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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

by 은총가득 2020. 10. 6.

“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

- 허 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

“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역사 이래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마땅히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 당위성을 대변하는 일종의 수사적 질문이다. 이 질문은 또한 그 동안 매우 당연시 되었던 진술 - ‘기독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 적지 않게 도전을 받고 있는 학문적 현실을 의식하면서 고려될 수 있는 일종의 변증적 질문이기도 하다. 이 학문적 현실이라는 것은 실제로 서구 신학계에 있어 18세기부터 신약성서 학계에서 이미 발원한 것이었으며, 19-20세기에 소위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와 ‘신앙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Faith)를 철저히 분리하려고 하는 ‘역사적 예수 탐구’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 학문적 분위기가 서구 교회의 안팎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침으로 인해 서구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 배경이기도 하다. 현재 서구에서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이미 ‘제 3시기’에 접어들어 현대주의적 비평적 시기였던 ‘제 2시기’를 나름대로 극복하면서 전개되고 있다면, 국내의 학계 상황은 이런 논의들이 체계적으로 토론되지 못한 형편에서 신학자들보다는 비교 종교학자들 내지 일반 철학자들에 의해 매우 단편적으로 교회 일반 성도들과 비기독교인 대중들에게 소개가 되고 있는 듯 하다. 예를 들어, 몇 해 전 공영방송을 통해 노자사상에 대한 시리즈 강좌를 진행한 바 있던 도올 김용옥은 주로 역사적 예수 탐구 제 2시기의 부분적 주장들을 마치 현재 서구 신학계의 일치된 견해인 것처럼 소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올 연초부터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내지 한상용의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와 같은 파격적인 제목과 그 내용이 예상외로 많은 관심을 끌게 되면서, 국내 성도들 뿐 아니라 비성도들에게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듯 하다.

이런 국내외의 배경을 염두에 둘 때, 필자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본 특집에 실린 앞선 글들과의 논의의 연속성 속에서 이 글의 제목과 내용을 이해해야 될 듯 싶다. 즉, 이 글은 현재 ‘역사적 예수 탐구’와 관련된 국내외의 신학계 상황을 직접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방적 ‘역사적 예수 탐구’의 결과로 하나의 부정적 내지 파괴적 성향으로 나타날 수 있는 주제인 ‘기독교 교회관’을 예수님과 초대 신앙 공동체와의 상호 역사적 관련성 속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서두에 언급하지만, ‘역사적 예수 탐구’(기독론)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실제로 구원론을 비롯한 ‘기독교 신학’의 전 영역과 이에 따른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삶과 세계관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학계의 결정적 이슈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주제는 성경, 특히 1세기에 기록된 신약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개의 길로 나뉠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논의의 출발점: 성경과 기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신약)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왜 교회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라는 우리의 중심된 논의에 앞선 의문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예수님과 초대 교회 형성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얻고자 할 경우, 우리는 사실상 거의 절대적으로 신약성경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와 관련하여 매우 단편적으로 예수를 소개해 주고 있는 비기독교(이교도와 유대교 문헌을 포함해서)적 자료와 비교해 볼 때,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각각 구체적으로 보도해 주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는 실로 그 역사적 가치가 중요하다 아니할 수 없다. 신약성경에 대한 이같은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이해는 다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평적 성서학자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신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보도해 주고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을, 특히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어떤 행위나 말씀에 있어서 소위 그 진정성(authenticity)을 타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매우 상이한 두 견해를 만나게 된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시작할 때 우리가 접하게 되는 신약성경(특히, 복음서)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견해는 다름아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직결된 입장의 표명이다.

