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는 간음녀를 정죄하지 않았는가?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많은 고대사본에 이 부분이 없습니다. 특히 이른바 이집트 본문 그룹이 그러합니다. 어느 고대사본에는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 7:36 다음에 있고, 다른 어느 그룹의 사본에는 요한 복음 21:24 다음에, 그리고 어떤 사본 그룹에는 누가복음 21:38, 마가복음 12:17 다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있는 대부분 사본은 요한복음 7:52 다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 한글성경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방식에 따릅니다.
이 본문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성경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추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집중적인 연구 결과에 따라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합니다. (1) 이 본문은 매우 오래된 예수님 전승에 속하는데, 늦어도 2세기에는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2) 이 본문은 원래 요한복음에는 없었으나 나중에 요한복음에 삽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이 믿음직하다는 것을 전제로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소아시아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적어 넣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피아스와 아리스티온이 그 제자에 속한다. 어쨌든 파피아스(125년경)가 이 본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가 이 이야기를 정리해서 자기 스승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에 추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사본의 정보 부분은 필자가 번역한 마이어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발췌하고 보충한 것입니다).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53절): 이 말을 앞 단락과 연관해서 생각한다면, 공회원이 합의를 보지 못해 집으로 돌아간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서 심문하기를 결정했으나, 경찰이 그분은 잡아오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자기편으로 알고 있었던 니고데모가 이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지적하자 논쟁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이윽고 저녁이 되자 공회가 해산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잡고자 한 무리들의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다음 날에도 계속 가르치실 수 있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위원 중에서 자기들을 반대하는, 침묵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좀 위축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 체포에 대해 더는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들은 앞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여 어찌하든 계략으로 잡으려고 합니다(요 8:3 이하; 막 12:13 이하).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어려운 시험을 통해 그분을 잡으려고 합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이기려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마침 매우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좋은 시험 거리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간음한 여인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시험을 통해 자신의 죄와 무지, 그리고 그와 반대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밝게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아무리 연구할지라도 말씀의 깊이를 다 파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만큼 최대한 이해한 후에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저녁이 되어 주무시고자 감람 산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과 근교에 예수님 제자들이 여러 명 거주함에도 그곳으로 가시지 않고 산으로 가신 것은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초막절 한 주일간 많은 것을 가르치셨고, 종교지도자들의 적의는 더욱 커졌습니다.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예수님께 기도 제목이 많았을 것입니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아침에 성전으로 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그곳에 아침 일찍 가신 것은 가르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틈만 나면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친다는 말은 구약을 해석한다는 의미입니다.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a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끌고 온다“, „말한다“라는 동사에 현재형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극적인 효과를 나타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다른 당파의 사람이 아니라 바리새인 서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람을 시험하여 고발하는 것은 그들의 전문분야입니다. 이것을 나쁜 일이 아니라 원래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을 이단으로부터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경 진리를 벗어난 거짓 교사를 잡기 위해 매우 어려운 질문을 던진 후, 그 대답을 듣고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나중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시는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목적에서 나온 매우 어려운 질문을 받게 됩니다(막 12:13 이하; 12:18 이하). 그러므로 이들은 진리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이 일을 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교인, 교회의 경건과 열심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단히 경건해 보이는 사람, 혹은 교회가 실제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여자를 가운데 세운 후에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들은 예수님께 랍비라는 명칭에 해당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자기보다 어리고, 랍비 학교도 다니지 않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러준 것은 좀 특이합니다. 예수님이 그만큼 선생님으로서의 명성이 있었고 위엄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이들이 예수님이 잘못된 대답을 하실 것을 확신했으므로, 그 오류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먼저 크게 올려주었을 것입니다. 낙차를 매우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모세가 간음자를 돌로 치라는 명령을 들고 나오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판결하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모세의 율법,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항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하게 되었을까요?
