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복음서 연구

“최후의 만찬에서 베드로는 어디에 앉았을까?”

by 은총가득 2021. 1. 7.

 

 

 

“최후의 만찬에서 베드로는 어디에 앉았을까?”

 

기독교 성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가 그린 ‘최후의 만찬(1494년.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녀원)’이 아닐까 싶다.

유태인들의 문화와 풍습에 맞추어 이 땅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신 예수의 ‘최후의 만찬’ 테이블을 재현해 보자.

 

1. ‘최후의 만찬’ 방은 사랑방?

최후의 만찬이 벌어진 마가의 다락방은 어떤 용도로 사용된 곳일까? 성서시대의 집들은 ‘카탈루마’로 불리는 손님방이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손님들이 머무는 ‘사랑방’쯤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브엘세바 광야에서 거하며 양들을 치는 베두인들은 손님 접대를 최고의 가치와 명예로 여긴다.

 

2. 마가의 다락방은 2층 방

첫째, 다락방었다. 성서시대 대부분의 집들은 단층으로 이루어졌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2층으로 집을 올렸다.

둘째, 큰 방이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 방에서 120명의 무리가 함께 기도 모임을 할 정도로 대단히 큰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자리를 베푼 방이었다. 이것은 숙식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를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3.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오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첫째, 테이블의 모양이 잘 못이다.

한글 자음의 ‘ㄷ’자 모양의 3면 테이블(triclinium)이어야 한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유대 땅에도 보급되었다.

둘째, 테이블에 앉는 좌석 배치가 잘못되었다.

3면 테이블에서는 상석과 말석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상석은 왼쪽 날개부분이고, 말석은 오른쪽 날개 부분이다. 최후의 만찬 테이블에서 상석은 당연히 그 식탁의 주빈(guest of honor)이었던 예수의 몫이다.

셋째, 테이블에 앉은 자세가 잘못되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은 유월절 쎄데르 식사를 바닥에 앉은 자세에서 비스듬히 누워서 먹었다. 비스듬히 누워서 먹는 식사법은 주전 63년에 폼페이 장군에 의해 유대 땅이 로마제국으로 편입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당시 랍비 문헌은 유월절 식사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일 년 중 한 끼 식사, 즉 유월절 만찬만큼은 부자처럼 기대서 먹어야 한다.)

 

 

4. 제자들이 상석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다.

‘ㄷ’자 모양의 3면 테이블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로마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예수도 누가복음에서 당시 로마 제국에 편입된 유대 사회의 계급 구조에 대해 언급하였다.(눅14:8-10)

성서시대의 문화와 복음서의 기록을 토대로 최후의 만찬 테이블에서 요한과 가롯 유다, 그리고 베드로의 좌석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왼쪽 날개의 중앙은 그 잔치의 주빈인 ‘예수’ 자리였다. 그 주빈의 오른쪽 자리는 주빈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앉았다. 그 자리는 ‘요한’의 몫이었을 것이다. 왼쪽은 가룟 유다였을 것이다. 오른손으로 떡을 찍어다가 자신의 왼쪽에 앉아 있는 ‘가룟 유다’의 입에 넣어 주었다.(요 13:26) 예수는 배반자 유다의 품에 안겨서 식사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좌석은 아마도 테이블 오른쪽의 가장 말석이었을 것이다. 평상시 베드로와 야보고, 요한은 예수의 수제자들이었다.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후 자신의 옆에 앉은 제자들부터 차례로 발을 씻겨 주셨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지만 그는 발을 내밀지 않고 버텼다. 승부욕이 강하고 늘 첫째가 되고자 했던 베드로는 말석에 솔선수범해서 앉아 아마도 ‘큰 자가 되려면 낮은 자가 돼라(마 23;11)’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을지 모른다.

- 『열린다 성경(식물, 광야, 성전, 절기, 생활풍습上?下, 동물)』 / 류모세 지음  <잃어버린 를 찾아서>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루브르판 '암굴의 성모' 이후 여러 작품을 그리다 1495년부터 후원귀족 스포르차를 위해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한다.

요한복음의 예수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그림은 무수한 소문들을 동반하고 있으며,

1999년에 복원되었지만 다빈치가 그린 것은 20% 정도만 남아서 원본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The Last Supper. 1495~1498 . 460 x 880 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Italy (1498)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 내용을 조형화한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를 그리고 있다.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게 될것이다'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포함하여 모두가 이 만찬 장소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전해듣는다.

