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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왕 같은 제사장

by 은총가득 2020. 12. 12.

 

왕 같은 제사장 (장봉운 목사)

 

 

마르틴 루터가 교회 개혁을 위해서 과감히 도전한지 50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영성에 따라서 교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든지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 설교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등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원래 개혁하고자 했던 ‘만민 제사장’이라는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사제와 평신도라는 이원적인 구분 역시 제대로 개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개신교는 단일체계로서의 왕권적 교회 구조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교단이라는 새로운 호족적 지배구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즉 로마 가톨릭을 통일왕국으로 본다면 교단교회는 난립된 군주국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에는 최고 통치자인 황제가 있고, 지방을 분할해서 다스리는 왕이 있습니다.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를 국(國)이라고 부르고, 왕이 통치하는 지역을 부(府)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의 개신교는 부와 비슷하다고 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황제를 모시든 왕을 모시든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세를 내야 하고 부역을 감당하기란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다스리든지 교단의 총회장이 다스리든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백성의 신분은 여전하듯이, 평신도로 구분되어 있는 신분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세에 해당하는 헌금은 여전히 똑 같이 드려야 하고, 부역에 해당하는 주일 성수는 의무로 되어 있습니다.

 


사제와 평신도의 이원적 구분은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지배하는 교회’와 ‘따르는 교회’로 ‘거두는 교회’와 ‘드리는 교회’로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냈고, 거듭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목회자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어 교회를 종교 집단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며, 목회자가 직업인으로 전락함으로써 성령의 일은 제한되고, 교회는 직업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인 구조로 바뀌어갔습니다. 직업이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이로써 자신의 삶이 우선되며, 교회는 밥그릇 싸움으로 인해서 낯부끄러운 일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목회자는 자기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기 때문에 성도는 그 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어떤 의식도 갖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그에 따라 일정한 달란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 남기면 칭찬이 돌아오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겠지만 묻어두고 증대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불러오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한 경각심이나 실질적인 필요를 전혀 느낄 여유를 주지 않고 있는 교회 구조는 성도들에게 엄청난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모순 된 구조는 먼저 지도자의 직무를 성직이라는 이름으로 직업화하고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직업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스스로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본입니다. 사도를 비롯해서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부르심을 직업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레위 지파의 출신들이며, 이들에게는 분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분깃을 받은 다른 지파들이 10분의 1을 거두어 이들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제사장이 없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직을 성취시킴으로써 이 땅에는 더 이상의 직업으로서의 제사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서 제사장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이제 십일조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었고, 주님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고 베푼 것처럼 우리도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존재이며, 그 직무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서 내어놓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진 것을 세상을 향해서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와 신의 십일조’이며, 주님이 죄인을 향해서 몸마저 내어놓았던 그 희생의 십일조입니다. 제가 게시판에서 십일조에 대해서 이미 언급했으므로(영성의 글샘 150번) 여기서는 생략하며, 이런 내용들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민 제사장이라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할 틀은 목회자의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도 각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목회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인데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지탱할 수 있었던 틀은 율법과 바리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주님에게는 대적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인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직업으로서의 목회자의 등장은 모든 교회 기능들을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것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있기 때문에 이 구조를 바꾸어야 성도가 주체가 되어 자신들에게 부어진 기름부음과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구조 속에서 세워진 목회자들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길로 나온 희생자들입니다. 그리고 후에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개인으로서는 역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그 구조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사회가 총체적 부패 속에 있음을 알고 학생시절에는 분개하지만 막상 공무원이 되거나 기업인이 되면 그 구조를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은 이처럼 악한 구조 앞에는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죄를 짓게 만드는 구조를 개혁하고 새로운 세대들로 새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지도자가 아닌 소명으로서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구조로 바꾸기 위해서 각 사람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우리 서로 고민해야 합니다.

 


