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아낌없는 헌신 (12:1?8)
2장부터 전개된 복음서 이야기의 빛이 가려진다고 할 정도로, 이제 마지막 분량 1/3에 예수 수난 이야기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수난 이야기는 온전하게 예수가 처형된 주간 동안 일어난 이야기에 특별하게 집중한다.
대부분 예루살렘 안이나 근처가 그 무대이다.
이렇게 수난 이야기를 배열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가의 수난 서사에 대한 강조를 반영하는 동시에,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하여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도인 듯하다.
일부 고대 전기들은 지면의 상당한 분량을 주인공들의 죽음 바로 직전이나, 그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건들에 할애하였다.
대부분의 현대 전기 작품들과는 대조적이다.
알란 컬페퍼 (R. Alan Culpeper)는 요 12장와 13장 사이에 나타나는 구조적인 병행점들을 지적하여 준다.
12장 | 13장 | |
시간 | 유월절 전 6일 전 | 유월절 바로 직전 |
동무 | 나사로 | 사랑받는 제자 |
발 씻기 |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씻음. |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음 |
예수의 죽음 | 나의 장례일 | 수의를 벗음 (암시) |
예수의 떠남 |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느니라 | 세상에서 떠날 시간 |
컬페퍼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반복은 비통한 심정에 대한 공감대 (pathos)를 증가시킨다.
반복은 또한 하나의 절정, 즉 예수의 죽음과 고별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담화를 향하여 나아가는 무게감을 더하여 준다.
12장의 대부분은 간주와 같다.
예수의 공적인 사역을 매듭짓고 (11:45?57), 수난 서사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
Mary Magdalene washes the feet of Jesus,
Basilica of the Annunciation, Nazareth, Israel
마리아가 베다니에서 기름부은 사건은 선행하는 장면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계산된 계획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무식한 불신이 저지를 수 있는 지대한 행위와 지적인 신앙에서 나오는 지고한 행위"
(a supreme act of ignorant unbelief and a supreme act of intelligent faith)
이 단락에서 세분화되는 작은 단위들(11:45?46, 54?57, 12:9?11)은 예수에 대한 엇갈리는 반응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가장 긴 두 단위는 대제사장(11:47?53)과 마리아(12:1?8)를 대조한다.
그리고 동시에 가룟 유다를 유대 엘리트의 태도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다 (12:4?6).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직후에(11:47?53), 마리아가 예수의 장례를 위해 애정을 기울여 기름을 붓는다.
예수는 이스라엘 왕으로 칭송을 받는다 (12.13).
십자가에 달려서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왕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18:39; 19:3, 14?15, 19).
예수의 간략한 담화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수난의 길을 예비한다.
Галерея 'Надземное'. Елена Черкасова : НОВЫЙ МИР
Gallery 'Aboveground'. Elena Cherkasova: NEW WORLD
A. 전승
네 권의 정경 복음서에서 각기 다른 버전의 기름붓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 26.6-13; 막 14.3-9; 눅 7.36-39).
복음서들 가운데 가름부음에 대한 설명이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은 구전의 전승 과정을 통하여 일어났다고 보아도 무방한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된었다.
복음서 기자들이 각기 다른 흐름으로 전수되어왔던 전승을 뒤섞어 놓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사점들은 자유로운 창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 자료들이 존재하였음을 시사하여 준다.
오리겐은 각 복음서 이야기의 설명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엉뚱하게도 세 번의 기름부음이 있었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두 가지 기본이 되는 기름부음 이야기들으로부터 이본합성(원래 하나의 사건을 다양하게 변형시켰거나 혹은 첫째 사건을 모방하는 둘째 사건을 대변한다)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각기 다른 특색이 특정하게 뒤섞여 있다.
이 점은 다양한 작가들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기름부은 이야기를 융합하였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 중에 누가의 이야기가 가장 독특하며, 누가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찰스 몰 (C. F. D. Moule)은 일부 핵심 요소들에 대한 기본적인 요약 비교를 제시한다.
