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장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는 길
요한복음12장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본 장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다. 그는 메시야적 왕의 신분으로서 입성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임금과 달리 하늘에서 오신 인자로서 이 땅에서는 고난과 대속적 죽음을 통해 그 왕적 신분을 행사하신다.
1. 대속의 죽음을 향한 승리의 입성(1-19절)
1)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
1절의 '유월절 엿새 전'은 예수께서 친히 유월절 속죄양이 되심을 암시한다. 베다니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살린 곳이란 면에서 예수의 죽음은 곧 부활로 연결될 것을 암시한다. 2절이 '마르다'와 '나사로'는 일상적으로 예수를 위하여 잔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3절의마리아의 모든 행위, 특히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는 것은 참된 제자 됨이 무엇인지를 아는 행동인 것 같다. 한편 이 기름붓는 행위는 7절과 같이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요한은 4절과 같이 가룟 유다만을 지목하지만 마리아의 행동에 모든 제자들이 반대했었다. 유다의 배신이 예수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5절의 '삼백 데나리온'이란 정확한 계산은 6절의 '도적, 훔쳐감이러라'에서 유다의 의도가 폭로된다. 7절의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는 요한의 신학적 통일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곧 대관식에 오르는 것과 동일시된다(3:14 이하). 그러므로 여기서 기름부음은 왕으로서 동시에 속죄양으로서 세우는 예식을 연상케 한다. 8절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신15:11를 준행하는 것이지만 사회적 차원은 예수의 대속적 차원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2) 적대자들과 믿는 자들
9절의 '유대인의 큰 무리'는 유월절 순례자 들일 것이다. 이들은 예수의 기름부음 받는 대관식의 하객들 역할을 하게 된다. 10절의 '나사로까지'는 참된 제자도의 운명을 암시하고, 대제사장들의 모의는 예수 운동을 종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돕는 결과로 유도된다. 11절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은 것은 나사로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이다. 20장에서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서야 믿었다.
3) 승리의 입성
12절의 '그 이튿날'은 전날 대제사장들의 모의를 암시하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예수께서 그 모의를 극복하고 메시야로서 입성함을 암시한다. 특히 '명절에 온 큰 무리'는 메시약적 기대가 고조된 상황 속에서 대제사장들의 모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를 메시야적 왕으로서 환영하게 된다. 13절의 '종려나무 가지'와 '호산나'는 초막절과 관련되는데 당시는 모든 메시야적 상징들로서 혼합되어 사용된 모양이다. '오시는 이'는 원래 시118:25이하에서는 '들어 오시는 이'였는데, 당시 '오시는 이'가 메시야적 칭호로 사용되었기에 변형된 것이다. 14절의 '한 어린 나귀'는 그들의 환호와 대조적인 예수의 행동을 보여 주지만, 15절의 '나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와 같이 예수는 메시야적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예언한 슥9:9를 성취하시는 것이다. 16절에서 제자들도 예수가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것을 깨달았다.
17,18절에서 무리가 예수를 맞은 이유는 부활의 목격자들이 증거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증거의 중요성의 강조된다. 기적에 근거한 믿음도 역시 중요하다. 그것은 어느 정도 참된 믿음을 보여 주는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19절에서 예수의 입성이 유대 지도자들의 모의를 능가하고 그들의 입술을 통해 '온 세상이 저를 좇는다'고 우주적 복음의 편만을 암시한다.
2. 헬라인들과 다가온 그 때(20-36a절)
1) 종말론적 제자도와 미래의 영광
20절의 '헬라인 몇'은 19절의 '온 세상'을 대표하는 성격과 연결되어 열방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종말적 현상을 반영한다. 21절에서 그들이 예수를 뵈옵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야이심을 강조한다. 22절의 빌립이 안드레에게 말한 것은 4제가와 12제자 사이에 질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23절에서 예수는 헬라인들의 방문을 인자의 영광 얻음과 연결한다. 인자는 유대인을 넘어 우주적 주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24절에서 예수는 인자의 영광을 죽음과 재생산과 연결한다. 이것은 25절에서 이 세상에서의 참된 제자도의 모범을 제시하는데 사용된다. 26절이 '나 있는 곳'은 '인자의 영광'의 처소를 반영하고 그곳에 있는 조건으로 '나를 따르라', 즉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제자도를 제시한다.
2) 인자의 고난과 영광
27절의 '민망하니'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이 영광의 신분으로 비참한 상황인 것을 보여 준다. 28절에서 예수의 순종은 좀더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도가 된다. 동시에 예수의 죽음은 그 자체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도구가 된다. '하늘에서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에 대한 완곡법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수의 자기 이해, 즉 예수께서 인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하나님의 공인을 보여 준다. 29절이 '우레'와 '천사'등은 하늘의 계시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신적 계시로서 이해한 당시의 반응을 보여 준다. 30절의 '너희를 위한 것'은 하나님이 무리들에게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계시한 것을 말한다. 31절의 '이 세상의 임금'은 사단을 가리키며 32절의 '땅에서 들리면'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곧 하늘의 영광으로 회복하는 길임을 보여 준다. '모든 사람'은 33절의 '어떠한 죽음'과 함께 유대인과 함께 헬라인을 포함하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재창조석 구속 사역을 암시한다. 34절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것은 삼하7:13시89:36사9:6,7겔37:25등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에서는 인자에 대해 언급하는 단7:13,14을 잘못 해석하여 인자의 죽음과 거리가 멀게 만들었다. 35절의 '아직 잠시 동안'과 36절의 '아직 빛이 있을 동안'은 단7:25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연상학 하여 인자와 연결된다.
3. 공생애의 끝 - 거부와 믿음(36b-50절)
1)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무리들
36b절의 '숨의시니라'는 35절의 '아직 잠시 동안'과 함께 예수께서 무리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후 이제 잠시 동안 제자들에게 13장 이후 일주일 동안 가르치실 기간을 할애하는 것을 암시한다. 37절에서 많은 표적은 믿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닌 것을 암시한다. 38절에서 그들의 불신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사53:1예언의 성취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사야에게서와 같이 예수님도 먼저 단순히 그들의 유기를 단정하지 않고 결과를 보고 그 결과를 하나님의 예정으로 돌린다.
2)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관원들
이사야가 본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환상은(사6:3)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요1:14)에 대한 환상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이 또한 고난받는 종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광이 고난과 거부를 포함하는 것을 보았다. 42절의 '관원 중에서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는 예수의 유대 사역이 성공하였음을 증거하고,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와 43절의 '사람의 영광을…더 사랑'은 참된 믿음은 드러나게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강조한다. 아마 당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다.
3) 예수의 말씀이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다.
44절에서 예수는 자신을 믿는 것과 예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과 동일시하고 45절에서는예수를 보는 것과 예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과 동일시하여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계시한다. 46절이 '빛'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서 1장에서와 같이 앎과 생명을 내포한다. 예수를 믿고 보는 것은 47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과 직결된다.
예수께 드려진 향유(요12:1-11)
◈ 원문강해 ◈
진정한 헌신과 위선적인 헌신
본문은 마리아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동시에 본문은 물질을 도둑질하기 위해 가차없이 남을 비판하는 가룟 유다의 위선도 보여 준다.
1.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1-3절)
1) 본문의 배경
( JO ou\n jIhsou'" pro; e}x hJmerw'n tou' pavsca h\lqen eij" Bhqanivan호 운 예수스 프로 헥스 헤메론 투 파스카 엘덴 에이스 베다니안;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나, 1절)
프로 헥스 헤메론(pro; e}x hJmerw'n엿새 전에)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날짜를 암시하며 동시에 십자가 고난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보여 준다. 학자들 간에는 예수의 도착 시기에 대해서, ① 금요일(Lange), ② 토요일(Meyer, Weiss), ③ 주일(De Wetter, Hase), ④ 월요일(Hilgenfeld) 등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데, 대체로 ②의 견해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또한 본문은 베다니라는 장소를 설명하면서 라자로스(Lavzaro"나사로)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요11:1-44)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이었음을 다시 한 번 간접적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께선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을, 부활의 이적을 보여 주신 베다니로부터 준비하셨다.
2) 마리아의 형제들
(ejpoivhsan ou\n aujtw'/ dei'pnon ejkei', kai; hJ Mavrqa dihkovnei, oJ de; Lavzaro"에포이에산 운 아우토 데이프논 에케이 카이 헤 마르다 디에코네이 호 데 라자로스;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2절)
에포이에산(ejpoivhsan할 새)은 3인칭 복수 형태이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가 불확실하여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데(F.Rienecker), 이 동사의 형태를 통해서 베다니 등 네 사람들이 잔치를 베풀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J.H.Bernard). 데이프논(dei'pnon잔치)은 일반적으로는 잘 차려진 저녁 식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잔치, 향연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Liddle&Scott). '일을 보고'(dihkovnei디에코네이)란 디아코네오(diakonevw시중들다, 섬기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마르다가 계속적으로 열심히 봉사했음을 암시한다. 분문에서 나사로가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사로의 집은 아닌 듯하다(A.Plummer).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장소에 대해서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모의가 진행되고 있었음에 반해서 베다니에서는 부활한 자와 함께 예수를 위한 잔치가 준비되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똑같은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자와 밀고하는 자로 나뉘었듯이, 예수를 대접하는 사람들도 두 가지로 나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3) 향유를 드리는 마리아
(hJ ou\n Maria;m labou'sa livtran muvrou navrdou pistikh'" polutivmou h[leiyen tou;" povda" tou' jIhsou' kai; ejxevmaxen tai'" qrixi;n aujth'" tou;" povda" aujtou':헤 운 마리암 라부사 리트란 뮈루 나르두 피스티케스 폴뤼티무 엘레입센 투스 포다스 투 예수 카이 엑세막센 타이스드락신 아우테스 투스 포다스 아우투;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3절)
피스티케스(pistikh'"순전한)는 '아무런 불순물도 섞이지 않고 순수한'의 뜻이다(W.Bauer). 당시의 어떤 향료들은 포도주를 섞어서 만들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 단어는 보여 주고 있다(Dods). '나드'(navrdou나르두)는 동인도에서 나는 방향성 나무에서 채취한 향유를 뜻한다(아1:124:13,14). 드릭신(qrixi;n머리털)은 유대 풍속에 있어서 가장 존귀함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즉 머리카락을 푸는 것은 가장 치욕스런 모욕거리가 될 수 있음과, 동시에 머리카락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 전부를 희생하며 드리는 것을 의미하였다(Lightfoot).
마리아는 예수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자신의 가장 순수한 헌신과 신앙의 마음을 순전한 나드 향으로 대신하여 표현하였으며, 자신의 가장 고결한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김으로써 예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과 겸손함을 드러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 어떤 향유도 발산할 수 없는 가장 고결하고도 향기로운 예물이었던 것이다.
2. 가룟 유다와 예수의 상반된 평가(4-8절)
1) 가룟 유다의 비판
(levgei de; jIouvda" oJ jIskariwvth"...ejdovqh ptwcoi'"_레게이 데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에도데 프토코이스;가룟 유다가 말하되…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4,5절)
파라디도나이(paradidovnai잡아)는 앞의 멜론(mevllwn줄)과 연결되어서 '잡아 주기로 되어 있는'의 의미를 지닌다(J.V.McGee). 트리아코시온 데나리온(triakosivwn dhnarivwn삼백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전으로서(마20:2,9,10,13) 현재 시가로 약 4,5만원에해당한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고가였음을 알 수 있다(J.Jermias). 프토코이스(ptwcoi'"가난한 자들)는 '거지처럼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한다(Liddle&Scott).
이 세상엔 언제나 선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의 헌신을 흠잡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순수히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과 거짓으로 타인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이다. 본문은 예수를 팔아서라도 자시의 이익을 챙겼던 가룟 유다가, 소유를 팔아 남김없이 예수께 드린 사람을 힐난하는 염치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 가룟 유다의 진정한 의도
(oujc o{ti peri; tw'n ptwcw'n e[melen aujtw'/ ajll j o{ti klevpth" h\n kai; to; glwssovkomon e[cwn ta; ballovmena ejbavstazen.우크 호티 페리 톤 프토콘 에멜렌 아우토알라 호티 클레프테스 엔 카이 토 글롯소코몬 에콘 타 발라 메나 에바스타젠;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 6절)
'생각함이'(e[melen에멜렌)란 멜레이(pelei걱정하다, 마음을 쓰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마음을 쓴다(동정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한글 개역성경에 '가난한 자들을'로 번역된 페리(peri)는 '∼에 대하여'의 뜻이다. 글롯소코몬(glwssovkomon돈 궤)은 원래 '악기의 혀'와 '지키다, 보관하다'의 합성어로서, 관악기의 리드 등을 넣는 작은 가방을 뜻하는 단어이다(W.Bauer). 본문의 구조로 보아 본문에서의 이 단어가 뜻하는 것은 아마도 예수와 제자들의 재정을 관리하던 돈지갑을 뜻하는 것 같다(Lightfoot). 에바스타젠(ejbavstazen훔쳐 감이러라)은 원래는 '나르다'라는 뜻을 가진다(Liddle&Scott).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돈을 가지고 다니면서(나르면서) 슬쩍쓸쩍 훔쳐 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도둑 중의 도둑이었다. 본문은 그가 예수의 제자이면서도 예수의 돈을 훔쳐 갔을 뿐 아니라 예수께 드려지는 것조차도 아까와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말씀처럼,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여 예수를 돈에 팔고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영원한 형벌에 던져 버리게 된 것이다.
3)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
( [Afe" aujthvn, i{na eij" th;n hJmevran tou' ejntafiasmou' mou thrhvsh/ aujtov:...ejme; de; ouj pavntote e[cete.아페스 아우텐 히나 에이스 텐 헤메란 투 엔타피아스무 무 테레세 아우토…에메 데 우 판토테 에케데;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7,8절)
아페스( [Afe"가만 두어)는 명령형으로서 '속박하지 말고 풀어 자유롭게 만들라'라는 의미이다. 즉 그의 행동에 그런 말로 올무를 씌우지 말라고 예수께서 명령하셨던 것이다. 또한 8절에선 에메(ejme나는)라는 1인칭 단수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말씀하심으로 '너희가 보고있는 바로 이 육신의 나'라는 의미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예수께선 마리아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하셨다. 이런 언급을 통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ㆍ간접적으로 예수는 언급하셨던 것이다. 본문에서 '나는 항상있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을 내버리고 가버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실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3. 대제사장들의 모의(9-11절)
1) 큰 무리가 모여든 이유
( [Egnw ou\n 팷J? o[clo" polu;" ejk tw'n jIoudaivwn o{ti ejkei' ejstin... i{na kai; to;n Lavzaron i[dwsin o}n h[geiren ejk nekrw'n.에그노 운 [호] 오클로스 폴뤼스 에크 톤 유다이온 호티 에케이 에스틴…히나 카이 톤 라자론 이도신;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9절)
〔호〕 오클로스(팷J? o[clo"무리가)에 정관사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앞 부분까지 포함하여 '유대인의 그 무리들이'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교권자들과 대조적인 서민 계층의 유대인들을 지칭해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J.C.Ryle). 또한 이들은 요7:25에 나타난 예루살렘인들과는 달리 요7:12,20,31,40,43,49에 언급된 바 여러 곳에서 온 순례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F.Rienecker).
사람들은 예수만이 아니라 나사로까지도 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메시야되심의 가장 직접적인 표적이 다시 살아난 나사로이기 때문이다. 이적과 표적을 구하던 유대 민족은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과 신앙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던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들에 더 많이 얽매이고 매달렸었다. 신앙은 오로지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2) 사악한 모의
(ejbouleuvsanto de; oiJ ajrcierei'" i{na kai; to;n Lavzaron ajpokteivnwsin에불류산토데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히나 카이 톤 라자론 아포크테이노신;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0절)
카이(kai;까지)는 '조차도'의 의미로서, '나사로 조차도'의 뜻이다(A.H.Chase). 에불류산토(ejbouleuvsanto모의하니)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이미 결정했음을 표현한다(W.Bauer). 아포크테이노신(kteivnwsin죽이려고)은 다양한 용례를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엔 암살하는 것이나 부당하게 죽이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본문에서의 용례는 이런 의미를 더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W.Bauer). 진리의 대적자들은 진리가 그 빛을 발하는 것은 물론 그 빛이 비추는 모든 영역까지도 두려워했고 제거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진리와 함께한다'는 것은 진리가 받는 고난도 함께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대제사장들의 나사로 살해 모의
(o{ti polloi; di j aujto;n uJph'gon tw'n jIoudaivwn kai; ejpivsteuon eij" to;n jIhsou'n.호티 폴로아 디 아우톤 휘페곤 톤 유다이온 카이 에피스튜온 에이스 톤 예순;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1절)
휘페곤(uJph'gon가서)은 '신속하게 달려나감'을 의미하는데(Liddle&Scott). 특히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유대인들이 지속적으로 나아갔음을 암시한다. '믿음이러라'(ejppivsteuon에피스튜온)도 미완료 과거로서 역시 한 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곧 본문에서 단순히 '가서'라고 표현한 것이 사실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갔던 것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민족들의 영역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것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바로 이 점이 예수를 제거하고자 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 설화는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부어준 사건으로서, 마26:6-13막14:3-9에도 나타나는데 본문과 좀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저술 배후에는 예수의 신체가 경건하게 다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D.Doube). 또한 요한은 마가와 누가를 통하여 이 사건에 대한 전승 자료들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C.K.Barrett).
1. 향유를 부은 마리아(1-3절)
1절의 '유월절 엿새 전에'에 대한 견해는, ① 데켄브리온 달력의 12일 전에, ② 로마 달력의 3일 전에-라틴어적 표현(Ditten Berger), ③ 밀교 의식 10일 전에, ④ 축제를 위해 2일 전에 새들을 구입한다(P.Fay) 등 다양하다. 요한은 여기에서 유월절 절기가 '다음 금요일 저녁에 시작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C.K.Barrett),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시점을 유월절에 강조적으로 두고 있다(Barrett). 공관복음서 저자들에 의하면 예수는 밤에도 베다니에 머물러 있었으며(마21:17막11:11눅21:37),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한 날은 유월절 이전의 안식일이었다. 그는 안식일이 시작되려는 시점, 즉 금요일 밤에 도착하였을 것이다(J.H.Bernard, A.H.McNeile).
2절의 '잔치할 새'에서 '잔치'라는 단어는 여기와 최후의 만찬에서만 사용되었다(요13:2), 본문을 통해서는 이 잔치가 어디서 행해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사로는 주인이라기보다는 손님의 입장에 있었기에 나사로의 집은 제외 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마태와 마가는 베다니사람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만찬이 벌어졌음을 논증하고 있으나(마26:7막14:3) 이는 거짓된 조화처럼 보인다(Meyer). 또 두 사람의 표현양식은 나사로가 저녁을 접대했다는 것을 제외시키고 있다(Weiss). 누가는 '바리새인 시몬'으로 기록하고 있다(F.L.Godet).
3절의 '순전한'이라는 형용사적 표현은 P66, D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으며, 이 단어가 피네인(pivnein)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액체의'라고 번역함이 가능하며, 이 말의 원래 라틴어 형태인 스피카툼(spicatum)으로 이해한다면 '날카롭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Pliny). 또한 이 단어를 지방 도시 이름이나 상품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요한은 이를 마가에서 빌어왔으며 아람어 피스타가(pistaqa), 즉 피스타치오 열매의 음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J.Lightfoot, Black). '발에 붓고'라는 묘사는 막14:3에 '머리에 부었다'라는 기록과 상반되며, 눅7:38에는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그 발을 적시고'라고 기록된 것을 고찰해 볼 때, 저자 요한은 마가보다는 누가의 단화에 익숙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C.K.Barrett, F.L.Godet).
2. 가룟 유다의 반론(4-6절)
4,5절의 '제자 중 하나'에서 헤이스 톤 마데톤(eitw'n maqetwn) 앞에 놓여 있는 에크(ejk)는 저자 요한의 습관이었다(요1:10). 특히 사본 속에는 에크(ejk)가 빠져 있다(요18:2219:34, J.H.Bernard). 또한 '∼할'(mevllen멜렌)이 본문에는 호 멜렌(oJ mevllen)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D 사본에는 호스 에멜렌(o{" h[mevllen)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요6:71의 영향에 기인한 듯이며, 이 용어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도록 운명지워진 상태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A.H.McNeile).
6절의 '저는 도적이라'는 기록을 보면, 그를 도적으로 단정할만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독립된 전승을 따라 이렇게 표현했거나 아니면 그가 가룟 유다에 대한 전통적 주장과 평들을 그대로 도입했을 가능성이 높다(C.K.Barrett, Stier, Kuinoel).
3. 예수의 답변 및 유대인의 믿음(7-11절)
7절의 '가만 두어'를 명령형 절대 형태로 이해하면 '그녀로 하여금 나의 죽는 날에 나를 방부 처리하도록 그냥 놔두어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Vulgate, Meyer, Baumleim). 또는 '말하자면 매장이 예기된 때에, 나를 존경해서 행하였던 행동에 따라, 그녀가 이 날을 위하여 이 향유를 준비하도록 허용하라'라고도 번역된다(Bengel, Lange, Luthardt, Weiss, Keil). 그러나 후자의 번역은 문법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F.L.Godet).
8절은 D, Sin 사본에 생략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5절의 해답이 7절에 제시되었고 그 속에 6절이들어서 8절은 본문의 맥락과 직접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C.K.Barrett). '큰 무리'는 이곳과 요12:12에만 나오는 용어로서 이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다수의 무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므로 본 절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W.Van Doren).
10절의 대제사장들은 요11:57에서 볼 수 있듯이 '사두개인파'의 일원이었을 것이며, 나사렛 예수의 '다시 일어남', 즉 부활 사상에 대해서 매우 불신하던 자들이었기에(막12:18) 죽이려 했을 것이다(Alford). 또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의 행동에 대하여 자기들에게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었다(요11:57).
11절의 '가서'는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써 요한이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며, 이는 유대인들이 유대주의의 생활 양식을 버리고 예수에게로 가는 모습을 암시해 주고 있다(C.K.Barrett, Van Doren).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본 장은 표적들의 책(2-12장)의 결론으로서(김세윤), 예수의 공생에 사역의 결론 역할을 한다(L.Morris, R.C.H.Lenski, E.A.Blum). 또한 저자는 11장의 나사로 부활 사건과 관련하여 예수가 진정으로 영생을 주는 자임을 나타내려고(김세윤) 본 장의 사건들을 편집하였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에 대한 언급이 있다(마26:6-13막14:3-9요12:1-8). 눅7:36-50은 다른 사건으로 보기도 하고(박윤선), 같은 사건으로 취급하기도 한다(Dodd, C.Barrett).
1. 마리아의 기름부음과 가룟 유다의 비난(1-6절)
1절의 저자는 예수가 베다니에 오신 날을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기록한다. 헬라의 날짜 계산법은 한 사건으로부터 계산하는 날까지를 포함시킨다(R.C.H.Lenski, Moulton). 따라서 유월절 오후에 양을 잡은 날이 니산 월 제14일 오후이므로 이 날은 니산 월 제8일로서 금요일 저녁에 해당한다(Barrett, L.Morris). 마태와 마가의 언급에 의해 2절의 잔치 장소는 문둥이 시몬의 집이다(마26:7막14:3).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잔치의 제공자들은 동네 사람들이지만(L.Morris), 나사로의 남매들(Tenney)도 같이 있다. 아마 예수님과 함께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등도 손님으로 초청되었던 것 같다(박윤선, A.T.Robertson).
한편 '잔치'(dei'pnon데이프논)는 신약에서는 주로 '만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란 그에게 봉사하는 은사가 있었던 것을(눅10:40) 나타내 준다.
