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안의 반의어 큰 자와 작은 자 연구StartFragment cafe.daum.net/correcttheology
1. 서론
마태복음 안에는 여러 반의어들이 많이 나타난다. 큰/작은, 악인/선인, 좋은 열매/나쁜열매 등.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안의 모든 반의어들을 다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중에서 지상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인 μέγας(큰 자)와 μικρός(작은 자) 용어들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10.42 ; 11.11 ; 18,6,10,14 ; 20.26 ; 23.11 ; 25.40,45). 이 대조 용어들과 그 함축 의미에 우리 연구의 목적이 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은 신약뿐 아니라, 구약과 그 주변문학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의 마태복음 안에서 사용된 그 반의어가 예수와 관련해서 사용된 점에 대해서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마 20:26-28), 주변 문학 안에서 사용된 용법과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이 반의어 연구는 부분적으로는 되어 왔지만1) , 전체적으로 또 특정한 점에 주목해서 살펴보는 것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다루어질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고전문학과 구약에서 사용된 그 용어들의 용법을 간단히 살펴보고, 그 후에 마태복음 20장 17-28 본문을 관찰해볼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렇게 살펴 본 마태 본문과 다른 본문들에 나타난 용어들을 관련시켜 봄으로서 반의어의 의미를 고찰해 볼 것이다.
2. 고전문학과 구약의 큰 자(μέγας) 작은 자(μικρός)
2.1. 고전문학 안의 반의어
고대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호머(Homer)의 작품에서부터 그 용어가 나타나는데, 거기서 그 용어는 계급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큰 자 용어에 관하여, 일리아드(Iliad) 서사시에서, "큰 신"(16.531 ; 19.410), "큰 헥토르"(2.816 ; 3.324), "큰 네스토르"(11.501), "큰 아이아스"(5.610) 등이 언급되어 있다. 오디세이(Odyssey)에서도 "큰 제우스"(9.411), "큰 유리토스"(8.226 ; 21.32), "큰 제피르"(14.458) 등이 나타난다. 이외에도 이 저자의 작품에서 그 용어는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나타난다.2) 특히 이 용어들은 신성, 지도자, 전사, 귀족 등에게 부여되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다른 고전주의 저자들에게서도 우리는 유사한 용례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큰 사람"(Platon, 법률 5.730d ; 5.732a), "큰 자 안티오커스"(Polybius, 4,2,7), "큰 그리스인들"(Sophocles, 아이아스, 225) 등에서 나타나는데, 이 용어 이해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상위의 계급적 신분에 그 용어가 부여되었다3).
이와 달리, "작은 자" 용어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호머가 용어를 사용할 때 서사적 위엄을 축소시켜서 사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4) 그러나 적은 수가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의 의미는 명백하다. 분명히, 위에 언급된 큰 자 용어와 반대의 계급적 의미로써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작은 자 클리게네스"(Aristophanes, 개구리, 709), "작은 자"(Aristoteles, 시학, 58b 25-30), "티데는… 작았다"(Homer, 일리아드, 5,801). 예를 더 들지 않아도, 그 본질 상 보잘 것 없는 인물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칭호인 것을 알 수 있다.5)
전체적으로 보아, 고전 문학에서 큰/ 작은 용어들은 일반적, 계급적인 의미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큰 자"는 명예의 신분이고 반대로 "작은 자"는 보잘 것 없는 경멸을 받는 자에게 부여되었다.6)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신분의 상위 계층을 담당하는 자들(주로 신들, 왕들, 지도자들, 귀족들, 어린이에 대조된 어른들 역시 큰 자로 지칭된다)이 큰 자로 분류되고, 사회의 하위층의 신분이 작은 자로 분류된다.7)
이 두 용어가 계급적 신분을 대조적으로 표시하고 있다면, 그들 사이 관계는 지배와 복종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참조, Platon, 국가론, 5.475a).
3. 구약의 용법
구약 LXX 에서 메가스(μέγας) 용어는 모두 902 번 등장하는데 해당되는 용어는 보다 적다. 미크로스(Mικρός) 용어도 총 161번 중 36번만 해당된다8).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구절들만 언급할 것이다. 먼저 창세기 25장 23절을 주목하면, 거기서 "큰 자"(LXX : μείζων, MT : בר)와 "작은 자"(LXX : ἐλάσσονι, MT : ריעצ)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 구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 중에서 부터 나누이리라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리라 그리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로 번역되는데, 이 구절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래 해석되던 대로, 에서보다 야곱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문장이 말하는 대로, 큰 사람이 작은 자를 섬기라(service)는 봉사적 부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오로지 이 구절들에만 있는 특이한 점들에 주목할 것이다.
1. 문맥은 싸움과 다툼(LXX : σκιρτάω, MT : ץצר) 이다. 즉, 에서와 야곱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싸움을 말한다.9)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단순한 다툼으로 이해될 수 없고 범세계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즉, 민족으로 표현된 것처럼, 영역을 넓혀 보면, 모든 인간 관계들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실, 그 두 사람은 아브라함의 "한 큰 나라"에 속하지만, 지배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 때문에 적대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고 그 나라는 둘로 쪼개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고자 큰 자가 작은 자를 살피고 배려하는 섬김의 관계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2. 작은 자에게 지고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실, "큰 자"는 에서였고 "작은 자"는 야곱이었다. 작은 자의 선택은 단순한 예정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이 작은 자를 선택하신 것은 당시 큰 자 위주의 이방 계급주의적 관점을 뒤엎는 놀라운 사건이다(참조. 위 1:1).
모든 사람들은 큰 자에게 우선적으로 달려 간다.10) 여기서 하나님이 작은 자, 즉, 야곱을 선택하므로 하나님 편의 가치는 작은 자에게 놓여지고, 이 작은 자가 그 중심이 된다. 이것은 구약에서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는 낮춤과 겸손의 독특한 유대적 사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고(삿 6:15 ; 삼상 9:21 ; 삼상 15:17 등) 자신을 낮추는 작은 자에게 하나님 편의 고양(exaltation)이 주어진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참조. 왕상 3:10-14).
3.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지고의 구조를 설립하신 특별한 의지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것은 작은 자를 배려하는 하나님의 긍휼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의 백성에 두 그룹이 있다면, 하나는 다른 자보다 더 강할 것이고, 다른 자는 상대적으로 약할 것이 분명하다. 이 두 그룹 중 약한 자가 경멸을 받고 천시를 받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를 편 드시고 "큰 자"가 "약한 자"인 "작은 자"를 배려하고 섬겨야 한다는 구조를 만드신다. 이 구조는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벌어진 살해 계획까지 치닫는 무거운 갈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싸움과 갈등으로 얼룩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설립하신 지고의 긍휼적 구조인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자 정체의 탁월성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한다. 이스라엘의 선택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하는 구조에서 시작됐으므로 신분의 기능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섬김의 구조를 실천해야 했다. 이러한 관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 백성들 모두가 예외 없이 지켜야 되는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적 계급제도를 설립하였고 그들의 공동체적 관계는 깨어져서, 상위 신분은 하위 신분에 그들의 계급적 우위를 주장하고, 그 신분에 걸맞는 특권과 지배를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구약의 말미에 닿으면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모두 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타락의 본질은 큰 자가 작은 자를 배려하고 섬기는 관계가 아니라, 이방 계급적 관계로 돌아서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 즉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의 관계들을 깨뜨렸다는 데 있다. 즉, 법과 질서가 파괴되고 지배와 종속관계가 모든 사회적 관계를 이끌어간다는 데 그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참조. 렘 5:5 등).
