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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요한복음 7장 초막절

by 은총가득 2020. 11. 30.

7장에서 9장은 장막절을 배경으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7장은 초막절의 의미를 유대인과 갈등하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드러낸다.

특히 장막절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절기가 되어야 하며, 바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성령 강림으로 그 의미가 완성된다.

 

예수는 생수의 근원이며 세상의 빛은 물과 빛의 의식들을 완성하였다 (7.1-10.21).

이 절기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9/10월에 순례를 와서 8일 동안 포도 추수를 기념하면서 축제를 벌인다.

비를 위한 기원 기도가 그 특징이다.

매일 실로암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서 성전에 물을 붓는 식으로 축제 행렬이 진행된다.

이 축제 행렬에서, 성전의 여인들의 뜰에는 엄청난 횃불을 켜서 빛을 비춘다.

따라서 절기의 주제는 물과 빛이다.

 

(a) 그의 형제들의 요구를 거절한 예수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비밀스럽게 예루살렘으로 올라온다 (7.1-10).

(b) 그에 관한 생각은 사람들을 분리시킨다 (7.11-15):

요한의 또 다른 주제

-- 예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심판을 하도록 만든다.

(c) 7.16-36에서 유대인들과의 대화는 모세 율법을 범한 것에 관한 이전의 적대감을 상기시켜준다.

결국은 그가 더 이상 오래 머물지 않고, 그를 보내신 자에게로 간다는 경고에서 절정을 이룬다.

(d) 7.37-39에서 장막절의 물의 주제를 완성시키는 것이 절기의 마지막 날에 전면에 부상한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로다 하고 선포한다.

이는 그가 영화로워지실 때에 받으실 성령을 가리킨다 (19.34).

 

예수와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된다.

 

배경:

초막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신약성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단락을 초막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식과 연결시켜 왔다 (cf. 7:2).

이 축제의 중심에는 실로암 못에서 성전까지 이어지는 행렬을 포함하여, 유명한 "물 길어붓기" 의식이 있었다.

이 행렬은 제사장들과 사람들이 성전으로 행진하여 들어간다.

그 행렬이 끝나면 제단 밑바닥에 물과 포도주를 쏟아 붓는 것이었다.

 

 

이 의식은 아마도 마카비 시대에 제정되었을 것이다.

전승은 이 의식이 힐렐 시대에 이미 표준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Abot R. Nat. 27, §55B. 아모라임 시대 라비문헌은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모세 시대부터 유래하였고 (b. MoAed Qat. 3b; cf. Zebah. 110b; p. Ro? Ha?. 1:3, §43; Sukkah 4:6, §1), 룻의 시대에 실행되었다 (Ruth Rab. 4:8)고 주장한다.

70년 전에 디아스포라에는 물 붓기 의식이 확실히 알려져 있었다.

디아스포라 순례자들은 그 축제에서 행해지는 행사의 하이라이트로서 이 의식을 남아있던 지역공동체에 보고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관광 산업은 이러한 보고서의 선전을 촉진할 것이다.

예를 들어, 키프로스에서 발견된 기념품 물주전자 (amphorisk)가 있다 (CPJ 3:5?6, §452).

(Engle, Anita., "An amphorisk of the second temple period",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109.2. 1977: 117-122).

아마도 예루살렘의 축제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물깃기 의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랍비 문헌은 이 축제에 대한 기억들이 옛 성전과 그 의식을 계속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 절기가 얼마 남았는지를 다시 세고있는 후대의 그림도 있다.

물깃기 의식의 분위기는 전체 축제와 마찬가지로 순례자들이 그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것은 축제의 하나였다.

유대인들은 이른 시기에 시작되는 초막절을 즐거움과 연관시켰다.

(고대 절기는 보통 축제의 요소가 포함되었다.

일부 이교도 철학자들은 그러한 민감한 요소들은 단지 대중들이 참여하도록 양보한 결과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일반적으로 잔치에 관한 이러한 즐거움은 특히 물깃기와 행렬에도 적용되었다.

아마도 물을 길어 올리는 의식의 고대 목적은 비를 확보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절기는 우기 바로 직전에 지켜졌다.

비는 고대인의 삶에 본질적으로 필수적이었다.

후대 유대인의 전승은 아마도 비가 내리는데 신적 기적에 의존하였음을 표현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정서를 보고하고 있는 듯하다.

 

 

죄가 가뭄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듯이 (신 28:48),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면 비가 온다고 약속했다 (레 26:4; 신 28:12).

일부 유대 교사들은 또한 하나님을 설득하여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특히 경건한 사람들로 여겼다.