이들은 예수님은 율법을 어겨서라도 약자를 돕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식일에 몇 번이나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분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리새인에게 지적받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이나 „장로들의 유전“을 여러 번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이라면 간음자라고 할지라도 돌로 쳐서 죽게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모세 율법을 어기는 거짓교사로 드러나 고소를 당할 조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 행위는 이해할만합니다. 율법을 헌신적으로 섬기려는 사람은 열심에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으로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은 예리하게 보면서 자기를 통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이 이미 굳어지면 마음이 남을 가르치고 정죄하는 데에 쏠리게 되어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한 행동을 보고서도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께 악심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율법주의자들의 약점입니다.
6b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지금 앉아계시므로 그대로 몸을 굽혀 무엇을 쓰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갑자기 질문 공격을 받으셨으므로 시간을 벌려고 그러한 퍼포먼스를 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다면 8절에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선지자적인 행동으로 보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특별한 몸짓과 행동, 삶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특별히 예레미야, 호세아).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어느 예언 말씀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렘 17:13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예수님은 지금 서기관들 눈앞에서 이 행동을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너희가 바로 여호와를 떠난 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단 5:5 이하에서 심판문을 쓰시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출 31:18(„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에 따르면 하나님이 직접 율법을 손가락으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고소하려고 하자, 예수님은 이러한 행동으로써 이들의 죄를 확정하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위기감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더라면 더 크게 망신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율법의 권위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자가 돌에 맞아 죽을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은 기본적으로 아직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변하지 않습니다. 간음은 이렇게 무서운 죄입니다.
2) 그런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형을 집행할 자격이 있다! 지금 형을 집행할 자격이 문제입니다. 형은 원칙적으로 죄가 없는 인간만 집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므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형을 내릴 수 있는 중립적인 기관, 즉 재판부를 허락하셨습니다. 형을 집행할 수 있는 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기간이므로, 사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형을 집행합니다. 형 집행자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구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개인이 복수하는 것을 금합니다. 국가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 그런데 당시 이 유대인들은 이 공정한 하나님의 법을 남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회에 넘기지 않고 자기들이 증인을 세워 린치를 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이 모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합니다. 개인 자격으로 사형에 동참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죄인이 죄인을 죽이는 살인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해석하신 율법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마 5:28). 모두 이처럼 무거운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관리를 통해 형을 집행하게 하신 것은, 이것은 본 사람은 자기도 같은 죄를 짓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죄를 보지 못하고 살기에 가득 찼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허락하셨다면 당장에 돌로 쳐서 죽일 형세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남용입니다. 율법은 일차적으로 자기 죄를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은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자기가 형을 집행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나는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의로 나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바로 앞 49절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를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 같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이들 마음에 자기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하신 것 같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불신자 마음에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마음에도 역사하셔서 역사의 진행을 바꾸십니다(예: 고레스 왕).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양심에 가책을 느껴“라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다. 이 말이 들어있는 사본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이 말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기보다는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옅은 죄 인식을 가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에도 눌리지 않았을까요? 이들이 정말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앞으로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들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또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죄 인식이 쉽게 회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죄 인식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조금 삼가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전과 같아집니다. 우리는 무언가 꺼림칙한 것을 느꼈을 때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 하며,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무튼, 이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시끄럽던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이 모두 떠나 이제 주위가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에게 질문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이 말씀도 참으로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메시아께서 자기를 정죄하여 죽이려던 자들을 모두 쫓아내셨다는 것을 환기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정죄한 자들을 모두 사라졌습니다. 메시아께서 그녀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이제 자기를 정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자기 앞에 서 계십니다. 그분만이 유일한 심판관이십니다. 그분만이 돌을 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분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오용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그녀의 죄를 그대로 덮어준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앞에서 „돌로 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죽을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차적으로 형 집행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살려주십니까? 지금은 일단 살려주었다가 나중에 죽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 용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는 비록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는 죄 사함의 선포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3-4장에서 가르치는 칭의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롬 3:21-22).
