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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누가복음 14장 원어 강해 및 주석

by 은총가득 2020. 11. 20.

누가복음 14장 원어 강해

 

눅 14:1~11 안식일의 치병과 말석에 관한 가르침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예수는 본문을 통해 일반적인 자세와는 정반대되는 역설적인 지리를 선포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 선포가 지니는 독특한 역설의 일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본문은 철저하게 낮아짐으로써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실행을 기억나게 한다.

1.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1-6절)

1) 고창병든 한 사람
(Kai;...sabbavtw/...aujtoi; h&san parathrouvmenoi aujtovn....kai; ijdou; a[nqrwpov" ti" h&n uJdrwpiko;"카이…삽바토…아우토이 에산 파라테루메노이 아우톤…카이 이두 안드로포스 티스엔 휘드로코피코스; 안식일에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고창병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1,2절)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된 것은 눅7장과 13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두령이 선의를 가지고 예수를 초청한 것이 아님은 파라테루메노이(parathrouvmenoi엿보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 단어는 '엎드려서 기다리다'의 의미를 포함하며, '악의를 가지고 면밀하게 살펴보다'라는 의미도 지닌다.(W.Bauer).
이런 사실로부터 고창병자가 일부러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기는 하지만 별로 신빙성은 없는 것 같다(W.Hendriksen).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문에선 환자에 대해 강하게 주의를 집중하는 표현으로서 '고창병이든 사람'이라는 말 앞에 이두(ijdouv보라)라는 단어가 나온다(Nestle-Aland).
휘드로피코스(uJdrwpiko;"고창병 든)는 '고창병을 앓는'이라는 표현이며, 휘도르(uJdwr물)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고창병은 신체 조직에 수분의 과다한 축적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이다.

2) 병자를 고쳐 주심
(kai;...oJ !Ihsou'"...#Exestin tw'/ sabbavtw/ qerapeu'sai h] ou[_oiJ de; hJsuvcasan. ... ijavsato aujto;n kai; ajpevlusen. 카이…호 예수스…엑세스틴 토 삽바토 데라퓨사이 에 우 호이 데 헤쉬카산…이아사토 아우톤 카이 아페뤼센;예수께서…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저희가 잠잠하거늘…예수께서…고쳐 보내시고,3,4절)
아포크리데이스(ajpokriqei;"대답하여)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사용한 아포크리데이스라는 의미를 지니긴 하지만, 종종 '상황에 대해서 대처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는데, 본문은 후자의 경우인 것 같다(Liddle &Scott).
헤쉬카산(hJsuvcasan잠잠하거늘)이란 표현을 통해, 예수의 대적자들이 더 이상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아사토(ijavsato고쳐)는 의사의 치병을 표현하며 동시에 죄사함을 은총을 표현하기도 한다(W.Bauer).

3) 예수의 가르침
(kai;...uiJo;" h] bou'" ... oujk eujqevw" ajnaspavsei aujto;n ejn hJmevra/ tou' sabbavtou_ ... oujk i[scusan ajntapokriqh'nai카이…휘오스 에 부스…우크 유데오스 아나스파세이 아우톤엔 헤메라 투 삽바투…우크 이스귀산 안타포크리데나이; 또…아들이나 소나…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대답지 못하니라, 5,6절)
티노스(Tivno"누가)는 원래 '누구의'라는 뜻이다. 또한 페세이타이(pesei'tai빠졌으면)는 미래형태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너희 중의 누군가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진다면'이다. 우크 이스퀴산(oujk i[scusan못하니라)에서 이스퀴산은 원래 '강하다, 할 수 있다'를 의미한다. 또한 안타포크리데나이 (ajmtapokriqh'mai대답지)는 안티(ajnti)와 아포(ajpov)의 이중복합어이다. 안티는 '회답으로, 대꾸하여'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대답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강한 반발을 보이지 못했음은 물론 예수의 질문에 대해서 대꾸조차 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W.Hendriksen, W.Bauer).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짐승의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면서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한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음에 대해서 예수는 본문을 통해 질책하고 있다.

2. 상좌와 말석에 관한 가르침(7-9절)

1) 사람들의 선택
(#Elegen de; pro;" tou;" keklhmevnou" parabolhvn, ejpevcwn pw'" ta;" prwtoklisiva" ejxelevgonto, levgwn pro;" aujtouv",엘레겐 테 프로스 투스 케클레메누스 파라몰렌 어페콘 포스타스 프로토클리시아스 엑셀레곤토 레곤 프로스 아우투스;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7절)
엑셀레곤토(ejxelevgonto택함을)란 3인칭 복수 미완료 과거 중간태로서 청함받은 자들이 자신들은 위해서 택하되, 한번뿐 아니라 매번(계속적으로) 그렇게 택하였음을 암시한다. 에페콘(ejpevcwm보시고)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W.Bauer).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앉는 것을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셨음과 무언가를 말씀하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다. 프로토클리시아스(prwtoklisiva"상좌)는 본래 명예로운 자리를 뜻하며 집주인의 바로 옆 자리를 의미한다(Liddle & Scott).
파라볼렌(parabolhvn비유)은 원래 현재적 상황과 밀접한 내용을 다른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이후에 나오는 비유는 현재적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 잔치라는 새로운 정황을 도입하므로 비유라는 표현이 적절하고 올바르다(W.Hendriksen).

2) 상좌에 앉지 말라
($Otan klhqh'/" uJpov tino" eij" gavmou", mh; katakliqh'/" eij" th;n prwtoklisivan,호탄 클레데스 휘포 티노스 에이스 가무스 메 키타클리데스 에이스 덴 프로토클리시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8a절).
호탄( {Otan 때에)은 원래 ' 마다'를 받아 준다. 그러므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적 효혁을 지닌 규칙으로서 '상좌에 앉지 말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그것은 상황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전제로 하여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A.H. Ch-ase). 카타클리데스(katakliqh'/"앉지)는 원래 유대인들이 식사 시간에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기대어 눕다'가 원래의 의미이다(Liddle & Sc-ott). 또한 우리는 '앉지 말라'에서 사용한 부정사가 우(ou')가 아니라 메(mh;)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행동 자체에 대한 금기만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우(ou')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어떤 정도 표현을 하고자 메(mh;)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좌에 앉는 구체적 행동 표현 이와에 심리적으로 상좌에 앉지 않겠다는 무언가의 결심을 요구하는 것임을 우리는 암시적으로 알 수가 있다(H.W.Smyth).