3절의 '나드'는 나르도스타키스자타만시(Nardostachysjamansi)라는 식물에서 채취한 동북부 인도의 특산품으로서, 한 근(livtra리트라, 로마 계량으로는 327.45kg)에 3백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고가품이다(L.C.H.Lenski, Barrett). 마리아는 이 귀한 것을 예수의 발에다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겨 드렸다.
당시 풍습상 잔치의 절정에서 귀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기도 하지만 마리아의 행위는 좀 특이하였다. 향유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노예도 아닌 그녀가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자신의 머리를 예수의 발과 동일시하는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R.C.H.Lenski). 그러나 민5:18에 의하면 간음 혐의를 받는 여자의 머리를 풀게 했다. 따라서 정숙한 여인들은 머리를 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L.Morris).
그러나 마리아는 이러한 수군거림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감사와 사랑과 헌신을 주님께 드린다(E.A.Blum). 또한 발을 씻은 것은 요13:9처럼 발을 씻음으로 전신을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나(R.H.Lightfoot), 혹은 발부터 전신까지 씻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J.Calvin).
4,5절에서 요한은 마가와는 달리 주동자 격인 가룟 유다만이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한 것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유다를 '제자 중의 하나'와 '예수를 잡아 줄 자'로 언급한 데서 슬픔과 동시에 분노를 느껴야 한다. 그는 자선과 사랑을 가장하여 자신의 사욕을 챙기는 위선자였다. 결국 그의 비난과 반대는 자신이 훔쳐낼 돈이 예수에게 허비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표현인 셈이다(Blum).
6절에서 저자는 유다의 악당적 행위를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와 전적으로 대조되며 결국 돈을 위해 스승을 팔고 만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유다의 사악함을 알지 못했다(요13:28). 이를 통해 유다의 치밀한 위선적 행위를 엿볼 수 있다.
2. 기름부음에 대한 예수의 평가와 대제사장들의 살해 모의(7-11절)
7절에서 예수는 가룟 유다의 비난을 알고 마리아의 행위를 두둔한다. 유대의 풍습상 기름을 붓는 것은 축제에 어울리는 행위이지만 예수는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여기셨다(L.Morris, Blum). 이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몰두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한편 이 사실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의 심정을 잘 감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L.Morris, R.C.H.Lenski).
한편 '이를 두게 하라'는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의 뜻이다(L.Morris). 이는 '향유를 조금만 쓰고 나머지는 남겨두라'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향유를 붓는 사건을 마음에 간직하게 하라'는 의미이다(C.K.Barrett). 다시 말하면 '향유'를 붓도록 가만두어 그 감동을 간직하게 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Moulton).
8절은 신15:11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금 예수는 가난한 자들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선행보다 구속적 대속 행위가 위대함을 암시한다. 이제 그는 곧 죽임을 당하고 또한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것이기에(Blum), 지금이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L.Morris). 그러므로 마리아의 행위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위대하기까지 한 행위이다.
9-11절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와 나사로를 보려고 몰려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 나사로의 부활은 제사장 계급인 사두개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파의 교리가 송두리째 뽑혀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L.Morris). 결국 그들은 예수와 나사로를 죽이려고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예수님 당시의 화장
1. 향수와 향
이스라엘은 건조한 지역이므로 물이 귀하다. 그래서 종종 향수는 훌륭한 목욕 재료가 되었다. 즉 힘들게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다른 사람들에게 거북함을 주지 않으려고 액체 방취제로 몸을 씻었다. 향수와 향유는 덥고 건조한 날씨로 피부가 마르고 갈라질 때 몸에 향기를 내줄 뿐만 아니라 피부를 부드럽게 해주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외모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과 향수를 사용했다.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향을 사용하는 것도 그리스도 당시에 매우 성행되었다.
2. 향유
손님이 방문했을 때 그 집의 주인은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 특별한 경의를 표하였다(눅7:46). 그리고 연회석 상에서도 기름으로 만든 작은 원뿔형의 향료를 손님의 머리위에 부었다. 이 향료는 사람의 옷에 닿았을 때 몸에서 나는 열로 인하여 천천히 녹았다(시23:5).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집에 향료와 향유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값비싼 액체와 가루는 병이나, 가방, 상자 또는 항아리에 담아 놓았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향유는 올리브에서 추출한 것이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향유는 올리브에서 추출한 것이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향과 몰약을 포함한 다른 향유들도 많이 사용되었다. 상인들은 이 향유들을 시장에서 독점하기 위해서 그 산지를 비밀에 붙이고 산지 재배인과 개인적으로 접촉을 하여 상품을 확보하는 수단을 썼다.
3. 화장품
성서 시대 사람들은 사실상 오늘날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화장품과 같은 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단지 그냥 한번해 보는 정도였다. 어떤 여자들은 립스틱을 칠하고 손톱과 발톱에 색칠을 하였다. 분은 드물었으나 몇몇 사람들은 스틱으로 빨간 색이나 검은색 루즈를 칠했다.
또 몇 사람만이 눈썹을 그렸다. 아마도 이세벨이 사용한 화장품은 페니키아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왕하9:30). 더구나 렘4:30과 겔23:40에서는 화장에 대해 비판함으로 인해 유대 여자들은 화장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돈에 새겨진 각인(刻印)의 상징(12:1-11)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이 물물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화폐가 유통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모양의 화폐에서 점차 각인이 들어간 화폐를 사용하였다. 각인의 상은 주로 신(神)이나 왕의 초상화 내지는 일정한 글귀가 쓰였다. 각 지역마다 특성을 살려 화폐의 재료도 다양하다. 이런 화폐의 사용은 물질 경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였다.
동양 / 중국 : 중국 사회에서 동전의 사용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런 동전의 재료로는 주로 구리를 사용하였다. 연(燕)나라에서는 도화(刀貨)의 손잡이 부분을 인용해 원형전을 만들었다. 그 원형전에 명자를 세기고, 그 중앙에는 무늬를 새긴 명자원전이라는 동전을 만들었다. 중국 사회는 화폐에 어떠한 인물을 각인하기보다는 글자를 써 넣은 형태의 화폐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이 각인된 의비전(蟻鼻錢)이라는 주화도 있었다. 주화의 모양은 주로 농기구의 모양을 본떠 만든 포화, 도화 등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중국에서는 불은 줄에 동전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그것을 성황(城隍)신의 목에 걸어 주는 풍습도 있었다. 그리고 15세까지는30개의 위험한 일이 있는데 이를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즉「만보전서(^ )」에 보면 이 30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유해한 귀신이 지키는 4계절의 장애(四季節), 4기둥의 장애, 우왕귀신의 장애, 유해한 귀신이 지키는 귀신의 문이라 칭하는 장애, 생명이 위험에 노출되는 장애, 극복하기 어려운 곤란의 장애, 금 닭이 우물에 빠지는 장애, 음부의 장애, 100일의 장애, 다리가 끊어지는 장애, 5정령의 장애, 금 자물쇠의 장애, 쇠 뱀의 장애, 목욕통의 장애, 흰 호랑이의 장애, 불교 승려의 장애, 하늘 개의 장애(^ ),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하늘이 애도할 장애, 자물쇠와 열쇠의 장애, 장을 가르는 장애, 머리를 다치는 장애, 1000일의 장애, 밤에 우는 장애, 뜨거운 국물의 장애, 아이를 묻는 장애, 단명의 장애, 장군 검의 장애, 깊이 흐르는 물의 장애, 불과 물의 장애"이다.
또한 중국인들은 미신적인 액막이를 위해 주화가 쓰였다. 즉 작은 검 모양의 주화를 만들어 이것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도 한다.
인도 : 인도에서 처음으로 각인된 화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B.C.3세기경 그리스 화폐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각인하기 시작하였다. 즉 연화, 수목 등 인도의 상징물과 아울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각인하였다. 그리고 동전의 형태도 그리스의 풍으로 도안되어 구조되었으며, 올림푸스 신들의 두상과 아울러 로마의 알파벳 글자와 카니시카 왕 시대의 주화를 보면 주로 금화와 은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왕의 초상이나 불상을 각인하여 당시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서양 / 그리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주화는 리디아 왕국에서 만든 엘레크트램이라는 주조화이다. 이 주화는 금과 은의 합금으로 되어 있으며, 주화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 리디아 왕국의 각인을 찍어 유통시켰다. 이후 아테네에서도 주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주화에 각인하기 시작하였다.
즉 주화의 뒷면에는 아테네의 여신상과 올빼미, 올리브 나무의 그림이 각인되었다. 이러한 화폐는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B.C.3세기경에는 다른 지역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주변의 여러 국가에서 화폐에 각인하기 시작했다.
로마 :로마는 B.C.3세기경부터 청동화와 은화를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B.C.1세기에 접어 들면서 금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에스 청도 주조화를 보면 한 면에는 화폐의 단위가 각인되어 있으며, 다른 한 며에는 양면신인 야누스, 배의 머리 부분(船首)의 모양이 각인되었다. 또한 데나리우스 은화에도 앞면에는 화폐의 단위가 각인되었으며 뒷면에는 로마의 신, 인카스가르와 폴럭스의 쌍생 신의 상과 ROMA라는 문자가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초기에는 주로 신상(神像)이 각인되었으나, 황제 시대에는 황제상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즉 카사르, 안토니웃, 아우구스투스, 아우레우스 등의 황제상이 각인되어 황제의 인격을 강조하여 신격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는 촛대가 각인의 대상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로마의 주화는 "국가적 상징(종려나무, 포도나무잎)이나 생산물의 풍요한 부귀를 나타내는 포도주나 기름의 병 속, 또는 풍요의 뿔에 꽂혀진 모양 등과 황제의 이름과 호칭, 통치 연대" 등도 각인되었다.
근동 / 팔레스틴 : 근동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주화는 아주 수수하고 단조로운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점차 주화에 화관 모양의 무늬가 각인되었으며, 고대 히브리 문자가 각인되기도 했다. 이후 "풍요의 쌍뿔(cornucopia;그리스 신화로서 어린 제우스에게 젓을 먹인 양 아말테의 뿔을 말하며, 그 속에서 과실과 곡식이 쏟아져 나오는 모양을 나타내서 물건의 풍부함을 상징함)과 양귀비의 머리 모양"이 각인되기 시작했는데 이들 모두가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요한 힐카누스는 B.C.110년경에 주화를 새로이 만들었는데 이는 기존의 유대인의 주화는 다른 형태의 주화를 만들어 자시의 이름을 각인하였다. 유다 아리스토불루스(Judas Aristobulus) 통치 시대의 주화는 '대제사장 예후다와 유대인 공동체'라는 글자를 각인하였다. 유다 마카비 시대의 마지막 왕인 안티고누스(Antigonbus 40-37 B.C. 재위)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주화를 주조했지만 상태가 매우 불량하였다. 그러나 이 황폐의 특징으로는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가 각인되었는데, 이는 것으로 성전의 성스러운 물건이 처음 화폐에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B.C.47년 율리우스 케사르가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헤롯(Herod 36-34 B.C.재위)을 파송하였다. 헤롯은 유대 지역에 그리스식 성전과 읍락, 그리고 로마와 같은 투기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주화의 제조에 있어서는 기존의 유대 주화의 각인과 같거나 비슷한 모양을 각인하여 새로운 화폐를 만들었다. 헤롯 시대 주화의 특징은 날짜를 각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자는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각인하였다.
헤롯의 아들인 아켈라우스(Archelaus B.C.4-A.D.6 재위)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파견된 자로 그는 주화를 제조함에 있어서 유대식도 헬라식도 아닌 중립적 상징물을 넣어 각인하여 유대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았다. 필립(Philip B.C.4-A.D.34 재위)은 최초로 로마의 황제 두상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전 건물을 각인하 인물이다. 그러나 헤롯의 신전 건물을 각인한 인물이다. 그러나 헤롯 아그립바(A.D.37-44 재위)는 자신의 두상을 화폐에 각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본디오 빌라도 시대의 주화에 각인된 것을 보면 한 면에는 국자 모양을, 다른 한 면에는 구부러진 지팡이나 관장(官杖)을 각인하였다. 빌라도가 이러한 각인을 사용한 것은 "디베료 황제의 명예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성경적 접근 : 성경의 화폐 거래는 솔로몬 시대 이후에야 등장한다(왕상5:11). 그 이전에는 물물 교환을 했으며 금이나 은을 중량으로 달아서 계산을 했다.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부여 만든 동전을 쓰기 시작한 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바벨론의 돈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스1:4). 유대인들은 돈을 만드는 일과 그 돈에 형상을 각인하는 일에 무관심했는데 아마도 십계명을 의식한 것이 주요 이유인 듯하다(출20:4). 고고학에서 발견된 최초의 유대 화폐는 B.C.4세기의 것으로 그 동전에는 '유다'와 '히스기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을 국세로 바쳤었는데 '신성한 가이사'라는 각인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것은 로마와 그 황제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성도들은 결코 돈을 우상처럼 받들어서는 안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가룟 유다의 위선(12:1-11)
예수를 영접하여 잔치를 베푼 곳은 문둥이 시몬의 집이었다(마26:6). 예수로 인해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집 사람들도 이 잔치에 참여했고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나드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었다.
1. 가룟 유다의 위선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부은 나드 향유는 구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고급 향유였다. 그것은 노동자 1년치의 품삯에 해당했다. 이에 분개한 것은 예수 공동체의 경리를 맡고 있는 가룟 유다였다. 이는 이 고가의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쓸 일이지 그렇게 부어 허비할 수 있느냐고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본심은 돈을 훔쳐갈 기회가 적어진 것을 아쉬워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분노는 가장된 그의 위선이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2. 가룟 유다의 독직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들 중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에게 그 공동체의 경리를 맡긴 것은 왜였을까? 그가 돈을 훔쳐가는 줄 아시면서도 그 직무를 계속 맡기신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그로 하여금 예수를 은 30세겔에 파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계속 '탐욕'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평소의 그의 작은 독직 행위가 마침내 메시야를 팔아 인류 역사에 영구히 '배반자'의 악명을 남기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3. 가룟 유다의 후예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가룟 유다의 후예들이 있다. 그들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일을 시작하나 그것은 모두 그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빙자하여 금전적, 교권적, 명예적 이익을 챙기는 데 비상한 수완들을 발휘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봉사'가 아니라 '탐욕의 추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영원히 기념될 '옥합'(12:1-11)
예수를 맞이한 베다니 마을에서는 큰 잔치를 베풀어 그를 환영했다. 죽었던 나사로를 덤에서 살려낸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을 곧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보통 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1. 그리스도를 영접한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 마을에는 오늘 잔치를 베푼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다(마26:6). 이 두 가정은 예수에 대하여 각별한 호의를 가진 가정들이고 그것은 그들이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로 베다니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맞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베푼 잔치는 마을 잔치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에게 향유를 붓는 마리아
한참 잔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비싼 나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와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 향내는 온 집안에 진동했고, 마치 그림같은 아름다운 광경으로 많은 사람들은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처럼 찬양받고 경배되는 대상은 없다. 거기에는 '구원'에 대한 벅찬 감격과 감사가 있기 때문이다. 향유를 붓는 마리아는 바로 그 감격과 감사의 영원한 표상이다.
3. 영원히 기념될 마리아인 '옥합'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을 비난하는 가룟 유다에게 예수는 마리아가 그에게 향유를 부은 것은 그의 장사를 위한 것이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영원히 기념될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행위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는 잘 모른다. 그 보상이 또한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는 잘 모른다. 그 보상이 또한 얼마나 큰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가 작은 소자에게 한 하찮은 선행까지도 당신에게 한 지극히 큰 선행으로 평가하신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요12:12-19)
◈ 원문강해 ◈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이스라엘의 왕
예수그리스도는 수많은 무리들의 호산나 소리를 들으면서 종려가지의 물결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이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들의 찬송은 조금 후엔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들의 찬송은 조금 후엔 예수를 죽이라는 함성으로 변하게 될 것이었다.
1. 환호하는 무리들(12,13절)
1) 예수의 소식
(Th'/ ejpauvrion oJ o[clo" polu;" oJ ejlqw;n eij" th;n eJorthvn, ajkouvsante" o{ti e[rcetai oJ jIhsou'" eij" JIerosovluma테에파우리온 호 오클로스 폴뤼스 호 엘돈 에이스 텐 헤오르텐 아쿠산테스 호티 에르케타이 호 예수스 예로솔뤼마;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2절)
테 에파우리온(Th'/ ejpauvrion그 이튿날에는)은 정관사를 사용하여 어떤 특정한 날의 바로 다음 날을 지칭하고 있다(A.Barnes). 본문에서 말하는 다음날은, 향연 후의 다음날로서 니산 월(1월) 10일일 것이다. 호 오클로스 폴뤼스(oJ o[clo" polu;"큰 무리가)는 9절에 나온 '큰 무리'와 동일한 단어와 어순을 선택하고 있다. 즉 유대교의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계층의 유대인들, 즉 서민 계층의 그 유대인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이 이미 예수께로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소문들이 넓게 퍼져 있었고, 예수의 다음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음을 본문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종려나무와 호산나
(e[labon ta; bai?a tw'n foinivkwn kai; ejxh'lqon eij" uJpavnthsin aujtw'/, kai; ejkrauvgazon, JWsannav:엘라본 타 바이아 톤 포이니 콘 카이 엑셀돈 에이스 휘판테스 아우토 카이 에크라우가존 호산나;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13a절)
바이아(bai?a종려나무 가지)는 구약에서부터 존경과 기쁨을 표시하는 수단이었다(레23:40).
또한 승리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나무를 가져오는 것은 승리자나 왕에게 승리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라 한다(계7:9,J.H.Bernard).
마카비1서 12:51에서는 독립 운동의 영웅인 시므온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본문에서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호산나'( JWsannav: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오!구원하소서'라는 뜻이며, 70인경(LXX)은 소손 데(sw'son dhv구원하소서)로 번역하였다.
본문의 환영 묘사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사람들은 아마도 마카비가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독립을 가져올 진정한 메시야로서 예수를 환영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가시적이며 지상적인 메시야 왕국을 가져 올 자로 예수를 알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선포한 예수 자신의 모습보다는, 자신들이 필요로 하고 상상해 온 예수를 환영했던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왕
(eujloghmevno" oJ ejrcovmeno" ejn ojnovmati kurivou, 팳ai;? oJ basileu;" tou' jIsrahvl.율로게메노스 호 에르코메노스 엔 오모마티 퀴리우 [카이] 호 바실류스 투 이스라엘;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3b절)
퀴리우(kurivou주)는 아마도 하나님을 뜻하는 사성 문자 '여호와'(hhy)로 번역된 글의 헬라어 번역일 것이다. 오노마티(ojnovmati이름으로)는 히브리인의 사고에서 단순한 성명 이상으로 전인격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실류스투 이스라엘(basileu;" tou' jIsrahvl이스라엘의 왕)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십자가 죄패와는 다른 표현이다.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유대인과는 달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바실류스(basileu;"왕)는 원래 정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은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이다(Liddle & Scott). 사람들이 예수를 찬송하던 말들은 그 용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메시야를 부르는 가장 정확한 용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말을 전혀 다른 의도로 사용하고 있다.
2. 나귀를 타고 들어오심(14-16절)
1) 나귀를 타심
(euJrw;n de; oJ jIhsou'" ojnavrion ejkavqisen ejp j aujto휴론 데 호 예수스 오나리온 에카디센 에프 아우토;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4절)
오나리온(ojnavrion나귀 새끼)은 구약에선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삿10:412:14). 사람들을 통치하는 왕은 나귀를 타지 않고 말을 탐으로써 권세와 힘을 나타내지만,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와 정사를 그 어깨 위에 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약한 한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과 자애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또한 예수께서 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마21:2막11:2눅19:30).
휴론(euJrw;n만나서)은 이렇게 나귀를 타신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섭리와 경륜에 속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예수께선 자신의 모든 선포들을 하나님께 의존했었으며, 동시에 그분의 권위에 의존했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입성에서도 하나님의 준비하심과 예비하심으로 나귀를 타셨던 것이다.
2) 예언의 성취
(Mh; fobou', qugavthr Siwvn: ijdou; oJ basileuv" sou e[rcetai, kaqhvmeno" ejpi; pw'lon o[nou.카도스 에스틴 계그람메논 메 포부 뒤가테르 시온 이두 호 바시류스 수 에르케타이 카데메노스 에피 폴론 오누;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이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5절)
게그람메논(gegrammevnon기록된 바)은 현재 완료 수동형으로 현재 쓰여져 계속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란 뜻으로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을 의미하며, 종종 '율법'을 의미하기도 한다(A.Barnes).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슥9:9이며, 뒤가테르 시온(qugavthr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시민'에 대한 애칭이다(사52:2,J.H.Bernard). 구약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종종 이스라엘 혹은 시온 달이라고 부르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나 혹은 남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사54:5). 구원받은 자녀들을 시온 딸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를 인용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져 온 바로 그 메시야임을 강력하게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본문에서도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약속의 성취에 대해서와 아울러 그 약속된 메시야가 바로 주 예수그리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3) 제자들의 나중 깨달음
(tau'ta oujk e[gnwsan aujtou' oiJ maqhtai; to; prw'ton, ajll j o{te ejdoxavsqh jIhsou'"타우타 우크 에그노산 아우투 호이 마데타이토 프로톤 알르 호테 에독사스데 예수스;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16절)
토 프로톤(to; prw'ton처음에)은 시간상으로는 '가장 먼저'라는 뜻이고, 어떤 사건과 관련해서는 '바로 직후에'라는 의미이다(W.Bauer).
원문에선 토 폴톤(to; prw'ton)의 직후에 알르(ajll j그러나)가 나옴으로써 앞뒤를 완전히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15절의 구문 자체는 알르(ajll j그러나) 이후의 내용을 강력하게 강조하기 위한 대칭 구문으로 볼 수 있다(H.W.Smyth). 예수를 환영하던 사람들은 물론,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조차도 사람들의 환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와 관계되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제자들조차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요12:23빌2:10,11) 이후에 보혜사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영감을 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3. 무리들의 반응(17-19절)
1) 무리들의 증거
(ejmartuvrei ou\n oJ o[clo" oJ w]n met j aujtou' o{te to;n Lavzaron ejfwvnhsen ejk tou' mnhmeivou kai; h[geiren aujto;n ejk nekrw'n.에말튀레이 운 호 오클로스 호 온 메트 아우투 호테 톤 라지론 에포네센 에크 투 므네메이우 카이 에게이렌 아아톤 에크 네크론;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7절)
에마르튀레이(ejmartuvrei증거한지라)는 '어떤 사안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증명해 보인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Liddle & Scott). 또한 본문에서 이 단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고 있다. 즉 무리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 대해서 그 순간에만 증거하고 다녔던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증명했음을 나타낸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함께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과 바리새인에게 가서 고한 사람들로 나뉘어졌었다. 그러나 이 양자 모두는 그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닐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활의 사건은 너무나도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문은 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2) 무리가 예수를 반겼던 이유
(dia; tou'to 팳ai;? uJphvnthsen aujtw'/ oJ o[clo" o{ti h[kousan tou'to aujto;n pepoihkevnai to; shmei'on.디아 투토 [카이] 휘펜테센 아우토 호 오클로스 호티 에쿠산 투토 아우톤 페포이 에케나이 토 세메이온;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셨음을 들었음이러라, 18절)
원문은 호 오클로스(oJ o[clo"무리가)라고 기록하여 정관사가 붙은 '그 무리가' 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무리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12절에 암시된 바 예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무리들 혹은 메시야나 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던 그 무리를 지칭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토 세메이온(to; shmei'on이 표적)이란 단어는 11장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의 증표로서 표적을 구했기 때문이다. 특히 표적에 관해서도 '이 표적'이라고 정관사를 사용함으로써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환영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과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에 예수그리스도가 부활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예수그리스도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표적들을 행하실 만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저들의 자세는 올바른 신앙의 자세만은 아니었다.