이것을 율법에서의 자유로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의롭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녀는 심판석 앞에서 심판자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뜻밖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율법을 만드시고 이것을 지나치게 어기는 자에게는 사형을 명한 분 자신이, 가장 무거운 죄 중의 하나인 간음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간음녀의 처지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녀는 죽음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두려움 앞에서 떨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영원토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선포가 들려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죄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몰래 간음하다가 발칵 되어 주위사람에게 알려진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이 분노해서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전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언제 회개했을까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 여자는 그 여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죄인을 용서하시는 메시아의 깊은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회개의 단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앞으로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고 살기도 어렵고, 쉽게 이사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메시아의 용서와 사랑으로 이 모든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이기고 용기 있게 살아갈 것입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는 말씀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은 주위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에도 계속 사는 힘을 줄 것입니다. „가라“라는 말씀은 죄 사함을 받고 앞으로 새 삶을 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참조: 5:14)는 것은 먼저 간음남과의 관계를 청산하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용서를 남용하여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계속 간음 상태에 있다면, 심판 말씀은 유효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죄를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천박하고 악한 말이 교회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유감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자, 회개의 삶을 사는 자를 받아주십니다. 회개한 자에 한에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놔두지 않으시고 그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좇는 자로 만드시고 그분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이 간음녀가 앞으로 남자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시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을지라도 사회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예가 많습니다. 율법 경시 풍조로 교인들의 죄의식도 상당히 낮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죄 용서가 가능하며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은 죄 사함에서 시작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깊은 수치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 간음녀가 많은 남자의 분노하는 눈길을 느끼면서 더러운 몸으로 거룩한 예수님 앞에 섰을 대 그 수치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죄 때문이 이 몸서리치는 수치감을 수천 번, 수만 번 느껴야 합니다. 일생 이러한 인식으로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그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기 죄가 드러나므로 계속 회개하고 그분의 죄 사함은 은혜를 더욱 강력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제 60 중반이 지나가고 70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린이 시절에 지은 죄까지 생각이 나서 저를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릅니다. 자기 죄는 6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깊이 감추인 우리 죄의 뿌리까지도 드러내셔서 이것을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매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묻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기 죄를 깨닫고 고백하여 죄 사함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너무나 강렬하여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를 이기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마술사가 우리를 정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이라는 주사를 한번 맞고 단번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그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 생각납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떠오르게 합니다. 내가 과거에 내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았던 그 은혜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호소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설득을 당해 죄를 이기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번 깊은 죽음의 골자기를 지나게 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일생 이끌기 때문에 내가 죄를 벗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회개의 체험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으며,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지 않으므로 죄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핵심인 „죄 사함“에 대해 배웠습니다. 죄 사함이란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너무나 수치스러워 예수님 앞에 선 죄인이 인격적으로 듣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를 듣고 영접한 사람은 이 예수님의 은혜가 뼛속까지 침투하여, 그 은혜가 일생 그를 악한 마음과 정욕으로부터 보호하는 능력이 됩니다. 이 죄 사함은 단순한 선포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대속하신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역사적인 증거가 있으므로 우리는 더욱 굳게 이 은혜를 붙들고 이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제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이 여자를 용서하심으로써 간음자를 사형하라는 모세 율법(레 20:10; 신 22:22)을 어기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국에 가서 그 여자를 용서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는 나중에라도 당국의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은 단지 회개를 근거로 일어나므로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자기 자신이 지시고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조금이라도 율법을 거스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당국의 판결과 관계없이 일어납니다. 회개한 자는 누구든지 이렇게 먼저 예수님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죄 사함과 권징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간음자를 반드시 권징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교회에서 간음자나 범죄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형교회와 다릅니다. 교회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아서 쉽게 깨어지고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대단히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는 드러난 죄인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3) 예수님은 왜 그녀를 사형에 넘겨주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그런 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미 정죄 받고 저주받은 이 땅에서 더 정죄하실 것이 없습니다. 다만 구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임무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시고 헌신하셔서 죄인을 섬깁니다. 그분이 심판하시는 것은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그분이 구원하시는 주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4) 벌하시는 하나님과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들은 서로 다른가? 아버지는 벌하시는데 어떻게 아들은 용서하실 수 있는가?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벌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벌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다만 그 벌을 아들이 지심으로써 아들이 벌을 받으므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죄만 지십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이 용서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이 그리스도와 함께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개인 삶에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원제: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요 7:53-8:11)
송다니엘/ 프랑크프루트개혁교회 목사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성경 원본에 있었는가?
