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편을 택하라(누가복음 10:38-42)
[ 성경묵상 ]
본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1.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42절). 우리가 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하느라 분주하지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 일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판단 기준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에 의거하여 선택한 것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2. 많은 것을 할려고 분주하기보다 중요한 것을 하나 선택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40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다. 분주한 것들 중에서 중요하고 좋은 것을 하나 골라 그곳에 집중해야 한다.
3. 좋은 편을 택하면 뻬앗기지 아니한다(42절).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좋은 편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인정할 수 있는 더 좋은 편은 무엇일까? 항상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 막무가내로 열심히 행하고 난 뒤에 만족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며, 이러한 사랑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더 좋은 편이다.
더 좋은 편을 선택해야 한다. 더 좋은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생각을 항상 점검하고 살아가야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눅 10:38-42)
[ 성경묵상 ] 10:38-42에서는 공관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보도하고 있는 기사로서, 마르다 · 마리아 자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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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이 기사는 '예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마음이 들떠서 안정되지 않는 상태의 신앙 생활보다는 차분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 생활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들이 길을 가는데,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누가는 이미 9:51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미리 언급함으로 본절에서 언급된 이 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왜 누가는 이 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는가? 그것은 예수의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의 사역을 이후에 집중적으로 다루어 부각시키려고 한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3:32,33 ; 17:11 ; 19:28).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의 발치에 앉아 ; 이것은 당시 랍비 앞에서 배우는 학생의 태도였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여인들이 배우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배울 것을 격려하시는 모습에서(42절) 여성에 대한 그분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르다의 요청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뉘앙스를 전제하고 있다. 첫째, 몹시 바쁜 와중에서도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 둘째,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도 침묵하고 계신 예수께 대한 원망, 셋째,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지금 접대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밝히려는 생각 등이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러한 생각은 곧 그 릇된 것이란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공동 번역은 본문을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한글 개역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만 하든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생략한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번역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KJV도 ‘그러나 한 가지가 필요하다(But one thing is needful)’라고 번역하였으며, NIV도 ‘그러나 오직 한 가지만이 필요하다(but only one thing is needed)’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NIV는 난하주에서 몇몇 사본에는 ‘그러나 몇 가지 혹은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다(but few things are ndded-or only one)'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바로 한글 개역 성경이 이러한 몇몇 사본의 경우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 번역과 NIV, KJV 등의 번역에 따라 본문은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을 취할 때 마리아가 선택한 말씀을 듣는 것의 중요성이 더욱 분명하게 부각된다. 당시 마르다가 하였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었으며 바로 마리아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순위에 있어서 영적인 일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으므로 그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요청에 대하여 대답하시면서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신 것이다.
본절은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도와주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그녀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이 단어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좋은 편을 택해 집중하고 있는 자의 유익을 외부의 어떤 것이 박탈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한편,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다의 음식 준비보다 더 차원 높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선 제38절의 설명에서 밝혔듯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이 부분에 배치시키며 또한 그 결론으로서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란 예수님의 말씀을 적시한 것과도 관계된다.
즉 누가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이와 같이 마무리함으로써 결코 빼앗기지 않을 ‘좋은 편’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며, 이러한 사랑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구체화됨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누가복음 2:25-39)
[ 성경묵상 ]
예수님을 본 사람은 많으나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찬양하며 축복한 사람은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 뿐이다.
오래 믿을수록, 신앙의 연륜이 높을수록 영안이 어두워지고, 영적인 감각이 둔해지는 경향이 크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관에 따라 판단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연륜이 깊은데로 불구하고 영안이 밝았다.
이들의 영안이 밝아진 이유는 무엇인가?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 그리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아기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다(25,26절).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한다(37절). 그는 아셀 지파 자손으로서 망한 지파의 딸이며 선지자였다.
그들은 경건한 생활을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며 섬기는 자에게 영안이 열리게 됨을 볼 수 있다.
시므온은 찬송(28절)하며 축복하였다(34절).
이들은 사람을 살리는 자로서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찬양하고 축복하며 전해야 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있었다.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는 주께서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다.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 안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에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주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것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하여 하는 이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여겼다.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도록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로 안나라는 여예언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았다. 그는 결혼하여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과부가 되어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 왔다.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바로 이 때에 그가 다가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이란 25절의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와 거의 같은 뜻이며, 구조상으로도 대구를 이루고 있다.
‘속량(redemption)’은 ‘속전을 받고 풀어주다’를 의미하는 ‘뤼트로오’에서 온 명사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신적 구원의 개념을 말하므로 메시야적 의미를 지닌 용어라 할 수 있다. 즉 메시야의 도래를 대망하는 당시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알렉산드리아 사본(A)을 비롯하여 베자 사본(D), 레기우스 사본(L), 그리고 표준 원문(Textus Receptus) 등에는 ‘예루살렘’ 앞에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 ‘엔’이 있다. 이에 따르면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구속됨을 기다리고 있는’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구속의 대상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구속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영역 성경 중 KJV가 이를 따랐다. 그러나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D) 등 권위 있는 사본들은 본문(UBS3 판)과 동일하게 되어 있고, 한글 개역 성경 및 NIV, NASB, RSV 등도 모두 본문을 따라 ‘예루살렘의 구속’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안나가 예루살렘의 구속을 예언하는 사 52:9을 따라 찬양했다는 사실을 통해 보여 주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도성이므로 예루살렘의 구속은 곧 이스라엘의 구속(25절)을,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구속을 의미하는 제유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아기의 부모는 주의 율법에 규정된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갈릴리에 있는 자기네 고향 동네 나사렛에 돌아왔다.
