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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메시야 사상/ 기름부음

by 은총가득 2020. 10. 1.

메시야 사상

 

Ⅰ. 서론

성경신학의 핵심은 역시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신,구약 성경속에서 어떻게 연관성을 맺고 있는가?가 중심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의 인격과 속성을 표현하는 칭호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용을 보인것은 그리스도 즉, 메시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메시야로 불리워졌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과정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위성은 역사적으로 인정되는가. 그것은 객관성의 문제에 있어서 여러 비판적 관점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또한 그가 메시야라고 불리워졌을 때,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야적 특성에 대하여 개관적이고 순수한 단순역사 속에서 그 과정과 실제의 형태를 편견없이 고찰하고자 한다.

Ⅱ.본론

1.메시야의 의미

메시야의 개념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학자들간의 끊임없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좁은 의미로 말할 때 메시야를 왕적인 인물로(Royal personage)묘사하는 것이고, 넓은 의미로는 마쉬아흐 와 관련된 부과적인 측면들을 말하는데 사용된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메시야 개념은 다음 중 하나, 또는 전부를 말할 수 있다. (1)구원의 약속들,(2)이 약속들을 이루기 위해 수행될 일, (3)자격들, (4)동원되는 방법들,(5)설정된 목적들,(6)왕외에 필요한 사람들,(7)메시야가 다스리는 영역,(8)메시야가 다스림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들,

마쉬아흐 와 관련된 용어들은 다양한 직무들과 성격들에 의해 대표되는 신적,왕적,제의적, 그리고 계시적 인물을 말한다.
그는 특별히 자신에게 위임된 임무들, 이미 결정되어 있는 목적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들을 소유한다.
달리 말하면 좁은 의미의 메시야 개념과 넓은 의미의 메시야 개념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넓은 의미의 메시야 개념에 포함되는 요소들은 마쉬아흐 인 인물에 대한 결정적이고,기술적이며,설명적이며,예증적인 측면으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넓은 의미의 메시야 개념에 속하는 요소들은 마쉬아흐가 언급될 때는 언제나 등장한다. 비록 메시야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는 방법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사실 넓은 의미의 메시야 개념에 속하는 요소들은 좁은 의미의 메시야 개념에 속하는 요소들보다 처음에는 더욱 적극적이고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마쉬아흐 라는 용어에 대해여 이 용어가 메시야 개념을 드러내는 계시의 초기 단계들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계시가 진전되고 드러남에 따라 다양한 인간적 메시야들이 메시야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묘사하고 미리 그려주며 예견하는 사건들과 함께 점차적으로 메시야 개념을 더욱 선명하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마쉬아흐 라는 용어는 그와 그의 사역을 지칭하게 되었다.

2.메시야 개념의 기원과 발전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는 구약의 메시야 개념과 유사한 것들이 전혀 없으며 성경의 메시야 개념들을 형성하는데 근간이 되었거나 어떤 자취들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성경에는 오실 메시야,그의 성격,그의 사역,그의 영향,그의 목적들,그리고 그의성공에 관한 많은 약속들과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메시야 대망들은 약속들과 예언들의 어떤 측면들이 해석되고 적용되며 고려의 대상이 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잘못된 메시야 대망들을 품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때가 언제인가를 묻는 이들의 질문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두 대망들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는 전자는 신적인 사람(divine person)을 고대한 반면에 후자는 자기 중심적이며 사회적,정치적인 유토피아를 고대하였다. 이러한 기대감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이세상에 존재하는 메시야 대망의 많은 부분이 이 영역에 속한다,

이것은 분명히 학자들이 근동의 문헌들에서 찾아낸 메시야 대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성경외적인 문헌들에서 영광스런 황금시대에 갑자기 나타날 한 왕에 의해 제거되어질 공포의 시간이 있음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는데 메시야 대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람들이 대망하는 이 왕은 원수들을 물리치고 거짓들을 제하며 가난한자들의 슬픔을 없이하며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양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언급된 메시야 약속들이 갖는 신적인 기원, 영적인 특징, 종교적, 도덕적,가치들 및 이런한 것들에 의해 생성된 적절한 대망들은 이교도의 대망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고대 이교도의 메시야 대망들은 성경에 나타난 메시야 약속들과는 매우 다르다.

