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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사건(누가복음 22:1-23:56)

by 은총가득 2020. 11. 18.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사건(누가복음 22:1-23:56)

 

제22장과 23장은 19:28에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한 주간인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을 다루는 기사의 연속 부분으로서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고 죽으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사건(the Crucifixion)을 보도하고 있는 22장과 23장은 본서에서 가장 긴 장(章)들로서 두 장을 합하면 무려 127절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십자가 수난 부분을 길게 보도하는 것은 마태나 마가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는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절정(Climax)에 이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 사건 역시 십자가 수난 사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건이지만, 부활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은 십자가 사건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긴밀하게 연관된 사건이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십자가 수난의 과정을 가장 길고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22,23장의 본문은 크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보도하고 있는 22:39-46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의 22:1-38의 내용과 그 이후인 22:47-23:56의 내용을 양분할 수 있다.

우선 22:1-38의 네 문단은 십자가 죽음을 대비하여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내용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다.

먼저 22:1-6의 첫 문단은 고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예수를 살해하고자 혈안이 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이 배반자 가룟 유다와 결탁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자 음모를 꾸민 사실을 보도한다. 이어 22:7-38의 세 문단은 고난 주간의 다섯째 날인 목요일에 있었던 사건을 보도한다. 이 날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며, 이를 통해 당신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유월절 기념의 법을 그것의 실체인 십자가 구속을 기념하는 성만찬의 법으로 새로이 바꾸어 제정하셨고, 후에 이것은 세례와 더불어 신약 시대의 2대 성례 중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바로 이 만찬 석상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다(7-23절). 이 부분에서 누가는 공관복음서 중 유일하게 만찬 직후에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큰가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24-30절). 즉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그 동안 수차례에 걸쳐 예루 살렘에서 수난을 당할 것임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사건이 임박한 순간에도 전혀 엉뚱한 곳에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에 실망치 않으시고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예고하시고 환난에 대한 권면을 주시는 등(31-38절), 차분히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 교훈을 베푸신다.

22:39-46은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에 가서 기도하신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 겟세마네 기도 사건은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시점에 서 있었다. 여기서 누가는 천사가 나타나 기도하시는 예수께 힘을 더하였다는 것(43절)과, 예수께서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될 정도로 간절하고도 힘을 다하여 기도하셨다는 것(44절)을 기술함으로써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복음서 저자들 중 가장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기도의 모습을 인상 깊게 제시한 것은 기도의 주제를 강조하고자 하는 누가의 신학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 22:47-23:56까지에서는 성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을 보도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일종의 삽화(揷話)로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사건을 보도한 22:54-62 부분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체포되신 시점부터 무덤에 장사 지내기까지의 연속적인 과정을 사실적이고도 긴박감 넘치는 필치로 보도하고 있다.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하속들에 의해 체포되신(22:47-53) 예수께서는 곧바로 대제사장의 사저로 끌려가 수욕(受辱)을 당하신 후, 유대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the Council of Sanhedrin)로부터 신성 모독 죄인으로 정죄된다(22:63-71). 그러나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 아래에 있었던 관계로 산헤드린에는 사형집행권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곧 예수님을 사형 집행권을 가진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서 고소한다.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23:1-25까지의 세 문단에서는 예수께 대한 심문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먼저 23:1-7의 문단은 빌라도가 예수를 1차로 심문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먼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정죄했던 것과는 달리 정치적 범죄 곧 반란죄로 고소한다(1,2절).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였으나 죄를 발견치 못하자 난감해한다. 그러던 중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는 마침 그 때 예루살렘에 와 었던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로 예수를 이송한다. 이어 23:8-12은 마태와 마가는 생략한 누가만의 고유한 기록으로서, 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과 빌라도에게로 재이송하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어 23:13-25은 빌라도의 2차 예수 심문 과정을 보도하고 있는데,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광분한 무리들의 요구에 영합하여 예수께 사형을 언도한다.

