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목자라
Εγω ειμι ο ποιμην ο καλος.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Ο ποιμην ο καλος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βαλλει υπερ των προβατων·
선한 목자 예수(요 10:1-42)
요한복음 10장은 강도에 대한 말로 갑자기 시작하기 때문에 9장과의 연관성이 문제된 때가 많았다. 하지만 10장 21절 등의 내용으로 보아 10장에서 예수는 9장에 나오는 유대인들과 계속해서 논쟁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장이 사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10장은 그 진리가 자기 계시를 하고, 이것에 대한 유대인 당국자들의 반응(22-39절)과 일반 대중의 반응(41-42절)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1. 목자 강화(요 10:1-18)
목자 강화는 비유 자체(1-6절)와 그에 대한 해설(7-18절)로 구성되어 있다. 비유(1-6절)의 내용은 다음 질문에 대한 해설로 요약될 수 있다. 누가 참 목자이고 참 목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참 목자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자며, 그는 양과 상호 간에 음성을 인식하는 자다. 역으로 말하면, 거짓 목자인 도둑 강도는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며, 양과 음성으로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자다. 그래서 양은 목자를 따라가지만 강도에 대해서는 피해서 도망간다.
위 예수의 비유가 무슨 뜻인가? 예수의 청자는 물론 현대 독자들로 이 내용 자체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예수의 말씀의 장르를 비유(‘파로이미아’)로 소개하면서 당시의 청자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6절). 아마도 그것은 이곳에서 사용된 비유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파라볼레’)와는 달리 어느 정도 풍유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함과 동시에 “도둑과 강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없다 할지라도 본문 내외에서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하고 예수는 그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비유에 대한 청중의 몰이해는 예수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요한은 중요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청중의 몰이해라는 문학적 장치를 흔히 사용한다(2:19-21; 3:3-5). 여기서 기대된 대로 예수가 누구이고 도둑과 절도는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먼저 강도에 대한 설명을 보자.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도둑]요 강도”(8절)라는 예수의 설명은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등 예수보다 먼저 이 세상에 온 자는 모두 다 도둑이요 강도가 된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가 이들을 강도라고 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들은 아마도 예수 이전 시대과 동시에 나타났던 거짓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혹은 이들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대적자들(바리새인들, 유대인 당국자들)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예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를 따르지 않으며(10:26) 예수의 양들에게 강도짓을 하는 자들이다(cf. 9:28).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설명은 누가 강도요 도둑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과 대비된 예수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예수는 먼저, 양의 문으로 소개된다(7절). 본 비유에서 예수는 목자임이 분명한데 갑자기 예수가 양의 문으로 등장한다. 어떤 주석가는 중동 지방의 양 우리에서 목자가 문에 대자로 누워 양 무리를 보호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여기서 예수는 이러한 풍습에 따라 자신을 양 무리를 보호하는 양의 문이라고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가 목자임과 동시에 양의 문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꼴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가 유일무이한 문이 된다는 것으로 예수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양이 꼴을 얻을 수 없고 곧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9절; cf. 14:6).
예수가 양의 우리의 문이라는 설명에서 이제 예수는 자신이 선한 목자라는 설명으로 넘어가는데 이것이 곧 본 강화에서 예수에 대한 중심적 설명이다. 요한복음에서 ‘나는 ...이다’라는 신적 자기 계시 문구를 사용하여 예수는 자신이 삯군과는 다른 선한 목자라고 소개한다(11-15절). 여기에 소개된 선한 목자 예수는 에스겔서 34장에 나오는 악하고 이기적인 목자들과 대비된다. 이들은 양을 돌보지 않고 이들이 야생동물들의 먹이가 되도록 그냥 놓아두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과는 다르게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로서 특이하게 제시된 것은 양과 목자를 서로 “앎”의 관계로 묘사한 것이다(14절).
