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와 함께 현대의 성경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3대 난해 비유로 손꼽힌다. 물론 내게도 그렇다. 신약을 읽으면서 짧게 나오는 이 비유들은 머리를 묵직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되고, 이게 뭔가하고 고심을 하게 만든다. 분명 천국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런 답이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비단 나 뿐 만은 아닐 것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쫒았을 때는 말이다.
“내 돈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악하게 보느냐.”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주인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침 일찍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구하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일을 하기 시작한 품꾼에게 주인이 약속한 돈은 한 데나니온이었다. 그런데 주인이 또 품꾼을 데리고 온다. 마지막에 데리고 온 품꾼은 1시간만을 일을 했고, 주인은 그에게 한 데나니온을 지급한다. 모든 품꾼들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포도원 주인이 자신들에게는 얼마를 줄지 말이다. 그들역시 한 데나니온을 받는다. 무엇이 문제 인가?
주인은 분명 약속을 이행했는데도, 품꾼들은 서운하기 시작한다. 한시간만을 일한 일꾼에게 한 데나니온을 주면서, 꼬박 열두시간을 일한 자신들에게도 한 데나니온을 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그럴까? 분명 주인은 하루의 일당으로 한 데나니온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열린다 비유>시리즈는 이 난해한 예수님의 비유를 풀어내고 있다. 난해하기로 따지면 불의한 청지기나 혼인잔치의 비유나 마찬가지다. 내 눈은 열려있지 않고, 내 맘은 주님의 맘이 아니니,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니 그런 결과가 나올것이다. 저자, 류모세 목사님은 <열린다 성경>시리즈로 베스트 작가시다. 성경의 주무대인 이스라엘에서 11년간 사역하면서 류목사님은 성서 시대 유대인들의 문화를 알아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고,<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기획, 출간하였다. 이스라엘의 문화를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열린다 성경>시리즈는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에 힘입어 예수님의 비유를 그 시대의 청중의 눈으로 한 편 한 편 살펴보는 <열린다 비유>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렇게 이 어려운 비유를 읽으면서 내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의 대역이라면 품꾼들은 지금 하나님이 멸망하도록 ‘악한 눈’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불평하는 품꾼들의 사악함과 극악무도함, 후안무치…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도 없는 그런 무섭고 섬뜩한 품꾼들의 죄악이 느껴지는가? 만약 우리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서 불평하는 품꾼을 향해 일말의 변호하는 마음과 동정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도 결국 하나님의 멸망을 바라는 참람한 죄악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p.199)
어렵다. 분명 쉽지만은 않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정의와 세상이 생각하는 정의의 문제 뿐만 아니라, 천국 윤리에서 보상의 개념까지 굉장히 어렵지만, 그러하기에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된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님에도, 내 눈은 보이는 것만을 보게 된다.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열어 아합의 군대 뒤의 천군천사를 보여준것 처럼 내 눈 역시 영의 눈이 뜨여지길 바라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얻는것이 당연시 되면서도, 그러지 못하기에, 미련하기에 이렇게 책을 읽고, 이 위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의 비유 단 하나만을 가지고 230쪽에 해당하는 글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풀어가고 있는책이다.
처음엔 예수님의 비유들의 해석쯤으로 보았다가, 살펴보고 단지 하나의 비유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음을 보고 다소 당황하였던 생각이 든다. 저자 류모세씨는 히브리의대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고, 유대문화와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보유한 분이라고 하던데, 정말 실감을 하였다. 저자의 재미있는 내용전개가 인상적인 책이다. 평소에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터라, 손에 책을 드는 순간 빠져들어서 한순간에 다 읽은 책이다.
포도원품꾼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당시 고대 유대문화에서 포도원 주인과 품꾼은 관계가 의미하는 바를 역사문화적 관점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는 이 비유에서 발견되는, 놓치기 쉬운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포도원 주인이 직접 나가서 품꾼을 찾는 것은 당시 일상적이지 않았다라는 점. 2) 당시 주인에게 청지기가 있었다는 점(삯을 지불할때 등장) 3) 포도원 주인이 여러 번 품꾼을 찾으러 나간 점, 4) 처음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그 이후에는 '상당하게 주리라' 라고만 약속한점, 5) 후에 삯을 지불할때, 일찍 온 순서 대로 지불 했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때는 나중 온사람들 부터 삯을 지불하라고 청지기에게 시킨점, 6) 그리고 당시 품꾼들이 집주인에게 원망을 할때, 주인이 한말 중,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의 사용하였다는 점등이다. 당시 유대에서 선한 눈과 악한 눈이 갖는의미등을 심층적으로 문화적, 역사적,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글의 결론은 이 비유의 주인공이 품꾼보다는, 포도원주인에 있다는 점이다.
포도원 주인의 품꾼을 향한 긍휼과 은혜, 품꾼들의 수고의 양보다는 주인의 약속과 주권에 의해서 동일한 보상을 주고 있다는 점등이 주목할 만한 상황이다. 또한 긍휼과 은혜를 받은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악한심성(당시 악한 눈은 살인에 이를 정도의 강한 시기심을 의마한다)에 대한 이해, 그리고 보상의 순서는 철저한 주인의 주권에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비유는 그 대상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혹은 일반 대중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품꿈으로 비유하여 이야기를 풀어가셨다는 점등이다. 이 비유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자리다툼을 벌였던 제자들의 일화가 발생한 다음에 주신 말씀이라는 점등이, 대상이 제자들이 었을 것이라는 판단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나중된 자로 먼저 된자들이 제자들에서는 특히 많이 발견되는 것 같다. 사도바울이 그랬고, 예수를 마지막에 영접한 십자가 상의 강도도 파라다이스에 예수님 다음으로 들어간 것을 보아도 그런 것 같다. 30년 복음 사역을 하다가 부르심을 받기도 하고, 1년의 사역도 마치기 전에 순교등을 통해 부르심을 받는 경우도 많이 있지 않은가?
책을 보면서, 다섯번이나 품꾼들을 향해 다가서서 초청하신 주인의 열정적인 행동과 긍휼의 마음을 보았다. 그것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였다. 약속된 보상을 받고도 다른 이들을 시기하여 주인을 원망하는 품꾼을 통해서는 얼듯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체험하였고 많은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다른 이들을 보고 시기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모습이 얼듯 나타나곤 한다. 항상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데서 성장해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좋은 책이다. 두고두고 묵상하며, 내 삶의 모습에도 적용하고,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데서 자라가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하는 책이다.
