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선재하신 신적 권세
요한복음8장 진리로 자유케 하시는 주
모세의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을 판단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판단하는 권세를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알리고 그들도 역시 판단받을 운명에 처한 자인 것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선재하신 신적 권세로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세상을 판단할 신적 판단자이심을 계시하신다.
1. 간음한 여인(1-11절)
1) 유대 지도자들의 시험
1절의 '감람산으로 가시다'는 밤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물러나심을 말한다. 감람산은 우리 주님께서 선호하셨던 곳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2절의 '들어오시니'와 '나아오는지라'는 계속을 나타내는 시제이다. 3절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공관복음에서 매우 자주 발견되는 결합어이다. 두 용어는 같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기관은 반드시 바리새인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4절의 '선생이여'는 공손함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도록 요구받는 문맥에서 적절한 말이다. '현장에서'는 그 여자가 잡혔다는 말은 그 일에 있어서 여자쪽에 더 강조점을 표현하는 말이다. 5절의 '이러한 여자를'은 서시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본문을 약간 조작한 것을 나타낸다. 레20:10신22,22에서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죽이도록 말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이 말하고 있는 것에 더 정의를 내린다. 6절의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조건을 얻고자 함이라'는 그들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혀 준다. 그들은 조언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
2) 예수의 승리와 용서하심
7절의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는 고소자들이 예수님의 침묵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호되게 다구치는 것을 나타낸다. 8절의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는 6절의 말씀과 같다. 그러나 왜 쓰셨는지 혹은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한 암시는 없다. 9절의 '어른'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 있었고 그들이 모든 것을 주도했을 것이다. 10절의 '여자여'는 엄격한 형태의 부름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에게 부르던 것과 같은 것이다(19:26). 11절의 '다시는'은 과거로 되돌아 갈 생각을 하지 말 것을 가리킨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12-30절)
1) 예수의 판단을 증거하는 두 사람
12절의 '나는'은 강조적이다. 이것은 신적칭호이다.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우리가 서두(1:4)에서 보았던 것으로 요한은 빛에 대해서 관심이 있음을 보인다. 13절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는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빛과 생명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법적인 절차에 집착할 뿐이다. 14절의 '참되니'는 주의 증거가 진실함을 나타낸다. 15절의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는 그들의 무자격을 계속하여 강조하는 말이다. 16절의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는 마지막 날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7절의 '참되다'는 '정당하다'를 의미한다.
18절의 '내가'는 신적 칭호를 회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그 말에 대해서 엄숙함과 장엄함을 덧붙인다. 19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직 아들 안에서만이 아버지가 계시되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주요한 교리이다. 20절의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라는 말은 복음서 저자가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2) 위기 속에서도 믿는 사람들
21절의 '내가 가리니…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있기 위해 그가 떠난 것을 다시 한번 말씀하는 것이다. 22절의 '자결하려는가'는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자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들은 죽음에 대한 언급임을 정확히 알아챈다. 23,2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유대인들을 대조한다. 그의 대적자들은 이 세상과 밀접하게 묶여 있어 '아래에서, 이 세상에 속하였고'라고 말씀한다. 25절의 '네가'라는 말은 경멸인 강조를 나타낸다. 26절의 '나를 보내신 이'는 다시 한번 주께서 사명의 관점에서 생각함을 나타낸다.
27절의 '깨닫지 못하더라'는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28절의 '든 후에'는 십자가를 가리킨다. 29절의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니라'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항상 친밀한 교제가 있음을 가리킨다. 30절의 '많은 사람들이 믿더라'는 요한이 이것의 결과를 간략하게 우리에게 주는 말이다.
3. 참아브라함의 자손(31-59절)
1)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다
31절은 '내 제자가 되고'는 중요한 말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진 않고 제자라고 말씀하신다. 32절이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33절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의 위대한 조상고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대단한 특권이다. 34절의 '죄를 범하는 자마다'는 분사구문으로 우리에게 지속 상태를 가리킨다. 계속 죄가운데 있는 자는 죄인이고, 그러므로 그는 종이라는 것이다. 37절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데 그것은 주의 '말씀'으로 인함이다. 38절의 '본 것'과 '들은 것'은 심각한 대조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항상 그의 메시지가 아버지로부터 나온 파생적인 것임을 말한다. 39절에서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데서 요약된다. 그들이 살인음모는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적대 행위로 인한 것이다. 40절의 '하나님께 들은 진리'는 자신으로부터 진리를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임을 말한다. 41절의 '너희 아비'라는 말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41절과 38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43절의 앞의 '말'은 표현 형태, 즉 담화의 외적 형태를 나타내고 뒤의 '말'은 그것의 내용을 의미한다. 44절의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는 말은 단도 직입적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이 대적자들이 마구와의 혈족 관계를 분명하게 단언한다. 45절의 '믿지 아니하는'이유는 분명하다. 47절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속해야 함을 나타낸다.
2) 아들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하시다
48절의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유대교의 교리를 지키는데 해이했음을 가리킨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께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사마리아인으로 분류한 것이다.
49절의 '아니라'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예수께서 부인하신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아버지를 공경함을 나타낸다. 50절의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는 주님은 인간들이 부여하는 영광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이 그것을 찾으신다. 51절의 '내 말'에서 강조점은 '내'에게 있다. 인간이 생명에 들어가려면, 그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그의 말씀이다.
53절의 '죽었거늘'은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나타낸다. 죽음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에게도 이르렀다. 54절의 '내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 부르시는 이다. 그는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을 지적하므로 그와 아버지와 관계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별화한다. 55절의 '너희는 그을 알지 못하되'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아님을 나타낸다. 56절의 '즐거워하다가'는 진심어린 말로, '고양되었다, 매우 기뻐하였다'를 의미한다.
58절의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는 말씀의 선재를 말하는 것이다. 59절의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해석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요8:1-11)
◈ 원문강해 ◈
법을 초월하는 인애
본문에서는 법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죄인 된 인간에 대한 끝없는 용서와 자비의 법칙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는 데 열중하나 은혜는 용서를 제1원리로 내세운다.
1. 예수 앞에 끌려 온 부정한 여인(1-4절)
1)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 [Orqrou de; pavlin paregevneto eij" to; iJerovn, kai; pa'" oJ lao;" h[rceto pro;" aujtovn, kai; kaqivsa" ejdivdasken aujtouv". 오르드루 데 팔린 파레게네토 에이스 토 히에론…카이 카디사스 에디다스켄 아우투스;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2절)
파레게네토(paregevneto들어오시니)는 파라기노마이(paragivnomai오다, 나타나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이다. 예수는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성전에 다시 오셨다. 당국자들의 음모와 계책을 아시면서도 자신의 일을 중단하시는 일이 결코 없었던 것이다. 설사 심각한 위험이 따르게 될지라도 사역자들은 자시의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카디사스(kaqivsa"앉으사)는 카디조(kaqivzw앉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A.T.Robertson). 즉 그분은 늘 하시던 대로 앉으셨다. 이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사의 준비 자세이다. 에디다스켄(ejdivdasken가르치시더니)은 디다스코(didavskw가르치다)의 미완료 시제이다. 이는 동작의 개시와 지속성을 나타내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라는 의미가 된다. 말씀을 맡은 자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 이름 최대로 활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2) 한 여인이 끌려 옴
(a[gousin de; oiJ grammatei'" kai; oiJ Farisai'oi gunai'ka ejp j moiceiva/ kateilhmmevnhn, kai; sthvsante" aujth;n ejn mevsw아구신 데…귀나이카 에피 모이케이아 카테일렘메넨 카이 스테산테스 아우텐 엔 메소;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3절)
아구신(a[gousin끌고 와서)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데리고 온 것, 체포해 온 것을 극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A.T.Robertson).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고 반전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한 여인을 등장시켰으며, 그들은 여기서 승기를 잡으리라고 생각했다(Wycliffe). 그들은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들이었으므로 범법자들을 체포하여 재판할 권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黑崎). 카테일렘메넨(kateilhmmevnhn잡힌)은 카탈람바노(katalambavnw붙잡다, 덮치다)의 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어떤 연유로 그의 범죄 행각이 드러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여자는 현장에서 발각되었고 붙잡혔다. 스테산테스(sthvsante"세우고)는 히스테미(i{sthmi두다, 놓다, 세우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단시켰으며, 그분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일을 진행해 나아갔다. 이는 완고한 그들의 어리석은 몸부림이다.
3)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힘
(levgousin aujtw'/, Didavskale, au{th hJ gunh; kateivlhptai ejp j aujtofwvrw/ moiceuomevnh:
디다스칼레 하우테 헤 귀네 카엘일렙타이 에프 아우토포로 모이큐오메네;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4절)
카테일렙타이(kateivlhptai잡혔나이다)는 카탈람바노(katalambavnw붙잡다)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잡혔으며, 아직도 죄가 있음'을 의미한다(A.T.Robertson). 그들은 매우 당당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한 가련한 여인을 앞에 놓고 자신들의 의를 마음껏 뽐내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우토폴로(aujtofwvrw현장)는 아우토스(aujtov"자신)와 포르(pwvr도둑)의 합성어로, '도둑질하다가 잡힌'이란 의미가 확대되어 '현행범으로 체포된 자'를 뜻한다(A.T.Robertson). 그 여인은 몰래 간음을 행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모든 죄는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고, 이는 주를 괴로우시게 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딤후2:19).
2. 무리의 간교한 술책(5-8절)
1) 율법을 빙자하여 예수께 질문함
(ejn de; tw'/ novmw/ hJmi'n Mwu>sh'" ejneteivlato ta;" toiauvta" liqavzein: su; ou\n tiv levgei"_
엔데 토 노모…에네테일라토 타스 토이아우타스 리다제인 쉬운 티 레게이스;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5절)
'율법에'(ejn tw'/ novmw엔 토 노모)는 신17:5-7에 근거한 듯하다. 에네테일라토(ejneteivlato명령하였거니와)는 고대 동사인 엔텔로(ejntevllw명령하다, 당부하다)의 단순과거 중간태 직설법이다. 이는 동작 자체보다 동작자를 중시하는 용법으로 여기서는 모세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J.G.Machen). 리다제인(liqajzein돌로 치다)은 현재 부정사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간음하는 자들에게 가해질 형벌임을 시사한다. 간음은 즉결 처분에 붙여질 사항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가 죄인들을 박멸하여 없애는 것이며, 이러한 권한이 부여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W.Barclay). 레게이스(levgei"말하겠나이까)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들은 예수의 판단을 구하는데 이것은 치밀하게 짜여진 그들의 술책이었다. 그들은 그분을 진퇴양난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하고 있었다(Wycliffe). 사단의 간교한 술책은 항상 우리의 가까이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2)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
(peiravzonte" aujtovn, i{na e[cwsin kathgorei'n aujtou'. oJ de; jIhsou'" kavtw kuvya" tw'/ daktuvlw/ katevgrafen eij" th;n gh'n.페이라존테스 아우톤 히나 에코신 카테고레인 아우투…카데그라펜 에이스 텐 겐;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땅에 쓰시니, 6절)
페이라존테스(peiravzonte"시험함이러라)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그들이 계속적으로 예수를 넘어뜨리고자 일을 꾸미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들의 의도는 항상 악한 것이었다(A.T.Robertson).
사람을 마치 물건 다루듯 하며(W.Barclay),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ㆍ방법 가리지 않는 자들의 태도는 오늘의 교회가 철저히 지양해야 할 것이다. 카테고레인(kathgorei'n고소할 조건을)은 현재 능동태 부정사이다. 이 단어는 '고소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대개는 법적 술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법적인 뜻이 없을 경우에는 '나무라다, 책망하다'라는 의미가 된다(Arndt-Gingrich). 보다 폭넓은 의미는 '누설하다, 선언하다'인데 신약에서는 이렇게 사용된 예가 없다(F.Buchsel). '땅에 쓰시니'(katevgrafen카테그라펜)는 미완료 과거로서 동작의 개시와 계속성을 나타내며 '땅에 쓰기 시작하였다'라는 뜻을 갖는다.
3)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 O ajnamavrthto" uJmw'n prw'to" ejp j aujth;n balevtw livqon:호 아나마르테토스 휘몬프로토스 에프 아우텐 발레토 리돈;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처라, 7절)
호 아나마르테토스(O ajnamavrthto"죄 없는 자)는 부정의 안(ajn없는)과 하마르테토스(aJmartho"죄)의 합성어이다.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하나는 '죄를 범할 수 없는'이다(A.T.Robertson). 자신에게 과오가 없어야 남의 과오에 관여할 권리가 있음을 주님은 지적하신다(W.Barclay).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대해서는 엄격한 표준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처사이다. 프로토스(prw'to"먼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를 의미하며, 비판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암시한다. 발레토(balevtw치다)는 발로(bavllw던지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명령법이다. 본 절에서 사형집행인을 선정하시는 주의 방법이 매우 특이하다. 그들은 율법대로 그 여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 자격은 어떤 죄도 범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했다(Wycliffe).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정죄보다 용서를 힘써야 한다.
3. 모두 다 물러가고(9-11절)
1) 양심의 가책을 받음
(oiJ de; ajkouvsante" ejxhvrconto ei|" kaq j ei|" ajrxavmenoi ajpo; tw'n presbutevrwn, kai; kateleivfqh호이 데 아쿠산테스 엑세르콘토 헤이스 카드 헤이스 아륵사메노이 아포 톤 프레스뷔테론 카이 카텔레이프데;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남았더라, 9절)
호이 아쿠산테스(oiJ ajkouvsante"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를 직역하면 '말씀을 들은 자들이'가 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엑세르콘토(ejxhvrconto나가고)는 엑세르코마이(ejxnvrcomai나가다)의 미완료 시제로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A.T.Robertson). 즉 그들이 나가기 시작한 것이며, 양심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Wycliffe). 의기양양하던 그들의 기세는 금방 꺽였다. 자기를 돌아볼 때 나는 죄가 없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 앞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포 톤 프레스뷔테론(ajpo; tw'n presbutevrwn어른으로)을 직역하면 '더 나이가 많은 자들로부터'이다. 더 많이 산 사람들은 지은 죄도 많기 마련이므로 그들이 먼저 자리를 뜨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자처럼 행동하려고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2) 남은 자가 없음
(ajnakuvya" de; oJ jIhsou'" ei\pen aujth'/, Guvnai, pou' eijsin_ oujdeiv" se katevkrinen아나큅사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아우테…우데이스 세 카테크리넨;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0절)
아나큅사스(ajnakuvya"일어나사)는 아나큅토(ajnakuvptw몸을 일으키다, 몸을 똑바르게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무리가 다 물러간 후에 예수께서 취하신 동작을 표현한다. 그분은 땅 위에 무언가를 쓰시다가 몸을 똑바로 하셨다. 홀로 남은 여자,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와의 대화를 위한 준비이다. 그분은 그녀에게 도움을 줄 필요를 느끼셨다(W.Barclay). 카테크리넨(katevkrinen정죄한)은 카타크리노(katakrivnw정죄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주변에는 살기가 등등한 자들이 버티고 서 있었으나 이제는 아무도 없다. 인생의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주께서 덤으로 주신 삶이다.
3) 주의 용서와 권고
(Oujdeiv", kuvrie. ei\pen de; oJ jIhsou'", Oujde; ejgwv se katakrivnw: poreuvou, 팳ai?; ajpo; tou' nu'n mhkevti aJmavrtane.우데이스 퀴리에…우데 에고 세 카타크리노 포류우[카이] 아포 투 뉜 메케티 하마르타네;주여 없나이다…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절)
우데 카타크리노(Oujdeiv" katakrivnw정죄하지 아니하노니)는 용서를 의미하기보다는 일종의 집행유예라고 보는 것이 옳다(W.Barclay). 그분은 이 가련한 여인에게 기회를 부여하신 것이다(A.T.Robertson). 아마도 그분은 이 여인의 중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회개와 변화를 보셨던 것 같다(Wycliffe). 예수는 인간을 정죄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 구원시키고자 오셨다(Smith-Lee)는 사실을 그림 같이 보여 준다. 아포 투 뉜(ajpo; tou' nu'n다시는)을 직역하면 '이제부터'이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충분히 활용해야만 후회가 없다. 하마르타네(aJmavrtane죄를 범치)는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적으로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나도'(ejgwv에고)라는 1인칭 대명사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분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보게 된다(W.Barclay). 기회를 잘 활용하는 자가 지혜자이다(엡5:10).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의 설화는 본래적으로 복음서 안에 들어올 수 없는 글이지만, 이 글의 진정성을 지지해 주는 D 사본이 있다. 그러나 나머지 자료들이 이를 압도하고 있다(Hoskyns, L.Morris).
1. 예수 앞에 선 간음한 여인(1-3절)
1절의 '감람산'을 직역하면 '올리브 나무들이 있는 산'이며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 보통으로 사용되었으나 가끔씩 엘라이온(elaiwvn감람나무 밭)이라는 표현으로 누가의 문서 속에 제시되기도 한다(C.K.Barrett). 특히 누가는 예수께서 마지막 시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낮에는 가르치고 밤에는 도시 밖의 감람산에서 휴식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눅21:37). 그러나 마가는 예수의 휴식 장소로 '베다니'를 언급하였다(막11:11).
2절의 '아침에'는 매우 이른 아침을 의미하며, 이 용어는 본문과 눅24:1행5:21에서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성전에 다시 오심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 성전의 진정한 주인으로 오셔서 담대히 하늘의 진리를 전하심을 함축한다. 그러나 한편 예수께서 밤에 나가셨다가 아침에 다시 오심을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분리도심과 백성들을 어두움 가운데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후에 예수님은 죄악으로 물든 예루살렘의 멸망을 한탄하신 적이 있다(마23:37-39눅21:20-24).
3절의 '서기관'은 공적인 순서를 주관하는 자들이며, 헬라어로 '기록하는 자들'이다(Ewald). 일부 학자들은 예수도 백성들에게 서기관으로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Schoettgen). '바리새인들'이 당시에 범죄자들을 기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문시되며(Ebrard), 일부 학자들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신정적인 재판에 회부하였을 것이라는 입장에 반대를 표명한다(Lange).
한편 이 본문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이 본문은 서방에서는 수용되었으나, 동방 교회에서는 거부되었다. 고대의 많은 사본들(Aleph, A, B, L, N, W), 시리아 시나이틱(Syriac Sinaitic)사본, 시리아 컬시브(Syriac Cursives)사본, 고틱(Gothic)사본 등에도 생략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있다. ① 이 본문은 요한의 진정한 저작이다(Storr, Burgon, Horne, Hug, Stier 등), ② 비록 삽입된 내용이지만 사실에 입각해 있다(Erasmus, Grotius, Wetstein, Semler, De Wette, Lach, Griesbach, Hitzig), ③ 하나의 상징적인 허구적 소설이나 일화이다(Hengst, E.J.Goodspeed), ④ 난외주에 있었던 것인데 필사자의 잘못으로 삽입되었다(A.T.Robertson)는 등의 견해가 있다.
2. 고소자들의 고소 내용(4,5절)
4절의 '선생이여'란 3절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당시 군중들을 가리키는 사람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는 그들이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하는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여자'에 대해 혹자는 당시 미쉬나(Mishnah)에 결혼한 여자와 다른 남자 사이의 간음에 대한 형벌로 교수형이, 약혼자일 경우 돌로 치라는 언급이 있음을 들어 미혼자로 보기도 하다(Billerbeck, Jeremias). 반면 또 다른 학자는 모이큐에인(moiceuvein간음하다)이 70인역이나 당시 헬라 작품 등에 결혼한 자들의 간음 행위를 묘사할 때 쓰여진 점과 비도덕적인 성행위에 대한 미쉬나의 처벌이 예수님 시대에 온전히 적용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결혼한 여자로 규정하기도 한다(Binzler, G.R.Beasley Murray). 5절은 신22:22-24를 근거로 한 것 같다(레20:10)
3. 예수의 반응(6-8절)
6절의 '시험함이러라'에 대하여 비평가들은 단순히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이 여자에게 처형을 언도하도록 유도하여 평상시 예수의 가르침에 반박하고자 함이(Calvin, Erasmus, Luther) 아니라,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는 입자에서 자비를 베푸는 말을 하기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Euthymius, Bengel, Tholuck, Henstenberg).
7절의 '죄 없는 자'란 여기서 단순히 '간음하지 않은 자'와 '불결치 않은 자'로 한정되고 있다(Lucke, Meyer). 이에 반하여 혹자는 이 말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를 지칭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의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Whiteby).
8절에서 예수가 다시 쓴 글의 내용은 "거짓일에서부터 자신들이 지켜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Derrett), 그 내용은 이 6절에 제시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과(Lange), 예수가 각 사람들의 죄들을 땅바닥에 썼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Alford).
4. 죄용서를 선포하는 예수(9-11절)
9절의 '양심'은 복음서 다른 고에 나오지 않는 용어로 주로 바울이 사용했다(행23:1롬9:1) '가책을 받아'는 당시 많은 랍비들이 간음죄를 지면서 살았던 역사적 증거들에 의해서 입증이 되고 있다(wagensail). '남았더라'는 눅5:28의 레위라 하는 세리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을 때, '버리다'라는 단어와 같이 쓰였다(L.Morris). '어른으로'는 다시 회당의 장로를 의미하는데(Schaff), 이들은 항상 고결한 자로 표현되고 있다(Hengst).
10절의 '어디 있느냐'는 몇몇 사본들은 에케이노이 호이 카테고로이 수(ejkeivnoi oiJ katpvgorovi sou)를 첨부해서 '널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에 있느냐'로 번역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C.K.Barrett). '정죄한'이란 표현은 처벌이전에 선행하는 과정(Elsey)이라고도 하며, 사형에 기소함(Gesenius)이나, 돌에 맞아 죽을 정도의 판단(Lange)이라는 등의 다양한 주장이 있다.
11절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오니' 예수는 구원자이시므로 죄를 심판하기보다 지에서 구원하신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요5:14에도 나온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에는 분명한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요7:53-8:11의 대부분은 고전 표준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각각 36절이나 44절뒤에,혹은 요한복음의 맨 마지막, 눅21:38뒤에 기록되어 있다(L.Morris, C.Carter). 이 단화의 일관된 통일성과 사상은 예수의 인격과 잘 부합되는 것이며, 역사적 사실로 인정될 수 있다(M.C.Tenney).
1. 간음 중에 잡힌 여인(1-5절)
요7:53의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라는 말은 이들이 아마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1절의 '감람산으로 가시다'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에 마지막 부분에 낮에는 예루살렘 성 내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성 밖에서 지내셨다는 공관복음 기록을 연상시킨다(눅21:3722:39, Tenney).
2절에서 '다시 성전을 돌아오시니'라는 말은 예수께서 이전에 성전을 방문하셨다는 것과 그곳에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특히 '나아오는지라'와 '가르치시더니'는 모두 진행을 가리키는 미완료 동사로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 백성들이 계속 그에게 찾아오는 장면을 묘사한다(Morris).
3절에서 '서기관들'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중 오직 이 부분에서만 등장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회에서 이들 직업적인 서기관들의 특별 업무란 율법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잘 알아야만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바리새인이었으나, 그렇다고 모든 서기관이 바리새인은 아니었다(Carter). '잡힌'은 '그 여인을 수치스러운 상태로 취하였다'라는 의미가 있다(Morris). 이 여인에 대해서는 그녀와 공범인 남자가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결혼하지 않은 12세 정도의 처녀로 보는 입장(Billerksen)과 이미 결혼한 여자이거나(Hendriksen), 적어도 약혼 기간 중에 있던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신22:23,24,R.V.G.Tasker).
4절의 '선생이여'는 정중한 칭호로서 그에게 결정을 내릴 권한을 위탁하는 것이다(Morris). '간음 중에'는 문자적으로 도둑질하는 중에 잡혔다는 의미가 있으나, 이후에는 악한 행위로 범법한 모든 경우, 특히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간음한 경우에 사용되기도 했다(Hendriksen, Morris).
5절의 '이러한 여자'는 그들의 일방적인 율법 적용을 보여 주는데, 원래 레20:10신22:22,23에 보면 간음한 자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처형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에 대한 임의적인 해석을 하여 그 여인에게 사형 언도가 내려지길 기대했다(L.Morris).
2. 죄 없는 자가 치라(6-11절)
6절에서 그들이 예수께 이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은 범죄한 그 여인에 대해 의분(義憤)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동기에서 예수를 책잡기 위한 시험적 질문을 했던 것임을 나타낸다. 만일 예수가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한다면 그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로마 정부의 권한 없이 극형을 언도한 것이 되기 때문에 로마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될 것이다. 반면 그 여인을 풀어주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Tasker, Carter).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것은, ①예수께서 무자비한 그 고발자들의 얼굴이나 범죄한 그 여인에 대한 실망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이거나(Temple), ②그들을 무시하는 의미로 그렇게 하셨다고도 주장한다(Calvin). 여기에는 예수께서 '마치 그들의 소리를 못들으시는 것처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의도를 좀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Tasker). 그가 쓰셨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그것이 율법의 일부였다거나 그 앞에 서 있던 자들의 이름, 혹은 아무런 내용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등 다양하다. 아마도 그는 그저 땅에 무엇인가 긁적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시간을 주시고자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다(Carter).
7절의 '일어나'는 그들의 계속적인 정치적인 동기를 위해 종교적 동기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의분을 암시한다. 그리고 '너희 중에…먼저'는 그들에게 종교적 동기면에서 자신들의 죄를 추궁하는 것이다. 이 답변은 그들의 적개심을 일순간 당혹케 했다. 그 말씀은 율법에 거스르는 것이 아니었다(Morris). 실상 이것은 신17:7의 말씀을 반영한 것이다(Hendriksen). 이제 질문을 던지던 자들이 도리어 궁지에 몰렸다. 간음과 같은 죄는 사생활에 관한 것이며, 이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우연한 목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일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꾸민 사건이 되거나, 그들이 그 행위를 묵과할 경우 그들은 결국 그 죄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든 그 여자를 고소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든지 그 여자를 죽이자던 요구를 그만두던지 해야 했다(Tenney).
8절에서 예수께서는 허리를 굽혀 다시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6절 후반부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9절의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는 어른들이 지은 죄가 더 많았거나 혹은 젊은 사람들보다는 더 지각이 있어서 자신들의 의로움에 대해 공언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Tenney).
10절에서 예수가 그 여인에게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가 나타내시려는 은혜를 더 인상 깊게 하시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즉 그 여인으로 하여금 이것을 깊이 생각하게 하고 표현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Hendriksen).
11절의 예수께서는 자신 역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이 사건을 일단락 지으셨다. 물론 그녀에게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께서는 다시 범죄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분부하신다(Morris). 그 여인에게 있어서 정죄가 아닌 용서의 경험은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허락하셨다. 결국 용서란 죄와의 완전한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Tenney).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성(性)에 대한 관습
유대인들이 성을 난해한 문제로 생각했을지라도 이것에 대한 지나친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금욕주의를 거부했으며 성적 행위의 즐거움이 자신들을 지배할 수 없고 또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식적으로 성교육은 없었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했다.
1. 완곡한 표현
종종 성경 기자들은 우리의 기분에서 볼 때 매우 대담한 표현을 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성적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내 기도했다. 성경은 빈번히 유방과 자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생식기를 기술하는 것은 부끄러워했으며 임신과 분만은 그대로 표현되었다. 포피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할례에 대한 강조 때문이었다.
2. 종교적 창기 제도
이스라엘 역사를 오염시켰던 이방 종교는 빈번히 성전 창기의 제도를 실행해 왔으며 이것은 보통 다산의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농부가 많은 농산물과 가축을 갖기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다산의 신에게 호소를 했다. 다산의 신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 중의 하나는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창이나 남창과 함께 성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이 관습은 신약성서 시대까지 계속되었으며 종종 여호와의 예배 속에 흡수되기도 했다.
3. 간통
이스라엘에는 많은 창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간통행위는 빈번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간통의 죄를 범하여 사형을 당했던 것은 우물스러운 일이다. 예수 시대에 이르러서는 간통과 그 벌에 대한 감정이 많이 바꾸었다. 부분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은 더 이상 그 문제를 죽이고 살리는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같은 변화는 예수님과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과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태도의 영향인 것 같다.
4. 근친 상간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반복되는 문제였다. 대개 유대인들은 이웃 유대인, 기독교인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매우 드물게 일어났던 일이요,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대중에게 창피한 일로 여겨졌다.
각 종교에서 죄의 개념(8:1-11)
◈ 세계배경 문화사 ◈
종교에서는 죄라고 하는 것을 주고 그 종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신의 계시를 따르지 않을 때 죄로 간주하는 한편 인간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각 종교에서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를 범했을 때에도 죄로 간주한다.