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였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찬미를 기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들어서 각각 이를 ‘자신의 몸’과 ‘자신의 피’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 예식을 영원히 기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적혀있다.

성체성사 즉, 성찬례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최후의 만찬'은 예수를 한가운데 그리고 제자들은 식탁 양쪽에, 예수를 판 가롯 유다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화가)의 '최후의 만찬'에서 처럼 따로 식탁 건너편에 외롭게 앉혀서 표현 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유다를 다른제자와 같이 앉히는 관용을 베풀었고, 돈주머니를 움켜쥐고있는 가룟 유다는

유일하게 어두운 그늘에 앉혀 빛 가운데 앉은 다른 제자들과 구분시켜 표현하고 있다.

 

사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제목만 같을 뿐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다.

레오나르도는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폭탄 선언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이 배신감과 자책감에

심리적으로 동요되는 극적인 순간을 택했다. 예수가 빵을 들어 축도하는 종래의 평범한 장면을 택하지 않았고,

또 드라마틱한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제자들을 세 사람씩 한 그룹으로 결속시키고,

또 좌우 여섯 명에 연대시키고 12사도 전체를 연관시켜 감정의 회오리바람을 그림에 도입했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가 갖는 모든 표정, 동작, 제스처(Gesture)가

이러한 극적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의 위치도

실은 레오나르도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배치한 것이다. 괴테가 지적했듯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람 몸 전체가 생동감있게 표현되고 정서와 열정과 생각이 신체의 동작에 예민하게 나타나,

손의 제스처는 이탈리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표현 동작이며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 위치도 그가 치밀하게 계획해 배치한 것이다.

 

예수 뒤로 또 다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원근법을 강조했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를 그릴때 따로 모델을 찾지 않았다.

 

최후의 만찬 스케치

 

1449년, 프랑스의 국왕이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공작을 몰아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다빈치는 만토바로 도망쳤다 다시 베니스로 향했다. 그리고 1500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명성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다.

 

1503년, 수천명의 군중들이 다빈치의 새로운 작품을 보기위해 피렌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1975년에 촬영한 복구 전의 모습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 이 벽화는

다 빈치가 그림을 완성한 뒤 그림은 계속 망가지기 시작했고, 500년이 흐르는 동안 원래 그림이 많이 훼손되어

이탈리아 정부는 그림을 복원하기로 결정, 1978년부터 시작된 21년간의 복원작업 후 1999년 5월 28일 복원된 그림이 공개된다.

 

진짜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20%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는 수십명의 다른 화가가 그려 넣은 것이다.

구도, 공간 처리, 각 인물의 배치, 색채 등에서 레오나르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록 복원되었긴 했지만 원래 그림은 거의 사라져있는 상태이다.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지 겨우 20년이 지났을때 원래의 색감이 거의 다 벗겨져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이렇게 금방 훼손된 원인은 다빈치가 새로운 채색 기법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기존의 방식은 젖은 회벽위에 안료로 채색한 다음 건조시키는 방법이었는데 다빈치는 밑그림을 이중으로 그린후 템페라와 유화물감을 섞어 썼다. 훨씬 더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했지만 지속성은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약했다.

 

1999년 복원된 그림 (5381 X 2926)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1943년 8월 15일 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이 교회와 수도원을 폭격하였고,

이로 인해 식당의 많은 부분들이 부셔졌으나 다행히도 이 최후의 만찬은 살아남았다.

 

1943년 폭격후의 사진과 살아남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을 보호하기 위해 구조물을 설치한 모습이다.

 

“다빈치 ‘최후의 만찬’, 4006년 ‘인류 종말’ 예언” ... [서울신문] 2010년 03월 16일(화)

 

 

Sala delle Asse ceiling frescoes

아쎄의 방

 

the ceiling of the Sala delle Asse, Castello Sforzesco, Milan. Painted by Leonardo da Vinci, c. 1498-99

 

'아쎄의 방' 벽이나 천장에 회반죽 위에 물감으로 장식한 것으로 식물의 줄기와 나뭇잎 등이 얽히고 설켜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1498 년경의 작품으로 밀라노의 카스텔로 스포르 체스코 (Castello Sforzesco) 성에 있다.