마태복음 20:1-16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 육시와 구시에 또 나가 그와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릐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는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릐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자까지 삯을 주라하니 제 십일시에 온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거늘 먼저 온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 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아니하여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여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열린다 성경》의 저자 류모세 선교사와 함께 떠나는 유쾌한 비유 여행!
예루살렘 수난 직전 예수님은 왜 포도원 품꾼 비유를 이야기하셨을까?
포도원 주인은 왜 모든 품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을까?
포도원 주인은 왜 일한 순서와 정반대로 품삯을 지불했을까?
열린다 비유 시리즈는…
예수님의 비유는 신자·불신자를 막론하고 온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쳐 왔다.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1/3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데, 비유의 대부분이 성서시대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화적 배경에서 탄생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 세상의 질서와 가치관, 윤리 등을 뒤집어엎는 충격 요법과 깜짝쇼를 즐겨 사용하신다. 부조리와 불합리가 판치는 이 세상을 한바탕 흔들고 뒤집어엎은 후에 비로소 사랑과 공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신다. 예수님은 이내 비유를 듣는 청중들에게 회개와 구체적인 결단을 촉구하신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청중들에게 비유의 이해를 돕는 주석서나 해설집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생활 속의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 땅의 그것과 넌지시 비교하면서 드러내셨다. 이것은 그들 사이에 이미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유를 읽는 현대의 성경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1세기 청중들이 공유하던 공감대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현대인에게 공연할 때 ‘변사’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배경에 대한 변사의 친절한 설명은 현대인이 공감하고 이해하기 힘든 춘향전과 심청전의 현장 속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셨던 성서시대와 현대인의 간극을 메워주는 변사 역할을 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비유의 보화를 파는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다.
포도원 품꾼 이야기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와 함께 현대의 성경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3대 난해 비유로 손꼽힌다. 이 비유를 읽은 현대의 성경 독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즉각적인 반응은 대충 이렇다.
“뭐 이래? 정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게 맞아?”
포도원 주인이 천국의 모델이라면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천국에서는 1시간만 달랑 일하나, 12시간을 꼬박 일하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받는다. 그렇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이런 의구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현대의 성경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삼천포로 빠지고 만다.
하지만 이상하게 보이는 포도원 주인, 그가 지극히 선하고 긍휼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주인에게 불평하는 품꾼들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라 사실은 악한 자라는 것이, 그것도 심히 악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결론이다.
이 결론이 단순히 머리로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이상한 포도원 주인이 천국의 모델이 될 정도로 선하고 긍휼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현대의 성경 해석자가 아니라 1세기 유대인 청중의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 앉아야 한다. 아울러 예수님의 비유가 갖고 있는 본질처럼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수시로 왕복하는 셔틀 여행을 해야 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과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일까? 왜 포도원 주인은 나중 온 사람에게 먼저 품삯을 주었을까? 12시간 열심히 일한 품꾼의 항변은 정당한가?
이 책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우리에게 안겨 주던 응어리와 체증을 뻥 뚫어 줄 셔틀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류모세 선교사의 유쾌하면서도 예리한 비유 여행을 떠나보자.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참으로 기이하다. 스토리가 난해해서가 아니다. 스토리만 본다면 앞선 두 개의 비유들보다 훨씬 단순하다. 구성도 다른 비유들과 흡사하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포도원 주인의 기이한 캐릭터 때문이다.
이상한 주인 때문에 성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일한 품꾼들이 졸지에 나쁜 사람으로 몰린다. 기분이 상한 품꾼의 항변에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대꾸한다.
“내 돈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악하게 보느냐.”
물론 주인의 이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자기 돈으로 밥을 하든, 죽을 쑤든, 누룽지를 만들든 타인이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포도원 주인은 새벽부터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들에게 하루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정확하게 지켰다. 문제는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것이다.
계약이 어긋나서가 아니다. 계약은 정확하게 지켜졌다. 오히려 너무 칼같이 정확하게 지켜졌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되고, ‘쏴’ 하니 서늘함이 느껴진다. ‘이성’은 주인이 계약을 이행했다는 사실에 수긍하지만, ‘감정’은 동료인 다른 품꾼을 향한 미묘한 시기심 때문에 주인에게 파도 같은 서운함을 느낀다. 서운함은 이내 모멸감으로 변하고 곧 활화산 같은 분노로 폭발한다.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은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이처럼 모욕감마저 느끼면 큰일이다. 가진 게 몸뚱어리밖에 없는 사람들이 지킬 건 자존심밖에 없지 않은가.
차라리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동료가 자신처럼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받은 사실을 몰랐다면 어땠을까?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은 만족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보람 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하며 흥겨운 콧노래까지 불렀을지도 모른다. 집에는 오늘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사 올 아버지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떡두꺼비 같은 자식들과 토끼 같은 아내가 있지 않은가! 애써 다른 품꾼들의 품삯에 관심을 가지며 포도원에 남아 어슬렁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 주인은 해가 지자 품꾼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가장 늦게 온 사람부터 일당을 지불했다. 전혀 예상 밖이다. 왜 포도원에 불려 온 순서와 정반대의 역순으로 품삯을 지불했을까? 하지만 모든 품꾼은 얼떨결에 이 광경을 주시하게 된다.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은 과연 얼마를 받을 것인가?
그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진다.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이 주어진 것이다.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이 하루치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나는? 갑자기 나머지 품꾼들의 머릿속은 주판알 굴리는 소리로 요란해진다.
나머지 품꾼들은 저마다 계약에 없던 화끈한 보너스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기대치는 새벽부터 와서 12시간을 꼬박 일한 품꾼이 가장 컸을 것이다. 이렇듯 김칫국부터 마신 품꾼들에게 문제가 있는가? 애초에 허파에 잔뜩 바람을 불어넣은 건 포도원 주인이 아니던가?
하지만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관대하던 포도원 주인이 다른 품꾼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까칠한 ‘까도남’으로 돌변한다. 혹시 포도원 주인은 이중인격자인가? 아니면 하루에도 변덕이 수시로 죽끓듯 하는 변덕쟁이인가? 아무리 봐도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한 품꾼들의 항변과 불만은 정당해 보인다. 품꾼은 그저 품꾼이지 성인군자가 아니지 않은가? p. 27-28
그러면 비유에 등장하는 ‘품꾼’은 과연 누구일까? 품꾼이란 직업은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을까?