마태 | 마가 | 누가 | 요한 |
베다니 | 베다니 | ? | 베다니 |
시몬 | 시몬 | 시몬 | (나사로 [엘리에살]) |
나병환자 | 나병환자 | 바리새인 | ? |
여자 | 여자 | 죄 많은 여자. | 마리아 |
머리 | 머리 | 발 | 발 |
장례를 위한 기름부음 | 장례를 위한 기름부음 | 용서에 대한 감사. | 장례를 위한 기름부음 |
샌더스 (E. P. Sanders)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세부 사항들이 교환되었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들은 아마도 기억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구전 전승에서 두 가지 기름부음 이야기 사이에 어느 정도 융합이 일어났으리라고 보는 것만이 오직 자연스러울 것이다.
각 복음서 기자가 오직 단 하나의 사건만을 보고한다.
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특징들을 채택하였다고 보는 것도 동일하게 자연스럽다.
샌더스는 요 12장은 눅 7장을 기본으로 하여 마 26장/막 14장의 이야기들, 또는 이들과 관련된 전승들을 합성하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안하는 두 가지 이야기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나의 사건에서 기인하는 상이한 전승이거나, 두 번째 여자가 아마도 첫 번째 여자의 본보기를 따르는 두 번째 사건일 것이다.
GIOVANNI GIULIANI
MARY MAGDALENE DRYING CHRIST'S FEET
This version carved in wood was installed in the cloisters at Heiligenkreuz.
아마도 마가 이전에 다양한 전승이 형성되어 있었던 듯하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누가는 처음부터 마가 이야기 전체를 다시 쓰려고 하는 식의 자유로운 창안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요한의 이야기 설명은 아마도 그 세부사항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독립적으로 아주 오래된 전승을 가지고 작업했을 가능성을 확증하여 주는 듯하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초기에 전승의 정확한 보존을 하려고 했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패턴은 서로 다른 주변환경에서 전승되었다는 예외적 사례들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에, 최종적으로 전승으로 융합된 두 가지 독특한 가름부음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요한은 아마도 이곳에서는 단순히 공관복음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정확하고 독립적인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전승이 마르다의 자매인 마리아와 특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제4 복음서에서 등장하기 훨씬 전에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우리가 눅 10:38?42을 통해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해 알고 있다.
요한 청중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알려져 있었던 듯이 보인다(요 11:1)
또한 마리아의 기름부음이 11:2에 소개된 방식은 요한 청중들이 예수에게 기름부은 사람이 마리아라는 형식의 전승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유대인의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몰려드는 인파가 많았을 것이다 (11:55).
그렇게 때문에,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 베다니와 같이 예루살렘에 가까운 곳에 하룻밤을 묵을 숙박장소를 찾았다 (12.1).
좀 잘 사는 어떤 이들은 유월절 동안 묵으려고 친히 텐트를 가지고 와서 야영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순회하는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대가로 손대접의 환대를 베풀었다.
그래서 나사로의 가족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기 전부터 예수와 친밀하게 지내왔다 (11:3).
공관복음서는 베다니에서 예수가 묵었다고 보고하지만(막 11:11?12; 마 21:17),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밝힌다 (막 14:3; 마 26:6).
나사로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전에 나병을 앓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당시 유대에서 이중 이름은 유별나지 않다).
시몬은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의 아버지이다.
"나병환자"는 별명이거나 또는 이전에 앓았는데 예수에게 치유함을 받았든지, 또는 다른 가능성들도 얼마든지 있다.
어떤 경우든 요한은 초창기 이야기를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이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에게로 전가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요한 청중들은 이미 마리아를 예수에게 기름부은 사람으로 알고 있은 듯하다 (11:2).
그 전승의 원래 자료에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겠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요한이 신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물은 아니다.
Mary and Martha, Painting by He Qi
B. 무대 설정(12:1?2)
유월절(12:1) 6일 전, 예루살렘은 이미 제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11.55) 인파로 가득차고 있었다.
