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계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지만,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그리스도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와 달리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과 동일시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왜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으로 부르고 있는가?
우리말 성경에 "말씀"이라고 번역된 것은 말은 원래 헬라어 "로고스"란 말입니다. 요한은 서론(1:1-18)에서 "로고스"란 말을 두 번(1,14)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곳에서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으로 불렀을까요?
1) 유대인에게 있어서 "말씀"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창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이 있으라!"고 하셨고, "그대로 되니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제로 존재하게 만드는 매개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을 접하면서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말씀"은 단순한 음성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말씀이 나가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그 말을 현실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면 그 말씀은 그 빛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었습니다(창 1:3). 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않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이와 같이 구약 성경에서 말씀은 그 말을 한 존재의 뜻을 대행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원동력으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상처입고 좌절한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었고,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시 33:6, 107:20, 147:15). 이와 같이 구약성경은 "말씀"을 하나님 창조 사역의 매개체와, 하나님의 뜻을 현실로 만드는 살아있는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2) 헬라인에게 "로고스"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요한복음은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 문화에 젖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로고스)이란 말이 헬라 문화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습니다. 헬라인들은 "로고스"란 말을 철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주전 6세기 경에 에베소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라는 철학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모든 만물이 계속해서 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 번 몸을 담근 강물은 이미 흘러가서 다시 같은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이렇게 변하지만 변화가 혼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만물의 변화에도 질서와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만물이 질서있게 움직이는 것은 그 배후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적인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신적인 이성"을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 로고스가 (요 1:1,14)에 사용된 "말씀"(로고스)과 같은 단어입니다.
또한 헬라인들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로고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로고스가 사람의 마음에 빛과 깨달음을 주고, 인간의 생각을 질서 있게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신과 교통할 수 있는 것도 로고스 때문이며, 하나님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로고스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후대 헬라 사상에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고,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헬라가 아테네에서 황금기를 맞았을 때에 플라톤은 자기 주변에 모여든 작은 무리의 학생들과 철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때가 되면 신으로부터 한 말씀, 즉 한 로고스가 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 로고스가 모든 신비를 밝혀주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뜻을 가진 "로고스"가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매우 적절한 단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헬라 문화에 익숙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단어 대신에, 로고스란 단어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요한이 독자들에게 "태초에 그리스도께서 계셨다"고 말하지 않고, "태초에 로고스가 계셨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말씀"의 의미
요한은 독자들에게 "로고스"란 단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이미 존재하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또한 그분이 세상을 질서있게 창조하셨다고 소개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후에 그것을 질서있게 운행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해주며,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한 말 속에 담겨진 여러 가지 의미들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요 1:1,2)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1).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2)."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 문화에 익숙한 이방인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서 "말씀"(로고스)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로고스는 당시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사역을 소개하기에 적절한 말이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씀"(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복음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을 반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첫째로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태초에(엔 아르케이) 계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 1:1)을 읽으면 "태초에"(베레쉬트)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태초에"란 말은 "이 세상의 역사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역사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 1:1)에서 요한이 말하는 "태초에"는 창세기의 시간보다도 더 앞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태초"는 세상 만물이 생기기 훨씬 이전, 즉 영원 전을 말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만물이 생기기 훨씬 이전, 즉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게서 시작도 없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요한의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창조 이전부터 존재해 온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한 후에 세상에 존재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이미 이 세상이 있기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2.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둘째로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계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인 동시에, 하나님과 구별되는 인격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와 교제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연합은 완전하고 영원한 결합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셋째로 요한은 "말씀(로고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께도 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라!"고 한 말 중에서 "하나님"이란 단어에는 정관사(the)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원래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인 "호 떼오스"(the God)입니다. 그러나 (요 1:1)에서 요한은 "호 떼오스 엔 호 로고스"(The Word was The God)라고 쓰지 않고, "떼오스 호 로고스"(The Word was God)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본문에서 "떼오스"란 말을 "하나님"(God)으로 번역하지 말고, "신적인"(divine)이란 뜻으로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은 본문을 "그 말씀은 신적인 분이셨다"라고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란 말(떼오스) 앞에 정관사를 생략한 경우에는 꼭 그 말을 "신적인 분"(divine)이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만일 요한이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고 말하지 않고, "그 말씀은 신적인 분이셨다"라고 말하길 원했다면, 아마도 그는 "떼오스"(God)란 말 대신 "떼이오스"(divine)란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신적인"이란 뜻을 가진 단어("떼이오스)가 있는데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단어("떼오스")를 사용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요한복음에는 주격보어로 된 단어가 정관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 1:49)을 보면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요한은 이 곳에서도 "임금"이란 말 앞에 정관사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 8:39)을 보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이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에서도 "자손"이란 말 앞에 정관사를 생략디어 있습니다. 또한 (요 17:17)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말한 후에 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도 요한은 "진리"라는 말 앞에서 정관사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헬라어에서는 주격보어로 사용된 명사가 정관사 없이도 사용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이 구절이 "그 말씀은 신적인 분이셨다"라고 단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하나님"이란 말 앞에 정관사를 생략했을까요? 아마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요한이 "하나님"이란 말에 정관사를 첨가했다면, 이 구절은 "그 말씀은 성부 하나님이셨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정관사를 생략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구별되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말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러한 요한의 증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 동안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숨겨져 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면,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또 공의를 사랑하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죄를 미워하고 공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사랑하고 용납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도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용납해 주십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이었다면, 그 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시면 그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을 수가 있게 되었슴니다.