고대 사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대 다수의 빈곤층과 극소수의 부유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대 사회처럼 두터운 중산층이 두 계층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한 것이 아니다. ‘중산층’으로 불리는 폼 나는 계층이 혜성처럼 등장한 시점은 겨우 근대의 여명이 밝아 오면서부터다. 산업혁명으로 생산량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근대화 이전에는 극소수의 부유층에게만 집중되던 잉여의 생산물을 빈곤층의 일부가 나눠 갖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중산층’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등장한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절대 다수를 이루던 빈곤층!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당장 다음 끼니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 그들에게 배고픔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듯 배불리 먹고, 맛있는 것을 먹는 ‘고차원’적인 것의 결핍이 아니었다. 단지 배고픔을 잊을 만큼의, 그러니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을 확보하려는 참으로 ‘저차원적’이지만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고대 사회의 빈곤층이 매일의 삶에서 당면하던 배고픔의 문제를 산더미처럼 쌓이는 음식물 쓰레기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현대인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경험해 보지 않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 중 상당수가 이런 절대 빈곤에 처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을 괴롭히던 참혹하고 절망적인 가난을 이해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한편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으신 것도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사려 깊은 배려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거룩한 것, 영적인 것, 하늘의 것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무리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절박한 지상과제였던 빵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p. 45-46
새벽에 인력시장에 나타나 필요한 만큼의 품꾼을 데려간 포도원 주인은 왜 세 시간 후에 다시 인력시장에 나타난 걸까? 단지 품꾼이 더 필요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포도원 주인은 새벽부터 인력시장을 가득 메운 품꾼들을 보았고, 그중에서 자신의 포도원에 필요한 숫자만큼만 데려온 것에 대해 내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포도원에 돌아온 주인의 눈에는 인력시장에서 어슬렁거리는 수많은 품꾼들이 계속 아른거렸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아른거리는 품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 센터워리워리 세브리카 무드셀라 구름위 허리케인에 담벼락….”
어쩌면 그는 이렇게 읊조리며 품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이런 포도원 주인의 마음에 불현듯 궁금증이 일었다.
‘인력시장에 그 많던 품꾼들은 과연 오늘의 일거리를 구했을까?’
일거리를 찾던 품꾼들의 애절한 얼굴을 외면할 수 없던 포도원 주인은 세 시간 만에 다시 인력시장에 나타난다. 만약 단지 품꾼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라면 청지기를 대신 보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직접 행차에 나선다. p. 87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은 왜 품삯 지불 순서를 바꾸었을까? 이를 통해 포도원 주인이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한 해석 역시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주는 전체적인 교훈과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포도원 주인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를 시켜 품꾼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러곤 포도원에 들어온 순서와 정확히 역순으로 품삯을 지불할 것을 지시한다.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뒤 역순으로 지불한 것이다. 비유 속의 품삯 지불 장면은 다분히 스토리텔러이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꾸며 낸 설정이다. 현실에서는 분명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포도원에 들어온 순서대로 지불했다면 품꾼들은 품삯을 받고 즉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역순으로 지불했더니 품꾼들은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을 주시하며 자기 자리를 지켰다. 포도원 주인이 굳이 품꾼들에게 이렇게 고함을 지를 필요도 없었다.
“전체, 주목! 품삯을 받은 품꾼들은 자리를 뜨지 말고 잠시 제자리를 지켜주세요. 제발 5분만이라도….”
포도원 주인은 품삯 지불을 통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들 모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구차한 장광설이 아닌 단순한 품삯지불 행위를 통해 품꾼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p. 111
이제 ‘선한 눈-악한 눈’과 관련된 히브리어 관용구 여행을 끝내고, 다시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 현장 속으로 돌아와 보자. 불평하는 품꾼들을 향한 포도원 주인의 마지막 호통을 다시금 기억해 보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개역성경).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표준새번역)
전혀 다른 뉘앙스로 번역된 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미 언급한 대로 ‘선한 눈-악한 눈’과 관련된 히브리어 관용구의 난해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두 번역을 두고 ‘선한 눈-악한 눈’의 관용구적인 표현이 갖고 있는 본래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다시 번역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내게는 ‘선한 눈’이 있는데 네가 오히려 나에게 ‘악한 눈’을 던지느냐?”(직역)
“내가 너희들에게 그토록 자선과 긍휼을 베풀었는데, 너희들은 그런 나에게 오히려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눈 흘김으로 나오느냐?”(의역)
그렇다. 품꾼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푼, 즉 지극히 ‘선한 눈’을 갖고 있는 포도원 주인에게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악한 눈’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아니, 저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하지만 품꾼들의 죄는 이처럼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 속에서 포도원 주인은 곧 하나님을 가리킨다. 비유의 단순성으로 인해 이 비유를 듣는 청중은 쉽게 이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의 대역이라면 품꾼들은 지금 하나님이 멸망하도록 ‘악한 눈’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불평하는 품꾼들의 사악함과 극악무도함, 후안무치…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도 없는 그런 무섭고 섬뜩한 품꾼들의 죄악이 느껴지는가? 만약 우리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서 불평하는 품꾼을 향해 일말의 변호하는 마음과 동정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도 결국 하나님의 멸망을 바라는 참람한 죄악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p. 197-199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던 랍비들의 문헌 중 병행구절을 살펴볼 때 ‘포도원품꾼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더욱 명확해진다.
첫째, 천국 윤리에서 ‘정의’(justice)의 개념이다. 천국에서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과연 천국에도 정의는 존재하는가? 그저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두루뭉술 넘어가는 은혜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일정한 노동에 일정한 품삯! 이것은 수백 년간, 아니 수천 년간 세상을 지배해 온 경제 정의다. 포도원 주인은 첫 품꾼을 제외한 나머지 품꾼들에게 ‘상당하게’(정의롭게) 지불하겠다고만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다. 해가 진 후에 지불된 품삯을 통해서 볼 때 포도원 주인이 생각한, 그리고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생각하신 ‘정의’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경제 정의와는 확연히 달랐다.
세상에서는 노동 시간에 따른 품삯 지불이 정의겠지만, 천국에서는 품꾼의 상황에 따른 맞춤 정의가 통용된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에게 ‘일한 만큼’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품삯을 준 것처럼 말이다. 또한 천국에서 정의는 가난한 자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복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포함한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에게 값싼 동정을 베풀지 않고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 준 것처럼 말이다.