근동 /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의 마즈다의 가르침은 악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생존을 가르치고 있다. 마즈다는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자손을 낳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악과 싸운다는 것은 "귀신들과 귀신에 속한 인간이든, 짐승이든 어떠한 존재들이든지 투쟁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여 생존을 위해서는 악과 쉼 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한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짜트스프람에 의해 정욕이라는 여자 귀신 아츠에 대항하는 투쟁"이라 하여 삶 전체를 악과의 투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내세관은 삶속에서 행해지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언어, 생각들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는 영원히 저울 위에 기록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죄를 씻기 위한 방법으로 "고해와 여분의 공적들의 이전"을 통해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개념이다.
동양 / 유교: 유교에서 윤리적 덕목을 덕(德)ㆍ예(禮)ㆍ의(義)ㆍ충(忠)을 들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가르쳤다. 즉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인은 자시의 욕망을 억누르고 예절과 자비를 베푸는 마음의 원리로서 인을 추구하는 사람을 군자라고 하며 인을 성취한 자를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이기고 예절을 지키며, 겸손하며 소신을 가지고 남에게 하시 싫은 일을 시키지 말며, 위로 공경을 드리고 아래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이를 어길 때는 죄로 간주하였다. 또한 효우(孝友)와 충서(忠恕)를 강조하고 있는데, 효우는 효도와 존경을 의미하며 충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이해심을 말하는 것이다. 효에 대해서는 공자가 실천 덕목의 첫 번째로 효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효의 실천 방법으로 「효경」에 기록되어 있다. "항상 부모를 공경하고, 의식봉양을 충분히 하며, 부모의 병을 걱정하고,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죽은 뒤의 제사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를 어길 경우에는 불효로 낙인찍히게 된다. 군신(君臣)관계에 있어서도 충과 인으로 대해야 한다. 특히 위정자들은 정치를 함에 인으로 하며 백성을 친자식과 같이 여기라고 유교는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유교에서 죄는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적 도리를 지키지 않았을 때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불교: 인간이 깨달음에도 도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10가지 인간의 사악한 죄가 있다고 한다. 즉 욕망과 애착에 의해 생기는 탐(貪), 사적인 욕망에 의해 구치 못했을 때 성내는 것인 진(賑), 사물의 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치(癡), 탐ㆍ진ㆍ치를 범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만(慢), 인과의 원리를 의심하여 믿지 않는 의(疑), 재물을 탐내는 신견(身見), 사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변견(邊見), 유물론 등과 같이 그릇된 인생관ㆍ우주관에 맹종하는 견취견(見取見), 불교의 계에 어긋나는 잘못된 규범을 따르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을 불교에서는 죄로 보고 있다.
성경적 접근: 타종교의 죄의 개념과 성경의 죄의 개념과 비슷한 것도 있다. 가령 이슬람교도 죄를 그들의 신인 알라 앞에서 그릇된 인간의 행위로 본다. 그러나 성경의 죄의 개념이 독특한 것은 죄를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죄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절대적인 범죄 행위요, 영원히 응보를 받아야 할 과오로 성경은 여기는 것이다. 결코 사람이나 사회의 법으로 응보받았다고 해서 사해지는 성질이 아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죄해 주셔야만이 해결될 것이 죄다. 그러므로 성경의 죄의 개념은 인간의 사회적인 윤리나 도덕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로만 해결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간음하다 잡힌 여인(8:1-11)
예수께서 성전 마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에게로 왔다. 그들은 그 일로 예수를 시험할 기회를 삼고자 했던 것이다.
1. 간음하다 잡힌 여인
남녀간의 성적 문란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부녀자나 약혼한 처녀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남녀는 모두 성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었다(신22:22-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던 남자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여인만을 데리고 옴으로써 예수를 시험하는 데 있어서 보다 더한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 분명했다.
2. 여인을 고소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들은 성전에서 강론하고 계시는 예수에게로 그 여인을 데리고 와서 율법을 빙자하여 고소했다. 거기에는 교묘한 함정이 감추어져 있었다. 율법대로 하면 당연히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로마 지배하에서의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주어여 있지 않았다. '돌로 쳐라'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죽이지 말라'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진퇴양난의 함정이 거기에 있었다.
3. 양심의 가책에 사라지는 무리들
예수께서는 그들의 고소를 들으시고 묵묵히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다. 이때 예수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으며 어떤 글씨를 쓰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사악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용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참담한 태도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비열한 궤계에 대한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였을까?
이윽고 일어나신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죄악 중에 행하면서 이웃의 허물을 용서할 줄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한 주님의 외침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8:1-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에게로 왔다. 그리고 율법에 돌로 쳐 죽이는 형벌 규정을 들어 예수를 시험하려 했다. 그러나 시험하려던 자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안고 예수에게서 떠나가는 결과를 가져 왔다. 예수에게는 그런 위대한 능력과 지혜가 있었다.
1. 땅에 글씨를 쓰시는 예수
그때는 아침이었고 장소는 성전 마당이었다. 그런데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간음한 여인을 이 거룩한 곳에까지 끌고 온 것이다. 더구나 예수는 재판관도 아니었는데 그 여인을 끌고 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위선에 차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시험하는 그들에게 예수는 말 없이 땅에 글씨를 쓰심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행동을 꾸짖고 있었다. 극심한 악행에 대하여 침묵의 응답처럼 준엄한 경책은 없을 것이다.
2.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대답을 재촉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일어나 말씀하셨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예수의 이 말씀은 남을 정죄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또한 그곳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자기 자신의 추한 내부를 들여다보게 하는 고단위 처방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오만한 인간들을 향하여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3.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분위기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기세등등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도망치듯 사라졌고, 군중도 떠나갔다. 혼자 남은 여인을 향하여 예수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죄에 대한 용서와 함께 간곡한 당부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은혜'로 만드는 것은 다시 범죄하지 않는 일밖에 없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요8:12-20)
◈ 원문강해 ◈
사람들이 인식한 빛
본문에서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인식된 빛이시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분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에게로 나아오기를 거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 세상의 빛이신 예수(12-14절)
1)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음
( jEgwv eijmi to; fw'" tou' kovsmou: oJ ajkolouqw'n ejmoi; ouj mh; peripathvsh/ ejn th'/ skotiva/에고 에이미 토 포스 투 코스무 호 아콜루돈 에모이 우 메 페리파테세 엔 테 스코티아;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12절)
에고 에이미( jEgwv eijmi나는…이니)에서 에고( jEgwv나는)라는 1인칭 단수 대명사는 강조용법으로 쓰였다. 포스(fw'"빛)란 단어는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즉 주님은 발광체로서의 빛이시나 성도는 반사체로서의 빛이다(마5:14). 아콜루돈(ajkolouqw'n따르는)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따르는 것은 나타낸다. 이 단어는 몇 가지의 다른 뜻이 있는데, ① 군사가 지휘관을 따르는 것, ② 노예가 주인과 동행하는 것, ③ 현명한 조언자의 의견이나 결정을 수용하는 것, ④ 도시나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것, ⑤ 어떤 교사의 논의의 추지에 따르는 것 등이다(W.Barclay). 예수를 한번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계속적으로 그분과 동행할 때에 그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며,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 예수는 또한 생명의 빛이시므로 그를 좇을 자에게는 새생명이 역사한다.
2) 바리새인들의 반박
(Su; peri; seautou' marturei'": hJ marturiva sou oujk e[stin ajlhqhv".쉬 페리 세아우투 마르튀레이스 헤 마르튀리아 수 우크 에스틴 알레데스;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3절)
페리(peri위하여)는 속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어떤 해동이 언급되거나 가리키는 물체 혹은 사람을 표시한다. '관하여, 대하여, ∼ 때문에, 위하여'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Arndt-Gingrich).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자기자신을 위해서 증거한다는 사실을 들어 그 증거가 확실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W.Barclay). 마르튀레이스(marturei'"증거하니)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주께서 계속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변명하며 유리하게 증거하셨음을 시사한다. 증거가 권위를 가지려면 객관성의 유지가 필요하다. 즉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만 한다. 그들은 예수를 인정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 증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영적직관임을 알지 못했기에(黑崎) 예수를 계속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알레데스(ajlhqhv"참되지)는 '변치 않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사법적으로 의로운, 정직한'등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다(R.Bultmann). 예수를 모르면 진리에 대해서도 눈이 머는 법이다(요14:6)
3) 주의 증거는 참됨
(ejgw; marturw' peri; ejmautou', ajlhqhv" ejstin hJ marturiva mou, o{ti oi\da povqen h\lqon kai; pou' uJpavgw: uJmei'" de; oujk oi[date povqen e[rcomai에고 말튀로 페리 에마우투 알레데스 에스틴 헤 마르튀리아 무 호티 오이다 오이다테 포덴 에르코마이;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알지 못하느니라, 14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ejgw; marturw' peri; ejmautou에고 마르튀로 페리 에마우투)를 직역하면, 전치사 페리(periv)가 '∼에 대하여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여도'이다. '내가'(ejgw;에고)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오이다(oi\da앎이어니와)는 완료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의미는 현재이다. '알다, 사귀어 알다, ∼줄을 알다, 알게 되다, 경험하다'등을 의미한다. 예수의 앎은 지식의 본질을 의미한다. 탐구하여 깨닫고 발견하는 인간적인 차원의 지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분은 자신의 기원과 운명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Wycliffe). 포덴 엘돈(povqen h\lqon어디서 오며)은 기원, 원천에 대해서 사용되는 의문 부사 포텐(povten어디서)과 에르코마이(e[pcomai오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이다(Arndt-Gingrich). 그분은 자신의 원천을 잘 아셨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뜻과 목적 등에 대해 세세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 휘파고(pou' uJpavgw어디로 가는 것을)는 그분이 자시의 운명을 직시하셨음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암시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예수를 평범한 인간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인간의 최대 실수요, 신성모독이다.
2. 예수에 대한 아버지의 증거(15-17절)
1) 육체를 따르는 인간의 판단
(uJmei'" kata; th;n savrka krivnete, ejgw; ouj krivnw oujdevna.휘메이스 카타 텐 사르카 크리네테 에고 우 크리노 우데나;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5절)
카타(kata;따라)는 대격을 지배할 때 규범이라든지 유사성(Similarity) 동질성(homogeneity)에 대해서 '∼에 따라서, ∼에 부합하게'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예수를 판단할 때에 육체의 규범, 육체의 표준을 중시하고 적용했던 것이다(Arndt-Gingrich). 사르카(savrka육체를)는 '살, 몸, 육신, 인간성, 유형'등을 뜻한다. 이는 신약에서 특히 '인간의 신체'라는 의미로, '몸'을 뜻하는 소마(sw'ma)와는 달리 죄성을 지닌 인간 자체, 변화된 새사람에 반하는 옛 사람의 뜻을 함축하는 말로 자주 쓰였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바사르(rvb육체)의 역어로 주로 쓰였는데, 관능과 결합되지 않고 할례와 관련되어 있다. 요한은 이 단어를 드물게 사용하였다(E.Schweiger). 바리새인들은 단지 육적인 생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뿐이었다(Wycliffe). 인간적인 지식과 표준에 그 근본을 둔 판단은 사물의 표면 밖에는 보지 못하게 마련이다(W.Barclay). 그들은 예수의 영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며,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2) 예수와 함께하신 아버지
(o{ti movno" oujk eijmiv, ajll j ejgw; kai; oJ pevmya" me pathvr.호티 모노스 우크 에이미 알르 에고 카이 호 펨프사스 메 파테르;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6절)
모노스(movno"혼자)는 '다만 홀로, 유일한'등을 뜻하며 호머(Homer) 이래로 등장한다. 70인역(LXX)은 이 단어를 레바드(d'b'l'홀로)나 레바다드(dd:b:l}떨어져서)에 대한 역어로 대부분 사용하였다. 히브리어의 기본 의미는 '∼로부터 분리된, ∼로부터 고립되어 외로운'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대부분 바울의 서신과 요한의 기록들에서 나타난다(K.H.Bartels). 주님은 자시이 혼자가 아님을 주장하신다. 우리는 이 말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그분의 판단이나 평가는 곧 하나님의 것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黑崎). 아버지께서 그분의 판단을 도우신다(Wycliffe). 예수의 말씀과 행위 안에는 하나님의 증언이 있다(W.Barclay). 펨프사스(pevmya"보내신)는 펨포(pevmya"보내다)읜 단순과거 능동태 분산이다. 하나님은 그를 보내셨고, 또 그와 함께하였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동일한 은혜 아래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다.
3)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됨
(kai; ejn tw'/ novmw/ de; tw'/ uJmetevrw/ gevgraptai o{ti duvo ajnqrwvpwn hJ marturiva ajlhqhv" ejstin.카이 엔 토 노모 데 토 휘메테로 게그랍타이 호티 뒤오 안드로폰 헤 마르튀리아 알레데스 에스틴;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7절)
게그랍타이(gevgraptai기록하였으니)는 그라포(gravpw쓰다)의 현재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이미 쓰여져 증거되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주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지적하심으로 자신의 증거가 참됨을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신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확증이라는 근거 위에 세워지는 주장이 옳은 것이다. 마르튀리아(marturiva증거)는 '증거, 증언'을 뜻하는네 요한의 문헌에서 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교적 용법이 지배적이다(Strathmann). 증거나 증언에는 언제든지 객관성이 요구된다. 한 사람의 말이나 주장만 가지고서는 진위 여부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율법은 재판의 안전과 공정성을 기한다는 측면에서 두사람의 증언을 요구했다(Wycliffe).
3. 아무도 잡는 이가 없음(18-20절)
1) 예수의 자증
(ejgwv eijmi oJ marturw'n peri; ejmautou' kai; marturei' peri; ejmou' oJ pevmya" me pathvr.에고 에이미 호마르튀론…마르튀레이 페리 에무 호 펨스사스 메 파테르;내가…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18절)
호 마르튀론(oJ marturw'n증거하는 자)은 현재 분사로 증거의 계속성과 진행성을 시사한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는데, 말씀과 행위를 통해 증거하셨다. 그 증거는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라든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보이는 반응을 통하여 참된 것이 입증할 수 있다(W.Barclay). 그 예수의 판단은 인간적인 지식과 표준에 근거를 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것과도 판이했다. 그것은 완전한 지식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다. 파테르(pathvr아버지)는 예수께서 자신의 증거의 타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마지막 카드이다(Wycliffe). 아버지의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행위 속에 아버지의 증언이 각인된 것을 보게 된다(黑崎).
2) 유대인들의 무지
(Pou' ejstin oJ pathvr sou_ ajpekrivqh jIhsou'", Ou[te ejme; oi[date ou[te to;n patevra mou: eij ejme; h[/deite, kai; to;n patevra mou a]n h[/deite.푸 에스틴 호 파테르 수…우테 에메 오이다테 우테 톤 파테라 무…안 에데이테;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너희는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알았으리라, 19절)
푸 에스틴 호 파테르 수(Pou' ejstin oJ pathvr sou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그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를 하나님이 아닌 육신의 아버지로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Augustine). 그들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증인의 증거는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시킬수가 없었다(Vincent). 이는 그들이 영적으로 어두운 땅에 속한 자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사생아로 몰아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이다테(oi[date알지)란 현재형으로서 부정사 우테(Ou[te못하고)와 함께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우테…우테(Ou[te...Ou[te못하고…못하는 도다)는 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로서 '∼도 아니∼도 아니, ∼도 ∼도 다 아니'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를 모를 뿐아니라 자기들이 존경한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무지하였다. 그리스도를 보고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을 갖는 유일한 수단이다. 한편 '알았더라면'(h[/deite에데이테)이란 2인칭 복수 과거 완료로서 그들이 과거부터 몰랐음을 암시한다.
3)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
(kai; oujdei;" ejpivasen aujtovn, o{ti ou[pw ejlhluvqei hJ w{ra aujtou'.카이 우데이스 에피아센 아우톤 호티 우포 엘렐뤼데이 해 화 아우투;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0절)
우데이스 에피아센(oujdei;" ejpivasen잡는 사람이 없으니)은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J.G.Machen). 예수님은 대적들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도 그분을 체포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시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신성모독죄에 해당했을 것인데 누구도 손을 대거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黑崎). 우포 엘렐뤼데이(ou[pw ejlhluvqei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는 에르코마이(e[rcouai오다)의 과거 완료 능동태로 아직 오지 않았음을 뜻한다(A.T.Robertson).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주권적 영역이다(행1:7). 그분이 허락지 않으시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세상의 빛'으로서의 예수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 자기 이해의 선언은 자기 증거를 입증한다.
1. '빛'의 증거에 대한 논란(12-14절)
12절의 '세상의 빛'의 배경에는 초막절 축제시에 사용한 촛불 의식과 관련되고 있으며, '나는∼이다'(jEgwv eijmi에고 에이미)용법은 예수의 자기 이해를 잘 보여 주는 요한의 독특한 표현법 중 하나이다(J.H.Bernard, A.H.McNeil). 초막절 첫째 날 밤에는 여인의 뜰에서 네 개의 황금 촛대에 촛불을 밝히는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 표현은 '하나님의 빛이라'라는 사상인 영지주의(Gnoscism)와 동양 종교의 전제와 연관되어 있다(G.P.Wetter. H.P.L.Orange). 이 사상은 유대주의의 '빛이 제일 먼저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신학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Colson, Whitaker, Charlesuath). '생명의 빛'이란 '생명을 부여해 주거나 조명해 주는 빛 또는 생명으로부터 파생된 빛을 의미할 수 있다(J.H.Bernard). 그러나 '생명의 떡'(요6:48,51,54-57)처럼 전자의 의미를 더 함축한다 하겠다. 본 절의 의미는 이 세상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하늘의 영생의 바른 길을 갈수 있게 됨을 시사한다.
13절의 서두의 운(ou)은 '그러므로'라는 의미로서 논쟁이 매우 격화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Anton), 특히 13절에서바리새인들이 반박한 사실은 랍비들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증거할 수 없다'하는 격언에 기초하고 있다(F.L.Godet). 13절 통해서 순례자들이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가고 없음을 알 수 있다(Wettss, Meyer).
14절의 내용은 요5:19에 이용된 부분에 속하며, 14절뿐만 아니라 15,16절도 복음서 기자가 자료에 첨가한 부수물들이다(Becker). '∼하여도'(ka[n칸)라는 표현은 조건적인 표현이거나(Grotius), 절대적인 말(Stier)일 수 있다.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란 예수께서 당신의 신적 인식을 온전히 가지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즉 그분은 자신의 신적 기운과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심(요13:1)을 항상 인식하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반면 유대인들은 이런 영적 진리를 알지 못했기에 그분을 믿지 못했다(요5:18-29,37,38).
'어디서'(povten포텐)는 두 가지 양상에 나타난 신적 사명을 의미하며(De Wetter), 예수의 성육신과 그의 겸손으로 인한 영화를 의미한다(Stier). 카이 푸(kaiv pou'어디로)를 헤 푸(h{ pou')로 읽어야 하며(Codd, D.K.T.Schaff), 책망의 날카로움을 제시해 주고 있다(Lange).
2. 두 사람의 증거(15-18절)
15절에서 '판단하나'(krivnw크리노)라는 의미는 예수가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De Wette). 버나드(J.H.Bernard)는 예수가 그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는 자기 자신을 심판(판단)자로 내세우기를 원치 않았다고 해석하고 있다(J.H.Benrnard).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라는 표현은 예수가 마지막 날에 심판할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L.Morris).
17절의 '∼에도'(dev데)는 접속사로서 앞에 제시한 말의 내용을 매우 강조하는 어법이며, '너희의'라는 말은 만일 예수가 유대인 출신으로서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이라면 이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C.K.Barrett). 이는 율법을 자신의 편리한 대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지적하여 언급한 말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요한은 교회와 회당 사이의 불화를 언급하면서 유대인들이 무시했던 성경 내용에 나오는 증언들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토라 속에서 예수와 아버지는 동일 관계임을 보여 주고 있다(Odeberg). '기록하였으니'(gevgraptai게그랖타이)라는 현재 완료 수동태 직설법 대신에 a사본에는게그람메논(gevgrammenon)의 현재 완료 수동태 분사로 독해하였다(F.L.Godet).
18절의 '내가'는 그리스도의 품성에 대한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으며, A.D.448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유티케스(Eutyches)는 예수의 성육신에 따른 양성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였고 5세기에네스토리안 일파들은 인성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Neander). 본 절 전반부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말씀이다(J.H.Bernard).
3. 때가 이름(19,20절)
19절의 '어디 있느냐'라는 성급한 질문은 단순히 '인간 아버지'를 생각하고 제시한 물음이었거나(Augustine), 예수의 의도를 조롱하는 표현이었을 것이다(L.Brug, Kuinoel). 이 질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장하는 예수에 대한 악의있는 처사였을 것이다(Alford, Stier). '나를∼못하고'(Ou[te ejme;우테 에메)라는 의미는 너희의 질문이 너무 사악하며, 너희는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알기 위한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Laupe). 그들은 14절에 보이듯 예수의 신적 기원에 대해 무지하였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그분과 연합하여 영적 교제를 가지신분이시며(요5:19,20) 그분의 말씀을 하시며(요5:198:28), 그분을 나타내시므로(요14:10)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아는 자는 곧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
20절은 요6:59과 유사하며, 장소 보도는 현장의 중요한 성격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연보궤 앞에서'(ejn tw' gazofulakivw엔 토가조필라키오)는 성전 안에 있는 보물 상자를 지칭할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통틀이 여러 개가 비치되어 있었다(II Esr. 22:44, Josephus, Bell, R.Bultmann).
또한 20절에는 '예수'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Tiscendorf, Alford, Lachmann) '앞에서'(ejn엔)라는 표현은 '∼옆에'라고 지니고 있다(Broun). 특히 바렛트(C.K.Barrett)는 그 '연보궤'가 여자의 내실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세상의 빛(12절)
12절에서 '나는∼이다'는 두 번째 선언으로 자신의 신적인 기원을 '세상의 빛'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계시는 초막절의 상징적 의미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불기둥을 따라 인도되었던 것처럼, 초막절의 촛불 점화는 이러한 광야의 행진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친히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시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자기 계시는 9장에 기록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셨던 사건 뒤에 생긴 논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R.Tasker).
2. 참된 증거(13-20절)
13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즉각 예수의 신적인 권위 주장을 알아차리고 반기를 든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빛과 어두움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복잡한 율법의 해석에만 집착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그 증거가 참되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참되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참되지 않다고 하는 말은 반드시 그 말이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같은 이중적 표현은 요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그의 언어 사용이 반드시 요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그의 언어 사용이 반드시 한 가지 의미만을 내세우지 않는 예 중의 하나이다. 도리어 바리새인들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예수의 말씀에 법적인 가치 혹은, 유효성이 없다는 것이다(Morris).
일반적으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증언은 편견에 빠지거나 주관저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를 위해 증거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5:31). 그러나 14절의내용은 이와 매우 상반되는 것이다. 흔히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없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떠한지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요13:3).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외적인 것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더 정확한 증거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Tenney). 여기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안다'라고 하는 의미는 정확하고도 불변하는 인식을 가리키며(Godet), 결국 그와 가은 지식은 신성(神性)의 한 표징이 된다(R.tasker).
15절에서 예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되고 완전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라고 말씀하신다(Tasker).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오직 육체를 따라 하는 것이며, 그 육체의 본성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심판도 온전하지 못하다. 그와 반대로 예수께서는 결코 육체에 따른 그릇된 판단을 하시지는 않는다.
16절을 표면적으로 볼 때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혹은 요9:39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라는 말씀과 15절의 말씀은 서로 상충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가 누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를 거부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결국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판단과 예수의 판단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결국 예수께서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지 심판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Morris). 설혹 그가 판단을 한다 하여도 그것이 진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와 그를 보내신 자 사이의 공공연한 일체성이 있기 때문이다(Tasker). 그의 판단은 아버지와의 관계, 즉 보내신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 사이의 관계에 근거하는 것이며, 둘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일치한다(Morris).
17절에서 예수는 어떤 주장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하여 두 세 증인이 필요하다는 율법 조항에 대해 말씀하신다(신17:6). 예수에게 있어서 두 증인은 곧 그 자신과 하나님이시다(Tenney). 여기에서 특별히 예수께서 '율법'에 대해 강조하시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당사자들이 정죄하기 위해 내세우는 바로 그 율법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는 견해와(Weiss, Keil, Reuss), ② 예수의 특별한 위치를 드러내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이라는 의견(Godet)이 있다. 두 의견에 모두 설득력이 있다. 결국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율법과 유대인들의 그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18절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그는 또 다시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요5:23,24,37, Tenney). 어떠한 인간의 증거로도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드러낼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자신가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Morris).
19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예수의 증언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도록 그의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들이란 그의 출생의 합법성 혹은 적법성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갈릴리 사람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유대인일 수도 있다(Carter). 또한 예수의 출생에 대한 조롱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절에서의'네 아버지'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Bernard). 즉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정당한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예수는 연이어서 '그를 알게 되면 하나님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Tenney).
이렇듯 아들 안에서만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근본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이는 바로 그 아들(요1:18)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진정으로 안다면 그는 또한 아버지가 허락하신 아들에 대한 증거도 알 것이다(Morris).
20절에는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장소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산헤드린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들은 예수의 말에 대해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면 그를 체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간이 이르기까지는 아무도 예수를 해칠 수 없었다(Morris, Carter, Hendriksen).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회당의 중요성
회당이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를 말한다. 회당은 종교 교육의 중심이며 유대인들의 공동 생활의 영적 등대 역할을 담당한 곳으로 그리스도 당시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 기원
최초의 회당이 언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원에 대한 근거는 겔20:1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존에 영향을 주는 심각한 위협에 여러 차례 직변하였다. 그들은 수 세기에 걸쳐 학살과 유배를 당했으며 주위의 이방 민족들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의 정신적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한 한 종교적 교육 기관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2. 발전사
회당의 발전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A.D.1세기경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0여 명의 성인 남자들이 필요했다. 큰 도시에는 수많은 회당들이 있었으며 전승에 따르면 A.D.3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무렵에는 회당이 394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3. 지도자
회당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대부분은 10인의 장로 회의에서 다루어졌다. 그들의 직무는 회당의 생활을 감독하고 그 활동을 담당할 사람들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사람들이 바뀐다 해도 두 사람의 관리가 중심적인 지도력이 되었다. 회당의 지도자에 대한 언급은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예배와 회의에서 원만한 질서를 유지시키도록 되어 있다.
4. 기독교인의 회당 사용
처음에 기독교인들은 당시의 종교 구조 속에서 그들의 활동 장소를 찾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여러 가지 일로 모였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과 모임은 계속해서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대부분의 가르침을 회당 안에서 하셨다.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도 회당의 힘은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고 불리하게 작용되기도 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 그는 회당을 기독교를 박해하는 매개물로 사용하였다(행9:2). 바울은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안식일에 세 번 설교를 하였고 예수님은 말씀을 설명하기도 하셨고 병자를 고치기도 하셨다(마4:239:35).
빛과 어두움이 상징하는 것(8:12-20)
◈ 세계배경 문화사 ◈
빛과 어둠은 반대 개념으로 여겨져 왔다. 빛은 밝음을 뜻하고 창조, 환희와 희망을 말하며 태양이나 불로써 상징되었다. 반면에 어둠은 혼돈으로 상징화되었으며 죽음, 파괴, 지옥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당대인들에게 어둠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상반된 상징적으로 인하여 빛과 어둠은 대부분의 이야기 속에서 대립적인 모양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근동 /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특히 밝음과 연관하여 불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다.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불' 앞에 예배드림으로써 자신들의 '의로움'이 살아난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화(聖火)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현명한 신)가 인간에게 내려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즉 조로아스터에서 불이란 아후라 마즈다의 귀중한 상징 가운데 하나였고, 불을 통하여 현명한 신의 본성과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세상에 종말이 오면 모든 사람들은 불과 녹은 쇳물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이때 불이나 쇳물은 착한 사람에게는 약으로 쓰이지만 악인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나뉘어진 악한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는데, 지옥은 깊은 어둠으로 둘러 싸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서양 / 그리스: 헤시오드는 「신통기(神統記)」라는 책을 통해서 세상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태초에는 혼돈(Chaos)밖에 없었으나 우주가 점차 진화하면서 대지와 지옥(Tartatus), 사람이 생겼다. 카오스(혼돈)에는 밤과 어둠이 있었는데 밤은 배우자가 없는 고독한 침실, 꿈, 죽음, 노년, 비참, 그리고 불화를 만들어 냈다. 즉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어두움은 부정적인 일상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다.
