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개념에 대한 신약적 고찰
유영기 (합동신학교 신약학 교수)
1. 서론
신약의 성전 개념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념임을 부인할 자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은 첫째로 성전이 신약시대 당시에도 그대로 존속할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제사가 날마다 계속적으로 드려지는 마당에 어떻게 성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형성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둘째로 관심되어지는 점은 이러한 신약적 성전개념과 구약의 성전개념과의 상관성에 대한 것이다.
첫째 질문은 성전에 대한 신약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옛날 성전에 대한 현대 정통 유대교인들의 사모함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정통 유대교인들 중에는 이천년 전에 파괴된 제 이 성전에 이어 제 삼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오래 전부터 계속해 왔고 이미 건축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소문이 논자의 귀에 까지 들려진지 오래다. 성전과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또한 성전 건축 준비가 완료되었다면 아무데나 교통 편리하고 경치 좋은 곳을 택하여 성전을 세우면 될 것인데 구태여 옛날 성전 터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정통 유대교인들에게 묻는다면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옛날에 성전이 세워졌던 이 장소 외에 이스라엘 땅 어느 곳도 성전을 세울 장소가 없다는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논자는 일명 ‘통곡의 벽 (Wailing wall)’으로 불려지는 성전 서쪽에 위치하는 벽에서 기도를 마치고 뒷걸음치며 나오다가 그 벽 쪽을 향하여 중얼거리며 절하고 그곳을 떠나는 유대인들을 종종 목격하였다. 그들에게 절하면서 무엇을 말하였느냐고 묻는 논자에게 “내년에는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을 마지막으로 기도드리고 이 곳을 떠난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렇게 옛 성전이 없어진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그 장소 외에는 어느 장소도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그 소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성전이 세워져 있는 신약시대 당시에 기독교 공동체가 성전이라는 견해야 말로 신약시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초대 기독교인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는가? 아니 어떻게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는 손으로 지은 곳(성전)에 계시지 않으신다”고 단언할 수 있었는가가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신약시대 당시 초대 기독교인들 이외에도 쿰란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영적 성전으로 간주하였다고 그 공동체의 문헌들에 근거하여 많은 학자들은 주장한다. 본 논문에서는 논문 제목에 보여주는 대로 우리의 관심을 신약에 국한하겠다.
둘째 질문에 대하여 간단하게 답하기 어려운 사실을 먼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전에 대하여 구약을 공통적으로 그 뿌리로 하고 있는 유대교인들과 초대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에 대한 초대교인들의 견해가 구약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답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어떠했는가를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가 어떠했는가는 살펴보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에 대한 초대교인들의 견해는 예수님의 성전 견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제 논문을 전개하는 순서는 첫째로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고찰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간주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초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이해하였는가를 고찰하려고 한다. 셋째로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와 하늘 성전의 관계를 고찰하려고 한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성전이라는 성전에 대한 신약적 개념과 구약성전 개념과의 상관성 에 대한 답을 얻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와 예루살렘 성전과의 관계를 고찰하려고 한다.
2. 성전과 예수님
성전과 예수님의 관계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하여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성전청결 사건임을 부인할 자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은 유대교인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라 하겠다 (막 11:15-18). 이 사건이 있은 다음 날 유대관원들이 전날 소란을 피운 예수님을 보고 그에게 와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도 질문이 하나 있는데 너희들이 그 질문에 답하면 나도 너희 질문에 답하겠다고 하시며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냐 아니면 사람에게로 서냐?”라고 물으셨다 (27-33). 유대관원들의 질문은 성전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는 권세가 무엇이며 또한 그 권세의 근원이 어디서 왔느냐 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답 대신에 세례요한의 세례의 근원이 어디로부터냐는 질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권세의 원천과 성격이 세례요한의 세례와 논리적인 관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가를 이스라엘에게 소개되는 원천은 세례요한의 세례였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막 1:11-12). 본 논문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선포된 내용이 시편 2: 7절과 사 42: 1절의 인용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시 2: 7절이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오를 때마다 불려진 ‘대관식 시’로서 선지자 나단의 예언 (삼하 7:12-16)과 연관하여 이해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나단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다윗은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는 것과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것과 다윗에게 허락한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단의 예언대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예루살렘 모리아 산 곧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대하 3:1; 7;11). 솔로몬에 의한 성전 건축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단의 예언은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와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삼하 7:13)”는 놀라운 예언적 선언에 관한 한 성취되었다기 보다는 성취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나단의 예언은 궁극적인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고 했던 다윗 왕국은 르호보암 때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졌고 주전 586 년에 유다가 멸망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모세에게서 볼 수 있다 (신 32:6)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장자이다 (출 4:22: 19: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다윗의 자손 중에 어느 개인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 고귀한 개념을 순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실현시킨 자가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을 예를 들어 보자.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가 이러한 일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왕상 11:11)”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다윗왕조는 솔로몬을 정점으로 점차로 쇠퇴하여짐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 예언은 아직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고 재해석되어 온 점이다. 예를 들면 솔로몬이 건축한 첫 번째 성전이 파괴된 뒤 이스라엘 포로로 바벨론으로 갔다가 고레스의 칙령에 의하여 두번째 성전이 다윗왕의 자손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건축되었을 때 메시야 사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슥 3장, 4장, 6장). 그러나 스룹바벨을 통하여 나단의 예언을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한 유대인들은 이 나단의 예언의 성취를 갈망하는 가운데 신약시대에 이르기 까지 이 예언은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는 메시야 사상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단의 예언을 최종적으로 성취시킬 자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고귀한 개념을 순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실현시킬 자어야 함은 자명한다 하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의하여 세례 받으실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었다 (참조 요 1:31, 34). 다시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진 자로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세례의 근원이 하늘로부터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서 소동을 피운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예수님은 성전 청결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을 새로 짓는 분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현재 성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성전을 다시 새로 지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성전을 새로 지어야 할 이유는 현재 성전의 파괴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현재 성전이 없어져야 할 이유를 밝히는 것이 간접적으로 성전을 새로 지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우선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 부서져야 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 위의 물음에 대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에스겔서 8장에 길게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마디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총체적인 부패였음을 알 수 있다. 헤롯이 지은 성전 역시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부패의 단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지적한대로 전 뜰이 장터가 되어버린 사실이다. 결국 이 부패한 성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무너진다고 하였다 (막 13: 2).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을 새로 지어야 할 이유는 단지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가 그 근본적인 그 이유가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새로 지을 성전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루살렘 성전과 하늘 성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와 하늘 성전을 고찰하는 가운데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님은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이 삼일 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참조: 호 6:2). 그런데 예수님이 지을 성전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막 14:58). 예수님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성전을 짓는다고 하셨을까? 이 말은 돌과 나무로 짓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건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모리아 산 다윗이 정한 장소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처럼 고정된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새로 짓겠다고 하신 성전은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중에 거하시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공동체를 성전으로 보셨다는 것이다. 성전에 대한 구약적 개념에 대하여 이미 다른 발표자에 의하여 상세하게 논의 되였기에 여기에서는 본 논자의 논제에 관련된 점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언약백성 공동체로서 성전개념의 뿌리는 성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성막을 만들도록 하신 목적에 대하여 기록한 출애굽기 29장 42절 - 46절에서 볼 수 있다. 여기 본문에서는 성막을 또 다른 이름으로 회막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기서 이스라엘과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42절).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말하신다 (45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것도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46절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 공동체로서 성전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기 위하여 성막을 만드실 것을 명령하시기 전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는 출애굽기 19장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와 같은 관계는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심과 연관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다: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출 19:12-13). 이러한 적대적 관계는 문맥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과 부정한 백성을 함께 거할 수 없는 사실에 근거되어짐을 알 수 있다 (출 19:10, 14, 22-23).