 

스포르체스꼬 성은 두오모의 성모마리아상과 비스콘티 가문 문장의 뱀과 함께 밀라노를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이 성의 많은 방들 중 꼬르떼 두깔레(Corte Ducale)방의 프레스코 화들은 볼만하며 까스텔로 디 로까비안까(Castello di Roccabianca)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성 안쪽에 위치한 그리젤라의 방(Camera di Griselda)이나 아쎄 디 레오나르도의 방(Sala delle Asse di Leonardo)도 볼 가치가 있다.

 

 

Little remains today of the Leonardo’s decorative paintings in a suite of rooms in the north-east tower of the Castello Sforzesco. Although nothing survives of the paintings of the Sala Negra, in the Sala delle Asse (“Room of the wooden panels”) fragments of trees are visibly portrayed on the upper sections of the lateral walls.

Leonardo worked on this mural with his assistants.

 

The branches of the trees are interwoven with golden braids to form a dense canopy that stretches across the ceiling and around the arms of Ludovico Sforza and Beatrice d’Este positioned in the centre. Other tablets on the ceiling with inscriptions refer to the marriage of Ludovico’s niece to the Emperor Maximilian in 1493, and to the Sforza’s claim to the Dukedom of Milan after the death of Filippo Maria Visconti, as proclaimed by Maximilian in 1495. A third tablet proclaims Ludovico’s victory over the French at the Battle of Fornovo, and his journey to Germany to cement an anti-French alliance with Maximilian in 1496.

 

The trees appear to be mulberry trees and as such are a reference to Ludovico Sforza, who was known as “il Moro”.

Surviving documents thought to relate to the decoration of the rooms imply a completion date of 1498 for the work.

 

 

the Sala delle Asse Detailes

 

 

One of less known, yet possibly among the most imaginative works of Leonardo da Vinci are his paintings in Salle Delle Asse in Sforza castle in Milan. Leonardo has very skillfully used the geometry of the hall so to achive impression that the observer stands in the middle of some dense forest (this work of Leonardo could probably be categorized as Trompe-l'œil, that was quite common later, in the baroque era). But the pattern Leonardo creates is a complex "knottiness" of leaves, branches and ropes that tie together in hundreds of different and very mathematical ways.

 

위의 마디에서 착안하여 그린 그래픽들 Leonardo's knottiness

 

 

출처 : http://asiber.ifs.hr/leonardo_uzorak_en.html

  http://blog.daum.net/wongis/7095014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세만 그 당시의 프레스코화가 일반적 임에도 템페라 기법을 활용하여 쉽게 변질되어 오늘 날 많이 훼손되었다. 이는 역사와 진실 앞에 고뇌하는 ‘다빈치’에게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템페라기법으로 속죄하는 마음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 上善若水 구상생각

구상나무(koreanfir)


우리 세대에 창의융합형 인간이라면 팔방미인, 오지랖 넓은 사람, 특출나게 잘하는 것은 없지만 여러방면에 관심이 많고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을거에요. 하지만 그들도 그 능력을 더 발전시킬수 있는 시대와 교육환경과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면 아마도 창의융합형 인재로 거듭날수도 있었을거에요.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세종을 만나 그 능력을 발휘한 장영실, 우리에게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의 결과물인 아이패드와 아이폰을 선물해준 스티븐 잡스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창의융합형 인재이겠죠. 500년전에 살았던 인류 역사 최고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야 말로 르네상스라는 시대를 만나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노력에 의해 다양한 분야에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진정한 창의융합형 인재라는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읍니다.

 

 

다빈치 일생의 무대는 크게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 말년을 보낸 프랑스 입니다. 만약 시련과 도전의 기회를 줄수 있는 인생의 무대 변화가 없었다면 다빈치도 현재에 안주하고 일반적인 똑똑한 인재로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우리나라 한국사와 함께 살펴보면서 다빈치가 다양한 스승, 멘토를 만나 자신의 능력을 꽃피웠던것처럼 다빈치가 장영실과 만났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지도 무척 궁금해지는 한국사, 세계사와 함께 보는 다빈치 일생 연대기표네요.

 

뛰어난 천재라고만 불렸던 다빈치가 최근에 모든 분야에 통달한 창의융합 인재의 모범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 어떤 단계를 밟아 창의융합 인재로 우뚝 섰는지 이 책을 따라가며 살펴보게요.