3) 부끄러운 결과
(ejntimovterov" sou h&/ keklhmevno" uJp! aujtou', ... Do;" touvtw/ tovpon, kai; tovte a[rxh/ meta; aijscuvnh" to;n e[scaton tovpon katevcein.엔타모테로스 수 에 케클레메노스 휘프 아우트…도스 투토 토폰…아륵세 메타 아이스퀴네스 톤 에스카톤 토폰 카테케인;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자리를 내어주라…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8b,9절).
본문은 앞 절과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에(h/경우에)는 가정법으로서 '만약 청함을 바은 사람이 있다면'의 의미이다. 그리고 메포테(mhvpote)는 ' 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것은 뒤의 에레이(ejrei'하리니)와 연결되어지며, 결국 본문은 '너를 청한 자와 더 높은 사람이 너에게 라고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이다(H.W.Smyth).
본문에서 에(h/)라는 가정법과 에레이(ejrei')라는 미래 시제를 사용한 것은 이런 두 가지 상황이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사건이기 때문이다(A.T.Robertson).
도스(Do;"내어 주라)라는 표현은 명령형이다. 즉 주인이 상석에 앉은 사람을 권유를 통해 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강권적인 명령으로써 자리를 바꿔 앉도록 만드는 것이다(W.He-ndriksen).
결국 상좌에서 자신을 뽐내고자 하는 사람은 오히려 말석으로 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3.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0,11절)

1) 말석에 앉으라
(ajll! o{tan klhqh'/" poreuqei;" ajnavpese eij" to;n e[scaton tovpon,알라 호탄 클레데스 포류데이스 아나페세 에이스 톤 에스카톤 토폰;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10a절)
상석에 앉아서는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은 알라(ajlla차라리)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대조와 반대를 의미한다(W.Bau-er). 아나페세(ajnavpese앉으라)는 명령형으로서 특히 식사 시간에 앉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즉 예수께선 '상석에 앉지 말라, 반대로 말석에 가서 앉으라'고 명령을 하고 계신다. 성경의 많은 표현들과 예수의 선포들이 가지는 특색 주의 하나가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도록 촉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C.H.Dodd). 에스카톤 토폰(e[scaton tovpon말석)은 맨 마지막 자리이며, 잔치에 간신히 참여하는 형편을 보여 주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잔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껴야 할 사람이 앉는 자리가 바로 말석이다.

2) 영광스런 결과
( i{na...Fivle, prosanavbhqi ajnwvteron:... e[stai soi dovxa ejnwvpion pavntwn tw'n sunanakeimevnwn soi. 히나…필레 프로사나베디 아노테론…에스타이 소이 독사 에노피온 판톤 톤 쉬나 나케이메논 소이;그러면…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0b절)
본문은 이전에도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앞의 본문과 연결되어 있다. 본문은 히나(i[na)로시작하는데, 히나(i[na)의 의미는 ' 하도록 하기 위하여'이며, 에레이(ejrei'하도록)하는 말과 연결된다. 이 말은 레고(legw말하다)의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이 문정을 직역하면 '친구여 올라 앉으라라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원문의 문자적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문자적 의미는, 자신이 결국 높임을 받기 위한 계산된 행동으로서 겸손을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말석에 가서 앉아야만이 주인이 그를 들어 상석에 올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진실된 겸손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예수의 결론
(o{ti pa'" oJ uJyw'n eJauto;n tapeinwqhvsetai, kai; oJ tapeinw'n eJauto;n uJywqhvsetai. 호티 파스 호 횝손 헤아우톤 타페이노데세타이 카이호 타페이논 헤아우톤 휩소데세타이;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1절)
헤아우톤(eJauto;n자기를)은 '스스로를'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자신의 몸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Liddle & Scott).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영화롭게 하려는 자는 낮아지게 될 것이다.
또한 타페이노데세타이(tapeimwqhvsetai낮아지고)와 휩소데세타이(uJywqhvsetai높아지리라)는 둘 다 미래 수동형이다. 그렇다면 누가 낮아지게 만들고 높아지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결국 자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영화롭게 하실 것이지만,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낮추실 것임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눅 14:12~24 큰 잔치의 비유

거부된 초청에 관한 예수의 비유

본문은 잔치와 초청 그리고 사람들의 거부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잔치는 초청받지 못했던 사람들로 채워지게 된다. 본문은 하나님의 초청이 언제나 우리들을 향해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님을 붐명하게 보여 준다.

1. 가난한 자들을 청하라(12-15절)

1)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Elegen de; kai;...mh; fwvnei... mhde; tou;" ajdelfouv"... kai; gevnhtai ajntapovdomav soi. 엘레겐 데 카이…메 포네이…메데게이토나스 플루시우스…카이 게네타이 안타포도마 소이;또…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2절)
포이에스(poih'/"베풀거든)는 원래 '하다, 만들다, 생상하다'를 의미하는데, 식사와 연관되어서는 '주다, 준비하다'를 뜻한(W.Bauer). 데이프논(dei'pnon저녁)은 종종 단순한 저녁이 아니라 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W.Bauer) 메 포네이(mh; fwvnei청하지 말라)에서 포네이(fwvnei)는 현재시제로서 '습관적으로 청하지 말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본문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안티칼레소신(ajntikalevwsivn도로 청하여)과 안타포도마(ajntapovdomav갚음이)가 메포테(mhvpote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는 용어와 연결되어 사용된다. 즉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부자들이 회답으로서 너를 다시 초청하여 너에게 갚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빈자들을 청하라'이다. 본문의 내용이 부자들은 초청의 대상에서 전적으로 제외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빈자들을 청하라
(ajll! o{tan doch;n poih'/", kavlei ptwcouv", ajnapeivrou", cwlouv", tuflouv":알르 호탄 도켄 포이에스 칼레이 프토쿠스 아나페이루스 콜루스 튀플루스;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3절)
알르(ajll차라리)는 앞의 구문과 반대됨을 나타낸다. 또한 원문은 호탄 도켄 포이에스(o{tan doch;n poih'/"잔치를 배설하거든)로 되어 있는데, 이 구문의 문자적 의미는 호탄(o{tan 거든)이 ' 때, 때마다'가 되므로 '잔치(연회)를 열어줄 때마다'의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 '배설하거든'(poih'/"포이에스)은 현재 가정법 능동형으로서 계속적인 뜻을 함축한다. 즉 본문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매번 계속적이고 일반적으로 취해야 할 행동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A.H.Chase).
칼레이(kavlei청하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예수님의 단순한 권유가 아닌 직접적인 명령의 형태로서 듣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한 것을 말한다. 또한 미래적 표현이 아니라 현재적 명령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앞으로 그렇게 하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해라'라는 명령인 것이다(N.E.Han).

3) 부활시의 상급
(ajntapodoqhvsetai gavr soi ejn th'/ ajnastavsei tw'n dikaivwn.안타포도데세타이 가르소이 엔 테 아나스타세이 톤 디카이온;그리하면…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4절)
톤 디카이온(tw'n dikaivwn의인들)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이라고 그 자리에서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인은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만을 의미한다.
안타포도데세타이(ajntapodoqhvsetai갚음을 받겠음이니라)는 미래 수동태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겐 현세적 상급도 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차 다가올 하늘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
또한 그 상은 우리 자신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그저 할 바를 다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나 우리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직접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2. 잔치 참여를 거절하는 사람들(15-20절)

1) 한 사람의 독백
(Makavrio" o{sti" favgetai a[rton ejn th'/ basileiva/ tou' qeou'.마카리오스 호스티스 파게타이 아르톤 엔 테 바실레이아 투 데우;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5절)
바실레이아 투 데우(basileiva/ tou' qeou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용된 바실레이아라는 용어는 원래 주권적인 영역을 표시하는 '왕국'이란 단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은 하나님의 주권이 철저히 펼쳐지는 영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TDNT).
본문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① '종말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되다'로 해석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② 교만한 바리새인의 단순한 외침으로서 자화자찬적인 선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본문은 뒤에 나오는 예수의 잔치 비유를 위한 도입부로서 작용하고 있다.

