면 주변 상점들이 눈치를 주기도 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두아디라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희생이 따랐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려면 손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부지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단코 손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은 보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하기위해 당하는 희생은 주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두아디라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많은 피해가 따랐습니다.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면 손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직장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예배에 우선해야 하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주일날 특근이나 수요일 잔업을 해야 할 때, 믿음 지키기 위해 예배 참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취함의 삶은 매우 쉽지만, 섬김의 삶은 매우 어렵습니다. 누구든지 취함의 삶은 유익이 되지만 섬김의 삶은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섬김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삶으로 칭찬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변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성도들은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려면 희생이 따릅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섬김의 삶이 손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섬김의 자리보다 취함의 자리에 머물 것이고, 섬김의 삶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섬김의 자리에 머물 것입니다.
다섯째, 인내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인내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은 인내가 절대적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인내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있어야 아름다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먹는 음식준비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일정시간 인내로 기다려야 밥이 되고, 반찬이 만들어집니다.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모두 아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이런 칭찬을 받기위해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가지고 신앙생활에 몸부림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내 의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2. 자기희생을 거부하여 책망 받은 사람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칭찬받은 사람도 있지만, 책망 받은 사람도 있다고 소개합니다. 책망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희생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자기희생을 거부한 사람들은, 주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책망 받은 것은 자신들이 악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남편이었던 아합 왕을 꾀어 바알숭배를 강요한 여인입니다(왕상16:30-32).
왕상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왕상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왕상16: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하였다고 한 것은, 이세벨이 남편 아합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김보다, 바알을 숭배하게 한 것처럼(왕상16:31-33), 두아디라 교회 성도 중에서 세상의 의식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의식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자들은, 세상의 외적인 의식들과 예식들을 따른다고 하여 신앙생활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믿음이 약한 일부사람들이 동조하여 자연스럽게 이교숭배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이세벨을 용납한 것은,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에게 행음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한 것을 말합니다.
20절에서 말하는 행음은, 사람간의 성윤리를 말하기보다, 하나님을 저버린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자기희생을 거부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이 행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익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우상을 선택하였습니다.
둘째, 자복, 통회를 거부한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이들은 세상의 일시적인 유익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께서 자복하고 통회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1절입니다.
3. 너희 각 사람이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2절과 23절에 소개되었습니다.
계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계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너희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은, 사무엘에서 다윗이 말한대로 “내 의대로”(삼하22:25) 깊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선을 선택한 것은 칭찬으로, 악을 선택한 것은 책망으로 나타날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첫째, 그를 침상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22절)
침상에 던져진다는 것은, 행동의 부자유스러움을 말합니다. 자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한 것입니다.
둘째, 악에 동참한 사람도 큰 환난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22절).
악을 부추긴 사람이나 동참한 자들도 질병이나 빈곤을 겪게 될 것임을 경고하였습니다.
셋째,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인다고 하셨습니다(23절).
대가 끊어질 것임을 경고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그들의 의대로” 결과가 나타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선택하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쌓은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내가 돈을 벌려고 발버둥 쳐도,
내가 건강을 지키려고 발버둥 쳐도,
내 생각으로, 내 뜻대로 해보려고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후~~~ 불어버리면, 한순간에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말씀에 순종하기위해 애쓰는 자들이 있고, 그저 왔다 갔다 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살던 “너희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아주리라.”는 말씀은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자신의 의대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기위해 애쓰는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있을 것이지만, 그저 왔다 갔다 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책망을 받은 자들은 주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고 돌아서면 살 것이요, 계속 그 자리에 머문다면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소개된 “에베소”는 ‘인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인내한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힘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세기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로마황제숭배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많은 인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끝까지 인내하여 신앙을 지킨 사람은 칭찬받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중도에 로마와 타협한 사람은 책망 받았습니다. 칭찬과 책망은 자신의 의대로 나타난 결과들입니다.
두 번째 소개된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매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합니다. 덩어리가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더욱 많은 향기를 발합니다. 부서진다는 것은 자기희생적인 삶을 말합니다.
서머나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환난과 궁핍을 당한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희생없이 불가능합니다.
서머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많은 희생과 손해가 따르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고도 따랐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당하는 환난입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한 것 때문에 당한 궁핍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려는 이유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요하고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이보다 더 큰 부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환난과 궁핍이 따를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주일날 근무를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장기화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수입이 감소한 상황에서도, 교회에 각종 헌금을 드려야 하고, 주일날도 교회에서 섬기는 일 때문에 육신이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다”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내 의대로 갚아주신다”는 약속 때문에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소개된 “버가모”는 ‘망대’ 즉 ‘높여졌다’는 뜻입니다.
