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낙심을 기쁨으로 바꾸는 부활의 은혜(누가복음 24:13-35)
들어가며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부활과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 속으로
1. 글로바와 또 한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까? (13-14, 19-24절)
13-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3-14절)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대화는 온통 ‘이 모든 된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된 일’이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동행하시게 되었습니다. 글로바와 그의 일행은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글로바가 그 낯선 나그네에게 해준 말이 19-24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글로바의 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19-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19-21절) 요약하면, 글로바는 예수님이 선지자요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분, 즉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그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가 무참히 깨어졌기에 글로바의 마음은 매우 슬펐습니다.
둘째는 22-2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22-24절) 글로바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준 처사를 만났다고 전해준 말을 들었습니다. 더구나 ‘우리와 함게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무덤에 가 보았더니 여자들의 말과 같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글로바와 그의 일행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속량할 메시아로 알고 있던 분이 죽으셨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믿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슬픈 빛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17절). 슬픔과 절망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2.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그 두 제자를 무슨 말로 책망하셨습니까? 또 책망하신 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25-27절)
25-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25-26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과엥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슴하셨습니다.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절)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자기에 관한 것’ 즉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즉 말씀으로 당신의 고난과 부활을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다소 의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입었던 상처를 보여주면서 “내가 부활했다.”고 말해주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가지고 당신의 고난과 부활을 입증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육신을 가지고 부활을 입증하셨다면 예수님의 육신을 눈으로 보지 못하는 우리는 실망감이 클 뻔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당신의 부활을 입증해 주셨기에,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입증해 줍니다. 예수님이 글로바와 그의 일행에게 설명해준 말씀은 구약성경인데,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비해 더욱 분명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말해줍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분명히 믿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지금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까?
3. 글로바와 그의 일행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언제입니까? (29-32절)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29절)
글로바와 그의 일행은 지금 자신들과 동행하고 있는 그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분과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자신들과 함께 있어주기를 간청하면서 함께 여관 같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30-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0-31절)
함께 유하게 된 곳에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는데, 그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을 떠난 후였습니다.
왜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31절에 가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겠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이전의 몸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이 말씀에서 ‘자기(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가리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전에 글로바가 보았던 그 분과는 사뭇 다르셨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다가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16절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절)이라고 말하고 31절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31절)라고 말한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낙심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여인들이 그 소식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불신이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리어졌던 그들의 눈은 왜 밝아졌습니까?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늘 하시던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글로바와 그의 일행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두 번째는 32절이 설명해줍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절) 예수님이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는데(27절) 그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불신이 그들의 눈을 가리게 했는데 믿음과 확신은 그들의 눈을 밝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은 가리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우리의 삶에 가득한 주님의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낙심했던 그들의 마음을 말씀으로 뜨겁게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하여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회복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잠시나마 자신들과 동행한 나그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제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33-35절)
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33절)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사람들이 있던 곳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낙심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내려갔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보다 예루살렘을,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던 신앙 공동체를 떠나간 것이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신앙 공동체로 돌아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낙심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신앙과 기쁨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34-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34-35절)
그들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한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고 그 부활 신앙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증거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절망이 기쁨으로, 낙심이 열심으로 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글로바와 그의 일행은 놀라운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변화입니다. 나는 그런 변화를 겪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한 주간의 실천/ 부활에 관한 찬송가를 한 곡 정해서 부르고 가사의 의미 묵상하기
마무리하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글로바와 그의 일행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깊은 절망이 크고 놀라운 희망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갔던 그들이 돌아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크나큰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절망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좌절하고 낙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생동감으로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복있는사람, 2018년 3,4월호
엠마오로 가는 길 / 요셉 폰 퓌리히(Josef von Führich) / 오스트리아 / 1800~1876년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누가복음 23:47-56)
[ 성경묵상 ]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한 변화
사역의 내용 제시 : 말 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자들을 증오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는 마음 등과 천재지변, 성전의 휘장 사건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켜 나갔다.
1. 백부장의 회심(47절) - 그를 복음 전파자로 삼음
백부장의 회심에 결정적 원인은 무엇인가?
/ ‘그 된 일’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일어난 초자연적 기적으로서 해가 빛을 잃어 온 세상이 어두워진 것과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끝까지 참으시면서 절제된 말로서 하나님께 드린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회심하였다.
/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기적은 사형이 집행되던 현장인 골고다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백부장의 회심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 백부장이 회심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로마 군대의 장교가 처형 현장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고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이다.
