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복음서 연구

요한복음 6장 캐논주석

by 은총가득 2020. 11. 30.

요한복음 6장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서의 생명의 떡

요한복음6장 참 생명의 떡 예수

 

예수께서 갈릴리 북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건너가신다. 큰 무리가 따르지만 외형적 표적을 보고 따르는 자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들을 먹일 믿음의 능력이 없다. 예수께서만 그 백성을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야이심을 보인다.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의 핵심은 대속적 죽음인 것을 밝히시고 이것은 참된 제자도의 정체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1. 오천 명을 먹이신 메시야적 표적(1-15절)

1) 표적을 보고 따르는 큰 무리

1절의 '그 후에'는 앞 문맥과 직접 연결되지 않음으로 그 사이 기간은 2절의 '큰 무리가 따르니'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즉 큰 무리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큰 무리에 대한 구절들 사이에서 3절의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휴식과 영적 회복의 시간에도 표적을 보고 따르는 큰 무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요한의 의도를 보여 준다.

4절의 '유월절'은 둘째 유월절로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사를 암시하며 동시에 큰 무리가 모일 수 있는 배경을 암시한다. 또한 5절의 '먹게 하겠느냐'와 11,12절은 그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당시의 유대교를 반영한다.

 

2)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심

5절의 '눈을 들어 큰 무리가…보시고'는 요4:35의 추수 말씀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는 영적인 양식을 먹여야 할 사명을 암시한 것이다. 6절의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는 그가 물질적인 떡을 나눠 주는 초자연적 능력을 베풀어야 할 것과 동시에 예수께서 친히 영생의 떡임을 가리칠 것을 포함한다. 빌립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대답했어야 했을 것이다.

 

3)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메시야적 표적

10절 '앉게 하라'는 기적을 준비하는 예수의 첫 명령이다. '잔디가 많은지라'와 '오천쯤'은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역사적 신빙성을 더해 준다. 11절의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나눠 주시고'는 모세의 출애굽 구원 사건을 연상하게 하므로 예수께서 종말의 제2의 모세로서 구원을 베푸는 것을 상징한다. 11절의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와 12절의 '배부른 후에'와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등은 모두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14절의 '그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는 단편적이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고한다. 그러나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것은 메시야적 칭호로서 그들이 예수의 메시야 되신 신분을 인정하는 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15절의'예수께서…아시고'와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는 당시 유대교의 정치적 메시야 사상을 배격하는 예수의 의도를 보여 준다.

 

2.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제자들과 무리(16-25절)

1) 예수를 떠난 제자들

16절에서 '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가'는 것은 15절의 예수께서 혼자 산으로 가시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 대조를 통해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왕이 되시지 않은 것으로 인해 실망했음을 암시한다. 17절의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와 '이미 어두웠고'는 그들이 예수를 늦게까지 기다렸음을 암시한다. 18절의 '큰 바람'과 '파도'와 19절의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와 '두려워하거늘'은 예수를 떠난 제자들에게 생명이 아니라 심판이 주어진 것을 상징한다.

 

2) 예수를 다시 영접한 제자들

20절의 '내니'는 에고 에이미(ejgwv eijmiv)로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신적 권위를 암시한다. '두려워 말라'는 신현의 배경을 암시한다. 21절이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는 예수께서 함께하심으로만 제자들의 믿음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을 보여 준다.

 

3) 예수를 찾는 무리들

22절의 '이튿날'과 '무리'는 파도 속에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의 상황과 대조를 이룬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는 그들이 이튿날까지 예수를 기다린 것을 암시한다.

 

3. 내가 곧 생명이 떡이라(26-72절)

1) 무리들에게 믿음을 촉구하심

26절의 '표적'과 '배부른'것이 대조되므로 예수께서 표적을 전혀 배제하신 것은 아니다. 단지 물질적 표적을 통하여 참된 영적 표적을 알기 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27절에서 '썩는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메시야적 사역과 관련해서 대조된다. 이 영생의 양식은 인자, 즉 초월해서 오신 예수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는 단7;13 이하에서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은 것을 상기시킨다. 28절의 '어떻게 하여야'(무리들의 질문)와 29절의 '믿는 것'(예수의 대답)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상반적 견해를 보여 준다. 마침내 무리들의 질문인 30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당신'으로 규정된다.

31절에서 무리들은 메시야적 표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보여 준다. 그러나 문제는 무리들이 '항상' 표적을 구한다는 데 있다. 32절에서 예수는 더 이상의 표적을 제시하지 않고 이미 오천 명을 먹이신 떡과 고기가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것, 특히 자신이 하나님의 떡으로서 생명을 주러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실 것을 약속한다. 36절 이하에서는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가 아닐지 모른다는 심판을 경고한다. 37절의 '결코 내어쫒지 아니하리라'와 39절의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는 그의 구원의 열망을 암시한다.

 

2) 유대인들에게 증거하심

41절의 '하늘로서'와 42절의 '요셉의 아들'이 대조를 이루며 유대인들이 예수의 메시야됨을 거부하는 것을 암시한다, 44절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와 45절의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와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 일치된다. 이것은 원래 메시야 시대를 상징하는 사54:13을 반영한다. 다시 46절의'아버지를 본 자'와 45절의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 일치된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는 예수인 것을 암시하여 예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요 예수에게 배운 사람은 아버지께 배운 것으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47절에서 '믿는 자'와 일치한다. 49절의 '광야에서 만나'의 한시성과 50절의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의 영원성이 대조된다.

51절에서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의미하지만 이차적으로는 51절의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 의미하듯이 그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하는 성만찬적 언어를 말한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하는 표현은 52절에서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갖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계속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당시의 성전 제사식 그림을 자기에게 적용시킨다.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와 57절의 '나를 먹는'은 당시의 정치적 메시야 사상을 배제하는 도전적 말씀이다.

 

3) 제자들에게 증거하심

예수의 도전적인 대속적 메시야 사상은 제자들에게도 어려운 말씀이었다. 61절의 제자들의 '소란'은 제자들의 부정적이고 배신적이고 불신앙적 태도를 암시한다. '걸림이 되느냐'는 도전적 말씀은 이 대속적 죽음이 참된 제자도의 근본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62절의 '인자의 이전 있던 곳'은 인자의 살과 피와 대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암시한다. 63절에서 영과 육이 대조되는데. 영은 하늘의 실제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67절의 '열두 제자', 특히 베드로는 예수를 영생의 말씀으로 선재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한다.

 

오병이어 표적의 배경(요6:1-9)

 

◈ 원문강해 ◈

 

무리와 제자들의 영적 무지

 

1.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는 이유(1,2절)

1) 바다 건너편으로 가심

(Meta; tau'ta ... pevran th'" qalavssh" th'" Galilaiva" th'" Tiberiavdo". 메타 타우타…페란 테스 달랏세스 테스 갈리라이아스 테스 티베이라도스; 그 후에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1절)

'그 후에'(Meta; tau'ta메타 타우타)는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 시간의 부사이다(요2:123:22;5:1;7:1). 이 시점이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본서의 문맥상 앞 장의 사건과 연결된다고 볼 때 그 기간은 약 몇 개월 내지(R.C.H.Lenski). 일 년(A.T.Robertson)의 차이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의 차이는 요5:1에 언급된 '유대인의 명절'(eJorth' tw'n jIoudaivwn헤오르테 톤 유다이온)이 어느 절기를 뜻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하튼 앞 장에서 38년된 병자가 치유함을 받는 사건과 본 장의 오병이어 표적 사이에는 상당 기가늬 시간적 간격이 있다. 한편 테스 티베리아도스(th'" Tiberiavdo"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이름은 헤롯 안디바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찬양하기 위해서 세운 도시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갈릴리 바다를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디베랴 바다 건너편, 곧 벳새다로 건너가셨다.

 

2) 큰 무리가 따름

(hjkolouvqei de; aujtw'/ o[clo" poluv" 에콜 루데이 데 아우토 오클로스 폴뤼스; 큰 무리가 따르니, 2a절)

'큰 무리'(o]clo" poluv"오클로스 폴뤼스)는 막 6:33,34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들의 수는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C.K.Barrett).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한편 에콜루데이(hjkolouvqei따르니)는 미완료 과거로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큰 무리가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행하실 때부터 계속해서 예수를 추종하며 따라다녔음을 의미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의 인기도를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추종하였다(R.C.H.Lenski).

 

3) 표적을 보았기 때문임

(o{ti ejqewvroun ta; shmei'a a} ejpoivei ejpi; tw'n ajsqenouvntwn. 호티 에데오룬 타 세매이아 하 에포이에이 에피 톤 아스테눈톤;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2b절)

본문은 호니(o}ti이는)로 시작되는 문장으로서, 앞서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는 진술의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두 동사, 곧 '행하시는 (ejpoivei에포이에이)과 '봄이러라'(ejqewvroun에데오룬)는 모두 미완료 시상이다, 이는 무리들이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 해오셨던 여러 가지 표적들을 지속적으로 지켜보아 왔음을 의미한다(L.Morris). 한편 '표적(ta; shmei'a타 세메이아)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행하신 이적이나 권능, 기사를 뜻하나 그것은 그 자체를 의미하거나 목적으로 삼는 것을 시사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이적이나 권능의 차원을 넘어서 이는 단순히 이적이나 권능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그것은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이적과 권능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 곧 메시야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이적과 권능을 행하셨다. 무리들은 이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다만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이적에만 매료되어 있었다.

 

2. 제자들을 시험하심(3-6절)

1) 산에 올라가 앉으심

(ajnh'lqen de; eij" to; o[ro" ... kai; ejkei' ejkavqhto ... h\n de; ejggu;" to; pavsca 아넬덴 데 에이스 토 오로스…카이 에케이 에카테토…엔 데 앵귀스 토 파스카; 산에 오르사…거기 앉으시니…유월절이 가까운지라, 3,4절)

에이스 토 오로스(eij" to; o]ro"산에)는 높이가 상당한 산에 오르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목적은 에카테토(ejkavqhto앉으시니)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미완료 중간태 3인칭 단수로서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앉으셨다는 의미이며 곧 쉬는 것을 뜻한다. 이는 휴식의 모습을 나타낸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오셨으며, 몰려드는 큰 무리로부터 피하여 쉬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을 수도 있다(A.T.Robertson).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앉는 것이 그분의 습관 이셨다고 보기도 한다(J.Bernard). 마14:23막6:46등에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신 것이 언급되어 있다.

한편 '유월절'(to; pavsca토 파스카)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맞이한 두 번째 유월절일 수도 있고(요2:13), 요5:1을 유월절로 보아 세 번째 맞이한 절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번째 유월절이냐가 아니라 오병이어 표적과 유월절의 관계성이다. 비록 본문의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생명의 떡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성만찬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R.C.H.Lenski) 본서에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성만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과 유형론적 해석, 곧 유월절 양의 희생과 예수의 죽음, 만나와 생명의 떡, 출애굽과 죄로부터의 구원을 뜻하는 영생 등과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 오병이어 표적 속에 성만찬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개연성이 있다(D.A.Carson, O.Cullmann, C.K.Barrett).

 

2) 어디서 떡을 사서 먹게 하겠느냐

(Povqen ajgoravswmen a[rtou" i{na favgwsin ou|toi_ 포텐 아고라소멘 아르투스 히나 파고신 후토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5절)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몰려든 무리들에게 저녁 때가 되도록 병을 고치시며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요한은 그것을 생략하고 곧바로 무리들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계신 산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몰려오는 무리를 보고 빌립에게 그들을 먹일 방법에 대해 물으셨다. 포덴(Povqen어디서)은 방법을 의미하는 '어떻게'라는 의미로 바꿀 수 있다. 또한 '사서'(ajgoravswmen아고라소멘)는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미래에 있을 사실을 함축하며 본 질문이 깊은 사색을 요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두 단어는 예수께서 빌립에게 하신 질문이 상당한 복선을 깔고 던지신 것임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빌립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질문이었다.

 

3) 빌립에 대해 예수의 시험하심

(peiravzwn aujtovn, aujto;" ga;r h[/dei tiv e[mellen poiei'n. 페이라존 아우톤 아우토스 가르 에데이 티 에멜렌 포이에인;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시험코자 하심이라, 6절)

'아시고'(h]/dei에데이)란 과거 완료로서 불완전 완료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현재의 뜻을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이 당시 알고 계심을 나타내 준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페이라존(peiravzwn시험코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시험하다'이며, 둘째는 시험함으로 '증명하다'이고, 셋째는 시험 결과로 '인정하다'이다. 이것은 때로 부정적인 차원에서 유혹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나 본문에서는 긍정적인 세 가지 의미 중에서 본문에서 사용된 것은 첫 번째로서(R.Earle, L.Morris)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시기 전에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 전체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셨다. 한편 가르(ga;r때문에)는 뒤이어 기록된 문장들이 앞서 언급된 시험하시는 이유임을 의미한다. 또한 가르(ga;r)에 이어 등장하는 에멜렌(e]mellen)은 부정사 포이에인(poiei'n하다)과 결합되어 '하실'이라는 미래 시상을 나타낸다(F.Reinecker). 이는 예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셨을 때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아셨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던지신 질문에 빌립이 어떻게 응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질문하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이제까지 행하신 표적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깨닫도록 유도하며 예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알도록 인도하셨다.

 

3.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의 실패(7-9절)

1) 빌립의 대답

(Diakosivwn dhnarivwn a[rtoi oujk ajrkou'sin ... bracuv i??} lavbh/. 디아코시온 데나리온 아르토이 우크 아르쿠신…브라퀴[티] 라베;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7절)

빌립은 상당히 세상적인 계산법에 근거해 대답하였다.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bracuv ti lavbh브라퀴[티]라베)는 12,13절의 '저희가 배부른 후에…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wJ" de; ejneplhvsqhsan ... ejgevmisan dwjdeka kofivnou"호스 데 에네 플레스데산…에게미산 도데카 코피누스)와 대조를 이룬다. 브라퀴(bracuv조금씩)는 성인들이 최소한으로 간단하게 식사하기 위해 오직 떡만을 먹는 것을 뜻한다. 빌립의 계사네 따르면 모인 무리들이 최소한의 음식만을 먹어도 그 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것이었다.

한편 디아코시온 데나리온(Diakosivwn dhnarivwn이백 데나리온)에서 데나리온은 당시 화폐 단위로 로마의 은전을 가리킨다. 이것은 오늘날의 화폐 기준으로 볼 때 약 17-20센트정도밖에 되지 않지만(R.Earle, F.Reinecker,R.C.H.Lenski) 당시에는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마20:2).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계산할 때 빌립이 식사 비용으로 산출한 '이백 데나리온'은 한 일꾼의 약 8개월임금에 해당한다(NIV,M.C.Tenney).

본문에 기록된 빌립의 대답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 같았지만,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계속해서 행해진 표적을 본 제자의 대답이라고 볼 때 불신앙에서 비롯되었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는 대답이었다.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도 표적을 보고도 병자가 낫는 것에만 빠져서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동일하게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2)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jAndreva" oJ ajdelfo;" Sivmwno" Pevtrou, 안드레아스 호 아델포스 시모노스 페트루;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8절)

빌립에 이어 안드레가 나서서 예수께 여쭈었다. 본서의 저자 요하니 안드레를 소개함녀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jAndreva" oJ ajdelfo;" Sivmwno" Pevtrou,안드레아스 호 아델포스 시모노스 피트루)라고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안드레는 예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한 자이며 베드로를 인도할 때 예수를 메시야로 소개한 자였다(요1:40,41). 다음 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안드레였으메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빌립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제자들의 불신앙과 실패를 확인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3) 안드레의 대답

( [Estin paidavrion w|de o}" e[cei pevnte a[rtou" kriqivnou" kai; duvo ojyavria: ajlla; 에스틴 파이다리온 호테 호스 에케이 펜데 아르투스 크리디누스 카이 뒤오 옵사리아 알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9절)

파이다리온(paidavrion한 아이)은 '아이'(pai'"파이스)의 이중적인 지소사로서 작은 사내아이를 가리킨다(Brown, R.C.H.Lenski). 그가 갖고 있는 '보리떡'(pevnte a]rtou"펜테 아르투스)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저질의 떡이었으며(D.A.Carson, A.T.Robertson), '물고기 두 마리''(duvo ojyavria뒤오 옵사리아)는 반찬으로 먹을 수 있도록 양념이 되거나 구워진 물고기를 뜻한다(C.K.Barrett). 안드레는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를 예수께 내놓았으나, 그것은 결코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갖고 계신 초자연적 능력을 신뢰하여서 취한 행동이 아니었다. 강한 반의 접속사인 알라(ajlla그러나)가 이를 확증한다. 이어 나오는 안드레의 대답, 곧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는 비록 안드레가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예수 앞에 내놓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메시야적 능력을 믿지 않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큰 무리들의 따름(1-4절)

1절에 '그 후'란 불특정한 시간 간격을 나타내는 말로 요한이 자주 쓰는 용어이다(요3:225:1;7:1).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사건을 다룬 5장의 사건 이후, 약 1년정도의세월이 흐른 시간적 간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갈릴리 바다란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언급되었는데, 구약에서는 '긴네렛 호수'로 기술되며(민34:11), 눅5:1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로, 요31:1에서는 '디베랴 바다'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각 복음서의 독자 대상에 따라 쉽게 알 수 있도록 달리 기술된 것 같다. 한편 디베랴란 A.D. 16-22년에 헤롯 안디바에 의해 건립된 서부 해안가의 도시이다(J.Bernard). 이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 이름을 따라 명명되어진 곳으로 헤롯의 친로마 정책을 잘 반영해 준다. 이곳은 휴양지로도 유명했다 한다.

2절의 '큰 무리가 따르니'에서 '따르나'(hjkolouvqei에콜루데이)란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적으로 따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곧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따랐음을 암시해 준다. 그들은 아마 '왕의 신하의 아들'(요4:46-54)의 치유 사건을 듣고부터 좇았을 것이다(J.Bernard).본문에서 '표적'이란 특히 병든 자의 치유 표적을 뜻한다.

3절에서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앉으시니'란 당시 랍비들이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처럼 교훈을 가르치실 때 취하시던 모습이었다(막6:34눅9:10). 특히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고 기록되었다. 한편 막6:30눅9:10에 의하면 이때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제자들은 열두 사도들이었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둔것과 관련 있는 듯하다.

4절의 '유월절'에 대해 많은 사본들이 언급하고 있으나 일부 교부들은 이 절기에 대해 의심한다고 주장한다(A.Plummer). 또한 호트(Hort)같은 학자도 본문의 유월절은 내용상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거 없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본문의 유월절 언급은 연대순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에서 언급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C.Barrett).

한편 요7:2에는 '초막절'이 언급되고 있다. 만약 '유월절'이란 말이 명시되지 않았다면 본문은 초막절을 암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J.Bernard).

 

2. 빌립의 계산과 안드레의 의견(5-9절)

5절에서 '눈을 들어…보시고'란 요4:3511:41;17:1 등에서 예수께 대하여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군주들에 대한 예수님의 동정심과 사랑을 암시한다. 한편 '빌립에게 이르시되'는 예수께서 주도적으로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사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고자 하신 것을 밝혀 준다. 막4:35눅9:12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먼저 요청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본서가 예수님의 신성을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6절의 '이렇게 말씀하심은…아시고'란 요한이 예수의 전지성, 신성을 나타내고자 의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시험코자'(peiravzwn페이라존)는 빌립을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의 신앙 여부를 알고자 하셨음을 뜻한다( C.Barrett).

7절에서 '이백 데나리온'이란 말은 마태나 누가복음에는 언급이 없고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막6:37). 이는 마가복음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어 마가가 기록한 것이고 요한복음은 직접 경험한 요한이 기록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요한이 마가의 기록을 회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생각게 한다(J.Bernard). 한편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전 명칭으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마20:2,9,10).

8절의 '시몬 형제 안드레'는 요1:40에서부터 언급되어 있다. 그는 처음부터 신앙적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빌립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실제적인 답변을 할 수 있도록 어떤 원인을 제공해 주고자 한 자로 묘사된다.

9절에서 '여기 한 아이가…가졌나이다'라는 표현은 다른 공관복음에는 언급이 없다. 요한이 이를 기록한 것은 전승에 기인하거나 막6:38의 '가서 알아 보아라'라는 말을 확대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C.Barrett). 한편 아이가 음식을 가져온 것은 자신의 양식일 수도 있으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J.Bernard).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심(1-4절)

1절에서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되는 본문은 요한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그는 정확하게 이 사건과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일 사이의 시간 경과를 가리키지 않고 있다(M.C.Tenney). 이렇듯 시간에 대해 모호하게 표현한다거나, 예수께서 그 제자들과 함께 오르셨던 산이나 언덕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것은(3절), 저자가 어떤 연대기나 지형적인 세밀함보다는 신학적인 진실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J.E.Carter). 한편 1절의 갈릴리 바다의 '건너편'이란 그 호수의 동쪽 해안을 말하는 것으로 가버나움을 둘러싸고 있는 서쪽 해안의 맞은편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이 호수에 관한 두 가지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Carter). 구약 시대에는 이 호수가 하프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긴네렛'이라고 불리웠으며Carson), '갈릴리 바다'는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디베랴'는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였으며, A.D.16-20년 헤롯에 의해 세워진 도시의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이 호수는 후에 디베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4절의 유월절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에 있는 한 산에 오르셨는데, 아마도 그곳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쉬며, 가르침을 베푸는 정해진 장소였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공관복음의 기록을 살펴보면, 주께서 이렇게 갈릴리 북쪽 언덕으로 피하신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제 그의 죽음을 준비하시고, 그를 위해 끝까지 충성할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가리셔야 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적대감은 점차로 구체화된 반면 , 군중들은 흥분된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정치적 의미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예수께서는 군중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곤 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방법인 정치적 폭동은 원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그는 제자들을 한데 모으시고, 최근 그들의 사역에 대한 보고(막6:30눅9:10)와 세례요한의 처형 소식을 들으셨고, 제자들과 함께 논의하시기 위해 광야로 물러가셨던 것이다(마14:12,13,Tenney). 4절의 이때가 유월절 무렵이었다는 표현은 요한의 또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즉 유월절이나 다른 절기들, 유대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드러난다(Morris). 다드(C.H.Dodd)는 이 유월절의 언급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이 이 기사의 처음 시작을 유월절로 함으로써 결국 이 기사가 가져 올 성만찬의 의의를 처음부터 암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므로, 단지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Morris).

 

2. 빌립의 태도(5-7절)

5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시는 동안에 큰 무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벳새다 출신이고, 그 지역 주민인 빌립에게 어디에서 그들에게 먹일 충분한 음식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그 질문은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하실 일에 대해 아셨기 때문이다(Carter). '시험'이라는 말은 나쁜 의도로 사용될 경우 '증명해 보다, 해보다' 등의 의미가 된다(Morries). 7절에서 빌립은 200데나리온을 갖고 음식을 사도, 그들이 조금씩밖에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스러운 대답을 한다. 빌립이 생각하기에 그 상황은 전혀 희망이 없어 보였다.

 

3. 소년의 도시락(8,9절)

8절에서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도시락을 갖고 있는 한 소년을 예수께 소개한다(Carter). 그가 소년의 소유에 대해 자세히 알았던 것으로 보아 그는 재빨리 현장 조사를 했던 것 같다(Morris). 그러나 빌립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희망이 없다는 태도로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는다(9절). 여기에 나오는 다섯 개의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었으며(Carter),두 마리 생선은 소금에 절이거나 구운 작은 생선으로(Bernard). 그 떡을 좀더 수월하게 먹기 위해 함께 먹는 음식이었다(Carter).

물론 빌립의 비관적인 태도에 비해 안드레가 좀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이기는 했지만(Tenney), 그 역시 그 음식으로 예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을지 의심했고 그 상황에 대해 절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Carter).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시험

 

1. 시험의 의미

시험이란 성경적 개념으로 어떤 사람을 유혹한다는 의미보다는 시험을 통하여 단련한다는 의미이다. 시험은 사람의 성품을 입증하거나 개선하려는 선한 목적, 또는 그 사람의 약점을 폭로하거나 그 사람을 그릇되게 행하도록 올가미를 놓는 악한 목적으로 시행될 수 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입장에서 메시야성을 입증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였다고 했는데, 그 단어는 '시험하다'와 같은 말이다(막8:11).

 

2.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은 신앙과 헌신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해 자기 백성을 시험하신다(창22:1삿2:22).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금속을 제련하듯 사람들을 연단시켜(시66:10)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고 따르도록 인도하신다(롬5:3). 사단은 항상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려고 애쓰지만(벧전5:9) 하나님은 허락만 하시지(마4:1) 자기 백성들이 잘못되도록 시험하시지는 않는다(약1:12이하).

 

3. 시험의 이유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우리들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약1:2,3).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통해 인내하게 하시며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신다. 또 하나의 이유는 복종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이다(창22: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의 깊이와 복종의 진실함을 알기 위해 시험하신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더욱 굳세고 연단된 믿음과 순종, 기쁨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적 인생 노정을 가게 하신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하고 약한 존재로 이런 시험을 통과하고 견딜 때 더욱 새롭게 온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며(마6:13) 시험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마26:41).

 

4. 시험의 방법

시험의 방법은 다양하게 나타나나 대표적인 것은 잠30:9에서 보듯이 가난을 통한 방법이 있으며, 반대로 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또 민22:17에서는 세상의 명예로 시험하기도 하고 시42:11에서처럼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낙망케 함으로 시험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무게의 단위(6:1-9)

◈ 세계배경 문화사 ◈

 

인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물물교환을 하면서 경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특히 건축술이 발달하면서 질량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왜냐하면 건물을 지을 때 무게 중심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폐 경제 이전에는 무게의 비율에 따라 물물교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근동/이집트 : 당시 근동 지역에서 무게를 다는 데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저울이다. 이런 저울은 물건을 다는 데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 심장을 진리 혹은 마아트신의 형상을 나타내는 깃털과 대비하여 달아보는 장면이 「사자의 서」라는 책에 나타나 저울이 내세의 심판 도구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의 저울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집트인의 숫자 개념을 보면 "10의 승(承) 단위로 100만까지 상형 문자로 표시한 십진법과 1/2에서 1/4까지의 분수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도 있다. 저울추의 모양으로는 원통형, 원추형, 반구형, 동물형, 장방형 등의 모양이 사용되었다. 이런 추의 단위를 보면 dbn(데벤)으로 암소의 모양을 한 저울추는 약 91g정도이며, 어떤 추는 "영생을 얻다. 70금(金)dbn"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추의 무게는 대략 945g이다. 따라서 1dbn의 무게는 평균 13.43g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무게의 단위는 각 시대마다 차이가 있다

또한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로는 hkt(케뎃)로 약 5.03ℓ로금속이나 곡물을 측량할 때 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우유·맥주 같은 액체를 측정할 때는 힌(hin)이라는 병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의 무게 단위는 왕조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일관된 기준이 없었다. 다만 이집트는 10진법인 반면 메소포타미아는 60진법을 사용하고 있다. 초기의 저울추에는 "정확한 1/2므나 저울추"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추의 무게는 244.8g 이며 1므나는 489.6g이다. 그러나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왕실에서 쓰는 저울추의 무게와 일반 백성이 쓰는 저울추의 무게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 저울추

+------------+--------------+-------------+

| 구 분 | 경량급 | 중량급 |

+------------+--------------+------------ |

| 달란트 | 30kg | 60kg |

| 므 나 | 500kg | 1kg |

| 세 겔 | 8.33g | 16.67g |

+------------+--------------+-------------+

 

왕실 저울추

+------------+---------------+-------------+

| 구 분 | 경량급 | 중량급 |

+------------+---------------+-------------+

| 달란트 | 30.6kg | 61.2kg |

| 므 나 | 525g | 1.05kg |

| 세 겔 | 8.37g | 16.74g |

+------------+---------------+-------------+

(성서백과대사전 10권,성서교재간행사p874재인용)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곡물과 같은 것을 측량하는 단위는 카(qa), 실라(sila), 수투(sutu)라는 단위로 계산되었다. 카는 다시 1.004리터와 1.34리터로 나누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에는 '이메루'라는 나귀가 한 번 질 수 있는 무게를 단위로 하는 계산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나귀가 한 번에 질 수 있는 짐의 양은 약90kg정도이다. 이를 다시 보리로 환산하면 약 138리터쯤으로 약 100카정도이다. 따라서 당시 "카는 약 1.34리터이고 수투로는 약 13.4리터,이메루는 약 134리터"로환산할 수 있다.

 

동양/중국 : 중국 사회에서 도량형의 발달은 황제(皇帝)가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상업의 발달로 인해 물물 경제 사회에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초기 단계에서는 정확한 단위의 개념이 없이 다만 같이 무게나 부피가 되면 서로 교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해문자」에 보면 척(尺)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주나라 때 촌, 척, 지, 심, 상, 인등의 도량을 제정했는데 모두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사시」의 '하본기(夏本紀)'편을 보면, "몸으로 물건의 길이를 측량하고 물건을 들어올림으로써 무게를 판단했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고공시」에 보면, "1두(豆)의 고기를 먹고 1두(豆)의술을 마신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두의 크기가 일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와 더불어 승(升)이 양을 측량하는 데 함께 사용되었다. 10승이 1두의 비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정확한 측량이 될 수 없으므로 인해 각 시대마다 표준 도량형을 만들게 되었다. 진나라의 상왕은 B.C.344년에 "16과 5분의 1입방촌(寸)의 용량을 1승(升)"으로 하는 표준 도량을 제정했다.

또한 「한서(漢書)」의 '식화지'에 보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1입방촌의 금을 1근(斤)으로 중량을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중국에는 천평(天平;저울)이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당시 저울추는 주로 돌을 사용했는데 돌저울추는 "일종의 권력의 상징으로, 그 돌과 같은 무게의 곡물을 징수할 수 있도록 부여받은 신물(信物)"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저울은 전국 시대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인들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지점과 거리 그리고 중량의 관계를 이용하여 물건의 질량을 측정하였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중량의 단위로는 게라(출30:31), 베가(출38:26), 세겔(삼상17:5,7), 달란트(출25:39) 등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도량형을 사용함에 있어서 공평하게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레19:35,36,;신25:15,16잠16:11). 또한 하나님께서 저울을 속이는 것을 미워하신다고 하셨다. 성도들도 중량을 속이듯이 남을 속이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기 때문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신앙을 방해하는 인본주의(6:1-9)

 

디베랴 바다 건너편이면 벳새다 광야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작은 산 언덕에 오르셨더니 많은 군중들이 모여 왔다. 벳새다의 빈 들에 황혼이 깔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당장 해결해야 할 민생 문제가 있었다. 예수는 빌립에게 그들에게 저녁 먹일 일을 강구하라고 분부하셨다.

 

1. 이성주의자 빌립

예수의 분부를 받은 빌립은 그 일이 전혀 불가능한 일임을 직감했다. 남자 어른만 대강 헤아려도 오천 명을 넘을 것 같고, 그 엄청난 사람들을 먹일 음식을 준비하려면 2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할 것이며, 더구나 그런 큰 돈이 설사 있더라도 거기는 빈 들이었으므로 어디서도 그 많은 음식물을 단시간 내에 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빌립의 판단은 매우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이성주의는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2. 회의주의자 안드레

빌립에 비하여 안드레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어린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를 예수에게 가지고 가면서도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순종과 성의가 있었다. 그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그런 마음은 예수에 의해 수용되었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안드레는 오늘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많은 신자들은 초자연적인 가능성에 대하여 언제나 반신반의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힘쓴다. 그것은 때때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낳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나 참신앙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성주의와 회의주의는 대개의 경우 신앙을 방해한다. 그러나 종교는 계시에 의해 성립된다. 계시는 그 자체가 이적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오천 명이 먹고 남은 열두 광주리(6:1-9)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많은 지방에서 군중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그가 행하는 표적을 보기 위하여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는 그들의 소원대로 오병이어로 이적을 행하셨다.

 

1. 굶주려 있는 백성

유대 백성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아온 것만도 1세기에 가까웠다. 그들은 수탈당한 대로 당해 육체는 병들고, 정신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시달렸으며 여인들은 살기 위하여 몸을 파는 자들이 많았다. 실업자는 어디에나 넘쳐 있었다. 예수에게 나오는 자들은 거의 그런 사람들이었다.

 

2. 보리떡 다서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안드레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다. 그것들은 가난한 어린이가 먹는 한 끼 식량에 불과했다. 안드레는 이것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는 묵묵히 그것을 받으신 후 모든 사람들을 잔디 위에 앉도록 지시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마19:26).