두 번째는 출애굽기 24장이다. 여기에서는 출애굽기 19장의 상황과 맞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모세를 위시하여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시내산에 올라가서 그들이 그곳에서 행한 행동과 그 결과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들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출 24:10-11; 참조 12, 14절).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무엇이 출애굽기 19장의 상황에서 출애굽기 24장 9절 이하의 상황으로 변하게 하는 분수령이 되였느냐는 점이다. 우리는 그 해답을 출애굽기 24장 4절 -8절에 나타난 사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더불어 행한 언약예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24장 6절은 희생제물의 피의 절반이 단 위에 뿌려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나머지 절반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려졌다는 것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8절). 여기에는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미 지적한 대로 희생의 피가 단 위에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뿌려졌다는 점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카슈토 (U. Cassuto)는 예물로 드려진 피의 절반은 여호와를 대표하고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이 예식이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연합(joining together)을 예시하며 또한 그들 사이에서의 언약 행위의 실행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둘째로 언약의 피가 죄 사함과 관련되어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하여 챠일즈 (B. S. Childs)의 설명이 주목된다. 그는 희생의 장소 안에 있는 단에 뿌려진 피는 이 피를 제물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한다. 니콜슨 (E. W. Nicholson) 역시 출애굽기 29장 20-21절과 레위기 8장 22-30절을 근거로 하여 희생제물의 피는 그 피에 접촉되는 것에게 거룩함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니콜슨은 출애굽기 19장의 상황과 출애굽기 24장 언약 예식 이후에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출애굽기 24장 9-11절의 내용은 출애굽기 24장 3-8절의 언약 예식이 마침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니콜슨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스라엘 총회는 피 뿌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봉헌되어졌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 언약 예식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 즉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
우리는 언약예식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 뿌리는 일은 구약에서 단 한번 밖에 없는 사건임을 주목할 수 있다. 또한 이 피 뿌림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백성이 된 점이 주목된다. 이 일 후에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40야를 있으면서 성막을 세우는 일에 대한 지시를 받게 되는 것을 본다 (출 24:12-31: 18). 성막은 이미 위에서 지적한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언약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또한 이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백성 중에 거하심과 거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제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기 24장의 언약예식이 성막을 세울 근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성막은 한 곳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그들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를 덮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 10:33-34).
위의 사실과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제 우리는 출애굽기 24장의 언약의 피와 이에 근거한 성막건축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말씀하신 ‘언약의 피’ 즉 새 언약의 피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려고 한다 (마 26:28; 막 14:24).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마태복음 26장 28절의 언약의 피를 출애굽기 24장 8절의 언약의 피와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는냐는 점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출애굽기 24장의 언약의 피가 속죄의 피로 해석되는 탈굼 (Onkelos, Yerushalmi 1)을 지적한다. 그닐카 (Gnilka)는 출애굽기 24장 8절의 언약의 피를 죄 사함과 연관시키는 데에는 반대하면서도 탈굼 onkelos와 Yerushalmi 1에서 이러한 속죄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언약적 속죄로서 해석한 헹겔의 논평은 길게 소개할 가치가 있다.
“예수의 죽음을 출애굽기 24장 8절과 관련하여 언약적 희생으로 간주하는 해석은 마가복음 14장 24절의 잔에 대한 말씀에 이미 전제되어 있고 또한 바울 (이전)의 전통이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의 새 언약과 관련시켜 발전시켜 놓은 해석인데,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이러한 해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탈굼 (Onkelos, Yerushalmi 1)이 출애굽기 24장 8절의 언약적 희생에서 피흘림이 가져다주는 속죄의 효과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또한 셈어 문체로 된 마가복음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는 형태 역시 종말론적이고 언약적인 희생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의 속죄적 이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4장 8절의 언약의 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에서 깨끗함을 받게 하는 언약의 피로 이해될 수 있다. 출애굽기 24장 8절을 암시하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마태나 마가가 예수님의 죽음을 죄 사함을 위한 언약적 희생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다른 새 언약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시내산 언약은 짐승을 희생시켜 그 짐승의 피로 세운 것인 반면에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은 예수님께서 헤롯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그대로 존족 시키기 위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패할 대로 부패한 헤롯성전을 솔로몬 성전과 같이 파괴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헤롯성전이 곧 허물어질 수밖에 없음을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삼일 만에 세우실 것을 예언하심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우리 예수님께서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하신 그 성전을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새 언약 공동체로 보았는가를 고찰하도록 하겠다.
3. 성전으로써의 기독교 공동체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라고 하는 관념은 바울 서신에 나타난 새 언약과의 관계에서 발견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바울 서신에 있어서의 새 언약과 성전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 개념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 내주하신다는 개념과 관련지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전 14:24-25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하면 불신자가 들어와 믿게 되고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참으로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다”라고 선언할 것이라고 말한다 (25절). 이 절은 아마도 사 45:14와 슥 8:23 (참조. 단 2:25)을 암시하는 것 같다. 마틴 (R. Martin)은 이것을 간파하고, “마지막 날에 대해 예언된 것, 다시 말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으로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일은 이제 현실로서 실현되었다”라고 언급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의 참된 예배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심을 의미한다.
고린도후서 6:16절 이하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hJmei" gaVr naoV" qeouv e[smen zwvnto")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6절).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를 그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라고 하는 구약의 성전 개념에 보여주는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의 인용은 레위기 26:11-12절과 에스겔 37:27절에서 취해진 것 같다. 이 두 구절은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밝히 보여준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는 바울의 인용은 위의 사실을 지지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전에 대한 약속과 함께 언약 백성에게 주어진 축복을 예언하는 사무엘하 7:14절의 나단의 말을 틀에 매이지 않고 인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라는 표현은 사무엘하 7장 14절의 “아들”을 일반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참조. 사 43:6). 구약에 대한 바울의 틀에 매이지 않는 인용은 구약의 예언이 기독교 공동체, 즉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참조. 고전 6:2).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사이에 성소를 세울 것이라고 하는 에스겔의 예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참조. Jub 1:17).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이 성전이 속죄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라는 점이다. 로마서 12장 1-2절에서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몸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로마서 15장 16절에서는 그가 이방인들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절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 내에 어떤 속죄의 기능이 있음을 시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성전 개념에 대한 바울의 영적인 해석을 접하게 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공동체가 속죄의 기능이 없이도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0-16절에서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터로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을 기독교 공동체라고 하는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이와 같은 생각을 강화시킨다. 기독교 공동체를 영적인 건물에 비유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를 성전에 비유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비록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서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가 성전이시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가 영적인 건물의 기초 (qemevlion)라고 하는 사실 (v. 11)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 공동체가 성전이라는 관념도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확실히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가 성전의 기초라고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조. 엡 2:20-22). 고린도전서 6장 15절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의 지체의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서 그의 몸의 각 지체들이 또한 성령의 전이라고 말한다 (고전 6:19). 기독교 공동체가 성령의 전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념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성전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성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고 하는 에베소서 2장 18-22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인 거룩한 성전의 모퉁이 돌로 묘사되어 있다.