그러나 어떤 전승은 성전을 어떻게 섬기느냐에 따라 비가 내린다고 하고, 어떤 전통은 특히 초막절과 비를 연결시켰다.

비에 대한 기도는 이 축제 동안 중요한 전통이었다.

후대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축제 동안 비에 관한 결정을 내리셨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잔치에서 물을 붓는 양에 따라서 내리는 비의 양이 결정된다고 믿게 되었다.

 

스테파노스 미할리오스는 요한 문헌에서 시간의 사용법을 살펴보고, 이 개념에 대한 요한의 이해에 다니엘적 종말론이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할리오스는 '고난의 시간' (time of distress)과 '그 시간'과 같은 표현 내에서 구약의 종말론적 시간의 개념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개념은 또한 다니엘서에 나타나며, 다니엘서에서 발견된 종말론적 시간과 관련된다.

미할리오스는 유대 전승 내에서조차도 다니엘의 종말론적 시간의 성취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다니엘의 '마지막 시간' 사건을 인유하는 맥락 내에서 종말론적 시간이 유다 문학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할리오스는 그 다음으로 요한의 종말론적 표현들과 주제들을 검토한다. 단어 '시간'이 등장할 때마다, 명확한 암시의 증거가 발견되는데, 이들 표현들은 다니엘에서 그 출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요한 예수에게는 시간이란 용어의 사용은 다니엘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고난과 부활의 최종 시간이 도래했음을 의미한다고 결론짓는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the hour of me is not yet at hand).

(7.1-9)

예수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신다.

유대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신다.

이는 유다인들 (?ουδα?ο?)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 예수를 유대 지도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7.23)

자기 소명이 분명한 사람은 시도때도없이 덤비지 않는다.

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아는 사람이다.

 

Christ expiring on the cross

Peter Paul Rubens, Crucifixion, c.1618-1620.

Boston Museum of Fine Art patrons Rose-Marie and Eijk van Otterloo

예수에게 "때" (καιρ??)는 무엇인가?

요한복음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 예수는 반복적으로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강조하여 주장한다 (2.4; 7.6, 8; 7.30=8.20).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할 때든지, 체포하려고 시도할 때에, 이러한 시도들이 무산된다 (6.15; 7.44; 8.59, 10.39; 11.53).

또한 자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반복하여 물러간다 (6.15; 10.40-42; 11.8, 54).

 

그런데 예수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33)고 엄숙하게 선포한다.

이 때부터 어조의 전환이 극적으로 이뤄진다.

고별 담화는 예수의 "때"가 이르렀다는 확신을 반영한다 (13.1; 16.32; 17.1; 참고 16.21).

가나 혼인 잔치에서 표적을 베푸심으로 시작된 예수의 시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러면 예수의 "때"는 무엇을 말하는가?

십자가에서 죽음의 때이다.

그 때에 예수는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외친다 (19.30; 참고 17.4).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세상의 죄를 속죄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탄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시간이다.

복음서 전체는 이 순간에 절정에 도달한다.

여기서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

선한 목자이다.

세상의 구세주이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의 민감한 시간 감각은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부각시킨다.

독생자이신 예수는 이 때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의 사람으로 사셨다.

아버지와 친밀함을 내내 유지하며, 그 분께 전적으로 의존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조차도 그 분의 시간에 따라 맡끼셨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인간은 시간을 아는 지혜를 배운다.

그 분이 부르신 소명을 알고 그 뜻을 헤아리며, 묵묵히 사명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완수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수 있다 (17.4).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이 가까이왔다.

광관복음과는 달리 요한은 예수가 유대 명절을 착실하게 준수하는 듯이 묘사하고 있다.

마치 절기 때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듯하다.

유대인 남자는 일년에 세번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야하는 의무가 있다.

물론 율법이 정한 의무이기에 모두가 철저하게 준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건한 유대인들은 가능한 한 지키려고 순례의 길을 떠났다.

 

초막절은 어떤 절기인가?

레 23:33-44; 신 16:13-15; 민 29:12-39

초막절 (장막절과 수장절)은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함께 구약성경에 나오는 3대 절기 중 하나이다 (출 34:22).

레위기 23:43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절을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후 40년 광야 생활 중에 초막에 거주한 것을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유대력으로 티쉬레이 달(Tishrei;태양력의 9~10월에 해당)의 15일(추분일에 가까운 보름달)부터 1주간 지켜졌다.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열렸다.

레위기에 23:34, 39에 따르면,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7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8째날에도 안식하라고 명한다.

초막절의 기원은 광야에서 성막 건축 완공에서 비롯되었다.