 

3. 오천 명이 먹고 남은 열두 바구니

예수께서는 그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그들 모두에게 나누어 먹게 하셨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의 기적이 이 벳새다 광야에서 온전하게 재현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생명의 시작이며 생명의 부양자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자연 법칙의 중간 과정을 간단히 생략해 버리신다. 그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 하여 놀란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기적이란 없다.

 

오병이어 표적과 물 위로 걸어가심(요6:10-21)

 

◈ 원문강해 ◈

 

생명을 풍족케 하시는 예수의 위로하심

 

1.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심(10-13절)

1) 많은 무리를 먹일 준비를 시키심

(Poihvsate tou;" ajnqrwvpou" ajnapesei'n. ... ajnevpesan ou\n oiJ a[ndre" to;n ajriqmo;n wJ" pentakiscivlioi. 포이에사테 투스 안드로푸스 아나페세인…아네페산 운 호이 안드레스 톤 아리드몬 호스 펜타키스킬리오이;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사신대…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0절)

예수께서는 안드레가 전하여 준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받으신 후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잔디에 무리를 지어 앉히도록 명령하셨다.

'이 사람들로…사람들이'(tou;" ajnqrwvpou" ... oiJ a]ndre"투스 안드로푸스…호이 안드레스)에서 전자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투스 안드로푸스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후자의 '사람들'에 해당하는 호이 안드레스(oiJ a]ndre")는 여자와 구분되는 남자만을 의미한다. 예수를 추종하던 큰 무리 속에는 여자와 아이들고 있었으나(미14:21)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여자와 아이들은 공식적인 석상에서 남자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나눌 수 없었기에(R.Earle)그 수효를 셀 때 제외되었다. 그 수효를 나타낼 때 사용된 호스(wJ"쯤)은 숫자인 펜타키스킬리오이(pentakiscivlioi오천)와 연결되어 대략의 숫자를 나타낸다(A.T.Robertson, F.Reinecker).오병이어 표적에 참여한 대략의 호이 안드레스(oiJ a]ndre"남자들) 숫자가 오천 명이었다는 것은 오병이어 표적에 참여한 사람들(tou;" ajnqrwvpou"투스 안드로푸스)의 숫자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예수를 추종하였으며,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산 떡임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2) 축사 후 나누어 주심

(eujcaristhvsa" ... o{son h[qelon. 유카리스 테사스…호손 에델론; 축사하신 후에…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1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앉은 것을 보시고 오병이어를 들어 축사하셨다. '축사'(eujcaristhvsa"유카리스테사스)는 공관복음서에서 사용된 율로게오(eujlogevw축복하다)와는 달리 문자적으로 '감사를 드리다'라는 의미로 식사 전에 드리던 감사의 기도를 가리킨다(신8:10,A.T.Robertson). 예수께서는 감사함으로 일상적인 식사 기도를 마치신 후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시되, 결코 제한된 양의 떡과 물고기를 주시지 않으셨다. '저희의 원대로'(o}son h]qdlon호손 에델론)에서 에델론(h]qelon원대로)은 델로(qevlw원하다)의 미완료 능동태로서 무리들이 먹기를 계속 원하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 계속 원하는 대로 주셨음을 뜻한다. 이것은 앞서 빌립의 대답에서 나온 브라퀴(bracuv조금씩)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빌림의 계산적인 불신앙 속에서는 무리들을 최소한의 식사를 하도록 먹여도 이백 데나리온이 든다고 예상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아주 작은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무리들이 원하는 만큼 풍족하게 나누어 주셨다.

 

3) 열두 광주리가 남음

(wJ" de; ejneplhvsqhsan ... ejgevmisan dwvdeka kofivnou" klasmavtwn 호스 데 에네플레스데산…에게미산 도데카 코피누스 클라스마톤; 저희가 배부른 후에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2,13절)

'배부른'(ejneplhvsqhsan에네플레스데산)은 일의 결과를 의미하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무리들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해 나누어 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원대로 먹고 그 결과 만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병이어 표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리가 배부르게 먹고도 남은 조각만 무려 '열두 바구니'(ejgevmisan dwvdeka kofivnou"에게미산 도데카 코피누스)였다. 여기서 코피누스(kofinou"바구니)는 버들가지를 재료로 만든 여행용 가방이다(Bernard, Morris). 이것은 제자들이 먹어야 할 식사를 담아 제공해 주는 것과(R.C.H.Lenski) 동시에 오병이어 표적으로 인해 무리들이 만족스럽게 먹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풍족했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셨던 생명의 풍족함은 인간들이 계산하는 방법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 생명의 풍족함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셨다.

 

2. 표적을 체험한 무리들의 반응(14,15절)

1)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

(OiJ ou\n a[nqrwpoi ijdovnte" ... e[legon o{ti Ou|tov" ejstin ajlhqw'" oJ profhvth" oJ ejrcovmeno" eij" to;n kovsmon. 호이 운 안드로포이 이돈테스…엘레곤 호티 후토스 에스틴 알레도스 호프로페테스 호 에르코메노스 에이스 톤 코스몬; 그 사람들이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14절)

여기서 사용된 호이 안드로포이(OiJ a]nqrwpoi이 사람들)는 앞서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무리의 수를 이야기할 때 사용한 남자만을 의미하는 호이 안드레스(oiJ a]ndre"남자들)와는 (10절) 달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체험한 후 술렁이기 시작했다. 엘레곤(e]legon말하되)은 미완료 시제로 계속 말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사람들이 술렁이며 나누기 시작한 말은 예수께서 '오실 그 선지자'(oJprofhvth" oJ ejrcovmeno"호 프로페텟, 호 에르코메노스)라는 것이다. 이는 모세가 예언한 것으로(신18:15) 메시야를 상징한다. 무리들은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후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야, 즉 이스라엘을 외부의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구원해 부강국을 만들 메시야였다.

 

2) 임금 삼으려 함

(o{ti mevllousin e[rcesqai kai; aJrpavzein aujto;n i{na poihvswsin basileva 호티 멜수니 에르케스다이 카이 하르파제인 아우톤 히나 포이에소신 바실레이아;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15a절)

'억지로 잡아'(aJrpavzein하르파제인)는 힘과 폭력을 함축하는 동사로(R.E.Brown, F.Reinecker) 예수께서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잡으려 함을 시사한다. 하르파제인은 '임금 삼으려'(poihvswsin basileiva포이에소신 바실레이아)와 연계되어 무리들이 왕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는 예수를 완력으로라도 잡아서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왕이셨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추대하려는 그러한 왕, 곧 로마의 식민지 생화로부터 해방시켜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국가를 세우는 왕은 아니셨다. 그분은 무리들이 간절히 고대하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영적인 왕이셨다(M.C.Tenney, D.A.Carson).

 

3) 예수의 물러가심

( jIhsou'" ou\n gnou;" ... ajnecwvrhsen pavlin eij" to; o[ro" aujto;" movno". 예수스운 그누스 …에네코레센 팔린 에이스 토 오로스 아우토스모노스; 그러므로 예수께서…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5b절)

그누스(gnou;"아시고)는 예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무리들의 의중을 알아채셨음을 의미한다(C.K.Barrett). 무리들의 뜻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다. 이를 아신 예수께서는 '혼자 산으로'(eij" to; o]ro" aujto;" movno"에이스 토 오로스 아우토스 모노스)떠나셨다.

여기서 모노스(movno"혼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셨음을 뜻한다. 어쩌면 제자들도 그들의 영적 무지 상태로 보아 무리들의 주장에 동조했을 수도 있다(A.T.Robertson).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의 길과 그의 뜻을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무리들과 동일하게 자신의 뜻과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버려두시고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마14:23).

 

3. 물 위로 걸어가심(16-21절)

1) 제자들만 떠남

(ejmbavnte" eij" ploi'on h[rconto pevran th'" ... skotiva h[dh ejgegovnei 엠반테스 에이스 플로이온 에르콘토 페란 테스 달랏세스…스코티아 에테 에게고네이; 배를 타고 바라를 건너…이미 어두웠고, 16,17절)

'배'(eij" ploi'on에이스 플로이온)는 당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타는 작은 배이며, 그 길이는 약 12내지20피트 정도였다(R.Earle). 이것은 커다란 배를 뜻하기보다는 작은 보트를 가리킨다. 제자들은 이 작은 배에 몸을 싣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건너'(h]rconto에르콘토)는 미완료 중간태인 바, 제자들이 계속해서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자신들 스스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상태에 있었음을 뜻한다(L.Morris). 한편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에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웠고'(skotiva h]dh ejgegovnei스코티아 에데 에게고네이)는 과거 완료 시제로 제자들이 바다를 건널 때가 한밤중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때까지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오시지 않으셨다.

 

2) 풍랑과 예수의 걸어오심

(ajnevmou megavlou pnevonto" ... wJ" stadivou" ei[kosi pevnte h] triavkonta qewrou'sin to;n jIhsou'n peripatou'nta ejpi; th'" qalavssh" 아네무 메갈루 프네온토스…호스 스타디우스 에이코시 펜테 에 트리아콘타 데오루신 톤 예순 페리파툰타 에피 테스 달랏세스; 큰 바람이 불어…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18,19절)

'큰 바람'(megavlou pnevonto"메갈루 프네온토스)은 갈릴리 바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기상 현상이다(마8:24). 갈릴리 바다는 사면에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주 기상 이변과 더불어 폭풍이 불어닥쳤다. 제자들은 자신들만 갈릴리 바다를 건너려 노를 저었을 때 바로 그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십여 리'(wJ" dtadivou" ei]kosi pevnte h] triavkonta호스 스타디우스 에이코시 펜테 에 트리아콘타)를 진행했을뿐이었다. 여기서 '십여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약 이십오 내지 삼십 스타디아'를 의미한다. '스타이다'는 184.94m(606.75피트)를 가리키는 바, 제자들이 노를 저어 나아간 거리는 약 4,625km에서 5.55km정도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갈릴리 바다의 길이가 약 20.92km(13마일)이고 폭이 약 9.7km(6마일)내지 11.3km(7마일)이라고 할 때 제자들이 노를 저어 나아간 곳은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였다(D.A.Carson, R.Earle, R.E.Brown). 그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혹자는 '바다 어'(ejpi; th'" qalavssh"에피테스 달랏세스)에서 전치사 에피(ejpi;)가 '곁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바닷가를 거니시는 것을 제자들이 잘못 보았다고 주장한다(Bernard). 그러나 전치사 에피(ejpi;)는 '곁에'를 의미하기도 하며 '위에'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폭풍이 부는 한밤중에 제자들이 바닷가에서 거니는 예수를 발견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바다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이 탄 배에 다가 오셨다.

 

3) 예수의 위로와 제자들이 영접

( jEgwv eijmi, mh; fobei'sqe. 에고 에이미 메 포베이스데; 내니 두려워 말라, 20,21절)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니 두려워말라'( jEgwv eijmi, mh; fobei'sqe에고 에이미 메 포베이스데)라고 위로하셨다. 여기서 에고 에이매( jEgwv eijmi)는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선언이며, 포베이스데(fobei'sqe두려워)는 미완료 수동태로 부정어 메(mh;아니)와 연결되어 제자들에게 진행되고 있는 행위의 금지, 곧 계속적으로 두려워 떨고 있는 행위를 금하는 명령이다.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께서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추신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특별히 계시하심과 동시에 두려우메 사로잡힌 제자들을 위로하셨음을 의미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오병이어의 기적(10-14절)

10절의 '앉게 하라'(ajnapesei'n아나페세인)는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으로 음식 먹을 때 비스듬히 누워 기대는 것을 말한다. '잔디가 많은 지라'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우기가 지난 봄철 시기로서 유월절(4절)저늬 기간임을 시사한다(J.Bernard).

11절에서는 마14:19막6:41눅9:16과는 달리 예수께서 떡을 바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공급해 주셨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에 떡이나 포도주 등에 감사 또는 축복을 하는 것에서 그 유형을 찾을 수 있다 한다(C.Barrett).

12절의 '배부른 후에'는 무리들이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로 만족케 된 기적의 행위가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한편 마14:20막6:43눅9:17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남은 것을 거두어 두라고 하신말씀이없다.

13절의 '열두 바구니'에서 '열두'란 예수의 열두 사도들이 표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막6;43에는 '물고기'란 말만 언급되었으나 본 절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란 말만 기술되어 있다.

14절의 '그 사람들이…말하되'란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에 의해 행해진 일로 강한 인상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2절에 암시된 바와 같이 그들은 예수의 치유의 표적을 보고 그분을 따라왔는데, 이제 또한 더 큰 이적적 사건을 목격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기록은 사도 요한이 본서의 기록 목적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려고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선지자라'는 신18:15에 예언된 선지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로서 메시야와 동일시되는 분으로 이해했음이 분명했다(C.Barrett).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영적 메시야로 알고 기다렸는지, 지상에 가시적 메시야 왕국을 세울 정치적 메시야로 알고 기다렸는지 언급이 없으나 후자의 가능성이 많다.

 

2. 무리의 추대(15절)

15절의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란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야적 왕으로 삼으려 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군중들이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하면서 환호했던 것과(요12:13) 동일시 된다. 그들은 예수를 지상의 정치적 메시야 왕으로서 이해하고 모시려 했던 것이다. 한편 '다시 혼자 산으로 더나 가시니라'란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 되심을 부인하시는 것이다. 참으로 그분은 유대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님을 시사하신 것이다. 마14:23막6:46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신 것이 언급되어 있다.

 

3. 물 위를 걸으심(16-21절)

16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건너편 지역으로 가라 명하신 말씀이 언급되어 있다(마14;22).

17절의 '이미 어두워졌고'(skotiva h]dh ejgegovnei스코티아 에데 에게고네이)란 직역하면 '어두움이 이미 덮이었고(일어났고)'이다. 이는 어두움이 성경에서 흔히 죄나 시련 등을 상징하는 것을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있다. 18절의 '큰 바람이 불어'란 막6:48에 의하면 '바람이 거스리므로'로 표현되었다. 예수님의 뜻대로 건너편에 가는 자들에게 시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19절의 막6:48에 의하면 '밤 사경'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오신 것으로 되었다. 한편 마14:26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favntasmav판타스마)으로 보고 놀랐다.

20절의 '내니 두려워 말라'에 대해 막6:50에는 '안심하라'는 말씀이 건너편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마14:22). 그들은 도중에 시련을 겪었지만 순종의 믿음으로 이기었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오병이어의 기적(10-13절)

본문의 사건은 인간으로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 인간의 지식이나 책략이 모두 실패했을 때, 예수께서 행동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Carter).

이 기적에 대한 기사만이 네 복음서 전체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부분들-예를 들어 주께서 축사하신 후에(마14:19막6:41눅9:16) 떡을 나누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으며,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 등-을 생략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독자들이 이미 그가 기록한 것 이상으로 그 기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W.Hendriksen). 절망스러운 상황이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희망의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12절에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먹은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은 것을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상징적 해석을 한다거나(F.N.Davey, C.K.Barrett, Ewald), 성찬에 대한 암시적 교훈으로(Macgregor), 혹은 빌립의 태도에 대한 응답으로(Godet) 각기 해석한다. 한편 도드(C.H.Dodd)는 이 구절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잃어 버린 떡이 되지 않는 분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견들에 대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어렵지만 결국 이 놀라운 표적을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들에게도 보여 주시고 확인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Morris).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들은 결코 헛되어 버려져서는 안된다.

 

2.무리의 추대(14,15절)

15절의 무리들이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예수께서는 이를 아시고 혼자 산으로 빠져 나가셨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는 완벽한 왕이 되실 수 있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치유하고,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광야의 시험을 겪으시면서 그것을 결정하셨던 것이다. 대신에 그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용서와 새 생명을 베푸실 분이었다. 그의 나라는 인간 삶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적인 나라이다(Carter).

 

3. 물 위를 걸으심(16-21절)

16절에서 저녁 무렵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통하는 그들의 여행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배를 탔다. 예수께서는 혼자 그들을 빠져 나가셨고, 제자들은 예수 없이 그 호수를 건너고 있었을 때, 성난 파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제자들은 성난 물결 속에 누군가가 호수를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가 예수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마도 유령일 것이라 생각하여 두려워 했다(19절).

그들은 아마도 폭풍 가운데 있는 자신들의 생명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Carter).

두려움과 놀람 가운데 그들은 "내니 두려워 말라"(20절)라는 친숙한 음성의 말씀을 들었다. 본문의 헬라어 원문은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양식이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데 쓰이고 있다(8:58). 그러나 본문에서는 단순히 예수께서 자신을 밝히시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Morris).반면 이 부분을 구약의 '야훼',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의 말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과(Dodd), '나는 구주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Ablott). 아무튼 그들이 처한 또 다른 인간적 절망과 두려움의 상황 가운데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희망과 확신을 주신 것이다. 예수를 배 위로 영접하고, 그들은 곧바로 목적지인 서쪽 해안(아마도 가버나움)에 도착했다(21절). 요한복음에서는 네 번째 기적(오병이어의 기적)과 다섯 번째의 기적(물 위를 걸으신 일)이 빨리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기적들은 각기 인간적인 절망과 무기력의 시간에 예수로부터 구원과 능력이 임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Carter).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그리스도는 삼중직을 가지고 계신다. 그중의 하나가 선지자직인데. 그리스도가 어떤 선지자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선지자' 개념과, 독특한 의미의 선지자로서의 개념, 그리고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메시지는 어떤 것이며 또 그의 선지자 사역은 언제부터 언제가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1. 그 선지자 모세와 같은 특징의 선지자

모세는 예수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예표하는 표준적인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모세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할 때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신18:15행3:22,23).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그 선지자' 즉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라고 불렀다(요1:21).

 

2. 특수한 의미의 선지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단순히 전달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하여 주는 은혜를 창조적으로 베푸시는 선지자였다. 또한 포도원 비유(마21:33이하)에서와 같이 '종'인 선지자가 아니라 '아들'이신 선지자였으며 예수님 자신의 표현대로 유일한 선생, 또는 지도자라고 하였다(마23:8,10). 또한 다른 일반 선지자들같이 부분적, 점진적인 계시의 전달자가 아닌 계시를 완성하신 완전한 계시자로서 육신으로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셨다(요1:1414:6).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과 일치하며 교제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신바를 직접 말씀하시고 선포하셨다.

 

3. 선지 사역의 여러 구분

성육신 이전에는 주의 처사들의 특별 계시로, 영으로 일했던 선지자들의 교훈으로(벧전1:11), 그리고 성육신 후에는 그의 교훈과 이적, 사도들과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의 설교로 그리고 내주하는 성령으로서 신자들에게 허락하신 조명과 감화로 그의 선지자 사역을 수행하신다. 그는 그의 선지자직을 직접적으로, 곧 구약 시대에는 주의 천사로서, 성육신 후에는 그의 교훈과 모범으로서(요13:15빌2:6-8벧전2:2) 수행하셨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교훈을 매개로 하여, 오늘날에는 복음의 사역자들을 통해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

 

 

배의 구조(6:10-21)

◈ 세계배경 문화사 ◈

 

인류의 활동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육로를 통한 이동과 해양을 통한 이동이 빈번하게 되었다. 특히 해로는 육로와는 달리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보다 안전하고 빨리 항해할 수 있는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근동/팔레스틴 : 당시 지중해 연안에 있던 여러 국가들이 소유하고 있던 배들은 주로 상선, 군함, 운송용이었다. 특히 당시 사회가 정복 전쟁으로 인해 많은 노획물들을 본국으로 운송할 때 배를 이용하였다. 이들 배에는 노를 저어 움직이는 소형 선박들이 있었는가 하면 배에 돛을 설치하여 바람을 이용하여 손쉽게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었던 배도 있다.

배의 구조는 대체로 말의 머리 모양을 한 높은 뱃머리와 너른 선미를 갖추고 있고 꼭대기에 망대가 있는 중앙 돛대와 그 돛대에 붙들어 맬 수 있게 된 하나의 돛과 여러 개의 노를 배의 양편에 설치하여 배의 추진력을 줄 수 있게 만든 배도 있다. 군함의 경우에는 뱃머리의 끝이 뾰족한 3층 갑판과 2열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많은 노를 저어 전진하게 되어 있으며, 무장한 전사들이 앉는 상갑판의 둘레에는 방패들이 걸려 있다. 또한 페니키아에서 발견된 배의 그림은 약 A.D1세기의 것으로 배 위에 높이 구부러진 고물이 있고 그 고물에 기가 부착되어 있다. 큰 돛대 위에 커다란 장방형의 돛이 펼쳐져 있고, 앞 돛대 위엔 작은 장방형의 돛이 펼쳐져 있고, 앞 돛대 위엔 작은 장방형이 돛이 있는 모습으로 당시 배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특이한 배의 구조로는 "고물에서 두 개의 닻을 내려 정박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모양의 다양화는 당시 지역적 특성 때문에 형태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큰 선박은 길이가 42미터이다. 그리고 선박에 쓰인 재료로는 주로 삼나무, 전나무, 느룹나무, 오리나무, 소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배의 구조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는 닻을 들 수 있다. 이런 닻은 "돌이나 납으로 된 닻장과 나무로 된 닻채 및 닻가지"가 있다. 닻 중에서 가장 큰 닻으로는 680kg이나 되는 것도 있다.

 

동양/중국 : 중국의 배에 관한 전설을 보면, 복희 황제 또는 기(棄)가 처음 배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역경」의 '태괘92효사(泰卦九二爻辭)' 편에 보면 "커다란 박은 강을 건너는 데 유용하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 부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이미 B.C. 4000년경에 배에 노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도구로서 중국인들은 항해를 할 때 목표 지점까지 정확하게 갈 수 있는 '사남(司南;나침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漢)나라의 「귀곡자(鬼谷子)」의 '모(謨)'편을 보면, "정나라 사람들은 옥을 캐러갈 때는 반드시 사남을 싣고 갔는데 이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라는 기록에서 이를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군함의 경우에는 기동성이 중요하므로 군함의 사용 목적에 따라 배를 제조했다. 즉 석명(釋名)의 '석선(釋船)'편에 보면 "앞서 나가는 배를 '선등(先登)', 적선과 충돌시키기 위한 길쭉한 배를 '몽동', 가볍고 빠른 배를 '적마(赤馬)', 돌과 화살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방을 두꺼운 판자로 댄 전함을 '함(艦)'이라고 치하였다." 특히 돛의 사용에 있어서 빠른 속도로 배를 항해할 수 있다는 장점과 아울러 물살이 거센 경우에는 조정이 어려워 전복될 우려가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후에 돛은 풍향과 풍력에 따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배들은 주로 이동수단에 사용되는 것들이다. 배를 만드는 재료로는 잣나무(창6:14), 백향목(겔27:5)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배의 구조를 보면 갑판(겔27:6), 거루(행27:16,17), 닻(행27:40), 노(겔27:6), 돛(사33:23)등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도록 하셨다. 마지막 때에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주께 대한 군중들의 무지(6:10-21)

 

예수께서 떡을 만들어 주시기 구름 떼 같은 사람들이 예수를 큰 선지자로 알고 추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이 아니라 '군중'들이다. 오늘도 그처럼 진실한 믿음이 결여된 '군중'들이 많다. 그들은 주님께 대해 몇 가지 그릇된 신앙적 무지를 지니고 있다.

 

1. 주님께 구할 것에 대한 무지

군중들은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14절) 주님을 고대하던 선지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절)이라고 주님은 간파하셨다. 그들은 '육신의 떡'을 구하고자 주님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께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영생의 떡'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 오늘도 주님을 찾는 무리들이 많다.

 

2. 주님께 드려야 할 것에 대한 무지

떡을 먹고 배부른 군중들은 주님을 억지로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한다. 그와 같은 군중들의 의도를 주님은 피하셨다(15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군중들의 환호가 아니다. 믿음과 순종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고 하셨다. 그분의 언약을 믿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당한 주의 백성이요, 그때서야 주님은 왕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오늘도 세속적인 목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3.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무지

제자들은 밤중에 파도 속에 걸어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알고 공포에 떨었다(19절). 그러나 파도 속에서 '내니 두려워 말라'(20절)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고난도 있다. 그러나 그 고난 중에도 주예수께서 함께해 주심을 군중들은 알지 못한다. 고난도 주의 섭리이다. 그 안에서도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군중'이 아니라 '성도'가 될 수 있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주의 은혜는(6:10-21)

 

우리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찾는다. 교회의 생명도 성도들의 신앙과 덕도 인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반으로 한다. 본문 뱃새다 들녘의 오병이어의 은혜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1. 하늘로서 주시는 은혜임

우리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은혜의 원천이 어디로부터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11절) 기적은 이루어졌다. 우리의 삶도 그와 같다. 우리가 가진 것은 고작 오병이어처럼 보잘것없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이웃에게 베풀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늘로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우리의 구원도, 덕을 행하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겸허한 성도가 되야 한다.

 

2. 공평하신 은혜임

주님은 오천 명에게 같은 음식으로 모두 배부르게 주셨다. 공평무사하신 은혜가 주님 은혜의 큰 특성이다. 그 옛날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보잘것없는 우리에게도 베푸신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시고 차별 없이 영생복락의 은총과 축복을 주심을 믿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1,12).

 

3. 풍성하신 은혜임

모두 원대로 배부르게 먹고 열두 광주리에 넘치도록 주셨다. 즉 넉넉하고 풍성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주의 은혜의 특성이다. 천국에 들어가기에 넉넉하도록 대속의 은혜를 베푸셨고 성도로서 이 땅에 살기에 넉넉하도록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고 성경은 약속한다. 또한 사단의 권세를 넉넉하게 이길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롬8:37).

 

표적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요6:22-29)

 

◈ 원문강해 ◈

 

영생에 이르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일은 율법과 같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구속주 도신 예수를 얼마나 전적으로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1.무리들이 예수를 찾음(22-24절)

1) 배 한 척만 남음

(oJ o[clo" oJ eJsthkw;" pevran th'" qalavssh" ei\don o{ti ploiavrion ... ouj suneish'lqen 호 오클로스 호 헤스테코스 페란 테스 달랏세스 에이돈 호티 플로이라리온…우 쉬네이셀덴;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22절)

'바다 건너편에'(oJ eJsthkw;" th'" qalavssh"호 헤스테코스 테스 달랏세스)는 21절의 제자들이 도착했던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건너편을 지칭하는 것으로 갈릴리 바다 동편, 곧 예수께서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시던 곳을 가리킨다(23절, D.A.Carson, C.K.Barrett). 다음날이 되었을 때, 전날에 예수께서 자신들을 떠나 산에 올라가신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다시 예수를 찾아보기 위해서 전날의 행적을 더듬어 갔다. '함께…오르지 아니하시고'(ouj suneish'lqen우 쉬네이셀덴)는 전치사 쉰(suvn함께)이 접속되어 있는 것으로 예수께서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전날 밤에 제자들과 더불어 배를 타시지 않았음을 뜻한다. 무리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들을 토대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떠나시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간절히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2) 디베랴에서 온 배에도 없으심

(a[lla ... oujk e[stin ejkei' oujde; oiJ maqhtai; 알라…우크 에스틴 에케이 우데 호이 마데타이; 그러나…그곳에 가까이 왔더라…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23,24a절)

알라(a]lla그러나)는 본 절이 앞서 언급된 구절들을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것임을 시사한다(A.T.Robertson). '제자들도 없음을'(oujk e]stin ejkei' oujde; oiJ maqhtai;우크 에스틴 에케이 우데 호이 마데타이)은 무리들이 예수를 찾기 위해서 샅샅이 그 일대를 뒤졌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전날에 제자들만 먼저 떠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까지 있는가를 확인하며 찾았다.

 

3)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ta; ploiavria kai; h\lqon eij" Kafarnaou;m zhtou'nte" to;n jIhsou'n. 타 플로이라리아 카이 엘돈 에이스 카파르나움 제툰테스 톤 예순; 곧 배를…예수를 찾으려 가버나움으로 가서, 24b절)

'배'(ta; ploiavria타 플로이라리아)는 복수형으로 무리들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탔음을 암시한다. 전날의 오병이어 표적을 본 무리들은 예수의 능력과 이적을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이튿날에도 여전히 예수를 찾고 있었다. 무리들은 예수가 자신들이 있는 그곳에 없음을 발견하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향하였다. 여기서 '찾으러'(zhtou'nte"제툰테스)는 '찾다'(zhtevw;;;;제테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예수를 계속 찾아 나섰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전날에 행해진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취했던 행동처럼 예수를 찾아 강제로라도 임금을 삼으려 하는 것이다(A.T.Robertson).

 

2. 썩을 양식(25-27a절)

1)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euJrovnte" ... JRabbiv, povte w|de gevgona"_ 유론테스…랍비 포테 호데 게고나스;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25절)

유론테스(euJrovnte"만나)는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문자적인 의미는 '발견하였을 때'이다(A.T.Robertson). 이것은 무리들이 가버나움에 가서 계속 찾아본 끝에 예수를 만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리들은 예수를 가버나움 회당에서 찾을 수 있었다(59절). 한편 '오셨나이까'(gevgona"게고나스)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의 제2완료 능동태 단수로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때를 뜻하는 '언제 오셨습니까'와 기간을 의미하는 '얼마 동안 계셨습니까'이다(L.Morris, C.K.Barrett, D.A.Carson, R.C.H.Lenski). 이것은 무리들이 오랫동안 예수를 찾았으며 어떻게 건너편에 오셨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한다(.A.T.Robertson).무리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찾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열심히 예수를 찾고 있었다.

 

2) 배부른 까닭에 예수를 찾음

(jAmh;n ajmh;n levgw uJmi'n, zhtei'tev me oujc o{ti ei[dete shmei'a ajll j o{ti ejfavgete ejk tw'n a[rtwn kai; ejcortavsqhte. 아멘 아멘 레고 휘민 제테이테 메 우크 호티 에이데테 세메이아 알르 호티 에파게테 에크 톤 아르톤 카이 에코르 타스테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26절)

본문은 앞서 무리들이 예수를 찾아 헤맨 목적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자신을 찾아 헤맨 목적이 자신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jAmh;n ajmh;n levgw uJmi'n아멘 아멘 레고 휘민)는 이어지는 내용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권세를 가지고 선언하는 것임을 시사한다(R.C.H.Lenski). 예수께서 선언하시는 것은 바로 자신을 찾아 헤맸던 무리들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상태를 두 가지로 진단하셨다. 첫째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oujc o{ti ei[dete shmei'a우크 호티 에이데테 세메이아)이다. 무리들이 예수를 간절히 찾은 것은 표적 때문이 아니라 기적 때문이었다(C.K.Barrett). 여기서 앞서 언급된 표적의 의미가 도출된다. 그것은 단순히 범상한 능력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권능과 이적이 아니라 복음과 진리, 곧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셨으나 무리들은 그 표적으로 인해서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적과 권능에 매료되어서 찾은 것이었다. 이는 무리들의 잘못된 관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ajll j o{ti ejfavgete ejk tw'n a[rtwn kai; ejcortavsqhte알르 호티 에파게테 에크 톤 아르톤 카이 에코르타스테테)이다. 여기서 에코르타스테테(ejcortavsqhte배부른)는 코르타조(cortavzw풀을 먹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승들이 풀을 먹고 배불리 하고 만족해 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무리들이 자신을 찾는 목적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게 경멸하며 비난한 것이었다(R.C.H.Lenski, A.T.Robertson). 무리들은 예수께서 계시되기를 바라고 행하셨던 오병이어 표적은 바라보지 않고 다만 자신들이 허기를 메꾸어 준 것에만 온통 신경을 쏟았으며 자신들의 육체적 만족만을 추구하였다.

 

3)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ejrgavzesqe mh; th;n brw'sin th;n ajpollumevnhn ajlla; th;n brw'sin th;n mevnousan eij" zwh;n aijwvnion, 에르가제스데 메 텐 보로신 텐 아폴뤼메넨 알라 텐 브로신 텐 메누산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27a절)

에르가제스데(ejrgavzesqe일하지)는 일을 해서 버는 것을 가리키며(C.K.Barrett, F.Reinecker), 문맥상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모두에 연결되어 있어서 '하라' 역시 에르가제스데를 가리킨다. '썩을 양식'(th;n brw'sin th;n ajpollumevnhn텐 브로신 텐 아폴뤼메넨)은 앞 구절에서 언급된 '떡을 먹고 배부른 것'을 가리키는 썩어질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리들이 예수를 찾기 위해 수고한 것은 바로 떡을 먹고 배부름을 얻기 위함이었다. 반면 '썩을 양식'과 대조를 이루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th;n brw'sin th;n mevnousan eij" zwh;n텐 브로신 텐 메누산 에이스 조엔)에서 에이스(eij")는 '∼안으로'라는 뜻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는 목적을 뜻하는 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의미한다(Lenski). 그것은 구속과 그것으로 인해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브로신(brw'sin양식)이 단순히 먹을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먹을 것과 마실 것 모두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더욱더 확증된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떡이며 음료이다. 그것은 곧 예수의 살과 피로서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암시한다(35,55절).