새로운 구조에서의 사역자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한 급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직업으로 목회의 일을 선택하려는 사람은 처음부터 이 분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직 부르심에 의해서 바울처럼 죽으면 죽을 각오로 나오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에굽(세상)에서 불러내어 광야(교회)로 나올 때  그 속에는 이스라엘이 아닌 수많은 잡족들의 따라 나왔습니다. 이처럼 목회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이 없는 직업인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틀에는 어떤 사회적 보장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르심에 대한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어쩌면 지금의 1000분의 1수준 이하로 줄어들 것입니다. 아주 소수의 목회자들이 남을 것인데 이들에게는 탁월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질 것입니다. 마치 바울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절대로 사역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역자는 어떤 한 지역을 송두리째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과 같은 개 교회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라 지역 전체를 순회하면서 가르치고 성도들을 연합시킬 것입니다. 교회는 극도로 세분화되어 은사 공동체로 모여 성숙된 지도자(멘토)를 중심으로 모임을 갖게 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12명 이하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이 집단들이 다시 12집단으로 연합하며, 이 집단들이 다시 더 큰 12집단으로 연합하여 대규모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그 핵심에는 사도와 선지자가 있고, 그리고 목사와 교사들이 공동체를 가르치고 이끌어갈 것이며, 최초 12명 이하의 단위의 집단들 즉 오늘날 셀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그런 소규모 집단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고 그 안에는 성숙한 사람과 어린 사람이 공존해서 배우고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모든 성도들의 일반적인 지적 수준이 대학 학력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최소 단위의 교회이며, 이 공동체는 은사를 중심으로 모이며 이런 다양한 성격을 지닌 공동체가 무수히 많으며, 이 공동체를 교사와 목사들이 연결고리를 만듭니다. 이 들을 다시 한 공동체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도와 선지자입니다. 소수의 사도와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교사와 목사가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 수 많은 셀교회 또는 가정교회가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의 기초 교회는 가정을 중심으로 모이며,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은사 공동체로 재편될 것입니다. 이로써 지금과 같은 직업 목회자는 사라지며, 사도 선지자 교사 목사 등의 직무를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후원자들이 생겨 그들의 사역을 뒷받침할 것입니다.

 

 

만민 제사장이라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바뀌어야 할 또 다른 틀은 교회당 건물입니다. 교회당 건물은 주일 성수를 위해서 모이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의무적으로 정기적으로 군집으로 모일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특수한 성격의 집회를 위해서 소수의 강당구조의 장소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은 체육관이나 학교 강당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예배만을 위해서 교회마다 건물을 짖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가정에서 모이며, 모두가 제사장이므로 예배를 주관할 수 있으며, 가르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사도와 선지자의 가르침은 인터넷이 이것을 돕는 훌륭한 수단으로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구조에서는 교회당이 없이는 설교자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당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터넷으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쳐 왔기 때문에 성도들은 교회당에 가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습성이 몸에 베어있지만 지구상의 성전은 오로지 우리 몸 이외에는 없습니다. 주님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물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거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당을 성전처럼 오인하면서 살아왔기에 이 개념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꾸어야 합니다. 조오지 다운헴은 '복음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외적 형태의 체제와 구조는 무시되어도 좋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가장 귀중한 복음이라는 보석을 구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old priest and new presbyter, 1956).

교회당이든지 인터넷이든지 이것은 동일한 수단일 뿐입니다. 바꾸면 바뀔 의복과 같습니다. 교회당 건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터넷이 대신하며, 성도들은 일정한 액수의 회비 성격으로 기부금을 냅니다. 이것으로 사역자의 생계가 유지되는 것이며, 소수의 사역자가 이 일을 감당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염려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교사는 이미 자비량 선교를 통해서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만민 제사장의 실현은 자비량 선교사의 등장을 보편화합니다. 성도가 직무를 감당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직업 선교사는 사라집니다. 오로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열정을 지닌 헌신적인 전도자가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직업을 가지고 선교지로 나갑니다. 사업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직장 선교사(market missionary)가 주를 이룹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만민 제사장이 되기 위한 움직임 속에 이미 들어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대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교회건물과 목사직의 해체는 당장에 이루어질 일은 아닙니다. 낡은 구조를 통해서 등장한 목회자는 그 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직업으로서의 성직을 행하고 있습니다. 낡은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가죽부대에서는 더 이상의 직업으로서의 사역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가 다 같은 제사장이며 위도 아래도 없습니다. 다만 먼저 성숙한 사람과 아직 덜 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서로 이끌어주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인터넷이 이 과정을 아주 손쉽게 해결합니다. 여러분이 저의 카페를 통해서 많은 영적 지식을 얻듯이 그렇게 되어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대학 학력을 가지고 있고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들 못지않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터넷을 통해서 공개되는 지식을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인터넷 신학교 한 곳만 있으면 모든 신학교가 하는 일을 대치할 수 있습니다. 실력 없이 난립한 군소 신학교 대부분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신학교에 갈 학생은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질 높은 강의를 언제든지 무료로 누구나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방대한 신학지식도 인터넷을 통해서 원하는 부분을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을 가정 교회 공동체 즉 기초 공동체에서 서로 나누고 배울 수 있으며, 적용하고 다룰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관여하시고 이끄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분의 지도를 받게 되며, 배우게 됩니다. 성숙하고 스스로 성령의 이끌림을 분명하게 인식하기까지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며, 이것이 멘토의 연결망 즉 교사 목사 등이 직무를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영적 유대를 갖게 되며, 모일 때마다 자원해서 연보를 냄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전임으로 사역하게 되는 교사 목사들은 생활이 다소 불안정한 것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처럼 일정한 소득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기능이 공개되고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구조 개혁을 위해서 토대를 마련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의 음성을 듣는 그날이 와야만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지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더 이상 가르치는 자가 없으며, 주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할 때까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고 모순이 가득한 교회라는 구조를 2000년 동안 지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 1500년이 걸렸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루터의 개혁이었고, 이 운동을 주도한 말틴 루터는 교회 분리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성경을 읽게 된지 500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성령의 음성을 듣는 시도를 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 운동은 앞으로 한 세대가 다 지나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세대를 ‘모세 세대’(the Mosaic Generation) 또는 ‘엘리야 세대’(Elijah Generation)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바로의 지배체계에서 벗어났지만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 세대들이 모세 세대입니다. 이들은 광야에서다 죽었고 다음 세대인 여호수아 세대가 들어갔습니다. 저를 비롯한 40대 이후 세대는 모세 세대들입니다. 대리자가 다스리는 애굽 통치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가나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이 보이는 지척에서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들어갈 수 없었듯이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보편적으로 임하는 그런 새로운 틀이 일상이 되는 그곳으로 40대 이후 세대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이 완성되는 2028년에는 이들 대부분은 연로할 것입니다.