(요8:3-11)
위의 사건은 대부분이 영어 성경에 그대로 나온다(KJV. ASV. NASV. NIV). 그러나 새영어성경(NEB) 에서는 An incident in temple이란 표제 아래 복음서의 끝에 두었다. 1971년판 개정표준역(R.S.V)에서는 새개정표준역(NRSV)이 한 것처럼 특별한 인쇄로 그 본문의 나머지 구절과 구별시켜 두었다. 또 표준 헬라어 신약(Nestle-Aland Text, 미국성서협회)은 본문을 괄호로 묶어둠으로써 그것이 요한의 본문에 한 부분이 아님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러면 본문을 요한복음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이 구절은 가장 오래되고 믿을 수 있는 헬라어 사본들에 나타나지 않는다.
2. 이 구절은 옛 수리아, 곱틱, 고딕 그리고 옛 라틴 성경의 가장 초기의 최선의 사본들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3. 헬라어 작가들의 이 구절에 대한 언급이 기독교의 첫 11세기 동안 없었다.
4. 본문은 클레멘트, 터틀리안, 오리겐, 싸이프리안, 씨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는 위대한 초대 교부들 대부분이 인용하지 않았다.
5. 이 본문들의 문체가 요한복음의 남은 부분과 맞지 않는다.
6. 이 이야기는 성경 사본들의 몇몇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요한복음 7:36 후에, 요한복음 21:24 후에, 요한복음 7:44 후에 그리고 누가복음 21:38 후에 나온다.
7. 요한복음 7:53-8:11을 포함한 많은 사본들은 의구표로 묘사함으로 그것이 의심스러운 구절임을 명시하고 있다.1)
그래서 로벗슨(A.T. Robertson)은 필사자의 실수로 본문에 삽입된 것으로 보며 렌스키(Lenski)는 불확실한 언어의 출현으로 아예 그의 해석에서 완전히 제외시켰다.2)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본문이 요한복음의 한 부분이었음을 주장할 수 있다.
1. 이 사건은 현재의 문맥에 매우 잘 어울린다.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 말씀은 이 여인이 도덕적으로 어두운 삶을 산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2. 여기 묘사된 그리스도는(7:53-8:11) 그 품성과 인격에서 다른 곳에서 소개하는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여기서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는 정죄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며 실제로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세리와 죄인들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3. 사도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는 이 이야기를 알았고 해석한 것처럼 보인다.
4. 어거스틴은 이 여인의 이야기를 뺀 것은 여인들이 그들의 부정에 대한 핑계로 이 이야기에 호소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체상의 특성을 연구한 존슨(Johnson)은 6:6; 6:7; 11:13; 11:51; 13:11; 13:28 과 8:6의 유사성을 들어 이 부분이 전체 요한복음의 완전하며 믿을 수 있는 구절임을 논증하였다.
역시 이 구절의 포함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본문상의 증거도 있다.
하지스(Hodges)는 이 사건을 포함시키기 위한 증거로 이 구절은 보존되어 있는 헬라 사본들 중에 아주 많은 다수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하였다. 대략 450개의 헬라어 본문이 Pencope 를 포함하고 있다. 역시 그는 본문의 진정성을 주장하기 위해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온 증거에 호소한다.