동양 / 한국: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설화는 빛과 어둠에 관한 당대인의 인식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아달라왕(阿達羅王)때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이들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이들은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그 후 신라에는 해가 없어지자 왕은 점을 쳐서 그 원인이 이들에게 있음을 알고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돌아오도록 하였으나, 돌아올 수가 없자 세오녀가 짠 베를 받아 왔다. 그 베를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해가 다시나와 밝아졌다고 한다. 설화에서는 어둠과 연관있는 사람은 보통의 사람과 다른 인물로 묘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비형랑에 관한 이야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이 데려다 궁궐에서 키웠다. 비형랑은 왕을 위하여 귀신들을 동원하여 다리를 놓기도 하고 왕을 위해 일할 귀신을 불러다 주기도 하는 등 신기한 행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성경적 접근: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요일1:5요1:4). 또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계21:23)이며 그 말씀도 사람들에게 빛이 된다. 그 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위로와 지혜와 침도 빛으로 상징되고 그로 인해 살아가는 성도의 거룩하고 고상한 삶도 빛으로 표현하다(엡5:8). 이와 반대로 어둠은 빛의 반대 개념적인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산단의 세계, 죽음, 불행, 죄와 무지가 그것이다(욥18:5엡5:8,12). 이와 같은 빛과 어두움의 상징적 대조 수법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특징이다. 그러나 빛과 어두움처럼 하나님의 세계와 세상, 하나님의 힘과 사단의 힘이 이원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속성이 대비된다는 의미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육체를 따른 판단(8:12-20)
참된 공의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동기와 기준으로 사물과 사안을 판단하는 것이 불신 세계의 폐단 중 하나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진리대신 그리스도까지 배척하였다. 과연 육체를 따르는 판단의 과오와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1. 사물의 외관을 중시함
사람들은 사물의 본질보다도 사물의 외관을 중시한다. 외적인 멋과 아름다움을 그 마음씨와 인격보다 더 선호하며, 사람의 지위나 출신 배경을 사람의 됨됨이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릴리 나사렛 목수로 나선 그리스도를 외관만 보고 무시했던 것이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라고 한 것이다.
2. 외적인 상황을 중시함
사람들은 또 상황의 의미보다 그 상황 자체를 중시한다. 가령 불의한 자일지라도 그가 현재 권세를 지니고 있거나 재물이 많으면 그를 인정하고 따르면 합세한다. 반대로 의를 위해 곤란한 상황을 당한 사람은 경원한다. 상황에 깃든 영적, 도덕적인 요소와 의미는 경시한 채 현실 상황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그들은 땅에 계신 예수의 상황만 중시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절)고 하신 것이다.
3. 서로 속이고 속는 삶
이와 같은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인해 이 세상에는 항상 거짓과 기만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3:13)라고 한 것처럼 외적인 것만 중시하는 인간의 판단으로 인해 거짓 사기꾼에게 속고, 거짓 이단 목회자에게 속고, 사단에게 미혹되어 그 삶을 망치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생명의 빛을 얻으려면(8:12-20)
빛의 모든 생명체의 활동과 유지의 필수 요소이다. 태양이 없으면 삼라만상은 사멸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나 영광, 그리고 그분의 진리와 위로와 힘을 빛으로 상징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으로 표현하신다.
1. 빛이 필요한 세상
주께서 자신을 빛이라고 표현하는 이면에는 이 세상은 어두움에 처해 있다는 지적이 내포되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어두움을 지니고 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그로 인해 도덕적, 윤리적인 가치에 무지해져 가는 것이 세사의 실태이다.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여'(잠2:13)라고 성경은 지적한다.
2.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
태양이 떠오르면 삼라만상의 실태가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세상의 빛'(12절)이라고 하셨다. 먼저 하나님과 그 진리의 세계를 드러내 주셨다. 그 다음, 이 세상의 상태를 알게해 주셨다. 그리고 사망과 죄와 심판에 처한 상황을, 그 다음 영원한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보여 주셨다. 십자가의 대속 진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처럼 인류에게 종교, 윤리, 철학적으로 온전한 빛을 비춘 존재는 없는 것이다.
3. 생명의 빛을 얻으려면
'나를 따르는 자'(12절)가 생명의 빛을 얻게 되리라고 하셨다. 장님들이 앞선 인도자를 따르듯 그리스도를 굳게 의지하며 행하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12절)하게 된다. 그의 약속, 그의 계명을 따르는 자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밝은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 길의 끝은 영생 천국이요,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계21:25),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22:5)고 성경은 증언한다.
자신을 밝히신 예수(요8:21-30)
◈ 원문강해 ◈
유대인들의 몰이해
여러 가지 증거를 보고도 불신하는 군중들을 향해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히셨으며,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다.
1. 근본이 다름(21-23절)
1) 주의 가시는 곳에 갈 수 없는 자들
( jEgw; uJpavgw kai; zhthvsetev me, kai; ejn th'/ aJmartiva/ uJmw'n ajpoqanei'sqe: o{pou ejgw; uJpavgw uJmei'" ouj duvnasqe ejlqei'n.에고 휘파고 카이 제테세테 메…호푸 에고 휘파고 휘메이스 우 뒤나스데 엘데인;내가 가리기 너희가 나를 찾아가…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1절)
본문은 요7:33,34와 유사한 말씀이다. '내가, 나의'( jEgw에고)라는 1인칭 단수 대명사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휘파고(uJpavgw가리니)는 사람 앞에서 떠나가 버리는 것이나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나타낸다(Arndt-Gingrich). 제테세테 메(zhthvsetev너희가 나를 찾아가)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후에 예수를 그들의 메시야로서 찾을 것이나 그때는 이미 늦는다는 뜻으로 본다(J.H.Bernard). 기회를 상실한 그들의 운명에 대해 예고하신다(W.Barclay). 기회라는 것은 한 번 잃게 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경우들이 허다하므로 주어졌을 대에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엡5:16). 우뒤나스데 엘데인(ouj duvnasqe ejlqei'n오지 못하리라)은 현재 직설법과 제2단순과거 부정사의 문장으로서 직역하면 '올 수 없다'이다. 기회를 상실하면 비록 그들에게 우선권이 부여되었다 하더라도 약속에 참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2) 예수를 조소하는 자들
(e[legon ou\n oiJ jIoudai'oi, Mhvti ajpoktenei' eJautovn엘레곤 운 호이 유다이오이 메티 아포크테네이 헤아우톤;유대인들이 가로되…저가 자결하려는가, 22절)
엘레곤(e[legon가로되)은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예수의 경고에 대한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를 분별한 능력이 있었다면 예수 앞에 무릎을 끓었을 것이나 오히려 조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마음이 강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메티(Mhvti∼는가)는 부정적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에 사용되는 부정적인 불변사이다(Arndt-Gingrich). 그러나 본문은 조롱적인 말이다. 아포크테네이 헤아우톤(ajpoktenei' eJai'nw'자결하려)은 아포크테이노(ajpoktei'nw죽이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헤아우톤(eJautovn스스로)이라는 지시대명사와 함께 쓰여 '자살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시려는 곳이 자결로 인하여 갈 수밖에 없는 지옥인 양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갈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조롱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신들이 가게 될 것이 바로 지옥임을 그들은 상상조차 못하였다(W.Barclay).
3) 이 세상에 속한 자들
( JUmei'" ejk tw'n kavtw ejstev, ejgw; ejk tw'n a[nw eijmiv: uJmei'" ejk touvtou tou' kovsmou ejstev휘메이스 에크 톤카토 에스테…휘메이스 에크 투투 투 코스무 에스테;너희는 아래에 났고…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23절)
에크 톤 카도 에스테(ejk tw'n kavtw ejste아래서 났고)는 요한복음에 독특하게 나오는 말로 요세푸스의 사상에서 볼 수 있다(A.T.Robertson). '아래로, 밑으로'를 의미하는 이 부사는 죄인들의 거처로서의 땅을 가리킨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을 가리키는 '위'의(요3:31) 반대어이다(F.Buchsel). 주님은 자신을 조소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근본을 파헤치심으로 함구하게 하신다. 에크 투투 투 코스무 에스테(ejk touvtou tou' kovsmou ejste이 세상에 속하였고)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Wycliffe). 세상은 사람이 사는 땅이나 인류를 가리켜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죄로 인해 파멸되고 타락되고 모든 신적인 것과 배치되는 상태를 나타낸다(Arndt-Gingrich). 즉 하나님을 거슬리고 그분의 뜻에 반하는 상태에 처해진 인간과 그이 구조적 삶의 형태 등을 함축한다.
2. 죄 가운데 죽게 될 유대인들(24-27절)
1) 믿지 아니하면 죽게 됨
( eja;n ga;r mh; pisteuvshte o{ti ejgwv eijmi, ajpoqanei'sqe ejn tai'" aJmartivai" uJmw'n.에안 가르 메 피스튜세테 호티 에고 에이미 아포다네이스테 엔 타이스 하마르티아이스 휘몬;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4절)
메 피스튜세테(mh; pisteuvshte믿지 아니하면)는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으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즉 '너희가 믿게 되지 않는다면'이란 뜻이다(A.T.Robertson).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 이외에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천명하는 말씀이다(黑崎).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죽음만이 기다린다(Wycliffe). '내가 그인 줄'(o{ti ejgwv eijmi호티 에고 에이미)란 직역하면 '내가∼이란 것을'이다. 여기에서 에고(ejgwv내가)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본문은 예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말씀으로서 예수의 영적 속성을 암시한다. 그분은 말씀이시며(요1:1-3),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요1:29,36), 하나님의 독생자(요3:16), 위로부터 오신 자(요3:31,33),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3:34 7:18,28), 빛(요18:12) 등이다. 아포다네이스데(ajpoqanei'sqe죽으리라)는 아포다네이스데(ajpoqnhvskw죽다)의 미래 중간태 직설법으로 동작자가 강조되고 있다. 예수께서 위에서 나신 분, 곧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처하게 될 운명을 언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가리킨다. 아집과 독선, 영적 무지는 영원한 것을 잃게 만드는 함정이다.
2) 예수가 누구인가 질문함
(Su; tiv" ei\_ ei\pen aujtoi'" oJ jIhsou'", Th;n ajrch;n o{ ti kai; lalw' uJmi'n쉬 티스 에이…텐 아르켄 호 티 카이 랄로휘민;네가 누구냐…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5절)
쉬 티스 에이(Su; tiv" ei\너는 누구냐)는 예수의 자신에 대한 주장, 즉 자신의 메시야이심과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말씀을 빌미로 신성모독죄로 고소하려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암시한다(A.T.Robertson).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만한 영적 지식이 없 는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예수가 누구신간 알게 되었다(W.Barclay). 텐 아르켄(Th;n ajrch;n처음부터)은 참으로 난해한 문장이다.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을 성서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처음부터'라는 말로 번역되지 않으며, '처음부터'란 엑스 아르케스(exajrch'",요16:4), 아프 아르케스(avpj ajrchv"요15:27요일1:1)로 쓰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J.H.Bernard). 또 다른 이는 '본질적으로 나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바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Vincent, Bernard). 70인역(LXX)에서는 이 문구가 시작에 '처음에'(at the beginning)라는 의미로(창43:20)쓰인다. 헬라어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뜻에서 '본질적으로, 원래'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예수께서 처음부터 자신이 증언해 오셨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Wycliffe), '너희와 말하는 것은 도무지 소용없는 일'이라고 개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 하늘의 것을 말씀하시나 깨닫지 못함
(kajgw; a} h[kousa par j aujtou' tau'ta lalw' eij" to;n kovsmon oujk e[gnwsan카고하 에쿠사 파르 아우투 타우타 랄로 에이스 톤 코스몬 우코에그노산;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은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깨닫지 못하더라, 26,27절)
에쿠사(h[kousa들은)는 아쿠오(aujtou듣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주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의 근거를 밝히신다. 그것은 예수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들은 것이므로 그분이 참일진대 그 모든 말도 참되다는 논리이다. 예수의 말씀은 곧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들은 바 말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우크 에그노산(oujk e[gnwsan저희는…깨닫지 못하더라)도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의 주요 관심은 현세적인 구원자, 정치적인 메시야였으므로(Westcott).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임을 인정코자 하지 않았다(A.T.Robertson). 예수를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경건의 주요 관건이다.
3. 아버지와 함께하신 그리스도(28-30절)
1)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하심
( {Otan uJywvshte to;n uiJo;n tou' ajnqrwvpou, tovte gnwvsesqe o{ti ejgwv eijmi, kai; ajp j ejmautou' poiw' oujdevn, ajlla; kaqw;" ejdivdaxevn me oJ path;r tau'ta lalw'.호탄 휩소세테…토테 그노세스데 호티 에고 에이미 카이 아프 헤마우투 포이오 우덴 알라 카도스 에디 닥센 메 호 파테르 타우타 랄로;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로 알리라, 28절)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라는 말씀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다루는 것으로 본선에 여러 번 나온다(요3:148:28;12:32,34).
그노세스데(gnwvsesqe알리라)는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단순과거식 미래 중간태이며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즉 그들이 지금 말씀을 통해서 믿지 못하는 것을 그때의 사실을 통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J.A.Bengel). '내가 그인 줄'(o{ti ejgwv eijmi호티 에고 에이미)란 직역하면 '내가∼이다는 것을'이다. 여기에서 에고(ejgwv내가)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카도스 에디닥센(kaqw;" ejdivdaxevn가르치신대로)은 디다스코(didavskw가르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그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분은 이 주장을 거듭 되풀이하셨는데(A.T.Robertson), 성령이 임한 사람만이 이에 대해 알게 된다.
2)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는 일을 하심
(oujk ajfh'kevn me movnon, o{ti ejgw; ta; ajresta; aujtw'/ poiw' pavntote.우크 아페켄메 모논 호티 에고 타 아레스타 아우토 포이오 판토테;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29절)
우크 아페켄(oujk ajfh'kevn두지 아니하셨느니라)은 아피에미(ajqivhmi가게 하다, 버려두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된다(Arndt-Gingrich). 예수와 아버지는 완전한 영적 일치의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분을 통해 나타난 역사라든지 그분이 행하신 사역은 아버지를 분리하고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ejgw;에고)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아레스타(ajresta;기뻐하시는 일)는 '뜻에 맞는, 합하는'을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하나님', 혹은 '사람이 흡족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W.F-oerster).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힘쓴다면 그분 또한 우리의 생애를 위대하게 하실 것이다.
3) 많은 사람이 믿게 됨
(Tau'a aujtou' lalou'nto" polloiv ejpivsteusan eiv" aujtovn타우타 아우투 랄룬토스 폴로이 에피스튜산 에이스 아우톤;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6절)
랄룬토스(lalou'nto"말씀은 하시매)는 랄레오(lalevw말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반대와 불신, 적대감의 표출, 조소 등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계속 진실을 말씀하셨음을 나타낸다.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유념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거부하거나 불유쾌한 반응을 보인다 하여 중단하는 것은 사역자의 도리가 아니다. 영혼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주께 소명 받았음을 확신한다면 대중의 인기를 염두에 두지 말고 진실을 말하도록 힘써야 한다. 폴로이(polloi많은 사람이)는 예수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증가했음을 나타낸다. 에피스튜산(ejpivsteusan믿더라)은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믿기 시작한 것을 나타낸다(A.T.Robertson). 특히 이 말뒤에 에이스 아우톤(eiv" aujtovn)을 직역하면 '그 안으로'란 뜻으로 곧 그리스도에로 향하는 믿음임을 암시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예수의 출발점과 마지막 죽음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며, 예수는 땅에 속해서 아래로부터 출원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늘에 속한 자임을 밝히고 있다(C.K.Barrett, F.L.Godet)
1. 죄 가운데 죽는 자(21-24절)
21절은 요7:34에 인용한 자료들에 대한 복음서 저자의 부연 설명으로서 '다시 이르시되 너희 죄 가운데서'라고 명백하게 하고 있다(R.Bultmann). 따라서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라는 문장을 삭제해야만 된다(U.Becker). '나는 가겠고'(ejgw uJpavgw에고 휘파고)에서 '나는 간다'라는 어법은 요한의 독특한 표현법으로서 예수가 하나님에게 와서 다시 돌아간다는 뜻으로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Barrett). '죄'(aJmartiva하마르티아)가 24절에는 복수로 사용되었으나 이 구절에서는 단수로 표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인 '예수를 부인하는 죄'에 초점을맞추었기 때문이다(Godet, Barrett).
'찾다가'(zhthvsetev제테세테)는 유대인이 믿음을 가지고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여 찾는 것을 의미한다(Meyer). 또한 이 찾음은 구세주에 대해 사죄하는 자세로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천년 왕국을 열광적으로 신봉하는 정치적 구원자를 찾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Lange). '죽겠고'(ajpoqanei'sqe아포다네이스데)는 로마에 의해서 개인적인 파멸을 의미하거나(Alford), 당대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Grotius, Lampe).
22절의 '유대인들이 가로되'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적대자들을 지칭하며 본문은 이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많은 수호를 암시해 주고 있다(W.H.Van Koren).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살'할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자살하는 사람의 영혼은 지하 세계의 어둠의 영역 속에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Josephus). 그러나 일부 주석가들은 그들의 표현을 다르게 바꾸기도 하였다. 즉 '만일 당신(예수)이 가장 낮은 지옥으로 간다면, 우리는 거기까지 따라갈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다'.
23절은 특히 대구법이 강조되어 있다. '위에서'(ejk tw'n a[nw엑크 톤 아노)가 천사의 세계를 지칭한다면, '아래에서'(ejk tw'n kavtw에크 톤 카토)는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천상의 세계를 제외한 전 영역, 즉 '이 땅 위에'라는 의미일 것이다(Barrett, Beasley Murray). 이에 반하여 '위'는 하늘을 의미하며, '아래'는 지옥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Stier, Bengel. Fikenscher). 또한 엡4:9에서는 '음부'(a{dh"하데스)를 의미하기도 한다(Koppe). 또한 전자는 예수의 신적인 우월성을 나타내며, 후자는 그의 완전한 신성을 가리키고 있다(Lampe).
'세상'(kosmo"코스모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 '우주'를 뜻하는 말로 쓰였는데, 헬라 세계에서는 자연적 질서의 총체라는 사상을 나타낸다. 70인역(LXX)에서는 '단장'이란 뜻으로 쓰였다. 요한에게서 이 말은 '하늘나라'의 반대 개념으로서 '사단이 지배하며'(요12:31), '죄와 어두움이 있고'(요1:97:7), '심판이 대상이 되는'(요16:31), '인간을 포함한 세속적 조직, 질서의 세계'라는 뜻을 함축한다.
24절의 '나는∼이다'라는 용법은 거의 헬라적인 표현법이 아니므로, 유대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여호와'(hwhy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표현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기도 했다(출3:14). 요한 신학에서 이러한 예수의 표현 어법은 예수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려고 사용하였다기보다는 예수가 자신에게 많은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시도한 표현이라고 보는 자도 있다(C.K.Barrett).
2. 처음부터 말해왔던 자(25-27절)
25절의 '네가'라는 표현은 어떤 물음을 위한 것도 아니라 단순히 분노의 표시였으며(Koecher), 경멸하는 데 사용된 일종의 공식이었다(Lampe). '처음부터'의 의미는 ① 계1:8에 제시된 '알파'(Alpha)를 의미(Gnostics, 교부들의 주장), ② 예수가 사역을 시작한 첫 실정을 의미하기나(Beza), ③ 부사적 어법으로 사용되어 표기된 '원래부터'(Originally)라는 의미(Bultmann), '모든 만물의 처음'(Yril, Lampe)이라는 뜻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처음부터'를 '원래, 처음에'로 보아 '원래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란 의미로 보기도 한다(J.H.Bernard).
일부 해석자들은 26절의 '처음부터'와 거의 시작 구절인 '내가∼많으나(polla; e[cw폴라 에코)를 연결시켜서 문장을 새롭게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말을 할 때 나는 너희에게 할 말이 많았었다"(Hofmann). 또는 "확실히 나는 가지고 있었다-내가 할 것들을-네에게 말한 많은 것들을"(Baumlein)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3. 인자와 아버지(28-30절)
28절의 '든'(uJyou'n휘푼)이라는 동사는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로서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릴 것을 말하고 있다(요3:1412:32, Beasley-Murray. '∼알고 ∼알리라'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인 요한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후에도 예수의 천상적 위치에 대하여 인정하기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C.K.Barrett). 유대인들은 '예수가 들리워진다'는 말뜻을 '예수가 메시야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라고 이해하였을 것이다(Lange).
29절의 '보내신(pevmya"펨프사스)이란 용어 속에는 '예수를 보내신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예수를 인정하여서 하나님의 영원한 조력자로 삼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Winer). '두지'(ajfh'ke아페케)는 예수의 성육신 기간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무제한적인 미래까지 포함하고 있다(Stier). 특히 29절에는'아버지'(oJ pathvr호 파테르)가 생략되어 있는데(Lachmann, Tischendorf) 사역 측면에서 보내신 하나님과 보냄받은 예수의 연합, 교제를 제시해 준다.
30절을 통해서 저자 요한은 독자들에게 결론적인 반응들을 보여 주고 있다. '많은 사람'(polloi;폴로이)은 예수와 논쟁하였던 대적자 출신들이거나 거기서 구성하던 구경꾼들을 지칭 할 것이다(L.Morris, William, H.Van Doren).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죄 가운데 죽으리라(21-24절)
21절의 '다시'라는 말은 앞 구절과의 막연한 연결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그가 저희들을 떠날 것인데 그들은 그곳에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7:33,34). '가리니'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 즉 그의 죽음을 나타낼 때만 요한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저희들의 죽음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 가운데' 죽어서 결코 예수의 계신 곳에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죄 가운데 죽는다는 말은 구약에도 등장하는 표현인이며(잠24:9겔3:818:18), 거기에서도 본문에서와 같이 아무런 부가적 설명이 없다. 죽음이 주는 공포감은 그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L.Morris). 그들이 왜 예수를 찾으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선 그들이 계속해서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의 메시야를 찾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Meyer)와, 그들이 예수를 찾을 때에는 이미 그 시기가 늦어져서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라는 견해(J.H.Bernard)가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러한 충격적 선언에 대해 마치 그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22절의 '자결하려는가'라는 질문은 분명히 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 부정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한 것이다. '설마 자살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그가 죽으실 것에 대해서는 그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L.Morris). 그들은 예수와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라는 인식 없이 예수께서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죽음의 세계에 속할 것이라 생각했지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M.C.Tenney).
23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최후로 맞이할 죽음(21절) 이외에도 그들과 예수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이질성에 대해 설명하신다(Beasley-Murray). 즉 예수의 대적자들은 이 세상에 속하였고 아래로부터 왔다. 그들의 사고나 종교는 모두 이 땅의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질서의 존재이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 때문에 결국 그들은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것이다.
24절의 '내가 그인 줄…'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L.Morris). 이것은 예수의 신적 계시의 주장인데,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유일하고 영원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말씀에 착안한 말씀이라는 견해(신32:39사4:4,C.H.Dodd)와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이사야가 기대하고 바라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밝히신 것이라는 의견(사43:10), 또한 자신이 바로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 것이라는 견해(Lenski) 등이 있다. 결국 이 구절에는 술부(述部)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개념만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에 대한 모든 이해를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25-30절)
25절에서 유대인들은 물론 신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예수의 주장이 특별한 것임은 감지했던 같다. '네가 누구냐'라는 것은 그들의 이러한 심정을 드러냈다(Morris). 특별히 대명사를 첫 번째 위치에 놓음으로써 냉소적 의미를 담으려고 했기 때문에, 이 구절을 '이런 말을 하는 너는 과연 누구냐'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A.Plummer).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 '나는…말하여 온 자니라'(25절)의 해석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나는 처음부터 말하고 있는 그다'라고 받아들이는 견해(Barrett), '도대체 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가'(RSV, NEB, Weymouth, Goodspeed, Knox), '결국 내가 또 너희에게 말한다'(ARV)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결국 이 구절이 예수의 선재성을 나타내는 것인지, 자기 계시를 나타내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문맥상 예수의 자기 증거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2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의 증거가 거짓되다는 것에 대해 지적할 부분이 많이 있었다. 결구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아버지와 예수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M.C.Tenney). '그에게서 들은 그것을…말하노라'는 예수와 하나님과의 메시지가 하나임을 나타내는 강조적 역할을 한다(Morris). 또한 그 메시지를 '세상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소식을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Hendriksen).
27절에는 그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깨닫다'는 복음서에서 자주 쓰이는 것인데 직관적 지식을 나타내기보다는 믿음과 관련될 때 사용되고 했다(Tenney).
28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들리신 후에야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단어는 '들다'이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는 우선적으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십자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보통 신약의 다른 저자들은 이 동사의 의미를 '높임을 받는다'로 해석한다. 결국 요한은 이 단어에 그의 이중적인 의도를 담아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지만 결국 죄인을 구원하시는 최대의 영광으로 높임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내가 그인 줄 알고'는 영원한 자존자(출3:14,E.Stauffer)이신 하나님의 속성이 그에게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로 그에게 속해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신 것이다(Tenney).
29절에서는 네 번째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16,18,26절). 예수께서는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행하신 일은 사실 아버지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된다(Morris). 이에 대한 강조적 표현으로 '나를… 아니하셨느니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의 동일성과 예수의 신적 지식의 근본을 밝히시는 부분이다(Olshausen). 요한은 이 논쟁의 끝을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 많은 사람들이란 그저 구경꾼인지, 그의 적대자들이었는지 아니면 각 부류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분명치 않다(Carter).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그리스도의 일위성에 대한 성경적 증거
일위 이성의 교리는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초감각적 실재와 불가해한 신비의 표현이며 우리의 지각이 미치는 인간사 속에서는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고 인간 이성에 의해서도 지지 받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교훈에 특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성이 배가되는 것이다.
1. 성경에는 이위성을 지지하는 증거가 없다
만일 예수님 안에 이중적 인격이 존재했다면 당연히 성경에서 그에 관한 모종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단 한 가지 증거도 없다. 중보자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하나님의 삼위간에 한 위가 다른 위에게 말하고 있는 바 '나와 너'의 구별이 전혀 없다(시2:740:7,8;요17:1,4,5). 더욱이 예수님은 창1:263:22;11:7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듯 자기를 칭하실 때 복수형을 사용하시지 않았다. 요3:11에서도 그리스도의 일위성을 증거한다.
2. 성경에서 이성은 일위에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두 성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지만 그 구절들에서 오직 한 인격만을 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롬1:3,4갈4:4,5빌2:6-11). 몇몇 구절에서는 두 성이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성경 어는 곳에서도 추상적인 신성이나 이런 신적 능력이 인성과 결합되었다거나 인성에 현현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구체적인 신성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인 인격이 인성과 연합되었다고 가르친다(요1:14롬8:33말4:4딤전3:16하2:11-14;요일4:2,3).
3. 한 위격이 양성의 어느 한 쪽에 관련되어 있다
한 성(性)의 속성들이 위격에 귀속되는 것으로 서술하면서도 그 위격을 다른 성에서 유래된 칭호로 부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인적 속성과 행동들이 위격에 귀속되어진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 위격을 신적인 칭호로 부르고 있다(행20:28고전2:8골1:13,14). 다른 한편으로는 신적인 속성과 행동들이 위격에 귀속된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 위격을 인간적 창조로 부르고 있다(요3:136:62;롬9:5).
자살의 행위와 그에 대한 내세의 처벌(8:21-30)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행위를 우리는 자살(自殺)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자살은 신에 대한 도전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자살이 신에게 자신을 헌납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종교적으로 추앙을 받는 경우도 때때로 있다.
근동 / 팔레스틴: 근동 지방에서는 자살이 행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것은 자살이라기보다는 죄에 대한 대가로 강요되는 일종의 처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자살한 사람들은 그것을 용서받지 못할 신에 대한 죄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양 / 그리스 :그리스의 신화(神話)를 보면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해 자살한 나르시스라는 어여쁜 소년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나르시스라는 소년은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소년이었다. 나르시스는 숲 속의 연못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을 가장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연못의 물 속에 비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자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 모습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르시스는 역시 연못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아름다운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연못에 뛰어들어 그만 죽고 말았다. 나르시스가 죽은 후 그가 빠져 죽은 연못 주변에는 나르시스를 닮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고 전해진다.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나르시스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에 취하여 자살하고만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는 나르시스가 받은 종교적인 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대신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아름다운 수선화 꽃을 피게 하였다고 했다. 이것을 보면 나르시스의 자살은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자신을 바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동양 / 한국: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승려 진표에 관한 기록을 보면 자살이라는 행위가 신권(神權)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자기를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승려 진표는 신라의 완산주(지금의 전주) 만경현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이고 어머니는 길보랑이며 성은 정(井)씨였다. 진표는 나이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금산사의 숭제라는 승려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의 스승인 숭제법사가 진표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고명한 승려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서 다섯 가지 계율을 받았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진표도 유명한 산을 두루 다니면서 수행을 쌓았다. 진표의 나이 27세 되던 해에 보안현이란 곳에 있던 절로 들어가 고행을 하면서 미륵(彌勒)불상 앞에서 열심히 계법(戒法)을 구하였다. 그러나 3년동안부지런히 수행을 하며 계법을 구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으니, 진표는 이에 실망하고 높은 바위 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다. 그때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손으로 진표를 받아 돌 위에 올려 놓았다. 진표는 자살을 후회하고 참회하며 다시 열심히 고된 수행을 하였다. 그 후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 지장(地藏)보살이 나타나 진표를 칭찬하면서 진표에게 계율을 주고 사라졌다.