이에 대해 로버트 스타인(Robert Stein)은 “예수의 생애 연구에 수반되는 기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기적이다. 그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기적의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와 사역과 관련하여 30개 이상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 . . 그러므로 기적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예수의 생애를 다룰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과 메시지의 중심에 기적이 있다. 예수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다. . . .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역사적인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옳게 주장하고 있다. 계속해서 스타인은 “예수의 생애와 거기에 관련된 기적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하든지, 그 증거를 정직하게 다루기만 하면 모두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산뜻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잘못된 말이다. 사실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기적 기사들을 연구하는 사람은 모두 이미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기사에 접근할 때 초자연적인 일과 기적의 가능성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기적 같은 것이 발생할 수 없는 폐쇄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접근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두 번째 입장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어떤 연구에 대해서도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견해는 증거를 연구하기 전에 내려진 신앙적인 결단에 근거하고 있다”라고 냉철하게 지적함으로써, 역사적 예수 탐구자 내지 해석자들의 ‘신앙적 전제’(religious presupposition)의 차이가 서로 상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에 있어서는 이것이 바로 서로 상반된 신약성경(특히, 복음서)에 대한 각각의 ‘다른 신앙적 전제’에 기인하는 것임을 논의의 처음부터 분명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신약성경의 내러티브가 초대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독자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는 그리스도와 주이시다”(행 2:36 참조)라고 하는 역사적 고백과 선포에 대한 분명한 결단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즉 성경의 세계관에로의 초대에 결단을 요구 받는 독자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신약성경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칭함 받았던 초대 성도들을 추적해 보면서, 우리의 주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자.

<초대 교회 성도들은 어떤 자들이었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해에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였는데, 이를 남달리 추종했던 자들을 아우구스티아니(Augustiani)라고 불렀으며, 역시 같은 해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치리 했던 헤롯(Herod)의 추종자들을 헤로디아노이(Herodianoi - 막 3:6 참조)라고 명명함으로써, 국가 권력을 갖고 있었던 왕이나 어떤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원래 헬라어의 ‘-이아노이’(-ianoi)라고 하는 접미사는 라틴어 접미사 ‘-이아니’(-ani)에서 변형된 것으로, ‘따르는 자들’(followers) 내지 ‘귀의자들’(adherents)을 의미한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 이후에 예수님의 생전의 가르침/도(o(do/j)를 따르며, 그 분을 그리스도(Christos)와 주로 고백하던 무리들을 크리스티아노이(Christianoi),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내지 ‘그리스도께 귀의한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크리스티아노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라 칭했던 것이 우리 신약성경(행 11:26; 26:28; 벧전 4:14, 16 참조)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의 문헌(대표적인 예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Annals 15.44; 요세푸스의 The Antiquities of the Jewish People 18.63-64)에서도 증언 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앞의 두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 스스로 크리스티아노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바라보는 외부인들로부터 크리스티아노이라고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외부인들이 볼 때에라도 이 가르침/도(o(do/j)의 지도자와 창시자인 예수는 ‘그리스도’로 알려져 있었다(플리니우스의 Epistles 10.96; 타키투스의 Annals 15.44; 요세푸스의 The Antiquities of the Jewish People 18.63-64; 20.200-203; 참조, 수에토니우스의 Life of Claudius 25.4)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메시아/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에 기초한 것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人子)이라는 다니엘서 7장 13절의 신적 인물로서의 자기 이해와 함께 예수님의 남다른 어법들(예, ‘아멘’, ‘아바’, ‘신적 수동태’)을 통한 가르침(예, ‘비유’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나 권세있는 어떤 행위들(예, ‘열 두 제자를 부르심’, ‘죄 용서 선언과 치유’, ‘성전 청결/심판’)이 매우 독특하여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을 만큼 심각한 ‘예수의 자기 이해’ 였던 것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본문들은 비평적 복음서 학자들의 소위 ‘비유사성의 기준’(the criterion of dissimilarity) 하에서도 그 역사적 진정성을 상당히 인정 받고 있는 것이어서 더욱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는 예수님 당대의 유대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용납될 수 없었던 사항들이 적지 않았고, 실제로 이같은 예수님의 자기 이해가 산헤드린 공회의 대표격인 대제사장에 의해 ‘참람한 자’(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낙인 찍혀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막 14:60-64). 한편,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으며 이 사실을 선포하는 자들을 ‘나사렛 이단’ 또는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사는 자들이라고 정죄하며 핍박하였던 것을 보게 된다(행 24:5, 14). 그리고 이미 1세기 후반에 이르러 안디옥 도시에서는 이 운동을 일컬어 크리스티아니스모스(Christianismos), 즉 그리스도교(Christianity)라고 일컫게 된 것이었다(안디옥 교회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의 편지 Magnesians 10.3).