더군다나 이 “앎”이라는 것은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에 사용된 것으로서(15절) 이것이 예수와 신자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 이 앎의 관계라는 것은 단순히 알고 지낸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 상호 간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지칭한다. 예수는 자신과 신자의 관계를 삼위 일체 인격체 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존중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가리키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예수는 갑자기 “이 우리에 들지 않는 다른 양”(16절)을 언급한다. 나아가 이들도 예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를 이루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전통적으로, 이 무리는 유대인 양 무리가 아닌 다른 양 무리, 즉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져 왔다. 최근에 요한복음을 요한 공동체 내의 문제로 읽는 학자들은 이 무리를 요한 공동체 내의 상이한 그룹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우선, 후자는 본문을 ‘거울’로 읽는 것이 아니라 ‘창’으로 읽으려는 시도로 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본문을 모두 알레고리로 이해하는 위험성이 있다.
둘째, 전통적인 해석이 보다 가능성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메시아적 목자 본문에는 이미 흩어진 양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데(겔 34:12-16, 23) 이들이 종말에 하나가 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겔 37:15ff.; 미 2:12; 사 56:6-8). 하지만, 요한이 여기에서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양들”을 이방인으로 한정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연관본문인 11장 52절과 17장 20-23절을 볼 때 이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앞으로 전도될 제 2세대 예수의 제자들로 볼수 있다.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자신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임을 재차 강조하면서 또 그렇게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자신의 자발적인 행동임을 천명한다. 자신은 신적인 속성을 가진 인물로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이다(17-18절).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시이다. 또 그 죽음이 죽임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 선택한 것임이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수난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걸어가는 영광인 것이다.
2. 목자 강화로 촉발된 유대인들의 분쟁(요 10: 19-21절)
예수가 표적을 행한 것에 대해 또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 어떤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이 요한적이다. 특히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유대인 그룹 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cf. 7:40-42). 본 구절은 예수의 목자 강화에 대한 반응으로 유대인들이 두 종류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가 귀신 들려 미친 짓이라고 하고 일군의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 구절을 통해서 목자 강화가 9장의 시각 장애인 치유 사건과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 예수와 유대인들의 기독론 논쟁(요 22-39절)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유대인들은 수전절(修殿節: 유다 마카비우스가 성전을 재 헌당한 것을 기념하는 신구약 중간기에 생긴 유대인의 절기)이 이르자 성전에 있는 예수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시 논쟁을 건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미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이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이것에 대해 이미 대답을 했는데도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또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하고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스스로를 증거 하는데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들이 예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25-26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예수는 말한다(27절). 예수는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그리는 목자 강화에 사용했던 메타포를 여기서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8-29절)고 하여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고 견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위의 모든 대답은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스스로 밝히라고 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직접적인 답변은 마지막 말에 나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절) 이러한 예수의 언명은 요한복음 내에서는 이미 기대되었던 것이다(cf. 1:1, 18; 5:18). 하지만 이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그 어느 말보다도 충격적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예수가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즉각적인 신체적 반응은 돌을 들어 치려 한 것이다(31절).
예수가 이들이 돌로 치려하는 것을 반발하자(32절)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의 언명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돌로 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cf. 레 24:10-16). 즉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33절).
자칭 하나님이라고 예수를 고소한 것에 대해서 당시 정통 유대인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했을 텐데 예수는 오히려 이들의 고소 내용을 반박하지 않고 그 고소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논리를 반박한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34-36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든 사람이 신이므로 내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예수의 언명은 지금까지의 요한복음 내의 원리로 볼 때도 기대되었던 대답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의 논증일 것이다.
즉 이 말은 “만약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면-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로 사용되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분에게 신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허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자신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 판단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살펴보라고 한다. 만약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지 말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자신은 믿지 못할지라도 그 말은 믿으라고 한다(37-38절). 이 말 속에는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공의롭게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cf. 7:17). 이러한 예수의 공격적인 말이 있었고 이들이 예수를 잡으려 했지만 아직 예수가 잡힐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셨다(39절). 여기에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는 왕적 메시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 요단강 저편 사람들의 믿음(40-42절)
예수는 자신을 잡으려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요단강 저편으로 가 머물렀는데 거기는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요한으로부터 예수에 대해서 증언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세례 요한의 말이 다 참인 것을 알고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예수를 믿었다(40-42절). 이렇게 일반 대중 가운데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유대인 당국자들은 예수를 대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저자는 은연중에 대조시키려 했을 것이다.