요컨대 기독교 공동체는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약속을 내포하는 새 언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성취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4.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와 하늘성전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하늘성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의 성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하늘의 성전이야말로 참된 장막(hJ skhnhV hJ ajlhqinhv)이며, 이에 대비되는 예루살렘 성전은 모형(uJpovddeigma)과 그림자(skiva)라고 말한다 (히 8:5; 9:23). 하늘의 성전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며 이 창조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보다 더 위대하고 완전한 장막이다 (히 9:11f, 24).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목되는 점은 히브리서 저자가 이러한 하늘의 성전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의 성전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히 9:24; 참조. 6:19f), 죄를 영구히 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통해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다 (히 9:12; 10:10ff). 그리스도는 영원히 대제사장이시지만, 그의 대제사장 직분이 지속되는 것은 희생 제사의 반복을 통해서가 아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드리신 희생 제사는 신자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오직 한 번으로 충분한 제사이다 (히 9:22; 10:12ff).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이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의 새 언약의 성취라고 지적한다 (히 10:16f).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가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히 10:18).
우리는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와 하늘 성전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히브리서 저자는 위와 같은 사실을 논증하기 위하여 강조하고 두 가지 면을 고찰하여야 한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행하는 속죄 제사는 죄를 사하기에 불충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희생 제물은 죄를 실제적으로 제거할 수 없고 다만 죄를 기억나게만 할뿐이라고 논증한다 (히 10:1-4). 둘째는 진정한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논증한다. 이제 레위의 속죄 제사가 불충분함을 히브리서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세 가지 점부터 고찰하겠다.
1) 레위 속죄제사의 불충분성
첫째로,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약점” (weakness, a*sqevneian, 히 7:8)가운데 임명되었다. 본문에, 대제사장들의 연약함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대제사장의 수가 많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죽기 때문에 한 사람이 그 직분을 영원히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절). 또한 그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려야만 한다 (27절). 이러한 제사장들과 희생 제물이 다수라는 것 자체가 죄 사함을 위한 레위 제사제도의 불완전성에 대한 표시인 것이다.
둘째로, 아론의 제사장들은 천상의 실재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로서 봉사하였다 (히 8:4 이하). 5절의 “모형과 그림자” (uJpodeigmati kaiV skia'/)는 지상의 장막이 하늘의 참 장막을 암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모형이라는 말은 지상의 성막이 그 원형인 천상적 실재의 모형임을 지적해 준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만드는 “실체”를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그림자”라는 단어는 레위의 제도가 레위 제사제도의 실체가 될 새로운 제사제도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제사장직이 세워지게 되면, 그것은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던 옛 제도를 대신할 뿐 아니라 옛 것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질서는 옛것의 원형이며 실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에게 있어서 레위 제사제도의 실체는, 새 언약의 약속들, 즉 더 좋은 약속들로 제정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히 8:6). 따라서 저자에게 있어서 레위 제사제도는 훨씬 좋은 그리스도의 제사제도를 통해 새 언약이 제정되면 폐기되는 것이었다.
셋째로, 아론 제사장들에 의하여 드려진 희생 제물은 제사 드리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히 9:9). 저자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실제적으로 죄를 제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히 10:4). 그에 의하면 짐승의 피로 드리는 희생 제사의 기능은 양심의 문제보다는 외적인 것에만 국한된다. 히 9:10은 짐승의 피로 드리는 희생 제사는, 오직 육체를 위한 규정들인,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같은, 외적인 것들만 다루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는 레위의 제도가 제사 드리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히 10:1-4). 레위 희생제사의 끊임없는 반복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기억하게 할뿐이었는데, 왜냐하면 만일 이와 같은 제사들이 드리는 자들의 양심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죄를 깨닫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 10:2이하).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새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소멸한다는 것을 저자가 강조한다는 점이다 (히 8:13). 그는 이러한 생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a) 첫 언약을 무흠한 것이 아니었다 (히 8:7). 첫 언약은 흠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좋은 언약, 즉 새 언약으로 바꾸어져야만 했다. b) 옛 질서는 현 시대를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옛 질서의 규례들은 실체에 의해 그림자가 대치되고 성취되는 혁신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그 역할을 맡고 있던 것일 뿐이다 (히 9:10).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 (tw'n genomevnwn ajgaqw'n)의 대제사장으로 나타나시면, 그 “장래 좋은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사제도는 중지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히 9:11). c) 특별히 아론의 제사장들에 의하여 드려진 죄 사함을 위한 짐승의 제사는 “장래 좋은 일의 그림자”였다 (히 10:1이하). 분명히 저자에게 있어 레위 제사제도가 예시한 “장래 좋은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백성의 죄를 위하여 제물을 드릴 필요가 더 이상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2) 죄사함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이제부터 저자에게 있어서는 장래 좋은 일의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짐승의 제사는 죄 사함의 효력이 없었고, 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린 그리스도의 제사에 의해 대치되고 성취되었다는 견해를 고찰하겠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죄 사함에 대한 약속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셨다 (히 7:26).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히 8:6), 말하자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히 9:15; 12:24). 히 9:13 이하에서 저자는 그리스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diaqhvkh" kainhV" mesivth")이심을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4절 이하; 12:24).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첫 언약 하에서 범죄한 자들을 구속하여 영원한 기업을 얻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심을 지적한다 (15절).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로 인한 죄 사함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을 백성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제물로 드리셨다는 저자의 확신을 주목해야 한다 (히 7:27; 9:12, 26; 10:10-14). 그러므로 저자는 백성의 죄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단번에 사하여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히 10:12 이하, 18).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납득시키기 위해, 저자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자신을 그의 형제들과 동일시하셨다 (히 2:11 이하; 5:1). 둘째,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아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것이다.
구약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 임명되어야 한다 (레 16). 그렇다면 유다 지파에 속한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전통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될 자격이 없으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시 110:4과 창 14:8 이하를 히 5:6 이하와 7:1 이하에서 언급함으로, 레위 제사제도를 통해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으므로 아론의 후손이 아닌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논증할 수 있게 되었다 (히 7:11-12). 저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유다 지파에 속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반차를 따른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 7:17). 저자는 7:1 이하에서 멜기세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 그는 왕이다 (의와 평강의 왕 - 1절 이하). b) 그는 시간을 초월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 3절). c) 그는 변함이 없다 (그는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 - 히 7:3). 위의 설명을 통하여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멜기세덱과 유사한 점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께서도 역시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육체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다 (히 7:11-16). 멜기세덱이 시간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것처럼 (히 7:3) 그리스도 역시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생명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대제사장 직분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 사실을 논증하기 위하여 세 가지 점을 제시한다 a) 그의 직분은 영원하며 죄가 없다. b) 그의 직분은 모형과 그림자의 실체가 되는 하늘의 참 성막에서 실행된다. c)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 모든 죄를 사하신다.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아론 대제사장직의 불충분성과 대조한다.
a) 아론의 제사장들이 죽을 수밖에 없으며 죄를 범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반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영원무궁하다. 그는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 (히 7:24).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 분이시다 (히 7:26 이하).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을 사람들의 죄를 위한 희생으로 드리셨다. 이 점은, 백성들의 죄를 위한 희생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들의 죄를 위한 희생을 먼저 드려야 하는, 아론의 대제사장직보다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직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히 7:27).
b) 구약의 제사장들이 첫 언약에 근거하여 천상적인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섬기는 자들인데 반해 (히 8:4 이하), 그리스도께서는 더 뛰어난 제사장직분을 얻어 더 좋은 언약, 즉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단번에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셨다 (히 8:6; 9:11 이하).
