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요한복음4장 참 생수에 관한 교훈과 그리스도
3장에서 니고데모가 유대교에서 가장 고귀한 모습을 보여 준 자라면 본문은 유대교 입장에서 보아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방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가르쳐 회개케 하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고, 그녀로 하여금 그 동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육신적인 차원에서 예수의 구원 사역을 깨닫지 못하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 중심으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것을 촉구하신다. 2,3장에서 계속된 영생의 가르침은 본 장에서 고관의 아들을 살림으로 그 영생을 실제적인 표적으로 보여 준다.
1.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심(1-26절)
1) 사마리아 여인을 개인적으로 만나심
예수의 사역은 요한의 사역을 완성하는 의미에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2절에서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부정되는 것은 의식적 세례를 배제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1절에서 '바리새인들'은 항상 그들의 정체와 의도가 예수의 신적 전지하심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3절의 '유대'와 '갈릴리'와 잦은 이동은 요한이 유대와 갈릴리를 구별하려는 당시 유대교의 관습을 허무는 의도를 보여 준다. 4절의 '사마리아'와 7절의 '사마리아 여인'은 그 대조를 더욱 심화 시킨다, 6절의 '야곱의 우물'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는 창28장의야곱의 상황과 대구되는 요1:51의 해석을 다시 연상시킨다. 6절의 '제육 시'는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것과 대조되는데, 특히 7절의'물을좀 달라'와 함께 당시의 인간 차별을 깨려는 예수의 능동적 태도를 보여 준다. 8절의 '제자들이 동네에 들어'간 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배경을 이룬다.
2) 야곱의 우물을 능가하는 영생의 샘물
9절에서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의 '유대인'이심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선적으로 유대인의 메시야이심을 암시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은 둘이 하나가 되게 하는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의 의미를 암시한다. 10절의 '하나님의 선물'은 요3:16의 '독생자를 주셨으니'를 연상시키므로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를 가리킨다. '생수'는 문자적으로 샘물이나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을 가리키나 예수는 이 용어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구원과 성령의 내주하는 임재를 가리켰다. 11절은 이 여인의 무지를 나타낸다. 12절의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는 예수의 메시야 됨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 여인의 냉소적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요1:514:6과 같이 예수께서 야곱을 능가하고 대치하는 메시야적 의미가 들어있다. 13절의 '다시 목마르려니와'는 야곱의 우물이 약속 차원의 잠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가리키고, 14절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영생을 성취하는 예수의 메시야적 기능을 강조한다. 15절의 '주여'는 예수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야곱을 능가하고 대치하는 분이심을 보여 주는 여인의 신앙 고백을 암시한다.
3) 영생을 주는 회개의 속죄 제사
16절의 '남편을 불러오라'는 영생을 주는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시지 않고 간음한 여인 같이 사는 그의 죄악된 현실을 고백하라는 의미이다. 17절의 '남편이 없나이다'는 여인이 자신의 현실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고 피하려는 시도이다. '옳도다'와 18절의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는 그녀를 정죄하는 의도보다는 그녀의 회개를 촉구하는 권면이다. 19절의 '선지자로소이다'와 20절의 '예배할 곳'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종교적 죄악을 속죄할 것을 결심한 것을 암시한다. '이 산'은 겔4:1-3의 배경하에서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며 모세 오경만을 사용한 배경을 보여 준다. 21절의 '여자여'는 믿으라고 부드럽게 권면하는 도입어이다.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는 요한 당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자들을 막으려는 배경을 암시한다. 22절에서 '예배'와 '구원'이 밀접하게 연결된다.
23절은 참된 예배를 가리키는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은 증언법으로 진리의 성령으로 예배할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진리의'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그의 부활을 그 내용으로 하여 보혜사 성령을 암시한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의지하게 하는 보혜사 성령을 좇아 예배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24절의 '영'은 하나님의 신분이라기보다는 그의 본질을 가리키므로 예배하는 자도 육신적인 형식으로 예배드리지 말고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는 영적 차원에서 예배드려야 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25절에서 여인이 종말론적 메시야 시대를 기대하는데 이르자 26절에서 예수는 '내가 그로라'(ejgwv eijmi;에고 에이미)로서 예수의 신적 메시야됨을 드러낸다.
2. 말씀을 통한 선교 사역을 촉구하심(27-42절)
1) 제자들의 사역과 여자의 사역의 대조
27절의 이때에'는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구원을 확신시키는 시간을 정확히 사용하신 주권을 보여 준다. 제자들이 '이상히 여겼으나…묻는 이가 없더라'는 제자들의 무지와 동시에 예수의 권위를 강조한다. 28절의 '여자가…사람들에게…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영적인 선교의 외침은 제자들의 침묵의 육신적인 질문들,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와 대조된다. 30절의 '저희가 예수께로 오더라'는 32절의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무엇인지를 잘 암시한다.
2) 제자들의 추수할 사명
33절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는 제자들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34절의 '온전히 이루는 이것'은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을 온전히 구원했고 그녀로 인해 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오는 것을 반영한다. 35절에서 제자들의 육신적인 추수 때와 예수의 영적인 추수 때가 대조된다. 36절의 '거두는 자'는 예수의 제자들을 암시하고, '뿌리는 자'는 일차적으로 예수를 의미하고 특히 38절과함께이차적으로 앞으로의 제자들의 사역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들, 특히 세례 요한과 예수 자신을 의미한다.
3) 함께 유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
39절의 '나의 행한 모든 것'은 여자가 회개의 차원에서 자신의 죄악됨을 공적으로 시인함으로 증거의 효과를 강조하게 한다. 여기서 나의 회개가 남에게 믿음을 주는 간증의 형태를 보게 해준다. 40절의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와 예수가 '이틀을 유하시니'는 예수의 말씀을 분명히 하여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요한에게서 표적보다 말씀이 강조되고 있다.
3. 고관의 아들을 고쳐 주심(43-54절)
1) 표적을 보고 영접하는 갈릴리인들
43절의 '이틀'은 40절의 '이틀'을 연상시키고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44절의 '친히 증거하시기'는 앞 문맥에서 선교적 사명을 주는 것과 연결할 수 있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예수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45절의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는 참된 영접이나 믿음이 아니라 단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본 반응일 뿐인 것을 암시한다.
2) 표적을 통한 믿음을 거절하심
46절의 '왕의 신하'의 처지는 다른 갈릴리인들과 달랐다. 예수께서 가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찾아 '가서' 자신의 아들이 '거의 죽게'된 것을 호소한다. 48절에서 예수는 '표적과 기사'를 통한 믿음을 꾸짖으신다. 49절의 '주여'는 그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암시하고 '죽기 전에'는 그의 간절함을 암시한다. 특히 50절에서말씀을 믿은 것은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사마리아에서의 전도 사역(요4:1-12)
◈ 원문강해 ◈
수가 성에서 만난 여인에게 전도하심
예수께서는 유대 교권주의자들과의 직접적인 논쟁을 피해 갈릴리로 가시려고 그 지름길인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고 계셨다. 그때 수가라는 동네를 통행하시다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복음의 참의미를 전하시게 되었다.
1.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심(1-6절)
예수는 자신이 제자를 많이 삼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을 아시자, 유대 교권주의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가시려 했다. 그리고 그 행로에 수가라는 동네를 지나게 되었고, 동네 우물가에 피곤하여 앉으셨음을 보여 준다.
1) 시기심을 품은 바리새인을 피하심
( JW" ou\n e[gnw oJ jIhsou'" o{ti h[kousan ... ajfh'ken th;n jIoudaivan kai; ajph'lqen pavlin eij" th;n Galilaivan. 호스 운 에그노 호 예수스 호티 에쿠산…아페켄 텐 유댜이안 카이 아펠덴 팔린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1-3절)
본 절은 예수의 전도 여행 기록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에그노(e[gnw아신지라)는 기노스코(ginwvskw알다)의 부정과거로 일회적 발생 사건의 의미를 나타내며, 예수께서 아시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예수에게 집중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을 아시게 되셨음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더 많은 무리가 몰려드는 것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예수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A.T.Robertson), 이제 주님의 전도 행적은 널리 소문이 퍼져 알려지게 되었다(J.H.Mayfield). 에쿠산(h[kousan들은)은 아쿠오(akouvw듣다, 알아내다)의 부정과거형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권세있는 자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종교적인 의식에 대해 조사할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A.Barnes). 그러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관심과 주의를 끌면서 제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만가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2절 서두의 카이토이게(kaivtoige비록)는 강조의 불변사인데,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그 뜻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중 오직 본 절에만 나타나는데 앞 절의 말을 부분적으로 고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그러하지만'의 의미이다(W.F.Scott). 즉 이 말은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준 것처럼 설명한 앞의 말들을 수정하기 위한 구실을 하고 있다. 에밥티젠(ejbavptizen세례를 주신 것이)은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적 행위를 함축하는데 본문에서는 부정사 우크(oujk아니요)와 함께 쓰여 예수께서 세례를 습관적으로 베푼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A.T.Robertson).
여기서 이 동사가 단수로 처리된 것은 비록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어도 그 베푼 세례의 궁극적인 책임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W.Hendriksen).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물 세례를 주시지 않은 것은 제자들이 베푼 회개의 세례인 물 세례와는 달리 참세례인 성령 세례를 주시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A.Plummer, H.R.Reynolds). 아페켄(ajdh'ken떠나사)은 아피에미(ajdivhmi떠나다, 사라지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유대를 떠난 단순한 출발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를 떠나신 것이다(H.R.Reynolds). 결국 예수께서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피함으로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A.T.Robertson).
2)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심
(e[dei de; aujto;n dievrcesqai ... e[dei de; aujto;n dievrcesqai 에데이 데 아우톤 디엘케스다이…에도켄 야곱 토 요셉 토 휘오 아우투;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5절)
에데이(e]gnw하여야 하겠는지라)는 데이(e[dei반드시∼해야 한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반드시 통행해야 한다는 강력한 행동의 표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주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겠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W.Hendriksen). 이러한 필요성은 예수의 사명과 사역의 목적과 관계되어 있다(J.H.Mayfield).
쉬카르(e[di'수가)의 지명에 대해서 두 가지의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① 현재의 나블루스(Nablus)라고 불리는 세겜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F.L.Godet, T.Zahn, H.A.W.Meyer).
② 세겜에서 동남쪽으로 2마일 떨어져 있는 아스칼(Askar)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①의 견해는 쉬카프(Suca;r)와 쉬켐(Sucem)의 발음이 비슷하기에 저자인 요한이 잘못 혼동하여 썼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팔레스틴 출신인 요한이 지명을 혼동했을 리 없고, 예전부터 수가와 세겜은 구별되어 일컬어졌다는 견해가 있기에 받아들이기 어렵다(L.Morris). 따라서 수가라는 지역은 세겜과 별로 멀지 않은(Eusebius)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통해서 갈릴리로 가는 행로 길가로 위치한 작은 마을인 것이다(C.K.Barrett).
3)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심
(h\n de; ejkei' phgh; tou' jIakwvb. oJ ou\n jIhsou'" kekopiakw;" ejk th'" oJdoiporiva" ejkaqevzeto ou{tw" ejpi; th'/ phgh'/: w{ra h\n wJ" e{kth. 엔 데 에케이 페게 투 야곱 호 호 도이포리아스 에케데제토 후토스 에피 테 페게 호라 엔 호스 헤크테;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6절)
케코피아코스(kekopiakw;"곤하여)는 코피아오(kopiavw피곤하다,곤하다)의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심히 피로에 지친 예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피곤에 지쳐 목마름을 느끼시는 예수의 참된 인간적인 면을 생생히 보여 주는 묘사인 것이다(R.C.H.Lenski).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모습 또한 생생히 표현하고 있다(L.Morris).
에케데제토(ejkaqevzeto앉으시니)는 카데조마이(kaqevzomai앉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께서 계속하여 앉아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수의 자세는 피곤에 지친 모습 그대로 땅에 주저앉으신 것을 나타내 준다(Chlsostom).
2.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7-10절)
1) 대화를 시작하심
(oJ jIhsou'", Dov" moi pei'n: 호 예수스 도스 모이 페인;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7절)
예수께서는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함으로써 대화를 시작하신다. 도스(Dov"달라)는 디도미(divdwmi주다)의 부정과거 부정사로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더운 대낮에 힘든 여행의 행로에 지치셨고, 심한 갈증을 느끼셨기 때문이다(W.Hendriksen).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요청은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에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를 소개하게 되었다(R.C.H.Lenski). 폐인(pei'n물을 좀)은 피노(pi'nw마시다)의 부정과거 부정사로서, 예수께서 단순히 마실 것(물)을 요구하시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본 절은 한 피곤한 나그네인 유대인 예수가 이방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연스러운 요청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대화의 시작을 한 타락한 여인을 구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 먹을 것을 사러 간 제자들
(oiJ ga;r maqhtai; aujtou' ajpelhluvqeisan eij" th;n povlin, i{na trofa;" ajgoravswsin. 호이 가르 마데타이 아우투 아펠렐뤼데이산 에이스 텐 풀린히나 트로파스 아고라소신;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8절)
본 절은 예수께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을 설명해 준다(H.R.Reynolds). 아펠렐뤼데이산(ajpelhluvqeisan들어갔음이리라)은 아펠코마이(ajpelcomai;가다, 오다)의 과거 완료형으로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제자들이 동네로 들어가 버렸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제자들 전부가 동네로 들어갔는지 일부만 들어갔는지에 대해 본문은 밝히지 않고 있으나,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기록이 친히 목격한 자의 내용 같기에(B.F.Westcott) 본서의 저자인 요한은 예수 곁에서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추정된다(H.R.Reynolds).
3) 여인과의 일문 일답
(ouj ga;r sugcrw'ntai jIoudai'oi Samarivtai". ... kai; e[dwken a[n soi u{dwr zw'n. 우 가르 슁크론타이 유다이오이 사마리타이스…카이 에도켄 안 소이 휘도로 존;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리라…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9,10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가 유대인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자기에게 요청하는 것에 대해 놀람을 나타내었다(J.A.Bengel). 슁크론타이(sugcrw'ntai상종하지)는 슁크라오마이(sugcrw'ntai교체하다, 오가다)의 3인칭 복수 중간태 직설법으로 원래 '그릇을 같이 사용하다'라는 의미이나 본 절에서는 '같이 만나 교제를 나누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흔히 사회적인 교류 관계를 두고 쓰는 말이다(R.C.H.Lenski). 중간태라 함은 그들이 자신을 위해 상종하는 것을 함축한다. 본문에서는 부정사와 함께 쓰며 자신을 위해 상종치 않음을 나타낸다.
도레안(sugcavomai선물과)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즉 ① 생명수이다(J.A.Bengel, F.L.Godet, J.H.Bernard, T.Zahn), ② 그리스도 자신을 말한다(J.Calvin), ③ 하나님의 일반적인 선물을 뜻한다(H.A.W.Meyer B.F.Westcott), ④ 하나님이 주시고자 약속한 성령이다(Augustine)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 중에서 이어지는 문맥과 연관지어 볼 때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하겠다. 또 휘도르 존(u{dwr zw'n생수)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 ① 세례를 의미한다(J.Martyn), ② 신앙을 뜻한다(G.C.F.Lcke), ③ 구원을 말한다(F.Tholuck), ④ 그리스도 자신이다(H.A.W.Meyer, Olshausen), ⑤ 영생이다(B.F.Westcott. F.L.Godet), ⑥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다(J.Calvin, L.Moris, J.H.Bernard) 등이 있다. 여기에서 본 절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생수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겠다.
3. 진리를 발견치 못한 여인의 대답(11,12절)
1) 의구심을 품는 여인
(levgei aujtw'/ 팯J gunhv?, Kuvrie 레게이 아우토「해 귀네」퀴리에; 여자가 가로되, 11a절)
퀴리에(Kuvrie주여)는 호격 명사로, 본문에서는 여인이 단순히 존경의 뜻으로 부른 칭호인 '선생님'이란 의미로 전달된다(A.T.Robertson). 원래 이 말은 주인, 하나님, 그리스도, 존경의 호칭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이여인은 아직 참된 주님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였기에 단순 호칭으로 부른 것이다.
2) 생수를 이해 못함
(povqen ou\n e[cei" to; u{dwr to; zw'n 포덴 운 에케이스 토 휘도르 토 존;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1b절)
휘도르 토 존(u{dwr to; zw'n생수)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명수인 성령을 말한 것이 아니고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여인이 단순한 물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그녀가 아직 영적인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육신적인 물질(현상) 세계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현상은 니고데모에게서도 엿보였다(요3:1-7). 이는 주님을 아직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야곱의 우물
(mh; su; meivzwn ... ta; qrevmmata aujtou'_ 메쉬 메이존…타 드렘마타 아우투; 우리 조상 야곱이…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12절)
메이존(meivzwn보다 더 크니)은 비교급으로서 여인이 생수를 주겠다는 예수와 야곱의 우물을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즉 이 말은 생수를 찾는데 있어서 야곱보다 예수가 더 지혜롭고 명철하냐고 논박하는 것이다(A.Barnes). 이 여인은 자신이 야곱의 직계 자손임을 주장하였고 그 위대한 조상인 야곱보다 예수가 더 뛰어나고 훌륭한지 의심을 품고 예수께 다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L.Morris).
아직까지도 이 여인은 영원한 생명수를 영혼들에게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우둔함을 보여 주고 있음을 본 절은 암시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예수 안에서 구약성경과 유대교가 완성됨을 암시해 주며, 물이라는 제의적 정결 수단이 성령의 요소와 결합됨을 보여 주는 매우 상징적인 부분이다(C.K.Barrett).
