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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탕자의 비유 - 눅15:1-3, 11-32- 글들

by 은총가득 2020. 11. 23.

탕자의 비유 - 눅15:1-3, 11-32

 

 

 


15장 말씀은 모두 잃었다가 찾는 내용입니다. 잃은 양을 되찾고,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고, 잃은 아들을 되찾는 옴니버스 형식의 이야기입니다.

비율로 따져 봅시다. 잃은 양 비유는 백 마리 중 한 마리, 동전은 열 개 중 하나, 아들은 둘 중에 하나라는 식으로 100대 1, 10대 1, 2대 일이라는 세 비유를 통해 점점 집중력을 높여 갑니다. 예수님께선 그 다음 비유를 들지 않지만 아무래도 저와 여러분에게로 향한 1대 1의 질문으로 방향키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이 세 비유 중 잃은 양 비유는 떠도는 유목민을 위해서, 동전 비유는 상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 아들 비유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비유라고 할 만합니다. 즉, 눅15장은 당시 주목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오늘 본문인 탕자의 비유는 가장 유명합니다. 집 나간 아들을 다시 받아 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너무 잘 알려진 본문인데, 저는 오늘 분문을 놓고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우리네 이야기로 다시 각색해보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해 보면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탕자의 비유가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이야기였는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어느 정도 드러날 것 같습니다.

자 한번 들어보시죠. 각색한 현실의 탕자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탕자비유와 비교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내 못 이겨 유산을 물려줍니다. 그러자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모든 것을 탕진합니다. 다 없앤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자 그는 완전히 궁핍하게 됩니다. 이제 이 사람은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빌붙어 살면서, 그 집 돼지 키우는 일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돼지조차도 자기 밥그릇을 나누어주지 않을 정도로 이 사람은 고단한 배고픔의 나락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 이 사람은 자기의 현실을 한탄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아버지 집은 부자라서 집의 하인조차 먹을 것 만큼은 풍족한데, 나는 이렇게 여기서 굶어 죽에 되는구나! 차라리 이럴 바에는 아버지께 가서 용서를 구하자.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말하지 마시고 그저 품꾼으로 여기고 써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이 사람은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직 도착할 길은 멀었는데 아버지가 오고 있는 아들을 보게 됩니다. 멀리서 터벅거리며 오고 있는 피골이 상접한 아들의 몰골을 보고는 이 아들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 하게 됩니다. 그 동안 아버지는 자기 유산 달라고 했을 때부터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예상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집 나간 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생고생하고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대문 곁에 세워둔 지팡이를 움켜쥐고 동네 어귀까지 달려 나갑니다. 그러고선 돌아온 아들을 앞에 두고 욕지기를 시작합니다.
‘야 이놈아, 뭘 더 말아 먹으려고 돌아왔어?’

아들이 고개를 떨구고 울먹이며 대답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저를 아들로 보지 마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지팡이로 후려치며 말합니다.
‘그래 너 말 잘했다. 넌 더 이상 내 아들 아니야!’

그리고선 아버지는 종들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 내 아들였던 이 썩을 놈이 오늘 우리 집에 왔네. 이놈이 이전에 받아간 전 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받아달라고 하는군. 이 녀석은 이제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야. 내 아들은 이미 내 가슴 속에서 죽었어. 그 아들은 더 이상 살아 돌아오지 못하네. 내 아들은 내 가슴에 있고 이미 나는 아들을 잃었다네. 그 아들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네. 그런데 여기 이 놈이 죽은 내 아들 행세를 하면서 다시 받아달라고 하면서 여기 있네.’