2) 잔치의 배설
(oJ de; ei&pen... ejpoivei dei'pnon mevga, kai; ejkavlesen pollouv"...#Ercesqe, o{ti h[dh e{toimav ejstin.호 테 에이펜…에포이에이 데이프논 메가 카이 에칼레센 폴루스…에르케스데 호티 에데 헤토이마 에스틴;이르시되…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6,17절)
에포이에이(ejpooivei배설하고)는 과거시제로서 잔치가 이미 다 준비되었음을 보여 준다. 주인이 종들을 통해 전한 헤토이마 에스틴(e{toimav ejstinv준비되었나이다)이란 표현도 저녁 만찬을위한 세부적 준비가 철저히 끝났음을 표현하는 특별한 표현이다(W.Bauer). 결국 본문의 상황은, 앞으로 준비될 잔치의 손님들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 주인은 이미 잔치를 연 후에 손님들만을 부른 것이다.
개역성경은 17절에서 '종을'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원문은 톤 둘론 아우투(to;n dou'lon aujtou'그의 그 종)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청함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단지 '그의 한 명의 특정한 종'만을 보내어 초청을 알렸던 것이다. 원문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많은 내용을 함축적으로 시사한다.

3) 사람들의 거절
(kai; h[rxanto ajpo; mia'" pavnte" paraitei'sqai...!Agro;n hjgovrasa...Zeuvgh bow'n hjgovrasa pevnte tunai'ka e[ghma kai; dia; tou'to ouj duvnamai ejlqei'n.카이 에륵신토 아포 미아스 판테스 파라이ㄴ데이스다아…아그론 에고라시…쥬게 보온 에고라사 펜테 튀나이카 에게마 카이 디아 투토 우 뒤나마이 엘데인;다 일치하게 사양하여…나는 밭을 샀으매…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나는 장가들었으나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18-20절)
사람들은 잔치에 청함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 이유들을 들어 거절한다. 이들이 지니는 공통점은 무언가를 얻었기 때문에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세속적인 어떤 이익이나 기쁨을 지금 소유하게 되었으므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그들은 거부하고 있다. 파라이테이스다이(paraitei'sqai사양하여)는 원래 사정해서 면제받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Liddle & Scott).


밭과 소를 산 사람들이 파레테메논(parh/thmevnon용서하라)이라고 말한 것에 비해 결혼한 사람은 갈 수 없다라고 말한 차이가 있다. 파레테메논은 '나를 용서해 다오, 내가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다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합법적 이유가 벗지만 잔치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결혼한 사람은 일년간 자신의 부인을 기쁘게 해 주라는 말에 의거해서 결혼한 사람은 용서를 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신24:5).
본문을 통해 나타나는 사람들의 공통적 태도는 잔치 참여를 거절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잔치를 기피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긴박한 형편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를 쓰고 잔치를 피했으며, 초청자를 향해서 자신을 빼달라고 사정했다.

3. 잔치 주인의 분노와 지시(21-24절)

1) 빈자들을 데려오라
(kai; paragenovmeno" oJ dou'lo"...tou;" ptwcou;" kai; ajnapeivrou" kai; tuflou;" kai; cwlou;" eijsavgage w|de.카이 파라게노메 노스 호 둘로스…투스 프로트쿠스 카이 아나페이루스 카이 튀플루스 카이 콜루스 에이사가게 호데;동이 돌아와…가나나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1절)


오르기스데이스(ojrgisqei;"노하여)는 수동분사형태이다. 즉 화가 나서 그 결과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화를 내면서'가 정확한 번역이다. 원래 유대 사회에서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고 동시에 예배나 잔치 등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조상이나 자신의 조 때문에 신체 불구가 되었다고 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생각한 것이다(E.Lohse). 율법에서 신체의 불구자된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레21:16-24). 그런데 밭과 소를 사고 결혼 할 수 있는 정상인들에 대한 더 큰 책망과 형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역성경은 에이사가게(eijsavgage데려오라)라는 명령만을 기록하나, 원문에서 호데(w|de여기로)라는 단어가 같이 나온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거부한 바로 '이곳'으로 데려오라는 것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이 거부한 그 잔치가 초청을 원하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섭리이다.

2) 그래도 남는 자리
(kai; ei&pen oJ dou'lo", Kuvrie, gevgonen o} ejpevtaxa", kai; e[ti tovpo" ejstivn. 카이 에이펜 호 둘로스 퀴리에 게고넨 호 에페탁사스 카이 에티토포스 에스틴;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2절)
에티(e[ti오히려)는 원래 '여전히, 아직도'를 의미한다(W.Bauer). 토포스(tovpo"자리)는 특정한 공간과 위치를 뜻하는 단어로서, 특정인이 채워 주어야만 하는 특정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즉 '자리가 있다'라는 표현은 대충 다 차고 일부 자리가 남는다는 표현이 아니라 꼭 차야만 하는 자리가 아직도 비어 있다 라는 의미이다(H.W.Smyth).

3) 강권하여 채우라
(#Exelqe eij" ta;" oJdou;"...ajnavgkason eijselqei'n, i{na gemisqh'/ mou oJ oi&ko":...oujdei;" tw'n ajndrw'n ejkeivnwn tw'n keklhmevnwn geuvsetaiv mou tou' deivpnou. 엑셀데 에이스 타스 호두스…아낭카손 에이셀데인 히나 게미스데 무 호 오이코스…우데이스 톤 안드론 에케이논 톤 케클레메논 규세타이 무 투 데이프누;길과…나가서…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전에 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3,24절)
원문의 구조는 개역성경과는 약간 다르다. 원문에선 히나 게미스데(i[na gemisqh)는 직영하면 '채우기 위하여'이다. 즉 '내 집을 채우기 위하여…로 나가라'가 원래의 의미인 것이다.


23절에서 '나가서'( [Exelqe엑셀데)와 '강권하여'(ajnavgkason아낭카손)는 부정과거 명령형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파송에 더 강한 의미 부여가 되어 있다.


그럼 파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4절에선 전에 청함받았던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잔치집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신 당신의 뜻을 그의 뜻대로 행하시지만, 한 번 돌이키신 당신의 뜻을 번복하지도 않으심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눅 14:25~35 제자가 되는 길

모든 소유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진정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쉽고 영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괴로움과 어려움들이 산적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다짐하도록 만들고 있다.

1. 자기 십자가와 제자의 길(25-27절)

1) 허다한 무리들
(Suneporeuvonto de; aujtw'/ o[cloi polloiv, kai; strafei;" ei&pen pro;" aujtouv",쉬네포류온토 데 아우토 오클로이 폴로이 카이 스트라페어 스 에어펜 프로스 아우투스;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5절)
오클로이 폴로이(o[clo polloiv허다한 무리)를 주의해서 보자. 본래 오클로스라는 단어는 예수를 쫓아다니던 특정한 무리들을 지칭해서 사용하던 단어였다(E.Lohmeyer). 그러므로 예수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예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신앙적으로 따르고 있는 자들이다.