1. 예수가 유대를 떠남(1-3절)
1절에서 나오는 '예수'(jjIhsou'")라고 표기한 사본은 a, D, q, l, it, vg 등이며, 이를 '주'(kurio"퀴리오스)로 표기한 사본은 P, P ,B 등이며(G.R.Beasley-Murrary). 그러나 원본에는 '그가 아셨을 때'에 가까우며, 위의 두 가지 사본들은 대명사의 대상을 분명케 하기 위한 피사자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Raymond, E.Brown). 이 구절에 따르면, 당시 예수의 선교 활동은 세례 요한이 아직 활동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그의 제자들은 세례를 주고 있을 때였다(C.K.Barrett). 저자의 요한은 사두개인들이나 헤로디안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의 바리새인들은 복음을 배척하는 국가의 대표적인 자들이었다(W.Estcott).
2절의 '그렇다고 하더라도'라는 구문은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신약성경에 한 번 기록된 말이다. 이는 아마도 예수와 세례 요한 사이를 구분하기에 정열을 다했던 편집자에 의해 삽입된 말인 것 같다(C.H.Dodd, J.Jeremias). 2절의 삽입 구문은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서 삽입되었고, 이는 예수를 단지 요한이나 요한의 모방자와 같은 세례자로 이해함을 방지하고자 했다(G.R.Beasley-Muurray). 또 다른 이유로서는 성경의 파송 이전에 예수가 베푸는 세례는 복음서 저자들에게는 무의미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D.Haenchen).
3절에서 요한 자신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서술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음에 대하여 비평가들은 아마도 바리새인들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고 주장한다(E.Stauffer). 즉 그들은 세례자를 매우 싫어했으며, 그들 중에는 예수의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양심적으로 안식일을 잘지켰다는 것이다(E.Stauffer). 혹자는 '다시가다'를 요3:43,44과 1-3절을 연결시켜 사마리아 사건을 후대에 간단히 요약하여 삽입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aymond, E.Brown).
2.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당도하심(4-6절)
4절의 사마리아에 대하여 누가와 요한은 이방인 지역으로서는 매우 민감하며, 사마리아에서의 예수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J.Bowman, Macdonald). 4절에 대한 요한의 서술은 역사가 요세푸스가 잘 입증해 준다. 즉, 축제 때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수 있는 주요 통로는 사마리아 땅이었으며, 이는 갈릴리 사람들의 전통이었다(Raymond, E.Brown. C.K.Barrett).
5절의 '수가'는 구약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쉬카르'(Sychar) 또는 사카르( Sichar)는 탈무드에 기록되어 있다(C.K.Barrett). 대부분 사본들에는 수가(Suchar)로 표기되어 있지만 시라이 사본은 세겜(Shechem)으로 표기되었고, 제롬은 둘 다 인정하고 있다(Raymond, E.Brown). 아스카르는 세겜과 매우 가까우며,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는 길가에 있는 주장(Schnachenburg, Lindars)에 반대하는 비평가(Raymond, E.Brown)등도 있으며, 올브라이트(W.E.Albright)는 브라운(Brown)을 따라 Sin 사본(Sychem)만을 인정한다(Davies).
6절의 예수가 피로하였다는 서술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매우 창작적이며 지나친 감이 있는 구문이기도 한다(E.Kasemann). 아마도 제자 요한이 예수의 인간성을 매우 어설프게나마 제시하려고 했던 것같다(C.K.Barrett).
3. 우물가에서 여인과의 대화(7-12절)
7절의 '사마리아'를 '왔다'에 연결시키기보다는 형용사적으로 '여자 하나가'와 연결시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여자는 원래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C.K.Barrett).
9절의 '상종하다'라는 의미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사마리아인들과 음료와 음식을 담는 그릇(용기)을 같이 사용하지 아니함(D.Daube, NEB). ② 사마리안인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 (Bauer, Schnackenburg, Lindars, Haenchen)등이다.
9절 속의 해설적인 삽입 구문은 하나의 속담으로 남아 있어, 그들의 사업 거래시나 다툴 때 혹은 타인의 부정직한 행위를 처벌할 때 다양한 하나의 신조로써 사용되어 졌다(R.Bultmann).
10절부터 설화의 방향이 새롭게 전환되고 있다(C.K.Barrett). '하나님의 선물'은 여기서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는 주장(Osty, Van den Bussche)과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낸다는 주장(G.R.Beasley-Murray)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토라는 세상에 대한 생명이었는데, 본문에서 계시자에 의해서 가져온 계시는 '생수'와 매우 깊은 관련성이 있다(R.Bultmann).
11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가 곧 지하에서 솟아 오르는 물로 생각하였기에 예수가 던진 말에 오해를 하고 있다(C.K.Barrett). '주여'의 헬라적 의미는 '존칭어'와 '주님'인데, 사마리아 여인은 동시에 두 의미를 다 사용한 것 같다(G.R.Beasely-Murray).
12절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짐승들까지 이샘의 물을 먹였다는 사실은 마실 샘물이 충분했음을 암시해주며, 야곱의 우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 즉, 물만 제공해주며, 인간의 동물적인 생명에 필요한 것만을 제공해 줄 뿐임을 나타내고 있다(A.Jauber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사마리아로 가게 된 이유(1-4절)
1절에는 예수가 갈릴리로 향하신 이유가 나타난다. 세례 요한의 투옥(A.D.27년 12월경, 막1:14)을 기뻐하던 바리새인들이 요한보다 더 큰 세력을 이룬 예수의 무리를 곱게 볼 리가 없다(Hendriksen). 이를 아신 예수는 아직은 그들과 충돌할 때가 아님을 아시고 몸을 피하시기에 이른다(Blum).
2절에서 저자가 굳이 제자들이 베푼 세례임을 밝히는 이유는, 아무라도 요한의 세례보다 월등한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고전1:17). 한편 예수의 시인하에 세례를 베푼 것은 예수가 세례에 대하여 책임을 지셨음을 의미한다(Hendriksen).
3절의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신 것은 단순히 자리만 옮긴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Morris, Lenski). '떠나다'는 동사가 일반적으로 '포기하다'의 뜻으로 사용되는 용례에 따른다면 본문은 유대 지역을 포기하셨거나(Morris) 세례 행위를 중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Lenski).
4절의 '사마리아를 거쳐야 하겠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Tenney, Morris, Barrett). 하나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므로 그리로 가야 한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제성을 의미한다.
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5-12절)
본문은 예수의 육체적 고통(요4:619:1)과 제6시(요4:719:14), 목이 마른 것(요4:719:28), 일을 마치심(요4:3419:30)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의 수난 기사와 매우 유사하다. 이는 예수를 세상의 구주(42절)로 묘사한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R.H.Lightfoot). 따라서 저자는 본문을 기록할 때, 구원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회상하며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Morris).
5절의 사마리아라는 명칭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는데 점차 북왕국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수가'는 세겜, 즉 현재의 나블루스(Nablus)의 남동족 약 6km떨어진곳에 있는 아스카르(Askar)로 추측된다(Tenney, Morris). 그 이유는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세겜)이 가깝고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말에는 입증되는데(창33:1948:22;수24:32), 아스카르는 물을 길을 만큼 가까운 곳에 야곱의 우물과 요셉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Lenski).
6절의 '우물'은 솟아오르는 샘물을 의미한다. 1,12절의 '우물'은 일반적인 의미의 우물을 총칭하는 용어이다(Hendriksen, Lenski). 저자가 이 두 단어를 구별한 이유는 14절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연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Morris). '피곤하여 그대로 앉으심'은 말 그대로 너무 지쳐서 우물가에 오자마자 앉으셨음을 나타내는데(Lenski, Morris), 이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Hendriksen). '제육 시'는 유대인의 시간법에 의해 정오이다. 이 시간은 물 긷는 시간으로는 부적당하지만(Hendriksen), 여인의 상황(15-18절)으로 보아 사람들을 피하여 그 시간에 온 것으로 보여진다(Tenney, Morris, Barrett, Lenski, Reynolds).
7,8절에서 예수는 수종들 제자들도 없고 두레박도 없었기에(11절)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시는데, 이 요청은 육신의 갈증 해결과 여인의 구원을 위한 목적이 있다(Hendriksen). 한편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사마리아인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존재이다(Tasker).
9절은 유대인 랍비로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여인의 반문이다. 이 말투는 놀람과 함께 비꼬는 것이다(Tenney). 이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도덕적 반목과 상황을 이해한다면 매우 당연한 것이다(Hendriksen, Tenney, Lenski).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의 항아리나 접시를 함께 사용하면 부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Barrett, Blum).
10절의 여인의 말은 자신이 예수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Hendriksen). 이 말에 대해 예수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로 생수를 줄 수 있는 자라고 말하신다. 이는 예수가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 영적인 수준으로 말씀하셔서 여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Tenney).
'알았더면'은 여인이 예수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였음을 보여 주며(Lenski).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Hendriksen) 자유롭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나타내며 궁극적으로는 성령(요7:38)을 가리킨다(Morris). 한편 구약에서는 여호와가 생수의 근원으로 묘사된다(시36:9렙2:13;겔47:9,Morris, Barrett).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생수를 주는 하나님이심을 밝히며 목마른 자들을 물가로 초대하는(사55:1) 것이다(Morris).
11,12절의 본문은 '표적들의 책'의 특징대로 예수의 '생수 표적'을 오해하는 장면이다(김세윤). 여인은 영적인 생수를 물질적인 생수로 이해한다. 그녀의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라는 질문은 '아니다'라는 답을 예상한 질문이다(Blum, Lenski). 반면 이 질문은 한 이방인(사마리아인 입장에서) 여행자의 존재와 크심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Hendriksen). '우리 조상 야곱'이란 표현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요8:53)과 이삭과 야곱을 위대한 인물로 여겨 경외하는 관습에서 볼 때, 당신은 도무지 야곱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며(Morris), 또한 유대인인 예수에게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자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Lenski, Tenney).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은혜에 대하여
은혜에 대해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렇듯 은혜는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롬3:24엡3:2).
1. 은혜의 정의
성경에서 '은혜'는 헬라어의 카리스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자의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사랑의 대상의 가치나 공적에 상관치 않고 주어 지는 하나님의 사랑 곧 모든 피조물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로운 역사와 선하심을 의미한다. 더 좁은 의미로는 아담의 범죄와 타락 이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 부활 등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도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관심을 말한다.
2. 은혜의 특징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선물'(엡2:8)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선 영원 전부터 택정하신 자에겐 궁극적인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엡1:3-5), 하고자하는 자에겐 그의 은혜를 끝까지 거부토록 하여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하신다(롬9:17,18).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나타났다.
3. 은혜의 종류
하나님의 은혜는 그 성격상 '특별 은혜'와 '일반 은혜'로 구분할 수 있다. 특별 은혜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한 자만을 부르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선택적 은혜를 의미한다(엡2:8-10). 이 은혜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관련된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과 구원과 관련하여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미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엡2:8)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근거하여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반면에 일반 은혜란 특별 은혜와는 달리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마5:43). 이런 사실 자체는 인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주어진 생명과 삶의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은혜란 성도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주어진 것이며, 또 이미 허락된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며, 거기에 기쁨과 감격이 있는 것이다.
우물에 관한 기록과 그 형태(4:1-12)
◈ 세계배경 문화사 ◈
우물은 구덩이, 물, 물웅덩이, 샘, 수리 시설, 저수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우물의 깊이와 모양은 토양의 종류와 지하수의 수위에 따라 달랐는데, 야트막한 구덩이 모양을 한 것이 있는가 하면 꽤 깊고 커다란 웅덩이도 있었다.
근동/팔레스틴 : 오리엔트 지역에서의 우물은 적은 강수량 때문에 항상 중요시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우물들은 광야, 골짜기, 성 근처, 들, 뜰 등에 위치해 있었다. 이 우물들은 사람들과 양 떼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유목민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마을과 성읍에서는 주로 물웅덩이와 샘으로부터 물을 얻었으며, 종종 따로 우물을 파서 보충하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우물의 소유권은 자주 싸움의 원인이 되었으며, 베두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어떤 우물은 사람이 들어가 숨을 수 있을 만큼 컸다. 우물의 입구는 깨끗이 보존했고, 사람이나 동물들이 그곳에 빠지지 않도록 돌로 덮혀 있었다. 우물물은 물항아리로 날랐으며, 깊은 우물에는 밧줄에 항아리나 가죽 부대를 매달아 물을 길었다. 우물 속에는 영들이 살았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우물에는 그 종족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붙여졌다. 르호봇, 싯나, 에섹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우물은 비유적으로 처녀나 이방 여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양/희랍 : 그리스와 로마에서 우물은 생명의 원천으로 지상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수 아래에서 솟아나 네 방향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 네 방향은 각기 생명의 샘, 불사의 샘, 청춘의 샘, 교훈의 샘이라는 뜻을 가진다고 했다. 샘의 원초적 상징은 소생과 정화라는 의미의 변주를 이루기도 한다.
게르만족에서 있어 미리르 샘물은 지혜를 상징하는데, 그 물은 아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물을 마시려면 최고신 오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즉 한쪽 눈을 실명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지혜와 예언의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오르페우스 신화에는 지옥 입구에 두 개의 샘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기억의 샘물이고, 다른 하나는 망각의 우물이다. 여러 종교에서 우물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동양/중국 : 유교적 사유 체계에서의 우물은 근본을 표상한다. 한자에서 샘물을 뜻하는 '천(泉)'자는 '수(水)'자를 기본으로 하여 돌틈에서 솟아나는 물 모양을 본뜬 상형 문자이다. 이것의 중국음은 전체를 뜻하는 '전(全)'과 같다. 그래서 샘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었고, 우물(샘물)은 끊임없이 솟고 잘 쓰인다는 뜻에서 돈을 상징한다.
중국인들은 예부터 사람이 죽으면 땅에 매장하였는데 땅 밑에는 샘이 있어 저승과 통한다고 믿었기에 '구천(九泉), 황천(黃天)'이라는 말이 생겼다. 일본에서 우물은 신의 은혜로 생각되었고, '영천'으로 숭배되었다. 그래서 우물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한국 : 우리 나라에서 우물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그려진 예는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 안악 3호분의 우물가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용두레 우물이라고 하는 이 우물은 지렛대를 이용하여 물을 푸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데, 그 평면은 '정(井)'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우물은 생활의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나타난 우물들의 역할은 식수로 사용하기 위함(창24:16삼하23:15)과 짐승들을 먹이기 위해 만들어 졌다(창24:2029:3). 이런 우물은 들이나 집안, 광야, 골짜기, 성읍 등지로 인간 생활과 밀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성경에 언급된 우물을 보면, 브엘라해로이(창16:14), 브엘세바(창21:30,31)등이 있다.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의 샘인 구원의 샘물을 매일 마셔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여성에 대한 그릇된 풍조(4:1-12)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의 세속적인 여인에게 베푸신 친절과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각도에서 교훈을 준다. 동서고금의 세계가 여성들에게 행해 온 그릇되고 부당한 형태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 성적인 상품으로 봄
그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과 이혼한 전력이 있었다(18절). 그리고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도 진정한 배우자는 아니었다. 한편으로 보면 이 여인은 결국 많은 남성들로부터 이용당하고 버림을 받은 불행한 존재였던 것이다. 지금도 이처럼 남성들은 여성을 성적 욕구의 해소 대상으로, 또는 성적인 상품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2. 우월 의식으로 깔봄
주님은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리고 여인의 냉대에도 친절하게 대화를 하시고 그 여인이 진리에 눈뜨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나 당시의 남성들은 여인들의 인격과 존재를 깔보고 무시했었다. '여인에게 율법을 가르칠 바에야 율법을 태우는 것이 났다'는 속담도 있었다. 현대의 세계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인의 인격과 권리와 존재를 무시하는 악습이 여전하다. 약한 자를 짓밟는 인간의 야수적 본성에 가장 많이 피해를 당하는 부류가 바로 여성인 것이다.
3. 하수인으로 취급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7절). 예부터 남성은 주인 행세를 하고 가사의 중노동은 여성들에게 맡겨온 풍조가 있다. 여인들은 가사의 중노동에서 해방된 지가 얼마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거 구조가 도시화로 변화되었기 때문이지, 남성들의 사회가 여성을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여인들이 가사의 노동에서는 벗어났으나 남성의 하수인으로 취급되는 풍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여성에 대한 악습과 악폐가 존재하는 반문화적 사회 풍조를 없애야 하겠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세계의 벽을 허무신 그리스도(4:1-12)
이 세계를 불행케 만드는 요인 중 한 가지가 '반목과 갈등의 벽'이다.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세계와 세계, 계층과 계층, 민족과 민족 그리고 하나님과 이 세계간의 불화의 벽이 인류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벽을 허무신 유일한 화해자다.
1. 혈통과 국경의 벽을 허무심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5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9절)했었다. 이방 앗수르인의 피가 섞였으며 변질된 종교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거리낌없이 그 지역을 찾으셨다. 국경도, 인종도, 또 종교의 벽도 그리스도에게는 장애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분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경으로 세례'(고전12:13)받게 하신 분이시다.
2. 계층과 성(性)의 벽을 허무심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 좀 달라 하시니'(7절). 그녀는 비천한 계층의 여인이요 세속에 찌든 여인이었다. 주님은 그녀의 신분과 정체를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화의 문을 여신 것이다. 가장 거룩한 신분을 지니신 분이 가장 추하고 천한 자와 만남을 시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이처럼 계층의 벽, 그리고 성(性)의 벽이 무너진다.