둘째, 천국 윤리에서 ‘보상’(reward)의 개념이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분명 ‘보상’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공관복음서를 기록한 세 명의 성경 저자들 가운데 유독 마태만이 이 ‘보상’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보상’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인 ‘미스도스’가 마태복음에는 무려 10번이나 등장한다. 같은 공관복음서인 누가복음에는 3번, 마가복음에는 고작 1번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보상’은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임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보상과 관련된 말씀을 두 개만 예로 들어 보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나는 이쯤 해서 ‘보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살펴보는 것이 의미 있다고 본다. 히브리어에는 ‘보상’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프라스’(???)이고, 다른 하나는 ‘사카르’( ??? )다. ‘프라스’는 어떤 종류의 보너스나 추가적인 보상의 의미로 쓰이고, ‘사카르’는 정확히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일당의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보상을 주신다면 그것은 ‘프라스’일까, 아니면 ‘사카르’일까? 바로 일한 만큼 받는 ‘사카르’가 아니라, 추가적인 보상인 ‘프라스’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세상의 고용주와는 달리 품꾼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후견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후견인이시라면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우리의 자세 또한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p. 227-229< 가져온글>
프롤로그 | 유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비유
포도원 품꾼 이야기 성경 구절
01. 포도원 주인은 천국의 모델인가, 악덕 고용주의 모델인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 해석의 난해성
02. 포도원 품꾼은 누구인가?
성서시대의 경제, 절망적인 너무나 절망적인…
03. 포도원 주인은 왜 다섯 번이나 품꾼을 구하러 갔을까?
반복된 품꾼 리크루팅 속에 숨겨진 비밀
04. 포도원 주인은 왜 일하러 온 순서와는 정반대로 품삯을 지불했을까?
역전된 품삯 지불, 고도의 문학적 장치
05. 품꾼들의 불평불만은 과연 정당한가?
포도원에서 발생한 노사분규
06.포도원 품꾼들이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사악한 이유는?(1)
성서시대의‘후견인-의뢰인’체제
07. 포도원 품꾼들이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사악한이유는?(2)
성서시대의 ‘악한 눈-선한 눈’ 개념
08.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도
이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혼인잔치의 비유'(마 22:1-14)와 함께 현대의 성경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3대 난해 비유로 손꼽힌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는 분명 현대인들이 그들의 이성적 사고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성경 독자들에게 이 비유는 실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비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현대의 성경 독자들 간에 놓인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제시하는 교훈적 메시지가 현대인들에게는 불문율로 여겨지는 경제 정의, 또는 노사관계의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이다(17-18쪽)
* 비유는 '천상의 의미를 가진 지상의 스토리'다. 예수님은 1세기 유대인 청중이 매일의 삶에서 접하는 친숙한 소재들을 통해 천상의 세계를 넌지시 설명하신다. 그것이 예수님의 비유가 갖고 있는 정의(definition)요 본질(essence)다. 비유는 우리가 이 땅에서 흔히 접하는 무언가를 소재로 삼기 때문에 친근하고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자 하는 타깃은 이 땅의 그것이 아니라 천국, 즉 천상의 세계다. 예수님의 비유를 따라가는 여해으은 이 땅의 친근한 소재를 '출발지'로 하지만 신비롭고 비밀스런 천국을 그 '종착지'로 하는 실로 어메이징(amazing)한 여행이다. 또한 수시로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스릴과 서스펜스를 만끽할 수 있는 익사이팅(exciting)한 여행이다(32-33쪽).
* 비유속의 품삯 지불 장면은 다분히 스토리텔러이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꾸며 낸 설정이다. 현실에서는 분명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포도원에 들어온 순서대로 지불했다면 품꾼들은 품삯을 받고 즉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역순으로 지불했더니 품꾼들은 이후에 전개되는 상활을 주시하며 자리를 지켰다. 포도원 주인이 굳이 품꾼들에게 고함을 지를 필요도 없었다. 포도원 주인은 품삯 지불을 통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들 모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구차한 장광설이 아닌 단순한 품삯 지불 행위를 통해 품꾼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한데 모아 놓고 가르치고 싶은 교훈은 무엇이엇을까?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로 가득한 사람이다. 인력시장을 다섯 번이나 찾아간 것도 한 사람의 품꾼에게라도 더 일자리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주인은 품꾼들의 절박한 사정을 잘 알았기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들에게도 하루치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이다. 최소한 한 데나리온이라도 손에 쥐어야 그날 하루치 식량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 가족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품꾼들을 긍휼이 여긴 것처럼 품꾼들도 서로에게 그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기를 바란 것이다. 이것이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싶던 메시지였을 것이다(111-113쪽).
*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정의로울 뿐 아니라 긍휼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포도원 품꾼들이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완전히 사악한 종자들이라고 판결한다. 약간 옳지 않은 구석이 있는 차원이 아니라, 비유는 그들이 완전히 사악한 자들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우리는 비유 속의 품꾼들을 보면서 쉽게 자기 자신과 동일화한다. 이것을 비유를 직접 들은 당시의 청중도 예외가 아니었다.
단언하건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듣고 품꾼들을 향한 일체의 동정과 연민, 더 나아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면서 그들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된다. 비유는 불평하는 품꾼들이 정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사악하다'고 결론짓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가르치믈 우리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에 나오는 성서시대에 통용되던 문화적 세팅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후견인-의뢰인' 개념. 둘째, '선한 눈-악한 눈'의 개념.<가져온글>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다시 읽기/
성경 속 대화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 사이에 깊게 형성된 공감대를 짚어내야만 실감 있게 그 이야기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 15:5
이 포도나무 비유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성경이 보증하는 최고의 포도 산지인 헤브론이다. 해발고도도 1,000미터 안팎에 이르는 지역으로, 겨울철에 다른 지역보다 비나 눈도 많이 내린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나무 과수원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는 아니었다. 유대 산지 헤브론이나 북부 골란 고원 등 특별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자연환경 덕분이었다. 농업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아무 데서나 포도원을 운영하고 있지 않다. 적당히 거친 자연환경과 바람이 많이 불어주고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큰 곳이 포도원 농사의 적격지이다.
‘제거해 버린다’는 ‘들어주신다’(?) 요한복음 15:2절 말씀은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의 포도 농사법에서 나온 독특한 표현이다.
포도나무의 특징은 길게 뻗어나가는 가지에 있다.
오늘날 포도 재배에서는 ‘Y’자 철사를 박아놓기 때문에
포도나무 가지는 철사를 따라서 감아 올라가면서 원없이 자랄 수 있다.
그러나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날의 포도 재배법과 상황이 전혀 달랐다.
철사가 귀했으므로 포도 가지는 뱀처럼 땅을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성경의 비밀을 푸는 절기 이야기, 두란노, 2009년, 114쪽
그러나 헤브론 지역 등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모양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곳의 포도나무는 정말 특별하다. 포도나무는 굵고 단단한 고목(?) 수준인 것에 비하면 가지는 그야말로 작고 가늘고 연약하게만 보인다. 그런데도 그 연약한 가지에서도 튼실한 포도를 맛볼 수 있다.