그는 많은 헬라어와 라틴어 사본에서 요한복음의 내용을 쓰고 있는 제롬(420년 경)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 주님 앞에서 고소되었던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가 발견된다.3) 따라서 하지스(Hodges)는 헬라어 사본들 초기의 번역들 그리고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이 본문의 진정성을 확신한다.
주
1.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p.414-415
2. William Hendriksen,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the Banner of truth trust, 1961), p.34
3. J. Carl Laney, Answers to Tough Questions(Grand Rapids: Kregel, 1997), pp.230-231
http://revdavidsuh.com/bbs/view.php?id=Joh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7http://www.reformanda.co.kr/theoJournal/118133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47)
중심내용 :
예수님은 ‘진리를 통한 자유’란 주제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진리의 당사자이신 예수님(요 14:6)을 믿음으로 영적 자유 곧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이유로 진리를 거절했다. 예수님은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며 저들의 영적 정체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고발하셨다. 모름지기 하나님께 속한 자는 말씀을 청종한다.
명제 :
복음은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설교목적 :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진리의 담지자 곧 구속주가 되심을 우회적으로 천명하시면서(32절/요 14:6, 마 1:21), 진리의 근본이신 자신을 믿음으로 죄사함 곧 죄로부터 자유(구원)케 될 것을 권유하신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의 선민임을 앞세워 예수님의 권유를 거절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란 명제 하에서(롬 3:23)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예외일 수 없음을 지적하신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수납 여부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 소속과 직결된다(죄인/자유인). 당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하십니까(죄사함). 마귀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졌습니까(골 1:13-14).
Ⅰ. 도입 :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진리
1.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떠나간 반면에(6:65-66), 일부는 계속 예수님을 좇았다. 복음서는 이들 무리를 제자로 부르기도 했지만 구원받은 참 믿음의 소유자들인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2. 예수께서는 이들 무리를 향해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을 말씀하셨다(요 8:31-32).
3.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이유로 죄로부터의 자유(모두가 죄인이기에)란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 나머지 예수님의 진리(복음)를 거절했으며 스스로 아브라함의 참(영적) 후손이 아님을 드러냈다.
4.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해야 할 것이라며, 저들이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질상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고발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절대가치?/상대가치?, 방편적 도구?/궁극적 관심?
Ⅱ. 전개 :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는 자유(계 8:31-47)
A. 진리로 말미암는 참 자유와 제자 됨의 함수관계(31-36절)
1.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32절).
(1) 이때 진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변한다(요 14:6).
(2) 이때 진리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내포한 복음을 가리킨다.
(3) 이때 자유의 정체성은 죄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을 의미한다.
① 결국 진리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
② 그리스도의 오심은 (죄에)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이다(눅 4:18).
*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로부터 구원할 자이심(마 1:21).
#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합니까?(롬 3:24)
2. 진리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고 자유한 자가 참 제자다(31절)
(1) 참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다(31하, 마 28:19-20/전인적 순종)
(2) 자기를 부인하며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자(마 16:24)
(3)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신앙적 고난과 시련 감수)
(4) 인간관계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자(눅 14:26) : 가족<그리스도
(5) 소유욕을 극복할 수 있는 자(눅 14:33, 재물에 예속되지 않는 자)
* 욥 1:21-22=고전 4:7 : 주신 분도,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인정
# 무소유의 삶이란 물질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과 욕망을 적극 절제/극복하는 삶이다.
3. 아브라함의 후손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33-36절)
(1) 유대인의 반박(33): 종 된 적이 없거늘(종교적) 어떻게 자유에 집착하겠느냐
* 아브라함의 자손도 죄의 종의 신분에서 결코 면제되지 못함(롬 3:9-1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죄의 노예와 예속물이 되었음(롬 3:23)
(2) 예수님의 구제책(34-36절) : ①종은 스스로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없음, ②반면에 아들은 상속권이 있음, ③그러므로 아들이 종을 자유케 할 권한이 있음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는 믿는 자에게 사죄와 칭의와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권세를 주심(요 1:12, 3:16, 5:24).