또한 '함께 갈새'(Suneporeuvonto쉬네포류온토)란 미완료 과거시제로 지속적으로 함께 가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라는 표현 뒤에 원문에만 나오는 카이(kai;그러나)라는 단어도 깊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예수를 어느 정도 따른다고 하는 무리들이 예수께 나아왔지만, 그러나 예수께선 그러한 그들에게 다음의 본문처럼 역설적으로 반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이하의 내용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전제되어진 말씀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라
(Ei[ ti" e[rcetai...ouj misei' to;n patevra eJautou' kai...e[ti te kai; th;n yuch;n eJautou', ouj duvnatai ei&naiv mou maqhthv".에이 티스 에르케타이…우 미세이 톤 파테라 헤아우투 카이…에티 테 카이 텐 프쉬켄 헤아우투 우 뒤나타이에이나이 무 마데테스;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6절)


에르케타이(e[rcetai오는)는 현재시제로서 '지금 내게 나아오고 있는'의 의미이다. 본문에서 우리가 의아심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단어는 바로 미세이(misei미워하지)라는 단어이다. 마10:37의 말씀과 병행해서 생각해 본다면, 미워한다 하는 표현은 덜 사랑한다 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W.Hendriksen).


'자기 목숨까지'로 개역성경이 표현한 구절은 원문에서 에티 테 카이 텐 프시켄 헤아우투(e[ti te kai; th;n yuch;n eJautou'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조차도)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 영혼(yuchv프쉬케)이란 생명체로서의 자아를 함축한다. 우 뒤나타이(ouj duvnatai못하고)는 정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자가 될 만한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A.H.Chase).

3) 자기 십자가를 지라
(o{sti" ouj bastavzei to;n stauro;n eJautou' kai; e[rcetai ojpivsw mou, ouj duvnatai ei&naiv mou maqhthv".호스티스 우 바스타제이 톤 스타우론 헤아우투 카이 에르케타이 오피소 무 뒤나타이 에이나이 무 마데테스;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7절)


에르케타이 오피소 무(e[rcetai ojpivsw mou나를 좇지)는 문자적으로는 '나의 바로 뒤를 따라오다'라는 현재적 표현이다. 즉 예수가 걸어간 바로 그 길을 정확하게 바로 뒤에서 따라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W.Bauer).
스타우론(stauro;n십자가)은 문자적으로 십자가만이 아니라 '박해와 고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자기 십자가란 자기에게 주어지는 박해와 고통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상징적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고난 및 순교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함을 암시한다(TDNT).

2. 두 가지 비유(28-32절)

1) 계획의 필요성
(tiv" ga;r ejx uJmw'n qevlwn puvrgon oijkodomh'sai...kaqivsai yhfivzei th;n dapavnhn,티스 가르 엑스 휘몬 델론 퓌르곤 오이코도메사이…카디사이 프세피제이 텐 다파넨;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제우고자 할진대…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8절)


퓌르곤(puvrgon망대)은 단순한 망대만을 의미하기보다는 거점, 성, 요새지,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세운 감시탑(마21:33)이나 피난을 위해 세운 탑 모양의 건물 등을 의미한다. 특히 이는 어떤 지역을 방어하는 요새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그 요새의 가장 높은 탑으로서 적들의 침공 감시나 순찰 등을 위해 건설한다(Liddle & Scott). 프세피제이(yhfivzei예산하지)란 고대에서 투표나 계산할 때 사용되었던 '돌'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고대에서 투표하는 것은 돌을 던지는 행위로 표현되었다(A.T.Rovertson, 행26:10).

2) 무계획의 위험성
(i{na mhvpote qevnto" aujtou' qemevlion...oujk i[scusen ejktelevsai.히나 메포테덴토스 아우투 데멜리온…우크 이스퀴센 엑텔레사이;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29,30절)


엠파이제인(ejmpaivzein비웃어)은 '어린이같이 놀다'혹은 '놀리다, 놀리기 시작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결국 성을 쌓기 시작하고 망대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끝까지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계수하지 않아 낭패를 본다면, 그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빈축만을 살뿐이다. 여기에서 '시작하고'(h[rxato에륵사토)란 3인칭 단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그가 자신을 위해 시작했다'라는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도 진정으로 끝까지 그 일을 잘 감당할 것인지를 신중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나서 결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예수를 따르다가 중간에 그만두게 된다면 원수 사단은 물론이고,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W.Hendriksen).

3) 싸움의 비유
(h] tiv" basileu;" poreuovmeno" eJtevrw/ basilei' sumbalei'n eij" povlemon...presbeivan ajposteivla" ejrwta'/ ta; pro;" eijrhvnhn.에 티스 바실류스 포류오메노스 헤테로 바실레이 쉼발레인 에이스 폴레몬…프레스베이안 아포스테일라스 에로타 타 프로스 에이레넨;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 지니라, 31,32절)
지배지를 표현하는 단어는 아르콘이라는 단어와 바실류스라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본문에 나오고 있는 바실류스(basileu;"임금)는 정통적인 권력을 정통적으로 세습 받은 왕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한 임금과 한 임금이 싸우는 것은 한 제국과 한 제국의 전투가 아닌 전쟁을 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비유이다(TDN-T).

 

예수께서 하신 이 두 번째 비유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 전쟁과 같은 일이며, 한 왕국과 유업을 받아들이는 일과도 같은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왕국이나 '사단의 왕국' 혹은 '세상과 명예와 부귀라는 왕국'과의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보여 주고 있다(J.Jeremias).

애시당초 이 전쟁에서 승리할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낫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다면, 예수를 따르지 않는 것이 현명함을 예수께선 본문을 통해 말씀 하셨다.

3.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33-35절)

1) 제자가 되는 조건
(ou{tw"...o}" oujk ajpotavssetai pa'sin toi'" eJautou' uJpavrcousin ouj duvnatai ei&naiv mou maqhthv".후토스…호스 우크 아포탓세 타이 파신 토이스 헤아우투 휘파르쿠신 우 뒤나타이 에이나이 무 마테테스;이와 같이…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


파신 토이스 헤아우투(pa'sin toi'" eJautou'자기의 모든 소유)라는 표현은, 자신의 노력으로 벌어들인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재산들을 지칭한다(H.W.Smyth). 그러나 반드시 재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자식들과 친척 관계 등은 물론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역성경에서 '버리지'로 간단히 처리한 부분도 원문은 아포탓세타이(ajpotavssetai)와 휘파르쿠신(uJpavrcousin)이라는 두 가지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전자는 '떠난다, 안녕이라고 말한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고, 후자는 '없애다, 주다, 포기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W.Bauer). 그러므로 버린다는 본문의 의미는 철두철미한 완전한 이별은 물론 완전한 제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 짜지 않은 소금
(Kalo;n ou&n to; a{la": eja;n de; kai; to; a{la" mwranqh'/, ejn tivni ajrtuqhvsetai_칼론 운 토 할라스 에안 데 카이 토 할라스 모란데 엔 티니 아르튀데세타이;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을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4절)
칼론(Kalo;n좋은 것이나)은 본래 '강하다, 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자기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던 역할을 잘 감당할 때에 칼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훌륭함과 그 능력을 표현하는 단어이다(TDNT). 그러므로 본문에서 소금을 좋은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소금이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나는 의미를 내포한다.