 

 

어릴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인 다빈치는 당시에 화가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가 아니라 물건을 생산하는 수공업자로 평가되었지만 화가는 자연과 가장 닮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직업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대학을 갈수 없었던 다빈치는 프란체스코 삼촌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자연속에서 무엇이든 꼼꼼히 관찰하는 관찰력을 키우죠. 아버지를 통해 베로키오에게 그림 실력을 인정받은 다빈치는 피렌체 베로키오 공방에서 그림을 향한 첫발을 내딛읍니다. 드디어 <그리스도의 세례> 작품을 통해 스승님을 뛰어넘는 실력을 인정받아 회화 분야의 일을 혼자서 맡게 됩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대학교육을 받을수 없었던 다빈치는 책을 좋아하는 책벌레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통하여 지식과 감동을 얻어 다양한 분야에 그것을 응용하고 접목시킴으로써 그의 위대한 업적의 바탕이 되게 합니다.

다빈치가 견습 생활을 하는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예술, 건축, 문학, 과학 등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지요. 또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으로 책이 여전히 귀하고 비싸지만 책을 접할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지요. 선배의 책을 통해 책에 대한 다빈치의 열망의 문이 열린 후론 자신이 얼마나 지식에 목말라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알아 가는 기쁨이 얼마나 행복감을 주는지 알게 되지요. 새로운 스승 알베르티를 만나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선 예술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피렌체 대성당 꼭대기에 구를 얹으면서 기하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과정에서 물리학, 역학, 기하학, 건축한, 야금학까지 배울 수 있었읍니다. 드디어 이런 모든 지식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책을 만날수 있는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을 이용할수 있는 허락도 받게 됩니다.

 

 

다빈치를 훌륭한 화가로 알게 하는 오류를 범하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 가장 훌륭한 그림인 <최후의 만찬>은 철학, 수학, 해부학, 광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있어 탄생하게된 다양한 지식이 하나로 융합되어 예술성을 높인 최고의 산물이죠.

 

라틴어를 하지 못해 교양 지식이 없다고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로부터 홀대 받은 다빈치는 결국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배우게 됩니다. 피나는 노력의 덕에 라틴어를 익히고 혼자서 고대 과학에 접근할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자신을 후원해줄 밀라노의 스포르타 공작을 찾아 밀라노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림이 아닌 류트 연주로 스포르타 공작의 인정을 받아 차차 화가로 명성을 쌓아가게 되지요.

 

1498년 <최후의 만찬>이 세상에 공개되자 정중앙에 자리 잡은 예수를 중심으로 공간이 점점 깊어지면서 마치 벽면 안쪽에 또 하나의 방이 있는 듯 보이게 하고 예수 머리 뒤의 창문에 초점이 모이게 하여 후광과 같은 효과를 내는 원근법과 제자들의 손짓, 태도, 모습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고 그림속에서 제자들에게 각자 역할을 주어 그림으로 말없는 시를 표현한 표현력에 모든 사람이 놀라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우연히 그리게 된 리자의 초상화를 그릴때도 인공적으로 석양을 만들기 위해 안뜰에 검은색을 칠한 벽을 쌓고, 그 벽 위에 지붕을 얹어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해가 날 때는 가리개로 빛을 조절해 햇빛에 구속받지 않도록 하여 대낮에도 얼굴에서 이마 부분만 빛나 보이고 양 볼을 감싼 어둠도 도드라지게 하고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해 일부러 인물의 윤곽선을 흐리게 처리하여 여인의 미소를 모호하지만 부드럽게 보이게 하여 신비로운 미소를 만들어 그 멋진 <모나리자>를 만들어 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랜시간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면서 얻은 지식들을 하나로 융합해 보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오늘날 다빈치를 대표적인 르네상스 인 이라고 부르는 거구요.

 

비록 사생아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다빈치는 자연, 동물, 신분과 빈부의 격차 없이 모든 사람이 편하게 만날수 있는 사람이길 바랬어요. 그런 마음때문에 그의 창조적 작업들 속에 자연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이 깔려있죠.

