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헤롯들
마태복음 2:1, 사도행전 1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들 해하려하여”
문제.
신약에서 헤롯이란 말은 45번이나 나오지만 대부분 구분하지 않고 헤롯이라고만 부리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다른 헤롯들이다. 성경의 배별을 좀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하기 위해서 헤롯 왕들을 구분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해석
A . 헤롯대왕(Herod the Gerat, bc37-4)
1. 예수께서 태어나신 당사의 헤롯은 헤롯대왕아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2:7-19과 누가복음 1:5에 나오는 헤롯 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33년 동안 유대인들을 다스리다가 마지막으로 베들레헴의 어린이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예수께서 태어나던 그해에 죽었다. 헤롯 대왕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 사람이다. 유대인ㄴㄴ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이방인이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 되었는가? 순전히 그의 아버지와 로마 세력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이두매의 실력자인 헤롯의 어비지 안티파테르(Antipater)는 유대 마지막 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혼란기를 틈타 로마의 권력을 힘없어 유대의 행정장관이 된다. 아버지의 권세 때문에 25살의 젊은 나이에 갈릴리의 총독이 된 헤롯(BC 47)은 틈을 엿보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공략하여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BC 37)
2.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잘 알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성전을 제 3성전 혹은 헤롯 성전이라 부를 만큼 오랜 서월에 결처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각종 건물들을 화려하게 건축하였다. 그리고 유대 하스몬 왕조의 공주인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음모에 휘말려 사랑했던 마리암네와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언제 로마의 지지가 끊어질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던 헤롯은 천혜의 요새인 거대한 마사다(Masada)를 건축하여 유사시에 피신하려고 했으나 사용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게 병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헤롯이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베들에헴의 두 살 아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고한 것은 그이 처지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3. 헤롯은 열 명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의 첫 아내는 이두매 여인인 도리스(Doris)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스를 버리고 히르카누스(Hyr-canus)II세의 손녀인 마리암네(Mariamne)공주와 결혼하였다. 유대 왕실과의 결혼은 그의 왕권의 정통성을 좀더 확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헤롯은 마리암네를 사랑했으나 마리암네는 그를 싫어하였다. 마리암네에게서 아리스토볼루스(Aristobulus)와 알렉산더(Alezander)라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헤롯은 후에 마리암네와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마리암네가 죽은 후 헤롯은 예루살렘의 제사장 시몬의 딸인 또 다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헤롯빌립을 얻었다. 이 빌립이 헤로다아의 첫 남편이 되지만 후에 헤롯 안디바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마14:3;막6:17) 그 다음 헤롯은 사라미아 여자 말다게(Malthace)와 결혼하여 아켈라오(Archelaus)와 안디바(Antipas)를 낳았는데 이 두 아들이 헤롯 사후에 유대의 실권을 쥐게 된다. 헤롯의 또 다른 아내는 예루살렘 여인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이다. 이 여자는 빌립을 낳았는데 헤롯은 빌립에게 아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도록 했다.(눅3:1) 다른 다섯 명의 아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헤롯왕의 가계는 부록을 참고할 것)
4. 헤롯은 사마리아를 건축하여 세바스테(Sebaste)라고 일컬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거의 70세였으며 죽을병에 결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병적인 의심과 욕심은 베들레헴의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주게 만들었다. 그이 치세는 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B.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 BC4-AD6)
1마태복음 2:22에 나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다. 헤롯 대왕은 유언장에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눠 주었다.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의 아들 아켈라오에게는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를, 둘째 아들 안디바에게는 갈릴리 지방을,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빌립에게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주어 다스리게 했다.
2.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을 닮아 향락과 시치를 사랑했으며 진안한 면이었었다. 즉위한 첫해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를 투입하여 3.000명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런 아켈라오를 두려워했으며, 그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파하여 돌어갔다. 폭도들을 지지했다는 구실로 대제사장을 파면한 일, 아내와 이혼하고 불의하게 재혼한일, 그리고 그의 잔혹성이 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려 그는 인기가 없었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연합하여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여 아켈라오를 추방하는데 성공하였다 (ad6).