성경적 접근: 성경에서 자살하는 자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사울 왕(삼상31:4), 시므리 왕(왕상16:18),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룟 유대다. 성경은 자살을 죄로 단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윤리 가치로 살펴볼 때 자살은 죄로 간주된다. 시므리 왕이 불을 지르고 자살한 것은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왕상16:19)이라고 언급한다. 자살에 대한 내세의 벌은 불신자에 대한 형벌에 기준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에도 주인이 아닌 청지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살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기에 불신자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가버리는 것과 남는 것들(8:21-30)
이 세상에는 소진되는 것과 순환되는 것들이 있다. 물과 공기 같은 것들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여 순환한다. 그러나 한 번 소진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세상의 삶과 관련된 것들의 속성이 그것이다.
1. 사람의 삶도 가버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24절)고 주님은 말씀한다. 우리의 삶은 반복되거나 순환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소진형'이다. 수명도, 젊음도, 힘도 다시는 재생되지 않는다. 소멸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권하는 것이다. 한 번 가면 다시는 올 수 없는 인생이기에 아껴야 한다. 수명과 힘을 쓸 곳에 써야 한다. 그럼에도 죽음과 늙음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삶을 소진시키는 어리석음을 오늘도 범하고 있다.
2. 은혜의 때도 가버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21절)라고 예수는 말한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인생은 영생 얻을 기회다. 이 기회 역시 한번 지나가면 오지 않는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관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성령은 말씀한다. 유대 땅에 예수가 오셨다가 가셨듯 하나님의 구원 은총도 영원히 이 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태양이 지듯 그 은혜의 시효도 철폐하실 것이다.
3. 가버리고 남는 것들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2절). 만일 인간이 그 삶을 소진해 버리고 은혜의 기회도 거절한다면 그 인생에서 남는 것은 '절망'과 '심판'뿐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인생이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살려면 그 삶을 소진시켜서는 안된다. 하늘 진리를 얻고 그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삶을 선용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예수그리스도의 확신(8:21-30)
어떤 일에 대한 확신은 그 일에 대한 신념과 가치 판단의 기반이 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확신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확신은 우리 성도들도 본받아서 지녀야 할 것이다.
1. 자신의 소속에 대한 확신
성도들은 이 세계에서 거하고 있지만 자신의 원 소속은 늘 '하늘'임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는 위에서 났으며…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절)고 천명하신다. 그와 같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계셨기에 사단의 세력과 유혹을 물리치시고 성업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가?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확신이 있는가? 우리도 나의 소속된 세계는 '하늘'임을 확신하고 있어야만 죄와 불의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골3:1-5).
2. 자신의 현실에 대한 확신
성도에게 중요한 사안은 과거가 아니다. 현실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했으며 어떤 처지에 있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현재 내가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절)고 하신다. 자신의 현실, 자신의 처지, 자신이 현재 하는 일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 내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일임을 확신할 수 있을까?
3.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
'내가 가리니'(21절),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알리라'(28절).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 죽음 후에 부활하사 승천하실 것을 확신하셨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히12:2)라고 한 것처럼 영원한 진리의 승리를 확신하는 성도만이 자신의 사명과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케 하는 진리와 마귀의 자식들(요8:31-41)
◈ 원문강해 ◈
자유와 예속
본문에서는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으며, 예수를 공격하는 유대 종교의 엘리트들이 마귀에게서 난 자들임을 경고하고 있다.
1. 종의 신분에 머무는 자들(31-34절)
1) 참제자가 되는 길
(jEa;n uJmei'" meivnhte ejn tw'/ lovgw/ tw'/ ejmw'/, ajlhqw'" maqhtaiv mouv ejste에안 휘메이스 메에네테 엔 토 로고 토 에모 알레도스 마데타이 무에스테;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1절)
메이네테(meivnhte거하면)는 메노(mevnw머물다, 거주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이다. 주의 말씀 속에 끊임없이 머무는 일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예수의 말씀에 계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그분에게 부단히 배우며, 말씀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반복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제자의 할 일이다(W.Barclay). 이 단어는 인간과 땅의 가변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연속성과 관계된다(F.Hauck). 믿음의 본질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임을 교훈하신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하다(Smith-Lee). 알레도스 마데타이(ajlhqw'" maqhtai참…제자)는 제자의 확실성을 강조한다(Arndt-Gingrich). 제자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모양만 갖추고 말씀을 순종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예수에 대한 지적인식만 가지고서는 참제자가 되지 못한다. 영적 교통을 나누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요15:4).
2) 진리를 알아야 함
(kai; gnwvsesqe th;n ajlhvqeian, kai; hJ ajlhvqeia ejleuqerwvsei uJma'".카이 그노세스데 텐 알레데이안 카이 헤 알레데이아 엘류데로세이 휘마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2절)
그노세스데(gnwvsesqe알진)는 기노스코(givwskw알다)의 2인칭 복수 미래 중간태 직설법으로 동작자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J.G.Machen). 본 절은 '너희 자신들을 위해서 알지니라'는 뜻으로서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는 일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진리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다(요14:6). 그를 진리로 알고서야 우리의 어두운 눈이 하나님에 의해 열리게 되므로 예수를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알레데이아(ajlhvqeia진리)는 알레데스(ajlhvqeia진실한, 신임할 만한)에서 유래한 것으로 숨김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엘류데로세이(ejleuqerwvsei자유케 하리라)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 가다)에서 유래한 엘류데로스(ejleuvqero"자유로운)가 변형된 고대 동사 엘류데로오(ejleuqepovw자유롭게 해주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나타내는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며(롬6:18갈5:1,A.T.Robertson), 두려움이라든지 자아, 죄 등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W.Barclay). 본문에서는 특히 바울이 롬8:2에서 말한대로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됨을 시사한다(A.T.Robertson).
3) 죄를 범하면 죄의 종
(oujdeni; dedouleuvkamen pwvpote: pw'" o{ti pa'" oJ poiw'n th;n aJmartivan dou'lov" ejstin th'" aJmartiva".우데니 데둘류카멘 포포테…아멘 아멘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포이온 텐 하마르티안 둘로스 에스틴 테스 하마르티아스;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3,34절)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논쟁의 와중에 나온 거짓된 말이다. 과거 그들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프톨레이, 시리아 왕들에 의해 지배되었었다(A.T.Robertson). 파스(pw'"마다)는 '모든 사람들, 누구든지, 모든'을 뜻하며, 본문에서처럼 분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누구든지∼사람은'이 된다(Arndt-Gingrich).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퀴리오스(kuvrio"주) 다음으로 흔하게 나오며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약에서도 120여 회 이상 나타난다(G.Bertram, B.Reicke).
포이온(poiw'n범하는)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습관적으로 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마약과 같이 죄라는 것도 습관화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경계가 요망된다(A.T.Robertson). 둘로스(dou'lov"종)는 '주인, 자유인'의 의미에 반대되는 말이다. 강제적인 섬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 없는 인생이 죄와 맺는 관계가 이와 같다(롬6:17).
2. 예수를 죽이려는 종된 자들(35-37절)
1) 집에 거하지 못함
(oJ de; dou'lo" ouj mevnei ejn th'/ oijkiva/ eij" to;n aijw'na: oJ uiJo;" mevnei eij" to;n aijw'na.호 데 둘로스 우 메네이 엔 테 오이키아 에이스 톤 아이오나 호 휘오스 메네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종은 영원히 지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5절)
우 메네이(ouj mevnei거하지 못하되)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함축한다. 종은 상속자가 아닌 까닭에 권리에도 제한이 있으며, 언제까지나 그 집에 머물 수도 없다. 그들은 확고한 지위가 보장되어 있지 않으며, 토지의 소유권도 없는 자들로, 언제라도 주인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A.T.Robertson). 엔 테 오이키아(ejn th'/ oijkiva집에)는 '가족, 식구'라는 의미가 있다. 오이코스(oi\ko"집)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O.Michel). 종은 영원히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는 주인이 머물도록 허락하는 동안만 그 집에 거할 수 있다. 휘오스(uiJo;"아들)는 상속자이다. 그는 어릴 때에는 후견인 아래 있지만 그 집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영원한 가족 구성원이다. 예수는 아버지 집의 상속자이시며, 그분 안에 있는 성도들도 상속자이다(롬8:17).
2) 아들만이 자유케 함
(eja;n ou\n oJ uiJo;" uJma'" ejleuqerwvsh/, o[ntw" ejleuvqeroi e[sesqe.에안 운 호 휘오스 휘마스 엘류데로세 온토스 엘류데로이 에세스데;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6절)
엘류데로세(ejleuqerwvsh자유게 하면)는 엘류데로오(ejleuqepovw자유롭게 하다, 해방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으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A.T.Robertson). 자유롭게 되는 길이 예수그리스도뿐임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권능을 받으셨으므로 원하는 자들의 죄를 속하여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가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자유롭게 하는 진리'이다(Wycliffe). 온토스(o[ntw"참으로)는 '사실로, 확실히'를 뜻하는 부사이며, 에이미(eijmiv이다, 있다)에서 유래하였다(Arndt-Gingrich). 엘류데로스(ejleuvqeroi자유)는 '자유로운, 독립한, 매이지 않은' 등을 뜻하는데, 율법의 저주, 죄와 허물, 죄의 권세, 죽음의 공포 등이 포함된다(Smith-Lee). 예수께서 주신 자유는 이 모든 속박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자유이다(갈5:1).
3) 주의 말씀이 있을 곳이 없음
(ajlla; zhtei'tev me ajpoktei'nai, o{ti oJ lovgo" oJ ejmo;" ouj cwrei' ejn uJmi'n.알라제테이테 메 아포크테이나이 호티 호 로고스 호 에모스 우코레이 엔 휘민;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37절)
제테이테 아포크테이나이(zhtei'tev ajpoktei'nai;죽이려 하는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이다. 예수를 죽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를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적대감을 표시하는 이들이 있었다(A.T.Robertson). 육신적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영적으로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그분의 증거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黑崎).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과 무관함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Wycliffe). 하나님께서 가문이나 문벌을 중시하지 않으심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 코레이(ouj cwrei있을 곳이 없으므로)는 고대 동사 코레오(cwrevw자리를 만들다, 속에 담다)의 자동사적 용법이다(A.T.Robertson).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였다. 즉 그들 속에는 주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자리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3. 아비의 행사를 하는 자들(38-41절)
1)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함
(kai; uJmei'" ou\n a} hjkouvsate para; tou' patro;" poiei'te.카이 후메이스 운 하 에쿠사테 파라 투 파트로스 포이에이테;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8절)
에쿠사테(hjkouvsate들은)는 아쿠오(ajkouvw듣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유대인으로 이 행하는 행위의 원천을 규명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지식에 의존하고 있었다. 파라 투 파트로스(para; tou' patro;"아비에게서)는 그들의 근원이 그리스도와는 전혀 판이함을 암시한다. 그들은 마귀라는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영감이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악한 마귀에서 왔으므로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바께 없었다(Wycliffe).
포이에이테(patro;"행하느니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이 계속적으로 마귀가 지시하는 일을 행함을 나타낸다. 마귀에게 근원을 둔 사람들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으며, 그 결국은 파멸이다(마25:41).
2)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
( JO path;r hJmw'n jAbraavm ejstin. levgei aujtoi'" oJ jIhsou'", Eij tevkna tou' jAbraavm ejste, ta; e[rga tou' jAbraa;m ejpoiei'te:호 파테르 헤몬 아브라암 에스틴…에이 테크나 투 아브라암 에스테 타 에르가 투 아브라암 에포이에테;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거늘, 39절)
파테르(path;r아버지)는 인도 유럽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버지, 선구자, 창시자, 존경받는 사람, 늙은이, 선생' 등을 의미하며, 복수로 쓰일 때는 '조상'을 뜻한다. 70인역(LXX)에서는 거의 언제나 히브리어 아브(ba아버지)를 나타내는 데 쓰였다(G.Schrenk). 존경하는 뜻으로 혹은 구약의 위대한 신앙의 영웅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Arndt-Gingrich). 테크나(tevkna자손)는 축어적으로는 '자녀'를 뜻하지만 본문에서는 비유적으로 아브라함과 그들 믿음의 조상으로 모신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에포이에이테(ejpoiei'te할 것이어늘)는 미완료 능동태 시제이다. 계속적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행했어야만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행실로써만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W.Barclay).
3) 유대인들의 무지
( JHmei'" ejk porneiva" ouj gegennhvmeqa: e{na patevra e[comen to;n qeovn.헤메이스 에크 포르네이아스 우 게겐네메다 헤나 파테라 에코멘 톤 데온;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1절)
에크 포르네이아스(ejk porneiva"음란한 데서)는 매춘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예수가 마리아의 사생아라고 취급하는 그들의 욕설이 포함되어 있는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를 인정치 않으려고 이처럼 엄청난 신성모독을 범하기에 이르렀다(A.T.Robertson). 우 게겐네메다(ouj gegennhvmeqa나지 아니하였고)는 겐나오(gennavw낳다)의 완료 수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혈통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역사와 전통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전형이다(W.Barclay).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이 아브라함과 하나님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다(Wycliffe). 전통에만 매달리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부임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기에 쉽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요한 신학의 전형적인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요한은 예수가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유대인들은 죄와 죽음을 초래하는 자의 자손임에 반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다(C.K.Barrett).
1. 진리와 종의 선포(31-32절)
31절의 '자기를 믿는'(pepisteukovta" aujtw;페피스튜코타스 아우토)이라는 표현은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서 하나의 삽입구로 간주되고 있다. '믿다'라는 용어는 현재 부정사의 구문 변화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C.K.Barrett).
'거하면'(mei메이네테)의 의미는 '이미 진리 가운데 전부터 머물러 있으면'이라는 내용이거나(Kling),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지 사이의 상호 협조'를 의미하거나(Stier), '만일 네가 나의 가르침을 막 붙잡으며'라는 의도(Schleier), 또는 '만일 네가 나의 교리 속에 머물러 있다면'(De Wette) 등이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말씀의 순종, 준수와 제자도를 연관시킨다(요15:7,10).
32절의 '진리'(ajlhvqeia알레데이아)는 허상과 반대되는 실제, 참의 의미를 함축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요17:17), 예수님 당신 자신(요14:6)이 진리로 묘사되며, 성령도 '진리의 영'(요14:7)으로 언급된다. 유대교에서 진리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 그 자체였으며 율법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인간이 자유할 수 있었다(C.K.Barrett). 따라서 율법의 멍에를 자원하여 멘 자는 세속적인 불안에서 자유케 될 것이며(R.Nehunya, B.HaKanah), 지도자들이 율법에 적법하게 행동한다면 자유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Philo, Josephus).
33절의 유대인들의 대답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해방되는 자유가 정치적인 해방이나 도덕적인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선물로 받는다고 주장하는 예수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지 못했다(C.K.Barrett). 많은 현대 신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는 30절에 제시된 내용을 믿지 않았으며, 그 근거는 37절에서 이들에게 반박한 내용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30-32절은 하나의 삽입 구문이며, 29절에서 곧 바로 33절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Lucke, Luthardt).
2. 아브라함의 자손(34-38절)
34절의 '죄를 짓는'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즉 죄악을 행하는 자는 이미 죄에 예속된 자임을 자기 자신이 입증함과 동시에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죄의 노예로 전략되어 버린다는 계속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Sidebottom). 그러나 텐 하마르티안(thvn aJmartivan)은 캠브리지 역본(Cambridge MS)에는 생략되어 있으며, Db, Syr Sin, 사본에도 빠져 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도덕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애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편집 과정에서 편집가의 노력으로 첨가된 듯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35절에서부터는 갑자기 은유적인 표현법으로 바꾸어지고 있으며, 34절의 '종'(dou'lo"둘로스)은 죄의 종이나 마귀의 종이었으나, 35절에서는 한 집안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집안의 '아들'(uJio;"휘오스)과 단순한 '종'(dou'lo"둘로스)을 대조시키고 있다(J.H.Bernard).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는 구문이 a , w, G, 33, 124, Clement, Alexomdria 사본 등에는 빠져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서기관들과 해석학자들 사이에 일어난 논란의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며, 또한 35절 전체를 갈4:30히3:5와 같은 구절과 연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A.H.McNeile).
36절의 '그러므로'(ou운)라는 접속사는 35절과 36절에 제시된 '아들'이 동일 인물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Kling). 한편 아버지의 집에서 태어난 노예는 로마인들 가운데 잇는 아들에 의해서 자유를 얻게 된다(Elsley). 특히 헬라법률에 의하면 노예일지라도 양자도 입양할 수 있으며 형제를 삼거나 친자로서 상속인을 삼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Grotius).
37절에서 '있을 곳'(cwrei'n코레인)이란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는 '자리를 만들다, 지나가다'의 뜻을 갖는데 마카비 2서 3:40에서는 보고의 퍼뜨림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운동의 개념이 함축된 것으로 보며 활동의 의미를 가지고 '너희 안에 존속하다'라는 뜻으로 간주하기도 한다(J.Bernard). R.V.역은 부정사와 함께쓰여 '자유로운 길을 가지 못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요5:38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지 못하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38절에 대한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으며, 많은 변이 문형이 제시되었다. 특히 '아버지'(patriv파트리) 바로 뒤에 '나의'(mou무)를 첨가한 사본으로는 a, D, N, D, Syr, Sin 등이 있으나, B, C, L, T, W 사본 속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들은'(eJwrakate에쿠사테)이란 말이 표기된 사본(a, B, L, W)에는 이 용어가 두 번째 단락에 제시되었으나, '들은'(hjkouvsate헤오라카테)라는 용어는 사본들 중에서 a. D, D, N, Syr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첫 번째 단락과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J.H.Bernard, A.H.McNeile).
3. 유대인들의 처신(39-41절)
39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아버지가 누구이든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들의 아버지를 아브라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B.Crusius). 이는 그들이 육신적으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40,41절 서두의 데(de;그러나)는 39절에서 암시했던 '할 것이어늘'이라는 미완료 형태의 말과 반대되는 행위를 암시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유대인들의 행동은 진리에 대하여 열려있던 아브라함의 행동과 다름을 실증해 주고 있다(C.K.Barrett). 또한 '아비'는 사단을 함축하고 있으며(44절, J.H.Bernard), 41절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조상에 대한 논의에서 인격만을 다루기보다는 자기들의 혈통을 아브라함에서 하나님으로 소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W.H.Van Doren). 그리고 41절에서유대인들이 결단코 사생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은 예수의 의도에 대한 호기심 어린 응답처럼 보인다(Moffa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31,32절)
31절의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믿다'라는 말은 30절에서부터 언급되는데 이와 관련된 여러 의견은 다음과 같다. ① 30절의 사람들은 온전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며, 31절의 부류들은 온전한 신앙을 가지지 않는 자들이다(W.F.Howard). ② 30, 31절 모두 이하절의 사람들과 같은 부류로 진정한 신앙으로 아니다(J.Calvin). 31절의 부류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은 로벗슨(A.T.Robertson), 박윤선 등도 주장한다. ③ 30-32절의 사람들은 진정한 신자들이다(R.C.H.Lenski). 아무튼 이들이 진정한 신앙인들이 아니라면 단순히 예수님의 주장을 인정한 격이고(A.T.Robertson),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33절 이하의 무리들과 다르다 할 수 있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란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입증의 표현을 위한 말씀으로서 사람이 말씀을 순종하고 따를 때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 됨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이었다.
32절의 그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이 진리는 자유케 하는 진리이다. 진리는 예수와 직접 관련된 말씀이며, 요한이 말하려는 진리는 구원의 진리라는 점이다. 즉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여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진리인 것이다(Cater, L.Morris).
2. 죄의 종(33-41절)
33절의 예수의 말씀이 자신들이 영적으로 자유한 자가 아니라 노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곧 그의 말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아브라함과 자신들과의 관계이다. 그들은 33절에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누구에게도 속박당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말하려고 하는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로부터 바벨론, 메데, 바사, 수리아 등의 나라에 속박을 받아 왔으며, 예수 당시에도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자유에 대해 말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들은 종교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자신들이 자유한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창17:7)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특권과 누구에게도 영적으로는 굴복하지 않는 자유가 있다고 자부했던 것이다(W.Hendriksen).
34절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서두에서 강조한 말씀인 '진실로 진실로…'는 이후의 말씀이 중요한 것임을 암시한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는 특별히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가정법으로 죄를 범하는 것이 1회적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이고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이 말씀에서 의도하는 바는 죄 안에서 사는 사람은 결국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죄의 종'이라는 것이다. 종에게는 안전이나 영원함이란 없다. 또한 그가 한 가족과 함께 삶을 보내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35,36절은 이상과 대조되는 한 예로 예수께서는 아들이 항상 그 가족의 일부로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한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도록 주신 자유인 것이다(Carter). 저자 요한은 특별히 여기서 '한 아들'(a son)이 아닌, '유일하신 아들'(the son)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는 영원한 존재로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므로 그가 말씀하신 자유를 줄 수 있는 존재이다(L.Morris).
37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점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연이어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진정으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들의 적대감은 예수의 말씀과 교훈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나 더 이상 자라지 못했다'가 아니라 '그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 한 적이 전혀 없었다'라는 의미이다(Tasker).
38절에서 특별히 예수께서 '본 것'과 그들이 '들은 것'을 대조시켜 말씀하는 것은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전하지만 그들은 잘못 전해진 지식에 따라 행한다(Tenney).
39절에서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의 모호함에 격분한 자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W.Hnedriksen). 구약에서는 종종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 부를 만큼,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 하면서 저희를 역시 하나님의 친구라는 간접적인 주장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혈통적 조상을 앞세우는 것 보다 '행함'의 중요함을 강조하신다. 그들이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그가 행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40절의 예수께서는 또한 자신을 '지금…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에는 특별히 예수의 인성(人性)이 강조되어 있으며, 자신을 가리켜 '사람'이라고 부른 유일한 경우이다(W.Hendriksen). 한편 8장 전반부에 나타나듯이 '진리'를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의 교훈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나타낸다(L.Morris).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주장도 있으나(Hengstenberg, Lampe), 중요한 것은 소위 그들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공경했던 반면, 유대인들의 행실은 아브라함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41절의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38절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 있다. 다만 유대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라고 부추기는 그러한 류(類)의 아비인 것이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비밀을 빗대어 자신들의 출신의 적법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비밀을 빗대어 자신들의 출신의 적법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예수 탄생과 관련한 이상한 점이 있음을 알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본문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L.Morris).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성경에서의 자유 개념
자유란 예속 상태로부터 벗어나 이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과 만족을 찾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이 개념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이스라엘의 자유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언약 백성으로서 자신을 섬기게 하셨다(출19:3).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었으며 만일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그 은혜는 상실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자연적 재앙과 타민족에게 역속시킴으로 심판하셨다(신28:25). 따라서 자유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벗어나는 것이며, 이는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다(출19:4).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벗어날 때 얻게 될 새로운 자유를 대망하였는데 이 자유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즐겁고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었다(사35:30).
2. 그리스도인의 자유
자유의 개념은 신약에서 발전되었다. 그리스도는 자유를 선포하면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눅4:16). 하지만 그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열심당원들의 갈망을 무시하셨으며, 그 대신 자신은 백성들을 죄와 사단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선포하였다(요8:34). 예수님의 귀신 쫓음과 치유 사역은 이러한 해방의 일환이었다(막3:22눅13:16).
바울은 영적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롬6:18), 제도에 불과한 율법으로부터(갈4:21), 사단의 세력으로부터(골1:13)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신다는 그리스도의 사상을 잘 설명하였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사람은 당연히 그 속에 있는 죄와 육체적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롬7:14,23,24).
3. 자유 의지
성경 곳곳에서 인간은 자발적인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전까지는 누구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진리의 개념(8:31-41)
◈ 세계배경 문화사 ◈
당시 대부분의 종교 교리에는 현실 속에서 추구해야 할 도덕 규범과 함께 미래에 대한 내세관을 담고 있다. 종교인들의 임무는 종교 교리를 통해 신도들에게 삶의 원칙과 방향을 올바로 잡아 열심히 생활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게 하는 것이다. 윤리ㆍ도덕 또는 가치관 등 인간이 살아가는데 삶의 진리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종교에서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동 / 이집트: 이집트에서는 신의 의지를 대표하는 말을 '마아트'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질서ㆍ진실ㆍ정의ㆍ덕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집트에서 마아트는 신과 조화하는 유일한 길로 여겨졌는데,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신분에 따라 각자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도덕 규범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정신의 밑바탕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인간 의지의 부산물이 아니라는 종교적인 신념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 구조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은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서양 / 로마 :로마의 종교는 전통적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영토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민족의 신들도 폭넓게 흡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많은 신을 숭배하게 된 바탕에는 정복 국가들을 유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로마 정부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정복 국가로 성장하면서 근면성실했던 로마인들의 정신 자세는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등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쾌락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동양 / 중국 : B.C.300년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했던 진(秦)에 이어 A.D.100년까지 중국을 지배한 한(漢)은 국가의 모든 의례와 예법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할 국교(國敎)로서 유교(儒敎)를 지정하였다. 유교를 국교로 지정한 목적은 신분 질서의 정착과 거기에 알맞은 처신을 규정(禮法)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 제국의 도덕 규범으로 삼기에 적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대에서 유교는 사회 규범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국가 의례와 신분 질서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쳤다.
이에 비해 도교와 불교는 사회의 도덕 규범과 깊숙이 관련을 맺으면서 귀족과 대중들의 인간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도교의 경우 인간은 근본적인 삶의 방식 내지는 자연의 기초를 이루는 질서에 따르는 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기본적인 삶의 방식(道)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사회의 엄격한 규율은 작위적이고 인생을 낭비하는 허무한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특히 도교는 자연의 도리를 터득하기 위해 자연의 신비한 현상을 찾아 다니는 것을 유행시키기도 하여 신선술( ^ )을 낳기도 하였다.
한편, 귀족들 사이에 큰 인기를 모은 도교에 비해 불교는 서민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였다. 현실 세계의 물욕, 소유욕, 세속적인 욕망을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허망함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경지(解脫)에서 진정 모든 번뇌와 고통이 사라진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은 하위 신분 계층에게는 인생의 진리로 삼을 수 있는 면이 강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살생(殺生)을 금지시켜 모든 자연물에 대한 생명 중시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살아가는 태도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성경적 접근: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진리를 찾는다. 하나님의 속성과 그 영광과 그 말씀이 진리다(시19:986:11;25;10).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르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합당하고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주는 가치관을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과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계시된 구원의 도리가 진리이며, 그것이 바로 복음 진리임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인간의 예속(8:31-41)
종살이를 원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이 세계에는 자유로운 사람보다 그렇지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태반이 자유를 상실했거나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도 무지하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1. 욕심에의 예속
욕심이란 인간이 비켜가기가 쉽지 않는 건널목과도 같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에게 종노릇한다. 돈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고 권력을 탐하고 쾌락을 탐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생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른다. 남보다 앞서가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친다.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들은 모두가 욕심의 노예이며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2. 죄에의 예속
유대인들은 예속의 개념을 잘못 이해했기에 자신들과는 무관한 용어인 줄 착각했었다. 하인을 막론하고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이 죄에게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이며, 구속이란 이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예수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은 죄에게 예속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3. 마귀에의 약속
마귀의 활동은 성경에서 다뤄지고 있는 중요 주제와 관련된다. 그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삶 속에 관여한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에게 예속되면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행위를 하게 되어 있다. 복음에 대해 귀를 막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근원은 마귀이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므로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꺾어진 멍에(8:31-41)
소가 무거운 짐수레의 멍에를 내려 놓았을 때나 죄수가 발의 착고에서 풀렸을 때 느끼게 되는 홀가분함은 매우 클 것이다. 죄의 멍에 아래서 신음하던 인간이 이것을 벗어버리게 될 때에 느끼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선 때문에 이 희열을 맛볼 수가 없었다.