4. 마태복음 20:17-28의 그 용어
우리가 다루는 용어가 마 10장, 11장, 18장에 나타난다. 그러나 20:17-28 11)의 본문이 기독론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26절에 "큰 자"(μέγας)와 "종"(διάκονος)의 용어가 대조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서 대조가 설립된 이유를 본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3. 1. 본문의 문맥
마태복음서 저자가 이 본문을 이 장소에다 배치하게 된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선행하는 줄거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에 뒤이어 시작한 예수 사역에서 예수가 한 첫 번째 요구는 회개와 나라의 도래였다(4.17). 이것은 하나님 통치 안에 들어오라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부름이다. 그러나 산상수훈을 통한 그 나라의 요구(5-7장)와 기적을 통한 신적 능력의 현시(8-9장)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메시아를 거절한다(11장). 11-16장을 살펴보아도 이스라엘은 계속 거절한다. 이스라엘의 거절을 확인한 후 예수는 그의 공동체를 설립한다(16.18). 예수는 어린이처럼 변화되어 하나님 통치 안에 들어와 살라고 요구하고 바로 이 "어린이-작은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선포한다(18,3,4).12) 그러나 제자들은 어린이-작은 자를 경멸하고 계급주의를 만든다(18.6-14). 우리의 본문은 이러한 연속성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근접 문맥으로 살펴볼 때, 본문에 선행하는 본문은 20:1-16으로, 이 본문 안에 공동체 안에 설립된 계급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예수의 교훈이 주어지고 있다. 갈등은 그들 신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첫째들과 신분의 하위를 차지하는 마지막 제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계급적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본문이 계급적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면, 이어지는 단편은 두 소경 이야기이다(20:29-34). 이 이야기의 본질은 무리가 사회 하층 계급들인 두 소경에게 던지는 멸시와 무시에 있다. 거기서 예수는 모두가 다 같이 자기를 따르기를 원하고 있다. 세 본문 전체가 그들 내부에 공통적으로 유사한 갈등 문제를 심층에서 말하고 있다.
3. 2. 본문 주석
마태복음에서 반의어 용어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여러 번 나타난다. 그러나 그 용어가 기독론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20:17-28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세밀히 살펴보기 위해, 다음과 같이 네 단락으로 본문의 구조를 구분해 볼 것이다.
3.2.1. 17-19절. 3.2.2. 20-23절. 3.2.3. 24-27절. 3.2.4. 28절.
3.2.1. 십자가와 예루살렘(17-19절)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17-19절(수난 예고)은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알리는 수난 예고는 20:20-28의 주요 부분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13) 결과적으로 이러한 구조는 좋은 서술 방향을 제공해 주며 공동체가 수난에 붙여지는 예수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되어 있다고 강조한다.14) 즉, 수난 예고는 따라 오는 다른 단락들에 영향을 미치며, 최종적으로 마지막 단락에서는(28절)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수난 예고가 예루살렘을 향한 길(17절)로 되어 있다는 것도 의미 있다.15) 이것은 예수와 함께 가는 제자들 역시, 최종착역인 예루살렘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17절)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3.2.2. 오는 나라 안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20-23절)
이 단락의 핵심은 마태 제자들이 우선권을 요구한 욕구에 있다(20-23절). 그 표현은 "이 나의 두 아들을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당신의 오른쪽에 하나는 당신의 왼쪽에 앉도록 명령하소서"(21절)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오른쪽에 앉다"는 고전 문학과 유대 문학에서 명예의 자리를 뜻한다16). 정상적으로 중간이 가장 높은 자리이고, 그 다음 오른쪽, 그 후 왼쪽 자리들이다17). 이러한 용법에 비추어 보아, 좌우의 두 자리는 그 사회 최고 계층이 차지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의미한다. 우리 본문이 언급하는 "당신의 나라의 오른쪽 왼쪽"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나라는 “오는 나라” 혹은 “천국”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경배하다"(20절)와 "아버지께서 예비하셨다"(23절)의 미래적 표현들을 보아 알 수 있다.
결국, 세베대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이 오는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욕심을 보이고 있다(θέλω, 21절). 사실, 오는 나라 신분 조건은 5.19에서 이미 언급되었었다.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최 측근 제자들로, 그들이 예수를 충실히 따랐다면, 오는 나라의 보좌에 앉을 자격이 있었다(19.28). 그럼에도 최고위 자리를 요구한다면, 이것은 지배하고자 하는 계급적 욕구와 관계가 깊다고 간주할 수 있다. 게다가, 리브가의 개입을 상기시키는(창세기 27.5-46)18),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마태 예수는 끊임없이 자기를 따르기 위해 가족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8.21,22 ; 10.37 ; 19.29). 이것들을 보아, 그들은 공동체의 지도급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오는 나라의 가장 우선권도 차지했으면 하는 지배 계급에 대한 깊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본문은 이것을 계급적 욕구의 절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3.2.3. 공동체 안의 큰 자들(24-27절)
세번째 단락에 μέγας/διάκονος(26절), πρῶτος/δοῦλος(27절) 쌍이 언급되어 있다. 27절은 26절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므로, 우리의 초점은 26절의 표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런데 왜 마태 예수는 이 단락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면 너희의 종이 되라"(26절, μέγας)고 요구하는가 ? 이것은 마태 공동체에 큰 자가 되기를 욕구하는 자들과 실제로 큰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가? 게다가, 마태 예수는 "이방인들의 큰 자들처럼 하지 말라"(25절, μεγάλοι, 복수형)고 요구한다. 여기서 신분에 관련된 이러한 언급들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마태 이야기 안에 세 그룹의 큰 자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 이방인의 큰 자들(20.25). 2) 마태 공동체 안의 큰 자들(26.27절 ; 23.11). 3) 유대교의 큰 자들(23장).19) 우리는 여기서 먼저 이방인의 큰 자들에 대해서 살펴본 후 마태 공동체의 큰 자들을 다룰 것이다.
먼저, 이방인의 큰 자들을 언급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 삶을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정체뿐 아니라 삶의 방식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우리는 이미 전기한 II.1의 고전 문학에서, μέγας는 그 사회의 가장 높은 계급을 나타내고, μικρός는 반대로 가장 낮은 신분을 나타낸다고 언급했다. 게다가 그들 사이 관계는 지배와 복종으로 특징지어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단락의 마태 예수 역시 같은 점을 지적한다.