메시아 대망이 미래지향적, 종말론적 소망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는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제왕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 일면서 마련되었다. 일례로 이사야 7장에 보면 예언자가 아하스 왕의 불신앙을 이유로 다윗의 왕조를 향한 심판을 선언하는데, 그 결과 다윗 왕조에 관한 언약의 실현은 후대로 미루어지게 된다(사9:2이하, 11:1이하).

무엇보다 기원 전 586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다윗 가문의 학살은 미래적 메시아를 대망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관에 입각한 메시아 대망 사상은 바빌론 유배시기를 거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헌신적인 뒷받침으로 그들 역사의 모순이라 생각했던 사건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구원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최초로 등장하고 유지된 것이 제2차 성전시대(B.C.E. 538~70)가 될 것이다.

시리아의 셀류커스 가문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황제가 헬라화 정착의 일환으로 유대교 말살 정책을 펼쳤을 때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인 사제들이 보여 준 성직 매수 등의 부패는 메시아 사상에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메시야 사상 중의 대표적인 것이 묵시문학적인 ‘사람의 아들’로서의 메시야 신앙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 구속사업을 성취시키기 위해 나타나는데 다윗의 후손보다 더 신비스런 인물로 묘사되었다. 또한 메시야 사상은 묵시문학 전승에서 다가올 통치자가 다윗 왕조와 전통적인 국수주의적 관련이 없는 초월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다니엘 7:13에 있는 “하늘의 구름과 더불어 오시는 이…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문제의 인물이다.

다니엘서에서 이 인물은 집합적 의미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보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사람이 본래는 한 개인으로서 전래되어 온 메시아적 통치자의 한 변형이라고 생각한다.

다니엘의 환상은 에녹1서(46:1 이하, 48:2 이하)에 연결, 확장되면서 완전한 묵시문학적 인물로 발전된다. 이제 이 인물은 만국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 마찬가지로 에스라 4서에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인간의 형체가 등장하는데(13:4),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13:32) 만국을 심판하며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불러 모은다.

이스라엘 내의 전승을 추적하는데 따르는 문제점은 이 묵시문학적 경향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다른 전승이 포로기 이후 후대 헬레니즘 시기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주전1세기 중엽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솔로몬 시편의 경우, 전래적인 다윗 계열을 따르는 이스라엘의 지상적 통치자와 예루살렘을 정화하고 원수들을 물리친다(17:23 이하). 쿰란 문서들의 경우에는 아론 계의 메시아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공존하는데, 이는 일찍이 스가랴에서 그려진 바 제사장과 왕권의 분리라는 이념이 확장된 것이며, 에스켈 40~48에서 그려지는 제사장의 우월함이 한층 더 발전된 것이라 하겠다.

다만 그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왕을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했거나 아니면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하고, 해방하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묘사한 것 등이었다.

3. 신약시대에서 이해되는 메시야 사상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에서 신음해야 했던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은 당연히 열렬하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마21:6~9, 눅1:68~69; 2:38; 7:18~19; 24:21, 요1:19; 4:25~26; 10:24 등). 그러나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생각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 대중은 원수들을 몰아내고 자기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해방자, 즉 다윗 왕손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굴욕적인 처지였던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자연스럽게 치솟은 다윗 왕조의 복원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들의 메시야관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지상적인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군중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를 그들의 기대에 호응할 메시야로 여겨 마치 왕을 영접하듯 환호성을 올리며 열렬히 환영했다(마21:9, 막11:8~10, 눅19:37~38, 요12:12~13).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이나 상류층 사람들보다 일반 민중이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더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배 이후부터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켜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활동하실 무렵 로마 식민통치의 격동기를 맞은 이스라엘에서는 그동안 동면 상태에 들어가 있던 메시야 대망 사상이 다시 되살아나서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B.C. 152년에 형성되어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적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지상적 메시야관을 배척하였다.