2. 구경하러 온 무리들의 변화 - 가슴을 치며 그들의 행위를 후회하게 함. 한 편 강도의 변화
3. 숨어 지내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제자들의 변화(52절) - 공회 회원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며 제자로서의 삶으로 변화됨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누가는 예수님의 무죄를 계속해서 증명해 나가고 있다. 누가의 주된 의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흠 없고 무죄한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인류를 구속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본문 개요 ]
44-49절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일어난 초자연적 현상과 예수의 운명을 목격한 백부장의 신앙 고백을 다루고 있다.
44절과 45절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은 온 땅이 어두워진 것과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다.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전 피조 세계의 슬픔과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류가 얻게 된 특권을 보여 준다. 먼저 대제사 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거룩한 공간인 지성소 앞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제 육시 즉 지금의 정오부터, 제 구시 즉 오후 세시까지 해가 가장 강렬하게 비칠 그 시간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수난 당하심에 대한 모든 피조물의 슬픔을 나타낸다. 즉 누가는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기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슬픔과 지성소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보좌가 성도들에게 공개되는 기쁨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50-56절까지는 예수님의 장사 과정 및 안식일 휴식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에 비해 비교적 요셉이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마태는 요셉을 ‘부자’로 소개함으로써 구약의 예언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마 27:57), 마가는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 소개함으로써 당시 산헤드린 의회 안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있음을 보여 준다(막 15:43). 그러나 누가는 요셉의 신분 뿐 아니라 그 신분에 따른 개인적 성품과 인품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즉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공회 의원이었으며, 자신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충실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이러한 충실함을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란 표현으로 강조한다.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늘의 문을 열고 구원의 길을 열고 삶의 전환의 길을 여신 위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일어난 열림의 역사들을 보십시오.
[ 질문 1 ] 예수님의 죽음을 본 백부장의 반응은 어떠한가?(47절)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그는정녕 의인이었다"고 하였다.
하늘의 문을 여신 왕(47-49) 예수님께서 제 삼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후 제 육시(낮 12시)부터 제 구시(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44). 아들의 죽음 앞에서 검게 타들어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이 보입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45). 아들의 찢김 앞에서 더 아프게 찢어지는 아버지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찢기시고, 성소의 휘장이 찢김으로써 은혜의 보좌(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책임을 맡았던 백부장의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47). 예수님의 죽음을 구경하러 모였던 무리들에게도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48). 우리 왕이신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인생에 열려야 할 모든 문이 열렸습니다. 열려야 할 모든 길이 열렸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마음과 나의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 질문 2 ]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어떠한가?(50,51절) 그는 공회 의원으로,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이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다.
인생 전환의 길을 여신 왕(50-56)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인생의 전환을 맞이한 한 사람을 만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그는 높은 사람, 공회원입니다.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50),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입니다(51).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임을 숨기고 지냈습니다. 공개하면 다 잃을 수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비록 자신을 공개하진 못했지만 예수님을 죽이자는 공회의 결의에 찬성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는 예수님의 편에 섰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이후 인생의 전환을 맞이합니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임을 만천하에 공개 했습니다(52).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 예수님을 자랑하는 인생이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정식으로 장사하였기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정당성도 확보되었습니다. 적어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 놓고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는 소리는 효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에게 인생 전환의 길을 여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예수님의 죽음이 내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까?
[ 설교 자료 ] - 십자가 수난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사건의 의미와 교훈은 한두 가지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고도 방대하다. 그러나 일단 누가복음의 문맥 흐름에 따라 볼 때, 십자가 수난을 중심으로 한 본문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무죄한 자로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산헤드린은 심문 과정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신 것을 빌미로 그를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으로 정죄하고 사형을 결의하였다(22:70,71). 그러나 그들은 이 종교적 차원의 문제만 가지고는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예수가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자칭 왕이라고 칭하였다고 함으로써 정치적 반역죄를 예수께 덮어씌우고자 하였다(23:2). 그러나 예수께서는 로마 정부에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신 적이 없었으며, 정치적 의미에서 왕이라고 주장하신 적도 없었다. 이러한 죄목이 예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23:14,22)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서도 무리들의 간악한 요구에 부응하여 사형을 언도하였다. 저자 누가는 이렇게 예수께 대한 고소와 심문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예수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누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죄가 아닌 타인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사 53:12).