정확한 도착 시간을 계산하지 못하거나 늦게 도착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순례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요한의 이야기 세계는 금요일 저녁에 시작되는 유월절이다 (18:28; 19:14 참조).
이야기의 시간대는 해가 지고난 후의 토요일 저녁임을 명백하게 시사한다.
이 시간이 이르러서 마르다가 만찬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마가는 유월절 이틀 전에 기름부은 사건이 있었다고 강하게 암시한다 (막 14:1?3).
어떤 이들은 요한이 독자적인 전승에 근거하여 마가가 묘사한 장면을 수정한다고 생각한다.
마가와 요한 사이의 차이점은 요한이 가진 전승이 독자적임을 강조하여 준다.
요한이 주도면밀하게 수정했다고 보든지 그렇지 않든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가는 유월절에 더 가깝도록 기름부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여기도록 시간 조정을 한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a) 기름부음 사건과 유월절 사이의 연관성을 명료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b) 또는 이야기의 긴장감이 증폭되도록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c) 또는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예수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회합 이후에 이 이야기를 읽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마가는 당국자들의 회합이 유월절보다 이틀 앞서 일어났다고 보고한다 (막 14:1?2).
반면에 요한은 훨씬 이전에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요 11:47?53).
요한은 기름부은 사건으로 수난 주간을 시작하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요한은 이미 예수 사역 초반에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유대 당국자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보고하였다 (2.14-18).
따라서 요한은 이제 예수가 거룩한 성에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전체 이야기가 종착지에 도달했다는 극적인 효과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름부은 사건으로 수난 이야기를 부각시켜야만 했다.
또한 다른 가능성도 있다.
변화산 이야기와 관련된 초기 기독교 전승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다 (막 9:2; 마 17:1).
그러면 요한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영광의 계시를 기다렸던 시기 (출 24.16)를 인유하도록 그 엿새를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에 예수는 '영화롭게'될 것이다 (12:23?24).
제자들은 모세의 영광(1:14)과 같이 예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가능성이 훨씬 적은 선택지도 있다.
모세오경에서 "육일"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이 점을 반영하여, 육일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일하는 기간임을 참조하여 언급할 수도 있다 (cf. 요 19:14, 31, 42).
Martha preparing the meal while (in the background) Mary of Bethany sitting at Jesus' feet;
painting (1566) by Joachim Beuckelaer
사려깊은 해석자는 그 엿새 동안을 또한 다음날(12:12)로의 장면 전환으로 주목하여 본다.
따라서 예수가 유월절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던 그 날 (출 12.6)에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가 입성하는 시간에 대한 명백한 연대적 표시가 전혀 없다.
유월절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는 시점에 들어갔다는 명확한 표시가 있다면, 이러한 요지를 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 표시의 결핍으로 인해, 요한이 이러한 인상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제안이 그리 설득력이 없게 된다.
만찬 무대의 설정은 아마도 나사로의 소생을 축하하는 연회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13장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수난 이전의 만찬 무대 설정을 식사 세팅을 예감하도록 만든다고 볼 수도 있다.
마르다의 '섬김'(12:2)은 명확하게도 마르다에가 복음전승(눅 10:40)에서 잘 알려졌 있던 활동을 반영하고 있다.
비록 사안의 중요성이 그리 분명하지 않지만, 마르다의 섬김은 일종의 겸손한 섬김을 위한 또는 대조되는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기도 한다.
마르다의 모델을 따르도록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요청한다 (11:26에서 복음서는 유일하게 διακον?ω를 다르게 사용한다).
그렇지만 십자가 이전에 섬김의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은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위이다(13:5, 14).
제4복음서에서 이 행위를 행동으로 옮기는 제자는 유일하다.
비록 예수보다 앞서서 실행하지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데, 마리아 한명 뿐이다 (11:2; 12:3).
Mary Magdalene anoints Jesus's head with precious ointment, by Baron Marochetti.