그들은 메시야의 역할이 하늘나라를 설립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내세신앙과 죽은 자의 부활 신앙에 있었다.
그들의 구원관은 율법 준수에 의한 자력 구원이었다. 세상의 지배는 과도기적인 것이므로 지배자가 로마이든 그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그들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새로운 가르침을 권위있게 전개하고, 또 군중들이 그를 메시아로 여기자 예수가 메시야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마22:41~46, 막12:35~37, 눅20:41~44)

에세네인들과 열심당의 문서가 묵시문학적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두 그룹들은 모두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에 헌신하는 진실한 자녀들의 회중을 모집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아 승리를 위하여 그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묵시적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에세네파는 ‘참 이스라엘’의 회중을 모으며, 이스라엘의 최후의 종말론적 공동체 그 이전의 공동체로서 묵시적 대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진정한 사독 사제의 계열로서, 공적 유대교와 달리 축제 의식을 위한 진정한 월력을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메시야 교리는 복합적이었다. 에세네파는 재건된 이스라엘의 왕적이며 제사장적 기능을 지배하기 위하여 다윗과 아론 같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메시아적 인물들의 선구자로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의 도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 당시 무력으로 로마에 항거했던 열혈당원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내세 신앙보다 현실적인 메시야운동을 전개하면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리고 랍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윤리적 행동과 정의의 실천으로 메시야시대를 열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율법교사로서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밖에 메시야를 종말의 대사제, 예언자, 재림할 엘리야, 하나님의 종, 사람의 아들 등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 지식인들은 메시야상을 구체적인 한 인물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 사상 속에는 메시야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중보적 기능을 반드시 수행하는 것으로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를 통해서 메시야 시대를 앞당기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소수이긴 하지만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부활 신앙을 거부하고 현실주의 노선을 걸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상류계급에 속했던 사두개파 사람들이었다

4. 메시야 사상의 기독론화

신약에 따르면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메시야이다. 모든 메시야적 요구들을 충족시켰으며 그래서 새 언약의 중보자(Mediator)이시다.

예수는 우물가의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고난받음, 체포당함, 죽음, 그리고 부활이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예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는 그가 메시야라는 사실과 그가 구약의 예언을 따라 모든 메시야 의무들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구약의 예언들에 대한 신약의 언급들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메시야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구약의 예언들을 직,간접적으로 거의 모두 언급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4-1) 복음서에 나타나 메시야 사상-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그의 동료 유대인들에게 알리려는 특별한 목적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던 마태는 반복해서 예수에 의해 성취된 구체적인 메시야 예언들을 열거하였다.

4-1-1) 마태에게 예수는 곧 그리스도이다. 그가 이 용어의 본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날지를 묻는다(2:4).
실상 마태복음의 주관심사 중 하나는 약속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다양하기 그지없는 호칭들이 적용된다. 그는 메시아이고(16:16), 다윗의 자손이며(1:18이하, 22:41~46), 하나님의 아들(3:17, 4:1이하), 사람의 아들(9:6, 12:1~8), 이스라엘의 왕(21:5)이라는 호칭들이 따른다.

구약성서의 이해가 실상은 기독교 전승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에서 줄곧 ‘주’라고 호칭된다. 예수는 유대교 성서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16:16이하)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자신의 확신을 표현했다.
4-1-2) 마가복음에 나타난 메시야-마가복음에는 많은 경우에 예수가 그 칭호를 사용하지만 메시야성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라는 증거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예수는 병을 고쳤을 때 병고침 받은자에게 조용히 할 것을 경고했고, 깨끗해진 문등병 환자에게도 자신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막1:34)에서도 예수를 알아본 귀신들도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 당했다.
예수는 실로 메시야였으나 부활때까지 이것은 온전히 인식되지 않았다. 그의 사역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이 사실을 비밀로 지켜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또 다른 말씀은 자신을 메시야로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을 오히려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의 눈에 비친 예수의 말씀은 예수의 이적을 통해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과 그 백성들을 나무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마가는 여러 가지 이적들을 통해서 예수는 오실 메시야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4-1-3) 누가에 비친 메시야-누가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예언과 성취의 도식에 의해 입증하려는 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누가는 우선 메시아적 소망의 본질을 밝힌 후, 그제서야 예수가 그 인물임을 보여준다. 이런 방법의 가장 분명한 본보기는 누가복음 24:44이하에서 찾을 수 있다

4-1-4) 사도 요한의 확신은 더욱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이러한 결론적 진술은 요한이 “나는.....이다.”(I am) 구절들을 기록하고 예수를 가르켜 구약의 메시야 예언들을 성취하신 메시야로 말한 다음에 나온 것이다.