3. 하늘 세계와 땅의 벽을 허무심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않으시니'(6절). 피곤을 느끼는 온전한 인간의 육체를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해 보자. 절대자이신 신(神)께서 불의한 이 세계에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영원한 세계와 유일한 이 세계 사이의 벽이 허물어 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우리의 화령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라고 했듯이 그리스도는 믿음 안에 있는 모든 세계의 영원한 통일자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분이시다.
영원히 만족을 줄 참된 영생수(요4:13-26)
◈ 원문강해 ◈
영생의 근원과 참된 예배
본문에서는 먹어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참된 영생수이신 구세주 예수를 밝히고, 인생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참된 정신 자세에 대해 천명하셨다.
1. 영생에 이르는 물(13-15절)
사마리아 여인과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예수는 참된 영생수의 근원을 설명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여인은 그러한 물을 구하고자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까지 참된 영생의 이치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1) 목마름을 해결 못하는 물
(ajpekrivqh jIhsou'" kai; ei\pen aujth'/, Pa'" oJ pivnwn ejk tou' u{dato" touvtou diyhvsei pavlin: 아페크리데 예수스 카이 에이펜 아우테 파스 호 피논 에크 투 휘다토스 투투 딥세세이 팔린;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3절)
피논(pivnwn먹는)은 현재 분사형으로 계속해서 물을 마시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세상의 우물물은 마시면 순간의 갈증을 해소해 주시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는 못하기에 다시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매일 야곱의 우물에 육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와야 하는 행위를 예수께서 지적하신 의미인 것이다(J.H.Mayfield).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생들이 살아가면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욕심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를 보여 준다. 인간의 욕심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진리안에 거할 때만이 그것이 사라질 것이다(H.R.Reynolds).
딥세세이(diyhvsei목마르려니와)는 미래형으로서, '그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이 마를 것이다'라는 의미를 전해 준다. 즉 야곱의 우물이 아무리 귀중하다고 해도 그런 물질적인 물을 인간의 갈증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여 하신 말씀인 것이다(A.Barnes). 이러한 말은 다음의 14절 말씀과 대조된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육적인 것을 만족시키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영적인 물을 대조하여서 설명하기 위해 말씀하셨다.
2) 영원한 생명수 샘물
(o}" d j a]n pivh/ ejk tou' u{dato" ou| ejgw; dwvsw aujtw ouj mh; diyhvsei eij" to;n aijw'na, ... aJllomevnou eij" zwh;n aijwvnion. 호스 드안 피에 에크 투 위다토스 후 에고 도소 아우토 우 매 딤세세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할로메누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내가 주는 물을 먹은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려니…샘물이 되리라, 14절)
피에(pivh먹는)는 부정과거형으로 여기서는 단회적인 먹는 행위를 의미하고 있다. 이 말은 13절의 피논(pivnon먹는)과는 달리 단 한 번에 먹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 샘물을 먹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는 말과 연결되어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먹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된다는 뜻을 전해 주고 있다(R.C.H.Lenski). 단 한번의 영생수를 주시는 분은 예수로서, 그 물을 먹는 자는 계속적인 목마름을 해결받고 영원한 생명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H.Alford). 이중 부정을 나타내는 말인 우메(ouj mh;아니하리니)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야곱의 우물과 비교하여 볼 때 조금의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H.Taylor). 그리하여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한 행복과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 샘물은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J.A.Bengel).
할로메누(aJllomevnou솟아나는)는 할로마이(a;llomevnou뿜어 나오다)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그자체가 콸콸 솟구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영생의 샘물은 끊이지 않고 거침없이 솟아나는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물의 생동력을 나타내며 또한 인간의 내부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도 나타내고 있다(L.Morris).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강은 인간의 필요를 채우고 남을 만큼 풍부하기에, 그 샘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것이다.
3) 목마름을 해결할 물을 구함
(i{na mh; diyw' mhde; dievrcwmai ejnqavde ajntlei'n. 히나 메 딥소 메데 디에르코마이 엔다데 안틀레인;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5절)
딥소(diyw'목마르지도)는 부정어 메(mh;않고)와 같이 예수께서 언급하신 목마르지 않는 영생하는 물을 가리키고 있다. 즉 이 여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특별한 물이 무엇인지는 알아들었으나 단지 자신의 편의를 추구하는 생각으로 말한 것이다. 디에르코마이(dievrcwmai오지도)는 부정어 메데(mhde;않게)와 함께 사용되어 중간태 가정법으로 부정적인 목적을 보여준다. 자신을 위해 오지도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여인은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육신적인 수고를 없애줄 물을 예수께 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여인은 자신의 집에 그런 샘을 갖기 원한다는 뜻으로 한 말로 들린다(J.A.Bengel). 이 여인은 아직까지 육신의 욕망과 일상의 필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를 나타내고 있다(H.R.Reynolds).
2. 예언자적 통찰력을 보이심(16-19절)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는 여인의 죄 문제를 지적하고 참된 영생수를 받기 전에 영혼의 무지를 깨치시려 하셨다.
1)예언자 예수를 나타내심
(Levgei aujth'/, {Upage fwvnhson ... Kalw'" ei\pa" o{ti [Andra oujk e[cw: 레게이 아우테 휘파게 포네손…칼로스 에이파스 호티 안드라 우크 에코;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6,17절)
포네손(fwvnhson불러)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심으로 이 여인에게 죄를 자각케 하기 위해 하신 예수의 의도적인 명령형 질문이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아직까지 참된 진리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에게 예언자적 통찰력을 나타내 보이시고(H.A.W.Meyer), 또 여인의 숨겨진 죄악의 씨앗을 노출시킴으로 믿음의 진리로 초청하신 것이다(H.R.Reynolds). 예수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여인에게 던짐으로 영생에 대한 갈증을 일깨우시려 그녀의 양심을 꿰뚫고 계신 것이다(W.Hendriksen). 결국 이 말은 여인의 과거 죄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고백하라는 예수의 요구인 것이다.
2) 다섯 남편과 산 여인
(pevnte ga;r a[ndra" e[sce" 펜테 가르 안드라스 에스케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18절)
안드라스(a[ndra"남편)는 아네르(a[nhvr남자, 어른)의 복수형으로 '남편들을'이란 의미이다. 어쨌든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자와 함께 산 기구한 운명을 보여 주며, 또한 성적 죄악의 모습도 나타내 준다. 이러한 여인의 생활은 그 무대가 사마리아 지방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종교 형식과 관련된 나쁜 도덕적 행실을 이 여인이 소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J.H.Mayfield). 에스케스(e[sce"있었으나)는 에코(e[cw소유하다, 간직하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살아 왔으나'의 의미이다. 즉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자들과 결혼하여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지금 같이 사는 남편과도 정당한 관계로 맺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해 주고 있다(A.Barnes).
3) 선지자로 깨달은 여인
(Kuvrie, qewrw' o{ti profhvth" ei\ suv. 퀴리에 데오로 호티 프로페테스 에이 쉬;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19절)
데오로(qewrw'내가 보니)는 현재 능동태형으로 여인이 점차 영적인 눈이 밝아져 예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여인의 가장 비밀스러운 일들을 통찰한 예수의 놀라운 지식을 보게 되자 여인은 예수를 선지자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여인의 관찰은 즉흥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여인은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함으로 자신의 죄악된 문제를 더 이상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R.C.H.Lenski).
3. 하나님께 드릴 참된 예배(20-26절)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한 여인은 이제 예배의 문제로 화제가 옮겨지고, 결국에는 참되고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가르침받게 되고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히시게 된다.
1)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
(uJmei'" proskunei'te o} oujk oi[date: hJmei'" proskunou'men o} oi[damen 휘메이스 프로스퀴네이테 호 우크 오이다네 헤메이스 프로스퀴누멘 호오다멘;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오니, 22절)
오이다테(oi[date알지)는 부정어 우크(oujk못하는)와 함께 사용되어, 완료형 부정 분사로 표현되는데, '너희는 알지 못했다'의 뜻을 나타낸다. 즉 사마리아인들은 예배할 대상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 대해서는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음을 지적하신 말씀이다(B.F.Westcott).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의 예언서와 시편을 배격하고 그들이 만든 것들에게 예배하였던 것이다(W.Hendriksen). 이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역사적인 계시를 통하여 계속 임했던 진리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던 것이다(W.F.Scott). 호 오이다멘(o} oi[damen아는것)은 사마리아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와 은혜가 임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계시의 결과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대답들은 결국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천명하신 말이다.
2)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
(ajlla; e[rcetai w{ra, kai; nu'n ejstin, o{te oiJ ajlhqinoi; proskunhtai; ... pneuvmati kai; ajlhqeiva/: 알라 에르케타이 호라 카이 뉜 에스틴 호테 호이 알레디노이 프로스퀴네타이…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23절).
알라(ajlla;그러나)는 강한 반의적 불변사로서 앞 절에서 논의되어 온 예배 장소의 문제보다 더 진정한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나, 예배의 대상이다, 예배의 형식이 온전하다고 그것이 올바른 예배가 아니라 더 중요한 내면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리고자 나타내 주는 접두어인 것이다. 프뉴마티(pneuvmati신령)는 '성령'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본 절에서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높고 고귀한 곳, 즉 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R.C.H.Lenski, L.Morris, F.L.Godet, J.H.Bernard). 또 알레데이아(ajlhqeiva진정)는 예배 행위에 있어서 거짓된 요소들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어지며,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H.A.W.Meyer). 이 말은 전치사 엔(en∼안에)이라는 말과 함께 쓰여진 여격으로서 직역하면 '영과 진리 안에'이다. 결국 '신령과 진정'은 성육신하신 예수에 의해 인간이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림으로 영적인 교류를 가지며 이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B.F.Westcott).
3)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심
(levgei aujth'/ oJ jIhsou'", jEgwv eijmi, oJ lalw'n soi. 레게이 아우테 호 예수스 예고 에이미 호 랄론 소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26절)
에고 에이미( jEgwv eijmi내가∼이다)는 예수께서 그의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말을 나타낸다(J.H.Bernard). 여기에서 에이미(v eijmi나는∼이다)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에고( jEgwv내가)라는 1인칭 대명사를 언급한 것은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심으로 신적인 계시의 방편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포하신 것이다(A.T.Robertson). 예수의 이 한 마디 말은 사마리아 여인의 심중에 지니고 있던 수많은 의문들을 해소시키기에 충분했고, 품고 있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말씀이었다(W.Hendriksen).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계속되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요한은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우물의 생수와 생명을 주는 생수 등 대조와 대구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C.K.Barrett).
1. 우물의 물과 영생하는 물(13-15절)
13,14절은 '한 번 사람이 이 물을 맛보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G.R.Beasley-Murray). 복음서 저자는 마치 자기가 넝쿨에 붙어있어야만 살 수 있듯이(요15:4), 계시를 반복적으로 마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R.Bultmann). '영생하도록'(eiv" zwhvn ai;wvnion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의 의미는 '영생을 얻는다'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영원하다'는 것이다(Schnackenburg).
또한 마신다는 표현은 피에(pi;h)로써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마시는 사람'으로 번역된 사본은 아마도 집회서 24:21의 영향을 받아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C.K.Barrett).
15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의 언급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마술적인 물'(Magic Waer)을 요구하고 있다(G.R.Beasley-Nurray). 유대교적 어법에 따르면, 예수는 예언자로 등장하며, 헬리니즘인 어법에 의하면 모든 세상 만물을 다 아는 '신적 인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C.K.Barrett).
2. 그 여인과 그녀의 남편들(16-19절)
16절에서 예수는 직접적으로 꾸짖지 아니했지만, 죄의식을 느끼도록 하고 있다(H.A.W.Mayer). 아마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먼저 구원의 은혜에 참여했을 수도 있었다(Chrysiston, Euthymius, Zigabenus).
17절에서 다섯 명의 남편은 아마도 '몸을 파는 남자'(Scortatores)들이었을 것이며(Moldonatus, Chrysostom), 이 다섯 명의 남편에 대한 설화를 해석할 때 아마도 사마리아 지역의 상징적인 역사를 암시하는 듯하며(H.A.W.Meyer). 이는 신적인 의미와 일치하거나(Hengst, Kostlin, Baumgarten, Scholten). 혹은 복음서 저자의 생각의 유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Weizsacker). 따라서 이 설화는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거나(Keim, Gesch).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B.Bauer), 신화적 기초에 입각한 역사소설(Strauss) 중 하나일 것이다.
18절의 '남편 다섯'(pente gar ajndra"펜테 가르 안드라스)에 대하여 두 가지 고찰이 가능하다.
① 사마리아 여자는 합법적으로 죽거나 이혼한 남편이 다성이나 있었다.
② 랍비는 세 번 이상 결혼하는 것을 불인정했으므로, 예수의 기준이 아닌 모세 율법을 기준으로 그 여자는 현재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된 자와 살고 있다(C.K.Barrett). 이 여자는 각자가 신을 모시는 이방의 다섯 부족으로 형성된 사마리아를 대표하며, '남편이 아닌' 한 사람은 거짓 신을 의미하거나(Simon, Magus), 진정한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으로 예배드리는 사마리아인들을 가리킬 것이다(Hoskyns, C.K.Barrett).
19절에서 이 여인은 예수를 예언자(Virgil, Hesiod, Macrobius)로 인식하고 유대 종교의 우월성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계속 경외할 그리스도로서 예언자를 인식하게 되었다(H.A.W.Meyer, 유대 종교의 우월성 주장:Ewald). 그녀는 사마리아 인들의 대표로서 국가적 장벽을 최초로 제거한 자가 되었다(Hengstenberg).
3. 진정한 예배(20-26절)
20,21절에서 예수가 언급한 내용, 즉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는 양쪽 장소가 나쁘기 때문이다(B.Crusius). 이와 같은 예수의 명령은 일반적으로 인류에 대한 명령도 아니며(Godget), 양쪽 지역의 종교적 형식을 의미한 것도 아니다(Hildgenfeld, Hen-gst). 이는 사마리아인들의 미래적 회심을 의미하며, 그리심 산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자유하게 됨을 의미하고 있다(H.A.W.Meyer).
22절을 통해서 사마리아인들의 종교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계시라는 뼈대를 상실하고, 그 중심에서 벗어난 종교는 직감적일 수는 있겠으나 지적이거나 구원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C.K.Barrett). 사마리아는 역사적으로 영지주의의 근원지이다(C.H.Dodd). 예수는 대화를 통하여 간단 명료하게 유대인의 우월성은 복음의 확장 이전에는 확실함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는 그녀의 국가적 실존의 비실재성에서 자유스럽게 해줄 의향이 없는 것 같다(Luthardt). '우리는 아는 것'(o#idamen오이다멘)에서 '우리'는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는 주장(R.Bultmann)도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이설화에서 주어지는 역사적 구도를 진지하게 취하지 못함으로 비롯된 발상이다(Raymond, E.Brown).
23절의 '참된 예비'(ajlhqinoi proskunhtai알레디노이 프로스퀴네타이)란 어떠한 예의적인 예배이든간에 종말론적인 사건이 그 예배 속에서 실현화된 예배를 뜻한다(R.Bultmann). '신령과 진정으로'(ejn pneuvmatikaikai; ajlhqiva엔 프튜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란 '영과 진리 안에서'로 옮길 수 있다. 여기에서 '영'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상한 부분으로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케 한다(J.Bernard). 24절의 '하나님은 영이시니'에서 하나님의 영성(Spirituality)은 유대교의 본질적인 교리였다(왕상8:27사31:3).
25절 '고하시리이다'(ajnaggelei아낭겔레이)라는 단어는 예수가 직접 자기의 사역을 서술하는 말로 받아들였으나, 소아시아에서는 이동사가 중요한 제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Schnackenburg, J.Bowman). 또한 신18:15-18절을 사마리아인들이 메시야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면서도, 타헤브(Taheb)를 율법의 교사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J.Schniewind, Bowman).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생수의 참된 의미(13-15절)
13,14절의 '우물물을 마시다'(pa" oJ pinwn파스 호 피논)라는 현재 분사는 '계속 마셔도 목마름'을 나타내고, '예수의 물을 마시다'(o[" dan pivh호스 단 피에)라는 부정과거 가정법은 '누구든지 단 한 번만 마신다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뜻이다(Morris, Lenski). 이 말은 성령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셔서 내적인 모든 갈증을 영원히 해갈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Tenney).
15절에서 여자는 아직도 생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Tasker, Hendriksen, Barrett), 그 물을 갈구한다는 면에서는 유대인의 선생인 니고데모보다 나은 편이다(요3:10,Lenski).
2. 또 다른 가르침(16-19절)
16절에서 예수는 여인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Blum) 갑자기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다. 이는 여인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였고(Morris, Blum, Lenski). 이로 인해 여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게 된다(Tasker).
17,18절에서 정곡을 찔린 여인은 9-15절의 수다스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Hendriksen), 법정 형식의 단 세 마디로 입을 다문다(Morris). '다섯 남편'은 일반적으로 여인의 이혼한 남편들로 해석된다. 혹자는 이를 사마리아의 이방신들과 영적 간음의 모습으로 보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마리아에 들어 온 우상은 모두 일곱이다(왕하17:30-32,Barrett, Morris). 따라서 '다섯 남편과 한 정부'는 여인의 실제 상황으로 보아야 한다.