C. 기름부음 (12:3)
여기서 향유의 양은 한 λ?τρα (한 근. 로마의 도량으로 1 파운드, 미국 도량으로는 12 온스, 국제표준으로는 324그램에 가깝다).
이 모두를 예수의 발에 쏟아붓는다는 것은 아낌없는 헌신의 행위다.
(19.39에서 진짜 부자가 희생하는 엄청난 양에 대비하면 소박함이 부각된다).
요한이 강조하듯이(12:3, 5), 그러한 향유가 '지극히 비싼' 것이었으리라고 짐작이 가는데, 이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이 명백했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은 연회에서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
시적으로 사랑 그 자체보다 더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떠벌린다.
따라서 받는 사람은 온 몸으로 그 냄새를 맡기를 원할 것이다.
향유로 번역된 'μ?ρον'라는 용어는 몰약의 향유나 향수를 나타낸다.
보통 마른 가루나 액체로 유통되었다.
"남 아라비아 중부 지방과 소말리아 북부에서 자라는 낮은 관목의 발삼나무에서 추출한 나오는 고무진 수지로 만든다."
그러나 마가 (막 14:3)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이 용어를 보다 포괄적인 총징으로 사용한다.
나드(Nard)는 인도 북부의 산악지대의 나드 식물의 뿌리에서 나오는 향기로운 기름인 감송향 (spikenard)을 가르킨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동방에서 온 나드는 부유한 자의 몫이라고 여겼다.
반문화적인 견유 철학자라면 자신의 머리보다 발에 기름을 부을 수 있겠지만, 연고로 흡입하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들 보고처럼 아주 드물게 다른 어떤 경우에 발에 기름을 붓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상적으로는 왕들이나, 귀한 손님 또는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붓는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기름붓는다 (12:3; cf. 눅7:38, 44?46, 48).
예수에게 엄청난 존경을 감정을 나타낸다 (눅 10:39).
마리아는 종의 자세를 취한다 (1:27; 13:5).
(랍비 요나단을 엄청 존경하여 그의 발에 입을 맞추기를 원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와 비교할 수도 있다. P. Peah 1:1, §13.)
마리아는 또한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아준다(12:3).
이는 비천한 노예의 태도를 보강하여 준다.
한 여자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영광"이었다 (고전 11.7).
주석가들은 마르다가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는 행위에 대해 종종 다음과 같은 관찰소견을 제시한다:
여성들에게 머리를 덮도록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유대의 관습을 어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관습은 결혼한 여자들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이기에, 마리아나 마르다 중에 어느 한 쪽이 결혼했는지가 불분명하다.
고대 자료의 성격을 감안할 때, 어느 한쪽이 결혼했다면 고대 작가가 언급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본다.
하지만 대신에 결코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리아와 마르다가 자신의 형제의 집에 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따라서 둘 중에 누구라도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결혼한 신분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듯이 보인다 (11:19?20).
이는 둘 모두가 결혼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는 이들 둘이 젊었다고 볼 수 있으며, 어쩌면 막 14:3의 나병환자 시몬은 사별한 아버지일 수도 있 것이다.
하지만 요한이 이 상황이나 주제와 관련이 없는 인물들이나 정보를 단순히 누락시키고 있기에, 우리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독신이든 기혼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여성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는데 사용한다.
정상적으로는 하인들만 주인의 발을 만졌던 때에다.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에 대한 겸비한 복종과 애정의 깊이가 얼만큼되었는지를 시사하여 준다.
연회 참석자들이 하인들의 머리나 머리카락에 묻은 과도한 물이나 기름을 닦아내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마리아는 예수에 대한 헌신의 표현으로서 이러한 하인의 역할을 스스로 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경건한 사람들은 여성과의 대화조차 반대하여 금기 사항으로 여겼다.
친척도 아닌 남녀 사이에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 너무 과도한 애정 행위를 공중 앞에 드러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마리아의 행동은 거기에 많은 구경꾼들이 있어다면 어쩌면 그들의 눈에는 비도덕적으로 보였 것이다.
