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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요한복음 7장 캐논주석

by 은총가득 2020. 11. 30.

요한복음 7장

 

 

예수의 신적 가르침과 유대 지도자들의 율법 어김

요한복음7장 생명수를 공급하시는 주

 

7장과 8장은 공통적인 시간적 요소와 중심되는 주제를 공유한다. 예수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신다. 그의 메시야적 역할과 권위를 증거하시면서 그가 제공하는 생명은 모세의 율법이 제공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세상의 빛으로서 구약에서 기대하던 완전한 계시를 가져오신 것이다.

 

1.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비밀히 방문하심(1-13절)

1) 유대인과 형제들의 불신앙

1절의 '이후에'는 예수의 사역이 유대 중심(2:12;4:22)에서 갈릴리 중심으로 전환되는 것을 표시한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는 예수께서 죽음을 두려워한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아직 대속의 죽음을 당할 때(16:31;17:2)가 이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3절의 '당신의 행하는 일'은 그 형제들이 표적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지 기적적 믿음만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유대'가 4절에서 '세상'으로 말해진 것은 유대교 사상을 반영한다. 5절의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는 그 형제들이 예수의 기적을 단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는 의도로만 이해한 것을 말해 준다.

 

2)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

6절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1절의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에 암시되었듯이 '내 때'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때를 말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워하는 것은 7절의 예수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와 함께 예수의 형제들이 세상의 악한 행사에 '늘' 동참하여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8절의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와 '나는…이 명절에 아직'은 스스로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을 멀리하심을 보여 준다.

 

3) 비밀히 올라가셔서 무리의 반응을 살피심

10절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올라가신 것은 스스로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과 구별하심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11절의 유대인들의 박해상황을 피하여 자신의 메시야 되심과 그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더 그르치셔야 하는 사역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따라서 12절의 무리들의 반응들은 14절 이하의 예수의 가르침의 필요성을 암시한다.

 

2. 권위에 대한 문제(14-24절)

1) 하나님께로서 온 교훈

14절의 '이미 명절의 중간'은 예수께서 그 명절의 약속을 성취하는 분이심을 가르쳐야 할 시점을 암시한다. 15절의 '유대인들이 기이히여겨'는 예수의 교훈의 효과를 암시한다. 그러나 16절은예수께서 스스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17절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교훈과 거짓 선지자의 교훈을 분별하 수 있게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 영광만 구하는 자들에게 미혹당하게 된다.

 

2) 모세의 율법과 안식일

19절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교훈을 전하는 예수를 죽이는 악한 행사를 고발한다(7절). 20절에서 '무리'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는 그 악한 생사의 극치로서 그들의 참람함을 고발한다. 예수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귀신의 것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21절의 '한 가지 일'은 23절의 '안식일'에 비추어 볼 때 요5:18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을 암시한다. 안식일이 메시야 시대를 상징하고 약속한다면 안식일에 병고침은 예수의 메시야 됨을 증거하는 표적이다(시103:3). 22절에서 예수는 모세의 할례법과 안식일법을 그 조상 아브라함의 할례와 함께 창조시의 안식일법까지 확대시킨다. 24절의 '공의의 판단'은 종말의 메시야적 심판을 염두에 두고 판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3. 예수의 신분에 대한 문제(25-39절)

1) 감히 말하지도 잡지도 못하는 유대인들

25절의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는 아마도 명절의 순례자들이기보다는 영주 거주자들일 것이다. 25절의 놀람과 26절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는 당국자들이 범법자와 신성모독자로 낙인 찍힌 죽어 마땅한 이 사람이(5:18)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계속 말하도록 허락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것은 예수의 권세를 강조한다. 27절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뿌리를 알고 있다는 것으로 메시야가 아님을 증거하려고 하다. 28절에서 예수는 그들이 예수의 인간적인 뿌리만 알고 있지 스스로 오지 않고 29절에서와같이 예수는 절대적인 분에 의해 보내심 받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암시한다. 30절에서 어떤 이들이 예수의 신적 정체 주장을 인하여 예수를 잡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잡지 못한 것은 예수의 신적 권세를 암시한다. 31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표적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믿음의 시작을 보여 준다.

 

2) 유대 지도자들도 잡지 못함

32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호의적이 아니었다. 아마 바리새인들이 더 우선적으로 타협을 시도한 모양이다. 마침내 성전지기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기 위해 파견된다. 33절의 '조금 더 있다가'는 예수가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돌아가겠다'는 고난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정기적으로 보인다(8:21;12:35;13:33;14:19;16:16-19). 34절에서 박해자들이 예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그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영광에 참여하지 못함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제자들조차도 최소한 즉각적으로는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35절에서 헬라인들에게 가서 선교할 것으로 오해된다. 이것은 이차적인 암시를 보여 주기도 한다. 37절의 '누구든지'는 이런 암시를 지지한다. 38절에서 예수께로 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과 동일시된다. 여기서 '그 배'는 일차적으로 성전을 상징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이차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의미한다. 생수의 강은 예수를 믿게 하고 풍성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성령을 말한다.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은 예수의 죽음과 승귀를 예고해 준다.

 

3) 그리스도의 기원

무리들이 예수를 선지자, 그리스도 등으로 칭하는 것은 이들이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판정을 반영한다(6:14). 즉 예수는 신18:15에 약속된 바로 그 선지자이며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다. 42절의 성경은 메시야가 다윗의 씨라고 하는 삼하7:12시89:3,4와 다윗이 고향 베들레헴을 말하는 미5:2를 상기시킨다. 43절의 무리들의 쟁론과 44절의 잡고자 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게 하신 예수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를 암시한다.

45절에서 하속들이 잡지 않고 그냥 온 것과 46절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수긍하는 것은 상황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권세와 예수의 참메시야됨을 강화한다. 47,48절에 유대 지도자들이 흥분하고 49절에서는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50절에 니고데모는 무리들이 율법에 무지하다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로 동료 관원들조차도 율법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을 제시한다. 이 니고데모는 전에 저녁에 예수님을 찾아왔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하여 교훈하셨었다. 당시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놀랐으나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임을 설명하셨다(3:1-14). 이 모든 서술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권세를 증가시킨다.

 

예수를 불신하는 형제들과 초막절(요7:1-13)

 

◈ 원문강해 ◈

 

감추어진 하나님의 시간

 

본문에는 예수에 대한 그의 형제들의 태도와 초막절에 주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이 언급되고 있다.

 

1. 예수를 불신하는 형제들의 권유(1-5절)

1)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

(ouj ga;r h[qelen ejn th'/ jIoudaiva/ peripatei'n, o{ti ejzhvtoun aujto;n oiJ jIoudai'oi ajpoktei'nai. ; 우 가르 에델렌 엔 테 유다이아 페리파테인 호티 에제툰 아우톤 호이 유다이오이 아포크테아니이 ;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1절)

페리파테인(peripatei'n다니려)은 현재 부정사이다. 이는 부정사 에델렌(h[qelen하심)과 함께 사용되어 주께서 유대에서 계속 머물거나 돌아 다니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음을 나타낸다(Arndt-Gingrich). 사역의 거부를 나타내는 이 부분은 그분에게 용기가 결여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때에 으리기까지 조심하려는 의도였다. 공공연히 적개심을 나타내 보이는 유대 직역에서의 사역은 위험하다고 느끼신 것이다(Wycliffe). 에제툰…아포크테이나이(ejzhvtoun...ajpoktei'nai. ; 죽이려 함이러라)는 미완료 시제 능동태와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로 직역하면 '죽이려고 계속적으로 찾았다'를 뜻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계속적으로 예수를 죽이고자 시도했음을 보여 주다(A.T.Robertson). 그들은 이미 예수를 제거해야 할 대상 제1호로 꼽고 있었으므로 모의를 중단하지 않았다.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이처럼 끊임없이 빛을 미워하고 의인을 대적한다(요3:19,20).

 

2) 유대로 가도록 권하는 형제들

(Metavbhqi ejnteu'qen kai; u{page eij" th;n jIoudaivan, i{na kai; oiJ maqhtaiv sou qewrhvsousin sou' ta; e[rga a} poiei'": ; 메타베디 엔튜덴 카이휘파게 에이스 텐 유다이안 히나 카이 호이 마데타이 수 데오레수신…하 포이에이스;당신이 행하는…제자들로 보게 여기를 떠난 유대로 가소서,3절)

메타베디(Metavbhqi ; 떠나)는 메타바이노(metabaivbhqi옮아가다, 자리를 옮기다)의 제2단순과거 명령법으로 그들의 태도가 매우 건방지고 경건치 못했음을 보여 준다(A.T.Robertson). 그들은 5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를 믿지 않았으며 그분의 메시야적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간 행했던 기적들을 그들 자신도 목도했던 터라 절대 부정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뢰하지도 못했으므로 이런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黑崎).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분에게 이리저리 하시도록 명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결정권은 언제든지 그분에게 있다. 데오레수신(qewrhvsousin보게)은 '구경하다, 관찰하다, 깨닫다, 경험하다'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일차적으로는 종교적인 절기에서의 구경꾼들을 가리키므로 '∼을 살펴보다'를 의미하며, '숙고하다, 관찰하다'라는 비유적 의미도 추가로 지닌다. 70인역(LXX)에서 56회 정도 나타나는데, 보는 것을 가리키는 다른 동사들과 함께 자주 쓰인다(W.Michaelis). 본문의 형제들은 예수간 공개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로 명절이 적절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려 준다.

 

3) 예수에 대한 형제들의 불신

(oujde; ga;r oiJ ajdelfoi; aujtou' ejpivsteuon eij" aujtovn.우데 가르 호이 아델포이 아우투 에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5절)

우데(oujde;아니)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속사이며, '∼그리고 ∼아니, ∼도∼아니, ∼도 역시 ∼아니, ∼까지도 ∼아니'를 뜻한다(Arndt-Gingrich).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태도를 예수의 형제들이 취했음을 보여 준다. 예레미야가 타락하기를 기다린 사람들이나 예수를 대적들의 손에 넘겨 준 사람은 모두 가까운 이들이었다. 에피스튜온(ejpivsteuon믿지)은 피스튜오(pistuvw믿다, 신뢰하다)의 미완료 시제이다. 이는 우데(oujde아니)라는 말과 함께 쓰여 그들이 계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불신의 태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J.G.Machen).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적 사명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므로 때로는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A.T.Robertson). 그들이 확신을 가졌었다면 이러한 선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주를 기쁘시게 한다(히11:6)

 

2. 아직 이르지 아니한 주의 때(6-9절)

1) 하나님의 신비 속에 감추인 주의 때

( JO kairo;" oJ ejmo;" ou[pw pavrestin, oJ de; kairo;" oJ uJmevtero" pavntotev ejstin e{toimo". ; 호 카이로스 판토테 에스틴 헤토이모스;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6절)

요한 복음에서는 카이로스(kairo;"때)라는 단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예정된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하는 호라(w}ra때, 시간)가 주로 쓰였다(W.Barclay). 기본적인 의미로 쓰일 때에 이 단어는 장소라든지 상황, 시간 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점이나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에트(t[때)나 모에드(d[wOm때)의 역어로 나타난다(G.Delling).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권위를 공적으로 나타내기에 알맞은 '적절한 기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A.T.Robertson). 최선의 시간, 가장 적절한 기회라는 뜻이다(W.Barclay). 파레스틴(pavrestin이르지)은 오래된 합성 동사로, 인격 존재 및 비인격 존재에 대해 '왔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Arndt-Gingrich). 예수님은 자신이 군중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서야 할 적절한 기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확신하셨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홀로 주장하시며 아무도 관여나 간섭을 할 수 없다(행1:7).

 

2)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는 이유

(ejme; de; misei', o{ti ejgw; marturw' peri; aujtou' o{ti ta; e[rga aujtou' ponhrav ejstin..에메 데 미세이 호티 에고 마르튀로 페리 아우투호티 타 에르가 아유튜 포네라 에스틴;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7절)

미세이(misei;미워하나니)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예수에 대한 세상의 적대적인 태도가 계속적이고 진행적임을 시사한다. 세상은 윤리적인 상호성의 법칙 때문에(Westcott) 자기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지 못하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고 못하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지 못하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고 핍박한다(요15:19). 마르퀴로(marturw'증거함이라)도 현재시제로 예수께서 미움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악에 대해, 불의에 대해, 불경건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시며 계속적으로 증거하고 증인이 되셨다. 이는 세상의 행사에 대해 계속해서 지적하고 책망하셨던 것이며, 주의 이같은 행동은 세상에 속한 자들의 적개심을 노골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黑崎). 포네라(ponhrav악한)는 '악한, 무가치한, 타락한'을 뜻한다. 이는 세상의 상태에 대해 교회와 성도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문구이다.

3) 명절에 올라가지 않으려는 주님

(ejgw; oujk ajnabaivnw eij" th;n eJorth;n tauvthn, o{ti oJ ejmo;" kairo;" ou[pw peplhvrwtai.에고 우크 아나바이노 에이스 텐 헤오르텐 타우텐 호티 호 에모스 카이로스 우포 페플레로타이;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8절)

우크 아나바이노(oujk ajnabaivnw올라가지 아니하노라)는 주께서 형제들의 권유에 따를 뜻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준다. 그분이 중시하신 것은 아버지의 의지뿐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여론 등에도 저혀 개의치 않으셨다. 우(ou)는 알레트(X), D, 아프리카 라틴 사본, 벌게이트역, 서부 콥틱역 등에서 사용되었다(A.T.Robertson). 우포 페플레로타이(ou[pw peplhvrwtai;아직 차지 못하였으니)는 주께서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서 움직이셨음을 알게 한다(W.Barclay). 이 단어는 플레로오(plhrovw시간을 채우다, 마치다, 성취하다)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그분이 무슨 일을 하든 인간의 시간에 맞추지 않았음을 잘 보여 준다. 사람이 작성한 시간들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다(마7:21).

 

3.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심(10-13절)

1) 비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tovte kai; aujto;" ajnevbh, ouj fanerw'" ajlla; J"? ejn kruptw'/. 토테 카이 아우토스 아네베 우 파네로스 알라[호스] 엔 크립토;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10절)

아네베(ajnevbh올라가다)는 아나바이노(anabaivnw올라가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예수께서 얼마나 시간 간격을 두고 가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형제들이 떠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우리는 이 시점을 예수 자신의 때라고 봐야 할 것이다(W.Barclau).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므로 이를 잘 분별하고 활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 파네로스(ouj fanerw'"나타내지 않고)는 형제들의 권유와는 전혀 상반되는 행동이다(A.T.Robertson). 그 분은 인기 스타가 되고자 시도하신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분의 예루살렘행은 계획의 돌연한 변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엔 크립토(ejn kruptw'/비밀히)로 보아 그분이 통상적인 순례자들의 대열에 끼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J.H.Bernard). 이러한 은밀함은 여행 때뿐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 감출 때와 드러내야 할 때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2) 예수에 대한 엇갈린 평가

(kai; goggusmo;" peri; aujtou' h\n polu;" ejn toi'" o[cloi": oiJ me;n e[legon o{ti jAgaqov" ejstin, a[lloi e;? e[legon, Ou[, ajlla; plana'/ to;n o[clon.

카이 공귀스모스 페리 아우투…호티 아가도스에스틴…우 알라 플라나 톤 오클론;예수께 대하여…수군거림이…좋은 사람이라…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2절)

굉귀스모스(goggusmo;"수군거림이)는 이오니아식의 의성어이며(A.T.Robertson), 은연중에 나타나는 불쾌감이라든지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 것 등에 사용된다. 여기서는 '밀담'의 의미로 쓰였다(Arndt-Gingrich). 즉 그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나타내기에는 아직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플라나(plana'미혹하게 한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예수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을 나쁜 길로 이끌며, 그릇되게 인도한다는 가장 악랄한 평가이다. 그들은 예수를 선동자라고 생각했다. 참된 종교에서 사람을 떠나게 만드는 이단자처럼 여겼던 거이다(W.Barclay). 이것은 인간의 무지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게 마련이다.

 

3) 사람을 두려워하는 무리들

(oujdei;" mevntoi parrhsiva/ ejlavlei peri; aujtou' dia; to;n fovbon tw'n jIoudaivwn.우데이스 멘토이 파르레시아 엘랄레이 페리 아우투디아 톤 포본 톤 유다이온;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13절)

멘토이(mevntoi그러나)는 대개 반의적으로 사용되는 불변사이며, '비록∼지라도, 그러나'등을 뜻한다. 파르레시아(parrhsiva;드러나게)는 '숨김 없음, 두려움 없음, 공공연하게'를 의미하는 것이며, 부정사가 문장의 처음에 쓰여 이를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즉 무리 중에는 예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으나 이를 공공연히 말하기에는 아직 미숙하였다. 영적인 성숙함과 신앙적인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공적이 신앙 고백이다. 언로가 막힌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黑崎). 디아 톤 포본(dia; to;n fovbon두려워하므로)은 그들이 수군거리는 직접적인 이유를 언급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다(마10:28).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 장은 초막절과 관련된 7-9장을 시작하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의 적대가 심화되고 예수의 형제들은 참된 믿음에 서지 못할 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때를 준비하고 있다(L.Morris).

 

1. 예수의 불신자 형제들의 간청(1-5절)

1절의 '이 후에'(meta; tau'ta메타 타우타)가 페리에파테이(periepavtei다니시고) 앞에 기록된 것은 B, C, D, Cyr, Chrys 사본 등이며, 이러한 나열은 매우 적절하게 보이다(Schulz, Lachm, Tisch). 1절에는 예수의 사역지로서 유대 지역을 가장 적절한 장소로 간주하고 있다는 주장(B.Crusius)이 있으며, 또한 본 절은 요6장의 진정성을 고발하는 하나의 용례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Schweizer), '유대인들이 적대'라는 주제를 요한이 구성하고 있다는 주장(Bruckner)이 대두되고 있다.

2절의 '가까운지라'는 요한의 창작성 편집의 상용어이다.

3절의 '그 형제들'의 이름은 2장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으며, 마13:55막6:3에 기록된 자들로 그들은 아직 불신자들이었다. 그 이유에 대한 주장들을 살펴보면, 첫째는 당시 유행하던 메시야 사상적 편견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Hengstenberg, Laurentius). 둘째는 여러 기적 사건들을 통해서 벌써 그들도 예수가 메시야일 가능성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가족들 때문에 심한 갈등 속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H.A.W.Meyer).

4절의 형제들이 제기한 내용은 엄격한 의미에서 옳았으며, 메시야적 물음은 갈릴리 안에서 결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Godet). 또한 흑자는 지적하기를, 복음서들 중에 이 부분은 공관복음서의 사단 시험이 이 부분과 병행을 이룬다고 지적하였다. 즉 사단이 예수에게 온 세상의 왕국들을 다 주겠다고 하였듯이, 요6:15에도 이 장면이 언급되고 있으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단의 시험은 요6:31의 기적적인 '만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이처럼, 본 절에서도 예수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의 능력을 보이라는 형제들의 요구는 사단이 예수를 성의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시험한 내용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R.E.Brown).

5절의 '그의 형제들'은 행1:14에 열두 명과 함께 언급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예수의 부활 후에 신자가 된 것 같다(R.E.B개주).

 

2. 형제들의 간청을 거절한 예수(6-9절)

6절의 '때'(kairov"카이로스)라는 명사는 요7:6,8에만 기록되어 있다. 흔히 헬라어에서 '때'라는 단어는 둘로 구분되는데, ①크로노스(crovno")는 역사적인 흐름 및 양적인 시간을 지칭한다(요5:67:33;12:35). ②카이로스(kairov")는 어느 정한 시간을 의미한다(J.Barr). 특히 본 절의 '너희의 때'는 그 형제들이 언제든지 세상과 벗하며 서 있고, 세상에 대하여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아무 때나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언급된 것 같다(R.E.Brown).

7절의 '세상'(oJ kovsmo"호 코스모스)은 믿지 아니하는 세상 속의 도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8절의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란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공개적 선언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음을 함축한다(J.H.Bernard). 9절의 '자기도 올라가시되'란 예수의 공생애 사역장으로서 갈릴리를 떠나심을 의미한다.

 

3. 군중들의 반응(10-13절)

10,11절은 예수가 비밀리에 올라가되, 눅9:51을 통해서 볼 때 아마도 사마리아라는 다른 길을 통해서 갔을 것이다(Henstenberg, Wieseler). 또한 예수는 그의 제자들 없이 홀로 갔을 것이다(De Wette, Krabbe).

12,13절 중 특히 13절은어거스틴 이후로 예수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판단하는 무리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해석되어 왔다(Lucke, Ewald, Baeumlein). 이에 반대하여 호의적이기보다는 적대하는 무리들이라는 주장도 있다(B. Crusius, Bruckner, Tholuck, Hengstenberg).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예수를 불신한 형제들(1-5절)

1절은 예수가 갈릴리에서만 사역하시는 이유를 타나낸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죽이려하기 때문이다. '이 후에'는 정확한 시간을 알수 없는 표현이다(E.A.Blum, L.Morris, M.C.Tenney). 한편 세 개의 미완료 시제 동사들은 예수 사역의 지속적 상황을 나타낸다(L.C.H.Lenski).

2절의 초막절에 대한 언급은 본문의 시기가 초막절인 7월 15일(레23:34신16:13-17) 이전임을 나타내는 좋은 자료이다. 태양력으로 볼 때 요6:4의 유월절(4월)과 본 장의 초막절(10월)은 6개월의 시간적 간격을 갖고 있다(Reynolds, Blum, Hendriksen, L.Morris).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반년 정도 지속된 것을 알게 한다(Blum).

한편 초막절은 출애굽기의 광야 생활을 돌이키며 풍성한 수확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축제로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반드시 올라가야 할 절기이다(신16:16). 초막절은 속죄일 이후 5일째 되는 날에 시작되는데(Tenney, W.Hendriksen), 이 날에는 낮에 실로암의 물을 길어 성전에 뿌리는 행사와 밤에 여자의 뜰에서 횃불을 밝히는 행사가 치뤄진다(W.Hendriksen, H.R.Reynolds). 이는 출애굽 당시의 므리바 반석의 물(출17:1-7)과 불기둥(민14:14)을 나타내며, 속죄일 이후에 구원의 완성을 기뻐하는 의미이다.

3-5절에서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가 예루사렘에 올라 가지 않은 것을 비판하며 유대에서 자신을 나타내어 명성을 얻도록 종용한다. 이 요구는 공관복음에서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인정을 받아 정치적 메시야가 되라는 광야 시험의 반복적 유혹이다(L.Morris, H.R.Reynolds, R.E.Brown).

 

2.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는 이유(6-9절)

6절에 의하면 예수는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한다. 여기서 '때'(kairov"카이로스)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크로노스(crovno"때)와는 달리 '적절한 시기'를 의미한다(L.Morris, Tasker, J.Barr). 따라서 본 절의 때는 가깝게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적절한 시기가 아직은 아님을 나타내며(8-10절, Bengel), 멀게는 십자가의 죽음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Blum, Bengel). 그런 의미에서 볼 때 8절의 '올라간다'는 '지형적 미'와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신학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Blum).

7절의 '세상'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Reynolds). 그 세상은 예수를 미워하는데, 이는 예수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자신들을 정죄하기 때문이다(Blum).

 

3. 비밀스런 예루살렘 상경(10-13절)

10절에서 예수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이는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며(Blum), 또한 자신의 상경이 단순한 순례나 형제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밝혀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기 위한 교훈을 주기에 적절한 시기이므로 올라간다는 것을 나타낸다(L.Morris).

11절에서 갈릴리 순례단에서 예수를 찾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고자 혈안이 되었다. 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적대하는 세력의 대표자로 나타난다(L.Morris).

12절에서 '무리들'은 예수를 좋게 보는 무리와 미혹하는 자로 보는 두 부류로 나뉜다. '수군거리다'는 일반적으로 '불평'을 나타내지만 본 절에서는 친한 사람들간의 조용한 토론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L.Morris).