3. 유대인들은 이제 헤롯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세우기를 원하였지만 로마는 아켈라오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을 두어 유대 지방을 다스렸다. 따라서 예수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제5대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AD.26-36)가 다스리고 있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는 총독을 철수시키고 총독이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도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에게 주었다. 그래서 한동안 (AD44까지)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 헤롯 대왕을 이어 전 이스라엘 지역을 통일하여 다스렸다. 아그립바가 죽자 로마는 다시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바울이 가이시랴 에서 만난 로마의 총독은 제 11대 총독 벨릭스(Felix, AD52-60)와 제 12대 총독 베스도(Festus, AD 60-62)였다.
C.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BC4-AD39)
1. 안디바는 헤롯 대왕이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아버지 헤롯의 유언에 의하여 그는 갈릴리와 페래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영토가 참례자 요한과 예수께서 사역을 한 곳이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헤롯은 헤롯 안디바를 말한다(마14:1-7;막6:16-22; 눅3:1,19; 9:7,9; 13:31; 23:7-15). 그는 당시의 로마 황제 디베료(Tiberius)를 기리기 위하여 유명한 도시 디베랴를 건설하였다.
왕의 이름 | 헤롯 대왕과의 관계 | 통치연대 | 설명 |
헤롯대왕 | BC37-4 | 예수 탄생시의 왕이다. | |
헤롯아켈라오 | 아내 말다게의 아들 | BC4-AD6 | 유대의 영주로 임명되었으나 실정을 거듭하여 추방되고 총독이 파견되었다. |
헤롯 안디바 | 아내 말다게의 아들 | BC4-AD39 |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침례자 요한을 죽였고 수난주간의 마지막 밤 예수를 심문하였다. |
헤롯 빌립 | 아내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 BC4-AD34 | 갈릴리 북동쪽 골란 지방의 분봉 왕으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
헤롯 아그립바1세 | 아내 마리암네 사이에난 아리스토볼로스의 아들 | AD37-44 | 할머니와 아버지가 할아버지 헤롯 대왕에게 살해당하는 L극을 겪은 왕자이며 왕이 된 후에 야고보를 죽였다. |
헤롯 아그립바 2세 | 증손자로 아그립바 1세의 아들 | AD50-70 |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이 만난 왕으로서 아니가 여려서 실권을 갖지 못했다. |
2. 침례자 요한과 헤롯 안디바
헤롯 안디바가 유명한 이유는 그가 침례자 요한을 죽였기 때문이다. 안디바는 나바테아의왕 아레다 4세의 딸과 결혼했다.(AD14). 그러나 로마 여행 중 이복형제 빌립을 방문했다가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Herodias)를 유혹하여 그와 결혼을 약속하고 이 사실을 안 아레다의 딸은 분노하여 그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곧 결혼하였다. 침례자 요한은 이런 불의할 결혼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를 부정한 여자로 책망하는 요한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딸 살로메를 시켜 침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
3. 예수와 헤롯 안디바
예수와 헤롯안디바가 관계된 세 가지 기사가 신약에 나온다. 첫 번째는 헤롯 안디바가 예수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두려워하며, “이는 침례자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 도다”(14:2)라고 말한 경우이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헤롯 안디바를 “저 여우”(눅13:32)라고 부르신 사건이다. 헤롯 안디바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께서는 간교하고 음흉한 그를 여우에 배유하셨다.