아버지가 매몰차게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종들이 손가락질하며 '양심도 없는 놈'이라며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밭에 있던 큰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고, 맏아들은 집 안에서 일하던 종들이 자기 동생을 비웃으면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그 종들 중 하나를 불러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그러자 종이 말합니다.
‘작은 도련님이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보고는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하시더니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은 마음속으로 고소하게 여깁니다. 그러고선 단박에 아버지 옆에서 무릎 꿇고 엎드러져 펑펑 울고 있는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형이 말합니다.
‘얘! 내가 아버지 곁에서 평생 동안 떠나지 않고 일한 것 너도 알지? 난 단 한번도 아버지 명령을 어겨본 적도 없고,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하면서 이제껏 살아온 것 너 알거 아냐? 근데 도대체 너는 뭐야? 아버지 살림을 놀고먹으면서 창기들에게 갖다 받친 대가가 겨우 이거냐? 그러고선 이제 와서 다시 받아 달라구? 예라이 이놈아 꼴도 보기 싫다. 너 같은 놈이 이 집안 아들이라고? 넌 이제 더 이상 아버지 아들도 아니고 내 동생도 아니야! 내 동생은 이미 죽었고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버렸다구! 네가 있던 자리는 이미 다 사라졌고 그 자리를 다시는 절대로 되찾을 수 없어! 꺼져 버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이 이야기는 절대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듣기 거북한 이야기이고 신경질 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의 태도가 우리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잘 생각해보시면 이게 진짜 우리들 곁에서 일어나는 실제 이야기 아닌가요? 재산을 탕진하고 갈 곳 없어 엎드려 있는 아들, 용서와 사랑이 없는 비정한 아버지와 맏아들의 모습이 실은 우리의 진짜 모습은 아닌지요?

이 시간 조용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각색한 이야기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비슷한 듯 하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는 뭔가 빈 듯 공허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꽉 차 있고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실마리는 단 하나, 바로 사랑의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배경이 되는 장면이 눅15:1-3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큰 호응을 보였던 대중은 그 당시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사람들입니다. 세리들, 창기들, 죄인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런데 2절에 보시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위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외적으로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도 잘하고, 불우 이웃을 위해 자선도 꼬박꼬박하고, 기도도 유창하게 잘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아주 잘 지키는 소위 신실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 앞에서 이 탕자의 비유를 전합니다. 특별히 이 비유 속에 나오는 맏아들이 바로 외형적으로는 아주 신실하게 보이는 바리새인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실존주의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라는 분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귀부인이 아주 추운 겨울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갑니다. 이 연극의 내용은 노예로 붙잡혀 들어온 하녀 하나가 주인에 의해서 몹시도 학대를 받는 내용입니다. 이런 연극을 보면서 이 귀부인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계속 흐느껴 웁니다. 그런데 그 시간 극장 바깥에서는 이 귀부인을 마차에 태우고 온 마부가 너무 추워서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이야기에서 귀부인의 위선적인 행동을 고발합니다.