3)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음
(oiJ ou\n Farisai'oi ei\pan pro;" eJautouv", Qewrei'te o{ti oujk wjfelei'te oujdevn: i[de oJ kovsmo" ojpivsw aujtou' ajph'lqen.호이 운 파리사이오이 에이판 아우투 아펠덴;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 19절)
오펠레이테(wjfelei'te쓸데)는 소기의 목적한 바를 달성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는 현재 시제로 지금 아무런 유익도 없다는 것을 나타낼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즉 바리새인들 이미 예수를 잡아죽이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A.Plummer).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허탈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포기하기 않고 계속해서 계획들을 추진해 나갔다. 그들은 군중 심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당장은 쓸 데가 없더라도 나중에는 효과가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 내용은 공관복음서 기사오 차이점이 있다. 이는 무리들의 환호를 받은 후에 한 나귀를 발견하고 입성했다는 것(요한)과 한 동물을 타고 입성할 계획을 미리 세웠다(마가)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나귀를 탄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도치시켰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C.H.Dodd, Sandert, R.E.Brown, Lindors).
1. 큰 무리의 환호(12-15절)
12절의 '그 이튿날'은 유월절 닷새 전이다. 이때와 요13:1의 유월절 전날 사이의 시간들은 36절의 '저희를 떠나가사 숨으시니라'라는 말슴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C.K.Barrett). 특히 '이튿날'은 '일요일'로서 저가 요한의 전형적인 표현 어구이다(L.Morris).
Sin 사본에는 '이튿날' 다음에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셔서 그곳에 머무르셨다'라는 부가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중들의 열광과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은, 마가복음에서는 나사로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적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과,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열광적인 환호를 받은 것을 베다니에서의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 사건과 연관되었다고 암시해 준다는 점이다(J.H.Bernard, A.H.McNeile).
13절의 '종려나무 가지'는 콥트어 ba(i)라는 '대추 야자 가지'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 호시아 나(abh[yvh제발 구원하소서)에 대한 음역이거나 시118:25에 제시된 아람어 호시아 나(abh[yvh이젠 구원하소서)의 음역일 것이며, 소손데(sw'son shv)라고 70인역(LXX)에 기록되어 '우리가 당신에게 기도하오니 우리를 건져주소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F.L.Godet, Keil).
14절은 예수가 한 어린 나구를 찾아서 타고 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나귀를 찾은 자는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다(마21:1-9막11:2-6눅19:29-36,J.H.Bernard).
15절은 슥9:9에 대한 축약된 형태를 인용한 것으로서 요한은 '두려워 말라'라고 기록한 반면에 히브리어 성경에는 '크게 기뻐할지어다'(ram ylyg길리 메오드)로 기록한 점이 특이하게 다른 점이다(C.K.Barrett).
2. 무리들이 예수를 환호한 원인(16-19절)
16절의 '이 일을'이라는 표현은 한 구절 속에서 세 번씩이나 되풀이 되어 강조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입성한 매우 중대한 사실과 그의 예언에 관한 일들을 의미하며(Bengel), 예수가 영광을 받기 전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이 깨닫게 되었음을 가리키고 있다(Reuss). 사본들 중 a, B, W, Q 사본에는 타우타(tau'ta)다음에 나오는 데(dev)를 빠뜨렸다. 사본 D, W, Q 사본 등은 예수스(jIhsou'd예수)앞에 나오는 정관사 호(oJ)를 첨가하고 있다(J.H.Bernard).
17절의 '∼하실 때'(o[ti호테)가 P66, D, it, sin, pesh 등의 사본에는 '∼때문에'(o[ti호티)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의 상황을 단순하게 요약하여 기록하고자 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C.K.Barrett). 이러한 구문적 차이에서 호테(o[te)를 지지하는 학자(Schaff)와 호티(o[ti)를 지지하는 학자(Tischendorf)로 나뉜다.
18절에 나오는 '무리'는 13절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환호하던 무리들로서, 이들은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일으키신 예수의 모습을 목격하였던 '그 무리들'(요9:17)과는 구별된다. 두 분류의 무리들 중 후자 무리는 예수를 후원하며 따라 다니는 무리들이고, 전자는 예수를 만난 무리들이다(J.H.Bernard, W.Van Doren). 특히 전자는 예루살렘이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예수를 환호했다.
19절은 마21:15에 의하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이 입성하신 예수님을 환호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음이 언급되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 입성 사건을 크게 불쾌하게 여겼음을 기록하고 있다. '서로'라는 단어는 아람어의 '품성적 여격'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Black)과, '그 사람들 입장에서'라는 의미라고 주장되기도 한다(Sanders). '온 세상'에서 코스모스(kovsmo"세상)라는 말이 P66, P75, a, B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관용적인 표현 어구이다(Lindars, F.L.Gode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예언의 성취로서의 입성(12-16절)
요세푸스(Josephus)는 12절의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순례객들의 숫자를 270만 명 이상으로 보고하였으며, 예레미야스는 예루살렘시에 약 15만명이사이 숙박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L.Morris). 따라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맞이하러 모인 군중들의 수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명절'이란 유월절을 뜻하는데(1절), 율법에 의해 이스라엘은 유월절(무교절), 오순절, 초막절 때 예루살렘에 모여 의식을 행해야 했다(출23:14-16).
13절에서 종려나무 가지는 초막절에 사용하여야 한다(레23:40). 그러나 후대에서는 다른 절기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마카비1서 13:51;마카비2서 10:7, Barrett, L.Morris).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종려나무 가지는 전통적으로 승리와 번영과 거룩함의 상징이다(R.C.H.Lenski, E.A.Blum). 따라서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한 것은 그를 정치적 왕으로 삼으려 하는 의도에서이다(E.A.Blum). 이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는 외침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이 구절은 시118:25,26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유대인들은 '오시는 이'를 메시야로 보았으며(마11:3), 그 개념은 본문에서처럼 정치적 왕적 메시야로소 이해되었다(R.C.H.Lenski, L.Morris, C.K.Barrett). 어쨌든 이 사건에서 기독교의 종려 주일이 시작되었다.
14,15절에서 요한은 나귀를 구하게 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오직 '예언의 성취자'로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한다는 것만을 강조한다(L.Morris). 이는 슥9:9의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서 왕으로 오시는 예수의 성격이 정치적으로 호령하는 메시야가 아닌 겸손하고 평화의 왕이심을 나타내고 있다(렘22:19마5:10슥9:10시20:7,김희보, L.Morris, R.C.H.Lenski). 한편 '시온의 딸'(@wy[ tk바트 치온)은 연계형으로 연결된 단어로서 단순한 소유격의 의미가 아니라 '동격의 소유'를 나타낸다. 따라서 '시온의 딸'보다는 '딸 시온' 혹은 '처녀 시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시온의 딸'의 의미는 궁극적으로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내기도 하며(김희보, E.A.Blum), 한편으로는 곧 비참하게 유린당할 예루살렘 성을 의인화하여 상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이란 표현은 '예루살렘성과 그 거민'을 동시에 의미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언약의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6절에서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당시 자신들의 무지함을 회상한다. 예루살렘 입성이 예언의 성취였으며 영적 메시야로서의 입성이었음을 뒤늦게, 즉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음을 언급한다(요14:26,27눅24:25-27). 이 사실은 제자들조차 예수가 진정으로 어떠한 메시야인가를 알지 못하였는데, 군중들은 어떠했겠는가를 알게 한다(L.Morris). 따라서 군중들의 외침은 허공을 치는 외침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바로 며칠 뒤에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요19:15).
2. 군중들이 예수를 맞이하는 이유(17-19절)
17절에서 예수를 정치적 왕으로 추종하려는 무리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증거로 더욱 분위기가 고조되었다(L.Morris). 그러나 그들의 증거와 추종은 나사로 부활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행하여졌다(Blum). 한편 이들의 증거는 '증거한지라' 동사가 능동태 미완료형인 것으로 보아 계속하여 증거한 것임을 알게 한다.
18절에서 무리가 예수를 영접한 구체적인 이유가 언급된다. 이들은 오직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그 이유만으로 예수를 만나러 나간 것이다. 이 사실은 '이에'의 의미가 '다른 목적들과는 구별되어 오직 그 이유로만'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L.Morris).
19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비난하며 '온 세상이 그를 좇는다'고 풍자한다. 그들의 이 말은 무의식 주에 교회가 온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L.Morris, R.C.Lenski, J.A.Bengel). 요한이 이 표현을 굳이 사용한 것은 이 사실을 바리새인들의 입을 빌어 언급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이 걱정과 비난과는 달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Blum). 이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더욱 빨리 예수를 죽이려는 방법을 강구하게된다(막13:1,2).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우주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직
1. 왕직의 성격
권능의 왕국이라는 용어를 신인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우주를 다스리시고 만유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섭리적 사법적으로 통치하신다는 의미이다. 개인, 사회, 지단, 민족들의 운명을 그가 자기 죄로 구속하신 백성들의 영적 성자, 짐진적 정화 및 궁극적 완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신다.
또한 그는 그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며 모든 대적들을 굴복시키고 멸함으로써 자기의 의를 보전하신다. 우리는 이 같은 그리스도의 왕직에서 인간의 원래적 왕직의 첫 회복을 보게 된다.
2. 권능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의 관계
우주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직은 그의 영적 왕적에 종속된다.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영적인 왕국을 세우고 통치하며 모든 적에 세력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임무이다. 그는 이 일을 죄의 세력 아래 있고 일체의 영적 노력을 방해하는 데 전심하고 있는 세상에서 수행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고 그는 세상의 모든 정사와 권세와 운동을 제어할 수 있게 되어서 세상에서 그의 백성들을 위한 안정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일체의 흑암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그들을 보호하실 수 있는 것이다.
3. 이 왕직의 기간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으로 들리우심 받았을 때 우주에 대한 이 왕직을 정식으로 위임받으셨다. 그것은 그의 노고에 대해 미리 약속되어진 상급이었다(시2:8,9마28:18엡1:20-22빌2:9-11). 이러한 임직은 시신인의 승귀의 일부분이었다. 이 임직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미 소유하시지 않은 다른 능력이나 권세를 받았거나 그의 통치 영역이 확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보자이신 신인이 이같은 권세의 주인이 되었고 그의 인생이 이같은 왕적 통치권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세계의 통치가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방식은 원수들에 대해 완전히 승리하고 심지어 사망이 철폐되기까지 계속될 것이다(고전15:24-28).
재생(再生)할 수 있는 자(12:12-19)
◈ 세계배경 문화사 ◈
재생(再生)이란 다시는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소멸(消滅)이나 죽음이 없는 것, 불멸(不滅)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영생(永生)이란 신적 존재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는 데, 재생(再生) 역시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염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동 / 유대 :이스라엘에서 영혼(靈魂)은 넓은 의미로 생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은 살아있는 인간과 동물의 육체(肉體)와 함께 존재하며, 신에 의하여 영혼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신은 인간의 영혼을 지키고 인간의 영혼은 그렇기 때문에 신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내재하는 신(神)적 요소로서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 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대의 엣센파의 부활 사상을 보면 "죽은 자의 육신은 전신(前身)인 흙으로 다시 돌아가고 영혼은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의 사상은 이방 종교의 사상과 접목된 상태이다. 즉 안티오쿠스 1세(Antiochus I)의 묘비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제우스 오로마스테스(Zeus Orimasdes)의 천상(天上) 옥좌 앞으로 보내진 후, 육체는 무궁하도록 무덤 안에서 쉬게 됨"이라고 하고 있다.
이집트 :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나름대로 영혼불멸의 독특한 내세관(來世觀)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비록 사람이 죽더라도 그 육체가 썩지 않으면 육체를 떠났던 영혼이 다시 돌아와 영생불사하게 된다고 확신했다.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애썼으며, 시체를 '미이라(mummy)'로 만들어 피라미드나 분묘 속에 안치하여 사자(死者)의 재생(再生)을 기원하였다. 특히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 의하면 "죽은 자는 조용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성적(性的) 쾌락 대신에 행복에 빛나는 초월의 상태가 있고, 식도락(食道樂)대신 영혼의 안식이 있다"라고 하고 있다.
메소포타이마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부활 신앙을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을 "흔히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는 무발리트 미티(muballit miti), 심지어는 죽은 자들을 하계(下界)에서 구해 내는 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신인 담무스(Tammuz)와 우가릿의 바알(Baal)과 같은 신의 신화가 있다.
서양 / 그리스 :그리스에서는 언제나 신들을 죽지 않는 존재로 설명하였으며, 이 불멸성이야말로 신들이 존재 방식으로 보아 왔다. 이러한 '불멸(不滅)'이라는 용어를 구체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플라톤(Platon)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불멸성이란 영혼을 포함한 여러 존재 형태 중 한 계층의 속성'이라고 보았다. 에피쿠로스(Epicuros) 학파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몸과 함께 분해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스토아(Stoa) 학파는 개인의 영혼은 능동적이며 사물의 구정 원리인 불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이들 모두의 주장은 인간의 영혼(靈魂)은 신성(神性)과 가깝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생각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불멸성(再生;재생)에 대한 약속은 신적ㆍ천상적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하게 되었다. 이러한 희망을 이루기 위해 신비 의식이 많이 행해졌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의로운 자가 죽으면 별에 머문다는 믿음이 있다. 즉 로마의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A.D.76-138)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안티노우스(Antinous)가 죽자 그의 영혼이 별이 되었다고 믿었다.
동양 / 한국 : 한국 사회는 예로부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에 대한 기록이 많이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죽어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신라의 김대성 이야기다. 원래 김대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새로운 절을 짓는 데에 자신들이 가진 전재산을 헌납함으로써 그 대가로 부유한 재상(宰相)의 집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김대성 이야기 이외에도 노비 욱면의 이야기도 있다. 욱면은 어느 귀족 집안의 노비였는데, 힘든 일을 하면서도 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불하였다. 그랬더니 어느 날 몸이 날아가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사복불언'조에 보면, 신라의 경주에 한 과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그 아들은 12세까지 걷지 못하고 배로 밀며 다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뱀복이 또는 한문으로 사복이라고 불렀다. 사복은 성장하면서 원효 스님과 깊은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사복의 어머니가 죽자 사복은 원효스님에게 이르기를 "여보게 친구 전생에 경전을 싣고 다니던 소가 오늘 죽었네, 함께 장례를 치르세…", 라고 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는 원래 전생에는 소였지만 경전을 싣고 다닌 공로로 인하여 현세에서는 인간으로 재생했다는 것이다. 이후 사복은 신라가 낳은 10대 성인 중 일인이 되었다. 이러한 기사로 보아 신라에서는 불교를 열심히 믿고 귀의(歸依)하면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신앙은 특히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 중국 사람들은 내세에 관한 개념이 저마다 다르다. 재생에 대한 개념 역시 재생할 수 있다는 자오 재생할 수 없다는 자로 나누어 진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육체와 혼(魂), 백(魄)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이들이 분리된다고 믿는 것이다 혼은 행동을 지시하는 것이며, 백은 몸통과 사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육체를 벗어난 백은 황천(黃天)이라는 세계로 가서 그곳에 있는 다른 백과 뒤섞이게 된다고 한다. 한편 중국인들은 재생보다는 영생불사를 더 갈구하여싸. 「열자」의 '탕문'편에 보면, "…각 산은 서로 7만 리씩 떨어져 있지만 마치 이웃처럼 생각된다. 그 위의 대관은 모두 금과 옥으로 되어 있고 짐승과 새들은 모두 순백색이다. 진주와 보석 나무가 총총히 서 있고 아름다운 꽃과 단 과일이 열린다. 그것을 먹으면 모두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신선으로 한낮 한밤이면 이 섬에서 저 섬으로 날아 다니며 수없이 왕래한다…"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재생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던 왕충이라는 자는 "살아 있는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할 수는 있어도 꺼진 불은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다시 소생시킬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을 다시 부활시킬 수는 없다. 죽은 재를 다시 타오를게 할 수 없다면, 죽은 사람을 원래의 모습대로 되살릴 수 있는지 자못 의문이다. 일단 불이 꺼지면 다시 타오르지 못하는 것과 일단 불이 꺼지면 다시 타오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라고 하여 부활을 부인하고 있다.
힌두교 : 힌두교의 재생에 관한 교리는 「마누법전」의 제12장에 조금 언급되었다가 브라만교의 경전인「우파니샤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죽지 않고 다른 몸으로 윤회하여 재생하는데 카스트라는 사회제도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받는다고 믿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은 망설임 없이 죽은 자의 재생을 말할 뿐만 아니라 보여 주고 예견하고 있다. 성경에서 죽은 자의 재생은 당연한 것이요 그 실례도 많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재생의 예는 엘리야 선지자로 인해 살아난 사렙다 과부의 아들(왕상17:17-24), 또 엘리사로 인해 되살아난 수넴 여인의 아들도 있다(왕상4:32-35). 그리고 죽은 엘리사 선지자의 뼈에 접촉한 시체가 재생한 예도 있다(왕하13:20,21). 신약 특히 그리스도와 사도 시대에는 죽은 자의 재생 사건이 빈번하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7:11-15), 나사로, 또 도르가(행9:36-40)의 예가 대표적이다. 그와 같은 재생의 근거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배경으로 하며 부활 진리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재생에 관한 성경의 내용은 불신 세상에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증언이요, 성도들에게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주의 입성을 대하는 무리들(12:12-19)
주님의 이성은 매우 열렬한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유대 군중들이 주님을 환영했다는 의미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분명히 성경은 말씀하신다. 주의 입성을 맞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그 환영의 참된 진의가 드러난다.
1. 단순한 구경꾼들이 많음
성경은 '명절에 온 큰 무리'(12절)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각국에서 온 유월절 순례자들이 약 200여만명이 된다는 고증도 있다. 성경은 주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을 구분하다. 이는 주님을 따른다고 다 제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냥 주님의 권능과 표적에 호기심을 지닌 구경꾼 무리들도 있다는 것이다(9절). 오늘도 기독교의 진리에는 구도심도 없이 단순한 인간적인 관심으로 교회를 찾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채우지 못하면 곧 흩어진다.
2. 인간적인 바람을 지닌 자들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을 행하심을 들었음이라'(18절). 그 무리 중에는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고 환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구세주는 예수 자신이 아니라 '정치 해방'과 '빵'이었다. 그러기에 영원한 사죄의 진리, 영원한 의의 천국을 바라고 따르는 자들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바람대로 주님이 행치 않자 며칠이 못되어 '예수 대신 바라바를!'이라고 외치며 주님을 배신하여였다. 그 신앙의 동기와 목적이 성령 안에서 성경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못한채 많은 무리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습관과 호기심, 그리고 물질적 행복과 표적을 구하려는 의식, 또 기독교를 정치 운동의 한 수단으로 여기는 목적을 지닌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는 스스로 자성해 봐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주께서 다시 오실 때(12:12-19)
드디어 주님은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다. 우리는 이 입성 기사를 공관복음에서 많이 다뤘
다. 마지막으로 그 입성의 상징적 교훈을 생각해보자.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은 훗날 이 땅에 재림하시는 사건의 전조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 큰 표적 후에 오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주님은 인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표적을 행하셨다.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시키신 것이다. 이는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밝히 알리신 표징이다. 이처럼 재림하실 때에도 그 직전에 큰 표적을 재림의 징조로 보여 주실 것이다. 그때는 역사의 심판주로 오실 것을 나타내는 줄 표적을 하늘로서 보여 주실 것이다(마24장).'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21:28).
2. 영광에 걸맞는 모습으로 오심
지상의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 이는 대속주로서의 겸허함을 상징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그 전능과 영광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보리라'(마26:64).
3. 사람들의 두려움과 환호 속에 오심
주님은 군중들의 환호와 바리새인들의 질시속에서 입성하셨다. 누구나 주님이 오시는 것을 다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갈구하는 참성도들만이 주님 오심을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대적하며 의인을 핍박하고 불의를 좇던 자들은 '그를 인하여 애곡'(계1:7)할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를 행하고 인내한 성도들 중에 우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자신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요12:20-36)
◈ 원문강해 ◈
자신을 희생으로 드리는 예수그리스도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의 뒤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하며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한 알의 밀(20-25절)
1) 예수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
( \Hsan de; {Ellhnev" tine"...qevlomen to;n jIhsou'n ijdei'n....levgousin tw'/ jIhsou'.에산 데 헬레네스 티네스…델로멘 톤 예순 이데인…레구신 토 예수;헬라인 몇이 있는데…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예수께 가서 여짜온데, 20-22절)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을 헬레네스( {Ellhnev"헬라인)라고 불렀는데(A.Barnes), 이방인들이 모두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Lightfoot). 본문에 나온 헬라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는 점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같다(Dods). 그러나 이들은 반개종자들로 허락되는 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축제를 지내고 싶어한 자들일 수도 있다(F.Riencker). '선생이여'는 원문에선 퀴리에(kuvrie주여)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① 단순한 존경, ② 노예의 상전에 대한 호칭, ③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에 대한 호칭 등의 의미들을 갖는데, 본문에선 ①의 의미이다(W.Bauer). 예수의 영광은 그의 미약한 제자들까지도 '주여' 혹은 '선생이여'라고 불리게 만들었다(Westcott). '청하여'(hjrwvtwn에로톤)는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적으로 청한다'는 뜻이며 빌립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교훈을 배우기 위해 예수를 뵙기 원했을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이방인들은 예수를 찾아왔던 것이다.
2) 열매 맺기 위한 조건
( jElhvluqen hJ w{ra i{na doxasqh'/ oJ uiJo;" tou' ajnqrwvpou....oJ kovkko" tou' sivtou pesw;n eij" th;n gh'n ajpoqavnh/, aujto;" movno" mevnei: eja;n de; ajpoqa;nh/, polu;n karpo;n fevrei.엘렐뤼덴 헤 호라 히나 독사스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호 콕코스 투시투 페손 에이스 텐 겐…에안 데 아포다네 폴륀 카르폰 페레이;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3,24절)
독사스데(doxasqh영광 얻을)는 수동태로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실 것임을 강조한다(J.Jeremias). 하나님께선 예수의 영광받으심을 작정하셨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께 영광주실 것임을 수동태로써 표현하고 있다. 아멘 아멘(ajmh;n진실로 진실로)은 예수 자신의 독특한 진리 선포를 시작하는 도입구로서 사용되는 구문이다(C.H.Dodd). 이는 말씀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콕코스(kovkko"밀)는 보리나 밀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곡식들을 포함한다(A.Barnes).
한 알의 밀이 썩어야만 동일한 많은 밀이 열매로 맺힌다는 예수의 말씀은,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나누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암시한다.
3) 예수의 역설
(oJ filw'n th;n yuch;n aujtou' ajpolluvei aujthvn, kai; oJ misw'n th;n yuch;n aujtou' ejn tw'/ kovsmw/ touvtw/ eij" zwh;n aijwvnion fulavxei aujth;n.호 필론 텐 프쉬켄 아우투 아폴뤼에이 아우텐 카이 호 미손 텐 프쉬켄 아우투 엔 토 코스모투토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퓔락세이 아우텐;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린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5절)
기독교의 특징은 일반 상식과는 대치되는 진리가 기독교 진리 안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프쉬켄(yuch;n생명)은 문자적으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말로서 숨을 쉬는 생명체 자체로서 그 자아를 뜻한다. 또한 육신의 삶과 목숨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Liddle & Scott). 이 세상의 그 누가 자신의 생명을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본문은 그 본능적인 자기 집착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또한 필론(filw'n사랑하는)은 현재 분사형태로서 '계속적으로 사랑하고 있는'이며, 아폴뤼에이(ajpolluvei잃어버릴 것이요)도 현재형으로서 '지금 잃어버리고 있다' 또는 '계속적으로 잃어버리는 상태로 있을 것'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지금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장차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생명을 파멸시키고 있다라고 보아야 한다. 아폴뤼에이(ajpolluveiv잃어버릴 것이요)는 '파멸시키다'의 의미도 갖는다(W.Bauer).