헤브론의 포도나무 김동문
또한 포도원 지기들은 수년간 포도나무를 다듬고 가꾸면서 포도나무의 모양을 Y자 또는 T자에 가까운 형태로 다듬어 놓았다. 자연스럽게 지지대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포도나무 가지가 땅으로만 쳐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땅에 닿은 포도 가지는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없다는데 있다.
‘우기’에는 땅에 닿은 부분이 습기로 인해 썩고, ‘건기’에는 자체적인 뿌리를 내리다 보니
본 뿌리에서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성경의 비밀을 푸는 절기 이야기, 두란노, 2009년, 114쪽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성경의 비밀을 푸는 절기 이야기, 두란노, 2009년
포도원 농사는 봄철부터 시작한다. 계절적으로는 건기이다. 이스라엘은 겨울 우기와 여름 건기로 구분한다. 포도나무 농사는 건기에 시작하여 건기에 마무리된다. 그런 점에서 류모세 목사가 묘사하는 우기에는 땅에 닿은 (포도나무 가지) 부분이 습기로 인해 썩는다는 생각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해석이다.
헤브론의 맛 좋고 실한 포도는 그 가지의 힘이 아니라 튼실한 포도나무 덕분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님과 그 무리들은 이 본문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의 힘(존재) 때문에 실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는 철학적, 현학적이거나 이른바 영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기보다, 다분히 일상적인 이해와 공감대를 바탕으로 주어진 것이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 또는 '품꾼을 찾는 주인의 비유'
[마20:1-16, 개역한글]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19장 사건에 이어지는 교훈을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9장에는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예수님에게 인정받으려는
‘부자청년’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모습이 소개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킨 완벽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인정받으려고 했지만,
정작 재물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고, 결국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이 부자 청년과 반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공로를 내세워서
예수님께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으로 19장 맨 마지막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처럼 ‘세상에 마음을 두고 떠니 지지 못하는 사람’이나
베드로처럼 ‘자기의 희생과 공로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천국의 질서는 공로와 기여도가 아니라 은혜로 세워진다.’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를 받아주는 은혜입니다.
19장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께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된 부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란 말은 해맑고 순수하고 천사 같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 또는 ‘스스로는 해낼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밖에 다니는 어린아이만 봐도
이 아이에게 부모가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깔끔하고 머리를 예쁘게 단장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면,
우리는 누구나 아이의 부모가 얼마나 아이를 잘 돌봐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겐 부모의 수고와 공로와 은혜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경력직이 대우를 받고, 공로가 많은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의 경력과 공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부족하고 무능해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족함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과 논리로 세워집니다.
이런 천국의 원리를 예수님께서는 20장에 비유로 소개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아침 6시에 인력시장에 나갑니다.
주인은 품꾼들과 통상적인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그 후로도 계속 인력시장에 나갔고,
그곳에는 일이 없어서 노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품꾼을 만나는 대로 삯을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어느덧 하루 일과가 끝나고 주인은 수고한 일꾼들에게 약속대로 일당을 지급했습니다.
먼저 가장 늦게 들어온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맨 처음 들어왔던 일꾼들은 그것을 보고, 자기들에게는 더 많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맨 처음 들어온 일꾼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지급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너희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나는 너희에게 약속대로 주었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내 마음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도 이 비유를 들으면서 일찍 온 일꾼들의 불평에 공감합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고와 공로를 쏟았습니다.
가장 나중에 들어온 일꾼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일찍 온 일꾼들을 속이거나 임금을 갈취한 것은 아닙니다.
주인과 일꾼들은 처음에 분명히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주인은 약속을 분명히 이행했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주인이 다른 일꾼들에게도 지나치게 관대하고, 은혜가 풍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찍 온 품꾼들의 불만은
주인의 악독함이 아니라 주인의 관대함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그들의 불만은 전혀 정당하지 못한 게 됩니다.
불평한 일꾼들이 주인에게 관대해선 안될 어떤 근거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포도원에서 어떤 사람도 자신의 공로와 수고를
주인이 베푼 은혜보다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세상은 언제나 능력과 실력으로 줄을 세우지만,
이 포도원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던 사람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사건이 포도원에서 일어났습니다.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되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역전은 어떤 인간의 수고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포도원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포도원에 들어간 일꾼들은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포도원에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주인의 은혜가 가득했던 것처럼
천국에서는 어떤 공로나 실력도 내세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합니다.
포도원에서 자기가 기대한 것보다 적게 받은 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천국에서는 자기가 기대한 것보다 적게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일찍 들어온 사람이나 늦게 들어온 사람이나
공로가 많은 사람이나 아무 공로도 없는 사람이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나 하찮은 취급을 받던 세리와 죄인들이
천국에서는 모든 부족함을 채우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모두가 귀한 존재로 대접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자신의 업적을 남들에게 자랑하며 대접받으려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저는 1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큰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원 주인을 어떤 사람으로 설명하십니까?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주인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인이 뭐가 아쉬워서 이른 아침에 인력시장을 나갑니까?
주인의 관심은 포도를 얼마나 수확했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많은 일꾼을 들여보낼 수 있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사람은 일꾼들이 아니라
포도원에 들여보낼 사람을 찾고 또 찾는 주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부름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포도원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수고와 공로를 세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 흘러나는
귀하고 복된 주일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전하면서 살아간다. 어린 시절, 할머니, 어머니한테서 들은 옛날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경우, 현실과 다른 결말을 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주 강렬한 갈망을 이야기로 담은 경우가 그것인 듯하다. 그래서 이런 경우 이야기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빗댄 것으로 봐야 한다. 역설적이죠. 반어법이 풍성하게 담긴 이야기이며, ‘판타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이야기도 역설적인 경우가 많았다. 현실과 다른 이야기,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도 알려진 포도원이 배경이 된 이야기이다.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지, 그 땅에 자리한 포도원으로 공간 이동을 하고,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의 배역을 정하고 이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보지 못한 것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 눈으로 덮인 헤브론 포도원의 포도나무 가지. 봄이 되면 가지 치기를 시작한다. ⓒ 김동문 |
성경 속으로
오늘 함께 읽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마태복음 20:1) 아주 익숙한 이야기이다. 설교도 넘쳐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포도원 주인’, ‘집 주인’이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보다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로 주고받는다. 왜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더 알려져 있을까? 잘 모르겠다.