13절은 예수를 좋게 보는 자들이 견해에 대한 진술로 보여진다(Bengel). 이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호평하는 자들을 위협하고 협박하였으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드러내어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Tenney). 한편 혹자는 당시에 예수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L.Morris), 그리고 아직 산헤드린의 공식 입장이 표명되지 않았기에(Hendriksen) 양측 다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예수의 메시야 됨에 대한 공관복음 견해

 

1. 공관복음에 메시야적 비밀이 있는 이유

공관복음에는 요한복음과는 달러 이른바 메시야적 비밀, 예수의 메시야 됨이 직접적으로 증거되기 보다는 기껏해야 간접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그래서 가령 마가복음에 보면 초자연적인 안식 능력을 가진 분으로 하늘에서나 또는 악령들이 또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야 됨을 고백할 때 제자들에게는 비밀을 지키라 하고 악령들에게는 꾸짖는다.

 

2. 자유주의 학자들의 견해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메세야적 비밀 이론은 순전히 마가의 소설적 창조라고 한다. 그 이유는 역사적 실재의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었고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또한 당시의 사람들도 그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후 교회는 예수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선포하였다. 그래서 이 교회의 신학과, 역사적 실재의 괴리를 메꾸는 것이 마가의 창조적 소설 작성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실제적 메시야였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야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가 비밀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과 악령들은 예수의 메시야 됨을 이해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후 이제 예수의 메시야됨이 드러났으며 이렇게 쓴 것이 마가복음이라고 한다.

 

3. 공관복음에서 메시야적 비밀

그러나 복음서에는 진짜 예수의 진정한 메시야적 비밀이 있다. 이런 것을 간접 기독론에서 이야기했다. 당시 유대교의 주종을 이룬 메시야 사상은 군사적 정복자, 정치적 영웅 메시야 사상인데 반하여 예수는 자신이 그런 메시야가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는 당시 유행하던 메시야 사상을 피라고, 그들의 메시야적 범주들을 피하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 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이 단7장의 예언을 성취하는 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당시 유행하며 주종을 이루던 메시야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예수의 메시야 됨이 감추어진 것 같다. 사실 예수는 구약의 메시야 사상을 재해석함으로 스스로 메시야 됨을 주시하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야 됨을 당시의 주종을 이루는 메시야 사랑으로 해석하려 메시야는 감추어져 있다.

 

 

명절(축제) 때 행하는 의식(7:1-13)

◈ 세계배경 문화사 ◈

 

어느 시대든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는 명절(축제)이 있다. 특히 인간의 생활에서 축제는 빼놓을 수 없는 의식으로, 종교 의식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축제를 통해 화합을 다짐하고, 공동체 의식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종교가 생활화되어 있던 당대인들에게 축제가 갖는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신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고, 이를 위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근동/이집트 :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집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이다"라고 할 만큼 이집트의 문화는 종교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집트의 종교는 경제ㆍ사회ㆍ정치에 있어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어디에나 성대하게 거행되는 종교 행사가 있었다. 매일 아침 신관은 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조달하였다.

이러한 의식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던 것은 나일 강이 범람할 때에 아몬 신께 베풀어졌던 제례였다. 이때가 되면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신관들이 행진하고, 아몬은 카르나크에 있는 신전에서 나와 나일 강의 제방까지 운반된 후 거룩한 나룻배에 태워져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룩소르(Luxor)에 있는 신전에 한달 가까이 머문 후에 다시 거창한 행렬을 이루어 크라나크로 돌아오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서양 / 그리스: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 중 하나는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첫 번째 여름에 제우스(Zeus) 신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열렸던 행사이다.

이 행사는 제우스에 대한 제사로 시작되었는데 제사는 닷새 동안 계속 되었다. 제사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축제가 열렸다. 이때는 원반 던지기, 창 던지기, 레슬링, 권투와 같은 체육 경기와 더불어 음악 연주ㆍ시 낭송ㆍ연극 공연 등 문화 행사도 벌어졌다. 운동 경기의 승리자에게는 올리브나무 가지로 만든 관이 주어졌으며 승리자의 출신 도시 사람들은 성벽을 부수고 그를 맞이하는 환영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B.C.776년에 시작되어 B.C.394년에 폐지될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동양 / 한국: 부여에서는 은정월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나라 안의 큰 축제가 있었으며 이것을 영고(迎鼓)라고 부른다. 영고의 축제가 열리면 부여 사람들은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모여서 즐겼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의식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며 사람들은 축제가 끝날 때까지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겼다.

고구려에서는 음력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가 있었는데, 이것을 동맹(東盟)이라고 하였다. 동맹 행사 중에는 신(神)을 맞아들이는 행사가 있었는데, 나라의 동쪽에서는 신의 모습을 본뜬 나무 조각상을 만들어 신이 앉는 의자에 놓고 제사를 드렸다. 이 동맹(東盟)이라는 축제는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숭배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성경적 접근: 성경은 명절을 절기라 부른다. 구약의 율법에 명시된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비롯 수많은 대ㆍ소 절기들이 있다. 그외에 역사적, 신앙적 사건을 기념하는 수전절 또는 나무드리는 절기 등이 있는데, 요10:22의 수전절은 '하눅카'라고 부르는 성전 해방과 봉헌의 절기이다. 이때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행진을 했으며 그런 연유로 '빛의절기'(Feast of Lights)라고 부르기도 한다.

명절 때 행하는 의식 중 큰 특징은 제사와 축제였다. 며칠간 하나님께 대한 감사제를 드렸으며 선민들은 계층을 초월하여 함께 즐거워했다. 이와 같은 성경의 명절들 특히 의식들은 하나님의 구속 섭리와 그로 인한 분복과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의 영원한 삶을 예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 예수(7:1-13)

 

초막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수는 얼마 동안 유대 땅에는 나가지 않고 갈릴리 지방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였을 때 사람들이 그를 유대의 왕으로 삼으려 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유대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살해하려는 결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 예수를 명예 야심가로 안 형제들

명절에 성인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모두 올라가 이 민족적 축제에 참가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 하지 않자 동생들은 그 예수를 향하여 빈정거렸다. 그들은 예수가 가정 일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런 예수를 이름이나 날려 보려는 명예 야심가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가정에 계신 메시야를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2. 예수를 미혹하는 자로 본 백성들

예루살렘이 모인 군중들의 화제는 모두 예수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예수를 좋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반대로 '백성을 미혹하는 자'로 보는 자들로 많았다. 예수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자들보다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현상이다. 이는 구원받을 자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임에 입증하는 것이다.

 

3. 예수를 죽이려고 한 교권주의자들

초막절을 맞아 유대교 지도자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군중들의 움직임이 곧 그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점점 고조되고(요6:14,15) 있었다. 사실은 예수가 종교적 정치적으로 그들을 위협하는 '뜨거운 감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완전히 제거시켜야 할 하나의 '이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때를 기다리는 그리스도(7:1-13)

 

유월절에서 초막절까지는 약 6개월의시간이 흘러야 한다. 유월절 이후 예수께서는 유대 지방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고 갈릴리 지방에서만 활동하셨다. 이는 '당신의 때', 즉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죽어야 할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으므로 체포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1.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한 일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큰 부담이되었고, 그것은 예수 살해 계획을 진행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고향인 갈릴리 지방에서만 활동하시면서 '당신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 은밀히 예루살렘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오셨다.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당신의 때를 약 6개월앞두고 예루살렘에서 집중적인 전도 활동을 벌이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처음부터 쉽게 노출되어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은밀하게 올라오신 것이다.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이 전도자들의 기본 전략이다(마10:16). 그리고 그가 죽어야 할 때는 아직 아니었던 것이다.

 

3. '때'를 기다리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것은 구속사적인 '때'로서 그가 십자가 위에서 대속 제물로 바쳐지는 때를 가리키고 있다. 그 '때'는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때이고 세상의 역사는 그 '때'를 이루기 위하여 모든 여건을 갖춰가고 있었다. 타락한 대제사장 가야바, 비겁한 총독 빌라도가 준비되었고, 가룟 유다도 그날에 동원되기 위하여 예수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때가 될 유월절은 6개월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예수 교훈의 근원(요7:14-24)

 

◈ 원문강해 ◈

 

절대적인 권위

 

본문에서는 전통 종교의 지도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예수의 교훈의 근원이 어디인가가 언급되어 있다. 그분의 절대적인 권위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1. 예수의 가르침을 기이히 여김(14-18절)

1) 교육받지 못한 예수

(ejqauvmazon ou\n oiJ jIoudai'oi levgonte", Pw'" ou|to" gravmmata oi\den mh; memaqhkwv"_에다우마존 운…포스후토스 그람마타 오이덴 메 메마데코스;기이히 여겨…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15절)

에다우마존(ejqauvmazon기이히 여겨)은 미완료 시제 능동태로서 계속적으로 '기이히 여기고 있었다'는 의미를 지닌 생생한 표현이다(A.T.Robertson). 예수의 성경에 대한 지식은 그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찬사를 보내게 되었다(Arndt-Gingrich). 오이덴(oi\den아느냐)은 제2완료 능동태 직설법인데 현재 의미로 사용되었다. 청중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글을 아신다는 사실과 무엇보다 당시의 대중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학문의 방법론에 정통하셨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Westcott).

메 메다데코스(mh; memaqhkwv"배우지 아니하였거늘)는 만다노(manqavnw배우다)의 완료 능동태 분사이다. 그분은 인정받을 만한 학벌이 없었으며, 랍비들의 신학적인 학파들 중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으셨다(A.T.Robertson). 당시에 신뢰받던 어떤 스승의 제자도 아니셨던 그분은(W.Barclay)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진리로 이끄셨다.

2) 주의 교훈은 아버지의 것

( JH ejmh; didach; oujk e[stin ejmh; ajlla; tou' pevmyantov" me:헤 에메 디다케 우크 에스틴 에메 알라 투 펨프산토스 메;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

디다케(didach;교훈)는 하나의 사실로서의 '가르침'이라든지 '교훈'을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단 1회시60편의제목으로 쓰였다. 여기에서는 예수의 가르침 전체를 지칭하고 있다(K.H.Rengstorf). 우크 에스틴 에메(oujk e[stin ejmh;내 것이 아니요)는 예수가 어느 한 학파에 속하지 않았으며, 독학으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님을 나타낸다(A.T.Robertson). 그분은 유대인들이 설치한 함정에 걸려들지 않으셨다. 만일 주께서 '나는 선생이 필요없다. 나는 나 스스로 배웠다'고 대답하셨다면 대적들에게 빌미를 주제 되었을 것이며, 공격의 강도가 더욱 거세졌을 것이다(W.Barclay). 알라 투 펨프산토스 메(ajlla; tou' pevmyantov" me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는 펨포(pemfantv"보내다)의 역접 접속사 알라(ajlla그러나)와 함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가 쓰인 말이다. 여기에 속격을 취함으로써 이 교훈의 출처를 명확히 함은 물론, 자신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밝혀 주신다. 자신의 것을 전파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다.

 

3)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는 분별함

(ejavn ti" qevlh/ to; qevlhma aujtou' poiei'n, gnwvsetai peri; th'" didach'" povteron ejk tou' qeou' ejstin h] ejgw; ajp j ejmautou' lalw'.

에안 티스 델레 토 델레마 아우투 포이에인 그노세타이 페리 테스 디다케스 포테론 에크 투 데우 에스틴;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알리라, 17절)

에안 티스 델레…포이에인(ejavn ti" qevlh...poiei'n사람이…행하려 하면)은 제1조건문이다. 누가 행하기를 '바란다면'(혹은 좋아한다면, 기뻐한다면)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 그분이 보시기에 만족해하실 만한 도덕적 목적을 가신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Wycliffe).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주의 가르치심, 성경의 교훈은 참되게 이해할 수 있다(W.Barclay). 그노세타이(gnwvsetai알리라)는 기노스코(ginwvskw알리다)의 미래 중간태 직설법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경험적인 지식을 가리킨다(A.T.Robertson). 우리는 행함을 통해서 배운다. 기독교에 있어서 배우는 길은 몸소 실천하는 데 있다(W.Barclay).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힘써야 하겠다(롬12:2)

 

2. 예수에 대한 군중의 적개심(19-21절)

1)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음

(kai; oujdei;" ejx uJmw'n poiei' to;n novmon. tiv me zhtei'te ajpoktei'nai_카이 우데이스 엑스 휘몬 포이에이 톤 노몬 티 메 재테이테 아포크테 아니이;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19절)

우데이스 포이에이(oujdei;" poiei지키는 자가 없도다)는 유대인들의 형식주의적 경건을 지적한 말씀이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는 국민이었으나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의도는 율법의 가르침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불경건의 소치였다(A.T.Robertson). 인생중에 의인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롬3:10), 유대인 중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Arndt-Gingrich). 제테이테 아포크테이나이(zhtei'te ajpoktei'nai죽이려 하는냐)에서 제테이테(zhtei'te)가 제테오(zhtevw찾다)의 현재 직설법이며 아포크테이나이(ajpoktei'nai)가 부정사로 직역하면 '죽이기 위해(계속적으로) 찾는다'라는 뜻이다. 예수께 대한 그들의 적대감이 노골화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단어의 현재적 용법은 그들이 계속적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율법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자랑을 삼아서는 안된다. 그것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2) 예수를 귀신들렸다 함

(ajpekrivqh oJ o[clo", Daimovnion e[cei": tiv" se zhtei' ajpoktei'nai_아페크리데 호 호클로스 다이모니온 에케이스 티스 세 제테이 아포크테이나이;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0절)

호 오클로스(oJ o[clo"무리가)는 유대 종교의 엘리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획책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黑崎) 예루살렘 밖에서 온 사람들로 보는 것이 옳다(A.T.Robertson). 그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 흉중에 들어 있는 악한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Wycliffe). 다이모니온 에케이스(Daimovnion e[cei"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문자적으로는 '당신은 귀신을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다'이며 계속적으로 귀신에게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J.G.Machen).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미쳐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악담이며(A.T.Robertson).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불경스런 말이다. 티스 세(tiv"se누가 당신을)는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적어도 양심의 가책 정도는 느끼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 '누구' 속의 주인공들이 자신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죄는 감춘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주의 행위를 인하여 괴이히 여김

( }En e[rgon ejpoivhsa kai; pavnte" qaumavzete.gps 에르곤 에포이에사 카이 판테스 다우마제테;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21절)

헨 에르곤(En e[rgon;한 가지 일을)은 주께서 안식일에 38년된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A.T.Robertson). 거기 모인 사람들의 고정 관념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그분이 행하신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귀가 닳도록 들어 왔으며, 이것이 유일한 규범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던 터라 예수의 행위가 이상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 단어는 일뿐만 아니라 행위, 행동, 실제적 증거, 직업, 작품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Arndt-Gingrich). 다우마제테(qaumavzete괴이히 여기는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함축한다. 그들은 주를 통해서 나타나는 기적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시는 예수에 대해 불편함 심기를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黑崎).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라 해도 자신들이 고수해 온 전통에서 벗어날 때에는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보수적 태도이다. 엄밀히 말한단면 이것은 경건이 아니다.

 

3. 외모로 판단하는 무리들(22-24절)

1) 조상에게서 난 할례

(oujc o{ti ejk tou' Mwu>sevw" ejsti;n ajll j ejk tw'n patevrwn --- kai; ejn sabbavtw/ peritevmnete a[nqrwpon.우크 호티 에크 투 모위 세오스 에스틴 알르 에크 톤 파테론 카이 엔 삽바토 페리템 네테 안드로폰;(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22절)

알르 에크 톤 파테론(ajll j ejk tw'n patevrwn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은 할례의 기원이 모세보다 훨씬 이전임을 명시하는 말씀이다. 모세가 율법을 하나님께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수하였던 것이고, 할례는 그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사 시행하게 하신 것이다. 페리템네테(peritevmnete할례를 주느니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함축한다. 모세 이전에 나온 이 제도가 안식일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십계명과 비교한다면 할례는 보다 덜 중요한 것이지만 철저히 이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식일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십계명과 비교한다면 할례는 보다 덜 중요한 것이지만 철저히 이행되고 있었다(黑崎). 그럼에도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예수께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었다(Wycliffe). 주께서 지적하고자 하시는 요점이 이것이다.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화시키고 남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마7:1-4)

 

2) 안식일에 병고침은 죄가 아님

(ejmoi; cola'te o{ti o{lon a[nqrwpon uJgih' ejpoivhsa ejn sabbavtw/_에모이 콜라테 호티 홀론 안드로폰 휘기에 에포이에사 엔 삽바토;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23절)

콜라테(cola'te너희가 노여워하느냐)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들의 예수께 대한 적대감이 계속적으로 드러남을 시사한다. 신약에서 본 절에만 나오는 이 단어는 쓸개즙, 쓸개를 뜻하는 콜레(colhv)에서 유래한 고대 단어이며, '성나다, 노하다'를 의미한다(A.T.Robertson). 즉 그들의 감정이 격한 상태에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홀론 안드로폰 휘기에(o{lon a[nqrwpon uJgih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는 예수의 치료가 일반 의사들의 방법과는 전혀 다름을 보여 준다. 그것은 전신의 치유, 더 나아가 전인의 치유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며, 그분의 뜻은 언제든지 인간이 세운 모든 전통이나 가치보다 우선한다. 이것은 교회들을 향한 경고가 된다.

 

3)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함

(mh; krivnete kat j o[yin, ajlla; th;n dikaivan krivsin krivnete.메 크리네테 카트 옵신 알라 텐 디카이안 크리신 크리네테;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24절)

크리네테(krivnete판단하지)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이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대부분 법률 용어로 쓰이고 있다. '나누다'라는 의미에서부터 '결정하다, 판단하다, 비난하다, 단죄하다, 비판하다' 등의 의미이다(F.Buchsel). 비판이나 정죄는 항상 분명한 기준의 토대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그래야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옵신(o[yin외모)은 '외모, 외형, 얼굴'을 가리킨다. 파상적으로 혹은 외면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언제든지 옳지 못하며(A.T.Robertson), 사람의 행위를 주목해야 한다(黑崎). 선행은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사보다 훨씬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법이다. 디카이안(dikaivan공의의)은 '올바른, 의로운' 등을 뜻하는데, 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우와 종교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율법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4절을 기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에서의 대논쟁이 시작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교훈이 본인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고,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나, 유대인들은 인정치 않음으로 율법을 오해하는 자가 되었고,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C.K.Barrett). 특히 본문은 예수는 모세 같은 진정한 선지자인기 또는 거짓 선지자인지에 대한 토론으로 시작되고 있다(W.A.Meeks, Leiden).

 

1. 예수의 자기 위상 점검(14-18절)

14절의 '명절'(mesouvsh"메수세스)이라는 명사는 P66, D, Q 등 사본에 메사주세스(mesazouvsh")로 표기되어 있고, W, it 사본에는 메세스(mevsh")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본문의 명사는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아들 표현들 중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C.K.Barrett).

15절부터 24절은 요5:44이후에 연결시켜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질문이 요5:44에 제기된 '모세의 글'(gravmmata그람마타)에 관계되어 언급된 말들이기 때문이다(J.H.Bernard, R.Bultmann, Scholfen).

16절의 '나를 보내사 이'의 표현은 매우 주의 깊게 선택한 하나님의 지시임을 암시해 준다. 그 이유는 보내는 자는 그의 사신에게 말을 주었고, 그를 통하여 보내는 자의 이름으로 보내는 자의 말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H.A.W. Meyer, Wachter, J.A.Bengel).

17절 상반절은 예수의 요청에 대하여 인간들이 자유스럽게 결정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C.K.Barrett).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것은 윤리적 복종, 즉 교리적 기독교의 예비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R.Bultmann).

18절에서 예수는 단지 자기의 생각을 말하거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도록 사려깊게 응하고 있다. 팔레스틴의 탈굼(Talgum)을 살펴보면, 충성스런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영광(명예)을 깊이 배려하는 자임을 강조하고 있다(Neofiti, M.McNamara).

 

2.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19-24절)

19세의 명령형에 대하여 대부분 사본들은 22절에 동화되어서 '주었다'(devdwka데도카)라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으나, B, D 사본에는 원문 그대로 에도켄(e[dwken의 제1과거형), 즉 '주었다'로 기록되어 있다(C.K.Barrett). 특히 요한은 모세의 율법이 매우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자유의 상징이자, 유대인들의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법률로 묘사하고 있다(H.A.W.Meyer). 그러므로 여기서 모세 율법은 단지 살인만을 금지하거나(Nonnus, Storr, Paulus), 단순히 안식일을 위반하는 정도(Kuinoel, Klee)를 훨씬 넘어선 법률로 묘사되고 있다.

20절에서 무리들이 예수에게 제시한 답변은 사악한 표현이 결코 아니다(Hengstenberg, 초대교회 주석가들).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놀란 이들은 예수가 도덕적 불능성과 어두운 미혹에 빠진 자로, 혹은 마귀에게 빠져 있는 자로 여겼던 것이다(H.A.W.Meyer).

21절의 '괴이히 여기다'(qaumavzete다우마제케)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첫째로 이는 감탄의 표현이다(Ewald). 둘째로 약한 강조를 포함한 비난의 표현이다(Meyer, Nonnus). 셋째로 이는 일종의 경고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Chrysostom). 넷째로 예수의 불유쾌함을 표현하는 구절이다(Grotius).

22절의 '그 이유'(dia; tou'to디아 투토)라는 구문은 21절의 '괴이히 여기다'와 연결된 것(Theophylact, Olshausen, B.Crsius, Beza, Homberg, Kypte)으로 주장하는 부류가 있고, 다른 일부 주석가들은(Goth, Dodd, Zigabenus, Wetstein, Luthardt) 22절의 도입 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23,24절 중 23절의 예수의 질책에 대한 유대인들의 입장은 안식일에 구태여 사람의 몸을 치유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었다(Abrahams).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파송 받은 예수(14-20절)

14,15절에서 예수는 명절 중간에 갑자기 성전에서 가르치신다. 이는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라는 예언의 성취이다(말3:1,L.Morris, C.H.Dodd, Lightfoot). 유대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매우 놀랍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의 가르침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배우지 않았음에도 전문가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R.C.H.Lenski). 랍비가 되려면 일정 기간 학교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데(Reynolds) 예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청중에게 예수가 자격 없는 선생임을 폭로하여 예수의 교훈을 따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경멸의 뜻이 담긴 '이 사람' 이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Lenski, L.Morris). 한편 '글'은 본래는 정관사와 함께 쓰여 '신성한 문자', 즉 성경을 의미한다(딤후3:15). 그러나 관사가 없으면 일반적인 학문적 지식이나 서신(행28:21) 등을 나타낸다(W.Hendriksen). 본 절에서는 무관사로 쓰였음에도 '성경'으로 보는 것은 문맥 자체가 분명히 '성경'을 나타내기 때문이다(L.Morris).

16.17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교훈이 하나님의 교훈임을 언급하여 자신에 대한 불신이 곧 하나님에 대한 불신임을 지적한다(Lenski). 당시는 교훈의 권위를 스승들의 이름에 근거하였으므로 예수는 자신의 교훈의 권위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파송자에게 있다고 하신 것이다(L.Morris). 이에 대하여 예수는 요8:28에서 자신의 교훈이 신적인 교훈임을 나타내고 있다.

18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이로 예수의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예수는 의로운 교사이다.

19,20절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l율법을 받았다고 자랑만 하고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고 지적하신다. 대표적인 예로서 지금도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지적하심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책망하신다(H.R.Reynolds, R.V.G.Tasker, M.C.Tenney). 이에 대해 무리는 예수가 귀신들려 헛소리를 한다면 극구 부인한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무리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면서도 부인하는 것이며(Blum), 두 번째는 지방 순례자 군중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정말로 몰랐기 때문에 하는 소리로 보는 견해이다(L.Morris, Lenski, Hendriksen).

