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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하나님 나라 비유

by 은총가득 2021. 1. 16.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I. 예수의 비유들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이미 현실화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예수는 한편으로는 메시아적 권능적 치유사역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적 임재를 증시하시고, 다른편으로는 설교와 가르침 사역으로써 다양한 비유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적 임박성을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basileia tou theou, the Kingdom of God)는 예수의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사역의 주제였다. 하나님 나라는 신구약의 주제요, 역사와 우주의 주제이며, 지구상에 사는 인류 개인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예수의 비유는 여러가지 다른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주제를 가르치나 이것들은 모두 통합적인 주제인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to come)에 집중되고 있다. 저자는 예수 비유를 주제 별로 하나님 나라 비유, 잃은 것 비유, 선한 목자 비유, 불의한 자 비유, 부유한 자 비유, 슬기로운 종 비유, 포도원 품꾼 비유, 종말론적 잔치 비유로 나누어 성찰해 보기로 한다. 이 다양한 주제들은 하나의 통합적인 큰 주제인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재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 나라 비유

1) 씨뿌리는 자 비유(마 13:1-9; 막 4:3-9; 눅 8:4-8)

(1) 복음의 씨는 다양한 심령의 밭에 뿌려진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씨뿌리는 자(the Sower) 비유”로 설명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9).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예수 자신이며, 이 비밀들은 그의 메시지와 사역의 효과들이다. 하나님 나라 비밀은 복음의 메시지 전파와 치유 사역이라는 복음의 씨를 통하여 뿌려진다. 씨가 뿌려져서 자라고 결실하는 데는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다. 길가에 떨어진 씨들은 공중의 새들이 보이는대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흙이 얇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들은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싹이 나오나 해가 돋아 올라 비취면 뿌리가 없어 말라죽어 버린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들은 싹이 나오나 가시가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옥토에 떨어진 씨들은 자라 무성하게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 이처럼 씨가 길가에 떨어져 새에 의하여 먹어 치우거나, 돌짝밭에 떨어져 말라 죽거나, 가시떨기에 짓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옥토에 떨어져 결실하는 다양한 모습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와 같다.

 

 

(2) 씨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예수는 씨 뿌리는 자(the Sower) 비유의 의미를 해석하신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19-23).

 

 

예수의 해석에 의하면 씨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막 4:14). 예수는 복음의 씨가 뿌려진 심령의 다양한 상태를 묘사하신다. 길가에 뿌려진 자는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메시지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마태가 악한 자라고 표현한 것을, 마가는 사탄(막 4:15)이라고 말한다. 돌밭에 뿌리운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넘어지는 자(막 4:16-17)다.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막 4: 18-19)를 뜻한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인간과 사회 안에서 여러가지 시련과 박해를 거치면서 자란다. 복음의 씨는 결국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들의 마음과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 안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막 4:13)와 달리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비유의 뜻을 깨달은 사람들로 표시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마 13:11a)

 

 

2) 가라지 비유(마 13:24-30)

(1) 하나님 나라는 추수때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것 같다

 

예수는 가라지(the Weeds)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24-30).

 

 

씨 뿌리는 자가 좋은 씨를 밭에 뿌렸는데 밤에 원수들이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다. 그리하여 싹이 나고 자라날 때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보인다. 종들이 길쌈을 하면서 가라지를 뽑겠다고 주인에게 말한다. 그러나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한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지혜를 말한다. 주인은 추수까지 함께 자라게 두고 추수 때에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하고 알곡은 곳간에 넣는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라지는 밀밭에서 곡식과 함께 자라는 독보리를 일컫는데, 검은색 열매를 맺을 때에 구분이 된다. 이렇게 가려낸 가라지는 땔감으로 사용된다. 가라지는 마구 뽑을 것이 아니라 검은 색 열매를 맺어 알곡과 구분이 될 때 제거되는 것 처럼 때가 되면 지혜롭게 제거되어야 한다.

 

 

(2) 역사의 종말에는 가라지의 분리됨이 있다.

예수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 이들에게 가라지 비유를 해설하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복음의 좋은 씨 뿌리는 자는 인자인 예수요 그의 제자들이다. 밭은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세상이다. 좋은 씨들은 천국의 아들들, 선인(善人)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악인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 사탄이며, 추수 때는 이 세상의 끝인 종말 때다.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이 세상은 그냥 돌고 도는 영겁 회귀(die ewige Wiederkehr)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때를 향하여 가고 있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심판이 일어 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신화적인 진술이라고 간주하나 이 비유는 문자 그대로 받아야 한다.