둘째,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과의 대격돌(大激突)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갈릴리 분봉왕 헤롯, 그리고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는 각각 종교적, 정치적 권력을 대변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평소 적대적 관계 혹은 갈등의 관계를 맺어 왔었으나 예수를 사형시키는 데 있어서는 하나로 결탁하게 된다. 물론 군중 심리에 선동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쳐대는 무리들도 빠뜨릴 수 없다. 어떻게 무죄한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 모든 무리와 권세 잡은 자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을까? 누가는 이처럼 예수를 죽이기 위해 모든 세력이 결집하는 과정을 회화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결국 예수를 죽이기 위해 세상 나라의 모든 세력, 즉 세상의 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이 총 결집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공관복음서 저자들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체포 음모 이전부터 이 사건이 사단의 역사에 의해 발생한 사건임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22:3). 사단은 총력을 기울여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죄와 죽음으로 다스려 온 자신의 나라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온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지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로써 사단의 목적은 일견 성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으로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이 부분의 기사를 통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제자들 및 백성과 죄인들을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누가는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서로 높아지기 위해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겸손의 교훈을 베푸신 것을 보도하고 있다(22:24-30). 또한 누가는 예수께서 죽음으로 향하는 골고다 언덕길에서조차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인하여 안타까워하시며,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향하여 오히려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권고하신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23:26-31).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병사들을 향하여 간절한 용서의 기도를 하는 모습을 제시한다 (23:34). 그리고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회개하는 한 강도를 구원하신 장면 등을 보도하고 있다(23:42-43). 이러한 것은 모두 누가만의 독특한 기사이다. 스승의 죽음을 앞두고서도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변함없이 참으시고 권고하시는 모습, 또한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자신을 죽인 그 도시의 백성을 위해 안타까워하시는 모습, 자신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은 강포한 군사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시는 모습, 그리고 바로 직전까지 자신을 비방하다가(마 27:44 ; 막 15:32)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강도조차도 구원하신 모습, 이것이 십자가를 앞두고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예수께서 보이신 모습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대사건 한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죄 많고 허물 많은 인간들을 향하여 사랑과 배려를 잃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을 묵상할 때, 우리의 가슴은 어느새 눈물이 흐르는 강이 된다. 누가가 전해 주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 곧 인류 구속 사역의 완성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향해 가시면서도 연약한 한 사람을 향하여 배려를 잊지 않으시는 사랑과 자비의 주님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체험하는 주님의 모습이 아니던가?
부자의 무덤에 장사됨(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46)"
바로 그때에 같은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이었던 니고데모가 나드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도왔습니다(요 19;39-40). 유대 장례법에 의하면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는 그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서 깨끗이 씻었습니다(행 9:37). 그리고 나서 그 시신을 세마포로 단단히 싸매고 그 사이에 향료를 넣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자기의 새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이 무덤은 바위를 깎아서 동굴처럼 만든 무덤이었는데,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넓은 바위나 선반이 있었습니다. 무덤의 입구는 둥근 돌로 막아서 짐승이나 침입자가 시체를 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덤 입구를 막은 둥근 돌을 굴리기 위해서 그 밑에 홈을 팠습니다. 사람들은 돌문을 닫은 후에 그 문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경사지게 홈을 팠습니다. 그래서 그 돌문은 닫을 때에는 한 사람이 닫을 수 있지만, 열 때에는 여러 명의 장정들이 힘을 합쳐야 굴려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러한 무덤은 귀하고 비싼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장사는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44-49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일어난 초자연적 현상과 예수의 운명을 목격한 백부장의 신앙 고백을 다루고 있다.
44절과 45절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은 온 땅 이 어두워진 것과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다.
/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전피조 세계의 슬픔과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류가 얻게 된 특권을 보여 준다.
/ 먼저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거룩한 공간인 지성소 앞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을 보여 준다.
/ 그리고 제 육시 즉 지금의 정오부터, 제 구시 즉 오후 세시까지 해가 가장 강렬하게 비칠 그 시간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수난 당하심에 대한 모든 피조물의 슬픔을 나타낸다.