25절의 μεγάλοι는 이방 세계의 큰 자들을 지칭한다. 그 절은 본질적으로 이방 세계의 큰 자들과 지배받는 자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두 타입의 지도자가 등장한다. ἄρχων(통치자, 왕, 관리)과 μεγάλοι(큰자들). 고전문학 안에 이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이 두 신분은 계급제도의 정상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20) 이 타입의 지도자들은 그 사회의 다양한 기능들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보면, 사회가 그러한 상황들과 지도적 신분들을 필요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능이 사회 유지에 불가결한 것이라면, 문제는 권위의 행사에 놓여진다. 고전주의의 분명한 용법에 비추어 보아, 이방계급주의는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구조가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상위와 지배권의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5절이 이 상황을 잘 요약하고 있다. 즉, 이방 큰 자들의 행위는 κατακυριεύω(지배하다, 다스리다, 정복하다) 와 κατεξουσιάζω(통치하다, 억압하다, 권위를 행사하다)21)로 요약된다. 예수는 이 표현을 긍정적이22) 아닌,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게 될 때 결과적으로 두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즉, 두 계급(지배자들과 종속자들)과 두 관계(섬김받다/섬기다)이다. 이런 관계 아래에서 어떤 사람들은 섬김 받고 다른 사람들은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들 지배하기를 원하지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없는 것처럼, 이런 관계 아래서 세상 안에 타락과 싸움과 갈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참조. 18.7). 따라서 마태 예수는 두 계층 사이의 계급적 관계를 다루면서, 이방 세계의 특징들을 주의 깊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6절 초에서 예수는 잘못 세워져 있는 이방적 방식을 본받지 말라고 초대한다23)이절이 이방인들과 제자들 사이의 삶의 방식들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처럼, 마태 이야기 전체는 이러한 틀 안에서 전개된다. 마태에서, 이방인들과의 차이는 지역적이라기 보다 교리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이다(5.47 ; 6.7 ; 18.17). 전체적으로 보아, 삶의 방식이 문제이다. 마태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이방인들과 경계 없는 근접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5.47 ; 10.18 ; 18.17 24.9,14). 당연히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6절에서, 예수가 "너희 중에는 그렇게 있어서 안 된다"고 할 때, 이것은 이방인들의 계급적 관계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본받지 말라는 권고이다. 사실 동시대의 요세푸스 작품 안에는, 이방 신분이든, 유대 신분이든, 수많은 계급의 소유자들이 폭발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계급주의를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열심히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방국가가 계급주의로 구조화 되어있는 것을 지적하고, 이 지배의 구조가 이방세계로 부터 마태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마태 공동체 안에도 큰 자들과 그 지배구조가 존재하는가 ? 24절에 따르면, 두 제자가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는 요구에 나머지 열(δέκα)제자들은 분개한다(ἀγανακτέω). 이것은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그들 역시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고24)그것으로 다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25). 게다가, 예수가 "너희는 안다", "너희 중에", "너희의"(참조. 25-27절)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모든 제자들을 겨누는 것이 틀림없다. 이것들이 드러내는 바는 마태 공동체가26) 예외 없이 이방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계급적 우선권을 깊이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26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μέγας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너희 중에 큰 자가 되고자 하면…”, 역시 27절,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면…”). 이 말은 마태공동체에 이미 "큰 자들"이 있다는 점에서만 가능하다. 이 자들이 존재한다면, 역시 "작은 자들"도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 인물들의 정체를 분명히 파악하려면, 우리는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고, 그 후 마태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두 쌍둥이 태아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창 25:22). 이것은 인간들에겐 원초적으로 지배자가 되기 위한 지배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인 것이다. 결국, 다툼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큰 자가 작은 자를 돌봐줘야 한다는 지고의 계획을 설립하신다(창 25:23). 에서는 이 구조를 거절했고, 하나님은 그의 긍휼에 따라 작은 자인 야곱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작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곧 잃어버리고 만다. 마태는 이러한 구약 전승의 관점을 물려받는다. 따라서 마태 예수는 다시금 메시아 공동체를 설립하고 어린이, 작은 자의 정체를 제자들에게 요구한다(18장). 그러나 마태 제자들 역시, 이스라엘과 다름없이, 점차로 그들의 정체를 잃어가고 계급주의를 설립하기 시작한다. 즉, 제자들 사이에, 이방인들처럼, "큰 자/작은 자"의 지배, 종속의 계급적 구분을 짓는 것이었다(참조. 특히, 19-20장).
모두가 큰 자가 되고 싶어하는 큰 욕구 앞에, 예수는 "큰 자가 되길 원하면 너희의 종이 되어라"(26절)고 초대한다. 여기서, "너희의"(ὑμῶν)의 표현은 누구를 지시하는가 ? 그 용어 "너희"는 전체 제자들을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마태에서, "12" 또는 "12제자들", 혹은 단순히 "제자들"은 상호 교환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27) 이들은 예수 메시아를 고백하고(16.16), "어린이-작은 자"로 변화되어 신적 통치 안에 들어왔던 제자들을 가르킨다(18장). 그렇다면, "너희의"는 분명 마태공동체의 "작은 자들"을 가르킨다. 이 말을 종합하면, "너희 중에 큰 자가 되길 원하면 작은 자들의 종이 되어라"이다. 이 말은 창 25:23에서 표명된 하나님의 요구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섬기다" 용어가 사용된 27절을 연결 시켜보면, 그 용어들은 LXX과 동일하고, MT와도 의미론적으로 같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차례에, 하나님에 이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지고의 구조를 마태 공동체에 설립하고 있는 것이다.
3.2.4. Imitatio Christi(28절)
그러면, 왜 마태예수는 "종"(διάκονος, 26절)과 "노예"(δοῦλος, 27절)가 되라고 요구하는가 ? 이 부름은 고대 사회에서 잘 이해될 수 없는 말이다.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노예의 삶을 불행한 삶이나28) 멍에 아래 삶으로29) 알았다. 쿰란 공동체에는 작은 자가 큰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1QS 6.2). 예수의 부름은 동시대인들의 사고와 완전히 다르다. 일상성에서 벗어난 이 부름의 참된 의미는 제자들의 계급적 욕구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나 큰 자가 되고픈 욕구가 있으므로 그로인해 무겁고 긴 갈등이 생겨날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이런 끈질긴 우선권 욕구를 끝장내기 위해서 마태 예수는 아주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이 방식은 구약과 다르고, 이방 세계에도 없던 것이다. 즉, 예수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타인에게 종과 노예처럼 내어주며, 그러한 방식의 삶을 제자들도 살도록 모델로 구조화한다(28절, ὥσπερ30)). 이 방식은 많은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어준 예수 대속의 참다운 효과를 맛볼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 요청은, 그 어느 것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지상 예수의 삶과 죽음의 참된 역사성위에 설립되어 있다.
5. 본문의 기초
어떤 동기 아래에서 이 본문의 반의어가 태어났는가 ? 먼저 우리는 어떤 가설들을 선험적으로 취해야 한다: 마태공동체의 내적 분쟁31)과 유대교와의 단절의 상황32)이 상황들은 마태 공동체의 현 상황에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마태 공동체 외부 갈등 이론(유대교에 의한 박해와 이방인들에 의한 박해가설)과33) 인트라 무로스(intra-muros) 가설(랍비 유대교 안에 살고 있는 마태 공동체)은34)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해온 상황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배제할 것이다. 우리는 1세기 교회 관리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논쟁의 반향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35) 혹은, 사도들에 의해 설립된 지역교회들 사이에 생겨난 우선권의 다툼으로 볼 수도 있다.36) 아니면, 제도화된 교회의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37)이 견해들은 모두 마태공동체 내부의 문제들에 관계하기 때문에 교회론적 관심이 그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본문은 이방세계와 대조적 삶을 살라고 요구하므로 도덕적, 윤리적 관심도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 언급은 마태 공동체가 이방인들처럼 계급주의적 욕구에 문을 열어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현상은 공동체가 점점 메시아적 공동체의 정체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우려할 상황은 이미 이방 세계의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 마태공동체의 상황이 우려할 만하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 공동체도 작은 자 공동체에서 시작하였지만, 그들이 계급주의로 돌아섰다면, 마태 공동체 역시 그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이방적 계급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모든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계급적 욕구들을 예수 메시아의 삶과 죽음의 동기 없이는 해결될 수 없음을 마태 저자가 깨달았다는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 메시아의 삶과 죽음의 모델에서 태어난다. 예수는 종말론적 삶을 사는 그의 메시야 공동체가 그의 삶과 죽음으로 주조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예수가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이 방식은 이방세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고, 구약의 것과도 다르다. 랍비 문서에 유사한 문장이 있지만("이 세상에서 토라 연구를 위하여 종이 되는 자는 오는 세상에서 해방된다", Baba Mezia 85b), 이것은 그와 같은 경우가 아니다. 토라 연구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천이 중요한 것을 마태 예수는 자주 언급했고(5.19 ; 19,17 ; 22.36-40), 인간 관계의 평화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돌보는 관계로 부터만 가능한 것을 예수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삶과 죽음의 모델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싸움, 다툼, 갈등들에 끝을 내기 원했던 지고의 메시아이다.38)
그러므로 당시 마태 공동체 내부에 심각한 갈등들, 다툼들,39) 계급주의가 존재했을 것이다. 분명 계급주의적 욕구는 이방 사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 공동체 가까이 공존하는 이방인들의 존재를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곁에 얌니아 이후 그의 길을 가고 있었던 랍비 유대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 공동체는 그들의 삶과 신앙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40) 1세기말 경(85년경), 시리아 안디옥의 역사적 환경과 그 주변의 발달된 도시 환경은 이러한 마태 환경에 다소 일치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역사적 순서 상, 메갈로이(μεγάλοι)는 예루살렘에서 도피한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인과 디아스포라의 유대 기독교인이 차지했을 것이다. 이들이 마태 공동체를 이끌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 기독교인이 점차로 많아졌을 것이고, 이들은 유대 기독교인에 비해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신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주로 교리 문답자들, 최근 개종자들, 가난한 자들, 무식한 자들, 병자들, 굶주린 자들, 즉,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신분의 기독교인들이었을 것이다. 이 기독교인들은 유대 기독교인들에 의해 경멸을 받았을 것이고, 복종적, 예속적 관계 아래 있었을 것이다.