목자 강화와 이어진 예수와 유대인 당국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논쟁은 계속된다. 인간적으로 보면 어느 한 쪽이 양보하면 쉽게 끝날 것 같은 싸움인데, 예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유대인들의 공격에 대해서 조금도 그 주장을 움츠리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신적 인물이요 나아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이것을 양보했다면 예수는 한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 정치범으로 처형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신적 본질에 대해서 계시하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심판의 메시지를 발한다. 목자 강화에서 절도와 강도와 삯군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10장이 9장과 연속된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들을 바로 소경을 눈뜨게 한 표적을 믿지 않는 자들이요 결국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10:30)라는 예수의 자기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다.
<결론>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배타성이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의 편협한 사고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겸허히 수용하고 교정해 나가면 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신성과 구원에 있어서의 배타성은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진리이다. 예수는 특히 요한복음 5장 이후부터 유대인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쟁하는데 한 번도 이 문제를 어정쩡하게 넘어간 일이 없다. 예수는 자신에게 신성이 있고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반박하는 것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표적과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 이것을 보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는 그들의 마음 속에서 ‘위기’가 일게 하였다. 즉 이것에 대해 어떤 반응이 요청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 당국자들은 불신으로 반응했던 반면 소수였지만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과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를 소개받았던 사람들은 믿음으로 반응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러한 기사를 쓰면서 독자들의 마음속에도 ‘위기’가 일어나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20:30-31)
나는 참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ὴ καὶ ὁ πατήρ μου ὁ γεωργός ἐστιν.
예수는 1절에서 “자신은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고 선언하신다(15:1). 하나님은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농부이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ajlhqinh)이라는 단어이다. ‘참되다’(ajlhqinω)는 형용사는 예레미야 2:21을 반영한 것으로 유대교의 교훈을 대체하는 분이다(4:23; 6:32). 불트만은 예수는 ‘포도나무’라고 주장하는 다른 것들과 대조된다는 점에서 참(ajlhqinhv) 포도나무라고 보았다. 비슬리-머레이는 “참”(ajlhqinh)이란 단어는 형용사로서 그림자에 반대되는 실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포도와 가지의 비유(요15:1-17)의 핵심은 기독론적인 교회론이며 그리스도와 교회가 바로 참 이스라엘, 참 포도나무라고 주장한다. 포도원의 상징인 이스라엘(마 20:1-16; 21:33-46; 막 12:1-12; 눅 20:9-19)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이라는 것이다.
브라운은 예수가 자신은 ‘참’ 포도나무라고 말한 것은 거짓 포도나무에 대조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온 “참”(ajlhqinh) 생명의 근원임에 대한 강조라고 보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포도나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은 ‘참 포도나무’라는 선언한다. 여기서 “참”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보아야 한다. 나아가 요한 교회공동체의 시대에 회당과의 관계에서도 관련 지어 볼수 있다. 회당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많은 곳에서 예언한 참 메시아인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예수 안에 거하는 것(mevnw)”이지만, 농부이신 아버지의 역할도 부각된다.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경작하는 농부로서 열매를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 요한은 포도나무이신 예수 안에 붙어있는 가지로서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며 농부이신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을 것을 천명한다.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πᾶν κλῆμα ἐν ἐμοὶ μὴ φέρον καρπὸν αἴρει αὐτό, καὶ πᾶν τὸ καρπὸν φέρον καθαίρει αὐτὸ ἵνα καρπὸν πλείονα φέρῃ.