구약의 제사장들은 외면적인 성소에 들어갈 뿐이다 (히 9:6). 분명히 레위의 제사제도 아래서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올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서 (히 9:11), 자신의 피를 흘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온전한 장막, 거룩한 곳, 바로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셨다고 강조한다 (히 9:11 이하, 24).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자에게 그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히 4:19; 9:15, 23; 10:19 이하).
c) 구약의 제사장들이 드린 제물이 드리는 자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반면 (히 9:9),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들을 그들의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 (히 9:14).
저자는 레위 희생제사의 끊임없는 반복은 실제로 죄악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기억나게 할뿐이라고 말한다. 이 것과 비교하여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를 통하여 단번에 죄를 속하는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히 10:14 이하). 아론의 대제사장직과 그리스도의 직분과 대조를 통한 지속적인 강조점은, 레위의 제사가 절대로 죄를 제거하지 못하는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든 시대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이다 (히 7:27; 9:12, 26; 10:10, 12, 14; 10:18).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모든 죄 사함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드려진 단번의 제사를 종말론적이라 생각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3) 하늘 성전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늘 성전에서의 예배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는 예수께서 신자들의 선구자(πρ?δρομο?)로서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셨다고 지적한다 (히 6:19f; 9:24; 참조. 요 14:2). 본래 선구자라는 것이 뒤따라오는 자들에게 길을 닦아주기 위해 먼저 시작하는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자신의 몸이신 휘장 사이로 길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전인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는 일과 관련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한 편으로 신자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순례자들이라고 말하면서 (히 3:7-4:16; 10:19-12:29), 다른 한 편으로 신자들은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왔다고 지적한다 (히 12:22). 그렇다면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이 하늘의 예루살렘 입성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지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늘의 예루살렘에서의 예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히 12:22ff).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 스스로가 제단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히 13:10, 15). 그는 또한 이 제단을 속죄제 (레 4:1ff), 특히 대 속죄일의 연례적인 속죄제사와 대조하여 언급하고 있다 (레 16장). “장막에서 섬기는 자는 먹을 권리가 없나니”라는 구절과 희생제물의 고기가 진 밖에서 완전히 불살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은 히브리서 저자가 대 속죄일의 연례적인 희생 제사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이 된다 (레 7; 참조. 고전 9:13; 10:18). “신자들 스스로가 제단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 히브리서 언급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와 같이 속제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느냐는 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히브리서 13장 12절 이하에서 찾을 수 있다. 12절 이하에서 이 제단이 예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 신자들이 드리는 속죄제사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에게 더 이상 속죄 제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 10:18).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에서, 레위 제사장들은 그들이 드린 제물에 동참할 수 없었던 반면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동참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에 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항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격려하고 있다 (히 13:15). 그는 여기에서 말하는 희생 제사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와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히 13:15f). 그는 또한 이러한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단언한다 (히 13:16). 여기에서 말하는 희생 제사들이 죄사함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신자들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한 노정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곳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다 (히 12:22ff).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단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그 제단은 신자들의 죄사함을 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제사를 드린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라는 관념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낯설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관념은 결과적으로 예수께서 기초를 놓으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라는 관념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신자들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임재를 강조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에베소서 2장 18절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라는 개념에는 신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이 그리스도를 통한 신자들과 하나님의 교제라고 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5.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초대기독교인들의 태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초대교인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간접적으로 히브리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전에 대한 초대교인들의 태도는 예수님의 성전 태도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이미 성전과 예수님에 대한 주제에서 이미 고찰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분수령은 성전 청결 사건이요 제자들과 초대교인들의 분수령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과 예루살렘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갈라지는 의미를 깨닫게 됨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분수령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누가가 성전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복음서는 천사가 성전에서 사가랴에게 나타나신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눅 1:5-22), 예수의 승천을 목격한 자들이 성전에 머물러 하나님을 찬송한 사건으로 끝맺는다 (눅 24:53). 예수는 태어나신 후에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가셨다 (눅 2:22-39). 또한 그는 성전에서 부모에게 발견되셨다 (눅 2:41-50). 그는 돈 바꾸는 자들을 성전으로부터 쫓아내셨다 (눅 19:45f). 사람들은 그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목격했다 (눅 19:47-20:1ff). 예수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후에 그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고 운명하셨다 (눅 23:45f). 도우세이 (J. Dawsey)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성전 (?ερ?ν)이 고대의 절기 때의 순례지이였으며 절기 시에 선포와 예배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서, 누가복음에 있어서의 성전이라고 하는 주제는,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태로 주님이 나타나심을 특징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그의 성전을 정화하실 것이라는 기대의 성취를 특징짓는다고 언급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사도행전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누가는 사도들이 성전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지적한다 (행 5; 참조. 3:11-26). 더 나아가서 몇몇 구절은 신자들이 성전에서의 예배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행 2:46; 3:1-10; 참조. 눅 24:52f). 누가에 의하면 바울은 성전의 의식들과 제도들을 지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행 21:26; 24:6, 12, 18; 26:21).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누가복음에 관한 한 누가에게 있어서 성전이 교회로 대치되었다고 가정하기 어렵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사항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성전개념은 누가복음에서도 언급된바와 같이 예수님의 성전청결과 예수님께서 성전휘장이 찢어진 후에 운명하심을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누가에게는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성전개념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어떻게 서로의 집에서 만나서 가르치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선포하고), 빵을 나누고 하나님께 기도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행 2:42-47; 4:23-31; 5:42; 12:12). 이와 더불어 사도행전 7장 48절에 나타난 스데반의 고백이 주목된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 48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라고 강조한다. 여기 ‘손으로 지은 곳’은 문맥적으로 (46절-47절) 볼 때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48절은 누가나 혹은 스데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참조. 17:24; 막 14:58; 히 9:24). 물론 하루아침에 성전개념이 교회로 대치되어 초대교인들이 성전과의 관계를 끝을 맺은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초대교회 교인들의 특이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같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열쇠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원리와 현실의 불일치의 예를 사도행전을 통하여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유대기독교인들의 견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을 때” (행 11:1) 그들은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행 11:18; 참조 마 28:18-20; 행 2: 38). 그러나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을 듣고 베드로를 힐난하였다고 하였다 (행 11:2-3 참조: 행 10:9-16; 갈 2:11-14). 이 점에 있어서 자신들의 새 언약 공동체가 성전이라고 주장했던 쿰란 공동체의 문서들 가운데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서로 다른 언급을 볼 수 있는 것은 주목된다.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언약 관계와 관련하여 성전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다메섹 문서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린 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 가운데 하나는 당신의 성소로부터 얼굴을 숨기시는 일이었다고 지적한다 (CD 1.3; 참조. CD 2.8). 다메섹 문서 내에서 9-16장의 법령이 공동체의 회원들은 비록 엄격한 규제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성전에서의 제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반면에, 6장 11절은 공동체의 회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공동체의 규례집(Rule of the Community, Manual of Discipline: 1QS)에서는 성전과 그것의 타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과 같은 이 공동체 회원들의 정결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위와 같이 이 공동체 문서 안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암시하는 바는, 비록 다메섹 문서가 성전으로서의 공동체라는 사상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성전에서의 제의에 참여하는 일은 규율을 통해 엄격하게 금하였고, 그러는 동안에 성전으로서의 공동체라는 사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할 만한 이념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쿰란 공동체의 태도가 어느 정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초대교회 교인들의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근거로서 초대교인들이 “성전이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라는 기록을 제시할 수 있겠다 (행 2:46). 성전에 대한 초대교회교인들의 개념이 초대교회 공동체인 교회로 하루아침에 대치되어 초대교인들이 성전과의 관계를 곧바로 끝을 맺은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쿰란 공동체의 태도를 그냥 그대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초대교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의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몇몇 구절들은 달리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구절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선교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는 사도들이 성전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지적한다 (행 5; 참조. 3:11-26). 물론 바울이 성전의 의식들과 제도들을 지킨 것으로 여겨지기 구절들도 있다 (행 21:26; 24:6, 12, 18; 26:21). 이와 같은 사실 역시 “유대인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한 바울의 고백처럼 선교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다른 측면에서 말한다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간주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초대교회 교인들의 특이한 태도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과 그 기능이 존속하는 가운데 그와 같은 성전개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독특한 개념이며 또한 견지하기 어려운 개념인가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다시 한번 신약의 성전 개념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념임을 보여준다 하겠다.