 

3. 인자가 주는 영원한 양식(27b-29절)

1) 하나님의 인치신 인자가 주는 양식

(h}n oJ uiJo;" tou' ajnqrwvpou uJmi'n dwvsei: ... ga;r ... ejsfravgisen 헨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휘민 도세이…가르…에르프라기센;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인치신 자니라, 27b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인자'(oJ uiJo;" tou' ajnqrwvpou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가 주는 것이다. '인자'는 예수를 가리키는 칭호로서 예수께서 영적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L.Morris). 여기서 도세이(dwvsei주리니)는 미래 시상으로서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D.A.Carson). 하나는 순수하게 미래 시상으로서 인자의 선물인 영생이 성령의 중재에 의해서 풍부하게 수여되는 때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임을 시사한다. 다른 하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현재 시상과 연계되어(R.C.H.Lenski)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양식을 주는 이가 오직 인자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자이신 예수께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살고 피를 내어 주는, 곧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믿는 자에게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분이다. 한편 가르(ga;r왜냐하면)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인치신 자'라는 것이 인자가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양식을 줄 수 있는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치신'(ejsfravgisen에스프라기센)은 혹자의 주장에 희생 제물에 흠이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인자이신 예수를 흠 없는 희생 제물로 열납하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Westcott). 그러나 희생 제물에 인치는 것은 미쉬나에만 기록되었을 뿐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도리어 그것은 어느 누구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보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인자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라는 것은 영새에 이르도록 하는 양식을 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만물의 창조주 되시며 주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증하신 것임을 시사한다(R.C.H.Lenski). 이러한 인증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재와 하늘의 음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ta; e[rga tou' qeou' 타 에르가 투 테우; 하나님의 일, 28절)

'일'(ta; e]rga타 에르가)은 복수형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명령하시자 무리들은 그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으며 어떤 것을 지켜 행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께 질문하였다. 이는 여전히 이들이 예수와 그의 사역,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고자 하시는 영생에 이르는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3)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

(Tou'tov ejstin to; e[rgon tou' qeou', i{na pisteuvhte eij" o}n ajpevsteilen ejkei'no". 투토 에스틴 토 에르곤 투 데우 히나 피스튜에테 에이스 혼 아페스테일렌 에케이노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29절)

'일'(to e]rgon에르곤)은 단수형이다. 이는 무리들이 복수형으로 사용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예수께서 교정하여 하나님의 일은 단 한 가지, 곧 '하나님의 보내신 자' (o}n ajpevsteilen ejkei'no"혼 아페스 테일렌 에케이노스)를 믿는 것임을 교훈하신 것이다.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n)은 '보내다'(ajpostevlw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권세를 부여하여 보내는 것을 뜻한다. 이는 영생에 이르도록 양식을 주시는 인자 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며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음을 시사한다. 영생을 얻는 깊은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신 인자 되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예수를 찾아 좇는 무리들(22-27절)

22절의 '바다 건너편'이란 21절의 장소에서 본 갈릴리 호수의 맞은편을 가리킨다. '무리가…보았더니'는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이 그 전에 체험했던 여러 기적 사건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 계속 예수를 찾고자 했었을 것임을 시사한다. 아마 그들은 예수를 지상 왕국의 왕으로 모시고자 시도했던 일(15절)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를 왕으로 세우고자 시도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J.Bernard). 한편 '배'(ploiavrion플로이라리온)는 보통 '작은 배'를 뜻한다(요21:8막3:9). 반면 플로이온(ploiavrion)은 비교적 큰 어선으로서 17,19,21절에 이미 언급되었다.

23절은 성격상 후에 삽입되어진 주해성 구절로 보기도 한다(J.Bernard). 무리들은 밤 동안에 디베랴에서 온 작은 배들을 타고 가버나움으로 예수를 찾으러 갔다. 이곳은 디베랴 갈릴리 바다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이 도시는 신약에서 요6:1,2321:1에만 언급되어 있다.

24절의 '예수를 찾으러'는 전에 기적을 체험했던 무리들이 예수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음을 추정케 할 뿐만 아니라, 2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풍부한 음식 공급을 바라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이는 아직도 그들이 영적 메시야로서 예수니믈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적인 눈으로 예수님의 겉모습만을 보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가버나움'이란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바다의 북서 해안에 위치하며 예수께서 초기 갈릴리 지역 사역을 하실 때 중심거점으로 삼아 일하셨던 곳이다. 여기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는데(요4:46-54마8:5-13막2:1-13), 그곳 사람들이 회개치 않으므로 예수님의 책망을 받기도 했다(마11:23,24).

25절의 '랍비여' 란 말은 요한이 헬라 독자를 위해 '선생'이라고 해석한 명칭인데, 제자들이 예수니메 대한 존경의 칭호로서 습관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다.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영적 메시야를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에 대한 존경의 칭호로 불렀던 것 같다.

26절의 '표적을…까닭이로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신적인 메시야로서 영적 생명을 부여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분이신 줄 모르고, 단순히 그들의 육신적 필요를 해결하며 채워 주는 분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이는 15, 30절 등에서도 엿보여진다(J.Bernard).

한편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을 당시 그들은 이미 육체적으로 배고픈 상태에 처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육체적 만족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발견케 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서의 기적 사건으로 배불리 음식을 먹었었다(12절).

27절의 '썩는 양식…영생토록 있는 양식'이란 대구 용법으로서 그 의미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썩는 양식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양식을 말하고 영생토록 있는 양식이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뜻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사역하시는 동안 그의 가치와 목적이 어떤 것인지를 엿보게 한다. 즉 그분은 이 땅에 육신적 풍요나 안식을 목적으로 오시거나 사역하시지 않고 영적인 생명과 만족을 위해 역사하심을 보여 준다. 이는 예수님의 오신 목적(요10:10)과 본서의 기록 목적(요20:31)에서도 엿보인다. 한편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는 예수께서 당신의 희생적인 구속 사역으로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심을 암시한다(48,51,53-55절).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그 사역 수행을 입증하시며 역사하는 것을 가리킨다(민3:16,17).

 

2. 하나님의 일(28,29절)

28절의 '우리가 어떻게…하오리이까'는 무리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질문이다.

29절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란 당시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율법의식과 행위에 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혹자는 요한이 바울의 사상과 일맥 상통하다고 말한다(C.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무리의 찾음(22-25절)

아마도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 그를 만나기 위해 많은 군중들은 오병이어 기적의 그 장소를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22절에 보면 그곳에는 배가 한 척밖에 없었고 예수께서는 그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어디로 가신지 알수 없었다. 23절의 디데랴에서 다른 배들-아마도 그 호수에서 고기잡는 배였을 것이다-이 도착하자, 사람들은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그곳에 없는 줄을 알고 그 배에 탔다(24절). 갈릴리를 건너 가버나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여전히 예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25절에서, 그들이 예수를 발견했을 때, 그들이 했던 질문은 오직 한 가지, 즉 언제 그곳에 오셨는가였다. 아마도 물 위를 걸으셨던 기적은 그의 제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먹이신 그 무리들은 그가 어떻게 그 호수를 건넜는지 알지 못했다(Carter). 여기에서 그들은 예수를 그저 '랍비'라고만 불렀는데, 아마도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열성이 한차례 지나간 후였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 그가 그곳에 오셨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 대신 언제 오셨는가 만을 궁금히 여긴 것이다(Morris).

 

2. 하나님의 일(26-29절)

2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처럼 완전히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질문에 대하여 영적인 진리로 답변하신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먹고 배불렀던 이적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다시 찾은 이유는 단지 다시 배부르기 위함이었다(Carter). 그들은 예수의 표적 가운데서 오직 떡에만 치중하여 그것만을 보았던 것이다( Godet, Lange). '배부른'에 사용된 동사 에코르타스테테(ejcortavsqhte)는 본래 가축을 배불리 먹인다는 의미이다(마14:20막6:42눅9:17)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사에서도 이 동사를 사용했다). 요한은 앞 절(12절)에서 군중이 배불리 먹었다는 표현을 할 때에 이 동사를 사용했지만, 본 절에서는 그 동사의 사용이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Morris). 예수께서는 없어질 것들을 위해 수고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인자가 그들을 위해 예비한 영원하고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경고하신다(Carter). 이 말씀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말씀하신 '생수'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요4:14). 즉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물질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궁극적인 노력의 핵심이 물질적인, 썩어질 양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Tenney).

27절의 인(印)을 친다는 것은 흔히 고대 사회에서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표시였다. 또 한편으로 인은 어떤 문서 따위의 진위를 구별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다. 결국 인을 친다는 것은 주인이 그에 대해 인정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께서도 역시 아버지 하나님께 인정의 인을 받으신 것이다(Morris).

28절에는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사용되었던 유형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어떤 사건이후에 이에 대한 의미 부여와 설명을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영적인 충족감을 만족시키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지나치게 물질적이며 문자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영원하며 썩지 않을 하나님의 은혜의 양식에 대한 말씀을 간과했다.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Carter). 여기서의 '일'이란 한 사람의 특별한 능력과 특성을 나타내는 행위를 말한다(Tenney).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은혜에 의존하는 이러한 종교적 난제는 언제나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Carter).

29절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질문한 '하나님의 일(들)'이라는 단수 형태로 답변하신다(Morris).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 바로 믿음을 말한다(Hoskyns).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그는 바로 전에 메시야의 칭호인 '인자'(27절)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그가 하시는 일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의로운 행위가 아니다(Carter).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요한복음의 메시야적 비밀

 

요한복음이 쓰여진 목적이 예수가 메시야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되도록, 영원한 생명을 소유케 하기 위함이다(요20:31).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메시야됨이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언뜻 보면 메시야적 비밀스러움이 없다. 처음부터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고, 예수 스스로가 자기의 메시야됨을,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음을 공공연히 천명한다. 그래서 비밀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요한복음에 메시야적 비밀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통해 그 비밀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구약의 약속의 성취자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은, 첫째로 그 안에 구약에서 하신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기다리던 구속자임을 암시한다. 즉, 메시야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성취자를 가리킨다. 빌립이 요1:45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쓰신 이'라고 증거한다. 즉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약속을 성취하시는, 구원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2. 이스라엘의 왕

요12:13에 '오실 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이'라고 말하는데, 예수의 메시야됨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자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지 못하고 나다나엘 같은 자들만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시인할 수 있다(요1:49). 육신적인 통로가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깨달아서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으로 재창조된 자들만이 그의 이스라엘의 왕되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가 되심을 깨닫게 된다. 그분의 왕국은 정치적, 세상적 왕국이 아니라 세상이나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에 참여하도록 하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공동체이다. 이렇게 예수가 건설한 왕국에서 그것의 대표로서 예수가 메시야적 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정치적 왕됨에 대한 거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가시적 왕국을 세우실 왕을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고 먼저 당신의 가속적 죽으심을 언급하심으로서 영적 왕국을 건설하셨다.

 

 

배의 종류 - 수송용(6:22-29)

◈ 세계배경 문화사 ◈

 

배는 인간의 기술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어 왔다. 인간이 육상을 통해 걸어다닌다면 하루에 30리정도가고작이다. 그러나 배는 엄청난 거리를 움직일 수 있다. 또한 배는 많은 짐을 한꺼번에 운송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배를 통한 수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근동/팔레스틴 : B.C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배가 프라이네스테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군함들은 대부분 노를 이단으로 설치하거나 삼단으로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프라리네스테에서 발견된 이 배는 이단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노는 양쪽에 18개씩설치되어 있는데 노 하나에 두 명이 젓는다면 모두 108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배의 총 승무원은 적어도 213명 정도 추산된다. 배의 길이는 약 31미터,선폭은 5.1미터, 하중(荷重)은 약 29.019kg이고 배의 최대 적재량은 약 81t으로추산된다. 또한 요세프스는 아드리아 해에서 600여명을 태운 배가 폭풍을 만나 난파한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70일 동안 폭풍과 싸운 이시스호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뱃머리의 양쪽에는 이시스의 상(象)들이 실려 있었고 그 배엔 장식적인 그림들과 주홍빛의 윗 돛과 선미에 선실들이 있었다. 그 배가 아테네의 주민들을 족히 1년동안먹일 수 있는 곡물을 적재하고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상선들은 그 배의 선명(船名)에 따라 신의 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곡물을 싣고 다니던 배는 모두 하나의 대형 장방형의 돛과 하나의 소형 장방형의 돛을 갖춘 짧고 휘어진 앞 돛대를 가지고 있었다.

 

동양/중국 : 당시 육로 교통 중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강이나 하천이었다. 또한 육로보다는 수로를 이용하면 많은 짐을 수송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즉 빨리 운송할 수 있다는 것과 선원 이외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절서(越絶書)」에 의하면 "당시 큰 배는 90명의 군사가 탈 수 있었고 보통 크기의 배는 50명의 사람과 3개월간의 보급품을 실을 수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진(晋)나라의 배는 2천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수경주(水經注)」에 보면, "동오의 큰 배는 3천명이나 탔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한서(漢書)」의 '식화지(食貨志)'에 보면 "한무제가 남오를 공격할 때 20만명이 넘는 군사를 해상으로 운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배의 종류를 보면 어선(요21:3-8), 여객선(욘1:3), 화물선(행27:2,10,38), 전함(민24:24), 무역선(시107:23), 노예선(신28:68) 등이 보이고 있다. 또한 이들 배에는 노와 돛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배로는 노아의 방주와 요나가 탄 배(욘1:3,4), 바울이 탄배(행27:1,2), 그리스도가 복음 전파하기 위해 오르신 배(마8:23-27) 등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배의 키를 조절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 키의 조절에 따라 움직이는 배임을 명심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떡만 바라고 좇는 자들(6:22-29)

 

사람에게는 물질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유대 속담에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몸은 푸주간 주인의 신세를 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물질을 희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앙의 동기와 목적도 물질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매우 그릇된 것이된다.

 

1. 위선적인 신앙으로 아첨함

떡을 바라고 예수를 좇는 군중들은 매우 열성적이다. 그리고 주님을 반갑게 맞는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25절)라는 말은 위선적인 아첨이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롬16:18)만 한다고 했다. 물질만 바라고 주님을 좇는 자들의 신앙은 허위다. 그들의 열심, 그들의 고백은 참된 믿음과 충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떡에만 정신이 팔

그들은 주님을 만나서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떡에만 관심을 둔다. 그래서 주님께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절)이라는 핀잔을 하신 것이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이것이 물질주의 신앙인의 기도문이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2:21)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3. 후에는 배신했

그와 같은 물질주의 신앙인들은 주님께 자신들이 구할 것을 못 구하게 되거나, 신앙으로인해 손해볼 일이 발생하면 주님께 등을 돌린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 물질만 구하는 이들의 양심과 영혼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오직 자신들의 물질적인 이익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그중 대표적인 자가 바로 가롯 유다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하나님의 일(6:22-29)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이 질문은 우리 모든 인생이 던져야 할 질문이다. 삶의 본연이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성도들도 늘 던져야 할 질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1.그리스도가 그 중심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29절)가 그 중심을 이룬다. 그리스도 예수,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일이 하나님의 창조 구속사의 요체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속주로 보내시기 위해 모든 작업을 해오셨으며(히1:1,2)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 그야말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인격과 그 사역은 하나님의 일의 주제요, 중심인 것이다.

 

2. 믿음으로 이룰 수 있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바로 '믿는 일'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예하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그 구속의 은총을 믿는 일 외에는 없다. 헌신도, 전도도, 봉사도, 예배도 그 믿음이 기반이 되어야 하나님께 가치를 인정받는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과 감사 없이 그 어떤 일도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인간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3. 썩지 않는 보상을 받게 됨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절)고 했다. 하나님의 일, 즉 그리스도를 믿고 그 계명대로 행하는 자는 그 보상을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받는다. 그 옛날 하늘에서 내렸던 만나는 하루만 지나도 썩었다. 세상의 공로와 업적도 언젠가는 그 가치와 의미가 변질되거나, 종국에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일에 대한 결과는 영광과 존귀가 넘치는 영원한 것이 될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요6:30-37)

 

◈ 원문강해 ◈

 

구약의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예표함

 

1. 구약 인용을 통해 표적을 구함(30,31절)

1) 표적을 요구함

(Tiv ou\n poiei'" su; shmei'on, i{na i[dwmen kai; pisteuvswmevn soi 티 운 포이에이스 쉬 세메이온 히나 이도멘 카이 피스튜소멘 소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30절)

세메이온(shmei'on표적)은 앞서 진술된 바와 같이 단순한 초자연적인 이적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내포하고 있는 권능과 기사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자신을 찾을 때 표적을 봄으로 인해서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심으로 오병이어가 표적임을 밝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i]dwmen kai; pisteuvswmevn이도멘 카이 피스튜소멘)는 제2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단회적으로 보고 믿을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J.G.Machen). 히나(i]na위하여)와 연결되어 목적절이 된 본 가정법은 이전까지 행해진 모든 표적들을 부정하며 이제부터 보고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행해 달라는 요청이다. 그것은 무리들의 철저한 불신앙을 시사한다.

 

2) 요구하는 표적의 성격

(gegrammevnon, [Arton ejk tou' oujranou' e[dwken aujtoi'" fagei'n. 게그람메논 아르톤 에크 투 우라누 에도켄 아우토이스 파게인;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31a절)

'기록된 바'(gegrammevnon게그람메논)는 현재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현재 나타나 있음을 의미한다. 기록된 그 말씀은 시78:24(LXX 77:24)으로 '하늘 양식'이라고 표현되어 있다(D.A.Carson). 본문에서는 그것이 문자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을 의미하는 아르톤 에크 투 우라누( [Arton ejk tou' oujranou'하늘에서…떡을)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오병이어를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의 불신앙을 반영한다. 즉 무리들은 오병이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떡의 양이 늘어난 정도보다는 보다 확실하게 하늘에서 떡을 내리게 하는 정도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R.C.H.Lenski). 이것이 무리들이 예수의 오병이어 표적을 부정한 의도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가 단순히 떡의 양을 늘린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는 하늘에서부터 양식을 내려 준 모세보다는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3) 구약의 실례

(oiJ patevre" hJmw'n to; mavnna e[fagon ejn th'/ ejrhvmw/, 호이 파테레스 헤몬 토 만나 에파곤 엔 테 에레모;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1b절)

본문은 무리들이 떡의 양을 늘리는 오병이어보다 더 큰 표적이라 생각하여 제시한 구약 시대의 실례이다. 그것은 '만나'(mavnna만나)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출애굽하여서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날마다 예비하여 주신 양식으로서(출16:4), 랍비들은 메시야시대가 되면 이러한 일이 다시 이루어질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A.T.Robertson). 즉 랍비들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주실 하나님의 풍부한 은사를 예표한다고 여겼다(Hoskyns). 그들은 이로써 메시야가 모세를 능가하는 우월한 존재임을 증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리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 표적은 부정하고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을 요구한 것은 모세를 훨씬 더 능가하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었다.

 

2. 예수의 그림자인 만나(32-34절)

1) 참된 떡을 주시는 하나님

(ouj Mwu>sh'" devdwken uJmi'n ... ajll j oJ pathvr mou divdwsin uJmi'n to;n a[rton ejk tou' oujranou' to;n ajlhqinovn: 우 오위세스 데도 켄 휘민…알르 호 파테르 무 디도신 휘민 톤 아르톤 에크 투 우라누 톤 알레디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2절)

본문은 무리들이 바라는 하늘의 떡의 기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교정시키는 것이다. 무리들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하늘의 떡을 모세가 내려 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믿을 수 있도록 모세가 행한 만나 이상의 표적을 행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ouj Mwu>sh'" devdwken uJmi'n우 모위세스 데도켄 휘민)는 무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부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부정어 우(ouj아니라)가 맨 앞에 기록된 것은 모세가 만나를 준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부정하는 문장 구성이다. 예수께서 만나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신 것은 간접적으로 모세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A.T.Robertson). 강한 부정을 동반하는 접속사 알르(ajll j그러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의 출처를 예고한다. 그 출처는 '내 아버지'(oJ pathvr mou호 파테르 무)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호 파테르 무라고 말씀하심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와 자신이 위대한 선지자에 불과한 모세와는 다른 존재임을 암시한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한편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divdwsin uJmi'n to;n a[rton ejk tou' oujranou' to;n ajlhqinovn디도신 휘민 톤 아르톤 에크투 우라누 톤 알레디논)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암시를 하고 있다. 첫째, 디도신(divdwsin주시나디)은 현재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하늘에서 내린 떡을 주고 계심을 시사한다. 둘째는 '참떡'(to;n a]rton ... to;n ajlhqinovn톤 아르톤…톤 알레디논)이다. 톤 알레디논(to;n ajlhqinovn참)이 떡을 수식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모세가 주었던 만나와 같은 일반적인 육체적 욕구를 채워 주는 떡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떡,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임을 시사한다.

 

2) 생명을 주는 떡

(ga;r ... oJ katabaivnwn ejk tou' oujranou' kai; zwh;n didou;" tw'/ kovsmw/. 가르…호 카나 바이논 에크 투 우라누 카이 조엔 디두스 토 코스모;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3절)

본 절은 가르(ga;r왜냐하면)로 시작되어 본절이 앞 절에서 언급된 '참떡'에 대한 이유임을 시사한다. 물론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만나도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라는 사실은 추호도 변할 수 없는 진리이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참떡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양분을 공급하여 육체적 생명을 연장시켜 줄 뿐이다(Chrysostom). 그러나 참떡은 '생명을 주는'(zwh;n didouv"조엔디두스)떡이다. 여기서 조엔(zwh;n생명을)은 단순히 영양분으로 인해 연장되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바(R.C.H.Lenski) 영생을 뜻한다(L.Morris). 무리들은 모세가 주었다고 생각한 만나를 이야기한 반면 예수께서는 만나보다 더 우월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떡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모세보다 훨씬 더 우월한 존재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영생의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3) 이 떡을 주소서

(Kuvrie, pavntote do;" hJmi'n to;n a[rton tou'ton. 퀴리에 판토네 도스 헤민 톤 아르톤 투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4절)

퀴리에(Kuvrie주여)는 무리드리 앞서 26절의 랍비 대신에 사용한 예수에 대한 칭호로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참떡이 무언가 다른 거룩한 것임을 미약하게나마 인식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무리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참떡이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원했던 것과 같이(요4:15) 자신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임을 알고 간절히 예수에게 요청하였다. 도스(do;"주소서)는 제2부정과거 명령법으로서 급박하게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실체인 예수(35-37절)

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jEgwv eijmi oJ a[rto" th'" zwh'": oJ ejrcovmeno" prov" ejme; ouj mh; ... oJ pisteuvwn 에고 에이미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호 에르코메노스 프로스 에메 우 메 …호 피스튜온;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35절)

예수께서는 참떡을 줄 것을 요청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에고 에이미( jEgwv eijmi내가…이니)라는 위대한 자기 선언을 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미(eijmi나는 ∼이다)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1인칭 단수 에고( jEgwv내가)를 언급한 것은 강조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에고 에이미는 예수께서 자신의 신적 권세와 자기 정체를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자기 선언 방식이다(요8:1210:7,11;11:25;14:6;15:1, Morgan, M.C.Tenney).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셔서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은 자신이 참떡, 곧 '생명의 떡'(oJ a]rto" th'" zwh'"호아르토스 테스 조에스)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조에스(zwh'"생명의)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께서 그 영원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A.T.Robertson), 그러나 타인이 예수의 영생을 수여받기 위해서는 예수에게 나아와 믿어야 한다. 에르코메노스(ejrcovmeno"오는)는 현재 중간태 분사이며, '믿는'(pisteuvwn피스튜온)은 현재 분사이다. 이는 예수에게서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에게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즉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나와서 지속적으로 예수를 믿고 교제를 나누어야 함을 시사한다.(A.T.Robertson, F.Reinecker).

 

2) 무리들의 불신앙

(ajll j ... eJwravkatev e? kai; ouj pisteuvete. 알르…헤오라카데[메] 카이 우 피스튜에테; 그러나…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36절)

강한 부정의 의미를 내포하는 접속사 알르(ajll j그러나)는 앞 절의 선언과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무리들은 예수에게 참떡을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명을 주는 참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불신앙으로 대적하였다. 한편 헬라어 본문사의 괄호 아네 들어있는 메(me나를)가 정확하게 본문에 있어야 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단어는 바로 26절의 내용을 가리킨다(A.T.Robertson). 즉 무리들은 이미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았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헤오라카테(eJwravkatev보고도)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무리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바로 저들 앞에 있음을 의미한다(R.C.H.Lenski). 카이 우 피스튜에테(kai; ouj pisteuvete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에서 카이(kai;그리고)는 본문의 문맥상'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의미하며(A.T.Robertson), 우피스튜에테(ouj pisteuvete믿지 아니하는도다)는 현재 시상으로 지속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무리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목적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있었다.

 

3) 아버지로부터 온 자만이 믿음

(Pa'n o} divdwsivn moi oJ path;r pro;" ejme; h{xei, ... ouj mh; ejkbavlw e[xw, 판 호 디도신 모이 호 파테르 프로스 에메 헥세이…우 메 에크발로 엑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7절)

'주시는 자는'(Pa'n o} divdwsivn판 호 디도신)은 남성이 아니라 중성 명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집합적 성격을 내포하며,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A.T.Robertson, C.K.Barrett, R.E.Brown).한편 '올 것이요'(h}xei헥세이)는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예배하기 위해서 나아오는 것을 묘사하는 헤코(h}kw오다)의 미래 시상으로 앞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는…믿는 것'(35절) 두 가지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이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무리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에 그 말씀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백성이 아니라는 선언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예수에게 나아와 믿고 경배하는 자를 결코 홀대하시지 않으신다.dn ap(ouj mh;결코…아니하리라)는 이중 부정으로 강한 긍정을 시사하는 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자신을 믿게 된 자들 모두를 받아들이시며 영생을 주실 것을 강하게 약속하시는 것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모세의 표적과 예수의 표적(30,31절)

30절의 '표적' (shmei'on세메이온)에 대해서 처음으로 표적에 대한 무리들의 물음이 급식 기적(요6:14,15,26)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E.Haenchen).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무리들이 이제 예수에게 모세가 행한 기적(요6:31)보다 더 큰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도록'(i}na히나)과 '믿다'(pisteuvein피스튜에인)라는 단어를 통해, 유대인들이 단순히 예수의 말의 신빙성만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C.K.Barrett).

31절의 '우리 조상들'은 출애굽 세대에 대한 서술이다(고전10:1). 광야에서의 만나 기적(느9:15울16:15)에 관해 '만나'를 해석함에 있어, '영혼의 양식'으로 알레고리(Allegory)화 하기도 했고(Philo),.'앞으로 올(새 시대의)만나'로 해석하기도 했다(Schlatter). 저자 요한(John)은 구약성서의 인용문들이나 교훈적인 유형들을 체계적으로 풀어쓰고 있다(P.Borgen). 하나님이 지금도 하늘로부터 참된 양식을 주고 있음을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애기하고 있다고 본다(Martyn). 무리들은 예수의 표적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다(C.K.Barrett).

 

2. 하늘(하나님)의 양식(떡) (32-34절)

32절은 31절에서 유대인들이 만나 전승을 이야기하면서 요구한 것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다(G.Richter). 예수는 떡을 모세가 준 것이 '아님'(ouj우)을 강조하고 있다(C.K.Barrett). 예수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올바르게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H.Merkel). 요한에게는 만나가 생명의 양식에 있어서 중요한 모형이었다. 만나는 불완전한 의미의 생명 양식이요, 33절 이하(생명의 떡) 문장의 도입에 불과하다(C.K.Barrett). 이처럼 요한은 구약성서를 해설함에 있어서 '…하게 읽지 말고, …하게 읽으라'는 형식으로 했다(Borgen). 33절의 '하늘에서 내려'(oJ katabaivlnwn ejk tou' oujranou'호 카타바일논 에크 투 우라누)에서 호 카타바일논(oJ katabalivn)은 '내려 준 이'로 번역되어야 한다(C.K.Barrett). '내려 준 이'는 그리스도를 뜻한다(Irenaeus). 저자 요한(John)은 생명(요1:43:15)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이는 예수가 세상에 생명을 준다는 내용으로, 요한복음서에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사상 중의 하나다(C.K.Barrett).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저자 요한은 '떡, 물, 포도나무'등을 사용했다(P.Aboth).

34절에서 우리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양식을 주겠다고 한 사실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예수가 곧 하나님의 양식임을 알지 못했다(C.K.Barrett). 때문에, 예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35절 이후에 말하고 있다. 무리들의 요구는 요4:15의 '사마리아 여인의 요청'을 연상케 한다(W.F.Howard, A.J.Gossip).

 

3. 예수의 자기 증거(35-37절)

35절 '생명의 떡'은 만나와 같은 일시적인 양식이 아니다(C.K.Barrett). 생명의 떡은 섭취함으로 얻어지는 기계적(유기적)인 의미의 양식이 아니라, 예수와의 인격적인 의미로써의 양식이다(Ignatius).

본 절에서 주목해 볼 것은 '나는 …이다'(eJgweijmi에고 에이미)용법으로(요8:1210:7,9,11,14;11:25;14:6;15:1.5).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① 구약성서에서 이 용법은 신(神)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때에 사용되었다(출3:6,1420:2;사51:12). ② 이시스 덕론(德論)의 형식을 비롯한 지혜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Deissmann). ③ '나'형식(나는…)이 발전되었을 것이다(C.K.Barrett).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을 통해, 본 절에서는 31절의 '만나'가 말씀과 가르침에 관련되어 해석되고 있다. 말씀(토라)은 떡이고 가르침(로고스)은 양식이다(C.H.Dodd). 이것은 생명의 양식에 대한 지혜 문학적인 해석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말씀(토라)으로 먹이시고, 예수는 그의 말씀(로고스)이라는 말이다(R.E.Brown).

결국 이 구절의 배경상 유대교적 요인들과 이방적 요인들이 그리스도적 전승에 의해 결합된 것이다(C.K.Barrett). '나는…이다'의 구절은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과 결부시켜 볼 때 신앙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Brown, C.K.Barrett).

36절은 36a절의 결과적 내용과 36b절의 이유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C.K.Barrett). 본 절에서 인과적 용법의 호티(oJti왜냐하면)는 36a절과 36b절을 연결해 주고 있다. '비록 너희는 보았어도 여전히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로 해석된다(Borgen). 이 단어는 예수가 그의 말을 할 때에 요한에게 있어서 종종 사용되던 단어이다(R.E.Brown). 본 절은 26절을 지시하고 있는데, 본 절의 '나를 보고도'에서 '나를'을 생략할 경우 훨씬 더 26절을 지시하고 있음이 명확해진다(C.K.Barrett).

37절에서 '오다'는 의미로 헤케인(hJkein)이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특별히 예배(경배)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이다(J.Schneider, Kittenberger). 후반부의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않는다'는 구절을 통해 요한복음에서 얘기하고 있는 보편주의와 예정론을 볼 수 있게 된다. 저자 요한의 예정론은 예수에게 옴에 있어서 하나님의 결정이 인간의 것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C.K.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표적을 구함(30,31절)

30절에서 예수 자신이 인자라는 말씀을 이해하자, 그들은 그가 인자이심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Carter).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 기해했던 것은 그가 오셔서 다시 한 번 광야의 만나를 내리시는 이적을 재연하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떡을 주셨던 사실에 만족했던 무리들은 이제 영원히 그 떡을 공급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Morris). 요한에게 있어서 '표적'(shmei'on세메이온)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깊은 영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만, 무리들에게 그 표적은 단순한 이적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은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Dodd). 그리스도의 베푸신 표적 자체가 이미 결정적인 것이었으나 그들은 다시 한 번 더 결론적인 것을 보게 해 달라고 요구했으며(Macgregor), 마치 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처럼 자신들을 기만하였다(Ryle).

한편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31절은 시78:24,25을 인용하고 있는 것 같다(Carter).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음식의 양을 늘려서 공급해 주셨지만, 모세는 '하늘에서 내린 떡'(32절)을 주었다는 것이다. 마16:1에도 그들이 바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유대인의 기대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시면 다시 만나를 내려 주실 것이라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개념 역시 그들을 자극했을 것이다(Morris). 반면 그들이 기대했던 만나가 도덕적 혹은 영적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P.Borgen), 그들이 선조들이 경험한 만나와 같은 것을 메시야를 통해 맛보기 원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2. 생명의 떡(32-37절)

32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언급이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정정하셨다. 우선 첫 번째로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주신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하늘의 떡을 주신 것이다(Carter). '참'(tovnajlqinovn톤 알레디논)은 '진짜의 , 본래의'라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께서는 만나가 그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진정한 영적 의미의 양식이 되심을 주장하시는 것이다(Tenney).