1. 예수를 통한 자유
자유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얻게 된다는 것이 통념처럼 되어 있다.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사람은 부림을 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을 예속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로부터의 자유, 곧 영적 자유는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이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정치적인 자유나 경제적인 자유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예수를 거부하고서는 아무도 이 자유를 얻지 못한다.
2. 관계의 회복
예수를 통한 자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 준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거룩한 교제가 재개되는 것이다. 잘 살고 훌륭하게 사는 것의 기준이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차이가 나게 마련이고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많이 가질 수 있고 많은 것을 누리기는 할지라도 잘 산다거나 훌륭하게 살기는 불가능하다.
3. 진정한 자유인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유에서 진정한 자유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준다.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자유인이 아니며, 자기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과는 거리가 멀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 아들과 연합하는 자의 자유가 참자유이며, 그분은 우리에게 이것을 약속하셨다. 남녀와 노고가, 그리고 빈부와 귀천의 구별 없이 그분을 영접하는 자는 이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마귀에게서 난 자들(요8:42-47)
◈ 원문강해 ◈
진리에 대한 거부
본문에서는 진리에 대해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실상이 언급된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다면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나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이를 거부하고 등을 돌린 것이다.
1.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함(42,43절)
1)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닌 증거
(Eij oJ qeo;" path;r uJmw'n h\n, hjgapa'te a]n ejmev, ejgw; ga;r ejk tou' qeou' ejxh'lqon kai; h{kw: oujde; ga;r ajp j ejmautou' ejlhvluqa, ajll j ejkei'nov" me ajpevsteilen.에이호 데오스 파테르 휘몬 엔 에가파테 안 에메 에고 가르 에크 투 데우 엘셀돈 카이 헤코…에케이노스 메 아페스테일렌;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나는 보내신 것이니라, 42a절)
에가파테(hjgapa'te사랑하였으리니)는 아가파오(ajgapavw사랑하다)의 미완료 능동태 시제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계속적으로 예수를 사랑했어야 옳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말이 거짓말임을 주께서 지적하신다(A.T.Robertson). 그들은 독선에 가득 차서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W.Barclay). '내가'(ejgw;에고)란 1인칭 단수 대명사로서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엑셀돈(ejxh'lqon나서)은 엑세르코마이(ejxevrcomai나오다, 나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으로 분명한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고 있다(A.T.Robertson). 예수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분과 함께 후사가 된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롬8:17). 하지만 유대인들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헤코(h{kw왔음이라)는 완결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분은 신성을 지니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Arndt-Gingrich).
2) 주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님
(oujde; ga;r ajp j ejmautou' ejlhvluqa, ajll j ejkei'nov" me ajpevsteilen.우데 가르 아프 에마우투 엘렐뤼다 알르 에케이노스 메 에페스테일렌;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2b절)
아프 에마우투(ajp j ejmautou스스로)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와 독립된 것이라거나 자신의 생각에 오신 것은 아버지와 독립된 것이라거나 자신의 생각에 따른 독창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A.T.Robertson). 그분은 어떤 것도 임의로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우데…엘렐뤼다(oujde;...ejmautou'온 것이 아니요)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제2완료 시제로 그분이 오시게 된 동기가 독립적임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 나가는 자는 주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한다 할지라도 결구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된다. 바울처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면 소명의식이 철저해야 한다(고전15:10).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n보내신 것이니라)은 아포스텔로(ajpostevllw보내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으므로 아무도 그분의 권위에 대해 왈가왈부해서는 안되었다. 특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는 말 앞에 역접접속사알르(ajll j그러나)가 언급되었는데, 이는 뒷 내용의 의미를 보다 강화시키고 있다.
3) 주의 말씀을 들을 줄 모름
(ouj ginwvskete; o{ti ouj duvnasqe ajkouvein to;n lovgon to;n ejmovn.우 기노스케테 호티우 뒤나스데 아쿠에인 톤 로곤 돈 에몬;깨eke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3절)
우 기노스케테(ouj ginwvskete깨닫지 못하느냐)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계속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사람들 마음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그들의 상태에 대한 지적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심한 무기력 상태에 처해 있었다.
우 뒤나스데 아쿠에인(ouj duvnasqe ajkouvein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현재 부정사이다. 그들이 주의 교훈과 권고에 도무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A.T.Robertson). 그들은 듣는 것과 이해하는 것 모두를 거절하고 있었다. 예수를 자신들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고자 힘쓸 뿐이었던 것이다(W.Barclay). 이런 사람들의 귀에 주의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다.
2. 마귀에게서 난 자들(44,45절)
1)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함
(uJmei'" ejk tou' patro;" tou' diabovlou ejste; kai; ta;" ejpiqumiva" tou' patro;" uJmw'n qevlete휘메이스 에크 투 파트로스투 디아볼루 에스테 카이 타스 에피뒤마이스 투 파트로스 휘몬 델레테 포이에인;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44a절)
에피뒤미아스(ejpiqumiva"욕심을)는 중성적인 의미로 '욕망', 좋은 뜻으로 '동경', 부정적인 의미로 '욕심, 정욕'을 의미한다(Arndt-Gingrich). 본문에서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처하나 실은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있었다. 예수의 이러한 선언은 그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혔음이 분명하다. 델레테 포이에인(qevletepoiei'n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 그들이 계속적으로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A.T.Robertson). 그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어서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않았으며, 양심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 영적으로 귀머거리가 된 채 마귀의 사주를 받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에만 몰두한 것이다. 그것도 경건이라는 껍질을 쓰고서 이것이 우리가 조심해야 할 악한 자의 함정이다.(벧전5:8,9).
2)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들
(ejkei'no" ajnqrwpoktovno" h\n ajp j ajrch'", kai; ejn th'/ ajlhqeiva/ oujk e[sthken, o{ti oujk e[stin ajlhvqeia ejn aujtw'/. o{tan lalh'/ to; yeu'do", ejk tw'n ijdivwn lalei', o{ti yeuvsth" ejsti;n kai; oJ path;r aujtou'.에케이노스 안드로포크토노스 엔 아프 아르케스 카이 엔 테 알레데이아 우크 에스테겐 호티 우크 에스틴 알레데이아 엔아우토…호티 프슈스테스 어스틴 카이 호 파테르 아우투;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44b절)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란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꾀어 선악과는 먹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박윤선), 혹은 가인이 사단에게 속해 아벨을 죽인 사실(요일3:12)을 가리키는 듯하다.
우크 에스테켄(oujk e[stin서지 못하고)은 스테코(sthvkw서다, 굳게 서다)의 미완료 시제인데 이 어근은 히스테미(i[sthmi두다)의 완료 능동태인 헤스테카(e[sthka)에서 유래하였다(A.T.Robertson). 이는 계속하여 서지 못함을 나타낸다. 마귀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를 없애려하고 피한다. 마찬가지로 마귀에게 속한 자들도 진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며 피하게 되어 있다. 프슈스테스(yeuvsth"거짓말쟁이)는 마귀의 본질을 잘 말해 준다. 그는 거짓을 사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거짓된 사상을 비롯하여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 온갖 종류의 거짓말 등은 모두 마귀의 것이다(W.Barclay). 성도는 거짓된 것을 철저히 멀리해야 한다.
3) 진리를 말하므로 믿지 아니함
(ejgev dev o{ti thvn ajlhvqeian levgw, ou; pisteuvetev moi에고 데 호티 텐 알레데이안 레고 우 피스튜에테 모이;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5절)
텐 알레데이안 레고(thvn ajlhvqeian진리를 말하므로)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다. 그분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가운데서 검토나 검증이 요구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14:6). 유대인들의 속에 진리가 없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예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들의 영적 갈증을 쉽게 해갈하여 주신다. 우 피스투에테(ou; pisteuvete믿지 아니하는도다)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입증할 만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보았음에도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한 그들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가르치시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되었다(黑崎). 마귀의 역사를 좇는 자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파괴하고자 시도한다(W.Barclay).
3. 예수를 죄로 책잡으려 함(46,47절)
1) 주를 죄로 책잡으려는 자들
(tiv" ejx uJmw'n ejlevgcei me peri; aJmartiva"_ eij ajlhvqeian levgw, dia; tiv uJmei'" ouj pisteuvetev moi_티스 엑스 휘몬 엘렝케이 메 페리 아마르티아스 에이 알레데이안 레고 디아 티 휘메이스 우 피스튜에테 모이;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G디 아니하느냐, 46절)
엘렝케이(ejlevgcei책잡겠느냐)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원래의 뜻을 '밝히 드러내다, 죄를 깨닫게 하다, 교정하다, 바로잡다'등을 의미한다(Arndt-Gingrich). 또한 현재형으로 계속적으로 책잡기 위해 한 것임을 암시한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비난하다, 정죄하다, 벌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F.Buchsel). 그들은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여여만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그분에게 죄를 선고하지 못했다(Wycliffe).
우 피스튜에테(ou; pisteuvete믿지 아니하느냐)는 예수를 향한 그들의 적개심이 불합리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편견과 선입견에 근거한 것이어서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A.T.Robertson). 예수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기본 요소인데(Smith-Lee) 그들은 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주의 인격, 주의 사명, 죄의 무서움, 제자 됨의 조건, 영적 자유 등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던 것이다.
2)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 말씀을 들음
(oJ w]n ejk tou' qeou' ta; rJhvmata tou' qeou' ajkouvei호 온 에크 투 데우 타 레마타 투 데우 아쿠에이;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47a절)
에크(ejk∼께 속한)는 속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으로부터, ∼에서 밖으로' 등을 뜻한다. 어떤 것이 오는 방향을 나타내기도 하고 분리를 나타낼 때와 기원, 원인, 동기, 이유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인다. 우설적 표현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본문에서처럼 에이미(eijmiv있다, 이다) 동사와 함께 나오면 '∼에게 속하다'라는 의미가 된다.(Arndt-Gingrich). 하나님에게 속했는지 마귀에게 속했는지는 예수에 대한 태도가 결정적으로 입증해 준다. 아쿠에이(ajkouvei듣나니)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적으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려는 태도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그분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며 순종하는 것뿐이다.
3)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들
(dia; tou'to uJmei'" oujk ajkouvete, o{ti cv.디아 투토 휘메이스 우크 아쿠에테 호티 에크 투 데우 우크 에스테;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7b절)
우크 아쿠에테(oujk ajkouvete듣지 아니함은)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전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계속적으로 듣거나 이해하기를 거부했던 것임을 나타낸다. 주를 향하여 철저하게 문을 닫아 걸고 있었으므로 그들 속에 있는 어두움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이 단어는 감각적인 지각으로서의 '듣다'라는 의미 이외에도 들어서 '알다, 순종하다, 깨닫다' 등의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Arndt-Gingrich). 들음은 적절한 형태로서 계시에 해당한다(G.Kittel). 에크…우크 에스테ejk...oujk ejste∼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는 문자적으로는 에크(ejk)가 '∼로부터'이며 에스테(ejste)가 '이다'라는 동사이므로 '∼로부터 나오지 않은 자'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Dods). 그들은 마귀와 혈연 관계에 있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늘도 참된 것은 거절하고 거짓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두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와 마귀에서 난 자(42-44절)
42절의 '내가…왔음이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예언자가 이 땅에 왔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이 구절의 전반부는 요일5:1,2과 같은 논쟁점으로, 예수는 영적인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밝히며, 결과 유대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J.H.Bernard, A.H.McNeile). 카이 헤코(kai; h{kw왔음이라)는 현재 시제로서 '그리고 내가 여기에 왔다'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강조법이며, 이 표현 속에는 저자인 요한의 '보냄 개념'(Concept of Mission)이 확실하게 피력되어 있다(L.Morris). 예수님은 본 절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의 당위성을 자신의 신적 기원에 두고 있다.
43절의 '내 말을…내 말을'(lalia;n...lovlon랄리안…로곤)이라는 두 용어는 구별될 필요성이 있다. 즉 랄리안(lalia;n)는 '말하는 방법'의 뜻을 함축하며, 로곤(lovlon)는 '말씀'을 뜻한다(J.H.Bernard). 본 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하신 말씀의 수용 여부가 영적 상태를 주장하을 암시한다(요17:8).
44절의 '너희는…났으니'라는 말 속에는 영지주의 원리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보는 자도 있다(Hilgenfeld, J.H.Barnard).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큰 뱀의 아버지라고 주장하였다(Ophites, Iadabaoth). '살인'(ajnqrwpoktovno"안드로포크토노스)이라는 단어는 단지 이곳과 요일3:15에서만 나온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는 표현은 아마도 죽음은 타락의 결과에 기인한 것이며, 이 타락은 마귀의 꼬임에 따른 결과였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교리에 근거한 것 같다.
또한 '처음부터 살인한 자'는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사건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Cyrl, Nitzsch, Lucke, De Wette, Reuss). 버나드(J.H.Bernard)도 이 개연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특히 '너희'(uJmei;"휘메이스)는 강한 강조점을 둔 시작점이며, 마귀에 대해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한 것은 진리를 말하시는 예수님과 강한 대조를 형성한다. 사단이 거짓말쟁이인 것은 하와를 미혹한 데서부터 잘 나타난다(창3:1-8). 또한 본 절에서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란 영적 실재가 없다는 뜻으로, 즉 공허하며 헛된 것으로서, 마귀는 거짓을 제 것으로 하는 것이다.
2.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45-47절)
45절에서 '내가(ejgw; de;에고 데)를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로서 사단의 세력에 반대하여 처음부터 진리의 기원으로서 거짓의 기원인 사단을 대적하고 있었음을 의도하며(Meyer) 마귀의 영적 자녀인 유대인에게 대항하는 모습과 대조의 강한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Lange, Bloomfield, Lampe). '∼하므로'(de; o{ti데 호티)는 진리를 사악하게 저지하는 죄를 지적하고 있으며(alford), "만일 내가 거짓을 언급했다면, 너희가 나를 믿었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Euthymius).
46절은 D, P 사본에 생략된 부분이 있으며, '너희 중에…죄로 책잡겠느냐'는 두 가지 이중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를 진리를 말하는 자로 믿어야 함과 동시에 예수가 실제적으로 진리의 객관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유대인들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R.Bultmann). '책 잡겠느냐'(ejlevgcei엘렝케이)의 뜻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다'이거나(Homer), '어떤 확실한 지식도 없이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할 것이다(J.P.Brown). '죄로'(peri; aJmartiva"페리 하마르티아스)는 지성적 능력의 결핍이나 지적 실패를 의도하거나(Origen, Cyril, Erasmus), 말의 실수로 인한 죄악이거나(Nelancthon, Hoffmann), 거짓된 교리(J.Calvin)이거나,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죄악을 의미할 것이다(Lucke, Stier, Luther, Meyer, Alford, Webber, Wilk).
47절의 '하나님께 속한 자'(ejk tou' qeou'에크 투 데우)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이거나(Euthmius), 마니교의 어원론적인 구분법에 의해서 다른 두 종류의 사람 중 신적인 기원과 본질을 가진 자를 의도할 것으로 보는 자도 있다(Hilgenfeld).
그러나 이 말은 마귀를 아버지로 두지 않고(44절)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 곧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를(39절) 의미할 수도 있겠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누구의 자녀인가(42-44절)
42절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그로부터 오셨다. 다드(C.H.dodd)는 이 구절에 의해 그리스도의 오심이 자신의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게다가 그의 근본은 이미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예수를 보내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여기에서 다시 예수의 사명에 대한 강조가 되풀이되는데, 그는 자신의 사명을 소개할 때마다 언제나 아버지를 의지하고 그의 사명이 아버지께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L.Morris).
43절에서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우둔함을 계속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별히 요8장에서 거듭 나타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22,25,27,33절). 예수의 말씀은 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고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W.Hendriksen).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통탄하신다. 여기에서 '깨닫다'는 본래 '알다'에서 온 말로 '어찌하여 내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후반의 '…알지 못함이로다'에서 '알지 못한다'는 본래부터 알지 못하는 선천적 무지를 가리킨다(Tenney). 혹 이것을 '너희는 그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Knox)라고 해석하면 그 본래적 의미에 더욱 가깝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사상은 '말'(lalia;n랄리안)과 '말'(lovgon로곤)의 대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전자의 성격이 표현의 형식이라면, 후자는 그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다(Morris). 그러므로 이 말은 '너희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들이 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Rieu).
4절의 말씀은 하나님과 정반대 세력인 마귀가 바로 이 유대인들의 아비라는 의미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마귀에게 속하여 그 뜻대로 행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속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것이다(요5:37,38). 이에 대해 훌(W.Hull)은 '∼이다'와 '∼에게 속한∼이다'를 구별했다. 그들의 불신은 그들이 마귀에게 속한 자들임을 나타낸다. '욕심'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때로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살전2:17), 일반적으로는 악한 쪽으로 움직이려는 강한 욕구를 말한다. 본문에서 후자의 용례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살인자의 행동을 한다'고 비난하셨고, 그것이 마구의 본래적 성질임을 밝히신다. 또한 '처음부터'라는 말은 아벨의 죽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요일3:12), 사단의 궤계로 아담이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원래적 이야기일 수도 있다(롬5:12지혜서 2:24). 어찌되었든 사단은 인간을 향한 살인자가 되었다. 마귀는 이처럼 생명을 헤치려고 하는 동시에 진리를 곡해하는 거짓말쟁이이다. 진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지리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본질상 거짓말쟁이이다(L.Morris). 이에 대해 블레어(C.H.Blair)는 흔히 이해하듯 교만의 죄가 아니라 거짓의 죄가 근본적인 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단은 처음부터 살인자이며 진리 안에 거하지 않았다. 특별히 그 안에 진리가 없다는 말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L.Morris).
2. 하나님께 속한 자(45-47절)
45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란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 마치 현실에 상응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아들에게 계시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Hendriksen).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수가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L.Morris).
46절에서 계속해서 예수는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물으신다. 곧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의미이며, 그가 한낱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러한 말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책잡다'는 특별히 잘못이 없음에도 그것을 지적한다라는 의미이다(Tenney). 즉 이 말씀은 예수의 완전한 의로움을 증거하는 말씀인 것이다(Godet).
47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L.Morris).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W.Barclay).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예정론의 역사
'예정'이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때때로 그것은 일반적인 단어인 '작정'과 동의어로 쓰인다. 다른 경우에 예정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표시한다.
1. 초대교회 교부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정을 언급하였으나 아직 그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신다는 근거하에 예정을 인간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로 간주하였다.
2. 어거스틴(Augustine)
예정은 어거스틴에 와서야 역사에서 주요한 논의의 주제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예정은 결코 인간 행동들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적인 예지의 기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기'에 대한 그의 표현은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다. 그의 어떤 진술들은 예정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무엇을 하실지를 미리 아실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선택의 주제들로, 유기자를 신적인 예지의 주체들로 언급하고 있다.
3. 종교 개혁자들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가장 엄격한 예정론을 주장했다. 루터(M.Luther)는 절대 예정론을 받아들였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을 하나님이 원하셨다는 신념으로 인하여 그의 생에 말년에 가서 예정론에 관한 어조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칼빈(J.Calvin)은 어거스틴 주의적인 이중 예정론을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는 피기우스(Pighius)를 반박하여 예정론을 변호하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에 관한 작정이 허용적인 작정이었으며 또한 유기의 작정을 하나님이 결코 죄의 조성자가 아니며 결코 그것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4. 바르트(K.Barth)
예정에 있어서 현대 신학 가운데 하나인 바르트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예정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해석을 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처럼 그도 이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과 계시, 소명 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예정에서 사람들의 예정된 분리를 알지 못하였고 선택을 특별한 선택으로 칼빈처럼 이해하지 못하였다.
종교에서 마귀의 개념과 역할(8:42-47)
◈ 세계배경 문화사 ◈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 교리를 설명할 때는 모든 현상을 선과 악, 천사와 악마 등으로 구별하면서 설명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종교에서 규정하고 있는 악한 행동이나 그 행위를 일삼는 무리는 배척되어야 할 대상으로 자리잡기 마련이다. 그러나 악한 행위나 무리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약간씩 재조정되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근동 / 이집트: 당대 이집트의 신 가운데 저승을 주관하는 오시리스(Osiris)의 탄생을 둘러싼 신화는 마귀와 관련되어 있었다. 오시리스의 동생 가운데 사악한 동생 세트(Seth)는 모든 인간들이 형만을 좋아하고 따른 것을 시기하여 오시리스를 죽이고 인간의 일들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때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가 남편의 시신을 모아 소생시켜 다시 세트를 몰아내고 세상을 주관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심 줄거리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오시리스는 세상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으로 자리잡게 되고, 현실 세계에서는 파라오로 나타나게 된다고 믿었다. 그 대신 세트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파라오를 음해하고 세상을 악한 기운으로 물들이려는 모든 적을 의미한다.
서양 / 로마: 서양의 신석기 유물 가운데 사람의 두개골에 구멍이 여러 군데 나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여자로 밝혀진 두개골의 주인은 생전에 간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환자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나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치료법은 로마 시대에 이르러 없어졌지만 로마인들도 역시 마귀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호랑가시 나뭇잎에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는가 하며, 해산하는 여자 옆에서 벨을 울리면 나쁜 귀신이 도망간다고 믿는데서 알 수 있다.
동양 / 한국: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마귀를 나타내는 용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단어가 귀신(鬼神)이다. 귀신의 의미를 풀어보면, 귀(鬼)는 악하고 못된 혼령을 뜻하며 신(神)은 정의를 위할 줄 아는 착한 신을 뜻한다. 특히, 귀(鬼)의 경우가 마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에게 풍요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자연신이나 조상신들과는 달리 인간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삼국 시대에는 가뭄,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마을 공동으로 제사 의식을 거행하는데, 대개의 경우는 마귀를 달래거나 물리치는 내용이 주된 관심사가 되기 마련이다. 대체로 마귀가 생겨나게 된 원인으로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가족이나 후손들이 매장이나 제사를 제때에 실행하지 못할 경우 생겨난다고 믿었다. 흔히 원귀(寃鬼), 잡귀(雜鬼), 객귀(客鬼)라고 불리는 귀신들은 마귀와 관련이 깊다.
삼국 시대 유물 가운데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천왕 장식의 벽돌, 귀신 얼굴 모양의 기와 등은 대표적인 마귀와 관련된 유물들로서, 대개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귀신들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한 처용의 얼굴을 본따서 만든 처용탈은 탈춤의 기원이 될 정도로 마귀와 관련된 장식물과 놀이가 많았다.
성경적 접근: 성경에서의 마귀(devil, demon)는 귀신으로도 번역된다. 마귀는 악한 영적인 존재들로서 인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귀신의 유래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사단과 함께 타락한 천사들로 나타나고 있다(벧후2:4). 성경에 언급된 귀신들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죽은 자의 영혼도 아니요, 또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피조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사단을 우두머리로 삼고 사람들을 육체적인 질병과 죄로 괴롭힌다. 그러나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섭리를 훼방하고 무효화시키는 것이 다른 종교의 악마와 귀신들의 역할과 다른 점이다. 그들로 인해 성도들은 시험과 유혹을 당하나 그것으로 인해 결국은 신앙이 더욱 공고해지게 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사단의 마음(8:42-47)
마음은 의지와 감정의 동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고와 사유와 행동의 원천이다. 그 마음속에 깃든 것이 세계를 만든다. 본문 44절에서 주님은 사단, 즉 악마의 마음이 무엇으로 구성되었으며 채워져 있는지 교훈해 주신다.
1. 불의한 욕심을 품고 있음
'너희는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 욕심은 무엇일까? 바로 피조물로서는 품어서는 안되는 분수를 넘은 욕망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을 사단은 늘 품고 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14:13)고 그는 늘 벼르고 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우상으로 삼고 싶은 욕심, 이것이 모든 죄의 원천이다.
2. 인간에 대해 살의를 지니고 있음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44절). 즉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파괴하고, 훔치고, 죽이려는 살의를 지니고 있는 자'라는 뜻이다. 죄와 불의와 불신과 이단으로 유혹하여 인생을 망치게 하고 끝내는 지옥불로 함께 끌고 들어가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품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격렬한 살의를 지니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3. 거짓으로만 이루어져 있음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다. 마귀의 별명은 '속이는 자, 거짓 말하는 영'(대하18:2)이다. 참과 거짓의 요소는 그 마음에 조금도 없다. 그래서 악마와 사귄다. 마귀는 이 세상 모든 거짓의 수뇌요, 각종 이단의 괴수요, 그 아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세계 속에 방치되어 불의와 거짓 가운데 처하게 됨을 알아야 하겠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악마에게 속한 사람들의 속성(8:42-47)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는 중용이 없다. 즉 중간저긴 가치나 세계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진리되신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당신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곧 악마에게 속한 마귀의 자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탐심으로 행함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44절).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행치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되고 싶은 교만한 욕심으로 행한다.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도 자기 욕심으로 산다. 하나님의 뜻과 그 사랑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주의'로 행한다.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고 자신을 위해 온갖 욕심과 탐심으로 사는 것이다(골3:5)
2.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음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43절)라고 주님은 책망하신다.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도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며, 또 알고자 노력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듣고 읽어도 그 가치와 의미를 납득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신앙적인 인본주의 사상을 진리로 대체하고 그것을 좇고 있는 것이다(딤후4:3,4).
3. 진리를 대적함
그들은 진리를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대적하려는 습성이 있다. 하나님은 계시며,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심판받을 죄인이다. 이 말들은 모두 진리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비웃고 부인하고 또 대적한다. 사단에게 속한 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이용하지 않으면 핍박하고 대적해 왔다. 결코 진리와 그것에 속한 교회를 사랑하는 속성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요8:48-59)
◈ 원문강해 ◈
예수의 영광
본문에서는 예수의 세계와 유대인의 세계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속하셨으며, 그들이 자랑하는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
1. 유대인들의 편견과 무지(48-50절)
1) 예수를 귀신이 들렸다 함
(Ouj kalw'" levgomen hJmei'" o{ti Samarivth" ei\ su; kai; daimovnion e[cei"_우 칼로스 레고멘 헤메이스 호티 사마리테스 에이 쉬 카이 다이모니온 에케이스;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8절)
칼로스(kalw'"옳지)는 '잘, 아름답게'라는 뜻으로, 본문에서처럼 '말하다, 듣다, 깨닫다'등의 동사와 함께 쓰일 때 '바로, 잘'따위로 번역한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평가가 옳은 것이라고 고집하였다(Arndt-Gingrich). 사마리테스(Samarivth"사마리아 사람)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적이요, 율법 위반자이며(W.Barclay) 이단자라고 조소하는 의미를 갖는다(黑崎).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의 말씀에 분개했으며, 순간적인 흥분의 상태에서 이처럼 엄청난 실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이모니온 에케이스(daimovnion e[cei"귀신이 들렸다)에서 에케이스(e[cei")가 에코(e[cw가지다)의 2인칭 단수 동사이며 다이모니온(daimovnion귀신)이 목적격이므로, '네가 귀신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이 된다. 특히 동사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적으로 악마에게 지배를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J.G.Machen). 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흔히 사용했던 비난의 말이다(A.T.Robertson). 무익한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은 충분히 숙고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2) 예수를 무시함
( jEgw; daimovnion oujk e[cw, ajlla; timw' to;n patevra mou, kai; uJmei'" ajtimavzetev me.에고 다이모이온 우크 에코 알라 티모 톤파테라 무 카이 휘메이스 아티마제테 메;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49절)
1인칭 단수대명사 에고(ejgw;나는)란 강조용법으로 쓰였다. 다이모니온 우크 에코(daimovnion oujk e[cw귀신들린 것이 아니라)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한 주의 냉정한 대답이다(A.T.Robertson). 첫 번째 비난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명확한 거짓임이 드러났으므로 간과해 버리셨으며 두 번째 비난에 대해서만 부정하셨다. 티모(timw'공경함이어늘)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분은 항상 아버지를 존경하였으며, 그분의 가르침이나 행위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이같은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행위를 마친 것으로 간주하고 모욕하는 것은 곧 성부에 대한 모욕이다(A.T.Robertson). 아티마제테(ajtimavzetev무시하는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모욕을 주다, 창피를 주다'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께 대해 계속적으로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빌2:9-11).
3) 자신의 영광을 구치 않는 예수
(ejgw; de; ouj zhtw' th;n dovxan mou: e[stin oJ zhtw'n kai; krivnwn.;에고 데 우 제토텐 독산 무 에스틴 호 제톤 카이 크리논;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0절)
에고(ejgw;나는)는 49절처럼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우 제토(ouj zhtw'구치 아니하나)는 예수께서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자신이 모욕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면서 끝내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것을 알고 계셨다(W.Barclay).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치 아니했고 예수는 세상의 영광을 구치 아니하셨다(A.T.Robertson). 에스틴(e[stin계시니라)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분은 역사의 저편에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신다.