2. 하늘 아버지의 선포(26-30절)
1) 나를 따르라
(eja;n ejmoiv ti", diakonh'/, ejmoi; ajkolouqeivtw, kai; o{pou eijmi; ejgw; ejkei' kai; oJ diavkono" oJ ejmo;" e[stai: ejavn ti" ejmoi; diakonh'/ timhvsei aujto;n oJ pathvr.에안 에모이 티스 디아코네 어모이 아콜루데이토…에안 티스 에모이 디아코네 티메세이 아우톤 호 파테르;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6절)
에모이(ejmoi나를)는 강세형이며(A.H.Chase), 또한 '나 있는 곳에'의 에고(ejme;나)도 1인칭 단수 인칭대명사로 강조를 위한 용법이다. 우리는 본문이 두 번의 에모이(ejmoi)와 에고(ejme;)를 통하여 예수 자신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선 죽음의 장소에까지, 고난과 시험의 장소에까지 자신을 따라와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가 가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지 함께 가고 예수가 당하는 고난과 함께 할 때만이, 예수와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다.
본문은 제자도의 참된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나를 따르라'라는 한마디를 통하여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고 있다.
2) 예수의 간구
(Nu'n hJ yuchv mou tetavraktai. kai; tiv ei[pw;...ajlla; dia; tou'to h\lqon eij" th;n w{ran tauvthn....kai; pavlin doxavsw.
뉜 헤 프쉬케 무 테타라크타이 카이 티 에이포…알라 디아 투토 엘돈 에이스 텐 호란 타우텐…카이 팔린 독사소;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27,28절)
뉜(Nu'n지금)은 '지금'보다는 오히려 '드디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테타라크타이(tetavraktai민망하니)가 '소동한다'라는 의미의 현재 완료형으로서 이미 고민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민망하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께의 순종이 교차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Bernard).
'구원하여'(sw'sovn소손)란 단순과거 명령형으로서 강한 희구성을 나타낸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만을 간구하셨고, 하나님은 이미 예수의 여러 사역들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음을 밝히셨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다시금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의 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만드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들인 예수를 영광스럽게 만드실 것이다(W.Hendriksen).
3) 너희를 위한 소리
(Ouj di j ejme; hJ fwnh; au{th gevgonen ajlla; di j uJma'".우 디 에메 헤 포네 하우테 게고넨 알라 디 휘마스;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0절)
사람들은 하늘의 음성에 대해서 의견들이 분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흡사 동물들이 인간의 언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안이 감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Godet). 본문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우레'로 묘사했던 것(출9:28삼하22:14)과 동일하게 간주하기도 한다(Weiss). 하나님의 이러한 구체적 선포하심은 아직도 죄와 죽음에서 허덕이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선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앞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으나 사람들은 아직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본문의 선포하심을 통해 인간들을 향해 자신의 섭리를 재차 밝히신 것이다.
3. 빛을 믿으라(31-36절)
1) 이 세상의 심판
(nu'n krivsi" ejsti;n tou' kovsmou touvtou...kajgw; eja;n juJywqw' ejk th'" gh'", pavnta" eJlkuvsw pro;" ejmautovn.뉜 크리시스 에스틴 투 코스무 투투…카고 에안 휩소도 엑 테스 게스 판타스 헬퀴소 프로스 에마우톤;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1,32절)
아르콘(a[rcwn임금)은 일반적인 왕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주로 무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통치권을 획득한 지배자를 뜻한다(W.Bauer). 휩소도(juJywqw'들리면)는 의미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심'을 의미하지만(A.T.Robertson) 그리스도의 능력을 모든 장소에서 보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W.Hendriksen). 또한 '들리면'에 부활과 승천이 포함된다는 입장도 있고(Westcott, A.Plummer). 그리고 32절의판타스(pavnta"모든 사람)라는 표현을 만민구원설이 근거로 간주하기도 한다(Meyer). 한편 '이끌겠노라'(eJlkuvsw헬퀴소)는 예수님께서 이미 요6:44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이끄신다는 말씀 속에서 사용하셨다.
예수께선 본문을 통해 자기 자신이 이제 당하게 될 고난이 고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리와 영광을 가져올 것이며 나아가 이것을 통해 모든 인류의 가장 복된 소식이 전해질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2) 무리의 반문
(shmaivnwn poivw/ qanavtw/ h[mellen ajpoqnhv/skein....oJ o[clo"...pw'" levgei" su; o{ti dei' uJywqh'nai to;n uiJo;n tou' ajnqrwvpou세마이논 포이오 다나토 에멜렌 아포드 네스케인…아페크리데…호 오클로스…포스 레게이스 쉬호티 데이 휩소데나이 톤 휘온 투 안드로푸;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임심이러라…이에 무리가 대답하되…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33,34절)
노무(novmou율법)는 구약 전체를 가리킨다(요10:34). '보이심이러라'(shmaivnwn세마이논)는 세마이노(shmaivnwn신호를 주다, 표시하다)의 현재 분사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확실한 표시로서 보여 준다는 뜻을 암시한다. 에쿠사멘(hjkouvsamen들었거늘)은 일반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읽고 해설해 주는 것을 통해 율법을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Lightfoot). 무리들은 어리석게도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선언에 대해서 자신들이 잘못 이해하여 구약 말씀을 사용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이 '이 인자가 누구냐'라고 되묻는 모습을 통해, 아직 인자와 메시야가 동일시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Westcott, J.H.Bernard). 그들은 오시는 메시야께서 이 땅에 가시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우고 정치적으로 통하시는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지도 못했고 또한 그것을 풀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사람들의 귀와 눈은 그토록 닫혀 있었던 것이다. 본문의 상황은 어쩌면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3) 빛을 믿으라
( [Eti mikro;n crovnon to; fw'" ejn uJmi'n...eij" to; fw'", i{na uiJoi; fwto;" gevnhsqe.에티 미크론 크로논 토 포스 엔 휘민…피스튜에테 에이스 토 포스 히나 휘오이 포토스 게네스데;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35,36절)
본문에선 포스(fw'"빛)와 스코티아(skotiva어두움)과 대조되고 있다. 빛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되지 않는다면 어두움에 붙잡혀 어두움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빛을 믿은 결과에 대해서는 휘오이 포토스(uiJoi; fwto;"빛의 아들들)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어두움에 대해서는 카탈라베(katalavbh/붙잡히지)와 같은 비인간적 관계형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빛을 믿어 빛의 아들들이 도지 않는다면, 어두움이 급히 뒤쫓아와 습격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 것임을 예수께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예루살렘에서 헬라인 몇 명이 예수를 만나러 왔다는 내용은 다른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전혀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이며, 또한 이들이 본 설화 속에서 갑자기 사라지고 있다는 점 또한 호기심을 자극케 한다(L.Morris).
1. 예수를 만나길 원하는 헬라인들(20-22절)
20절의 '헬라인 몇 명'(e{llhn헬렌)은 헬라종족을 의미하기보다는 비유대계 출신들을 지칭하며, 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로 보기도 하며(Robinson, euald, Semler), 반대로 헬라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로 보기도 한다(J.H.Bernard). '올라온'(ajnabainovntwn아나바이논톤)은 예루살렘에 습관적으로 여행하던 순례자들을 지칭하고 있다(Schaff). '예배하러'(proskunhvswsin프로스퀴네소신)는 이 본문에서 행해졌던 일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에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Neander).
21절이 '벳새다'(bhqsaida;벳사이다)는 '어부의 집'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바다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이는 이두래의 분봉왕 빌립에 의해(눅3:1) 건설되었다.
22절의 '안드레'는 빌립처럼 헬라식 이름을 가졌다. 인물 성격면에서 빌립이 신중하고 계산적이지 못한 반면, 안드레는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민첩하게 해결하는 자로 묘사된다(요7:8,J.H.Bernard).
2. 예수의 대응(23-29절)
23,24절에서 '때가 되었다'라는 의미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죽을 것을 말한다(Burney). 본 절에서처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공생애 사역의 때와 방법, 결과 등을 모두 아시고 계셨다(요7:6,8,308:20). '인자의 영광'이란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을 지닌 자로서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당하실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는 대속적 죽음을 당하실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는 대속적 죽음 후에 높힘받아 영광 얻으실 것과 연관한다(롬8:3빌2:11). '인자'란 기독교 이전에는 묵시론적이며 종말론적으로 하늘과 땅을 화합시키는 존재로 이해되었다(J.H.Bernard). 혹자는 24절의 내용이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글에서 인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시몬이 이르기를 '지속적으로 살아남은 나무일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죽게 된다'(Hippolytus). 그러나 마구스는 계속 이어서 마3:10을 인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는 요한과 동사적 유사성이 있으나 그 의미와 사상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J.H.Bernard).
25-27절의 '목숨'(yuchv프쉬케)은 네페쉬(vpb)처럼 감정과 욕망의 의식적인 기관(Organ)을 의미하지 프뉴마(pneu'ma)와 같은 신적인 의미는 없다는 주장(A.H.McNeile)과, 생명(life)과 영혼(soul)을 결합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C.K.Barrett)이 있다. 또한 프쉬케(yuchv)는 '생명'뿐만 아니라 '자의식'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Tholuck).
26절의 '나 있는 곳에'(o{pou eijmi ejgw;호푸 에이미 에고)란 '예수와 같이 걸어가는 길'을 의미하거나(Luthardt), 예수의 재림(Parousia)을 의미하거나(Meyer), 예수가 이 세상에서 당한 고통과 죽음의 상태를 벗어나서 종의 신분이 영광의 신분으로 된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Lange). '내가 이를 위하여'란 예수의 오신 목적이 대속적 사역임임을 보여 준다.
28절의 '하늘에서 소리가'란 단4:31에 처음 언급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똑똑히 하신 것처럼 믿게 하는 구절이 많이 있다(삼상3:4왕상19:13욥4:16).
그러나 랍비들은 신인동형 동성론적 표현을 잘 쓰지 않고 이를 '하늘로부터 소리'란 말로 묘사하기를 즐겨했다(에녹서 65:4;제2에드라서6:13,17'바룩의 묵시록 22:1, J.H.Bernard).
3. 예수의 죽음과 영광(30-36절)
30,31절에서 '이 소리'가 예수가 아닌 군중들을 위한 소리였다면 왜 그 군중들은 그 소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영적인 감지력이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거나(L.Morris), 이러한 예수의 표현은 당시 '셈족어의 비교 표현 양식'의 하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Tasker).
32,33절의 '들리면'(uJywqw'휩소도)은 예수가 '십자가에 높이 달리워짐'과 하늘의 높은 위치에 올리워짐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를 지칭하지만, 저자 요한은 두 가지의미를 항상 유념해 두고 글을 기록하였다(Tholuck, Alford, Lange).
33절은 복음서 저자들의 논평 및 해석이며, 이와 같은 이들의 해석은 요18:32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 요한은 이를 32절에서 휩소도(uJywqw')로 표현하고 있으며, 복음서 저자 모두 이를 '사람의 아들이 들리워짐'으로 보고 있다(J.H.Bernard).
34-36절에 나오는 '무리'(oJ o[clo"호 오클로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말했던 자들이며(Lange), '율법에서'는 아마도 시110:4와 사9:6을 지칭하는 것이 될 수 있으나, 시89:4이 가장 좋은 인용 구절일 것이다(W.C.Von Unnik). '너희 중에'(ejn uJmin엔 휘민)는 S, B, D, W, Latin 사본들이 지지하나, '너희와 함께'(meq j uJmw'n메드 휘몬)는 A 사본이 지지하고 있다(Bernard). '빛이 있을 동안에'에서 '동안에'(wJ"호스)라고 표기된 것도 있는데 일부 비평가들이 후자를 지지한다(Baumlein). 일부 해석학자들은 36b을 37-50절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려고 편집하기도 한다(R.Bultmann).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헬라인의 방문(20-23절)
20절에서 이 사건은 요한만의 기사로서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었지만, 요한은 이 사건을 예수의 구속 사역의 때가 도래한 신호로 이해하여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L.Morris).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은 일반적으로 비유대계 이방인들인데(Barrett, L.Morris), 이들은 디아스포라, 즉 이방 지역에 '흩어진 자들'로서의 유대인이 아닌 유대교 개종자들이거나(R.C.H.Lenski), 개종하지 않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여겨진다(행10:2,L.Morris). 헬라인의 방문은 온 세상의 대표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으로 보여지다(E.A.Blum, L.Morris).
한편 헬라인들이 빌립에게 먼저 찾아간 이유는, 그의 이름이 헬라식이며 갈릴리에서 그를 보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거나(A.T.Robertson), 헬라식이었기 때문이 아니라(L.Morris), 예수가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남자들의 뜰에 있었고 빌립이 이곳을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R.C.H.Lenski).
22절에서 빌립이 안드레(이 이름도 헬라식 이름이다)와 상의한 것은 평소 그의 모습에서 보듯이(요1:43,446:7;막3:18) 판단력의 부족함 때문으로 여겨지는데(L.Morris), 안드레는 위기를 잘 극복하는 지혜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23절에서 예수는 이방인들의 등장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도래한 시점으로 인식하셨다(E.A.Blum). 왜냐하면 자신의 사역이 곧 헬라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죽음이기 때문이다(L.Morris). 이는 예수가 그들의 등장을 분명한 '하나님의 때의 도래'로 인식하셨음을 보여 주다. 한편 '영광'은 그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Barrett, L.Morris, E.A.Blum). 또한 예수께서 대속적 죽음 후 부활 승천하시어 얻으실 영광을 함축하는 것으로도 연결할 수 있다(롬8:17,34빌2:1히2:9).
2. 한 알의 밀알 비유(24-26절)
24절의 밀알 비유는 아멘 화법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영광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그 죽음을 한 알의 밀알의 죽음으로 비유한다(R.C.H.Lenski).
25,26절에서 예수는 생명 보존의 역설적인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이는 자신의 '한 알의 밀알'적인 죽음을 제자들에게도 적용시키시는 것이다(E.A.Blum). 한편 26절에서는 '나'(ejgwv에고)라는 1인칭 대명사가 여섯 번이나 사용되어 예수 자신을 강조하고 있다.
3. 예수의 죽음 예고(27-36절)
27절의 '민망하다'(taravssw티라쏘)는 '당황하다, 동요하다'의 의미로서(E.A.Blum), 예수의 마음 상태를 극명하게 표현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인성을 발견한다(R.C.H.Lenski).
28,29절에서 예수는 사역의 마지막 시점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모습이 잦아졌다(요12:2313:31,32;14:13;15:8;17:1,4;21:19, E.A.Barrett),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L.Morris)을 발견한다.
랍비들은 이 하늘의 음성을 '그 음성의 딸'(lqtk바트콜, 메아리)로 보지만 신약에서는 이를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명히 언급한다(L.Morris, C.K.Barrett). 신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린 경우는 수세 때(마3:17)와 변화산 사건(마17:5)과 본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린 경우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권위를 입증하고 동시에 예수의 사역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미 영광스럽게 하셨고, 영광스럽게 하시리라'는 예수의 지나온 모든 삶과 사역을 통해 이미 영광을 받았으며(요11:40), 또한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과 들리우심으로 영광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Barrett, R.C.H.Lenski).
30절에서 예수는 이미 죽음의 결심을 굳혔으며 또한 하나님과의 긴밀한 영적 소통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음성이 필요없다(L.Morris).
31-33절의 '이 세상의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가 세상을 비추신 결과이며 또한 그를 죽임으로 인해 주어지는 결과이다(Barrett). 따라서 '쫓겨나는 이 세상 임금'을 십자가로 인해 패배하는 사단을 나타낸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들리워지고 또한 그의 부활 승천으로 들리워짐으로 어둠과 사망의 권세 아래 매여 있던 사람들의 결박을 풀어(히2:14) 빛과 생명으로 모아들이신다(Barrett, 김세윤, L.Morris). '모든 사람'은 문자적인 만인구원이 아니라 유대인 외에도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의미이다(Barrett). 즉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E.A.Blum, R.C.H.Lenski).
34절의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무리의 주장은 삼하7:12-16시89:36110:4;사9:7단7:14에녹서 49:1;솔로몬의 시 17:4등에서 발견된다(Barrett, L.Morris). 35,36절은 34절의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이다. 빛에 거하는 자만이 인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R.C.H.Lenski). '빛을 믿으라'라는 말은 메시야에 대한 지식적 한계를 넘어서 신앙에 이르러야만 한다는 의미이다(L.Morris). 또한 '빛의 아들'은 예수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롬13:12엡5:8골1:13,14살전5:5요일1:7,E.A.Blum). 요한은 복음서 서두에 예수의 빛되심을 언급했다(요1:4,5,9).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시고 자신을 숨기신 것은 빛으로서의 자신의 공적 사역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는 것과 매우 잘 어울린다(Barrett).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요한복음의 메시야 비밀
요한복음을 언뜻 보기에는 메시야적인 비밀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처음부터 예수를 메시야라 하고, 예수 스스로가 자기의 메시야 됨을,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음을 공공연히 천명한다. 그래서 비밀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 아주 공공연히 자기의 메시야 됨. 하나님의 아들됨, 그것도 선재한 아들됨을 말한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면 아주 요한복음적인 메시야 비밀이 있다. 예수는 요한복음에 메시야로 제시되지만 그의 메시야 성은 그것을 빌지 않는 자들에게는 계속 감추어져 있다. 오로지 그것을 보는 자에게만 혹은 믿는 자에게만 계시된다.
1. 구약의 약속 성취자로서의 메시야라는 의미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은 첫째, 그 안에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기다리던 바로 그 구속자임을 암시한다.
이런 것은 메시야란 말의 신약성경의 전반적인 쓰임새와 일치한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에 하나님의 구원약속의 성취자라고 하는 것이 '메시야'란 말이다. 그의 구원 약속을 성취하여 '구원을 이루신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1:46에 빌립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쓰신 이'라고 증거한다. 즉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들에 예언된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2.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메시야라는 의미
요12:13에 '오실 이, 오시기로 되어있는 이'라고 되어 있는 데 예수의 메시야 됨에 있어서 중요한 생각 하나는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진정한 의미로 더 본질적이고, 더 깊은 의미로 이스라엘의 왕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보는가? 바로 나다나엘 같은 자가 본다. 야곱, 이스라엘의 육신적인 통로가 아닌 예수의 계시를 보고 깨달아서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창조된 자들만이 그의 이스라엘의 왕 되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가 되심을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가 되심을 깨닫게 된다. 요12:13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왕으로 입성한다. 또 빌라도의 재판 때도 그의 왕 되심이 죄목이 된다. 그러나 그의 왕 되심은 정치적 왕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바로 생명력 있는 그 나라의 왕이신 것이다.
종교에서 천사(天使)의 개념과 역할(12:20-36)
◈ 세계배경 문화사 ◈
천사(天使)라는 한자어의 의미는 하늘에서 보낸 사신이라는 말이다. 보통 서양에서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 다니는 모습으로 그려졌고, 동양에서는 구름을 타고 다니거나 상상의 동물을 대신 등장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만물을 창조하고 세상을 주관하는 절대자와 그 피조물인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천사이기 때문이다.
근동 / 이집트 : 당대 이집트에서는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 여러 동물을 숭배하였으며, 결국에는 신전에서 사육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태양, 대지, 물의 신의 상징이었던 악어, 환희, 사랑의 여신을 대표하는 고양이, 문자 발명과 사후 세계를 대표하는 토트신인 아누비스의 상징인 자칼등 하늘과 인간의 매개 역할을 하는 동물을 숭배한 것이 이집트의 전통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렇게 독특한 특징을 가진 동물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과정에서 신과 좀더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신성한 동물이 죽게 되면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할 정도로 인간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서양 / 로마 :당대 로마인들은 신의 은총에 대한 보답을 중요시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신들은 그리스 신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자연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농장, 나무, 바위, 화롯불 등을 수호하는 신들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특히 독특한 힘을 가진 동물, 식물을 신과 연결시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올빼미나 꿀벌의 경우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의 심부름꾼으로 여겨졌다. 독수리는 로마제국의 문장(文章)으로서 번개와 뇌우를 가져오는 신성한 새로 인식되었다.
동양 / 중국 : 당시 중국에서는 용(龍)과 같은 상서로운 동물을 섬기면서 하늘과 인간의 매개역할을 하게 하였다. 중국인들은 용에 대해서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로 치솟을 수 있고, 아래고 들어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으로 잠길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용이란 바로 천상의 신이 지상에 내려오면서 용의 현상으로 변화했다는 것에 근거한다.
한국 : 우리나라에서도 용에 대한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용왕(龍王)이라든가, 용궁(龍宮) 등의 용어를 통해 용이 얼마나 일상 생활을 지배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삼국사기」에 신라시대 '사해제'라든가 '사독제'라는 용신제가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용오름'이라는 바닷물이 하늘로 오르는 자연 현상을 용이 하늘로 올라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생명의 연속인 문자 그대로의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생겨난 불로불사를 얻어 초인적 능력을 지니고 속세를 초월하는 선인(仙人)의 개념은 또 하나의 천사 관념의 일종이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자, 여호와의 사자, 천사로 불리고 있는 천상의 존재가 빈번히 등장하며, 때로는 천군으로도 불린다. 그 수는 무궁무진한 것으로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 피조물인 것이다. 그 역할은 히1:14에 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자라고 했다. 천사들은 하나님이 보좌를 지키고 그 명령을 전달, 수행한다. 때로는 타락한 천사의 무리인 사단과 귀신들이 싸우기도 한다(단8:10).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천사들은 성도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주로 하는 것으로 증거된다(행12:6-10). 그리스도의 증언에 의하면 성도 각 사람 곁에는 항상 수호 천사가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마18:10). 따라서 하늘의 선한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어두움에 붙잡힌 자들(12:20-36)
뿌리가 거룩해야 가지도 거룩하다는 것은 영구 불변의 진리이다. 인생에 있어서 기초와 바탕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므로 좋은 기초 위에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세우도록 힘써야 실패하는 일이 없게 된다. 유대인들은 어두움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셨다.
1. 어두움의 정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상태를 '어두움'(@;호쉐크)으로 표현한다. 어두움은 무질서와 부조화의 상징이다. 이 세상이 어두움으로 묘사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렸으므로 정상적인 질서와 조화가 깨어졌음을 나타낸다. 어두움은 파괴적인 능력이어서 이에 붙잡힌 자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무질서 속으로 빠져든다. 예수를 끊임없이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그 전형이다.
2. 어두움의 권세
어두움은 세상에서 그 세력을 떨친다. 어두움의 세력을 잡은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마구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많은 사람을 자신의 영향력을 아래 굴복시키고자 하고 있다. 그의 전술은 다양하므로 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유대 경건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건이라는 미명 아래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엄청난 우를 범하게 되기가 쉽다.