기름부은 향유의 향기가 '집을 가득 채웠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집인 성막이나 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출 40:34?35, 왕상 8:10?11). 요 10.36에서 자신이 새로운 성전으로 성별되어 봉헌되었다는 예수의 말씀도 사려깊은 독자는 기억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Judas Iscariot (right), retiring from the Last Supper,
painting by Carl Bloch, late 19th century
D. 가룟 유다의 항거 (12:4?6)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려는 의도를 언제부터 품고 있었는가?
기름부은 이야기의 바로 이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12:4; 13:2), 그리 설득력이 없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의 이야기 세계에서, 이쯤 되면 예수에 대한 반대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누가 어떤 편에 서있는지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며(11:8), 예수를 따르는 대가가 분명해지고 있다 (11:16).
심지어 바울의 수난 서사조차도 배신 행위를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고전 11:23).
유다의 배신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지어내었을 법한 자료도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할 때, 예수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한 명의 스승으로서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지중해 사회는 수치와 명예를 지고의 사회적 가치로 여기는 문화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다.
배신자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공개적으로 가르치지 않을 때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워졌음을 시사한다.
Judas Iscariot (between 1886 and 1894) by James Tissot
향유가 매우 비쌌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계 수단으로는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쩌면 가보 (家寶)였을 가능성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막 14.5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향유의 가격이 보통 노동자의 1년치 임금에 거의 해당한다고 보고한다 (12.5의 3백 데나리온).
이 정도의 비용은 대부분 여성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듯하다.
어쩌면 마리아의 전체 유업을 대변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값 비싼 향유가 베다니 가문이 부유하다는 점을 시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마리아의 전재산이 아닐 수도 있다.
마리아의 헌신은 자신의 오빠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리아가 값 비싼 향유를 부은 원인이 마태와 마가에서는 다소 명백하지 않다.
전승은 제자들이 때때로 랍비의 기금으로 자금을 모아두었음을 가정한다.
In the Church of St John the Baptist, Yeovil,
one stained glass window depicts Judas with a black halo.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요한의 언급 (12.6)은 유다의 사악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요한은 여기서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을 위해 헬라어 단어 μ?λει를 채택한다.
이 동일한 단어가 10.13에서 이미 채택하였는데, 여기서 는 목자의 양떼를 돌보지 않는 삯꾼 목자들에게 사용한다.
이 문맥에서 양떼의 거짓 인도자들에게 "도둑"이란 칭호를 붙이고 있다 (10:1, 8, 10; 12:6).
마가는 여자의 값비싼 헌신(막 14:3?9)을 유다의 돈을 위한 배신(막 14:10?11)을 연속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대조한다.
반면에 요한은 동일한 대조를 하고 있음에도 다르게 표현하여 암시한다.
한편으로 전승에 표현되어 있었던 여성의 희생에 대한 구경꾼들의 전반적인 혐오감 을 위한 방관자에 대한 일반적인 불쾌감 (막 14:4?5; 참고. 마 26:8?9에서는 제자들)을 유다(요 12:9)에게 전가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유다의 배신 계획(12:4)과 과거 절도(12:6)를 언급한다.
유다는 돈을 보유하고 있었다 (12.6).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돈이다 (13.29).
당시에 유대 랍비들은 때때로 제자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할당하였다 (예: 4:8; Pesiq. Rab. 25:2).
복음 전승의 진정성에 대한 판별 기준으로 당혹감의 기준 (criterion of embarrassment)이 있다.
이 판별 기준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가 황당해서 독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전승은 창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예수가 유다에게 회계 담당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임명했다는 자체가 사실은 당확스럽다.
그런 내용이 복음서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기에, 진정성이 있는 역사적 전승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금을 잘못 집행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은 후대의 독자들이 예수를 신뢰하는데 있어서 스캔들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자를 임명한 자가 이제는 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한다면, 더더욱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E. 예수의 응답(요12:7?8)
예수는 마리아를 변호하며 응답한다 (12:7).