6. 마태복음 안의 다른 본문들
여기에서 다룰 본문은, 지상 계급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큰 자, 작은 자(μέγας/μικρός)가 나타나는 다른 마태의 본문들과 관계가 있다. 이 용어들은 개별적으로 연구해서는 안 되고, 상호 연관성 속에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먼저, 10장 42에서 작은 자(μικρός) 용어가 나온다. 이 용어는 지상 계급 중 첫 번째 언급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다른 용법들과 차이가 있다. 이 인물의 정체가 무엇인가 ?
우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기원 자체가 작은 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정체는 어느 정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전달되어 내려오는데, 10장의 주된 수신자가 역사적 12제자들임을 고려할 때 이들의 기원 정체가 분명 "작은 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을 18장에 가서야 만들어지는 작은 자와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언급된 "작은 자"는, 그 절이 언급하는 것처럼, 구약 전승의 위대한 인물들인 "선지자와 의인"(41절)과 같은 반열에 서있는 구약적 작은 자의 위엄을 갖춘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11장 11절에서는 지상의 큰 자(μείζων)를 언급한다. 예수의 선포를 수용하고 거절하는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즉,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선구적 사역을 믿지 못하고, 계급주의만 추구하는 그 백성에게, 예수가 요한이란 인물의 진정성을 말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예수는 고양적 용법을 사용하여 요한 찬사를 만든다(참조. 위의 1.2.2). 구약에서 모세, 여호수아(출 11.3 ; 참조, 시락46.1)에게 고양(exaltation)이 부여된 것처럼, 세례 요한 역시 큰 자로 불려진다. 즉, 하나님(예수) 편에서, 세례 요한에게 진정한 지상 계급의 위대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41)
셋째, 18:6,10:14의 작은 자(μικρός)는 어린이와 동등물이다42). 어린이의 특성은 작고 약하고 무지하고 의존적이다43)부모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런 특징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미크로스(μικρός)는 어린이처럼 변화되고, 자신을 낮추는 제자들에게 부여되는 칭호이다. 즉, 어린이의 겸손과 낮춤의 특징을 갖고 있는 제자들은 예외 없이 작은 자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들은 구약의 작은 자의 연속성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44)그러나 다른 이 본문에서부터 진정한 기독교인 정체를 가진 작은 자가 시작된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어쨌든 이 메시야의 작은 자 공동체 안으로 점차 이방 계급주의가 들어오고, 계급적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넷째, 23:11에서 큰 자(μείζων)가 등장한다. 23장 전체는 이스라엘의 타락 즉, 율법에 불복족하고 공동체 내에 계급주의를 증식시킨 것에 대한 결정적 평결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주장한 가설이 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유대 공동체가 계급주의(참조. 4-7절)로 말미암아 공동체적 형제애 관계가 무너졌다면, 마태 공동체는 그러한 전철을 피해야 한다(참조. 8-12절).45) 이미 언급한 것처럼(20:26), 마태 공동체 안에 메이존(μείζων)의 신분이 있다면, 그는 섬기고 배려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메시아가 그의 종말론적 공동체에 주는 최후 경고이다.
다섯째, 25:40,45에 가장 작은 자(ἐλάχιστος)가 나타난다. 가장 작은 자는 참으로 특이한데, 그것은 작은 자들보다 더 작은 자들(참조. 최상급)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미 공동체 안에 계급주의가 설립되어 있으므로 제자들 중에 가장 작은 자가 나타날 수 있게 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예수는 이 가장 작은 자(ἔλάχιστοι)를 배려하는 자가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의인"으로 간주한다. 창세로 부터 예정된 자는, 바로 천하고, 낮은 형제를 보살펴 준 제자를 가르킨다는 것이다. 인생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들을 돌보라는 예수의 권고이다.
7.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안의 그 용어들
첫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용어들을 각각 4번과 9번 사용한다.46)마가복음 용어들의 전체 용법은 대략 마태복음의 것과 같다. 그 중, 관찰할 만한 중요한 본문은, 마가본문 10:32-45인데, 전체적인 틀과 인물들은 마태나 마가나 동일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마태복음 20:17-28 47)). 이방 공동체내의 계급적 용어처럼 (42절 μεγάλοι, 그리고 역시 6:21 οἱ μεγιστᾶνες48)), 10:43의 메가스(μέγας)는 마태 공동체안의 가장 높은 계급을 말한다. 이 용어는 이미 막 9:34에서 계급적 의미로 언급 되었었다. 마가복음의 본문들은 그 문맥이 다툼에서 기인되었다고 마태보다 더 분명히 표현한다(9:34 ; 10:41). 마가의 본문은 마태복음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므로,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관찰한 결과와 다른 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누가복음 안에 나타난 전체 용어를 고려해 본 결과(9번)49)누가 기자의 용법 역시 마태나 마가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 우리가 다룬 마태의 병행 본문인 눅 22:24-30(//마가10.32-45)은 기독론적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본문에서 그 용어는 3번 나타난다. 이 본문은 제자들이 모두 성공 욕구와 영광 욕구에 휩싸여 있고(26절), 우선권을 쟁취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φιλονεικία).50) 사실, 누가에 따르면, 제자들은 이미 이전에도 우선권 때문에 서로 싸웠었다(9.46). 9장의 싸움은 22장까지 연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그 이야기를 큰 자가 되기 위한 다툼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51) 결국, 누가복음서의 예수 역시 그의 제자들이 이방인들처럼 계급적 욕구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25절), 그 자신의 삶을 따라, 제자들도 남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7절).