위선이란 ‘일관성의 결여’입니다. 그래서 위선자들은 자기가 입으로 말한 것, 확신하며 전한 생각과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며 살아갑니다. 모순된 삶이죠. 이것을 기독교적 술어로 '바리새주의'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적이라는 말은 내적인 영성과 내적인 확고한 마음이 결여된 채 경건성이나 도덕성을 바깥으로만 드러내 보이려는 일종의 노력, 즉 신앙의 탈을 쓴 위선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신앙의 탈을 쓰고 위선을 행하는 바리새인들의 속 마음을 고발하면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로 바꾸어 말하면, 아버지는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은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세리들을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돌아온 동생에게 잔치를 벌여주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맏아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둔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속 알맹이인 하나님의 마음인 포용적 사랑과 용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바리새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가른다 구분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범주에서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가르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전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임을 이 비유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에서 천사의 말과 방언을 할지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 비유를 아름답게 만드는 누룩은 바로 사랑과 용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랑의 용서가 우리 삶에 들어 올 때 삭막하고 무자비한 인생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오른뺨을 맞으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것이 세상사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도 주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예수님이 원하시는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이고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삶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용서를 한다는 것,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현실에서 불가능합니다. 밑지는 것 같고 미련한 짓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교회력 사도서간문 고전1:18절을 찾아 함께 읽어봅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법칙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미련하다고 가지 않는 십자가의 길, 영원한 사랑의 법칙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사랑의 용서라는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인생의 참맛을 깨닫는 예수님의 사람, 사랑의 사람,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에르미타쥐 박물관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8
캔버스에 유채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보다 더 아버지의 사랑을 잘 나타낸 이야기가 있을까?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기독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렘브란트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드러낸 이야기를 한장의 화폭에 담아냈다. 이 한 장면으로써 기독교의 오의를 나타내었으니 과연 위대한 화가가 아닐 수 없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 수 많은 명작들이 있지만, ‘돌아온 탕자’라고 하는 이 작품만큼 사랑받는 것도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이 유지되는 힘이야 말로 사랑에 기초한다는 것을 조용하지만 힘차게 표현해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 요청한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유산을 달라 하였으니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며칠이 못되어 유산을 나눠 받은 작은 아들은 먼 타향으로 떠나 그곳에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써 버리고 만다. 마침 그곳에 흉년이 들어 작은 아들은 먹을 것이 없어 그 지방 사람들의 종이 되고, 돼지치는 일을 한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주는 이가 없어 굶어죽게 되었다. 그제서야 한탄한다. 내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 조차도 배불리 먹지 않았던가?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아버지가 먼저 멀리서 오는 작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작은 아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데, 아버지는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하인들을 시켜서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며, 발에 신을 신기라 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베푼다. 밭에서 일하던 맏아들은 무슨 일인가 하인에게 알아 보라 한다. 죽은 줄 알았던 작은 아들이 살아 돌아와 아버지가 잔치를 베푼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맏아들은 분노하며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이렇게 수고하였어도 잔치 한번 베푸신 적이 없는데,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말아먹은 동생을 위하여 이런 큰 잔치를 베푸심은 어찜이니이까’ 아버지가 대답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화면으로 돌아와 보자. 성경의 내용대로, 한쪽 신발이 벗겨진채 남루한 옷을 걸친 작은 아들은 아버지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어 무릎꿇어 용서를 빌고 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양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분노한 맏아들이 이 상황을 무섭게 주시하고 있다.

 


명암법을 즐겨 사용하는 렘브란트는 주인공들을 밝게 하고, 그 외의 배경과 주변인물들을 어둡게 함으로써, 주제를 알기 쉽게 드러낸다. 돌아온 탕자도 마찬가지이다. 독자들은 알아 맞춰 보시라. 그림에서 가장 밝게 표현된 부분은 어디인지? 아버지의 얼굴과 맏아들의 얼굴이다. 맏아들의 얼굴은 모든 분노를 동생에게 쏟아 붓는 강렬한 인상이다. 맏아들은 가문의 흥망성쇠를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었다. 혹여라도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될까 하여 행동도 조심하고, 밭에 나가서는 게으르지 않게 맡은 바 과업에 충실하였다. 그로 인하여 가문은 번창하였고, 그러한 일을 이룬 맏아들은 모든 이들의 칭찬의 대상이었다. 이런 맏아들에게 늙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동생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형의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분노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세상은 바르고 곧은 것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맏아들은 바르고 곧다. 그러나 아버지는 크고 높다. 바른 아들과 허랑방탕한 아들 모두를 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바르게 사는 큰 아들만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허랑방탕하였어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자까지도 아끼는 분이다. 큰아들의 ‘의’를 뛰어 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 이다.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하다. 법과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있다면 세상은 살벌할 것이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다. 누구나 허물이 있다. 그런 허물을 누군가가 보듬어주지 않으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의와 불의를 뛰어 넘어 더 높은 자리에서 모두를 포용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우화를 통해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세상은 사랑으로 지탱되는 것이다. 늙은 아버지의 자애로운 표정에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맏아들과 아버지의 표정을 대비시킴으로써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라고 하는 기독교의 핵심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었다.

|작성자 백야나라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군중들에게 “구원의 은혜”에 관하여 말씀하였다. 주(主)는 이 설교 속에서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돈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 후에, 그가 좋아하는 돌아온 탕자 아들에 관한 비유를 더하였다. 예수는 말씀했다:

 