유대력 7월 10일에 시내산에서 내려 온 모세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지을 재료를 풍성히 모으게 되었다.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던 날부터 모든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과 성막 지을 문제를 다 설명한다.

그후에 그 달 15일부터 7일간 성막 지을 재료인 금, 은, 포목, 목재 등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드려 성막을 짓게 하였다.

여호와의 뜻을 따라 성막 지을 재료를 제조하여 바친 그 7일간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대대로 이 날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초막절을 정하여 지키게 하셨다.

 

 

레 23:39과 신 16:13에 따르면 토지의 소산 거두기를 마치고 추수한 것을 저장하는 것을 마치는 때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수콧이라 부르며, 추분과 가까운 음력 대보름 저녁부터 초막절을 시작한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추석과 격년으로 날짜가 거의 겹친다.다른 격년에는 1달 차이가 난다.

농사력이 끝나는 가을에 지켜졌다.

초막절은 어떤 절기인가?

레 23:33-44; 신 16:13-15; 민 29:12-39

초막절 (장막절과 수장절)은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함께 구약성경에 나오는 3대 절기 중 하나이다 (출 34:22).

레위기 23:43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절을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후 40년 광야 생활 중에 초막에 거주한 것을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유대력으로 티쉬레이 달(Tishrei;태양력의 9~10월에 해당)의 15일(추분일에 가까운 보름달)부터 1주간 지켜졌다.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열렸다.

레위기에 23:34, 39에 따르면,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7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8째날에도 안식하라고 명한다.

초막절의 기원은 광야에서 성막 건축 완공에서 비롯되었다.

유대력 7월 10일에 시내산에서 내려 온 모세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지을 재료를 풍성히 모으게 되었다.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던 날부터 모든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과 성막 지을 문제를 다 설명한다.

그후에 그 달 15일부터 7일간 성막 지을 재료인 금, 은, 포목, 목재 등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드려 성막을 짓게 하였다.

여호와의 뜻을 따라 성막 지을 재료를 제조하여 바친 그 7일간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대대로 이 날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초막절을 정하여 지키게 하셨다.

 

 

레 23:39과 신 16:13에 따르면 토지의 소산 거두기를 마치고 추수한 것을 저장하는 것을 마치는 때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수콧이라 부르며, 추분과 가까운 음력 대보름 저녁부터 초막절을 시작한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추석과 격년으로 날짜가 거의 겹친다.다른 격년에는 1달 차이가 난다.

농사력이 끝나는 가을에 지켜졌다.

일년 중 '마지막' 절기이며, '큰' 절기로 여겼다.

 

회당에서는 전도서가 낭독되고, 성전에서는 성대한 희생제사가 연일 행해졌다.

또한 절기가 끝나는 날에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행해졌다.

,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매일 제단에 붓는 행사가 행해졌다(요한복음 7:37~38).

 

초막절은 유대 신년과 대속죄일에 이어서 열리는 마지막 절기이자 큰 절기이다.

이때에 대회가 열린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면, 당연히 이 절기에 참여하여 자신을 증거할 기회이다.

하지만 예수는 머뭇거린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5.18).

예수는 무모하게 십자가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아니다.

이땅에서 해야할 표적과 일들이 남아있다.

 

여기서 예수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반응을 일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 예수가 자신이 생수의 근원임을 선포하는지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요한의 문학적 기법이다.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믿지 않는다

(요 7.1-9)

예수의 형제들이 비아냥거린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

 

고대 사회에 철학자의 이상은 παρρησ?α (parrh?sia)이다.

"담대하고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거침이 없이 진리를 말한다"는 뜻이다.

 

παρρησια (파레시아)

 

"παρρησια" 는 신약 성경에 31번 사용된다.거침없이 말하다.남김없이 다 말하다.두려움이...

blog.naver.com

Parrhesia - Wikipedia

Parrhes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For the moth genus, see Parrhesia (moth) . For the region of Ancient Greece, see Parrhasia (Arcadia) . For the journal, see Parrhesia: A Journal of Critical Philosophy . In rhetoric , parrhesia is a figure of speech described as: "to speak candidly or...

en.wikipedia.org

 

숨어서 행동하는 사람은 감출 것이 많은 사람이다.

(Sophocles El. 1493?1494; Dionysius of Halicarnassus R.A. 8.78.3; Livy 3.36.2)

이단들은 비밀리에 말한다.

비록 랍비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비밀리에 전수하였지만, 율법은 공개적으로 가르쳤다 (Sipre Deut. 13:7).?

그런데 예수는 숨어 지낸다.