세 번째 사건은 잡히신 예수께서 헤롯 안디바가에게 신문을 받으신 사건이다. 헤롯은 갈릴리 지방의 왕이지만 명절 때에는 예루살렘의 헤롯 궁에 와 있었다.(눅23:6-12) 빌라도는ㄴ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궁리하다가 마침 헤롯안디바가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을 알고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인 예수를 그 지방의 분봉왕 헤롯에게 보냈다. 평소에 예수를 보고 싶어 하던 헤롯은 예수를 신문한 후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자 별다른 판결 없이 예수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4. 헤롯 안디바의 말년.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안디바의 아내 헤로디아의 동생이다. 아그립바가 불하한 시절을 보낼 때 잠시 안디바에게 몸을 의탁했었는데 그는 처남인 아그립바를 도와주면서도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후에 아그립바의 후원을 고맙게 생각한 로마의 갈리굴라 황제는 아그립바에게 빌립이 죽고 난후 그의 영토를 주고 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아직 정식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분봉왕 안디바와 헤로다아의 시기심은 대단했다. 그의 부부는 처남인 아그립바와 같은 왕의 칭호를 얻기 위해 급히 로마로 달려갔으나 아그립바가 선수를 쳐서 안디바는 영주의 자리마저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로마는 안디바의 영토를 아그립바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렇게 해서 침례자 요한을 죽이고 예수께서 처형 받도록 방관했던 헤롯 안디바는 마침내 불행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D. 헤롯 빌립(Herod Philip, BC 4-AD34)
1. 빌립은 헤롯 대왕과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난 아들이며, 아버지가 죽자 헤롯 대왕의 영토중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이두래 와 드라고닛 지방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복형제인 아칼라오, 안디바와 함께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가 다스린 백성들은 주로 수리아인과 헬라인 계통의 비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헤롯 왕가에서 제일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복형제들처럼 야심도 없었고 간교하지도 않았다.
2. 그는 두 도시를 건설하였다. 하나는 요단강 수원에 위치한 파네아스(Panes)를 확장, 재건한 것이다. 그는 황제의 영광을 위하여 이도시를 가이사랴로 명명하였는데 후에 그것을 남쪽의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부르게 되었다.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고 물으신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가 건설한 또 하나의 도시는 어촌인 벳새다를 헬라식 도시로 건설한 벳세다 율리아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수 황제의 딸 율리아를 기념하여 이 도시를 벳세다 율리아로 명명하였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고쳐주신 곳이 바로 여기다 (막8:22-26)
3. 그는 온건하고 평화스럽게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말년에는 30년이나 연하인 그의 질녀, 즉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하였으나 자녀가 없이 죽었다. AD 34년에 빌립이 죽자 그의 영토는 수리아에 합병되었지만 3년 뒤 갈리굴라 홍제는 아 땅을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주었다.
E.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1, AD37-44)
1.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다. 즉 헤롯대왕과 하스몬가의 마리암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아리스도볼루스의 아들로서 헤로디아의 동생이다. 그는 키프로스(Cypros)와 결혼하여 4남매를 낳았다. 버니게, 마리암네,드루살라. 아그립바 II세가 그들인데, 두루실라 유대 총독 벨릭스의 아내가 되었고(행24:24), 버리게는 남편이 죽자 오빠인 헤롯 아그립바 II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부인처럼 살았다.(행25:13).
2.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자였다. 그는 헤롯가의 왕자로서 로마에 유학하였으며 돈을 낭비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마침내 그는 많은 빚을 지고 채무자들에게 쫓겨 낙향하였다. 매형인 헤롯 안디바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주었으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는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에서 그는 칼리굴라와 교제했는데, 어느 날 디베료 황제가 물러나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지각없는 말을 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6개월 후 디베료 황제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그는 즉시 아그립바를 석방하고 그에게 빌립의 영토를 주고 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AD37), 그가 영토를 돌아보러 팔레스타인에 돌아오자 시기심에 불탄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자기도 분봉왕의 칭호를 떼어버리고 왕의 칭호를 억기위해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재빨리 사자를 로마로 보내 헤롯 안디바를 고발하였으며 그 결과 안디바는 분봉왕 자리마저 빼앗기고 추방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아그립바는 이렇게 해서 매형과 누나를 몰아내고 마침내 안디바의 영토까지 차지하게 되었다.(AD39)
그의 행운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2년 뒤 AD41년 그가 잠깐 로마에 체류하고 있을 때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당하고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복잡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현명한 충고 덕분에 두려움을 이기고 원로원을 제압하여 권력을 얻은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에게 총독이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가지도 영토로 주었다. 이렇게 해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명실상부하게 할아버지 헤롯대왕의 영토를 다시 한번 통일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3. 사도행전 12장에 헤롯 아그립바 12세는 초기 교회를 핍박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카로 죽였으며 그 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자 베드로를 잡아 투옥하고 유월절 후에 죽이려했다. 그날 밤 기적적으로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구출되자 진노한 왕은 파수꾼들을 잡아 죽였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AD44년에 가이사fi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는데 누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그 축제의 두 번째 날에, 아그립바 왕은 순은으로 짠 침으로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으로 들어갔다. 태양 광선이 찬란하게 비치자 그 옷은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반짝임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아첨꾼들은 아그립바 왕을 신아라고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잡았다…….앙은 54세, 즉위한지 7년 되는 E에 세상을 떠났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xix 8.1)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II세는 겨우 17세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에 다시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F. 헤롯 아그립바 II세 (AD 50-100)
1.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그의 어린 아들 아그립바 2세는 로마에 있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친한 글라우디오 황제는 즉시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싶었지만 아직 어려서(17세) 영토를 다스리기에는 무리라는 반대를 할 수 없이 수용하여 다시 쿠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를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몇 년 후에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글라우디오 황제에게 빌립의 영토를 물려받았다. AD 54년 황제가 된 네로는 아그립바 2세 에게 갈릴리 주변의 땅을 추가해 주었다.