여기서 2천 년 전, 포도원은 어떤 존재감이었을까? 포도원 주인은 누구였을까? 포도원의 소유주는 누구였는가? 이것은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로마 식민지 이스라엘에 있었던 포도원은, 식민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책 사업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눈 덮인 헤브론 산지의 포도원. 고대와 지금도 가장 대표적인 포도원 지역이다. ⓒ 김동문
로마 제국의 포도주 내수 증대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식민지에서 포도원을 계속 늘려나갔습니다. 왜, 였나요? 로마 시민들 포도주 수요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포도원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내수용이 아니라 제국으로 보내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임금으로 운영되는 전 세계의 일차 산업1차 산업 현장이 그것입니다. 커피 원두 재배 농장 같은 것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커피 원두 생산자가 커피를 즐기지 못하듯이, 포도 재배 농부들도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원의 존재는 이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 포도 나무에 가지가 뻗고, 잎은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 시작한다. ⓒ 김동문 |
또한 현실 속의 포도원 주인은, 로마인이거나 로마에 충성하던 이스라엘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일용직 노동자에 대해 어떤 배려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로마인이 직접 포도원을 소유했지만. 점차 비 로마인에게도 포도원 권리를 넘겨주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식민지에서 권력자, 권세가, 유지였습니다. 그가 로마인이든, 로마에서 인정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든 간에. 일제 치하의 주요 기간 산업 소유자, 운영자 같은 존재 말입니다.
포도원 재배의 중심지에는 당연히 유대 산지의 헤브론 지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들어진 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에서 발견한 고대 포도원에 자리했던 포도즙 틀은, 고대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지방과 헤브론 등 유대 산지, 갈멜산 지역, 골란고원 등에 흩어져 있습니다. 전통적인 포도원이 있었던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포도원을 새로 만들고 직접 관리했을 개연성이 큽니다.
배경을 짚어보는 것이 조금 길었습니다. 포도원의 존재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포도원 주인, 포도원 청지기, 포도원 품꾼들을 떠올려봅니다. 품꾼, 날품을 팔려고 해도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인력 시장은 노는 인력이 넘쳐납니다. 이 이야기 속에 보면,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노동을 하는데,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도 날품을 팔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날품을 팔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큰 복이었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이라는 것,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푼돈이라도 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을 듯합니다.
직접 인력 시장에 가서 품꾼을 모으는 포도원 주인의 존재도 현실에서는 없는 존재입니다. 비현실적인 장면은 또 있습니다. 한 시간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존재는 더더욱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고 불평하는 품꾼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조차도 아주 후하게 받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터로 부르면서 품삯을 미리 약속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조건을 갖고 포도원에서 일하던 이들, 이들 모두는 한 데나리온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가 영글고 있다. 여름철 포도원 풍경이다. ⓒ 김동문 |
다시 생각하기
이렇게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의 포도원 주인의 됨됨이가 천국을 그려준다고 말합니다. 그들 모두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필요를 따라 대우하는 포도원 주인을 만나는, 그 황당한 이야기처럼, 천국은 황당하게 다가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에 정통하고,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충실하며, 십일조를 제때 바치고 사는 이들이나 갈 것만 같은 그 나라에, 하루 벌어 하루 살 수도 없었던 무지렁이 백성도 천국에서 차별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꿈꾸는 천국의 모습, 우리가 일상에서 보여주는 천국의 됨됨이는 어떤가요? 혹여라도 차별을 당연시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차별을 당연하다며, 정당화하는 시대를 살면서, 이 이야기 속의 포도원 주인과 같은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일까요?
▲ 날품을 파는 노동자들이 인력 시장에서, 한낮에도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일자리는 없고 인력을 넘쳐났다. ⓒ 김동문 blog.naver.com/yahiyakim |
프롤로그: 유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비유
포도원 품꾼 이야기 성경 구절
01. 포도원 주인은 천국의 모델인가, 악덕 고용주의 모델인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 해석의 난해성
02. 포도원 품꾼은 누구인가?
성서시대의 경제, 절망적인 너무나 절망적인…
03. 포도원 주인은 왜 다섯 번이나 품꾼을 구하러 갔을까?
반복된 품꾼 리크루팅 속에 숨겨진 비밀
04. 포도원 주인은 왜 일하러 온 순서와는 정반대로 품삯을 지불했을까?
역전된 품삯 지불, 고도의 문학적 장치
05. 품꾼들의 불평불만은 과연 정당한가?
포도원에서 발생한 노사분규
06.포도원 품꾼들이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사악한 이유는?(1)
성서시대의‘후견인-의뢰인’체제
07. 포도원 품꾼들이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사악한이유는?(2)
성서시대의 ‘악한 눈-선한 눈’ 개념
08.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도
참고도서
천국 = 포도원 주인 O
천국 = 포도원 X
언뜻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포도원 주인을 비유 속의 캐릭터로 제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스토리텔러이신 예수님이다. 만약 우리가 포도원 주인을 억지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채색하려는 순간 스토리텔러이신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본래 의도하시던 바가 흐려지고 만다. 비상식적인 포도원 주인을 억지로 변호하려는 순간, 애초에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메시지가 크게 훼손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포도원 주인의 기이한 태도, 품꾼들을 의도적으로 도발하는 듯한 포도원 주인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포도원 주인의 기이한 태도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다. .....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에서 정반대의 판결을 내리신다. 포도원 주인은 지극히 선하고 포도원 품꾼은 참으로 악한 자라는 것이다. 마 20:15
비유에 나오는 품꾼은 고대의 피라미드 사회 구조에서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던 최하류층이었다. 이들의 숫자는 만만치 않게 많았다. 극소수 부유층의 재산 목록에 포함되어 그들의 은덕을 입고 살아가던 노예들이 차라리 품꾼보다 훨씬 나았다. 노예들은 자신의 주인이 파산하지 않는 한 최소한 굶거나 헐벗게 될 염려는 없었기 때문이다.
.....
