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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누가- 묵상자료 2

by 은총가득 2020. 11. 18.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둔 진정한 부자(누가복음 16:19-31)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신 재물에 대한 제자도를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칭찬과 재물의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 기준과 선입관과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릴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이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린다. 이것은 단순히 부를 축적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산술적으로 비교하고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와 자세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으로 진정한 부자가 어떠한 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며 안식을 누리는 자가 누구인가를 시사하고 있다.

1. 부자

예수께서는 부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19절). 이것은 부자가 소유하고 있던 재물 그 자체를 묘사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가 취한 삶의 자세를 나타낸다(H. Ridderbos). 이것은 부자가 자신의 부를 자랑하였으며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살았음을 뜻한다. 아마도 부자는 자신의 집 대문 밖에 누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연명(延命)하고 있는 거지 나사로가 있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렇듯 부자는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의지하는 자였다. 부자는 그러한 인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아마도 그가 소유했던 재산의 정도에 맞게 호화스러운 장례식으로 이생의 삶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의 생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는 생이었다. 심지어 물을 손가락 끝에 묻혀 헛바닥에 발라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생이었다. 이것은 그가 지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재물을 의지한 결과였다. 그는 지상에서 재물을 더 신뢰하였으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그가 재물을 소유함으로 인해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선택하고 재물에 충성을 다한 결과이다. 그는 지상에서 부유한 자로서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받아서 진정한 부자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 이상 구제될 수 없는 가난한 자, 곧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였다.

부자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은 재물의 소유 그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그의 선택과 충성으로 인해서 빚어진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은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는 부자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여 경각심을 갖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한 데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28-31절).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 가운데 선포되었던 것이다. 부지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자기 만족과 연락을 즐기기 위해서 재물을 선택하였으며 그것만을 추구하였다. 부자에게 주어진 기회는 동일하게 부자의 형제들에게도 주어진다. 그들 역시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동일한 경고를 받게 될 것이다. 부자에게도 처음에는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만족과 탐닉에 빠져서 재물을 선택하고 그것에 충성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 부자에게도 기회가 있었듯이 부자의 형제들에게도 모세와 선지자의 가르침을 들을 기회는 물론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양자 택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 지상의 삶을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복 혹은 심판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부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보내서 형제들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우를 따르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가서 권하여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선택한 이상 그들은 더 이상 모세와 선지자의 가르침을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었다가 실아난 사람이 외치는 것조차도 거부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마리아와 마르다의 형제 나사로의 기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보는 이들에게 증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들은 예수와 더불어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사악함을 드러내었다(요 11:1-53 ; 12:9-11).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한 자들은 어떠한 이적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신에 재물을 선택한 부자나 그의 형제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재물을 선택하여 재물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L. Morris).

2. 거지 나사로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연락을 즐기는 부자와는 달리 거지 나사로는 끼니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 음식으로 때우며 연명하는 자였다. 심지어 그는 몸의 상처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였으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자였다. 그는 단순히 먹을 것이 없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아무런 권리도 소유하지 못한 자였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였다(S. G. De Graaf). 그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하는 자였다(H. Ridderbos).

그도 부자와 동일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부자의 장례식을 언급하신 반면 거지 나사로의 장례식은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장례식은 거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지 나사로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거지 나사로는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당시 연고자나 연고지를 알 수 없는 거지가 길거리에서 죽었을 때 사람들은 거지의 시체를 게헨나라 불리는 예루살렘의 소각장에서 태웠다. 어쩌면 거지 나사로는 이러한 장례식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G. Campbell Morgan). 비참한 삶과 죽음과 장례식을 맞이했던 거지 나사로의 생 역시 지상의 삶으로 끝나지 않았다.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는 부자와는 달리 진정 가난한 자였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기대하며 생을 마감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부자와는 달리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지상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영적으로 가난하여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 만을 기대하는자였다. 비록 이러한 그의 인생이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가난 그 자체였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진정으로 부유한 자의 모습이었다. 거지 나사로는 인생의 도움이 재물에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재물을 의지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 음식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과 재물에 대한 자세에서 비롯된다. 재물 대신에 하나님을 선택하여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고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다하며 청지기로서 주어진 재물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할 때, 그는 거지 나사로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카리스주석. pp. 576-577.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 주신 소망(누가복음 1:5-23)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헤롯이 다스리는 암울한 유대 땅은, 아이가 없으나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가라와 엘리사벳을 통해 새 시대를 맞이합니다.