19절에서 여인은 예수를 선지자로 부르며 자신의 죄악상을 인정한다(Lenski). 유대인은 몇 번을 결혼해도 법적인 문제가 없었지만 랍비들의 교훈을 따라 세 번 이상 재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Barrett). 그러므로 그녀는 율법의 본질(이혼 금지)과 당시의 관례법을 모두 범하고 있었다. 한편 예수를 '선지자'로 부른 것 은 그녀가 이미 예수를 메시야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오경만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 이후의 선지자는 곧 신18:18의 메시야를 의미한다(Morris).
3. 예배의 본질과 그리스도(20-26절)
20절에서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며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예배의 장소에 대해 질문한다(Tenney, Lenski, Blum). 당시에는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이냐 하는 예배의 장소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Morris). 따라서 이 질문은 더 이상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Hendriksen)와 함께 선지자의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오랜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Tasker).
21절의 '내 말을 믿으라'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어법과 같은 의미이다(Barrett). 즉 이후의 말씀이 진리임을 나타내어 믿음을 종용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는 특징적 표현으로서 하나님과 예수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Barrett). 여기서 여인은 조상들의 권위에 호소하였으나 예수는 자신의 권위로써 참다운 예배의 대상을 언급한다. '때가 이르리라'는 예수의 죽음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Blum) 완성될 보편적 예배가 드려지는 시기를 의미한다(Reynolds). 그 때는 모든 족속과 만국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습2:11말1:11,Hendriksen, Reynolds, Tasker).
22절에서 예수는 '너희'와 '우리'를 대비시키며(Morris). 혼합주의에 빠진 사마리아인의 예배보다는(Tenney) 유대인의 예배가 정통임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은 선지서나 시가서를 거부하여(Tasker)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지식이 많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Hendriksen, Morris, Lenski).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시147:19,20사2:3암3:2미4:1,2롬9:4,5)는 것은 사마리아인이 아니고 유대인에 속한 예수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서(Blum, Lenski, Morris),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때가 이르면 구원이 유다에서 만국으로 퍼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Barrett).
23,24절의 참예배는 예수를 통해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다(Blum). '신령과 진리로'(ejn pvneuvmati kaiv ajlhqeiav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는 '영과 진리로' 안에서의 뜻이다, 여기서 '영'은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인간의 영이며(Morris, Lenski, Reynolds), '진리'는 예수를 통하여 얻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Hendriksen, Lenski). 영과 진리는 전치사 하나로 연결되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영과 진리가 예배의 필수 요소이며(Lenski), 또한 예배자의 영과 하나님이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이 참예배라는 것을 나타낸다(Tenney). 한편 '때가 오나니 곧 이때'는 예수의 구속 사역을 통해 완성될 참예배의 시가 아직은 이르지 않았지만, 완성자이신 예수가 바로 이 자리에 있고, 또한 완성된 상태가 현재 예수의 마음속에서 현시되고 있다는 의미이다(Hendriksen, Lenski). 그리고 '아버지가 참예배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열망(Hendriksen)과 함께 실제로 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Lenski).
24절에서 참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인데, 이는 하나님이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심을 나타낸다(Tenney, Morris). 25,26절에서 여인은 신18:15을 기억하며 '메시야가 와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한다. 사마리아인들도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지식이 빈약하여(Morris) 다윗의 후손에게서 오실 것을 몰랐다(Blum). 여인은 메시야를 고유 명사처럼(Hendriksen) '오실 분'(Taheb 타헤브, 회복자, 다시 오실 자)으로 부른다. 이는 사마리아인의 메시야 명칭으로서 유대의 메시야 관과는 달리 종교적이며 예언적인 경향이 짙다(Lenski, Tenney).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참된 예배
1. 예배의 개념
예배란 무엇인가? 이는 기독교에서 주일의 공식 모임으로 행하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공적 예배'를 뜻한다. 구약에서는 아바트(rb[;)란 말로 표현되었는데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뜻이다. 또 다른 말 사마([s'v;)는 '굴복하다, 순종하다, 숭배하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proskunevw)로 표현되었는데 그 말은 '절하다, 경배할, 엎드리다'란 뜻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를 가리켜 사용되었다(마4:11요4:22-24). 따라서 예배라는 개념은 사람이 존경,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절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그의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 예배하고 할 수 있다.
2. 예배의 중요성
예배가 중요한 첫째 이유는 성경이 그것에 대해 자주 말하기 때문이다. 제1계명(출20:2-60은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강조하며 그것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축34:14).
신약에서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11장까지 그리스도인과 모든 유익을 정의한 후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받으실 만한' 예배라고 강조한다. 예배는 생활에 추가되는 것이 아닌 생활의 핵이다. 받으실 만하게 예배하는자는 영생에 들어간다. 즉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한다(시24:3-6).
3. 예배의 대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성경은 말한다(눅4:8시45:11출20:3).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며(요4:23),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우리의 주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예배한다(요9:38).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섭리자시고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 주셨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성도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대속적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중보자로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현재에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예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서 우주를 다스리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남편의 개념(4:13-26)
◈ 세계배경 문화사 ◈
부부 관계에 있는 한 쌍의 남녀 중 남자쪽을 가리켜 남편이라고 한다. 아내가 단지 그의 배우자를 가리키는 친족 호칭이라면, 부계 친족제도에서 남편은 '아내의 배우자'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대표자를 의미하는 개념도 가지고 있다.
근동/유대 :이스라엘 가정에서 남편이요, 아버지의 존재는 사회적 조직체 이상으로 간주되던 가정에서 으뜸가는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가정은 종교적 특성과 중요성을 지녔기 때문에, 가정과 부족의 신들에 대한 제의가 가정을 통해 행해지고 전승되었다. 이때 가장인 남편은 그 가정 제사의 제사장이었으며, 이에 따라 그 가족의 종교 생활과 가족 제단을 지켜가는 일에 책임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남편은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아내와 자식들에 대해서 처음부터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편의 영영 내에서 그의 지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하나 도는 둘 이상의 아내는 남편을 주인으로 섬겼다. 남편은 우두머리로 남편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는 죽음으로 다스려질 죄악이었다. 그는 하찮은 이유만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이혼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즉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남편은 가정의 구성원들을 가족과 부족, 민족의 전통에 따라 가르치고, 종교적인 길을 따라 그들을 훈련시키는 사람이었다.
서양/그리스 :플라톤은 '노예들이 주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과 동등한' 나라는 '질서가 문란한'것으로 간주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당신의 아내와 하는 말보다 더 많이 주고 받을 사람이 과연 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리스에서도 아내의 처지는 낮고 남편의 지위는 높고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에서 남편들은 직접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제 활동으로부터 벗어나 집회, 법정, 군대생활, 운동장, 시장 등에서 정치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남편은 어린아이의 양육 여부를 결정하였다. 남편이 거부한 아이는 집 밖에 방치해 두며, 노예가 데려다 기르거나 아니면 죽게 되었다. 당시에 남자들의 지위를 반영하듯한 극작가는 "극빈한 가정에서도 남자 아이는 키우고 부자집에서도 여자 아이는 버린다"고 기록하였다.
동양/중국 : 동양의 부계제 친족 제도 속에서 가족의 중심이 남편에게 있었기 때문에 부부 관계는 결코 대등한 관계로 인식되지 않았다. 혼인에 있어서도 아내는 남편의 가문으로 옮겨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가정 윤리의 여러 측면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유교의 윤리에서 아내는 두 남편을 섬겨서는 안된다고 하여 비록 남편과 사별하더라도 다시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니라, 친정의 가문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곧 남편의 사망이 혼인 관계의 종식을 가져오는 사유가 되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평등한 예속적인 관계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것이다. 이 규범은 여자의 예속적 지위와 남편의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남편이 아내의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또한 부부간의 사랑을 평가하는 기준도 남편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다. 이는 부계로 이어지는 친족 제도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은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할 것이며(창24:67엡5:25,28), 자상한 남편은 아들보다 아내를 먼저 생각할 것이며,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하셨다(삼상1:4-8). 또한 성경은 남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경계하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고(골3:19), 아내를 버리지 말 것이며(마19:9), 한 아내만을 취할 것을 인간들에게 명령하셨다. 이밖에 남편은 여호와와 그의 백성 관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비유되고 있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사이비 신앙의 특징(4:13-26)
우리 기독교 주변에는 이단과 사이버 집단들이 기생하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들만이 참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 속에서는 반성경적이며 비성경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자기 본위적인 성경관을 지님
그 여인은 예배 장소, 즉 성전의 중심이 예루살렘이 아닌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창49:10)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될 것이 기록되 있다고 증언한다(눅24:47). 이단 신앙의 공통점은 이처럼 성경 전체의 내용을 무시하고 자기들 본위로 한 내용을 강조하는 특성이 있다.
2. 성경 진리에 대해 무지함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22절) 라고 주님은 지적하셨다. 즉 성경의 예언과 약속을 알지 못하고 '조상들'(20절)의 구전과 신화를 근거로 신앙 생활하는 사마리아 종교인들의 폐단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처럼 이단이나 사이비인들은 성령 안에서 성경의 참진리를 알지 못한다.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1:10)고 한 것처럼 인간의 본능적인 지혜와 감성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다.
3. 진정한 예배 요소가 결핍됨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24절)고 하셨다. 계시된 성령의 빛 가운데 깨달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참기독교 신앙이다. 그와같은 예배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인식과 감사의 믿음과 충성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단 사이비인들은 인간적인 예배를 드린다. 참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는 요소가 없이 맹목적인 두려움이나, 자기 최면을 위해, 혹은 물질의 축복이나 육신의 이익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영생으로 인도하시려는 노력(4:13-26)
주님은 본문에서 자신을 영생의 샘물이라고 하셨다. 세속에 찌든 수가 성 여인에게 베푸신 주님의 친절은 어찌하든지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하시려는 그리스도의 구령의 의지를 보여 준다.
1. 인간의 갈증을 지적하심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3,14절). 주님은 먼저 인간의 영적인 갈증을 아시고 지적하신다. 그 여인은 인간의 사랑에 대한 갈증, 종교적인 진리에 대한 갈증을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와 같은 갈증은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다. 다만 그 갈증을 다른 지식이나 일이나 향락으로 해소하고자 애쓸 뿐이다.
2.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심
주님은 영생의 샘물을 원하는 여인에게 동문서답식으로 그 여인의 문란한 이성 관계를 지적하셨다. 영생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인간의 속되고 위기에 처한 실상을 주님은 드러내 보여 주신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으로 자신의 실상을 보게 만드시는 것이다. 영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죄던 자신의 실상을 먼저 깨달아야만 영생의 가치와 그 의미 그리고 그것을 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 무지와 오류를 바로잡으심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2절), 이 말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사마리아 이단 종교의 오류와 무지에 빠져 있는 수가 성 여인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영생으로 인도하려면 진리를 알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철학과 소신이 어떤 것이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상반된다면 분토처럼 버려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 가르침과 그 언약에 순종해야 영생으로 가는 길로 갈 수 있다.
영혼 구원의 긴급성을 선포하심(요4:27-38)
◈ 원문강해 ◈
돌아온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전한 여인
음식을 구하러 동네에 갔던 제자들은 돌아와 이방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를 이상히 생각하였고, 여인은 메시야 예수를 깨달았을 때에 즉시 동네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이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영혼 구원을 위해 오신 자신의 사역을 알리시고 전도의 시급성을 선포하셨다.
1. 그리스도를 증거함(27-30절)
1) 돌아온 제자들
( Kai; ejpi; touvtw/ h\lqan oiJ maqhtai; aujtou', kai; ejqauvmazon ... met j aujth'"_ 카이 에피 투토 엘단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카이 에다우마존…메트아우테스;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묻는 이가 없더라, 27절)
에다우마존(ejqauvmazon이상히 여겼으나)은 다우마조(qaumavzw놀라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께서 어떤 낯선 이방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것을 동네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목격하고 계속적으로 놀라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당시 유대인의 관행에는 길거리에서 여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금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R.C.H.Lenski). 그리하여 제자들은 유대인의 전통적 관습에 정면 도전하는 스승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방 여인에게 신령한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J.A.Bengel).
에이펜(ei\pen묻는)은 부정과거형으로 형용사 우데이스(aujdei"∼이가 없더라)와 함께, 제자들이 예수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감히 물어보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은 그동안 경험했던 스승에 대한 기억들과 존경심 그리고 놀라움 등이 교차되면서 감히 나서서 스승의 행동에 반대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A.T.Robertson). 비록 랍비의 율법에 길거리에서는 자기 아내와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음을 알고 있었어도 말이다.
2) 동네 사람들에게 전파함
(ajfh'ken ou\n th;n uJdrivan ... Deu'te i[dete a[nqrwpon o}" ei\pevn moi pavnta o{sa ejpoivhsa: mhvti ou|tov" ejstin oJ Cristov"_ 아페켄 운 텐 휘드리안…듀테 이테테 안드로폰 호스 에이펜 모이 판타 호사 에포이에사, 메티 후토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나 하니, 28,29절)
아페켄(ajfh'ken버려두고)은 아피에미(ajfiemi버려두다)의 부정과거형으로 메시야 그리스도를 발견한 여인이 흥분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황급히 물동이조차 버리고 떠났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A.T.Robertson). 이러한 표현은 예수께서 전한 영생의 도리가 여인의 마음에 크게 자리 잡았고, 그 순간 다른 모든 세상적인 것을 다 잊어버리게 되었음을 잘 묘사하고 있다(R.C.H.Lenski). 메티후토스(mhvti ou|tov"이는…아니냐)는 의문 접두어 메티(mhvti아니냐)와 지시 형용사 후토스…이는)의 연합으로 자기가 만난 메시야에 대해 실제적인 응답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W.F.Scott). 그리하여 '내가 만난 이분이 혹시 메시야라고 생각되지 않나요?'라는 뜻을 전해 주고 있다. 이 여인은 이제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고 동네 사람들 스스로 예수가 정말 메시야라고 고백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J.A.Bengel).
3) 예수를 보러 나옴
(ejxh'lqon ejk th'" povlew" kai; h[rconto pro;" aujtovn. 엑셀돈 에크 테스 플레오스 카이 에르콘토 프로스 아우톤;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0절).
엑셀돈(ejxh'lqon나와)은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과거형으로 여인의 외침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즉시 몰려나오는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다. 또 에르콘토(h]rconto오더라)는 미완료 과거로서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 계속적으로 나오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여인의 외침을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구세주를 만나보기 위해 나오는 진행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R.C.H.Lenski). 이 두 동사는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여인의 말을 확인키 위해 예수를 보려 나오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L.Morris).
2. 참된 영적 양식(31-35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신의 만족을 채우는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영적 양식인 영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1) 육적인 양식을 전하는 제자들
( jEn tw'/ metaxu; hjrwvtwn aujto;n oiJ maqhtai; levgonte", JRabbiv, favge. 엔 토 메탁쉬 에로톤 아우톤 호이 마데타이 레곤테스 랍비 파게;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디여 잡수소서, 31절)
메탁쉬(metacu;사이)는 형용사로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인데 이는 예수와 대화하던 여인이 동네로 전도하러 떠나고 이에 대해 전해들은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도착하기 까지의 시간적인 간격을 의미하고 있다(W.Hendriksen).
메시야에 대해 전해들은 사마리아 수가 성 사람들이 흥분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들한을 건너오고 있는 동안의 그 '사이'인 것이다(H.R.Reynolds). 에로톤(hjpwvtwn청하여)은 에로타오(ejrwtavw질문하다, 간청하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본래의 의미로는 '질문하다'인데 본문에서는 계속적으로 간청하고 권하는 행위를 의미하고 있다( C.K.Barrett). 이제 제자들은 스승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놀라움을 진정시키고 동네에서 구해 온 육신의 양식을 계속 권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께서 먹을 양식
(oJ de; ei\pen aujtoi'", jEgw; brw'sin e[cw fagei'n h}n uJmei'" oujk oi[date. 호 데 에이펜 아우토이스 에고 브로신 에코 파게인 헨 휘메이스 우크 오이다테;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2절)
명사형인 브로신(brw'sin양식)은 비브로스코(bibrwvskw먹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원래는 먹는 동작을 의미하였다. 또한 이것은 브로마(brw'ma음식)와도 서로 대체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본문에서 영적인 욕망과 만족을 주는 것으로 나타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의식은 제자들의 생각과 구별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H.R.Reynolds). 본절의 이 말씀은 34절로 연결되어 그 의미가 좀더 심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결국 예수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 양식에 대해 설명해 나가신다.