새장에 갇힌 새들을 구하기 위해 새를 구입해 날려보내주고, 채식주의자의 삶을 선택하고, 천사의 얼굴을 한 악동 자코모를 자식처럼 돌보고, 자신을 버리고 새 인생을 선택한 어머니를 가정부로 모셔와 함께 마지막 삶을 같이 보내는 등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지요. 이는 프란체스코 삼촌의 사랑과 자연이 준 가르침 때문이었어요. 자연이 알려준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고 아무리 위대한 발명과 과학일지라도 자연이 만든 정교함은 감히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연을 정복하고 바꾸려 하기보다는 겸허하게 배우고자 했던 그의 바른 인성도 다시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듯 합니다. 이 시대 학문적 업적이 훌륭한 일부 지식인들의 몰상식한 행동에 대한 따끔한 충고로 받아들여야겠어요.

 

 

다빈치는 해부학에 무척이나 열중했지요.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당시 의사 외에 금기시된 시체 해부를 마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등 도전을 즐겼고 여기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기쁨을 누렸읍니다.

우연히 접한 인체 해부학 실습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1470년? 폴라이우올로 형제가 운영하는 공방을 찾아가 왜 해부학이 화가에게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직접 해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몰래 해부로부터 레오 10세의 허락을 받은 로마의 산토스피리토 병원에서의 해부를 통해 1,500장에 이르는 해부학 스케치를 남기게 됩니다. 당시에는 이 연구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다빈치는 자연의 원리를 연구하는 과학자의 자세는 예술가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라 믿었고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결코 탄생할 수 없기에 해부학에 그토록 열중했던 것입니다. "과학 지식 없이 적용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방향키나 나침반 없이 배에 오르는 조타수나 다름없다." 다빈치의 말처럼 도전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의 융합이야 말로 새로운 지식의 창조의 밑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빈치가 활동한 15세기 르네상스가 싹을 틔우던 시기엔 아직도 중세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기독교 교리에 집착하고 있었지요. 자연에 대한 지식도 아직 고대의 학자들이 이룬 수준을 넘어서지 못해 다빈치는 지식에 대한 끈질긴 호기심과 인내심, 투철한 실험 정신을 통해 화가에서 과학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토스카넬리에 의해 과학에 눈을 뜬 다빈치는 지금이라면 당연시 되지만 그 당시엔 기상천외한 자동화 기계들, 무기, 하늘을 나는 꿈을 위한 설계도 등 다양한 발명품이 만들어지고 실패의 연속인 실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게 현재에 실현된 것을 보면 그의 노력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었어요.

 

프랑수아 1세의 후원을 받아 여유와 안정을 찾은 프랑스에서 밀라노 시절부터 써 왔던 노트를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40년간 써 온 노트는 현재 남아 있는 것만 해도 약 8,000쪽에 달하는 노트입니다. 자신이 생각해 낸 훌륭한 결과물을 누군가가 가로챌까 불안해 하고 나쁜 곳에 쓰일까 걱정해서 거꾸로 글씨를 쓴 비밀노트엔 채소 요리법, 일상적인 생각들, 우스갯소리, 구입한 물건 목록, 해부도, 건물 설계, 무기 설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구절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내용과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져 있읍니다.

노년에 왼팔 마비로 방대한 노트를 정리해 책으로 엮으려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과학의 시대에 사는 오늘날에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내용, 당시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에 실현된 내용 등 그의 업적은 신이 다빈치 한사람을 위해 내린 은총이 아닌 우리 온 인류에게 내린 은총이며 창의융합 사고의 모법답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시리즈로 나올 프랭클린, 셰익스피어, 토머스 제퍼슨, 미켈란젤로, 뉴턴, 괴테, 정약용, 세종대왕, 아인슈타인을 제치고 가장 먼저 우리에게 소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야말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꼭 필요한 창의융합 인재의 본보기라 할수 있겠네요. 추상적이고 모호한 창의융합 인재에 대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을 따라가보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고 어떤 능력이 갖추어져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우리 아이가 그 속에서 한가지 한가지 닮아가려고 노력하면 미래의 창의융합 인재에 한걸음 더 나아갈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가져온 글>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도원 품꾼의 비유 <열린다 성경 >  (0) 2021.01.19
하나님 나라 비유  (0) 2021.01.16
헤롯왕가와 로마황제  (0) 2020.12.25
성경에 나오는 헤롯들  (0) 2020.12.25
매태복음 - 반어, 비유 , 5대설교  (0) 2020.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