8. 마태복음 20:17-28의 신학적 의미
우리가 다룬 용어는 마태 저자의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드러낸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서 역시 마태복음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 이야기가 구약 배경뿐 아니라, 지상 예수의 삶과 죽음에 비추어 해석되고 편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본문의 핵심은 섬김이고, 이 섬김의 요청은 마태 공동체에 윤리적, 도덕적 실천을 복돋우는 부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윤리적 의미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윤리와 도덕은 실천의 요구에 내재적 한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론적 의미가 역시 게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 메시아의 삶과 죽음의 모델이 강하게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메시야가 세상에 온 목적은 섬김과 돌봄의 모범을 통해서, 세상의 잘못된 계급적 관계를 그의 의지대로 다시 세우기를 원한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서, 큰 자가 작은 자를 돌보는 배려의 관계로 변화된 것이 관찰되었다.
몽펠리에 대학교 Th.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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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 연구의 초점은 마태복음안의 지상 계급을 나타내는 반의어 μέγας/μικρός의 배경과 의미에 놓여있다. 용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고전 문학과 유대문학, 특히 구약안에 나타난 개념들을 먼저 찾아 보았다. 호머부터 시작되는 고전문학에서 μέγας(큰자)는 계급구조의 상위층을 차지하는 높은 신분이라면, μικρός(작은자)는 그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두 범주의 관계는 계급주의적이며, 작은자가 큰자를 섬기는 노예적 구조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약(LXX과 MT)에서 하나님은 이 구조를 바꾸시는데, 이방 세계와 달리, 구약적 개념은 큰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service) 한다는 것이다(창25.23). 이스라엘이 이 구조를 따르지 않자, 예수는 그의 삶과 죽음을 모델로 하여 다시 이 지고의 아름다운 구조를 재 설립한다. 마태복음 20.26(참조, 23.11)이 말하는 것처럼 μέγας(큰자)가 μικρός(작은자)를 섬겨야(service)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마태복음의 기독론의 가장 독특한 점으로 드러난다. 신약은 모두 같은 관점을 갖고 있는데, 특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같은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1) 이 용어들의 연구를 위해 다음을 참조하라 : O. MICHEL, μικρός, TDNT, IV, p.648-659. S. L'EGASSE, Jésus et l'enfant, "'enfants", "petits" et "simples" dans la tradition synoptique, EB, Paris : Gabalda, 1969. F. THIELE, μικρός, DNT, II, p.427-429. A.C. WIRE, "L'accueil des petits. Une étude de la théologie de Matthieu", Reconnaissance à Suzanne de Dietrich. Cahiers bibliques, 1971, hors-serie, p.94-108. J. LAMBRECHT, "The parousia discourse", L'évangile selon Matthieu. Rédaction et théologie, 1972, p.332-339. G. BARTH, "Matthew's understanding of the Law", Tradition and Interpretation in Matthieu, G. BORNKAMM, G. BARTH, H. J. HELD, London : SCM, 1982, p.121-125. S.W. GRAY, The least of my brothers. Mt 25 : 31-46. A history of interpretation, SBL (114), 1989. D.B. PEABODY, "Repeated Language in Matthew : Clues to the Order and composition of Luke and Mark", SBL, 1991, p.667-686. D.D. KUPP, Matthew? Emmanuel: Divine Presence and God's People in the First Gospel, SNTS, 1996, p.176-200. E. CUVILLIER, "Justes et petits chez Matthieu. L'interprétation du lecteur à la croisées chemins", ETR, 1997/3, p.345-364. W. GRUNDMANN, μέγας, TDNT, IV, p.529-544. F. THIELE, μέγας, DNT, II, p.424-427. G. BONNEAU, Stratégies rédactionnelles et fonctions communautaires de l'évangile de Marc, EB, Paris : Gabalda, 2001, p.227-320.
2) 몇가지 예로, 일리아드 : 2.134 ; 2.412 ; 2.816 ; 3.324 ; 5.610 ; 5.721 ; 6.5 ; 16.531 ; 19.410. 오디세이 : 9.26 ; 9.411 ; 11.255 ; 11.268 ; 11.604등을 보라.
3) 고전문학안의 실례를 더 든다면, Aeschylus, Supplices, 1053. Persae, 24. Herodotus, The Histories, p.I.188.Polybius, 18,35,9 ; 4.2.7. Euripides, Electra, 405등을 보라.
4) G.P. SHIPP, Studies in the Language of Homer, p.196-197 : ''μικρός (σμικρός) is very rare in Homer, as being an affective word lacking in epic dignity, the idea being commonly expressed by ὀλίγος, τυθόϛ. The avoidance of the word is an interesting paralle to the well-known absence of diminutives in Homer''.
5) 파피루스등에 나타나는 다른 자료에 관해서는 O. MICHEL, μικρός,TDNT, IV, p.649를 보라.
6) O. MICHEL, μικρός,TDNT, IV, p.652.
7) W. GRUNDMANN, μέγας, TDNT, IV, p.529. O. MICHEL, μικρός,TDNT, IV, p.652.
8) 이 용어들에 관하여, E. HATCH & H.A. REDPATH, A Concordance to the Septuagint, II, p.902-906와 926-927를 참조하라.
9) 다음 저자들도 같은 관점으로 본다 : H. GUNKEL, Genesis, tr. M.E. BIDDLE, p.288. G. WENHAM, Genesis 16-50, p.175. J.W. WEVERS, LXX, p.175. WESTERMANN, Genesis 12-36, p.413.
10) 여기서 장자권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장자에게 아버지의 재산권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물려주는 장자권은 신적 기원이 아닌 당시 고대 근동의 관습였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 중국, 에스키모, 오스트랄리아등지에서 발견되는 관습였었다 (J. HENNINGER, "La primogéniture en ethnologie", p.462이하).
11) 이 본문에 대한 참고 문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할 것이다 : W. CARTER, Households and Discipleship, p.161-192. 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II, p.79-103. U. LUZ, Matthew 8-20, p.539-547.
12) 이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 18장(“교회 연설”)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간단히 말한다면, 이 공동체 연설은, 구약 작은자처럼, 기독교인 “어린이-작은자”의 탄생과 그러한 공동체의 설립을 알리는 중요한 본문이다. 아래 IV.c를 참조하라.
13) 보통 저자들은 20.17-19 과 20.20-28 단편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II, p.83이하. P. BONNARD, Matthieu, p.293,295. D. HILL, Matthew, p.288. C.S. KEENER, Matthew, p.484-485. U. LUZ, Matthew 8-20, p.539,541. F.W. BEARE, Matthew, p.404. R.T. FRANCE, Matthieu, II, p.99). 이 구조의 단점은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부터 다음 저자들은 둘을 밀접히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 W. CARTER, Households and Discipleship, p.161-163. Matthew and the Margins, p.399. J. RADERMAKERS, Matthieu, II, p.255,264. D.J. HARRINGTON, Matthew, p.288. R. GUNDRY, Matthew, p.401 역시 그 밀접한 관계성을 설명한다.
14) W. CARTER, Households and Discipleship, p.163-165.
15) 이 구절("예루살렘에 오르자")에서 예전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특히 P. BONNARD, Matthieu, p.294를 보라. 그리고 J. SCHNEIDER, ἀναβαίνω, TDNT, I, p.519-522와 H. SCHULTZ, Ίερουσαλήμ, DNT, II, p.324-329를 참고하라.
16) W. GRUNDMANN, δεξιός, TDNT, II, p.38.
17) F. JOSEPHE, Les Antiquités Judaïques, 6.235 (참조. 7.31). 랍비문서도 같은 내용을 언급한다 : M. Yom. 3.9 ; B. ibid. 37a ; T. Sanh. 8.1 ; Mid. Ps.18(79b). S.T. LACHS, A Rabbinic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p.337를 보라.