3) 참된 양식을 추수할 때가 됨
(levgei aujtoi'" oJ jIhsou'" ... kai; teleiwvsw ... o{ti leukaiv eijsin pro;" qerismovn. h[dh 레게이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카이 텔레이오소…호티 류카이 에이신 프로스 데리스몬 에데; 예수께서 이르시되…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4,35절)
텔레이오소(teleiwvsw온전히, 이루는)는 부정과거 가정법형으로, 예수께서 달성한 목적을 성취해야 할 것을 언급하신 말이다. 이 말씀의 성취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심을 보여 준다(A.T.Robertson). 에파라테(ejpavrate들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눈을 들어 세심히 관찰하여 보라는 의미로서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영적인 눈을 떠서 복음을 듣기 위해 몰려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바라보라는 뜻을 전달하신 것이다(A.Barnes). 실제적으로 곡식을 추수하기까지는 아직 넉 달의 기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영혼의 수확을 거두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류카이(leukaiv희어져)는 형용사형으로 회색의 머리털처럼 잘 익은 수확기의 곡식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수확기의 곡식은 희어지는 법이 없다. 그러기에 이 표현은 '추수할 시기가 왔음을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L.Morris).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실제로 흰 옷 입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나타내신 표현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H.V.Morton). 사마리아인들이 흰 옷을 입고 예수께 나오는 모습은 마치 추수할 때가 된 이삭이 희어져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3.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자(36-38절)
1) 이미 삯이 지불된 하나님의 일
(oJ qerivzwn misqo;n lambavnei kai; sunavgei karpo;n eij" zwh;n aijwvnion, i{na oJ speivrwn oJmou' caivrh/ kai; oJ qerivzwn. 호 데리존 미스돈 람바네이 카이 쉬나게이 카르폰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히나 호 스페이론 호무 카이레 카이 호 데리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6절)
데리존(qerivzwn거두는)은 현재 분사형으로 거두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복음을 증거한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다(A.Barnes).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자들에게 주어질 확실한 상급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현세에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이 주어지고 내세에서는 큰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스페이론(speivrwn뿌리는)은 '뿌리고 있는'의 뜻을 전해 주는 현재 분사형이다. 그런데 본문의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에 대해 상이한 견해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뿌리는 자는 구약의 선지자이고 거두는 자는 영생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이다(B.F.Westcott)라는 주장과 또 다른 하나는 뿌리는 자는 구약이란 밭에 영생의 진리를 뿌린 예수이고 거두는 자는 예수의 제자들(A.Plummer)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동일 인물인 예수이다(C.K.Barrett)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들 견해 중에서 마13장에비추어 생각해 볼 때 뿌리는 자는 예수로, 거두는 자는 제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2) 추수의 법칙
(ejn ga;r touvtw/ oJ lovgo" ejsti;n oJ ajlhqino;" o{ti [Allo" ejsti;n oJ speivrwn kai; a[llo" oJ qerivzwn. 엔 가르 투토 호 로고스 에스틴 알레디노스 호티 알로스 에스틴 호 스페이론 카이 알로스 호 데리존; 그런 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7절)
스페이론(speivrwn심고)은 스페이로(speivrw씨를 뿌리다)의 현재분사이고, 데리존(qerivzwn거둔다)은 데리조(qerivzw수확하다)의 현재 분사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 이 두 동사는, 사역에는 구분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일의 결과는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J.H.Mayfield). 결국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알려진 속담을 인용하여 본절에서 씨를 뿌리는 자와 수확하는 자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예수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고 제자들이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3) 다른 사람의 노력에 참예함
(ejgw; ajpevsteila uJma'" qerivzein o} oujc uJmei'" kekopiavkate: a[lloi kekopiavkasin, kai; uJmei'" eij" to;n kovpon aujtw'n eijselhluvqate. 에고 아페스테일라 휘마스 테리제인 호 우크 휘메이스 케코피아카데 알로이 케코피아카신 카이 휘메이스 에이스 톤 코폰 아우톤 에이셀렐뤼다테;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참예하였느니라, 38절)
아페스테일라(ajpevsteila보내었노니)는 부정과거형으로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낸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C.K.Barrett). 제자들의 이파송의 명령은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추수의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R.C.H.Lenski). 코폰(kovpon노력한 것)은 코프토(kovptw자르다, 끊다, 슬퍼하다)에서 파생된 남성 명사로 '수고를'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수고'의 주체인 아우톤(aujtw'n그들의)에 대해서 ① 예수 자신이다(J.Weiss). ② 예수와 세례 요한이다(F.L.Godet). ③ 예수와 구약의 선지자들을 지칭한다(Keil). ④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일꾼을 말한다(B.F.Westcott). ⑤ 세례 요한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A.T.Robinson). ⑥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을 말한다(J.H.Bernard) 등의 견해가 있다. 그런데 가장 타당성 있는 것은, 사도들의 노력 이전의 하나님의 종들이 수고한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 27-30절에서는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가 한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나, 놀람을 나타내지도 않고 침묵을 지켰음과 그 여인이 예수의 통찰력을 예언자의 상징물로 인식했음을 제시하고 있다 (W.F.Howard, A.J.Gossip). 31-38절은 그 여인이 예수를 증거하러 동네에 들어간 사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상한 언급을 한 내용으로서 이는 요한의 반복하는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W.F.Howard).
1.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27-30절)
27절에서 '무엇을 구하시나이까'라는 질문이 여인에게 주어진 질문일까?(Bernard) 에 대하여 어떤 고대 증거자들은 '과연 그녀가 뭘 원했을까?'라는 문형으로 바꾸길 원했으며(Tatian, Encratite), 이는 그 여인과의 대화 속에 예수가 주도권을 상실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Tatian). 또한 제자들이 놀란 사실은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R.Bultmann).
28절의 여인은 '물동이'(uJdriva휘드리아)를 버려두고 간 이유는 아마도 예수가 물을 보시도록 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Daube). 이에 반하여 혹자는 이 여인이 일어난 일을 증거하려는데에 너무 화급했기 때문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다는 주장과, 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둠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의 삶에 완전한 절연을 하고자 했다는 주장도 있다(C.K.Barrett).
29,39절에서 메티(mhvti)를 사용함으로써 '이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렇지! 라는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다(Lucke).
2.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31-38절)
31절은 여인이 떠나는 장면과 수가 사람들이 도착하는 장면 사이에 제자들과 예수가 등장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둘의 규칙'-짧은 대화 속에서 한 장면에 두 명의 배우 이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B.T.D.Smith).
32절의 '양식'(brw'sin브로신)이라는 단어와 34절의 브로마(bpw'ma)라는 단어 사이의 차이점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Raymond,E.Brown), 혹자는 후자가 특별한 영양가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Spiq).
33,34절에서 '내 양식은∼행하며'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의 양식이라는 것이며, 이는 가정법과 함께 쓰였고, 목적적 의미를 제외한 히나(i]na) 용법은 현대 그리스어에도 일반화되었는데, 이것이 요한복음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C.K.Barrett).
35절의 에티(e]ti)는 '좀더(more)'라는 표현으로서 호티(o]ti) 다음에 삽입되어야 하는데 기록하기를 생략하였다(Raymond, E.Brown). 또한 곧 추수가 시작될 것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고자 왔으며, 이 사역은 예상하는 시간보다 더 진척되어 있다(Loisy).
36절의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에 대하여 어떤 비평가는 이르기를, '아버지는 뿌리는 자이고, 예수는 거두는 자'라고 했으나(thusing),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뿌리는 자인 예수와 거두인 자는 함께 기뻐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으며(Meyer), '뿌리는 자'를 예언자(선지자)로 지명하는 자도 있다(Chrysostom).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순한 기쁨이 아닌 동시에 두 사람이 누리는 기쁨을 강조해야 한다(B.Crusius, Luthardt). 본 절의 원리는 일반 자연질서와 위배되는 것처럼 보여 진다. 그러나 일찍 이런 메시야적 날이 예언되었는데(암9:13), 이는 모두가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 볼 수 있다(J.Bernard).
37절의 격언은 유다적이기보다는 매우 헬라적이며, 신20:628:30;미6:15욥15:28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병행 구절임이 주장되어 왔다(C.K.Barrett). 특히 헬라적 자료들에는 더 좋은 병행 구절이 발견된다(Aristophanes). 따라서 필로(Philo)는 아마 유다적 자료보다는 헬라적 자료를 더 많이 의존했다고 주장하였다.
38절에서 '내가…보내었노니'(ejgwv ajpevsteila에고 아페스테일라)에서 에고(ejgwv)를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Raymond, E.Brown), '보내었다'는 동사의 과거형은 뿌리는 자가 예언자가 아니었음을 잘 묘사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De Wette, Thluck).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여인의 증거(27-30절)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상거래는 하고 있었다(Hendriksen). 당시의 랍비들은 다른 사람의 아내는 물론 자신의 아내와도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Morris, Barrett, Lenski).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가 이방 여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가 특별한 이유 때문에 랍비들의 관습을 의식적으로 지키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았고(Morris), 또 예수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 때문에 감히 묻는 이가 없었다(Lenski, Hendriksen).
28,29절에서 여인이 물동이를 두고 간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 번째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빨리 예수를 전해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버려두고 갔다는 견해이고(Blum Lenski, Morris, Tenney), 두 번째는 예수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두고 갔다는 견해이다(Hendriksen, Barrett).
30절의 '오더라'(h[rconto에르콘토)는 미완료 시상으로 동민들이 계속하여 몰려오는 것을 매우 생동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다(Morris).
2. 예수의 양식(31-34절)
31,32절에서 제자들의 식사 권유에 대해 예수는 '나와 너희'를 대조적으로 구별하여 강조하며 다른 양식이 있다며 거절한다. '양식'(brw'si"브로시스)은 먹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34절의 '양식'(brw'mav브로마, 음식)과 동의어로 쓰였다(Morris, Hendriksen).
33절에서 제자들의 질문도 메(mhv)를 사용함으로 부정적 답을 요구한다(Morris, Lenski). 제자들은 표적들의 책의 형식대로 예수의 양식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이해한다(Morris). 이 오해는 곧이어 예수의 설명을 불러오는 동기가 되고 있다.
34절에서 말하는 예수의 양식은 구체적으로 파송자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자신의 파송자'로 언급하여 자신을 '보냄받은 자'로 묘사하는데, 이는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이며(Barrett). 또한 예수의 사명과 헌신을 보여 준다(Morris). 이는 예수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보여 주며(Morris)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는 것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Tenney). 그 일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다 이루어진다(요19:30,Hendriksen, Morris). 한편 다른 양식을 '여호와의 말씀'(신8:3)으로 볼 수도 있는데(Blum), 그렇다면 본 절은 예수의 광야 시험에서의 굶주림을 거부하신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Morris).
3. 영적 추수(35-38절)
35절에서 파종은 11월이고 추수는 이듬해 4월이다. 그리고 현재가 12월경이므로 넉 달이 지나야 추수기라는 말은 사실이다 (Hendriksen, Reynolds, Lenski). 그러나 해당 구절이 히브리적 병렬 운율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Barrett), 이는 암9:13에 예언된 '그 날'이 이르렀음을 나타낸다(Tasker, Hendriksen), 36절에서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았음은 추수가 이미 완료되었거나 매우 급박함을 의미한다(Morris, Barrett). 왜냐하면 파종과 함께 곧바로 추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암9:13,Morris, Hendriksen). '영생에 이르는 열매'는 성도들을 의미하는데 본 절에서는 개종한 사마리아인들을 가리킨다(Barrett). 파종자와 추수자는 협력자이기 때문에 함께 기뻐한다. 또한 파종하고 곧바로 추수하기 때문에 동시에 기뻐한다. 37,38절에서 영적 파종과 영적 추수는 어느 한 집단이나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Tenney).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과 예수의 씨뿌리는 노력의 대가를 그들 대신 다른 사람들이 수확한다는 것이다(고전3:6,Barrett, Blum, Tasker, Morris). 따라서 이제 예수가 뿌렸으니 제자들이 수확해야 하는 것이다(38절 Hendriksen, Lenski).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제자도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그로 하여금 죽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라고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ffer, 1906-1945)는 말했다. 이 진술에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본질이 내포되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에로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헌신된 '제자'에로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1. 제자도의 개념
제자란 말의 헬라어는 '마데테스(mathetes)'인데 '배우는자'라는 뜻이다, 배우는 사람으로서 한 선생의 제자 또는 철학이나 종교의 어떤 특정한 견해의 추종자를 가리킨다. 신약 시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로 생각했다(요9:28). 세례 요한과 같이 바리새인들도 제자가 있었다(막2:18). 예수님께도 따르는 사람들을 제자로 불리워졌다(눅6:17막6:45).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인으로서 말씀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치도록 파송되었다(막3:14,15눅10:1이하).
2. 제자도의 전제
열두 명의 제자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을 성숙케 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자들도 따른 본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
제자는 첫째, 찾아야 한다. 즉 순종과 그에 따른 헌신자들을 찾는 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는 말에서 보듯이 광의적 의미에서 제자이고 협의적 의미에선 헌신된 자를 찾는 것이다. 둘째, 제자는 숙달되도록 배워야 한다.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 효과 있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헌신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단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들이여야 제자가 될 수 있다.
3. 제자됨의 결과
제자 된 자가 맞게 될 결과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긍정적인 면은 제자는 선생과 같아야 하며(눅6:40마10:24).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해야 하며(마28:19,20), 전파해야 한다(마10:27), 부정적인 면은 제자된 자들은 핍박을 받게 된다(마10:24). 또한 제자들은 비방받기를 각오해야 한다(요13:16), 세상은 주님께 악하게 하듯 우리에게도 악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자는 미움을 받는다(요15:18-21). 제자됨의 목표는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물을 담아 나르던 용기 - 물동이(4:27-38)
◈ 세계배경 문화사 ◈
원시 시대부터 인간은 사냥한 먹이를 저장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나 농사 기술을 습득하고부터는 저장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정착 생활을 앞당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장기술 가운데 토기의 발명과 사용은 동서를 막론하고 모양에서 차이를 나타낼 뿐 폭넓게 사용되었다.
근동/팔레스틴 : 히브리어로 캇(kad)이라 불린 물동이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도 물을 운반하거나 담아두기 위한 필수품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물동이의 재료로는 진흙을 높은 열로 구워 만든 것이 일반적인 생산 방법이었다. 당대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붉은 진흙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회전판에 얹어 만드는 방법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틀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진흙을 부어 완성하거나 손으로 직접 빚기도 하였다.
물동이는 용도에 따라 물을 긷거나 운반할 때 쓰이던 물항아리가 있고, 가정에서 대형 항아리, 물을 마시기 편리하게 만든 물주전자로 나눌 수 있다. 크기와 모양은 용도에 따라 다양한 것들이 있다.
물항아리는 보통 길이 33cm, 지름 19cm가량 되며, 물이 출렁거리릴 때 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둥이 가장자리를 잘 다음은 것이 특징이다. 주둥이는 사람의 손이 들어갈 정도로 넓고 뚜껑을 닫을 만큼 적당한 크기로 되어 있다. 손잡이는 하나인 경우가 일반적이고 둥글고 넓적한 몸체에 원통형의 주둥이 모양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저장용 대형 항아리는 밑바닥이 둥그스름하고 방안에서 사용할 때 화덕 위에 올려 놓는다. 손잡이는 2내지는 4개인 것이 많고 물항아리에 비해 3,4배 정도의 크기를 갖추고 있다.
서양/로마 :로마는 문화적으로 원래부터 그리스나 근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여러 벽화나 유물들을 보면 근동의 물동이와 거의 유사한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로마 시대의 유물 가운데 흙으로 빚은 물동이가 많은데, 토기는 고열로 처리해서 잘 깨지지 않고 오랫동안 모양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로마 시대 토기 가운데에는 고열로 구워낸 후 새와 기묘한 무늬를 새겨 넣고 그 위에 검은색 유약을 발라 생활 용품으로서가 아닌 예술품의 경지에 이른것도 있다.
동양/한국 : 우리 나라에서도 토기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된 가장 일반적인 물동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는 철기 시대에 접어든 B.C2,1세기까지도 값싼 원료와 단순한 기술로 이용할 수 있었던 서민용 물동이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도 도기(陶器) 기술의 발달로 점차 세련된 모양으로 생산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토기로는 신석기 시대에 이른 민무늬, 덧무늬, 빗살무늬 모양의 토기가 생산되었다. 밑이 뾰족한 역삼각형으로 땅에 묻어 놓고 사용한 것 같은데, 물을 담거나 음식을 저장하는데 사용한 저장용 항아리에 속한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민무늬 토기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바닥이 납작한 점으로 미루어 들고 다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손잡이가 없는 점이 의문이다.
고조선이 망하고 고구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 철기에도 민무늬 토기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철기 시대에는 무기와 장신구뿐만 아니라 농기구까지도 철제가 사용된 시기였으나 물동이는 여전히 토기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항아리의 종류를 보면 물 항아리(창24:20), 빈 항아리(삿7:16), 질항아리(애4:2), 돌항아리(요2:6,7), 금항아리(히9:4)등이 나타나 있다. 이들 항아리의 용도는 대부분 물과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또한 횃불을 숨기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삿7:16). 성도들은 예수님이 토기를 빗는 토기장이요, 우리는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질그릇임을 깨달아야 한다(렘18:6).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복음 전파의 걸림돌(4:27-38)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의 가르침으로 변화받고 그리스도를 동네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 배후에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는 교회의 단점도 발견할 수 있다. 함께 생각해 보자.
1. 차별의식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은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실을 '이상히'(27절) 여겼다. 그들은 인종, 종교, 문화 그리고 성(性)과 계층의 차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느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인의 여인과 대화하는 것은 수치로 여겼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인간 차별의식을 지닌 성도, 오만스럽고 까다로운 차별의식을 지닌 교회는 복음전파의 큰 걸림돌이 됨을 알자.
2. 물량적 성장주의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을 거부하시는 주님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고 누가 미리 식사 대접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주께서 진리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삶의 가장 큰 즐거움과 만족으로 여기시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오늘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물질 중심, 물량적 성장주의로만 이끄는 사역자들이 많다. 이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르고 육신의 떡만 주님께 드리려고 했던 제자들과 같은 모습들이다.
3. 회의적 비관주의
'너희가 넉 다리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 하느냐'(35절)고 주님은 책망하신다. 이 말씀은 속담을 인용한 것으로 어떤 일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일을 미루는 폐단을 지적할 때 쓰였다.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을 이러 저러한 이유로 미루는 일이 많다. 전도의 시기는 지나갔다느니, 전도해 봐야 소용 없다느니 하면서 비관적이며 회의적인 자세를 지닌 성도들이 있다. 뜨거운 정열과 믿음과 희망으로 전도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야 하겠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복음 전파의 도구(4:27-38)
복음의 불모지와 같던 사마리아 지역에 드디어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 복음 전파의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천한 수가 성 여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복음 전파의 참된 도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1. 변화받은 인격임
복음 전파에는 물질도 필요하고 언변도 필요하며 해박한 지식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도구와 수단은 변화된 인격'임을 알자. 주님의 깨우침으로 거듭나고 변화된 사마리아 여인의 성화된 인격에서 나온 증언이 사마리아인들로 하여금 주님께 나오도록 한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 진리와 교훈으로 성도들의 인격 교육, 영성 교육에 힘써야 한다. 그것이 교회 성장의 영원한 자산이 됨을 알자.