 

 모란데(mwranqh'맛을 잃었으면)는 원어적으로 '바보가 되다, 제 구실을 상실하다'라는 뜻인데(Lidd-le & Scott), 본문에서는 수동형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으로 치면 멍청해진다는 뜻이고, 야수로 치면 이빨과 발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TDNT). 아르튀데세타이(ajrtuqhvsetai짜게 하리요)는 본디 '열매를 많이 맺게 만들다'라는 뜻에서 출발하였다. 즉 소금이 무엇으로 짜게 할 것이요? 라는 개역성격의 표현은, 소금으로서의 열매들을 어떻게 풍성히 맺도록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의역할 수 있다(M.Dibelius).

3) 맛을 잃은 소금의 결과
(ou[te eij" gh'n ou[te eij" koprivan eu[qetovn ejstin, e[xw bavllousin aujtov. oJ e[cwn w&ta ajkouvein ajkouevtw.
우테 에이스 겐 우테 에이스 코프리안 유테톤 에스틴 엑소 발루신 아우토호 에콘 호타 아쿠에인 아쿠에토;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35절)


자기 자신의 본분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상태, 그렇기에 많은 열매들을 맺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은 본문을 통해서 정확하고도 직접적으로 그 결과를 묘사하고 있다. 즉 아무 곳에도 쓸데가 없어서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발루신(bavllousin내어버리느니라)은 현재시제를 취하고 있다. 즉 지금 그 맛을 내지 못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또는 언제든지) 내어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발루신'은 원래 내러버리는 것보다 집어던져 으깨는 것을 의미한다.(W.Bauer). 또한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상급을 받을 자리에서 저주를 받는 자리로의 전환을 동시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선포를 들어야만 하는 대상에 대해, 예수님은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선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이 선포는 들어야만 하는 명령이며, 마음에 새겨야만 하는 선포인 것이다.

 

성 경: [눅14: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ꃨ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 '두령'(*, 아르콘)은 '지도자'를 뜻하는 이에 대해서는 (1) 바리새파에 속한 지배자(RSV,Creed), (2) 회당장(Marshall), (3) 바리새인의 계층가운데 지도급 인물(NEB,NIV), 등의 견해가 있는데 세번째 견해가 무난하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 바리새인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에 응했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안식일의 회당의식이 끝난 후에 가지는 식사일 가능성이 높다. 안식일에는 회당의식이끝난 후에 가장 큰 식사를 하였으며 랍비들은 빈부에 관계없이 안식일에 손님 접대하기를 가르쳤고 그것은 종교적 의무로까지 여겨졌다.
ꃨ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 여기서 '저희'는 그 곳에 있던 다른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며(3절) '엿보고 있더라'(*, 파라테루메노이)는 문법구조상 미완료로 되어있어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신학적인 오류가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계속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행위로 미루어 보건대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동기가 불순한 것이었던 것같다.

성 경: [눅14:2]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ꃨ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 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성 경: [눅14:3]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ꃨ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 13:10-17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병고쳐주기 전에 먼저 질문부터 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먼저 질문하시는 것은 그들의 악의를 아셨기 때문이다(1절). 여기서 '합당하냐'(*, 여세스틴)는 직역하면 '그것이 율법적이냐'는 뜻으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예수께서 이미 간파(看破)하셨음을 말해준다. 앞에서도 두 차례에 걸친 안식일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6:1-11;13:10-17) 또다시 안식일 논쟁이 수록된 것은 안식일 문제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성 경: [눅14: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ꃨ 잠잠하거늘 -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율법 지식에 의거하여 당연히 합당하지 않다고 대답했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일에 고치는 것은 랍비적 규례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암시는 전혀 없기 때문에 생명의 위태함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고쳐주리라는 결의를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ꃨ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 예수께서는 침묵하고 있는 율법사들과 바리섀인들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예수의 이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사문화(死文化)된 율법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즉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동정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안식일 규범의 미신성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을 모든 형태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식일 규범을 가르치신 것이다.

성 경: [눅14:5]
주제1: [척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침]
ꃨ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안식일에 대한 미쉬나의 규정에는 온건한 것이 있고 엄격한 것이 있는데 온건한 규정은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구해낼 수 있도록 하나 엄격한 규정은 다만 구덩이에 꼴만을 넣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수 당시에는 온건한 규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바리새인 보다 훨씬 엄격했던 쿰란(Qumran)공동체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만 구해낼 수 있고 짐승은 구해낼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채택된 규정에 의하면 우물에 빠진 짐승을 건지는 것이 허용되었던 셈이다. 예수의 질문 속에 깔린 논리는, 곤경에 처한 짐승을 구하면서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는 것이다.

성 경: [눅14:6]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침]
ꃨ 대답지 못하니라 - 이 말은 4절의 단순한 침묵과는 달리 반대 논리로 맞서 대답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롬 9:20). 그들은 예수에게 모종의 도전과 공격을 하려고 준비하였지만(1절)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지는 것들이 예수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예수는 진리였으나 그들은 비진리였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왜곡된 판단력을 지닌 인간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7]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ꃨ 상좌 택함을 보시고 - 그 바리새인의 식사에는 예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초청되어 있었다. 아마 초청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상석에 앉으려는 암묵적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축되며 이것을 본 에수께서 그들의 교만을 지적하시는 듯하다. 당시에는 음식상에 앉는 순서가 손님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Marshall). 그리고 가장 귀한 손님은 대개 가장 나중에 도착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대인의 연회석은 디귿(ㄷ)자 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좌는 그 세 면의 중앙 부분을 각각 의미한다. 상좌에 앉아서 섬김을 받기 좋아한다는 것은 바리새인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막 12:38,39).

성 경: [눅14:8]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ꃨ 혼인 잔치에...상좌에 앉지 말라 -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점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가장 엄격한 격식이 요구되는 결혼식의 잔치를 비유의 상황으로 설정하신다. 여기서 '앉다'는 물론 유대인의 식탁 자세 즉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묘사한다. 다른 자리에서도 그러하지만 매우 각별한 격식이 요구되는 혼인 잔치에서는 어디에서나 상석에 앉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의례히 자기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여겨 먼저 상석을 차지했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그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때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잠25:6, 7에는 본문과 유사하게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겸손의 덕목은 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 경: [눅14:9]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ꃨ 말석...되리라 - 교만하여 상석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여 당하게 될 비참함이 희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구분하여 그러한 차이에 얽매이지 말고 매사에 겸손하라는 교훈이며, 그 교훈을 직접 말씀하지 않고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완악성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10]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ꃨ 말석에 앉으라 - 8,9절과 정반대의 상황이 제시되어 처음 경우의 참담한 수치와 지금의 영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단순한 공식 석상에서의 예법 즉 소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명예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영예를 얻을 수 있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상좌를 차지하려는 바리새인들이 소아적(小兒的)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지적함과 아울러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성 경: [눅14:1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ꃨ 높이는 자...낮추는 자 - 이 말씀은 18:14;마 23:12 에서도 보여지는데 인간의 높고 낮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지 인간의 자기 추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것은 "낮아지고"(will be humbled,NIV)와 "높아지리라"(will be exalted,NIV).라는 문장이 '수동태'로 되어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사 람은 높아짐을 당하거나 낮아짐을 당할 수 있을 뿐 그것을 결정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편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 가장 아름다운 자세가 바로 겸손임을 강조한다.