6. 결론
구약이나 유대교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성전은 속죄의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며 또한 하나님이 그 언약백성 중에 거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신약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그 자체 내에 속죄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음에도 자신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유대교적 관점에서 볼 때 속죄의 기능이 없는 기독교 공동체는 성전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간주했으면서도 속죄의 제사를 드린 기록이 없는 쿰란 공동체가 어떻게 속죄의 기능을 행하였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언급된 문서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쿰란 공동체가 성전의 속죄 기능을 어떻게 대치하였는가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쿰란 공동체가 속죄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자체 내에 속죄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공동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완전한 행실”이 피의 제사를 대신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이 공동체는 성결의 영이 그들 공동체의 속죄 기능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성결의 영이 공동체의 회원들로 하여금 완전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제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공동체가 속죄의 기능을 수행하는 성전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쿰란 공동체와 달리 기독교 공동체를 성전으로 간주하면서도 속죄의 기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약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날마다 드리는 속죄의 제사는 그림자 혹은 모형적인 것으로 죄 용서를 위한 언약적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의 죽음을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죄 사함의 약속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한 모든 희생을 대신하여 드리신 단번의 제사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레위 제사장들이 천상적 실체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봉사했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올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통하여 모형과 그림자의 실체인 참 장막 곧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하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더 좋은 약속들에 근거하는 사역으로 (히 8:8-12 - 렘 31:31-34에서 인용), 첫 언약 하에서 범죄한 자들을 구속하셨다. 또한 저자는 렘 31:31-34절을 인용하면서 “이제는 죄 사함이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 죄를 위한 어떠한 희생 제사도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새 언약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때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들의 양심을 그들의 죽은 행실로부터 정결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렘 31:31-34의 죄 사함의 약속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가 필요치 않다고 강조한다 (히 10:18).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성전이라고 드러내어 말하는 구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터전이며 머릿돌이요 기초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고전 3:11; 엡 2:20f). 이러한 칭호들은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 개념이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새 언약 백성들을 위한 궁극적인 속죄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를 보증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참조. 요 2:21; 고전 15:3; 히 9:14f, 26; 10:12, 18). 그러므로 구약에서나 유대교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던 그 장소 밖에 어느 곳에 세워진 성전도 성전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죄 용서를 위한 언약적 희생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계없는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성전은 성전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쿰란 공동체가 속죄의 기능을 자체 내에서 수행하였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정당한 주장이라면 우리는 영적인 성전으로서의 공동체 개념에 대해 사해 사본과 신약 성경이 대조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속죄의 장소가 아닌 반면에, 사해 사본에서는 바로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속죄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해 사본에 의하면 메시아의 시대의 종말론적인 성전은 더 이상 속죄의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도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공동체는 메시아의 시대가 오면 죄의 근원이 제거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QS 4.6-8; 참조. 11QTem 29.7-10). 여기서 우리는 쿰란 공동체가 종말론적인 성전과 관련하여 기대했던 그 무엇은, 초대 교회가 이미 그들 가운데에서 실현되었다고 믿었으며 동시에 장차 완성되기를 고대했던 바로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엡 2:20; 히 9:19ff).
구약이나 유대교에서 성전은 하나님이 그 언약백성 중에 거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신약의 성전개념은 구약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그리고 죄 용서를 위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함께 초기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성령과 관련하여 기독교 공동체를 성령의 전이라고 말한다 (고전 6:19). 기독교 공동체가 성령의 전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념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6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 (hJmei" gaVr naoV" qeouv e[smen zwvnto")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6절).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를 그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라고 하는 구약의 성전 개념에 보여주는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성전개념에 대한 신약적 고찰을 마치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논자의 고찰이 신약 성경을 바로 이해한 논증이라면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성전과 하늘 성전의 관계를 모형적 혹은 그림자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마치 성막이 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성전이 앞으로 세워질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듯이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성전은 모형 (구약성전)에 대한 실제로서 장차 완성될 하늘성전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지어져 가고 있다 (엡 2:20; 히 10:22).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이 너무 확실하기에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 하늘의 예루살렘 입성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지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늘의 예루살렘에서의 예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2-2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보이지 않더라. 또 내가 보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계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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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하였다 (마 12:14; 막 3:6).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에 관한 것이 죄목으로 제시되었음이 주목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증거를 찾을 때에 비록 거짓 증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한 증거에 근거하여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는 물음은 당시에 종교인들이 성전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마 26:60-62; 막 14:58).