품꾼은 신분상으로는 분명 자유인이지만 실제로는 노예보다 못한 삶이 기약 없이 이어졌다. 품꾼들은 허리가 휘도록 하루 종일 일해 봤자 겨우 하루치양식밖에 벌 수 없었다. 내일을 위해 아무것도 대비할 수 없고 믿을 만한 일자리가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그날그날 일거리를 찾아 인력시장을 서성이고 배회해야 하는 가장 처참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욥기에는 품꾼들의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욥 7:1, 욥 14:6
우리말 성경에 '상당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디카이오스'다. 이것은 '공정하게', '정의롭게'를 의미한다. 포도원 주인은 두 번째 그룹의 품꾼들에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품삯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면 품꾼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어쩌면 예수님이 다루시고자 한 주제도 바로 '정의'였던 것 같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경제 정의와 자신이 소개할 천국에서 통용되는 경제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품꾼들이 불쌍했다면 그냥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여기 한 데나리온이 있소. 이걸로 음식을 사서 가족에게 돌아가시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에게 값싼 동정은 베풀지 않는다. 그런 식의 동정은 자칫 가진 게 자존심밖에 없는 이들에게 모멸감만 안겨 줄 뿐이다. 포도원 주인은 대신 그들이 간절하게 원하던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도 지켜 주고 잠깐이나마 일의 보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주인은 품꾼들의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욕구 모두에 놀라울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로 가득한 사람이다. 인력시장을 다섯 번이나 찾아간 것도 한 사람의 품꾼에게라도 더 일자리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주인은 품꾼들의 절박한 사정을 잘 알았기에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들에게도 하루치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품삭을 준 것이다. 최소한 한 데나리온이라도 손에 쥐어야 그날 하루치 식량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 가족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은 겨제적인 원칙에 따라 품삯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지불했다. 보통 포도원 주인 같았으면 새벽에 나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했ㅇ니까 맨나중에 온 이들에게는 1/12 데나리온만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품삯을 지불했다.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정의로울 뿐 아니라 긍휼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포도원 품꾼들이 정의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사악한 종자들이라고 판결한다. 약간 옳지 않은 구석이 있는 차원이 아니라, 비유는 그들이 완전히 사악한 자들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우리는 비유 속의 품꾼들을 보면서 쉽게 자기 자신과 동일화한다. 이것은 비유를 직접 들은 당시의 청중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만큼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다루고 있는 이슈는 당시나 지금이나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듣고 품꾼들을 향한 일체의 동정과 연민, 더 나아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면서 그들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아직 비유의 핵심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유는 불평하는 품꾼들이 정의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악하다'고 결론짓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우리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에 나오는 성서시대에 통용되던 문화적 세팅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후견인-의뢰인'의 개념
둘째, '선한 눈-악한 눈'의 개념
고용주이자 후견인인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 중에서 자신의 의뢰인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누구에게는 단순히 고용주로서 대하고, 또 누구에게는 마치 자신의 수하에 들어온 가조거럼 과분한 자선을 베푸는 후견인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뢰인이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후견인만의 고유하면서도 절대적인 권한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때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의 불만은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 볼 때도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아주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후견인인 포도원 주인만의 절대적인 권한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의 불만을 당시의 '후견인-의뢰인' 개념에서 재해석하면 당ㅁ과 같은 말이 된다.
"다른 품꾼들은 당신의 의뢰인으로 선택하면서 나는 어째서 선택하지 않는 거요?"
한 데나리온의 품삯은 애초에 약속된, 그리고 당시에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된 금액이었다. 이것보다 더 주는 것은 분명 자선에 속한다. 후견인인 포도원 주인이 그런 자선을 누구에게 베풀지는 전적으로 후견인에게 속한 절대권한이었다.
비유 속에서 후견인으로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과연 인색한가? 결코 아니다 12시간 일한 품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정 부분 이상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자선의 혜택을 받았다. 이미 넘치도록 자선은 베풀어졌다. 포도원 주인은 후견인으로서 다수의 의뢰인인 품꾼들로부터 충분히 명예를 얻을 만한 자선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이 자신에게도 자선을 베풀라면서, 즉 자신도 의뢰인으로 받아 달라면서 생떼를 쓰고 있다. 그는 지금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금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시대 유대인들의 인체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스템으로 설명할 수 있다.
1. 심장-눈 시스템
2. 입-귀 시스템
3. 손-발 시스템
첫째, 심장-눈 시스템이다. 인체는 눈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된 정보를 심장(마음)에 보낸다. 심장(마음)은 그것을 가공하고 묵상하고 판단한다. 이것은 외부 세계를 내 속으로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일종의 감정과 사고의 영역이다.
둘째, 입-귀 시스템이다. 인체는 귀를 통해 외부의 정보를 듣고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 낸다. 이렇게 소화된 내용은 입을 통해 외부 세계로 표현된다. 이것은 외부 세계에 자신을 표현하고 변호하는 언어의 영역이다.
셋째, 손-발 시스템이다. 이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판단된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최종적으로 손말을 움직여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성서시대에 이런 활동은 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수동적인 동기, 또는 명예를 쌓으려는 적극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외부 세계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의도적인 활동 영역이다.
유대적 개념에서 '레브'(심장)는 현대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마음'에 더 가깝다. 유대인들은 우리 몸에서 생각과 사고를 주관하는 곳을 '레브'라고 여긴 것이다. ..... 성서시대 유대인들은 '눈'이라는 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를 보고, 그렇게 인식한 정보들이 심장에 저장된다고 이해했다. ..... 눈으로 보는 외부 세계는 '심장-눈' 시스템의 심장으로 곧바로 통하게 된다.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 심장(마음)에 직접적인 전류를 통하게 한다는 것이 성서시대 유대인들의 사고였던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무엇을 보느냐?' 그것이 문제다. 그것이 심장, 즉 마음에 전류를 통하게 하니까 말이다. 성서시대 유대인들의 인체관 중 심장-눈 시스템, 즉 서로 전류가 찌릿찌릿 통하는 심장(마음)과 눈의 관계를 알고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분명 새롭게 와 닿을 것이다. 민 15:39, 삼상 2:33, 왕상 9:3, 욥 31:7, 시 131:1, 전 2:10, 전 11:9, 잠 15:30, 렘 22:17, 겔 6:9, 애 5:17-18
성서시대 유대인들의 인체관 중 하나인 '심장-눈 시스템'과 '눈'이 단순히 보는 차원을 넘어서 '탐심'으로 의미가 확대된다는 것을 알 때 히브리어 관용구인 '선한 눈-악한 눈' 개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한 눈'은 히브리어로 '아인 톱'이라 하고, '악한 눈'은 '아인 라'라고 말한다. 선한 눈, 악한 눈은 이미 언급한 대로 시력의 좋고 나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표현이다. 눈매가 선하고 악한 것과도 상관없다.
'눈'이 '심장'(마음)에 탐심을 불러일으키는 기관임을 알 때 성서시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관용구인 '선한 눈-악한 눈'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선한 눈: 어떤 물건을 보아도 그것을 갖고자 하는 탐심이 일어나지 않는 눈
악한 눈: 어떤 물건을 볼 때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탐심을 일으키는 눈
선한 눈: 물질을 아끼지 않고 잘 쓰는(generous)
악한 눈: 물질에 연연하고 인색한(stingy)
신 15:9, 잠 23:6, 잠 22:9, 잠 28:22
고대인과 현대인들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다르다. 현대인들은 모든 재화(goods)를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풍성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선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대량소비 문화가 생겨났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더라도, 돈만 있으면 그것을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혀대인들의 머릿속에는 '무제한적인 재화'라는 인식이 어느덧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이 살아가던 세상은 모든 재화가 넘쳐 나는,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인류가 모든 재화가 넘쳐 나는 풍성함을 경험한 지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백 년밖에 되지 않는다. .....