포도나무 가지에게 중요한 것은 열매 맺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단지 그를 믿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과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하여 버리신다(cf. 마 3:10). 그 다음은 남아있는 가지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과실을 맺는 것이 농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의 존재의 목적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는 것은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농부의 필수 작업일 것이다. 그러면 과실을 맺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농부이신 하나님이 제거하실 대상은 가장 우선적으로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이며, “내게 있어”(ejn ejmoi;)라는 어구를 볼 때 배교하는 세력일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지속적으로 배교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제거하다. 깨끗게 하다”의 뜻을 지닌 단어 ‘아이레이’(ai[rei)와 ‘카다이레이’(kaqaivrei)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아이레이(ai[rei)는 “치우다, 제거하다”, 본문에서 “제하다”를 의미한다면, 카다이레이(kaqaivrei, 3) 일차적으로 종교적 의미에서 자주 “정결케하다”를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땅에서 부터의 잡초를 “제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차이점은 ‘아이레이’(ai[rei)는 죽은 가지를 제거하는 것을, ‘카다이레이’(kaqaivrei)는 살아있는 가지로부터 쓸모없는 가지를 떼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불필요한 가지를 “제하시며” 살아있는 가지를 “쳐서 깨끗하게 하신다”, 혹은 그가 죽은 가지를 “베어내시며” 살아있는 가지의 쓸모없는 부분을 “베어내어 깨끗하게 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농부이신 아버지(ὁ πατήρ ὁ γεωργόςἐστιν.) 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들을 제하심을 통해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농부가 살아 있으나 열매 맺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가지를 제거하는 이유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열매를 맺음을 통해 아버지는 영광을 받으신다(15:8; 15:16). 따라서 저자는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음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권면하고 있다.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ἤδη ὑμεῖς καθαροί ἐστε διὰ τὸν λόγον ὃν λελάληκα ὑμῖν·
농부는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깨끗게 하다’(kaqaivrei)는 형용사는 ‘깨끗하게 하다’(kaqaivrei)는 동사와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의 성장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깨끗하게 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이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하셨다(13:10).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서 이미 “내가 일러준 말로”(lovgon o}n lelavlhka) 정화의 과정에 들어갔다고(13:10) 말씀한다. 하지만 “내가 일러준 말”은 예수의 어떤 말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의 말은 계명을 의미한고 할 수 있다. 또 예수의 말은 예수가 전한 구원의 메시지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5:24). 여기서 후자가 더 타당하다고 볼수 있다. 예수의 말(lovgon)도 그의 모든 행동처럼(5:19)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7:16; 8:26; 28; 12:49)이다. 예수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는 분이라는 이미지는 요한 신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깨끗하여졌다”(kaqaroiv)는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4-11절의 예수의 발 씻김 사건을 통해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깨끗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발씻김(예수의 죽음의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 안에 지속적인 머물며 예수를 통해 깨끗함을 받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 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14:23-2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는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여진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실을 맺는 원리를 제시한다.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안에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여기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meivnate ejn ejmoiv, kajgw; ejn uJmi'n)는 말씀은 포도나무와 가지비유(15:1-17)의 핵심적인 사상이라 할수 있다.
예수 안에 거하는 목적은 과실을 맺기 위함이다. 과실을 맺는다는 사상은 15:2과 관련 있다. 예수는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제자들은 반드시 예수 안에 거함을 통해서만 열매 맺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믿음으로 그와 연합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는 신자 안에 거하는 ‘상호거함’의 원리이다. 포도나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열매를 맺는 것으로, 만일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그 가지를 말라 죽게 된다. 신자공동체는 이제 예수 안에 거할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너희 안에”(kajgw; ejn uJmi'n)라는 말씀은 조건문인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의 귀결절로 간주된다. 만일 그들이 믿음을 통하여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러있다면, 예수는 사랑과 열매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다. 이것이 4절과 5절에서 열매 맺기 위해 예수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이 구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 되지 않았다. 예수 안에 거하는 방법은 곧 예수가 거하시는 요한 교회공동체에 거하는 것이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신적 기원을 계시해주는 7개의 ‘에고 에이미’ 문형 중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ὑμεῖς τὰ κλήματα.)