4) 성도들이 자기 입을 열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죄 사함을 약속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복음은 자신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다 (요 1:3)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지음을 받았으며, 그가 없이 지음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요 1:3)
요한은 "태초에 말씀(그리스도)이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그리스도)은 하나님이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이제 요한은 3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또 한 가지 증언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였다는 놀라운 증언입니다. 요한은 놀랍게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지음을 받았고, 그리스도가 없이 존재하게 된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힘주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1.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지은 바 되었으니..."
요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를 통해 지음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만물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매개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계획하셨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창조사역에서 함께 일하셨으며,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만물"로 번역된 말(판타)은 "모든 것들"을 의미하며,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음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만물"은 "보이는 세계"는 물론, "보이지 않는 세계"(영적 존재)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바울은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즉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지음받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지음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목적이 되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지어졌다"고 번역된 말(에게네토)은 "존재하게 되다". "무엇이 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세상에는 어떠한 실체나 물질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만물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2. "그가 없이 지음을 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요한은 "그가 없이는 지음 받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어떤 사실을 강조할 때에 사용하는 중요한 표현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말한 후에, 다시 한 번 그것을 부정적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앞에서 "만물이 그를 통해서 지음을 받았다"(긍정적 표현)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그가 없이 지음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부정적 표현)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와 같이 긍정적인 표현과 부정적인 표현을 반복함으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3. 영지주의 창조론과 요한의 창조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표현들이 당시에 유행했던 영지주의 사상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성숙한 사상 체계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요한이 살던 때보다 훨씬 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성숙한 사상 체계를 가진 영지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썼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발전했기 때문에, 요한 당시에 초기 영지주의 사상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이러한 초기 영지주의 사상을 반대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는 일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중심에 신이 있고, 그 신을 중심으로 주변에 동심원을 그리면서 여러 개의 이온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온일수록 더 저급하고 악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저급하고 악한 이온 중에 하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을 본질적으로 악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선한 하나님이 악한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의 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저급한 존재가 만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만드신 분은 가장 선하신 하나님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이 창조사역에 참여하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은 선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만물은 악한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요한의 창조론은 영지주의에 창조론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생명과 빛이 되신 그리스도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그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5)."
요한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단어들을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여러 가지 추상적인 단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4-5)에는 요한이 사용한 중요한 두 개의 추상명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빛"입니다.
1. "생명이신 그리스도"
첫째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생명이란 추상명사를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했으며(1:4), "그리스도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했습니다(14;6). 그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았다"고 고발했으며(5:40),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실 것이며 "아무도 이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양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10:10). 특히 요한은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생명"(영생)을 얻게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0:30-31). 이와 같이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창 1:1),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이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그리스도)은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그리스도)은 "사람을 진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서 그를 살아있는 영으로 만드셨습니다"(창 2:7).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며, 또한 사람들에게도 생기를 주신 분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다시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아담은 범죄로 인해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조히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가리켜서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풍속과 악한 영들을 좇아 육체의 정욕을 좆아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엡 2:1-6)." 그리스도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분리된 죄인들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게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은 잠시 살다 사라지는 일시적인 생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이 생명은 그의 아들(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요일 5:11)."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3:16)."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다!"말할 수 있습니다.