그런데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이다’(예, 행 2:36)라는 문맥 속에서 사용된 메시아/그리스도는 원래 예수님의 제자/증인들의 선포의 내용이자 칭호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상당히 초기부터 이 칭호의 의미를 깨닫기 힘든 비유대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이 칭호는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상당히 고유 명사적 개념(‘예수 그리스도’)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롬 3:24; 6:3, 11, 23; 8:1, 2, 11, 34, 39; 15:5, 16, 17; 16:3; 참조, 롬 1:2-4; 고전 10:4; 15:22; 고후 5:10; 11:2-3; 엡 1:10, 12, 20; 5:14; 빌 1:15, 17; 3:7).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종’(servant of Christ)으로 파악하고 있으며(갈 1:10, 15-16), 베드로와 야고보 역시 ‘그리스도의 사도’(apostles of Christ)로 일컬어짐을 보게 된다(갈 1:17; 참조, 고전 1:1). 이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아로 고백하게 된 것에 기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따라서 위에서 본 기독교 내외적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단순한’ 이름 만으로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삶의 양식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다시 말하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명백하게 처음부터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고 하는 고백과 함께 이 고백을 선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전승)에 따른 삶을 살았던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들이 믿었던 ‘나사렛(역사적) 예수’는 ‘그리스도(신앙적) 예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분의 예수님이셨다는 말이다.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는 자들’에 대해 동일한 개념을 다소 다른 표현들을 통해 소개해 주고 있는 사도행전을 잠시 관찰해 보자. 사도행전 9장을 한 예로 고려해 본다면, 1절, 25절, 26절과 38절에서는 ‘제자들’로, 2절에서는 ‘그 도를 좇는 사람’으로, 13절과 32절에서는 ‘성도’로, 26절과 30절에서는 ‘형제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기록자 누가의 이와 같은 진술은 초기 유대-크리스천들과 이방인-크리스천들을 부르는 표현이 예수 신앙 공동체 초기에 매우 다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다양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 진술들 속에서 나타나는 핵심적인 본질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고 하는 구성원들의 체험과 고백인데, 이들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 같은 인식 속에서 그 분의 가르침(‘그 도를 좇는 사람’)을 따르는 자(‘제자’)들로서 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형제들’)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예수님의 사도/제자들의 증인 사역은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을 포함한 적지 않은 자들의 회심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과 주되심을) 믿는 자들’(행 2:44; 4:32; 15:5; 16:34; 18:27; 19:18; 21:20, 25; 22: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행 9:14, 21; 22:16), ‘(그리스도 주 예수를 통해) 구원 받는 사람’(행 2:4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 거룩한 자들’(행 9:13, 32, 41; 20:32; 26:10, 18; 참조, 롬 1:7; 16:15; 고전 1:2; 고후 1:1; 13:12; 빌 1:1; 히 6:10; 13:24), ‘(그리스도 예수를 함께 믿는) 형제들’(예, 행 9:26, 30; 11:29; 14:2; 15:1, 22, 36; 18:27; 마 12:46-50; 참조, 행 2:29; 7:2; 13:26, 38; 28:21),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행 6:7; 9:1, 26, 30; 11:26; 15:10; 18:27; 20:30),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자들’(행 9:2; 19:9, 23; 24:22) 등으로 사도행전에 소개됨으로써,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타나는 ‘교회’(e)kklhsi/a)라는 용어(참조, 행 5:11; 8:1, 3; 9:31; 11:22, 26; 12:5; 13:1; 14:23, 27; 15:3, 41; 16:5; 20:28; 21:1)가 일반화되기 이전에 이런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의 핵심적인 사실은 이 같은 신앙 공동체 회원들이 다양한 형태로 묘사될 수 있었지만,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본질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은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이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 주의 백성’(행 15:14; 18:10; 참조, 행 3:23)으로 간주된다는 점도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있던 (민족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주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백성’이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게 된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을 향해 묘사되었다고 하는 사실(참조, 고후 6:16; 딛 2:14; 벧전 2:9-10)은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전통적 유대인들이 신앙하던 바로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전통적 유대인들이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각각 그리고 함께 고백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e(+ij qeo\j o( path\r)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ei+j ku/rioj )Ihsou=j Xristo\j)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따라서, 참 이스라엘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민족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와 같은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개와 결단으로 돌이키는 심령과 행위가 따를 때, 이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구원론적 체험이요 확증이라 할 수 있다(행 2:37-39; 고전 2:6-13; 롬 8:1-11).