5절은 4절에 대한 부정적 진술을 긍정적으로 언어로 전환한다. 예수는 그 안에 거하는(mevnin)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말씀한다. 앞 절의 말씀을 반복하여 진술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예수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는 -이다”(ἐγώ εἰμι) 진술을 통해 묘사한다. 여기서 강조 인칭대명사(나는/너희는)의 대구적 사용을 통해 가지로서 제자들의 정체성이 강조된다.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서 친밀하고 직접적인 관계로 표현한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의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14:10-11, 20). 제자들은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의 자기 정체성과 자기 존재의 기반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이다. 모든 가지는 수액을 얻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요한의 중심사상인 ‘내주(內住, mevnw)- 예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의존적 관계-의 주제를 이곳보다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한 곳은 없다. 1절에 나타난 “나는 - 포도나무요”(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문형이 다시 나타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문형은 나무와 가지로서 그리스도와의 친밀함과 유대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많이 맺게 되지만, 반대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그리스도와 떨어져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되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많은 열매”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떠나는 것(cwri;)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단호한 선언처럼 신자 개인과 교회는 예수를 떠나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저자는 예수 안에 온전히 거하며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 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는 이제 과실을 맺지 아니함으로 버려지는 가지들의 운명, 즉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사람이 만일 내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져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15:6). “밖에 버리우다”는 표현은 이 세상 임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때에도 사용하였다(12:31). 말라진 가지들의 운명은 사람들이 주어 다가 불(pu'r)에 던져 살라짐을 당하게 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불(pu'r)은 구약성서에서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예레미야도 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표현했다(렘 5:14).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백성들인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가지를 꺾는다”는 말로 표현했다(렘 5:10-11).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 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렘 5:14). 그러나 요한 사상에서 불은 유대교의 대중적인 사상이나 지옥이나 지옥불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마 13:40 참조).
예수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함으로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가지와 같이 결국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의 상징인 포도원을 짓밟히고 버려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에스겔 15:4-7에 의하면 포도나무는 땔감으로 사용되기 위해 불에 던져졌고(70인 역, 겔 15:4; 요 15:2), 19:12에서는 포도나무의 줄기가 말라 불에 탔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에 대한 심판은 요한의 미래적 종말론적 표현이다. 요한 교회공동체의 제자(신자)들은 반드시 예수 안에 거하여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멸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요한 교회공동체 안에 온전히 거하며 열매 맺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7.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6절에서 예수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경고와 함께 7절에서는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로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는 기도응답의 약속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4절의 예수가 제자들 안에 거하는 것 대신, 그의 말이 그들 안에 거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예수의 ‘말’(τὰ ῥήματά)이 그들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는 자를 신뢰하며 그의 말씀을 간직하고 실천하고자 헌신한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말씀’(이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성령과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6:63). 예수의 ‘말’이란 아버지께 들은 것이며(8:26), 또 아버지가 명령하신 것이다(12:49). 예수의 말을 믿는 것은 곧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할 때, 예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이 기도할 때 응답이 주어질 것이다. 5-6절은 머물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선택 할 것을 촉구한다. 이제 예수 안에 머문 자에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결과는 긍정적인 면으로 발전된다.
한편,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 주한다’는 의미로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예수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며, 예수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7절과 10절). 예수 안에 거하며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간구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며, 그들은 구하는 바들을 아버지께 항상 응답받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7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지속적인 머무름에 한 강조와 그의 기도들이 응답될 것이 약속한다. 예수 안에 거하는 자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결론>
이와같이 예수는 “에고 - 에이미 "Ἐγώ εἰμι "문형을 통해 자신은 참 포도나무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ὴ 라고 선언한다. 본래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가 참 포도나무시다. 예수를 참 포도나무로 묘사한 것은 주로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소명을 실패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라 할수 있다. 이제 참된 이스라엘은 예수에게로 옮겨진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농부로 소개하면서 그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농부의 목적은 포도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게 는 것이다. 농부는 열매를 잘 맺도록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하여 깨끗게 하고 나머지 가지들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주신다. 이 비유를 통해 요한은 제자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예수 안에, 나아가 공동체 안에 물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농부의 돌봄을 받아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듯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님의 돌보심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깊은 유대관계는 ‘거하다'라는 말을 통해 강조하는데,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15:4-10). 요한복음에서 ‘거하다’라는 말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너희는 내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한다”는 상호 내주에 대한 묘사이다. 이 관계는 바로 우리의 믿음의 핵심이며,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지속적으로 생명을 공급받고 열매를 맺는 방법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그 안의 곧 말씀 안에 거할 때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기도 응답에 대해 약속하신다.
예수 안에 머무는 것이 곧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와 교회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열매를 맺고 기도의 응답을 위해 교회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예수 안에, 곧 그의 말씀 안에 거해야 된다는 것이다(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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