“사무엘로부터 요한에 이르는 선지자들이 너희들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진리를 탐구하라고─ 훈계하여 왔다. 그들은 항상 ‘만날 수 있는 동안에 그 주님을 찾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가르침을 가슴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너희들에게 보여주려고 내가 왔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가서, 길을 잃고 헤매는 그 양을 발견하자, 그것을 어깨에 메어 친절하게 데리고 돌아와서 양 떼 속으로 다시 넣어주었다는, 선한 목자의 이야기를 내가 너희에게 여러 번 해 주었다. 그리고 잃었던 양이 무리 속으로 들어가자, 그 선한 목자가 자기 친구들을 부르면서, 잃었던 양을 발견한 것에 대하여 함께 기쁨을 향유하자고 그들을 초대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기억할 것이다. 다시 말하겠는데,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명의 의인들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을 더욱 기뻐한다. 혼들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관심을 더욱 깊게 해줄 뿐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분부대로 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며, 사람의 아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이 사실이다.

 

 

“회개한 후에야, 그리고 희생물과 참회의 행위의 결과로 신성한 용납이 온다고 너희가 배워왔지만, 내가 너희에게 약속하는 것은, 아버지는 너희가 회개하기도 전에 너희를 용납하며, 너희를 찾아서 양 무리에게로, 영적 진보가 있는 아들관계의 왕국으로 기뻐하면서 데리고 오도록, 아들과 그의 동료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너희는 모두 길을 잃은 양과 같으며, 길을 잃은 그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내가 왔다.

 

 

“그리고 너희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목걸이를 만들려고 은으로 된 열 개의 동전들을 감고 있다가, 하나를 잃어버려서, 등을 밝히고 집안을 열심히 쓸면서 잃어버린 그 은 동전이 발견될 때까지 쉬지 않고 찾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잃었던 그 동전을 발견하자마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서, ‘내가 잃었던 동전을 찾았으니 나와함께 기쁨을 향유하자.’고 말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겠는데, 한 죄인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양 떼로 돌아오면 하늘의 천사들의 현존 안에서 항상 기쁨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다는 것을 너희의 가슴속에 새겨두기 위해서이며, 이렇게 찾아 나설 때, 구원을 필요로 하며 서 있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기 위한 우리의 부지런한 노력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우리는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찾기 위하여 광야에 나가며, 집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도 한다. 그 양은 부지불식간에 길을 잃게 된 것이다; 그 동전은 시간이라는 먼지로 덮이고, 사람들의 일들로 누적되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어느 부자 농부의 철없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는데, 그 아들은 고의로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다른 나라 땅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양들은 아무 의도 없이 방황하게 되었지만, 이 젊은이는 계획적으로 자기 집을 떠났다는 것을 너희가 기억하기 바란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동생은 근심 걱정이 없고 무책임(無責任)하여 항상 즐거운 시간만을 찾으며 책임은 회피하였으나, 반면에 그의 형은 진지하고 침착하며 열심히 일하고 책임을 기꺼이 지는 사람이었다. 이윽고 이 두 형제들의 사이가 나빠졌으며; 둘이 항상 다투고 언쟁을 하였다. 동생은 명랑하고 활발하였지만, 게으르고 신뢰성이 없었다; 형은 침착하고 부지런하였지만, 반면에 자아-중심적이고 무뚝뚝하며 교만하였다. 동생은 놀기는 좋아하였지만 일하는 것은 피하였다; 형은 일에 열심이었지만 잘 놀지 않았다. 두 형제의 불화가 너무 심해지자, 동생이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저에게 오게 될 당신의 소유물들 중 3분의 1을 저에게 주시고 세상에 나가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요청을 들은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에 있으면 형 때문에 얼마나 불만스러워 하는지를 알고, 자기 재산(財産)을 떼어서, 작은아들의 몫을 주었다.

 

“그 젊은이는 몇 주 후에 자기 돈을 다 모아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지만, 재미있으면서도 돈을 벌만한 일을 찾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곧 모든 유산을 탕진하게 되었다. 재산이 모두 떨어졌을 때, 그 지방에 오랫동안의 기근이 닥쳐왔으며, 곤궁한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배고픔을 참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자, 그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 고용이 되었는데, 그를 돼지 키우는 곳으로 보냈다. 그 젊은이는 돼지들이 먹는 옥수수 껍질로 배를 채우지 않을 수 없었으나,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매우 배가 고팠을 때,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 고용된 많은 하인들에게는 배부르게 먹고 남을 만큼 빵이 풍성한데, 나는 이곳 이국땅에서 돼지나 키우다가 굶주려 죽게 되었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다만 저를 고용된 하인들 중의 하나처럼 여겨주십시오’ 그리고 이 젊은이는 가슴의 결정이 되자,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향하였다.