왜 그럴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혜이시다.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1-8

예루살렘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아니한다

(요 7.10-36, )

형제들에게 말한 바와는 달리, 예수는 예루살렘에 은밀하게 가신다.

예수에 대한 여론이 분분했다.

"좋은 사람이다." (12절)

"무리를 미혹한다." (12절)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15절)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20절)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6절)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31절)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36절)

그 선지자라 (40절)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1절)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46절)

 

 

이러한 소문과 오해에 대하여 예수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1)

예수는 자신이 무리를 미혹한다는 말 (신 13장의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에 14-19절에서 대응한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복속이 자신이 진정한 선지자라는 증거이다

 

예수가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또 다른 선지자의 표적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농민은 대중적 차원에서 더 신뢰할 수 있는 예언자일 수 있다(Josephus War 6.301 on Joshua ben Anania).

그러나 엘리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트들은 심지어 꾸밈이 없는 외적 모습에 근거하여 배우지 않은 사람을 그릇되게 생각할 수도 있다 (Philostratus Vit. soph. 1.24.529)

정직한 평민이 물론 부정직한 수사가 (Aeschines Timarchus 31)보다 나았다.'

하지만, 인물을 찬사하는 전기들은 종종 교육을 칭찬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핍은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Menander Rudor Treatise 2.371.17?372.2를 인용한 Malina and Rohrbaugh, John, 152?53).

일부 수사학자들이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Plutarch Demosthenes 8.3?4; 9.3).

하지만 즉석에서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군중의 놀라움의 근거는 아니다 (Kennedy, Classical Rhetoric, 103).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12살까지 회당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다.

이것은 의무교육과 같았다.

그 이상은 자율적이다.

그 이상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성인이 되어서 율법 공부를 전문적으로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당시에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힐렐과 삼마이 학파이다.

이들 학교에서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승과 해석을 전수하여 교육시켜다.

이런 학교에서 배출된 사람들이 서기관과 율법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주석가들이 교육을 율법 공부로 간주하지만, 수사학이나 직업을 위한 도제 공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후대의 현자들은 어쨌든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현자 학교의 전통 해석적 논점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배우지 못한 자들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예수가 어떤 식으로든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은 것은 관객의 기대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수사 기법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교사를 위한 학교에서 가르치는 법을 배우지 않으셨다면, 그는 자신의 지혜로 말했을까?

현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독창성이 없음을 자부했다.

 

아무튼 무엇보다도 예수는 스승인 아버지(7:16; cf) 밑에 '앉았다'고 응답한다 (시 119:99).

예수는 그의 아버지를 '듣고' '보고'하여 복종하고 모방하였다(5:19?20, 30, 8:26, 38, 40, 12:49?50).

한 사람의 아버지는 쉐마, 토라,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여기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그들의 '교육'이라는 용어인 μανθ?νω (7:15)는 6.45에 등장한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종말론적 잔재를 이야기한다.

많은 고대 사상가들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좋다.

하지만, 타고난 덕목에서 배우는 것은 더 낫다고 생각했다 (cf. Philo. Abraham 6).

 

(2)

예수는 또한 자신을 죽으려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적대감에 대하여 매우 논쟁적으로 대응한다.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는데, 너희도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지 않는가?

안식일에 사람을 온전하게 치유한 것으로 왜 분노하느냐?

 

(3) 예수는 자신의 진정한 신원이 누구인가에 대한 오해에 대응한다.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 (7.52), 요셉의 아들 (42)과 같은 출신배경으로 예수를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보냄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3)

예수는 자신의 때가 되면 죽게되니, 굳이 수고해서 잡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7.33).

 

초막절의 진정한 의미의 성취: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4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37. εν δε τη εσχατη ημερα τη μεγαλη της εορτης ειστηκει ο ιησους και εκραξεν λεγων εαν τις διψα ερχεσθω προς με και πινετω

38. ο πιστευων εις εμε καθως ειπεν η γραφη ποταμοι εκ της κοιλιας αυτου ρευσουσιν υδατος ζωντος
39. τουτο δε ειπεν περι του πνευματος ου εμελλον λαμβανειν οι πιστευοντες εις αυτον ουπω γαρ ην πνευμα αγιον οτι ο ιησους ουδεπω εδοξασθη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혜는 자신을 음식과 음료로 바친다 (시락 24:21).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증명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영을 쏟아 붓겠다고 제안한다 (잠 1.23).

초기 기독교인들은 요엘의 약속 (2.28-29)을 미드라쉬 해석을 통하여 이 지혜의 약속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행 2.17?18, 33, 10.45; 롬 5.5; 딛 3:5?6).