질문 ; 세례요한은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16-17)

사가랴 가정의 비극(5-7) 헤롯은 이두매. 곧 에돔 사람으로 로마 세력을 둥에 업은 가짜 왕입니다. 그는 자기 신분을 가리고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타락의 온상이며, 제사장은 타락을 부추기는 무리였습니다. 이런 암울한 시대에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계명과 규례에 흠이 없는 의인의 삶을 살았습니다(6). 그러나 두 사람의 나이는 많고, 이들의 신앙을 이어갈 자녀는 없었습니다. 사가랴 가정의 개인적인 비극은 당대가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임을 암시합니다. 가짜왕, 욕망으로 가득한 성전, 타락한 제사장 등 소망 없는 세대를 사는 소망 없는 가정에서 과연 의인의 삶이 가능할까요?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시대와 현실을 핑계하며 개인의 비극과 아픔을 외면하거나 주어진 사명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핑계로 내 안에 있는 죄와 욕망을 합리화하는 일은 없습니까?

질문 ; 사가랴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이것은 징계입니까, 징표입니까? (20)

이스라엘의 소망(8-23) 자녀가 없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도 사가랴는 제사장 직분을 성실히 감당합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그의 간구를 들은 것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을 일러줍니다(13). 사가랴 부부는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며 뜻을 구했고 이제 응답된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태어날 요한은 사가랴 부부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기쁨이며(14),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16-17). 두 사람은 사적인 간구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공적으로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너무 놀라운 소식을 사가랴는 쉽게 믿지 못해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가랴의 믿지 못함은 불순종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 줍니다.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작을 사가랴와 당대 사람들 모두 믿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내 짧은 생각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부정하거나 제한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할 때 비록 사적인 기도라도 공적으로 응답됨을 알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따라 늘 구하십시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아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사가랴, 엘리사벳(5) ; 사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이며,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맹세'라는 의미가 있다.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그 두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이었고, 두 사람은 다 나이가 많았다.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사가랴가 자기 조의 차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일을 하고 있었다.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어느 날 제사직의 관례를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9) ; 약 18,000명의 제사장 중 순번이 정해진 그룹에서 하루 두 번 제비를 뽑아 번제와 분향할 제사장을 정했다. 일생에 한 번 돌아오기 어려운 영광스러운 기회이다.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그 때에 주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그는 천사를 보고 놀라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께서 들어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그 아들은 네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는 포도주와 독한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요,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그는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의 선구자로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다. 나는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보내심을 받았다.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보아라, 그 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회중이 사가랴를 기다리는데,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도 오래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그런데 그가, 나와서도 말을 못 하니까,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환상을 본 줄을 알았다. 사가랴는 그들에게 손짓만 할 뿐이요, 그냥 벙어리가 된 채로 있었다.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사가랴는 제사 당번 기간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직분과 신실함을 존중하시는 하나님

본문 : 눅 1:5-23

찬송 ;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주제 개설

오늘의 말씀은, 직분과 신실함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께서 시대마다 직분을 주시고, 신실한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인간은 주신 직분이나 신실한 삶을 간과하고 가벼이 여기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신 직분과, 직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자들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으시고 존중해 주십니다.

본문에 대한 적용적 해석

본문에 주의 사자가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납니다. 사가랴와 아내 엘리사벳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6절에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주의 말씀을 신실하게 실천하고, 또한 주신 직분을 묵묵히 신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고, 세례 요한의 탄생을 알려 줍니다. 곧 이 땅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요한을 이 땅에 보내시는데, 주님은 신실한 직분자 사가랴를 사용하시고, 특히 그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중에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청중을 향한 해석적 적용

주신 직분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직분을 받고도 가벼이 여기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옳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습니다. 교회를 통해 주께서 주신 직분은 그 자체로 너무 소중하고 존귀합니다. 그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때 그 사람을 통해 주께서 귀한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또한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시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9절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할 때입니다. 우리 시대로 옮기면 예배 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10절에는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제사장은 신실하게 제사를 집례하고, 백성은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할 그 시간에, 11절에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지금도 예배는 주님이 임재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만 모이는 시간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주님은 무엇보다 예배를 사용하십니다.