 

2. 안식일 사역에 대한 변호사(21-24절)

21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요5:11) 안식일법을 범한 사건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

22,23절에서 예수는 이에 대하여 할례를 예로 들어 자신의 안식일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신다. 할례는 생후 8일째 되는 남아에게 행하는 종교적 정결 의식인 동시에 언약 의식이다(Blum). 이는 아브라함이 처음 실시하였고(창17:9-14) 모세가 율법으로 명령하였다(레12:3,Tenney). 할례는 안식일에도 시행되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육체의 일부분을 정결케 하는 의식이 안식일법보다 더 중요함을 나타낸다고 해석하신다(Reynolds). 따라서 안식일에 인간의 전존재를 건전하게 치유하는 것은 결코 율법이 정한 안식일법의 근본 정신(L.Morris)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즉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막2:27)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히셨다(Lenski).

24절의 말씀은 초막절 기간의 안식일에 주로 읽혀졌던 '전도서'의 중심 주제를 언급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Bengel). 한편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판단의 대상은 근본적으로는 성경의 내용을 피상적이며 문자적으로만 보는 이해를 가리키고(E.A.Blum), 다음은 성경을 오해한데에서 오는 예수의 안식일 사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리킨다(Hendriksen, L.Morris, Reynolds, Tenney).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내어줌의 형식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요3:16). 이 내어줌의 형식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당신의 사랑의 풍성함으로 인해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까지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보냄의 형식과 내어줌의 형식은 바울에게서도 나오는 데 내어줌의 형식이 나올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다.

 

1. 구원 조건의 만족

이 보냄의 형식과 내어줌의 형식으로 구원의 조건이 만족된다. 즉 구원의 초월성-구원은 초월해서 와야 된다. 인간의 재재의 이 세상 내재의 실제가 구원이 아니다. 이 세상에 내재해 있는 실재는 우리에게 구원의 힘이 없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죄인 자체가 되었고 세상에 있는 피조물도 그 죄의 영향으로 물들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유한성과 결핍성을 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힘이 없다. 이 세상 밖에서 초월자에게서부터 와야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이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지 이 세상 내재에 의한 구원이 아니다.

 

2. 사랑을 드러내기 위함

보냄의 형식이 초월자의 오심을 말한다면 그 내어줌의 형식은 사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 온 자는 완전히 사랑의 덩어리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엡5:2). 그래서 비로소 구원이 발생한다.

 

3. 내어줌의 목적

알들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믿는자마다 명말치 않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내어줌의 형식은 요3:16요일1:14,18에 나오거나 아니면 반영되어 있는데 이 형식이 나올때는 항상 그 주제는 사랑이며 목적은 구원이다. 이것은 바울의 편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의 편지에서도 보냄의 형식이 나오고 내어줌의 형식이 나온다. 내어줌의 형식은 롬8:32갈1:20에 나온다. 또 조금 변형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아닌 그리스도란 칭호와 더불어 롬4:25에서도 나오고 있다. 참으로 예수님은 성도들의 죄를 속하고 구원하시며 세상에서 건지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교훈(7:14-24)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 사회에서 종교가 맡은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종료를 믿는 사람들에게 사회 윤리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미래에 대한 내세관을 약속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 종교 지도자들이 중요한 임무는 종교의 교리(敎理)를 통해 대중들에게 삶의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여 윤택한 생활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근동 / 이집트: 이집트와 근동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신(神)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농부는 열심히 일하고 관리는 정치를 바르게 처리해야 하는 등 '모두 자신이 맡은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생활해야 한다'는 도덕 규범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가 되었다. 이것은 이들을 둘러싼 힘든 자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도 관계가 깊은 사상으로 여겨진다. 당시 사람들은 아직 물리적인 현상과 심리적인 힘에 대한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정신적, 심리적 기능을 심장과 같은 육체의 기관에 귀속시켜 생각하였다. 즉 심장에는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사고(思考)ㆍ공포ㆍ희망 등 지적(知的) 활동에 활력을 제공해 주는 중요한 인자(因子)가 있다고 믿어 인간의 내면 세계를 중요시 여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밑바탕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인간 양심의 산물이 아니라는 종교관이 깊이 배어 있었다. 때문에 사회 구조에 대한 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의문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서양 / 로마 :로마에서 종교 의식은 시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로마의 종교는 다른 민족을 공격하고 식민지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신들도 폭넓게 흡수하여 발전해 나가기도 하였다. 로마가 다른 민족의 신들까지 포함하여 다신 을숭배하게된 바탕에는 '세계 정복 구가를 유지'하며, 왕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로마제국의 의지가 강하에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사람들은 종교의 영향과 함께 철학적인 면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스토아 학파는 만물에 존재하는 세계 이성(자연법)에 의해 만물의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을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엄격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가 신전(神殿), 제물(祭物), 기도 등 관념적인 신의 숭배를 배제한 것도 솔직하고 간소한 초기 로마인들의 생각과 일치하였던 것이다.

 

동양 / 중국 : 당대 동북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는 불교다. 불교의 중심 사상은 윤회(輪廻)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회사상이란 인체(人體)를 구성하고 있던 입자는 물고기나 새에게 먹히는데,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영혼은 자연 속에서 어떤 생물의 몸에 언젠가는 다시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사상에 근거한 내세사상(來世思想)은 대중들에게 현재 위치에서 자족(自足)할 줄 아는 생활 태도를 자연스럽게 인식시키고, 나아가 신분 제도의 강화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공자의 제자였던 맹자(孟子)는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작용에 의하여 덕성(德性)을 높일 수 있는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을 성선설(性善說)이라고 하는데,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성경적 접근 : 성경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본연이요, 지혜요, 행복의 근간임을 성경은 강조한다. 그 다음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4:15)를 종교의 본질적인 기능과 그 교훈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를 믿음으로 인간에게 영생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인 진리와 더불어 인간이 자기자신, 이웃, 자연에 대해 온전히 행하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는 것이다(딤후3:16,17).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스스로 말하는 자(7:14-24)

 

유대인들 중에는 주님이 유명한 율법 학자로부터 수업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고 수근댔다(15절). 그러나 주님은 유명한 랍비들을 '스스로 말하는 자'(18절)라고 지적하셨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않고 스스로 지어낸 그릇된 교훈을 말하는 자들이 많다.

 

1. 인간의 뜻을 가르침

유대 율법학자들은 율법과 그 뜻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한 예로 안식일에 관해 율법에도 없는 조항들을 많이 가르쳤는데 백성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주님을 비장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인간적인 생각이나 규례를 가르치는 자들이 많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라고 주님은 한탄하시고 계신다.

 

2. 성경과 다른 말을 지어냄

스스로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과는 다른 내용을 스스로 꾸며 지어낸다는 뜻이다.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니라'(딤후2:17,18)고 한 것처럼 계시를 또 받았느니, 성경 말씀은 틀렸느니 하면서 자기가 지어낸 말만이 진리인 양 떠드는 자들이 많다. 이들이 바로 이단 사이비들이다.

 

3.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가르침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18절). 당시 랍비들은 대중의 취향에 맞는 가르침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회적인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인간들에게 아부를 한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진리를 올바로 전하지 않는다. 의, 회개, 심판, 고난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기 쉬운 진리는 전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는 법(7:14-24)

 

사람의 배움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가 바로 종교의 가르침이다. 이는 지적인 수학 능력만으로도 깨닫기가 어렵다. 특히 참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본문도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주님과의 논쟁을 다뤘다. 과연 주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는 길은 무엇인가?

 

1. 가르침을 실행해 봄

진리는 논리적으로 습득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그 가르침대로 실행하는 사람만이 체득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알리라'(17절)고 하신다. 그러므로 진리의 결심을 맺는 자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라고 한 것이다. 순종과 실행 없이 사랑과 의의가치를 알 수 있을까? 예수의 모든 교훈은 실행을 요구한다.

 

2. 사심 없는 마음으로 배움

또 진리는 진실하고 순수한 구도심을 지니고 배워야 깨달을 수 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24절)고 하셨다. 인간적인 인습과 사고방식, 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예수의 교훈을 대하는 자들에게는 그 진의와 진가가 숨겨진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라고 했든 영원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3. 사랑의 틀 안에서 접근해야 함

진리란 단순하다.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과 그 결과가 진리의 내용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언약은 결국 '사랑'이라는 가치관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신 행동을 안식일 규례를 범한 것으로 예수를 정죄한 사람들은 예수의 진리 속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리의 얼굴이다. 그 사랑의 틀 안에서 예수의 모든 교훈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질문(요7:25-36)

 

◈ 원문강해 ◈

 

그리스도의 자증

 

본문에서는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무리의 수군거림과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 예수를 잡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적극적인 행동 등에 관해 언급되고 있다.

 

1. 예수의 근원을 안다고 말함(25-27절)

1) 지도자들이 죽이고자 하는 장본인

(tine" ejk tw'n JIerosolumitw'n, Oujc ou|tov" ejstin o}n zhtou'sin ajpoktei'nai_테네스 에크 톤 헤로솔뤼미톤 우크 후토스 에스틴 혼 제투신 아포크테이나이;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5절)

티네스(tine"혹이)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외지에서 온 순례자들과 대조되는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A.T.Robertson). 그들은 타지역에서 온 사람들에 비해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즉 종교 지도자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의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었다(Vincent). 우쿠 후토스 에스틴(Oujc ou|tov" ejstin이는 ∼아니냐)은 긍정적인 답변을 예상한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라 온 사람들보다는 그분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제투신(zhtou'sin저희가 ∼하고자)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복수형으로 쓰여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는 지도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노렸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세상의 불의한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속성이다.

 

2) 드러나게 말하되 반박하지 아니함

(kai; i[de parrhsiva/ lalei' kai; oujde;n aujtw'/ levgousin. mhvpote ajlhqw'" e[gnwsan oiJ a[rconte" o{ti ou|tov" ejstin oJ Cristov"_

카이 이데 파르레시아 랄레이 카이 우덴 아우토 레구신 메포테 알레도스 에그노산 호이 아르콘테스호티 후토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6절)

파르레시아(parrhsiva드러나게)는 예수께서 공공연히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절대자들의 감시의 눈이 많음을 아시면서도 이른 전혀 의식함이 없이 자신의 할 일을 하셨다. 성도에게는 이러한 용기와 담력이 요구된다. 우덴 아우토 레구신(oujde;n aujtw'/ levgousin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은 지도자들의 약삭빠르고 비열한 태도를 꼬집는다.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했으므로 예수를 임의로 다룰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메포테(mhvpote아마)는 의문 불변사로서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하며(A.T.Robertson), '혹시 ∼하지나 않았는지'라는 뜻이나(Arndt-Gingrich), 개혁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그들은 당국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웃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당국자들'(a[rconte"아르콘테스)은 '관원'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요3:112:42;눅23;35;행4:5,8) 흔히 산헤드린 의원들을 가리킨다(J.Bernard). 에그노산(e[gnwsan알았는가)은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의중에 대한 의문을 나타낸다. 어디에나 이같은 구경꾼들은 있게 마련이다.

 

3)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 함

(ajlla; tou'ton oi[damen povqen ejstivn: oJ de; Cristo;" o{tan e[rchtai oujdei;" ginwvskei povqen ejstivn.알라 투톤 오이다멘 포덴 에스틴…호탄 에르케타이;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오실 때에는, 27절)

투톤(tou'ton이 사람이)은 예수를 높여 부르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경멸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한 무명 인사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A.T.Robertson). 오이다멘(oi[damen아노라)은 완료형의 형태를 가졌으나 의미는 현재이다. 사람이나 사람을 아는 것 혹은 사귀어 아는 것, 깨닫거나 경험하는 것등을 가리킨다(Arndt-Gingrich).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의 근원을 알았더라면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 것은 예수의 근원을 알았더라면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 것은 예수의 출신지와 가계 등 인간적인 배경뿐이었으므로 그가 메시야일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고 말았다. 포덴 에스틴(povqen ejstivn어디서 왔는지)은 예수께서 나사렛의 목수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을 나타낸다.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나셨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A.T.Robertson). 천박한 신학 지식이나 고정 관념은 많은 것을 잃게 만든다(黑崎).

 

2.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닌 예수(28-31절)

1) 예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심

(kai; ajp j ejmautou' oujk ejlhvluqa, ajll j e[stin ajlhqino;" oJ pevmya" me, o}n uJmei'" oujk oi[date:

카이 아프 에마우투 우크 엘렐뤼다 알르엘스틴 알레디노스 호 펨프사스 메 혼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8절)

엘렐뤼다(ejmautou온 것이)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 가다)의 제2완료 시제이다. 그는 자신의 근원이 육신적인 가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신다(黑崎). 우리가 알기에도 무관하다고 주장하신다. 우리가 알기에도 그분의 집은 나사렛이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Wycliffe).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요5:307:17;8:28;12:49;14:10 등에서도 언급하셨다. 펨프사스(pevmya"보내신)는 펨포(pevmpw보내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로, 예수께서 보내심을 받은 것을 나타낸다. 참이신 하나님이 그를 보내다. 선민임을 자하는 유대인들에게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uJmei'" oujk

oi[date너희는…알지 못하나)는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었다(W.Barclay).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은 아님을 알아야 하겠다(롬2:28).

 

2) 예수가 그에게서 나심

(ejgw; oi\da aujtovn, o{ti par j aujtou' eijmi kajkei'nov" me ajpevsteilen.에고 오이다 아우톤 호티 파르 아우투 에이미 카케이노스 메 아페스테일레;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29절)

에고 오디 아우톤(ejgw; oi\da aujtovn;나는 아나니)은 영적 분별이 불가능한 유대인들의 상태와는 대조되는 말씀이며(A.T.Robertson), 이 세 개의 단어는 예수의 독특하신 주장을 담고 있다(Bernard). 특히 1인칭단수대명사 예고( ejgw;나는)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이 세상에 나타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지식만이 참되고 확실하다. 파르 아우투 에이미(par j aujtou' eijmi;그에게서 났고)는 하나님이 자신의 출처가 되신다는 대담한 선언이다.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쉬운 말이 아니다. 문자적으로는 '아버지에게서부터 있다'라는 뜻이다. 파르(par j;에게서)란 발생시키거나 지시하는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전치사이며, 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나옴을 말해 준다(Arndt-Gingrich).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n보내셨음이니라)은 단순과거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은 결구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함

( jEzhvtoun ou\n aujto;n piavsai, kai; oujdei;" ejpevbalen ejp j aujto;n th;n cei'ra, o{ti ou[pw ejlhluvqei hJ w{ra aujtou'.에제툰 운 아우톤 피아사이…호티 우포 엘렐뤼데이 헤 호라 아우투;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0절)

에제툰(jEzhvtoun저희가 ∼하고자 하나)은 제테오(jEzhvtevw찾다, 애쓰다)의 미완료 시제능동태로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즉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행동에 옮겼음을 시사한다(A.T.Robertson). 피아사이(piavsai잡고자)는 파아조(piavzw붙잡다, 체포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이다. 그들의 적대감은 공권력을 이용,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우포 엘렐뤼데이(ovu[pw ejlhluvqei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과거 완료 능동태이다. 유대인들의 계획이 좌절된 원인을 요한은 하나님께서 접하신 때와 관련시켰다. 사실상 예수님의 박해와 죽음은 예정된 과정을 따라서 진행되고 있었다(Bernard). 성도는 핍박 중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하게 서기 때문이다.

 

3. 보내신 이에게 돌아가실 예수(32-36절)

1)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실 것임

([Eti crovnon mikro;n meq j uJmw'n eijmi kai; uJpavgw pro;" to;n pevmyantav me.에티크로논 미크론 메드 휘몬 에이미 카이 휘파고 프로스 톤 펨프산타 메;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3절)

에티 크로논 미크론(Eti crovnon mikro;n;조금 더 있다가)에는 아직 되지 않은 시간을 가리켜 사용되는 부사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대격이 함께 쓰였다(Arndt-Gingrich, A.T.Robertson). 주님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이러한 표현을 하셨을 것이다. 휘파고(uJpavgw돌아가겠노라)는 '철수하다'라는 개념을 지닌 단어로 사람 앞에서 떠나가 버리는 것이나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해서 쓰이며, 여기에서처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나타낼 때에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Arndt-Gingrich). 70인역(LXX)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 신약에서는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말로 쓰이며(요8:14,2113:3,33,36;14:4,5,28;15:16;16:4,7,10,17), 모든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우리는 그때를 위해서 빈틈 없이 준비해야 하겠다(하9:27).

 

2) 저희가 찾아도 만날 수 없음

(zhthvsetev me kai; oujc euJrhvsetev e?, kai; o{pou eijmi; ejgw; uJmei'" ouj duvnasqe ejlqei'n.;제테세테 메 카이 우크 휴레세테 메 카이 호푸에이미 에고 휘메이스 우 뒤나스데 엘데인;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34절)

우크 휴레세테 메(oujc euJrhvsetev e만나지 못할 터이요)는 휴리스코(euJrhvsetev찾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는 부정사 우크(oujc못할)와 함께 쓰여 그들이 예수를 찾고자 힘써도 만날 수 없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J.G.Marchen). 예수를 제거하는 일차적 목적은 달성할 수 있겠지만 구원의 갈망이다. 좀더 큰 목표는 좌절될 것임을 시사한다(A.T.Robertson). 기회를 놓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일종의 경고이다(黑崎). 즉 지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J.Bernard). 우 뒤나스데 엘데인(ouj duvnasqe ejlqei'n오지도 못하리라)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제2단순과거 부정사이다. 예수가 계신 곳에 올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선심이라든가 경건이 모두 무익한 것임을 암시한다. 대단히 절망적인 선포이다. 길은 예수밖에 없다(요14:6)

 

3)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무리

(Pou' ou|to" mevllei poreuvesqai o{ti hJmei'" oujc euJrhvsomen aujtovn_ mh; eij" th;n diaspora;n tw'n JEllhvnwn mevllei poreuvesqai kai; didavskein tou;" {Ellhna"_푸 후토스 멜레이 포류에스다이 호티 헤메이스 우크 휴레소멘 아우톤…카이 디다스케인 투스 헬레나스;이 사림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5절)

푸(Pou'어디로)는 장소에 대한 의문 대명사로 '어디, 어디서, 어디로'를 뜻한다. 여기서는 직접 질문을 나타낸다(Arndt-Gingrich). 유대인들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곳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우크 휴레소멘 아우톤(oujc euJrhvsomen;저를 만나지 못하리요)은 휴리스코(euvrsomen만나다, 발견하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을 만날 수 없다는 선포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한편 '헬라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란 구약 시대부터 가나안 땅을 떠나 헬라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런 디아스포란(diaspora;n;흩어져 사는 자들)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본문의 말 속에도 이런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약1:1벧전1:1에 더 언급되어 있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예수의 천한 출생 신분으로 메시야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C.K.Barrett)과 예루살렘 무리들의 회의에 대한 대답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본문 서술의 특징은 예루살렘 대중과의 역사적인 논쟁을 보도하려는 목적보다는 이 세상과 계시자 예수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Wilbert, F.Howard)

 

1. 예수의 출생 기원에 대한 논쟁(25-29절)

25절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요7:12의 큰 무리 중에 예루살렘에 방문한 자를 포함한 특별한 부류들로 추정되며, 특히 초막절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대부분 참여하는 잔치였다(R.E.Brown). 그러나 이들을 절기에 참석하기 위한 순례자들로서 예루살렘에 온 자들과는 달리 예루살렘 주민들을 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Bernard).

26절의 이 유대인들은 묵시문학의 개념을 소중히 하였는데, 메시야적 통치자와 심판이 영원토록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이들에게는 감추어지고, 나머지에게는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에녹서 38:6;제4에스라서 13:51,52). 또한 메시야에 대한 묵시 문학의 사상을 열거한 혹자는 랍비 문헌들 속에는 이 사상이 매우 희미하며, 메시야에 대한 전형적인 랍비들의 이해는 매우 상이하다(E.Sjoberg).

27절의 '이 사람'(ajllav tou'ton알라 투톤)은 멸시를 표현하기 위한 표현은 아니며, 이 말은 호티(o{ti) 절로부터 나와서 주문장의 목적어가 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C.K.Barrett). 메시야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이전에 세상에 대하여 은폐되어 있을 것이라는 신앙은 저스틴(Justine)의 Trypho 8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표현은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랍비들의 일반적인 진술들 속에도 전제되어 있다(Bousset, Gressmann). 특히 요한은 당시 잘 알려진 유대인 신앙을 수용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를 초자연적인 '천적 구원자'라는 요한의 사상에 맞추기 위함이었을 것이다(C.K.Barrett). 특히 메시야의 감춰진 구원에 대한 교리의 진정성을 수렴하는 것은 이에 대한 모든 인간의 판단이 적절치 못하며, 또한 이와 같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적대자들은 이 사실을 수렴할 준비 자세가 안되어 있었다(Lightfoot, R.Bultmann). 한편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육신적 가족과(마13:55,56) 그분의 나사렛에서 사셨다는 것을 알았다(마13:53-57).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출생 장소를 베들레헴으로 알고 있었고(42절;마5:2), 그분의 강림 시기나 방법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것으로 믿었다. 랍비들은 말하기를 '세 가지, 즉 메시야, 하나님의 선물, 저주는 전적으로 예상치 못한 가운데서 온다'라고 했다 한다(Westcott). 구약 외경 제2에스드라서 7:28;13:32;바룩의 예언서 24:3 등에서는 메시야가 감추어진 가운데서 출현하심이 암시되어 있다.

28절의 예수의 가르침은 ① 심문적인 해석(interrogatory interpretation)이라는 주장(Lampe, Semler, Storr, Paulus, Kuinoel), ② 하나의 역설적인 것(ironical one)이라는 주장(Lucke, B.Crusius, Tholuck, Olshausen), ③ '네가 아는대로 생각한다'라는 주장(Hengstenberg)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29절의 '나는 아니니'란 요8:55언급된다. '내가 그에게서 났고'를 문자적으로 보면, '나는 그로부터 출생하였다'이며, 시내 사본에는 '내가 그와 함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예수님의 신적 기원을 암시하며 하나님과 그분 사이의 교제를 함축한다. 이는 여러 사본들(OS,Sah)이 뒷받침하고 있다(Boismard).

 

2. 예수에 대한 체포 시도(30-36절)

30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신적 기원과 사역을 강력히 주장하여 그의 대적자들에게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이 절에서 그들은 분명히 예루살렘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며, 이들의 시도는 32절의 당국자들의 시도와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R.E.Brown).

31절의 '무리'(o[clou오클루)들은 30절에 제시된 '예수를 잡고자 한 저희'에게 강한 반대 세력을 지칭하고 있다(Klotz, Ellendt). 또한 이들은 예수를 하나의 선지자로 이해했든지(Tholuck), 아니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Grotius)로 여겼을 것이나, 이들은 약속된 메시야의 이상적인 기적의 실현으로 이해하였다(Euthymius, Zigabenus).

32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대제사장의 재판정에 속한 주도적인 사제 가문 출신들이었고 사두개파 사람들이었다(Josephus). 요한은 모든 산헤드린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는 이 음모가 매우 초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요한의 태도는 예수 시대의 팔레스틴에 대한 그의 지식에 매우 의심을 품게하고 있다(C.K.Barrett).

33절에서 예수가 자신에 대한 체포 음모에 전혀 동요치 않은 이유는 그의 '때'(kairov"카이로스)가 오기 전에 잠시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주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요12:3513:33;14:19, C.K.Barrett).

34절의 '흩어져 사는 자들(diasporvan디아스포란)이라는 용어는 신성한 땅 밖에서 사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며,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란'이라는 표현이 70인경(LXX)의 사47:6과 시147:2에 묘사되고 있다(R.E.Brown).