23:26-56까지의 세 문단은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형 집행과 예수님의 운명 및 장사의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한 기사에서 누가만의 독특한 부분은,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의 이동 과정과 십자가상에서의 한편 강도의 회심을 보도한 부분이다.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마태와 마가는 단 한 구절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으나(마 27:32 ; 막 15:21), 누가는 26-31절의 여섯 절에 걸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십자가상의 한 강도의 회개와 구원에 관하여 마태와 마가는 생략하고 있으나 누가는 이를 빠뜨리지 않고 섬세하고도 감동적인 묘사로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사건의 의미와 교훈은 한두 가지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고도 방대하다. 그러나 일단 누가복음의 문맥 흐름에 따라 볼 때, 십자가 수난을 중심으로 한 본문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무죄한 자로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산헤드린은 심문 과정에서 예 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신 것을 빌미로 그를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으로 정죄하고 사형을 결의하였다(22:70,71). 그러나 그들은 이 종교적 차원의 문제만 가지고는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예수가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자칭 왕이라고 칭하였다고 함으로써 정치적 반역죄를 예수께 덮어씌우고자 하였다(23:2). 그러나 예수께서는 로마 정부에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신 적이 없었으며, 정치적 의미에서 왕이라고 주장하신 적도 없었다. 이러한 죄목이 예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23:14,22)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서도 무리들의 간악한 요구에 부응하여 사형을 언도하였다. 저자 누가는 이렇게 예수께 대한 고소와 심문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예수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누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죄가 아닌 타인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사 53:12).

둘째,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과의 대격돌(大激突)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갈릴리 분봉왕 헤롯, 그리고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는 각각 종교적, 정치적 권력을 대변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평소 적대적 관계 혹은 갈등의 관계를 맺어 왔었으나 예수를 사형시키는 데 있어서는 하나로 결탁하게 된다. 물론 군중 심리에 선동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쳐대는 무리들도 빠뜨릴 수 없다. 어떻게 무죄한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 모든 무리와 권세 잡은 자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을까? 누가는 이처럼 예수를 죽이기 위해 모든 세력이 결집하는 과정을 회화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결국 예수를 죽이기 위해 세상 나라의 모든 세력, 즉 세상의 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이 총 결집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공관복음서 저자들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체포 음모 이전부터 이 사건이 사단의 역사에 의해 발생한 사건임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22:3).

사단은 총력을 기울여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죄와 죽음으로 다스려 온 자신의 나라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온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지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로써 사단의 목적은 일견 성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으로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이 부분의 기사를 통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제자들 및 백성과 죄인들을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누가는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서로 높아지기 위해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겸손의 교훈을 베푸신 것을 보도하고 있다(22:24-30). 또한 누가는 예수께서 죽음으로 향하는 골고다 언덕길에서조차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인하여 안타까워하시며,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향하여 오히려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권고하신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23:26-31).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병사들을 향하여 간절한 용서의 기도를 하는 모습을 제시한다 (23:34). 그리고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회개하는 한 강도를 구원하신 장면 등을 보도하고 있다(23:42-43). 이러한 것은 모두 누가만의 독특한 기사이다.

스승의 죽음을 앞두고서도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변함없이 참으시고 권고하시는 모습, 또한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자신을 죽인 그 도시의 백성을 위해 안타까워하시는 모습, 자신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은 강포한 군사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시는 모습, 그리고 바로 직전까지 자신을 비방하다가(마 27:44 ; 막 15:32)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강도조차도 구원하신 모습, 이것이 십자가를 앞두고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예수께서 보이신 모습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대사건 한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죄 많고 허물 많은 인간들을 향하여 사랑과 배려를 잃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을 묵상할 때, 우리의 가슴은 어느새 눈물이 흐르는 강이 된다. 누가가 전해 주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 곧 인류 구속 사역의 완성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향해 가시면서도 연약한 한 사람을 향하여 배려를 잊지 않으시는 사랑과 자비의 주님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체험하는 주님의 모습이 아니던가?  출처 ; 옥스퍼드 주석

 

 

사탄의 계교에 무너진 가룟 유다(누가복음 22:1-6)

[ 성경묵상 ]