3. 어두움의 해악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두움에 붙잡힌 자들의 특징이다. 옳고 그름, 겉과 속, 하나님의 뜻과 마귀의 유혹 등을 분별할 만한 지혜를 이미 상실했으므로 어두움의 괴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는 사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는 것이며,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아무 것도 기대하기가 어렵다. 어두움은 인생에 있어서 희망적인 요소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고자 힘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빛의 아들(12:20-36)
빛을 주신다는 주의 약속은 인생들이 어두움에 처하여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미 빛 가운데 거한다면 이같은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주의 빛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뿐인데, 즉 빛이신 예수를 믿는 것이며, 이들의 삶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
1. 양심적인 생활
양심이란 사람 속에 두신 여호와의 등불과도 같아서 숨겨진 동기들을 드러내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빛의 아들들만이 양심의 명령에 따르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쓰는 것이다. 양심은 칸트(Kant)가 지적했듯이 인간 내면에 있는 법정과도 같아서 이를 거역하는 사람들은 불의를 선택하는 것이 된다. 청결한 양심을 따라서 진실되게 살아야 빛의 아들이다.
2. 말씀의 규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활을 재는 잣대를 가지게 마련이며, 이 잣대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가 가름된다. 빛의 아들들이 가진 유일한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은 보편적인 잣대, 세속적인 잣대를 거부하고 주의 말씀을 유일한 규범으로 삼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틀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훌륭하고 위대하게 만드는 하나뿐이 규범이기에 이를 좇는 자들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3. 생활의 변화
기독교를 가리켜서 변화의 종교라고 말한다. 어두움에 속했던 자가 빛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그 사상과 생활에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들이 이제는 무가치하게 되고, 전에 크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 형편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이타주의자가 되고, 남에게 해를 끼치던 사람이 봉사와 친절을 베푼다. 이러한 생활의 변화야말로 사회를 개혁하는 놀라운 힘이 된다.
유대인들의 불신(요12:37-43)
◈ 원문강해 ◈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약 예언의 성취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해 왔고,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메시야가 오셨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것은 구약 예언들의 성취와 사람들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눈뜬 소경과도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진리의 선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 예언의 성취(37,38절)
1) 사람들의 불신
(Tosau'ta de; aujtou' shmei'a pepoihkovto" e[mprosqen aujtw'n oujk ejpivsteuon eij" aujtovn토사우타 데 아우쿠 세메이아페포이에코토소 엠프로스덴 아우톤 우쿠 에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ALE지 아니하니, 37절)
데(de;그러나는 '행하셨다(pepoihkovto"페포이에코토스)'와 연결하여 '행하셨으나'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단어가 앞부분에서 접속사로 사용될 경우에는 강한 반전을 나타내어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를 가지게 한다. 페포이에코토스(pepoihkovto"행하셨)는 현재 완료 시제로서, 이미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으며 그 사실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보여 준다(A.H.Chase). 또한 엠프로스덴(e[mprosqen앞에서)은 시ㆍ공간적인 '미리 앞섬'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선 공간적인 의미로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라는 의미이다(W.Bauer). '믿지'(ejpivsteuon에피스튜온)는 미완료 과거로서 그들이 끈질기게 믿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본문은 사람들의 완악함을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표적을 줄기차게 요구했었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은 이후에 그들은 예수를 열렬히 환영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토록 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을 예수께서 그들의 눈 앞에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2) 구약의 이루어짐
(i{na oJ lovgo" jHsai?ou tou' profhvtou plhrwqh히나 호 로스 에사이우 투 프로페투 플레로데;이는 선지사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38a절)
프로페투(profhvtou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거나 해석해 주는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선견자라고도 불리웠다(삼상9:9,11,18,19삼하24:11). 그들은 미래에 있을 일을 예언하거나 당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고,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었다(L.Morris). 플레로데(plhrwqh이루려)는 '가득 채우다'에서 비롯되어 '충만히 이루다'의 의미를 지니며,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이루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낸다(Liddle & Scott).
하나님께선 자신의 백성들을 통해 구세주 메시야에 대한 계시를 전구약을 통해 끊임없이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며 아울러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3) 예언의 내용
(Kuvrie, tiv" ejpivsteusen th'/ ajkoh'/ hJmw'n_ kai; oJ bracivwn kurivou tivni ajpekaluvfqh퀴리에 티스 에피스튜센 테 아코에 헤몬카이 호 브라키온 퀴리우 티니 아페칼뤼프데;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38b절)
퀴리에(Kuvrie주여)는 '여호와'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성 문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브라키온(bracivwn팔)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상징할 때 사용되었다(신7:99:29;왕상8:42왕하17:36,J.H.Bernard). 아페칼뤼프데(ajpekaluvfqh나타났나이까)는 '숨겨진 그 무언가를 드러내다'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누구에게 보여 주셨습니까? 라는 뜻으로 사53:1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비단 예수그리스도때뿐 아니라,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예수께서 전하는 바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눈앞에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들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예언자는 "그렇게 많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이 이토록 믿지 않으니 하나님께선 도대체 누구 앞에서 당신의 권능을 행하신 것입니까?"라고 한탄하며 예언하고 있다.
2. 믿지 못한 까닭(39-41절)
1) 능히 믿지 못함
(dia; tou'to oujk hjduvnanto pisteuvein, o{ti pavlin ei\pen jHsai?a",디아 투토 우크 에뒤난토 피스튜에인 호티 팔린 에이펜 에사이아스;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39절)
에뒤난토(hjduvnanto능히)는 믿음이 단순한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능력의 차원임을 보여 준다. 이 단어를 통해 본문을 '믿을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은'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A.Plummer). 팔린( pavlin 다시)은 본문과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구약의 인용이 연계된 내용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이다. 디아 투토(dia; tou'to이 까닭이니)는 뒤에 나오는 호티(o{ti곧)와 연결되어서, 호티(o{ti) 절 이하의 내용이 구체적인 이유가 된다(H.W.Smyth).
이사야의 예언은 사람들이 믿지 못할 것임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들이 왜 믿지 못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다음 절에서 다시 인용되고 있다.
2)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결과
(Tetuvflwken aujtw'n tou;" ojfqalmou;" kai; ejpwvrwsen aujtw'n th;n kardivan...kai; nohvswsin th'/ kardiva/ kai; strafw'sin, kai; ijavsomai aujtouv".테튀플로켄 아우톤 투스 옵달무스 카이 에포로센 아우톤 텐 카르디안…카이 스트라포신 카이 이아소마이 우투스;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40절)
본문은 사6:9,10의 개작된 인용이다. 이 인용은 오해의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불신이 하나님의 책임인 듯한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테튀플로켄(Tetuvflwken멀게 하시고)은 현재 완료 형태로서 이미 눈이 멀어 버려 현재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상태임을 묘사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아예 볼 수 없도록 만드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목전에서 당신의 능력을 행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는 것조차 거부하고 보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하였다. 때문에, 하나님께선 그들의 눈을 감긴 채로 그냥 놔두셨고, 그들의 닫힌 마음을 닫힌 그대로 있게끔 만드신 것이었다.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을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들의 고집스런 악함을 그들의 소원대로 내버려두신 것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이렇게 기록한 이유
(tau'ta ei\pen jHsai?a", o{ti ei\den th;n dovxan aujtou', kai; ejlavlhsen peri; aujtou'.타우타 에이펜 에사이아스 호티 에이덴 텐 독산 아우투 카이 엘랄레센 페리 아우투;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1절)
독산 아우투(dovxan aujtou주의 영광)에서 사용된 '주'란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뜻한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다가 '그의'라는 뜻인 아우투(aujtou)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앞으로 장차 태어나실 하나님의 영광을 지칭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사역 등 많은 부분에 대해 예언하였다(사7:149:6;11:1-5;40:34;42:1-4;53:1-12).
이사야는 우리가 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누가 믿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팔이 뉘게 나타났는가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의 영광'을 곧이어 연장시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들을 통해서 놀랍게도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창세 이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으며, 성부의 말씀과 더불어 구약 시대에도 찬연히 빛나고 있었음을 본문은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3.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들(42,43절)
1) 관원 중에서 믿는 자
(o{mw" mevntoi kai; ejk tw'n ajrcovntwn polloi; ejpivsteusan eij" aujtovn호모스 멘 토이 카이 에크 톤 아르콘톤 폴로이 에피스튜산 에이스 아우톤;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42a절)
아르콘톤(ajrcovntwn관원)은 '힘고 권력을 가진 지배 계층'을 뜻한다(Liddle & Scott). 또한 본문에서 적절히 번역되지 못한 카이(kai)는 '∼조차도'의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관원들 중에서조차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지배 계층이 아닌 피지배 계층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래도 꽤 존재하고 있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요3:1막15:43).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동시에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으며, 많은 믿는 사람들을 획득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해 나가기 시작했다.
2) 그들의 두려움
(ajlla; dia; tou;" Farisaivou" oujc wJmolovgoun i{na mh; ajposunavgwgoi gevnwntai:알라 디아 투스 파리사이우스 우크 호몰로군 히나 메 아포쉬나고고이 게논타이;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2b절)
본문에서 알라(ajlla그러나)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이 의미를 살린다면, '관원들조차도 많이 믿긴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라고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W.Bauer). 호몰로군(wJmolovgoun드러나게 말하지)은 '자백하다, 고백하다'의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미완료 과거시제이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조와 믿음을 증언한다는 뜻이다(W.Bauer). 이는 부정사 우크(oujc)와 함께 그들이 지속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상태로 지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였고, 하늘나라에서 내침당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유대인 집단에서 쫓겨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단순히 신앙 고백뿐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가장 부끄러운 신앙의 모습이었다(Westcott).
3)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영광
(hjgavphsan ga;r th;n dovxan tw'n ajnqrwvpwn ma'llon h[per th;n dovxan tou' qeou'.에가페산 가르 텐 독산 톤 안드로폰 말론 에페르텐 독산 투 데우;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3절)
본문 서두의 가르(ga;r)는 '왜냐하면'의 뜻으로서 앞 구절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였기 때문이다'가 올바른 의역일 것이다. 톤 안드로폰(tw'n ajnqrwvpwn사람의 영광)은 문자적으로는 '사람들의 영광'이며, 좀더 넓게 보면 '사람들로부터 얻게 되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광'은 '사람들이 주는 영광'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H.W.Smyth). 본문은 독산 투 데우(dovxan tou' qeou하나님의 영광)와 '사람의 영광'을 직접 비교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귀에 들리지 않는 것보다는 귀에 들리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 것에 더 글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하고 사람의 영광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죄악된 인생들이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이사야의 예언(37-40절)
37절의 '많은 표적'(tosam'ta shmei'a토사우타 세메이아)에서 토사우타(tosam'ta)는 '이렇게 위대한'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비록 요한은 요한복음에 기록하지 않은 많은 표적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백성들은 예수를 용납하지 않았다(J.H.Bernard, Meyer, Alford, tholuck). 그러나 다른 비평가들은 토사우타(tosam'ta)를 '큰, 위대한'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Lucke, De Wette). 또한 이 말은 수량과 질적인 양면을 동시에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Schaff).
38절의 '주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①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이다(Meyer). ② 복음 전도자의 탄식 소리이거나 전도자의 동일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한탄하는 소리이다(Luthardt). 요한은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의도되었던 것이었음을 밝히고자 했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자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진입할 수가 없었다(C.K.Barrett, A.H.McNeile). 특히 38절은 사53:1을 인용한 내용으로서 인간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끄신 자들이라는 점과 예언자들이 예언한 사실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F.L.Godet).
39,40절에서 디아 투토(dia tou'to이 까닭이니)는 요한복음의 호티(o{ti 때문에) 구문에서 설명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가 한 예언의 말씀 때문에 그 예언대로 믿을 수 없었으며 신적인 선지식 현실 속에 드러내게 되었다(J.Bernard). '주의 팔'이란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의 능력을 암시한다(신5:15사40:1051:9).
40절은 사6:10에서 인용해 온 내용이다. 요한이 인용한 이 내용은 히브리 성경과 70인역과 다르지만 그는 70인역보다는 히브리어 성경에 가깝게 번역하여 인용하였다(C.K.Barrett). 70인역(LXX)은 '하나님의 대행자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마음이 완고하였다'라는 히브리어성경의 내용을 수동태 형태로 바꾸었으며, 요한은 히브리어성경에 가깝게 인용했다. 요한이 아람어 성경을 가지고 직접 번역하여 여기에 인용했다는 주장도 있다(Burney).
2. 이사야 예언에 대한 해석과 믿는 자들(41-43절)
41절의 호티(o[ti)는 접속사로서 '∼하는 것으로'이며, P66, P75, a, B, sah 등의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다(Weiss, Keil, Tischendorf). 그런데 이 접속사 대신에 호테(o[te)라는 부사가 사용된 사본들(D, W, it, vg, sin, pesh)도 있으며, 이 뜻은 '∼할 때'이다(C.K.Barrett). 사6장에 묘사된 '신의 현현'이라는 내용은 '주의 영광'으로 표기되었고, 저자 요한은 '하나님 보좌'라는 표현을 근거로 모든 구약성경이 신약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고 판단하다(A.T.Hanson, Philo). 이사야가 '주를 보았다'라고 한 진술은 탈굼에서 특징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주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기술되고 있다. 이사야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경외스러운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으나, 저자 요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여호와의 그리스도를 동질화시켰다(J.H.Bernard). 후기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로고스(Logos)는 구약의 신의 현현의 이행자(Agent)로 보았으며, 요한은 탈굼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본 이사야를 소개한 내용에 대해서 익숙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A.H.McNeile).
42절 서두에 호모스 멘토이(o{mw" mevntoi)는 한글 개역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등장하고 있다. 특히 이 말의 의미는 '비록 참으로'이며, 이 표현은 41절 문장을 제한시키거나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Lange). '관원들 중'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을 것이다(Meyer). 또한 요한이 '믿는 자'들의 믿음의 정도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믿음으로 구분할 때, 본문의 믿는 자들은 넓은 의미의 믿음 정도를 말했을 것이다(Lange).
43절은 요한복음을 크게 단락으로 구분할 때 네 번째 단락의 끝부분에 속하며(R.Bultmann), 버나드(J.H.Bernard)의 구분법에 의해 그 단락 마지막 절에 속한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예언 성취로서의 불신앙(37-41절)
37절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고(마12:38), 예수는 수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으나 저들은 결국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의 불신앙마저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언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유대인의 불신앙의 궁극적인 이유를 설명한다(L.Morris).
38절에서 요한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예언의 성취로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사건으로 설명한다(L.Morris). 본 절은 사53:1의 인용으로서 70인역(LXX)을 따른 것이다(R.C.H.Lenski, C.H.Barrett). 이는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일부로서(E.A.Blum), 예수의 교훈(들은 바)과 표적들(주의 팔)이 거부될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질문이다(Barrett).
39,40절은 사6:9,10의 인용으로서, 유대인에게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믿을 능력이 없었음을 예정론적으로 설명한다(L.Morris).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유대인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은 자유로운 도덕적 선택에 대한 책임으로 나타나는 결과로서 성취되기 때문이다(Barrett). 그러므로 유대인의 불신앙은 결국 자신들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4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은 그가 보았던 환상(사6:1-5)에 근거한다. 그 환상은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 영광을 예수의 영광으로 해석한다(L.Morris). 즉 이사야가 본 환상이 곧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의 영광이다(R.C.H.Lenski). 이 사실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여호와의 영광이 곧 예수의 영광이라는 것은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E.A.Blum). 요한은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반복하고 있다(요1:1,1810:30). 요한은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의 인격과 행위와 교훈 속에서 직접 보고,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R.C.H.Lenski).
2. 우유부단한 신앙(42,43절)
42절에서 예수를 믿는 관원들 중의 대표적 인물들은 아리마대 요셉(눅24:50)과 니고데모(요3:1)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믿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비록 비굴하고 허약한 믿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하더라도, 다른 면으로는 예수의 사역의 놀라운 효과(L.Morris, R.C.H.Lenski)와 그를 따르는 자가 있다는 면에서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Barrett, E.A.Blum). 요한은 저들의 믿음이 실제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동사의 시제를 부정과거로 사용하였다(R.C.H.Lenski). 한편 그들은 유대 공동체로부터의 출회를 두려워하여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였는데, 여기서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였는데, 여기서 그들의 신앙과 두려움을 역접으로 연결해 주는 호모스 멘토이(o{mw" mevntoi)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관용구는 신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유일한 형태로서(R.C.H.Lenski)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의 매우 강한 역접어이다(L.Morris). 유대인의 출교는 크게 나누면, 임시 출교와 영구 출교로 구분되는데, 세분하면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베지타(htyzk)는 가벼운 경고로서 비공식적인 징계와 조치이다. 둘째, 니두이(ywrn)는 공식적인 징계와 출회의 첫 단계로서 30일동안 공동체 내의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당한다. 만약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30일을 추가로 연장할 수 있다. 셋째, 헤렘(!rh)은 학교의 무기 정학에 해당하는 중징계로서 공동체 내에서 무기한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넷째, 샤마타(htmv)는 영구 출교를 의미한다. 관원들이 이 출회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시 사회의 독특함 때문이다. 당대의 유대 사회는 공동체에서 출회되면 사회의 모든 기득권과 법적인 보호를 상실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언약의 백성의 자격마저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출교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43절에서 요한은 그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행위'라고 선포한다. 그들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어두움에 속한 자들의 모습이며,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저주의 행위에 도움을 준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의 무죄에 대하여 변론했어야 할 그때에 그들이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C.H.Lendski).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범죄의 유형
1. 종교적 범죄
여러 다른 신들과 유상을 따르는 것만큼 나라의 멸망에 잠재적 요소가 된 관습은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역적 타락의 무시무시한 결과로 점철되어있다. 우상 숭배는 나라가 존재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출20:3-5).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 주변의 우상 숭배자들과 그들의 인간적 연약함 때문에 번번히 이방인들의 관습과 그들의 예배를 연합시켰다.
2. 위법적 범죄
어떤 법들은 개인의 육체적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대인의 법은 다른 여러 사회의 법들도다 광범위한 제재와 규약을 갖고 있었다. 범죄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외에 육체적인 상해를 줄 수는 없었다. 폭행하여 상대편이 다치는 그 결과에 따라 배상해야 하며(출21:18,19) 사고를 입은 상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 법들은 노예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만일 주인이 노예에게 육체적 상해를 입혔다면 그는 책임을 져야 했다(출21:26,27). 부모를 구타한 자는 사형(출24:15)이었고 강간은 발각되면 돌로 쳐죽였고, 유죄로 판명되면 남자는 50세 겔을 여자의 아비에게 지불하거나 그 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3. 물질적 범죄
유대인들은 부를 가치 높게 보았으며 범죄에 대한 형벌로서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소 한 마리를 훔치거나 양을 죽이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다. 그들의 보상제도는 감옥을 필요없게 만들었다. 한 마리의 양을 훔친 건에 대한 형벌은 네 마리의 양으로, 소한 마리를 취했다면 다섯 마리의 소로 보상해야 했다(출22:1). 보상할 능력이 없으면 노예가 되었고, 도둑의 생명은 보호받았다.
4. 윤리ㆍ도덕적 범죄
거짓말, 사기, 탐욕, 성적 부정 또는 성적 도착에 과한 어떠한 범죄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FP위기는 엄격히 금지된 성적 관계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제공해 주고 있다. 결론에 성관계뿐 아니라 동물과의 성교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그것을 비난하고 잇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규칙을 어겼다면 그는 주민들로부터 제거당했다(레18:1-29).
관원(官員)의 역할(12:37-43)
◈ 세계배경 문화사 ◈
관원(官員)이란 보통 관리라는 말로 쓰인다. 관리는 왕을 섬기고 벼슬하는 사람으로, 왕에게 항상 절대 복종하며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밑으로는 왕의 명령을 실무 행정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즉 관리란 왕과 일반 백성들 중간에 위치한 계층으로 한 국가의 실무 행정을 맡아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근동 / 이집트 : 이집트에서 왕은 신(神)으로서 지상(至上)에 존재하였다. 그 외에 모든 이집트인은 왕의 종복이었다. 왕의 정치를 돕는 귀족이나, 국토에 곡식이 익도록 운하(運河)나 도량을 파는 민중도 종복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 귀족은 두뇌를, 농민은 근육을 사용하여 신(神)인 왕에게 봉사하였다. 이집트의 행정(行政), 신전(神殿), 군사(軍事)에 관여하는 관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재상(宰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재상은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었으나, 권력을 이용한 수탈이나 횡포 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파라오인 왕의 대변자로서 공평하고 정당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 / 로마 :이민족 및 이탈리아 내의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해야 할 입장에 있던 로마로서는 평민들의 협조가 절대 필요하였다.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평민회(Concilium Plebis)를 설치하고 2명의호민관(護民官;tribunus)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호민관의 수는 그 후 4명으로 증가하여 결국에는 10명이 되었다. 호민관의 신분은 절대 보장되었으며, 만일 호민관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호민관은 행정관들이 어떠한 행위이든지 금지시킬수 있는 거부권(veto)을 갖고 있었고, 행정적 기능이 없는 평민을 옹호하는 평민 권익옹호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민회는 호민관을 선출 할 뿐 아니라 평민 전체에 관한 사항에 대해 입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 / 한국 : 부여에는 옹 아래에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 加), 구가(狗加), 대사(大使), 대사자 등의 직책이 있었다. 이 중 가(加)들은 사출도라고 불린 부여의 각 지방을 다스렸다. 또 그 밑에 읍락에는 호민(豪民)이라고 하는 부유한 계층이 있어 일반 농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사(大使)는 왕 직속하에 있으면서 실무 행정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가(加)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에는 일찍부터 관직 체계가 정비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관직으로 대로, 상가(相加), 고추가, 주박, 우태, 승( ), 사자(使者), 조의, 선인(先人) 등이 있었다. 대로, 주박, 우태, 승 등은 왕권의 직속하에 있으면서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그 나머지 관직들은 소국(小國)의 지배자들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의 관원은 고급 관리들을 의미한다. 궁정의 신하와 환관들, 지방의 행정 수뇌들, 결비대의 지휘자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신약 시대에 대표적인 관원은 산헤드린 종교 회의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종교적 재판권과 치안 유지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 이해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대적하는 역할도 했다.
성경은 이 세상의 관원들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보여 준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그들의 권위와 역할은 종국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다(롬13:1-7). 성도의 사회적인 윤리 생활의 감독을 관원들이 대행한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이다. 부정적인 면은 불신 인본주의에 젖어 있는 관원들을 적그리스도의 하수인들로 보는 것이다(고전2:6-8). 세상의 정치, 종교의 실권을 지닌 성도들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사자(使者)라는 자세로 선하고 의로운 관원이 되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은둔의 신앙인들(12:37-43)
사람들 중에는 환경에 따라 자신의 정체와 신분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은폐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본문 42,43절에는 유대 고위층 중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출교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신앙을 비밀에 붙힌 사실을 말해 준다. 오늘도 이와 같은 은둔 신앙인들이 많다.
1. 봉사하기 싫어함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면 그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기에 감추는 이들이 있다. 즉 사랑과 인내의 모습을 지녀야 함을 그들은 알고 있으며 그와 같은 생활에는 봉사와 희생이 따르기에 신앙인임을 밝히기 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나도 그를 사랑'(요14:21) 하시겠다고 하셨음을 유념하자.
2. 고난에 동참하기 싫어함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때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 한 가지로도 재산과 생명을 박탈당하는 예가 많았다. 즉 기독교를 박해하는 환경과 시대는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본문의 유대 고관들이 소외당한다는 것은 자명했다. 그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신앙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자신에게 닥칠 고난과 손해와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신앙인의 신분을 감추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3. 세상 영광을 사랑함
결국 '저희는 사랑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43절)하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지적한다. '제자는 비밀주의를 부정하고, 비밀주의는 제자라는 사시를 부인한다'고 바클레이는 말한다. 주님은 분명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3)고 하셨다. 익명과 은둔과 비밀한 신앙 생활은 결국 불신앙에 가깝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표적과 불신앙(12:37-43)
어떤 현상이나 사건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때로는 삶의 가치와 지혜를 얻게 해준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곧 무관심과 망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적인 표적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 행하였으나 저를 믿지 않았다'고 했다(37절). 과연 표적과 신앙의 관계는?
