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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가상칠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

by 은총가득 2020. 11. 23.

[가상칠언]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1)

*성경: 눅 23.33-38


죽음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든다. 그래서 유언은 그 어떤 말보다도 무겁게 여겨진다.

예수님도 운명하실 때 유언 같은 말씀을 하셨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4복음서에 의하면 모두 7마디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가상칠언이라 부른다.

이 가상칠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서 운명직전에 자신의 심중을 기탄 없이 드러냈다는 점이다. 이 말들은 예수의 성품이 지니셨던 위대한 힘과 아름다움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께서 당했던 정신적 및 신체적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말해 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오셨고 왜 죽으셨는지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는 아래와 같은 순서로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 중재의 기도(23:34):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2) 도적의 기도에 대한 응답(23:43):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3)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들에 대한 말씀(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4) 영적인 고립감에 대한 외침(27:46,15:34): 엘리엘리 라마사막다니
(5) 육체적 고통에 대한 시인(19:28): 내가 목이 마르다.
(6) 승리의 선포(19:30): 다 이루었도다!
(7)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가득 찬 위탁 (23:46):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맡기나이다.

 

십자가에서 처음하신 말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 34)

•첫 말씀, 그것은 기도였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기도였습니다. 설교도 원망이나 저주가 담긴 욕설도 아니었습니다. 자기비하의 독백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였다.

★우리의 첫 반응은 기도여야 한다. 모든 일의 시작이 기도여야 한다.
니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느끼고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왕의 술맡은 관원장으로 항상 왕의 얼굴을 대면해야 하는 자의 위치에서 금식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자신의 직책을 박탈을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왕과 가까이에서 대면했다. 왕은 그의 얼굴이 평상시와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챘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그는 마음속으로 아주 짧은 시간 묵상으로 기도했다. 그의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그 순간에 기도할 수 없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한다.

배반과 핍박 앞에 우리의 첫 반응도 기도여야 한다. 저주의 기도가 아닌 용서의 기도를 해야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

기도가 가장 앞서야 한다. 말보다 행동보다 앞서야할 것은 기도다. 사람보다 세상보다 우리가 먼저 찾고 구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특히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가장 먼저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느헤미야가 평소 기도의 사람이었기 그 짧은 순간에 기도할 수 있었다. 그는 기도가 습관화 되었다. 그의 삶의 우선순위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시 105:3-4)


세상을 향한 기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드리신 기도내용은 성경에 여러차례 기록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기도문이다. 또 하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제자들을 위해 하신 중보의 기도였다. 성서학자들은 그 기도를 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에는 이 기도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내 기도는 이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17:20-23)

위의 기도는 제자들을 위해 하신 기도로 이러한 내용의 기도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당연한 기도일 수 있다. 자식 같은 이들을 위해 안쓰럽고 사랑스러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

반면 십자가상에서 첫 말씀이자 기도는 세상을 향한 기도이다.

자신을 구주로 거부할 뿐 아니라 조롱하고 대적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출입하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예루살렘에 압성할 땐, "호산나... 왕리시여!" ,뢰치던 그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바를 돌려달라"고 녹청높여 외쳤던 그들이었다.

뱀의 혀처럼 갈라진 혀를 군중은 가졌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을 필요할 땐 끌어당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었다.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예수님께 침 뱉고 뺨을 때리고 발가벗기고 비아냥거렸다. 바로,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제자들을 위해서도, 끝까지 울면서 십자가 밑에까지 동행한 여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지 않으셨다. 원수를 위해 용서를 구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첫번째 반응은 기도여야 한다. 또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진 그릇이 되어야 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성품이 가득하길 축복한다.


• 타협할 수 없는 기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첫번째 말씀은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그 자신의 윤리 규준(마5:44)을 완전히 실증하였음을 보여 준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


•탓하지 않고 담당하심
흉악한 죄인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푼 예수님을 배신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눈길은 한 없이 자비로웠다.