마리아는 왕의 기름부으심에 부합하는 기름부으심을 의도하였을 수도 있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 즉, 예루살렘에 이스라엘 왕으로 입성하는 맥락에 잘 들어 맞는다 (12:13?15).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신다 (19:19).
따라서 왕의 기름부음은 장례를 위한 기름부음과 결코 분리시킬 없다.
예수는 여기서 어떻게든 마리아의 행위를 왕의 장례와 연관시킨다.
사람들은 시신을 포함하여 악취를 억제하기 위해 향수를 사용했고, 종종 시신에다 기름을 부었다.
처형된 범죄자들이 매장되었을 때, 그들은 통상적으로는 기름부음을 거부 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름부음은 예수의 장례를 예견하였기에, 예수의 죽음에 앞서서 시행되었다 (마 26:12; 막 14:8).
요한의 어구는 19.39-40에 이뤄진 추가적인 기름부음으로 인해 다소 모호하다.
예수는 장례가 임박하다고 언급한다. 이 언급은 바로 직전의 문맥에서 주제사장들의 적대감으로 말마암아 시사하는 긴장감(11:57; 12:10)에 바로 맞아떨어진다.
유다 자신의 염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처럼 경건한 것이 아니었음을 요한은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그 이후에, 요한은 마가에서도 등장하는 동일한 전승을 인용한다 (막 14:7):
그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섬길 기회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육신을 입고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만 예수를 섬길 수 있지, 항상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12:8).
유대 사회는 빈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빈곤의 완화를 강조했다.
여기에서 예수는 신 15.11를 인유한다.
맥락상으로 보아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면, 모든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결코 그 땅에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문맥은 신명기에서든 요한복음에서든 어떠한 본문도 가난한 자들을 방치하는 것을 하용하지 않는다 (13:29; cf. 요일 3:17).
그러나 이 속담을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곧 떠나실 예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를 섬기는 것이 급선무 또는 우선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Crucifixion, circa 1957 by Roy de Maistre
부록:
마가판 기름부은 사건에서 복음과 기름부음과 장례의 연관성 (14.9)
예수가 자신을 이사야 53장의 종으로 보았다.
바로 이러한 이해로부터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일종의 속량하는 사건으로 스스로 짊어지셨다.
이에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 14.9에 따르면, 예수는 바로 이 수난 역사의 선포를 위하여, 사 53.1이 자신에게 제공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베다니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은 여자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는 다음과 확언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은 그녀를 기념하여 말하여지리라”.
기름부음을 받은 장면의 전체 역사는 사 52.13-53.12에 확고하게 연결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이 말씀에 등장한 ε?αγγ?λιον (참조. 사 53.1)도 역시 거기에 확고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
Anointing by the Gods
This is a reconstruction of an Ancient Egyptian image of Pharaoh's being Anointing by the Gods.
어려운 표현 (스하트. 상하게 하다. 사 52.14)은 막 14.1-9의 이야기에 그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쿰란 이사야 두루마리 (1QIsaa)에서와 같이, 막 14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는 동사 ??? (마사= “기름을 붓다”)와 연결되어있다.
마 6.16-18에서 예수는 일종의 언어의 유희를 통하여 사 52.14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키고서 이들 동사들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금식하는 자들에 권면한다.
자신들을 얼굴을 꼴사납게 만드는 (???? ????) 대신에, 얼굴에 기름을 발라야 한다 (????)고 하신다.
[마 6.16-18의 ?φαν?ζουσιν τ? πρ?σωπα (16절)라고 한다.
여기에 예수가 진술하고 있는 “얼굴에 기름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 52.14의 “손상한 얼굴” (???? ?????)에 대한 암시가 있다.
이에 덧붙여서, 예수는 동사 ???? (=‘보다’; 또는 사 52.14에 있는 ‘모습’ (???????).