B. 아브라함의 참 후손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좇음(37-44절)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았음(창 15:5-6)
2.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면 아브라함처럼 행동할 것임(39절)
3.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죽이려함(40-44절)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했으나
(2) 아브라함의 후손된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예수님을 죽이려함
(3) 그러므로 유대인의 정체성은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 아님.
* 아브라함의 참 후손은 혈통적 이스라엘 아님/그리스도께 속한자(갈 3:29)
(4) 결국 유대인의 행사의 배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임을 고발하심(44절)
*요 8:44(마귀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살인자. 진리의 실종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계 12:10(참소하는자)
C.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45-47절)
1. 예수님은 무죄자이시다(46절상)
* 본질상 하나님으로서(신성/빌 2:6, 요일5:20) 인성을 겸비하셨으나 죄는 없으심(히 4:15). 죄를 모르심(고후 5:21). 죄를 범치 않으심(벧전 2:22).
* 그러므로 아무도 예수님을 죄책으로 벌할 수 없음
* 예수님의 정죄와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대속적 죽음(롬 4:25)
#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셨는지요(요 1:12)
2.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참 믿음의 내용이다(46절하, 요 14:6)
* 바른 믿음(신앙)은 합당한 내용을 동반한다(롬 10:17).
# 그러므로 바른 계시관의 정립은 바른 신앙관 정립의 첩경으로 작용한다.
3.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47절)
(1)요10: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 (2)그러므로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자.
Ⅲ. 결론 :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1. 예수님은 ‘진리를 통한 자유’란 주제로 누구든지 진리의 당사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 자유 곧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증하신다.
2.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롬 4:25).
3.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사랑이 동기유발 된 행함을 동반하며, 행함을 통해 참 제자 됨을 증시한다.
4. 결국 예수님의 말씀(진리=복음)에 대한 수납 여부는 사죄 및 구원 여부와 직결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하십니까(죄사함). 흑암의 권세(엡 6:12/세상 곧 마귀의 통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졌습니까(골 1:13-14).
주님과 동행하는 복 (요 8:29)
이 시간에 “주님과 동행하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고향에 오신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게 됨을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향교회를 위해서 잊지 마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결혼도 해보니 별 것 아니고 이제는 돈이나 실컷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아직 인생을 덜 경험한 소리입니다. 돈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을까요?
2002년 성탄절에 미국의 잭이란 사람은 역사상 가장 큰 로또에 당첨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금액은 세금을 제외하고도 1억 1,3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300억 원 정도 됩니다. 그 당시로는 그가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고 최고로 행복한 존재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무절제한 삶 등 불과 2년 만에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폐인이 되어 재활 센터로 보내졌습니다. 더 가슴 아픈 일은 그의 손녀가 마약에 손을 대 과다복용으로 친구와 함께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내가 그 주인공이라면 현명할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그럴지라도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대통령직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무덤에 있는 것이 낫다.”
3대 대통령인 제퍼슨도 백악관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권력의 사슬을 벗어던질 때 느꼈던 해방감은 죄수가 감옥에서 나올 때의 해방감 이상이다.”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전1:2-3을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 고백은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누려본 솔로몬 왕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으로 만족을 누려야지 세상 것으로 만족을 누리려고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과 동거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1. 인생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요8:29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동행했더니 함께 하셔서 외롭지 않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까지도 아버지께서 온전히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16:32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외로움 고독 이것이 문제입니다. 외롭지만 않으면 인생은 살만한 존재입니다. 외롭지 않는다면 산속이라도 집을 짓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해 보면 외로움 때문에 포기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은 사람 사는 곳에 모여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 틈에서 산다고 외롭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 외롭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처럼 방황하고 방탕해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거스틴(A.D.354-430)은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신자이며 서방교회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그러나 그는 16살 때 카리타고로 유학하면서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이성의 사랑에 빠져 사생아를 낳고 문란한 생활했을 뿐 아니라 9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찾아 마니교에 심취하며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참된 안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왜 나는 이 더러운 생활을 깨끗이 끝내지 못할까?" 애통하며 눈물로 부르짖을 때 이웃집 뜰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노래를 부르는데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서재로 뛰어 들어가 성경을 폈습니다. 롬13:13이었습니다.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이 그의 폐부에 깊이 박혀 들어갔고 그의 삶은 변화되고 오랜 방황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응답이었고 성령의 기름부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말고 어디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 길이 그러한 것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길에 생명강수가 가슴 속에서 타져 나오고 온갖 생명의 실과로 만족한 것입니다.