기원후 약 57-60년 경에 기록되어 바울의 첫 선교 서신으로 이해되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보아도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살전 1:1; 참조, 살전 2:14)로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택하심을 입은 형제들”(살전 1:4; ‘하나님과 관계 있는 자들’: 살전 1:9; 2:12, 13; 14, 4:7; 5:24)이면서,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은 자들”(살전 1:6 - ‘성령과 관계 있는 자들’: 살전 1:5, 6; 4:8; 5:19)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와 관계 있는 자들로 매우 자연스럽게 소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살전 2:6, 14; 5:9, 18, 23, 28):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살전 4:14);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는 자들”(살전 4:13);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살전 4:16);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자들”(살전 5:9); “예수와 함께 사는 자들”(살전 5:10).

이 같은 성도들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에 나타나는 몇 가지 초기 기독론적 특징들을 사도행전에 초점을 맞추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새 언약의 백성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행 2:38; 8:16; 10:48; 19:5; 22:16; 참조, 마 28:19). 둘째, 예수님의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증거한다기 보다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증거한다는 사실이다(눅 24:48; 행 1:8, 22; 2:32, 40; 3:15; 4:33; 5:32; 8:25; 10:39, 41, 42, 43; 13:31; 14:3; 18:5; 20:21, 24; 23:11; 26:16, 22; 22:15, 18, 20; 28:23). 셋째, 예수님의 사도들이나 다른 제자들이 가르치거나, 말씀을 선포하거나, 기적을 행할 때, 그 능력의 출원으로서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이다(행 3:6, 16; 4:7, 10, 12, 17, 18, 30; 5:28, 40; 9:27, 28; 참조, 행 19:13, 17-20). 넷째, 하나님과 관련된 구약의 본문들을 예수님께 재해석하여 적용시킨다는 사실이다(욜 2:32 - 행 2:21, 38; 4:12; 9:14, 21; 22:16; 참조, 고전 1:2; 롬 10:13). 다섯 째, 예수님의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환상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 자신 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앙적으로 체험(말하자면, 예수의 신적 현현)한다는 사실이다(행 7:55-56; 9:4-6, 10-16; 18:9-10; 22:7-10, 18, 21; 23:11; 26:14-18). 여섯 째, 존귀케 되신 예수님께 기도한다는 사실이다(행 7:59-60; 1:24; 참조, 눅 24:52; 행 19:17; 고후 12:2-10; 고전 16:22; 예수님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도함 - 롬 1:8; 7:25; 고후 1:20; 골 3:17). 마지막으로 율법 토라와 장로들의 유전이 아닌 ‘나사렛 이단’(행 24:5, 14)이라고 불리는 그 도(o(do/j)를 따라가고 그 도를 가르친다는 사실이다(행 9:2; 19:9, 23; 22:4; 24:14, 22; 참조, 행 5:14; 9:35, 42; 11:17, 21b, 24; 16:15, 31; 18:8).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향한 회개’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행 20:21). 초기 신앙 공동체의 이런 요소들은 이 신앙 공동체(즉, 교회)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리의 상관 관계에 있었음을 여실히 증거 해 주는 특징들이 아닐 수 없다.