'헬라인들을 가르칠 터인가'라는 구문은 예수가 교회라는 조직체를 통해서 흩어진 유다인들에게 가서 이교도와 개종자들에게 가르칠 것이며(C.K.Barrett), 요11:52을 통해서 볼 때, 저자인 요한이 흩어져 사는 자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본 절에서 염두해 두고 있다(C.K.Barrett), 요11:52을 통해서 볼 때, 저자인 요한이 흩어져 사는 자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본 절에서 염두해 두고있다(Hoskyns). 그러나 이 구절을 철저히 거부하는 비평가들의 주장(J.A.T.Robinson, Sanders, Brown)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그리스도의 기원(25-30절)

25절의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순례자로서 예루살렘에 오는 자들과는 달리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로 본다(A.T.Robertson). 이들은 순례자들보다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의 관계를 잘 알고 있어다(W.Hendriksen). 26절의 '당국'(oiJ a[rcone"호이 아르콘테스)이란 '통치자들' 곧 산헤드린 회원들을 지칭한다.

27절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 사상을 알게 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당시 유대에는 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Hendriksen). 첫째는 '그리스도의 기원을 알수 없다'는 메시야관인데, 이는 전설에 기반을 둔 당시의 인기 신학의 한 주장이다(M.C.Tenney). 둘째는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자'라는 견해로서, 이는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입장으로서 지배적인 견해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자식이라는 예수의 기원을 알고 있고, 도한 예수의 고향이 갈릴리 나사렛이란 것도 알기 때문에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참된 기원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가 '하늘로부터 온 자'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으며, 또한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한편 '메시야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메시야의 초월성과 갑작스런 임재를 나타내는데, 이 사상은 단7:139:25;말3:1의 전승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H.R.Reynolds, L.Morris).

28,29절에서 예수는 아이러니컬한 화법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신에 대한 지식이 피상적이고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며 자신의 본질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풍자한다(J.Bengel, E.A.blum, L.Morris). 예수는 자신의 기원과 사역을 신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Blum, Tasker). 그러므로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더라도(요5:38,R.C.H.Lenski) 하나니을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한편 '외쳐 가라사대'는 '격앙되어 크고도 간절한 음성으로 부르짖다'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말씀을 하실 때 사용하시던 말씀이다(요1:157:37;11:43;12:44, L.Morris, J.A.Bengel, E.A.Blum).

30절에서 예수를 잡고자 했던 사람들은 예수에게 임한 하나님의 임재(L.Morris)와 예수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Reynolds) 때문에 예수를 잡지 못하였다. 반면 요한은 이러한 상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대적들에게 넘기울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붙잡히지 않았다고 설명한다(Lenski).

 

2. 예수가 가야 할 곳(31-36절)

31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보다 저급한 표적적 신앙으로서(Lenski), 아직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야로서 자신들의 구주가 되실 것이라는 믿음의 상태에 이르지는 못했다(Blum). 그들은 예수의 엄청난 표적들을 보고 어쩌면 그가 자신들이 대망하던 약속된 지도자, 즉 정처지거 메시야인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Hendriksen, Tenney). 이러한 믿음은 약속된 메시야는 이적을 행하면서 올 것이라는 것(사35:5,6)과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시킬 것이라는 기대(행1:6)에 근거한 것이다(Hendriksen). 하년 '더 많은 표적'은 수량적 의미를 넘어서 질적인 개념으로, 즉 '더 큰 표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Lenski, S.Goebel).

32절에서 여기서 대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전ㆍ현직 대제사장들로서 바리새인들과는 정치적 신학적으로 반목 상태에 있던 자들이다(H.R.Reynolds, L.Morris, Hendriksen, Macgregor). 요한복음에서는 이 두 그룹이 함께 언급되면 그것은 단순한 계층을 지시하지 않고 유대의 최고 법정 기관인 산헤드린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요7:4511:47,57;18:3, Kenski, L.Morris). 어쨌든 적대적 관계에 있던 두 그룹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한편 '하속'들은 단순한 '하인'들이 아니라 성전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성전 경비 대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된다(Tenney, L.Morris, Tasker). 이들이 나선 것은, 메시야 봉기가 발생하면 로마가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게 되고, 그러면 그나마 얻은 정치적 종교적 혜택마저 사라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Tenney). 한편 산헤드린이 경비병들을 동원해 예수를 잡고자 한 사실은 예수에 대한 체포령이 공식적으로 발동된 것을 의미한다(Lenski, Tenney).

33,34절은 예수의 죽음이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Lenski). 예수의 죽음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구원의 은총이 베풀어 질 수 없는 장소로 예수가 떠나간다는 의미이다. 본 절의 의미는 예수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대적들이 예수의 죽음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L.Morris). 반면 실제로 6개월 후면 예수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이 닥쳐 온다(Lenski, Bengel, Reynolds, Hendriksen). 한편 본절은 잠1:24암8:11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며, 이는 장차 예수의 죽음 후에 성취될 것이다(Lenski, Hendriksen, L.Morris).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돌아가다'의 의미가 본서에서는 '하나님 혹은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기억할 때, 예수의 돌아감은 반드시 그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요14:28,L.Morris).

35,36절은 예수의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진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무리들이 예수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Lenski, Hendriksen). 35절의 질문은 예수가 디아스코라 유대인들이나 헬라 이방인들에게 가서 그들의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유대교의 배타성을 잘 보여준다(Tenney, Lenski).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론

 

1. 19세기까지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하등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는 모두 칼케돈 회의에서 공식화된 기독론에 동의하였다. 그들의 중대하고 뿌리 깊은 견해차는 다른점에 있었다. 루터파의 기독론에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특징이 하나있다. 성만찬에서의 육체적 임재에 관한 루터의 교리는 루터파 특유의 속성간의 교류를 도출해 내었다.

그 요지는 그리스도의 양성은 제각기 상대편으로 침투하며 그의 인성은 신성의 속성들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호간의 전달이 예수됨의 지상 생활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같은 루터파 교리에서 일종의 유티케스주의 내지는 그리스도의 양성의 혼합을 간파하였다. 개혁파 신학은 성육신 후에 양성의 제특성이 그리스도의 한 위격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믿는다.

 

2. 19세기

19세기 초엽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연구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때까지의 출발점은 주로 신학적이어서 그 결과 기독론은 신중심적이 있다. 그러나 19세기말이되면서 좀더 가깝게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에서 출발하면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점차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기독론의 제2기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새로운 관점은 인간학적이었고, 결과는 인간중심적인 기독론이었다. 술라이에르마터는 새로운 그리스도를 인성이 이상적 완성의 단계에까지 승화된 새로운 피조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존재라고는 거의 말할 수 없다. 헤겔의 그리스도관을 그의 범신론적 사상 체계의 일부였다. 말씀이 육신이되었다는 구절을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성 속에 구체화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성육신은 사실상 신인간의 일체성의 표현이었다. 슐라이에르바허를 재외하고 현대 신학에 가장 거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리츨이었다. 그의 기독론의 출발점은 그리스도의 위격보다는 사역에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 위격의 존엄성을 결정짓는다.

 

 

사람들이 죽이고자 하는 사람의 죄(7:25-36)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 사회에서는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이 있는 반면, 그와는 반대로 사회 성원들에게 비난받고 배척당하는 행위가 있다.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죄라고 말한다. 죄에 대한 규정을 정해 놓고 이를 어긴 사람에게는 그에 해당하는 죄가를 치루도록 법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근동 / 메소포타이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법제 조직이 발달되었다. 바벨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은 즉위한 지 38년이 되는 해에 법전(法典)을 만들어 반포하고, 그 내용을 새긴 비석을 주요 도시의 신전 입구에 세워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렸다. 함무라비 왕의 법전은 죄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으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처럼 보복을 원칙으로 하여 형법, 민법, 상법상의 여러 방면의 법에 걸쳐 그 내용을 규정하였다. 이렇게 죄에 대한 벌이 엄격하게 적용되면서 바벨로니아에서는 작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조차 사형에 처해지는 경구가 많았다. 법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남의 불(火)을 훔친 자는 화형(火刑)을 시킨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한 사람은 그 훔친 물건의 10배, 20배, 30배를 갚거나 그렇지 못한 때는 사형(死刑)을 시키라고 적어 놓았다. 또 술을 파는 사람이 술에 물을 섞어서 속여 팔았다면 그 사람 역시 사형을 시킨다. 그리고 성직자로서 술을 마신 자에게는 화형(火刑)을 집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부모를 때린 자식은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한 자는 그와 똑같이 자기의 눈을 상하게 만들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의 딸을 때려서 유산시키면 그 자신의 딸은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만약 목수가 집을 짓다가 집이 무너져 집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이 죽어야 하는 보복적 원칙이 적용되었다.

 

서양 / 희랍: 그리이스와 로마에서 절도나 살이 등의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행동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은 도시에서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반역의 행위를 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동양 / 한국: 고조선에는 8항목의 법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 가지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고조선의 법률에 의하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에는 노비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만약에 남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곡물로써 보상하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고조선 사회는 개인의 생명과 사유 재산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침해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도록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여 역시 엄격한 법률이 있었는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있으면 당사자를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은 노비로 삼았다.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12배로 갚도록 했다. 그리고 간음하고 투기할 경우 사형에 처했다. 특히 부인이 간음하면서 더욱 증오하여 사형시켜 시체를 수도의 남산에 갖다 버리고, 시체가 썩은 후에 부인의 친정에서 그것을 찾아가려 하면 소나 말을 가져와야 시체를 주었다.

 

성경적 접근: 인간 사회에서 죽음으로 응징하고 그 대응되어야 하는 죄는 일찍이 구약성경에 다양하게 명시되있다. 범죄인을 죽임으로써 사회에 경각심을 심어주고, 선민 공동체가 죄로 오염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죄 중에 가장 민감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범죄였다. 우상 숭배, 이방신 숭배, 무당섬기는 죄는 돌로 쳐서 죽였으며, 화형을 시키기도 했다(레24:14신17:6). 또 사회적 범죄로는 유부녀와의 간음, 강간, 근친상간, 수간(獸姦) 그리고 고의로 살인한 죄는 사형을 시켰고, 부모에 대한 패륜적인 죄도 공개 사형을 시켰다(신2:18). 신약성경에도 그와 같은 맥락을 따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롬1:32)를 사도가 언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죄지은 자는 죽음의 형벌을 당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교훈해 준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인간의 무지(7:25-36)

 

사실임이 극명하게 드러났음에도 이를 인정치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깨달음이 없는 무지한 사람이든가 겸손에 관해 배워야 할 교만한 사람이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주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도 그분 앞에 엎드리지 아니한 유대인들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무지를 보게 된다.

 

1. 진리에 대한 무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최고를 소유하는 일이다. 과학이나, 철학, 그 밖에 다른 어떤 지식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진리이신 예수께서 자신들 앞에 서 계셨음에도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않았다. 인간은 전반적으로 진리에 대한 무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파스칼은 진실은 항상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이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적다고 했다.

 

2. 주의 뜻에 대한 무지

일꾼이 주인의 마음에 들고 그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먼저 그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힘써서 일한다 하더라도 주인의 뜻을 모르면 시간만 낭비하게 되기가 쉽다. 열심히 산다고 모두가 잘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그분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조차도 이에 대해 무지했던 탓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되었다. 주의 뜻에 무지하면 인생은 실패한다.

 

3. 하나님의 때에 대한 무지

모든 일에도 때가 있으며 때와 기한을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없어서 인생을 실패한다. 하나님의 때를 알아야 기회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 때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를 배척하는 엄청난 오류를 결단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를 분별할 줄 모르면 누구라도 부끄러움을 당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하나님의 시간(7:25-36)

 

사람은 단 5분후에일어날 일조차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시대나 문명의 최첨단 시대라는 현재나 이 사살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유대인들조차도 주께서 말씀하시는 때에 관해 무지한 상태였다.

 

1.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

때와 기한은 인간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작정되어진다.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세계의 존폐와 나라들의 흥망 성쇠는 물론이고 개인의 수한까지도 임의로 주관하신다. 성경에 나타나는 날이나 때, 시간은 모두가 그분의 주권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잡는 데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속들이 잡고자 출동하였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인간이 침범할 수는 없었다.

 

2. 인간 의지의 전적 배제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배제된 특별한 때이다. 유대인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조금'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는 그들이 임의로 정하는 개인 생활의 시간표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시간표가 이미 작성되어 있었음에도 선지자들의 말을 믿기에 더딘 유대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밝은 자라야 그분의 시간표를 읽을 수 있다.

 

3. 일하기에 충분한 시간

주께서 말씀하신 '조금 더 있다가'는 일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일은 중도에 멈춰지는 법이 없다. 그분이 작정하셨다면 완전히 성취된다. 주께서 일하신 기간은 아주 짧았다. 하지만 주의 뜻은 온전히 이루어졌으며,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었다. 우리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그분이 맡겨 주신 일들을 넉넉히 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목마른 자를 위한 생수의 장(요7:37-44)

 

◈ 원문강해 ◈

 

갈증의 영원한 해결

 

본문에서는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복음서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는 생수의 강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갈등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과제이다.

 

1. 명절 끝날의 주의 설교(37,38절)

1) 명절 끝날에 서서 외치심

( jEn de; th'/ ejscavth/ hJmevra/ th'/ megavlh/ th'" eJorth'" eiJsthvkei oJ jIhsou'" kai; e[kraxen levgwn엔 데 테 에슼테 헤메라 테 메갈레 테스 헤오르테스 헤이스테케이 호 예수스 카이 에크락센레곤;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37a절)

헤메라 테 메갈레(hJmevra/ th'/ megavlh큰 날에)는 칠 일 동안의 초막절(레23:33-36민29:12-34) 행사를 끝내고 제8일에 안식일처럼 성회로 모였음을 나타낸다(민33:36). 이 초막절은 출애굽 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광야 여정 중 돌보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다. 이를 '큰 날'이라 지칭한 것은 아마도 광야의 여정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들어온 기념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Lange). 헤이스테케이(eiJsthvkei서서)는 히스테미(i{sthmi서다)의 과거 완료 능동태이다. 예수께서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으나 공공연히 활동하셨음을 알게 한다. 목을 노리는 대적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에크락센(e[kraxen외쳐)은 크라조(kravzw외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로 그분이 갑자기 외치신 것을 묘사한다(A.T.Robertson). 중요한 일은 뒤로 미루는 게 아니다.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나 현재임을 유념해야 하겠다.

 

2) 목마른 자들을 부르심

( jEavn ti" diya'/ ejrcevsqw prov" me kai; pinevtw.에안 티스 딥사 에르케스도 프로스 메 카이 피네토;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7b절)

티스(ti"누구든지)는 인종이라든지 국적, 피부 색깔,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 사람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벽들을 원천적으로 뛰어넘는 선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차별하는 법이 없으시다. 그분의 부름시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므로 누구라도 은혜의 향연에 참여할 수 있다. 딥사(diya;목마르거든)는 디파오(difavw목마르다)의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계속적으로 목이 마른 상태를 시사한다(J.G.Machen). 목마른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충은 매우 큰 것이며, 물만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본 절의 주께서 마시라고 언급한 물은 육신을 충족시키는 음료가 아니다. 즉 생명의 성령을 가리킨다. 인생의 갈증은 성령의 역사와 충만을 통해서만 해갈될 수 있다.

에르케스도(ejrcevsqw와서)와 피네토(evtw마시라)는 모두 현재 명령으로 언제든지 와서 마시라는 지속성을 함축한다. 주께로 나와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음을 묘사한다. 누구라도 지금 나아와 끝 없이 주시는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있다.

 

3) 주를 믿는 자의 축복

(oJ pisteuvwn eij" ejmev, kaqw;" ei\pen hJ grafhv, potamoi; ejk th'" koiliva" aujtou' rJeuvsousin u{dato" zw'nto".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포타모이 에크 테스 코일리아스 아우투 류수신 휘다토스 존토수;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38절)

피스튜온(pisteuvwn믿는)은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믿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서 그분을 영접하고 계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W.Barclay). 예수에 관해 안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지적인 앎은 여하한 경우에도 믿음을 대신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리스도라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터에 연결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직접적인 인용 구절은 없으나 비슷한 내용으로 사55:158:11;8;47:1;욜3:18슥13:114:8 등이 있고,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사28:16로 주장하기도 한다. 포타모이(potamoi강)는 본문에서 흐르는 많은 양의 생명의 물을 가리킨다(Arndt-Gingrich). 성령이 역사하는 사람 안에서 흘러나는 생수이다(Smith-Lee). 여기서 새로운 삶에 대한 풍요로운 약속이 성령과 관련이 있음을 유념해야 하겠다(Wycliffe). 류수신(rJeuvsousin흘러나리라)은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성령의 역사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 외부로까지 나타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예수를 통해서만 흘러나온다.

 

2. 무리의 엇갈린 반응(39-41절)

1) 믿는 자가 받게 될 성령

( tou'to de; ei\pen peri; tou' pneuvmato" o} e[mellon lambavnein oiJ pisteuvsante" eij" aujtovn: ou[pw ga;r h\n pneu'ma, o{ti jIhsou'" oujdevpw ejdoxavsqh.투토 데 에이펜 페리 투 프류마토스 호 에멜론 람바네인 호이 피스튜산테스 에이스 아우톤;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39절)

페리 투 프뉴마토스(peri; tou' pneuvmato"성령을 가리켜)는 직역하면 '성령에 대하여' 혹은 '성령에 대하여' 혹은 '성령에 관련하여'가 된다(Arndt-Gingrich). 여기서 '성령'은 오순절에 임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아직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이었다(Wycliffe). 에멜론 람바네인(e[mellon lambavnein받을)은 멜로(mellon∼하려고 하다, ∼할 작정이다)의 미완료 능동태가 람바노(bavnein취하다, 받다)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를 수반하여 사용되었다. 이 경우의 의미는 '바야흐로∼받으려고 하다, ∼받으려고 ∼할 작정이다, ∼하게 되어 있다' 등이 된다(Arndt-Gingrich).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다(A.T.Robertson). 또한 믿는 자들,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게 될 놀라운 변화를 예기케 한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케 되며, 항상 만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W.Barclay).

 

2) 예수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 jEk tou' o[clou ou\n ajkouvsante" tw'n lovgwn touvtwn e[legon, Ou|tov" ejstin ajlhqw'" oJ profhvth":에크 투 오클루 운 아쿠산테스톤 로곤 투톤 엘레곤 후토스 에스틴 dkffpehytm 호 프로페테스;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거자라 하며, 40절)

에크 투 오클루(jEk tou' o[clou무리 중에서)는 예수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일단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동일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항상 양분되게 마련이다. 이 헬라어 관용구가 종종 사용되고 있다(A.T.Robertson). 아쿠산테스(ajkouvsante"들은)는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본 절에서 예수가 명절 끝 날에 행하신 설교를 경청한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한분의 설교를 들었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귀고 듣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호 프로페테스(oJ profhvth"그 선지자)에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거나 해석하는 사람, 특별한 준비와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람 등을 지칭한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 예언의 능을 받은 사람들이 이 이름으로 불러왔다(Arndt-Gingrich). 그런데 본문에서는 호(oJ 그)가 언급되어 모세가 구약에서 예언한 선지자를 지칭하는 것 같다(신18:15).

 

3) 출신 지역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oiJ de; e[legon, Mh; ga;r ejk th'" Galilaiva" oJ Cristo;" e[rcetai_호이 데 엘레곤메 가르 에크 테스 갈리라이아스 호 크리스토스 에르케타이;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1절)

메(Mh;)는 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이다. 의지라든지, 소원, 의심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며, 우(ouj)와는 달리 어떤 사실보다는 그 개념으로 부정한다(Arndt-Gingrich).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하는 질문에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A.T.Robertson). 예수를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즉시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그의 향리에서 나시게 될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어디에서 출생하셨는지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무지라 하겠다.

에르케타이(e[rcetai나오겠느냐)는 인격적 존재의 나타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신적 존재의 임재를 표현할 때에도 자주 사용된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를 갈릴리 출신으로만 알고 있었으므로 그분을 통해 나타나는 신적 역사들을 보면서도 끝내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3. 예수로 인한 무리의 쟁론(42-44절)

1) 구약성서에 대한 이해

(oujc hJ grafh; ei\pen o{ti ejk tou' spevrmato" Dauivd, kai; ajpo; Bhqlevem우크 헤그라페 에이펜 호티 에크 투 스페르마토스 다위드 카이 아포 베들레엠;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베들레헴에서, 42절)

그라페(grafh; 성경)는 문자적으로는 '기록물'을 의미하는데, 신약성서에서는 전적으로 성서를 가리켜 사용되었다(Arndt-Gingrich). 70인역(LXX)에서도 때때로 '거룩한 성경'을 암시한다(G.Schrenk).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거부 이유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탄생의 장소(미5:27)와 불일치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셨으나(마2:23),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즉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이런 그분의 출생에 대해 유대인들이 정확한 지식이 가지지 못함에서 빚어진 결과이다(A.T.Robertson). 에크 투 스페르마토스(ejk tou' spevrmato"씨로)는 '다윗의 후손, 자손'을 의미한다. 성경은 한결같이 이에 관해 언급하였으므로 다른 가계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몇 가지 징후만 보고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로 말미암은 쟁론

(scivsma ou\n ejgevneto ejn tw'/ o[clw/ di j aujtovn.

스키스마 운 에게네토 엔 토 오클로 디 아우톤;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34절)

스키스마(scivsma쟁론이)는 '찢어지기, 갈라지기, 분열, 불화'를 뜻한다(Arndt-Gingrich). 의견의 차이나 논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 단어이다. 분열은 교리상의 차이라든지 서로

들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데서 생겨 날 수 있다. 에게네토(ejgevneto되니)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으로 개시를 나타낸다. 하나님 안의 평화와 성령을 통한 일치가 없는 곳에서는 이같은 일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결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분은 우리가 무릎 끓고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무미건조한 신학 논쟁에만 정열을 쏟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W.Barclay). 지금 교회 내에 잔존하고 있는 분쟁들도 마찬가지다.

 

3) 예수께 손을 대지 못함

(tine;" de; h[qelon ejx aujtw'n piavsai aujtovn, ajll j oujdei;" ejpevbalen ejp j aujto;n ta;" cei'ra". 티네스 데 에델론 엑스 아우톤 피아사이 아우톤 알르 우데이스 에페발렌 에프 아우톤 타스 케이라스;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4절)

에델론 파아사이(h[qelon piavsai잡고자하는)는 델로(qevlw원하다)의 미완료 능동태와 피아조(piavzw붙잡다, 체포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이다. 직역하면 '체포하기를 계속적으로 원하는 혹은 체포하기를 계속적으로 기뻐하는'이 된다(A.T.Robertson). 예수를 제거하려는 적대자들의 음모가 계속 진행 중임을 시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포기한 것도 아니며, 사단의 이같은 음모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잇다. 에페발렌(ejpevbalen내는)은 에피발로(ejpiavllw없다, 손을 대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잡고자 찾는 예수께서 가까이 계셨음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黑崎).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예수가 성전의 초막절 의식의 일부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새로운 문제로 부상시킴과 하나님의 선물에 대하여 선포한 내용을 담고 있다(C.K.Barrett).

 

1. 불쌍한 영혼을 초대하는 예수(37-39절)

37절의 '명절 끝날 곧 큰 날…흘러나리라'이란 초막절의 제7일로 보기도 하고(신16:13,15겔45:26), 제8일로 간주하기도 한다(레23:34-36민29:12-39제2마카비서 10:6). 버나드(J.H.Bernard)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 초막절에는 실로암 못에서 떠와 황금 그릇에 채워진 물을 제사장들이 부어드리는 의식을 행사했는데, 아마 다음 추수기에 풍성한 소득을 위해 풍부한 비의 공급을 상징하는 뜻에서 행해진 듯하다(J.H.Bernard). 예수님은 이런 것을 배경으로 당신의 생수 공급을 교훈하셨다.

38절의 '성경에 이름과 같이'의 구절은 목마른 자에 대한 초대, 생명수가 신자의 배에서 흘러나옴, 생명수가 그리스도의 배에서 흘러나옴 등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은 구약성경과 유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수의 근원지로 묘사되어 있다(C.K.Barrett). 특히 초막절에 읽혀진 예언서인 하프타로트(Haphtaroth) 중 일부분인 슥 14장에잘드러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Abrahams, H.J.Thackeray). 또한 감사의 시편, 즉 1QH 8:16에는 '생수의 샘'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이는 일반적인 유다의 개념이다(Brown).