4-2) 바울에 증거하는 메시야 사상-예수가 약속된 메시야라고 믿는자들을 박해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후에는 그의 동료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조차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한결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바울은 그의 설교에서 예수의 인성,사역,죽음 그리고 부활이 구약의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하였다. 바울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요 약속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이 안식일 예언의 말씀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한 사람임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특히, 예수의 부활이 메시야 약속들의 성취라고 말하였다. 그의 저서들에서 바울은 거듭해서 그가 그르친 바를 반복해서 말하였다. 약속된 메시야는 예수이다. 그는 약속된 구원자이다. 그가 약속된 구원을 성취하였다. 그가 약속된 약속된 통치자요, 왕이요, 그리고 주이시다.

4-3) 역사적, 복음주의적, 그리고 보수주의적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메시지의 바로 중심에 있다는 주장을 항상 견지해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두 제자들에게 들려준 예수의 말은(눅 24:26-27) 진지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구약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들을 발견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한가지 유일한 차이는 구원이 베풀어지고 제공되는 방법이다.

4-4) 예수의 자기 주장
예수는 분명히 자신을 메시야라고 주장하였으며, 과거와 현재의 어떠한 인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마11:27; 10:37; 24:35; 요10:30; 14:6).

이 점을 그가 사마리아성의 우물가에서 여인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도 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을 때,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요18:34)라고 도전하였다.
예수는 간접적인 의견이나 대리적인 판단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예수가 원했던 것은 인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러한 질문 뒤에 나타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충격적인 감동으로 받아들인 예수의 언급은 중요하다.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여기서 예수는 수년 동안의 모든 인내에 대한 엄청난 보상이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결국 그의 심령의 노고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이렇듯 메시야 의식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 이유는 메시야란 기름부음자, 승리자, 구속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명에다가 또 한가지 새로운 뜻을 덧붙였다. 그것은 궁극적인 승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 이었다.
예수는 자기를 고난의 종이라고 생각하여 치욕을 당하고 비극까지도 각오하였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도 확신하였다. 종의 묘사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명과 사람의 인식에 의하여 승리로써 끝을 마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예수는 죽음을 넘어서 생명을, 십자가를 넘어서 면류관을, 부끄러움을 넘어서 영광을, 비극을 넘어서 승리를, 거부를 넘어서 왕위의 보좌를 보았다.
예수의 메시야 의식의 중심에는 구약성서의 고난의 종의 묘사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위하여 괴로움과 죽음을 당하였다가 하나님의 변명으로 승리하는 인간상이다. 예수는 이 종의 형상의 완전한 성취자이다.

(4-5) 성취된 메시야의 적용과 명칭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의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약에서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고 증거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예언되어졌고, 신약에서 성취되어진 메시야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4-5-1) 왕

유대인의 개념에 있어서는 메시야는 주로 유대 민족에게 승리와 번영을 가져오고 예루살렘에 그의 보좌를 세운 다윗의 왕계이었다. 군중은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때에 환호성을 울리며 맞이했다.(마21:9) 심지어 바리새인까지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다(마22:42) 이러한 것은 묵시문학적 요소들이 만족적 기대에 배합된 것 같으며 그 이유는 메시야는 은신처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기적적으로 자신을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요7:27,31)

4-5-2) 예언자

복음서는 예언자를 대망 했다는 진술이 있으나 이 진술로 보아서만 메시야가 예언자적 직능을 가진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약 예언자 중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댔을 뿐만 아니라(마14:2, 16:14), 또한 메시야와 구별되는 유명한 예언자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요1:21,25, 7:40)