세번 모른다고 맹세와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눈길은 따뜻했다. 모두가 추워 모닥불을 피웠고 주변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지만 베드로 비 겁한 마음을 녹인 것은 예수님의 따뜻한 눈길 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전가하려는 죄성을 가졌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결국은 그 끝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예수님 덮어주고 변호해주신다.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신다. 속죄제를 드릴 때 당사자는 동물의 머리 에 손을 얹었다. 자신의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켰다.


•참된 변화, 영향력은 기도가 만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허신 7마디 말씀 중 그 첫 말씀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한 기도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크고도 ㅣㅍ다.

십자가상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허공을 울리는 공허한 공기의 떨림이 아니었다. 메아리처럼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오는 공기의 진동이 아니었다. 스데반이 그 현장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후 초최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예수님의 죽음의 장면과 유사점이 많다. 특히 그가 마지막 순간에 드린 기도는 더욱 그렇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7:59-60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그 대상만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의 기도를 그대로 재현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이렇게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듣고 있는 한 젊은이를 소개한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행 7:59-60)

스데반의 기도는 핍박자 사울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는 첫 영향력이 되었다.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중요하고 강력한 영향력의 요소를 더하고 싶다. 그것은 중보기도다.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진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그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지금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중보자들을 찾고 있다. 그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이 시대를 바꿔가시며 사람들을 변화시켜 가신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담은 거룩한 영향력이 되길 축복한다. 아멘.


•} 기도:
나의하나님,
우리의 첫 반응이 기도가 되게 하소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성품이 담긴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원망이 아닌 용서를 담기길 원합니다. 저주가 아닌 축복이 담겨지게 하옵소서. 사랑과 칭찬이 담겨지게 하옵소서.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방관자가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핍박자도 사도로 바뀔 것입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사람들의 속사람을 바꾸는 하나님의 방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상칠언]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두번 째 말씀은 예수님 우편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십자가상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첫 말씀은 죄인들을 위해 드린 중보의 기도라면, 두번 째는 자신을 향해 구원을 요청하는 한 죄인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한 사람은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시오” 하며 예수님을 모욕하였으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너는 똑같이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싸지만 이분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였다. 그러고서 그가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3:39‭-‬43).


오늘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우편 강도는 예수님의 기도를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운명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이 기도가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의 발아래 있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조롱할 때에 오히려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그들을 위해 용서를 간구하는 예수님을 그는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메시아로 알았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어들과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무례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리들을 보았고 거기에 반응하시는 예수님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성품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결코 그렇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강도나 그의 발아래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분명 그의 기대에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담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값으로 죽는 죽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 용서하시길 기뻐하시는 주님
십자가형은 일류가 만든 가장 흉악한 형벌입니다. 로마 정부는 극도로 악한 범죄자에 대해서만 이 형벌을 내렸습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고 민심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만 내린 형벌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그가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행악자였다고 누가는 밝힙니다. 강도 자신도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으로 당연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는 한마디로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그런 끔찍한 죄인도 예수님은 용납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나님은 첨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십자가상의 우편도가 받은 구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는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도피처로 생각합니다. 죽음은 결코 도피처나 피난처가 아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시작입니다. 졸업과 같습니다. 졸업은 끝이 아닌 시작인 것처럼 죽음은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죄의 삯이 사망이기에 죽은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이 열리면 두 갈래 길이 펼쳐집니다. 세 갈래도 그 이상도 아니고 외길도 아닙니다. 정확히 두 갈래 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과 낙원으로 인도하는 두 길만이 존재합니다.


• 오늘 나와 함께
예수님께서 우편 강도에게 약속한 낙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일까요?