39절의 '그를 믿는 자의'는 현재 시제보다는 부정과거로 해석해야 하며(Bodmer, Paryri), 이 구절은 편집자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의 산물이다. 38절은 편집자가의 작업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보는자도 있다(R.Bultmann).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는 표현에 대하여 일부 사본과 역본에는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아니했다', 또는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성령이 아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하여 새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지 않으심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피스튜산테스(pisteuvsante"말씀하신 것이라)는 부정과거 분사로서 에이펜(ei[pen말했다)과 잘 어울리며, 콥티MSS에서는 이 '믿는 자'가 교회 시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하였다(G.R.Beasley-Murray).

 

2. 많은 사람들의 논쟁(40-44절)

40절의 '그 선지자'란 신18:15,18에 예시된 대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볼 수도 있는데 쿰란 공동체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란 마지막 구원시대에 속하는 인물로서 암시된다. 쿰란 문서(IQS9:11)에는 '선지자와 아론과 이스라엘의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올 때까지'란 말이 언급되었다. 쿰란 문서에는 그 선지자와 메시야를 구분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흐릿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혹자는 사복음서나 본절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와는 개념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메시야라는 개념으로 바뀜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J.L.Marthn)

41,42절의 메시야 탄생 장소에 대하여 복음서 저자들은 잘 알지 못했거나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사실에 대해 알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R.Bultmann). '어찌'(mhv gavr메 가르), '그러므로'(gavr가르)는 부정직한 응답을 바라는 '아니다'(mh;메)를 강조하기 위한 접속사이다. 메시야 탄생지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면, 첫째로 미5:2에는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 구절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인정받고 있으며(C.K.Barrett). 이에 대한 랍비 문학은 후대에도 메시야의 탄생지에 대하여 이 구절을 무시하고 있다(Bonsirren). 이에 대하여 쿰란 제4동굴의 종말론적 미드라쉬인 '4Q Flor'와 삼하7:11-14에서 찾아 볼 수 있다(Fitzmyer). 그러나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출생지를 잘 몰랐으며, 그가 갈릴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이 그의 출생지로 여긴 것이라고 보는 자들이 있다(G.Vermes). 이처럼 편견에 집착하는 교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믿음을 통해서 접근하는데 있어서 장해 요소가 되는 것이다(R.Bultmann).

43,44절에서 '그러나'(allj알르)는 본문의 30절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신적인 보호가 지금 동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Euthymius, Zigabenus). '대다'(ejpebalen에페발렌)에서 군중들은 소수의 관원들의 저지를 받고 있었거나 혹은 그들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을 것이다(De Wette, Luthardt). 그리고 예수로 인하여 군중들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예수의 계시의 말씀이 더욱 비평적인 기능을 수행케 하였던 원인이 되었다(Schnackenburg).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예수와 생수의 강(37-39절)

37-38절에서 예수는 초막절의 두 가지 행사(2절) 중에서, 실로암 못(혹은 기혼샘)의 물을 길어 성전에 뿌리는 행사를 상징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메시야성을 밝히신다. 이 상징은 슥13:114:8,16-19에 의해 메시야를 기대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Blum, Tasker). 그런데 예수는 이 상징을 끌어 들여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이는 '종말의 구원은 출애굽과 같다'는 유대인의 사고 방식을 동원해 예수 자신을 통해 생수, 즉 성령을 공급하여 자신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얻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가 곧 메시야라는 주장으로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시46:4,5잠5:15사44:355:1;58:11;겔47:1-11,욜3:18슥13:114:8, Tasker, Hendriksen). 한편 '명절 끝날 곧 큰 날'은 초막 절기가 7일 동안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제7일로 여겨질 수 있다(민29:12신16:13,Bl-um). 그러나 본 절은 제8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질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또 다른 구절들이 초막절에 이어지는 제8일을 '성회'로 지켜야 한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며(레23:36민29:35느8:18), 또한 제2마카비서10:6과 요세푸스(Josepjus)의 저술에 의해 제8일을 성회로 지키는 관습이 있었음을 볼 때, 제8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예수가 '내가 생수의 근원이다'라고 외친 시기가 물긷는 행사가 끝난 후라는 점에서 더욱 확실하다(C.K.Barrett, Lenski, Hendriksen). 그리고 '성경에 이름과 같이'에서 성경이란 어떤 특정 구절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성령을 물로 비유한 모든 성경 구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사12:332:15;44:3;겔39:29욜2:28-32,Tenney, L.Morris). 또한 '그 배'는 29절과 연관지어 볼 때 성도들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생수의 궁극적인 근원은 예수이지만 성도들은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 그들이 전인 격 속에 성령이 내주하며, 그로 인해 성령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L.Morris, C.K.Barrett, R.Y.G.Tasker).

39절은 예수가 주는 '생수'가 '성령의 내주하심'이라는 설명 구절이다(E.A.Blum). '영광'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비하를 통해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것으로서, 본 저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의 죽음으로 율법 시대가 마감되고 성령(은혜) 시대가 시작될 것을 나타낸다(Teney).

 

2. 재개된 그리스도 논쟁(40-44절)

40-42절에서는 '그 선지자'와 예수를 계속하여 비교하여 예수를 그 선지자로 보려는 시도들에 대해 언급한다(요1:21,256:14, L.Morris). 많은 이적들을 보고도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더 자들이 생수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는 예수를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신18:15), 즉 메시야(그리스도)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진정한 선지자는 이적이 아니라 말씀으로 백성들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선지자 의식에 근거한 이해 때문이다(L.Morris). 그러나 이 주중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인 것을 들어 메시야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의 구약적 지식에 의하면 메시야는 다윗의 가문과 다윗의 동네에서 와야 한다(삼상16:1,4삼하7:12시89:3사11:1렘23:5미5:2).

그러나 예수는 이미 이 조건들 모두 충족시켰지만(마1:1-172:1-6), 반대자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E.A.Blum, R.C.H.Lenski, L.Morris).

한편 요한은 예수의 베들레헴 출생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A.Bengel). 즉 요한은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나단의 신탁'(삼하7:12-16)의 내용을 이용해 거꾸로 예수가 바로 그 신탁의 성취자임을 나타내므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43절의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은 예수에 대한 의견이 갈려 서로 쟁론하게 되었다. 본 절은 예수를 메시야로 보는 무리와 메시야가 아니라고 보는 무리들로 구분된다. 하지만 27절도 포함한다면 메시야의 근원을 알 수 없다는 무리도 쟁론에 참가하였을 것이다(Lenski).

44절의 '쟁론(scivsma스키스마)은 단순한 논쟁을 넘어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완전히 분열된 상태로서 분파와 분당이 형성된 것과 같은 상황을 가리킨다(Hendriksen, L.Morris). 이는 '내가 온 것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고…불화하게 하려 함이라'(마10:34,35)라는 예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나마 성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성경은 성령의 모든 사역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속의 중보자가 될 뿐만 아니라 창조의 중개자도 되듯이 성령도 구속의 사역뿐만 아니라 창조의 사역에서도 활동한다.

 

1. 성령의 일반 사역

구약성경에서는 신약성경만큼 삼위의 구분이 명확하게 계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용어는 구약에서 항상 인격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인격적인 개념이 나타나는 경우에도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을 지칭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숨결을 나타내기 위해서 (욥32:8시33:6), 어떤 경우에는 생명의 힘, 즉 피조물들이 살아가게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원리를 독특한 방식으로 지칭할 때 사용되고 있다. 피조물 안에 거하며 그 존재 기반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며 피조물은 하나님과 결합하게 한다(욥32:833:4;34:14,15;사42:5).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이 단지 능력뿐만 아니라 인격이라는 것이 나타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부여하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완성시킨다(욥33:4시104:29,30사42:5)

 

2.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의 관계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일반 사역을 통해 성령은 유기체적인 윤리적인 삶을 시작하게 하고 유지하고 강화하고 인도한다. 성령은 이러한 일을 상이한 방식으로 대상에 맞게 수행하신다. 성령의 특별사역도 이와 유사하다. 성령은 구속의 영역에서도 신생을 일으키고 이를 열매맺게 하며, 발전하도록 인도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도달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영역에서의 성령의 사역과 구속 혹은 재창조의 영역에서의 성령의 사역간에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창조의 영역에서는 자연적 창조의 새영을 시작하고 유지키시고 발전시키고 인도한다. 구속의 영역에서는 성령은 위로부터 출생하고 양육되며 위에서 완성될 새생명, 즉 지장에서 살지만 원리상 창조적 생명을 시작시키고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며 인도한다.

 

 

종교에서 경전이란(7:37-44)

◈ 세계배경 문화사 ◈

 

경전이란 말은 성전(聖典)과 유사한 말로 주로 성인의 말등을 기록한 책이다. 또한 종교에서는 각 종교의 창시자의 교리 등을 기록한 것을 일컫는다. 이런 경전들은 대부분 각 종교에서 신성시하였으며, 신도들에게는 필독서로 읽혀 왔다.

 

근동 / 이슬람교: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은 쿠르안 또는 쿠란으로도 불리고 있다. 독송(讀誦)형태로 되어 있는 코란은 "신(알라)이 20여 년에 걸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멧에게 하늘에 있는 '계전'을 읽어 들려 주었다는 계시를 사람들이 기억했다가 후에 집록"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코란은 총 114장과 6,342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코란의 편집을 보면 기록한 연대의 역순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제1자은 개경장으로 코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장이다. 개경장은 "찬미(讚美)의 장, 치유(治癒)의 장, 보호(保護)의 장, 충족의 장, 근간(根幹)의 장"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코란에는 일관된 줄거리가 없다. 왜냐하면 "첫째, 신이 대부분 1인칭으로 잡다한 문제에 관해 그때 그때 말해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장 속에서도 화제는 여러 가지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아라비아어의 한 자, 한 구절이 그대로 '신의 말씀'이라고 하여 인간의 말과 엄격히 구별하여 문학적 작위(作爲)는 모두 배제되고 그대로 집록된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구성 때문에 코란은 읽기 어렵다는 인식을 주고 있는 것이다.

메카 시대의 코란은 당시 샤먼들이 즐겨 쓰던 언어가 많이 사용되어 있다. 즉 "일종의 신빙(神憑) 상태에서 짧게 토해 내는 말은 이미지가 풍부하고,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다가오는 종말과 그 공포, 무시무시한 불가시적 세계의 음산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원한 말씀이라는 코란은 신에 대한 복종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코란은 인간의 행동 규범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신조로, "신 관념, 특히 그 유일성, 천지창조, 아담고 하와의 창조와 낙원 추방, 이뉴의 역사와 신의 지배, 인간의 불복종과 신의 벌, 종말, 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 계전 등에 대한 계시이다. 둘째는 윤리로, 이것은 다음의 법적 규범과 함께 신에게 복종하는 그 구체적 형식을 밝힌 것이다. 예를 들면 고아나 빈자나 나그네를 돕고, 부모를 공경하고, 선행을 권장하고 부정을 바로잡는 일과 그 밖에 예의 범절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셋째는 법적인 규범인데, 이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신에 대한 의무를 말한 의례적 규범으로 정결, 예배, 희사, 단식, 순례, 타부이다. 또 하나는 인간 상호간의 법적 의무 규범으로 결혼과 이혼, 부양, 상속, 매매행위, 형벌 등이 포함된다." 이런 이슬람교의 코란은 이슬람 사회의 전반에 걸쳐 생활 규범이 되었으며, 이슬람 법을 만드는 모체가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아베스타」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으로 총 21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일부만 전하고 있다. 「아베스타」는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을 A.D.6세기경 사산 왕조 때 문자화한 것읻. 「아베스타」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가사'로 조로아스터의 말을 기록한 거으로 아후라마즈다에 대한 찬가이다. '야스나'는 가사를 중심으로 하는 제의서, '아슈트'는 제신들에 대한 기도서, '베디다드'는 제사의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한 제마법, '아베스타'는 여러 기도문을 모은 것으로 구분된다.

 

동양 / 인도: 베다는 인도의 고대 종교인 바라밀교 종교 경전을 총칭하는 말이다. 베다는 인도의 아리아인들의 경전으로 제식(祭式)을 기록하여 인도 사상의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다는 모두 네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신들을 제장(祭場)으로 부르고 찬가를 부르는 호트리 제관에 소속하는 「리그 베다」, 둘째는 「리그 베다」에 포함된 찬가를 일정한 선율로 부르는 우드가트리 제관에 소속하는 「사마베다」, 셋째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식의 실무를 담당하는 아드바리유 제관에 소속하는 「야주르 베다」, 넷째는 제식 전체를 총괄하는 브라만 제관에 소속하는 「아타르바 베다」이다.

각 베다는 4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히타는 만트라라 하는 찬가, 가곡, 제사, 주문(呪文)을 집성한 기본적인 부문으로 보통 베다라고 부른다. 둘째는 브라흐마나로 산히타에 부수하는 산문 부분으로 제식의 비의 가 다루어짐과 동시에 철학적인 문제도 다루어진 부문이다. 넷째는 우파니샤드로 베다의 귀결 부분 또는 정수(精髓)라는 뜻으로 베단타라고도 한다." 이런 베다, 특히 아라냐카 같은 경우는 철학적으로 발전하여 인도의 우주관과 음성학ㆍ제사학 등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불교: 소승 불교는 삼장(^;Tripitaka)이라는 3권의 교리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다. 첫째는 수타 피타카로 이는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서 평신도 교육용이다. 둘째는 아비담마 피타카로 형이상학적 경전으로 불교원리를 철학적으로 다룬 것이다. 셋째는 비나야 피타카 로 승가의 훈련용이며 수도승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법을 기록한 것이다.

 

유교: 유교의 경전으로서는 사서(四書) 오경(五經)을 들고 있다. 사서는 「논어」,「맹자」,「중용」, 「대학」이며, 오경은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를 일컫는다. 이런 경전들은 대부분 인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즉 보다 나은 인간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성경적 접근: 성경에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성경이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의 경전은 오직 성경뿐이다. 그래서 '경'(벧전2:6) 또는 '성경'(딤후3:15)으로 부른다. 이 외에 '모세의 율법책' 또는 '하나님의 율법책'으로도 부른다. 이와 같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거룩한 진리의 말씀이다. 그 외에 간접적으로 다른 종교의 경전을 취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한 유대교의 구전 율법을 사람의 계명(마15:9)이라고 부르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딤전1:4)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므로 성경은 타종교의 경전을 초등 학문(골2:20)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주어진 성경만이 유일무이한 종교의 경전임을 은연 중에 강조하는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그리스도의 실체를 모르면(7:37-44)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라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속주요, 통치주요, 심판주이신 절대자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실체다. 이 실체는 오직 성령 안에서 거듭난 복된 성도들만이 알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순종의 영에 사로잡혀 그분의 실체를 알 수 없다.

 

1.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봄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로 하며'(40절)라고 하듯 유대인들은 주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 정도로 인식했다. 육으로 난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가장 존중한다는 수준이 그리스도를 위대한 성현이나 선지자 정도로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도, 유대교나 마호멧 교도들은 예수를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여긴다. 또 다른 종교인들 지성인들도 기껏해야 예수를 성현의 한 사람으로 볼 뿐이다.

 

2. 무관심 및 오해를 지니고 대함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42절)고 했다. 유대인들은 성경의 예언을 잘 알았지만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에서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사실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는 증표다. 관심 없는 신앙은 일종의 오해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의외로 많은 것은 바로 이같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 분쟁을 함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43절). 결과적으로 유대인들 중에서 그리스도다, 아니다라는 논쟁이 벌어졌다. 오늘도 예수를 빙자한 종교 분쟁, 종파 분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실체를 모르는 자들의 악폐다. 그분의 절대적인 권세와 뜻을 안다면 신앙을 위해 유혈참극가지 벌일 필요는 없다. 화해의 자세로 모든 것을 심판주 되신 그분께 맡기는 것이 옳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그리스도인과 영생수(7:37-44)

 

우리나라는 어느 곳을 파도 지하수가 나오는 축복받은 땅이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경우는 다르다. 우물도 지표수가 고인 물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땅 속에서 솟는 생수는 매우 희귀하다. 예수는 믿는 자들은 이와 같은 생수의 강을 지니고 있다고 교훈하신다.

 

1. 영생의 생수되시는 그리스도

그러므로 성경은 '생수'를 인간의 생명의 기조로 상징한다. 기쁨, 힘, 희망으로 상징하며, 결국은 '영생'을 생수로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얻을 것을 내다보고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라고 했고, 그리스도는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21:6)라고 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 철학, 지혜는 가뭄 때면 마르는 '지표수'와 같다. 참된 생수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다.

 

2. 영생의 생수를 마신 성도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38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가?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내리리니'(사44:3)라고 한 것처럼 이는 성도가 받을 성령의 권능을 의미한다.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이제 성도는 육의 세계를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안에 있게 되었다. 늘 영생의 소망, 의의 권능, 사랑과 화평의 기쁨을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마시게 될 것이다.

 

3. 영생수가 넘치는 성도의 삶

그리스도를 영생수를 통해 마시게 된 성도들은 영생의 생수를 이 세상에 배출하는 존재가 되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인내, 자비'(갈5:22)의 열매는 세상의 생수가 된다. 성령의 권능 안에서 생명의 능력을 힘껏 분출하는 성도가 되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갑론을박(요7:45-53)

 

◈ 원문강해 ◈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

 

본문에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서로 엇갈린 견해가 언급되고 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은 진리를 보고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릇된 고정관념이 가져다 주는 극심한 폐해의 단면이다.

 

1. 주인보다 지혜로운 하속들(45,46절)

많이 안다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영적 지식은 세속적인 지식의 분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하겠다.

 

1) 하속들의 현명한 처신

( \Hlqon ou\n oiJ uJphrevtai pro;" tou;" ajrcierei'" kai; Farisaivou"엘돈 운 호이 휘페레타이 프로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파리사우스;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45a절)

엘돈(Hlqon오니)은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을 보낸, 즉 고용한 이들에게로 온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고용된 사람들이었으므로 어떤 성과를 가지고 가야만 했고,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 성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보인다. 휘페레타이(uJphrevtai하속들)는 휘페레테오(uJphretvew섬기다, 봉사하다, 도움이 되다)와 동일 어군으로 '하인, 조수, 사환'을 뜻한다(Arndt-Gingrich). 휘페레타이(uJphrevtai)는 자유인으로서 자기가 제공한 봉사의 저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가 있으므로 둘로스(douvlo"종, 노예)와는 구별된다. 70인역(LXX)에서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신약에서는 다른 사람의 의도를 보조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나타난다(K.H.Rengstorf). 본 절의 하속들은 소신껏 행동했으나, 그들의 이러한 처신은 지도자들을 실망시켰다. 진리를 좇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처신이 요구된다.

 

2) 보낸 자들의 힐책

(kai; ei\pon aujtoi'" ejkei'noi, Dia; tiv oujk hjgavgete aujtovn_카이 에이폰 아우토이스 에케이노이 디아 티 우크 에가게테 아우톤;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나, 45b절)

에이폰(ei\pon묻되)은 레고(levgw말하다)의 제2과거로 쓰였으나 의미는 현재이다. 유대지도자들의 질문은 질타 내지 힐책의 성격을 디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보낸 자들이 빈 손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A.T.Robertson). 에가게테(hjgavgete잡아오지)는 아고(a[gw인도하다, 체포하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 사람들의 임무는 예수를 체포하여 데려오는 것이었는데 그대로 왔기 때문에 힐책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유대 지도자들이 미쳐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들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 자신들과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예수를 곧 심문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는 좌절되고 말았다(Dods).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인간의 계획은 결코 성취되지 못한다.

 

3) 마음에 감동을 받는 하속들

(ajpekrivqhsan oiJ uJphrevtai, Oujdevpote ejlavlhsen ou{tw" a[nqrwpo".아페크리데산 호이 휘페레타이 우데포테 엘랄레센 후토스 안드로포스;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아페트리데산(ajpekrivqhsan대답하되)은 아포크리노마이(ajpekrivnomai대답하다, 큰소리로 이야기하다)의 단순과거 직설법이다. 그들은 상관들의 힐책에 즉시 답변했다.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는 일에 정직한 답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예수님의 높은 인격과 그분의 가르치신 말씀으로 인한 감동이 그들로 용기 있는 답변을 하게 했을 것이다. 우데포테 엘랄레센(Oujdevpote ejlavlhsen말한…이때까지 없었나이다)은 전례가 없었음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건을 그들이 목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압도한 것은 예수님의 역사 하심이라기보다는 바로 그분의 말씀이었다(A.T.Robertson).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어떤 초자연적인 권위를 느꼈기에 그분을 체포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Wycliffe). 거룩하신 자 앞에서 인간이 갖게 되는 공통된 경험이다(사6:5).

 

2. 바리새인들의 아집과 독선(47-49절)

고정관념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반재자들의 생각이 옳고 합당해도 이를 수용할 만한 능력이 없다. 바리새인들의 아집과 독선을 결국 자신들을 파멸로 몰고갔다.

 

1) 미혹된 것으로 단정함

(ajpekrivqhsan ou\n aujtoi'" oiJ Farisai'oi, Mh; kai; uJmei'" peplavnhsqe_아페크리데산 운 아우토이스 호이 파리사이오이 메 카이 휘메이메 페플라네스데;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7절)

아페크리데산(ajpekrivqhsan대답하되)은 낭패하게 된 바리새인들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멸시와 조롱을 예상할 수 잇다. 그들은 안하무인격의 생활에 익숙한 자들이었으므로 하속들의 우월함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A.T.Robertson). 메(Mh)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형식으로,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믿고 있었다. 또한 이는 하속들에 대한 강한 불만의 표시이다. 페플라네스데(peplavnhsqe미혹되었느냐)는 플라나오(planavw길을 잃게 하다, 속이다)의 완료 수동태이나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완전히 옹호해야 할 그들이 예수를 변호하는 데 대해 자신들이 입게 된 충격이 적지 않음을 보여 준다 .폐쇄적 사고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위를 주장하게 되므로 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2) 당국자들 중에 믿는 이가 없음

(mhv ti" ejk tw'n ajrcovntwn ejpivsteusen eij" aujto;n h] ejk tw'n Farisaivwn_메 티스에크 톤 아르콘톤 에피스튜센 에이스 에 에크 톤 파리사이온;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48절)

아르콘톤(ajrcovntwn당국자들)은 아르코(a[rcw지배하다, 다스리다)의 분사로서 명사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통치자 및 일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데, 대제사장이나 회당을 맡아보는 이 산헤드린 의원, 재판관, 이방관헌 등이 지칭되었다(Arndt-Gingrich). 이들은 유대를 움직이는 그룹에 속한 자들로 본문에서는 산헤드린 공회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피스튜센(ejpivsteusen믿는)은 피스튜오(pisteuvw믿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한 사람이라도 믿었느냐'가 된다(A.T.Robertson).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모든 사람의 사상이나 행위를 규제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들이 행하는 것은 옳고 합당하며,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거부하는 것은 그릇되었다는 우스꽝스러운 논리이다. 하속들이 보인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약화된다는 불안감을 조성케 했고, 예수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된 실제적인 이유가 되었다. 우월주의, 이기주의는 속히 버려야 할 폐습이다.