고대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현대인들과 달리 '모든 재화는 제한되어 있다'(limited goods)는 인식이 뿌리 깊었다. 모든 재화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더 가지려 할 때 그만큼 남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제로섬'(zero sum) 게임이 벌어지는 곳이 고대인들이 살아가던 세상이었다.
남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소유한 지배층이 '후견인-의뢰인' 체제를 통해 가난한 자들과 자신의 재화를 나누었던 것도, 알고 보면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이런 '제로섬' 게임과 같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했을 때 덜 가진 사람과 나누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아울러 고대인들은 나누지 않고 혼자만 독식하려는 사람을 향해 '뭐, 그럴 수도 있지! 자기 건데 자기 맘대로 할 수도 있지!"하면서 대충 넘어갈 수 없었다.
이런 부자들, 곧 악한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사회적인 경멸과 모욕이 뒤따랐다. 왜냐하면 부자가 가진 잉여의 산물은 다른 사람에게 그만큼의 부족과 결핍을 초래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선을 베풀지 않는 부자에게 가해진 사회적 경멸과 모욕은 결국 그들의 부가 남의 것을 훔친 것과 같다는 사고에서 기인한 것이다. 명예와 수치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던 성서시대 사회에서 '인색한 부자'라는 평가는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
'제한된 재화'란 개념이 뿌리 깊은 고대인들에게, 남보다 더 갖게 된 잉여의 재화는 과연 누구의 것으로 인식되었을까? 그것은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를 '궁핍의 때'를 위해 저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과 그 후손들만 자자손손, 흥청망청, 떵떵거리며 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제로섬' 게임 사회를 살아가던 성서시대 부자들에게는 운 좋게 자신에게 주어진 잉여의 부를 동시대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써야 한다는 무언의 사회적 압력이 가해졌던 것이다.
성서시대 유대인들의 이런 사고를 알 때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가 얼마나 어리석고, 심지어 경멸스런 사람인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눅 12:16-21
이런 상황에서 고대인들이 탐심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갖고 싶은 물건, 더 나아가 그 물건의 실소유주를 향해 '악한 눈'(evil eye)을 던지는 것이다.
현대의 사전적 의미로는 히브리어 관용구인 '악한 눈'을 단순히 '시기'란 말로 번역한다. 하지만 '악한 눈'은 단지 두 개인 간의 점잖은 경쟁심리를 의미하는 현대 심리학적 개념의 '시기'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고대세계에서 어떤 물건, 더 나아가 그 물건의 소유주에게 '악한 눈'을 던지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죽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그래서 그 물건이 자신의 소유물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 있다.
굳이 현대적 개념을 빌리자면 누군가에게 '악한 눈'을 던지는 것은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심리적 살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악한 눈'이 갖고 있는 파괴적이고 섬뜩한 의미인 것이다. 고대인들은 상대방이 던지는 '악한 눈'을 통해 그 사람의 살인적인 영혼까지 자신에게 전가된다고 믿었다.
.....
고대인들의 세계, 특히 성서시대 유대인들의 사고에서 질투와 시기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시기'는 남의 물건을 향해 악한 눈을 던지며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강한 충동이지만, '질투'는 타인이 던지는 악한 눈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소유물을 지켜 내려는 욕구다. 결국 시기는 수치스런 감정인데 반해, 질투는 명예로운 감정인 것이다. 히브리어로도 '시기'는 악한 눈을 의미하는 '아인 라'를 사용하지만, '질투'는 '킨아'를 사용한다.
시기와 질투의 서로 상반된 개념을 알 때 우리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시기, 질투의 개념을 알지 못하는 현대의 성경 독자들은 '하나님이 뭐 쩨쩨하게 질투를 하시는가?'라고 오해하겠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저차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소유물인 자녀를 향해서 질투심을 발함으로써 그것을 빼앗으려고 사탄이 던지는 '악한 눈'(시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전략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알 때 우리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출 20:5, 출 34:14, 신 4:24, 신 6:15, 수 24:19, 민 25:1, 막 7:22
..... '선한 눈-악한 눈'의 관용구적인 표현이 갖고 있는 본래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다시 번역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내게는 '선한 눈'이 있는데 네가 오히려 나에게 '악한 눈'을 던지느냐?"(직역)
"내가 너희들에게 그토록 자선과 긍휼을 베풀었는데, 너희들은 그런 나에게 오히려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눈 흘김으로 나오느냐?(의역)
..... 하지만 품꾼들의 죄는 이처럼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의 대역이라면 품꾼들은 지금 하나님이 멸망하도록 '악한 눈'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불평하는 품꾼들의 사악함과 극악무도함, 후안무치,,,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도 없는 그런 무섭고 섬뜩한 품꾼들의 죄악이 느껴지는가? 만약 우리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서 불평하는 품꾼을 향해 일말의 변호하는 마음과 동정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도 결국 하나님의 멸망을 바라는 참람한 죄악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종말 비유가 아니다. 재림 비유도 아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맞이하게 될 운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교훈.
첫째, 세상에서는 노동 시간에 따른 품삯 지불이 정의지만, 천국에서는 품꾼의 상황에 따른 맞춤 정의가 통용된다. 또한 천국에서 정의는 가난한 자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복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포함한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에게 값싼 동정을 베풀지 않고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 준 것처럼 말이다.
둘째, '보상'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마 5:12, 마 5:46.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보상을 주신다면 그것은 일한 만큼 받는 '사카르'가 아니라, 추가적인 보상인 '프라스'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고용주와는 달리 품꾼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후견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후견인이시라면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우리의 자세 또한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천국 윤리.
첫째, 세상에서는 할 수만 있으면 높아지려고 하지만 제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낮아져 섬겨야 한다.
둘째, 세상의 품꾼들은 품삯만 바라고 주인이 안 보면 얼렁뚱땅 시간을 때우려 하지만 제자들은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셋째, 세상의 품꾼들은 동료의 행운을 시기하고 서로 '누가 크냐?'고 경쟁하지만, 제자들은 동료의 행운에 함께 기뻐하고 서로를 축복해 중야 한다.
넷째,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그분 앞에서는 모든 경쟁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정의롭게 보상하실 것이다. blog.naver.com/jsuf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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