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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성도가 꼭 버려야 할 4가지(막14:10-21)

by 은총가득 2020. 11. 24.

성도가 꼭 버려야 할 4가지

(막14:10-21)


오늘 본문에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본문 21절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일 좋았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는 절대로 그런 불행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가룟 유다의 삶은 우리가 4가지를 버려야 함을 잘 가르쳐줍니다.

1. 시기심

흔히 고난 주간 넷째 날인 수요일을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바로 다음에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사랑 받는 장면이 3-9절에 나오고, 바로 이어서 10-11절에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이런 극과 극의 장면이 연이어서 나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의 시기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계산이 빨라 제자들 중에서 돈 궤를 맡을 정도였습니다(요 12:6; 13:29). 출신도 다른 11제자들은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가룟 유다는 남쪽 유다의 가룟이라는 도시 출신이었습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가룟 지방은 교육여건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나머지 11제자들은 두만강 인근 지역 출신인데, 가룟 유다는 분당 출신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출신부터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다른 제자보다 똑똑했고, 돈 궤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항상 자부심이 대단했고, 자기의 생각은 누구보다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제자들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으로 일반 회사원의 1년 연봉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그 돈을 한 순간에 날렸다고 생각한 가룟 유다는 주님 보는 앞에서 주님이 무안할 정도로 그 여인에게 “왜 그런 엄청난 돈을 낭비하느냐?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느냐? 왜 쓸데없는 행동을 하느냐?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이나 돕지!”하고 야단을 쳤습니다(요 12:4).

그때 예수님도 그 여인을 야단친 자기를 두둔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가만 두어라. 왜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위도 전해질 것이다.”

그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룟 유다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별 볼일 없는 여인을 두둔하며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것 같아 이런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정면에서 면박을 줄 수 있나?”

가룟 유다는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여인에게 상처를 입힌 생각은 하지 않고 상처를 받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여인에 대한 시기심이 불타올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일개 무명의 여인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아서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 복합적 감정의 동란으로 마귀가 쑥 들어가 결국 가룟 유다는 그 자리를 뛰쳐나가 예수님을 팔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이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잘 받는 것, 수치심을 잘 느끼는 것, 자기감정만 생각하고 자기만 옳은 줄 아는 것, 시기하는 것 등이 다 한 통속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가룟 유다와 같은 불행한 삶을 피하려면 시기심을 버리고 남이 잘하는 일을 기꺼이 칭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명예욕

왜 가룟 유다가 주님을 따랐을까요? 그것은 정치적 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런 야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는 특별히 그런 정치적인 야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인 야심을 이루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런 야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무수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 그렇다!”고 동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뒤엎고 자신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예수님은 그 반대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강한 능력으로 대중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소수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녀서 그 공동체는 여전히 개척교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어울리는 사람도 귀족 장상(將相)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천한 사람들, 즉 베다니 문둥이 시몬과 같은 사람과 식사하며 어울리는 것을 보니까 큰 비전을 가진 가룟 유다로서는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욕심을 비전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욕심과 비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비전은 외형에 흔들리지 않고 욕심은 외형에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고난이 있고,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도한 대로 되지 않고, 성취가 없는 것 같아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은혜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있는 사람은 고난이 있고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금방 주님을 배반하고 은혜를 배반합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가뜩이나 주님에 대해서 실망하고 배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게다가 향유 사건으로 자신의 자존심이 뭉개졌다고 생각하니까 참지 못하고 주님의 공동체를 뛰쳐나가 거대한 교권을 가진 대제사장들에게로 찾아가 결국 주님의 마음에 못질을 하고 은혜를 배반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야심이나 명예욕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것을 온전히 버리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야심과 명예욕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 야심과 명예욕을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으로 변화시키고,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비전을 이루어주시고 좋은 날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3. 물질욕

가룟 유다에게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가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게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도와주지 않느냐?”고 한 것은 그가 평소에 선교와 구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실상 베푸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 돈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아! 저 돈이 있었으면 무엇 무엇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의 물질적인 욕심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도전입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혜를 배반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 힘든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은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모습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부모님의 은혜를 받은 때가 언제입니까? 기저귀 차던 때입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세살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가장 많은 부모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부모의 가장 큰 사랑은 대개 우리는 의식하기 이전에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을 안다고 하지만 아는 것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받은 바 그 사랑의 엄청난 분량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요새는 물신주의가 팽배해서 물질로 하나님의 은혜를 재는 경향이 있지만 자녀의 건강을 비롯해서 물질 이외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한 은혜에 대한 열린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 사람의 은혜를 깨달아야 우리는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4. 자존심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을 보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가 가장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자존심이 강한 것이 때로는 성공과 땀을 가져다주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은 지나치면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파멸로 나아가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의 개척교회의 비전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향유 사건은 가룟 유다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힌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주님이 가룟 유다가 싫어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칭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때의 가룟 유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질책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여인의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뜻이 컸을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면 주님의 제자로서 때로는 질책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첫 번째 회개의 기회였습니다. 그때 자존심을 낮추고 “아! 그 여인의 행동에 그런 좋은 의미가 있구나! 내가 잘못했다!”고 하고 돌이켰으면 가룟 유다는 원래 주님께서 주님 공동체의 재정을 맡길 정도로 신뢰를 보낸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훌륭한 성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상한 자존심을 참지 못하고 그날 밤에 바로 대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주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는 가룟 유다가 그날 밤 대제사장을 찾지 않고 기도 처소를 찾거나 차라리 방콕에 가서(방안에 콕 들어박혀서) 상한 자존심을 달래며 차라리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으면 어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자존심 상한 일을 당해도 하룻밤 자고 나면 마음이 많이 차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즉시 대제사장에게 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이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두 번째 회개의 기회를 주는 말씀을 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 앉아 먹을 때에(최후의 만찬을 할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잘 몰랐겠지만 가룟 유다는 그 말이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나의 마음과 행위를 다 알고 계시는구나! 역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돌이켜서 주님께 회개의 고백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건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하고 자존심이 더 상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존심 때문에 더 상처를 받고 두 번째 회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가룟 유다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으로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는 주님의 말을 듣고 근심하는 마음으로 한 명씩 한 명씩 “접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룟 유다는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태연하게 모른 척 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세 번째로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때는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때 나머지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이 가룟 유다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렇게 이제는 누가 팔 것인지 명백하게 된 상황에서 주님은 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주님의 말씀은 듣는 가룟 유다에게는 큰 상처가 되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랑의 목자라면서 어떻게 이렇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나?” 그러나 그 주님의 직설적인 말도 충격 요법을 써서라도 가룟 유다가 회개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때 회개하고 “주님! 용서하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 그는 성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이 더 상해서 완전히 주님에게 마음 문을 닫고 그 자리를 뛰쳐나가 주님을 팔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삶은 우리에게 회개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회개입니다. 가룟 유다가 몇 번의 회개의 기회에 한번이라도 회개했다면 그는 반드시 인간 말종인 아닌 성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존심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존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나는 이미 죽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자존심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선다면 반드시 복된 역사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도 사도라 칭함을 받았고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실한 자리까지 갔습니다. 그는 재무를 맡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만약 그가 회개했다면 그는 어느 누구보다 훌륭하게 쓰임 받았을 것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주님 앞에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저주하며 세 번 주님을 저주했습니다. 베드로의 죄도 죄질로 말하면 가룟 유다보다 더 큰 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진정으로 회개해서 다시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죄질이 어떤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때로 우리는 후회스러운 일을 하고, 실수하여 잘못을 저지르며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와 어두움의 그림자가 있어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4가지, 시기심, 명예욕, 물질욕, 자존심을 잘 버림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