 

 

이 비유는 “세상 심판의 비유”(마 25: 31-46)와도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한다. 임금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이들에게 합당한 판결을 명하신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3-34, 45-46). 예수는 여기서 역사 종말 심판의 두가지 결과에 관하여 언급하고 계신다.

 

하나는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영생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을 위하여 마련된 영벌의 길이다. 이 비유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영생과 영벌은 맹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역사의 과정 속에서 우리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사는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하여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 역사 종말에는 두가지 종류의 판결이 있다: 영생과 영벌의 판결이다. 선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벌로 들어간다. 심판이 없다면 우리의 역사과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선을 위한 고난과 박해에 대한 보상도 없으며 우리의 도덕 윤리적 행위에 대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3) 가라지는 미리 제거할 것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알곡을 거두는 데 있어서 그릇된 인본주의적 행동주의를 경계한다. 좋은 씨를 뿌린 자리에 가라지가 자라난 것을 보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실 것이며, 가라지는 불에 던지시고 알곡을 거두실 것이다.

 

가라지를 분리해 내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한다. 심판 시에 가라지는 가려질 것이다. 인간 스스로 가라지를 제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심판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의 선한 일에 힘쓰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구제와 돌봄을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경외요 존경으로 보신다는 점이다. 종교적 신앙과 경건이란 이웃, 특히 소외된 자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3)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눅 13:18-19)

(1)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예수는 겨자씨(the Mustard Seed)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갈릴리 지방에서 많이 자생하는 십자화과(科) 식물(눅13:19)의 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지극히 작은 것'(마17:20)의 대명사로 언급되나 성장하면 키가 4-5m나 되는 특징을 가진다. 겨자씨는 이처럼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씨다. 그 안에는 큰 나무가 들어 있다. 겉으로 볼 때 작아서 하찮은 것으로 보고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씨에서 싹이 나와서 줄기가 되고, 더 커서 가지가 되고, 더욱 크게 자라 큰 가지가 되고, 완숙하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 만한 거대한 겨자나무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나라는 초라하다. 하나님 나라는 무식하고 사회적으로도 낮은 계층들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혀 크게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겨자씨가 겨자나무가 되는 것처럼 되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등록 신자가 모두 참 신자라고 볼 수는 없다. 알곡(참) 신자와 가라지(명목) 신자가 모두 교회 안에 있으나, 이 구분은 종말에나 드러난다.



(2)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전 인류가 믿게 되는 공동체로서 묘사된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작은 아브라함의 가족과 영세(零細)한 12지파에서 시작되어 이스라엘 민족으로 확장되었다가 이스라엘의 배도와 귀양살이로 인해 남은 자들로 수렴되고 예수에게로 집중되었다. 예수로부터 다시 12제자, 120 제자들, 초대교회, 이방전도, 세계선교 등으로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나사렛 예수에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신자를 가진 종교가 되었다. 신구교 합하여 2014년 기준으로 등록된 기독교인 수는 21억명 정도 된다. 한국에서는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천3백5만명(개신교: 967만명, 천주교:389만명, 2015년 기준) 정도 된다. 한국에서 개신교 19.7%·불교 15.5%로 1995·2005년 순위가 바뀌어 불교에 첫 역전하여 개신교가 1위가 되었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계시를 통하여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을 보고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6-27). 예수의 비유가 언급하는 겨자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이란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될 이방인들을 염두에 둔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모습과 거기에 속하게 될 이방인을 지시하고 있다.



4) 씨의 성장 비유(막 4: 26-29)

(1) 하나님 나라는 씨가 자라 곡식 열매를 맺음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씨의 자람과 같다고 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 26-29).

하나님 나라는 밭이라는 이 세상에서 씨앗으로 현존한다. 씨앗은 미래를 품은 현재다. 씨앗 안에는 장차 올 것이 숨겨져 있다. 씨앗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으로 스스로 모든 의심과 염려를 물리치고 자란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결실한다. 씨가 뿌려져 싹이 나고 이삭을 맺듯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파되어 결신자를 만들고 이들이 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전파자가 된다.