<교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신약성경의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hsi/a)라는 단어는 1세기 유대인들에게 있어 늘 ‘신약적 교회’를 지칭하는 (신학적) 전문 용어가 아니었다. ‘회중’(congregation) 내지 ‘모임/집회’(assembly)의 뜻을 가진 이 헬라어 단어는 신약성경의 ‘교회적 개념’을 구약(칠십인 역)과 관련하여 표현하는데 있어 매우 용이하게 사용된 가장 대표적인 용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약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공동체와 그 모임을 지칭하는데 있어 유대교의 민족적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하여 연속적인 면과 비연속적인 면이 동시에 함의 되어 있는 셈이다. 위의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본 글의 주제에 초점을 갖고 교회의 정체성을 짧게 생각해 보자.

네 개의 복음서 중에 에클레시아 용어가 유일하게 발견되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직후에 베드로를 향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참조, 마 18:17-20)라고 선언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에클레시아가 ‘예수의 에클레시아’로 표현되면서, 이 에클레시아를 세우는(이 동사는 막 14:58에도 사용되었음) 주체가 또한 예수님이라는 점이며, 둘째, 이같은 예수님의 선언은 자신을 향한 메시아적 고백(즉, 예수가 그리스도이다)이 자신을 따르던 제자의 입술로부터 터져 나온 연후에 있었다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에서 에클레시아가 발견되는 또 다른 문맥은 18장 15-20절 문맥인데, 여기서도 역시 에클레시아는 예수님과 필연적 상관성(마 18:20)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 단어는 발견되지 않지만, 공관복음서(마 10:1-4; 막 3:13-19; 눅 6:12-16)는 모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을 증언해 주고 있다. 여기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구약 이스라엘의 대표격인 열 두 지파를 대체하는 새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새롭게 부르시고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즉, 메시아적 자기 이해)로서의 상징인 셈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때에 자신의 죽음을 예레미아서 31장 31절(이 구절에 사용된 동사 ‘세우리라’를 주목하라)에 대한 성취로써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막 14:22; 마 26:28; 참조, 고전 11:23-25)고 말씀하신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자기 이해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공동체를 모으기 위한 자기 사명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며, 이같은 예수님의 자기 이해와 사명이 바로 자신의 하나님 나라 도래 선포와 특히 자신의 죽음의 의도로 이해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소위 에클레시아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른 관찰과 이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자체가 구속사적으로 예수님의 탄생, 사역, 죽으심, 부활 그리고 승천과 같은 일련의 기독론적 사건 속에서 점진-종말론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큰 일”(행 2:11)이라는 사실을 깊이 고려함으로써(참조, 행 2:33) 신약적 에클레시아의 탄생이 예수님의 총체적인 메시아적 자기 이해와 사명에서 기인된 것임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위의 내용을 이해할 때, 우리는 왜 신약성경(특히, 바울)에서 에클레시아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고전 1:2; 10:32; 11:16, 22; 15:9; 고후 1:1; 갈 1:13; 살전 2:14; 살후 1:4; 참조, 고전 3:16-17; 고후 6:16; 엡 2:18-22)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롬 16: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 - 갈 1:22; 참조, 고전 3:10-11; 벧전 2:4-6)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에서 에클레시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the churches of God in Christ which are in Judea)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그의 첫 서신에서부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신약적 교회’ 개념에 필연적임을 시사해 준다.