2. 사람의 단점
여인은 체면을 불구하고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29절)고 외쳤다. 여섯 명의 남정네와 문란한 생활을 한 부끄러운 단점을 알고 계신 주님의 신적 권능이 전도의 큰 도구가 된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약점과 단점도 이처럼 주안에서는 유용한 전도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알자. 사도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고후12:9)을 더 나타내려는 이유라고 했다. 주님의 권능, 주님의 진리,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유용하다면 우리의 부끄러운 옛 죄도, 또 약점도 거리낄 없이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
3. 선진 신앙인들의 희생과 충성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리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38절). 선진 신앙인들의 거룩하고 희생적인 삶의 씨앗이 기독교 복음 전파의 가장 훌륭한 권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좋은 것을 심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에 머무심(요4:39-45)
◈ 원문강해 ◈
사마리아 지역 전도 후 갈릴리로 가심
참된 진리의 복음을 깨달은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를 청하여 직접 말씀을 듣고 더욱 만이 믿게 되었다. 예수는 이틀 후에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셨다.
1.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39,40절)
1)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의 결과
( jEk de; th'" povlew" ejkeivnh" polloi; ejpivsteusan eij" aujto;n ... marturouvsh" o{ti Ei\pevn moi pavnta a} ejpoivhsa. 에크 데 테스 폴레오스 에케이네스 폴로이 에피스튜산 에이스 아우톤…말튀루세스 호티 에이펜 모이 판타 하 에포이에사;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예수를 믿은지라, 39절)
에피스튜산(ejpivsteusan믿는지라)은 부정과거로 '그들이 믿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야곱의 우물에서 메시야를 직접 만난 여인의 증언을 들은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믿음의 싹이 트기 시작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 증거한 여인의 씨뿌림이 있었던 것이다.(J.H.Mayfidld). 말튀루세스(marturouvsh"증거하므로)는 말튀레오(marturevw증명하다)의 현재 분사형으로 '여인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증거하자'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여인의 확신에 찬 증거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여인의 결정적인 증거로 인해 이제 수가 성 동네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R.C.H.Lenski).
2) 사마리아인들의 요청
(wJ" ou\n h\lqon pro;" aujto;n oiJ Samari'tai, hjrwvtwn aujto;n mei'nai par j aujtoi'": 호스 운 엘돈 프로스 아우톤 호이 사마리타이 에로톤 아우톤 메이나이 파르 아루토이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40a절)
에로톤(hjrwvtwn 청하니)은 미완료 과거로서, 지속적이고도 진지한 간청을 예수께 드린 사마리아인들의 부탁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이제 참된 복음을 영접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와 헤어질 수 없어 함께 머물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L.Morris).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예수에 대해 들은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친히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보다 친밀하기 위해 머물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3) 예수의 유하심
(kai; e[meinen ejkei' duvo hJmevra". 카이 에메이 넨 에케이 뒤오 헤메라스;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메, 40b절)
에메이넨(e]meinen유하시매)은 부정과거형으로 사마리아인들의 간청에 못이겨 수가 성의 동네에 예수께서 체류하신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기간은 뒤오 헤메라스(duvo h;evra"이틀을)이다. 예수께서 이틀간이나 수가 성에 머물러 계신 것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배척시하는 관계임을 생각해 볼 때 이례적인 일인 것이다(A.T.Robertson). 또한 예수의 이틀의 체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보고도 믿음을 받아 들이지 않았고 유대인들과 매우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R.C.H.Lenski). 결국 예수와 함께 지낸 사마리아인들은 더욱 견고한 신앙을 소유하기에 이르렀음을 41절 이하에서 보여 주고 있다.
2. 참된 구주를 발견한 사람들(41,42절)
한 여인의 증거로 인해 메시야를 발견한 사마리아 수가 성 사람들은 예수와 이틀 간을 함께 지내면서 참된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1) 더욱 많이 믿음
(kai; pollw'/ pleivou" ejpivsteusan dia; to;n lovgon aujtou', 카이 폴로 플레이우스 에피스튜산 디아 톤 로곤 아우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1절)
폴로(pollw'자가 많아)는 이제 수가 성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더욱 많이 믿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더욱 많이 믿게 된 연유는 예수의 말씀 때문이라고 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단지 이적이나 표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를 둔 인격적인 신앙심을 갖게 되었음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이들이 예수를 세상의 구세주로 믿었음을 42절은 표현해 준다. 또한 본 절은 플레이우스(pleivou"더욱)라는 형용사를 써서 여인의 증거로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보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은 수가 더욱 많았음을 나타낸다(W.Hendriksen).
2) 참된 믿음의 근거
(th'/ te gunaiki; e[legon o{ti Oujkevti dia; th;n sh;n lalia;n pisteuvomen: 테 테 귀나이키 엘리곤 호티 우케티 디아 텐 센 랄리안 피스튜오엠;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리, 42a절)
랄리안(lalia;n말을)은 '어떤 말투'나 '단순하고 서투른 말'을 뜻하는 것인데(T.Boman). 볼 절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리키는 로고스(lovgo"말씀)와 구별되어 사용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여인의 설득력 있는 훌륭한 말로 인하여 예수를 발견하기는 했으나 이제는 인간의 말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를 전해 준다(A.T.Robertson). 랄리아(lalia;)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도 사용하셨기에 인간적인 말이라고 엄격히 규정지을 수는 없다. 피스튜오멘(pisteuvomen우리가 믿은)은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형으로 현재 그들이 계속적으로 믿고 있다는 신앙 고백을 표현한 말이다. 즉 이 고백은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믿음의 발로이며 결코 형식적이거나 공허한 말이 아니다(R.C.H.Lenski). 이들이 이런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참된 세상의 구세주를 친히 만났기 때문이다.
3) 세상의 구주를 앎
(aujtoi; ga;r ajkhkovamen, kai; oi[damen o{ti ou|tov" ejstin ajlhqw'" oJ swth;r tou' kovsmou. 아우토이 라르 아케코아멘 카이 오이다멘 호티 후토스 에스틴 알레도스 호 소테를 투 코스무;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42b절)
아케코아멤(ajkhkovamen듣고)은 현재 완료형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직접 들은 그들의 한결같은 체험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이 확신하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었다(R.C.H.Lenski). 즉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알게 된 것은 예수를 전한 여인 때문이었지만,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친히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이다멘(oi]damen앎이니라)은 오이다(oi]da경험하다, 깨닫는다)의 현재 완료형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그분을 구세주로 깨달아 안 것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세상의 구주를 아는 믿음의 신앙이야말로 진실하고 순진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은 여인이 증거한 말을 들음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들 심령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영적인 실제적 체험에 기인한 것이다.
소테르(swth;r구주)는 '구원자, 구출자'의 의미를 지닌 명사로 본 절이 세상을 구원할 세상의 구주로 알게 되었다는 뜻을 전달해 준다. 즉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신 세상의 구원주 메시야 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가장 정확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하기에 이 표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신령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한다(H.R.Reynolds). 세상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의 근거는 결국 인간의 죄의 씨앗을 없애주기 위함이며, 그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은혜는 사람들에게 귀한 영적인 열매를 주시게 된다(W.Hendriksen).
3. 갈릴리에 이르심(43-45절)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이틀을 머무시며 복음을 증거하시고 많은 영혼의 수확을 거두신 예수께서는 이제 갈릴리에 도착하셨다.
1) 사마리아를 떠남
(Meta; de; ta;" duvo hJmevra" ejxh'lqen ejkei'qen eij" th;n Galilaivan: 메타 데 타스 뒤오 헤메라스 엑셀덴 에케이덴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3절).
엑셀덴(ejxh'lqen떠나)은 엑셀코마이(ejcevrcomai밖으로 나오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동네에서 이틀을 유하신 후에 거기를 떠나 오신 것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습관과 다른 관습을 소유한 사마리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J.A.Bengel) 하여튼 이틀간의 사마리아의 체류는 예수의 지상 사역의 목적에 예외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R.V.G.Tasker). 아펠덴(ajph'lden가시며)은 부정과거형으로 사마리아에서 전도의 열매를 다 거두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다시 여행을 다 거두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다시 여행을 계속하시러 가신 것을 밝히고 있다(L.Morris). 예수께서는 비록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지만 주님의 사역을 펼칠 계획하에 갈릴리로 가신 것이다(F.W.Grosheide).
2) 높임을 받지 못하는 선지자
(aujto;" ga;r jIhsou'" ejmartuvrhsen o{ti profhvth" ejn th'/ ijdiva/ patrivdi timh;n oujk e[cei. 아우토스 가르 예수스 에말튀레센 호티 프로페테스 엔 테 이디아 파트리디 티멘 우크 에케이;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며, 44절)
본 절에서는 서두에 나오는 가르(ga;r왜냐하면)가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번역이 되지 않아 해석상의 단점이 있다. 본래 이 단어는 영어의 for의 의미로 전달되는 접속사이나 본 절에서는 문맥상 흐름으로 보아 '참으로, 실로'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고향 갈릴리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지 않을 것을 심증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파트리디(patrivdi고향)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많아서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① 어린 소년 시절을 지낸 나사렛(Calvin). ② 남쪽 갈릴리 지방(Lange), ③ 유대의 지방(Origen). ④ 예루살렘 성전 지역(B.R.Westcott) 등의 주장들이 있는데, 이중에서 예수의 고향을 갈릴리로 성경은 언급하므로 마13:54,57눅4:16역시 갈릴리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그런데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이 유대 베들레헴이기에 유대 지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
(o{te ou\n h\lqen eij" th;n Galilaivan, ejdevxanto ... ga;r h\lqon eij" th;n eJorthvn. 호테 운 엘덴 에이스 덴 갈리라이안 에덱산토…가르 엘돈 에이스 텐 헤오르텐;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니라, 45절)
운(ou\n그러므로)은 접속사로서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그 뜻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말은 사건과 다음 사건과의 경과적인 연속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에 이르신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어떤 원인과 결과의 뜻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A.T.Robertson). 에덱산토(ejdevcanto영접하니)는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형으로 갈릴리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예수를 영접한 것을 보여 주는 말이다. 이들의 환영은 44절의 암시와는 반대의 형편을 나타내주었는데, 이는 표적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과는 달리 사마리아인들은 표적을 보지 않고 오직 말씀만 듣고 믿은 신앙이기에 더욱 위대한 믿음을 소유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헤오라코테스(e;wrakovte"보았음이더라)는 현재완료 분사형으로 갈릴리 사람들이 첫 유월절 명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을 보았던 것들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결국 갈릴리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겪은 표적과 이적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을 것을 아셨다(A.Barnes). 즉 유대 갈릴리 사람들의 환영은 그들이 보았던 이적 때문이었고, 진실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한 사마리아인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기 때문에 갈릴리인들의 환영이 진실되고 참된 신앙의 고백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L.Morris).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39-43절까지의 내용은 30절 이후에 단절되었던 설화들을 다시 끄집어내서 결론을 도출한 대목이며, 이 본문의 관심을 제자들에게서 다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W.F.Howard).
43-45절은 생명과 심판의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서술하기 위한 서곡으로서 갈릴리로 감을 제시하고 있다( G.R.Beasley-Murray), 놀랄만한 사실은 마가는 예수의 배척당한 고향으로서 갈릴리를 그리는 반면, 요한은 유다 또는 예루살렘을 예수의 고향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C.K.Barrett).
1. 수가 사람들의 회심(39-42절)
39절의 '여자의 말'에 기초한 믿음과 예수의 말(41절)에 기초한 믿음 사이의 강한 대조가 본 절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요 1장서언에나타난 로고스 개념에 대한 예시로 볼 수 있다(Raymond, E.Brown). 또한 그 여인의 증거를 통해서 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수가 사람들은 예수를 많이 믿었다. 이는 인간을 통해 증거된 선포로 결코 경시해서는 안됨을 알려 준다(R.Walker).
40절에 예수의 유하심은 단지 시간적인 머무름이며, 이는 예수가 영화롭게 됨과 성령의 오시기 전까지는 단지 짧고 한정된 시간 동안만 머무를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C.K.Barrett).
42절의 '세상의 구주'란 표현은 저자 요한의 개성적인 표현으로 예수의 이틀간의 사역의 결과로서 산출된 믿음직한 고백이다(A.H.W.Mayer). 게다가 만인구원설(Universalnism)은 제한적이며 고집적인 국수주의 감정에 사로잡힌 유대인들보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메시야적 신앙에 더욱 친근하였다(Gesenius, de Samar).
2. 예수의 갈릴리 여행(43-45절)
43절의 '이틀이 지나매'라는 기사는 40절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으며(H.A.W.Meyer), 특히 '그'는 예수를 언급할 때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본인을 입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44절의 '선지자'라는 단어를 추론한 혹자는 예수가 자신을 메시야로 인정하거나 선포한 일이 없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Schenkel). 또한 '증거하시다'는 과거완료형으로는 볼 수 없으며(Tholuck, Godget), 이는 '당시에' 즉, '그가 갈릴리로 돌아 왔을 때'라고 해석해야 한다(Godgeg).
특히 예언자의 냉대에 대하여 막6:4에서는 마 13:57의 '친척들'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있으며, 눅4:24과 병행 구절이다. 이말은 P.O , Ⅰ에도 도마 복음서에도 나오는 구절이며, 이는 독립된 로기온으로 전해졌을 것이다(C.K.Barrett). 여기서 저자인 요한의 본문은 마가의 형식에 가까우면서도 마태복음의 내용을 상당히 요약하고 있다(Mayer). 이 44절은 전승들(P.O ,Thom)에서 분명히 독립되어 있으며, 위의 전승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의사도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치유할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G.R.Beasley-Murray).
43절과 45절은 예수의 고향을 예루살렘으로 복음서 저자들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Dodd, C.K.Barrett, Lindars). 따라서 파트리스(patriv")를 나사렛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거나 가르(gavr∼를 향하여)를 사용하여 참으로 그가 갈릴리로 갔다는 사실로 언급하는 일은 매우 독단적이며, 부정확한 표현인 것이다(H.A.W.Mayer). 또한 본문의 갈릴리 지역을 갈릴리 하단부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됐으며, 그 이유는 갈릴리 하단부에 나사렛이 있기 때문이다(Mayer). 그러나 그가 간 곳은 갈릴리가 아니라 나사렛이었다(Chrysostom, Euthymius, Zigabenus, Beza).
45절의 '영접하다'라는 동사는 요한의 글 중에서 단지 여기에만 기록되었다(Raymond, E. Brown).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갈릴리 사람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떠났으며, 이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무식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동네를 떠났다'고 기록하였다(C.K.Barrett, Josephus).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사마리아인들의 믿음(39-42절)
39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의 첫 단계는 한 여인의 증거에 의존한 신앙이었다(Reynolds). 그때 그들은 예수를 타인의 과거를 아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믿었다(Hendriksen). 한편 여인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미 제자의 위치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세례 요한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Barrett).
40,41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사람의 증거에 기초한 신앙의 단계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을 요구한다(Morris, Tenney, Hendriksen).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다(마13:58눅4:29). 이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는 이틀을 유하셨고 말씀, 즉 복음을 전하셨다(Morris). 그로 인하여 결신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더욱 견고하여져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표적과 기사를 구하지도 않고(48절) 예수를 세상의 구조(42절)로 믿은 것을 볼 때(Reynolds), 그들의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 있는 온전한 믿음으로 여겨진다(Morris, Tenney).
42절은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 준다. 그들은 여인의 증거뿐 아니라 예수를 직접 체험함으로 신앙을 확고히 한다(Barrett). 왜냐하면 이제는 친히 듣고 알았기 때문이다. '여자의 말'은 요한에게는 로고스(laliva39절)로 여겨졌지만(Hendriksen). 랄리아는 일반적으로 '수다스런 잡담'을 의미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말이 예수의 말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요8:43,Morris). 다라서 본문에서의 의미는 41절의 '예수의 말씀'과 비교되는 의미에서 사용되며(Lenski) 최소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세상의 구주'는 만인구원론 의미가 아니라 '각 사람에게 빛을 비췬다'(요1:9).는 의미로서(Blum) 유대인은 물론이요, 사마리아인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구주가 되신다는 의미이다(Tasker, Morris).
2. 갈릴리로 돌아가심(43-45절)
43절의 갈릴리 행로는 요1:432:1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44절은 45절과 언뜻 보기에는 상반되는 진술인 것 같다. 왜냐하면 44절에는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언급을 했는데, 45절에서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점은 요한이 본서를 연대기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Lenski). 고향에서 배척받는 모습은 마13:57막6;4;눅4:24에도 언급되는데 이 사건들 중에 눅4:24은 본문의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본 절은 과거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려 했던 기억을 되살려(눅4:18-30,Tenney) 갈릴리인들이 곧 예수를 배척하게 될 것을 미리 예언하고 계신 것이다(Blum).