아그립바 2세는 유대에 파견된 총독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종교 문제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총독 베스도는 헤롯 아그립바 2세에게 바울문제를 상의하였다(행25:26). AD 70년 유대 전쟁시 아그립바 2세는 로마를 지지하였으며 로마 황제가 네로(AD54-68), 갈바(Galba, 68),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 티투스(Titus.97-81)로 바뀌는 동안 충성을 맹세하여 계속 좋은 관계를 맺고 영토를 보전하였다. 그는 AD 100년경에 죽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헤롯 왕조도 막을 내렸다.
2.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사생활은 건전하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확실치 않고 여동생 버니게는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다.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도 그는 버니게와 함께 있었다(행25:23)
3. AD 60년경 어느 날 아그립바는 세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을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가서 여러 날을 묵었다(행25:12,13).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자문을 구하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보고 싶어 했다.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앞에 섰다. 바울은 아그립바 2세가 유대인의 모든 풍습과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런 왕 앞에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고 말한다(행26:2,3). 바울의 논리정연한 말에 당황한 아그립바 2세는 “네가 적은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 라고 말하였다. 아그립바는 그의 호기심은 채웠으나 구원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방탕하게 살았던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요약
신약에 나오는 헤롯은 다 같은 인물이 아니다. 예수의 탄생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왕이었고 그 후에 그의 아들 3명과(아켈라오, 안디바, 빌립) 그의 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1세) 그리고 증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2세)이 등장하여 다른 역할들을 수행하였다.
왜 두 살 아래 아이를 다 죽였을까?
마태복음 2:16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문제
성경은 헤롯이 죽인 아이들을 왜 갓난아이라 하지 않고 두 살 아래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인가? 당시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서 두 살 아래 어린이는 몇 명이나 되었을까? 자기 왕위의 안전을 위해 죄 없는 어린이들을 죽일 만큼 헤롯 왕은 잔인했는가?
해석
a. 헤롯이 잔인하게 두 살 아래 어린이들을 다 죽인 사건을 왜 다른 복음서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헤롯 왕은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위의 안전과 인가를 이해서는 사랑하던 아내와 두 아들을 죽일 만큼 병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각 지방의 귀족들을 경기장에 감금해 놓고 그가 죽는 순간에 그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여 전국적인 애도가 일어나도록 하라고 명령할 만큼 정상인이 아니었다. 그런 병적인 사람이 자기와 헤롯 왕조를 치명적으로 위협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데, 더구나 그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알고 있는데 가만히 이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b.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다. 그 인근 지경까지 합한다 해도 두 살 아래의 어린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20-3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어린이 살해 사건도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성경기자들은 그 당시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길이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주제나 관심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과감히 생략했다.
c. 그렇다면 왜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니고 두 살 아래인가? 헤롯은 별이 나타난 때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물었다(마2:7) 그리고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여행한 기간이 적어도 40일 이상이 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주도면밀히 계산한 헤롯은 만일의 경우까지 생각하여 안전하게 두 살 아래로 범위를 정했을 것이다.