후대의 랍비들은 자연스럽게 토라를 물과 동일시했다.

(m. Abot 1:4; 2:8; Mek. Vay. 1:74ff.; Bah. 5:99; Sipre Deut. 48.2.7; 306.19.1; 306.22?25; Abot

R. Nat. 18 A; cf. b. TaAan. 7a; B. Qam. 17a, 82a; Gen. Rab. 41:9, 54:1, 69:5, 70:8?9, 84:16, 97:3; Exod.

Rab. 31:3 (지혜); 47:5; Song Rab. 1:2, §3; 우물로서 Sipre Deut. 48.2.7; Pesiq. Rab Kah. 24:9; 나쁜 물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경우, m. Abot 1:11; Sipre Deut. 48.2.5.)

 

성령이 육신이 된 말씀 (1:14?18)의 현존을 계속 이어간다.

그러기에 (14:17?18, 23), 요한이 성령을 물로 묘사한다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사실 후대 랍비들이 토라를 물로 강조하는 것보다 성경 예언자들이 더 앞서서 말해고 있다

(사 44:3; 겔 36:25?27; 요엘 2:28 참조).

후기 유대 자료들도 바로 이 절기로 예수의 이미지가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제시한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야기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명시적 설명(7:39)을 듣고 있는 독자들의 장점을 공유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

 

이 축제에서 물을 길어 올리기 또한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 되었다.

주석가들이 흔히 언급하듯이, 그 전승은 기원전 3세기 초보다 늦지 않다.

일부는 또한 물깃기와 성령을 창세기 29장에 근거하여 야곱의 우물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참고. 요 4.12-14)

이들 설명들은 요한의 시대보다 상당히 늦다.

하지만 요한의 요점이 초기 유대 환경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더 자신 있게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들 설명들은 초기의 전승을 반영할지도 모른다.

예수는 반복적으로 전통적인 물 의식보다 위대하신 분으로 등장한다 (1:31?33; 2:6; 3:5; 4:14; 5:2; 6:35; 9:7).

현존하는 복음서 중에서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이 흘러나왔다고 보고한다 (19:34).

만일 계시록이 복음서와 같은 공동체에서 유래하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의 강물이 흐른다고 선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 22:1).

계 22장 1절은 아마도 여기에서 기술된 요한 언어의 종말론적 중요성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듯하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22장 17절에서 현재적 실현에도 종말론적 언어를 적용하고 있다.

 

예수는 7.38에서 어떤 성경을 언급하고 있는가?

예수는 "성경에 이른 바와 같다"고 선언한다.

이때 다른 유대 교사들이 성경으로 자신의 권위를 부열하듯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본문(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일부 성경 낭독 (lectionary) 이론이 일반적으로 제4복음서와 특정하게는 이 구절의 해석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 후대 랍비들은 70년 이전부터 이 축제에 사용된 공통 성경 읽기 목록을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절기에서 토라를 공개적으로 읽는 것은 적어도 느헤미야 8:1?18에 기록한 사례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느헤미야 본문에 수문 (8:1)과 연관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랍비 전승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요한의 청중 중 몇몇 나이든 사람들은 우리의 본문이 의존하고 있는 70년 이전의 전승을 상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요한 공동체가 전통적인 축제들을 계속 기념하였다면 이들 전승들을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요한 복음은 이들 전승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적어도 전제하고 있다.)

 

예언서에서 초막절 축제에 대해 논의하는 유일한 본문들은 호세아 12:9와 스가랴 14.16-21뿐이다.

호세아 12:9는 σκηνοπηγ?α (초막절)를 사용하지 않고, 문맥상으로 즐거운 기념축제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는다.

스가랴 14:16?21은 순례의 본문이며 이스라엘이 열방에 의기양양하게 높임을 받는 승전가이다.

 

 

그러므로 초막절 절기를 위한 후대의 성구가 바로 이 성경 읽기를 포함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후기 성경 낭독 전통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요한에 보고된 사건의 배후에 있는 동일한 해석 노선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그 전통의 후대성을 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선험적인 이유로, 초막절 절기의 성경 낭독에 스가랴 14장이 포함되어 있어야야 할 가능성이 있다.

사실 탄나임 유대교 자료들은 이러한 기대를 확인하여 주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초막]절에 물을 길러와서 붓기가 요구되는데, 그리하여 이로 인하여 비를 내리게 하는 복을 있으리라.