(2)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씨)이 발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으로 하나님 나라 도래 시간을 계산하려고 하고,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율법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프로그램에 의한 인위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플로레타리아 독재라는 이상향을 당원들의 전략적 속임수와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실현하려다 70년 이데올로기 실험 가운데서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짐으로 실패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의 이상향을 추구하여, 생물학과 컴퓨터 공학과 인터넷 기술의 결합으로 인위적으로 도출하려고 하나 예기치 못한 여러가지 부작용이 도출되고 있다. 환경과 생태 오염과 파괴, 지구온난화, 인간의 소외, 부익부, 빈익빈 등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이상향 첨단기술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복음의 능력으로 실현된다. 하나님 나라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 복음의 말씀 전파와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심령 가운데서 먼저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공동체 가운데서 파편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그 자체가 가진 능력으로 역사의 추수 때를 가져 온다. 복음의 능력이란 예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의 사랑이다. 예수는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제자들에게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예언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는 여기서 자신의 십자가 희생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 25-28).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한 알의 밀알로서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하여 그가 지실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심이라고 해석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과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계신다.



(3)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원리(희생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으심은 씨앗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는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취를 결실한다. 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서로부터 많은 믿는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심판자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낫을 가지시고 알곡을 거두어 들이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 낫으로 추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4).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犧牲)제물(祭物)이 되신 예수는 최후의 심판 때는 흰보좌의 심판자로 나타나신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1-12). 흰 보좌 앞에 죽은 자들이 보좌에 펴진 생명책과 행위책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예수는 최종의 심판에서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나,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



5) 누룩 비유(마 13:33; 눅 13:20-21)

(1)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누룩(Leaven)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빵을 구울 때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난 번에 빵을 굽고 남겨 놓았다가 띄운 반죽 한 조각을 뜸팡이로 썼다. 이런 식으로 누룩은 이스라엘의 집에 늘 비치되어 있어서 빵을 굽는 데 사용되었다. 누룩에는 퍼지는 성질이 있다. 이 퍼지는 성질로 인하여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여 빵을 만들도록 한다.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퍼져 빵을 부풀게하는 누룩과 같다. 누룩은 발효를 통하여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 같이 변혁(transformation)을 야기한다. 이 변혁이란 복음의 능력에 의한 삶의 방식과 사고와 가치관의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자들은 선한 누룩이 되어 그가 속한 가정과 사회속에서 퍼지는 역할을 한다. 가정과 사회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한다.



(2)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는 퍼져나가는 성질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죄로 인하여 죽은 인류가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속죄 공로를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한다. 예수의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를 설립하였고, 거기서 안디옥 교회로 전파되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세우고 희랍교회와 로마교회를 세우고 박해를 거치면서도 로마제국을 점령하여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고 서구사회로 퍼져나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을 이루고 아프리카와 남미에 교회를 이루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아시아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오늘날 지구촌 오지(奧地)의 미지(未知)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이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지고 있다.



6)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마 13:44)

(1) 하나님 나라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발견하고 전 소유를 팔아 사는 자와 같다

예수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the Hidden Treasure)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하나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아서 그것은 발견하는 자만 그 밭의 가치를 아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다. 그러나 그 보화의 가치는 숨겨져 있다.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귀중한 것을 산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 있다.

전도서 저자 솔로몬은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종교의 씨를 심어놓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성, 모든 사람들의 초청됨과 그 진정한 가치의 은폐성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3-4). 이 구절에 의하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론적으로 주어지는 빛이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요 종교의 씨다. 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 어두움이란 세상 내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부패한 인간은 자기에게 비쳐진 빛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복음 빛의 은폐성이다.



(2) 하나님 나라 보화(寶貨)를 발견한 자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를 구입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 보화가 있는 밭을 그냥 값어치가 없는 일반적인 땅으로 간주하고 지나쳐간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헤롯왕과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베들레헴에 탄생한 아기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 이들은 아기 예수 신분의 존귀성을 알기만 알았으나 그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과 생모의 마리아만 예수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의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그리고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과부된지 38년이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다가” 아기 예수에 관하여 말하였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7-38).

시므온과 안나는 당시 마리아와 요셉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아기 예수의 비밀을 성령의 조명 속에서 알고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물과 성령으로 중생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산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감추인 밭을 자기의 전 소유를 팔아서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소유를 모두 처분한다. 그리하고 이 밭을 사게 된다. 하나님 나라 보화는 밭에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발견하는 자만이 밭의 가치를 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항상 일상적인 삶 속에 감추어져 있다. 자연적인 눈을 가진 자에게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복음의 진리를 듣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여태까지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숨겨진 보화가 있는 밭을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우리가 가진 모두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세상의 부귀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사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주기철, 손양원, 김관주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이 그들의 삶을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바쳤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