40대 이후 세대들은 그 세계를 멀리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세대들입니다. 그리고 열심을 다해서 그 구조를 만들어내는 세대들입니다. 40대 이후 세대들은 만들어내는데 익숙한 세대들입니다. 60년대 이를 악물고 일터에서 쉴 틈도 없이 일해서 오늘날의 이처럼 경제적으로 성장한 나라를 만들어낸 주역들입니다. 일벌레라는 말을 들으면서 일에만 몰두해서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면서 가족을 위해서 일한 세대들입니다. 이들이 이 거룩한 성도 운동의 주역으로 다시 주님의 나라 건설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50대를 주축으로 하는 이 운동이 거세게 세계를 휩쓸어가면서 교회의 구조를 송두리째 뒤 바꿀 열정으로 가득합니다.

이 운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일어나는 운동이며, 범세계적인 운동입니다. ‘거룩한 성도 운동’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이 운동의 핵심은 ‘만민이 제사장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 운동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문을 외우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 것이 이 세대에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운동은 아픔이 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에게 나왔다가 근심하면서 돌아간 부자 청년처럼 안타까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세대를 바꾸는 운동은 거대한 물결이며, 이는 새로운 페러다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들어가지 못하는 세대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해주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요 15:22)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정당했으며, 올바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심으로써 그들이 행한 일은 더 이상 정당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세인들이여!” 이것이 주님이 당시의 체제를 향해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주 하나님이 수도 없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변화에 대한 계시를 무시했고, 따라서 주님의 임하심이 이루어진 이 시기에는 더 이상 그들의 정당성이 유지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불순종의 세대들과 같았습니다.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질 때는 새 구조가 낡은 것을 대치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영적인 것이므로 낡은 구조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여전히 먹고 마시는 일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 합니다. 주님이 오셨지만 유대교는 여전히 존재하며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가 하나 더 생겨났을 뿐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인 현상입니다. 새로운 틀이 만들어지면 낡은 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자기 죄를 변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신자들

베드로전서 2장 4절 ~ 2장 10절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신자도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합니다.

이런 삶은 믿는 사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으로 잘 표현 됩니다.

 

서로를 사랑하려면 악의, 속임수, 위선, 시기 온갖 비방의 방해 거리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신자가 된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변화를 갖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집으로  건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집에서 모든 신자는 직접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신자의 신분을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모퉁이 돌은 한쪽 구석에 있는 쓸모없는 조그만 돌이 아니라  건축물 전체를 묶어 주는 가장 중요한 커다란 돌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모퉁이 돌에 비유하면서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베푸실 놀라운 은혜와 무한한 복을 직접 드러내자 않고 감춘 듯이 표현하고 계십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안에 담긴 내용은 9~10절에서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자는 시시한 제사장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그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사실과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긍휼을 얻은 자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출처] <함께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