2. 빛이신 그리스도
둘째로 요한은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은 거짓, 악, 죄악을 상징하고, 빛은 진리, 선, 좋은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 갇혀 살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리를 아는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빛을 환하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시 27:1)에서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했고, (시 36:9)에서도 주로 인해 "우리가 광명(빛) 중에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주님께서 옷을 입은 것 같이 빛을 입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시 104:1-2). 사도 요한도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요일 1:5).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진리를 아는 빛을 세상에 비추어 주신 분이시며, 또한 모든 소망과 선한 것과 빛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3.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셋째로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둠 속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어주시기 전에 자신들이 어둠에 살고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비추어 주신 빛(진리)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어둠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빛 안에 거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큰 빛이시며 또한 영광의 광채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진노 아래 놓인 사람들에게 구원과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주는 빛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후에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진리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내 주신 성령님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여, 그들이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빛은 자연 세계에서 나오지만, 영적 세계의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단은 그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빛 안에 거하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다.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 "깨닫다"고 번역된 말(카테라벤)은 "잡다, 파악하다, 이해하다"는 뜻과 함께 "따라가서 잡다, 만회하다", 그리고 "제압하다, 이기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단어를 "깨닫다, 이해하다"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말을 "이기다, 제압하다"는 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경우에 이 구절은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했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이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어둠의 세력은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시고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빛을 위한 증인: 세례 요한(요 1:6-8)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6).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7).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8)."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또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고 증거했습니다. 또한 그는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또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보내신 한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6)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아페스탈메노스)은 "특별한 임무(명)를 띠고 파견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가 자신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사람의 대리인, 대사, 또는 사절로 파송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대리인, 또는 사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귀한 소명과 임무를 맡기고, 그 일을 감당하게 하려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그는 자원하거나, 사람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서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파송받을 때에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특별한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고, 그를 보낸 하나님의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절로 보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빛과 생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낸 사람은 하나님이나 빛과 생명이 아니라 단순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수행하게 하시려고 세례 요한에게 많은 영적 능력과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분에게 몰려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영향력이 백성들에게 크게 미쳤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조사단을 파송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었고 그의 말을 따라 회개의 세례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빛과 생명이 아니라 빛과 생명을 증거 할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의 이름이 요한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은혜롭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그가 해야 할 사역에 적합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는 돌아선 백성들의 마음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돌아서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전하기 위해서 보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이 그에게 주신 "요한"이란 이름은 가장 적절한 이름이었습니다.
2. 세례 요한의 사명: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를 믿게 함(7)
사도 요한은 "그가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그를 통서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한 가지 중요한 사명을 띠고 세상에 보냄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고, 최선을 다해서 이 일을 완한 후에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전한 메시지한 사역은 스스로 만들거나 전수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사상이나 생각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께서 맡겨 주신 메시지를 전하,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영적 운동을 주도하거나, 조직이나 단체를 만들어 운영하거나, 또는 선한 사역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이적이나 병자를 치유하거나, 회당이나 성전에서 행사를 주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 즉 사람들에게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가진 유일한 소명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사람들이 믿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조직하고, 경영하며, 감독이나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이러한 수단을 목적과 혼동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 모든 힘을 다 소비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자신의 유일한 사명과 목적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믿고 구원(생명)받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실천해야 합니다.
3.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였다(8)"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이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 증거하러 온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세례 요한의 능력과 메시지를 보고 그를 메시아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그 사람은 참 빛(그리스도)이 아니라 그 빛을 증거하기 위해 온 증인이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며,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절에 불과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에 가장 뛰어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보시고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요 1:27). 당시에 신발 끈을 매고 푸는 일은 종들이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창조주, 또 피조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만 높이는 세례 요한의 태도는 "오늘날 하나님의 일꾼들이 본받아야 할 중요한 태도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는 그리스도 대신 자신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만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므리바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을 때에 그에게 맡겼던 사명을 거두셨습니다.
생명과 빛이신 그리스도(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 있었습니다(요 1:9)."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메시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위해 '로고스'(말씀)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빛, 즉 생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과 진리를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으며, 어둠은 그 빛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빛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하기 위해서 한 증인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증인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참 빛이 세상에 오셨고 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었다!"고 증거했습니다.
* 참 빛이신 그리스도
사도 요한은 "참 빛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 말로 "참되다"고 번역된 말(알레디논)은 "참된 것, 실제적인 것,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허구적인 것, 속이는 것, 비 실제적인 것, 불완전한 것(흠있는 것)'의 반대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되고, 진실하며, 실제적이고, 완전한 참 빛(the true Light)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빛(light)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과 장래 일, 사람의 생각, 죄와 수치, 지옥과 죽음에 대해 가르쳤으며, 자신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 빛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결점과 흠이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빛에 대해서 말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둠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진정한 빛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빛"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게서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순수하고 정결하고 선하신 분으로, 어둠의 세력을 정복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세상은 자신들이 어둠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으며(요 14:6),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습니다(요 12:36,46).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의 세력을 내쫓으셨으며(요 3:19-20), 거짓을 몰아내셨고(엡 5:8-10),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참된 빛"이었습니다.