성 경: [눅14:12]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ꃨ 점심이나...청하지 말라 - '점심'(*, 아리스톤)은 늦은 아침에 먹는 첫번째 식사를 뜻하고 '저녁'(*, 데이프논)은 늦은 오후에 먹는 주식사를 뜻한다(11:37 주석 참조).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런 식사에 벗, 형제, 친척, 부한 이웃을 초청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기에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은 다음 절의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나 소경의 네 부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본문은 이런 대비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여기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과 관계를 끊거나 사랑을 나누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더욱 각별한 관심을 보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진정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이며, 이들에게 은밀히 행한 자선이 곧 하나님께 대접한 것이기 때문이다(마 6:4).

성 경: [눅14:13]
주제1: [척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ꃨ 가난한 자들...소경들을 청하라 - 여기에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과 달리 아무런 보답도 해 줄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린 이유를 오히려 초청시 동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 25:32-35의 천국 비유와도 의미가 통하며 6:32-35와도 통하는 말씀이다.

성 경: [눅14:1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본절은, 구제와 자선을 단지 천국에 가기 위한 혹은 천국에서 보상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보다는 곤경에 처한 자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가르친다.
ꃨ 의인들의 부활 -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만인의 부활 즉 의인과 악인을 모두 포괄하는 부활을 의미하며 계 20:5,6이나 살전 4:16처럼 단계적 부활 에서는 첫째 부활을 뜻한다.

성 경: [눅14:15]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하나님의 나라에서...복되도다 - 본문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야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제일 큰 잔치를 베푸실 것인데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사람이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유대인으로서 기기에다 바리새인으로서 이 잔치에 당연히 참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앞에서 말씀하신 행위 기준에(12-14)자신이 충실하였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과연 이 사람의 생각이 옳은 것인가는 또 다른 기준 즉 그가 하나님의 초청을 진정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가에 의해 검증(檢證)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의 비유는 바로 이 사실을 검증케 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14:16]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 이 비유와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마22:1-14에는 잔치를 베설한 사람이 '임금'으로 묘사되고 잔치의 성격도 '혼인잔치'로 되어있다. 여기서 '큰 잔치'(*, 데이프논)는 '오찬' 또는 '공식 연회'를 뜻하며 여기서 잔치가 의미하는 것은 '구원'이다.
ꃨ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 유대인들의 풍습에 의하면 잔치를 여는 사람은 사전에 날짜를 정한 다음 종을 보내어 초청된 사람들에게 참석 여부를 물은 후에 그 수효에 맞추어 잔치를 준비한다.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주인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음을 암시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사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Marshall).

성 경: [눅14:17]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잔치할 시간에...종을 보내어 - 최초의 초청을 수락한 사람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종을 보내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으며(에 6:14;잠9:1-6) 이때 불가피한 사유가 아닌 한 잔치에 불참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缺禮)였다. 심지어 아랍인들에게는 두번째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선전 포고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한다. 마태의 경우 임금은 '종들'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있고 초청받은 자들 가운데 더러는 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 까지하는데 이것은 선전 포고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마 22:3-6). 한편 마태의 본문에 복수로 표현된 '종들'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뜻한다고 보고 누가의 본문에 단수로 표현된 '종'은 예수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Lenski) 일리가 있다 하겠다.

성 경: [눅14:18]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 '일치하게'(*, 아포 미아스)는 '당장', '곧'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만장일치로','한결같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초청을 사양하고 있는 것은 국면(局面)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며 의외의 사태가 발생할 것같은 암시를 준다.
ꃨ 밭을 샀으매 - 첫번째 사람이 초청에 응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밭을 이미 사고난 후에 밭에 가보는 일이 그토록 긴박한 일인지에 관해서는 의아하기 때문이다. 밭을 먼저 확인한 후에 매입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고 할 때 그의 거절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 경: [눅14:19]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 두번째 핑계 역시 첫번째 경우처럼 농경생활과 관련된 내용이다. '다섯 겨리'는 '다섯 쌍'을 뜻하는데 이 정도의 소를 살 정도면 상당한 부농(富農)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보통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는 한 두 겨리의 소로 충분했기 때문이다(Jeremias). 또한 '시험하다'(*, 도키마사이)는 '테스트해 보다' 또는 '검사해 보다'는 뜻인데 이것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소를 살때는 그 소가 일을 하기에 적합한 소인지 아닌지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정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혹 불가피하게 소를 먼저 사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소를 시험해 보는 일이 약속되어 있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까지 해야 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 경: [눅14:20]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장가들었으니 - 세번째 사람은 아마도 최근에 결혼했던 것같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결혼한 남자는 1년간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면제되었다(신 24:5). 그러나 생사가 걸린 전쟁에 나가는 것과 잔치 석상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하겠다. 그는 단지 신혼의 재미를 깨트릴 수 없다는 하찮은 이유로 정중한 초대를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할 복음 사명을 일신상의 하찮은 일을 핑계로 도외시하는 우리들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ꃨ 가지 못하겠노라 - 대답자들의 태도가 점점 더 무례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번째 사람은 비록 납득할 수 없는 사유를 제시하기는 하지만 "불가불...나를 용서하도록 하라"는 예의를 갖춘 형식으로 정중히 사양하고 있고, 두번째 사람은 약간 퉁명스럽게 자신의 불참 사유를 단순히 통보하며 용서를 구하는 반면 세번째 사람은 전혀 사과의 뜻도 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불참을 통고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점점 더 완악해져 감을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눅14:2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집 주인이 노하여 - 종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주인은 그들의 사유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핑계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들의 행위는 상호간의 인격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깨트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매우 분노한다. 마태의 본문에 의하면(마 22:6, 7) 마치 전쟁을 방불(彷佛)케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닥칠 비극상이 어느 정도일 것인지를 분명히 나타낸다.


ꃨ 시내의 거리와 골목 - '시내의 거리'(*, 플라테이아)는 다양한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넓은 길'을 가리키며 '골목'(*, 뤼메)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암시한다.
ꃨ 가난한 자들...저는 자들 - 여기 언급되고 있는 네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적으로는 멸시를 당하며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지 못한 버려진 존재들이다. 이들은 돈이 없어 말이나 소를 사지 못하고 장가도 가지 못하며 잔치에 초대받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눅14:22]
주제1: [천구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 주인의 분부대로 행하였지만 그럼에도 남은 자리가 있다는 종의 보고에서 그 잔치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다(요 14:2).