이는 갈릴리인들의 영접이 사마리아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단지 표적만 구하는 모습이라는 말씀(48절)에서 장차 있을 배척을 암시하며(Blum). 결국은 예수를 배척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요6:41,66,Hendriksen). 한편 예수의 고향에 대한 해석으로 유대(Westcott), 예루살렘(Hoskyns, Reynolds), 하늘(R.H.Lightfoot) 등이 있지만 본절의 문맥상 갈릴리로 보는 견해이다(Morris, Lenski, Hendriksen, Blum). 이 견해는 갈릴리 지역이 예수가 자라나신 곳으로 언급되는 진술과도 일치한다(요1:467:41,52;19:19;눅4:16,Morris). 한편 '높임받다'는 요한이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요한은 예수가 합당한 영광을 받을 때는 주로 독사(dovxa)를 사용한다(Morris). 이는 45절에 나타난 갈릴리인들의 환영이 합당치 않은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45절에서는 예수의 배척에 대한 말씀과는 반대로 갈릴리인들은 예수를 환영한다. 그 이유는 그들 중의 일부가 유월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정화 사건과 많은 표적들(요2:13-25)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영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48절, 요6:26,66,Blum) 배척과 상통하는 환영임을 나타내려는 요한의 의도이다(Morris).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사마리아
1. 위치
북이스라엘의 수도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명칭이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11km 떨어져 있는 지역의 산에 세웠다. 그리고 그곳의 명칭은 그곳 주인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선지자들에 의해 우상 숭배의 중심자로 여겨졌다.
2. 사마리아의 역사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는 8세기 초에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그의 후계자 2세는 그 땅에 살던 많은 사람들을 추방했고 결국 북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존재는 사라졌다(왕하17:6,18,23). 또한 B.C.331년 그 곳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제는 처음에는 우호적이었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장관이 살해되자 그 성읍을 멸망시켰다. 폼페이가 그곳을 재건했고 헤롯은 다시 치장하여 세베스테라고 명명했다.
3. 고대의 사마리아의 상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유적지 중, 아합 시대의 궁전은 급수를 위한 물탱크와 수영장까지 갖추었으며 넓은 정원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의 창고에서는 200장 이사의 장시용 널빤지와 상아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아합 시대의 일부를 비롯하여 그 성읍의 다른 부분들은 알렉산더 시대에도 잘 보존되었다.
4. 사마리아인
이들은 구약에서 한 번 언급되었는데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이주시킨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왕하17:29).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되고 그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 국가 여러 곳으로 이주되었고, 반대로 여러 이방 나라의 이민족들이 사마리아에 이주되어 살게 되었다(왕하17:23,29). 결국 사마리아는 혼합 민족이 거하는 곳이 되었다. 후기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가장 초기의 언급에 따르면 그들은 세겜에서 살았다(집회서50:26;마카비서 5:22,23).
뚜렷한 집단으로서 신약의 사마리아인들은 세겜이 재견된 B.C. 4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듯 하다.
사마리아의 주요 신학적 저술은 현재 A.D.4세게 전후의 것들만 남아 있어 신약시대의 그들의 신앙을 상세하게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겼고 모세가 다시 돌아올 것을 고대했다.
종교에서 구주의 개념(4:39-45)
◈ 세계배경 문화사 ◈
구원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구원자의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는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의 상이한 방법으로 구원에 대해서 말하며,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근동/유대 :이스라엘에서 구주라는 것은 먼저 신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셨고, 그의 구원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확신으로부터 일어났다. 즉 이 신앙은 홍해에서의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이 구원되었던 실재적이고 역사적인 경험에 기인하며, 이 경험은 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는 신앙의 기저를 형성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과거에 일어난 신의 행위가 미래에 일어날 그의 행위의 형태 내지 전조(前兆)가 된다는 믿음은 그들의 고유한 신앙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들에게 과거에 역사적으로 일어난 구원은 종말에 있을 구원에 대한 약속과 보증을 뜻한다. 예언자들은 앞으로 올 구원을 역사의 종말에 새로운 창조와 구원의 행위라고 이해하였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의 헤르메스 문헌에 나타난 영지주의적 신화(靈知主義的 神話)는 사람 곧 하늘의 사람에 관한 신화로 이것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한 빛의 존재가 싸움에 패하여, 혹은 어리석음 때문에 하늘로부터 땅에 떨어졌다. 땅위에서 그의 존재는 무수한 원자로 분해되어 인간이 되어 그들의 본래적인 본성과 기원을 망각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가장 높은 신의 '아들'로 묘사되는 구원자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그는 인간의 본래적 성품에 관한 지식을 나누어 주고 빛의 세계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이들을 구원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있었던 하늘의 존재로 재창조되는 것을 말한다. 하늘의 구원자는 땅에 있는 동안에 그 자신을 여러 형태의 인간으로 변신한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악한 지배자들의 주목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여러 밀의(密儀)종교와 융합되었으며 헬라화된 기독교와도 융합되었다.
로마 :로마에서는 이렇게 하늘로부터 온 사람에 의한 구원 외에도 정치 권력을 통해 구언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즉 자기 백성의 은인이며 구원자인 신격적인 왕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 102∼44 B.C)는 죽은 다음에 신의 서열에 올랐지만, 그의 신전은 생전에 성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해 소아시아에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아시아의 신격(新格) 황제들은 자신들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신전에서 숭배되었다. 제국의뜻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기도 했다.
동양/중국 : 동양 사람들은 은둔(隱遁)을 통해서 신선(神仙)이 되거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武陵桃源)등의 낙원에 가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있었다. 불교의 정토 신앙(淨土信仰)에 의하면, 서방(西方)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다스리는 극락(極樂)과 같은 세상이 있는데 사람들은 거기로 가서 살게 되기를 원했다.
또한 미래에는 미륵불(彌勒佛)이 와서 세상을 깨끗이 하여 지금의 현실 세계에 이상 세계가 이룩된다고 믿었다. 즉 석가가 못다 이룬 중생들을 미륵 보살이 이승에 나타나 구원받지 못한자들을 다시 구제한다는 믿음이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구주에 관한 기록을 보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자(롬5:66:10),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자(롬4:25), 본을 보이신 자(요13:15), 하늘나라에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는 자(요14:2,3)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풍성하게 주시는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또한 경건한 생활에 힘써야 하며, 항상 주님을 증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온전한 신앙을 지니지 못하는 원인(4:39-45)
우리는 신앙 생활을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 신앙 성장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간혹 볼 수 있다. 본문 사마리아인들과 갈릴리 고향인들의 주님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원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1. 타율적인 의식 때문임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의 간증과 전도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42절)고 고백한 것이다. 신앙은 타의에 의해 시작하여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완성된다, 그럼에도 초신자 때의 습성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지닌 사람이 많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나, 어떤 집사님의 기도에만 의존하는 이들이 많다.
2. 주님과 교제를 하지 않음
사마리아인들은 이틀간 주님과 동숙하며 교제했다. 그 결과 주님이 참된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신앙이란 주 하나님의 인격과 교제한 결과로 얻어지는 인격적인 확신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긴밀한 교제 없이는 참신앙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예배에만 참여하고 생활에 주님과 교제를 하지 않고 있다. 주님과 기도로서 교제하고,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서 교제하지 않으면 참신앙에 이를 수가 없음을 알자.
3. 인내하지 못함
갈릴리인들은 처음에는 주님을 불신앙했으나 오랜 시간을 두고 주님이 '하신 모든 일'(45절)을 살폈다. 이처럼 인내함으로 주 예수를 따라야 온전한 신앙에 이를 수 있다.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조금 의심스럽다고 주님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신앙의 형성 과정(4:39-45)
모든 일에는 그 과정이 요구된다. 과정 없는 좋은 결과란 기대할 수가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본문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의 신앙 입문 사실과 갈릴리인들의 예수 영접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와 같은 내용 속에서 신앙의 형성 과정을 찾아보자.
1. 다른 사람의 인도로 신앙에 입문함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절). 여인의 간증과 전도로 인해 이웃 사람들이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신앙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전도와 인도로 입문하는 예가 대분분이다. 물론 바울처럼 주님이 직접 부르신 예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예도 이웃성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10:17)라고 했다.
2. 자신의 구도로 인한 확신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42절). 예수님과 이틀간 교제한 동네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가 틀림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믿음은 처음에는 외적인 요인에 의해 가지게 되지만 믿음의 확신은 자신의 구도로 얻게 된다. 그래서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믿음으로 승화되야 한다.
3. 시험을 극복한 후의 성장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45절) 갈릴리 고향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님을 배척했다. 주님의 신성을 의심했던 까닭이다. 그들은 사단의 불신앙과 의심의 시험에 빠졌던 것이었으나,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이 틀림없는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굳건한 신앙, 성숙한 신앙은 이처럼 시험과 연단을 극복한 후 얻어짐을 알자.
갈릴리에 행한 두 번째 표적(요4:46-54)
◈ 원문강해 ◈
왕의 신하의 아들 병을 고치심
갈릴리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말씀으로 고치시는 치유의 이적을 행하셨는데, 이것이 갈릴리에서 향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다.
1. 병든 아들을 고치려고 예수께 청함(46-48절)
갈릴리 가나에서 처음 이적을 나타내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 이적을 통해 믿음을 소유하게 된 왕의 신하로부터 병든 아들을 고쳐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1) 갈릴리 가나에 이르심
( \Hlqen ou\n pavlin eij" th;n Kana; th'" Galilaiva", o{pou ejpoivhsen to; u{dwr oi\non. kai; h\n ti" basiliko;" ou| oJ uiJo;" hjsqevnei ejn Kafarnaouvm: 엘덴 운 팔린 에이스 텐 카나…카이 엔 티스 바실리코스 후 호 휘오스 에스데네이 엔 카파르나움;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6절)
바실리코스(basiliko;"왕의 신하)는 혈연적으로 또는 공적인 관계로 바실류스(basileuv"왕)와 관련된 사람을 의미한다(A.T.Robertson). 본 절에서는 궁궐에서 높은 벼슬을 가지고 왕을 섬기는 소화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L.Morris). 이 사람에 대해 분봉왕 헤롯의 수하에 있는 신하인 구사이거나(눅8:3), 아니면 헤롯의 의형제인 마나엔(행13:1)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단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신하는 기적을 베푸는 예수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W.Hendriksen). 에스데네이(hjsqevnei병들었더니)는 미완료 과거로서 이전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아픈 상태에 놓여 있는 의 의미이다. 이 아이가 독자였는지 어린아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심한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음을 다음 47절을 통해 알 수 있다.
2) 아들의 병을 고치려 예수를 청함
(ou|to" ajkouvsa" o{ti jIhsou'" h{kei ... h[mellen ga;r ajpoqnhv/skein. 후토스 아쿠사스 호티 예수스 헤케이…아펠덴 프로스 아우톤 카이 에로타…에멜렌 가르 아포드네스케인;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죽게 되었음이라. 47절)
이펠덴(ajph'lqen가서는)은 부정과거형으로 긴급히 달려간 동작을 표현하고 있다. 또 에로타(hjrwvta청하되)는 미완료 과거로서, 청하기 시작한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간청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두 단어를 통하여 보면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의 약 30km나되는먼 거리를 귀족의 신분도 마다않고 황급히 달려와 예수께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왕의 신하의 절박한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에멜렌(h]mellen거의∼되었음이라)은 미완료 과거로서 '막…하러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동사는 본 절에서 중병에 들은 신하의 아들의 병이 매우 긴급할 정도로 심각했음을 설명하고 있다(A.T.Robertson).
3) 표적과 기사가 요구되는 믿음
(ei\pen ou\n oJ jIhsou'" pro;" aujtovn, jEa;n mh; shmei'a kai; tevrata i[dhte, ouj mh; pisteuvshte. 에이펜 운 호 예수스 프로스 아우톤 에안 메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이데테 우 메 피스튜세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8절)
에안( jEa;n만일)은 조건적 불변사로서 앞으로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즉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조건이 있음을 암시한다. 피스튜세테(pisteuvshte믿지)는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강한 이중 부정어인 우 메(ouj mh;도무지 아니하리라)와 함께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완고함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사람들은 예수의 신적인 권능과 능력이 외부로 표출되는 세메이아(shmei'a표적)와 테라타(tevrata기사)를 보지 않고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외적으로 표출되는 표적들을 보아야만 자극을 받고 신앙을 가지게 되는 영적인 어린아이 같은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다(H.R.Reynolds).
2. 말씀을 믿은 신앙(49-51절)
예수께서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 자들을 향해 한탄하신 것과 달리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모시러 왔던 사람은 예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더 큰 이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1) 예수를 청하는 왕의 신하
(levgei pro;" aujto;n oJ basilikov", Kuvrie, katavbhqi pri;n ajpoqanei'n to; paidivon mou. 레게이 프로스 아우톤 호 바실리코스 퀴리에 카타베디 프린 아포다네인 토 파이디온 무;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49절)
카타베디(katavbhqi내려오셔서)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걱정을 가지고 예수께서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오시기를 바라는 긴박한 어투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의 아이가 죽기전에 내려와야 한다는 단서를 내걸고 있다. 이것은 이 사람에게 있는 믿음의 단계를 보여 주는데, 예수께서 죽기 전에만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연약한 믿음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J.A.Bengel).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은 다른 갈릴리 사람들처럼 왕의 신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능력을 나타내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다.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디온(paidivon)은 '어린아이, 아기'를 말하는데, 51절의 파이스(pai'"소년, 소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병든 왕의 신하의 아들이 아주 어린아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 말씀을 믿고 떠남
(levgei aujtw'/ oJ jIhsou'", Poreuvou: oJ uiJov" sou zh ... oJ jIhsou'" kai; ejporeuveto.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포류우 호 휘오스 수 제…호 예수스 카이 에포류에토;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말씀을 믿고 가더니, 50절)
포류우(Poreuvou가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예수께서 말씀만으로 이적을 행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한마디이다. 제(zh')는 현재 능동태형으로 '살아 있다'의 의미이다. 신하의 아이는 죽음을 주목하고 정상적인 신체의 활동을 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전능하신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 죽어가던 아이를 고치셨으며 그리하여 그 아이는 완전하게 건강을 회복하였던 것이다(W.Hendriksen). 에피스튜센(ejpivsteusen믿고)은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아들이 살았다고 선포하신 그 말씀을 즉시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여 주는 말이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확신있는 마음을 가지고 일말의 의심도 가지지 아니하였다(A.Barnes). 그는 이제 더 이상 표적을 구하는 연약한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에포류에토(ejporeuveto가더니)는 미완료과거로서 예수의 말씀 한 마디만을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인 신하의 동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신하의 행동은 예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믿음에 의한 행위인 것이다(A.T.Robertson).
3) 아들이 살았음을 알게됨
(h[dh de; aujtou' katabaivnonto" oiJ dou'loi aujtou' uJphvnthsan aujtw'/ levgonte" o{ti oJ pai'" aujtou' zh'/. 에데 데 아우투 카타바이 논토스 호이 둘로이 아우투 휘펜테산 아우토 레곤테스 호티 호 파이스 아우투, 제;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1절)
카타바이논토스(katabaivnonto"내려가는 길에서)는 부정과거 분사로서 예수의 치유 선포의 말을 들은 왕의 신하가 서둘러서 자기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일을 확인코자 집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J.A.Bengel). 휘펜테산(u;phvnthsan오다가 만나서)은 부정과거형으로, 주인 아들의 급작스런 병의 회복에 놀란 종들이 주인을 만나 전하려고 달려온 것을 보여 준다. 종들은 집에서 주인의 도착만을 기다릴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주인에게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W.Hendriksen).
3. 온 가족이 예수를 믿음(52-54절)
표적을 보고야 예수를 믿었던 갈릴리의 사람들과는 달리 아들이 병든 왕의 신하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 성숙한 신앙을 가짐으로 아들의 병을 고침받고 결국 그의 온 집이 예수를 믿는 복된 가정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1) 제칠 시에 병이 나음
(ejpuvqeto ou\n th;n w{ran par j aujtw'n ... eJbdovmhn ajfh'ken aujto;n oJ puretov". 에퓌테노 운 텐 호란 파르 아우톤…햅도맨 아페켄 아우톤 호 퓌레토스;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2절)
에퓌데토(ejpuvqeto물은즉)는 부정과거 중간태형으로 동작이 강조된 표현이며 마주 오는 종들을 만난 주인이 아들의 병이 나았다는 말을 듣고 언제부터 그 병이 낫기 시작했는가를 자신을 위해 물은 단호한 질문을 나타낸다(L.Morris).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떠나간 신하는 아들의 병이 정말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인해 치유되었는 지를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에스켄(e]scen시작한)은 부정과거형으로 아들의 병이 차도를 보인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때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이 가정에 임하기 시작한 때임을 알려 주고 있다.
아페켄(ajfh'ken떨어졌나이다)은 부정과거형으로, 아들의 열병이 떠나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말이다(R.C.H.Lenski). 그런데 병든 아이가 낫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께서 말씀하신때와 같다는 것을 본 절에서 언급함으로 예수의 은총이 임한 시각임을 알려 준다. 예수께서 병든 아이를 고치신 것은 거리나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말씀을 선포하신 바로 그때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G.MacGregor).
2) 온 집이 다 믿음
(e[gnw ou\n oJ path;r o{ti 팫jn? ejkeivnh/ th'/ w{ra/ ... JO uiJov" sou zh'/, kai; ejpivsteusen aujto;" kai; hJ oijkiva aujtou' o{lh. 에그노 운 호파테르 호티[엔] 에케이네 테 호라…호 휘오스 수 제 카이 헤 오이키아 아우투 홀레;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리라, 53절).