크리논(krivnwn판단하시는)은 현재 분사로, '아버지는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를 판단하시는 자'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를 향한 그들의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은 그 옳고 그름이 아버지에 의해 판단될 것이다(Wycliffe).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그분의 판단이다(창18:25)
2. 영원한 삶을 위한 길(51-54절)
1) 주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살게 됨
(ejavn ti" to;n ejmo;n lovgon thrhvsh/, qavnaton ouj mh; qewrhvsh/ eij" to;n aijw'na.; 에안 티스 톤 에몬 로곤 테레세 다나톤 우 메 데오레세 에이스 톤 아이오나;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51절)
테레세(thrhvsh/지키면)는 테레오(threvw지키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이다. 기본적인 의미는 '유의하다, ∼에 주의하다' 등이며, 70인역(LXX)에서는 '망보다, 감사하다, 준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의 보편적인 사상은 계명등을 준수함이나 지킴에 대한 것이다(H.Riesenfeld). 예수의 가르침을 수용하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 메 데오레세(ouj mh; qewrhvsh보지 아니하리라)는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이 강한 이중 부정어가 함께 사용된 부정문이다(A.T.Robertson). 일차적으로 종교적인 절기에서의 구경꾼들을 가리키는 이 동사는 '∼을 보다, 발견하다, 인정하다, 감지하다, 깨닫다' 등을 의미한다. 70인연(LXX)에서는 환상적으로 보는 것이나 지각의 뜻으로 나타났다(W.Michaelis). 주가 말씀하시는 이 죽음은 영적인 것이며,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가 시간과 영원의 구별이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시사한다(W.Barclay).
2) 예수를 아브라함과 비교하는 자들
(mh; su; meivzwn ei\ tou' patro;" hJmw'n jAbraavm, o{sti" ajpevqanen_ kai; oiJ profh'tai ajpevqanon: tivna seauto;n poiei'"_메 쉬 메이존 에이 투 파트로스 헤몬 아브라함 호스티스 아페다넨…티나 세아우톤 포이에이스;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3절)
메(mh;)는 부정적 대답을 기대하는 의문 불편사로 사용되었다(Arndt-Gingrich). 즉 유대인들은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크지 않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전제로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 질문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이었다(A.T.Robertson).
메이존(meivzwn∼보다 크냐)은 메가스(mevga"큰, 위대한)의 비교급이다. 영적 사실에 대해 눈인 어두운 유대인들은 예수의 위치에 대해 계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黑崎). 그들의 말 속에는 예수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비난이 깔려 있다. 티나 세아우톤 포이 에이스(tivna seauto;n poiei'"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를 송사할 구실을 잡으려는 질문이다(黑崎). 현재 능동태 직설법인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행하다, 만들다' 등을 의미하지만, '생각하다'라든지 '상상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의 자신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였다.
3)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영광을 돌리심
(e[stin oJ pathvr mou oJ doxavzwn me, o}n uJmei'" levgete o{ti qeo;" hJmw'n ejstin:에스틴 호 파테르 무 호 독사존 메 혼 휘메이스 레게테 호티 데오스 해몬 에스틴;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4절)
에스틴(e[stin∼시니)은 위치상 강조를 나타내며, 실제로 내 아버지는 그분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A.T.Robertson). 독사존(doxavzwn영광을 돌리시는)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영예를 주고 영화롭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 독자적인 지식을 주장하신다(W.Barclay).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분처럼 정확하게 알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휘메이스 레게테(uJmei'" levgete너희가…칭하는)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마귀와 혈연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경건은 아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의 기쁨(55-59절)
1) 하나님께 대한 무지
(kai; oujk ejgnwvkate aujtovn, ejgw; de; oi\da aujtovn. ka]n ei[pw o{ti oujk oi\da aujtovn, e[somai o{moio" uJmi'n yeuvsth": ajlla; oi\da aujto;n kai; to;n lovgon aujtou' thrw'.카이 우크 에그노카테 아우톤 에고 데 오이다 아우톤…알라 오이다 아우톤 카이 톤 로곤 아우투 테로;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5절)
우크 에그노카테(oujk ejgnwvkate너희는 알지 못하되)는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완료능동태 직설법으로 경험적인 지식을 나타내며 그들이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A.T.Robertson).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오이다(oi\da아노니)는 완료 형태를 가졌으나 의미는 현재로(Arndt-Gingrich), 지속적으로 알고 계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주장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특이한 것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와 매우 친밀한 관계에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W.Barclay). 테로(thrw'.지키노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분이 계속적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려면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W.Barclay, 고전11:1).
2) 아브라함의 선지자적 통찰력
( jAbraa;m oJ path;r uJmw'n hjgalliavsato i{na i[dh/ th;n hJmevran th;n ejmhvn, kai; ei\den kai; ejcavrh.아브라함 호 파테르 휘몬 에갈리 아사토 히나 이데 텐 헤메란 텐 에멘 카이 에이덴 카이 에카레:너희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에갈리아사토(hjgalliavsato즐거워하다가)는 아갈리아사오(ajgalliavsaw기뻐 날뛰다, 기뻐서 미칠 지경이다)의 단순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 자신을 위해 스스로 즐거워함을 시사한다.
능동태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이 동사의 용법은 동작자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J.G.Machen).
즉 본 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즐거워한 것을 부각시킨다. 히나 이데(i{na i[dh볼 것을)는 호라오(oJpavw보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이다. 아브라함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이다(히11:1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기의 씨가 세상에 나타낼 때를 보고자 했으며, 예수의 탄생을 낙원에서 보고 기뻐한다(黑崎). 에카레(ejcavrh기뻐하였느니라)는 카이로(caivrw기뻐하다)의 제2단순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외적 요인에 의해 기뻐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유대인들과는 전혀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음을 나타낸다. 예수를 기뻐하는 것이 경건이다.
3)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예수
( jAmh;n ajmh;n levgw uJmi'n, pri;n jAbraa;m genevsqai ejgw; eijmiv.아멘 아멘 레고 휘민 프린아브라암 게네스다이 에고 에이미;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프린…게네스다니(pri;n...genevsqai나기전부터)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 생기다, 일어나다)의 제2단순과거 부정사로 '아브라함이 존재하기 전에, 생겨나기 전에'라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이 무시간적 존재이심을 주장하고 있다.(W.Barclay).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무시간적인 분은 하나님 한분이신데, 예수의 이같은 주장은 자신이 곧 그임을 나타내신 것이다(W.Barclay). 에고 에이미(ejgwv eijmiv내가 있느니라)에서 1인칭 단수대명사 에고(ejgwv 내가)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고, 1인칭 단수 동사 에이미(eijmiv있느니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나타낸다. 그분이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심을 표현한다. 그분은 영원한 존재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A.T.Robertson). 그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요14:9).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유대인들의 질문(1)-사마리아인 예수(48-51절)
48절에 보면 예수를 사마리아 사람으로 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① 그가 귀신들린 자로 여겨졌기 때문으로, 과거에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도시데우스(Dositheus)와 시몬 마구스(Simon Magus)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서 귀신들린 자로 취급을 받았었던 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귀신들린 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C.K.Barrett), ②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사마리아인과 비슷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 예수라고 불리웠다는 주장(J.W.Bowman, D.Cullmann), ③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눈에 이교도로 보였기 때문이거나 마술가들로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J.L.Martyn, Str-B) 등의 주장이 있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인정하기 않았는데, 이런 점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인들이 일치하여 사마리아인이라 불렀다고 보기도 한다(J.H.Bernard).
49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과 관련된 비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는 듯하다. 이는 이제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대적적인 긴장 관계가 사라질 시기에 놓였다는 것을 아시기에 강하게 반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요4:21,J.H.Bernard, A.H.McNeile). 특히 49절의후반부 구절들은 구약적 지지를 받고 있으며(시7:9-1135:22-28), 예수가 그들의 모독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임을 보여 주고 있다(Blank).
'공경함이어늘'(timw'티모)은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Lucke), 이 현재 시제는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증거해야만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Stier).
50절의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분의 뜻을 이루며(요6:38,39), 그분의 말씀을 전하며(요5:1917:8), 이것이 예수님이 줄곧 지향해 온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음을 의미한다(요12:27,2817:3).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 즉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시고 그렇게 하심으로 지금의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신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J.H.Bernard).
51절은 50절의 '판단하시는 이' 바로 뒤에 이어서 기록된 것이 좀 거북스럽게 보인다. 특히 이 구절은 31,37,43절에 제시한 '내 말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진 것들을 상기시켜 주며, 저자인 요한은 '내'(ejmo;n에몬)라는 말에 큰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F.L.Godet). '죽음을…아니하리라'라는 의미는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보지 아니하며,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상은 막9:1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H.Leray, Haenchen, Lindars).
2. 유대인들의 질문(2)-불멸자 예수(52-56절)
52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언급(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예수가 귀신들리 자로 판단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아브라함이 죽었다는 이 사실은 인간 죽음의 불가피성을 나타내는 근거였다(Str-B, Schlatter).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슥1: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R.Bultmann).
'지금'(ou운)이라는 표현이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으며(Lachmann, Alford), '맛보다'(geuvsetai규세타이)라는 표현을 데오레세(qewrhvsh보다, 관찰하다) 대신 사용하여 그의 의미를 왜곡시킨 표현이라는 주장이 있다(Luca, Brug). 이는 랍비들 가운데 흔한 표현이거나(Wetstein) '죽음을 보지 않는'이란 죽음이 생의 또 다른 하나의 변모로 바꾸어지는 것으로서 믿는 자가 체험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을 맛보지 않는'이란 죄인이 죽음에 대하여 무서워하며 참혹스럽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주관적으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Lange).
53,54절에서 제자인 요한은 53절을 통해서 반어법적인 대답을 유도하고 있는데, 이는 요한의 역설적인 표현이다(Barrett, L.Morris). '너희의 하나님'(qeo;" uJmw'n데오스 휘몬)이라는 표현은 a, B, D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으나, P66, P75, Q, W 사본들에서는 '너희의' 대신에 '우리의'(hJmw'n헤몬)라고 기록되어 있다(C.K.Barrett).
56절의 '나의 때 볼 것을'은 '아브라함이 세 천사들을 본 것'을 의미하며, 그중 한 천사는 로고스(lovgo"말씀)였을 것이다(Hengst). 이에 반하여 아브라함이 이삭의 탄생과 그의 의미를 축하하여 기뻐했던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Hofmann, wordsworth).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출생되고 그로 인해 모든 민족이 축복받을 것이라고 한 약속을 환영한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요12:3,J.H.Bernard).
3. 유대인들의 질문(3)-아브라함 이전의 예수(57-59절)
57절의 '오십'(penthvkonta펜테콘타)이라는 용어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으며(Hengst), 그의 정신적 선동 능력이 매우 성숙되어 있었음을 의도하거나(Clemant, Lange, Heumann), 그의 영적 헌신도가 그의 나이보다 더 많이 먹어 보이도록 하였다는 의견이 있다(Trapp).
58,59절의 '아브라함이…내가 있느니라'라는 표현은 '아브라함보다 선재했던 예수'를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신적인 능력과 계획을 가진자로서 아브라함을 능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Crell, De Wette). 또한 예수의 선재 사상은 하나의 관념적인 의식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예수는 자신과 아브라함을 창조자와 피조물로 구분하고자 했다는 등 여러 주장들이 공존한다(Lyster). '내가 있느니라'라는 표현법은 여호와(hwty)의 이름을 주장한 것과 동일한 것(McWhorter)으로 보기도 한다. 이 말은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표현인데(요10:7,1114:6),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계시로서 '내가 그니라'(aDh yg"a"아니 후아)의 같은 의미의 말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H.Bernard).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비난의 격화(48-51절)
48절에서 예수를 사마리아로 비방한 것은 우선 사마리아인들이 본래 이방인과 이스라엘 여인들과의 혼혈인임을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정당한 출생과 예수의 모호한 출생을 빗댄 말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Hoskyns). 또는 유대인 자신들이 주장하듯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들의 특권 의식을 예수께서 인정하시지 않은 것에서 나온 말일 수도, 혹은 그저 통상적인 사마리아인에 대해 반감을 담은 욕설일수도 있다(Cater, L.Morris).
한편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가 귀신들렸다고 말한 경우를 세 번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귀신들렸다 함은 정신이 이상해지고 마귀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가르킬 때 사용한다(Tenney).
그러나 49절에서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그들의 비난을 묵살하셨다. 덧붙여 '귀신들렸'다는 그들의 말을 조용히 부인하신다. 또한 그들이 예수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다. 여기에서 '무시하다'라는 말을 '너희가 나를 멸시하느냐'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으나(Rieu), 여기에서는 '단지 너희들은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나 나는 아버지를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L.Morris).
5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이 없다(요6:38,3912:28;17:4). 그 결과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요17:1,5).
51절의 서두 '진실로 진실로…'는 뒤에 오는 그의 교훈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여기에서 '말씀'이란 전반적인 예수의 교훈을 이르는 것이다(31,37,43절, L.Morris). '내 말을 지키면'이란 믿음을 함축하며,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관계 유지를 하는 것을 나타낸다(요14:23,2415:20;17:6). 요5:24에는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언급된 한편 '죽음을…보지 아니하니라'는 '죽지 아니하리라'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이다.
2. 아버지가 주신 영광(52-59절)
52절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도 말씀을 지켰으나 죽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난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영적 의미, 곧 영생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치 못했다.
53절의 '너는…크냐'라는 질문은 요4:12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을 회상케 한다. 51절에서 '죽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 능력을 나타내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시비를 걸고 있다.
이에 대해 54절에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이 곧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밝히셨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임을 밝혀 예수님의 신분을 밝히고 하나님이 그분의 보증이 되심을 암시한다.
55절에서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특별히 2개의헬라어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각각 '알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기노스코(ginwvskw)와 오이다(oi)이다. 전자의 의미가 경험적인 지식의 의미로 '알다'라는 것이라면, 후자는 어떤 사실을 직감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56절에서 예수는 다시 유대인들의 이론적 근거인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오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예수를 반대하고 대적하기보다는 도리어'그의 때'를 보고 즐거워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때'란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사건, 그의 죽음, 부활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다(Carter). 곧 모든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 전체를 나타내는 때이다. 또한 이 구절의 해석상 난해한 부분은 아브라함이 언제 즐거워했는가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동사의 시제를 현재로 보아 아브라함이 낙원으로 돌아간 후에, 그곳에서 지금 그리스도의 사역하심으로 보고 기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Meyer). 그와 다른 견해로는 아브라함이 즐거워한 것이 그의 생애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 가운데 그의 씨인 이삭의 혈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W.Hendriksen, L.Morris).
57절의 그들이 말한 바 '아직 오십도 못되었다'라는 언급을 통해 당시 예수의 나이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누가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 가량이었다고 밝히고 있다(눅3:23). 그러나 57절의말씀과 요2:20의 말씀을 참고로 하여 예수의 공생애가 40-50세 사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C.K.Barrettt), 회너(Hohner)는 천문학적인 기록이나 빌라도와 관계된 역사 기록을 근거로 다시 그의 연령이 33세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L.Morris, Tenney).
58절에는 8장에서의 결정적인 말씀으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가 선포된다. '진실로 진실로…'는 이제까지 오고 간 논쟁에 획을 긋는 말이여, 이후의 그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나타내 준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 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 등으로 해석되는데, 결국 그 동사의 의미는 부정과거로 '아브라함이 존재하기 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Tasker, L.Morris).
여기에서 특별히 '내가…있느니라'의 표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70인역(LXX)의 에고 에이미(ejgwv eijmi나는∼이다)는 항상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형식이며(신32:39사41:443:10;46:10), 출3:14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으로 계시하신 바 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현재성의 지속을 의미하며, 신의 영원성, 즉 존재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L.Morris).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위격(位格)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Abbot).
59절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신성 모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범법자들에게 행하는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레24:16),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 돌을 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물론 그들은 법적인 절차를 밟거나 재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너무나 흥분했기 때문에 예수를 즉시 돌로 치려 했던 것이다(W.Hendriksen, L.Morris).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요한 신학 구조에서의 익명서
1. 정경이 형성된 이래로 계시록 외에도 신약의 세 저작이 사도 요한의 것으로 돌려졌다. 요한은 갈2:9에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세 '기둥들'에 속하는 것으로 지칭되었다. 요한복음과 두 개의 요한 서신은 이미 무라토리안 단편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요한이라는 이름은 저작들 자체에는 나오지 않고 나중에 붙여진 책 제목들에만 나타난다. 요한의 처음 두 서신은 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전통적인 서신 형태로 씌여진 세 번째 서신조차도 그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다. 그는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로서 스스로를 나타내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의 증인이라고 말하였다. 요일1:1,3과 요1:14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서 일단의 집단에 속해 있었던 한 개인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이 개인은 요한복음에 의해 요13:23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21장에서는이 사랑하시는 제자를 예수의 역사적 제자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또한 복음서의 저자라고 설명되고 있다(요21:24). 하지만 원래의 복음서의 구절들은 사랑하시는 제자를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제자가 아니라 참제자의 모델로 묘사하였다. 이 제자는 한편으로는 예수의 지상 생애의 사건을 직접적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요19:35)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회고적으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요20:8), 즉 복음서 기자가 그 사건을 이해한 방식(요2:22)을 알고 있었다.
3. 저자가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소개한 방식은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문에서 자료를 접근한 방식을 프로그램으로 제시하였던 누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출현에 접근하였다.
요한도 목격자의 실증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본다'는 것(요일1:1,3)은 눅1:3과 행1:21이하에 나오는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한 목격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고 그와는 다른 특이하게 파생된 의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자기가 본 것을 이해한 사람만이 참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요9:3919:35;20:8).
거짓말쟁이(사기꾼)에 대한 처벌(8:48-59)
◈ 세계배경 문화사 ◈
거짓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말하는 것이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하는 중상 모략 또는 비방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거짓말은 당대에도 관습에 따라 금기시하는 경향이 높았을 뿐 특별히 처벌 방식에 관한 것은 뚜렷하게 발견할 수 없다.
근동 /팔레스틴: 당대 근동 지역에서 종교의 이단으로 몰려 처벌을 받은 경우는 역시 예수의 처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에서 점차 각광을 받아가고 있던 시기에 유대교의 주류파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위치가 흔들리고 신전의 수입이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급기야 유대교의 최고 평의회에서 예수가 신을 모독한 죄를 지었다고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인도하여 처벌받게 하기 위해 예수의 죄목을 유대왕을 지칭하여 민중을 혼란하게 한 것으로 고발하였다. 당시 종교적인 이단 문제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서양 / 로마: 당대 로마에서 일어난 이단의 문제 가운데 유명한 사건은 네로(Nero)와 관련된 것이다. A.D.64년 7월 로마의 시장에서 원인모를 대화재가 일어나 시가의 대부분이 타버렸다. 그때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떨어진 별궁에 있었는데, 방화 혐의가 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네로는 세간의 의심을 벗어나기 위해 당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었던 기독교도에게 방화 혐의를 돌려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을 실시하였다. 기독교도는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형, 화형뿐만 아니라 사나운 개와 싸우게 하여서도 죽였다. 이때 바울은 목이 잘리고, 베드로는 역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 네로 시대를 이어서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A.D.95년 스스로 '주(主)이며 신(神)'이라 선언하면서 자기에게 직접 예배를 올릴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자신의 사촌이면서 집정관이었던 클레멘스(Clemens)와 그의 처 도미틸라(Domitilla)가 무신론과 유대적인 행위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클레멘스를 죽이고, 도미틸라를 추방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가하였다. 기독교 탄압에 대해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나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 미신의 집단인 기독교도가 처형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로마에서도 이단은 사회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 상황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 / 중국: 동양에서는 이단과는 약간 다른 것이지만 유사한 성격을 가진 사건이 있었다. 중국에서 혼란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마감하고 6국을통합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한 인물은 진(秦)의 시황제였다. 그는 병합한 제후국의 하나인 제나라의 순우월이라는 인물이 진의 정치를 비판하자, 사상 통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와 관련된 역사책ㆍ의학ㆍ농업ㆍ주술과 관련된 책을 제외하고 전국의 서적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이러한 사건은 이전에 술사(術士)에게 속은 시황제가 노하여 460명에 달하는 유생을 처형한 것과 함께 사상 통제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성경적 접근: 성경은 거짓말을 사단을 불의에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 거짓말은 타락한 죄인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악한 것(마5:33)이라고 그리스도께서 규정하셨다. 또한 구약의 십계명 중 9계에 거짓말이 금지되었으며(출20:16), 거짓의 종류로는 개인의 거짓말, 공동체의 낭설 유포, 영적인 거짓 예언으로 분류되는데 고의적으로 거짓을 유포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거짓은 사단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진리와 의를 기만하고 왜곡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구속 진리를 왜곡시키며 사람들을 기만한다. 고의적인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은 이미 사단의 사기적인 속성에 물든 자들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불신앙인이 바로 알 수 없는 것들(8:48-59)
본문에서는 불신 유대인들과 예수와의 논쟁이 격렬하게 심화된다. 이와 같은 내용은 기독교와 그 실체에 대해 어설픈 지식을 지니고 있는 불신앙인들의 폐단을 보여 주는 것이다.
1.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알지 못함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마리아 사람', 또는 '귀신들린 자'라고 공격했다. 사마리아인은 '이단 종교인'이라는 뜻이요, '귀신들렸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광신자 같다는 뜻이다.
불신 세상 역시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봉사 정신 그리고 사랑의 메지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영생, 부활, 거듭남 같은 내용을 말하면 반사회적인 가치, 또는 반이성적인 광신이라고 비난한다.
2. 하나님의 존재를 올바로 알지 못함
불신 세계의 다른 종교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55절)라고 그리스도는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되 그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온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은 알되 삼위일체로 존재하심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신성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본질을 올바로 알지 못함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겼다(53절). 그의 권능과 기적은 단순한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으면 영생얻는다'는 사실을 불신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그 속죄의 은혜를 모르면 그 지식은 무가치하다. 또 그분의 절대적인 신성을 인정치 않으면 그 믿음도 거짓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본질을 인정치 않고 그분을 한 성인으로 아는 예가 많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숨고 피하시는 그리스도(8:48-59)
대적자들이 자신을 돌로 치는 태장을 가하려고 하자 주님은 '숨어'(59절) 성전을 나가셨다고 했다. 여기서 '숨는다'는 것은 신적인 권능에 의해 대적자들의 눈에 감춰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행동엣 대적자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다.
1. 그 본질을 숨기심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 이는 주님의 권능과 표적을 보고도 그분의 하나님 되시는 본질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질문이다. 그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이 숨기워진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그 본질을 감추신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그 말씀대로 불신자에게는 믿고 영생 얻을 특권을 함부로 주시지 않는 것이다.
2. 그 심판의 권능을 숨기심
숨어 나가는 대신 주님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심판할 권능도 지니고 계셨다. 하는 천군 열두군단을 부르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 심판의 권세를 일시적으로 숨기신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이 땅의 대적자와 불의한 자들에게는 바로 심판을 행치 않으시고 잠시 숨기신다. 원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 섭리를 바라보시는 것이다. 그 섭리의 마감 때에 영원한 심판의 권능을 밝힌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3.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임
그리스도를 돌로 치려는 무리 중에는 군중들의 격앙된 감정에 잠시 휘말린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군중들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성을 되찾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 자리를 숨어 피하신 이유 중 한 가지가 바로 대적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는 데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주 하나님은 세상에 숨어있는 듯 보인다. 그 이유는 다만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벧후3:9)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복음 8장 원어 강해
요 8:1~11 감음하다 법정에서 잡힌 여인
법을 초월하는 인애
본문에서는 법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죄인 된 인간에 대한 끝없는 용서와 자비의 법칙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는 데 열중하나 은혜는 용서를 제1원리로 내세운다.
1. 예수 앞에 끌려 온 부정한 여인(1-4절)
1)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 [Orqrou de; pavlin paregevneto eij" to; iJerovn, kai; pa'" oJ lao;" h[rceto pro;" aujtovn, kai; kaqivsa" ejdivdasken aujtouv". 오르드루 데 팔린 파레게네토 에이스 토 히에론…카이 카디사스 에디다스켄 아우투스;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2절)
파레게네토(paregevneto들어오시니)는 파라기노마이(paragivnomai오다, 나타나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이다. 예수는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성전에 다시 오셨다. 당국자들의 음모와 계책을 아시면서도 자신의 일을 중단하시는 일이 결코 없었던 것이다. 설사 심각한 위험이 따르게 될지라도 사역자들은 자시의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카디사스(kaqivsa"앉으사)는 카디조(kaqivzw앉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A.T.Robertson). 즉 그분은 늘 하시던 대로 앉으셨다. 이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사의 준비 자세이다. 에디다스켄(ejdivdasken가르치시더니)은 디다스코(didavskw가르치다)의 미완료 시제이다. 이는 동작의 개시와 지속성을 나타내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라는 의미가 된다. 말씀을 맡은 자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 이름 최대로 활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2) 한 여인이 끌려 옴
(a[gousin de; oiJ grammatei'" kai; oiJ Farisai'oi gunai'ka ejp j moiceiva/ kateilhmmevnhn, kai; sthvsante" aujth;n ejn mevsw아구신 데…귀나이카 에피 모이케이아 카테일렘메넨 카이 스테산테스 아우텐 엔 메소;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3절)
아구신(a[gousin끌고 와서)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데리고 온 것, 체포해 온 것을 극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A.T.Robertson).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고 반전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한 여인을 등장시켰으며, 그들은 여기서 승기를 잡으리라고 생각했다(Wycliffe). 그들은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들이었으므로 범법자들을 체포하여 재판할 권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黑崎). 카테일렘메넨(kateilhmmevnhn잡힌)은 카탈람바노(katalambavnw붙잡다, 덮치다)의 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어떤 연유로 그의 범죄 행각이 드러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여자는 현장에서 발각되었고 붙잡혔다. 스테산테스(sthvsante"세우고)는 히스테미(i{sthmi두다, 놓다, 세우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단시켰으며, 그분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일을 진행해 나아갔다. 이는 완고한 그들의 어리석은 몸부림이다.
3)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힘
(levgousin aujtw'/, Didavskale, au{th hJ gunh; kateivlhptai ejp j aujtofwvrw/ moiceuomevnh:
디다스칼레 하우테 헤 귀네 카엘일렙타이 에프 아우토포로 모이큐오메네;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4절)
카테일렙타이(kateivlhptai잡혔나이다)는 카탈람바노(katalambavnw붙잡다)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잡혔으며, 아직도 죄가 있음'을 의미한다(A.T.Robertson). 그들은 매우 당당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한 가련한 여인을 앞에 놓고 자신들의 의를 마음껏 뽐내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우토폴로(aujtofwvrw현장)는 아우토스(aujtov"자신)와 포르(pwvr도둑)의 합성어로, '도둑질하다가 잡힌'이란 의미가 확대되어 '현행범으로 체포된 자'를 뜻한다(A.T.Robertson). 그 여인은 몰래 간음을 행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모든 죄는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고, 이는 주를 괴로우시게 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딤후2:19).
2. 무리의 간교한 술책(5-8절)
1) 율법을 빙자하여 예수께 질문함
(ejn de; tw'/ novmw/ hJmi'n Mwu>sh'" ejneteivlato ta;" toiauvta" liqavzein: su; oun tiv levgei"_
엔데 토 노모…에네테일라토 타스 토이아우타스 리다제인 쉬운 티 레게이스;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5절)
'율법에'(ejn tw'/ novmw엔 토 노모)는 신17:5-7에 근거한 듯하다. 에네테일라토(ejneteivlato명령하였거니와)는 고대 동사인 엔텔로(ejntevllw명령하다, 당부하다)의 단순과거 중간태 직설법이다. 이는 동작 자체보다 동작자를 중시하는 용법으로 여기서는 모세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J.G.Machen). 리다제인(liqajzein돌로 치다)은 현재 부정사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간음하는 자들에게 가해질 형벌임을 시사한다. 간음은 즉결 처분에 붙여질 사항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가 죄인들을 박멸하여 없애는 것이며, 이러한 권한이 부여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W.Barclay). 레게이스(levgei"말하겠나이까)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들은 예수의 판단을 구하는데 이것은 치밀하게 짜여진 그들의 술책이었다. 그들은 그분을 진퇴양난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하고 있었다(Wycliffe). 사단의 간교한 술책은 항상 우리의 가까이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2)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
(peiravzonte" aujtovn, i{na e[cwsin kathgorei'n aujtou'. oJ de; jIhsou'" kavtw kuvya" tw'/ daktuvlw/ katevgrafen eij" th;n gh'n.페이라존테스 아우톤 히나 에코신 카테고레인 아우투…카데그라펜 에이스 텐 겐;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땅에 쓰시니, 6절)
페이라존테스(peiravzonte"시험함이러라)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그들이 계속적으로 예수를 넘어뜨리고자 일을 꾸미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들의 의도는 항상 악한 것이었다(A.T.Robertson).