2. 우리는 문헌을 통해 onias 4세가 주전 161년 경에 애굽으로 이주하여 Ptolemy 6세의 도움을 받아 Leontopolis에 성전을 짓고 사독계 대제사장 관할 하에 예루살렘 성전 형식에 준한 제사의식이 230년간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일반적으로 애굽에 사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성전이 아닌 onias 집으로 불려졌고 거부되었다. 그래서 애굽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계속하였다. 이 성전에서 사역했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 사역이 금지되었다 (부루스, 신약사, p. 21, 각주 7). 이 성전 이후 유대 역사 중에 예루살렘이 아닌 어떤 곳에도 성전이 세워진 일이 없었다. 시온주의를 주창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아프리카 우간다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하도록 권하였을 때 결국 지금의 팔레스틴 땅을 고집한 이유도 옛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 ‘통곡의 벽’으로 불려지는 이 벽에 가까이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과 더불어 하얀 종이 조각들이 돌과 돌 틈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그 벽 안 쪽에 비록 이천년 전이었지만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옛 성전의 울타리가 되었던 이 벽은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에게 소망을 싶어주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되기에 일명 통곡의 벽으로 불려지는 이 벽을 ‘소망의 벽’으로 부르고 싶다. 욥바 문 (Jappa Gate) 옆에 있는 다윗의 요새(David‘s Citadel)라고 불려지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명해 주는 박물관에서 매년 4월부터 10월말까지 거의 매일 저녁마다 요새 안에 이곳저곳을 탐조등 (search-light)으로 비추면서 요일에 따라 히브리어 영어 불어로 예루살렘 삼천년 역사를 설명하는 라이트 쇼(light show)가 있다. 다윗의 요새라는 이름은 이곳이 다윗이 살았던 장소이기 때문에 불려지는 이름은 아니다. 우리가 공연을 시작하면서 마치 세계 권투타이틀 시합을 선언하는 것처럼 외치는 말을 듣게 되면 신약시대에 옛 성전 터가 얼마나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중요했으며 또한 그것이 오늘의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Israel was the center of the world. Jerusalem was the center of Israel. The Temple was the center of Jerusalem. The Holy of Holies was the center of the Temple. The Ark was the center of the Holy of Holies. The Ark was on the Rock. The Rock was the foundation of the world.
4. B. Gartner, The Temple and the Community in Qumran and New Testament, SNTSMS 1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65), pp. 4-46; J. Baumgarten, Studies in Qumran Law (Leiden, 1977), pp. 39-100; G. Klinzing, Die Umdeutung des Kultus in der Qumrangemeinde und im NT, SUNT 7 (Go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71), pp. 50-93.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언약 관계와 관련하여 성전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다메섹 문서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린 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 가운데 하나는 당신의 성소로부터 얼굴을 숨기시는 일이었다고 지적한다 (CD 1.3; 참조. CD 2.8). 다메섹 문서 내에서 9-16장의 법령이 공동체의 회원들은 비록 엄격한 규제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성전에서의 제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반면에, 6장 11절은 공동체의 회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공동체의 규례집 (Rule of the Community, Manual of Discipline: 1QS)에서는 성전과 그것의 타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과 같은 이 공동체 회원들의 정결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위와 같이 이 공동체 문서 안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암시하는 바는, 비록 다메섹 문서가 성전으로서의 공동체라는 사상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성전에서의 제의에 참여하는 일은 규율을 통해 엄격하게 금하였고, 그러는 동안에 성전으로서의 공동체라는 사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할 만한 이념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이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영적인 성전이라고 간주함에 대한 것이다. 영적인 성전으로서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이 공동체가 스스로를 “든든한 집”(sure house)이라고 부르며 회원들을 “사독의 자손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이 공동체를 “이스라엘을 위한 성결의 집”이나 “이스라엘 내에서의 진리의 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이 공동체가 스스로를 영적인 성전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둘째로 만일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를 거부했다면, 이 공동체는 무엇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대치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 점들은 성전으로서의 공동체의 기능이 속죄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I첫째로 공동체의 규례집 9장 4-5절은 피의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과 “완전한 삶”으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They shall atone for guilty rebellion and for sins of unfaithfulness that they may obtain loving kindness for the Land without the flesh of holocausts(burnt-offering) and the fat sacrifice. And prayer rightly offered perfection of way as an acceptable fragrance of righteousness, and perfection of way as a delectable free-will offering.” G. Vermes, The Dead Sea Scrolls in English (New York: Penguin Books, 1975[1962]), p. 87.
셋째로 “성결의 영”은 공동체의 속죄 기능의 근거를 제공한다. 성결의 영은 공동체의 회원들로 하여금 완전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회원들의 완전한 삶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피 흘리는 제사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는 성결의 영이 거하시는 곳,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성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공동체의 규례집 8장 5-7절은 공동체의 속죄 기능이 심판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특히 속죄의 대상이 땅일 때 더욱 그러하다.
“When these are in Israel, the Council of the Community shall be established in truth. It shall be an Everlasting Plantation, a House of Holiness for Israel, an Assembly of Supreme Holiness for Aaron. They shall witness to the truth at the Judgment, and shall be the elect of Godwill who shall atone for the Land and pay to the wicked their reward. It shall be that tried wall that precious corner-stone, whose foundations shall neither rock nor sway in their place (Isa 28:16)” (Vermes, DSSE, 85).
요약하자면, 이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주장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를 거부했다. 그들 공동체를 영적인 성전이라고 여겼다. 성전과 새 언약의 관계에 대해서,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당신과의 언약을 맺을 자들을 위해서 “든든한 집”을 세우셨다고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든든한 집”은 “사독의 자손들”에게 약속된 것인데, 그들은 공동체의 모든 회원들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실제로 사독의 자손이 아닌 공동체의 회원들도 성전에서 섬기는 특권을 누릴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사독의 자손들에게 약속된 든든한 집은 영적인 성전으로서의 공동체 개념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생각은 이 공동체가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진리의 집”, 혹은 “이스라엘을 위한 성결의 집”이라고 불렀던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영적인 성전으로서의 공동체의 기능과 관련하여, 이 공동체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속죄의 기능을 가졌다고 확신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완전한 행실”이 피의 제사를 대신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이 공동체는 성결의 영이 그들 공동체의 속죄 기능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성결의 영이 공동체의 회원들로 하여금 완전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제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공동체가 속죄의 기능을 수행하는 성전이라고 생각했다.
이 공동체의 규칙들이 고도의 정결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공동체 내의 속죄 기능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의 하나님의 임재와도 관계된 것이라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자신들이 성결의 영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정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은 정화와 고도의 정결성의 유지가 그들의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가능케 했다고 생각했다.
5. 요한복음 2:13-22에서는 성전청결사건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성전된 예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 계시록 21:22에서 어린양 예수가 바로 성전임을 말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을 고찰하기에는 전승적 논의 (겔 40-48과 슥 3-4의 성전 재건; 유대 문헌들)가 불가피하게 논의 범위가 너무 확대되어야 하겠기에 본 논문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6. 김세윤, 예수와 바울(참말, 1993), p. 139.
7. 이사야 42:1에 대한 고찰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연관성이 전혀 없어서가 아님을 밝힌다.
8.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Exodus, ET (Jerusalem, 1967), p. 312. 카슈토는 계속하여 말한다: “in this manner the union between Yahweh and the people is created, since the altar and the people share the common blood" (Ibid.); 참조. R. Clements, Exodus: Commentary CBC (Cambridge, 1972), p. 159. P. Hyatt 역시 이 특이한 점을 주목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in the OT such a rite is never repeated, although in Israelite sacrifices the blood was sometimes thrown upon the altar (eg. 29:16; Lev 1:5, 11)" (Commentary on Exodus, NCB (Lodon, 1971), p. 256).
9. B. Childs, Exodus: A. Commentary, OTL (London: SCM, 1977), p. 506.
10. Nicholson, God and His People: Covenant and Theology in the OT (Oxford: Clarendon, 1986), p. 172 (참조 “The Covenant Ritual in Exodus 24.3-8", VT 32 (1982), pp. 74-86).