그러나 요6:14 이하에서는 예언자의 개념과 왕의 개념이 동일시된 것 같다. 거기에는 군중이 예수가 자기들이 기다리던 예언자임을 알고 억지로 그를 붙잡아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곧 군중들은 세속적인 왕을 기대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를 단순히 예언자로 세상속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완전한 빛을 전해줄 분(요4:25) 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빌립이 설명한 것을 보면, 빌립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예언자와 예언서에 나오는 메시야적 왕의 모습이 종합된 분으로 보았음을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다.(요1:45)

4-5-3)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살던 시대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메시야적 칭호로 사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제사장 역시 산헤드린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메시야적 칭호로 인정했다.(마26:63)

또한 세례요한(요1:34) 나다니엘(요1:49), 마리아(요11:27), 베드로(마16:16)등 예수의 제자들은 그 말의 공식적인 의미로 예수에게 사용하고 있다.

이런 메시야적 방법은 시편2:7에 근거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은 단순한 형식적인 위엄성 이상의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후에야 비로서 제자들이 그 말을 예수께서 주장하신 독특한 메시야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4-5-4) 인자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드러 내려함에 있어서 침묵하기를 원하셨던 적이 많다. (막 1:23-25,1:32-34, 3:11-12, 5:43, 7:38, 8:22-26)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반발로 인한 장애물이 생기지 않도록 한것이지 그 자신이 메시야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후에 주로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심으로, 자기가 겸비한 참된 메시야적 왕임을 ‘나타내려고 했다. 이 칭호가 있는 주와 구절들을 검토해 보면, 예수님께서 그 말을 독특한 의미로 자기 자신에 대해 사용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다니엘의 인사를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은 그의 재림을 상징하는 구절을 보면 분명하다. (막8:38, 14:62) 곧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이 비극적 운명을 선포하기 위해 그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막8:31).

그는 이것에 대해 아무 모순을 느끼지 않았는데, 이는 자기의 죽음을 메시야적 역할에 대한 성취의 시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준다‘(마20:28)와 목숨을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간다‘(마26:24), 또한 눅22:37등은 그가 이사야 53장을 자기의 메시야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해석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5-5) 주

‘주’라는 명칭은, 구약에 나오는 메시야의 명칭 중 가장 특색있는 칭호이다. 이 말은 사람과 신에게 다 통용되는 칭호이기 때문에 모호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 ‘주’는 메시야 예수를 언급함에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주권은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권세가 부흥된다(마28:18)

그 권세는 그리스도의 땅 위 왕권을 능가하며 우주적 의미를 갖는다(골1:16),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다(골2:20) 곧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결국 모든 피조물에 대해 자신의 왕권을 주장하실 것이다.(롬8:34, 골3:1)

이러한 메시야의 주권은 신자가 강제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독재적 통치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주되신 권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가 오신 것은 다스리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고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 오셨다(마20:28, 막10:45)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그를 최상의 종으로서 모습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준다.

5. 유대사회에서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왜곡

예수가 태어났을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메시야 대망 사상이 팽배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갈릴리로부터 오시지 않고 베들레헴으로부터 오실 것을 알고 있었다(마 2:5-12; 요 7:41-42). 그들은 메시야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으며(마 2:2) 그가 이적을 행할 것도 알고 있었다(요 7:31).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가 예언자일 것과(요 4:29) 그가 신비스럽게 나타나실 것을 알고 있었다(요 7:27). 그리고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계통에서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마 9:27).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에 대한 에언의 근본적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은 왜곡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의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다음과 같다.

5-1) 시간적인 왕을 대망함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수난의 종 대신에 일시적인 왕을 대망했다. 바울의 초기 생애 가운데서 읽을 수 있듯이(빌 3장),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했고, 그들이 죄에서부터 구속함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의 거침돌이 되었다(고전 1:23; 벧전 2:8). 그들은 메시야가 수난의 종으로 오실 것을 생각지 못하고 오히려 일시적인 왕으로 오실 것을 대망하고 있었다.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왜 그리스도가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마 16:21-25).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기 까지는 3년 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요 2:22). 따라서 그 당시 유대주의를 배운 대중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요 12:32-34).