 

3) 율법을 빙자하여 저주함

(ajlla; oJ o[clo" ou|to" oJ mh; ginwvskwn to;n novmon ejpavratoiv eijsin.알라 호 오클로스 후토스 호 메 기노스  톤 노몬 에파라토이 에스틴;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49절)

호 오클로스 후토스(oJ o[clo" ou|to"이 무리)는 예수께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군중을 지칭한다. 특히 정관사 호oJ는 그 무리를 지적하여 언급한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암 하아레츠($rah[땅의 백성)를 경멸하고 있었다(A.T.Robertson).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무조건 정죄하는 태도는 경건과 거리가 멀다. 호 메 기노스콘(oJ mh; ginwvskwn율법을 알지 못하는)은 현재 능동태 분사이며, 통상적인 부정사 메(mh;)와 함께 쓰여 랍비들의 경멸하는 태도를 진솔하게 표현한다. 그들은 예수까지도 함께 이 범주 속에 포함시켰으며, 그분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율법에 무지한 때문이라고 매도하려 했다(Wycliffe). 에파라토이 에스틴(ejpavratoiv eijsin저주를 받은 자로다)은 에파라오마이(ejparavomai저주를 빌다)의 고대 동사적 형용사로 신약에서는 여기에서만 발견된다(Arndt-Gingrich). 그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지혜롭고 선하므로 예수가 필요치 않다는 무서운 생각에 지배되고 있었다(행4:12).

 

3. 니고데모의 변호(50-53절)

니고데모는 당국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으나 그의 소극적인 태도는 칭찬받기에 미흡하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선다면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마련이다.

 

1) 전에 예수를 만난 니고데모

(levgei Nikovdhmo" pro;" aujtouv", oJ ejlqw;n pro;" aujto;n o;? provteron, ei|" w]n ejx aujtw'n,레게이 니코데모스 프로스 아우투스 호 엘돈 프로스 아우톤[토] 프로테론 헤이스 온 엑스 아우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50절)

레게이(levgei말하되)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바리새인들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반대론이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서 제기되었으며,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은 것이다. 말을 해야 할 때에 말을 아끼는 사람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고 말을 아껴야 할 때에 말을 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인데, 니고데모는 용기가 있는 자였다.

엘돈(ejlqevn)은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제2단순과거 분사로 이는 니고데모가 예수와 조우했었음을 표현한다. 예수를 만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용기 있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소극적으로라도 진리를 옹호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으므로 우리는 그의 행동을 높이 평가함이 마땅하다. 예수를 만나면 사람이 바뀐다.

 

2) 율법의 판결 원칙

(Mh; oJ novmo" hJmw'n krivnei to;n a[nqrwpon eja;n mh; ajkouvsh/ prw'ton par j aujtou' kai; gnw'/ tiv poiei'메 호 노모스 헤몬 크리네이톤 안드로폰 에안 메 아쿠세 프로톤 파르 아우투 카이 그노 티포이에이;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1절)

메…크리네이(Mh; ... krivnei;판결하느냐)에서 메(mh;)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이다. 니고데모의 말은 당국자들의 행위가 율법을 위반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항의가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분명하게 표현한 셈이었다(A.T.Robertson). 에안메 아쿠세(eja;n mh; ajkouvsh듣고)는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을 수반한 제3조건문으로 부정을 나타낸다. 소송 사건에서 피고의 진술을 듣는 것은 모든 법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정의임에도 이를 무시한 당국자들의 태도를 그는 힐책한 셈이다. 그노(gnw'알기)는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인데 여기서는 간접 의문문으로 쓰였다. 진실을 폭로한 니고데모의 행위를 기독교 지도자들은 배워야 한다.

 

3) 선지자가 날 수 없는 갈릴리

(Mh; kai; su; ejk th'" Galilaiva" ei\_ ejrauvnhson kai; i[de o{ti ejk th'" Galilaiva" profhvth" oujk ejgeivretai.메 카이 쉬 에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이 에라우네손…프로페테스 우크 에게이레타이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52절)

쉬 에크 테스 갈릴라이아스(su; ejk th'" Galilaiva"너도 갈릴리에서)는 니고데모를 노골적으로 모욕하며 무리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표현이다(A.T.Robertson). 그들은 그의 출신지를 알고 있었지만 예수를 두둔하므로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에라우네손(ejrauvnhson상고하여)은 에라우나오(ejraunavw조사하다, 감사하다 살피다)의 단순과거 명령법으로 강한 요청을 나타낸다.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있는지 조사해 보라는 것이며, 결국 그들은 갈릴리 출신인 예수를 결코 인정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Wycliffe). 예수를 변호하려면 조소와 멸시가 따를 수 있고 때로는 희생도 각오해야 함을 잘 알게 한다(딤후3:12,W.Barclay).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고자했던 그들의 시도가 좌절되자 계획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경비병들에게 돌렸다. 본문의 중심적인 문제는 모든 복음서에서 다루는 그리스도론인 '과연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인가'에 대한 것이다(G.R.Beasley-Murray).

 

1. 지도자들과 하속인 사이의 논쟁(45-49절)

45절에서 '하속들'이란 성전 경비병(Temple Police)의로 표현하기도 했다(J.H.Bernard). 이들은 산헤드린 산하에 소속된 자들로 불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란 산헤드린 구성요원을 가리킨다. 산헤드린은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소로서 민사는 물론 맡는 형사 사건 및 특별히 행정적인 사건까지 취급하였다. 37절의 '명절 끝날 곧 큰 날'과 연대기적 입장에서 볼 때, 하속인들이 밖으로 나간 후 다시 돌아온 것은 4일째되는 날이었으며, 이와 같은 시간 조정은 매우 인위적인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R.E.Brown).

46절에서 강조되는 점은 마지막 말에 있는 듯하다. 하속인들은 예수의 위상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정립하지 못했으나, 예수의 초인간적 권유에 압도당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C.K.Barrett). 아마 그들은 갈릴인들이 그랬던 것처럼(마7:28,29)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J.H.Bernard).

47절의 '미혹되었느냐'(mhv kaiv uJmei'" 메 카이 휘메이스 페플라네스데)란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한 말이다(J.H.Bernard).

48절에 등장하는 '산헤드린'(Sanhedrin)은 문자적으로 '당국'을 의미하며, 산헤드린 안에는 바리새파의 당원들이 포함되어 구성되어 있었으나, 본 절은 바리새파의 일반적인 당을 의미하고 있다(R.E.Brown).

49절의 표현은 단지 맹목적인 열정적 발언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며(Ewald), 랍비 신학과 법령에 입각한 기발한 발상으로 보여지기도 하고(Kuinoel), 당시 문맹이던 군중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지식을 자랑한 표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Western, Lampe, Str-B, Gfrorer). 특히 당시 랍비들의 용례를 보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즉 '이 땅의 사람들'은 율법에 부주의했으며, 율법을 공부한 자들에게 멸시를 받아왔었다(Str-B).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표현은 신27:2628:15;시119:21에 나오는 것으로서, 율법을 확신할 수 없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Brown).

 

2. 니고데모의 발언(50-53절)

50절의 '그 중에 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본에서는(Syriac) 빠져 있으나, '전에'라는 표현이나 '밤중에, 처음에'라는 삽입 구문이 다른 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이와 가은 변이들의 분류에 의해 생긴 것이다(R.E.Brown). 이 말은 니고데모가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51절은 대부분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육과 피로 된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를 판단하며, 듣지 않고서는 그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율법은 이 점에 있어서 마치 심판관인 것처럼 인격적으로 말해진다(출23:1신1:16-17:2-5, C.K.Barrett, Josephus, Ant). 여기서 랍비들의 원리는 랍비 엘리자드 벤페닷(Eleaar ben Pedath)이 미드라쉬의 출21:3에서 '한 인간이 제안한 청원을 들을 수 없다면, 그는 심판할 수 없는 것이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R.E.Brown).

52절의 '상고해 보라'(ejrauvnhson에라우네손 카이 이데)라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논증의 유대 문헌에 병행 구절로 나온곳이 없다. 구약 관습에 갈릴리가 열등한 지역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사9:1에는 갈릴리의 영화로움이 언급되었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는 갈릴리 출신으로 여겨진다(왕하14:25,J.H.Bernard). 더욱 뚜렷한 사실은 사본들 중 P66, P75에는 메시야적 예언자가 갈릴리에서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Lindars). 여기서 말하는 '예언자'는 매우 특출난 예언자나 예언자 중에서 위대한 자를 의미하지 않으며(Henstenberg), 예수라는 사람으로 갈릴리에 나타나지 않은 한 예언자(Godet)를 의미하는 것이다.

53절에 모든 사람들은 성전에 모였던 모든 사람을 지칭하며(H.A.W.Meyer), 이들은 산헤드린의 의원들로 그들의 반대자를 잡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버린 자들을 의미한다(Grotius, Lampe, Mayer, Lange).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예수를 잡지 못한 하속들의 이유(45-49절)

45,46절에서 산헤드린은 명절이 끝나면 예수가 순례자들과 함께 돌아갈 것을 염려해서 예수를 빨리 체포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Lenski).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는 것보다 그 일로 인한 폭동이 발발하지 않기를 더 원하고 있었다(L.Morris). 하지만 하속들의 대답은 좀 달랐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압도되어 도저히 예수를 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Tenney). 한편 요한은 '이때까지 그와 같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라는 하속들의 말을 빌려 예수가 인간 이상의 신적 존재임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는 원문에 '사람'이라는 단어가 맨 끝에 위치하여 '사람'을 강조하는 용법과도 잘 어울린다(Barrett, Tenney, L.Morris).

47,48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중에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사실일 뿐이지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다(요12:4219:38,39,E.A.Blum). 결국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12:19)라는 그들의 과장된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인기와 명성에 대하여 시기하고 있을 뿐이다(E.A.Blum).

49절에서 '율법을 알지 못한다'라는 표현은 군중들이 율법을 전혀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같은 지식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이다(L.Morris). 즉 군중들의 율법 지식은 예수가 메시야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는 하찮은 것이라는 뜻으로서(Lenski), 메시야 판별과 성경의 교훈은 전문가들인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이 담겨 있다(Hendriksen). 한편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암 하아레츠($rah ![땅에 속한 자들)이며,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계층'을 가리킨다(L.Morris, Reynolds, Lenski, Barrett). 본래 암 하아레츠라는 단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였다(겔22:29). 그런데 점차 지배층과 반대되는 피지배층 백성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전용되다가(렘1:18) 포로기 이후에는 귀향민들과 구별된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스10:11). 그러다가 결국은 랍비들을 통해 정식으로 율법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들은 율법의 명령을 준수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저주받은 자'(신27:2628:15)가 될 수밖에 없다(E.A.Blum, L.Morris). 따라서 체계적으로 율법을 배운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교만이다.

 

2. 니고데모의 반론(50-53절)

50,51절에서 요한은 바리새인들 중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하나도 없다며 하속들을 꾸짖는 상황에서 니고데모를 등장시켜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시킨다(Lenski, L.Morris). 니고데모는 열정적으로 예수를 변호하지는 않지만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율법(23:1;신1:16,1717:4)을 통해, 무작정 예수가 군중을 매도하는 일이 옳지 못함을 주장한다(Reynolds, Barrett, Hendriksen, Lenski). 우리는 니고데모의 이러한 태도에서 무작정 예수와 군중을 변호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배려와 지혜를 엿볼 수가 있다.

한편 니고데모를 가리켜 '그 중에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를 호의적으로 보기는 하지만 아직은 '유대인들'에 속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다(Barrett). 그리고 '전에 예수께 왔던'(요7:50)이란 표현은 저자가 니고데모를 설명하기 위해 첨가한 일종의 삽입구로 여겨진다(Barrett, Lenski).

52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의 반대가 애향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요나는 갈릴리 출신이었으며(R.C.H.Lenski, C.K.Barrett, L.Morris), 호세아와 나훔도 갈릴리 출신으로 주장되기도 한다(Lenski).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예수가 베들레헴 출신이란 사실과 갈릴리에 대한 사9:1의 예언을 무시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어느 곳에서든지 일꾼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이다(L.Morris).

53절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7:53-8:11까지를 한 단락으로 역, 문맥상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정경으로서의 가치는 인정한다. 52절에서 바로 요8:12로 연결하면 문맥이 자연스럽다(김세윤, Leski). 본 절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사실을 말한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신학에서의 중생이라는 용어의 용법

 

1. 초대교회와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중생이라는 용어가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이는 죄를 씻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변화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중생과 동일시된 중생은 죄의 용서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되었고 도덕적인 정신의 개념도 배제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조차도 이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고 있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중생은 죄의 용서가 더불어 심령의 변화의 '발단'을 포함하며 중생 후에는 회심이 뒤따른다. 그는 중생을 인간이 협력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이하고 이해했다. 창의는 은혜의 주인, 즉 새로운 피조물로의 출생 혹은 중생, 그리고 죄의 용서, 이와 관련되 죄책의 제거를 포함한다. 토머스 아퀴니스에 의하면 은혜의 주임이 우선적이며 죄의 증서는 여기에 기초한다.

하지만 둔스 스코투스는 죄의 용서가 우선적이며 이것이 은혜의 주임에 근거가 된다고 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중생과 창의가 혼동되는데 이는 창의가 법정적 행위가 아니라 갱신의 행동이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2.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

루터는 중생과 창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한 의미로 언급했다. 칼빈(J.Calvin)도 역시 이를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호를 포함하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배부 포괄적으로 사용했다. 일부 17세기 전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사와 교한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부르심, 즉 천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오늘날 개혁자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 처음으로 행동화되는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창조'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를 새 생명의 첫 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영혼단에서의 새 생명의 주임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좋다.

 

 

각 종교의 핵심적 교리(7:45-53)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은 신과의 관계 속에 많은 규례를 지켜야 하고 종교는 많은 규례를 만들어 인간이 지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때 그 종교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때로는 많은 교리를 인간들이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가장 핵심적인 진리만을 요약해서 강조하기도 한다.

 

동양 / 불교: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연기(緣起;모든 사물의 기원이나 유래)이다. 이 연기는 절대 변하지 않는 영원 불멸의 진리이며, 보편타당한 객관적 진리라고 한다. 따라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라고 한다. 결국 불교에서는 연기를 올바로 깨닫는다면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거시다. 연기의 변화를 보면,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어진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그것도 멸한다."라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십이인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① 무명(無明), 즉 지혜가 없으면 올바른 인생관·세계관을 갖지 못하며, ② 행(行)무명에 의해 야기된 행위라면 필연적으로 고뇌에로 이끌어 갈 그릇된 행이 된다. ③ 식(識)은 과거의 모든 행위가 잠재의식이 되어서 작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다. ④ 명색(名色), 즉 정신적인 것 (名)과 물질적인 것(色)으로 이 현상 세계의 일체의 존재를 가리킨다. ⑤ 육입(六入), 6개의 감각기관으로 이를 통해 식이 작용하게 되어 명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⑥ 촉(觸) 접촉에 의해 생기는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 ⑦ 수(受)이다. ⑧ 애(愛)는 갈애(渴愛)라고 하며, 감수작용이 강하면 애증(愛憎)의 염(念)도 그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⑨ 취(取)는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애증의 염에서 일어나는 강한 취사 선택의 행동이며, 이러한 애·취라는 행위가 잠재적으로 되는 데에 현존재, 즉 ⑩ 유(有)가 규정되면, 그것에 의하여 ⑪ 생(生)이, ⑫ 노사(老死)의 고(苦)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근동 / 조로아터교: 조로아스터교에서 최고의 신은 아후라 마즈다로 이는 선한 신이고, 이에 대항하는 신이 앙그라 마인유이다. 이 두 시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가르침으로는 신론, 창조론(創造論), 인간론(人間論), 종말론(終末論)을 들 수 있다. 신론을 보면, 아후라 마즈다(지혜를 주관하는 신)가 유일한 신이라고 하는 개념이다. 창조론은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앙그라 마인유)의 싸움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하여 이들은 가각 선과 악의 시작이라고 한다. 인간론은 인간은 아리만에 의하여 타락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종말론을 보면, 악한 자들에게는 4단계의 지옥, 선한 사람은 4단계의 낙원에 들어간다고 한다. 결구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생명의 존속과 악에 대항한 투쟁이다. 악의 세력은 죽음의 세력이며 인간은 이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선을 사모하고 아후라 마즈다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 접근: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타종교는 '유대교'이다. 구약성경의 율법을 교리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유대교는 기독교의 '요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교리가 기독교와 상이(相異)하기에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종교로 성경은 취급한다. 즉 유대교의 구원론에 대한 교리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구원론과는 다르다. 유대교는 율법대로 행함으로(갈3:12)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다고 가르쳤다. 그 율법대로 행하는 것 중 가장 강조되는 교리가 할례와 안식일 준수다(행11:1,2). 그러나 성경의 핵심 교리는 믿음과 회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요 존재의 기반이 된다. 이 교리가 결여된 복음은 저주받은 다른 복음(갈1:7,8)으로 성경은 간주하고 있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그리도인들에 대한 경멸(7:45-53)

 

유대교 당국자들은 예수를 체포할 자들을 은밀하게 풀어 놓았었다. 그래서 예수의 언행에서 고소할 근거를 찾아낼 자들을 보냈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에게서 감화를 받고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에게 호감을 지닌 자들을 저주하고 비난한다. 그와 같은 모습 속에서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경멸을 발견할 수 있다.

 

1. 미혹된 자들로 단정함

그들은 하속들이 예수의 언행을 칭송하자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절)고 질타한다. 예수께 대한 공경심을 미혹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세상의 일관된 태도이다. 그리스도를 '군중을 미혹하는 자'(요7:12), 또는 '유혹하던 자'(마27:63)라고 당시부터 비난했고, 심지어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정죄한 무리들도 있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강화력을 종교적인 사행술 행위 정도로 오도시키는 것이다.

 

2. 무식한 자들로 깔봄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을 자로다'(49절)라고 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배우지 못한 서민들을 '땅의 무리들'이라고 불렀다. 또 이방인들은 '해충'이라고 경멸했다. 그와 같은 무식한 자들이기에 예수께 호의를 가진다는 경멸이 깔려있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들도 경멸한다. 어떤 철학자는 기독교인들을 '노예 근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멸시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반(反)지성인으로 경멸하는 것은 불신 세상의 보편적인 태도이다.

 

3. 문제인들로 취급함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52절). 같은 관원 니고데모의 지적에 대한 답변이다. 갈릴리는 문제 지역, 문제아들의 대명사다. 불의와 굳어진 폐습에 대해 끝없이 항거한 사람들이 바로 갈릴리인들이다. 세상은 이처럼 기독교와 그 사람들을 반사회적 존재, 문제아들로 치부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나타나는 빛의 열매들(7:45-53)

 

요한은 서두에서 그리스도를 죄악의 어두운 세상에 비취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빛으로 묘사했다(요1:9). 이제 주님의 사역은 종반부로 넘어간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빛의 열매도 나타나고 있음을 본문은 증거해 주고 있다.

 

1. 군중들의 여론 속에 나타남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그 선지자'(40절),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41절)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선지자'는 모세오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칭호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났으나 또한많은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것이다. 진리의 씨앗은 이처럼 그 열매를 얻는다. 고난과 역경도 많지만 그 열매의 수확도 확실함을 알자.

 

2. 하속들의 고백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그들 고백의 참뜻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신적인 것이다'라는 것이다. 악의 측근들이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큰 감화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 진리의 감화력은 이처럼 위대하다. 기독교의 허위와 잘못을 찾아내려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오히려 큰 감화를 받고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다. 「쿼바디스」를 쓴 노벨상 수상자 헨리 센케비치가 그 한 예다.

 

3. 니고데모의 변호

관원들의 맹목적인 정죄에 관원 니고데모는 '증거도 없이 사람을 판결하지 못한다'(51절)며 그리스도를 변호했다. 그 뜻은 '그리스도가 사기꾼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뜻이다. 복음의 빛은 이제 대적자들의 중심부가지 비췬 것이요, 그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바른 진리를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복음 진리를 전하며 그 진리대로 산다면 결국은 풍성한 빛의 열매를 이 세상에서 거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요한복음 7장 원어 강해

 

 

요 7:1~13 예수를 불신하는 형제들과 초막절

감추어진 하나님의 시간

본문에는 예수에 대한 그의 형제들의 태도와 초막절에 주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이 언급되고 있다.

1. 예수를 불신하는 형제들의 권유(1-5절)

1)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
(ouj ga;r h[qelen ejn th'/ jIoudaiva/ peripatei'n, o{ti ejzhvtoun aujto;n oiJ jIoudai'oi ajpoktei'nai. ; 우 가르 에델렌 엔 테 유다이아 페리파테인 호티 에제툰 아우톤 호이 유다이오이 아포크테아니이 ;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1절)
페리파테인(peripatei'n;다니려)은 현재 부정사이다. 이는 부정사 에델렌(h[qelen;하심)과 함께 사용되어 주께서 유대에서 계속 머물거나 돌아 다니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음을 나타낸다(Arndt-Gingrich). 사역의 거부를 나타내는 이 부분은 그분에게 용기가 결여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때에 으리기까지 조심하려는 의도였다. 공공연히 적개심을 나타내 보이는 유대 직역에서의 사역은 위험하다고 느끼신 것이다(Wycliffe). 에제툰…아포크테이나이(ejzhvtoun...ajpoktei'nai. ; 죽이려 함이러라)는 미완료 시제 능동태와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로 직역하면 '죽이려고 계속적으로 찾았다'를 뜻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계속적으로 예수를 죽이고자 시도했음을 보여 주다(A.T.Robertson). 그들은 이미 예수를 제거해야 할 대상 제1호로 꼽고 있었으므로 모의를 중단하지 않았다.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이처럼 끊임없이 빛을 미워하고 의인을 대적한다(요3:19,20).

2) 유대로 가도록 권하는 형제들
(Metavbhqi ejnteu'qen kai; u{page eij" th;n jIoudaivan, i{na kai; oiJ maqhtaiv sou qewrhvsousin sou' ta; e[rga a} poiei'": ; 메타베디 엔튜덴 카이휘파게 에이스 텐 유다이안 히나 카이 호이 마데타이 수 데오레수신…하 포이에이스;당신이 행하는…제자들로 보게 여기를 떠난 유대로 가소서,3절)
메타베디(Metavbhqi ; 떠나)는 메타바이노(metabaivbhqi;옮아가다, 자리를 옮기다)의 제2단순과거 명령법으로 그들의 태도가 매우 건방지고 경건치 못했음을 보여 준다(A.T.Robertson). 그들은 5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를 믿지 않았으며 그분의 메시야적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간 행했던 기적들을 그들 자신도 목도했던 터라 절대 부정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뢰하지도 못했으므로 이런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黑崎).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분에게 이리저리 하시도록 명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결정권은 언제든지 그분에게 있다. 데오레수신(qewrhvsousin;보게)은 '구경하다, 관찰하다, 깨닫다, 경험하다'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일차적으로는 종교적인 절기에서의 구경꾼들을 가리키므로 '∼을 살펴보다'를 의미하며, '숙고하다, 관찰하다'라는 비유적 의미도 추가로 지닌다. 70인역(LXX)에서 56회 정도 나타나는데, 보는 것을 가리키는 다른 동사들과 함께 자주 쓰인다(W.Michaelis). 본문의 형제들은 예수간 공개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로 명절이 적절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려 준다.

3) 예수에 대한 형제들의 불신
(oujde; ga;r oiJ ajdelfoi; aujtou' ejpivsteuon eij" aujtovn.;우데 가르 호이 아델포이 아우투 에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5절)
우데(oujde;;아니)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속사이며, '∼그리고 ∼아니, ∼도∼아니, ∼도 역시 ∼아니, ∼까지도 ∼아니'를 뜻한다(Arndt-Gingrich).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태도를 예수의 형제들이 취했음을 보여 준다. 예레미야가 타락하기를 기다린 사람들이나 예수를 대적들의 손에 넘겨 준 사람은 모두 가까운 이들이었다. 에피스튜온(ejpivsteuon;믿지)은 피스튜오(pistuvw;믿다, 신뢰하다)의 미완료 시제이다. 이는 우데(oujde;아니)라는 말과 함께 쓰여 그들이 계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불신의 태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J.G.Machen).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적 사명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므로 때로는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A.T.Robertson). 그들이 확신을 가졌었다면 이러한 선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주를 기쁘시게 한다(히11:6)

2. 아직 이르지 아니한 주의 때(6-9절)

1) 하나님의 신비 속에 감추인 주의 때
( JO kairo;" oJ ejmo;" ou[pw pavrestin, oJ de; kairo;" oJ uJmevtero" pavntotev ejstin e{toimo". ; 호 카이로스 판토테 에스틴 헤토이모스;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6절)
요한 복음에서는 카이로스(kairo;";때)라는 단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예정된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하는 호라(w}ra;때, 시간)가 주로 쓰였다(W.Barclay). 기본적인 의미로 쓰일 때에 이 단어는 장소라든지 상황, 시간 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점이나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에트(t[;때)나 모에드(d[wOm;때)의 역어로 나타난다(G.Delling).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권위를 공적으로 나타내기에 알맞은 '적절한 기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A.T.Robertson). 최선의 시간, 가장 적절한 기회라는 뜻이다(W.Barclay). 파레스틴(pavrestin;이르지)은 오래된 합성 동사로, 인격 존재 및 비인격 존재에 대해 '왔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Arndt-Gingrich). 예수님은 자신이 군중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서야 할 적절한 기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확신하셨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홀로 주장하시며 아무도 관여나 간섭을 할 수 없다(행1:7).