결론과 도전

주신 직분을 소중히 여기고,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도 제목 ; 우리 연약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거나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출처 ; 설교자를 위한 복있는사람. 2019년 11,12월호(Vol. 18). pp. 176-177)

 

 

 

자기 의(自己 義)에 관하여(누가복음 18:9-14)

 

누가복음 18:9-14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본문에 등장하는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 중예서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인보다 세리를 의롭다 하신다(칭의).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들은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이다. 나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고 판단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아니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의롭지 않다고 판단한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된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고전 4:6-8의 말씀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물질과 능력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식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교만과 자기 의의 표출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행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인정하는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 세리는 교회 앞이나 사람들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을 만한 일을 행한 것들이 없는 자였다. 그는 자신이 부족함을 깨닫고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죄인임을 깨닫고 나아갔다. 이때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 내가 행한 것 때문이 아니다.

항상 나 자신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이다."를 외치면서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쳐서 세뇌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못난 자아가 불쑥 불쑥 나타나게 된다. 주 안에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영성 훈련에 집중하도록 하자.

 

 

사단의 지배 하에 있는 인간의 사악함(누가복음 23:1-25)

산헤드린 공회에서 능욕을 당하신 예수는 사형 선고를 받아야만 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스스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살려 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마치 포도원 농부들이 세를 받으러 온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주인의 모든 재산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처럼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를 죽이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빌라도 총독에게 거짓 증언으로 고소하였다.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회원들의 고소, 헤롯의 조롱, 군중들의 외침 속에서 아무런 반항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잔을 받아들이셨다. 그 잔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이었다. 23장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 즉 산헤드린의 고소, 빌라도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함,헤롯의 간악함, 백성들의 무지함과 로마 군병들의 잔혹성 등은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치밀함과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의 사악함(1-25절)

산헤드린, 빌라도, 헤롯, 그리고 군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고 있는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목전에 놓인 이익과 자기 만족에 급급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였으며,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실상은 사단의 지배하에서 저질렀던 범죄들이었다.

본문에는 네 부류의 인간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산헤드린 회원들과 빌라도, 헤롯, 그리고 백성들이다.

1. 산헤드린 회원들

산헤드린은 자신들을 비판하며 정죄했던 눈엣가시와 같은 예수를 드디어 체포하였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불법적인 심문 과정을 통해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예수를 체포하기 전부터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심문 과정은 죽일 근거를 찾기 위한 요식(要式) 행위에 불과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실상 예수를 사형시킬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의 입을 통해서 직접 예수 자신이 메시야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했다. 그래야만 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적하려 했다고 고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근거가 될 만한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시면서도 자신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다. 산헤드린 회원들이 심문 과정에서 내린 예수의 죄목은 신성 모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빌라도 총독의 입장에서 볼 때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될 수 없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예수의 죄목을 변조시켰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2절). 그들이 변조시킨 예수의 죄목 중 첫째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하였다는 것이다. 세금 논쟁은 산헤드린 회원들이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서 던졌던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특유의 질문 방식을 통해서 그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셨다(20:19-26). 예수께서 내리신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0:25). 예수께서는 결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백성들을 선동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산헤드린 회원들은 거짓으로 빌라도에게 고소하였다.

산헤드린 회원들이 변조시킨 두 번째 예수의 죄목은 예수가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이라는 표현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이 말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을 고려하여 산헤드린 회원들이 ‘그리스도’ 앞에 붙인 것이었다(G. Campbell Morgan).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 과정에서도 메시야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서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께서 자칭 메시야 곧 왕이라고 주장하였다고 빌라도에게 고소하였 다.

이러한 산헤드린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5절). 그들의 주장은 예수께서 민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항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위증을 통해서 반역죄라는 죄목을 예수께 뒤집어 씌웠으며 그로 인해서 사형 선고를 받도록 유도하였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예수를 죽이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께서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에서 말씀하신 예언대로(20:9-18)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

2. 빌라도

예수의 수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이다.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고소에 따라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수가 무죄이며 산헤드린의 고소가 허무 맹랑한 것임을 알았다. 그는 산헤드린의 고소 내용대로 예수가 왕이라고 주장하며 백성들을 선동하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하였다. 예수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였다. "네 말이 옳도다"(3절).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께서 긍정하셨음에도 다음 절에서 누가가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에게 중요한 것은 빌라도의 심문과정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의 무죄성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누가는 오직 예수의 무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생략한 채 예수가 무죄라는 빌라도의 판단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요한은 예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누가가 이 말씀을 생략하고 있다 할지라도 빌라도는 심문 과정을 통해서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고자 선동하는 자가 아님을 확실히 알았다.

예수는 분명히 왕이셨다. 그러나 산헤드린 회원들이 고소하는 것처럼, 빌라도가 처음에 오해한 것처럼 예수는 이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니시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취되며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시며 왕이시다.