/ 즉 누가는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기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슬픔과 지성소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보좌가 성도들에게 공개되는 기쁨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낮 열두시쯤 되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유월절에는 만월(滿月)이 가까운 시기로서 일식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후대 사본들은 ‘해가 빛을 잃었다’는 표현 대신에 ‘해가 어두워졌다’는 표현으로 고쳐 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는 짙은 구름이나 모래 바람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해물에 의해 어두워질 수 있기 때문에, 자연 현상인 일식만을 암시하는 듯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 있었던 것이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곧 속죄일에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이스라엘을 위해 대속의 기도를 드린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인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해(마 27:5 1 ; 막 15:38) 누가는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가 사용한 ‘한가운데’로 번역된 ‘메손’은 ‘중간의’, ‘가운데의’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휘장의 중심 부분을 가리킨다. 즉 누가는 좀더 정확한 관찰력으로 예수의 운명 순간 휘장의 한가운데 부분이 찢어져 휘장이 같은 크기의 두 개의 휘장으로 나뉘어진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와 마가는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을 예수님의 운명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한 반면, 누가는 예수님의 운명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한다(마 27:5-51 ; 막 14:37). 이러한 차이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성전관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성전관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와 마가는 율법을 왜곡하며 형식 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교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성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리하여 성전의 파괴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질 새로운 성전, 즉 교회 공동체의 성립이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한 과정으로 골고다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왜곡된 유대교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기독교가 탄생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성소의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처소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차례, 즉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유대교는 성전 중심이며 대제사장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러한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그동안 막혀 있었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졌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의미 갚은 사건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결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운명 다음에 기록함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성전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 성전과 가까이 계셨고, 예루살렘 입성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사역하신 것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언인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 사건은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누가가 성전에 대해 어떤 시각과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게 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성전은, 비록 그곳이 왜곡된 유대교의 구심점이긴 하였으나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서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장소로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이 사건을 제사장 중심의 유대교의 멸망과 만인 제사장직에 기초한 기독교의 탄생을 알려는 상정적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동시에 성소 휘장의 찢어짐을 통해 유대교인들을 향한 경고의 의미 역시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운명과 성소 휘장의 찢어짐은 동시에 발생한 사건이므로 어느 것을 전후에 배치하여도 사실과 배치되지 않는다.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부르짖으시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하던 기도이기도 하다.
46절은 예수님의 가상 칠언 중 마지막 말씀이다(34절 설명 참조). 마태와 마가는 단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신 것으로만 기록하고 무슨 내용의 소리를 질렀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마 27:50 ; 막 15:37). 그러나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예수님이 지르신 큰 소리의 구체적 내용을 본절에서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모든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려는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지닌 누가의 기록 습관 때문이다.
‘부탁하나이다’로 번역된 ‘파라티데마이’의 원형 ‘파라티데미’는
/ ‘옆에’라는 뜻의 ‘파라’와 ‘놓다’는 뜻의 ‘티데미’의 결합형으로 어원적으로는 음식 같은 것을 사람 옆이나 앞에 놓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뜻이 보다 발전되어 진리 옆에 앉게 한다는 뜻으로 ‘가르침을 베풀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 그러나 본절에서는 ‘맡기다’, ‘위탁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곁에 있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사실 이러한 기도문은 죽음을 앞둔 유대인들이 드리던 기도였고, 초대 교회에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임종시 드리던 기도였다(행 7:59 ; 벧전 44:19).
/ 예수님의 이 기도문은 시 31:5의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를 인용한 것으로 동사의 시제만을 조금 바꾼 형태이다.
/ 여기서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자신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며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을 보여 주고 있다. 모든 기력을 잃고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하여 큰소리로 성경 말씀에 나온 기도문의 절규로 마지막을 장식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많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신앙에 대한 모범이 되고도 남는다.
‘운명하시다’로 번역된 ‘엑세프뉴센’의 원형 ‘에크프네오’는
/ ‘밖으로’라는 뜻의 ‘엑스’와 ‘영혼’이라는 뜻의 ‘프뉴마’의 합성어로서 ‘숨을 밖으로 내쉬다’는 뜻이며,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이를 ‘마지막 숨을 내쉬다(breahted his last)’로 번역하고 있지만 KJV는 ‘영혼을 내어 주었다(gave up the ghost)’로 번역하였다.
/ 병행 구절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보면 마태는 ‘영혼을 양도하셨다’로 기록하였고, 요한은 ‘영혼을 포기하셨다’로 기록하여 예수께서 자의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죽음의 길을 가셨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셨다. 자신을 홈 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대업을 완전히 이루셨던 것이다.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백부장이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였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 마태와 마가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고 밝힌 반면 누가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고백은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이었다(누가복음에서 8번 등장하는 송영이다).
‘백부장’으로 번역된 ‘헤카톤타르케스’ 앞에 정관사 ‘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던 사람이었다.
/ 전승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이며,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이 죄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된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후로 신앙을 가져 복음을 전하다가 갑바도기아(Cappadocia)에서 순교까지 하게 된 인물이었다.
백부장의 회심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그 된 일’ 때문이다.
/ ‘그 된 일’로 번역된 ‘토 게노메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일어난 초자연적 기적으로서 해가 빛을 잃어 온 세상이 어두워진 것과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끝까지 참으시면서 절제된 말로서 하나님께 드린 예수님의 기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기적은 사형이 집행되던 현장인 골고다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백부장의 회심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백부장이 회심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로마 군대의 장교가 처형 현장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고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이다.
/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백부장이 돌린 영광은 본서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사의 방문과 목자들이 돌린 영광과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눅 2:14,20).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백부장은 예수님이 참된 의인이었음을 고백한다.