2)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는 이유
(ejme; de; misei', o{ti ejgw; marturw' peri; aujtou' o{ti ta; e[rga aujtou' ponhrav ejstin..;에메 데 미세이 호티 에고 마르튀로 페리 아우투호티 타 에르가 아유튜 포네라 에스틴;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7절)
미세이(misei;미워하나니)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예수에 대한 세상의 적대적인 태도가 계속적이고 진행적임을 시사한다. 세상은 윤리적인 상호성의 법칙 때문에(Westcott) 자기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지 못하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고 못하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지 못하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미워하고 핍박한다(요15:19). 마르퀴로(marturw';증거함이라)도 현재시제로 예수께서 미움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악에 대해, 불의에 대해, 불경건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시며 계속적으로 증거하고 증인이 되셨다. 이는 세상의 행사에 대해 계속해서 지적하고 책망하셨던 것이며, 주의 이같은 행동은 세상에 속한 자들의 적개심을 노골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黑崎). 포네라(ponhrav;악한)는 '악한, 무가치한, 타락한'을 뜻한다. 이는 세상의 상태에 대해 교회와 성도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문구이다.
3) 명절에 올라가지 않으려는 주님
(ejgw; oujk ajnabaivnw eij" th;n eJorth;n tauvthn, o{ti oJ ejmo;" kairo;" ou[pw peplhvrwtai.;에고 우크 아나바이노 에이스 텐 헤오르텐 타우텐 호티 호 에모스 카이로스 우포 페플레로타이;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8절)
우크 아나바이노(oujk ajnabaivnw;올라가지 아니하노라)는 주께서 형제들의 권유에 따를 뜻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준다. 그분이 중시하신 것은 아버지의 의지뿐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여론 등에도 저혀 개의치 않으셨다. 우(ou)는 알레트(X), D, 아프리카 라틴 사본, 벌게이트역, 서부 콥틱역 등에서 사용되었다(A.T.Robertson). 우포 페플레로타이(ou[pw peplhvrwtai;아직 차지 못하였으니)는 주께서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서 움직이셨음을 알게 한다(W.Barclay). 이 단어는 플레로오(plhrovw;시간을 채우다, 마치다, 성취하다)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그분이 무슨 일을 하든 인간의 시간에 맞추지 않았음을 잘 보여 준다. 사람이 작성한 시간들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다(마7:21).

3.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심(10-13절)

1) 비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tovte kai; aujto;" ajnevbh, ouj fanerw'" ajlla; 퍆J"? ejn kruptw'/.; 토테 카이 아우토스 아네베 우 파네로스 알라[호스] 엔 크립토;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10절)
아네베(ajnevbh;올라가다)는 아나바이노(anabaivnw;올라가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예수께서 얼마나 시간 간격을 두고 가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형제들이 떠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우리는 이 시점을 예수 자신의 때라고 봐야 할 것이다(W.Barclau).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므로 이를 잘 분별하고 활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 파네로스(ouj fanerw'";나타내지 않고)는 형제들의 권유와는 전혀 상반되는 행동이다(A.T.Robertson). 그 분은 인기 스타가 되고자 시도하신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분의 예루살렘행은 계획의 돌연한 변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엔 크립토(ejn kruptw'/;비밀히)로 보아 그분이 통상적인 순례자들의 대열에 끼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J.H.Bernard). 이러한 은밀함은 여행 때뿐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 감출 때와 드러내야 할 때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2) 예수에 대한 엇갈린 평가
(kai; goggusmo;" peri; aujtou' hn polu;" ejn toi'" o[cloi": oiJ me;n e[legon o{ti jAgaqov" ejstin, a[lloi 팪e;? e[legon, Ou[, ajlla; plana'/ to;n o[clon.
; 카이 공귀스모스 페리 아우투…호티 아가도스에스틴…우 알라 플라나 톤 오클론;예수께 대하여…수군거림이…좋은 사람이라…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2절)
굉귀스모스(goggusmo;";수군거림이)는 이오니아식의 의성어이며(A.T.Robertson), 은연중에 나타나는 불쾌감이라든지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 것 등에 사용된다. 여기서는 '밀담'의 의미로 쓰였다(Arndt-Gingrich). 즉 그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나타내기에는 아직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플라나(plana';미혹하게 한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예수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을 나쁜 길로 이끌며, 그릇되게 인도한다는 가장 악랄한 평가이다. 그들은 예수를 선동자라고 생각했다. 참된 종교에서 사람을 떠나게 만드는 이단자처럼 여겼던 거이다(W.Barclay). 이것은 인간의 무지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게 마련이다.

3) 사람을 두려워하는 무리들
(oujdei;" mevntoi parrhsiva/ ejlavlei peri; aujtou' dia; to;n fovbon tw'n jIoudaivwn.;우데이스 멘토이 파르레시아 엘랄레이 페리 아우투디아 톤 포본 톤 유다이온;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13절)
멘토이(mevntoi;그러나)는 대개 반의적으로 사용되는 불변사이며, '비록∼지라도, 그러나'등을 뜻한다. 파르레시아(parrhsiva;드러나게)는 '숨김 없음, 두려움 없음, 공공연하게'를 의미하는 것이며, 부정사가 문장의 처음에 쓰여 이를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즉 무리 중에는 예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으나 이를 공공연히 말하기에는 아직 미숙하였다. 영적인 성숙함과 신앙적인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공적이 신앙 고백이다. 언로가 막힌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黑崎). 디아 톤 포본(dia; to;n fovbon;두려워하므로)은 그들이 수군거리는 직접적인 이유를 언급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다(마10:28).

 

 

 

요 7:14~24 예수 교훈의 근원

절대적인 권위

본문에서는 전통 종교의 지도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예수의 교훈의 근원이 어디인가가 언급되어 있다. 그분의 절대적인 권위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1. 예수의 가르침을 기이히 여김(14-18절)

1) 교육받지 못한 예수
(ejqauvmazon oun oiJ jIoudai'oi levgonte", Pw'" ou|to" gravmmata oiden mh; memaqhkwv"_;에다우마존 운…포스후토스 그람마타 오이덴 메 메마데코스;기이히 여겨…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15절)
에다우마존(ejqauvmazon;기이히 여겨)은 미완료 시제 능동태로서 계속적으로 '기이히 여기고 있었다'는 의미를 지닌 생생한 표현이다(A.T.Robertson). 예수의 성경에 대한 지식은 그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찬사를 보내게 되었다(Arndt-Gingrich). 오이덴(oiden;아느냐)은 제2완료 능동태 직설법인데 현재 의미로 사용되었다. 청중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글을 아신다는 사실과 무엇보다 당시의 대중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학문의 방법론에 정통하셨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Westcott).
메 메다데코스(mh; memaqhkwv";배우지 아니하였거늘)는 만다노(manqavnw;배우다)의 완료 능동태 분사이다. 그분은 인정받을 만한 학벌이 없었으며, 랍비들의 신학적인 학파들 중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으셨다(A.T.Robertson). 당시에 신뢰받던 어떤 스승의 제자도 아니셨던 그분은(W.Barclay)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진리로 이끄셨다.
2) 주의 교훈은 아버지의 것
( JH ejmh; didach; oujk e[stin ejmh; ajlla; tou' pevmyantov" me:;헤 에메 디다케 우크 에스틴 에메 알라 투 펨프산토스 메;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
디다케(didach;;교훈)는 하나의 사실로서의 '가르침'이라든지 '교훈'을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단 1회시60편의제목으로 쓰였다. 여기에서는 예수의 가르침 전체를 지칭하고 있다(K.H.Rengstorf). 우크 에스틴 에메(oujk e[stin ejmh;;내 것이 아니요)는 예수가 어느 한 학파에 속하지 않았으며, 독학으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님을 나타낸다(A.T.Robertson). 그분은 유대인들이 설치한 함정에 걸려들지 않으셨다. 만일 주께서 '나는 선생이 필요없다. 나는 나 스스로 배웠다'고 대답하셨다면 대적들에게 빌미를 주제 되었을 것이며, 공격의 강도가 더욱 거세졌을 것이다(W.Barclay). 알라 투 펨프산토스 메(ajlla; tou' pevmyantov" me;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는 펨포(pemfantv";보내다)의 역접 접속사 알라(ajlla;그러나)와 함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가 쓰인 말이다. 여기에 속격을 취함으로써 이 교훈의 출처를 명확히 함은 물론, 자신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밝혀 주신다. 자신의 것을 전파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다.

3)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는 분별함
(ejavn ti" qevlh/ to; qevlhma aujtou' poiei'n, gnwvsetai peri; th'" didach'" povteron ejk tou' qeou' ejstin h] ejgw; ajp j ejmautou' lalw'.
;에안 티스 델레 토 델레마 아우투 포이에인 그노세타이 페리 테스 디다케스 포테론 에크 투 데우 에스틴;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알리라, 17절)
에안 티스 델레…포이에인(ejavn ti" qevlh...poiei'n;사람이…행하려 하면)은 제1조건문이다. 누가 행하기를 '바란다면'(혹은 좋아한다면, 기뻐한다면)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 그분이 보시기에 만족해하실 만한 도덕적 목적을 가신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Wycliffe).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주의 가르치심, 성경의 교훈은 참되게 이해할 수 있다(W.Barclay). 그노세타이(gnwvsetai;알리라)는 기노스코(ginwvskw;알리다)의 미래 중간태 직설법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경험적인 지식을 가리킨다(A.T.Robertson). 우리는 행함을 통해서 배운다. 기독교에 있어서 배우는 길은 몸소 실천하는 데 있다(W.Barclay).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힘써야 하겠다(롬12:2)

2. 예수에 대한 군중의 적개심(19-21절)

1)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음
(kai; oujdei;" ejx uJmw'n poiei' to;n novmon. tiv me zhtei'te ajpoktei'nai_;카이 우데이스 엑스 휘몬 포이에이 톤 노몬 티 메 재테이테 아포크테 아니이;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19절)
우데이스 포이에이(oujdei;" poiei;지키는 자가 없도다)는 유대인들의 형식주의적 경건을 지적한 말씀이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는 국민이었으나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의도는 율법의 가르침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불경건의 소치였다(A.T.Robertson). 인생중에 의인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롬3:10), 유대인 중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Arndt-Gingrich). 제테이테 아포크테이나이(zhtei'te ajpoktei'nai;죽이려 하는냐)에서 제테이테(zhtei'te)가 제테오(zhtevw;찾다)의 현재 직설법이며 아포크테이나이(ajpoktei'nai)가 부정사로 직역하면 '죽이기 위해(계속적으로) 찾는다'라는 뜻이다. 예수께 대한 그들의 적대감이 노골화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단어의 현재적 용법은 그들이 계속적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율법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자랑을 삼아서는 안된다. 그것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2) 예수를 귀신들렸다 함
(ajpekrivqh oJ o[clo", Daimovnion e[cei": tiv" se zhtei' ajpoktei'nai_;아페크리데 호 호클로스 다이모니온 에케이스 티스 세 제테이 아포크테이나이;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0절)
호 오클로스(oJ o[clo";무리가)는 유대 종교의 엘리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획책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黑崎) 예루살렘 밖에서 온 사람들로 보는 것이 옳다(A.T.Robertson). 그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 흉중에 들어 있는 악한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Wycliffe). 다이모니온 에케이스(Daimovnion e[cei";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문자적으로는 '당신은 귀신을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다'이며 계속적으로 귀신에게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J.G.Machen).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미쳐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악담이며(A.T.Robertson).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불경스런 말이다. 티스 세(tiv"se;누가 당신을)는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적어도 양심의 가책 정도는 느끼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 '누구' 속의 주인공들이 자신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죄는 감춘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주의 행위를 인하여 괴이히 여김
( }En e[rgon ejpoivhsa kai; pavnte" qaumavzete.;gps 에르곤 에포이에사 카이 판테스 다우마제테;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21절)
헨 에르곤(En e[rgon;한 가지 일을)은 주께서 안식일에 38년된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A.T.Robertson). 거기 모인 사람들의 고정 관념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그분이 행하신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귀가 닳도록 들어 왔으며, 이것이 유일한 규범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던 터라 예수의 행위가 이상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 단어는 일뿐만 아니라 행위, 행동, 실제적 증거, 직업, 작품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Arndt-Gingrich). 다우마제테(qaumavzete;괴이히 여기는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함축한다. 그들은 주를 통해서 나타나는 기적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시는 예수에 대해 불편함 심기를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黑崎).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라 해도 자신들이 고수해 온 전통에서 벗어날 때에는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보수적 태도이다. 엄밀히 말한단면 이것은 경건이 아니다.

3. 외모로 판단하는 무리들(22-24절)

1) 조상에게서 난 할례
(oujc o{ti ejk tou' Mwu>sevw" ejsti;n ajll j ejk tw'n patevrwn --- kai; ejn sabbavtw/ peritevmnete a[nqrwpon.;우크 호티 에크 투 모위 세오스 에스틴 알르 에크 톤 파테론 카이 엔 삽바토 페리템 네테 안드로폰;(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22절)
알르 에크 톤 파테론(ajll j ejk tw'n patevrwn;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은 할례의 기원이 모세보다 훨씬 이전임을 명시하는 말씀이다. 모세가 율법을 하나님께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수하였던 것이고, 할례는 그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사 시행하게 하신 것이다. 페리템네테(peritevmnete;할례를 주느니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함축한다. 모세 이전에 나온 이 제도가 안식일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십계명과 비교한다면 할례는 보다 덜 중요한 것이지만 철저히 이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식일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십계명과 비교한다면 할례는 보다 덜 중요한 것이지만 철저히 이행되고 있었다(黑崎). 그럼에도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예수께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었다(Wycliffe). 주께서 지적하고자 하시는 요점이 이것이다.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화시키고 남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마7:1-4)

2) 안식일에 병고침은 죄가 아님
(ejmoi; cola'te o{ti o{lon a[nqrwpon uJgih' ejpoivhsa ejn sabbavtw/_;에모이 콜라테 호티 홀론 안드로폰 휘기에 에포이에사 엔 삽바토;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23절)
콜라테(cola'te;너희가 노여워하느냐)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들의 예수께 대한 적대감이 계속적으로 드러남을 시사한다. 신약에서 본 절에만 나오는 이 단어는 쓸개즙, 쓸개를 뜻하는 콜레(colhv)에서 유래한 고대 단어이며, '성나다, 노하다'를 의미한다(A.T.Robertson). 즉 그들의 감정이 격한 상태에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홀론 안드로폰 휘기에(o{lon a[nqrwpon uJgih;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는 예수의 치료가 일반 의사들의 방법과는 전혀 다름을 보여 준다. 그것은 전신의 치유, 더 나아가 전인의 치유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며, 그분의 뜻은 언제든지 인간이 세운 모든 전통이나 가치보다 우선한다. 이것은 교회들을 향한 경고가 된다.

3)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함
(mh; krivnete kat j o[yin, ajlla; th;n dikaivan krivsin krivnete.;메 크리네테 카트 옵신 알라 텐 디카이안 크리신 크리네테;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24절)
크리네테(krivnete;판단하지)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이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대부분 법률 용어로 쓰이고 있다. '나누다'라는 의미에서부터 '결정하다, 판단하다, 비난하다, 단죄하다, 비판하다' 등의 의미이다(F.Buchsel). 비판이나 정죄는 항상 분명한 기준의 토대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그래야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옵신(o[yin;외모)은 '외모, 외형, 얼굴'을 가리킨다. 파상적으로 혹은 외면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언제든지 옳지 못하며(A.T.Robertson), 사람의 행위를 주목해야 한다(黑崎). 선행은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사보다 훨씬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법이다. 디카이안(dikaivan;공의의)은 '올바른, 의로운' 등을 뜻하는데, 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우와 종교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율법이다.

 

 

 

요 7:25~36 예수의 메시야 성에 관한 질문

그리스도의 자증

본문에서는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무리의 수군거림과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 예수를 잡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적극적인 행동 등에 관해 언급되고 있다.

1. 예수의 근원을 안다고 말함(25-27절)

1) 지도자들이 죽이고자 하는 장본인
(tine" ejk tw'n JIerosolumitw'n, Oujc ou|tov" ejstin o}n zhtou'sin ajpoktei'nai_;테네스 에크 톤 헤로솔뤼미톤 우크 후토스 에스틴 혼 제투신 아포크테이나이;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5절)
티네스(tine";혹이)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외지에서 온 순례자들과 대조되는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A.T.Robertson). 그들은 타지역에서 온 사람들에 비해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즉 종교 지도자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의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었다(Vincent). 우쿠 후토스 에스틴(Oujc ou|tov" ejstin;이는 ∼아니냐)은 긍정적인 답변을 예상한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라 온 사람들보다는 그분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제투신(zhtou'sin;저희가 ∼하고자)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복수형으로 쓰여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는 지도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노렸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세상의 불의한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속성이다.

2) 드러나게 말하되 반박하지 아니함
(kai; i[de parrhsiva/ lalei' kai; oujde;n aujtw'/ levgousin. mhvpote ajlhqw'" e[gnwsan oiJ a[rconte" o{ti ou|tov" ejstin oJ Cristov"_
;카이 이데 파르레시아 랄레이 카이 우덴 아우토 레구신 메포테 알레도스 에그노산 호이 아르콘테스호티 후토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6절)
파르레시아(parrhsiva;드러나게)는 예수께서 공공연히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절대자들의 감시의 눈이 많음을 아시면서도 이른 전혀 의식함이 없이 자신의 할 일을 하셨다. 성도에게는 이러한 용기와 담력이 요구된다. 우덴 아우토 레구신(oujde;n aujtw'/ levgousin;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은 지도자들의 약삭빠르고 비열한 태도를 꼬집는다.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했으므로 예수를 임의로 다룰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메포테(mhvpote;아마)는 의문 불변사로서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하며(A.T.Robertson), '혹시 ∼하지나 않았는지'라는 뜻이나(Arndt-Gingrich), 개혁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그들은 당국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웃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당국자들'(a[rconte";아르콘테스)은 '관원'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요3:1;12:42;눅23;35;행4:5,8) 흔히 산헤드린 의원들을 가리킨다(J.Bernard). 에그노산(e[gnwsan;알았는가)은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의중에 대한 의문을 나타낸다. 어디에나 이같은 구경꾼들은 있게 마련이다.

3)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 함
(ajlla; tou'ton oi[damen povqen ejstivn: oJ de; Cristo;" o{tan e[rchtai oujdei;" ginwvskei povqen ejstivn.;알라 투톤 오이다멘 포덴 에스틴…호탄 에르케타이;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오실 때에는, 27절)
투톤(tou'ton;이 사람이)은 예수를 높여 부르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경멸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한 무명 인사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A.T.Robertson). 오이다멘(oi[damen;아노라)은 완료형의 형태를 가졌으나 의미는 현재이다. 사람이나 사람을 아는 것 혹은 사귀어 아는 것, 깨닫거나 경험하는 것등을 가리킨다(Arndt-Gingrich).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의 근원을 알았더라면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 것은 예수의 근원을 알았더라면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 것은 예수의 출신지와 가계 등 인간적인 배경뿐이었으므로 그가 메시야일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고 말았다. 포덴 에스틴(povqen ejstivn;어디서 왔는지)은 예수께서 나사렛의 목수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을 나타낸다.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나셨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A.T.Robertson). 천박한 신학 지식이나 고정 관념은 많은 것을 잃게 만든다(黑崎).

2.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닌 예수(28-31절)

1) 예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심
(kai; ajp j ejmautou' oujk ejlhvluqa, ajll j e[stin ajlhqino;" oJ pevmya" me, o}n uJmei'" oujk oi[date:
;카이 아프 에마우투 우크 엘렐뤼다 알르엘스틴 알레디노스 호 펨프사스 메 혼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8절)
엘렐뤼다(ejmautou;온 것이)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 가다)의 제2완료 시제이다. 그는 자신의 근원이 육신적인 가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신다(黑崎). 우리가 알기에도 무관하다고 주장하신다. 우리가 알기에도 그분의 집은 나사렛이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Wycliffe).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요5:30;7:17;8:28;12:49;14:10 등에서도 언급하셨다. 펨프사스(pevmya";보내신)는 펨포(pevmpw;보내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로, 예수께서 보내심을 받은 것을 나타낸다. 참이신 하나님이 그를 보내다. 선민임을 자하는 유대인들에게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uJmei'" oujk
oi[date;너희는…알지 못하나)는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었다(W.Barclay).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은 아님을 알아야 하겠다(롬2:28).

2) 예수가 그에게서 나심
(ejgw; oida aujtovn, o{ti par j aujtou' eijmi kajkei'nov" me ajpevsteilen.;에고 오이다 아우톤 호티 파르 아우투 에이미 카케이노스 메 아페스테일레;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29절)
에고 오디 아우톤(ejgw; oida aujtovn;나는 아나니)은 영적 분별이 불가능한 유대인들의 상태와는 대조되는 말씀이며(A.T.Robertson), 이 세 개의 단어는 예수의 독특하신 주장을 담고 있다(Bernard). 특히 1인칭단수대명사 예고( ejgw;;나는)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이 세상에 나타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지식만이 참되고 확실하다. 파르 아우투 에이미(par j aujtou' eijmi;그에게서 났고)는 하나님이 자신의 출처가 되신다는 대담한 선언이다.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쉬운 말이 아니다. 문자적으로는 '아버지에게서부터 있다'라는 뜻이다. 파르(par j;에게서)란 발생시키거나 지시하는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전치사이며, 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나옴을 말해 준다(Arndt-Gingrich).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n;보내셨음이니라)은 단순과거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은 결구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함
( jEzhvtoun oun aujto;n piavsai, kai; oujdei;" ejpevbalen ejp j aujto;n th;n cei'ra, o{ti ou[pw ejlhluvqei hJ w{ra aujtou'.;에제툰 운 아우톤 피아사이…호티 우포 엘렐뤼데이 헤 호라 아우투;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0절)
에제툰(jEzhvtoun;저희가 ∼하고자 하나)은 제테오(jEzhvtevw;찾다, 애쓰다)의 미완료 시제능동태로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즉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행동에 옮겼음을 시사한다(A.T.Robertson). 피아사이(piavsai;잡고자)는 파아조(piavzw;붙잡다, 체포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이다. 그들의 적대감은 공권력을 이용,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우포 엘렐뤼데이(ovu[pw ejlhluvqei;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과거 완료 능동태이다. 유대인들의 계획이 좌절된 원인을 요한은 하나님께서 접하신 때와 관련시켰다. 사실상 예수님의 박해와 죽음은 예정된 과정을 따라서 진행되고 있었다(Bernard). 성도는 핍박 중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하게 서기 때문이다.