5-2) 초월적인 능력의 사람을 대망함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실 것을 대망하지 못하고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일신 개념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이같은 주장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한 죄라고 생각했다(마 26:63; 막 14:62-64; 요 5:17-18; 10:32-36).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5-3) 국가적인 소망을 성취할 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할 사람을 대망하기보다 그들의 나라에 다윗왕과 솔로몬왕 시대 같은 번영을 회복시킬 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은 물론 부활 이후에도 이같은 생각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까지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올바른 뜻을 제자들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질문한 제자들의 마음은 이를 증명해 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스데반 그리고 바울 사도를 비난하면서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이 유대 백성과 유대인의 율법과 유대인의 성전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마 26:61; 행 6:13-14; 21:28; 25:8).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는 유대인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글을 해석함에 있어서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성전만이 타당한 예배의 처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요 4:20-24; 마 27:51).

그리고 성전이 파괴될 것을 가르치셨다(마 24:1-2). 예수님은 유대 백성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므로 다른 백성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마 21:43)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치셨다(막 7:19); 눅 11:41).

5-4)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킬 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영적(靈的)인 구원자를 기다리기보다 그들을 로마의 통치에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혁명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었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세우려 했다(요 6:15). 예수님이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이적을 행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대망하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왕국 개념을 철저하게 배격했으며(참조, 행 1:6), 유대인들의 지도자나 니고데모에게 올바른 왕국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고(요 3:1-12) 빌라도에게 그의 왕국의 참다운 본질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요 18:36).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목적이 지상에서 그의 왕국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참조. 롬 14:17).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에서부터 해방시켜서 지역적인 왕국을 세우리라는 유대인들의 메시야관과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가르친 메시야관 사에에는 큰 차이가 있다.

5-5) 유대인만을 위한 왕국 설립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설립한 왕국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이 그가 세례 베푸는 곳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꾸짖어 가로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9)고 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그들도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참다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하셨다(요 8:44).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 대신에 이방인을 부르실 것이라고 천명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들의 메시야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복음은 땅 위에 모든 백성들에게 전파되었다. 예수님께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은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하신 것은 바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뜻한다.

같은 뜻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하셨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지 아니하였고,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1-12).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 3:16). 그는 우리 속의 양뿐만 아니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를 양들을”(요 10:16) 상에 전파되어야 된다(마 24:14).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된다(마 24:14). 그리스도를 승천하시기 전, 바로 이 사명을 교회에 주신 것이다(마 28:18-20; 눅 24:44-49; 행 1:9). 이처럼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을 위해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1)

6. 메시야 사상에 대한 현대의 적응

메시야 개념에 대한 여러 가지 문헌적 자료들이 있지만 기독론적 관점에서 메시야를 관망하는 것이 메시야 사상이 정당한 취급을 받는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구약은 신약의 서론이라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들을 발견 할 수 있고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학자 캠프벨(R. Campbell)은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가 긴급히 그 속으로 뛰어 들어온 새언약에 자신의 연구를 집중시킨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는 옛언약에 약속되고 그 모습이 기록된 그 메시야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 및 기독교 교회속에 있는 새언약은 메시야 속량사역이 완성되었을 때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Ⅲ. 결론

구약의 예언에 의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현세 지향적인 성향으로 인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참람한 자로 정죄하였다.

한편 18세기 자유주의 시대 시조가 등장한 후 합리주의적인 입장에서 성경해석을 주장하는 비평주의자들은 역사적인 예수만을 보면서 비정통적인 메시야관을 제시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을 부정하고 성경의 정경적 권위와 계시성을 부인하며 기독교의 유일성과 초자연성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구약의 역사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직접 개입 활동하셨던 실제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로 보지않고 다만 단순한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보았다.

그러나 구약의 중심주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속사이시고 이 일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이시며 그 내용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구약전문의 중심이요, 신구약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가 된다.

구약에는 메시야 초림에 대한 예언이 300회 이상 나타나며 그 중에서도 많은 부분이 이사야서에 편중되어 있다. 이러한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으로 모두 성취 되었다.