성 경: [눅14:23]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 여기서의 '길'(*, 호도스)은 성밖의 공용도로를 가리키고 '산 울'(*, 프라그모스)은 '둘러 막다'의 뜻을 가진 '프라쏘'(*)온 말로 '울타리'를 가리킨다. 21절의 '거리와 골목'이 성내의 영역을 뜻한다면 본문의 '길과 산울'은 성밖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 잔치에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백성이 초대됨을 뜻한다. 이렇게 볼 경우 앞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자들은 유대인 가운데 소외되고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정죄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ꃨ 강권하여 - 헬라어 '아낭카손'(*)은 '필요하다'의 뜻을 가진 '아낭케'(*)에서 온 말로 물리적인 강제력(compulsion)을 이용하여 데려오라는 의미가 아니라 끝까기 설득하여 데려오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초청을 받은 사람이 엉겁결에 사양한다 하더라도 친철한 자세로 끈질기게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양적 예법(禮法)이 배경에 깔려 있다.

성 경: [눅14:2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ꃨ 내가 너희에게 - 갑자기 '너희에게' 라는 복수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니희에게' 라는 말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1) 최종적으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가리킨다(Bengel,Marshall).(2) 본 비유에 대한 결론적 적용으로서, 비유를 듣게 된 최초의 청중들 즉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시는 것으로 본다(Bruce,Greed). 이 중 전후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ꃨ 전에 청하였던...맛보지 못하리라 -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유대인들이 맞게 될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문자적으로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않될 것이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민으로서의 모든 특권이 무효화 됨을 뜻한다고 봄이 낫겠다. 유대 민족이 A.D.70년에 예루살렘 파멸이라는 징표를 받은 것도 이 사실에 대한 한 징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이다(롬 11: 25,26). 이것은 유대인들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창 17:7),이삭(창 26:24), 야곱(창 28:13-14)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며 그분은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25]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 바리새인의 집에서 떠나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무리들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허다한 무리'(*, 오클로이 폴로이)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시사하며 아울러 예수의 인기가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예수께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다. 혹자는 이 무리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레자들 이었고(Farrar),이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따랐던 것이라고 한다(Plummer).
ꃨ 돌이키사 - 예수의 가르침이 시작될때 많이 사용되는 용법이다(7:9;9:55; 10:23; 22: 61; 23: 28 ). 예수께서 이 시점에서 진행을 정지시키신 것은 무리들의 빗나간 기대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눅14:26]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미워하지 아니하면 - 예수에게 나아오는 것이 그의 부르심에 대한 일차적인 응답이라면 본절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보여야 할 이차적인 응답에 해당한다. 일차적인 응답 으로부터 이차적인 응답으로 발전하기 의해서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미워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가 '조금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의 뜻으로, 상대적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마 19:29).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이 당신을 따름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의 뜻을 추종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 중 후자의 것에 궁극적(窮極的)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면 예수를 따르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한편 누가는 마태가 기록하지 않고 있는 '형제자매' 및 '아내'와의 단절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아내'에 관한 부분은 20절과의 관계에서 누가가 특별히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Marshall).

성 경: [눅14:27]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자기 십자가를 지고 - 본절의 문구는 9:23에 표현된 진리를 부정적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형식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은 지금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십자가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여기서 '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조'(*)는 요19:17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지신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나' 십자가를 져야 하며 당시에 죄수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자신이 져야 했듯이 예수를 따르는 자도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가 몸소 져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눅14:28]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망대 - 이는 13:4에도 언급되는데 그와 달리 여기서는 '농장 건물'을 뜻한다고 본다(A.G.Marshall). 이러한 건물을 지을 때는 기초 공사만 놓는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ꃨ 먼저 앉아 - '앉아'(*,카디사스)는 정밀한 계산을 위해서 정좌하여 앉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소요(所要)되는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여 자기가 확보한 돈으로 건축을 시작해도 될지 잘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도 그길은 결코 부귀 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임을 알아 냉철한 판단에 의해 따르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 주께로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얼마가지 않아 작은 시험조차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더욱 깊이 상고되어야 할 것이다.

성 경: [눅14:29]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기초만 쌓고...이루지 못하면 - 아마 당시에는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없이 건축을 시작하여 기초만 쌓고 건축을 증단하거나 또는 건축 중간에 비용이 없어 중단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빌라도가 수도 공사를 진행시키던 중 공사비 부족으로 중도에 공사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이상근).


ꃨ 비웃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피이제인'(*)은 '놀림감'을 만들다', '조롱하다', '우습게 보다'의 뜻으로 어리석은 건축자가 당하게 될 부끄러움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고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실패가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애초에 따르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만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망신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악조차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30]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이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호 안드로포스'(*)는 경멸적 또는 풍자적 용법으로서 '이친구' 라는 뜻이다.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잘못된 비전(Vision)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작될 경우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는 참다운 제자가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작의 귀중함은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히 6:11).

성 경: [눅14:3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싸우러 갈때에 -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의 비유가 연속하여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앞의 비유처럼 '너희 중에'라는 서두가 없는데 이는 거기에 있던 무리 가운데 왕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더욱 정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ꃨ 헤아리지 - 만명을 거느린 임금이 이만명을 이끌고 공격해오는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을 때 승산이 있는지의 여부를 빨리 판단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조속히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집단 몰사할 가능성이 많겠기 때문이다. 적군의 숫자가 아군에 비해 두배나 많은 것으로 언급된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마치 중과부적(衆寡不敵)과도 같은 상황처럼 어려움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써만 감당 되어질 수 있다(히 2:18).

성 경: [눅14:32]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화친을 청할지니라 - 이는 순수한 전쟁의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선과 악의 싸움 또는 영적인 싸움에서 걱과 타협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비유의 초점은 화친을 하고 안하고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의 냉철한 판단력에 맞춰져 있음에 유의하자.

성 경: [눅14:33]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 27절의 구체화이자 두 비유(28-30,31-32절)의 결론으로서 본문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리들은 예수를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되려고 결정할 때, '모든 소유'를 버려야하는 상황마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후에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 결국 소유에 대한 집착은 제자가 되는 것 그리고 구워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18-20절). 본문에서 '버리다'(*, 아포타쎄타이)는 말은 사용되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작볕 인사를 뜻하고 사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포기하다', '버리다'의 의미가 된다. 특히 '아포타쎄타이'는 현재형으로서 그 '포기'가 지금 당장 결단해야 할 성질의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본문에는 18:22의 부자 청년에게 주어진 명령과는 달리 포기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 또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위임(委任)된 것이라고 여기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Liefeld).