그리고 이 땅의 어느 가족이라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만군의 주이신 왕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애굽의 가족이 올라가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들에게 [주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가지 않는 열방에 해를 입히시는 전염병이 닥칠게 될 것이다] (슥 14.17?18)

의미심장하게도, 스가랴의 선행하는 문맥은 이스라엘을 위해 평화와 축복의 종말론적 시대를 시작하게 될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즉, 종말론적 시간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갈 것이다 (슥 14.8-9).

 

Adolf Behrman (1876 - 1942)

Talmud Readers

From the collections of Jewish Historical Institute in Warsaw

이 본문은 자연스럽게 다른 수많은 본문들과 미드라쉬 기법을 사용하여 연관을 맺었을 것이다.

다른 본문들로는 이사야 44:3과 요엘 2:28 (MT 3:1)과 같은 본문이다.

이들 본문들은 하나님의 영이 물로 쏟아져 나온다고 기술한다.

또한 특히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오는 본문들도 이에 해당된다 (요엘 3.18)

그렇지만 이스겔 47장과 가장 밀접한 친화도를 나타낸다.

겔 47장은 탄나임 시대에 초막절을 논의할 때에 뜻밖에도 등장한다: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와서 (겔 47:1?2), 온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깊은 강이 된다 (3-12절).

토세프타는 에스겔 47장을 강해하면서, 초막절 축제에서 물을 붓는 병으로 예시되는 미래에 적용한다.

왜 "수문이라고 불리는가 [M. Sukkah 4:9]?

왜냐하면 그 문을 통해 그들은 축제의 물 붓기를 하기 위해 한 개의 물 병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랍비 야곱의 아들 엘리제르가 말한다.

"그것을 통해 물이 [남쪽으로] 나온다 (Ez. 47:2).

 

 

이것은 그들이 병의 물처럼 바깥쪽으로 흐르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의 문지방의 남쪽 끝 아래에서 흘러 내려오게 되어 있다.

겔 47장 10절에서 토세프타의 선언은 이렇다:

"이것은 창조 때에 창조된 모든 물이 이 작은 물병의 입으로부터 나가도록 작정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초막절과 관련된 에스겔 47장의 물은 다음과 같이 정화시킬 것이다:

"죄와 월경으로 인한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는 물의 근원은 단 하나가 있을 것이다."

에스겔의 새로운 성전 이미지의 사용은 아마도 지금까지 실현되어왔던 것보다 제4 복음서에 더 큰 의미 심장한 듯하다.

 

 

요한은 아버지의 집을 세 번 말한다 (2.16, 8.35, 14.2).

첫 번째 본문은 성전을 가리킨 다음, 그리스도의 부활하는 몸의 관점에서 성전을 정의한다.

두 번째 본문은 아버지의 가족을 가리키며, 노예가 아닌 오직 후손만이 그곳에서 영구적인 유업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 번째 본문은 뒤따르는 문백과 선행하여 말한 집으로 설명되기까지는 모호하다는 점이 명백하다.

그 집은 성령을 통해 성도들이 예수가 현존하는 가운데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에스겔 46:16-17은 왕자의 토지 상속이 그의 종들이 아닌 그의 후손들에게만 영구히 이루어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DP더욱이, 오직 더럽혀지지 않은 사역자들만이 하나님의 집, 즉 성전에서 자리를 사실상 차지할 것이다 (44:9?16; cf. 48:11).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다 (43:7, 9, 48:35).

종말론적 도시는 정사각형으로 구성되어 거룩하게 할당된다 (겔 48:16, 20).

이것은 아마도 계 21:16에서 새 예루살렘의 모양에도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하나님의 현존 장소인 지성소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는 새 성전이다.

이곳에서 신자들과 하나님이 서로의 현존을 체험하는데, 이는 요한의 실현된 종말론이다 (요 14장; 참고. 계 21.3, 22).

그 새 성전에 대한 요한의 구상 중 일부는 분명히 에스겔에서 파생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물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영화롭게 된 예수부터 물이 흘러는 이유가 있다 (19:34; cf. 계 22.1).

요한은 절기 마지막 날을 "마지막 날, 위대한 날"이라고 언급한다.

이 언급은 요한의 전형적인 이중 의미 (double entendres)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종말론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마지막 날"은 초막절의 맥락에서도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특히 그날의 성서 낭독에 관한 일반적인 제안이 어느 정도 장점이 있다면 중요하다 (전승의 연대가 불확실하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세계에 직접적으로 적용한다.

절기의 "마지막" 날은 축제의 일곱 번째 날을 언급하고 있을 수 있다.

이는 요한이 "큰" 날 (즉, 가장 위대한 날)을 말하고 있으며, 8일은 물 붓기와 춤추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제안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여덟째 날은 처음 일곱째 날과 달랐다.