요약
마태의 기록은 정확하다. 헤롯 대왕은 자기의 왕위의 안전-을 해치는 세력이라면 수천 명이라도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동방ㄷ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이기 때문에 헤롯은 살해할 아이들의 나이를 두 살 아래로 정했다.
서양미술사에는 브뢰헬 두 사람이 나온다.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와 그의 장남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el the Younger (1564-1638)이다.
아버지 브뢰헬은 Belgian Northern Renaissance의 핵심 화가로 16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화가다.
그때의 네덜란드는 벨기에를 포함한 국가로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분리되기 전이다.
당시에는 벨기에나 네덜란드나 각각의 지방색처럼 회화의 풍도 달랐다.
아버지 브뢰헬의 정확한 출생지와 연도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다만 그가 사망한 후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카렐 반 만데르의 화가들에 관한 책에 따르면 그는 앤트워프의 화가인 피테르 쿠케 반알스트 아래에서 도제로 지냈다고 한다.
그곳에서 일찍부터 인문주의를 접했으며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고 로마에서 지내는 동안 미켈란젤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오늘 비교하는 작품에서 보듯 사람의 행위를 관찰하는 데 깊은 노력을 했는데 세부적으로 깊게 관찰함과 동시에 정밀하게 묘사했다.
또한 브뤼헬은 주목 받지 못하던 평범한 농민들을 그림에 등장시켜 농민 생활을 매우 실감나게 묘사한 화가로 알려지는데 재치있는 장면을 유쾌하게 묘사하여 풍속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플랑드르 지방의 자연 풍광을 장대하고 밀도 높게 그려 풍경화 장르를 열었으며 17세기 루벤스가 등장하기까지 북유럽 사실주의 기법을 지켜내면서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이룩한 화가로 남았다.
그의 장남 피테르 브뢰헬은 아버지의 벽을 넘지는 못했으나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주로 아버지 그림 기법을 모방하여 풍속화 종교화 등을 그렸으나 아버지와 차이나는 작품을 그리고자 겨울 풍경을 공상적 또는 우스꽝스럽거나 괴이한 장면 그리고 지옥의 장면 등을 즐겨 그렸으므로 지옥의 브뢰헬 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버지 브뢰헬
Massacre of the Innocents by Pieter Bruegel the Elder
베들레헴의 영아학살 (1565-1567)
원작 London The Royal Collection
아들 브뢰헬
Massacre of the Innocents by Pieter Brueghel the Younger
베들레헴의 영아학살 (1605-1610)
모작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동네 풍경이다.
성경에 나오는 헤롯의 유아학살에 대한 그림이다.
유아 대학살은 마태복음 2 장1 ~18절에 나오는 동방박사에 의해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게 된 헤롯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성경 이야기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그림의 스토리가 완전히 다르다.
마을 한복판에서 거위 닭 같은 가금류가 창 끝에서 파닥거리고 있다.
영아학살 그림인데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이가 없고 대신 항아리가 있다.
갑옷입은 병사들의 휘장엔 독수리가 보이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문장이다.
1558년부터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지배했으므로 이를 희화화한 것이다.
그림에는 네덜란드 총독 알바 백작도 보인다.
병사들이 잡는 칠면조는 원래 아기들이었으나 그림을 본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가 잔혹하다는 이유로 아기들이 살해되는 장면 대신 양 칠면조 거위 등으로 덮었다고 한다.
그림의 중앙에는 말 탄 기병들이 살육을 하고 있고 고개를 돌리는 여인들이 있고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버티는 여인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 하는데 항아리다.
여자들이 보따리, 항아리 동물들을 안고 울고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이 바로 아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실제 이 동물 혹은 보따리 이전에는 아기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동물 보따리 등으로 덧칠을 한 것이다.
이는 아들 브뢰헬이 그린 모사품에서 파악된다.
브뤼헬은 이 이야기를 성경에서 벗어나 16세기 네덜란드의 마을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성경과는 달리 로마 군인이 아닌 스페인 군대 제복의 병사들로 바꾸어 버렸다.
플랑드르에서는 신교도들을 탄압하지 않았던 가톨릭교도들 만여명이 재판을 받고 천여명을 처형 시켰으므로 무언의 항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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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화가 두치오가 그린 1388년 영아학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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