에피스튜센(ejpivsteusen믿으니라)은 부정과거 능동태형으로 단지 예수의 말씀만을 믿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믿음의 신앙을 가진 것을 뜻한다. 이제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 왔던 왕의 신하는 온전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L.Morris). 그는 어린아이의 믿음의 단계를 벗어나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홀레(o}lh본)는 '전부, 전체'를 나타내는 형용사로서 아들의 병 나음과 그 아버지가 전한 예수의 말슴을 들은 '가정 전체'가 믿음을 받아들인 신앙의 가정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R.C.H.Lenski, A.Barnes).
3) 두 번째 표적
(Tou'to 팪e;? pavlin deuvteron shmei'on ejpoivhsen oJ jIhsou'" ejlqw;n ejk th'" jIoudaiva" eij" th;n Galilaivan. 투노[데] 팔린듀테론 세메이온 에포이에센 호 예수스 엘돈 에크 테스 유다이아스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54절)
투토(Tou'to이것은)는 지시 대명사로,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이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이적들은 예수께서 믿음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수단으로 사용하신 것이다(W.Hendriksen). 예수께서 행하시는 능력의 역사는 자연계뿐만 아니라 지역적인 한계도 무시되는 초월적인 신적 권능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에는 46절에 나타나는 가나에 대한 내용들과 다른 표적들이 중간에 삽입되어 있지만 이는 두 번째 표징으로 말하는 진수로서 이 설화가 본래 가나에서의 혼인 기적 단화와 한 쌍을 이루어 형성되어 있었음을 내포하고 있다(C.K.Barrett).
1. 신하의 간청과 예수의 응답(46-50절)
46절의 바실리코스(basilikov"왕의 신하)라는 번역은 요세푸스의 흔한 용례에 기인하며(Krebs),그는 일반적으로 '왕을 돕는 군대', 특히 '헤롯을 보좌하는 군대'라고 이해하나, 일부 학자들은 '왕과 관련성이 없는 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Plutarch, Polyb, Wetstein). 또한 혹자는 '헤롯 안디바 왕을 섬기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Baronius, Bos, Chrysostom).이에 대하여 불가타역은 '바실리코스'(basilikov")를 빼버리고 레굴루스(regulus) 라 칭했는데, 이 뜻은 '사소한 왕, 대장'이며, 일각에서는 이를 눅8:3에 나오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Chusa)이거나 혹은 행13:1에 나오는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Manaen)으로 추측하기도 한다(B.F.Westcott). 혹자는 이를 헤롯의 신하 중 한 사람으로서 갈릴리의 본봉왕으로 보기도 한다(J.Bernard).
47절에서 왕의 신하의 간구는 가나에서 예수가 행한 첫 번째 이적을 통하여 시도되었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불후의 명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H.A.W.Meyer).
48절에서 '너희는'이라는 어문에서 왕의 신하는 44,45절의 갈릴리 사람들을 대표하는 자로 간주되고 있다. 공관복음서(막7:27)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하는 기사는 여러 면에서 본문의 설화와 병행을 이루고 있으며(C.H.Dodd), 그녀를 면박한 예수는 그녀를 당시 그 나라 그룹의 대표자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Raymond, E. Brown).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일시적이나마 표적 행하심을 기대했던 왕의 신하에게 실망을 안겨다주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49절의 '주여'(kuvrie퀴리에)는 '선생님이여' 또는 '주여' 중에 후자의 의미가 여기에서는 뚜렷하다. 막7:28에서 수로보니게 여인 설화에서도 예수의 면박에 대하여 그녀가 응답할때에도 퀴리에(kuvrie)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Raymond, E. Brown).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48절의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50절의 예수의 선포는 최면술의 치료가의 효력(Olshausen, Krabbe, Kern)에 의해서가 아니라, 좀 떨어진 거리에서도 실행되는 예수의 의지의 행동으로 인한 기적적 능력이었으며, 이는 이방인에게도 해당되는 설명하기 힘든 치료의 기적이었다(H.A.W.Meyer). 또한 예수의 선포를 의학적 예지로 간주하는 자도 있으며 (Paulus, Ammon),일반적인 믿음의 결과로 비롯된 치유거나, 군중들의 영적인 운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Weizacker).
2.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51-54절)
51절은 매끄럽지 못하게 구성된 속격 절대구문으로서 이는 신약성경과 헬라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이다. 혹자는 '아이'(rai'"파이스)가 마태와 누가와 같게 한 점을 이유로 본문의 '아들'(uiJov"휘오스)을 주장하고 있다(G.D.Kilpatrick, 이에 대한 반대자; E.D.Freed). 52절의 '낫기'(komfteron e]scn콤포테론 에스켄)란 구문은 '건강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레니즘적인 표현으로서 이것은 '낫다'라는 단순과거형을 지시한다(C.K.Barrett, P.Tebt).
53절의 '그의 온 집안'(hJ oijkiva aujto'uo}lh헤 오이키아 아우투 홀레)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요한이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 요한은 후대의 교회 선교에서 그가 잘 알고 있던 한 사건을 요한복음서에 끌어와서 삽입시켰다(C.K.Barrett). 혹자는 인간의 무능함을 알고 있는 인간의 약함을 위해서 때때로 기적은 허용되며, 이 기적은 평범하게 보이는 기적에 근거한 신앙 이상으로 인간들을 이끌어 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였다.(R.Bultmann). 54절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을 언급한 것은 이 사건의 역사적 실제성을 드러내며, 그로 인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으로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신 분이심을 분명히 한다.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왕의 신하의 간구(46-50절)
46절에서 가나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으로 소개한 것은 가나의 혼인 잔치가 역사적 사실임을 나타내려는 의도이다(Morris). '왕의 신하'는 '왕의 사람'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는 갈릴리 지역의 분보왕 헤롯 안디바의 신하로 여겨진다(Tasker, morris, Hendriksen, Barrett).왜냐하면 막6:14에 그를 '헤롯 왕'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한편 테니(Tenney)는 왕의 신하를 '이방인'으로, 레이놀즈(Raynolds)는 눅8:3의 '구사'로 본다. 하지만 본문이 이에 대해 침묵하므로 이같은 주장은 합당치 않다. 오히려 그는 48절로 보아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Blum, Hendriksen, Morris, Barrett).
47절의 귀족의 신분인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약 34km를달려공개적으로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볼 때(Blum), 일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청하다' 동사가 미완료 시상으로 '거듭 간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Tenney). '내려오셔서'는 가나는 고지대이고 가버나움은 호반의 저지대라는 지리적 여건을 염두에 두고 말한 표현이다(Morris).
48절의 예수의 말은 책망섞인 꾸짖음이다(Tenney). 예수가 '너희'라는 2인칭 대명사 복수형을 사용해 꾸짖은 것은, 신하의 요구를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요구로 인식하시고(Tasker) 그들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Morris). 이는 신하를 비롯한 갈릴리인들의 신앙이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예수의 신성과 말씀조차 믿지 않는 매우 저급한 것임을 보여 준다(Hendriksen, Blum). '표적'과 '기사'는 항상 같이 나타나는데, 이는 본서의 특징적 표현이다(Morris). 표적의 의미는 표적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Morris). 그러나 유대인들은 표적의 참된 의미를 보지 못하고 단지 놀라운 구경거리로만 본다(Lenski).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이중 부정법 우 메(ouj mh;)를 사용하여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Morris, Lenski).
49절에서 신하는 47절에서는 '죽다' 동사를 현재 시상으로 사용하였는데, 본 절에서는 부정과거인 아포다네인(ajpoqanei'n)으로 표현함으로써 상태의 위독함을 나타내며(Tenney) 예수의 자비를 간청한다(Blum).
50절에서 예수는 다른 표정도 없이 단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 한 마디만 하셨는데 이는 일종의 시험이다(Morris, Tenney). 그러나 그는 아무런 표적도 없이 예수의 말씀만을 믿고 내려감으로 아들의 생명을 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도 표적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한 단계 놓은 차원으로 성숙하게 되었다(Lenski). 한편 '살았다'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순히 나았다는 것만이 아닌, 신하의 소원대로 아들의 목숨을 돌려준다는 의미이다(Lenski).
2. 표적과 신앙(51-54절)
51,52절의 '내려가는 길에서'는 '거의 다갔을 때'를 의미하며(Barrett), '제칠 시'는 유대시간으로는 오후 1시이고 로마 시간으로는 오후 7시이다(Morris, Hendriksen, Lenski). 그런데 종들은 '어제 7시'라고 언급한다. 두 곳의 거리는 약 34km로대부분 산지인 것을 감안하면 약7-9시간정도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Hendriksen).
그러므로 어제라는 개념은 어느 시간으로 보더라도 해결될 수 있다. 유대 시간(오후1시)에 병이 나았다면 신하가 거의 다 간 지점이므로 대략 오후 7,8시 경에 종들을 만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일몰을 기준으로 하루를 계산하는 방식대로 제7시는 어제로 표현할 수 있다. 반대로 오후 7시에 병이 나았다면 다음날 새벽 1,2시 경에 종들을 만났으므로 역시 어제 7시라고 말할 수 있다. 두 가지 견해가 모두 타당하지만 본서의 특성상 로마 시간으로 보는 것이 좀 더 낫다(Blum). 어쨌든 신하는 시간의 일치가 우연이 아니라 예수에 의한 기적임을 깨닫고 온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Tenney, Barrett).
54절은 이 사건을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요2:23). 한편 요한이 이 사건을 표적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이다(Blum).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표적
역사나 자연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에 대해 '표적, 이적, 기사, 기적'등의 여러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런 기적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분명하고도 초자연적이며 의미 심장하게 나타난다.
1. 표적의 의미
일반적으로 '표적'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세메이온'(shuei'on)이란 말이다. 이 단어는 어떤 것이 사실임을 보여 주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라는 의미로 이해 되기도 했고, 또는 어떤 사람에게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인간이 지어낸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초대교회 선교 사역에서 표적과 이적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냈다(롬15:19).
2. 표적과 자연질서
성경은 하나님의 일정한 주권적 섭리와 그의 특별한 행동을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표적에 대한 믿음은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에 의해 지속되며 그의 뜻의 지배를 받는다는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골1:16,17). 따라서 자연 속에는 기사와 능력과 그 중요성이 이미 나타나 있다(롬1:12). 그리고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표적'과 '자연질서'를 구분하지 않는다.
3. 표적과 계시
표적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단순한 확증이 아니라 계시와 불가결한 요소이다. 표적은 하나님이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증가시켜 주기위해 극적으로 말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참된 표적은 계시와 일치한다. 표적의 현저한 특징은 이것이 자연적인 사건에 의해서 '설명될'수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통한 말씀에 의해 예언되거나 그 말씀과 함께 나타났다는 점이다(슥3:7이하).
4. 신약의 표적
예수님의 표적들을 구약과는 다르게 보도록 해주는 증거가 있다. 예수께서 이 땅의 공생애 사역 기간 중 처음으로 표적을 행하신 것은 가나의 혼인 잔치 자리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일이었다(요2:1-11). 이곳에서 주님은 초자연적 표적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바 된 메시야되심을 직접 나타내셨다. 신약에서 사도들 및 다른 지도자들의 표적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발생하였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행하였다. 표적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부일 뿐 그 목적은 아니다.
신하(臣下)의 개념(4:46-54)
◈ 세계배경 문화사 ◈
보통 신하란 왕을 섬겨 벼슬하는 사람을 말한다, 왕을 섬기는 자로서 신하는 항상 절대 복종과 충성이 요구되었다. 왕과 신하의 관계라는 것은 또한 한 나라의 정치 제도와 직접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일정한 형태에 있어서 계약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외에 신하라는 의미는 다양하게 쓰였다.
근동/유대 :이스라엘에서 신하라는 말은 우선 종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며 복종해야 하는 의무를 가졌다. 복종에 대한 대가로 보통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집트 이집트의 왕은 신(神)으로서 지상(至上)에 존재하며, 모든 이집트인은 왕의 종복이었다. 왕의 시정(施政)을 돕는 귀족도, 국토에 곡물이 익도록 운하나 도랑을 파는 민중도 종복인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귀족은 두뇌를, 농민은 근육을 사용하여 신인 왕에게 헌신했다. 세계 최초의 석조 대건축인 피라밋이 건조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이집트 역사상 행정, 신전, 군사에 관여하는 관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재상이었다. 재상은 국가의 최고에 위치하는 관리로서 왕을 제외하고는 정치 전반에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재상은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었으나, 횡포등의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파라오의 대변자로서 공평하고 정당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었다. 일반 행정, 신전 관리, 군사 관계의 권한을 위임받은 신하들은 처음에는 대리(代理)로 행사하던 권력을 차츰 세습적인 권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의 스파르타에는 두 가문에서 각각 한 사람의 왕을 선출하는 이원 왕정(二元王政)을 유지하는 형식 아래 5부족에 기반을 둔 귀족과두정체(貴族寡頭政體)의 정치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 밑에는 임기가 1년인 5명의 에포르(ephors;최고 행정관)가 왕권을 제한하고, 원로 회의(gerusia)가 정치의 중심을 이루었다. 스파르타에는 민회(apella)가 있었다. 왕이 소집하는 민회는 원로 회의의 제안을 인준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으며, 왕을 제외한 모든 관리를 선출하였다. 전쟁과 평화, 동맹과 조약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은 민회의 표결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민회는 모든 시민이 참가할 수있었던 것은 아니고, 시민 가운데 중무장보병(重武裝步兵)으로 복무할 재력이 있는 30세 이상의 남자만이 회원의 자격이 있었다.
로마 :로마에서 신하들의 생사권(生死權)은 왕에게 있었다. 로마 시민회(Populus Romanus)는 실권이 없었고, 행정관의 임명이나 전쟁과 평화의 결정에 관한 인준권 내지 거부권을 갖고 있었다. 시민회의 결정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us)에 의해 거부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원로원 가문의 자제들은 크르수스 어너룸(cursus honorum)이라는 교육 단계를 거쳐야 했다.
동양/한국 : 한국에서 모든 백성은 왕의 신하였다. 이들 왕과 신하의 관계는 흔히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로서 효가 요구되었던 대신,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효에 대비되는 윤리로써 신하에게는 '충(忠)'이 가장 큰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관념이 철저하게 지켜져 왔으며,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욕적인 이야기들이 따라 다녔다. 예로 신라 눌지왕(訥紙王)때 박제상(朴堤上)의 이야기는 충신의 대표적인 예로 칭송을 받고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언급된 신하를 보면, 왕의 신복이 되는 자(대하35:23,24), 용감한 신하(삼상19:4), 상전을 위하는 신하(삼상16:15-17)등이 있는가 하면, 모반하는 신하 중에 요아스 신하(왕하12:20,21), 솔로몬의 신하(왕상11:26)등이 언급되고 있다. 성도들은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을 통해서 성도들이 일상 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이 예수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오만한 신앙인의 특성(4:46-54)
본문은 갈릴리 분봉왕의 신하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다룬 내용이다. 결과는 신하의 순종과 믿음으로 인해 생명이 위급했던 아들의 목숨을 주의 은혜로 건지게 됐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왕의 신하처럼 높은 지위와 명예를 지닌 자중에 오만한 신앙을 지닌 자들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위급할 때만 주를 찾음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8절). 오만한 자들은 평소에는 마치 주님이 필요 없는 양 인간적인 부와 영예와 권세를 의지하며 주님과 교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과 자신의 주변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위기를 당할 때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언제, 어느 때나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2. 현상만 중시함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 참된 신앙은 주님의 언약과 말씀을 그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오만한 자들은 현상을 중시한다. 즉 종교적인 표적과 기적을 원하는 것이다. 도마처럼 '내가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요20:25). 표적과 기적을 보고 얻는 믿음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요소가 결여되었기에 참된 믿음이 될 수 없다.
3. 순종심이 결여됨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47절)라고 하는 것을 보라, 그는 주님을 그의 '주치의'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신하는 후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려갔다. 그러나 오만한 자들 중에 그와 같은 순종심, 경외심에 결여된 자들이 많다. 하나님과 성령을 하수인 취급을 하며 주의 사역자들을 하인 취급하는 예가 많다. 두려운 일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진정한 왕과 신하(4:46-54)
헤롯 왕가의 신하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 내용이 단순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만남에는 영원하신 왕과 참된 신하의 관계가 상징적으로 교훈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세와 성도의 절대적인 순종, 그 결과 생명의 부활이 주어진다.
1. 진정한 왕의 권위와 권세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는 헤롯 안디바는 그 옛날 예수 탄생 당시 영아를 살해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 중 하나였다. 로마의 권세를 등에 엎고 권세를 부렸으나 신하 아들의 생명을 좌우할 권세는 없었다. 즉 '죽이고 빼앗을 권세'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50절)고 선언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진정한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세를 지니고 계신다.
2. 진정한 신하의 자세
그 왕의 신하는 주님의 책망과 주님의 언약에 순종과 인내와 믿음으로 대했다. 처음에는 님이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바라는 표적 중심의 믿음을 지녔었으나 주님의 책망을 듣고 주님의 권능을 믿는 참믿음을 지니게 된 것이다. 가버나움가지는 약 삼십km 정도 떨어져 있으나 그 왕의 신하는 언약을 믿고 다시 돌아간 것이다. 이 순종과 인내와 실행은 믿음의 참내용이요,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들이 지녀야 할 신앙의 덕목들임을 알자.
3. 진정한 권세와 신앙의 결과
집에 돌아온 신하는 주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한 그 시간부터 그 아들이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됐음을 알게 됐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권세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는 말씀대로다. 참된 왕의 권세와 그 신하의 참된 순종과 신앙의 만남은 그와 같은 '영생'의 열매로 나타난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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