한편 '내 아버지가…주시나니'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떡'은 무리들이 주장하듯이 과거에 광야에서 주어졌던 만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시고 계신 것이라는 사실이다(Carson).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로 알려 주신다(Carter).

33절에서 두 번째로 그들의 생각을 정정하신 부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하늘의 참떡이며, 그것은 결코 1회적인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비록 예수께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드러내신 것은 아니지만, 그 함축된 의미는 이미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시하셨던 그분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의 떡이라는 선물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34절에서 무리들은 여전히 문자적이며 물질적인 견해를 갖고서 이러한 참생명의 떡을 달라고 요구한다. 우물가의 그 여인이 다시 우물에 와서 물을 긷지 않도록 생수를 요구했던 것처럼(요4:15), 그들은 다시 배고프지 않기 위해 생명의 떡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 7번나타나는 그의 주장 가운데 첫 번째 말씀을 하셨다(요6:358:12;10:7,11;11:25;14:6;15:1). 그 주장들은 각각 '나는…이다'라는 강조된 선포와 함께 소개되곤 한다. 그리고 이 각 선포들은 인간의 영적인 필요와 예수의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그는 '내가 곧 생명의 떡'(35절)이라고 선언하셨다. 그가 바로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분인 것이다(Carter).

35절의 '생명'은 일반적인 생명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는 말이다(Hendriksen). 앞 절(32,33절)에서도 그는 생명의 떡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여기에서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35절 후반절의 '내게 오는 자… 아니할 터이요'에 대해서는 주께 오는 자들은 영원히 그들의 영적 욕구가 만족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입장도 있지만(Bernard), 성도란 믿음으로 보다 충만한 영적인 욕구를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 즉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Barrett).

36절에서 그들은 예수를 보면서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표적을 통해 그들에게 떡을 주심으로써, 하늘의 진리를 여시고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지만, 그들은 지극히 육신적이고 땅의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떡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Hodet). 그들은 자신들의 본 바를 깨닫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다(Morris).

37절의 예수의 말씀 가운데 나오는 '…다'라는 말은 중성 명사로, 여기에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만 문법적으로는 일반적으로 '모든 것'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Morris). 예수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며, 그때야 비로소 그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없다. 예수께서는 누구라도 용납할 것임을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Tenney).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유대교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에 대해 금세기 초 종교사학파들은 헤라 종교사적 배경을 가진 신앙 고백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신앙 고백임을 밝히고 있다.

 

1. 묵시 문학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유대교에 오면 유대 묵시문학에 나오는 merkabah전승의 이위일체론적인 신인식에서 발달했다고 한다. 그때에 하나님과 또 하나의 신적 존재, 즉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는 제2의 신적 존재를 구약과 유대교가 제공하는 범주와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리인 노릇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이 발달한다. 이 이위일체론적인 신인식과 더불어 초월자 하나님의 내재의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인식이 발달한다.

 

2. 지혜 문학에서

하나님과 그의 지혜 또는 그의 말씀의 신학이 발달한다. 그래서 이 지혜나 말씀이 하나님의 속성으로 추상적인 개념으로 그치지 않고 물체화, 인격화해서 나타난다. 이것도 묵시문학에서와 똑같이 초월자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고 불리워진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지혜, 말씀이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대리자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때 쓰는 언어가 '아들, 딸'등의 언어들이다.

묵시 문학과 마찬가지로 지혜 문학에서도 점차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기를 꺼려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 하나님의 지혜의 예시와 구원의 수단이 모세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재현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모세 율법을 잘 연구하고 지킴으로써 지혜를 얻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상이 나온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자들이 곧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추종하며 따라 사는 자들로서 그분의 아들들로 불리우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방 민족들, 즉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면서 나아가서 살지 않는 자들과 구분된다. 그리고 그들만 종말에 구원받는 사상으로 발전한다.

 

 

조상에 대한 개념(6:30-37)

◈ 세계배경 문화사 ◈

 

조상이란 돌아가신 어버이와 그 위의 대대로의 어른을 말한다. 여러 문화권에서는 그들의 조상을 신으로 섬겼다. 이런 숭배는 유목 사회보다는 농경 사회에서 더 발달하였다. 즉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풍년을 들게 해주는 것이 다 조상덕이라고 믿었다.

 

서양/ 로마 :로마에서는 특별한 영웅 등 특정한 조상들은 사령(死靈)의 개념을 넘어 개별 가족의 조상으로서 숭배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황제들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황제가 신격화하여 전체의 조상처럼 예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율리우스 케사르(102-44 B.C.)의 신전이 세워져 경배를 받았으며, 가이우스 황제나 편집광인 네로 황제 등이 자신들을 신과 같은 존재로서 숭배할 것을 강요했던 사실도 이와 관련이 깊다.

 

동양/ 중국 : 중국에서는 효도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도 깎듯하여 조상의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하며, 그를 위해 남자아이를 낳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풍속은 사자(死者)에 대한 애착의 정과 더불어 사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구나 생존에 유력했던 조상의 영혼은 사후에 더욱 강력해진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사자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 현실 사회로 되돌아온다는 생각과, 나아가 사자의 영혼에 대한 막연한 외경(畏敬)의 관념 등에서 이들 조상을 받드는 여러 가지 의례가 행해지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개별적, 가족적 숭배가 대부분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씨족, 부족, 국민 등의 집단 단체에 의하여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영웅 등 특별한 조상은 다른 조상보다도 우선적으로 받들여지고, 또 단순한 사령(死靈)의 개념을 넘어 신격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의 조상 숭배는 유교의 발전과 함께 효도 사상과 결부되어 복잡한 의례가 일상 생활 속에 침투되었다. 유교적 제례에 의한 조상 숭배의 정신은 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국가적 기반이 되었고, 나아가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이념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 : 우리 민족에게는 옛날부터 조상 숭배의 관습이 있었다. 즉, 옛날 각 가정의 아랫목이나 시렁 위에 놓아두었던 '조상 단지'는 바로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조상 단지는 지방에 따라 제석오가리, 세존단지 등 여러 명칭이 있으나, 그것은 종손의 집에만 전해졌고 작은 아들 집에는 없었다.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자신들의 시조(조상)는 하늘에서부터 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동명설화(東明說話)에 의하면 동명의 아버지는 하늘 나라에서 온 해모수이고, 그 어머니인 유화는 물의 신인 하백의 딸로 나타나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서는 자신들의 건국한 조상인 동명을 신격화(神格化)하여 동맹(東盟)이라는 제천 행사를 통해 숭배하는 습관이 있었다.

신라 사로 6촌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또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알지(金閼智)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궤에 담겨져 있었다고 하여 천상과 연결하여 생각되어졌다. 그 밖에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水路王) 역시 하늘로부터 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하늘로부터 온 시조들은 매우 특별한 인물로 여겨져서 죽은 후에도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는 육체적인 조상(창15:15)과 영적인 조상(롬4:11,16)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조상들의 유업을 지킬 것과(왕상21:4), 우리의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다. 때로는 조상들로부터 나쁜 관습을 이어받기도 한다. 즉 우상 숭배(렘44:17)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기업과 하나님이 주신 약속 등을 이어 받으라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들도 조상들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육신적인 믿음(6:30-37)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3절)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육이란 타락한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뜻한다. 이 육적인 본성이 성령으로 거듭날 때 주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육신적인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된다.

 

1. 그리스도의 인격보다 표적을 중시함

신앙의 대상은 바로 우리 주님이다. 주 예수의 전인격을 믿고, 사랑하고, 본받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다. 그럼에도 육신적인 신앙인들은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30절)라고 기도한다. 그리스도 자체보다 표적을 우상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신비한 표적, 잘되는 표적, 낫는 표적 등을 신앙의 주 대상으로 삼는다. 그와 같은 믿음은 참된 신앙으로 볼 수 없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류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2. 육신의 양식만을 구함

주님은 하늘의 떡, 영생의 떡을 말씀하시는 반면 그들은 땅의 양식,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신앙인의 관심과 그 정신의 초점은 하나님과 그 진리 그리고 그 뜻과 영원한 세계에 맞춰져 있어야 합당하다. 그 마음이 있는 곳이 그 신앙인의 신앙 주소가 된다. 그러나 늘 땅의 일, 육신의 것에만 관심을 지닌 신앙인이 있다면 그는 참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다.

 

3. 영원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함

그와 같은 육신적인 믿음을 지닌 자들은 주님의 말씀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고 하며 주님 곁을 떠나게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고전2:14)라고 했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라고 했다. 세속적인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구속의 진리와 가치는 피곤하고 난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영원한 생명의 양식(6:30-37)

 

'사랑은 달콤하다 그러나 빵과 함께 있을 때만이 그렇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속담이다. 인간은 식량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문화도, 정신적인 활동도 또 종교도 사실은 빵 문제를 해결한 후 가능하다. 예수는 '내가 곧 생명의 떡'(35절)이라고 했다. 함께 그 교훈을 생각하자.

 

1. 하늘에서 주신 양식임

빵 한 조각 안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이웃의 덕이 어우러져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와 바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 내후에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주신다. 그 옛날 '만나'도 하늘에서 주신 선민의 양식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하늘에서 내린 참떡'(32절)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 영광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2. 영원한 생명의 양식임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절). 육신의 양식은 엄밀히 말해서 '생존의 필수품'이다. 즉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될 수 없다. 일차원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할 뿐 인간의 영원한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없다. 자유, 진리, 영원한 신, 영원한 세계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영원한 배고픔이다. 이 배고픔을 채워 줄 양식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영원한 양식을 섭취하려면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36절)고 하셨다. 그렇다. 육신의 양식은 육신의 입을 여러 섭취하고, 정신의 양식, 즉 지식은 정신의 문을 열어 배워 습득한다. 그렇다면 영혼은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맞아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약속을 믿으며 시마다 때마다 그분의 임재와 사랑을 믿고 교제하는 것이 영원한 양식을 먹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결과 영생에 이르게 된다.

 

예수의 교훈에 대한 변론(요6:38-46)

 

◈ 원문강해 ◈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소유함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어 마지막 날에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삶을 얻도록 역사하신다.

 

1. 아버지 뜻대로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심(38-40절)

1)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유

(o{ti katabevbhka ajpo; tou' oujranou' oujc i{na poiw' ... ajlla; to; ... qevlhma tou' pevmyantov" me: 호티 카타베베카 아포 투 우라누 우크 히나 포이오…알라 토…델레마 투 펨프산토스 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8,39a절)

카타베베카(katabevbhka 내려온)는 전치사 카타(katav 아래로)와 동사 바이노(baivnw 오다)의 합성어인 카타바이노(katabaivnw내려오다)의 현재 완료시제로, 이미 내려와 있음을 암시한다(C.K.Barrett).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분이시다. 이는 앞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떡과 비교되어 예수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떡, 곧 생명의 떡이심을 암시한다.

한편 '행하려'(poiw' 포이오)는 포이에오(poievw 행하다)의 현재 가정법으로 목적절을 이끄는 히나(i}na 위하여)와 연결되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포이오(poiw' 행하려)가 현재 가정법이라는 사실은 그가 계속해서 행하려고 하는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의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qevlhma tou' pevmYanto" me 델레마 투 펨프산토스 메)이다.

펨프산토스(pevmYanto" 보내신)은 부정과거 분사로서 예수를 일회적으로 보내신 사실 자체를 의미한다. 더욱이 이것은 현재 가정법으로 사용된 포이오와 연결되어 예수의 지상 최대 목적이 자신을 보내신 자, 곧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임을 시사한다(A.T.Robertson).

 

2) 보내신 이의 뜻

(i{na pa'n o} devdwkevn moi mh; ajpolevsw ejx aujtou' ajlla; ajnasthvsw aujto; jn? th'/ ejscavth/ hJmevra/. 히나 판 호 데도켄 모이 메 아폴레소 엑스 아우투 알라 아나스테소 아우토 [엔] 테 에스카테 헤메라;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39b절)

'주신 자'(pa'n o} dedwkevn 판 호 데도켄)에서 판(pa'n 모든)은 중성으로서 집합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에게 주시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데도켄(devdwkevn 주신)은 현재 완료시제로서 그 시점이 마지막 날에 살리는 것에 연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R.C.H.Lenski). 한편 아폴레소(ajpolevsw 잃어버리지)는 앞서 중성으로서 집합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판(pa'n 모든)과는 달리 개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묘사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나는 전공동체 중에서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C.K.Barrett, F.Reinecker).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믿는 자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마지막 날'(jn? th'/ ejscavth/ hJmevra/ [엔] 테 에스카테 헤메라), 곧 종말에 모두 살리실 것이다. '살리는'(ajvasthvsw 아나스테소)이란 말은 '부활'(ajvastasi" 아나스타시스)의 어근으로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의인의 부활을 시사한다(A.T.Robertson).

 

3)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음

(pa'" oJ qewrw'n to;n uiJo;n kai; pisteuvwn eij" aujto;n e[ch/ zwh;n aijwvnion, kai; ajnasthvsw 파스 호 데오론 톤 휘온 카이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에케 조엔 아이오니온 카이 아나스테소;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40절)

'보고'(qewrw'n 데오론)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주 예수에 대해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곧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가리킨다(요12:4516:10,19, C.K.Barrett, A.T.Robertson). 예수를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영생이 수여된다. '얻는'(e]ch/ 에케)은 결코 미래시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시제로서 예수를 보고 믿는 순간에 영생을 소유하게 됨을 시사한다(R.C.H.Lenski). 영생은 마지막 날의 부활 이전에 믿는 자들이 소유하게 될 현재적 축복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두 가지 시제, 곧 부정과거 가정법과 약속과 의지 등을 함축하고 있는 미래 직설법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아나스테소(ajnasthvsw 다시 살리리라)는 미래 직설법으로 해석되는 것이 자연스럽다(A.T.Robertson, C.K.Barrett).

 

2.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무리들의 몰이해(41,42절)

1) 예수의 말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

( jEgovgguzon ou\n oiJ jIoudai'oi peri; aujtou' 에공귀존 운 호이 유다이오이 페리 아우투;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1절)

'수군거려'( jEgovgguzon 에공귀존)의 어근인 공귀조(govgguvzw)는 의성어로서, 비둘기들이 모여 구구거리는 것이나 별들이 날아다닐 때 들리는 날게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에공귀존은 기동상의 미완료시상으로, 이는 예수 자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말씀을 끝내자 그 선언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는 불만을 계속적으로 수근거려 토로하기 시작한 것을 나타낸다(F.Reinecker).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의 선언과 변론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2) 자연 현상을 기준으로 이해함

(Oujc ou|tov" ejstin jIhsou'" oJ uiJo;" jIwshvf, 우크 후토스 에스틴 예수스 호 휘오스 요세프;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42a절)

부정어 우크(Oujc 아니냐)가 문두에 위치해 있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유대인들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되어 '이는'(ou|tov" 후토스)은 예수를 가리키는 '이 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기에는 불신앙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요구한 떡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좌절과 실망의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R.E.Brown). 이는 멸시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F.Reinecker). 그들이 실망과 불신앙에 빠진 것은 예수의 가계(家계)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에서 연유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oJ uiJo;" jIwshvf 호 휘오스 요세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사고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초자연적 능력을 주셔서 임무를 수행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수여할 수 있으며 신적 권세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인간이라는 증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불신앙에 빠지게 되었다.

 

3) 초자연적 사실을 이해하지 못함

(pw'" nu'n levgei o{ti jEk tou' oujranou' katabevbhka_ 포스 뉜 레게이 호티 에크 투 우라누 카타베베카;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2b절)

'하늘로서 내려왔다'( jEk tou' oujranou' katabevbhka 에크 투 우라누 카타베베카)는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예수의 가계에 대한 선 이해로 인해서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3. 가르침의 진정성에 대한 변증(43-46절)

1) 아버지로부터 온 자만이 이해함

(Mh; gogguvzete ... oujdei;" duvnatai ejlqei'n prov" me ... eJlkuvsh/ aujtovn 메 공귀제테…우데이스 뒤나타이 엘데인 프로스 메…엘퀴세 아우톤; 수군거리지 말라…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43,44절)

공귀제테(gogguvzete 수군거리지)는 현재 명령법으로 부정사 메(me 말라)와 결합하여 현재 한창 진행 중인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며, 자신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예수께서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불만과 웅성거림을 금지시키셨다. 한편 엘퀴세(eJlkuvsh 이끌지)는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재권을 의미한다(C.K.Barrett, W.Barclay, L.Morris, A.T.Robertson). 이것은 '아니하면…없으니'(oujsei;" duvnatai ... me 우데이스 뒤나타이…메)와 연결되어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예수에게로 이끌어 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2) 구약 예언의 성취

(e[stin gegrammevnon ejn toi'" profhvtai", Kai; e[sontai pavnte" didaktoi; qeou': ... maqw;n 에스틴 게그람메논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 카이 에손타이 판테스 티타크토이 데우…마돈;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배운, 45절)

에스틴 게그람메논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e[stin gegrammevnon ejn toi'" profhvtai" 선지자의 글에…기록되었은즉)에서 엔토이스 프로페타이스는 문자적으로 '선지자 안에'를 의미하나, 이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쓴 예언서를 가리킨다. 이러한 사실은 게그람메논(gegrammevnon 기록되었은즉)과 연결되어 확증된다. 더욱이 게그람메논은 현재 완료시제로 이미 기록되어 있는 예언서를 의미하며, 본문은 구약 사54:12,13을 가리킨다(L.Morris). '하나님의 가르침'(didaktoi; qeou': 디다크토이 데우)은 구약 본문을 해석하여 옮긴 것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53장에기록된 고난받는 종, 곧 메시야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가 누리게 될 영광과 축복을 의미한다(D.A.Carson, R.CH.Lenski).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하나님의 절대적 선재권만을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마돈(maqw;n 배운)은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예수에게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접하게 된 믿는 자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A.T.Robertson). 영생을 얻으며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을 누릴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배워가는 자이다.

 

3) 하나님을 보신 예수

(eij mh; oJ w]n para; tou' qeou', ou|to" eJwvraken to;n patevra. 에이 메 호 온 파라 투데우 후토스 헤오라켄 톤 파테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6절)

본 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앞 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앞 절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누구나 다 하나님과 대면하여서 보게 되며 스스로의 능력으로 아들 예수께 나아가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보았느니라'(ou|to" eJwvraken to;n patevra 후토스 헤오라켄 톤 파테라)는 앞서 언급된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와 연결되어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만이 그럴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oJ w]n para; tou' qeou' 호 온 파라 투 데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본 자가 없으며,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나누는 자가 없다(요1:18). 다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본 예수께서 중재하심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C.K.BHarrett, A.T.Robertson).

앞 절에서 말씀하신 것은 믿음으로 영생과 마지막 부활을 소유하게 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이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을 시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과 교제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이신 예수만이 가능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중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요14:9).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심(38-40절)

38절은 시40:8,9을 간접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히10:9과도 비슷하다(M.Boismard).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의 사상적 내용은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K.Barrett). 본 절에서 '내 뜻'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의 대조는 예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막14:36눅22:42)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M.Boismard, E.Brown). 39절의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37절의 '내어쫓지 않는다'의 바뀐 표현이다. 이것은 복음서 기자가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예수만이 '구세주'이기 때문에(요3:174:42) 그의 '쫓아냄'은 '잃음', 즉 '멸망'을 뜻하는 것이다(R.Bultmann).

40절은 예수의 보냄의 목적에 대해 39절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R.Bultmann, M.Boismard). '보다'는 '바라본다'는 의미로, (감각적인) 눈으로 보는 것과 더불어 영적인 시야를 뜻한다(E.Brown). 여기에서 '보는 것'에 '믿는 것'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K.Barrett, R.Bultmann). 40b절의 '마지막 날에 살리는 것'은 39,44,54절의 '나를 보내신 이의 뜻'에 기초하고 있다(K.Barrett).

 

2. 유대인들의 수군거림(41-43절)

41절의 유대인들의 수군거림은 마치 광야에서 유대인들의 조상들(출16:2,8,9)이 했던 불평과 같다(E.Brown, K.Barrett).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갈릴리 사람들에게 쓴 것으로, 이것은 일반적으로 예수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을 말할 때 쓰였다(E.Brown). 28절과 30절에서와 같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담론은 그들의 오해와 불만이 한 걸음씩 전진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K.Barrett).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임을 예수가 계시한 사실은 33절과 35절의 결합으로써, 세상의 반기(유대인들의 수군거림)를 부추겼다(R.Bultmann).

42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습(예수의 혈통)으로만 보는 어리석음을 보였다(E.Brown, R.Bultmann). 유대인들의 이러한 어리석음은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주장에 대한 거부(Borgen)에 기인한다(Menoud, Odeberg). 이 구절은 나사렛에서 예수에 대해 거절한 사실(마13:55막6:3눅4:22)과 병행된다(K.Barrett, E.Brown).

43절에서 저자 요한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이 과시되는 즈음에 '너희는 수군거리지 말라'는 말로 유대인들의 흥분을 가라앉힌다(R.Bultmann).

 

3. 예수에게로 올 자(44-46절)

44절의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구절을 볼 때, 유대인들의 불평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의 주도권을 벗어나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함(막10:23-27)을 의미한다(K.Barrett). 랍비 문헌을 보면 '이끌다'를 율법에로의 이끔으로 표현하고 있다(E.Brown).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그들의 불신앙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불신앙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기 때문에, 아버지(하나님)에 의해 예수에게로 갈 수 있는 것이다(R.Bultmann). '살리리라'는 미래 직설법적 표현으로 '살릴 것이다'이다(P.Oxy).

45절에서 저자 요한은 '선지자의 글에'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였다(K.Barrett). 요한이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것은 선지자의 말이 실상 종말론적 예언이며, 예언의 성취가 곧 신앙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R.Bultmann). 본 절에서 지시하고 있는 선지자의 글(예언서)은 아마 사54:13과 렘31:33,34일 것이다(E.Brown, K.Barrett). 요한이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것은 선지자의 말이 실상 종말론적 예언이며, 예언의 성취가 곧 신앙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후반부절은 인간이 아버지(하나님)에게 '경청하고 배움'으로, 신앙의 표상인 예수에게 오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역설하고 있다(R.Bultmann).

46절은 '아버지를 본다는 사실'에서 신비적 체험으로 오해하는 것을 막고, 예수만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K.Barrett). 예수만이 계시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된다(R.Bultmann, E.Brown). 즉 저자 요한은 예수에 의해 구원의 과정이 이뤄진다고 말하려고 한다(K.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함(38-40절)

38절에는 이 본문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온'(38절) 분이라는 것과, 사람들이 그를 믿기 위해 그에게로 '온다'(37절)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은 본문 6장에서만 7번 나타난다(33,38,41,42,50,51,58절). 아버지가 주시는 구원과 영적인 양식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그에게로 와야만 한다. 예수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그 선물은 주시는 분에게 올 때에 라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Carter). 한편 그에게 오는 자는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9절).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고 그에게 온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결국 영원한 구원에 이를 것이다(L.Berkhof).

또한 40절에는 그를 '보고 믿는 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서 본다는 행위가 특별히 구원과 연관된 것 같지는 않다(Morris). 단지 믿음의 전체로 어떤 환상을 눈으로 볼 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깨달아 본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Bailey).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주실 생명이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신다. 현재 그리스도와 만난다는 것은 앞으로 누리게 될 영생과 분리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만 발견되는 표현으로, 요한에게 있어서 오늘 누리게 된 영생은 마지막에 올 부활을 포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Morris).

 

2. 무리의 수군거림(41,42절)

41절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항하여 사람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이란 예수를 대적했던 유대 지방의 유대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이다(Carter). 이 경우에 그 유대인들이란 가버나움 회당에 모여 들었던 사람들이거나(59절), 최소한 그들의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이다(Carson). 그들이 갈릴리로부터 왔다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다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며 해석할 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부모가 나사렛이라는 갈릴리 마을 출신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42절, Carter).

 

3. 아버지를 본 자(43-46절)

43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문자적인 해석에 대해 서로 수군대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해석을 간과하신다. 그는 또한 44절에서 37절의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신다. 아무도 아버지에 의해 이끌리지 않고는 그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올 수 없다. 이렇듯 아들에게 옴으로써 하나님의 주도권적인 권한에 응답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다(Calvin, Barclay, Lightfoot, Morris, Godet, Barrett).

45절에서 예수께서는 사54:13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모두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는 자들은 그의 아들 예수에게 응답할 것이다(Carter). 이 구절의 의미, 특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곧 그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보며(Odeberg), 오직 예수만이 그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Berrett, Themple).

반면 이 구절에 성도와 하나님의 교제뿐 아니라 그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Westcott).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그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았던 자들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46절은 서문(요1:18)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그 사상을 반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들 이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자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신다. 아버지께로부터 오 자 만이 아버지를 본 적이 있는 것이다(Carter). 결국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하나님과 예수, 즉 그의 독생자이신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말씀인 것이다(Morris).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여호와의 날

 

마지막 날 곧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구약에서부터 임 유도되던 사상이다. 특히 요엘 선지자나 아모스 선지자 등 선지자들에게서 이 개념이 발견되고(사13:6겔13:5욜1:153:14;암5:18,20) 이는 당시 일반 백성들의 강한 희구를 반영한 사상의 일단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1.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짐과 동시에 주변 국가들의 범죄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 사이에 만연한 불평등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은 이런 모든 인류의 죄악이 해결되는 미래를 기대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때 오래할 그 날을 이방의 악한 세력과 국내의 죄악들이 제거도리 민족적 구원의 날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날'하면 여호와께서 원수를 이겨 주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는 승리의 날로 알고 그날을 사모하는 것이 상례였다(암5:18).

 

2. 선지자들이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들을 위하여 원수들을 멸하여 주시는 그 날로 믿어 온 반면에 선지자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승리와 실패 여하는 오직 그들의 신앙과 도덕적 조건으로 결정될 것을 말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원수를 이겨 주시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날이라는 것이 선지자들의 교훈이며 선포였다(욥2:1-11사2:12-21습1:7-13).

 

3. 성취되어지는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은 구약의 특정사건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성경의 여타 예언들처럼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수차의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도 하나 결정적으로는 세상 최후의 말을 지칭하기도 한 것이었으며, 또한 시기적으로 볼 때도 남북 왕국이 분명히 멸망되고 난 후에도 심지어 신약에도 거듭거듭 종말론적 심판의 날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말4:5요12:48).

이는 미래에 여호와의 구원과 심판이 구체적으로 임할 것이 예시된 것이며,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이 분명하다(고전5:5벧후3:10). 그날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한 모든 자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이 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신화적 존재(6:38-46)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이 집단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 집단을 이끌어 갈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지도자들은 보통 사람과 같은 출생이 아닌 신(神)의 아들 또는 그의 대리자로 자처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출생 신화 역시 하늘에 있는 신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도자인 자신과 관계를 맺음으로 자신의 출생을 신성시하게 되었다.

 

동양/ 중국 : 중국 사회는 삼황(三皇) 오제(五帝)로부터 시작된다. 즉 "반고씨(盤古氏)가 땅과 하늘을 분리시켜 세상을 창조했으며, 유소씨(有巢氏)가 동물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나무 위에 주거지를 만들었고, 수인씨(燧人氏)는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만들어 요리를 했으며, 복희씨(伏羲氏)는 고기와 동물을 잡기 위해 그물을 짰고, 황제 유응씨(皇帝有熊氏)는 국가를 건설했으며,"라고 한다. 「백호통(白虎通)」에 보면 "황제는 최초로 사회 제도를 만들었고, 전욱(황제의 손자)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바르게 성립시켰으며,"라고 했다. 중국 사회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복희(伏羲)는 12년간의 잉태 기간을 걸쳐 태어났으며, 인간들에게 사냥과 낚시, 무리를 지어 사는 군락 생활을 가르쳤으며, 악기를 만들고, 결혼 제도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중국의 「풍속통의(風俗通義)」에 보면 여와라는 신이 있었는데 이 신은 인간을 진흙으로 창조했으며,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어느 때에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네 개의 기둥이 부러져서 천지가 몹시 파괴된 일이 있으나, 여와는 5색의 돌을 다듬어서 하늘의 파손된 곳을 보충하고, 큰 거북의 다리를 잘라서 네 기둥을 세웠으며 가대의 재를 쌓아서 홍수를 막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여와가 복희의 누이 혹은 아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태양을 의인화하여 숭배하였던 기사도 있다. 즉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동남해(東南海)의 건너편에 희화(羲和)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에 희화라는 이름의 여자가 살고 있는데, 그녀는 열 개의 태양을 낳아 그것을 감천(甘天)이라는 샘물에서 태양 목욕을 시킨다고 한다."라는 기사가 있다. 또한 신농(神農)에 관한 기사가 보이고 있는데 이는 「역경(易經)」에 "신농은 복희의 뒤를 이어서 천자(天子)가 되어 목제(木製)의 호미나 괭이를 만들어서 농업을 가르치고 시장을 만들어 교역을 시켰다."라고 하고 있다. 이런 신화의 공통점으로는 당시 통치자의 조상을 신성시 하여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신화적인 존재로는 황제라는 인물이 있는데 「산헤경」에 의하면 "치우(痔尤)가 폭풍을 일으켜 황제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황제는 발(魃)이라는 천녀(天女)에게 명하여 폭풍을 그치게 한 후 치우를 잡아 죽었다."

한국 : 한국 사회의 단군 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단군 왕검에 관한 기사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제1권 '기이(紀異)'편 고조선(古朝鮮)조에 보면 단군 왕검에 관한 기사가 보이고 있다. 즉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뜻을 인간 세상에 두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저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이르고 이 분을 곧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렀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善),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되 원컨대 사람이 되어지이다 하거늘, 한 번은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자루와 마늘 20톨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동안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이에 곰은 인내하며 근신하여 여자의 몸이 되었고 범은 참지 못하여 사람이 못되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또 신단 아래서 축원하기를 "아이를 배어지이다" 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깐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단군 왕검은 고조선을 1,500년 동안 통치하다가 1,908세에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한다.

 

서양/ 그리스 :그리스 신화를 보면 모든 시들이 반신반인(半神半人)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의 신 중에서 최고의 신인 제우스 역시 반신반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포세이돈, 하테스, 래스티아, 테메터르, 헤라 등의 자식을 삼켜 후한을 없애고자 했다. 이에 레아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남편을 속여 돌을 먹이고 제우스를 넘프(요정)와 산양(山羊)인 아말테이아에게 부탁하여 크레타섬에 있는 딕테 산의 동굴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이들에게서 온갖 지혜와 능력을 배운 제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메티스의 도움으로 크로노스에게 약을 먹여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는 형제를 토해 내게 하였다. 제우스는 이들 형제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물리쳤다. 이어 거인족 키클롭스의 도움으로 티탄신 족을 물리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제우스는 그의 형제들과 지역을 삼 등분하여 각각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하데스는 제승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우스는 여신들과 또한 인간 여성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낳았다. 즉 메티스와는 아테나(지혜의 여신), 에울리노메와는 카리스(미와 우아함의 여신), 헤라와는 아세스(군신), 에일에이티이(출산의 여신), 헤베(청춘의 여신), 헤파이스토스(대장간의 신), 레토와는 아폴론(태양신), 아르테미스(사냥의 신) 등을 얻었다. 인간과의 관계를 보면, 주신(酒神)인 디오니소스, 헤라클레스, 헤르세우스 등의 자식을 두었다. 이와 같이 제우스는 신인 동시에 인간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근동/ 이집트 : 근동 지역 역시 반신반인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신화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신은 아툼 라 신이다. 그는 스스로 자가 수정을 통하여 슈와 테프누트라는 자식을 얻었다. 슈와 테프누트는 결합하여 게브와 누트를 얻게 되었지만 이들은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그 결과 게브는 대지, 슈는 공기, 테프누트는 증기, 누트는 하늘을 각각 다스리게 되었다. 오시리스는 여동생 이시스와 결혼하였으나 누트의 시기로 인해 결국 오시리스는 누트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시리스를 살해한 누트는 그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사방에 버렸다. 오시리스의 아내는 전국을 헤매며 그 시체를 모아 재생시켰다. 오시리스는 견신(犬神) 아누비스와 함께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하는 저승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또한 이집트인들에게는 '계절마다 부활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연신으로 숭배 되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딤전4:7) 했으며, 신화는 쓸데없는 변론을 야기시키므로(딤전1:4) 멀리하라 하였다. 신화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이 하늘로부터 왔다고는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늘로부터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깨달아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6:38-46)

 

주님은 유대 군중들에게 육신의 양식도 주셨고 영적인 교훈을 통해 당신이 영생의 떡이심을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많은 군중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치 않고 불신한다.