18) 이 점에 대해서 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II, p.87를 참조하라.
19) 유대교의 큰자들에 대해서 다루려면 23장을 상세히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논의가 확대되므로 생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이글에서 여러번 작은자 공동체인 이스라엘안에 들어온 이방 계급구조를 설명했으므로 이와 같은 선상에서 23장의 유대 계급구조를 이해하면 족할것이다.
20) 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II, p.83 : "synonymous parallelism".
21) A. BAILLY, Dictionnaire Grec-Français, p.1038,1063.
22) 이 두 용어에 대해 주석가들은 자주 긍정적 의미를 생각한다(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II, p.93. W. CARTER, Households and Discipleship, p.170. P. BONNARD, Matthieu, p.297. R.T. FRANCE, Matthieu, II, p.101). 그러나 마태 예수가 부정적 의미를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에 따르면, 지도자들(즉, 왕들, 고관들, 큰자들)의 신분은 지배하는데 있지 않다, 그러나 섬기는데 있다 (20.26-28).
23) 참조. D.C. SIM, "Matthew and the Gentiles", p.28. 이 저자가 다룬 본문들이 5.46-47 ; 6.31-32 ; 6.7-8 ; 18.15-17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의 것과 동일하다.
24) 제자들 사이의 “우선권 다툼”은 다음 학자들에게서 나탄난다 : D.A. HAGNER, Matthew 14-28, p.581. 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II, p.92. U. LUZ, Matthew 8-20, p.544. C.S. KEENER, Matthew, p.486 : "competition for status among peers was important in their culture". 특히 W.G. THOMSON, Matthew's Advice의 논문안에 마태 공동체 내부의 갈등적 상황이 잘 설명되어 있다 .
25) 특히 막 9.33-37 ; 10.32-45 ; 눅 9.46-47 ; 22.24-30 등은 제자들 사이의 다툼으로 소개한다.
26) 이 본문의 "형제들"용어 (ἀδελφοί, 24절)는 마태에 고유하다. 병행구를 보라 : 막 10.41 ("야고보와 요한"). 그러나 누가복음(22.24-30)안에는 해당 용어가 없다.
27) M.J. WILKINS, The concept of disciple in Matthew's Gospel, p.143. E. CUVILLIER, "Matthieu et le judaïsme", p.46.
28) PLATON, Gorgias, 491e.
29) SOPHOCLES, Trachiniac, 302. 그레코-로마시대의 노예의 최하층 신분에 대하여 W. CARTER, Households and Discipleship, p.172-189를 보라.
30) 이 용어에 기독론적 모방의 의미가 있다. U. LUZ, Matthew 8-20, p.546. W. CARTER, Households and Discipleship, p.171. 참조 : 마가 10.45(γάρ, 원인 강조)와 누가 22.27(δέ, 대조의 강조).
31) G.D. KILPATRICK, The origins, p.127. G. BARTH, "Matthew's understanding", p.75-76. W.C. THOMPSON, Matthew's Advice, p.261. J. ZUMSTEIN, "Matthieu, l'avocat", p.115-118.
32) BORNKAMM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 가설(즉, 유대교 밖의 상황)을 지지한다 : G. BORNKAMM, "The Authority", p.88. D. MARGUERAT, Le jugement, p.239-302. J. ZUMSTEIN, Matthieu : Le théologien, p.23. E. SCHWEIZER, "Matthew's Church", p.149. E. CUVILLIER, "Matthieu et le judaïsme", p.53-54. U. LUZ, Matthew 1-7, p.88. "L'évangéliste Matthieu", p.91. G.N. STANTON, A Gospel for a new people, p.97, 113-169. "Introduction : Matthew's Gospel", p.18-19. J.D. KINGSBURY, Matthew as story, p.154-155.
33) 유대교와 이방인들에 의한 박해의 상황에 대해서도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한다 : G.D. KILPATRICK, The origins, p. 109-112. U. LUZ, “Le problème historique et théologique”, p.127-150. G.N. STANTON, A Gospel for a new people, p.379-391. E-J. VLEDDER, Conflict, p.160. 그러나 D.R.A. HARE, Jewish Persecution, p.146-166는 기독교인 선교사들만이 박해를 받았다고 하며, 마태 복음안의 박해는 과거 사실이라고 반박한다. HARE의 이 견해에 대해 G.N. STANTON 역시 반대한다(A Gospel for a new people, p.159).
34) intra-muros 가설에 대해 : G. BORNKAMM, "End-expectation", p.20. G.D. KILPATRICK, The Origins, p.111,118,122. A.J. SALDARINI, "Boundaries and polemics", p.239-253. 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 p.22-24. P.S. ALEXANDER, "The Parting of the Ways", p.1-25. D.C. SIM, Matthew and christian Judaisme, p.5-6. E.-J. VLEDDER, "Conflict", p.141-167.
35) 이것은 P. BONNARD, Matthieu, p.297의 가설이다. D. HILL, The Gospel of Matthew, p.288 역시 이 가설을 따른다.
36) J. RADERMAKERS, Matthieu, II, p.264.
37) U. LUZ, Matthew 8-20, p.544-547.
38) 사 9.5-7.
39) 마태의 상황은 다소간에 W.G. THOMPSON이 제안한 가설에 가까울 것이다. Matthew's advice, p.255-266, 특히 p.263 : "Scandal resulting in mutual betrayal and hatred (24,10), false-prophets (24,11) and widespread lawlessness (24,12) can easily cause a disciple to wander from the community... Peter's question (18,21-35) about his attitude toward a brother who repeatedly sinned against him was particularly meaningful to a divided community which was experiencing mutual betrayal and hatred (24,10) and in which love was growing cold (24,12)".
40) 참조. E. TROCME, ''Le Christianisme primitif'', p.16. 이 저자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는 그의 고유한 신앙, 고유한 예배, 고유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자에 있어 이 사실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분리를 뜻하지 않는다.
41) 이 본문안에 언급되는, “지상 큰자(μείζων)”로서의 세례 요한과 “천국 작은자(μικρότερος)”의 정체와 의미에 대해 해석이 나뉘어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세례 요한을, 구약에서 처럼, 지상 큰자로 언급하는 고양적 용법으로 간주한다(참조. 출 11,3).
42) S. LEGASSE, Jésus et l'enfant, p.35. E. CUVILLIER, "Juste et petits chez Matthieu", p.357.
43) E. CUVILLIER, "Juste et petits chez Matthieu", p.357이하. W. CARTER, Households and Discipleship, p.95이하.
44) 특히 삿 6.15 ; 삼상 15.17 ; 왕상 3.7등을 보라.
45) 8절 이하가 마태 공동체를 겨눈다는 것은 수신자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많은 학자들이 이점에 동의한다 : R. GUNDRY, Matthew. p.457. P. BONNARD, L´évangile selon Saint Matthieu, p.336. W.D. DAVIES - D.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III, p.265. R.T. FRANCE, L'évangile de Matthieu, II, p.136. J. RADERMAKERS, Au fil de l'évangile selon saint Matthieu, p.288. D.A. HAGNER, Matthew 14-28, p.658.
46) 지상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는 마가복음 6.21(μεγιστάσιν) ; 9.34(μείζων) ; 10.42(μεγάλοι),43(μέγας)에 나타난다. 그외의 다른 구절들은 우리의 논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므로 생략할 것이다.
47) 누가복음 역시 동일하다. 누가 22.24-30을 보라.
48) 이 용어는 "국가의 큰자들, 첫번째들"을 의미한다. A. BAILLY, Dictionnaire Grec-Françqis, p.1236.