버가모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힘든 장소, 즉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킨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버가모에는 세계칠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 신전이 높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해발 240m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전의 외양이 보좌같이 보였다고 하여 “사단의 권자”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버가모”는 종교적으로 ‘이중결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버가모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사랑하며, 이방신도 사랑한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처럼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그리스도인도 있었지만,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고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한 이중결혼입니다.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 지명의 의미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업에 손해를 보면서도 사랑과 믿음으로 섬긴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두아디라 여인 루디아가 희생제물이 되어, 유럽에 복음화 되는 일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한사람 희생제물이 많은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한 여인 이세벨(계2:20)을 용납함으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음하고, 우상제물을 먹음으로 많은 악영향이 나타났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크게 두 부류의 삶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루디아처럼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하여 칭찬받은 사람과, 이세벨처럼 자기희생을 거부하여 책망받은 사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다섯번째 소개된 사데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계시록 3장 1절부터 6절까지 말씀을 중심으로, 제목은 1절에 근거하여 “아노니”입니다.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교회와, 다섯 번째 소개되는 사데교회는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교회는 세상과 타협한 교회였고, 다섯 번째 소개되는 사데교회는 자만심(교만)으로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사데” 단어의 의미는 ‘남은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남은 물건’이라는 단어적 의미는, 이미 없어진 75%보다, 남아있는 25%가 적다는 뜻입니다.
지명적인 의미도 동일합니다. 사데 지역은 삼면이 벽으로 둘러 싸여 있어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천연적 요새입니다. 남아 있는 한 면은 앞을 바라보며 뚫려 있습니다. 75% 해당되는 삼면은 둘러 싸여 있고, 25% 해당되는 한 면은 열려있으니, 열려있는 부분은 매우 낮은 비율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남은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사데교회는 단어와 지명의 의미처럼, 주님께서 보실 때는 이미 75% 정도는 죽었고, 겨우 25% 정도만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만심으로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책망이요 두려움입니다.
1. 사데교회의 상황
주님께서 진단하신 사데교회의 상황이 1절에 소개되었습니다.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앞서 소개된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상황에 대하여 다 안다고 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사데교회 상황에 대해서도 다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안다는 표현은,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을, 못한 일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사데교회는 스스로 살아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에게는 죽은 교회로 평가하셨습니다(1절, 죽은 자로다).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면, 암의 상태가 전의된 부분이 더 많아서 위험한 수준이라는 표현입니다.
과일로 비유하면, 먹을 수 있는 부분보다, 먹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아서 버려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사데교회가 죽은 자의 모습으로 보였다면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3:5)교회였습니다.
사데교회의 형편이 오늘 나의 형편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다.
사데교회처럼 주님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요?
사데교회처럼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불꽃같은 눈으로 보는 주님으로부터는 죽은 자로 평가받는 것은 아닌가요?
이 땅에 사는 날동안 사람들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 해주시는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데교회를 향하여 죽었다고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데 지명의 의미인 “남은 물건”에서 힌트를 발견합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고, 알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주님보다 사람과 환경을 더 의식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가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삶과 흡사합니다. 사울도 자신을 세워주신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여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은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삶의 브레이크가 작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고, 알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삶의 브레이크가 작동됩니다.
오늘 우리는 삶속에서 브레이크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요? 잘 작동되고 있다면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고, 잘 작동되지 않는다면 내 생각, 내경험, 내지식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 사데교회에 내려진 처방전
사데교회의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크게 세 가지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이는 죽어가고 있는 사데교회를 살려주시겠다는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첫째, 생각하라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것은 스스로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만심, 즉 교만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으로 깨어있지 아니하면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항상 깨어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누구든지 깨어있기 위해서는 은혜를 경험하고, 말씀을 받았을 때의 감동적인 순간들과, 들었던 말씀을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자만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습니다. 자만심(교만)에 빠지면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넘어지게 됩니다.