 

1.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치 않는 사람들

그들은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인정치 않았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고 코웃음친 것이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결코 예수믿는 것이 예수에 대한 신앙의 첫 걸음이다. 예수를 절대적인 신적 존재로 인정치 않는다면 그 신앙은 생명력이 결여된 것이다.

 

2.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는 사람들

주님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림 없이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과 지혜만으로는 예수를 참되게 믿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성과 지식만으로 예수께 접근하려는 이들이 많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3절)고 했다. 원죄로 인해 타락한 인성으로는 스스로 그리스도 예수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3. 성경을 외면하는 사람들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절)고 하셨다. 즉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배우고 연구한 사람만이 예수를 온전히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외면하고 다른 방법으로 예수와 교제하려는 이들이 많다. 신비스러운 체험, 인간적인 철학과 과학적인 이론 등을 통해 예수를 알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벗어난 신앙은 바로 사단에게 속한 이단이 됨을 알아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예수가 오신 뜻(6:38-46)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38절). 예수는 계속적으로 당신이 이땅에 온 의미와 목적을 강조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교훈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성도들에게 귀감이 된다.

 

1. 하나님 뜻 안에서 오셨음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29절)다.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니다. 또 그처럼 삶의 동기가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삶의 목표로 삼으신 것이다. 이는 인생의 참 모범이다. 우리도 다 하나님 뜻 안에서 인생을 관조해야 한다. 내 자의로 이 세계에 살게 된 것도 아니요 내 마음대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보내심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한다.

 

2. 순종함과 겸손함으로 오셨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2:7,8)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으나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춰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예수의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본받아야 가능함을 교훈해 준다. 아무나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서 살 수는 없다. 예수의 정신을 지닌 성도만이 이 땅에 보냄받은 자로서 살 수 있다.

 

3. 자신을 주시려고 오셨음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셨다. 철저하게 자신을 이웃에게 주시려고 오셨다는 의미다. 무언가를 취하고 이들을 보고, 얻고자 인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주는 자로서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함을 교훈해 주신 것이다. 예수가 오신 뜻, 우리 삶의 뜻으로 삼자.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 영생을 주심(요6:47-59)

 

◈ 원문강해 ◈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심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은 인자 되신 예수께서 세상을 위하여 주신 살과 피를 먹는 것, 곧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1.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47-51절)

1)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떡

(oJ pisteuvwn e[cei zwh;n aijwvnion ejgwv eijmi oJ a[rto" th'" zwh'". 호 피스튜온 에케이조엔 아이오니온 에고 에이미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7,48절)

'믿는 자'(oJ pisteuvwn 호 피스튜온)는 현재 분사로서 예수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확신을 갖고 믿는 자임을 시사한다(R.C.H.Lenski). 믿음은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께서만 오셔서 하나님을 본 유일한 존재이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며(A.T.Robertson).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생을 가졌나니'(e[cei zwh;n aijwvnion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에서 에케이(e[cei 가졌나니)는 현재 시제로서 믿는 자들이 현재 삶 속에서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35절에 이어 다시 한번 위대한 자기 선언인 에고 에이미(ejgwv eijmi 내가…이로다)와 더불어 믿는 자들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이다. 에고 에이미와 더불어 선언된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oJ a[rto" th'" zwh'" 생명의 떡)는 예수 자신이 생명의 원천이며, 동시에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2) 만나와 생명의 떡

(e[fagon ... ajpevqanon ... favgh/ kai; mh; ajpoqavnh/. 에파곤…아페다논…파게 카이 메 아포다네;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49,50절)

에파곤…아페다논(e[fagon ... ajpevqanon 먹고 죽었거니와)은 모두 부정과거시제로서 먹었고, 죽었다는 것을 단순한 일회적 발생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며, 모세의 인도함에 따라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 생활을 하던 당시에 먹었던 만나 사건을 의미한다(출16:4-36).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만나는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만나를 먹음으로 육체적 생명을 연장하였다(C.K.Barrett). 그러나 결국 그들은 사망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파게 카이 메 아포다네(favgh/ kai; mh; ajpoqavnh/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는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생명의 떡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내린 생명의 떡, 곧 예수 자신을 먹음으로 결코 죽지 않게 될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만나와 생명의 떡의 차이이다.

 

3) 예수의 살

(oJ a[rto" oJ zw'n ... ejgw; dwvsw hJ savrx mouv ejstin uJpe;r th'" tou' kovsmou 호 아르토스 호 존 에고 도소 헤 사륵스 무 에스틴 휘페르 테스 투 코스무;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51절)

본문은 만나와 달리 하늘에서 내리는 떡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근거와 그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떡이다. 그 떡은 바로 예수의 살이다. '나의 줄'(ejgw; dwvsw 게고 도소)에서 1인칭 대명사 에고(ejgw; 나)는 도소(dwvsw 출)가 1인칭 단수 동사인 바 없어도 가능하나 삽입되어 있는 것은 생명을 주시는 떡이신 예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무리들이 만나를 내려주었다고 여기는 모세보다 예수 자신이 더 탁월한 분이심을 시사한다(A.T.Robertson). 예수께서 주시는 떡인 헤 사륵스 무(hJ savrx mouv 나의 살)에서 사륵스는 바울에 의하면 단순히 몸을 뜻하는 도소(dwvsw)와 구분하여 죄 있는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특별한 구별이 없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성육신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요1:14에서도 사륵스로 묘사된다(Moloney, D.A.Carson). 또한 혹자는 생명의 떡이 사륵스(savrx 살)라는 사실을 근거로 예수께서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C.K.Barrett, J.Jeremias), 그것보다는 뒤에 언급된 휘페르(uJpe;r 위하여)와 연결되어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시사한다(L.Morris). 한편 '세상을 위하여'(uJpe;r th'" tou' kovsmou 휘페르 테스 투 코스무)에서 전치사 휘페르(uJpe;r 위하여)는 희생 제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D.A.Carson), 본서에서도 대부분 예수의 희생적 죽음과 연결되어 나타난다(요10:11,1515:13;18:14;롬5:8갈3:13요일3:16).

 

2. 살과 피(52-56절)

1) 무리들의 논란

( jEmavconto ou\n pro;" ajllhvlou" oiJ jIoudai'oi 에마콘토 운 프로스 알렐루스 호이 유다이오이;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52절)

에마콘토( jEmavconto 다투어)는 기동상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서로 계속적으로 격하게 말다툼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앞서 41절에서 수군거리던 반응에서 더 적극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알렐루스(ajllhvlou" 서로)는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께서 자기 살이 곧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분분하였음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알아들었으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여서 생명의 떡이 예수 자신의 살이라는 말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2) 참된 양식과 음료

(eja;n mh; favghte th;n savrka tou' uiJou' tou' ajnqrwvpou kai; pivhte aujtou' to; ai|ma, ... ajlhqhv" ejstin povsi". 에안 메 파게테 텐사르카 투 휘우 투 안드로푸 카이 피에테 우우투 토 하이마…알레데스 에스틴 포시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참된 음료로다, 53-55절)

유대인들의 말다툼을 보신 예수께서는 보다 강한 의미의 어휘를 사용하셔서 생명의 떡에 대해 설명하신다. 이제 '내 살과 피'는 본문에서 '인자의 살과 피'로 바뀐다. 여기서 '인자'(tou' uiJou' tou' ajnqrwvpou 투 휘우 투 안드로푸)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복음서에서 메시야 되신 예수를 가리킬 때 사용된 칭호이다(G.Vos).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 내 살이라고 말씀하실 때 어떻게 인육을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해 말다툼하였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가 단순한 인간의 살과 피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투 휘우 투 안드로푸라는 메시야적 칭호를 사용하셨다. 이는 자신의 살과 피가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만약 앞서와 같이 유대인들이 이것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더욱더 심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인자에 대한 언급에 이어서 곧바로 '내 살을 먹고'(oJ trwvgwn mou th;n savrka 호 트로곤 무 텐사르카)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 인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여기서 '먹고'(trwvgwn 트로곤)는 현재 분사이며, 씹거나 뜯어먹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먹는다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며, 현재시제로서 계속적으로 충당하는 것을 뜻한다(L.Morris). 즉 그것은 먹는 자와 예수와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가시적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믿는 자는 예수와 지속적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참된 음료로다'(ajlhqhv" ejstin povsi" 알레데스 에스틴 포시스)에서 알레데스(ajlhqhv" 참된)는 '믿을 만한'을 뜻하는 알레디노스(ajlhqinw")와는 달리 '실제적인'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살과 피가 실제적인 양식과 음료임을 강조한 것으로 예수의 살과 피가 가지고 있는 생명과 그의 영향력을 강하게 강조한 것이다(R.E.Brown).

 

3)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와의 연합

(ejn ejmoi; mevnei kajgw; ejn aujtw'/. 엔 에모이 메네이 카고 엔 아우토;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6절)

'거하고'와 '거하나니'는 메네이(mevnei)를 사용하는 동일한 말이다. 이는 현재시제인 바, 계속해서 예수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 사이에 내주하는 것을 시사한다. 특별히 메네이는 쌍방간의 내주를 통한 실제적이고 신비적인 연합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믿는 자 사이의 교제와 생명의 공유 및 연합을 의미한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 곧 예수를 믿는 자는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수여하시는 예수와 더불어 내주하며 영생을 공유한다.

 

3. 영원한 생명의 근원(57-59절)

1) 예수의 생명의 근원

(kaqw;" ajpevsteilevn me oJ zw'n path;r kajgw; zw' dia; to;n patevra, 카도스 이페스테일렌 메 호 존 파테르 카고 조 디아 톤 파테라;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메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57a절)

본문의 문두에 있는 카도스(kaqw;" 처럼)는 양태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이 주는 믿는 자의 생명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시사한다. 호 존 파테르(oJ zwn path;r 살아 계신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되심을 시사한다. 특별히 예수의 생명은 '아버지로 인하여'(dia; to;n patevra 디아 톤 파테라) 부여되었으며 유지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vn 보내시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예수께서는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성육신하신 생명의 떡이시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과 생명을 부여받으셨기에 그의 생명과 권한은 아버지에게 달려 있다(C.K.Barrett).

 

2)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kai; oJ trwvgwn me kajkei'no" zhvsei di j ejmev. 카이 호 트로곤 메 카케이노스 제세이 디 에메;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7b절)

'나를 먹는 그 사람도'(oJ trwvgwn me 호 트로곤 메)에서 메(me 나를)는 앞서 언급된 '살과 피'가 문자적으로 예수의 육체가 아니라 예수의 인격, 혹은 예수의 전인(whole man)을 함축하여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한다(C.K.Barrett, R.C.H.Lenski). 믿는 자들이 얻게 되는 생명은 '나를 인하여'(di j ejme 디 에메) 주어진 것이다. 디 에메는 예수께서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로 인하여'(dia; twn patevra 디아 톤 파테라) 생명을 수여받았으며, 유지되며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믿는 자들의 생명 또한 예수에게 달려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생명의 매개체로서 세상에 보내셨으며 세상을 위한 생명의 원천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믿는 자의 생명은 철저하게 생명의 떡이시며 믿는 자에게 영생을 부여하시는 예수에게 달려 있다. 만약 믿는 자가 예수와의 상호 내주와 연합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 또한 생명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3) 영원히 죽지 않음

(ou|tov" ejstin oJ a[rto" oJ ejx oujranou' katabav", ... zhvsei eij" to;n aijw'na. 후토스 에스틴 호 아르토스 호 엑스 우라누 카타바스…제세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영원히 살리라, 58절)

본문은 이제까지 예수께서 행하신 강화의 결론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oJ a[rto" oJ ejx oujranou' katabav" 호 아르토스 호 엑스 우라누 카타바스)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유대인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는 달리 영원히 살 수 있는(zhvsei eij" to;n aijw'na 제세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 영원히 살리라) 생명을 중개하는 자이심을 시사한다. 사람이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을 갖고 계시며 생명을 타인에게 수여하시는 예수를 믿음으로 상호간의 내주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로 인하여 생명을 소유하고 있듯이 믿는 자들도 또한 세상을 위한 생명의 매개체로 오신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예수는 생명의 떡(47-51절)

47절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jmjh;n ajmh;n legw uJmi'n 아멘 아멘 레고 휘민)는 예수만 쓰는 언어 양식으로, 청중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표현이다(R.Bultmann, M.Boismard). '믿는 자는 영생을 갖는다'(oJpistuvwn e]cei zwh;n ai]wnion 호 피스튜온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에서 아마도 히브리 원문에는 '믿는'(pisteuvwn 피스튜온) 다음에 '나를'(eij" ejmev 에이스 에메)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R.Bultmann). 48절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예수'라는 주제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요6:35). 49절에서 만나를 먹는 것은 생명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본문에는 '먹다'라는 말이 생명 유지라는 측면에서 설명되기 위해 쓰여졌다(Borgen). 49-51절은 앞에 나온 것들(특히 32-35절)을반복, 요약하고 있다(H.Schrmann, Trierer). 앞 구절의 '너희 조상들'을 볼 때 이미 교회와 회당이 분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0절에서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은 '만나'와 대립된다(R.Bultmann). '하늘로서 내려오는'은 예수를 지칭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예수의 속성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Goguel). 51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51a절은 이미 말해진 것들(35-48절)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으며, 51b절의 중심 내용을 '내가 줄 떡은 곧 나의 살'이라는 사상이다(K.Barrett). 요한(John)이 예수의 '살'을 문제시한 것은 주의 만찬에서 예수의 살(과 피)을 먹는 것에 대한 문제에 관해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Justin, Carpenter, W.F.Howard). 요한(John)은 의도적으로 예수의 활동 전반의 상황 가운데 성만찬 사상을 두고, 그것을 인격적으로 철저히 해석하려고 노력했다(K.Barrett). 또한 '…위하여'(uJper 휘페르)의 경우, 요한복음에서 이 표현은 자주 사용되고 있다(요10:11,1511:50-52;15:13;17:19).

즉, 51b절은 예수의 속죄적인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G.Kummel, W.F.Horard, A.J.Gossip), 희생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K.Barrett, E.Brown, R.Bultmann).

 

2. 예수의 삶과 피(52-55절)

52절에서 '다투었다'(ejmavconto 에마콘토)는 '격렬하게 논쟁했다'를 의미한다(E.Brown).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추종자와 적으로 나뉘어 싸웠다는 것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R.Bultmann).

53절에는 51b절의 진리가 부정문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K.Barrett). 본 절에서 중요한 두 가지 주안점을 볼 수 있다. 먼저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칭호다. 예수는 오직 본 절에서만 자신을 3인칭으로 이야기하고 있다(E.Brown). 인자는 살과 피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정한 사람이요,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K.Barrett). 두 번째로 '살의 먹음'에 '피의 마심'이 첨가되었다는 점이다(R.Bultmann). '살과 피'는 서로 병행구를 이루고 있고(E.Brown), 그것은 그리스도의 전(全) 삶을 강조하고 있다(K.Barrett). 이 표현은 공동체의 의전적(儀典的)인 언어에 속하는 것으로(R.Bultmann), 성만찬을 가리키고 있다(M.Boismard, E.Brown). 요한의 이같은 '살과 피'의 언급은 아마도 가현설을 배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G.Kmmel, E.Schweizer, G.Richter).

54절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보다 더 분명히 하고 있다(R.Bultmann). '먹다'(trwvgein 트로게인)라는 동사는 본래 초식 동물의 먹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E.Brown), '씹어(뜯어) 먹다'를 의미했었다(Wrterb). 헤로도투스(Herodotus) 이후에 이 단어는 사람이 먹는 행위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K.Barrett, E.Brown).

이것은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의미의 먹음을 뜻한다(R.Bultmann). 본 절은 요한에게 있어서 성만찬과 종말론이 결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K.Barrett).

55절에서는 '참된'(ajlhqhv" 알레데스)이라는 표현을 통해 실체적(實體的)인 양식과 음료를 의미하고 있다(R.Bultmann). 즉, 예수의 살과 피는 참으로 모범적인 양식과 마실 것이 되고, 그것들을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K.Barrett).

 

3. 예수와의 연합(56-59절)

56절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받아들이는 자에게 참된 양식이며 음료이기에 55절의근거가 된다(K.Barrett). 이것은 성례전적인 연합(合)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A.Dieterich, E.Reuterskiold, H.Lietzmann). '거하다'(mevnein 메네인)는 본 절에서 상호 내주 관계(5:38;8:31;15:4)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용 단어 중의 하나다(K.Barrett).

57절에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심'은 20:21을 참고할 수 있다(K.Barrett). 본 절은 5:21,26의 사상을 인용하여, 성만찬의 작용에 있어서 근원이 되는 예수의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R.Bultmann).

요한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삶은 비록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C.H.Dodd, M.Braun), 예수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K.Barrett).

58절의 내용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닌, 지금까지의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전체적인 결론이다(R.Bultmann). '이것은'(ouJto" 후토스)의 선행사는 아마도 '살과 피에서 제공된 삶의 양식, 나 자신' 등의 의미일 것이다(K.Barrett). 그리고 본 절에서는 또 한 번 만나 사건이 언급되면서 '하늘로부터의 떡'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요6:32,49,50). '같다'(kaqw;" 카도스)의 사용 측면에서 본 절과 3:14을 비교해 볼 때, 저자 요한(Jphn)의 "모세적 예언자 메시야"에 대한 태도는 매우 복잡했음을 알 수 있다(K.Barrett).

59절에서의 가버나움 회당은 24절에서 장소가 가버나움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또 한번 명시되고 있다(K.Barrett). 59절에서는 가버나움 회당은 24절에서 장소가 가버나움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또 한번 명시되고 있는 것이다(K.Barrett). 본 절은 이 토론(25-58절)이 회당에서의 설교보다는 덜 공식적인 이야기들이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E.Brown). 예수는 종종 회당에서 가르치곤 했었다(마4:239:35;12:9;13:54).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산 떡(47-51절)

47절에 나오는 논쟁에서는 세 번째로 '진실로 진실로…' (ajmh;n ajmnvn 아멘 아멘)가 나오는데, 이는 뒤에 하실 예수의 말씀이 엄숙하고도 중요한 말씀임을 암시한다. 그는 자기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씀하신다(Tenney). 일반적으로 아멘이라는 말은 기도의 마지막에 붙여지는 말이며, 유대의 어떤 문헌에도 그 단어가 문두에 나온적이 없었다(Jeremias, Daube, Morris). 그러나 그가 이 단어를 문두에 놓은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말씀과 인격 가운데 나타난 현재의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G.E.Ladd). 이 말씀의 내용은 요3:15의 것을 반복하신 것이다. 44절의 내용이 지극히 예정론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에는 믿음에 대한 분명한 초대와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명백한 심판이 암시되어 있다(Carson).

49절을 보면 이 전에도(30,31절) 유대인들은 예수께 모세보다 더 큰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세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주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을 신앙으로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광야에서 주어졌던 만나와 자신이 주는 생명의 떡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생명의 떡에 참여한 사람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50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타난다. 그 사람들이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다(Carter). 여기에서 '먹는다'(50절)라는 동사의 시제는 부정과거로 그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일회적인 사건임을 암시하고 있다(Morris).

51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산 떡'(51절)이라고 주장하셨는데, 이 떡은 영생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내려 온'(51절) 역시 '먹고'(50절)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제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하신 일회적인 사건을 나타낸다. 이 시제가 바로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Mac-Gregor, Barrett, Lindars, Jeremias) 이 구절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갖지 말아야 되는 증거가 된다(Morris).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말씀하신 것(51절)은 그의 죽음을 가리킨 것이었음이 분명하다(Carter, Plummer, Morris).

 

2. 참된 양식, 참된 음료(52-59절)

52절이 유대인들은 다시 예수의 말씀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살을 먹는 것에 대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들에게는 식인 풍습의 장려쯤으로 들리는 예수의 말씀에 곧 반격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그의 가르침에 대한 전형적인 방법은 우선 예수께서 다소 모호한 말씀을 하시고, 무리가 이에 대해 반격하며, 다시 예수께서 이에 대한 설명을 하심으로써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무리들은 사람이 어떻게 그의 살을 먹을 수 있는지 물었다(52절).

54절은 제4복음서의 또 다른 가교 가운데 하나로 요한은 그의 부정적 언급을 먼저 기록한 후에 긍정적인 말씀을 전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생명을 지닌 자는 누구든지 그의 살을 먹어야 할 분 아니라 그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여기에서의 '피'가 생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레17:11,14신12:23).

결국 예수께서 맞이하실 죽음의 필연성과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이들이 얻게 될 새 생명을 의미하고, '살'이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으로 겪게 되는 희생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Temple). 반면 여기에서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와 연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 역시 있다(Westcott).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먹는다'라는 동사가 나타내는 행위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탐식하며 먹는 행위와 또 한편으로 즐겁게 먹는 다는 의미가 있다(마24:38). 이것은 매우 사실적이며 직접적인 표현으로 이러한 동사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어서 더욱 의외적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이 동사가 먹는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본문의 의미를 성만찬에 대한 암시로 이해하고 있다. 결국 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로 받아들여야 함을, 즉 그리스도를 그의 안에 모셔야 함을 가리킨다(Carter).

55절에서 예수께서는 또한 이미 광야의 만나와 자신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말씀하신 적이있다(49,50절). 그가 주시는 양식과 음료가 '참된 양식이요…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진정한 가치를 일깨우신다(R.E.Brown).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이고, 그의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성도의 교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또한 예수를 믿고 그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 역시 일시적이거나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다(Morris, Carter).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믿음을, 또한 믿음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57절에서의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보내셨고 아버지가 그러하신 것처럼 그에게 생명이 있다. 따라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살아간다. 예수가 그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나 죽은 사람들과 그리스도와 영생에 참여하는 사람들간의 대조가 이루어진다(58절, Carter). 결국 신앙은 한 단체의 회원이 되는 것 이상의 개별적 경험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Morris).

59절의 말씀은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베푸신 것이었다. 비록 그러한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가르침에 대한 인상은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던 때처럼(25절), 외부에서 시작된 대화였던 것 같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논쟁은 바닷가에서 시작되어 회당으로 옮겨졌거나 이 논쟁 모두가 회당에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배경의 설정이 복음서 저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관계를 갖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는 회당과는 절대적으로 분리되셨던 것이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은혜 언약의 모든 복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다. 심지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구원 은혜의 첫 번째 복 자체도 중보자의 인격과의 연합을 이미 전제로 한다.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은 신비적이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을 신비적 연합(Union mystic)이라고 부른다.

 

1. 신비적 연합의 본질

구속의 경륜에서 그리스도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과의 언약적인 연합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관념적으로 이미 구원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형성되었다. 이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복들이 그리스도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기적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비적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이며, 성령의 사역에 의해 주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이다.

 

2. 신비적 연합의 성격

신비적 연합의 성격을 보면 유기적 연합의 성격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즉 ,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돌보며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 안에 내주하며 소생시키는 생동적 연합의 성격이 있고, 이러한 생동적인 연합은 성령에 의해 중재되는 연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비적 연합은 어느 한편의 연합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연합은 개인적으로 신자가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개인적 연합이며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짐으로 변혁적 연합의 성격이 있다.

 

3. 신비적 연합의 중요성

죄인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즉 잠재의식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감을 느껴야 된다. 그가 받은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연합으로 인해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이를 중심으로 성도간의 연합, 즉 성도들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사도 바울은 롬6:1-11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새 생명 가운데서 함께 살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성도가 그리스도께 매어 달려 있음을 언급하시기도 했다(요15:1-8).

 

 

영생(永生)의 개념(6:47-59)

◈ 세계배경 문화사 ◈

 

영생의 사전적 의미는 소멸이나 죽음이 없는 것, 즉 불멸(不滅)을 뜻한다. 영생(永生)이란 신적 존재와 인간을 구별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세상 모든 인간들이 염원하는 것이다.

 

근동/ 유대 :이스라엘에서는 영생을 "오직 신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구절로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생을 신성(神性)의 탁월한 속성으로 여겼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스라엘에서 불멸성은 인간의 상태의 변화가 가져오는 결과를 지적하는 것으로, 신적(神的) 생명의 능력에 동참함으로써 변모된 인간의 생명을 뜻하였다. 즉 영생(永生)은 신이 주는 새 생명을 뜻하며, 이 생명은 미래에 완성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 실재하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집트 : 이집트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독특한 내세관을 가졌다. 그들은 영혼 불멸을 굳게 믿고, 육체가 썩지 않으면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한 '미이라'를 피라미드 혹은 분묘 속에 안치했다.

 

서양/ 그리스 :그리스 종교에서는 항상 신들을 불멸(영생)의 존재로 설명하고, 이 불멸성의 본질은 결정적인 신의 존재 방식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불멸'이라는 추상적인 용어가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플라톤에 의해서다. 플라톤은 불멸성이 영혼을 포함한 여러 존재 중 한 계층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영혼은 죽어서 몸과 함께 분해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스토아 학파는 개인의 영혼은 능동적이며, 사물의 구성 원리인 불같은 영의 불꽃이라고 보았다. 이들 모두의 주장은 인간의 영혼이 신성(神性)과 가깝다는 기본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은 개인의 고립화가 증대되고, 지상의 생활은 외부의 세력, 심지어는 우연, 운명 및 별 등의 적대 세력에 의해 조종된다는 염세적인 신앙 때문에 불멸의 개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멸성에 대한 약속은 신적, 천상적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한다. 이러한 희망을 이루기 위해 신비 의식이 행해졌고, 불멸성은 죽은 다음에 얻는 것이 아니라 신 또는 여신의 제례에 참여함으로써 획득된다고 믿었다. 이때 플라톤 철학은 영혼의 불멸적 본질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이성과 도덕의 훈련을 권유했다.

 

동양/ 중국 : 동양의 영생 사상은 십장생과 신선 사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십장생이란 오래살고 죽지 아니한다는 열 가지 물건을 말하는 데, 곧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신선이란 도를 닦아서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자연과 벗하여 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신선을 믿고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장소로 승천하기를 바라며,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三神山)과 27계급의 선인(仙人)을 그리던 사상으로 신선설(神仙設)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사상은 중국의 전국 시대를 비롯하여 진 및 한나라 때에 크게 유행하였고, 후에는 노장 사상과 맺어져 도교의 성립으로 발전되었다. 진(晉)나라의 시황제가 불로장생초를 찾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사방으로 보냈다는 전설은 당시에 영생 사상이 유행했음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또한 영지 버섯을 신성한 식물이라 하여 장생불로의 문장으로 많이 쓰였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영생의 뜻을 살펴보면, 영생은 온전한 것이며(마19:17-21), 사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다(요17:3)라고 하고 있다. 이런 영생의 근원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음과 동시에 믿어야 하며(요5:39), 예수그리스도를 진정한 나의 구세주로 믿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진리 안에 거할 수 없는 자들(6:47-59)

 

유명한 향수 중에 '샤넬 No.5'라는 것이 있다. 한때 향수의 대명사 역할까지도 했다. 그런데 이 향수 냄새를 역겨워하는 남성들도 있다고 한다. 그 향수의 원료가 숫고래의 정액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진리 말씀에 도저히 적응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1. 말씀을 의심함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수근'(41절) 거렸다. 수근거린다는 것은 의심, 비판, 불만의 표시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려는 자세, 기쁘게 여기는 자세를 지니지 못하고 의심하고, 비판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이다. 의심은 불신앙의 현관이다. 자신이 모르고,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의심부터 하는 습성을 지닌 사람들은 결코 진리 안에 들어올 수가 없다.

 

2. 분쟁을 일으킴

수근거리는 유대인들은 주님의 영적인 강화가 깊어지자 이제는 '서로 다투어'(52절) 분쟁을 일으켰다. 의심과 불만을 지닌 자들은 이처럼 교회의 분쟁과 분란의 원인이 된다. 주님의 진리를 가지고 논쟁거리로 삼아 그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요란케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전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고 했듯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다들은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질식시키고 왜곡시키고자 다툼을 일으킨다.

 

3. 진리와 분리됨

그들은 끝내 진리와 결별을 한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고 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고 설명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생명의 떡을 먹는 법(6:47-59)

 

주님은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 떡이니 그것을 먹고 영생을 얻으라고 권하신다. 이는 영적인 말씀이며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떡을 먹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

먹는다는 것은 내 것으로 흡수한다는 의미다. 흡수라는 과정이 있어야 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음식을 흡수하고, 식물은 뿌리로 자양분을 흡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흡수하는 것이요, 먹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믿을 때 우리는 영생의 산 떡이신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적용함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흡수하는 과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섭취'해야 한다. 그 양식은 양식 그대로 우리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과 뼈로 동화되고 섭취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켜야 한다. 즉 그분의 인격과 가르침을 본받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인격과 삶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곧 영생의 떡을 올바로 먹는 길이다.

 

3. 그분과 끊임없이 교제함

생명체는 생존하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먹어야 한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58절).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고 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떡을 제대로 먹는 자세다.

 

무리의 반응과 제자들의 고백(요6:60-71)

 

◈ 원문강해 ◈

 

예수만이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다

 

생명이신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두 가지 갈래 길에 서게 된다. 하나는 예수의 말씀을 받아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말씀을 내버림으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중간 지대는 없다.

 

1.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고로 영적 생명을 보증함(60-63절)

1) 무리들의 걸림돌이 된 예수의 변론

(Polloi ... ejk tw'n maqhtw'n ... Sklhrov" ejstin oJ lovgo" ou|to": tiv" duvnatai aujtou' ajkouvein ... Tou'to uJma'" skandalivzei_ 폴로이…에크 톤 마데톤…스클레로스 에스틴 호 로고스 후토스 타스 뒤나타이 아우투 아쿠에인…투토 휘마스 스칸달리제이; 제자 중 여럿이…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0,61절)

'제자들 중 여럿이'(Polloi ... ejk tw'n maqhtw'n 폴로이…에크 톤 마데톤)는 67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열두 제자와 대비를 이루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제자들, 곧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던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스클레로스 에스틴(Sklhrov" ejstin 어렵도다)은 '거칠다, 딱딱하다' 등과 같은 의미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를 나타낸다(C.K.Barrett, Bernard). 이것은 여러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 자체는 이해하였으나 자신들의 마음상태로 인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들을 수'(ajkouvein 아쿠에인)가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쉐마([mv 들으라)와 같은 것으로 '따르다' 혹은 '순종하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해의 부족이나 준비되지 못한 마음의 상태로 인해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따를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편 스칸달리제이(skandalivzei 걸림이 되느냐)는 '함정이나 올무'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초자연적 지식을 가지고 앞서 선포하신 살과 피에 관한 자신의 말씀으로 인해서(D.A.Carson) 수 많은 제자들이 올무에 걸려 있음을 아셨다.

 

2) 부활과 승천을 통해 보증하심

(eja;n ou\n qewrh'te to;n uiJo;n tou' ajnqrwvpou ajnabaivnonta o{pou h\n to; provteron_ 에안 운 데오레테 톤 휘온 투 안드로푸 아나바이논타 호푸 엔 토 프로테론;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2절)

헬라어 본문에는 '어찌 하려느냐'는 어구가 없다. 다만 본문은 하나의 조건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조건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본문에 대한 귀결문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는 걸림이 더 증폭된 다는 것이며 둘째로 걸림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D.A.Carson, Westcott). 왜냐하면 '인자의…올라가는 것을'(to;n uiJo;n tou' ajnqrwvpou ajnabaivnonta 톤 휘온 투 안드로푸 아나바이논타)은 단순히 예수의 부활과 승천만을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즉 예수의 비하와 승천을 통한 영광을 얻으심과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순간적인 사실이다. 비하와 영광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데오레테(qewrh'te 볼 것)라는 단어가 믿음이나 마음에서 비롯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암시하고 있듯이(R.C.H.Lenski),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만이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즉 믿음을 가진 자는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걸림이 제거될 것이나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걸림이 증폭될 뿐이다. 한편 '이전 있던 곳으로'(o{pou h\n to; provteron 호푸 엔 토 프로테론)는 하늘을 암시하는 바 예수의 선재하심, 곧 신성을 시사한다. 특히 '있던'(h\n 엔)은 에이미(eivmiv 이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해 계셨음을 함축한다. 예수께서는 로고스로서 천지 창조가 있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며 선재하셨던 분이다. 그가 생명을 주는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으며 대속적 죽음을 당하실 것이나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선재하셨던 곳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3) 영적 생명

(to; pneu'mav ejstin to; zw/opoiou'n, hJ sa;rx oujk wjfelei' oujdevn: ta; rJhvmata a} ejgw; lelavlhka uJmi'n pneu'mav ejstin kai; zwhv ejstin. 토 프뉴마 에스틴 토 조오포이운 헤 사륵스 우크 오델레이 우덴 타 레마타 하 에고 렐랄레카 휘민 프뉴마 에스틴 카이 조에 에스틴; 살리는 것은 영이니…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3절)

'살리는 것'(to; zw/opoiou'n 토 조오포이운)은 생명을 주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여기서 프뉴마(pneu'mav 영)에 대해서 혹자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M.C.Tenney, B.Murray) 그것보다는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까지 성령은 세상에 도래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예수 자신이 성령의 수여자이며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셨기 때문이다(요1:32a;3:34, D.A.Carson).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롬8:2고전15:45). 혹자는 '영'(pneu'mav 프뉴마)이 호흡, 생기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 바, 이를 '예수님의 이 말씀들 안에는 하나님의 생기와 생명이 있다'라는 측면에서 보기도 한다(A.T.Robertson).