* 세상에 와서
요한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포기하시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구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높고 존귀한 분이셨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을 잘 보여주신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자연과,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어두운 상태로 버려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연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친히 빛이 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 뜻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가르침, 그리고 죽음과 부활은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요 14:9-10)"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와 삶은 하나님과 그 뜻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죄로 인해 사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해주셨습니다. 복음은 진노와 심판 중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어둠을 벗어나서 생명과 빛에 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요 8:12)"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오르신 후에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되지만 믿지 않으면 심판받는 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요16:8-11). 또 성령님은 성도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요 16:13). 그리고 성령님은 성도들이 죄를 이기고 진리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어둠에 살던 사람들을 빛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며, 또한 위로하고 격려해 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주신 참 빛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 (요 1:10,11)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10). 그는 자기 자신의 소유(집)에 찾아왔지만,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 1:10-11)"
요한은 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자신을 빛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세상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으며, 또 구원과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그의 백성들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10)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지 않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요한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해 지음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상은 자기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33년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였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세상은 자기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여관 주인은 예수님을 낳을 모친에게 방 한 칸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 왕 헤롯은 정권 유지를 위해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탄생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 3:19)"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죄인이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죄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죽이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했으며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이 영적인 소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담 이후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고후 4:3-4).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성령의 일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영적인 일은 성령에 의해 깨달을 수 있으며, 육신으로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영적 소경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 세상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11)
또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자기 땅"이라고 번역된 말(타 이디아)은 "자신의 소유들"(his own things)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요 19:27)에서 "자기 집"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만든 세상. 즉 자기 집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것이었고, 그리스도는 세상의 주인이셨으며, 세상은 그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왕을 거역하고 반역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세상에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가인도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또한 약속의 자녀인 이삭 역시 하나님이 야곱을 대신에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야곱의 10 형제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여버렸습니다(렘 44;16).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반역의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반역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포도원 비유를 통해서 그들의 얼마나 사악한 백성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원을 빌린 후에 소작료를 내지 않으려고 소작료를 받으러 간 종들을 죽인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아들마저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로마 군대를 보내서 그들을 흩으시고 그 땅을 다른 사람들, 즉 이방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하나님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도 죄와 어둠에 있기를 더 좋아하여 그리스도께 오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의 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주인이며 왕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관심을 갖거나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증거한 인간의 반역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요1:12,13)
"그러나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12). 이 사람들은 혈육이나, 육신의 의지나, 또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13)."
요한은 태초부터 있었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증거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사람들의 타락과 그들의 죄에 대해서 고발했습니다. 사람들은 참 빛이시며 자기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그 분를 알지도 못했고 또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소수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 "그를 영접하는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12)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십니다. 이럼 점에서 보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장자"라고 부르셨고(출 4:22), 다윗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시 103:13)."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사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사 64:8)."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요 8:41).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였다고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다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라....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함이라(요 8:42,44)."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진정한 하나님일까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거했습니다(요 1:12).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자기 자녀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또한 그는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이와 같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영점하고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권세"로 번역된 말(엑수시아)은 '권위'(authority)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힘(power)이나 능력(might)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부터 수여되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이 경우에 그에게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주체는 국민들입니다. 또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사람은 장관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이 경우에 장관에게 권위를 부여한 주체는 대통령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위를 수여하셨습니다. 이 경우 권위를 부여하신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국민이 부여한 권위는 그가 선거에서 패배하면 박탈당하게 되고, 대통령이 부여한 권위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여한 권위는 변할 수 없고,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으면 그 권위는 영원히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위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뜻으로 난 사람들(13)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사람의 힘이나 뜻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혈통"(the blood)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혈통은 피, 즉 인간의 유전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특별한 부모를 가졌거나, 특별한 민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났고, 에서는 이삭의 혈통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목사나 장로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둘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의 뜻"을 따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말 성경에 "육정"으로 번역된 말은 "델레마토스 사륵코스", 즉 '육신의 뜻(의지)'(the will of flesh)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사륵코스(flesh)는 영과 반대되는 뜻으로 인간의 육적인 본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의 뜻이나 의지에 의해 태어나지 않습니다. 셋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뜻'으로 번역된 말은 '뗄레마토스 안드로스', 즉 '사람의 뜻(의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헬라어 "안드로스"(man)는 사람, 또는 남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사람이나 남편, 또는 가장의 뜻에 다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혈통, 육신의 뜻, 그리고 사람, 남편, 가장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될까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으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첫째, 이 말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스마멜과 같이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사람입니다. 기생 라합이나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이 말은 육신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뜻을 따라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을 통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이 말은 남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리브가의 태 중에 있을 때에 이미 야곱을 선택하고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 육신의 뜻, 또는 사람(남편)의 뜻을 따라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진정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육신의 영광: 독생자, 은혜와 진리(요 1:14)