1. 표적과 회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나'(40절)라고 했다. 종교적인 표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한 회개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일시적인 경각심, 경외심은 줄지 모르나 그 사랑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적인 죄성을 깊이 깨닫게 하고 회개케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성령과 말씀만이 할 수 있다.
2. 표적과 신앙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 아무리 놀라운 종교적인 표적을 경험했을지라도 그리스도와 성경 말씀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가치, 영적 진리의 가치에 동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신앙에 이르지 못한다. 천국의 원리와 전리에 순종하는 자세,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말초적이며 사행적인 욕구로 표적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다. 표적은 '진리의 포장지'이다. 그 표적이 담고 있는 진리와 교훈의 의미를 외면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3. 표적의 심판적인 의미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요15:24),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리라'(요15:22)고 하셨다.
기독교의 가장 큰 표적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그 자체시다. 그를 알고 보고도 믿지 않는 자에게 그리스도는 영원한 심판의 증표가 되실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요12:44-50)
◈ 원문강해 ◈
예수그리스도의 강생 목적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세상에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까닭은 그 말씀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함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겐 그 말씀이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다.
1. 빛으로 오신 예수(44-46절)
우리는 예수의 음성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빛으로 오신 것이다.
1) 예수 믿는 것의 이중적 의미
( JO pisteuvwn eij" ejme; ouj pisteuvei eij" ejme;, ajlla; eij" to;n pevmyantav me,호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우 피스튜에이 에이스 에메 알라 에이스 톤 펨포산타 메;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4절)
피스튜온(pisteuvwn믿는)은 현재 분사 형태로서 정관사와 결합하여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피스튜온(pisteuvwn)이 보여 주는 시제가 현재이고 마찬가지로 뒤에 나오는 피스튜에이(pisteuvwn믿는)도 현재형이므로 본문은 계속적으로 믿는다는 믿음의 현재성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본문은 '나를 믿고 있는 사람은…나를 보내신 이를 믿고 있는 것이며'가 된다.
예수께서 본문처럼 말씀하신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첫째는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강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믿고자 하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선 자신을 믿어야 함을 역설하시기 위함이다. 다른 그 어떤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으며, 하나님을 섬길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도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하나님을 믿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2) 예수를 보는 것의 이중적 의미
(kai; oJ qewrw'n ejme; qewrei' to;n pevmyantav me.카이호 데로론 에메 데오레이 톤 펨프산타 메;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5절)
데오론(qewrw'n보는)은 현재 진행 형태로 위와 마찬가지의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본문도 44절과 마찬가지로 현재형만을 사용하여 '지금 보고 있다'는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사용된 데오레이(qewrw'n보는)는 육적인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J.H.Bernard). 그러므로 이 단어는 성부에 대한 깊은 지식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속적인 묵상을 통해 획득됨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Vincent).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감겨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자들, 즉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예수는 본문을 통해 외친다.
3) 빛으로 오신 예수
(ejgw; fw'" eij" to;n kovsmon ejlhvluqa, i{na pa'" oJ pisteuvwn eij" ejme; ejn th'/ skotiva/ mh; meivnh/.에고 포스 에이스 톤 코스몬 엘렐뤼다 히나 파스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엔 테 스코티아메 메이네;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6절)
예수께선 위의 두 구절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일체성을 강조하신 후에, '왔나니'(ejlhvluqa엘렐뤼다)가 주어를 함축하는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에고(ejgw;나는)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믿는 자들'에는 파스(pa'"모든)라는 단어가 원문에 들어있으므로 '모든 믿는 자들'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며, 또한 개역성경에서 '세상에'로 번역한 부분의 전치사가 에이스(eij"안으로)로 되어 있으므로 '세상 안으로(어둠 안으로)'가 보다 더 정확한 번역이다.
예수께선 자신을 언제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자신의 사역을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이 죄악된 세상과 죄로 물든 인간의 심성을 온전히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빛되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뿐이다.
2. 예수가 오신 진정한 이유(47,48절)
예수는 심판을 선포하려 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 구원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심판의 말씀이 될 것이다.
1)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kai; ejavn tiv" mou ajkouvsh/ tw'n rJhmavtwn kai; mh; fulavxh/, ejgw; ouj krivnw aujtovn카이 에안 티스 무 아쿠세 톤 레마톤 카이 메 퓔락세 에고 우 크리노 아우톤;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 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47a절)
레마톤(rJhmavtwn말)은 '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심으로 보여 주신 '증거물'을 뜻하기도 한다. 즉 예수가 자신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하신 모든 말을 능력과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하신 모든 말을 총칭적으로 레마톤(rJhmavtwn)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L.Morris).
크리노(krivnw심판하지)는 '구별하다'라는 의미와 동시에 '법정 앞에서 법적인 판결을 내리다'의 의미도 지닌다(W.Bauer).
예수는 본문을 통해 너희들을 판단하거나 현재의 너희의 모습에 대해 심판을 내리고자 하는 의사가 지금은 없다는 점을 말씀하고 계신다. 만약 지금 심판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과연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주고자 하는 것일까?
2) 구원하고자 온 예수
(ouj ga;r h\lqon i{na krivnw to;n kovsmon ajll j i{na swvsw to;n kovsmon.우 가르 엘돈 히나 크리노 톤 코스몬 알르 히나 소소 톤 코스몬;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7b절)
우(ouj아니요), 알라(ajllaj함이로라)는 영어에서의 not A but B 구문으로서, 'A가 아니라 B이다'라는 뜻이다(H.W.Smyth). 그러므로 예수는 본문의 구조를 통해 자신의 목적이 크리노(krivnw심판하려)가 아니라 소소(swvsw구원하려)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또한 본문은 가르(ga;r왜냐하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어서 앞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께선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자신이 이 땅에 내려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죄악에 대한 결과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심판과 정죄이며, 나머지 하나는 용서와 화해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후자에 있음을 본문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3) 마지막 날의 심판자
(oJ ajqetw'n ejme; kai; mh; lambavnwn ta; rJhvmatav mou...oJ lovgo" o}n ejlavlhsa ejkei'no" krinei' aujto;n ejn th'/ ejscavth/ hJmevra/:호 아데톤 에메 카이 메 람바논 타 레마타 무…호 로고스 혼 엘랄레사 에케이노스 크리네이 아우톤 엔 테에스카테 헤메라;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48절)
아데톤(ajqetw'n저버리고)과 람바논(lambavnwn받지)은 현재 분사로 44,45절과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 두 동사도 현재 시제로 계속적인 행동의 현재성을 드러내 준다. 또한 아데톤(ajqetw'n저버리고)은 '무효라고 선언하다, 인정하지 않다, 거절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람바논(llaban받지)은 '선택하다, 자신의 소유로 가져가다'등의 의미를 지닌다(H.K.Moulton).
본문은 현재 선택하고 있는 행동과 마지막 날을 결부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저버리고 받지 않는 지금의 행동은 심판이 임하게 될 마지막 날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귀에 들려 주실 것이며 그들의 눈앞에서 행하셨던 표적들에 의해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3. 예수 선포의 권위(49,50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신 분이다. 그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행동은 곧 하나님의 행동이다.
1) 예수 선포와 성부와의 관계
(o{ti ejgw; ejx ejmautou' oujk ejlavlhsa, ajll j oJ pevmya" me path;r aujtov" moi ejntolh;n devdwken tiv ei[pw kai; tiv lalhvsw.호티 에고…펨프사스 메 파테르 아우토스 모이 엔톨렌 데도켄 티 에이포 카이 티 랄레소;내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였으니, 49절)
아우토스(aujtov"친히)는 '그 자신이'라는 의미로서 행위의 주체를 다시 한 번 강하게 강조한 표현이다(H.W.Smyth). 다시 말해서 본문은 '아버지, 바로 그분께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본문은 구조상 '나 자신으로부터'를 의미하는 엑스 에마우투(ejx ejmautou'내 자의로)와 '아버지 그분으로부터'를 의미하는 파테르 아우투(path;r aujtov"아버지께서 친히)가 대칭적인 대조 구문을 형성하고 있다. '주셨으니'(devdwken데도켄)는 현재 완료 시제로서 현재 주어 지금까지 지속되는 상태로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영생이라는 선물을 가져 오셨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어린양 예수께 친히 전할 말들을 명령하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친히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이다.
2) 성부 명령의 가치
(kai; oi\da o{ti hJ ejntolh; aujtou' zwh; aijwvniov" ejstin카이 오이다 호티 헤 엔톨레 아우투 조에 아이오니오스 에스틴;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50a절)
엔톨레(ejntolh;명령)가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뜻하는 단어로서 사용되기도 한다(H.K.Moulton). 본문에선 이 단어를 정관사 헤(hJ)와 같이 사용하여 '그 계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명령의 의미는 예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즉 예수에게 주신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본문에서 '그의 명령'이라고 표기한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섭리는 심판이 아니라 영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통해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락을 허락하시기를 그토록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본문을 통해 선포하고 있다.
3) 예수 선포의 특징
(ejgw; lalw', kaqw;" ei[rhkevn moi oJ pathvr, ou{tw" lalw'.하 운 에고 랄로 카도스 에이레켄 모이 호 파테르 후토스 랄로;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50b절)
본문에서도 에고(ejgw;내가)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선포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내가'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도 예수께선 하나님을 향하여 파테르(pathvr아버지께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본문의 표현들을 통해 예수께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하나됨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J.C.Ryle). '말씀하신'(ei[rhkevn에이레켄)은 현재 완료로서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 지속되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께 말씀하셨던 것만을 인간을 향하여 선포하셨다고 외치셨다. 이것은 예수가 녹음기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선 태초 이전부터 아버지와의 완벽한 의사소통을 통해 하나를 아버지의 말씀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이 단락은 일반적인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요약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지적을 하기 위하여 '다시 시작'한 내용이다(F.L.Godet). 특히 본 단락은 특별한 강화 장소나 새로운 내용도 없이 기록한 것으로서(Keim), 복음서 저자가 인위적으로 기록한 내용이거나 저자의 독창적인 사상이 담겨 있을 뿐이라는 비평가들의 지적이 있다(F.C.Baur, E.Reuss, Hilgenfeld, De Wette).
1. 나를 믿는 것(44-46절)
44절의 '나를 믿는 자는…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며'라는 표현은 공관복음에서도 발견되는 말씀이다(마10:40눅9:48). 이는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 관계가 아니며, 상호 긴밀한 교제 가운데 거하시며, 특히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역사하시고 계심을 함축한다. '외쳐'(e[kraxen에크락센)는 군중들에게 공적으로 연설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외침은 36절 바로 뒤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Chrysostom, Kling, Watkins).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이 표현은 저자 요한의 에필로그를 의미하거나(Lucke, Tholuck, Olshausen, Meyer), 제자들 앞에서 예수가 외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Luthardt, Besser).
45,46절에서 제자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는 아들이며, 아버지의 이행자(Agent)이기에,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인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공식을 적용시키고 있다(C.K.Barrett). 특히 '보는'(qewrei'n데오레인)은 요6:4014:17처럼 '영적인 시력'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육적으로 예수의 형상을 본 사람들 모두가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J.H.Bernard).]
46절의 '나는'(ejgw;에고)는 매우 강조되어 있으며, '세상의 빛'이라는 명제는 요한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요1:45:9;8:12).
2. 불신자들에게 있을 심판(47,48절)
47절의 카이 메(kai; mh;아니할지라도)에서 메(mh;)가 사본에는 생략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필사자들은 예수가 예수의 말을 수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기록하기를 주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C.K.Barrett). 요한복음 속에서도 요5:22,278:16,26 등은 예수그리스도를 심판자로 가리키고 있으나, 요3:178:15에 보면 예수는 심판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한 복음서 속에 두 가지 모순된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이 이 모순된 내용을 한 책 속에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거나, 고의가 아닌 실수였다는 입장은 거의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이는 '양면성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거절하는 행위 자체가 심판을 초래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C.K.Barrett, F.L.Godet).
48절에서 앞 부분의 심판은 '실현된 종말론'으로 볼 수 있으며, 뒷 부분의 심판은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으나(Brown), 뒷 부부는 앞 부분을 설명해 주는 내용인 것으로 보이며, '실현된 종말론'과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론'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논쟁은 신약 시대에는 분명치 않았던 것같다(L.Morris).
3. 아버지가 부탁한 것은 영생임(49,50절)
49절을 통해서 저자 요한은 예수의 말들이 절대적이며 종말론적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말들이 단지 예수 자신 속에서 나온 말들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며, 이 말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J.H.Bernard).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e[ipw lalhvsw에이포 랄레소)이라는 동의어를 한 문장에 사용하는 것은 요한 문체의 특징 중 하나이며, 이 동사의 반복은 '신적 문체'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거의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다(A.H.McNeile). 본 절은 신18:18을 생각게 하며, 예수의 사역의 기원과 선지자 되심을 알려 준다.
50절에서 예수의 공적 사역의 마지막 언급은 새로운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버지가 위임한 내용은 매우 엄격히 제한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생'이라는 선물이다(Temple, C.K.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예수가 오신 목적(44-47절)
44절에는 관원 중의 믿는 자들과 예수의 행위가 대조된다. 저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었지만 예수는 반대로 입을 벌려 크게 외치셨다. 예수에게 있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은 곧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 사실은 42절의 주석처럼 예수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중대한 선언이며(E.A.Blum), 성부와 성자가 본질상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다. 본 절의 내용과 문자적으로 동일한 언급은 찾아 볼수 없지만 유사한 내용으로 언급된 말씀은 요7:168:42;14:9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보내다' 동사는 부정과거 시제로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이 역사적인 행위였음을 나타내고 있다(R.C.H.Lenski). 또한 본문에서 '나'라는 1인칭 대명사가 자주 반복되어 예수 자신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L.Morris).
45절의 '예수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는 진술은 44절의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본 절은 44절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enski). 왜냐하면 44절의 '보내신 자와 보냄을 받은 자' 사이에는 먼 간격을 느낄 수 있으나, 예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 간격조차 제거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46절에서 보듯이 빛으로 오신 예수는 어두움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빛을 제공하는 사역을 하신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자신을 믿는 자들을 어두움에서 구원하여 빛 가운데 거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정리하며,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밝힌다(L.Morris).
47절에는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빛에 거하는 것'과 '구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는 자기를 거절한 자들도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마지막 날에는 예수께서 심판하신다. 또한 그가 이미 심판자로 활동하시기도 했지만(요5:22-308:16,26:9:39), 이는 예수가 적극적으로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가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심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C.K.Barrett, L.Morris). 따라서 본 절은 예수가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강조점에 대해서는 본 절에서는 '예수 자신' 외에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세상'이 반복, 강조되어 있다(L.Morris).
2. 심판과 예수의 말씀(48-50절)
48절에서 예수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근거는 '예수의 말씀'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예수를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로 무시해 버린 사람'을 가리킨다(Barclay). 따라서 구원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거절한 사람들은 그들이 배척했던 '그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L.Morris). 한편 예수는 레마타(rJhvmata말)와 호 로고스(oJ lovgo"그 말)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호 로고스는 레마타의 집합 명사로 사용되었고, 레마타는 구체적으로 발언되어 나타난 말을 의미한다(C.K.Barrett). 그런데 예수는 호 로고스를 자신이 언급했던 말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요1:1)에게까지 연결시키고 있다(Lenski). 그렇다면 이는 곧 예수가 바로 심판주이심을 의미한다(요5:22,C.K.Barrett). 그들이 받는 심판은 신18:15에 예언된 그 선지자인 예수를 듣지 않음으로서 오는 당연한 심판이다(신18:18,19,E.A.Blum).
49절에서 예수의 말들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가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이 하나님이 주신 말을 그대로 전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제껏 자신이 선포했던 말들이 인간적인 수준의 교훈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요5:198:28;12:49)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L.Morris). 이런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요17:6) 행하심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와 그의 말을 믿지 않는 자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되고 만다.
50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이라는 말씀은 요5:39신32:47에 근거한다(C.K.Barrett, E.A.Blum).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말이 곧 온전한 하나님의 영생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 곧 구약의 율법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옛 율법을 완성하고 대체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다(C.K.Barrett).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20세기 다양한 예수관들
1. 유대교 신학자들의 예수관
부버(M.Buber)는 "예수는 위대한 형제이며 유대교의 훌륭한 인물들 중의 한 설교자였고 스승"이라고 한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은 순수하게 유대적이라 한다. 예수는 구원자가 아닌 바리새파 정신에 가까운 사상가였다고 한다. 신학자이며 작자인 샬롬 코린(Schalom-Chorin)은 예수는 메시야도 예언자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예수는 유대교의 '스승'이었고 '의사'였다는 주장을 한다.
2.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예수관
철학자인 블로흐(E.Bloch)는 예수가 통치자, 메시야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단지 낙원의 원래적 인간이었다고 하며 전인류의 상징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철학자인 마코벡(M.Machovec)은 예수를 사회에 새로운 불길을 붙힌 사회적 방화자라고 말하며 예수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직접 실천하고 가르침의 본을 보임으로써 당시의 사람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칠 수가 있었다고 한다.
3. 현대 신학자들의 예수관
칼 바르트(K.Barth)는 예수를 '종으로서의 주님'이시며 그의 종의 모습 속에서 그의 주님 됨이 계시된다고 한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이며 우리들의 화해의 모습이라고 한다. 불트만(R.Bultmann)은 예수를 '결정적 구원의 사건'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분속에서 말씀으로 찾아오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반면에 예레미아스(J.Jeremias)는 예수를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받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밝혔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사53장의고난받는 종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해석했다.
4.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기존의 유대교적 개념이나 사상의 틀 안에서만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가 출발하고 있는 유대교의 울타리를 훨씬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신학자들이나 막스주의 사상가들의 개념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이 증거하는 역사적 예수는 메시야이며 묵시 문학에서 예고된 인자로서의 예수이다. 예수는 '메시야적 인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심판을 할 수 있는 신(神) (12:44-50)
◈ 세계배경 문화사 ◈
각 종교에서 최고의 신은 그 종교에서 가장 강력한 심판의 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다. 즉 하늘과 저승을 나누어 각각의 곳에서 심판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이 있다. 즉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에 올라가느냐 지하 세계로 가느냐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이런 신들은 인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근동 / 이집트 : 이집트의 최고 신은 라(Ra) 신이다. 바다에서 태어난 그는 신과, 우주, 인간을 만들고 지배하였다. "늙어서는 낮에는 낮배로 하늘을 밤에는 밤배로 하늘의 여신 누트의 태내(胎內) 또는 지하의 명계(冥界)를 여행"하였다. 그가 창조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자 그의 누이동생인 하도르 신에게 명하여 인간의 죄를 정죄하게 하였다. 이에 하도르 신은 야수의 모습으로 변하여 지상의 인간을 전멸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하도르 신은 야수의 모습으로 변하여 지상의 인간을 전멸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하도르 신의 생각에 놀란 라 신은 하도르에게 호수의 술을 다 마신 후에 인간을 정죄하라고 명하였다. 하도르는 호수의 술을 모두 마시고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전멸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이집트의 또 한 신으로 오시리스를 들 수 있다. 오시리스는 저승 심판자의 대명사로 등장하고 있다. 오시리스는 누이동생인 이시스와 결혼하였으나 또 다른 동생 세트의 시기로 인해 세트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시스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시리스의 시체를 찾아 다시 재생시켰다. 이후 이시스는 견신인 아누비스와 함께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하는 왕이 되었다.
서양 / 그리스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아트레우스(Atreus)는 배다른 동생 크리시포스를 티에스테스라는 또 다른 동생과 함께 살해했다. 그리고는 미케네로 도망하여 그곳의 왕인 스테넬로스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스테넬소스가 후사 없이 죽자 왕위를 놓고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사이에 다툼이 시작되었다. 티에스테스는 형수와 밀통하여 황금 양을 훔쳐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태양의 운행을 역행하여 그 간계를 폭로함으로 티에스테스는 추방당하였다. 또한 티탄 족의 거신인 아틀라스는 올림푸스의 신들과의 끊임없는 싸움 끝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제우스는 천계를 어지럽힌 죄로 밤과 낮이 합쳐지는 지점인 아프리카 서북쪽에서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는 벌을 가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천상에 있는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주어 제우스 신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여자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에게 보냈지만 그는 판도라를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그의 미모에 반하여 그와 결혼하게 된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판도라 상자 사건이다. 그 상자 안에는 많은 재앙이 담겨 있었는데 상자를 열자마자 다 나가고 희망만이 상자 안에 남아 있게 되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인 채로 독수리에게 간장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이는 간장이 밤이면 소생하여 다시 독수리에게 쪼임을 당하는 형벌이다. 이후 여행하던 헤라클레스의 도움을 받아 독수리를 제거하고 제우스 신과 화해하였다는 신화가 전하고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창조, 통치, 구속 사역과 함께 진리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구속주와 심판주로 강조된다. 특히 하나님 심판의 당위성과 그 실효성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심판의 자격도 지니신 분이시다. 또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실 자격을 지니신다. 우월한 존재는 열등한 존재를 판단하거나 도태시킬 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다음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심판하실 수 있다. 죄인 된 인간들이 아무리 은폐하고 도피해도 기필코 죄값을 심판하실 권능을 지니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희생하사 구원의 근거를 마련해 놓으셨기에 불신자들을 심판하실 당위성을 지니고 계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불신에 대한 최후의 경고(12:44-50)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44절). 이제 요한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적인 전도 사역이 끝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지막으로 군중들에게 외치시는 것이다. 이는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요, 피맺힌 권고인 것이다.
1. 보고도 믿지 않는 죄에 대한 경고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5절). 일반적으로 '무지'로 짓게 된 죄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탕감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성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과 진리를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지 바'(요일1:1)가 되었음에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15:24)고 하신 것이다. 나타난 하나님, 공개된 진리를 보고도 믿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 듣고도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한 경고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48절)라고 하셨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경고 말씀'이시다. '옛적에 선지자들도…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와 그리고 그 한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훈, 언약을 외면하나는 자에게는 더 이사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기화기 없다.
3. 은혜를 거부한 죄에 대한 경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46절),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47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 그 자체시다. 그를 보내 희생시키사 세상과 화목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광야의 불뱀', 즉 심판의 도구가 아니라 '광야에서 두 구원의 놋뱀'이시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은혜를 거부한 자들의 운명은 오직 멸망뿐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본받을 주님의 삶의 목적(12:44-50)
인본주의 철학의 세계관에서 인생이란 우연히 이 땅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세계관은 다르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이 땅에 보내진 것이다. 본문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삶의 목적,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진술하신다.
1.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것
'나를 믿는 자는…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절). 예수그리스도는 누구도 보여 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그분의 사랑을 이 세계에 보여 주시고자 예수는 오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나타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 세상의 빛이 되시는 것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46절). 불의, 무지, 모순, 그리고 미움과 갈등과 죽음의 권세가 넘치는 밤 같은 세상에 주님은 하나님의 진리와 의와 생명을 주시고자 오셨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고 했다. 성도들도 빛의 자녀처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이기주의 풍조를 벗어나 빛이 되고 소금 되는 삶을 살도록 하자.
3.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것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47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50절). 영생 구원을 주시고자 주니믄 오셨으며 십자가의 희생과 대속을 그 삶의 목적으로 삼으신 것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삶의 자취를 따라야 한다. 비판과 심판은 세상 사람들도 쉽게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화해와 치유와 소망을 주는 자로서 살아야 온당하다.