/ 사실 마태와 마가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의인’이라고 고백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 물론 백부장이 이 두 가지 말을 모두 하였을 것이나 누가는 그 가운데 ‘의인’이라는 말을 선택하여 기록한 것이다.
/ 본장에서 계속하여 예수님의 무죄성을 강조해 온 누가는 본절에서 예수님의 무죄성을 백부장의 입을 통해서 결론적 선포의 형식으로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장에는 매우 중요한 대조적인 두 개의 흐름이 있다.
첫번째는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는 네 부류의 무리들이다. 35절부터 시작된 백성의 무관심과 관원들과 군병들의 비웃음과 희롱은 39절 행악자의 비방에서 절정을 이룬다(39절 설명 참조). 사실 이러한 흐름의 주인공들은 23장 1절부터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산헤드린과 산헤드린에 의해서 매수된 무리들이다.
두번째 흐름은 예수님에 대한 호의적인 세 무리들이다. 그들은 바로 백부장(47절)과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는 무리(48절),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49절)이다.
누가는 사실 본장 전반부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무죄성을 강조해 왔다. 빌라도의 재판과 헤롯의 재판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신없는 행동으로 인하여 결국 무죄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본절부터 시작되는 백부장과 무리들과 여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무죄함이 다시 한 번 더 분명하게 고백되어진다.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이것을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일어난 일을 보고, 모두 가슴을 치면서 돌아갔다.
구경하러 온 무리들은 단순히 예수의 사형 집행을 구경하기 위해서 모여든 무리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모인’으로 번역된 ‘쉽 파라게 노메노이’의 원형 ‘쉽 파라기 노마이’는 ‘함께 따라온(come together)’이라는 뜻으로 산헤드린의 배후 조종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치던 무리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18절).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갑자기 본절에서 바뀐다. 예수님을 가리키며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치는 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는 백부장의 경우와 동일하게 십자가 상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하늘의 이적들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있어서 가슴을 치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애통을 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외경인 베드로 복음서 25장을 인용하면서 무리들이 가슴을 친 것을 자신들의 죄값을 깨닫고 서글퍼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한 것으로 본다(Metzger).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무리들이 진심으로 회개했다고 보지 않고, 단지 죄없는 사람의 무모한 죽음에 대한 비애의 표현으로 가슴을 친 것으로 본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산헤드린의 음모에 놀아난 자신 들의 모습을 후회하면서 자신들의 실수로 희생양이 된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으로 이해한 것이다.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예수를 아는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 보았다.
49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들로서 무리 속에 숨어 있던 자들이다. 이들은 과거부터 예수님을 알던 자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들은 십자가의 처형 자리까지 따라와 멀리서 예수님의 처형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여기서 ‘아는 자들’로 번역된 ‘호이 그노스토이’는 단순히 ‘아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넘어서 ‘친구들’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예수님의 친척이나 예수님의 친구로 본다. 막 15:41을 참조하여 예수님이 아는 익명의 여자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아는 자들’이 남성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 친척이나 친구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고 ‘여자들로 번역된 ‘귀나이케스'는 마 27:55,56와 막 15:40,41에 나오는 여자들로서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정죄받을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차마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 가까이 갈 수 없었다.
47-49절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된다.
/ 그것은 백부장과 무리들이 변화의 체험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들 이 십자가 처형 과정 중에 일어난 일들을 목격하였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셨던 예수님의 죄없이 죽으신 모습과 용서의 기도, 그리고 초자연적인 이적이 강팍한 무리와 사형 집행관이었던 백부장의 마음까지 변화시켰던 것이다.
/ 누가는 성도들이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미 여러 번 강조했다(녹 21:1,2,6).
/ 본절에서 누가는 다시 한 번 더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십자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2천 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바로 보기만 한다면 당시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일어난 변화가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오는 변화의 능력을 먼저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를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증인이 되어야 한다.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즉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공회 의원이었으며, 자신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충실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이러한 충실함을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란 표현으로 강조한다.
‘선하고’로 번역된 ‘아가도스’는 ‘좋은 땅’, ‘좋은 인품’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며, 50절에서는 존경할 만한 좋은 자질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아리마대 요셉의 인품의 탁월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의로운’으로 번역된 ‘디 카이오스’는 47절에서 백부장이 예수께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는 율법이나 규례를 준수함에 있어서 홈없는 모습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강직하고 성실한 인품을 지닌 아리마대 요셉은 아무리 다른 공회 의원들이 예수의 처형을 당연시 여겨도 잘못된 결정에 가편 투표를 할 수 없었다(51절). 즉 요셉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산헤드린 의회에서 그들의 음모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동료들의 결정대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지내기까지 했다. 누가는 이렇게 아리마대 요셉의 개인적 인품과 예수의 죽음과 관련한 행동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이 아리마대 요셉은 A.D.63년경 영국으로 건너와 글라스톤베리에 정착하여 영국에 최초의 예배당을 지은 자로 전해진다. 그리고 글라스톤베리에 있는 기적의 가시나무는 요셉이 쉬기 위하여 땅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움이 터서 꽃이 핀다고 전해 내려온다.