그러나 이 날도 또한 안식일이기도 하였고 (cf. 9:14, 레 23:36, 민 29:35), 이 기간에는 축제 기간이 8일 동안 열렸다 (2Macc 10:6).

게다가, 요한은 축제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예수를 체포하지 않았다음을 부분적으로 지적하는 "마지막" 날로 언급하고 있을 수 있다.

"큰" 날(7:37)은 그날이 가진 종교적 의미를 가리킨다 (cf. 19:31).

 

요한이 7.38에서 "성경"을 인유한 것은 학자들로 하여금 그 정확한 출처를 찾도록 만들어왔다.

몇몇은 민수기에 있는 우물을 관찰하였는데, 이는 또한 초막절 물병과 관련이 있었다.

이 잔치 동안 바위에서 나온 물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점은 느 9.15, 19.20에서 분명이 알 수 있다.

이들 느헤미야 본문들에서 이러한 사건들은 초막절 맥락에서 회상되었다 (느 8.18).

우물은 후기 유대 전승에서 두드러지게 묘사되어 있다.

예., 첫번째 안식일 저녁에 창조되었다 (b. Pesah. 54a);

심연에서 나온다 (Tg. Neof. 1 on Num 21:6; Tg. Neof. 1 on Deut 32:10)

또는 이스라엘과 같이 여행하였다

(L.A.B. 11:15; t. Sukkah 3:11; b. ?abb. 35a; Num. Rab. 19:36; Tg. Neof. 1 on Deut 2:6; 1 Cor 10:4).

Sib. Or. 3.439?440 은 아시아로부토 인유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성경 출처가 가능하다.

반석에서 물을 내었다는 모세의 이야기는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반석은 성전에 보관되어 있었다 (Josephus Ant. 3.38에는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요세푸스는 모세가 이로부터 흘러아오는 "강"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Ant. 3.36).]

이 우물은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은사 목록에서 만나와 영광의 구름과 함께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슥 14장이나 겔 47이 더 유력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요한이 에스겔에 있는 새 성전 자료를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요한이 다른 곳에서 다양한 문헌을 미드라쉬 기법으로 혼합하고 있기에, 여기서도 그 관행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설득력이 있다.

 

누구에게서 물이 흘러나오는가?

이 구절에서 강물이 누구에게 흘러나오는지를 묻지 않고서는, 요한의 인용문이나 성서의 본문을 논증할 수 없다.

여기서 생수의 근원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를 믿는 사람인가?

신자의 '배'에서 물이 흐른다는 견해에 대한 성경적 선례를 찾는 것은 어렵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가슴 속에 있는 사람의 이성적인 부분을 그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요 4.14를 제외하면 유대나 기독교 출처에서는 거의 전례가 없다.

 

"배" (κοιλ?α)의 배후에 있는 셈어 원문 에 대한 논의는 관찰 중에 있는 구약 본문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출처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법은 요한의 이상적인 청중이 히브리어나 아람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해야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히브리어를 알고 한 사람이 배열한 절충된 본문을 읽는 것은 히브리어를 읽는 것과 같지 않다.

그렇기에 이 방법은 성경 구절이나 요한이 참고한 문헌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1) 신자

요 7:37?38의 물이 신자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 요소들에 근거하여 논증한다.

대명사 α?το?의 선행사.

4.14과의 병행

7:39에서 받는 것에 대한 강조.

반대 견해의 병행주의의 약점,

그리고 아마도 가장 강력한 요점으로 가장 오래된 구두점이 찍힌 필사본들에 있는 구두점.

이들 근거들은 이러한 해석 전통을 선호한다는 점을 반영한다.

 

(2) 예수

다른 학자들은 신자 대신에 예수로부터 물이 흐른다고 읽기에 더 쉬운 구두점을 선호한다.

그들은 반대되는 견해에 대한 교부들의 지지에 도전하여, 병행주의, 문법, 양식적인 고려로부터 논증한다.

(a) 요한복음이 성경을 신자에게 적용하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예수에게 적용한다.

이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기독론적 해석을 위해 성경을 인용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b) 요한의 지혜 그리스도론

(요 1:1?18; 목마른 사람은 지혜에게로 와야만 한다는 잠 9:5; 시락 24:19?21; 51:23?24; cf. 요한 4:14; 6:35);

 

(3) 문맥: 요한은 성도들을 성령의 받는 사람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가 성령의 원천임을 암시한다 (39절).

이 논증은 또한 왜 예수가 영화롭게 되기 이전에 성령이 을 활동할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19:34의 특정 사건이 여기서 고려 중에 있는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승귀 이후에야 충분히 이해한다 (2:22, 14:26).