11. Nicholson은 출애굽기 24:9-11과 출애굽기 19장의 대조를 지적하면서 이 사실을 설명한다 (Ibid.).
12. Jeremias,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ET: London: SCM, 1966), p. 178ff, 225 ff; H. Conzelmann, 1 Corinthians, Hermeneia (Phila., 1975), p. 199; O. Betz, "Beschneidung", TRE V, 719; R. Pesch, Das Abendmahl und Jesu Todesverstandnis (Freiburg: Herder, 1978), p. 95f; M. Hengel, The Atonement, ET (London, 1982), pp. 53-54.
13. J.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 EKKNT II (Koln, Basel and Neukichen-Vluyn, 1979), p. 245.
14. Hengel, Atonement, p. 53f.
15. Marshall, Last Supper and Lord's Supper (Exeter: Paternoster, 1980), p. 46; S. Kim,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WUNT 30 (Tubingen, 1983), p. 62.
16. R. Martin, The Spirit and the Congregation: Studies in 1 Corinthians 12-15 (Grand Rapids, 1984), p. 74.
17. Gartner, Temple, p. 52f; R. J. McKelvey, New Temple: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Oxford: Oxford Univ., 1969), p. 95; V. Furnish, 2 Corinthians, AB 32A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1984), p. 364; R. Martin, 2 Corinthians, WBC 40 (Waco, Texas: Word Books, 1986), p. 204.
18. R. J. McKelvey, New Temple, 96.
19. Martin, 2 Corinthians, 203f; 참조. D. Georgi, The Opponents of Paul in the Second Corinthians ET (Edinburrgh: T. and T. Clark, 1987), pp. 258-64.
20. 희년서 저자는 하나님이 시온산에 성소를 세우실 것이며 거기에서부터 하나님 자신이 왕으로서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임을 선포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저자의 시대에 이미 예루살렘에 성소가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지성소(the Holy of the Holies)를 더럽힌 자들을 비난한다 (Jub 23.21).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세우는 일이다. 그는 시온산에 있는 성소가 신실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될 이방인과의 큰 전쟁 후에 세워질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저자가 새로운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선민 가운데 새 성전을 세울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Jub 1.29). 이러한 견해는, 비록 예레미야 31장 31-34절에서 성소의 언급이 없기는 하지만 새 언약에 관하여 에스겔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 가운데 영원토록 그의 성소를 세우실 것임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것이다 (겔 37:26 이하).
21. 바울이 iJerovn 대신 naov"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과 관련하여 어떤 학자들은 iJerovn이 성전 전체를 가리킨다면 naov"는 일반적으로 성소(Holy Place)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지성소(Holy of holies)를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Gartner, Temple, 53; M. Newton, The Concept of Purity at Qumran and in the Letters of Paul SNTSMS 53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65), p. 54f].
22. 참조. W. Sanday and A. C. Headlam, A Cr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ICC (Edinburgh: T. and T. Clark, 1902), p. 353, 405; O. Michel, Der Brief an die Hebraer (Go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84[36]), p. 369f; Cranfield, A Cr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II ICC (Edinburgh: T. and T. Clark, 1983[79]), p. 599, 755.
23. E. Kasemann, Commentary on Romans ET (London: SCM, 1980), p. 327.
24. 고전 6:19에 나타나는 바울의 진술이 헬라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다. 비록 몇몇 학자들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바울의 사상과 헬라주의의 사상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는 McKelvey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진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이 몸(swvma)이라는 사상은 헬라인들에게는 낮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또한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become) 지적한다(McKelvey, New Temple, 104; 참조. Newton, Purity, 57f).
25. Gartner, Temple, p. 100.
26. B. F. Westcott, The Epistle to the Hebrews (Lodon: MacMillan, 1903), p. 276f; J. Moffatt, A Cr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ICC (Edinburgh: T. and T. Clark, 1924), p. 124; P. Hughe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1977), p. 385f.
27. Michel, Hebraer, p. 325f.
28. Westcott는 여기의 a*sqevneian이라는 단어는 개인적인 불완전성과 특별한 제사장들의 죄 뿐만 아니라 인류의 한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Hebrews, p. 200).
29. Michel, Hebraer, p. 276; Hughes, Hebrews, p. 268.
30. Westcott, Hebrews, p. 281; Moffatt, Hebrews, p. 106; Bruce, Hebrews, p. 167; M, Rissi, Die Theologie des Hebrabriefs, WUNT 41 (Tubingen, 1987), p. 37f. 여기에 나오는 tw'n ejpouranivwn 이라는 구절은 여러가지로 번역된다: heavenly sanctuary (RSV); the heavenly (NEB); heavenly things (VG 와 KJV); the heavenly realities (JB). latreuvousin tw'n ejpouranivwn이라는 구절이 2절의 tw'n aJgivwn leitourgov"와 분명히 관련되는 것으로 볼 때, tw'n ejpouranivwn은 하늘의 성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 히 9:8; 10:19; 13:11). 저자가 지상의 성소를 하늘의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묘사하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학자들은 저자가 Philo와 Alexandria의 다른 유대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플라톤 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예. Moffatt, Hebrews, xxxi, p. 106; T. H. Robins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MNTC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33), p. 107f; 참조. Philo, Vita Mosis, ii, 72ff). 그러나 다른 몇몇 학자들은 비록 필로적인 플라톤주의의 용어들과 히 8:5의 언어 사이에 유사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히 8:5에서 필로의 사상의 핵심적인 요소를 찾을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예. R. P. C. Hanson, Allegory and Event (Richmond, 1959), p. 91;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London: Marshall, Morgan and Scott, 1964), p. 166; R. Williamson, Philo and the Epistle to the Hebrews (Leiden, 1970), p. 557; Hughes, Hebrews, p. 294f].
31. Bruce, Hebrews, p. 166; Rissi, Theologie, p. 38.
32. Hughes, Hebrews, p. 293; 참조. Bruce, Hebrews, p. 166.
33. Westcott, Hebrews, p. 256.
34. Moffatt은 kataV suneivdhsin을 여기서 죄의 인식으로 해석한다 (Hebrews, p. 118; 참조. Michel, Hebraer, p. 308).
35. 어떤 주석가들은 ajnavmnhsi"를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연관시켜서 이해한다 (Bruce, Hebrews, p. 228). Hughes는 “연례적인 희생 제사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상기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신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주었다”고 논평한다 (Hebrews, p. 392).
36. 많은 주석가들은 율법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없으며, 잘못은 그 법을 받은 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참조. 8절) (Westcott, Hebrews, p. 221; Michel, Hebraer, p. 295; Bruce, Hebrews, p. 170; Hughes, Hebrews, p. 297; Guthrie, Hebrews, p. 174). 죄 사함과 관련된 첫 언약의 불완전한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다.
37. parabolhV ei*" tojn e*nesthkovta는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해석된다. a) 그때 존재하던 시간; b) 지금 존재하는 시간. 첫 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현세는 장차 도래할 세대 이전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Westcott, Hebrews, p. 254).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현세가 바로 장차 도래할 세대인 것이다. W. Manson은 이 견해를 따르면서, 이 구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가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지적한다 [The Epistle to the Hebrews (London, 1951), p. 132]. 더 나아가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참조. Bruce, Hebrews, p. 195; Hughes, Hebrews, p. 323).