특별히, 선지서가 기록될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모습은 하나님의 요구와는 너무 달랐는데, 이러한 정황속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이에 돌이키지 않으며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를 시행하시되 이미 맺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시어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유지하는 '남은 자'들을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메시야의 도래와 회복될 이스라엘을 말씀하셨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완성된 것이다. 나아가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온 인류를 향하신 구원의 사실을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명확한 등식으로 선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한 마태복음, 고난 받는 종으로서 묘사한 누가복음, 하나님 자신이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셨음을 강조한 요한복음, 그리고 세계만민을 위한 구세주임을 열방에 널리 알린 바울서신들이 구약의 예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그의 다양한 사역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선포하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모든 일정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섭리하시고 역사하심을 깊이 인식하고 믿음으로 정진하는 진실과 경

건의 생활로 대내외적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서 추호도 동요됨이 없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관과 신앙관을 견고히 해야 할 것이다.


기름부음’에 대한 이해

 

1. 기름

구약성경에서 기름이라고 하면, 이는 보통 감람기름(올리브유)을 뜻한다.

신약성경에서는 기름을 비둘기, 불, 물, 바람 등과 같이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2. 기름의 종류와 용도(用度)

성경에 자주 드러나는 기름의 종류와 용도는 다음과 같다.

1) 감람유(橄欖油) : 감람으로 짠 기름. 올리브유(눅7:46;계6:6,18:13).

(1) 성별용(聖別用) : 거룩하게 하고 구별하는 의미이다(민3:3,7;1;삼상10:1).

(2) 조리용(調理用) :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였다(출29:23;레8:26;왕상17:12).

(3) 등화용(燈火用) : 불을 밝힐 때 사용하였다(출27:20;레24:2;마25:3,4,8).

(4) 접객용(接客用) :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환영하였다(시23:5;아6:6;눅7:46).

(5) 치료용(治療用) : 병을 치료할 때 사용하였다(.레14:28;사1:6;막6:13;눅10:34;약5:14)

(6) 화장용(化粧用) : 몸단장을 하는데 사용되었다(삼하12:20;룻3:3;사1:1-3).

 

2) 관유(灌油) : 올리브유에 향료를 넣어 만든 것(출29:21,30:25;레21:12;민4:16).

(1) 성별용(聖別用) : 거룩하게 하고 구별하는 의미이다(레8:2,10:7;출30:31-33).

 

3) 몰약(沒藥,) : 상록수의 향내 나는 나무 진(창37:25;43:11;마2:11;막15:23).

(1) 장례용(葬禮用) : 시신의 썩는 냄새가 나지 않게 한다(막16;1;눅24;1).

(2) 마취용(痲醉用) : 고통을 덜게 하는데 사용되었다(막15:23).

(3) 화장용(化粧用) : 몸단장을 하는데 사용되었다(에2;12).

 

4) 동물성 기름(fat) : 동물의 지방조직 또는 그것에서 뽑아낸 액체(창4:4;출29:13;레3:16,17)

(1) 화제용(火祭用) : 단 위에서 불사르며,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드림을 의미한다(.출29:13;레2:16,3:3,17,7:21:6)

 

 

3. 기름의 의미(意味)

1) 생명을 유지하는 힘의 근원이다(창9:4,5)

2) 권위와 복과 영광을 의미한다(시45:7;사61:3;히1:9)

3) 존귀히 여김과 환대를 의미한다(시23:5;눅7:46)

4)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복 주심을 의미한다(신32:13)

5) 사치한 생활을 의미한다(잠21:17)

6) 기름을 불사르는 것은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의미이다(레3:16)

7) 기름이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했다(욜1:10).

8) 성령을 가리킨다(눅4:18;요일2;20).

9) 성령의 거룩, 성결, 계시, 조명, 헌신, 치유, 유지력 등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행10:38).

 

 

4. 기름 부음[anointment]

기름(감람유)을 사람의 머리와 몸 혹은 물체에 바르거나 그 위에 붓는 의식. ‘기름부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스마’(crivsma-)라는 단어는 칠하거나 문지르거나 기름을 붓는 행위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히브리어 ‘마사흐’(기름 바르거나 붓다), ‘미쉬하’(바르는 기름), ‘모쉬하’(기름 부음)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1) 선지자나 제사장이 기름을 부었으나 그 권위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삼상26:11;왕상1:34,39,45;시18:50).

2) 한 번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 물건이나 사람은 그 효력이 일생 동안(또는 그 직분을 담당하는 동안) 계속되었다.