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 사람의 동네 아리마대 출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51절은 예수 처형 판결 과정에 있어서 아리마대 요셉이 취한 태도에 대한 언급으로서 이 부분은 누가 만이 기록하고 있다.
‘결의’로 번역된 ‘불레’의 원형 ‘불레’는 ‘뜻’, ‘의도’라는 뜻과 더불어 ‘결정’(행 27:42)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계획과 더불어 공적으로 내린 결정 사항을 가리킨다.
그리고 ‘행사’로 번역된 ‘프락세이’의 원형 ‘프락시스’는 ‘행함’, ‘집행’이란 뜻으로 좋은 뜻과 나쁜 뜻에 모두 사용된다. 본절처럼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악한 행위’, ‘범죄’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결의’와 ‘행사’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뜻을 세워 결의하고 그 결의대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려는 일련의 모든 행동을 가리킨다.
‘찬성하다'는 뜻으로 번역된 ‘쉽카타테데이메노스’의 원형 ‘쉽카타티데마이’는 문자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함께 같이 놓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은 곳에 표를 두다는 뜻으로 찬성하다, ‘동의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의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는 뜻은 산헤드린의 결의와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흑자는 산헤드린 의회는 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산헤드린 의회에 초청하지 않아 만장일치로 예수님에 대한 사형 결의를 통과시켰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본절에서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무죄함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즉 당시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한 인물의 태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무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유대적 표현으로서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뜻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거룩하고 의로운 유대인으로서 그 시대의 암울함 속에 메시야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던 참 신앙의 소유자였다. 여기서 ‘기다리다’는 뜻으로 번역된 ‘프로세데케토’는 ‘프로스데코마이’의 미완료형으로서 타인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뜻으로 ‘기다리다’, ‘기대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됨으로써 요셉의 지속적이고 간절한 기대와 기다림을 보여 주고 있다.
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산헤드린 공회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산헤드린이 정죄하여 죽인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기 위해 달라고 요청하는 행위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서 ‘달라 하여’로 번역된 ‘에테사토’는 ‘요구하다’는 뜻이 있는 아이테오’의 부정 과거형으로 단 한 번의 강한 요구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리마대 요셉은 모든 염려를 뒤로 한 채 용기를 내어 아주 강력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요구는 아리마대 요셉의 자비나 동정심에 근거하기보다는 믿음에 근거한 행동이다.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내겠다는 말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3년 동안 동고동락하였던 열한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체포시 뿔뿔이 흩어진 반면, 숨어 있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는 담대한 신앙을 보여 준다.
사실 아리마대 요셉 역시 전에는 예수님의 은밀한 제자였다(마 27:57 ; 요 19:38).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한 그는 더 이상 숨어지내는 제자의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그는 소극적 태도에서 박차고 나와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에 자신을 기꺼이 헌신함으로써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로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러한 요셉의 용기 있는 강한 요청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준다(막 15:44).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이 연약한 믿음의 사람을 강한 믿음의 증인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과 헌신이 약해질 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연약한 믿음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그는 시신을 내려서 모시로 싸고,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다가 모셨다. 그 무덤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것이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장례는 유대의 장례법대로 시행되었다(요 19:40).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죽은 자의 마지막을 돌보는 사랑의 장례 의식을 행했는데, 예수님의 장례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서 주도되었다(요 19:38-42). 그들은 먼저 예수님의 머리에 수건을 싸고, 몸에 세마포를 싸면서 니고데모가 준비한 몰약과 침향을 부어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다.
여기서 ‘싸고’로 번역된 ‘에네될릭센’의 원형 ‘에네일레센’은 ‘감다’, ‘싸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몸을 세마포로 말아 감쌌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마포를 사용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장례식이 부자의 장례식이었음을 보여 준다. ‘세마포’로 번역된 ‘신도니’의 원형 ‘신돈’은 ‘아마포(linen cloth)’ 같은 비싸고 고운 천으로서 특히 부자의 시체를 싸는 데 사용되던 천을 가리킨다. 그리고 또한 세마포는 당시 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아리마대 요셉이 세마포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소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R. J. Karris).