둘째, 지키라
지키라는 말씀은 굳게 붙잡으라. 순종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깨달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읽고, 들은 것에 머물지 말고, 삶속에서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말씀을 읽고 듣지만 지키는 삶까지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말씀은 삶속에서 지킬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들도 말씀을 아는 것이 머무르지 말고,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속에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통회하라
자복과 통회는 그저 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기억나야 가능합니다. 말씀이 기억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자복과 통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와 가룟인 유다의 사례를 통해서도 이미 증명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이 기억나서 자복과 통회에 이르렀지만, 가룟인 유다는 말씀이 기억나지 않아 자복과 통회에 이르지 못하고 뉘우침에 머물렀습니다. 결과는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사데교회에 내려준 세 가지 처방전을 따르지 아니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갑작스럽게 임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3절에 주님께서 도둑같이 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
주님께서 내려준 처방전을 잘 따라하여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도 있습니다. 본문 4절과 5절입니다.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교회가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한 삶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첫째,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4절)
4절,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흰옷을 입는다는 표현은, 자신의 죄로부터 의롭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옷은 주님께서 주신 칭의의 옷입니다.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흰옷을 입는 다는 것은, 그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둘째, 생명책에 이름을 흐리지 않다는 다고 하셨습니다(5절).
5절,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불못에 던져지는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입니다(계20:15).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런 상황에서 본다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사건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면 영생, 즉 영원한 생명으로,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했다면 영벌, 즉 영원한 죽음으로 나누어집니다.
셋째, 그 이름을 시인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5절)
5절,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 이름을 시인해주신다는 것은, 천국에 합당한 자로 인정해주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사데교회와 같이 자만심, 즉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벧전5:8).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님께서 사데교회가 어떻게 신앙생활하는지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는 자만심, 즉 교만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지만,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이 가장 위험합니다. 자신은 깨어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실상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데 지명의 의미인 “남은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이라도 깨닫고 주님께서 처방해주신 처방전을 잘 따른다면 회복할 수 있겠지만, 기회를 놓친다면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처방전은 세 가지 이었습니다.
생각하라.
지키라.
통회하라.
이 세 가지만 잘 지킨다면 살아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만심에 빠져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죽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안됩니다. 오직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데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다 안다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도 다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 비대면 예배 등으로 신앙의 줄이 느슨해지기 쉬운 이때에, 우리들은 말씀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가 잘한 것은 없고, 잘못한 것만 다 안다고 하시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내가 잘하면 잘하는 대로 갚아주실 것이고, 잘못하면 잘못하는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내 의대로’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소개된 “에베소”는 ‘인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인내한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힘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세기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로마황제숭배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많은 인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끝까지 인내하여 신앙을 지킨 사람은 칭찬받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중도에 로마와 타협한 사람은 책망 받았습니다. 칭찬과 책망은 자신의 의대로 나타난 결과들입니다.
두 번째 소개된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매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합니다. 덩어리가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더욱 많은 향기를 발합니다. 부서진다는 것은 자기희생적인 삶을 말합니다.
서머나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환난과 궁핍을 당한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서머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많은 희생과 손해가 따르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고도 따랐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당하는 환난입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상인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한 것 때문에 당한 궁핍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려는 이유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요하고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이보다 더 큰 부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 번째 소개된 “버가모”는 ‘망대’ 즉 ‘높여졌다’는 뜻입니다.
버가모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힘든 장소, 즉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킨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버가모에는 세계칠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 신전이 높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해발 240m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전의 외양이 보좌같이 보였다고 하여 “사단의 권자”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버가모”는 종교적으로 ‘이중결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버가모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사랑하며, 이방신도 사랑한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처럼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그리스도인도 있었지만,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고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예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한 이중결혼입니다.
네 번째 소개된 “두아디라” 지명의 의미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업에 손해를 보면서도 사랑과 믿음으로 섬긴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로입니다.
두아디라 여인 루디아가 희생제물이 되어, 유럽에 복음화 되는 일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한사람 희생제물이 많은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한 여인 이세벨(계2:20)을 용납함으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음하고, 우상제물을 먹음으로 많은 악영향이 나타났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크게 두 부류의 삶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루디아처럼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하여 칭찬받은 사람과, 이세벨처럼 자기희생을 거부하여 책망받은 사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다섯번째 소개된 “사데” 지명의 의미는, “남은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남은 물건’이라는 단어적 의미는, 이미 없어진 75%보다, 남아있는 25%가 적다는 뜻입니다.