본 글의 주제와 관련된 교회의 정체성 이해에 있어 한 가지 더 염두에 두어야 할 바울의 용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to\ sw=ma tou= xristou=)이라는 표현이다(고전 12:27; 엡 4:12; 참조, 롬 12:4-5; 엡 1:22-23). 물론 이 용어가 사용된 문맥의 강조점은 고린도 교회와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을 목양하는 가운데, 각자와 전체의 유기적이고 필수적인 상호관련성을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를 통해 그 통일성과 다양성의 신비를 교훈하고자 함이었다. 그럼에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용어를 통해 바울이 하나님의 새 언약 공동체를 기독론(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하는 가운데!) 중심으로(“그리스도의” 몸) 이해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결정적으로 증거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몸” 개념에 기초하여 유기적 통일성과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회원들로 잘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그리고 함께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신앙 고백과 상관 없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결단코 ‘그리스도의 몸’으로 칭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철저하게 구속사적 맥락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마땅히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증거하는 기독론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시종여일 증거하고 있다.

<나가는 말>

1세기 유대 땅에서 성장하며 역사적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역사적 예수의 제자들을 모질게 잔해하고 핍박했던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약 2-3년이 지나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만큼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더 잘 증거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또 있을까 하고 필자는 자문해 본다. 예수님의 역사적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믿는 가운데, 수많은 환란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개척하며 목회-선교적 열정과 현장에 여념이 없었던 ‘역사적 바울’과 그에 의해 쓰여진 1세기의 ‘역사적 서신들’은, ‘역사적 예수’ 이해와 관련하여 - 최소한 필자에게 - 오늘날 20-21세기 ‘예수 세미나’와 같은 현대 성서학자들과 그들의 가설에 의해 쓰여진 저서들이 증거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보다 더 ‘역사적’ 설득력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성경적) 교회가 오늘날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도적)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 이제 분명해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거나 고백할 수 없는 ‘다른 신앙’ 내지 ‘다른 복음’ 위에 세워지는 교회는 성경적 교회, 즉 ‘역사(사도)적’ 교회의 연속성과는 상관 없는 하나의 ‘집회’ 내지 ‘모임’(행 19:32, 39, 41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를 참조하라)으로 전락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집회’ 내지 ‘모임’은 하나의 의미있는 사회-정치적 그룹으로 나름대로의 기능을 할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구속사의 신적 방편으로서의 참 기독교(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능력은 이미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사도)적’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 교회/성도들이 유념할 사항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우리의 ‘역사(사도)적’ 신앙 고백이 단순히 개인적인 입술의 고백으로만 장식되어 형식과 과거에 치우친 죽은 고백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 교회/성도들은 우리가 처한 삶의 공동체적 자리에서 늘 심령의 새로워짐과 겸손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현재와 내일을 치유해 주는 살아있고 책임감 있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성도들의 무분별한 개인 이기적 또는 기복적 신앙 내지 각 지역 교회/교단의 지나친 교권이나 이권적 다툼은 민족과 사회 앞에서 우리 성도들과 교회의 능력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 아니라, 우리들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역기능의 심각한 본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민족과 사회 앞에서 우리 교회/성도들이 의식하고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과 전문 영역에서 모두 ‘기독교적’(基督敎的; Christian; xristiano/j)이란 용어의 잃어버렸거나 망각하기 쉬운 이 본질적 수식어를 다시 회복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즉,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 )Ihsu=j e)sti\ Xristo/j; 참조, 마 16:16; 막 8:29; 눅 9:20; 행 2:36; 5:42; 9:22)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붙여졌던 이 역사적 용어 크리스티아노스(xristiano/j)가 오늘 우리의 시대에 좀 더 온전히 인식되고 적용되어져야 할 당위성이 요구된다. 내가 성도이든, 목사이든, 신학자이든,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나의 답변이 여전히 사도적 신앙에 기초하고 그 신앙을 고백하고 따르는 ‘기독교적’(基督敎的) 성도, ‘기독교적’(基督敎的) 목사, ‘기독교적’(基督敎的) 신학자로서의 일관성 있는 답변인지를, 그래서 참 ‘기독교적’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우리의 고백과 행위가 우리 삶의 구속사적 현장에서 어느 정도 일치되어 드러나고 있는지를 정직히 물어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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