요한복음 12장 원어 강해
요 12:1~11 예수께 드려진 향유
진정한 헌신과 위선적인 헌신
본문은 마리아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동시에 본문은 물질을 도둑질하기 위해 가차없이 남을 비판하는 가룟 유다의 위선도 보여 준다.
1.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1-3절)
1) 본문의 배경
( JO oun jIhsou'" pro; e}x hJmerw'n tou' pavsca hlqen eij" Bhqanivan;호 운 예수스 프로 헥스 헤메론 투 파스카 엘덴 에이스 베다니안;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나, 1절)
프로 헥스 헤메론(pro; e}x hJmerw'n;엿새 전에)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날짜를 암시하며 동시에 십자가 고난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보여 준다. 학자들 간에는 예수의 도착 시기에 대해서, ① 금요일(Lange), ② 토요일(Meyer, Weiss), ③ 주일(De Wetter, Hase), ④ 월요일(Hilgenfeld) 등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데, 대체로 ②의 견해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또한 본문은 베다니라는 장소를 설명하면서 라자로스(Lavzaro";나사로)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요11:1-44)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이었음을 다시 한 번 간접적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께선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을, 부활의 이적을 보여 주신 베다니로부터 준비하셨다.
2) 마리아의 형제들
(ejpoivhsan oun aujtw'/ dei'pnon ejkei', kai; hJ Mavrqa dihkovnei, oJ de; Lavzaro";에포이에산 운 아우토 데이프논 에케이 카이 헤 마르다 디에코네이 호 데 라자로스;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2절)
에포이에산(ejpoivhsan;할 새)은 3인칭 복수 형태이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가 불확실하여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데(F.Rienecker), 이 동사의 형태를 통해서 베다니 등 네 사람들이 잔치를 베풀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J.H.Bernard). 데이프논(dei'pnon;잔치)은 일반적으로는 잘 차려진 저녁 식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잔치, 향연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Liddle&Scott). '일을 보고'(dihkovnei;디에코네이)란 디아코네오(diakonevw;시중들다, 섬기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마르다가 계속적으로 열심히 봉사했음을 암시한다. 분문에서 나사로가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사로의 집은 아닌 듯하다(A.Plummer).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장소에 대해서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모의가 진행되고 있었음에 반해서 베다니에서는 부활한 자와 함께 예수를 위한 잔치가 준비되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똑같은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자와 밀고하는 자로 나뉘었듯이, 예수를 대접하는 사람들도 두 가지로 나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3) 향유를 드리는 마리아
(hJ oun Maria;m labou'sa livtran muvrou navrdou pistikh'" polutivmou h[leiyen tou;" povda" tou' jIhsou' kai; ejxevmaxen tai'" qrixi;n aujth'" tou;" povda" aujtou':;헤 운 마리암 라부사 리트란 뮈루 나르두 피스티케스 폴뤼티무 엘레입센 투스 포다스 투 예수 카이 엑세막센 타이스드락신 아우테스 투스 포다스 아우투;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3절)
피스티케스(pistikh'";순전한)는 '아무런 불순물도 섞이지 않고 순수한'의 뜻이다(W.Bauer). 당시의 어떤 향료들은 포도주를 섞어서 만들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 단어는 보여 주고 있다(Dods). '나드'(navrdou;나르두)는 동인도에서 나는 방향성 나무에서 채취한 향유를 뜻한다(아1:12;4:13,14). 드릭신(qrixi;n;머리털)은 유대 풍속에 있어서 가장 존귀함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즉 머리카락을 푸는 것은 가장 치욕스런 모욕거리가 될 수 있음과, 동시에 머리카락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 전부를 희생하며 드리는 것을 의미하였다(Lightfoot).
마리아는 예수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자신의 가장 순수한 헌신과 신앙의 마음을 순전한 나드 향으로 대신하여 표현하였으며, 자신의 가장 고결한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김으로써 예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과 겸손함을 드러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 어떤 향유도 발산할 수 없는 가장 고결하고도 향기로운 예물이었던 것이다.
2. 가룟 유다와 예수의 상반된 평가(4-8절)
1) 가룟 유다의 비판
(levgei de; jIouvda" oJ jIskariwvth"...ejdovqh ptwcoi'"_;레게이 데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에도데 프토코이스;가룟 유다가 말하되…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4,5절)
파라디도나이(paradidovnai;잡아)는 앞의 멜론(mevllwn;줄)과 연결되어서 '잡아 주기로 되어 있는'의 의미를 지닌다(J.V.McGee). 트리아코시온 데나리온(triakosivwn dhnarivwn;삼백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전으로서(마20:2,9,10,13) 현재 시가로 약 4,5만원에해당한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고가였음을 알 수 있다(J.Jermias). 프토코이스(ptwcoi'";가난한 자들)는 '거지처럼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한다(Liddle&Scott).
이 세상엔 언제나 선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의 헌신을 흠잡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순수히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과 거짓으로 타인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이다. 본문은 예수를 팔아서라도 자시의 이익을 챙겼던 가룟 유다가, 소유를 팔아 남김없이 예수께 드린 사람을 힐난하는 염치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 가룟 유다의 진정한 의도
(oujc o{ti peri; tw'n ptwcw'n e[melen aujtw'/ ajll j o{ti klevpth" hn kai; to; glwssovkomon e[cwn ta; ballovmena ejbavstazen.;우크 호티 페리 톤 프토콘 에멜렌 아우토알라 호티 클레프테스 엔 카이 토 글롯소코몬 에콘 타 발라 메나 에바스타젠;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 6절)
'생각함이'(e[melen;에멜렌)란 멜레이(pelei;걱정하다, 마음을 쓰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마음을 쓴다(동정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한글 개역성경에 '가난한 자들을'로 번역된 페리(peri)는 '∼에 대하여'의 뜻이다. 글롯소코몬(glwssovkomon;돈 궤)은 원래 '악기의 혀'와 '지키다, 보관하다'의 합성어로서, 관악기의 리드 등을 넣는 작은 가방을 뜻하는 단어이다(W.Bauer). 본문의 구조로 보아 본문에서의 이 단어가 뜻하는 것은 아마도 예수와 제자들의 재정을 관리하던 돈지갑을 뜻하는 것 같다(Lightfoot). 에바스타젠(ejbavstazen;훔쳐 감이러라)은 원래는 '나르다'라는 뜻을 가진다(Liddle&Scott).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돈을 가지고 다니면서(나르면서) 슬쩍쓸쩍 훔쳐 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도둑 중의 도둑이었다. 본문은 그가 예수의 제자이면서도 예수의 돈을 훔쳐 갔을 뿐 아니라 예수께 드려지는 것조차도 아까와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말씀처럼,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여 예수를 돈에 팔고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영원한 형벌에 던져 버리게 된 것이다.
3)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
( [Afe" aujthvn, i{na eij" th;n hJmevran tou' ejntafiasmou' mou thrhvsh/ aujtov:...ejme; de; ouj pavntote e[cete.;아페스 아우텐 히나 에이스 텐 헤메란 투 엔타피아스무 무 테레세 아우토…에메 데 우 판토테 에케데;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7,8절)
아페스( [Afe";가만 두어)는 명령형으로서 '속박하지 말고 풀어 자유롭게 만들라'라는 의미이다. 즉 그의 행동에 그런 말로 올무를 씌우지 말라고 예수께서 명령하셨던 것이다. 또한 8절에선 에메(ejme;나는)라는 1인칭 단수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말씀하심으로 '너희가 보고있는 바로 이 육신의 나'라는 의미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예수께선 마리아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하셨다. 이런 언급을 통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ㆍ간접적으로 예수는 언급하셨던 것이다. 본문에서 '나는 항상있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을 내버리고 가버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실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3. 대제사장들의 모의(9-11절)
1) 큰 무리가 모여든 이유
( [Egnw oun 팷J? o[clo" polu;" ejk tw'n jIoudaivwn o{ti ejkei' ejstin... i{na kai; to;n Lavzaron i[dwsin o}n h[geiren ejk nekrw'n.;에그노 운 [호] 오클로스 폴뤼스 에크 톤 유다이온 호티 에케이 에스틴…히나 카이 톤 라자론 이도신;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9절)
〔호〕 오클로스(팷J? o[clo";무리가)에 정관사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앞 부분까지 포함하여 '유대인의 그 무리들이'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교권자들과 대조적인 서민 계층의 유대인들을 지칭해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J.C.Ryle). 또한 이들은 요7:25에 나타난 예루살렘인들과는 달리 요7:12,20,31,40,43,49에 언급된 바 여러 곳에서 온 순례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F.Rienecker).
사람들은 예수만이 아니라 나사로까지도 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메시야되심의 가장 직접적인 표적이 다시 살아난 나사로이기 때문이다. 이적과 표적을 구하던 유대 민족은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과 신앙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던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들에 더 많이 얽매이고 매달렸었다. 신앙은 오로지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2) 사악한 모의
(ejbouleuvsanto de; oiJ ajrcierei'" i{na kai; to;n Lavzaron ajpokteivnwsin;에불류산토데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히나 카이 톤 라자론 아포크테이노신;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0절)
카이(kai;;까지)는 '조차도'의 의미로서, '나사로 조차도'의 뜻이다(A.H.Chase). 에불류산토(ejbouleuvsanto;모의하니)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이미 결정했음을 표현한다(W.Bauer). 아포크테이노신(kteivnwsin;죽이려고)은 다양한 용례를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엔 암살하는 것이나 부당하게 죽이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본문에서의 용례는 이런 의미를 더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W.Bauer). 진리의 대적자들은 진리가 그 빛을 발하는 것은 물론 그 빛이 비추는 모든 영역까지도 두려워했고 제거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진리와 함께한다'는 것은 진리가 받는 고난도 함께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대제사장들의 나사로 살해 모의
(o{ti polloi; di j aujto;n uJph'gon tw'n jIoudaivwn kai; ejpivsteuon eij" to;n jIhsou'n.;호티 폴로아 디 아우톤 휘페곤 톤 유다이온 카이 에피스튜온 에이스 톤 예순;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1절)
휘페곤(uJph'gon;가서)은 '신속하게 달려나감'을 의미하는데(Liddle&Scott). 특히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유대인들이 지속적으로 나아갔음을 암시한다. '믿음이러라'(ejppivsteuon;에피스튜온)도 미완료 과거로서 역시 한 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곧 본문에서 단순히 '가서'라고 표현한 것이 사실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갔던 것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민족들의 영역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것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바로 이 점이 예수를 제거하고자 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요 12:12~19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이스라엘의 왕
예수그리스도는 수많은 무리들의 호산나 소리를 들으면서 종려가지의 물결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이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들의 찬송은 조금 후엔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들의 찬송은 조금 후엔 예수를 죽이라는 함성으로 변하게 될 것이었다.
1. 환호하는 무리들(12,13절)
1) 예수의 소식
(Th'/ ejpauvrion oJ o[clo" polu;" oJ ejlqw;n eij" th;n eJorthvn, ajkouvsante" o{ti e[rcetai oJ jIhsou'" eij" JIerosovluma;테에파우리온 호 오클로스 폴뤼스 호 엘돈 에이스 텐 헤오르텐 아쿠산테스 호티 에르케타이 호 예수스 예로솔뤼마;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2절)
테 에파우리온(Th'/ ejpauvrion;그 이튿날에는)은 정관사를 사용하여 어떤 특정한 날의 바로 다음 날을 지칭하고 있다(A.Barnes). 본문에서 말하는 다음날은, 향연 후의 다음날로서 니산 월(1월) 10일일 것이다. 호 오클로스 폴뤼스(oJ o[clo" polu;";큰 무리가)는 9절에 나온 '큰 무리'와 동일한 단어와 어순을 선택하고 있다. 즉 유대교의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계층의 유대인들, 즉 서민 계층의 그 유대인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이 이미 예수께로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소문들이 넓게 퍼져 있었고, 예수의 다음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음을 본문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종려나무와 호산나
(e[labon ta; bai?a tw'n foinivkwn kai; ejxh'lqon eij" uJpavnthsin aujtw'/, kai; ejkrauvgazon, JWsannav:;엘라본 타 바이아 톤 포이니 콘 카이 엑셀돈 에이스 휘판테스 아우토 카이 에크라우가존 호산나;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13a절)
바이아(bai?a;종려나무 가지)는 구약에서부터 존경과 기쁨을 표시하는 수단이었다(레23:40). 또한 승리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나무를 가져오는 것은 승리자나 왕에게 승리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라 한다(계7:9,J.H.Bernard). 마카비1서 12:51에서는 독립 운동의 영웅인 시므온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본문에서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호산나'( JWsannav:;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오!구원하소서'라는 뜻이며, 70인경(LXX)은 소손 데(sw'son dhv;구원하소서)로 번역하였다.
본문의 환영 묘사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사람들은 아마도 마카비가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독립을 가져올 진정한 메시야로서 예수를 환영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가시적이며 지상적인 메시야 왕국을 가져 올 자로 예수를 알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선포한 예수 자신의 모습보다는, 자신들이 필요로 하고 상상해 온 예수를 환영했던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왕
(eujloghmevno" oJ ejrcovmeno" ejn ojnovmati kurivou, 팳ai;? oJ basileu;" tou' jIsrahvl.;율로게메노스 호 에르코메노스 엔 오모마티 퀴리우 [카이] 호 바실류스 투 이스라엘;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3b절)
퀴리우(kurivou;주)는 아마도 하나님을 뜻하는 사성 문자 '여호와'(hhy)로 번역된 글의 헬라어 번역일 것이다. 오노마티(ojnovmati;이름으로)는 히브리인의 사고에서 단순한 성명 이상으로 전인격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실류스투 이스라엘(basileu;" tou' jIsrahvl;이스라엘의 왕)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십자가 죄패와는 다른 표현이다.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유대인과는 달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바실류스(basileu;";왕)는 원래 정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은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이다(Liddle & Scott). 사람들이 예수를 찬송하던 말들은 그 용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메시야를 부르는 가장 정확한 용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말을 전혀 다른 의도로 사용하고 있다.
2. 나귀를 타고 들어오심(14-16절)
1) 나귀를 타심
(euJrw;n de; oJ jIhsou'" ojnavrion ejkavqisen ejp j aujto;휴론 데 호 예수스 오나리온 에카디센 에프 아우토;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4절)
오나리온(ojnavrion;나귀 새끼)은 구약에선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삿10:4;12:14). 사람들을 통치하는 왕은 나귀를 타지 않고 말을 탐으로써 권세와 힘을 나타내지만,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와 정사를 그 어깨 위에 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약한 한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과 자애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또한 예수께서 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마21:2;막11:2;눅19:30).
휴론(euJrw;n;만나서)은 이렇게 나귀를 타신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섭리와 경륜에 속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예수께선 자신의 모든 선포들을 하나님께 의존했었으며, 동시에 그분의 권위에 의존했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입성에서도 하나님의 준비하심과 예비하심으로 나귀를 타셨던 것이다.
2) 예언의 성취
(Mh; fobou', qugavthr Siwvn: ijdou; oJ basileuv" sou e[rcetai, kaqhvmeno" ejpi; pw'lon o[nou.;카도스 에스틴 계그람메논 메 포부 뒤가테르 시온 이두 호 바시류스 수 에르케타이 카데메노스 에피 폴론 오누;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이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5절)
게그람메논(gegrammevnon;기록된 바)은 현재 완료 수동형으로 현재 쓰여져 계속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란 뜻으로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을 의미하며, 종종 '율법'을 의미하기도 한다(A.Barnes).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슥9:9이며, 뒤가테르 시온(qugavthr;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시민'에 대한 애칭이다(사52:2,J.H.Bernard). 구약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종종 이스라엘 혹은 시온 달이라고 부르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나 혹은 남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사54:5). 구원받은 자녀들을 시온 딸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를 인용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져 온 바로 그 메시야임을 강력하게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본문에서도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약속의 성취에 대해서와 아울러 그 약속된 메시야가 바로 주 예수그리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3) 제자들의 나중 깨달음
(tau'ta oujk e[gnwsan aujtou' oiJ maqhtai; to; prw'ton, ajll j o{te ejdoxavsqh jIhsou'";타우타 우크 에그노산 아우투 호이 마데타이토 프로톤 알르 호테 에독사스데 예수스;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16절)
토 프로톤(to; prw'ton;처음에)은 시간상으로는 '가장 먼저'라는 뜻이고, 어떤 사건과 관련해서는 '바로 직후에'라는 의미이다(W.Bauer).
원문에선 토 폴톤(to; prw'ton)의 직후에 알르(ajll j;그러나)가 나옴으로써 앞뒤를 완전히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15절의 구문 자체는 알르(ajll j;그러나) 이후의 내용을 강력하게 강조하기 위한 대칭 구문으로 볼 수 있다(H.W.Smyth). 예수를 환영하던 사람들은 물론,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조차도 사람들의 환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와 관계되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제자들조차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요12:23;빌2:10,11) 이후에 보혜사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영감을 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3. 무리들의 반응(17-19절)
1) 무리들의 증거
(ejmartuvrei oun oJ o[clo" oJ w]n met j aujtou' o{te to;n Lavzaron ejfwvnhsen ejk tou' mnhmeivou kai; h[geiren aujto;n ejk nekrw'n.;에말튀레이 운 호 오클로스 호 온 메트 아우투 호테 톤 라지론 에포네센 에크 투 므네메이우 카이 에게이렌 아아톤 에크 네크론;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7절)
에마르튀레이(ejmartuvrei;증거한지라)는 '어떤 사안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증명해 보인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Liddle & Scott). 또한 본문에서 이 단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고 있다. 즉 무리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 대해서 그 순간에만 증거하고 다녔던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증명했음을 나타낸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함께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과 바리새인에게 가서 고한 사람들로 나뉘어졌었다. 그러나 이 양자 모두는 그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닐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활의 사건은 너무나도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문은 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2) 무리가 예수를 반겼던 이유
(dia; tou'to 팳ai;? uJphvnthsen aujtw'/ oJ o[clo" o{ti h[kousan tou'to aujto;n pepoihkevnai to; shmei'on.;디아 투토 [카이] 휘펜테센 아우토 호 오클로스 호티 에쿠산 투토 아우톤 페포이 에케나이 토 세메이온;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셨음을 들었음이러라, 18절)
원문은 호 오클로스(oJ o[clo";무리가)라고 기록하여 정관사가 붙은 '그 무리가' 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무리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12절에 암시된 바 예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무리들 혹은 메시야나 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던 그 무리를 지칭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토 세메이온(to; shmei'on;이 표적)이란 단어는 11장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의 증표로서 표적을 구했기 때문이다. 특히 표적에 관해서도 '이 표적'이라고 정관사를 사용함으로써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환영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과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에 예수그리스도가 부활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예수그리스도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표적들을 행하실 만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저들의 자세는 올바른 신앙의 자세만은 아니었다.
3)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음
(oiJ oun Farisai'oi eipan pro;" eJautouv", Qewrei'te o{ti oujk wjfelei'te oujdevn: i[de oJ kovsmo" ojpivsw aujtou' ajph'lqen.;호이 운 파리사이오이 에이판 아우투 아펠덴;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 19절)
오펠레이테(wjfelei'te;쓸데)는 소기의 목적한 바를 달성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는 현재 시제로 지금 아무런 유익도 없다는 것을 나타낼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즉 바리새인들 이미 예수를 잡아죽이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A.Plummer).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허탈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포기하기 않고 계속해서 계획들을 추진해 나갔다. 그들은 군중 심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당장은 쓸 데가 없더라도 나중에는 효과가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요 12:20~36 자신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
자신을 희생으로 드리는 예수그리스도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의 뒤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하며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한 알의 밀(20-25절)
1) 예수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
( Hsan de; {Ellhnev" tine"...qevlomen to;n jIhsou'n ijdei'n....levgousin tw'/ jIhsou'.;에산 데 헬레네스 티네스…델로멘 톤 예순 이데인…레구신 토 예수;헬라인 몇이 있는데…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예수께 가서 여짜온데, 20-22절)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을 헬레네스( {Ellhnev";헬라인)라고 불렀는데(A.Barnes), 이방인들이 모두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Lightfoot). 본문에 나온 헬라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는 점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같다(Dods). 그러나 이들은 반개종자들로 허락되는 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축제를 지내고 싶어한 자들일 수도 있다(F.Riencker). '선생이여'는 원문에선 퀴리에(kuvrie;주여)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① 단순한 존경, ② 노예의 상전에 대한 호칭, ③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에 대한 호칭 등의 의미들을 갖는데, 본문에선 ①의 의미이다(W.Bauer). 예수의 영광은 그의 미약한 제자들까지도 '주여' 혹은 '선생이여'라고 불리게 만들었다(Westcott). '청하여'(hjrwvtwn;에로톤)는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적으로 청한다'는 뜻이며 빌립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교훈을 배우기 위해 예수를 뵙기 원했을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이방인들은 예수를 찾아왔던 것이다.
2) 열매 맺기 위한 조건
( jElhvluqen hJ w{ra i{na doxasqh'/ oJ uiJo;" tou' ajnqrwvpou....oJ kovkko" tou' sivtou pesw;n eij" th;n gh'n ajpoqavnh/, aujto;" movno" mevnei: eja;n de; ajpoqa;nh/, polu;n karpo;n fevrei.;엘렐뤼덴 헤 호라 히나 독사스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호 콕코스 투시투 페손 에이스 텐 겐…에안 데 아포다네 폴륀 카르폰 페레이;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3,24절)
독사스데(doxasqh;영광 얻을)는 수동태로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실 것임을 강조한다(J.Jeremias). 하나님께선 예수의 영광받으심을 작정하셨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께 영광주실 것임을 수동태로써 표현하고 있다. 아멘 아멘(ajmh;n;진실로 진실로)은 예수 자신의 독특한 진리 선포를 시작하는 도입구로서 사용되는 구문이다(C.H.Dodd). 이는 말씀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콕코스(kovkko";밀)는 보리나 밀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곡식들을 포함한다(A.Barnes).
한 알의 밀이 썩어야만 동일한 많은 밀이 열매로 맺힌다는 예수의 말씀은,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나누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암시한다.
3) 예수의 역설
(oJ filw'n th;n yuch;n aujtou' ajpolluvei aujthvn, kai; oJ misw'n th;n yuch;n aujtou' ejn tw'/ kovsmw/ touvtw/ eij" zwh;n aijwvnion fulavxei aujth;n.;호 필론 텐 프쉬켄 아우투 아폴뤼에이 아우텐 카이 호 미손 텐 프쉬켄 아우투 엔 토 코스모투토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퓔락세이 아우텐;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린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5절)
기독교의 특징은 일반 상식과는 대치되는 진리가 기독교 진리 안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프쉬켄(yuch;n;생명)은 문자적으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말로서 숨을 쉬는 생명체 자체로서 그 자아를 뜻한다. 또한 육신의 삶과 목숨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Liddle & Scott). 이 세상의 그 누가 자신의 생명을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본문은 그 본능적인 자기 집착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또한 필론(filw'n;사랑하는)은 현재 분사형태로서 '계속적으로 사랑하고 있는'이며, 아폴뤼에이(ajpolluvei;잃어버릴 것이요)도 현재형으로서 '지금 잃어버리고 있다' 또는 '계속적으로 잃어버리는 상태로 있을 것'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지금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장차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생명을 파멸시키고 있다라고 보아야 한다. 아폴뤼에이(ajpolluveiv;잃어버릴 것이요)는 '파멸시키다'의 의미도 갖는다(W.Bauer).