골치 이픈 문제에 걸려 들기 싫은 빌라도는 예수의 문제가 헤롯 관할임을 알고 헤롯에게로 보내 버렸다. 헤롯이 어떠한 판결도 내리지 않고 예수를 빌라도에게 되돌려보내자,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판결을 내려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빌라도 자신의 판단에서 볼 때 예수는 결코 반역을 꾀한 적도 로마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저지른 적도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 주기 위해서 산헤드린을 설득하기로 작정하고그들을 불렀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 앞에서 예수에게서 이무런 혐의를 찾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는 산헤드린과 백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는, 예수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때려서 방면하겠다고 말한 것이다(15,16절). 무고한 자를 때리는 것은 분명한 불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계속해서 귀찮게 구는 산헤드린의 욕구를 적당한 선에서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둘째는, 적당한 타협안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형시키라고 외치는 산헤드린과 백성들의 함성과 민란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대로 의로운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허가하였다는 점이다(24절).

그는 예수의 무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과 백성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더라도 예수를 사형시키도록 언도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공의를 지키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산헤드린과 백성들의 요구대로, 살인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범죄자를 방면하고 대신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허가하였다.

예수는 사형을 언도받는시점에서까지 불법자로 취급당하셨다(22:37). 결국 예수는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속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서 끝까지 죄 있는 자, 불법자 취급을 당하셨으며 그로 인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게 되셨다. 그러나 그의 고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인함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소원해질 수밖에 없던 인간들은 예수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 구원받을 길을 얻게 되었다.

3. 헤롯

헤롯은 매우 간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도록 보내 주었을 때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헤롯은 평소에 예수 만나기를 고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자 했던 동기는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고자 했던 동기외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헤롯이 예수를 만나기 원했던 것은 예수가 소문대로 이적을 행하는 자인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8절).

아마도 헤롯은 예수가 행한 이적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한 소문, 곧 자신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S G. De Graaf).

헤롯 앞에 선 예수는 헤롯의 기대와는 달리 어떠한 이적도 행하지 않으셨으며, 심문하여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여러 가지로 심문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예수 주변에 서서 타당치도 않은 이유를 가지고 계속해서 예수를 고소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 무리들, 이 모든 것들은 헤롯을 짜증나게 하였다. 참다 못한 헤롯은 예수를 희롱하고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헤롯이 산헤드린의 어떠한 고소 내용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헤롯은 후에 빌라도가 산헤드린과 백성들의 성화에 못이겨 사형을 언도한 것과 같은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다. 다만 헤롯은 자신의 기대에 못미쳤던 예수를 보면서 조롱하였을 뿐, 산헤드린의 고소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를 범죄자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헤롯은 예수를 범죄자로 취급하기를 요구하는 산헤드린의 함성을 거절하였다. 헤롯은 예수를 범법자로 여기지 않고 다만 광대꾼으로 취급하였다(G. Carnpbell Morgan). 빌라도의 심문과 헤롯의 심문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예수는 결코 불법자의 동류가 아니셨다. 그는불의한 자가 아니며 결코 정죄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의인이셨다. 다만 예수께서 불법자의 동류로 취급 당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4. 백성들

예수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 사실상 백성들은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을 불러들인 사람은 빌라도였다. 예수의 무죄를 알게 된 빌라도는 고소한 산헤드린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는 산헤드린을 소집할 때 백성들도 함께 듣도록 불러모았다(13절). 빌라도는 어쩌면 백성들이 자신의 견해에 동조해 주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백성들이 산헤드린과는 달리 자신의 판결을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백성들은 철저하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질렀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19:38)라고 찬양하였다. 그들은 그 동안 예수의 행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며,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셨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 곧 자신들이 기대하던 하나님의 나라,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듯하다. 하지만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 대신에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서슴지 않았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의 독립을 추구하는 자유의 투사인 바라바를 백성들이 요구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듯하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였다. 도리어 자신들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린 배신자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열렬히 찬양하던 태도에서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예수에게서 느꼈던 심한 배신감은 예수께서 주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전혀 약속하신 적이 없는, 백성들의 잘못된 기대를 채우지 못한 허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지상적이고 국가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신 적이 없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는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도 자신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백성들이 기대했던 국가적이고 지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로마와 같이 힘이 지배하는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였으며 힘이 아니라 섬김이 지배하는 나라 출처 ; 카리스주석. pp. 508-511.<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