 

델포이의 세계의 배꼽

 

많은 초기 그리스인들과 로마 후계자들은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 즉 배꼽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러한 전통에 반박하여 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제단 아래의 기초석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단언했을 것이다.

이 중심으로부터 생수의 강을 흘러 전 세계에 물을 공급할 것이다.

그리고 요한에서는 예수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 된다(2:19?21).

예수는 산산조각이 난 주춧돌이 된다.

여기서 생수의 강물을 흘러나온다.

이 약속은 예수가 "영화롭게"된 이후에 성취된다 (7:39; cf. 12:16; 13:31).

하지만, 성령이 그 이후에는 그의 영광을 계속 상세하게 설명하여 준다 (16.14).

신자들은 20:22에서 성령을 "받는다" (7:39).

이 구절은 요한 성령론이 절정에 도달하는 구절의 일부이다 (20:19?23).

 

상징적인 의미에서 19.34에서 예수의 복부에서 물이 흘러 나와 동일한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물이 흐른다고 주장하지만, 배경은 몇 가지 측면에서 토론의 물꼬를 튼다.

물은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여기서는 새 성전을 대변한다고 해도, 문제는 그리 없다.

예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기초석으로 남아있다 (엡 2:20; 벧전 2:6?7).

또한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위한 생수의 근원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 예수가 영광을 받으시지 않으셨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장하는 승귀를 다 포괄하여 이해하는 편이 좋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가 영광을 받으신 후에 일어난다.

아직은 제자들에게는 성령이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고별담화에서 보혜사 성령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말씀하신다.

 

전체 문맥으로 보아서, 신자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

즉 배를 배꼽으로 본다면, 세계의 중심이다.

성령이 강림한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지리적인 자리로 보기 싶다.

하지만 모든 성도가 성령이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모든 성도들이 있는 곳마다 성령, 생수의 상이 흘러넘칠 것이다.

그러면 에스겔 선지자가 47장에 꿈꾸었던 이상이 실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반응

(요 7.45-52)

무리들에게서 예수의 말씀과 선언을 통해 분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완강하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

찾아 보라 (율법을 공부하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이러한 견해는 고대 지중해에 전형적인 지배 계층의 시각을 반영한다.

대중의 의견을 무시한다.

혈연, 지연, 학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귀족 이데올로기:

지혜로운 자를 가장 설득하지 못하는 자가 대중을 가장 많이 설득한다.

 

대중은 현혹되기 쉽고 어리석다.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는 견해는 바리새 지도자들이 성셩을 모른다는 반증이다.

요나는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갈릴리의 가드헤벨 출신이다 (왕하 14:25).

후대의 몇몇 랍비들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족속 (b. Sukkah 27b),

그리고 심지어 모든 도성 (Seder Olam Rabba 21)에서 일어난다고 확증한다.

1세기에 갈릴리는 아마도 구약으로 투사하고 있는 듯하다

(1세기 중반의 것으로 주장되는 솔로몬의 편지, Eupolemus, in Eusebius Praep. ev. 9.33).

 

요한은 유대 지도자들의 무지를 일부러 썰쩍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풍경지기>

 

많은 초기 그리스인들과 로마 후계자들은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 즉 배꼽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러한 전통에 반박하여 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제단 아래의 기초석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단언했을 것이다.

이 중심으로부터 생수의 강을 흘러 전 세계에 물을 공급할 것이다.

그리고 요한에서는 예수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 된다(2:19?21).

예수는 산산조각이 난 주춧돌이 된다.

여기서 생수의 강물을 흘러나온다.

이 약속은 예수가 "영화롭게"된 이후에 성취된다 (7:39; cf. 12:16; 13:31).

하지만, 성령이 그 이후에는 그의 영광을 계속 상세하게 설명하여 준다 (16.14).

신자들은 20:22에서 성령을 "받는다" (7:39).

이 구절은 요한 성령론이 절정에 도달하는 구절의 일부이다 (20:19-23).

<풍경지기>

 

37. εν δε τη εσχατη ημερα τη μεγαλη της εορτης ειστηκει ο ιησους και εκραξεν λεγων εαν τις διψα ερχεσθω προς με και πινετω
38. ο πιστευων εις εμε καθως ειπεν η γραφη ποταμοι εκ της κοιλιας αυτου ρευσουσιν υδατος ζωντος
39. τουτο δε ειπεν περι του πνευματος ου εμελλον λαμβανειν οι πιστευοντες εις αυτον ουπω γαρ ην πνευμα αγιον οτι ο ιησους ουδεπω εδοξασθ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