성 경: [눅14:3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 소금은 음식의 맛을 조절하는 양념으로 사용되었 그 종교 의식상의 용도 곧 소제(레 2:13)와 번제(겔 43:24)의 예물 위에 뿌리는데도 사용되었다. 또 성전에 피우는 향의 성분 속에 소금이 들어갔으며(출 30:35)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의학적 목적으로 소금을 뿌리기도했고(겔 16;4) 방부제로 쓰기도 했다. 이중 특히 소금의 역할로 중요한 것은 맛을 내는일이다. 본문도 이점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1) 본래 이 말씀은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없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복음도 없어지거나 그 영향력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전승과정에서 제자들의 변절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G.Bertram). (2) 가축의 똥을 연료로 땔 때 소금을 촉매제로 함께 섞어 사용했는데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소금의 촉매력이 없어져 화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3) 팔레스틴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사해(死海)의 소금물을 증발시켜서 만든다. 그런데 사해의 물에는 염화나트륨 외에도 여러가지 성분이 있기 때문에 수분을 증발시키면 거기에는 소금과 광로석 및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 때 소금이 먼서 결정되므로 그것들을 모으면 순수한 소금이 되지만 쓴 맛을 내는 광로석을 소금으로 착각하여 채취하기도하였다. 이렇게 잘못 채취된 광로석의 표면에 묻어있던 염분이 용해되어 버리면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는 것이다(J.Tinsley,Marshall). 이 세개의 해석 가운데 (3)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관련지어 이해할 때, 이는 소금도 그 맛으로 소금됨을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참다운 제자됨을 확인받을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성 경: [눅14:35]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ꃨ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이...버리느니라 - 소금이 땅과 거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소금이 비료나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부정과 긍정의 견해로 갈리기 때문이다. (1) 부정하는 견해-팔레스틴에서 소금을 거름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소금은 땅을 황폐하게 한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Jeremias). (2) 긍정하는 견해-현대 이집트에는 소금기 있는 홅을 비료로 사용한 증거가 있다(H.Gressmann). 소금은 잡초를 죽일 뿐만 아니라 땅속깊은 곳에서 사해의 소금이 가지고 있는 칼슘 성분을 용해시켜 토양을 개량시키고 아울러 인분의 부패를 억제하늘 작용을 한다(E.Deatrick). 이러한 양 견해에 대해서 어느것이 옳은지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사실성 여부에 관계없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마태는 누가의 본문보다 더 강하고 경멸적(輕蔑的)인 표현인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밝힐 뿐이니라"로 서술하고 인다(마 5:13).


ꃨ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매우 의미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이제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25절) 필요한 말씀을 충분히 해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 현명한 결단을 하는 일이다. 그 결단은 강요에 의한 것도 구걸에 의한 것도 아니요 다만 듣는 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제자의 길[눅 14장]

[내용개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잔 두령의 집에서 식사하신 후에 고창병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1-6절).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하라고 가르치셨고(7-11절), 예수를 초청했던 사람에게는 잔치를 배설할 때는 부한 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초청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셨다(12-14절). 예수와 함께 식사하던 자가 한마디 거들자 예수께서는 큰 찬치 비유를 말씀하셨다(15-24절). 잔치 후에 돌아가는 길에 예수께서 함께 가던 무리들에게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침을 베푸셨다(25-35절).


[강 해]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무대는 안식일 날 바리새인의 식탁에서 베푸신 말씀으로 천국 시민의 자격에 대한 내용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자 제자의 길에 관해 말씀하신 교훈입니다.

 

1. 거짓된 무리들을 책망하심

 

1) 거짓된 영접
예수님께서는 각성과 각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안식일 날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기꺼이 그의 초청에 응하셔서 그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집에는 한 사람의 고창병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이 고창병자를 고칠 것인지를 시험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거짓 영접을 했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 앞에서 진솔하게 정직하며 거짓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보화입니다.
a. 함께 식사하기를 청함받음(눅7:36)
b. 고소할 틈을 얻기 위하여(단6:4)

 

2) 고창병자를 치유하심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그의 집에 영접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궤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고창병자를 세워서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면 안식일을 범한 죄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은 그들의 악함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항상 진리는 옳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a. 선을 행하는 것(마12:12-13).
b.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함(마22:46)

 

3) 자기를 낮추라
청함을 받은 자들이 상좌 택함을 보신 예수님은 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상좌는 그 좌중에서 가장 홀륭한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상좌에 앉으려고 애쓰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말석에 앉을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자신을 인간의 형체로 낮추어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그의 제자 되는 우리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a.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짐(눅18:14)
b. 겸손은 성도의 행동 규범임(롬12:16)

 

2. 천국 잔치

 

1) 은밀한 보상

예수님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조, 마7:12). 예수님께서는 부한 자보다 가난한 자들을 대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대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접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대접한 것을 갚아 주십니다.
a. 분깃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신14:29)
b. 병 든 거지(눅16:20)

 

2) 배설된 큰 잔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천국을 큰 잔치 혹은 혼인 잔치에 비유한 예가 많습니다(참조, 사61:10;사62:5;마9:15;요3:29).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풍습에서는 잔치를 계획하고서 바로 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종을 통해서 1차 통보를 하고 잔치 준비가 끝난 후 2차 통보를 하여 잔치에 초대합니다.
· 혼인 잔치(눅14:8)

 

3) 초청에 응한 사람들
첫번째 초청에 응하였던 사람들은 잔치 준비가 끝난 후 2차 초청에는 모두 약속이나 한듯 거절하였습니다. 초청을 받았던 자들의 거부는 단순한 약속 위반이 아니라 중대한 인격 모독이었기에 주인은 진노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잔치 자리가 아직도 비자 주인은 종에게 길과 산으로 가서 강권하여 사람을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처럼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 이생의 재리는 말씀을 막음(눅8:14)

 

3.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

 

1) 헐연과 목숨까지 미워하라
예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 심지어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혈연으로 인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나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림(요12:25)
b. 세상 생명은 헛된 것(욥7:15-16)

 

2)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한다면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담당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a.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함(딤후1:12)
b. 모든 것을 해로 여김(빌3:8)

 

3) 모든 소유를 버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소유도 또한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지식, 가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에는 우리의 생명과 영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희생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희생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마치 망대를 건축하다가 도중에 그만 두는 것과 같습니다. 순교자 야고보와 스데반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희생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a.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사랑해야 함(마10:37-38)
b. 과실을 많이 맺어야 함(요15:8).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희생을 기피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과 희생의 길을 자청하여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단어해설]
1절. 두령. 원어 은 '두목, 지도자'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바리새인 중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2절. 고창병. '수분, 물'을 뜻하는 원어 에서 유래한 말로 신체 중에서 심장이나 신장 부분에 혈장액이 고이는 병을 말한다. 이 병은 성생활이 문란한 경우에 나타나며 발병 한 사람은 활동하는 것이 불편했다. 여기서 바리새인 집에 고창병 환자가 있었던 이유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3절. 합당하냐. 원어적으로는 '율법적인 행위인가'라는 말이다.

7절. 상좌. 이 말은 교만을 의미한다.

9절. 말석. 이 말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됨을 의미한다.


[신학주제]
제자도.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를 네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제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들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의 사명을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둘째, 예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예수의 제자는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를 함으로써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넷째, 예수의 제자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이 세상이 썩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란 어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반드시 제자 됨의 행동으로 드러나 야만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는 사람은 입술로는 믿을지라도 마음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담대한 선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명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도 제자도와 관련하여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을 말할 자격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이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고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 운운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강력한 표현으로써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말이다.


[영적교훈]
부자들을 초청하는 잔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잔치 배설자에게도 하늘의 보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초청받은 부자들은 세상적인 차원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세상적인 차원에서의 보상이 없더라도 하늘의 보망을 소망하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