★낙원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다.
죄는 분리를 가져왔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의 분리는 곧 죽음, 자체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죄인의 운명은 죽음, 하나님과의 단절과 분리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지옥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영원히 단절되어 소외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그것은 실제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있는 곳과 천국은 오갈 수도 없는 다른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여러가지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간구도 요구도 거절당합니다. 전혀 긍휼이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곳이 지옥이며 이런 상태가 바로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낙원은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단절된 사이에 다리가 되기위해 오신이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이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일어난 첫 번째 결과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좌정하여 계신 거룩한 장소를 상징입니다. 이곳은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이 막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일년에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어린양의 피를 들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일어난 두번 째 사건은 무덤이 열린 것입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유대인들의 무덤은 바위에 생긴 동굴이 많았습니다. 바위가 터졌다는 것은 바로 바위속 무덤이 열린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잠들어 있던 성도들이 부활했습니다. 그들이 마태가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살아있는 이들이 많았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를 다시 맺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죄의 담을 허셨습니다.


• 더 기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이 말씀대로라면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아픔보다도 극악 무도한 강도가 그날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것으로인해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가상칠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

 

 

가상칠언,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말씀


예수님께서 운명직전에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이 일곱 마디의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낸 진솔한 표현이였다. 이 말들은 예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드러내 주며,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고 왜 죽으셨는지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시는 말씀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


(1) 중재의 기도(눅23:34)
(2) 도적의 기도에 대한 응답(23:43).
(3)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들에 대한 말씀(요19:2627)
(4) 영적인 고립감에 대한 외침(마27:46,막15:34)
(5) 육체적 고통에 대한 시인(요19:28)
(6) 승리의 선포(19:30)
(7)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가득 찬 위탁 (눅 23:46).


십자가상의 칠언 중 세 마디의 말은 신비스러운 어둠이 천지에 내리기 이전인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말한 것이다(마5:44).

가상칠언의 구조(대조)


내용상으로 시간상으로 네번째 말씀은 일곱말씀의 중심에 위치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왜 당신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망에 찬 고백이 아니다. 친 아들이 아버지(하나님)께 버림받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한 고백이다. 특히 네번째 말씀부터 시편 22:1부터 69:21까지 자신(메시아)의 희생과 죽음에 대한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었다(예수께서 이 시편을 전체를 암송하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시말해 제 4언을 중심으로 제 1언부터 3언까지는 "사람과 자신의 사역'에 관계된 말씀들이라면, 제 5언부터 7언은 '자신과 사명'과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다.


1) 제1언/ 첫번째의 말: (눅23:34)은 예수님께서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그 자신의 윤리 규준(마5:44)을 완전히 실증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2) 제2언/ 두 번째의 말: (막23:43)은 예수님께 긍휼과 자비,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이 가져올 천국을 확신하고 계셨으며 회개하는 자를 파멸로부터 건져내어 그를 영원한 축복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3) 제3언/ 세 번째의 말/ (요19:2627)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간의 의무를 빈틈없이 수행하였으며 땅위에서 맺어진 부모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분명히 밝혀 준다.

예수가 인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마리아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 말이 끝난 다음에 예수는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는데,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 그에게 임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4) 제4언/ 네번째 말(마27:46, 막 15:34): 시편 22:1절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에게서 단절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단절은 그 자신의 죄의 결과가 아닌 그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제5언/ 다섯 번째의 말: (요19:28)은 시편 69:21절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며 실제적인 육체적 고통을 나타낸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

6) 제6 / 여섯 번째 말: 예수님께서 느끼고 있는 승리와 만족과 인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일이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7) 제7언/ 일곱 번째 말: 시편 31:5절과는 달리 "아버지여"라는 말은 맨 앞에 두고 있는데, 예수는 이 말을 하면서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다.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아들이 드리는 고백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말보다 의미있고 값진 말씀이다. "빛이 있으라"(창세기 1:3)하신 그 말씀이 다시 재현되는 말씀이다. 우리의 죄가 만든 어둠을 거두시고 재창조의 새벽을 여시는 말씀이다. 이 일 후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며 잠자던 성도들이 많이 살아난 것은 그것을 반영하는 첫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이 일곱말씀(가상칠언)이 공허한 말이 아님을 주님은 부활이전에 먼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드러내셨고 부활을 통해 재 확인해주셨다. by pray4ch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