49) 누가복음 1.15(μέγας),32(μέγας) ; 7.16(μέγας),28(μείζων, 반복) ; 9.46(μείζων),48(μείζων) ; 22.24(μείζων),26(μείζων),27(μείζων)에 나타난다. 그 용어가 나타나지만, 관련되지 않는 구절들은 생략했다.
50) A. PLUMMER, The Gospel According to S. Luke, p.501. I.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p.811. 여기서 φιλονεικία용어(신약에 한번 나타남)는 “dispute, strife” (BAGD, p.860)을 의미한다
51) 특히 다툼은 막 9.33-37 ; 10.32-45 ; 눅 9.46-47 ; 22.24-30등에 언급되어 있다
구기정
마태복음에 나타난 비유들의 핵심
서론
마태복음 전체 분량의 1/4 정도가 비유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르침 가운데 비유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였는가를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 심오한 진리들을 딱딱한 논리적 철학적 진술들로 제시해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일반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농업, 상업, 어업, 목축업, 자연 현상, 가족 관계, 잔치, 재판, 등)에 빗대어 일상적 언어로 제시해 나가기를 선호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비유 이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50여개에 달하는 마태복음의 비유들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 나타나지만, 특히 13장, 21-22장, 24-25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위의 장들에 나타나는 비유들의 핵심적 메시지들을 그 문맥에 비추어 집중적으로 살펴 볼 것이며, 나머지 비유들은 몇 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간략히 살펴 보려 한다.
1. 13장: 하늘 나라의 비밀
13장에는 하늘 나라(天國)에 관한 8개의 비유들이 나타난다. 이 비유들은 매우 조직적인 구성을 통해 하늘 나라의 속성의 다양한 측면들을 아주 인상적으로 제시해 준다. 그 핵심적인 메시지들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1. 성장하는 하늘 나라
겨자씨(31-32절)와 누룩(33절) 그리고 아마도 씨뿌리는 자(1-9절, 18-23절)와 가라지(24-30절, 36-43절) 비유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비밀스런 시작과 승리적 결과의 절정 사이의 대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님 사역 당시 이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제자 집단 밖에 있던 외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선포를 입증할 획기적인 현상들을 제시해 보라고 도전하였을 것이다(참조. 12:38; 16:1). 한편 제자들 입장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그 온전한 영광 중에 도래함으로써 이를 대적하던 모든 세력을 완전히 멸절시킬 사건을 조급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위의 비유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제공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형태라 할지라도 그 씨앗이 일단 뿌려진 때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 결실할 때까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성장 과정에 있어서 그 반대 세력이 아무리 강해 보인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 나라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일순간에 완결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성장의 과정을 통해 결실해 가는 방법이며, 겉으로 과시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이다.
1.2. 철저한 요구를 수반하는 하늘 나라
보화(44절)와 진주(45-46절) 비유들은 하늘 나라를 소유한다는 것(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자기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함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에서 발견될 수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참조. 10:37-39; 19:27). 즉, 하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 한 그의 주인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서 그의 주인으로서 그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참조. 갈 2:20). 사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6:24), 모든 사람은 자기가 그 자신의 주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그 둘 사이의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신의 소유를 다 포기할 때 마지못해서 하거나 슬퍼하며 한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하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44절). 이는 그 농부에게 있어서 그 보화를 얻는 것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보다 훨씬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외면적인 표시나 가시적 영광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른 모든 소유보다 값진 보화이며, 가치에 있어서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주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고 오직 그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소유하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하늘 나라
씨뿌리는 자(1-9절, 18-23절), 가라지(24-30절, 36-43절), 그물(47-50절) 비유들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누이게 될 것을 가르쳐 준다. 하늘 나라의 그 놀라운 가치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인 반응만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충분히 모르거나(가시떨기, 돌밭) 아예 관심이 없거나(길가) 심지어 배척 혹은 대적하기까지 한다(가라지). 결국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마지막 날 풀무불에 던져져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41-42절). 실제로 11-12장에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관한 언급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가 하면 19장의 부자 청년은 하늘 나라의 가치를 충분히 몰랐기에 재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철저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분명 좋은 반응을 보일 것이며(좋은 밭, 10장의 제자들, 19:27의 베드로의 고백),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결국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됨으로써 마지막 날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43절).
2. 21:28-22:14: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
21-22장에서 연이어 나타나는 3개의 비유들은 각각 독특한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본 문맥에 함께 위치해 있음으로써 막강한 메시지를 제공한다. 그 문맥으로 보아 이 세 비유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참조. 21:23-27). 그러면서도 이 비유들 모두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2.1. 실제로 행하는 자(21:28-32)
두 아들 비유(21:28-32)는 우리가 실제로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참조. 7:15-27). 이 비유의 요점은 31절에 요약되고 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즉,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결론이다. 그들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하나님에게 가장 합당치 못한 자들로 여겨 멸시하였다(참조. 9:9-13).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전혀 반대라는 것이다. 21:23-27의 대화에 비추어 볼 때, 지도자들의 실패는 도덕적 종교적 진실성의 문제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인식하고 환영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멸시받던 자들은 그에게 열렬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자들(둘째 아들)은 영접함을 받게 되는데 반해 종교적인 지도자들(맏아들)은 오히려 배척을 당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참조. 8:11-12).
2.2. 열매를 맺는 자(21:33-43)
포도원 농부들 비유(21:33-43) 역시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강력한 정죄를 포함하고 있다(41, 43절). 이사야 5:1-17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비유는 메시아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원에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잘못 이끄는 지도자들을 반역하는 농부들에 비유하고 있다(참조. 시 80:8ff.; 렘 2:21; 겔 19:10ff.). 41절은 '다른 농부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소작권은 그들이 맺는 '열매들'에 달려 있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이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있어서도 방심의 여지는 전혀 없음을 명백히 해 준다(참조. 롬 11:20-22).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43절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대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한 마태복음 내의 가장 명백한 언급이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의 백성은 혈통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그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자들이면 누구든지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들만이 그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는 새로운 원칙이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2.3. 초청에 응하는 자, 그리고 예복을 입은 자(22:1-14)
혼인 잔치 비유(22:1-14)에서 잔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상징한다(참조. 8:11; 25:1ff.). 청함을 받은 자들이 종들을 다루는 비상식적인 태도(6절)는 21:35-36에서 이미 언급된바 있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절의 태도를 인상적으로 부각시킨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도의 결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되고 있는데, 이 경고는 주후 70년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7절).
9-10절에서는 앞의 두 비유들의 공통된 결론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이와 같이 반응에 실패한 자들은 전혀 예상치 않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대체되리라는 주제이다. 하지만 복음이 보다 넓은 영역의 사람들에게 전파됨에 따라 그 복음은 합당한자 뿐 아니라 합당치 않은 자들에게도 호감을 끌게 될 것인데, 바로 이러한 주제가 11-13절에서 다루어진다. 이 후반부의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에게 자유로이 열려진 가능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원칙도 없는 자유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는 거기에 어울리는 예복, 즉,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삶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참조. 21:41, 43; 7:13-27).
14절은 이 비유의 두 가지 메시지를 간결하게 요약해 준다. 많은 사람이 초대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오기를 거절하였다(5, 6절).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초대에는 응했으나 연회장에서의 규범, 즉,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11, 12절). 이들 두 대상자들 모두가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은 입지 못한 자들로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택함을 입지 못한 이유는 모두 그들 자신의 거절에 있었다. 한편 끝까지 남은 자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ejklektoiv)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운명이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주체, 즉, 하나님의 선택에 의존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그들이 구원을 입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속한 일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세 비유들 모두는 처음 시작보다는 마지막 결과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공히 보여 준다.