그리고 동사 ???? (= φανε?σθαι = “자신을 보이게 하다,” 또는 사람 앞에서 “모습을 보이다”)
??????? (=πρ?σωπον)의 번역은 마 17장에 있는 변화산 사건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17.2).
이 장면도 마 9.2-8과 같이 사 53장에 영향을 받았다.
참조. Origen, Contra Celsum 1.55: 이 본문에는 “너의 얼굴은 사람들에 의하여 존중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구절이 네 번째 종의 노래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인용되어져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그리스도의 매장 : 아이콘과 그림
참을 수없는 고통에 더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끔찍한 갈증과 필사적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마 14.4에서 ?π?λεια는 가치가 엄청난 기름을 “허비하다” 또는 “낭비하다”를 의미한다.
이 헬라어 동사는 어근 ? + ????= “황폐하게 하다”를 함축한다.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 (“쓸모 없게 만든다”)는 쿰란에서와 같이 “무덤” 또는 “스올”로서 이해되어져 있는 듯 하다.
따라서 ? + ??? 는 “무덤에 누이는” (=?νταφιασμ??, “장사”) 행동을 그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가룟 유다는 기름을 붓는 것 (????)은 일종의 낭비하는 (????)행위로 믿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는 그 여인이 자신의 장례 (????→????)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막 14.8; 참조. 사 53.9).
요아킴 에레미아스는 기름부은 사건과 막 14.8의 말씀을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고려한다.
하지만, 14.9의 진정성은 부인한다 (NTT 284).
이는 오직 명사 ε?αγγ?λιον는 ?????가 아니라는 그의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 53.1을 참조할 때에, 이 용어는 사 52.14; 53.9, 10를 지향하고 있는 이 기름부음 받은 이야기의 의미심장한 결론이다:
베다니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일종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사랑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복음”이 전하여지는 한 그 속에서 전수 될 것이다 (14.9).
이는 이 복음의 주제가 사 53.1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적인 종의 구속적인 수난, 그의 죽음, 장사, 승귀가 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조. 사 53.5-12; 52.13 이하).
바로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어져야 할 것이다 (막 14.9).
이는 모든 땅의 구석구석이 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 52.10).
Andrea del Castagno, St Mark, 1442, Fresco, height of figure 176 cm
San Zaccaria, Venice
마가는 바로 이 복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복음은 최대 교회들이 성찬 기념을 할 때에 처음 선포되어졌다 (고전 11.26).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지상 예수의 메시지로 그 내용이 보충되어졌다.
마가는 “복음”이라는 이 단어를 자신의 작품 앞에 두는 머리말에 집어넣었다.
이는 원시 기독교/바울 케리그마도 이렇게 딱지를 붙여졌기 때문이다 (참조. 고전 15.1-5).
무엇보다도 사 53.1에 관한 탈굼에서도 이 단어는 수난을 받는 종에 관한 보고의 서론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체 (narrative)로 쓰여졌다.
이는 사 52.15에서 ‘말하는 것’ (??? = ?νηγγ?λη)과 사 53.8 (LXX, 참조. 행 8.32 이하)에 있는 διηγ?σεται는 그 종에 관한 전파의 양식으로 언급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미 그리스도 죽음의 선포가 주의 만찬의 의식에서 유월절 학가다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Giotto di Bondone (1266?1337), The Raising of Lazarus
5. 나사로에게 다가오는 위험 (12:9?11)
이 이야기(12:10?11)는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예수가 목숨의 위험을 무릎쓰고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유대에 갔다.
이제 나사로의 새로운 삶은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대가를 지불하도록 요구한다.
제자들을 위한 패러다임으로 이보다도 더 명확할 수 없다.
예수를 따르려는 자들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12:25, 27).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죽이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15:18, 16:2).
그러나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러한 순교로 인해 신앙은 쇄하지 않을 것이다.
나사로가 새로운 삶을 얻은 표적은 다른 사람들을 신앙에 이르도록 한다 (12:11; cf. 11:45, 48). <풍경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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