‘아직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란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유일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과 연결된다(눅 19:30). 사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준비한 무덤은 큰 무덤으로 여러 명이 함께 묻힐 수 있었던 무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장사될 때에는 그곳에 아무도 장사된 사람이 없는 새 무덤이었다. 비록 예수님은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지만 아무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큰 무덤에 마치 왕과 같이 안치되셨다.
또한 아무도 장사되지 않은 새 무덤이라는 것은 이후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사실성을 명확히 보여 준다. 다른 시체가 전혀 없는 곳에 장사되셨고 후에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무덤이 ‘바위에 판 무덤’이라는 사실은 당시 로마 군인들이 퍼뜨렸던 소문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바위를 판 무덤이라는 것은 다른 통로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다른 통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당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준다. 이로 보건대 본절은 예수님의 시체가 안치된 곳으로 부유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제공되었는데 그것은 구약의 예언대로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다’(사 53:9)는 말씀을 성취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들을 막을 수 있는 완벽한 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54.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그 날은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예수님의 장례가 서둘러서 치러진 이유는 바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비일’로 번역된 ‘파 라스큐에스’의 원형 ‘파라스큐에’는 ‘준비된 것’이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유대 인들이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는 날이란 의미로 쓰였다. 본절에서는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날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해의 예비일은 금요일로서 목요일 일몰부터 금요일 일몰 전까지의 시간이었다.
‘거의 되었더라’로 번역된 ‘에페포스켄’의 원형 ‘에피포스코’ 는 ‘밝아지다’, ‘날이 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를 만나게 된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은 일몰부터 다음날 일몰 전까지를 하루로 보았는데, 안식일의 시작을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는 뜻을 지닌 ‘에페포스켄’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예수의 장례를 마칠 즈음의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이러한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의 습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유월절을 준비하는 예비일 저녁에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집에 등불을 준비해 두었다가 해가 지면 둥불을 밝혔음을 반영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Giel). 즉 이 날 저녁에 밝혀진 등불로 인해서 어두웅이 임하는 다른 날과는 달리 유월절에는 반대로 점점 더 밝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등불이 아니라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한 춧불올 집집마다 밝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Lightfoot).
(3) 일몰로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어두움이 깔릴 때 밤에 보이는 밝은 별들의 출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Pully).
(4) 이방인을 위한 누가의 배려로서 유대의 시간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루의 시작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표현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Campbell).
이 많은 의견들이 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나 이 가운데서도 첫번째와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거의 하루 해가 져 가는 유월절이 시작될 순간에 예수님의 장례가 마쳐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의 유월절은 안식일과 겹치는 날로 니산월 14일이었다.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이 뒤따라가서, 그 무덤을 보고, 그의 시신이 어떻게 안장되었는지를 보았다.
이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서 니고데모가 준비한 향료를 사용하여 세마포로 예수님의 몸을 싼 일련의 장례 절차를 보았다.
마가는 단순히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어느 무덤에 장사되었느냐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기록한 반면, 누가는 좀더 세밀하게 예수님이 무덤 안에서 어떠한 장례 과정을 통하여 안치되었는가를 지켜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치밀하고 자세한 기록은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지닌 누가의 기록 습관에 기인한 것으로서 여인들이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예수님의 장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자세한 관찰을 통해서 여인들은 안식일에 쫓겨 급히 치른 장례를 안타까워 하며 안식일이 지난 후, 보다 정중한 장례를 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56절) 이틀 뒤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때 여인들이 실수로 다른 무덤을 찾아갔다는 견해는 그들이 오랫동안 무덤에 머물면서 장례 과정을 세밀하게 지켜보았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향료와 향유를 마련하였다. 안식일에 여자들은 계명대로 쉬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 여인들은 예수께 속히 향품과 향유를 발라 드리고 싶었지만 안식일을 맞이하여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경건한 모습을 보여 준다. 보다 가치있는 일을 위하여 보다 덜 가치 있는 것들을 소흘히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 또한 범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의 실천을 보다 가치있게 한다. 이러한 순종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 가운데 깨어 있던 이 여인들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십자가 처형 ( 23:44-49 )
1.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 일어난 기이한 현상들(44,45)
(1) 해가 빛을 잃음:때는 제 육시 즉 정오 쯤이었다. 그런데 제 구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2)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먼저 말한 것은 하늘에서 일어났으며 이것은 성전에서 생긴 일이다. 하늘도 성전도 다 하나님의 집이다.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의식적인 율법이 폐기됨을 암시하였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던 모든 장애물이 사라짐으로써 이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2. 그리스도께서 힘을 다하여 하신 말씀(46)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그렇게 나와 있다. 또한 여기서도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 같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절). 그는 이 말씀을 조상 다윗에게서 빌어 왔다(시 31:5). 그리스도는 성경 말씀대로 죽으셨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말씀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버림받은 것을 하소연할 때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었으나 이제 끔찍한 영혼의 고통이 끝났음을 보여 주려고 여기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특별한 의미에서 중보자이신 자신에게 사용하셨다. 그는 지금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며"(사 53:10)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이다"(마 20:28). 이렇게 말씀함으로써 그는 제물을 드리셨다. 즉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으셨다가 떼셨다. "이것을 바칩니다. 이것을 당신 손에 모두 드립니다." "아버지여 내가 위하여 죽는 죄인들의 생명과 영혼 대신에 내 생명과 영혼을 받으소서." 제물을 바치는 자의 뜻이 선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 제물을 흠향하신다. 그는 자기 영혼을 낙원에 들이시며 사흘 후에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아버지 손에 자기 영혼을 맡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이 한 이 말을 유용하게 만드신 것이다. 우리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내세를 믿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도록 하자.