사람을 마치 물건 다루듯 하며(W.Barclay),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ㆍ방법 가리지 않는 자들의 태도는 오늘의 교회가 철저히 지양해야 할 것이다. 카테고레인(kathgorei'n고소할 조건을)은 현재 능동태 부정사이다. 이 단어는 '고소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대개는 법적 술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법적인 뜻이 없을 경우에는 '나무라다, 책망하다'라는 의미가 된다(Arndt-Gingrich). 보다 폭넓은 의미는 '누설하다, 선언하다'인데 신약에서는 이렇게 사용된 예가 없다(F.Buchsel). '땅에 쓰시니'(katevgrafen카테그라펜)는 미완료 과거로서 동작의 개시와 계속성을 나타내며 '땅에 쓰기 시작하였다'라는 뜻을 갖는다.
3)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 O ajnamavrthto" uJmw'n prw'to" ejp j aujth;n balevtw livqon:호 아나마르테토스 휘몬프로토스 에프 아우텐 발레토 리돈;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처라, 7절)
호 아나마르테토스(O ajnamavrthto"죄 없는 자)는 부정의 안(ajn없는)과 하마르테토스(aJmartho"죄)의 합성어이다.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하나는 '죄를 범할 수 없는'이다(A.T.Robertson). 자신에게 과오가 없어야 남의 과오에 관여할 권리가 있음을 주님은 지적하신다(W.Barclay).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대해서는 엄격한 표준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처사이다. 프로토스(prw'to"먼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를 의미하며, 비판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암시한다. 발레토(balevtw치다)는 발로(bavllw던지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명령법이다. 본 절에서 사형집행인을 선정하시는 주의 방법이 매우 특이하다. 그들은 율법대로 그 여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 자격은 어떤 죄도 범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했다(Wycliffe).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정죄보다 용서를 힘써야 한다.
3. 모두 다 물러가고(9-11절)
1) 양심의 가책을 받음
(oiJ de; ajkouvsante" ejxhvrconto ei|" kaq j ei|" ajrxavmenoi ajpo; tw'n presbutevrwn, kai; kateleivfqh호이 데 아쿠산테스 엑세르콘토 헤이스 카드 헤이스 아륵사메노이 아포 톤 프레스뷔테론 카이 카텔레이프데;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남았더라, 9절)
호이 아쿠산테스(oiJ ajkouvsante"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를 직역하면 '말씀을 들은 자들이'가 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엑세르콘토(ejxhvrconto나가고)는 엑세르코마이(ejxnvrcomai나가다)의 미완료 시제로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A.T.Robertson). 즉 그들이 나가기 시작한 것이며, 양심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Wycliffe). 의기양양하던 그들의 기세는 금방 꺽였다. 자기를 돌아볼 때 나는 죄가 없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 앞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포 톤 프레스뷔테론(ajpo; tw'n presbutevrwn어른으로)을 직역하면 '더 나이가 많은 자들로부터'이다. 더 많이 산 사람들은 지은 죄도 많기 마련이므로 그들이 먼저 자리를 뜨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자처럼 행동하려고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2) 남은 자가 없음
(ajnakuvya" de; oJ jIhsou'" eipen aujth'/, Guvnai, pou' eijsin_ oujdeiv" se katevkrinen아나큅사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아우테…우데이스 세 카테크리넨;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0절)
아나큅사스(ajnakuvya"일어나사)는 아나큅토(ajnakuvptw몸을 일으키다, 몸을 똑바르게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무리가 다 물러간 후에 예수께서 취하신 동작을 표현한다. 그분은 땅 위에 무언가를 쓰시다가 몸을 똑바로 하셨다. 홀로 남은 여자,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와의 대화를 위한 준비이다. 그분은 그녀에게 도움을 줄 필요를 느끼셨다(W.Barclay). 카테크리넨(katevkrinen정죄한)은 카타크리노(katakrivnw정죄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주변에는 살기가 등등한 자들이 버티고 서 있었으나 이제는 아무도 없다. 인생의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주께서 덤으로 주신 삶이다.
3) 주의 용서와 권고
(Oujdeiv", kuvrie. eipen de; oJ jIhsou'", Oujde; ejgwv se katakrivnw: poreuvou, 팳ai?; ajpo; tou' nu'n mhkevti aJmavrtane.■우데이스 퀴리에…우데 에고 세 카타크리노 포류우[카이] 아포 투 뉜 메케티 하마르타네;주여 없나이다…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절)
우데 카타크리노(Oujdeiv" katakrivnw정죄하지 아니하노니)는 용서를 의미하기보다는 일종의 집행유예라고 보는 것이 옳다(W.Barclay). 그분은 이 가련한 여인에게 기회를 부여하신 것이다(A.T.Robertson). 아마도 그분은 이 여인의 중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회개와 변화를 보셨던 것 같다(Wycliffe). 예수는 인간을 정죄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 구원시키고자 오셨다(Smith-Lee)는 사실을 그림 같이 보여 준다. 아포 투 뉜(ajpo; tou' nu'n다시는)을 직역하면 '이제부터'이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충분히 활용해야만 후회가 없다. 하마르타네(aJmavrtane죄를 범치)는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적으로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나도'(ejgwv에고)라는 1인칭 대명사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분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보게 된다(W.Barclay). 기회를 잘 활용하는 자가 지혜자이다(엡5:10).
요 8:12~20 세상의 빛이신 예수
사람들이 인식한 빛
본문에서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인식된 빛이시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분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에게로 나아오기를 거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 세상의 빛이신 예수(12-14절)
1)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음
( jEgwv eijmi to; fw'" tou' kovsmou: oJ ajkolouqw'n ejmoi; ouj mh; peripathvsh/ ejn th'/ skotiva/에고 에이미 토 포스 투 코스무 호 아콜루돈 에모이 우 메 페리파테세 엔 테 스코티아;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12절)
에고 에이미( jEgwv eijmi나는…이니)에서 에고( jEgwv나는)라는 1인칭 단수 대명사는 강조용법으로 쓰였다. 포스(fw'"빛)란 단어는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즉 주님은 발광체로서의 빛이시나 성도는 반사체로서의 빛이다(마5:14). 아콜루돈(ajkolouqw'n따르는)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따르는 것은 나타낸다. 이 단어는 몇 가지의 다른 뜻이 있는데, ① 군사가 지휘관을 따르는 것, ② 노예가 주인과 동행하는 것, ③ 현명한 조언자의 의견이나 결정을 수용하는 것, ④ 도시나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것, ⑤ 어떤 교사의 논의의 추지에 따르는 것 등이다(W.Barclay). 예수를 한번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계속적으로 그분과 동행할 때에 그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며,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 예수는 또한 생명의 빛이시므로 그를 좇을 자에게는 새생명이 역사한다.
2) 바리새인들의 반박
(Su; peri; seautou' marturei'": hJ marturiva sou oujk e[stin ajlhqhv".쉬 페리 세아우투 마르튀레이스 헤 마르튀리아 수 우크 에스틴 알레데스;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3절)
페리(peri위하여)는 속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어떤 해동이 언급되거나 가리키는 물체 혹은 사람을 표시한다. '관하여, 대하여, 때문에, 위하여'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Arndt-Gingrich).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자기자신을 위해서 증거한다는 사실을 들어 그 증거가 확실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W.Barclay). 마르튀레이스(marturei'"증거하니)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주께서 계속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변명하며 유리하게 증거하셨음을 시사한다. 증거가 권위를 가지려면 객관성의 유지가 필요하다. 즉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만 한다. 그들은 예수를 인정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 증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영적직관임을 알지 못했기에(黑崎) 예수를 계속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알레데스(ajlhqhv"참되지)는 '변치 않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사법적으로 의로운, 정직한'등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다(R.Bultmann). 예수를 모르면 진리에 대해서도 눈이 머는 법이다(요14:6)
3) 주의 증거는 참됨
(ejgw; marturw' peri; ejmautou', ajlhqhv" ejstin hJ marturiva mou, o{ti oida povqen hlqon kai; pou' uJpavgw: uJmei'" de; oujk oi[date povqen e[rcomai에고 말튀로 페리 에마우투 알레데스 에스틴 헤 마르튀리아 무 호티 오이다 오이다테 포덴 에르코마이;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알지 못하느니라, 14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ejgw; marturw' peri; ejmautou에고 마르튀로 페리 에마우투)를 직역하면, 전치사 페리(periv)가 ' 에 대하여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여도'이다. '내가'(ejgw;에고)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오이다(oida앎이어니와)는 완료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의미는 현재이다. '알다, 사귀어 알다, 줄을 알다, 알게 되다, 경험하다'등을 의미한다. 예수의 앎은 지식의 본질을 의미한다. 탐구하여 깨닫고 발견하는 인간적인 차원의 지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분은 자신의 기원과 운명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Wycliffe). 포덴 엘돈(povqen hlqon어디서 오며)은 기원, 원천에 대해서 사용되는 의문 부사 포텐(povten어디서)과 에르코마이(e[pcomai오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이다(Arndt-Gingrich). 그분은 자신의 원천을 잘 아셨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뜻과 목적 등에 대해 세세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 휘파고(pou' uJpavgw어디로 가는 것을)는 그분이 자시의 운명을 직시하셨음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암시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예수를 평범한 인간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인간의 최대 실수요, 신성모독이다.
2. 예수에 대한 아버지의 증거(15-17절)
1) 육체를 따르는 인간의 판단
(uJmei'" kata; th;n savrka krivnete, ejgw; ouj krivnw oujdevna.휘메이스 카타 텐 사르카 크리네테 에고 우 크리노 우데나;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5절)
카타(kata;따라)는 대격을 지배할 때 규범이라든지 유사성(Similarity) 동질성(homogeneity)에 대해서 ' 에 따라서, 에 부합하게'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예수를 판단할 때에 육체의 규범, 육체의 표준을 중시하고 적용했던 것이다(Arndt-Gingrich). 사르카(savrka육체를)는 '살, 몸, 육신, 인간성, 유형'등을 뜻한다. 이는 신약에서 특히 '인간의 신체'라는 의미로, '몸'을 뜻하는 소마(sw'ma)와는 달리 죄성을 지닌 인간 자체, 변화된 새사람에 반하는 옛 사람의 뜻을 함축하는 말로 자주 쓰였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바사르(rvb육체)의 역어로 주로 쓰였는데, 관능과 결합되지 않고 할례와 관련되어 있다. 요한은 이 단어를 드물게 사용하였다(E.Schweiger). 바리새인들은 단지 육적인 생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뿐이었다(Wycliffe). 인간적인 지식과 표준에 그 근본을 둔 판단은 사물의 표면 밖에는 보지 못하게 마련이다(W.Barclay). 그들은 예수의 영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며,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2) 예수와 함께하신 아버지
(o{ti movno" oujk eijmiv, ajll j ejgw; kai; oJ pevmya" me pathvr.호티 모노스 우크 에이미 알르 에고 카이 호 펨프사스 메 파테르;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6절)
모노스(movno"혼자)는 '다만 홀로, 유일한'등을 뜻하며 호머(Homer) 이래로 등장한다. 70인역(LXX)은 이 단어를 레바드(d'b'l'홀로)나 레바다드(dd:b:l}떨어져서)에 대한 역어로 대부분 사용하였다. 히브리어의 기본 의미는 ' 로부터 분리된, 로부터 고립되어 외로운'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대부분 바울의 서신과 요한의 기록들에서 나타난다(K.H.Bartels). 주님은 자시이 혼자가 아님을 주장하신다. 우리는 이 말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그분의 판단이나 평가는 곧 하나님의 것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黑崎). 아버지께서 그분의 판단을 도우신다(Wycliffe). 예수의 말씀과 행위 안에는 하나님의 증언이 있다(W.Barclay). 펨프사스(pevmya"보내신)는 펨포(pevmya"보내다)읜 단순과거 능동태 분산이다. 하나님은 그를 보내셨고, 또 그와 함께하였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동일한 은혜 아래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다.
3)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됨
(kai; ejn tw'/ novmw/ de; tw'/ uJmetevrw/ gevgraptai o{ti duvo ajnqrwvpwn hJ marturiva ajlhqhv" ejstin.카이 엔 토 노모 데 토 휘메테로 게그랍타이 호티 뒤오 안드로폰 헤 마르튀리아 알레데스 에스틴;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7절)
게그랍타이(gevgraptai기록하였으니)는 그라포(gravpw쓰다)의 현재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이미 쓰여져 증거되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주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지적하심으로 자신의 증거가 참됨을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신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확증이라는 근거 위에 세워지는 주장이 옳은 것이다. 마르튀리아(marturiva증거)는 '증거, 증언'을 뜻하는네 요한의 문헌에서 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교적 용법이 지배적이다(Strathmann). 증거나 증언에는 언제든지 객관성이 요구된다. 한 사람의 말이나 주장만 가지고서는 진위 여부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율법은 재판의 안전과 공정성을 기한다는 측면에서 두사람의 증언을 요구했다(Wycliffe).
3. 아무도 잡는 이가 없음(18-20절)
1) 예수의 자증
(ejgwv eijmi oJ marturw'n peri; ejmautou' kai; marturei' peri; ejmou' oJ pevmya" me pathvr.에고 에이미 호마르튀론…마르튀레이 페리 에무 호 펨스사스 메 파테르;내가…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18절)
호 마르튀론(oJ marturw'n증거하는 자)은 현재 분사로 증거의 계속성과 진행성을 시사한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는데, 말씀과 행위를 통해 증거하셨다. 그 증거는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라든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보이는 반응을 통하여 참된 것이 입증할 수 있다(W.Barclay). 그 예수의 판단은 인간적인 지식과 표준에 근거를 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것과도 판이했다. 그것은 완전한 지식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다. 파테르(pathvr아버지)는 예수께서 자신의 증거의 타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마지막 카드이다(Wycliffe). 아버지의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행위 속에 아버지의 증언이 각인된 것을 보게 된다(黑崎).
2) 유대인들의 무지
(Pou' ejstin oJ pathvr sou_ ajpekrivqh jIhsou'", Ou[te ejme; oi[date ou[te to;n patevra mou: eij ejme; h[/deite, kai; to;n patevra mou a]n h[/deite.푸 에스틴 호 파테르 수…우테 에메 오이다테 우테 톤 파테라 무…안 에데이테;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너희는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알았으리라, 19절)
푸 에스틴 호 파테르 수(Pou' ejstin oJ pathvr sou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그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를 하나님이 아닌 육신의 아버지로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Augustine). 그들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증인의 증거는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시킬수가 없었다(Vincent). 이는 그들이 영적으로 어두운 땅에 속한 자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사생아로 몰아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이다테(oi[date알지)란 현재형으로서 부정사 우테(Ou[te못하고)와 함께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우테…우테(Ou[te...Ou[te못하고…못하는 도다)는 부정을 나타내는 불변사로서 ' 도 아니 도 아니, 도 도 다 아니'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를 모를 뿐아니라 자기들이 존경한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무지하였다. 그리스도를 보고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을 갖는 유일한 수단이다. 한편 '알았더라면'(h[/deite에데이테)이란 2인칭 복수 과거 완료로서 그들이 과거부터 몰랐음을 암시한다.
3)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
(kai; oujdei;" ejpivasen aujtovn, o{ti ou[pw ejlhluvqei hJ w{ra aujtou'.카이 우데이스 에피아센 아우톤 호티 우포 엘렐뤼데이 해 화 아우투;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0절)
우데이스 에피아센(oujdei;" ejpivasen잡는 사람이 없으니)은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J.G.Machen). 예수님은 대적들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도 그분을 체포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시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신성모독죄에 해당했을 것인데 누구도 손을 대거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黑崎). 우포 엘렐뤼데이(ou[pw ejlhluvqei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는 에르코마이(e[rcouai오다)의 과거 완료 능동태로 아직 오지 않았음을 뜻한다(A.T.Robertson).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주권적 영역이다(행1:7). 그분이 허락지 않으시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요 8:21~30 자신을 밝히신 예수님
유대인들의 몰이해
여러 가지 증거를 보고도 불신하는 군중들을 향해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히셨으며,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다.
1. 근본이 다름(21-23절)
1) 주의 가시는 곳에 갈 수 없는 자들
( jEgw; uJpavgw kai; zhthvsetev me, kai; ejn th'/ aJmartiva/ uJmw'n ajpoqanei'sqe: o{pou ejgw; uJpavgw uJmei'" ouj duvnasqe ejlqei'n.에고 휘파고 카이 제테세테 메…호푸 에고 휘파고 휘메이스 우 뒤나스데 엘데인;내가 가리기 너희가 나를 찾아가…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1절)
본문은 요7:33,34와 유사한 말씀이다. '내가, 나의'( jEgw에고)라는 1인칭 단수 대명사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휘파고(uJpavgw가리니)는 사람 앞에서 떠나가 버리는 것이나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나타낸다(Arndt-Gingrich). 제테세테 메(zhthvsetev너희가 나를 찾아가)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후에 예수를 그들의 메시야로서 찾을 것이나 그때는 이미 늦는다는 뜻으로 본다(J.H.Bernard). 기회를 상실한 그들의 운명에 대해 예고하신다(W.Barclay). 기회라는 것은 한 번 잃게 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경우들이 허다하므로 주어졌을 대에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엡5:16). 우뒤나스데 엘데인(ouj duvnasqe ejlqei'n오지 못하리라)은 현재 직설법과 제2단순과거 부정사의 문장으로서 직역하면 '올 수 없다'이다. 기회를 상실하면 비록 그들에게 우선권이 부여되었다 하더라도 약속에 참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2) 예수를 조소하는 자들
(e[legon oun oiJ jIoudai'oi, Mhvti ajpoktenei' eJautovn엘레곤 운 호이 유다이오이 메티 아포크테네이 헤아우톤;유대인들이 가로되…저가 자결하려는가, 22절)
엘레곤(e[legon가로되)은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예수의 경고에 대한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를 분별한 능력이 있었다면 예수 앞에 무릎을 끓었을 것이나 오히려 조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마음이 강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메티(Mhvti 는가)는 부정적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에 사용되는 부정적인 불변사이다(Arndt-Gingrich). 그러나 본문은 조롱적인 말이다. 아포크테네이 헤아우톤(ajpoktenei' eJai'nw'자결하려)은 아포크테이노(ajpoktei'nw죽이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헤아우톤(eJautovn스스로)이라는 지시대명사와 함께 쓰여 '자살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시려는 곳이 자결로 인하여 갈 수밖에 없는 지옥인 양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갈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조롱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신들이 가게 될 것이 바로 지옥임을 그들은 상상조차 못하였다(W.Barclay).
3) 이 세상에 속한 자들
( JUmei'" ejk tw'n kavtw ejstev, ejgw; ejk tw'n a[nw eijmiv: uJmei'" ejk touvtou tou' kovsmou ejstev휘메이스 에크 톤카토 에스테…휘메이스 에크 투투 투 코스무 에스테;너희는 아래에 났고…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23절)
에크 톤 카도 에스테(ejk tw'n kavtw ejste아래서 났고)는 요한복음에 독특하게 나오는 말로 요세푸스의 사상에서 볼 수 있다(A.T.Robertson). '아래로, 밑으로'를 의미하는 이 부사는 죄인들의 거처로서의 땅을 가리킨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을 가리키는 '위'의(요3:31) 반대어이다(F.Buchsel). 주님은 자신을 조소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근본을 파헤치심으로 함구하게 하신다. 에크 투투 투 코스무 에스테(ejk touvtou tou' kovsmou ejste이 세상에 속하였고)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Wycliffe). 세상은 사람이 사는 땅이나 인류를 가리켜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죄로 인해 파멸되고 타락되고 모든 신적인 것과 배치되는 상태를 나타낸다(Arndt-Gingrich). 즉 하나님을 거슬리고 그분의 뜻에 반하는 상태에 처해진 인간과 그이 구조적 삶의 형태 등을 함축한다.
2. 죄 가운데 죽게 될 유대인들(24-27절)
1) 믿지 아니하면 죽게 됨
( eja;n ga;r mh; pisteuvshte o{ti ejgwv eijmi, ajpoqanei'sqe ejn tai'" aJmartivai" uJmw'n.에안 가르 메 피스튜세테 호티 에고 에이미 아포다네이스테 엔 타이스 하마르티아이스 휘몬;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4절)
메 피스튜세테(mh; pisteuvshte믿지 아니하면)는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으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즉 '너희가 믿게 되지 않는다면'이란 뜻이다(A.T.Robertson).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 이외에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천명하는 말씀이다(黑崎).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죽음만이 기다린다(Wycliffe). '내가 그인 줄'(o{ti ejgwv eijmi호티 에고 에이미)란 직역하면 '내가 이란 것을'이다. 여기에서 에고(ejgwv내가)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본문은 예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말씀으로서 예수의 영적 속성을 암시한다. 그분은 말씀이시며(요1:1-3),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요1:29,36), 하나님의 독생자(요3:16), 위로부터 오신 자(요3:31,33),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3:34 7:18,28), 빛(요18:12) 등이다. 아포다네이스데(ajpoqanei'sqe죽으리라)는 아포다네이스데(ajpoqnhvskw죽다)의 미래 중간태 직설법으로 동작자가 강조되고 있다. 예수께서 위에서 나신 분, 곧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처하게 될 운명을 언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가리킨다. 아집과 독선, 영적 무지는 영원한 것을 잃게 만드는 함정이다.
2) 예수가 누구인가 질문함
(Su; tiv" ei_ eipen aujtoi'" oJ jIhsou'", Th;n ajrch;n o{ ti kai; lalw' uJmi'n쉬 티스 에이…텐 아르켄 호 티 카이 랄로휘민;네가 누구냐…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5절)
쉬 티스 에이(Su; tiv" ei너는 누구냐)는 예수의 자신에 대한 주장, 즉 자신의 메시야이심과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말씀을 빌미로 신성모독죄로 고소하려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암시한다(A.T.Robertson).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만한 영적 지식이 없 는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예수가 누구신간 알게 되었다(W.Barclay). 텐 아르켄(Th;n ajrch;n처음부터)은 참으로 난해한 문장이다.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을 성서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처음부터'라는 말로 번역되지 않으며, '처음부터'란 엑스 아르케스(exajrch'",요16:4), 아프 아르케스(avpj ajrchv"요15:27요일1:1)로 쓰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J.H.Bernard). 또 다른 이는 '본질적으로 나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바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Vincent, Bernard). 70인역(LXX)에서는 이 문구가 시작에 '처음에'(at the beginning)라는 의미로(창43:20)쓰인다. 헬라어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뜻에서 '본질적으로, 원래'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예수께서 처음부터 자신이 증언해 오셨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Wycliffe), '너희와 말하는 것은 도무지 소용없는 일'이라고 개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 하늘의 것을 말씀하시나 깨닫지 못함
(kajgw; a} h[kousa par j aujtou' tau'ta lalw' eij" to;n kovsmon oujk e[gnwsan카고하 에쿠사 파르 아우투 타우타 랄로 에이스 톤 코스몬 우코에그노산;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은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깨닫지 못하더라, 26,27절)
에쿠사(h[kousa들은)는 아쿠오(aujtou듣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주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의 근거를 밝히신다. 그것은 예수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들은 것이므로 그분이 참일진대 그 모든 말도 참되다는 논리이다. 예수의 말씀은 곧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들은 바 말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우크 에그노산(oujk e[gnwsan저희는…깨닫지 못하더라)도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의 주요 관심은 현세적인 구원자, 정치적인 메시야였으므로(Westcott).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임을 인정코자 하지 않았다(A.T.Robertson). 예수를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경건의 주요 관건이다.
3. 아버지와 함께하신 그리스도(28-30절)
1)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하심
( {Otan uJywvshte to;n uiJo;n tou' ajnqrwvpou, tovte gnwvsesqe o{ti ejgwv eijmi, kai; ajp j ejmautou' poiw' oujdevn, ajlla; kaqw;" ejdivdaxevn me oJ path;r tau'ta lalw'.호탄 휩소세테…토테 그노세스데 호티 에고 에이미 카이 아프 헤마우투 포이오 우덴 알라 카도스 에디 닥센 메 호 파테르 타우타 랄로;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로 알리라, 28절)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라는 말씀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다루는 것으로 본선에 여러 번 나온다(요3:148:28;12:32,34).
그노세스데(gnwvsesqe알리라)는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단순과거식 미래 중간태이며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즉 그들이 지금 말씀을 통해서 믿지 못하는 것을 그때의 사실을 통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J.A.Bengel). '내가 그인 줄'(o{ti ejgwv eijmi호티 에고 에이미)란 직역하면 '내가 이다는 것을'이다. 여기에서 에고(ejgwv내가)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카도스 에디닥센(kaqw;" ejdivdaxevn가르치신대로)은 디다스코(didavskw가르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그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분은 이 주장을 거듭 되풀이하셨는데(A.T.Robertson), 성령이 임한 사람만이 이에 대해 알게 된다.
2)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는 일을 하심
(oujk ajfh'kevn me movnon, o{ti ejgw; ta; ajresta; aujtw'/ poiw' pavntote.우크 아페켄메 모논 호티 에고 타 아레스타 아우토 포이오 판토테;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29절)
우크 아페켄(oujk ajfh'kevn두지 아니하셨느니라)은 아피에미(ajqivhmi가게 하다, 버려두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된다(Arndt-Gingrich). 예수와 아버지는 완전한 영적 일치의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분을 통해 나타난 역사라든지 그분이 행하신 사역은 아버지를 분리하고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ejgw;에고)란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아레스타(ajresta;기뻐하시는 일)는 '뜻에 맞는, 합하는'을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하나님', 혹은 '사람이 흡족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W.F-oerster).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힘쓴다면 그분 또한 우리의 생애를 위대하게 하실 것이다.
3) 많은 사람이 믿게 됨
(Tau'a aujtou' lalou'nto" polloiv ejpivsteusan eiv" aujtovn타우타 아우투 랄룬토스 폴로이 에피스튜산 에이스 아우톤;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6절)
랄룬토스(lalou'nto"말씀은 하시매)는 랄레오(lalevw말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반대와 불신, 적대감의 표출, 조소 등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계속 진실을 말씀하셨음을 나타낸다.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유념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거부하거나 불유쾌한 반응을 보인다 하여 중단하는 것은 사역자의 도리가 아니다. 영혼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주께 소명 받았음을 확신한다면 대중의 인기를 염두에 두지 말고 진실을 말하도록 힘써야 한다. 폴로이(polloi많은 사람이)는 예수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증가했음을 나타낸다. 에피스튜산(ejpivsteusan믿더라)은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믿기 시작한 것을 나타낸다(A.T.Robertson). 특히 이 말뒤에 에이스 아우톤(eiv" aujtovn)을 직역하면 '그 안으로'란 뜻으로 곧 그리스도에로 향하는 믿음임을 암시한다.
요 8:31~41 자유케하는 진리와 마귀의 자식들
자유와 예속
본문에서는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으며, 예수를 공격하는 유대 종교의 엘리트들이 마귀에게서 난 자들임을 경고하고 있다.
1. 종의 신분에 머무는 자들(31-34절)
1) 참제자가 되는 길
(jEa;n uJmei'" meivnhte ejn tw'/ lovgw/ tw'/ ejmw'/, ajlhqw'" maqhtaiv mouv ejste에안 휘메이스 메에네테 엔 토 로고 토 에모 알레도스 마데타이 무에스테;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1절)
메이네테(meivnhte거하면)는 메노(mevnw머물다, 거주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이다. 주의 말씀 속에 끊임없이 머무는 일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예수의 말씀에 계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그분에게 부단히 배우며, 말씀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반복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제자의 할 일이다(W.Barclay). 이 단어는 인간과 땅의 가변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연속성과 관계된다(F.Hauck). 믿음의 본질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임을 교훈하신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하다(Smith-Lee). 알레도스 마데타이(ajlhqw'" maqhtai참…제자)는 제자의 확실성을 강조한다(Arndt-Gingrich). 제자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모양만 갖추고 말씀을 순종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예수에 대한 지적인식만 가지고서는 참제자가 되지 못한다. 영적 교통을 나누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요15:4).