3. 24:37-25:46: 하나님 나라의 완성 - 마지막 때
24-25장에 연이어 나타나는 6개의 비유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로서, 특히 그 나라의 완성 시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 때가 임하는 상황을 세 가지 각도에서 적절히 묘사해 준다.
3.1. 마지막 때가 임하는 시기 (24:37-25:13)
노아의 때(24:37-39), 도둑(24:42-44), 지혜 있는 종과 미련한 종(24:45-51), 열 처녀(25:1-13) 비유들은 24:3의 제자들의 질문 중 파루시아, 즉, 세상 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지고 있다. 이 비유들에 나타난 강조점은 파루시아의 때가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과 그 때는 가장 예기치 않은 때에 임하리라는 점이다. 그 때에 대해서는 (징조가 주어지고 있는 성전 파괴의 때와는 달리<참조. 4-35절>) 미리 경고로서 인식 될 만한 징조가 없을 것이며,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시에 심판의 때를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끊임없이 경성함으로써 그 때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25:13은 24:36을 반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두절 사이의 모든 비유들이 알려져 있지 않은 '날'과 '시각'의 주제에 관한 확장된 논의임을 보여 준다.
노아의 때 비유(24:37-39)의 주된 초점은 노아 당대 사람들의 준비되지 못한 모습에 맞추어져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홍수의 때를 예측하여 셈하였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에 항상 준비된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이었음을 보여 준다.
도적 비유(24:42-44)는 재림의 때를 계산하려는 시도의 무익함을 확실히 하고 있다. 제자는 재림의 때를 계산하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너무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지혜 있는 종과 미련한 종 비유(24:45-51) 역시 문제의 초점은 동일하지만, 준비된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다 실제적으로 설명해 준다. 준비된 모습이란 단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때를 위해 열심히, 활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 처녀 비유(25:1-12)에서는 도둑 비유에 인상적으로 나타난 '준비성'(44절) 주제와 나머지 비유들에 나타난 '두 종류의 운명'(24:40-41, 45-51) 주제가 함께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인자의 재림을 내다보는 자들은 기름을 준비함으로써,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신의 본분에 합당한 행동을 행함으로써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준비란 그 날이 오기 전까지만 가능하며, 일단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준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문이 닫힐 것'이기 때문이다.
3.2. 마지막 때를 위한 준비 (25:14-30)
위의 네 비유들에 뒤이어 나타나는 달란트 비유(25:14-30)에서도 준비성의 주제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준비함'이 무엇인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해 준다.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이 와서 보고 인정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 책임 있는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기다림의 기간은 무의미하고 공허한 '지연'의 기간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종들에게 맡겨진 달란트들을 선히 사용할 수 있는 기회의 기간으로 의도된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종들에게 맡겨진 일정액의 돈(달란트, 헬. tavlanton)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연적 재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권들과 기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들은 그 특성과 크기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주인이 돌아오기에 앞서 그 기회들을 충실히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준비성'이란, 그 크고 작음을 떠나서, 제자들로서의 우리들의 책임들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임의 크기를 조정하시는 분은 주인이시다. 종의 의무는 그 크기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 셋째 종의 실수는 단순히 게으름에 있었다기 보다는 그의 주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있었다. 그는 주인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그릇된 운명론적 사고(思考)에 빠졌던 것이다. 이 비유는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데 만 온 마음을 쏟는 소극적인 종교적 성향의 위험성을 적절히 지적해 준다. 주인의 기대는 자신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활동적이고 책임성 있는 충실한 봉사를 통한 결실들에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3.3. 마지막 심판의 기준 (25:31-46)
24:36로부터 시작된 마지막 때에 관한 주제의 절정을 제공하는 양과 염소 비유(25:31-46)는 구분의 최종성을 강조한다(32-33절; 참조. 13장의 비유들; 24:38).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은 구약에서 자주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한편 34절의 '임금', '나라', '상속' 등의 언어는 다니엘 7:14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본 절은 다니엘 7:14의 성취의 궁극적 완성의 단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비교. 16:27-28; 24:30-31, 34).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이 받게 되는 '나라'는 아마도 왕적 권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19:28).
그런데 최종적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는 선행은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한 선행인가? 여기서 '내 형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며(참조. 12:48-50; 28:10), '지극히 작은 자' 역시 어려움에 처한 모든 자들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마태복음의 특징적인 용법으로서의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10:42; 18:6. 10, 14). 그렇다면 여기서 최종적 판단의 기준은 단순한 인간애적 봉사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선행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나라'(40절; 참조. 45절)는 예수님의 선언은 그 판단의 궁극적 기준이 그 선행 자체라기보다는 그 선행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인 것을 보여 준다(참조. 10:40-42). 마태복음의 구조상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 단락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주어지고 있는 이 비유의 분명한 강조점은 열매 맺지 못하는 (즉, 선행으로 표현되지 않는) 관계는 진정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관계에 근거해서는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참조. 7:21-23).
4. 그 밖의 비유들
위의 비유들 이외에도 마태복음 안에는 대단히 많은 길고 짧은 비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들 가운데 산재해 있는데, 그들 중 보다 중요한 것들은 다음 몇 가지 주제들로 분류될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에서 제자들의 현재적 삶의 속성과 중요성: 등불(5:14-15); 좋은 열매(7:16-20); 집짓는 자(7:24-27); 은혜를 모르는 종(18:23-34) 비유들. 2) 하나님의 성품과 주권: 길 잃은 양(18:12-14); 포도원 일군(20:1-16) 비유들. 3) 메시아 시대의 도래: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9:16-17); 장터 아이들(11:16-19;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12:25-26; 참조. 28절) 비유들. 4) 메시아에 대한 반응에 실패한 자들: 장터 아이들(11:16-19); 심지 않은 나무(15:13); 소경(15:14) 비유들.
결론
지금까지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비유들의 주된 초점은 '하나님 나라'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나라 백성의 삶, 그 나라의 왕되신 하나님의 성품과 주권, 그리고 그 나라의 완성의 시기와 그 때를 위한 준비 및 마지막 심판의 기준 등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실질적인 질문들에 직면해 있던 제자들에게 이 비유들은 지극히 필수적인 메시지들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그 주대상으로 쓰여졌던 것으로 보이는 마태복음의 경우,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면 그것은 왜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 세상 가운데 아직 실현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13장의 비유들이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으며, 자신들의 동족 대부분이 왜 하나님 나라로부터 제외되어야만 하였는지에 대한 대답은 21-22장의 세 비유들이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위기 상황을 누구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 들였을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마태는 그 사건이 마지막 때가 아니라 마지막 때는 아무도 모르는 미래적 사건,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최종적 심판이 있게될 사건임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는 24-25장의 일련의 비유들을 그처럼 인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태의 독자들의 그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한국 교회 독자들에게도 그 형태는 달라도 유사한 각도에서 제기되는 (혹은 제기되어야 하는) 경우들이 많으며(예. 하나님 나라의 속성 - 장소적, 미래 지향적 사고로 인한 오해들; 하나님 나라<영생, 구원>와 제자의 삶 사이의 관계;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징조와 마지막 때 도래의 무징조적 성격 사이의 대조), 따라서 한국 교회 성도들이 마태복음에 나타난 비유들의 이와 같은 핵심적 메시지들을 적절히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양용의(에스라 성경신학 대학원대학교)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5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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