 

 

“이 때 이 아버지는 아들로 인하여 몹시 슬퍼하였다; 그 명랑하고 철없는 아들을 무척 보고 싶어 하였다. 이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사랑하였으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던 날, 그가 아직도 멀리 있는데,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사랑 가득한 연민으로 감격하여, 그를 만나려고 뛰어 나갔으며, 자애롭게 환영하면서 그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인사가 끝나자, 그 아들은 눈물을 흘리는 자기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당신 앞에 죄를 지었으니; 저는 더 이상 아들이라 불려 질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그 아들은 고백을 다 마치지도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이때에 뛰어 달려오는 너무도 기뻐하는 아버지가, 하인들에게, ‘내가 보관해 둔 가장 좋은 옷을 빨리 가져와서 그에게 입히고, 아들을 상징하는 반지를 그의 손에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발을 가져오라’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행복한 그 아버지는 발이 부르트고 기진맥진한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인들을 불러 말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살찐 송아지를 잡아 음식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가져오고 흥겹게 놀도록 하자.’ 그들은 모두 그 아버지에게 모여 그의 아들이 돌아온 기쁨을 향유하였다.

 

 

“이 무렵, 그들이 축하하고 있는 동안, 큰아들이 들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집에 가까이 오면서 음악 소리와 춤을 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뒷문으로 가서, 하인들 중 하나를 불러내어 이 모든 잔치가 왜 벌어지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하인이, ‘오래도록 잃었던 당신의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으며, 당신 아버지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자기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기쁨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들어오셔서 동생을 환영하고 당신 그를 다시 아버지 집에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그 형은 이 말을 듣자, 너무도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동생을 환영한 것에 대하여 큰아들이 분개하였다는 말을 들은 그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 그에게 간청하였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의 설득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일하였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었는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삼 년 동안 꼬박 아버지 곁에서 보살펴 드렸는데, 저의 충성스러운 봉사에는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의 소유를 창기들과 함께 탕진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자, 서둘러 살찐 송아지를 잡으시고 그를 즐겁게 만드셨습니다.’

 

 

“이 아버지는 자기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였기 때문에, 큰아들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내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너는 언제라도 새끼 양을 잡아서 네 친구들과 흥겹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동생이 돌아왔으니, 나와 함께 들어가서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아들아 네 동생을 잃었다가 찾은 것과; 살아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을 생각해 보아라!’”

 

 

이 비유는 예수가 청중들의 가슴속에,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오려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버지의 기꺼운 마음이라는 것을 심어주기 위하여 제시한 모든 비유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효력적인 것들 중의 하나였다.

 

예수는 이 세 가지 이야기들을 동시에 말씀하기를 대단히 좋아하였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생명의 길에서 멀어졌을 때, 아버지는 그러한 잃어버린 자들을 잊지 않으시며, 그 양떼의 참 목자인 자기 아들과 함께 나가셔서, 잃은 양을 찾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씀하였다. 그리고 집안에서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는, 혼동되거나, 좌절당하거나, 또는 일생의 물질적인 염려들과 축재(蓄財)로 인하여 영적으로 눈이 먼 모든 사람들을 찾으시는 신성한 노력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잃어버린 아들, 방탕한 자를 환영하는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한 것은, 잃어버렸던 아들을 아버지의 집과 가슴속으로 얼마나 완벽하게 복귀시키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예수는 가르치시는 동안 이 방탕한 아들 이야기를 얼마나 여러 번 반복하였는지 모른다. 예수는 이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의 이웃에 대한 정의(正義)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좋아하였다.

 

UrantiaBook [169:1.1~16]

제 169 편 펠라에서의 마지막 가르침

1.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

출처: 유란시아 코리아(URANTIA Korea) : 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