2. 삶의 의미와 목표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빌3:7-9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만나 진정한 인생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미국의 요한 맥스웰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더 근원적으로 보면 우리 주님을 깊이 만났느냐의 여부인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꿈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갈 데가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달려가십니까?” 물으면 “모릅니다. 그냥 저도 달려갈 뿐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면 삶의 의미와 목표가 생깁니다. 주님이 영의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 주십니다. 성경 말씀대로 그리고 성령의 감동대로 따라만 가면 됩니다.
덴마아크를 변화시킨 구룬두비 목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목사고시를 볼 때 설교제목이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였습니다. 시험관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떨어뜨렸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발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섰지만 목사고시에 낙방하고 조그마한 섬에 유배당하다시피하여 신경쇠약에 걸려 잠도 자지 못하고 나중엔 헛소리까지 하는 등 폐인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그룬두비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절히 통회 자복하며 눈물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그를 뜨겁게 해주셔서 연약함을 치료 받고 담대해져서 그 때부터 그의 입에서 말씀이 쏟아지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덴마크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국민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나 동행해야 삶의 의미와 목표가 생깁니다.
3.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마11:28-30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과 한 멍에 메고 동행하는 자에게 모든 짐 벗겨 주시고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잘 안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해해야 되는데 이해하기 싫고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하지 못하며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의 짐이 무거워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면 그 짐이 가벼워지고 말씀대로 살아집니다. 그래서 그 완악하던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고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짐 예수님께로만 오면 자동으로 다 벗어집니다.
4. 변화 받은 사람이 됩니다.
요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면 변화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을 깊은 만난 사람일수록 더욱 크게 변화됩니다.
죄수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미국의 캐서린 로즈여사가 있었습니다. 로즈여사는 평생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농아들에게는 수화를 가르쳤고 맹인들에게는 점자를 가르쳤습니다. 1937년 어느 날, 그녀는 그만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에 교도소에 알려지게 되자 죄수들이 교도소장에게 “소장님! 저희들이 교도소 밖으로 나가 캐서린 로즈 여사에게 문상을 하고 경의를 표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 분은 우리의 은인입니다.” 그 부탁을 들은 교도소장은 그런 엄청난 부탁을 듣고 한참 망설였지만 평소에 그 캐서린 여사의 감동적인 헌신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흉악한 죄수들이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캐서린 로즈 여사를 존경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승낙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도소장은 죄수 600명에게 잠시 동안 외출을 허용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600명의 죄수들은 한 줄로 서서 그 캐서린 로즈 여사의 운구행렬을 뒤따랐는데 그 길이가 무려 800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들꽃을 하나씩 따서 한 송이씩 들고 캐서린 로즈 여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날 저녁 600명의 죄수는 단 한 사람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교도소로 돌아왔습니다. 존경하는 캐서린 로즈에게 누를 끼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위해서는 양심도 버린 죄수들이건만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주님과 동행하면 이처럼 변화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할수록 소성강처럼 더욱 충만해집니다.
그럼 어떻게 동행하는 것일까요?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암3:3)고 했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하늘보좌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나를 내려놓고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blog.daum.net/ope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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