3. 보내신 이에게 돌아가실 예수(32-36절)

1)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실 것임
([Eti crovnon mikro;n meq j uJmw'n eijmi kai; uJpavgw pro;" to;n pevmyantav me.;에티크로논 미크론 메드 휘몬 에이미 카이 휘파고 프로스 톤 펨프산타 메;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3절)
에티 크로논 미크론(Eti crovnon mikro;n;조금 더 있다가)에는 아직 되지 않은 시간을 가리켜 사용되는 부사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대격이 함께 쓰였다(Arndt-Gingrich, A.T.Robertson). 주님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이러한 표현을 하셨을 것이다. 휘파고(uJpavgw;돌아가겠노라)는 '철수하다'라는 개념을 지닌 단어로 사람 앞에서 떠나가 버리는 것이나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해서 쓰이며, 여기에서처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나타낼 때에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Arndt-Gingrich). 70인역(LXX)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 신약에서는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말로 쓰이며(요8:14,21;13:3,33,36;14:4,5,28;15:16;16:4,7,10,17), 모든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우리는 그때를 위해서 빈틈 없이 준비해야 하겠다(하9:27).

2) 저희가 찾아도 만날 수 없음
(zhthvsetev me kai; oujc euJrhvsetev 팵e?, kai; o{pou eijmi; ejgw; uJmei'" ouj duvnasqe ejlqei'n.;제테세테 메 카이 우크 휴레세테 메 카이 호푸에이미 에고 휘메이스 우 뒤나스데 엘데인;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34절)
우크 휴레세테 메(oujc euJrhvsetev 팵e;만나지 못할 터이요)는 휴리스코(euJrhvsetev;찾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는 부정사 우크(oujc;못할)와 함께 쓰여 그들이 예수를 찾고자 힘써도 만날 수 없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J.G.Marchen). 예수를 제거하는 일차적 목적은 달성할 수 있겠지만 구원의 갈망이다. 좀더 큰 목표는 좌절될 것임을 시사한다(A.T.Robertson). 기회를 놓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일종의 경고이다(黑崎). 즉 지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J.Bernard). 우 뒤나스데 엘데인(ouj duvnasqe ejlqei'n;오지도 못하리라)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제2단순과거 부정사이다. 예수가 계신 곳에 올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선심이라든가 경건이 모두 무익한 것임을 암시한다. 대단히 절망적인 선포이다. 길은 예수밖에 없다(요14:6)

3)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무리
(Pou' ou|to" mevllei poreuvesqai o{ti hJmei'" oujc euJrhvsomen aujtovn_ mh; eij" th;n diaspora;n tw'n JEllhvnwn mevllei poreuvesqai kai; didavskein tou;" {Ellhna"_;푸 후토스 멜레이 포류에스다이 호티 헤메이스 우크 휴레소멘 아우톤…카이 디다스케인 투스 헬레나스;이 사림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5절)
푸(Pou';어디로)는 장소에 대한 의문 대명사로 '어디, 어디서, 어디로'를 뜻한다. 여기서는 직접 질문을 나타낸다(Arndt-Gingrich). 유대인들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곳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우크 휴레소멘 아우톤(oujc euJrhvsomen;저를 만나지 못하리요)은 휴리스코(euvrsomen;만나다, 발견하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을 만날 수 없다는 선포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한편 '헬라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란 구약 시대부터 가나안 땅을 떠나 헬라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런 디아스포란(diaspora;n;흩어져 사는 자들)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본문의 말 속에도 이런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약1:1;벧전1:1에 더 언급되어 있다.

 

 

요 7:37~44 목마른 자를 위한 생수의 장

갈증의 영원한 해결

본문에서는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복음서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는 생수의 강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갈등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과제이다.

1. 명절 끝날의 주의 설교(37,38절)

1) 명절 끝날에 서서 외치심
( jEn de; th'/ ejscavth/ hJmevra/ th'/ megavlh/ th'" eJorth'" eiJsthvkei oJ jIhsou'" kai; e[kraxen levgwn;엔 데 테 에슼테 헤메라 테 메갈레 테스 헤오르테스 헤이스테케이 호 예수스 카이 에크락센레곤;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37a절)
헤메라 테 메갈레(hJmevra/ th'/ megavlh;큰 날에)는 칠 일 동안의 초막절(레23:33-36;민29:12-34) 행사를 끝내고 제8일에 안식일처럼 성회로 모였음을 나타낸다(민33:36). 이 초막절은 출애굽 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광야 여정 중 돌보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다. 이를 '큰 날'이라 지칭한 것은 아마도 광야의 여정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들어온 기념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Lange). 헤이스테케이(eiJsthvkei;서서)는 히스테미(i{sthmi;서다)의 과거 완료 능동태이다. 예수께서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으나 공공연히 활동하셨음을 알게 한다. 목을 노리는 대적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에크락센(e[kraxen;외쳐)은 크라조(kravzw;외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로 그분이 갑자기 외치신 것을 묘사한다(A.T.Robertson). 중요한 일은 뒤로 미루는 게 아니다.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나 현재임을 유념해야 하겠다.

2) 목마른 자들을 부르심
( jEavn ti" diya'/ ejrcevsqw prov" me kai; pinevtw.;에안 티스 딥사 에르케스도 프로스 메 카이 피네토;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7b절)
티스(ti";누구든지)는 인종이라든지 국적, 피부 색깔,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 사람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벽들을 원천적으로 뛰어넘는 선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차별하는 법이 없으시다. 그분의 부름시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므로 누구라도 은혜의 향연에 참여할 수 있다. 딥사(diya;목마르거든)는 디파오(difavw;목마르다)의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계속적으로 목이 마른 상태를 시사한다(J.G.Machen). 목마른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충은 매우 큰 것이며, 물만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본 절의 주께서 마시라고 언급한 물은 육신을 충족시키는 음료가 아니다. 즉 생명의 성령을 가리킨다. 인생의 갈증은 성령의 역사와 충만을 통해서만 해갈될 수 있다.
에르케스도(ejrcevsqw;와서)와 피네토(evtw;마시라)는 모두 현재 명령으로 언제든지 와서 마시라는 지속성을 함축한다. 주께로 나와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음을 묘사한다. 누구라도 지금 나아와 끝 없이 주시는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있다.

3) 주를 믿는 자의 축복
(oJ pisteuvwn eij" ejmev, kaqw;" eipen hJ grafhv, potamoi; ejk th'" koiliva" aujtou' rJeuvsousin u{dato" zw'nto".;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포타모이 에크 테스 코일리아스 아우투 류수신 휘다토스 존토수;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38절)
피스튜온(pisteuvwn;믿는)은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믿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서 그분을 영접하고 계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W.Barclay). 예수에 관해 안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지적인 앎은 여하한 경우에도 믿음을 대신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리스도라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터에 연결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직접적인 인용 구절은 없으나 비슷한 내용으로 사55:1;58:11;8;47:1;욜3:18;슥13:1;14:8 등이 있고,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사28:16로 주장하기도 한다. 포타모이(potamoi;강)는 본문에서 흐르는 많은 양의 생명의 물을 가리킨다(Arndt-Gingrich). 성령이 역사하는 사람 안에서 흘러나는 생수이다(Smith-Lee). 여기서 새로운 삶에 대한 풍요로운 약속이 성령과 관련이 있음을 유념해야 하겠다(Wycliffe). 류수신(rJeuvsousin;흘러나리라)은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성령의 역사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 외부로까지 나타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예수를 통해서만 흘러나온다.

2. 무리의 엇갈린 반응(39-41절)

1) 믿는 자가 받게 될 성령
( tou'to de; eipen peri; tou' pneuvmato" o} e[mellon lambavnein oiJ pisteuvsante" eij" aujtovn: ou[pw ga;r hn pneu'ma, o{ti jIhsou'" oujdevpw ejdoxavsqh.;투토 데 에이펜 페리 투 프류마토스 호 에멜론 람바네인 호이 피스튜산테스 에이스 아우톤;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39절)
페리 투 프뉴마토스(peri; tou' pneuvmato";성령을 가리켜)는 직역하면 '성령에 대하여' 혹은 '성령에 대하여' 혹은 '성령에 관련하여'가 된다(Arndt-Gingrich). 여기서 '성령'은 오순절에 임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아직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이었다(Wycliffe). 에멜론 람바네인(e[mellon lambavnein;받을)은 멜로(mellon;∼하려고 하다, ∼할 작정이다)의 미완료 능동태가 람바노(bavnein;취하다, 받다)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를 수반하여 사용되었다. 이 경우의 의미는 '바야흐로∼받으려고 하다, ∼받으려고 ∼할 작정이다, ∼하게 되어 있다' 등이 된다(Arndt-Gingrich).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다(A.T.Robertson). 또한 믿는 자들,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게 될 놀라운 변화를 예기케 한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케 되며, 항상 만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W.Barclay).

2) 예수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 jEk tou' o[clou oun ajkouvsante" tw'n lovgwn touvtwn e[legon, Ou|tov" ejstin ajlhqw'" oJ profhvth":;에크 투 오클루 운 아쿠산테스톤 로곤 투톤 엘레곤 후토스 에스틴 dkffpehytm 호 프로페테스;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거자라 하며, 40절)
에크 투 오클루(jEk tou' o[clou;무리 중에서)는 예수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일단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동일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항상 양분되게 마련이다. 이 헬라어 관용구가 종종 사용되고 있다(A.T.Robertson). 아쿠산테스(ajkouvsante";들은)는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본 절에서 예수가 명절 끝 날에 행하신 설교를 경청한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한분의 설교를 들었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귀고 듣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호 프로페테스(oJ profhvth";그 선지자)에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거나 해석하는 사람, 특별한 준비와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람 등을 지칭한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 예언의 능을 받은 사람들이 이 이름으로 불러왔다(Arndt-Gingrich). 그런데 본문에서는 호(oJ ;그)가 언급되어 모세가 구약에서 예언한 선지자를 지칭하는 것 같다(신18:15).

3) 출신 지역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oiJ de; e[legon, Mh; ga;r ejk th'" Galilaiva" oJ Cristo;" e[rcetai_;호이 데 엘레곤메 가르 에크 테스 갈리라이아스 호 크리스토스 에르케타이;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1절)
메(Mh;)는 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이다. 의지라든지, 소원, 의심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며, 우(ouj)와는 달리 어떤 사실보다는 그 개념으로 부정한다(Arndt-Gingrich).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하는 질문에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A.T.Robertson). 예수를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즉시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그의 향리에서 나시게 될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어디에서 출생하셨는지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무지라 하겠다.
에르케타이(e[rcetai;나오겠느냐)는 인격적 존재의 나타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신적 존재의 임재를 표현할 때에도 자주 사용된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를 갈릴리 출신으로만 알고 있었으므로 그분을 통해 나타나는 신적 역사들을 보면서도 끝내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3. 예수로 인한 무리의 쟁론(42-44절)
1) 구약성서에 대한 이해
(oujc hJ grafh; eipen o{ti ejk tou' spevrmato" Dauivd, kai; ajpo; Bhqlevem;우크 헤그라페 에이펜 호티 에크 투 스페르마토스 다위드 카이 아포 베들레엠;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베들레헴에서, 42절)
그라페(grafh; ;성경)는 문자적으로는 '기록물'을 의미하는데, 신약성서에서는 전적으로 성서를 가리켜 사용되었다(Arndt-Gingrich). 70인역(LXX)에서도 때때로 '거룩한 성경'을 암시한다(G.Schrenk).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거부 이유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탄생의 장소(미5:27)와 불일치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셨으나(마2:23),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즉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이런 그분의 출생에 대해 유대인들이 정확한 지식이 가지지 못함에서 빚어진 결과이다(A.T.Robertson). 에크 투 스페르마토스(ejk tou' spevrmato";씨로)는 '다윗의 후손, 자손'을 의미한다. 성경은 한결같이 이에 관해 언급하였으므로 다른 가계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몇 가지 징후만 보고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로 말미암은 쟁론
(scivsma oun ejgevneto ejn tw'/ o[clw/ di j aujtovn.
;스키스마 운 에게네토 엔 토 오클로 디 아우톤;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34절)
스키스마(scivsma;쟁론이)는 '찢어지기, 갈라지기, 분열, 불화'를 뜻한다(Arndt-Gingrich). 의견의 차이나 논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 단어이다. 분열은 교리상의 차이라든지 서로
들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데서 생겨 날 수 있다. 에게네토(ejgevneto;되니)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으로 개시를 나타낸다. 하나님 안의 평화와 성령을 통한 일치가 없는 곳에서는 이같은 일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결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분은 우리가 무릎 끓고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무미건조한 신학 논쟁에만 정열을 쏟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W.Barclay). 지금 교회 내에 잔존하고 있는 분쟁들도 마찬가지다.

3) 예수께 손을 대지 못함
(tine;" de; h[qelon ejx aujtw'n piavsai aujtovn, ajll j oujdei;" ejpevbalen ejp j aujto;n ta;" cei'ra".; 티네스 데 에델론 엑스 아우톤 피아사이 아우톤 알르 우데이스 에페발렌 에프 아우톤 타스 케이라스;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4절)
에델론 파아사이(h[qelon piavsai;잡고자하는)는 델로(qevlw;원하다)의 미완료 능동태와 피아조(piavzw;붙잡다, 체포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이다. 직역하면 '체포하기를 계속적으로 원하는 혹은 체포하기를 계속적으로 기뻐하는'이 된다(A.T.Robertson). 예수를 제거하려는 적대자들의 음모가 계속 진행 중임을 시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포기한 것도 아니며, 사단의 이같은 음모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잇다. 에페발렌(ejpevbalen;내는)은 에피발로(ejpiavllw;없다, 손을 대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잡고자 찾는 예수께서 가까이 계셨음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黑崎).

 

 

 

요 7:45~53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갑론을박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

본문에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서로 엇갈린 견해가 언급되고 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은 진리를 보고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릇된 고정관념이 가져다 주는 극심한 폐해의 단면이다.

1. 주인보다 지혜로운 하속들(45,46절)

많이 안다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영적 지식은 세속적인 지식의 분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하겠다.

1) 하속들의 현명한 처신
( Hlqon oun oiJ uJphrevtai pro;" tou;" ajrcierei'" kai; Farisaivou";엘돈 운 호이 휘페레타이 프로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파리사우스;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45a절)
엘돈(Hlqon;오니)은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을 보낸, 즉 고용한 이들에게로 온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고용된 사람들이었으므로 어떤 성과를 가지고 가야만 했고,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 성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보인다. 휘페레타이(uJphrevtai;하속들)는 휘페레테오(uJphretvew;섬기다, 봉사하다, 도움이 되다)와 동일 어군으로 '하인, 조수, 사환'을 뜻한다(Arndt-Gingrich). 휘페레타이(uJphrevtai)는 자유인으로서 자기가 제공한 봉사의 저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가 있으므로 둘로스(douvlo";종, 노예)와는 구별된다. 70인역(LXX)에서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신약에서는 다른 사람의 의도를 보조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나타난다(K.H.Rengstorf). 본 절의 하속들은 소신껏 행동했으나, 그들의 이러한 처신은 지도자들을 실망시켰다. 진리를 좇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처신이 요구된다.

2) 보낸 자들의 힐책
(kai; eipon aujtoi'" ejkei'noi, Dia; tiv oujk hjgavgete aujtovn_;카이 에이폰 아우토이스 에케이노이 디아 티 우크 에가게테 아우톤;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나, 45b절)
에이폰(eipon;묻되)은 레고(levgw;말하다)의 제2과거로 쓰였으나 의미는 현재이다. 유대지도자들의 질문은 질타 내지 힐책의 성격을 디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보낸 자들이 빈 손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A.T.Robertson). 에가게테(hjgavgete;잡아오지)는 아고(a[gw;인도하다, 체포하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 사람들의 임무는 예수를 체포하여 데려오는 것이었는데 그대로 왔기 때문에 힐책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유대 지도자들이 미쳐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들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 자신들과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예수를 곧 심문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는 좌절되고 말았다(Dods).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인간의 계획은 결코 성취되지 못한다.

3) 마음에 감동을 받는 하속들
(ajpekrivqhsan oiJ uJphrevtai, Oujdevpote ejlavlhsen ou{tw" a[nqrwpo".;아페크리데산 호이 휘페레타이 우데포테 엘랄레센 후토스 안드로포스;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아페트리데산(ajpekrivqhsan;대답하되)은 아포크리노마이(ajpekrivnomai;대답하다, 큰소리로 이야기하다)의 단순과거 직설법이다. 그들은 상관들의 힐책에 즉시 답변했다.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는 일에 정직한 답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예수님의 높은 인격과 그분의 가르치신 말씀으로 인한 감동이 그들로 용기 있는 답변을 하게 했을 것이다. 우데포테 엘랄레센(Oujdevpote ejlavlhsen;말한…이때까지 없었나이다)은 전례가 없었음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건을 그들이 목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압도한 것은 예수님의 역사 하심이라기보다는 바로 그분의 말씀이었다(A.T.Robertson).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어떤 초자연적인 권위를 느꼈기에 그분을 체포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Wycliffe). 거룩하신 자 앞에서 인간이 갖게 되는 공통된 경험이다(사6:5).

2. 바리새인들의 아집과 독선(47-49절)

고정관념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반재자들의 생각이 옳고 합당해도 이를 수용할 만한 능력이 없다. 바리새인들의 아집과 독선을 결국 자신들을 파멸로 몰고갔다.

1) 미혹된 것으로 단정함
(ajpekrivqhsan oun aujtoi'" oiJ Farisai'oi, Mh; kai; uJmei'" peplavnhsqe_;아페크리데산 운 아우토이스 호이 파리사이오이 메 카이 휘메이메 페플라네스데;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7절)
아페크리데산(ajpekrivqhsan;대답하되)은 낭패하게 된 바리새인들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멸시와 조롱을 예상할 수 잇다. 그들은 안하무인격의 생활에 익숙한 자들이었으므로 하속들의 우월함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A.T.Robertson). 메(Mh)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형식으로,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믿고 있었다. 또한 이는 하속들에 대한 강한 불만의 표시이다. 페플라네스데(peplavnhsqe;미혹되었느냐)는 플라나오(planavw;길을 잃게 하다, 속이다)의 완료 수동태이나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완전히 옹호해야 할 그들이 예수를 변호하는 데 대해 자신들이 입게 된 충격이 적지 않음을 보여 준다 .폐쇄적 사고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위를 주장하게 되므로 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2) 당국자들 중에 믿는 이가 없음
(mhv ti" ejk tw'n ajrcovntwn ejpivsteusen eij" aujto;n h] ejk tw'n Farisaivwn_;메 티스에크 톤 아르콘톤 에피스튜센 에이스 에 에크 톤 파리사이온;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48절)
아르콘톤(ajrcovntwn;당국자들)은 아르코(a[rcw;지배하다, 다스리다)의 분사로서 명사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통치자 및 일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데, 대제사장이나 회당을 맡아보는 이 산헤드린 의원, 재판관, 이방관헌 등이 지칭되었다(Arndt-Gingrich). 이들은 유대를 움직이는 그룹에 속한 자들로 본문에서는 산헤드린 공회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피스튜센(ejpivsteusen;믿는)은 피스튜오(pisteuvw;믿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한 사람이라도 믿었느냐'가 된다(A.T.Robertson).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모든 사람의 사상이나 행위를 규제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들이 행하는 것은 옳고 합당하며,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거부하는 것은 그릇되었다는 우스꽝스러운 논리이다. 하속들이 보인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약화된다는 불안감을 조성케 했고, 예수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된 실제적인 이유가 되었다. 우월주의, 이기주의는 속히 버려야 할 폐습이다.

3) 율법을 빙자하여 저주함
(ajlla; oJ o[clo" ou|to" oJ mh; ginwvskwn to;n novmon ejpavratoiv eijsin.;알라 호 오클로스 후토스 호 메 기노스  톤 노몬 에파라토이 에스틴;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49절)
호 오클로스 후토스(oJ o[clo" ou|to";이 무리)는 예수께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군중을 지칭한다. 특히 정관사 호oJ는 그 무리를 지적하여 언급한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암 하아레츠($rah[;땅의 백성)를 경멸하고 있었다(A.T.Robertson).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무조건 정죄하는 태도는 경건과 거리가 멀다. 호 메 기노스콘(oJ mh; ginwvskwn;율법을 알지 못하는)은 현재 능동태 분사이며, 통상적인 부정사 메(mh;)와 함께 쓰여 랍비들의 경멸하는 태도를 진솔하게 표현한다. 그들은 예수까지도 함께 이 범주 속에 포함시켰으며, 그분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율법에 무지한 때문이라고 매도하려 했다(Wycliffe). 에파라토이 에스틴(ejpavratoiv eijsin;저주를 받은 자로다)은 에파라오마이(ejparavomai;저주를 빌다)의 고대 동사적 형용사로 신약에서는 여기에서만 발견된다(Arndt-Gingrich). 그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지혜롭고 선하므로 예수가 필요치 않다는 무서운 생각에 지배되고 있었다(행4:12).

3. 니고데모의 변호(50-53절)

니고데모는 당국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으나 그의 소극적인 태도는 칭찬받기에 미흡하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선다면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마련이다.

1) 전에 예수를 만난 니고데모
(levgei Nikovdhmo" pro;" aujtouv", oJ ejlqw;n pro;" aujto;n 퍁o;? provteron, ei|" w]n ejx aujtw'n,;레게이 니코데모스 프로스 아우투스 호 엘돈 프로스 아우톤[토] 프로테론 헤이스 온 엑스 아우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50절)
레게이(levgei;말하되)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바리새인들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반대론이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서 제기되었으며,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은 것이다. 말을 해야 할 때에 말을 아끼는 사람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고 말을 아껴야 할 때에 말을 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인데, 니고데모는 용기가 있는 자였다.
엘돈(ejlqevn)은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제2단순과거 분사로 이는 니고데모가 예수와 조우했었음을 표현한다. 예수를 만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용기 있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소극적으로라도 진리를 옹호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으므로 우리는 그의 행동을 높이 평가함이 마땅하다. 예수를 만나면 사람이 바뀐다.

2) 율법의 판결 원칙
(Mh; oJ novmo" hJmw'n krivnei to;n a[nqrwpon eja;n mh; ajkouvsh/ prw'ton par j aujtou' kai; gnw'/ tiv poiei';메 호 노모스 헤몬 크리네이톤 안드로폰 에안 메 아쿠세 프로톤 파르 아우투 카이 그노 티포이에이;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1절)
메…크리네이(Mh; ... krivnei;판결하느냐)에서 메(mh;)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이다. 니고데모의 말은 당국자들의 행위가 율법을 위반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항의가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분명하게 표현한 셈이었다(A.T.Robertson). 에안메 아쿠세(eja;n mh; ajkouvsh;듣고)는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을 수반한 제3조건문으로 부정을 나타낸다. 소송 사건에서 피고의 진술을 듣는 것은 모든 법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정의임에도 이를 무시한 당국자들의 태도를 그는 힐책한 셈이다. 그노(gnw';알기)는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인데 여기서는 간접 의문문으로 쓰였다. 진실을 폭로한 니고데모의 행위를 기독교 지도자들은 배워야 한다.

3) 선지자가 날 수 없는 갈릴리
(Mh; kai; su; ejk th'" Galilaiva" ei_ ejrauvnhson kai; i[de o{ti ejk th'" Galilaiva" profhvth" oujk ejgeivretai.;메 카이 쉬 에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이 에라우네손…프로페테스 우크 에게이레타이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52절)
쉬 에크 테스 갈릴라이아스(su; ejk th'" Galilaiva";너도 갈릴리에서)는 니고데모를 노골적으로 모욕하며 무리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표현이다(A.T.Robertson). 그들은 그의 출신지를 알고 있었지만 예수를 두둔하므로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에라우네손(ejrauvnhson;상고하여)은 에라우나오(ejraunavw;조사하다, 감사하다 살피다)의 단순과거 명령법으로 강한 요청을 나타낸다.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있는지 조사해 보라는 것이며, 결국 그들은 갈릴리 출신인 예수를 결코 인정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Wycliffe). 예수를 변호하려면 조소와 멸시가 따를 수 있고 때로는 희생도 각오해야 함을 잘 알게 한다(딤후3:12,W.Barc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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