'이른 말'(ta; rJhvmata a} ejgw; lelavlhka 타 레마타 하 에고 렐랄레카)은 예수께서 이제까지 하신 말씀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생명의 수여자로서 성령이 함께하신 말씀이며(요3:34), 곧 그것은 영임과 동시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2. 수많은 제자들이 떠나감(64-66절)

1) 불신자와 배반자를 미리 아심

(ajll j eijsi;n ejx uJmw'n tine" oi} ouj pisteuvousin. h[/dei ga;r ejx ajrch'" oJ jIhsou'" tivne" eijsi;n oiJ mh; pisteuvonte" kai; tiv" ejstin 에데이 가르 엑스 아류세스 호 예수스; 이는 예수께서…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4절)

'처음부터 아심이러라'(h]/dei ... ejx ajrch'" 에데이…엑스 아르케스)는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의 사역 초기를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요1:1에서와 같이 태초를 가리킬 수도 있다(C.K.Barrett, D.A.Carson). 예수의 절대적인 지식은 어느 시기에 제한되지 않기에 두 가지 시기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아심이라'(h]/dei 에데이)는 과거 완료로서 예수께서 이미 아셨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절대적인 지식을 갖고 계신 예수께서 '자기를 팔 자'(oJ paradwvswn aujtovn 호 파라도손 아우톤)를 아셨다는 것은 단순히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처음부터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열 두 제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룟 유다에게서 자신을 팔 조짐을 알아채셨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에 떡조각을 찍어 주심으로 마지막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셨으나 유다는 예수를 팔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때 사단이 들어가 그를 사로잡았다(요13:27,G.Morgan). 이러한 것으로 보아 본문은 예수께서 미리 아시고 가룟 유다를 열두 제자로 택하셨다기보다는 가룟 유다에게서 배반의 가능성을 미리 아셨다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2)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

(eja;n mh; h\/ dedomevnon aujtw'/ ejk tou' patrov". 에안 메 에 데도메논 아우토 에크 투 파트로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65절)

데도메논(dedomevnon 주지)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에안 메(eja;n mh; 아니하면)와 연결되어 조건문의 형식을 이룬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하는 바(37절), 믿지 않는 자와 배반자가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A.T.Robertson). 하나님께서 먼저 이끄심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예수를 믿고 따를 수 없다.

 

3)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떠남

( jEk touvtou polloi; jk? tw'n maqhtw'n aujtou' ajph'lqon eij" ta; ojpivsw 에크 투투 롤로이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아펠돈 에이스 타 오피소;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66절)

'이러므로'( jEk touvtou 에크 투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이 이유로'라는 의미로 앞 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이끄심이 없는 것을 가리킬 수 있으며 둘째는 '이때로부터'로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시점을 가리킬 수도 있다(C.K.Barrett, F.Rienecker). 두 가지는 상호 베타적 이기보다는 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그 시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지 못하고 단지 호기심에 차 예수를 따르던 형식적인 제자들이 떠나갔음을 시사한다. 한편 '물러가고'(ajph'lqon eij" ta; opivsw 아펠돈 에이스 타 오피소)는 문자적으로 '뒤로 가버리다'라는 의미로, 많은 제자들 스스로가 예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갔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이로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지 못한 자들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3. 열두 제자의 고백과 배반에 대한 예고(67-71절)

1) 영생의 말씀을 가지신 예수

(Mh; kai; uJmei'" qevlete uJpavgein ... rJhvmata zwh'" aijwnivou e[cei" 메 타이 휘메이스 델레테 휘파게인…레마타 조에스 아이오니우 이케이스; 너희도 가려느냐…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67,68절)

수많은 제자들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며 떠나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Mh; kai; uJmei'" qevlete uJpavgein 메 카이 휘메이스 델레테 휘파게인)는 질문을 던지셨다. 이 질문은 부정어 메(Mh; 아니다)와 더불어 시작된 질문으로서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서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면서 질문을 던지셨다. 한편 '영생의 말씀'(rJhvmata zwh'" aijwnivou 레마타 조에스 아이오니우)은 앞서 이야기 하신 오병이어 강화는 물론 63절의 말씀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은 생명을 갖고 있어서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영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영원한 생명임을 시사한다(R.C.H.Lenski, D.A.Carson, M.C.Tenney). 이러한 사실은 에케이스(e[cei" 계시매)가 현재 시제로서 예수께서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에서 보다 명확하게 확증된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 표적에 이어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강화 속에서 계속해서 설명하신 생명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많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곁을 떠나게 만들었던 영생을 주시는 말씀이 예수에게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다(A.T.Robertson).

 

2)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hJmei'" pepisteuvkamen kai; ejgnwvkamen o{ti su; ei\ oJ a{gio" tou' qeou'. 헤메이스 페피스튜카멘 카이 에그노카멘 호티 쉬 에이 호 하기오스 투 데우;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을 믿고 알았삽나이다, 69절)

'우리가…믿고 알았삽나이다'(hJmei'" pepisteuvkamen kai; ejgnwvkamen 헤메이스 페피스튜카멘 카이 에그노카멘)에서 두 동사는 모두 현재 완료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러한 시제는 페피스튜카멘(pepisteuvkamen 믿고)이 '우리가 믿게 되었고 계속해서 믿고 있다'라는 의미이며(L.Morris), 에그노카멘(ejgnwvkamen 알았삽나이다)이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여 깨달았으며 그것을 붙들고 있다' (C.K.Barrett)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영생을 소유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줄 이미 깨닫고 믿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알고 믿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oJ a{gio" tou' qeou 호 하기오스 투 데우)는 예수께서 인류에게 영생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혹은 선별된 자임을 시사한다(R.V.G.Tasker, F.Rienecker).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부족하나마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영생을 소유하고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3) 가룟 유다의 배반 예고

(kai; ejx uJmw'n ei|" diavbolov" ejstin ... 카이 엑스 휘몬 에이스 니아볼로스 에스틴…;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70절)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하여 팔아 넘길 것을 예고하셨다. 여기서 디아볼로스(diavbolov"; 마귀)는 '비방자 혹은 거짓 참소자'라는 의미로 신약 성경에서 어둠의 권세를 지닌 사단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요8:4413:2,27, D.A.Carson). 예수께서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이 디아볼로스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택하실 때부터 가룟 유다가 디아볼로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요13:27에서 사단이 그때서 가롯 유다에게 들어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려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가룟 유다의 음모를 폭로하는 것이며(A.T.Robertson), 은혜로 그로 하여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었다(R.C.H.Lenski).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무리)들(60-63절)

60절에 나오는 제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66,67절), 무리들 중의 제자들을 말하고 있다(E.Brown). '(말씀이) 어렵다'(sklhrov" 스클레로스)의 원래 뜻은 '굳은, 딱딱한'을 뜻하는 것으로서(K.Barrett), 이 구절은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완고한, 충격적인 말'을 의미한다(W.F.Howard).

본 절에는 '듣다'(ajkoujein 아쿠에인)의 단어가 두 번 나오게 되는데, 첫 번째 것은 이해가 필요없이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해(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들음'이다(E.Brown). 그리고 여기에서 이 단어는 단순한 들음이 아닌, '순종하다'라는 의미에 근절해 있다(K.Barrett).

61절에서 '(예수께서) 아시고'(eijdw;" 에이도스)는 그리스적 표현이 아니라 셈어적인 어법이다(E.Brown). 또한 이것은 예수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뜻하고 있다(K.Barrett). '걸려 넘어지다'(skandalivzei 스칸달리제이)는 요한복음에서 본 절과 16:1에만 나오는데(Derrett), 본 절에서 제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인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라는 사상(53-56절)이다(K.Barrett). 이것은 요한의 헬레니즘적 독자들에게도 불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C.H.Dodd).

62절은 귀결점이 없는 불완전한 문장이다(K.Barrett). 단순히 조건만 제시되고 있다(E.Brown). 이 조건이 충족될 때, 걸림돌은 더 커지든지(R.Bultmann), 다른 쪽으로 이동될 것이다(Bauer).

또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서의 예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Thusing). 이러한 해석들은 십자가의 수난과 영광의 측면(R.Bultmann)에서 종합될 수 있다(K.Barrett). 예수의 '올라감과 내려옴'은 인자(사람의 아들)를 거론할 때에 자주 사용된다(K.Barrett). 인자의 '올라감'은 인자의 선재(先在)를 뜻하고 있고(E.Brown),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보여지는 것임을 저자 요한(John)은 제시하고 있다(W.F.Howard).

63절의 '살리는'(zwopoiou'n 조오포이운)은 바울적인 언어로(고전15:45고후3:6), '생명을 부여하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R.Bultmann).

저자 요한에게 있어서 '영'의 개념을 볼 때 예수 자신은 성령을 지닌 자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1:32,33). 그렇지 않다면 그의 살과 피는 육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의미를 잃고 말기 때문이다(K.Barrett).

그러나 '육이 소용이 없다'는 저자 요한(John)의 말은 영과 육 사이의 이원론적 영향을 의미하게 된다(Charlesworth). 이것은 아마도 성만찬에 있어 신앙을 언급하는 데에 '살' 자체만으로는 부적절하기에 '영'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Guilding). 즉, 성만찬이 보이는 말씀, 표징, 상징의 의미(C.H.Dodd)보다는, 성만찬에서 행위(요13:8-11)와 말(15:3)이 병행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Lightfoot). 아무튼 저자 요한(John)은 눈에 보이는 예수의 '살'(savpx 사륵스)과 '들어야만'(ajkouvein 아쿠에인)하는 그의 '말들'(rJhmata 레마타)이 성령과 말씀을 증거한다고 보았다(K.Barrett).

 

2.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64-66절)

64절에서 예수가(처음부터) 알았다는 사실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미리 알고 있음(2:25)을 말한다. '처음부터'는 태초(1:1)때라기보다는 '선교(목회) 활동의 시작부터'로 보아야 한다(E.Brown, K.Barrett). 예수는 신(神)적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Origen) 본 절은 역시 6:6에서처럼 저자 요한의 편집자적 시도이다(E.Brown).

65절에서 '이러하므로'는 64절에서의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E.Brown).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37절과 44절에서 예수가 말한 것을 또다시 언급한 것을 말한다(K.Barrett). 본 절의 핵심적 내용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시작'과 인간의 '응답(의무)'이 연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W.F.Howard).

66절에서 제자들이 물러간 이유는 아버지(하나님)가 그들 자신들을 택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와, 또는 예수의 가르침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불만(몰이해) 때문일 것이다(E.Brown). '물러가고'의 구절의 의미는 예수께로부터 '홱 돌아서서 멀리 떠남'을 뜻한다(R.Bultmann).

본 절에서의 저자 요한(John)의 메시지는 당시 예수의 목회에 있어서의 역사적 상황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닐, 주후 1세기 말 저자 요한이 살던 시대의 많은 사도들의 모습(요일2:19)을 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확연해진다(E.Brown).

 

3.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를 팔 자 가룟 유다(67-71절)

67절에는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열두 제자라는 숫자가 나온다(W.F.Howard). 그리고 예수의 질문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열두 제자 마저도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부정의 답을 원함을 내포한 물음이다(E.Brown). 이렇게 저자 요한(John)은 '예수의 말에 거하라'라는 뜻의 반어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J.Heise).

68절의 베드로의 고백은 다른 복음서들(막,눅)에서 급식 기적과 가까운 시기에 베드로의 고백이 행해졌다는 사실과 병행되고 있다. 저자 요한(John)은 공관복음서의 사건과 순서를 본문에서 재연하고 있는 것 같다(K.Barrett). 주의 '영생의 말씀'은 예수를 비밀을 아는 지식으로 이끄는 친절한 길이다(W.F.Howard). 아마도 '영생의 말씀'이라는 말은 저자 요한(John)이 베드로의 고백을 배열함에 있어서, 앞·뒤의 문맥을 연결시키기 위해 사용된 말인 듯 싶다(K.Barrett).

69절에서는 '믿다'와 '알다'가 완료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저자 요한(John)의 특징으로, 이 두 동사는 광범위한 의미에 있어서는 동의어로(요7:1711:27,42;16:27-30;17:3,8,21) 쓰여지고 있는 것 같다(K.Barrett). 하지만 이 두 동사가 예수에게 있어서는 단지 예수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뿐이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E.Brown).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는 칭호는 막1:24과 눅4:34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귀신은 초자연적 지식으로 고백하고 있다(K.Barrett). 또한, 요일2:20에 예수가 거룩한 자로 불리워지는 것은 메시야의 칭호로 이해될 수 있다(W.F.Howard). 즉, 요한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의 사절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A.J.Gossip).

70절에서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12제자)를 선택했다는 말은 13:18과 15:16에서 되풀이되지만(E.Brown), 요한에게 있어서 '12'라는 숫자 개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K.Barrett). '마귀'(diaavbolo" 디아볼로스)는 '이간질하는 자'의 본(本) 뜻을 가진 단어로, 흔히들 '악마'나 '사단'의 의미로 쓰인다(R.Bultmann). 유다는 마귀(악마)의 꼬임을 받아 그의 도구가 되었다(13:2).

71절의 가룟(가리옷) 시몬의 아들 유다는 요한복음에서 8번 언급된다(유다-12:4;13:29;18:2,3,5,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6:71;13:2,26, K.Barrett). 71b절은 예수의 선견지명을 강조하고 있다(A.J.Gossip). 유다는 자신의 선택받은 것과 자신의 결단함에 있어서, 안일한 의식을 갖음으로(마귀의 꼬임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팔았던 것이다(R.Bultmann).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많은 제자들이 떠남(60-66절)

60절에서 보듯이 예수의 말씀은 제자들 사이에 어떤 수군거림을 불러일으켰다. 이전에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주로 그의 대적들이 었으나 이번에는 그의 제자들이었다. '제자'라는 말은 배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예수에게 매력을 느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열두 제자와는 구별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수군댄 이유는 예수께서 방금 하신 말씀이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듣는다'라는 말은 '이해하여 듣는다', '받아들이다'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Morris), 결국 그들이 말한 것의 의미는 그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따르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Bernard, Lindars, Carter).

한편 많은 학자들이 앞 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53-57절) 성만찬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성만찬에 직접 적용하여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인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만일 이 본문이 성만찬에 관계된 것이라면 이후에 일어났던 성만찬에 대한 언급이 기록된 논쟁으로 다시 되돌아가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생명, 즉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해서 얻게되는 영생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각 개인이 자신의 삶에 영접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지 성만찬을 준수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본문이 직접 성만찬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예수의 희생에 대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성만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과 예배는 예수께 의존하는 것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는 성찬에 대한 기록이 없다(Carter).

61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즉 만일 그들이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된다면 그들은 분명히 예수께서 오신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62절, Carter). 그러나 본절은 원문상 완전한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인자가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 마음의 걸림을 버리지 않겠느냐는 것과(Odeberg), 둘째로 인자가 전에 계시던 하늘로 올라가면 그들의 마음에 더욱 걸림이 되지 않겠느냐는 해석이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양자의 해석을 모두 종합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Barrett, Meyer, Morris, Davey, Lindars). 십자가 없는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예수에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테지만, 그의 사역은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63절에는 특히 영과 육에 대한 대조가 기록되어 있다. '육'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 땅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E.Schweizer). '영'이란 새로운 창조의 존재 양식을 말하는 것으로(Ridderbos), 둘 사이의 관계는 선악으로 구별된다기보다는 존재 양식의 구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Ridderbos).

64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 중에 몇몇 사람이 예수나 그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는 처음부터 누가 그를 배반할 것인가를 알고 계셨다. 여기에서 '처음부터'란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이 시간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즉 창조이전부터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며, 두 번째는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던 시기라거나 그가 제자들을 불렀던 시기라고 보는 견해(Meyer, Bernard, Lindars)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예정론적인 색체가 짙고 요한은 6:44에서도 이미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오게 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을 분명히 나타내었다(Morris). 그것이 바로 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주도적인 권한 없이, 즉 아버지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시지 않고는 아무도 그에게로 올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이다(65절, Carter).

66절에서는 이 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단순히 그에게 끌렸거나 호기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그를 떠나갔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를 따랐으나, 이제는 그를 버렸다. 이제 예수께서 평범한 선생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된 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완전히 그에게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사람들은 그를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Carter).

 

2.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67-69절)

67절에서는 이러한 반대를 보시자 예수께서는 이제 열두 제자를 돌아보시고, 그들의 충성을 시험하셨다. 그는 제자들 역시 떠날 것이냐고 물으신다. 베드로는 종종 제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A.T.Robertson), 본문에서도 역시 열두 제자의 그룹을 대표해서 대답한다(68절). 제자들은 그를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만이 모두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말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Carter). 본문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공관복음에 기록된 가이사랴 빌리보에서의 그의 고백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지만(Barrett, Bernard, Weisse), 그러한 주장에는 여러 가지 무리한 점(고백을 했던 당시 분위기의 상이점, 장소의 차이, 고백의 내용 등)이 있으므로, 둘은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J.Murray, Morris).

68절의 '영생의 말씀'이라는 말에는 의도적으로 판사가 생략되어 있는데, 헬라어에서는 흔히 그 단어를 강조하고 싶을 때 사용되던 방법이었다(Moulton). 요한 역시 그러한 방법을 통해 말씀의 생명력과 그 말씀이 영생임을 강조했다. 또한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68,69절)로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칭호는 이전에 예수에게 사용되던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Carter). 비록 그것이 메시야와 같은 칭호는 아니지만, 베드로는 분명히 메시야를 찬양할 때 쓰이는 말의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Vincent, Taylor).

 

3. 배신자(70,71절)

예수께서는 물론 베드로의 고백을 기뻐하셨지만, 그의 표현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는 인간적인 어떤 허식도 거부하셨다. 또한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 오직 요한만이 열두 제자의 선택 사건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절대적 권위로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예상치 못한 치명적 실패가 있었다. 즉 그들 가운데 하나는 '마귀'였다. 물론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선택하신 것에는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들이 있어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마귀'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참소자', '거짓말 하는 자'라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거의 어두움의 왕 사단이라고 언급되어 있다(8:44;13:2,27).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그들 중에 하나를 사단에게 내어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단이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13:2에서 좀더 분명해진다(Carson). 71절에서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 요한은 유다가 '장차 예수를 팔 자'라는 자신의 설명을 덧붙인다. 복음서에는 그에 대한 긴설명은 없으나 언제나 '예수를 판 자'라는 말이 그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요12:418:2;마10:4눅6:16,Tenney).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서의 거룩

 

1. 거룩의 어원과 개념

'거룩하다'는 의미의 히브리 단어'카다쉬'(q;d'v)는 '자르다', '분리하다'를 의미하는 어근 '카드'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종교적인 표현들 중의 하나로서 주로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 같은 개념이 신약성경에서는 '하기아조'와 '하기오스'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거룩함을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주로 도덕적인 특성이나 종교적인 특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이 밝혀지게 된다. 거룩함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은 하나님과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위치' 혹은 '관계'라는 개념이다.

 

2. 거룩함의 성격

신적 거룩함에 관한 윤리적 관념은 엄위로운 거룩함의 관념과는 분리될 수 없다. 윤리적 관념은 엄위로운 거룩함의 관념으로부터 발전하였다. 하나님의 윤리적인 거룩성의 기본 관념도 역시 분리의 관념이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도덕적인 악이나 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그의 거룩함에 의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죄와 교제하실 수 없다(욥34:10l합1:13).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거룩함'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엄위로운 순결 혹은 윤리적인 엄위를 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윤리적인 거룩함의 관념은 단순히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며 도덕적인 탁월성 혹은 윤리적인 완전이라는 적극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다.

 

3. 하나님의 거룩함의 현현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마음에 심겨져 있으며 양심을 통하여 말하는 도덕법 속에서, 좀더 특별하게는 계시 속에서 계시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주어졌던 율법에서 현저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은 구약 율법에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11:44,45)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한 최고의 계시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행3:14)라고 불렀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함을 보여 주셨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도 계시되어 진다(요17:17).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계시되었다.

 

 

영(靈)에 대한 당대인의 개념(6:60-71)

◈ 세계배경 문화사 ◈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영(靈)이 있다고 믿었다. 영(靈)이란 사람의 혼령 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화와 복을 내리는 정령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 신들, 일반적으로 무형(無形)의 영적 존재들과 인간성 속에 있는 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근동/ 유대 :히브리어에서 영(靈)의 근본 의미는 '공기의 움직임', '미풍' 혹은 '바람', '호흡'을 뜻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 생명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영은 살아 숨쉬는 인간과 동물의 육체에 거하며, 신이 인간의 영을 창조했다고 말했고, 신이 영을 지키므로 영은 신에게 속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의 영은 사람들에게 미친듯한 행위를 유발시켜 악한 신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예언자들로 하여금 순수한 교훈이나 경고를 하도록 강권하며, 전쟁이나 행정상의 능력을 부여하기도 한다고 믿었다. 이 외에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에 내재하는 신적 요소로서 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개념은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신적 요소가 있다고 말하며, 그 속에 영적인 속성이 있다고 했다.

 

서양/ 그리스 :그리스와 로마에서 영(靈)이란 절대 유일신을 제외한 여러 신과 정령 유령 등이 있다. 이 밖에 부분적으로 악마, 악귀 등의 관념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정령은 사후 세계에 육체를 가지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고, 유령은 죽은 사람의 넋이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거나 물리적이 아닌 존재, 즉 꿈 속에서만 나타나는 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 유교 : 유교에서는 하늘이 인격화되면서 천재(天宰)라는 개념이 생겼다. 여기서 천재(天宰)는 우주 및 인간 세계 섭리의 최고 관리자를 상징하며, 유교에서는 천제 또는 천신(天神) 외에는 잡신 혹은 잡귀라 하여 공적(公的)인 이념의 세계에서는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의 사물이나 현상의 기운이면서 그늘진 기운이 요사하게 나타난 것을 요(妖), 사(邪), 괴(怪) 등으로 불렀다.

 

도교 : 도교에서는 다양하게 범신론적(凡神論的)인 신의 관념을 가졌다. 위로는 옥황상제로부터 수궁의 용왕에 이르기까지 신들이 살고 주재하는 광범위한 우주론을 형성하였다. 도교의 설천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다다를 수 있고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신선(神仙)이라는 관념은 인간의 영혼 또는 정신이 극도로 이상화되고 승화된 결과로서 신격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각종 범신론적인 신의 관념을 발달시켰다.

 

한국 : 우리 나라의 신화에서는 천신 및 조상신 그리고 무속신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고조선, 고구려, 가야, 신라의 신화는 모두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와 비로소 나라를 세운 신들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 이때 신은 하늘의 원리로 지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 나라 조상신 신앙의 원형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한편, 무속 신화에서는 천지개벽자인 신의 관념과 천지가 신격화된 결과인 신의 관념을 볼 수가 있다.

 

인도 : 인도의 리그 베다에서 나오는 브리트라 혹은 바벨론의 신화에 나오는 티아맛 등은 리워야단이라는 바다뱀, 바다에서 폭풍우를 일으키는 용 라합, 베테모드로 불리우는 사막의 용들과 유사한 무형의 영적 존재이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영은, 즉 하나님의 영(시139:7), 성령(창1:2), 인간의 영, 호흡(전3:19)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에게 있는 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하나님이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은 영은 죽음과 동시에 육체와 분리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거부와 결별과 대적(6:60-71)

 

예수의 갈릴리의 영적인 강화의 결과는 겉으로 보면 '실패'로 끝난다. 떡을 보고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이 거의 떠나버리고 소수의 제자들만이 잔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를 떠나고, 배신하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의 실태를 볼 수 있다.

 

1. 영원한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들을 수 있느냐'(60절)고 반발했다. 이 뜻은 주님의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라는 요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떡을 구하려는 자들은 영원한 가치를 찾으라는 기독교의 요구에 도저히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알곡과 쭉정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2. 주님과 결별하는 자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에서 '물러가고'는 스스로 떠난다는 뜻이요 '함께 다니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와 천국 천도여행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치 인식과 의식의 차이를 지닌 자들은 결국 주님과 결별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3.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70절). 엄밀히 말해 '마귀편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는 떠나지 않고 아직 제자의 무리에 잔류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요12:6)고 가룟 유다의 잔류 이유를 시사해 준다. 예수의 진리 교훈과 그 가치를 거부하고, 그를 사랑치 않을지라도 교회에 잔류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경건을 이익 재료로 삼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그러나 후에는 교회의 큰 대적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너희도 가려느냐? (6:60-71)

 

'너희도 가려느냐? (67절)라는 주님의 이 물음은 핵심 제자들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주님 곁을 떠나려는 흔들리는 성도들에 대한 일침이 된다. 신앙에 의혹을 느끼고 상처받고 또한 다양하고 엄청난 시련과 시험으로 인해 신앙을 등지려는 자들에 대한 권고요, 교훈이다.

 

1. 부활의 진리를 외면하고 가려느냐?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1,62절).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다면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이다. 부활의 진리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죽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진리가 인생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님을 떠날 수는 없다.

 

2. 참된 생명을 맛보고도 가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3절)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사랑과 희생과 의의 가치가 영원한 진리임을 맛보았다. 성령안에서 하늘의 빛을 맛본 것이다. 그와 같은 진리를 맛보고도 일시적인 시험 때문에 주님을 떠날 수는 없다. 보석에 흙이 묻었다고 보석을 버릴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3. 육의 무익함을 일고도 가려느냐?

여기서 육은 세속적인 가치와 삶을 뜻한다. 육신적인 이익 때문에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다시 가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인생의 손익 결산을 따져보라. 세상의 부와 영예와 행복은 영원한 생명과는 관계가 없다. 결국 바람처럼 사라지고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에 가져갈 수도 없으며 또 그것들이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육은 무익하다. 일시적인 세상의 이익 때문에 영원한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요한복음 6장 원어 강해

 

 

요 6:1~9 오병이어 표적의 배경

무리와 제자들의 영적 무지

1.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는 이유(1,2절)

1) 바다 건너편으로 가심
(Meta; tau'ta ... pevran th'" qalavssh" th'" Galilaiva" th'" Tiberiavdo".; 메타 타우타…페란 테스 달랏세스 테스 갈리라이아스 테스 티베이라도스; 그 후에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1절)
'그 후에'(Meta; tau'ta;메타 타우타)는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 시간의 부사이다(요2:12;3:22;5:1;7:1). 이 시점이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본서의 문맥상 앞 장의 사건과 연결된다고 볼 때 그 기간은 약 몇 개월 내지(R.C.H.Lenski). 일 년(A.T.Robertson)의 차이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의 차이는 요5:1에 언급된 '유대인의 명절'(eJorth' tw'n jIoudaivwn;헤오르테 톤 유다이온)이 어느 절기를 뜻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하튼 앞 장에서 38년된 병자가 치유함을 받는 사건과 본 장의 오병이어 표적 사이에는 상당 기가늬 시간적 간격이 있다. 한편 테스 티베리아도스(th'" Tiberiavdo";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이름은 헤롯 안디바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찬양하기 위해서 세운 도시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갈릴리 바다를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디베랴 바다 건너편, 곧 벳새다로 건너가셨다.

2) 큰 무리가 따름
(hjkolouvqei de; aujtw'/ o[clo" poluv"; 에콜 루데이 데 아우토 오클로스 폴뤼스; 큰 무리가 따르니, 2a절)
'큰 무리'(o]clo" poluv";오클로스 폴뤼스)는 막 6:33,34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들의 수는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C.K.Barrett).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한편 에콜루데이(hjkolouvqei;따르니)는 미완료 과거로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큰 무리가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행하실 때부터 계속해서 예수를 추종하며 따라다녔음을 의미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의 인기도를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추종하였다(R.C.H.Lenski).

3) 표적을 보았기 때문임
(o{ti ejqewvroun ta; shmei'a a} ejpoivei ejpi; tw'n ajsqenouvntwn.; 호티 에데오룬 타 세매이아 하 에포이에이 에피 톤 아스테눈톤;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2b절)
본문은 호니(o}ti;이는)로 시작되는 문장으로서, 앞서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는 진술의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두 동사, 곧 '행하시는 (ejpoivei;에포이에이)과 '봄이러라'(ejqewvroun;에데오룬)는 모두 미완료 시상이다, 이는 무리들이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 해오셨던 여러 가지 표적들을 지속적으로 지켜보아 왔음을 의미한다(L.Morris). 한편 '표적(ta; shmei'a;타 세메이아)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행하신 이적이나 권능, 기사를 뜻하나 그것은 그 자체를 의미하거나 목적으로 삼는 것을 시사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이적이나 권능의 차원을 넘어서 이는 단순히 이적이나 권능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그것은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이적과 권능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 곧 메시야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이적과 권능을 행하셨다. 무리들은 이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다만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이적에만 매료되어 있었다.

2. 제자들을 시험하심(3-6절)

1) 산에 올라가 앉으심
(ajnh'lqen de; eij" to; o[ro" ... kai; ejkei' ejkavqhto ... hn de; ejggu;" to; pavsca; 아넬덴 데 에이스 토 오로스…카이 에케이 에카테토…엔 데 앵귀스 토 파스카; 산에 오르사…거기 앉으시니…유월절이 가까운지라, 3,4절)
에이스 토 오로스(eij" to; o]ro";산에)는 높이가 상당한 산에 오르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목적은 에카테토(ejkavqhto;앉으시니)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미완료 중간태 3인칭 단수로서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앉으셨다는 의미이며 곧 쉬는 것을 뜻한다. 이는 휴식의 모습을 나타낸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오셨으며, 몰려드는 큰 무리로부터 피하여 쉬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을 수도 있다(A.T.Robertson).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앉는 것이 그분의 습관 이셨다고 보기도 한다(J.Bernard). 마14:23;막6:46등에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신 것이 언급되어 있다.
한편 '유월절'(to; pavsca;토 파스카)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맞이한 두 번째 유월절일 수도 있고(요2:13), 요5:1을 유월절로 보아 세 번째 맞이한 절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번째 유월절이냐가 아니라 오병이어 표적과 유월절의 관계성이다. 비록 본문의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생명의 떡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성만찬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R.C.H.Lenski) 본서에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성만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과 유형론적 해석, 곧 유월절 양의 희생과 예수의 죽음, 만나와 생명의 떡, 출애굽과 죄로부터의 구원을 뜻하는 영생 등과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 오병이어 표적 속에 성만찬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개연성이 있다(D.A.Carson, O.Cullmann, C.K.Barrett).

2) 어디서 떡을 사서 먹게 하겠느냐
(Povqen ajgoravswmen a[rtou" i{na favgwsin ou|toi_; 포텐 아고라소멘 아르투스 히나 파고신 후토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5절)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몰려든 무리들에게 저녁 때가 되도록 병을 고치시며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요한은 그것을 생략하고 곧바로 무리들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계신 산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몰려오는 무리를 보고 빌립에게 그들을 먹일 방법에 대해 물으셨다. 포덴(Povqen;어디서)은 방법을 의미하는 '어떻게'라는 의미로 바꿀 수 있다. 또한 '사서'(ajgoravswmen;아고라소멘)는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미래에 있을 사실을 함축하며 본 질문이 깊은 사색을 요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두 단어는 예수께서 빌립에게 하신 질문이 상당한 복선을 깔고 던지신 것임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빌립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질문이었다.

3) 빌립에 대해 예수의 시험하심
(peiravzwn aujtovn, aujto;" ga;r h[/dei tiv e[mellen poiei'n.; 페이라존 아우톤 아우토스 가르 에데이 티 에멜렌 포이에인;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시험코자 하심이라, 6절)
'아시고'(h]/dei;에데이)란 과거 완료로서 불완전 완료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현재의 뜻을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이 당시 알고 계심을 나타내 준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페이라존(peiravzwn;시험코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시험하다'이며, 둘째는 시험함으로 '증명하다'이고, 셋째는 시험 결과로 '인정하다'이다. 이것은 때로 부정적인 차원에서 유혹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나 본문에서는 긍정적인 세 가지 의미 중에서 본문에서 사용된 것은 첫 번째로서(R.Earle, L.Morris)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시기 전에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 전체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셨다. 한편 가르(ga;r;때문에)는 뒤이어 기록된 문장들이 앞서 언급된 시험하시는 이유임을 의미한다. 또한 가르(ga;r)에 이어 등장하는 에멜렌(e]mellen)은 부정사 포이에인(poiei'n;하다)과 결합되어 '하실'이라는 미래 시상을 나타낸다(F.Reinecker). 이는 예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셨을 때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아셨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던지신 질문에 빌립이 어떻게 응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질문하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이제까지 행하신 표적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깨닫도록 유도하며 예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알도록 인도하셨다.