"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과 같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인류 역사 중에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직접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고, 그 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14(상))
요한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헬라어 "사르크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사르크스"는 "영"과 반대되는 의미로 때로 '죄를 따르는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이러한 연약한 인성을 입으심으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육신을 입으셨을까요? 첫째,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 죽음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히 2:14-15). 둘째, 그리스도는 썩어질 것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위해 살게 하시려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밷후 1:4).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려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롬 8:3). 넷째, 그리스도는 썩어질 육신이 영원히 썩지 않을 몸을 입게 하시려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롬 8:11).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은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거하셨다"고 번역된 말(에스케노센)은 원래 "장막을 쳤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이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구약의 "성막 사건'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불과 구름의 모습으로 성막 안에 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의 장막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했으며, 그 안에는 거룩한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분향단, 촛대, 진설병, 물두멍, 그리고 제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물건과 성막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들과 함께 사신 일은 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은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 성막을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실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에서 제사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의 삶의 중심에 계시며,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의 제목이 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중에 거룩한 장막을 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요한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계속해서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 분과 함께 동거동락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들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한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특권은 자신만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받은 특권이었습니다.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셨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로서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비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분이 행하신 이적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신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총애"이며,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은혜는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가장 큰 증인이셨습니다(롬 5:8).
물론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보다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은 죄인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자기 자녀가 되게 해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또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이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죄와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준수하셨고 진실과 진리를 따라 사셨습니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진리를 떠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은 참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유혹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고 증거했습니다.
성육신의 증거들 (요 1:15-18)
에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첫 번째 증거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직접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으며,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성육신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세례 요한의 증거(15)
"요한이 그에 관해 증거하여 외쳐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내가 말했던 그 사람입니다. 내 뒤에 오는 이가 나보다 앞서 계셨으니, 이는 그 분이 내가 있기 전에 계셨기 때문입니다(15).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두 번째 증거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제시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내가 전에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오시기 전에 이미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강력한 능력과 메시지로 인해서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분명히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나 보다 뒤에 오실 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고 세례 요한보다 공적인 사역을 늦게 시작하셨습니다. 또 세례 요한은 "그 분이 나보다 앞서 계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앞서 계셨다"는 말은 자신 보다 이전에 계셨고, 또는 지위나 능력, 그리고 영광에 있어서 자신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뒤에 오셨지만 그 분이 자기보다 앞서 계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 분이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출생했지만, 세례 요한 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를 볼 것을 기뻐했고 마침내 나를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또한 예수님은 "내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느니라!(요 8: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모두 다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축복(은혜와 진리)의 원천이 되신 그리스도(16-17)
"우리 모두 다 그의 충만한 것으로부터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라(16).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으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도다(17)."
성육신에 대한 세 번째 증거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무한한 축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줄 수가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충만"(플레로마)은 "가득 차 있는 것", "전체" 또는 "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보화가 충만하게 있었고,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이 충만했습니다(골 2:9). 또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지혜, 의, 거룩, 그리고 자비가 충만했습니다(고전 1:13).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충만한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충만한 중에서 주시기 때문에 인류에게 무한한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 위에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어려운 사람도 충만한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충만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기에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는 모세와 율법을 통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온전히 순종하는 자에게만 축복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역함으로 인해서 그들은 심판을 받고 이방인에게 정복되어 포로의 몸으로 이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달리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통해서 죄인들을 의인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정욕을 좆던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와 진리는 너무 커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충만하게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주시는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계시하신 그리스도(18)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되,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독특하신 하나님이 그를 나타내셨도다(18)."
성육신의 네 번째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계시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줄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품안에 계신 독특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품안에 계셨고, 하나님 또한 그리스도 안에 계셨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독생자"로 번역된 말(모노게네스)은 "외아들"이 아니라 "독특한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상세하게 가르쳐 주실 수 있었습니다. <최영찬 목사>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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