2. 하늘 아버지의 선포(26-30절)
1) 나를 따르라
(eja;n ejmoiv ti", diakonh'/, ejmoi; ajkolouqeivtw, kai; o{pou eijmi; ejgw; ejkei' kai; oJ diavkono" oJ ejmo;" e[stai: ejavn ti" ejmoi; diakonh'/ timhvsei aujto;n oJ pathvr.;에안 에모이 티스 디아코네 어모이 아콜루데이토…에안 티스 에모이 디아코네 티메세이 아우톤 호 파테르;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6절)
에모이(ejmoi;나를)는 강세형이며(A.H.Chase), 또한 '나 있는 곳에'의 에고(ejme;;나)도 1인칭 단수 인칭대명사로 강조를 위한 용법이다. 우리는 본문이 두 번의 에모이(ejmoi)와 에고(ejme;)를 통하여 예수 자신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선 죽음의 장소에까지, 고난과 시험의 장소에까지 자신을 따라와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가 가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지 함께 가고 예수가 당하는 고난과 함께 할 때만이, 예수와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다.
본문은 제자도의 참된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나를 따르라'라는 한마디를 통하여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고 있다.
2) 예수의 간구
(Nu'n hJ yuchv mou tetavraktai. kai; tiv ei[pw;...ajlla; dia; tou'to hlqon eij" th;n w{ran tauvthn....kai; pavlin doxavsw.
;뉜 헤 프쉬케 무 테타라크타이 카이 티 에이포…알라 디아 투토 엘돈 에이스 텐 호란 타우텐…카이 팔린 독사소;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27,28절)
뉜(Nu'n;지금)은 '지금'보다는 오히려 '드디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테타라크타이(tetavraktai;민망하니)가 '소동한다'라는 의미의 현재 완료형으로서 이미 고민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민망하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께의 순종이 교차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Bernard).
'구원하여'(sw'sovn;소손)란 단순과거 명령형으로서 강한 희구성을 나타낸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만을 간구하셨고, 하나님은 이미 예수의 여러 사역들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음을 밝히셨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다시금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의 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만드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들인 예수를 영광스럽게 만드실 것이다(W.Hendriksen).
3) 너희를 위한 소리
(Ouj di j ejme; hJ fwnh; au{th gevgonen ajlla; di j uJma'".;우 디 에메 헤 포네 하우테 게고넨 알라 디 휘마스;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0절)
사람들은 하늘의 음성에 대해서 의견들이 분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흡사 동물들이 인간의 언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안이 감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Godet). 본문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우레'로 묘사했던 것(출9:28;삼하22:14)과 동일하게 간주하기도 한다(Weiss). 하나님의 이러한 구체적 선포하심은 아직도 죄와 죽음에서 허덕이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선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앞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으나 사람들은 아직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본문의 선포하심을 통해 인간들을 향해 자신의 섭리를 재차 밝히신 것이다.
3. 빛을 믿으라(31-36절)
1) 이 세상의 심판
(nu'n krivsi" ejsti;n tou' kovsmou touvtou...kajgw; eja;n juJywqw' ejk th'" gh'", pavnta" eJlkuvsw pro;" ejmautovn.;뉜 크리시스 에스틴 투 코스무 투투…카고 에안 휩소도 엑 테스 게스 판타스 헬퀴소 프로스 에마우톤;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1,32절)
아르콘(a[rcwn;임금)은 일반적인 왕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주로 무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통치권을 획득한 지배자를 뜻한다(W.Bauer). 휩소도(juJywqw';들리면)는 의미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심'을 의미하지만(A.T.Robertson) 그리스도의 능력을 모든 장소에서 보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W.Hendriksen). 또한 '들리면'에 부활과 승천이 포함된다는 입장도 있고(Westcott, A.Plummer). 그리고 32절의판타스(pavnta";모든 사람)라는 표현을 만민구원설이 근거로 간주하기도 한다(Meyer). 한편 '이끌겠노라'(eJlkuvsw;헬퀴소)는 예수님께서 이미 요6:44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이끄신다는 말씀 속에서 사용하셨다.
예수께선 본문을 통해 자기 자신이 이제 당하게 될 고난이 고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리와 영광을 가져올 것이며 나아가 이것을 통해 모든 인류의 가장 복된 소식이 전해질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2) 무리의 반문
(shmaivnwn poivw/ qanavtw/ h[mellen ajpoqnhv/skein....oJ o[clo"...pw'" levgei" su; o{ti dei' uJywqh'nai to;n uiJo;n tou' ajnqrwvpou;세마이논 포이오 다나토 에멜렌 아포드 네스케인…아페크리데…호 오클로스…포스 레게이스 쉬호티 데이 휩소데나이 톤 휘온 투 안드로푸;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임심이러라…이에 무리가 대답하되…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33,34절)
노무(novmou;율법)는 구약 전체를 가리킨다(요10:34). '보이심이러라'(shmaivnwn;세마이논)는 세마이노(shmaivnwn;신호를 주다, 표시하다)의 현재 분사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확실한 표시로서 보여 준다는 뜻을 암시한다. 에쿠사멘(hjkouvsamen;들었거늘)은 일반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읽고 해설해 주는 것을 통해 율법을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Lightfoot). 무리들은 어리석게도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선언에 대해서 자신들이 잘못 이해하여 구약 말씀을 사용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이 '이 인자가 누구냐'라고 되묻는 모습을 통해, 아직 인자와 메시야가 동일시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Westcott, J.H.Bernard). 그들은 오시는 메시야께서 이 땅에 가시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우고 정치적으로 통하시는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지도 못했고 또한 그것을 풀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사람들의 귀와 눈은 그토록 닫혀 있었던 것이다. 본문의 상황은 어쩌면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3) 빛을 믿으라
( [Eti mikro;n crovnon to; fw'" ejn uJmi'n...eij" to; fw'", i{na uiJoi; fwto;" gevnhsqe.;에티 미크론 크로논 토 포스 엔 휘민…피스튜에테 에이스 토 포스 히나 휘오이 포토스 게네스데;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35,36절)
본문에선 포스(fw'";빛)와 스코티아(skotiva;어두움)과 대조되고 있다. 빛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되지 않는다면 어두움에 붙잡혀 어두움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빛을 믿은 결과에 대해서는 휘오이 포토스(uiJoi; fwto;";빛의 아들들)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어두움에 대해서는 카탈라베(katalavbh/;붙잡히지)와 같은 비인간적 관계형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빛을 믿어 빛의 아들들이 도지 않는다면, 어두움이 급히 뒤쫓아와 습격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 것임을 예수께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요 12:37~43 유대인들의 불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약 예언의 성취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해 왔고,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메시야가 오셨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것은 구약 예언들의 성취와 사람들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눈뜬 소경과도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진리의 선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 예언의 성취(37,38절)
1) 사람들의 불신
(Tosau'ta de; aujtou' shmei'a pepoihkovto" e[mprosqen aujtw'n oujk ejpivsteuon eij" aujtovn;토사우타 데 아우쿠 세메이아페포이에코토소 엠프로스덴 아우톤 우쿠 에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ALE지 아니하니, 37절)
데(de;;그러나는 '행하셨다(pepoihkovto";페포이에코토스)'와 연결하여 '행하셨으나'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단어가 앞부분에서 접속사로 사용될 경우에는 강한 반전을 나타내어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를 가지게 한다. 페포이에코토스(pepoihkovto";행하셨)는 현재 완료 시제로서, 이미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으며 그 사실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보여 준다(A.H.Chase). 또한 엠프로스덴(e[mprosqen;앞에서)은 시ㆍ공간적인 '미리 앞섬'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선 공간적인 의미로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라는 의미이다(W.Bauer). '믿지'(ejpivsteuon;에피스튜온)는 미완료 과거로서 그들이 끈질기게 믿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본문은 사람들의 완악함을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표적을 줄기차게 요구했었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은 이후에 그들은 예수를 열렬히 환영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토록 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을 예수께서 그들의 눈 앞에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2) 구약의 이루어짐
(i{na oJ lovgo" jHsai?ou tou' profhvtou plhrwqh;히나 호 로스 에사이우 투 프로페투 플레로데;이는 선지사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38a절)
프로페투(profhvtou;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거나 해석해 주는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선견자라고도 불리웠다(삼상9:9,11,18,19;삼하24:11). 그들은 미래에 있을 일을 예언하거나 당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고,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었다(L.Morris). 플레로데(plhrwqh;이루려)는 '가득 채우다'에서 비롯되어 '충만히 이루다'의 의미를 지니며,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이루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낸다(Liddle & Scott).
하나님께선 자신의 백성들을 통해 구세주 메시야에 대한 계시를 전구약을 통해 끊임없이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며 아울러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3) 예언의 내용
(Kuvrie, tiv" ejpivsteusen th'/ ajkoh'/ hJmw'n_ kai; oJ bracivwn kurivou tivni ajpekaluvfqh;퀴리에 티스 에피스튜센 테 아코에 헤몬카이 호 브라키온 퀴리우 티니 아페칼뤼프데;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38b절)
퀴리에(Kuvrie;주여)는 '여호와'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성 문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브라키온(bracivwn;팔)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상징할 때 사용되었다(신7:9;9:29;왕상8:42;왕하17:36,J.H.Bernard). 아페칼뤼프데(ajpekaluvfqh;나타났나이까)는 '숨겨진 그 무언가를 드러내다'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누구에게 보여 주셨습니까? 라는 뜻으로 사53:1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비단 예수그리스도때뿐 아니라,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예수께서 전하는 바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눈앞에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들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예언자는 "그렇게 많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이 이토록 믿지 않으니 하나님께선 도대체 누구 앞에서 당신의 권능을 행하신 것입니까?"라고 한탄하며 예언하고 있다.
2. 믿지 못한 까닭(39-41절)
1) 능히 믿지 못함
(dia; tou'to oujk hjduvnanto pisteuvein, o{ti pavlin eipen jHsai?a",;디아 투토 우크 에뒤난토 피스튜에인 호티 팔린 에이펜 에사이아스;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39절)
에뒤난토(hjduvnanto;능히)는 믿음이 단순한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능력의 차원임을 보여 준다. 이 단어를 통해 본문을 '믿을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은'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A.Plummer). 팔린( pavlin ;다시)은 본문과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구약의 인용이 연계된 내용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이다. 디아 투토(dia; tou'to;이 까닭이니)는 뒤에 나오는 호티(o{ti;곧)와 연결되어서, 호티(o{ti) 절 이하의 내용이 구체적인 이유가 된다(H.W.Smyth).
이사야의 예언은 사람들이 믿지 못할 것임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들이 왜 믿지 못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다음 절에서 다시 인용되고 있다.
2)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결과
(Tetuvflwken aujtw'n tou;" ojfqalmou;" kai; ejpwvrwsen aujtw'n th;n kardivan...kai; nohvswsin th'/ kardiva/ kai; strafw'sin, kai; ijavsomai aujtouv".;테튀플로켄 아우톤 투스 옵달무스 카이 에포로센 아우톤 텐 카르디안…카이 스트라포신 카이 이아소마이 우투스;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40절)
본문은 사6:9,10의 개작된 인용이다. 이 인용은 오해의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불신이 하나님의 책임인 듯한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테튀플로켄(Tetuvflwken;멀게 하시고)은 현재 완료 형태로서 이미 눈이 멀어 버려 현재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상태임을 묘사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아예 볼 수 없도록 만드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목전에서 당신의 능력을 행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는 것조차 거부하고 보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하였다. 때문에, 하나님께선 그들의 눈을 감긴 채로 그냥 놔두셨고, 그들의 닫힌 마음을 닫힌 그대로 있게끔 만드신 것이었다.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을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들의 고집스런 악함을 그들의 소원대로 내버려두신 것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이렇게 기록한 이유
(tau'ta eipen jHsai?a", o{ti eiden th;n dovxan aujtou', kai; ejlavlhsen peri; aujtou'.;타우타 에이펜 에사이아스 호티 에이덴 텐 독산 아우투 카이 엘랄레센 페리 아우투;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1절)
독산 아우투(dovxan aujtou;주의 영광)에서 사용된 '주'란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뜻한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다가 '그의'라는 뜻인 아우투(aujtou)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앞으로 장차 태어나실 하나님의 영광을 지칭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사역 등 많은 부분에 대해 예언하였다(사7:14;9:6;11:1-5;40:34;42:1-4;53:1-12).
이사야는 우리가 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누가 믿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팔이 뉘게 나타났는가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의 영광'을 곧이어 연장시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들을 통해서 놀랍게도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창세 이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으며, 성부의 말씀과 더불어 구약 시대에도 찬연히 빛나고 있었음을 본문은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3.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들(42,43절)
1) 관원 중에서 믿는 자
(o{mw" mevntoi kai; ejk tw'n ajrcovntwn polloi; ejpivsteusan eij" aujtovn;호모스 멘 토이 카이 에크 톤 아르콘톤 폴로이 에피스튜산 에이스 아우톤;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42a절)
아르콘톤(ajrcovntwn;관원)은 '힘고 권력을 가진 지배 계층'을 뜻한다(Liddle & Scott). 또한 본문에서 적절히 번역되지 못한 카이(kai)는 '∼조차도'의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관원들 중에서조차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지배 계층이 아닌 피지배 계층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래도 꽤 존재하고 있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요3:1;막15:43).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동시에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으며, 많은 믿는 사람들을 획득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해 나가기 시작했다.
2) 그들의 두려움
(ajlla; dia; tou;" Farisaivou" oujc wJmolovgoun i{na mh; ajposunavgwgoi gevnwntai:;알라 디아 투스 파리사이우스 우크 호몰로군 히나 메 아포쉬나고고이 게논타이;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2b절)
본문에서 알라(ajlla;그러나)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이 의미를 살린다면, '관원들조차도 많이 믿긴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라고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W.Bauer). 호몰로군(wJmolovgoun;드러나게 말하지)은 '자백하다, 고백하다'의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미완료 과거시제이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조와 믿음을 증언한다는 뜻이다(W.Bauer). 이는 부정사 우크(oujc)와 함께 그들이 지속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상태로 지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였고, 하늘나라에서 내침당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유대인 집단에서 쫓겨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단순히 신앙 고백뿐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가장 부끄러운 신앙의 모습이었다(Westcott).
3)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영광
(hjgavphsan ga;r th;n dovxan tw'n ajnqrwvpwn ma'llon h[per th;n dovxan tou' qeou'.;에가페산 가르 텐 독산 톤 안드로폰 말론 에페르텐 독산 투 데우;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3절)
본문 서두의 가르(ga;r)는 '왜냐하면'의 뜻으로서 앞 구절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였기 때문이다'가 올바른 의역일 것이다. 톤 안드로폰(tw'n ajnqrwvpwn;사람의 영광)은 문자적으로는 '사람들의 영광'이며, 좀더 넓게 보면 '사람들로부터 얻게 되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광'은 '사람들이 주는 영광'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H.W.Smyth). 본문은 독산 투 데우(dovxan tou' qeou;하나님의 영광)와 '사람의 영광'을 직접 비교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귀에 들리지 않는 것보다는 귀에 들리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 것에 더 글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하고 사람의 영광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죄악된 인생들이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요 12:44~50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
예수그리스도의 강생 목적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세상에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까닭은 그 말씀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함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겐 그 말씀이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다.
1. 빛으로 오신 예수(44-46절)
우리는 예수의 음성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빛으로 오신 것이다.
1) 예수 믿는 것의 이중적 의미
( JO pisteuvwn eij" ejme; ouj pisteuvei eij" ejme;, ajlla; eij" to;n pevmyantav me,;호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우 피스튜에이 에이스 에메 알라 에이스 톤 펨포산타 메;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4절)
피스튜온(pisteuvwn;믿는)은 현재 분사 형태로서 정관사와 결합하여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피스튜온(pisteuvwn)이 보여 주는 시제가 현재이고 마찬가지로 뒤에 나오는 피스튜에이(pisteuvwn;믿는)도 현재형이므로 본문은 계속적으로 믿는다는 믿음의 현재성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본문은 '나를 믿고 있는 사람은…나를 보내신 이를 믿고 있는 것이며'가 된다.
예수께서 본문처럼 말씀하신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첫째는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강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믿고자 하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선 자신을 믿어야 함을 역설하시기 위함이다. 다른 그 어떤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으며, 하나님을 섬길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도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하나님을 믿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2) 예수를 보는 것의 이중적 의미
(kai; oJ qewrw'n ejme; qewrei' to;n pevmyantav me.;카이호 데로론 에메 데오레이 톤 펨프산타 메;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5절)
데오론(qewrw'n;보는)은 현재 진행 형태로 위와 마찬가지의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본문도 44절과 마찬가지로 현재형만을 사용하여 '지금 보고 있다'는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사용된 데오레이(qewrw'n;보는)는 육적인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J.H.Bernard). 그러므로 이 단어는 성부에 대한 깊은 지식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속적인 묵상을 통해 획득됨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Vincent).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감겨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자들, 즉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예수는 본문을 통해 외친다.
3) 빛으로 오신 예수
(ejgw; fw'" eij" to;n kovsmon ejlhvluqa, i{na pa'" oJ pisteuvwn eij" ejme; ejn th'/ skotiva/ mh; meivnh/.;에고 포스 에이스 톤 코스몬 엘렐뤼다 히나 파스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엔 테 스코티아메 메이네;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6절)
예수께선 위의 두 구절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일체성을 강조하신 후에, '왔나니'(ejlhvluqa;엘렐뤼다)가 주어를 함축하는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에고(ejgw;;나는)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믿는 자들'에는 파스(pa'";모든)라는 단어가 원문에 들어있으므로 '모든 믿는 자들'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며, 또한 개역성경에서 '세상에'로 번역한 부분의 전치사가 에이스(eij";안으로)로 되어 있으므로 '세상 안으로(어둠 안으로)'가 보다 더 정확한 번역이다.
예수께선 자신을 언제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자신의 사역을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이 죄악된 세상과 죄로 물든 인간의 심성을 온전히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빛되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뿐이다.
2. 예수가 오신 진정한 이유(47,48절)
예수는 심판을 선포하려 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 구원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심판의 말씀이 될 것이다.
1)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kai; ejavn tiv" mou ajkouvsh/ tw'n rJhmavtwn kai; mh; fulavxh/, ejgw; ouj krivnw aujtovn;카이 에안 티스 무 아쿠세 톤 레마톤 카이 메 퓔락세 에고 우 크리노 아우톤;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 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47a절)
레마톤(rJhmavtwn;말)은 '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심으로 보여 주신 '증거물'을 뜻하기도 한다. 즉 예수가 자신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하신 모든 말을 능력과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하신 모든 말을 총칭적으로 레마톤(rJhmavtwn)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L.Morris).
크리노(krivnw;심판하지)는 '구별하다'라는 의미와 동시에 '법정 앞에서 법적인 판결을 내리다'의 의미도 지닌다(W.Bauer).
예수는 본문을 통해 너희들을 판단하거나 현재의 너희의 모습에 대해 심판을 내리고자 하는 의사가 지금은 없다는 점을 말씀하고 계신다. 만약 지금 심판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과연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주고자 하는 것일까?
2) 구원하고자 온 예수
(ouj ga;r hlqon i{na krivnw to;n kovsmon ajll j i{na swvsw to;n kovsmon.;우 가르 엘돈 히나 크리노 톤 코스몬 알르 히나 소소 톤 코스몬;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7b절)
우(ouj;아니요), 알라(ajllaj;함이로라)는 영어에서의 not A but B 구문으로서, 'A가 아니라 B이다'라는 뜻이다(H.W.Smyth). 그러므로 예수는 본문의 구조를 통해 자신의 목적이 크리노(krivnw;심판하려)가 아니라 소소(swvsw구원하려)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또한 본문은 가르(ga;r;왜냐하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어서 앞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께선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자신이 이 땅에 내려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죄악에 대한 결과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심판과 정죄이며, 나머지 하나는 용서와 화해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후자에 있음을 본문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3) 마지막 날의 심판자
(oJ ajqetw'n ejme; kai; mh; lambavnwn ta; rJhvmatav mou...oJ lovgo" o}n ejlavlhsa ejkei'no" krinei' aujto;n ejn th'/ ejscavth/ hJmevra/:;호 아데톤 에메 카이 메 람바논 타 레마타 무…호 로고스 혼 엘랄레사 에케이노스 크리네이 아우톤 엔 테에스카테 헤메라;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48절)
아데톤(ajqetw'n;저버리고)과 람바논(lambavnwn;받지)은 현재 분사로 44,45절과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 두 동사도 현재 시제로 계속적인 행동의 현재성을 드러내 준다. 또한 아데톤(ajqetw'n;저버리고)은 '무효라고 선언하다, 인정하지 않다, 거절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람바논(llaban;받지)은 '선택하다, 자신의 소유로 가져가다'등의 의미를 지닌다(H.K.Moulton).
본문은 현재 선택하고 있는 행동과 마지막 날을 결부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저버리고 받지 않는 지금의 행동은 심판이 임하게 될 마지막 날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귀에 들려 주실 것이며 그들의 눈앞에서 행하셨던 표적들에 의해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3. 예수 선포의 권위(49,50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신 분이다. 그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행동은 곧 하나님의 행동이다.
1) 예수 선포와 성부와의 관계
(o{ti ejgw; ejx ejmautou' oujk ejlavlhsa, ajll j oJ pevmya" me path;r aujtov" moi ejntolh;n devdwken tiv ei[pw kai; tiv lalhvsw.;호티 에고…펨프사스 메 파테르 아우토스 모이 엔톨렌 데도켄 티 에이포 카이 티 랄레소;내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였으니, 49절)
아우토스(aujtov";친히)는 '그 자신이'라는 의미로서 행위의 주체를 다시 한 번 강하게 강조한 표현이다(H.W.Smyth). 다시 말해서 본문은 '아버지, 바로 그분께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본문은 구조상 '나 자신으로부터'를 의미하는 엑스 에마우투(ejx ejmautou';내 자의로)와 '아버지 그분으로부터'를 의미하는 파테르 아우투(path;r aujtov";아버지께서 친히)가 대칭적인 대조 구문을 형성하고 있다. '주셨으니'(devdwken;데도켄)는 현재 완료 시제로서 현재 주어 지금까지 지속되는 상태로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영생이라는 선물을 가져 오셨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어린양 예수께 친히 전할 말들을 명령하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친히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이다.
2) 성부 명령의 가치
(kai; oida o{ti hJ ejntolh; aujtou' zwh; aijwvniov" ejstin;카이 오이다 호티 헤 엔톨레 아우투 조에 아이오니오스 에스틴;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50a절)
엔톨레(ejntolh;;명령)가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뜻하는 단어로서 사용되기도 한다(H.K.Moulton). 본문에선 이 단어를 정관사 헤(hJ)와 같이 사용하여 '그 계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명령의 의미는 예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즉 예수에게 주신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본문에서 '그의 명령'이라고 표기한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섭리는 심판이 아니라 영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통해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락을 허락하시기를 그토록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본문을 통해 선포하고 있다.
3) 예수 선포의 특징
(ejgw; lalw', kaqw;" ei[rhkevn moi oJ pathvr, ou{tw" lalw'.;하 운 에고 랄로 카도스 에이레켄 모이 호 파테르 후토스 랄로;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50b절)
본문에서도 에고(ejgw;;내가)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선포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내가'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도 예수께선 하나님을 향하여 파테르(pathvr;아버지께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본문의 표현들을 통해 예수께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하나됨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J.C.Ryle). '말씀하신'(ei[rhkevn;에이레켄)은 현재 완료로서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 지속되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께 말씀하셨던 것만을 인간을 향하여 선포하셨다고 외치셨다. 이것은 예수가 녹음기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선 태초 이전부터 아버지와의 완벽한 의사소통을 통해 하나를 아버지의 말씀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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