3.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의 실패(7-9절)

1) 빌립의 대답
(Diakosivwn dhnarivwn a[rtoi oujk ajrkou'sin ... bracuv 퍁i??} lavbh/.; 디아코시온 데나리온 아르토이 우크 아르쿠신…브라퀴[티] 라베;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7절)
빌립은 상당히 세상적인 계산법에 근거해 대답하였다.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bracuv ti lavbh;브라퀴[티]라베)는 12,13절의 '저희가 배부른 후에…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wJ" de; ejneplhvsqhsan ... ejgevmisan dwjdeka kofivnou";호스 데 에네 플레스데산…에게미산 도데카 코피누스)와 대조를 이룬다. 브라퀴(bracuv;조금씩)는 성인들이 최소한으로 간단하게 식사하기 위해 오직 떡만을 먹는 것을 뜻한다. 빌립의 계사네 따르면 모인 무리들이 최소한의 음식만을 먹어도 그 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것이었다.
한편 디아코시온 데나리온(Diakosivwn dhnarivwn;이백 데나리온)에서 데나리온은 당시 화폐 단위로 로마의 은전을 가리킨다. 이것은 오늘날의 화폐 기준으로 볼 때 약 17-20센트정도밖에 되지 않지만(R.Earle, F.Reinecker,R.C.H.Lenski) 당시에는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마20:2).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계산할 때 빌립이 식사 비용으로 산출한 '이백 데나리온'은 한 일꾼의 약 8개월임금에 해당한다(NIV,M.C.Tenney).
본문에 기록된 빌립의 대답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 같았지만,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계속해서 행해진 표적을 본 제자의 대답이라고 볼 때 불신앙에서 비롯되었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는 대답이었다.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도 표적을 보고도 병자가 낫는 것에만 빠져서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동일하게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2)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jAndreva" oJ ajdelfo;" Sivmwno" Pevtrou,; 안드레아스 호 아델포스 시모노스 페트루;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8절)
빌립에 이어 안드레가 나서서 예수께 여쭈었다. 본서의 저자 요하니 안드레를 소개함녀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jAndreva" oJ ajdelfo;" Sivmwno" Pevtrou,;안드레아스 호 아델포스 시모노스 피트루)라고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안드레는 예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한 자이며 베드로를 인도할 때 예수를 메시야로 소개한 자였다(요1:40,41). 다음 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안드레였으메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빌립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제자들의 불신앙과 실패를 확인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3) 안드레의 대답
( [Estin paidavrion w|de o}" e[cei pevnte a[rtou" kriqivnou" kai; duvo ojyavria: ajlla;; 에스틴 파이다리온 호테 호스 에케이 펜데 아르투스 크리디누스 카이 뒤오 옵사리아 알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9절)
파이다리온(paidavrion;한 아이)은 '아이'(pai'";파이스)의 이중적인 지소사로서 작은 사내아이를 가리킨다(Brown, R.C.H.Lenski). 그가 갖고 있는 '보리떡'(pevnte a]rtou";펜테 아르투스)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저질의 떡이었으며(D.A.Carson, A.T.Robertson), '물고기 두 마리''(duvo ojyavria;뒤오 옵사리아)는 반찬으로 먹을 수 있도록 양념이 되거나 구워진 물고기를 뜻한다(C.K.Barrett). 안드레는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를 예수께 내놓았으나, 그것은 결코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갖고 계신 초자연적 능력을 신뢰하여서 취한 행동이 아니었다. 강한 반의 접속사인 알라(ajlla;그러나)가 이를 확증한다. 이어 나오는 안드레의 대답, 곧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는 비록 안드레가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예수 앞에 내놓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메시야적 능력을 믿지 않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요 6:10~21 오병이어의 표적과 물 위를 걸어가심

생명을 풍족케 하시는 예수의 위로하심

1.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심(10-13절)

1) 많은 무리를 먹일 준비를 시키심
(Poihvsate tou;" ajnqrwvpou" ajnapesei'n. ... ajnevpesan oun oiJ a[ndre" to;n ajriqmo;n wJ" pentakiscivlioi.; 포이에사테 투스 안드로푸스 아나페세인…아네페산 운 호이 안드레스 톤 아리드몬 호스 펜타키스킬리오이;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사신대…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0절)
예수께서는 안드레가 전하여 준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받으신 후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잔디에 무리를 지어 앉히도록 명령하셨다.
'이 사람들로…사람들이'(tou;" ajnqrwvpou" ... oiJ a]ndre";투스 안드로푸스…호이 안드레스)에서 전자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투스 안드로푸스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후자의 '사람들'에 해당하는 호이 안드레스(oiJ a]ndre")는 여자와 구분되는 남자만을 의미한다. 예수를 추종하던 큰 무리 속에는 여자와 아이들고 있었으나(미14:21)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여자와 아이들은 공식적인 석상에서 남자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나눌 수 없었기에(R.Earle)그 수효를 셀 때 제외되었다. 그 수효를 나타낼 때 사용된 호스(wJ";쯤)은 숫자인 펜타키스킬리오이(pentakiscivlioi;오천)와 연결되어 대략의 숫자를 나타낸다(A.T.Robertson, F.Reinecker).오병이어 표적에 참여한 대략의 호이 안드레스(oiJ a]ndre";남자들) 숫자가 오천 명이었다는 것은 오병이어 표적에 참여한 사람들(tou;" ajnqrwvpou";투스 안드로푸스)의 숫자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예수를 추종하였으며,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산 떡임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2) 축사 후 나누어 주심
(eujcaristhvsa" ... o{son h[qelon.; 유카리스 테사스…호손 에델론; 축사하신 후에…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1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앉은 것을 보시고 오병이어를 들어 축사하셨다. '축사'(eujcaristhvsa";유카리스테사스)는 공관복음서에서 사용된 율로게오(eujlogevw;축복하다)와는 달리 문자적으로 '감사를 드리다'라는 의미로 식사 전에 드리던 감사의 기도를 가리킨다(신8:10,A.T.Robertson). 예수께서는 감사함으로 일상적인 식사 기도를 마치신 후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시되, 결코 제한된 양의 떡과 물고기를 주시지 않으셨다. '저희의 원대로'(o}son h]qdlon;호손 에델론)에서 에델론(h]qelon;원대로)은 델로(qevlw;원하다)의 미완료 능동태로서 무리들이 먹기를 계속 원하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 계속 원하는 대로 주셨음을 뜻한다. 이것은 앞서 빌립의 대답에서 나온 브라퀴(bracuv;조금씩)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빌림의 계산적인 불신앙 속에서는 무리들을 최소한의 식사를 하도록 먹여도 이백 데나리온이 든다고 예상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아주 작은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무리들이 원하는 만큼 풍족하게 나누어 주셨다.

3) 열두 광주리가 남음
(wJ" de; ejneplhvsqhsan ... ejgevmisan dwvdeka kofivnou" klasmavtwn; 호스 데 에네플레스데산…에게미산 도데카 코피누스 클라스마톤; 저희가 배부른 후에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2,13절)
'배부른'(ejneplhvsqhsan;에네플레스데산)은 일의 결과를 의미하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무리들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해 나누어 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원대로 먹고 그 결과 만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병이어 표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리가 배부르게 먹고도 남은 조각만 무려 '열두 바구니'(ejgevmisan dwvdeka kofivnou";에게미산 도데카 코피누스)였다. 여기서 코피누스(kofinou";바구니)는 버들가지를 재료로 만든 여행용 가방이다(Bernard, Morris). 이것은 제자들이 먹어야 할 식사를 담아 제공해 주는 것과(R.C.H.Lenski) 동시에 오병이어 표적으로 인해 무리들이 만족스럽게 먹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풍족했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셨던 생명의 풍족함은 인간들이 계산하는 방법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 생명의 풍족함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셨다.

2. 표적을 체험한 무리들의 반응(14,15절)

1)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
(OiJ oun a[nqrwpoi ijdovnte" ... e[legon o{ti Ou|tov" ejstin ajlhqw'" oJ profhvth" oJ ejrcovmeno" eij" to;n kovsmon.; 호이 운 안드로포이 이돈테스…엘레곤 호티 후토스 에스틴 알레도스 호프로페테스 호 에르코메노스 에이스 톤 코스몬; 그 사람들이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14절)
여기서 사용된 호이 안드로포이(OiJ a]nqrwpoi;이 사람들)는 앞서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무리의 수를 이야기할 때 사용한 남자만을 의미하는 호이 안드레스(oiJ a]ndre";남자들)와는 (10절) 달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체험한 후 술렁이기 시작했다. 엘레곤(e]legon;말하되)은 미완료 시제로 계속 말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사람들이 술렁이며 나누기 시작한 말은 예수께서 '오실 그 선지자'(oJprofhvth" oJ ejrcovmeno";호 프로페텟, 호 에르코메노스)라는 것이다. 이는 모세가 예언한 것으로(신18:15) 메시야를 상징한다. 무리들은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후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야, 즉 이스라엘을 외부의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구원해 부강국을 만들 메시야였다.

2) 임금 삼으려 함
(o{ti mevllousin e[rcesqai kai; aJrpavzein aujto;n i{na poihvswsin basileva; 호티 멜수니 에르케스다이 카이 하르파제인 아우톤 히나 포이에소신 바실레이아;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15a절)
'억지로 잡아'(aJrpavzein;하르파제인)는 힘과 폭력을 함축하는 동사로(R.E.Brown, F.Reinecker) 예수께서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잡으려 함을 시사한다. 하르파제인은 '임금 삼으려'(poihvswsin basileiva;포이에소신 바실레이아)와 연계되어 무리들이 왕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는 예수를 완력으로라도 잡아서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왕이셨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추대하려는 그러한 왕, 곧 로마의 식민지 생화로부터 해방시켜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국가를 세우는 왕은 아니셨다. 그분은 무리들이 간절히 고대하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영적인 왕이셨다(M.C.Tenney, D.A.Carson).

3) 예수의 물러가심
( jIhsou'" oun gnou;" ... ajnecwvrhsen pavlin eij" to; o[ro" aujto;" movno".; 예수스운 그누스 …에네코레센 팔린 에이스 토 오로스 아우토스모노스; 그러므로 예수께서…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5b절)
그누스(gnou;";아시고)는 예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무리들의 의중을 알아채셨음을 의미한다(C.K.Barrett). 무리들의 뜻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다. 이를 아신 예수께서는 '혼자 산으로'(eij" to; o]ro" aujto;" movno";에이스 토 오로스 아우토스 모노스)떠나셨다.
여기서 모노스(movno";혼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셨음을 뜻한다. 어쩌면 제자들도 그들의 영적 무지 상태로 보아 무리들의 주장에 동조했을 수도 있다(A.T.Robertson).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의 길과 그의 뜻을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무리들과 동일하게 자신의 뜻과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버려두시고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마14:23).

3. 물 위로 걸어가심(16-21절)

1) 제자들만 떠남
(ejmbavnte" eij" ploi'on h[rconto pevran th'" ... skotiva h[dh ejgegovnei; 엠반테스 에이스 플로이온 에르콘토 페란 테스 달랏세스…스코티아 에테 에게고네이; 배를 타고 바라를 건너…이미 어두웠고, 16,17절)
'배'(eij" ploi'on;에이스 플로이온)는 당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타는 작은 배이며, 그 길이는 약 12내지20피트 정도였다(R.Earle). 이것은 커다란 배를 뜻하기보다는 작은 보트를 가리킨다. 제자들은 이 작은 배에 몸을 싣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건너'(h]rconto;에르콘토)는 미완료 중간태인 바, 제자들이 계속해서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자신들 스스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상태에 있었음을 뜻한다(L.Morris). 한편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에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웠고'(skotiva h]dh ejgegovnei;스코티아 에데 에게고네이)는 과거 완료 시제로 제자들이 바다를 건널 때가 한밤중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때까지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오시지 않으셨다.

2) 풍랑과 예수의 걸어오심
(ajnevmou megavlou pnevonto" ... wJ" stadivou" ei[kosi pevnte h] triavkonta qewrou'sin to;n jIhsou'n peripatou'nta ejpi; th'" qalavssh"; 아네무 메갈루 프네온토스…호스 스타디우스 에이코시 펜테 에 트리아콘타 데오루신 톤 예순 페리파툰타 에피 테스 달랏세스; 큰 바람이 불어…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18,19절)
'큰 바람'(megavlou pnevonto";메갈루 프네온토스)은 갈릴리 바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기상 현상이다(마8:24). 갈릴리 바다는 사면에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주 기상 이변과 더불어 폭풍이 불어닥쳤다. 제자들은 자신들만 갈릴리 바다를 건너려 노를 저었을 때 바로 그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십여 리'(wJ" dtadivou" ei]kosi pevnte h] triavkonta;호스 스타디우스 에이코시 펜테 에 트리아콘타)를 진행했을뿐이었다. 여기서 '십여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약 이십오 내지 삼십 스타디아'를 의미한다. '스타이다'는 184.94m(606.75피트)를 가리키는 바, 제자들이 노를 저어 나아간 거리는 약 4,625km에서 5.55km정도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갈릴리 바다의 길이가 약 20.92km(13마일)이고 폭이 약 9.7km(6마일)내지 11.3km(7마일)이라고 할 때 제자들이 노를 저어 나아간 곳은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였다(D.A.Carson, R.Earle, R.E.Brown). 그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혹자는 '바다 어'(ejpi; th'" qalavssh";에피테스 달랏세스)에서 전치사 에피(ejpi;)가 '곁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바닷가를 거니시는 것을 제자들이 잘못 보았다고 주장한다(Bernard). 그러나 전치사 에피(ejpi;)는 '곁에'를 의미하기도 하며 '위에'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폭풍이 부는 한밤중에 제자들이 바닷가에서 거니는 예수를 발견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바다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이 탄 배에 다가 오셨다.

3) 예수의 위로와 제자들이 영접
( jEgwv eijmi, mh; fobei'sqe.; 에고 에이미 메 포베이스데; 내니 두려워 말라, 20,21절)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니 두려워말라'( jEgwv eijmi, mh; fobei'sqe;에고 에이미 메 포베이스데)라고 위로하셨다. 여기서 에고 에이매( jEgwv eijmi)는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선언이며, 포베이스데(fobei'sqe;두려워)는 미완료 수동태로 부정어 메(mh;;아니)와 연결되어 제자들에게 진행되고 있는 행위의 금지, 곧 계속적으로 두려워 떨고 있는 행위를 금하는 명령이다.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께서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추신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특별히 계시하심과 동시에 두려우메 사로잡힌 제자들을 위로하셨음을 의미한다.

 

 

요 6:22~29 표적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

영생에 이르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일은 율법과 같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구속주 도신 예수를 얼마나 전적으로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1.무리들이 예수를 찾음(22-24절)

1) 배 한 척만 남음
(oJ o[clo" oJ eJsthkw;" pevran th'" qalavssh" eidon o{ti ploiavrion ... ouj suneish'lqen; 호 오클로스 호 헤스테코스 페란 테스 달랏세스 에이돈 호티 플로이라리온…우 쉬네이셀덴;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22절)
'바다 건너편에'(oJ eJsthkw;" th'" qalavssh";호 헤스테코스 테스 달랏세스)는 21절의 제자들이 도착했던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건너편을 지칭하는 것으로 갈릴리 바다 동편, 곧 예수께서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시던 곳을 가리킨다(23절, D.A.Carson, C.K.Barrett). 다음날이 되었을 때, 전날에 예수께서 자신들을 떠나 산에 올라가신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다시 예수를 찾아보기 위해서 전날의 행적을 더듬어 갔다. '함께…오르지 아니하시고'(ouj suneish'lqen;우 쉬네이셀덴)는 전치사 쉰(suvn;함께)이 접속되어 있는 것으로 예수께서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전날 밤에 제자들과 더불어 배를 타시지 않았음을 뜻한다. 무리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들을 토대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떠나시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간절히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2) 디베랴에서 온 배에도 없으심
(a[lla ... oujk e[stin ejkei' oujde; oiJ maqhtai;; 알라…우크 에스틴 에케이 우데 호이 마데타이; 그러나…그곳에 가까이 왔더라…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23,24a절)
알라(a]lla;그러나)는 본 절이 앞서 언급된 구절들을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것임을 시사한다(A.T.Robertson). '제자들도 없음을'(oujk e]stin ejkei' oujde; oiJ maqhtai;;우크 에스틴 에케이 우데 호이 마데타이)은 무리들이 예수를 찾기 위해서 샅샅이 그 일대를 뒤졌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전날에 제자들만 먼저 떠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까지 있는가를 확인하며 찾았다.

3)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ta; ploiavria kai; hlqon eij" Kafarnaou;m zhtou'nte" to;n jIhsou'n.; 타 플로이라리아 카이 엘돈 에이스 카파르나움 제툰테스 톤 예순; 곧 배를…예수를 찾으려 가버나움으로 가서, 24b절)
'배'(ta; ploiavria;타 플로이라리아)는 복수형으로 무리들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탔음을 암시한다. 전날의 오병이어 표적을 본 무리들은 예수의 능력과 이적을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이튿날에도 여전히 예수를 찾고 있었다. 무리들은 예수가 자신들이 있는 그곳에 없음을 발견하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향하였다. 여기서 '찾으러'(zhtou'nte";제툰테스)는 '찾다'(zhtevw;;;;;;제테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예수를 계속 찾아 나섰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전날에 행해진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취했던 행동처럼 예수를 찾아 강제로라도 임금을 삼으려 하는 것이다(A.T.Robertson).

2. 썩을 양식(25-27a절)

1)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euJrovnte" ... JRabbiv, povte w|de gevgona"_; 유론테스…랍비 포테 호데 게고나스;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25절)
유론테스(euJrovnte";만나)는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문자적인 의미는 '발견하였을 때'이다(A.T.Robertson). 이것은 무리들이 가버나움에 가서 계속 찾아본 끝에 예수를 만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리들은 예수를 가버나움 회당에서 찾을 수 있었다(59절). 한편 '오셨나이까'(gevgona";게고나스)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의 제2완료 능동태 단수로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때를 뜻하는 '언제 오셨습니까'와 기간을 의미하는 '얼마 동안 계셨습니까'이다(L.Morris, C.K.Barrett, D.A.Carson, R.C.H.Lenski). 이것은 무리들이 오랫동안 예수를 찾았으며 어떻게 건너편에 오셨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한다(.A.T.Robertson).무리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찾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열심히 예수를 찾고 있었다.

2) 배부른 까닭에 예수를 찾음
(jAmh;n ajmh;n levgw uJmi'n, zhtei'tev me oujc o{ti ei[dete shmei'a ajll j o{ti ejfavgete ejk tw'n a[rtwn kai; ejcortavsqhte.; 아멘 아멘 레고 휘민 제테이테 메 우크 호티 에이데테 세메이아 알르 호티 에파게테 에크 톤 아르톤 카이 에코르 타스테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26절)
본문은 앞서 무리들이 예수를 찾아 헤맨 목적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자신을 찾아 헤맨 목적이 자신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jAmh;n ajmh;n levgw uJmi'n;아멘 아멘 레고 휘민)는 이어지는 내용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권세를 가지고 선언하는 것임을 시사한다(R.C.H.Lenski). 예수께서 선언하시는 것은 바로 자신을 찾아 헤맸던 무리들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상태를 두 가지로 진단하셨다. 첫째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oujc o{ti ei[dete shmei'a;우크 호티 에이데테 세메이아)이다. 무리들이 예수를 간절히 찾은 것은 표적 때문이 아니라 기적 때문이었다(C.K.Barrett). 여기서 앞서 언급된 표적의 의미가 도출된다. 그것은 단순히 범상한 능력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권능과 이적이 아니라 복음과 진리, 곧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셨으나 무리들은 그 표적으로 인해서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적과 권능에 매료되어서 찾은 것이었다. 이는 무리들의 잘못된 관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ajll j o{ti ejfavgete ejk tw'n a[rtwn kai; ejcortavsqhte;알르 호티 에파게테 에크 톤 아르톤 카이 에코르타스테테)이다. 여기서 에코르타스테테(ejcortavsqhte;배부른)는 코르타조(cortavzw;풀을 먹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승들이 풀을 먹고 배불리 하고 만족해 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무리들이 자신을 찾는 목적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게 경멸하며 비난한 것이었다(R.C.H.Lenski, A.T.Robertson). 무리들은 예수께서 계시되기를 바라고 행하셨던 오병이어 표적은 바라보지 않고 다만 자신들이 허기를 메꾸어 준 것에만 온통 신경을 쏟았으며 자신들의 육체적 만족만을 추구하였다.

3)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ejrgavzesqe mh; th;n brw'sin th;n ajpollumevnhn ajlla; th;n brw'sin th;n mevnousan eij" zwh;n aijwvnion,; 에르가제스데 메 텐 보로신 텐 아폴뤼메넨 알라 텐 브로신 텐 메누산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27a절)
에르가제스데(ejrgavzesqe;일하지)는 일을 해서 버는 것을 가리키며(C.K.Barrett, F.Reinecker), 문맥상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모두에 연결되어 있어서 '하라' 역시 에르가제스데를 가리킨다. '썩을 양식'(th;n brw'sin th;n ajpollumevnhn;텐 브로신 텐 아폴뤼메넨)은 앞 구절에서 언급된 '떡을 먹고 배부른 것'을 가리키는 썩어질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리들이 예수를 찾기 위해 수고한 것은 바로 떡을 먹고 배부름을 얻기 위함이었다. 반면 '썩을 양식'과 대조를 이루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th;n brw'sin th;n mevnousan eij" zwh;n;텐 브로신 텐 메누산 에이스 조엔)에서 에이스(eij")는 '∼안으로'라는 뜻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는 목적을 뜻하는 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의미한다(Lenski). 그것은 구속과 그것으로 인해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브로신(brw'sin;양식)이 단순히 먹을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먹을 것과 마실 것 모두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더욱더 확증된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떡이며 음료이다. 그것은 곧 예수의 살과 피로서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암시한다(35,55절).

3. 인자가 주는 영원한 양식(27b-29절)

1) 하나님의 인치신 인자가 주는 양식
(h}n oJ uiJo;" tou' ajnqrwvpou uJmi'n dwvsei: ... ga;r ... ejsfravgisen; 헨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휘민 도세이…가르…에르프라기센;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인치신 자니라, 27b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인자'(oJ uiJo;" tou' ajnqrwvpou;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가 주는 것이다. '인자'는 예수를 가리키는 칭호로서 예수께서 영적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L.Morris). 여기서 도세이(dwvsei;주리니)는 미래 시상으로서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D.A.Carson). 하나는 순수하게 미래 시상으로서 인자의 선물인 영생이 성령의 중재에 의해서 풍부하게 수여되는 때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임을 시사한다. 다른 하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현재 시상과 연계되어(R.C.H.Lenski)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양식을 주는 이가 오직 인자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자이신 예수께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살고 피를 내어 주는, 곧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믿는 자에게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분이다. 한편 가르(ga;r;왜냐하면)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인치신 자'라는 것이 인자가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양식을 줄 수 있는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치신'(ejsfravgisen;에스프라기센)은 혹자의 주장에 희생 제물에 흠이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인자이신 예수를 흠 없는 희생 제물로 열납하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Westcott). 그러나 희생 제물에 인치는 것은 미쉬나에만 기록되었을 뿐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도리어 그것은 어느 누구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보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인자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라는 것은 영새에 이르도록 하는 양식을 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만물의 창조주 되시며 주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증하신 것임을 시사한다(R.C.H.Lenski). 이러한 인증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재와 하늘의 음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ta; e[rga tou' qeou'; 타 에르가 투 테우; 하나님의 일, 28절)
'일'(ta; e]rga;타 에르가)은 복수형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명령하시자 무리들은 그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으며 어떤 것을 지켜 행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께 질문하였다. 이는 여전히 이들이 예수와 그의 사역,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고자 하시는 영생에 이르는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3)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
(Tou'tov ejstin to; e[rgon tou' qeou', i{na pisteuvhte eij" o}n ajpevsteilen ejkei'no".; 투토 에스틴 토 에르곤 투 데우 히나 피스튜에테 에이스 혼 아페스테일렌 에케이노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29절)
'일'(to e]rgon;에르곤)은 단수형이다. 이는 무리들이 복수형으로 사용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예수께서 교정하여 하나님의 일은 단 한 가지, 곧 '하나님의 보내신 자' (o}n ajpevsteilen ejkei'no";혼 아페스 테일렌 에케이노스)를 믿는 것임을 교훈하신 것이다.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n)은 '보내다'(ajpostevlw;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권세를 부여하여 보내는 것을 뜻한다. 이는 영생에 이르도록 양식을 주시는 인자 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며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음을 시사한다. 영생을 얻는 깊은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신 인자 되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요 6:30~37 생명의 떡이신 예수

구약의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예표함

1. 구약 인용을 통해 표적을 구함(30,31절)

1) 표적을 요구함
(Tiv oun poiei'" su; shmei'on, i{na i[dwmen kai; pisteuvswmevn soi; 티 운 포이에이스 쉬 세메이온 히나 이도멘 카이 피스튜소멘 소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30절)
세메이온(shmei'on;표적)은 앞서 진술된 바와 같이 단순한 초자연적인 이적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내포하고 있는 권능과 기사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자신을 찾을 때 표적을 봄으로 인해서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심으로 오병이어가 표적임을 밝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i]dwmen kai; pisteuvswmevn;이도멘 카이 피스튜소멘)는 제2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단회적으로 보고 믿을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J.G.Machen). 히나(i]na;위하여)와 연결되어 목적절이 된 본 가정법은 이전까지 행해진 모든 표적들을 부정하며 이제부터 보고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행해 달라는 요청이다. 그것은 무리들의 철저한 불신앙을 시사한다.

2) 요구하는 표적의 성격
(gegrammevnon, [Arton ejk tou' oujranou' e[dwken aujtoi'" fagei'n.; 게그람메논 아르톤 에크 투 우라누 에도켄 아우토이스 파게인;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31a절)
'기록된 바'(gegrammevnon;게그람메논)는 현재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현재 나타나 있음을 의미한다. 기록된 그 말씀은 시78:24(LXX 77:24)으로 '하늘 양식'이라고 표현되어 있다(D.A.Carson). 본문에서는 그것이 문자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을 의미하는 아르톤 에크 투 우라누( [Arton ejk tou' oujranou';하늘에서…떡을)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오병이어를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의 불신앙을 반영한다. 즉 무리들은 오병이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떡의 양이 늘어난 정도보다는 보다 확실하게 하늘에서 떡을 내리게 하는 정도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R.C.H.Lenski). 이것이 무리들이 예수의 오병이어 표적을 부정한 의도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가 단순히 떡의 양을 늘린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는 하늘에서부터 양식을 내려 준 모세보다는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3) 구약의 실례
(oiJ patevre" hJmw'n to; mavnna e[fagon ejn th'/ ejrhvmw/,; 호이 파테레스 헤몬 토 만나 에파곤 엔 테 에레모;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1b절)
본문은 무리들이 떡의 양을 늘리는 오병이어보다 더 큰 표적이라 생각하여 제시한 구약 시대의 실례이다. 그것은 '만나'(mavnna;만나)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출애굽하여서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날마다 예비하여 주신 양식으로서(출16:4), 랍비들은 메시야시대가 되면 이러한 일이 다시 이루어질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A.T.Robertson). 즉 랍비들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주실 하나님의 풍부한 은사를 예표한다고 여겼다(Hoskyns). 그들은 이로써 메시야가 모세를 능가하는 우월한 존재임을 증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리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 표적은 부정하고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을 요구한 것은 모세를 훨씬 더 능가하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었다.

2. 예수의 그림자인 만나(32-34절)

1) 참된 떡을 주시는 하나님
(ouj Mwu>sh'" devdwken uJmi'n ... ajll j oJ pathvr mou divdwsin uJmi'n to;n a[rton ejk tou' oujranou' to;n ajlhqinovn:; 우 오위세스 데도 켄 휘민…알르 호 파테르 무 디도신 휘민 톤 아르톤 에크 투 우라누 톤 알레디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2절)
본문은 무리들이 바라는 하늘의 떡의 기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교정시키는 것이다. 무리들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하늘의 떡을 모세가 내려 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믿을 수 있도록 모세가 행한 만나 이상의 표적을 행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ouj Mwu>sh'" devdwken uJmi'n;우 모위세스 데도켄 휘민)는 무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부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부정어 우(ouj;아니라)가 맨 앞에 기록된 것은 모세가 만나를 준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부정하는 문장 구성이다. 예수께서 만나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신 것은 간접적으로 모세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A.T.Robertson). 강한 부정을 동반하는 접속사 알르(ajll j;그러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의 출처를 예고한다. 그 출처는 '내 아버지'(oJ pathvr mou;호 파테르 무)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호 파테르 무라고 말씀하심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와 자신이 위대한 선지자에 불과한 모세와는 다른 존재임을 암시한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한편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divdwsin uJmi'n to;n a[rton ejk tou' oujranou' to;n ajlhqinovn;디도신 휘민 톤 아르톤 에크투 우라누 톤 알레디논)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암시를 하고 있다. 첫째, 디도신(divdwsin;주시나디)은 현재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하늘에서 내린 떡을 주고 계심을 시사한다. 둘째는 '참떡'(to;n a]rton ... to;n ajlhqinovn;톤 아르톤…톤 알레디논)이다. 톤 알레디논(to;n ajlhqinovn;참)이 떡을 수식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모세가 주었던 만나와 같은 일반적인 육체적 욕구를 채워 주는 떡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떡,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임을 시사한다.

2) 생명을 주는 떡
(ga;r ... oJ katabaivnwn ejk tou' oujranou' kai; zwh;n didou;" tw'/ kovsmw/.; 가르…호 카나 바이논 에크 투 우라누 카이 조엔 디두스 토 코스모;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3절)
본 절은 가르(ga;r;왜냐하면)로 시작되어 본절이 앞 절에서 언급된 '참떡'에 대한 이유임을 시사한다. 물론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만나도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라는 사실은 추호도 변할 수 없는 진리이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참떡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양분을 공급하여 육체적 생명을 연장시켜 줄 뿐이다(Chrysostom). 그러나 참떡은 '생명을 주는'(zwh;n didouv";조엔디두스)떡이다. 여기서 조엔(zwh;n;생명을)은 단순히 영양분으로 인해 연장되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바(R.C.H.Lenski) 영생을 뜻한다(L.Morris). 무리들은 모세가 주었다고 생각한 만나를 이야기한 반면 예수께서는 만나보다 더 우월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떡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모세보다 훨씬 더 우월한 존재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영생의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3) 이 떡을 주소서
(Kuvrie, pavntote do;" hJmi'n to;n a[rton tou'ton.; 퀴리에 판토네 도스 헤민 톤 아르톤 투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4절)
퀴리에(Kuvrie;주여)는 무리드리 앞서 26절의 랍비 대신에 사용한 예수에 대한 칭호로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참떡이 무언가 다른 거룩한 것임을 미약하게나마 인식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무리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참떡이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원했던 것과 같이(요4:15) 자신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임을 알고 간절히 예수에게 요청하였다. 도스(do;";주소서)는 제2부정과거 명령법으로서 급박하게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실체인 예수(35-37절)

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jEgwv eijmi oJ a[rto" th'" zwh'": oJ ejrcovmeno" prov" ejme; ouj mh; ... oJ pisteuvwn; 에고 에이미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호 에르코메노스 프로스 에메 우 메 …호 피스튜온;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35절)
예수께서는 참떡을 줄 것을 요청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에고 에이미( jEgwv eijmi;내가…이니)라는 위대한 자기 선언을 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미(eijmi;나는 ∼이다)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1인칭 단수 에고( jEgwv;내가)를 언급한 것은 강조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에고 에이미는 예수께서 자신의 신적 권세와 자기 정체를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자기 선언 방식이다(요8:12;10:7,11;11:25;14:6;15:1, Morgan, M.C.Tenney).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셔서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은 자신이 참떡, 곧 '생명의 떡'(oJ a]rto" th'" zwh'";호아르토스 테스 조에스)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조에스(zwh'";생명의)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께서 그 영원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A.T.Robertson), 그러나 타인이 예수의 영생을 수여받기 위해서는 예수에게 나아와 믿어야 한다. 에르코메노스(ejrcovmeno";오는)는 현재 중간태 분사이며, '믿는'(pisteuvwn;피스튜온)은 현재 분사이다. 이는 예수에게서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에게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즉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나와서 지속적으로 예수를 믿고 교제를 나누어야 함을 시사한다.(A.T.Robertson, F.Reinecker).