지명적인 의미도 동일합니다. 사데 지역은 삼면이 벽으로 둘러 싸여 있어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천연적 요새입니다. 남아 있는 한 면은 앞을 바라보며 뚫려 있습니다. 75% 해당되는 삼면은 둘러 싸여 있고, 25% 해당되는 한 면은 열려있으니, 열려있는 부분은 매우 낮은 비율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남은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사데교회는 단어와 지명의 의미처럼, 주님께서 보실 때는 이미 75% 정도는 죽었고, 겨우 25% 정도만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만심으로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의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책망이요 두려움입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3장 7절부터 13절까지 말씀을 중심으로, 제목은 8절에 근거하여 “아노니”입니다. 안다는 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지상의 모든 교회마다 칭찬받을 일을 한 것과, 책망 받을 일을 한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여섯 번째 소개되는 “빌라델비아”는 ‘형제우애’라는 뜻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 상황은, 성도들의 인원수는 적고, 저소득 계층으로 구성되어 힘은 미약하였지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교회의 사명과 역할을 잘 감당한 교회로 칭찬받았습니다. 비록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행위를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1. 주님의 평가
주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안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선택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안다는 말씀을 들을 때,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말씀은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8절입니다.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첫째,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숫자적으로 인원이 적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헌금을 많이 하고 싶어도 잘 하지 못하는 저소득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적은 성도들이 수입조차 적었지만,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말씀대로 살기위해 몸부림친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 곧 사탄의 무리들 중에 몇 명을 성도들에게 보내 그들 발 앞에 절하게 함으로, 주님께서 성도들을 사랑하는 줄 알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9절).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까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까요?
지금의 나의 상황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고, 부족한 여건과 환경을 핑계 삼아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의 상황을 우리에게 적용해본다면, 내가 세상적인 것을 많이 소유라고 있느냐, 적게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느냐, 비그리스도들처럼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로 통하여 성도들의 활동이 제안 받고, 수입보다 지출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더더욱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출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을 줄이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궁핍함은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말씀에 불순종하고, 세상의 것을 붙잡고 사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궁핍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려울수록 더욱더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삶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 능력있는 삶입니다.
둘째,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적은 인원수와 적은 물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로마와 타협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삶이 주님께 신실한 행동입니다. 이런 행위를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에게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주님께 대한 신실함이며, 충성되고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으로 인하여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성도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세상과 타협하면 안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살면 안됩니다. 이는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행동입니다.
2. 주님의 약속
주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보상으로 세 가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첫째,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해준다는 약속입니다. 10절입니다.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온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한 것처럼 내 의대로입니다.
시험의 때는 환난의 때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환난을 당할 때,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면제받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기 때문에 베풀어주는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은 인내가 요구됩니다. 바울도 주님을 섬길 때 인내(딤전6:11)로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기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결단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하며 주님이 주신 말씀을 꽉 붙잡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 알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둘째,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12절 상반절입니다.
계3:12상,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건물의 기둥은 힘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적은 능력을 가진 자에게 강력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처럼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하는 일은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주님의 보상은 큰 것으로 나타나게 해주시는 것은, 말씀대로 살면 결단코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속하는 천국백성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12절 하반절입니다.
계3:12하,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하나님의 이름, 예루살렘의 이름,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해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는 천국백성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천국백성이 된다는 약속은 엄청난 약속입니다. 이는 내 의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권면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들에게 주님의 권면은 두 가지입니다. 본문11절입니다.
계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첫째, 굳게 잡아라
약한 빌라델비아교회에게 강한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굳게 붙잡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최고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살아남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더욱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악한 영들은 주님의 말씀이 최고의 능력임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지 못하게 미혹합니다. 썩어지고 없어지는 것, 즉 능력없는 세상의 것을 붙잡도록 미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악한 영들에게 미혹당하지 말고 능력있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삽니다.
둘째,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빌라델비아교회에게 강한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 승리자에게 주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의 권면은 당시 빌라델비아교회에게 주는 권면인 동시에, 오고 오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하기가 매우 힘든 환경입니다. 특히 올해는 1월 20일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로 통하여 더욱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로 통한 모임 자제요구,
실직으로 인한 수입 감소,
사람들의 이동제한으로 인한 사업장 수입 감소 등등,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길은 흔들리지 말고 오직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승리자들에게 주시는 면류관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안다는 평가는 두 가지였습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는 것과,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비록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이것이 능력있는 삶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의 작은 유익을 위해,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동일하게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약속은 세 가지입니다.
나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해준다는 약속과,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주신다는 약속과, 하나님께 속하는 천국백성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부족한 환경과 여건속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나간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고, 시험의 때를 면해줄 것이며, 하나님성전의 굳건한 기둥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은 두 가지 이었습니다.
강한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라는 것과,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강한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야 악한 영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작성자 : 크로스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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