38. Montefior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장차 올 좋은 일’은 그리스도의 세대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그것은 그 세대가 완전히 성취될 때 도래할 것이다” [H. Montefiore,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London: A. and C. Black, 1964), p. 164]. 이러한 해석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데,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올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나타나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히 9:11).
39 15절 초두의 diaV tou'to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이신 이유를 보여준다 (참조. Michel, Hebraer, p. 316).
40.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들의 대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셨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그가 형제들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oi* aJgiazovmenoi)이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는데, 왜냐하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 (oJ aJgiavzwn)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기 (ejx eJnoV" paVvte") 때문이라고 말한다 (히 2:11). 그러나 ejx eJnoV" paVvte"라는 구절은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eJnoV"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Westcott, Moffatt, Windisch, Montefiore, Bruce). 그러나 Hughes는 이러한 해석이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차이가 근본적이고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eJnoV"라는 명사가 중성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일차적으로는 인성을 가진 공동체와 관계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Hebrews, p. 104ff). 이러한 휴즈의 생각은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신 점을 강조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를 형제라고 부르셨다(참조. G. W. Buchanan, To the Hebrews. Tradition, Comment and Conclusions, AB 36 (Garden City, New York, 1972, 32f). 이 문맥은 oJ aJgiavzwn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oJ aJgiavzwn은 tou'" aJgiazovmenou"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자와 동일한 인물이시기 때문이다 (Michel, Hebraer, p. 150; Strobel, Hebraer, p. 103; Buchanan, Hebrews, p. 32f; H. Braun, An die Hebraer, HNT 14 (Tubingen, 1984), p. 60.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단지 육신과 피를 가지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점에 있어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vv. 14, 17). 그는 히 2:17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실 필요성과 목적을 지적하고 있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 (w!feilev kataV pavnta toi'" ajdelfoi'" oJmoiwqh'nai)이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류와 완벽하게 동일시하실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Michel, Hebraer, p. 163; Hughes, Hebrews, p. 119; D. Guthrie, The Letter to the Hebrews (Leicester: IVP, 1983), p. 94; Rissi, Theologie, p. 60). 17절 하반절의 i@na가 이끄는 절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형제들과 동일시하신 목적에 대해 말해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함이다 (i@na elejhvmwn genhtai kaiv pistov" ajrciereuV" taV proV" ton qeovn, eij" toV iJlavskesqai ta" aJmartia" tou' laou') (히 2:17). 여기서 i@na라는 단어는 즉각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Westcott, Hebrews, p. 57).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인류의 대표가 되실 수 없는 것이다 (참조. 5:1) (H. Montefiore, Hebrews (London: A. and C. Black, 1964), p. 67).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형제들과 동일시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자격을 얻으셨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저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형제들과 동일시되시는 일은 대제사장의 자격을 취득하는 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왜냐하면 대세사장은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람 가운데서 취해진 자이기 때문이다 (히 5:1).
41. 히브리서 저자는 창세기의 기사가 멜기세덱의 출생과 죽음과 부모와 후손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신비스런 방식으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창 14). 그러나 저자는 독자들이 멜기세덱의 전승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을 전제하고서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조. Josephus, Bell. Jud., vi 438; Ant., i 180f). 이 주제를 자세히 다룬 연구로는 H. L. Horton, The Melchizedek Tradition: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Sources to the Fifth Century A.D. and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Cambridge, 1976)이 있다.
42. 시편 110편에 언급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제사장은 파멸하지 않는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야말로 이러한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히 1:3; 8:1; 11:19).
43.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죽음이 그의 대제사장직을 종결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죽음은 대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의 죄를 위해 드리는 필수 불가결한 제물이라고 생각했다 (Hughes, Hebrews, p. 269; Guthrie, Hebrews, p. 166). 비록 그가 여기에서 부활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참조. 1:3; 7:16; 8:1; 11:19; 특히 13:20) (Bruce, Hebrews, p. 411).
44. Bruce, Hebrews, p. 194.
45.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속죄제사의 완전성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짐승을 제물로 드렸던 반면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고 흠 없고 순결하고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히 7:26; 참조. 8:14).
46. 히 10:11 이하에서 저자는, 제사장마다 매일 (e@sthken) 섬겨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ejkavqisen) 지적한다. 이것은 레위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준다. 레위 제사장들은 끊임없이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서서 일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그의 한번의 제사가 모든 시대에 유효한 것이기 때문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Michel, Hebraer, p. 340; Bruce, Hebrews, p. 238f; Hughes, Hebrews, p. 400f).
47. 요한 계시록 21:22에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안에는 성전 건물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어린양이 성전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미 각주 5에서 언급한대로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48. Westcott, Hebrews, 166; Michel, Hebraer, 254; McKelvey, New Temple, 151.
49. Hughes, Hebrews, 236.
50. 히브리서 저자에게 있어서 휘장과 예수의 육체의 긴밀한 관계를 다룬 것으로는 다음의 책을 보시오: O. Hofius, Der Vorhang vor dem Thron Gottes, WUNT 14(Tubingen, 1972), pp. 76-84; M. Rissi, Theologie, p. 42f.
51. Westcott, Hebrews, 415; E. Kasemann, The Wandering People of God: An Investigation of the Letter to the Hebrews, ET (Minneapolis, 1984[57]), p. 53f. Montefiore가 προσεληλ??ατε를 “다가왔다” (have drawn near)라고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여, McKelvey는 “이 서신서는 다른 신약의 다른 책들과 ‘아직 아니’ (not yet) - ‘지금도’ (even now), 즉 미래의 희망과 현재의 실현이라고 하는 역설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시온산에 이르렀다”라는 번역과 관련해서 그는 “προσεληλ??ατε라는 단어 자체가 이 서신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묘사하는 제의적인 전문 용어 (cultic terminus technicus) (4:16; 7:25; 10:22; 11:6; 참조. 10:1; 12:18)”라고 제안한다 (New Temple, 153, 참조. C. Spicq, L'Epitre aux Hebreux (Paris, 1952), I, 281)
52. Gartner, Temple, 88ff(참조. Spicq, Hebreux, II, 403); McKelvey, New Temple, 154
53. 참조. Hughes, Hebrews, 575.
54. 비록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서 "an altar"가 성찬 예식에 대한 암시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제단을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한다 (Hughes의 Hebrews, 579f를 참고하시오).
55. Westcott, Hebrews, 441.
56. Ibid.; 445f; Montefiore, Hebrews, 244ff; Hughes, Hebrews, 575ff, 583f.
57. J. Dawsey, “The Temple Theme in Luke", Milita Theologica 38(1987), 29f; 참조. K. Baltzer, "The Meaning of the Temple in the Lucan Writings", HTR 58(1965), 263-77.
58. 고전 6:19에 나타나는 바울의 진술이 헬라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다. 비록 몇몇 학자들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바울의 사상과 헬라주의의 사상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는 McKelvey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진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이 몸(σ?μα)이라는 사상은 헬라인들에게는 낮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또한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become) 지적한다 (McKelvey, New Temple, 104; 참조. Newton, Purity, 5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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