2) 무리들의 불신앙
(ajll j ... eJwravkatev 팵e? kai; ouj pisteuvete.; 알르…헤오라카데[메] 카이 우 피스튜에테; 그러나…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36절)
강한 부정의 의미를 내포하는 접속사 알르(ajll j;그러나)는 앞 절의 선언과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무리들은 예수에게 참떡을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명을 주는 참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불신앙으로 대적하였다. 한편 헬라어 본문사의 괄호 아네 들어있는 메(me;나를)가 정확하게 본문에 있어야 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단어는 바로 26절의 내용을 가리킨다(A.T.Robertson). 즉 무리들은 이미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았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헤오라카테(eJwravkatev;보고도)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무리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바로 저들 앞에 있음을 의미한다(R.C.H.Lenski). 카이 우 피스튜에테(kai; ouj pisteuvete;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에서 카이(kai;;그리고)는 본문의 문맥상'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의미하며(A.T.Robertson), 우피스튜에테(ouj pisteuvete;믿지 아니하는도다)는 현재 시상으로 지속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무리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목적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있었다.

3) 아버지로부터 온 자만이 믿음
(Pa'n o} divdwsivn moi oJ path;r pro;" ejme; h{xei, ... ouj mh; ejkbavlw e[xw,; 판 호 디도신 모이 호 파테르 프로스 에메 헥세이…우 메 에크발로 엑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7절)
'주시는 자는'(Pa'n o} divdwsivn;판 호 디도신)은 남성이 아니라 중성 명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집합적 성격을 내포하며,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A.T.Robertson, C.K.Barrett, R.E.Brown).한편 '올 것이요'(h}xei;헥세이)는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예배하기 위해서 나아오는 것을 묘사하는 헤코(h}kw;오다)의 미래 시상으로 앞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는…믿는 것'(35절) 두 가지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이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무리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에 그 말씀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백성이 아니라는 선언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예수에게 나아와 믿고 경배하는 자를 결코 홀대하시지 않으신다.dn ap(ouj mh;;결코…아니하리라)는 이중 부정으로 강한 긍정을 시사하는 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자신을 믿게 된 자들 모두를 받아들이시며 영생을 주실 것을 강하게 약속하시는 것이다.

 

 

요 6:38~46 예수의 교훈에 대한 변론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소유함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어 마지막 날에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삶을 얻도록 역사하신다.

1. 아버지 뜻대로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심(38-40절)

1)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유
(o{ti katabevbhka ajpo; tou' oujranou' oujc i{na poiw' ... ajlla; to; ... qevlhma tou' pevmyantov" me:; 호티 카타베베카 아포 투 우라누 우크 히나 포이오…알라 토…델레마 투 펨프산토스 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8,39a절)
카타베베카(katabevbhka; 내려온)는 전치사 카타(katav; 아래로)와 동사 바이노(baivnw; 오다)의 합성어인 카타바이노(katabaivnw;내려오다)의 현재 완료시제로, 이미 내려와 있음을 암시한다(C.K.Barrett).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분이시다. 이는 앞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떡과 비교되어 예수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떡, 곧 생명의 떡이심을 암시한다.
한편 '행하려'(poiw'; 포이오)는 포이에오(poievw; 행하다)의 현재 가정법으로 목적절을 이끄는 히나(i}na; 위하여)와 연결되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포이오(poiw'; 행하려)가 현재 가정법이라는 사실은 그가 계속해서 행하려고 하는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의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qevlhma tou' pevmYanto" me; 델레마 투 펨프산토스 메)이다.
펨프산토스(pevmYanto"; 보내신)은 부정과거 분사로서 예수를 일회적으로 보내신 사실 자체를 의미한다. 더욱이 이것은 현재 가정법으로 사용된 포이오와 연결되어 예수의 지상 최대 목적이 자신을 보내신 자, 곧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임을 시사한다(A.T.Robertson).

2) 보내신 이의 뜻
(i{na pa'n o} devdwkevn moi mh; ajpolevsw ejx aujtou' ajlla; ajnasthvsw aujto; 팫jn? th'/ ejscavth/ hJmevra/.; 히나 판 호 데도켄 모이 메 아폴레소 엑스 아우투 알라 아나스테소 아우토 [엔] 테 에스카테 헤메라;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39b절)
'주신 자'(pa'n o} dedwkevn; 판 호 데도켄)에서 판(pa'n; 모든)은 중성으로서 집합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에게 주시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데도켄(devdwkevn; 주신)은 현재 완료시제로서 그 시점이 마지막 날에 살리는 것에 연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R.C.H.Lenski). 한편 아폴레소(ajpolevsw; 잃어버리지)는 앞서 중성으로서 집합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판(pa'n; 모든)과는 달리 개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묘사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나는 전공동체 중에서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C.K.Barrett, F.Reinecker).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믿는 자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마지막 날'(팫jn? th'/ ejscavth/ hJmevra/; [엔] 테 에스카테 헤메라), 곧 종말에 모두 살리실 것이다. '살리는'(ajvasthvsw; 아나스테소)이란 말은 '부활'(ajvastasi"; 아나스타시스)의 어근으로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의인의 부활을 시사한다(A.T.Robertson).

3)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음
(pa'" oJ qewrw'n to;n uiJo;n kai; pisteuvwn eij" aujto;n e[ch/ zwh;n aijwvnion, kai; ajnasthvsw; 파스 호 데오론 톤 휘온 카이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에케 조엔 아이오니온 카이 아나스테소;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40절)
'보고'(qewrw'n; 데오론)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주 예수에 대해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곧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가리킨다(요12:45;16:10,19, C.K.Barrett, A.T.Robertson). 예수를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영생이 수여된다. '얻는'(e]ch/; 에케)은 결코 미래시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시제로서 예수를 보고 믿는 순간에 영생을 소유하게 됨을 시사한다(R.C.H.Lenski). 영생은 마지막 날의 부활 이전에 믿는 자들이 소유하게 될 현재적 축복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두 가지 시제, 곧 부정과거 가정법과 약속과 의지 등을 함축하고 있는 미래 직설법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아나스테소(ajnasthvsw; 다시 살리리라)는 미래 직설법으로 해석되는 것이 자연스럽다(A.T.Robertson, C.K.Barrett).

2.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무리들의 몰이해(41,42절)

1) 예수의 말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
( jEgovgguzon oun oiJ jIoudai'oi peri; aujtou'; 에공귀존 운 호이 유다이오이 페리 아우투;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1절)
'수군거려'( jEgovgguzon; 에공귀존)의 어근인 공귀조(govgguvzw)는 의성어로서, 비둘기들이 모여 구구거리는 것이나 별들이 날아다닐 때 들리는 날게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에공귀존은 기동상의 미완료시상으로, 이는 예수 자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말씀을 끝내자 그 선언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는 불만을 계속적으로 수근거려 토로하기 시작한 것을 나타낸다(F.Reinecker).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의 선언과 변론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2) 자연 현상을 기준으로 이해함
(Oujc ou|tov" ejstin jIhsou'" oJ uiJo;" jIwshvf,; 우크 후토스 에스틴 예수스 호 휘오스 요세프;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42a절)
부정어 우크(Oujc; 아니냐)가 문두에 위치해 있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유대인들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되어 '이는'(ou|tov"; 후토스)은 예수를 가리키는 '이 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기에는 불신앙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요구한 떡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좌절과 실망의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R.E.Brown). 이는 멸시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F.Reinecker). 그들이 실망과 불신앙에 빠진 것은 예수의 가계(家계)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에서 연유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oJ uiJo;" jIwshvf; 호 휘오스 요세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사고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초자연적 능력을 주셔서 임무를 수행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수여할 수 있으며 신적 권세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인간이라는 증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불신앙에 빠지게 되었다.

3) 초자연적 사실을 이해하지 못함
(pw'" nu'n levgei o{ti jEk tou' oujranou' katabevbhka_; 포스 뉜 레게이 호티 에크 투 우라누 카타베베카;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2b절)
'하늘로서 내려왔다'( jEk tou' oujranou' katabevbhka; 에크 투 우라누 카타베베카)는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예수의 가계에 대한 선 이해로 인해서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3. 가르침의 진정성에 대한 변증(43-46절)

1) 아버지로부터 온 자만이 이해함
(Mh; gogguvzete ... oujdei;" duvnatai ejlqei'n prov" me ... eJlkuvsh/ aujtovn; 메 공귀제테…우데이스 뒤나타이 엘데인 프로스 메…엘퀴세 아우톤; 수군거리지 말라…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43,44절)
공귀제테(gogguvzete; 수군거리지)는 현재 명령법으로 부정사 메(me; 말라)와 결합하여 현재 한창 진행 중인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며, 자신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예수께서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불만과 웅성거림을 금지시키셨다. 한편 엘퀴세(eJlkuvsh; 이끌지)는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재권을 의미한다(C.K.Barrett, W.Barclay, L.Morris, A.T.Robertson). 이것은 '아니하면…없으니'(oujsei;" duvnatai ... me; 우데이스 뒤나타이…메)와 연결되어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예수에게로 이끌어 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2) 구약 예언의 성취
(e[stin gegrammevnon ejn toi'" profhvtai", Kai; e[sontai pavnte" didaktoi; qeou': ... maqw;n; 에스틴 게그람메논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 카이 에손타이 판테스 티타크토이 데우…마돈;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배운, 45절)
에스틴 게그람메논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e[stin gegrammevnon ejn toi'" profhvtai"; 선지자의 글에…기록되었은즉)에서 엔토이스 프로페타이스는 문자적으로 '선지자 안에'를 의미하나, 이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쓴 예언서를 가리킨다. 이러한 사실은 게그람메논(gegrammevnon; 기록되었은즉)과 연결되어 확증된다. 더욱이 게그람메논은 현재 완료시제로 이미 기록되어 있는 예언서를 의미하며, 본문은 구약 사54:12,13을 가리킨다(L.Morris). '하나님의 가르침'(didaktoi; qeou':; 디다크토이 데우)은 구약 본문을 해석하여 옮긴 것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53장에기록된 고난받는 종, 곧 메시야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가 누리게 될 영광과 축복을 의미한다(D.A.Carson, R.CH.Lenski).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하나님의 절대적 선재권만을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마돈(maqw;n; 배운)은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예수에게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접하게 된 믿는 자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A.T.Robertson). 영생을 얻으며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을 누릴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배워가는 자이다.

3) 하나님을 보신 예수
(eij mh; oJ w]n para; tou' qeou', ou|to" eJwvraken to;n patevra.; 에이 메 호 온 파라 투데우 후토스 헤오라켄 톤 파테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6절)
본 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앞 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앞 절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누구나 다 하나님과 대면하여서 보게 되며 스스로의 능력으로 아들 예수께 나아가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보았느니라'(ou|to" eJwvraken to;n patevra; 후토스 헤오라켄 톤 파테라)는 앞서 언급된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와 연결되어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만이 그럴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oJ w]n para; tou' qeou'; 호 온 파라 투 데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본 자가 없으며,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나누는 자가 없다(요1:18). 다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본 예수께서 중재하심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C.K.BHarrett, A.T.Robertson).
앞 절에서 말씀하신 것은 믿음으로 영생과 마지막 부활을 소유하게 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이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을 시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과 교제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이신 예수만이 가능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중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요14:9).

 

 

요 6:47~59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 영생을 주심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심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은 인자 되신 예수께서 세상을 위하여 주신 살과 피를 먹는 것, 곧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1.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47-51절)

1)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떡
(oJ pisteuvwn e[cei zwh;n aijwvnion ejgwv eijmi oJ a[rto" th'" zwh'".; 호 피스튜온 에케이조엔 아이오니온 에고 에이미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7,48절)
'믿는 자'(oJ pisteuvwn; 호 피스튜온)는 현재 분사로서 예수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확신을 갖고 믿는 자임을 시사한다(R.C.H.Lenski). 믿음은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께서만 오셔서 하나님을 본 유일한 존재이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며(A.T.Robertson).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생을 가졌나니'(e[cei zwh;n aijwvnion;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에서 에케이(e[cei; 가졌나니)는 현재 시제로서 믿는 자들이 현재 삶 속에서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35절에 이어 다시 한번 위대한 자기 선언인 에고 에이미(ejgwv eijmi; 내가…이로다)와 더불어 믿는 자들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이다. 에고 에이미와 더불어 선언된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oJ a[rto" th'" zwh'"; 생명의 떡)는 예수 자신이 생명의 원천이며, 동시에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2) 만나와 생명의 떡
(e[fagon ... ajpevqanon ... favgh/ kai; mh; ajpoqavnh/.; 에파곤…아페다논…파게 카이 메 아포다네;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49,50절)
에파곤…아페다논(e[fagon ... ajpevqanon; 먹고 죽었거니와)은 모두 부정과거시제로서 먹었고, 죽었다는 것을 단순한 일회적 발생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며, 모세의 인도함에 따라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 생활을 하던 당시에 먹었던 만나 사건을 의미한다(출16:4-36).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만나는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만나를 먹음으로 육체적 생명을 연장하였다(C.K.Barrett). 그러나 결국 그들은 사망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파게 카이 메 아포다네(favgh/ kai; mh; ajpoqavnh/;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는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생명의 떡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내린 생명의 떡, 곧 예수 자신을 먹음으로 결코 죽지 않게 될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만나와 생명의 떡의 차이이다.

3) 예수의 살
(oJ a[rto" oJ zw'n ... ejgw; dwvsw hJ savrx mouv ejstin uJpe;r th'" tou' kovsmou; 호 아르토스 호 존 에고 도소 헤 사륵스 무 에스틴 휘페르 테스 투 코스무;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51절)
본문은 만나와 달리 하늘에서 내리는 떡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근거와 그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떡이다. 그 떡은 바로 예수의 살이다. '나의 줄'(ejgw; dwvsw; 게고 도소)에서 1인칭 대명사 에고(ejgw;; 나)는 도소(dwvsw; 출)가 1인칭 단수 동사인 바 없어도 가능하나 삽입되어 있는 것은 생명을 주시는 떡이신 예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무리들이 만나를 내려주었다고 여기는 모세보다 예수 자신이 더 탁월한 분이심을 시사한다(A.T.Robertson). 예수께서 주시는 떡인 헤 사륵스 무(hJ savrx mouv; 나의 살)에서 사륵스는 바울에 의하면 단순히 몸을 뜻하는 도소(dwvsw)와 구분하여 죄 있는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특별한 구별이 없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성육신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요1:14에서도 사륵스로 묘사된다(Moloney, D.A.Carson). 또한 혹자는 생명의 떡이 사륵스(savrx; 살)라는 사실을 근거로 예수께서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C.K.Barrett, J.Jeremias), 그것보다는 뒤에 언급된 휘페르(uJpe;r ; 위하여)와 연결되어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시사한다(L.Morris). 한편 '세상을 위하여'(uJpe;r th'" tou' kovsmou; 휘페르 테스 투 코스무)에서 전치사 휘페르(uJpe;r; 위하여)는 희생 제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D.A.Carson), 본서에서도 대부분 예수의 희생적 죽음과 연결되어 나타난다(요10:11,15;15:13;18:14;롬5:8;갈3:13;요일3:16).

2. 살과 피(52-56절)

1) 무리들의 논란
( jEmavconto oun pro;" ajllhvlou" oiJ jIoudai'oi; 에마콘토 운 프로스 알렐루스 호이 유다이오이;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52절)
에마콘토( jEmavconto; 다투어)는 기동상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서로 계속적으로 격하게 말다툼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앞서 41절에서 수군거리던 반응에서 더 적극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알렐루스(ajllhvlou"; 서로)는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께서 자기 살이 곧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분분하였음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알아들었으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여서 생명의 떡이 예수 자신의 살이라는 말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2) 참된 양식과 음료
(eja;n mh; favghte th;n savrka tou' uiJou' tou' ajnqrwvpou kai; pivhte aujtou' to; ai|ma, ... ajlhqhv" ejstin povsi".; 에안 메 파게테 텐사르카 투 휘우 투 안드로푸 카이 피에테 우우투 토 하이마…알레데스 에스틴 포시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참된 음료로다, 53-55절)
유대인들의 말다툼을 보신 예수께서는 보다 강한 의미의 어휘를 사용하셔서 생명의 떡에 대해 설명하신다. 이제 '내 살과 피'는 본문에서 '인자의 살과 피'로 바뀐다. 여기서 '인자'(tou' uiJou' tou' ajnqrwvpou; 투 휘우 투 안드로푸)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복음서에서 메시야 되신 예수를 가리킬 때 사용된 칭호이다(G.Vos).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 내 살이라고 말씀하실 때 어떻게 인육을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해 말다툼하였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가 단순한 인간의 살과 피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투 휘우 투 안드로푸라는 메시야적 칭호를 사용하셨다. 이는 자신의 살과 피가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만약 앞서와 같이 유대인들이 이것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더욱더 심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인자에 대한 언급에 이어서 곧바로 '내 살을 먹고'(oJ trwvgwn mou th;n savrka; 호 트로곤 무 텐사르카)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 인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여기서 '먹고'(trwvgwn; 트로곤)는 현재 분사이며, 씹거나 뜯어먹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먹는다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며, 현재시제로서 계속적으로 충당하는 것을 뜻한다(L.Morris). 즉 그것은 먹는 자와 예수와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가시적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믿는 자는 예수와 지속적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참된 음료로다'(ajlhqhv" ejstin povsi"; 알레데스 에스틴 포시스)에서 알레데스(ajlhqhv"; 참된)는 '믿을 만한'을 뜻하는 알레디노스(ajlhqinw")와는 달리 '실제적인'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살과 피가 실제적인 양식과 음료임을 강조한 것으로 예수의 살과 피가 가지고 있는 생명과 그의 영향력을 강하게 강조한 것이다(R.E.Brown).

3)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와의 연합
(ejn ejmoi; mevnei kajgw; ejn aujtw'/.; 엔 에모이 메네이 카고 엔 아우토;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6절)
'거하고'와 '거하나니'는 메네이(mevnei)를 사용하는 동일한 말이다. 이는 현재시제인 바, 계속해서 예수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 사이에 내주하는 것을 시사한다. 특별히 메네이는 쌍방간의 내주를 통한 실제적이고 신비적인 연합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믿는 자 사이의 교제와 생명의 공유 및 연합을 의미한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 곧 예수를 믿는 자는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수여하시는 예수와 더불어 내주하며 영생을 공유한다.

3. 영원한 생명의 근원(57-59절)

1) 예수의 생명의 근원
(kaqw;" ajpevsteilevn me oJ zw'n path;r kajgw; zw' dia; to;n patevra,; 카도스 이페스테일렌 메 호 존 파테르 카고 조 디아 톤 파테라;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메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57a절)
본문의 문두에 있는 카도스(kaqw;"; 처럼)는 양태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이 주는 믿는 자의 생명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시사한다. 호 존 파테르(oJ zwn path;r; 살아 계신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되심을 시사한다. 특별히 예수의 생명은 '아버지로 인하여'(dia; to;n patevra; 디아 톤 파테라) 부여되었으며 유지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vn; 보내시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에수께서는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성육신하신 생명의 떡이시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과 생명을 부여받으셨기에 그의 생명과 권한은 아버지에게 달려 있다(C.K.Barrett).

2)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kai; oJ trwvgwn me kajkei'no" zhvsei di j ejmev.; 카이 호 트로곤 메 카케이노스 제세이 디 에메;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7b절)
'나를 먹는 그 사람도'(oJ trwvgwn me; 호 트로곤 메)에서 메(me; 나를)는 앞서 언급된 '살과 피'가 문자적으로 예수의 육체가 아니라 예수의 인격, 혹은 예수의 전인(whole man)을 함축하여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한다(C.K.Barrett, R.C.H.Lenski). 믿는 자들이 얻게 되는 생명은 '나를 인하여'(di j ejme; 디 에메) 주어진 것이다. 디 에메는 예수께서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로 인하여'(dia; twn patevra; 디아 톤 파테라) 생명을 수여받았으며, 유지되며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믿는 자들의 생명 또한 예수에게 달려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생명의 매개체로서 세상에 보내셨으며 세상을 위한 생명의 원천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믿는 자의 생명은 철저하게 생명의 떡이시며 믿는 자에게 영생을 부여하시는 예수에게 달려 있다. 만약 믿는 자가 예수와의 상호 내주와 연합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 또한 생명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3) 영원히 죽지 않음
(ou|tov" ejstin oJ a[rto" oJ ejx oujranou' katabav", ... zhvsei eij" to;n aijw'na.; 후토스 에스틴 호 아르토스 호 엑스 우라누 카타바스…제세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영원히 살리라, 58절)
본문은 이제까지 예수께서 행하신 강화의 결론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oJ a[rto" oJ ejx oujranou' katabav"; 호 아르토스 호 엑스 우라누 카타바스)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유대인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는 달리 영원히 살 수 있는(zhvsei eij" to;n aijw'na; 제세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 영원히 살리라) 생명을 중개하는 자이심을 시사한다. 사람이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을 갖고 계시며 생명을 타인에게 수여하시는 예수를 믿음으로 상호간의 내주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로 인하여 생명을 소유하고 있듯이 믿는 자들도 또한 세상을 위한 생명의 매개체로 오신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요 6:60~71 무리의 반응과 제자들의 고백

예수만이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다

생명이신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두 가지 갈래 길에 서게 된다. 하나는 예수의 말씀을 받아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말씀을 내버림으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중간 지대는 없다.

1.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고로 영적 생명을 보증함(60-63절)

1) 무리들의 걸림돌이 된 예수의 변론
(Polloi ... ejk tw'n maqhtw'n ... Sklhrov" ejstin oJ lovgo" ou|to": tiv" duvnatai aujtou' ajkouvein ... Tou'to uJma'" skandalivzei_; 폴로이…에크 톤 마데톤…스클레로스 에스틴 호 로고스 후토스 타스 뒤나타이 아우투 아쿠에인…투토 휘마스 스칸달리제이; 제자 중 여럿이…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0,61절)
'제자들 중 여럿이'(Polloi ... ejk tw'n maqhtw'n; 폴로이…에크 톤 마데톤)는 67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열두 제자와 대비를 이루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제자들, 곧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던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스클레로스 에스틴(Sklhrov" ejstin; 어렵도다)은 '거칠다, 딱딱하다' 등과 같은 의미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를 나타낸다(C.K.Barrett, Bernard). 이것은 여러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 자체는 이해하였으나 자신들의 마음상태로 인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들을 수'(ajkouvein; 아쿠에인)가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쉐마([mv; 들으라)와 같은 것으로 '따르다' 혹은 '순종하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해의 부족이나 준비되지 못한 마음의 상태로 인해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따를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편 스칸달리제이(skandalivzei; 걸림이 되느냐)는 '함정이나 올무'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초자연적 지식을 가지고 앞서 선포하신 살과 피에 관한 자신의 말씀으로 인해서(D.A.Carson) 수 많은 제자들이 올무에 걸려 있음을 아셨다.

2) 부활과 승천을 통해 보증하심
(eja;n oun qewrh'te to;n uiJo;n tou' ajnqrwvpou ajnabaivnonta o{pou hn to; provteron_; 에안 운 데오레테 톤 휘온 투 안드로푸 아나바이논타 호푸 엔 토 프로테론;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2절)
헬라어 본문에는 '어찌 하려느냐'는 어구가 없다. 다만 본문은 하나의 조건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조건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본문에 대한 귀결문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는 걸림이 더 증폭된 다는 것이며 둘째로 걸림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D.A.Carson, Westcott). 왜냐하면 '인자의…올라가는 것을'(to;n uiJo;n tou' ajnqrwvpou ajnabaivnonta; 톤 휘온 투 안드로푸 아나바이논타)은 단순히 예수의 부활과 승천만을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즉 예수의 비하와 승천을 통한 영광을 얻으심과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순간적인 사실이다. 비하와 영광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데오레테(qewrh'te; 볼 것)라는 단어가 믿음이나 마음에서 비롯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암시하고 있듯이(R.C.H.Lenski),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만이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즉 믿음을 가진 자는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걸림이 제거될 것이나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걸림이 증폭될 뿐이다. 한편 '이전 있던 곳으로'(o{pou hn to; provteron; 호푸 엔 토 프로테론)는 하늘을 암시하는 바 예수의 선재하심, 곧 신성을 시사한다. 특히 '있던'(hn; 엔)은 에이미(eivmiv; 이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해 계셨음을 함축한다. 예수께서는 로고스로서 천지 창조가 있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며 선재하셨던 분이다. 그가 생명을 주는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으며 대속적 죽음을 당하실 것이나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선재하셨던 곳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3) 영적 생명
(to; pneu'mav ejstin to; zw/opoiou'n, hJ sa;rx oujk wjfelei' oujdevn: ta; rJhvmata a} ejgw; lelavlhka uJmi'n pneu'mav ejstin kai; zwhv ejstin.; 토 프뉴마 에스틴 토 조오포이운 헤 사륵스 우크 오델레이 우덴 타 레마타 하 에고 렐랄레카 휘민 프뉴마 에스틴 카이 조에 에스틴; 살리는 것은 영이니…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3절)
'살리는 것'(to; zw/opoiou'n; 토 조오포이운)은 생명을 주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여기서 프뉴마(pneu'mav; 영)에 대해서 혹자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M.C.Tenney, B.Murray) 그것보다는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까지 성령은 세상에 도래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예수 자신이 성령의 수여자이며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셨기 때문이다(요1:32a;3:34, D.A.Carson).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롬8:2;고전15:45). 혹자는 '영'(pneu'mav; 프뉴마)이 호흡, 생기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 바, 이를 '예수님의 이 말씀들 안에는 하나님의 생기와 생명이 있다'라는 측면에서 보기도 한다(A.T.Robertson).
'이른 말'(ta; rJhvmata a} ejgw; lelavlhka; 타 레마타 하 에고 렐랄레카)은 예수께서 이제까지 하신 말씀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생명의 수여자로서 성령이 함께하신 말씀이며(요3:34), 곧 그것은 영임과 동시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2. 수많은 제자들이 떠나감(64-66절)

1) 불신자와 배반자를 미리 아심
(ajll j eijsi;n ejx uJmw'n tine" oi} ouj pisteuvousin. h[/dei ga;r ejx ajrch'" oJ jIhsou'" tivne" eijsi;n oiJ mh; pisteuvonte" kai; tiv" ejstin; 에데이 가르 엑스 아류세스 호 에수스; 이는 예수께서…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4절)
'처음부터 아심이러라'(h]/dei ... ejx ajrch'"; 에데이…엑스 아르케스)는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의 사역 초기를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요1:1에서와 같이 태초를 가리킬 수도 있다(C.K.Barrett, D.A.Carson). 예수의 절대적인 지식은 어느 시기에 제한되지 않기에 두 가지 시기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아심이라'(h]/dei; 에데이)는 과거 완료로서 예수께서 이미 아셨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절대적인 지식을 갖고 계신 예수께서 '자기를 팔 자'(oJ paradwvswn aujtovn; 호 파라도손 아우톤)를 아셨다는 것은 단순히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처음부터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열 두 제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룟 유다에게서 자신을 팔 조짐을 알아채셨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에 떡조각을 찍어 주심으로 마지막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셨으나 유다는 예수를 팔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때 사단이 들어가 그를 사로잡았다(요13:27,G.Morgan). 이러한 것으로 보아 본문은 예수께서 미리 아시고 가룟 유다를 열두 제자로 택하셨다기보다는 가룟 유다에게서 배반의 가능성을 미리 아셨다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2)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
(eja;n mh; h/ dedomevnon aujtw'/ ejk tou' patrov".; 에안 메 에 데도메논 아우토 에크 투 파트로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65절)
데도메논(dedomevnon; 주지)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에안 메(eja;n mh;; 아니하면)와 연결되어 조건문의 형식을 이룬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하는 바(37절), 믿지 않는 자와 배반자가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A.T.Robertson). 하나님께서 먼저 이끄심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예수를 믿고 따를 수 없다.

3)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떠남
( jEk touvtou polloi; 팫jk? tw'n maqhtw'n aujtou' ajph'lqon eij" ta; ojpivsw; 에크 투투 롤로이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아펠돈 에이스 타 오피소;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66절)
'이러므로'( jEk touvtou; 에크 투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이 이유로'라는 의미로 앞 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이끄심이 없는 것을 가리킬 수 있으며 둘째는 '이때로부터'로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시점을 가리킬 수도 있다(C.K.Barrett, F.Rienecker). 두 가지는 상호 베타적 이기보다는 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그 시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지 못하고 단지 호기심에 차 예수를 따르던 형식적인 제자들이 떠나갔음을 시사한다. 한편 '물러가고'(ajph'lqon eij" ta; opivsw; 아펠돈 에이스 타 오피소)는 문자적으로 '뒤로 가버리다'라는 의미로, 많은 제자들 스스로가 예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갔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이로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지 못한 자들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3. 열두 제자의 고백과 배반에 대한 예고(67-71절)

1) 영생의 말씀을 가지신 예수
(Mh; kai; uJmei'" qevlete uJpavgein ... rJhvmata zwh'" aijwnivou e[cei"; 메 타이 휘메이스 델레테 휘파게인…레마타 조에스 아이오니우 이케이스; 너희도 가려느냐…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67,68절)
수많은 제자들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며 떠나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Mh; kai; uJmei'" qevlete uJpavgein; 메 카이 휘메이스 델레테 휘파게인)는 질문을 던지셨다. 이 질문은 부정어 메(Mh;; 아니다)와 더불어 시작된 질문으로서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서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면서 질문을 던지셨다. 한편 '영생의 말씀'(rJhvmata zwh'" aijwnivou; 레마타 조에스 아이오니우)은 앞서 이야기 하신 오병이어 강화는 물론 63절의 말씀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은 생명을 갖고 있어서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영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영원한 생명임을 시사한다(R.C.H.Lenski, D.A.Carson, M.C.Tenney). 이러한 사실은 에케이스(e[cei"; 계시매)가 현재 시제로서 예수께서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에서 보다 명확하게 확증된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 표적에 이어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강화 속에서 계속해서 설명하신 생명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많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곁을 떠나게 만들었던 영생을 주시는 말씀이 예수에게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다(A.T.Robertson).

2)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hJmei'" pepisteuvkamen kai; ejgnwvkamen o{ti su; ei oJ a{gio" tou' qeou'.; 헤메이스 페피스튜카멘 카이 에그노카멘 호티 쉬 에이 호 하기오스 투 데우;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을 믿고 알았삽나이다, 69절)
'우리가…믿고 알았삽나이다'(hJmei'" pepisteuvkamen kai; ejgnwvkamen; 헤메이스 페피스튜카멘 카이 에그노카멘)에서 두 동사는 모두 현재 완료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러한 시제는 페피스튜카멘(pepisteuvkamen; 믿고)이 '우리가 믿게 되었고 계속해서 믿고 있다'라는 의미이며(L.Morris), 에그노카멘(ejgnwvkamen; 알았삽나이다)이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여 깨달았으며 그것을 붙들고 있다' (C.K.Barrett)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영생을 소유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줄 이미 깨닫고 믿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알고 믿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oJ a{gio" tou' qeou; 호 하기오스 투 데우)는 예수께서 인류에게 영생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혹은 선별된 자임을 시사한다(R.V.G.Tasker, F.Rienecker).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부족하나마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영생을 소유하고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3) 가룟 유다의 배반 예고
(kai; ejx uJmw'n ei|" diavbolov" ejstin ...; 카이 엑스 휘몬 에이스 니아볼로스 에스틴…;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70절)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하여 팔아 넘길 것을 예고하셨다. 여기서 디아볼로스(diavbolov"; 마귀)는 '비방자 혹은 거짓 참소자'라는 의미로 신약 성경에서 어둠의 권세를 지닌 사단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요8:44;13:2,27, D.A.Carson). 예수께서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이 디아볼로스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택하실 때부터 가룟 유다가 디아볼로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요13:27에서 사단이 그때서 가롯 유다에게 들어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려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가룟 유다의 음모를 폭로하는 것이며(A.T.Robertson), 은혜로 그로 하여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었다(R.C.H.Lenski).
cafe.daum.net/correcttheology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리아의 아낌없는 헌신 (요 12:1-8)  (0) 2020.11.30
요한복음 7장 캐논주석  (0) 2020.11.30
요한복음 4장 캐논 주석  (0) 2020.11.30
요한복음 2장 캐논주석  (0) 2020.11.30
세례 요한의 증언(요1:6-28)  (0) 202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