요셉과 마리아 일행은 성전 방문 후 곧바로 나사렛으로 간 것이 아니라, 일단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 왔으며 거기에서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받았고(마 2:11), 이집트 이주에 대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그곳으로 이주하였으며(마 2:13-15), 이주 후 헤롯 대왕의 유아 학살령 및 학살이 있었고(마 2:16), 혜롯 사망 후(마 2:19) 비로소 요셉과 마리아 일행은 갈렬리 나사렛으로 돌아왔다(마 2:23). 따라서 본문은 이러한 여러 사건이 기록된 마 2:1-22 이후에 나오는 마 2:23에 해당되는 사건이다.
한편 누가가 이러한 사건들을 일체 생략한 것은 자신의 복음서를 유대라는 지리적 배경 하에서 기록하려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면으로 볼 때도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이 만방에 전해지는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했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유대 땅에서의 예수의 사역을 보다 중심적으로 기술하였다. 즉 누가는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마지막 지상 명령(행 1:8)을 하나의 시간적 경계로 하여 그 전 사건이 기록된 누가복음은 유대 땅을 지리적 배경으로 하고, 그후의 사건이 기록된 사도행전은 보다 넓은 이방 땅을 주요 배경으로 하여 기록하였던 것이다.
예수님 성장 과정, 시므온과 안나의 찬송(눅 2:21-40)
[ 성경묵상 ] 예루살렘의 시므온과 안나는 오랫동안 메시아 오심을 기다려 온 사람들로서 아기 예수님을 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다(누가복음 5:1-11)
전도자 사도 바울은 세 사람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첫번째는 스데반이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하는 자리에 바울이 있었다.
두번째는 아나니아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어 헤매이고 있을 때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 나아가 권면하였다.
세번째는 바나바다. 그가 바울을 이끌고 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난 바울은 큰 일을 행하였다. 믿음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남이 인생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새로운 학년을 맞이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자신들에게 좋은 만남이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기다려야 한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나타난다.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를 부르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그때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힘들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된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반항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였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가 목수 출신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졌다. 순종한 결과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때 베드로가 변화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 때 주님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복음 전파의 큰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에게는 육신적으로는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힘들어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데까지 일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그들의 삶은 달라진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삶은 완전하게 달라졌다.
한 번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끝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자신의 생각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날마다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게 되고, 기도로 영적인 호흡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복음 8장에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으로 병고침을 받았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병고침을 받았다. 이처럼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진 자들은 변화를 받아 고침을 받게 된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져야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변화되면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베드로는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이 몸종으로부터 엘리야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가 찾아 갔을 때 엘리야는 자신을 만나 주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으라고 하였다. 듣지 않으려고 할 때 신하들의 권유를 듣고 요단강에서 몸을 씻었다. 7번 씻을 때까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실망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순종했을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참고 소망 중에 인내한다면 큰 소망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소망의 인내 / 나아만 장군, 베드로의 만남의 결과는 육신적인 영광과 번영보다는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눅-4, 예수님의 갈릴리 전기 사역(눅 4:14-5:16)
4:14-9:50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께서 드디어 갈릴리(Galilee)를 중심으로 공생애 사역을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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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소명 과정(눅 5:1-11)
[ 성경묵상 ] [ 질문1 ]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누가 먼저 찾아갑니까?(3-4절) [ 질문 2 ]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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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눅 5:1-11)
찬송 :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들어가며 교회를 다닌다는 것,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믿음생활의 전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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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 누가복음 9장 22절 아침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듣고 난 후에 자신의 앞날에 대해 말씀하셨다(누가복음 9:22).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은 후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할 자들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다. 일반 백성들이 아니었다. 이방인들도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아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일반 백성들은 그러한 생각을 한다 할지라도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메시아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했을 때 일어난 일들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던 사울이 행했던 것처럼 행하면서 살아가는 자들도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교회를 핍박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렴풋이 아는 자들이 교회를 배척한다. 교인들을 핍박한다. 일반 백성들은 단지 마음으로, 생각으로, 또는 욕만 할 뿐이지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교회를 공격한다.
교회 내부에서도 목사를 배척하고, 교회에 큰 환난을 초래하는 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이다. 목사를 비롯하여 장로들, 그리고 안수 집사들이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 보다 큰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들은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한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동을 하게 된다.
베드로와 같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자들도 넘어진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을 간다. 멀찍이 서서 바라만 보고 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환난이나 곤고나 어려움이 닥치면 피하는 게 현실이다.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룬다고 하였다(로마서 5:3-4). 소망을 가진 자들이 환난 가운데서 인내하며 연단을 받는다.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닥치지 않는다. 나에게 닥치는 환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즐거워하는 하루가 되도록 하자.
그리고 소망의 인내를 갖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자. 앞날의 사역에 대해 소망을 갖고 하나님께서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지 바라보며 기다리자. 소망을 이루기 위해
부활은 삶의 승리입니다(누가복음 24:1-12)
오프라의 일화 소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의 일기를 쓰면서 성경과 부활의 신앙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고백했다고 했다.
예수님이 죽은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왕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각자의 길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것을 보이셨다.
안식 후 첫날은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더 이상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첫째로 생명의 승리를 보여 주셨다.
우리 인간은 죄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보혈의 피를 흘려 주셨기에 우리의 죄는 속량함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생명, 영생을 얻게 되었다.
로마 시대에 순교한 성도들은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 후 영생을 얻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진리의 승리를 보여 주셨다.
부활의 소망, 진리가 승리하게 한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이 우리도 부활하고 살아가게 된다.
진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진리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디.
셋째로, 사랑의 승리를 보여 주셨다.
사랑은 결국 승리하게 됨을 증거하셨다.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면 우리의 인생은 모두 끝이 된다.
결론을 맺어보자.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어려움과 환난이 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여려움이 생기게 된다. 이럴 때 이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서 다시 일어서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문제가 해결된다.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서 승리하게 하신다.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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