3)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성별한 물건이나, 거룩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라 해도, 죄의 오염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대제사장을 통해서 1년에 한 차례씩(대속죄일) 짐승의 피를 뿌려서 죄의 오염을 씻어내는 예식을 거행하게 하셨다. 이러한 대속죄일의 예식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온 백성의 죄를 주기적으로 정결케 하는 역할을 했다(레16장).

 

 

5. 기름 부음의 경우

1) 하나님의 섭리를 수행할 직분자로 세움을 받을 때

(1) 제사장 직분을 위임할 때 : 아론과 그 아들들(출28:41,40;13,15;레2:2) ,29:7,29,40;15;레4;16,6:20,8;12).

(2) 선지자를 세울 때 : 엘리사(왕상19:16). 사독(대상29:22)

(3) 왕을 세울 때(왕상1:39,5:1,19:16) : 사울(삼상15:1,9:16,10:1), 다윗(삼하5:3,17;삼상16:12,13;삼하2:4;대상11:3),

솔로몬(왕상1:34,39,5;1;대상29;22)

(4) 예수님께 능력을 주실 때(눅4:18;행10:38)

(5) 성도로 세움을 받을 때(고후1:21)

2) 물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성별(聖別)시킬 때

(1) 돌을 성별할 때 : 벧엘의 돌(창28:18,31:13).

(2) 성막과 그 기구를 성별할 때(출30:26-29,40:9-16;레8:10,11)

3) 성령의 임재 또는 내재를 나타낼 때(요일2:20,27).

 

 

6.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야’(요1:41,4:25)를 뜻하고,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기로 약속한 사람에 대한 히브리 칭호이다.

1) 구약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가리킨다.

2) 왕정 후기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는 구원의 시대를 다스릴 이상적인 인물을 가리키게 되었다(사11장).

3) 신약 시대에는 장차 이 세상에 와서 로마의 통치를 타도할 다윗의 후손을 의미하였다

4)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눅4:18;행4:27,10:38).

5)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고후1:21;요일2:20.27)

 

 

7. ‘기름 부음’의 용례(用例)

 

1) 기름을 바르다

(1) 기름 발리운 자(슥4:14) :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2)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다(시23:5) : 크게 환영하다. 특별한 존재로 인정하다.

(3) 기름을 몸에 바르다(암6:6) : 사치와 향락에 젖어 든다.

(4) 기름을 발리우고(민3;3) : 거룩히 구별되다.

(5) 기름을 좋아하는 자(잠21:17) : 사치와 향락에 젖어 지내는 자.

(6) 네게 기름을 바르고(겔16:9) : 몸단장을 하다.

(7)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다(약5:14) : 주의 권위로 치료를 하다.

(8) 방패에 기름을 바르다(사21:5) : 전쟁을 준비하다

 

 

2) 기름을 붓다

(1) 기름 받은 자 :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시고 그 권위를 인정한 자 : 다윗(시2:2), 고레스(사45:1) 등

(2) 기름 부은 자(대상16:22) :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여 은혜를 덧입혀 준 자.

(3) 기름 부음 받는 날(레6:20) :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직분자로 세움을 받는 날

(4) 기름을 부으신 이(고후1:21) : 직분을 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하나님.

(5)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시92:10) : 새로운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다.

(6)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히1:9) : 권위와 영광과 복을 덧입혀 주다.

(7) 향유를 머리에 부으니(마26:7) : 크게 환영하다. 특별한 존재로 인정하다

 

 

3) 기타

(1)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레3:17) : 생명을 취하지 말라

(2) 기름 뿔(삼상16:13;왕상1:39) : 기름을 채운 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기름을 붓는데 사용한다.

(3) 기름시내(욥29:6) : 풍부했던 생활을 의미한다.

(4) 기름지다((창18:7,45:18;사10:27) : 기름기가 많고 영양이 좋다.

(5) 순결한 기름(출27:20) : 다른 첨가물이 섞이지 않은 감람 열매로만 만든 순수한 기름.

(6)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시17:10) : 풍요함으로 교만이 가득하다.

(7)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리라(사34:7) : 땅이 기름으로 뒤덮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