3.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47-49)
(1) 군병들을 지휘했던 백부장은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47절). 그
백부장은 로마인 즉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한 그는 참을성 있게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던 자에 대해 증언하셨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더 나아가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2) 무관심하게 구경만 하던 자들에게도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만이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48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심각해져서 돌아갔다. 그들은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이 일은 당분간 그들을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소리질렀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예수를 희롱하며 욕하던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심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감동은 곧 사라진 것 같다. 즉 그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경의의 표시를 더 이상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잠시 후에 이 사건을 잊어버린 것을 염려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은 감격하지만 그 감격은 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은 감격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어째서 그를 사랑해야만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3) 예수를 아는 자들과 제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가까이 다가와서 그 된 일 보았다(49절). 예수의 아는 자들이 다 멀리 서있었다. 이 사실을 예수의 괴로움 중의 하나였다.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 이 일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시므온이 예언한 대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려고 세움을 입으신 것이다(눅 2:34,35)
그리스도를 장사지냄 ( 23:50-56 )
1. 장사를 치른 사람(50,51)
예수를 아는 자들은 멀리 서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이라 하는 사람'을 일으키셨다(50절).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자요, 덕행이나 경건이 있어서 흠이 없다는 평판을 받던 자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던 자였다. 그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공회 의원이었고 산헤드린 회원이었으며 유대 교회의 장로였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과 같은 집단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하였다(51절). 그는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그리스도의 친구들과 동조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크게 소란을 떠는 자들보다 훨씬 더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많이 있다.
2. 그리스도를 장사지내기 위해 요셉이 한 일(52,53)
(1)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2) 이를 내려 세마포로 쌌다. 틀림없이 손수했을 것이다. 우리가 어린 아기를 "배내옷"으로 싸듯이 시체를 천으로 싸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마포를 원단으로 사서 시체를 쌀 수 있도록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3. 장사지낸 곳(53)
바위에 판 무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적이 없었다.
4. 장사지낸 시기(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54절). 그들이 급하게 장사를 서두른 이유가 여기 있다. 즉 안식일이 거의 되었기 때문이다. 슬픔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지키는 데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5.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55)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고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었다(55절).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그 옆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았다.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께 대한 사랑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6. 그의 시체를 위해 마련된 준비물(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56절). 이는 그들의 신앙이라기 보다 그들의 사랑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리란 것을 기억하고 믿었더라면 그와 같은 낭비나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준비를 바삐해 놓고 안식일에 쉬었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아래 작품은 총3개의 패널로 된 작품(삼면화 / 트립티크(Triptych)
트립티크(Triptych)의 대부분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그림에 많이 사용되며, 경첩이 달려 있어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접으면 또 다른 그림이 있다. 평상시에는 닫아 놓고 특별한 날에는 열어놓기도 한다.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임신 중에 사촌이 엘리사벳을 만나고 있는 장면이고, 오른쪽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치고 있는 장면이다.
작품의 양 측면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가운데는 예수님의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십자가에서 내림 / 루벤스(Peter Paul Rubens) / 벨기에 / 1612-1614 / 파란 옷의 성모 마리아 / 예수님의 발을 잡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 붉은 옷을 입은 요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이동
장사 지냄 <청지기>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 묵상자료1 (0) | 2020.11.18 |
---|---|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눅 24:50-51) (0) | 2020.11.18 |
비아돌로로사 : 심문 -사형언도 (0) | 2020.11.18 |
나눔, 아름다운 순종과 헌신(누가복음 19:28- 46) (0) | 2020.11.18 |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사건(누가복음 22:1-23:56) (0) | 2020.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