2) 진리를 알아야 함
(kai; gnwvsesqe th;n ajlhvqeian, kai; hJ ajlhvqeia ejleuqerwvsei uJma'".카이 그노세스데 텐 알레데이안 카이 헤 알레데이아 엘류데로세이 휘마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2절)
그노세스데(gnwvsesqe알진)는 기노스코(givwskw알다)의 2인칭 복수 미래 중간태 직설법으로 동작자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J.G.Machen). 본 절은 '너희 자신들을 위해서 알지니라'는 뜻으로서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는 일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진리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다(요14:6). 그를 진리로 알고서야 우리의 어두운 눈이 하나님에 의해 열리게 되므로 예수를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알레데이아(ajlhvqeia진리)는 알레데스(ajlhvqeia진실한, 신임할 만한)에서 유래한 것으로 숨김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엘류데로세이(ejleuqerwvsei자유케 하리라)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 가다)에서 유래한 엘류데로스(ejleuvqero"자유로운)가 변형된 고대 동사 엘류데로오(ejleuqepovw자유롭게 해주다)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나타내는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며(롬6:18갈5:1,A.T.Robertson), 두려움이라든지 자아, 죄 등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W.Barclay). 본문에서는 특히 바울이 롬8:2에서 말한대로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됨을 시사한다(A.T.Robertson).
3) 죄를 범하면 죄의 종
(oujdeni; dedouleuvkamen pwvpote: pw'" o{ti pa'" oJ poiw'n th;n aJmartivan dou'lov" ejstin th'" aJmartiva".우데니 데둘류카멘 포포테…아멘 아멘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포이온 텐 하마르티안 둘로스 에스틴 테스 하마르티아스;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3,34절)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논쟁의 와중에 나온 거짓된 말이다. 과거 그들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프톨레이, 시리아 왕들에 의해 지배되었었다(A.T.Robertson). 파스(pw'"마다)는 '모든 사람들, 누구든지, 모든'을 뜻하며, 본문에서처럼 분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누구든지 사람은'이 된다(Arndt-Gingrich).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퀴리오스(kuvrio"주) 다음으로 흔하게 나오며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약에서도 120여 회 이상 나타난다(G.Bertram, B.Reicke).
포이온(poiw'n범하는)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습관적으로 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마약과 같이 죄라는 것도 습관화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경계가 요망된다(A.T.Robertson). 둘로스(dou'lov"종)는 '주인, 자유인'의 의미에 반대되는 말이다. 강제적인 섬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 없는 인생이 죄와 맺는 관계가 이와 같다(롬6:17).
2. 예수를 죽이려는 종된 자들(35-37절)
1) 집에 거하지 못함
(oJ de; dou'lo" ouj mevnei ejn th'/ oijkiva/ eij" to;n aijw'na: oJ uiJo;" mevnei eij" to;n aijw'na.호 데 둘로스 우 메네이 엔 테 오이키아 에이스 톤 아이오나 호 휘오스 메네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종은 영원히 지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5절)
우 메네이(ouj mevnei거하지 못하되)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함축한다. 종은 상속자가 아닌 까닭에 권리에도 제한이 있으며, 언제까지나 그 집에 머물 수도 없다. 그들은 확고한 지위가 보장되어 있지 않으며, 토지의 소유권도 없는 자들로, 언제라도 주인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A.T.Robertson). 엔 테 오이키아(ejn th'/ oijkiva집에)는 '가족, 식구'라는 의미가 있다. 오이코스(oiko"집)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O.Michel). 종은 영원히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는 주인이 머물도록 허락하는 동안만 그 집에 거할 수 있다. 휘오스(uiJo;"아들)는 상속자이다. 그는 어릴 때에는 후견인 아래 있지만 그 집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영원한 가족 구성원이다. 예수는 아버지 집의 상속자이시며, 그분 안에 있는 성도들도 상속자이다(롬8:17).
2) 아들만이 자유케 함
(eja;n oun oJ uiJo;" uJma'" ejleuqerwvsh/, o[ntw" ejleuvqeroi e[sesqe.에안 운 호 휘오스 휘마스 엘류데로세 온토스 엘류데로이 에세스데;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6절)
엘류데로세(ejleuqerwvsh자유게 하면)는 엘류데로오(ejleuqepovw자유롭게 하다, 해방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으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A.T.Robertson). 자유롭게 되는 길이 예수그리스도뿐임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권능을 받으셨으므로 원하는 자들의 죄를 속하여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가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자유롭게 하는 진리'이다(Wycliffe). 온토스(o[ntw"참으로)는 '사실로, 확실히'를 뜻하는 부사이며, 에이미(eijmiv이다, 있다)에서 유래하였다(Arndt-Gingrich). 엘류데로스(ejleuvqeroi자유)는 '자유로운, 독립한, 매이지 않은' 등을 뜻하는데, 율법의 저주, 죄와 허물, 죄의 권세, 죽음의 공포 등이 포함된다(Smith-Lee). 예수께서 주신 자유는 이 모든 속박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자유이다(갈5:1).
3) 주의 말씀이 있을 곳이 없음
(ajlla; zhtei'tev me ajpoktei'nai, o{ti oJ lovgo" oJ ejmo;" ouj cwrei' ejn uJmi'n.알라제테이테 메 아포크테이나이 호티 호 로고스 호 에모스 우코레이 엔 휘민;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37절)
제테이테 아포크테이나이(zhtei'tev ajpoktei'nai;죽이려 하는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단순과거 능동태 부정사이다. 예수를 죽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를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적대감을 표시하는 이들이 있었다(A.T.Robertson). 육신적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영적으로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그분의 증거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黑崎).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과 무관함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Wycliffe). 하나님께서 가문이나 문벌을 중시하지 않으심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 코레이(ouj cwrei있을 곳이 없으므로)는 고대 동사 코레오(cwrevw자리를 만들다, 속에 담다)의 자동사적 용법이다(A.T.Robertson).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였다. 즉 그들 속에는 주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자리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3. 아비의 행사를 하는 자들(38-41절)
1)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함
(kai; uJmei'" oun a} hjkouvsate para; tou' patro;" poiei'te.카이 후메이스 운 하 에쿠사테 파라 투 파트로스 포이에이테;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8절)
에쿠사테(hjkouvsate들은)는 아쿠오(ajkouvw듣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유대인으로 이 행하는 행위의 원천을 규명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지식에 의존하고 있었다. 파라 투 파트로스(para; tou' patro;"아비에게서)는 그들의 근원이 그리스도와는 전혀 판이함을 암시한다. 그들은 마귀라는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영감이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악한 마귀에서 왔으므로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바께 없었다(Wycliffe).
포이에이테(patro;"행하느니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이 계속적으로 마귀가 지시하는 일을 행함을 나타낸다. 마귀에게 근원을 둔 사람들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으며, 그 결국은 파멸이다(마25:41).
2)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
( JO path;r hJmw'n jAbraavm ejstin. levgei aujtoi'" oJ jIhsou'", Eij tevkna tou' jAbraavm ejste, ta; e[rga tou' jAbraa;m ejpoiei'te:호 파테르 헤몬 아브라암 에스틴…에이 테크나 투 아브라암 에스테 타 에르가 투 아브라암 에포이에테;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거늘, 39절)
파테르(path;r아버지)는 인도 유럽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버지, 선구자, 창시자, 존경받는 사람, 늙은이, 선생' 등을 의미하며, 복수로 쓰일 때는 '조상'을 뜻한다. 70인역(LXX)에서는 거의 언제나 히브리어 아브(ba아버지)를 나타내는 데 쓰였다(G.Schrenk). 존경하는 뜻으로 혹은 구약의 위대한 신앙의 영웅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Arndt-Gingrich). 테크나(tevkna자손)는 축어적으로는 '자녀'를 뜻하지만 본문에서는 비유적으로 아브라함과 그들 믿음의 조상으로 모신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에포이에이테(ejpoiei'te할 것이어늘)는 미완료 능동태 시제이다. 계속적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행했어야만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행실로써만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W.Barclay).
3) 유대인들의 무지
( JHmei'" ejk porneiva" ouj gegennhvmeqa: e{na patevra e[comen to;n qeovn.헤메이스 에크 포르네이아스 우 게겐네메다 헤나 파테라 에코멘 톤 데온;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1절)
에크 포르네이아스(ejk porneiva"음란한 데서)는 매춘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예수가 마리아의 사생아라고 취급하는 그들의 욕설이 포함되어 있는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를 인정치 않으려고 이처럼 엄청난 신성모독을 범하기에 이르렀다(A.T.Robertson). 우 게겐네메다(ouj gegennhvmeqa나지 아니하였고)는 겐나오(gennavw낳다)의 완료 수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혈통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역사와 전통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전형이다(W.Barclay).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이 아브라함과 하나님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다(Wycliffe). 전통에만 매달리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부임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기에 쉽다.
요 8:42~47 마귀에게서 난 자들
진리에 대한 거부
본문에서는 진리에 대해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실상이 언급된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다면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나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이를 거부하고 등을 돌린 것이다.
1.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함(42,43절)
1)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닌 증거
(Eij oJ qeo;" path;r uJmw'n hn, hjgapa'te a]n ejmev, ejgw; ga;r ejk tou' qeou' ejxh'lqon kai; h{kw: oujde; ga;r ajp j ejmautou' ejlhvluqa, ajll j ejkei'nov" me ajpevsteilen.에이호 데오스 파테르 휘몬 엔 에가파테 안 에메 에고 가르 에크 투 데우 엘셀돈 카이 헤코…에케이노스 메 아페스테일렌;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나는 보내신 것이니라, 42a절)
에가파테(hjgapa'te사랑하였으리니)는 아가파오(ajgapavw사랑하다)의 미완료 능동태 시제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계속적으로 예수를 사랑했어야 옳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말이 거짓말임을 주께서 지적하신다(A.T.Robertson). 그들은 독선에 가득 차서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W.Barclay). '내가'(ejgw;에고)란 1인칭 단수 대명사로서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엑셀돈(ejxh'lqon나서)은 엑세르코마이(ejxevrcomai나오다, 나다)의 제2단순과거 직설법으로 분명한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고 있다(A.T.Robertson). 예수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분과 함께 후사가 된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롬8:17). 하지만 유대인들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헤코(h{kw왔음이라)는 완결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분은 신성을 지니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Arndt-Gingrich).
2) 주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님
(oujde; ga;r ajp j ejmautou' ejlhvluqa, ajll j ejkei'nov" me ajpevsteilen.우데 가르 아프 에마우투 엘렐뤼다 알르 에케이노스 메 에페스테일렌;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2b절)
아프 에마우투(ajp j ejmautou스스로)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와 독립된 것이라거나 자신의 생각에 오신 것은 아버지와 독립된 것이라거나 자신의 생각에 따른 독창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A.T.Robertson). 그분은 어떤 것도 임의로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우데…엘렐뤼다(oujde;...ejmautou'온 것이 아니요)는 에르코마이(e[rcomai오다)의 제2완료 시제로 그분이 오시게 된 동기가 독립적임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 나가는 자는 주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한다 할지라도 결구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된다. 바울처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면 소명의식이 철저해야 한다(고전15:10). 아페스테일렌(ajpevsteilen보내신 것이니라)은 아포스텔로(ajpostevllw보내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으므로 아무도 그분의 권위에 대해 왈가왈부해서는 안되었다. 특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는 말 앞에 역접접속사알르(ajll j그러나)가 언급되었는데, 이는 뒷 내용의 의미를 보다 강화시키고 있다.
3) 주의 말씀을 들을 줄 모름
(ouj ginwvskete; o{ti ouj duvnasqe ajkouvein to;n lovgon to;n ejmovn.우 기노스케테 호티우 뒤나스데 아쿠에인 톤 로곤 돈 에몬;깨eke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3절)
우 기노스케테(ouj ginwvskete깨닫지 못하느냐)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계속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사람들 마음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그들의 상태에 대한 지적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심한 무기력 상태에 처해 있었다.
우 뒤나스데 아쿠에인(ouj duvnasqe ajkouvein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현재 부정사이다. 그들이 주의 교훈과 권고에 도무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A.T.Robertson). 그들은 듣는 것과 이해하는 것 모두를 거절하고 있었다. 예수를 자신들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고자 힘쓸 뿐이었던 것이다(W.Barclay). 이런 사람들의 귀에 주의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다.
2. 마귀에게서 난 자들(44,45절)
1)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함
(uJmei'" ejk tou' patro;" tou' diabovlou ejste; kai; ta;" ejpiqumiva" tou' patro;" uJmw'n qevlete휘메이스 에크 투 파트로스투 디아볼루 에스테 카이 타스 에피뒤마이스 투 파트로스 휘몬 델레테 포이에인;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44a절)
에피뒤미아스(ejpiqumiva"욕심을)는 중성적인 의미로 '욕망', 좋은 뜻으로 '동경', 부정적인 의미로 '욕심, 정욕'을 의미한다(Arndt-Gingrich). 본문에서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처하나 실은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있었다. 예수의 이러한 선언은 그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혔음이 분명하다. 델레테 포이에인(qevletepoiei'n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과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 그들이 계속적으로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A.T.Robertson). 그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어서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않았으며, 양심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 영적으로 귀머거리가 된 채 마귀의 사주를 받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에만 몰두한 것이다. 그것도 경건이라는 껍질을 쓰고서 이것이 우리가 조심해야 할 악한 자의 함정이다.(벧전5:8,9).
2)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들
(ejkei'no" ajnqrwpoktovno" hn ajp j ajrch'", kai; ejn th'/ ajlhqeiva/ oujk e[sthken, o{ti oujk e[stin ajlhvqeia ejn aujtw'/. o{tan lalh'/ to; yeu'do", ejk tw'n ijdivwn lalei', o{ti yeuvsth" ejsti;n kai; oJ path;r aujtou'.에케이노스 안드로포크토노스 엔 아프 아르케스 카이 엔 테 알레데이아 우크 에스테겐 호티 우크 에스틴 알레데이아 엔아우토…호티 프슈스테스 어스틴 카이 호 파테르 아우투;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44b절)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란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꾀어 선악과는 먹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박윤선), 혹은 가인이 사단에게 속해 아벨을 죽인 사실(요일3:12)을 가리키는 듯하다.
우크 에스테켄(oujk e[stin서지 못하고)은 스테코(sthvkw서다, 굳게 서다)의 미완료 시제인데 이 어근은 히스테미(i[sthmi두다)의 완료 능동태인 헤스테카(e[sthka)에서 유래하였다(A.T.Robertson). 이는 계속하여 서지 못함을 나타낸다. 마귀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를 없애려하고 피한다. 마찬가지로 마귀에게 속한 자들도 진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며 피하게 되어 있다. 프슈스테스(yeuvsth"거짓말쟁이)는 마귀의 본질을 잘 말해 준다. 그는 거짓을 사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거짓된 사상을 비롯하여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 온갖 종류의 거짓말 등은 모두 마귀의 것이다(W.Barclay). 성도는 거짓된 것을 철저히 멀리해야 한다.
3) 진리를 말하므로 믿지 아니함
(ejgev dev o{ti thvn ajlhvqeian levgw, ou; pisteuvetev moi에고 데 호티 텐 알레데이안 레고 우 피스튜에테 모이;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5절)
텐 알레데이안 레고(thvn ajlhvqeian진리를 말하므로)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다. 그분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가운데서 검토나 검증이 요구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14:6). 유대인들의 속에 진리가 없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예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들의 영적 갈증을 쉽게 해갈하여 주신다. 우 피스투에테(ou; pisteuvete믿지 아니하는도다)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입증할 만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보았음에도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한 그들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가르치시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되었다(黑崎). 마귀의 역사를 좇는 자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파괴하고자 시도한다(W.Barclay).
3. 예수를 죄로 책잡으려 함(46,47절)
1) 주를 죄로 책잡으려는 자들
(tiv" ejx uJmw'n ejlevgcei me peri; aJmartiva"_ eij ajlhvqeian levgw, dia; tiv uJmei'" ouj pisteuvetev moi_티스 엑스 휘몬 엘렝케이 메 페리 아마르티아스 에이 알레데이안 레고 디아 티 휘메이스 우 피스튜에테 모이;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G디 아니하느냐, 46절)
엘렝케이(ejlevgcei책잡겠느냐)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원래의 뜻을 '밝히 드러내다, 죄를 깨닫게 하다, 교정하다, 바로잡다'등을 의미한다(Arndt-Gingrich). 또한 현재형으로 계속적으로 책잡기 위해 한 것임을 암시한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비난하다, 정죄하다, 벌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F.Buchsel). 그들은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여여만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그분에게 죄를 선고하지 못했다(Wycliffe).
우 피스튜에테(ou; pisteuvete믿지 아니하느냐)는 예수를 향한 그들의 적개심이 불합리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편견과 선입견에 근거한 것이어서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A.T.Robertson). 예수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기본 요소인데(Smith-Lee) 그들은 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주의 인격, 주의 사명, 죄의 무서움, 제자 됨의 조건, 영적 자유 등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던 것이다.
2)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 말씀을 들음
(oJ w]n ejk tou' qeou' ta; rJhvmata tou' qeou' ajkouvei호 온 에크 투 데우 타 레마타 투 데우 아쿠에이;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47a절)
에크(ejk 께 속한)는 속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 으로부터, 에서 밖으로' 등을 뜻한다. 어떤 것이 오는 방향을 나타내기도 하고 분리를 나타낼 때와 기원, 원인, 동기, 이유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인다. 우설적 표현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본문에서처럼 에이미(eijmiv있다, 이다) 동사와 함께 나오면 ' 에게 속하다'라는 의미가 된다.(Arndt-Gingrich). 하나님에게 속했는지 마귀에게 속했는지는 예수에 대한 태도가 결정적으로 입증해 준다. 아쿠에이(ajkouvei듣나니)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적으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려는 태도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그분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며 순종하는 것뿐이다.
3)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들
(dia; tou'to uJmei'" oujk ajkouvete, o{ti cv.디아 투토 휘메이스 우크 아쿠에테 호티 에크 투 데우 우크 에스테;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7b절)
우크 아쿠에테(oujk ajkouvete듣지 아니함은)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전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계속적으로 듣거나 이해하기를 거부했던 것임을 나타낸다. 주를 향하여 철저하게 문을 닫아 걸고 있었으므로 그들 속에 있는 어두움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이 단어는 감각적인 지각으로서의 '듣다'라는 의미 이외에도 들어서 '알다, 순종하다, 깨닫다' 등의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Arndt-Gingrich). 들음은 적절한 형태로서 계시에 해당한다(G.Kittel). 에크…우크 에스테ejk...oujk ejste 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는 문자적으로는 에크(ejk)가 ' 로부터'이며 에스테(ejste)가 '이다'라는 동사이므로 ' 로부터 나오지 않은 자'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Dods). 그들은 마귀와 혈연 관계에 있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늘도 참된 것은 거절하고 거짓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두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다.
요 8:48~59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
예수의 영광
본문에서는 예수의 세계와 유대인의 세계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속하셨으며, 그들이 자랑하는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
1. 유대인들의 편견과 무지(48-50절)
1) 예수를 귀신이 들렸다 함
(Ouj kalw'" levgomen hJmei'" o{ti Samarivth" ei su; kai; daimovnion e[cei"_우 칼로스 레고멘 헤메이스 호티 사마리테스 에이 쉬 카이 다이모니온 에케이스;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8절)
칼로스(kalw'"옳지)는 '잘, 아름답게'라는 뜻으로, 본문에서처럼 '말하다, 듣다, 깨닫다'등의 동사와 함께 쓰일 때 '바로, 잘'따위로 번역한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평가가 옳은 것이라고 고집하였다(Arndt-Gingrich). 사마리테스(Samarivth"사마리아 사람)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적이요, 율법 위반자이며(W.Barclay) 이단자라고 조소하는 의미를 갖는다(黑崎).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의 말씀에 분개했으며, 순간적인 흥분의 상태에서 이처럼 엄청난 실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이모니온 에케이스(daimovnion e[cei"귀신이 들렸다)에서 에케이스(e[cei")가 에코(e[cw가지다)의 2인칭 단수 동사이며 다이모니온(daimovnion귀신)이 목적격이므로, '네가 귀신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이 된다. 특히 동사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적으로 악마에게 지배를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J.G.Machen). 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흔히 사용했던 비난의 말이다(A.T.Robertson). 무익한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은 충분히 숙고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2) 예수를 무시함
( jEgw; daimovnion oujk e[cw, ajlla; timw' to;n patevra mou, kai; uJmei'" ajtimavzetev me.에고 다이모이온 우크 에코 알라 티모 톤파테라 무 카이 휘메이스 아티마제테 메;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49절)
1인칭 단수대명사 에고(ejgw;나는)란 강조용법으로 쓰였다. 다이모니온 우크 에코(daimovnion oujk e[cw귀신들린 것이 아니라)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한 주의 냉정한 대답이다(A.T.Robertson). 첫 번째 비난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명확한 거짓임이 드러났으므로 간과해 버리셨으며 두 번째 비난에 대해서만 부정하셨다. 티모(timw'공경함이어늘)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분은 항상 아버지를 존경하였으며, 그분의 가르침이나 행위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이같은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행위를 마친 것으로 간주하고 모욕하는 것은 곧 성부에 대한 모욕이다(A.T.Robertson). 아티마제테(ajtimavzetev무시하는도다)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모욕을 주다, 창피를 주다'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께 대해 계속적으로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빌2:9-11).
3) 자신의 영광을 구치 않는 예수
(ejgw; de; ouj zhtw' th;n dovxan mou: e[stin oJ zhtw'n kai; krivnwn.;에고 데 우 제토텐 독산 무 에스틴 호 제톤 카이 크리논;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0절)
에고(ejgw;나는)는 49절처럼 강조 용법으로 쓰였다. 우 제토(ouj zhtw'구치 아니하나)는 예수께서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자신이 모욕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면서 끝내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것을 알고 계셨다(W.Barclay).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치 아니했고 예수는 세상의 영광을 구치 아니하셨다(A.T.Robertson). 에스틴(e[stin계시니라)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분은 역사의 저편에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신다.
크리논(krivnwn판단하시는)은 현재 분사로, '아버지는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를 판단하시는 자'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를 향한 그들의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은 그 옳고 그름이 아버지에 의해 판단될 것이다(Wycliffe).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그분의 판단이다(창18:25)
2. 영원한 삶을 위한 길(51-54절)
1) 주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살게 됨
(ejavn ti" to;n ejmo;n lovgon thrhvsh/, qavnaton ouj mh; qewrhvsh/ eij" to;n aijw'na.; 에안 티스 톤 에몬 로곤 테레세 다나톤 우 메 데오레세 에이스 톤 아이오나;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51절)
테레세(thrhvsh/지키면)는 테레오(threvw지키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이다. 기본적인 의미는 '유의하다, 에 주의하다' 등이며, 70인역(LXX)에서는 '망보다, 감사하다, 준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의 보편적인 사상은 계명등을 준수함이나 지킴에 대한 것이다(H.Riesenfeld). 예수의 가르침을 수용하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 메 데오레세(ouj mh; qewrhvsh보지 아니하리라)는 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이 강한 이중 부정어가 함께 사용된 부정문이다(A.T.Robertson). 일차적으로 종교적인 절기에서의 구경꾼들을 가리키는 이 동사는 ' 을 보다, 발견하다, 인정하다, 감지하다, 깨닫다' 등을 의미한다. 70인연(LXX)에서는 환상적으로 보는 것이나 지각의 뜻으로 나타났다(W.Michaelis). 주가 말씀하시는 이 죽음은 영적인 것이며,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가 시간과 영원의 구별이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시사한다(W.Barclay).
2) 예수를 아브라함과 비교하는 자들
(mh; su; meivzwn ei tou' patro;" hJmw'n jAbraavm, o{sti" ajpevqanen_ kai; oiJ profh'tai ajpevqanon: tivna seauto;n poiei'"_메 쉬 메이존 에이 투 파트로스 헤몬 아브라함 호스티스 아페다넨…티나 세아우톤 포이에이스;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3절)
메(mh;)는 부정적 대답을 기대하는 의문 불편사로 사용되었다(Arndt-Gingrich). 즉 유대인들은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크지 않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전제로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 질문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이었다(A.T.Robertson).
메이존(meivzwn 보다 크냐)은 메가스(mevga"큰, 위대한)의 비교급이다. 영적 사실에 대해 눈인 어두운 유대인들은 예수의 위치에 대해 계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黑崎). 그들의 말 속에는 예수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비난이 깔려 있다. 티나 세아우톤 포이 에이스(tivna seauto;n poiei'"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를 송사할 구실을 잡으려는 질문이다(黑崎). 현재 능동태 직설법인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행하다, 만들다' 등을 의미하지만, '생각하다'라든지 '상상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Arndt-Gingrich). 그들은 예수의 자신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였다.
3)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영광을 돌리심
(e[stin oJ pathvr mou oJ doxavzwn me, o}n uJmei'" levgete o{ti qeo;" hJmw'n ejstin:에스틴 호 파테르 무 호 독사존 메 혼 휘메이스 레게테 호티 데오스 해몬 에스틴;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4절)
에스틴(e[stin 시니)은 위치상 강조를 나타내며, 실제로 내 아버지는 그분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A.T.Robertson). 독사존(doxavzwn영광을 돌리시는)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영예를 주고 영화롭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Arndt-Gingrich).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 독자적인 지식을 주장하신다(W.Barclay).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분처럼 정확하게 알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휘메이스 레게테(uJmei'" levgete너희가…칭하는)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들은 마귀와 혈연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경건은 아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의 기쁨(55-59절)
1) 하나님께 대한 무지
(kai; oujk ejgnwvkate aujtovn, ejgw; de; oida aujtovn. ka]n ei[pw o{ti oujk oida aujtovn, e[somai o{moio" uJmi'n yeuvsth": ajlla; oida aujto;n kai; to;n lovgon aujtou' thrw'.카이 우크 에그노카테 아우톤 에고 데 오이다 아우톤…알라 오이다 아우톤 카이 톤 로곤 아우투 테로;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5절)
우크 에그노카테(oujk ejgnwvkate너희는 알지 못하되)는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완료능동태 직설법으로 경험적인 지식을 나타내며 그들이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A.T.Robertson).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오이다(oida아노니)는 완료 형태를 가졌으나 의미는 현재로(Arndt-Gingrich), 지속적으로 알고 계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주장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특이한 것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와 매우 친밀한 관계에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W.Barclay). 테로(thrw'.지키노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분이 계속적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려면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W.Barclay, 고전11:1).
2) 아브라함의 선지자적 통찰력
( jAbraa;m oJ path;r uJmw'n hjgalliavsato i{na i[dh/ th;n hJmevran th;n ejmhvn, kai; eiden kai; ejcavrh.아브라함 호 파테르 휘몬 에갈리 아사토 히나 이데 텐 헤메란 텐 에멘 카이 에이덴 카이 에카레:너희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에갈리아사토(hjgalliavsato즐거워하다가)는 아갈리아사오(ajgalliavsaw기뻐 날뛰다, 기뻐서 미칠 지경이다)의 단순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 자신을 위해 스스로 즐거워함을 시사한다.
능동태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이 동사의 용법은 동작자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J.G.Machen).
즉 본 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즐거워한 것을 부각시킨다. 히나 이데(i{na i[dh볼 것을)는 호라오(oJpavw보다)의 제2단순과거 능동태 가정법이다. 아브라함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이다(히11:1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기의 씨가 세상에 나타낼 때를 보고자 했으며, 예수의 탄생을 낙원에서 보고 기뻐한다(黑崎). 에카레(ejcavrh기뻐하였느니라)는 카이로(caivrw기뻐하다)의 제2단순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외적 요인에 의해 기뻐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유대인들과는 전혀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음을 나타낸다. 예수를 기뻐하는 것이 경건이다.
3)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예수
( jAmh;n ajmh;n levgw uJmi'n, pri;n jAbraa;m genevsqai ejgw; eijmiv.아멘 아멘 레고 휘민 프린아브라암 게네스다이 에고 에이미;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프린…게네스다니(pri;n...genevsqai나기전부터)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 생기다, 일어나다)의 제2단순과거 부정사로 '아브라함이 존재하기 전에, 생겨나기 전에'라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이 무시간적 존재이심을 주장하고 있다.(W.Barclay).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무시간적인 분은 하나님 한분이신데, 예수의 이같은 주장은 자신이 곧 그임을 나타내신 것이다(W.Barclay). 에고 에이미(ejgwv eijmiv내가 있느니라)에서 1인칭 단수대명사 에고(ejgwv 내가)는 강조 용법으로 쓰였고, 1인칭 단수 동사 에이미(eijmiv있느니라)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계속성을 나타낸다. 그분이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심을 표현한다. 그분은 영원한 존재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A.T.Robertson). 그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요14:9).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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