22장은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의 제3일인 화요일에 발생한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1-6절)으로 시작하여 제6일인 금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체포 사건과 공회에서의 심문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 예언되고 성만찬이 제정되며,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의 예언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의 기도 및 예수의 체포와 심문이 이어지는 매우 급박한 사건 가운데서도 본서 저자 누가가 특별히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22장에서 강조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첫문단에서 시작된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음모(1-6절)가 마지막 부분에서 산헤드린에 의해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 주며(63-71절), 그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일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24-30절)과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며 겟세마네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잠을 자는 제자들의 모습과(39-46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54-62 절) 등을 보여 줌으로써 구속사가 성취되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한없이 무디고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장의 첫문단인 1-6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인 1,2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산헤드린의 예수 살해 음모와 관련한 고민을 다루며, 후반부인 3-6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을 다룬다. 즉 1,2절은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정했지만, 백성들 때문에 두려워하는 모습을 기록했으며, 3-6절은 가룟 유다가 산헤드린을 찾아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나(마 26:1-16 ; 막 14:1-11) 그 구성이 조금 다르다. 마태와 마가는 산헤드린의 고민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록한 반면에(마 26:6-13 ; 막 14:3-9) 누가는 이 기록을 생략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향유를 부은 자를 책망한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은 정확히 그가 가룟 유다임을 밝혔다(요 12:4).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에 근거해서 마태와 마가복음을 자세히 보면 돈을 사랑하는 가룟 유다의 심경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마태와 마가 및 요한은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하게 된 심경의 변화 단계를 보여 주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갑작스럽게 가룟 유다의 배신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누가는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하여 가룟 유다의 배신의 근본 원인이 무엇임을 분명히 밝히지만(3절) 그의 본성의 단면과 심경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 향유 도유 사건은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전 토요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의 불신앙과 마리아의 헌신된 신앙을 비교하기 위해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기록한 것이다.

반면 누가는 과감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하면서 마태와 마가보다 더 정확한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22:1-6의 첫 문단은 고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예수를 살해하고자 혈안이 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이 배반자 가롯유다와 결탁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자 음모를 꾸민 사실을 보도한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유월절이라 불리는 무교절’이 된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출 12:8-11).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정월인 니산월 14일 저녁에 4일 전에 준비한 1년된 홈없는 양을 잡아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었다. 이것은 B.C. 1446년에 있었던 출애굽할 때 상황을 재현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늘 기억하며 감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의식이다.

그리고 무교절은 그 다음 날 아침부터 1주일 간 무교병을 먹으면서 출애굽 당시 발효하지 않은 빵을 먹은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무교절은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누가가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연속성으로 인해 이 둘을 한 절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는 아예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표현하여 같은 날처럼 기록하였다(막 14:1).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런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 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본절은 당시 유대의 최고 입법 · 사법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 차원에서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일꼬’로 번역된 ‘아넬로신’의 원형 ‘아나이 레오'는 ‘위로’라는 뜻의 ‘아나’와 ‘취하다’는 뜻의 ‘하이레오마이’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땅에서부터 들어올리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물에 사용되면 ‘제거하다’, ‘폐지하다’는 뜻을 갖고(히 10:9), 사람에게 사용되면 ‘살해하다(slay)', ‘죽이다’는 뜻을 가진다(마 2:16).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 었으며 존재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연구하니’로 번역된 ‘에제툰’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제테오’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어느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매우 집요하게 노력하였음을 의미한다.

누가는 본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는 데 반해 마태와 마가는 그들이 두려워한 구체적 내용, 즉 민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마 26:5 ; 막 14:2). 사실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할 때 예수를 메시야나 선지자로 알고 따르던 무리들의 소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음해하려 할 때 항상 발생하는 걸림돌이었다(눅 19:48).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반 사건이며 인간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가룟 유다의 배반이 3-6절까지 기록되었다.

이 문단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죽일 방책을 찾으며 고민하는 산헤드린을 찾아가 함께 예수님을 죽일 방책을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와 마가는 2절과 3절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발생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기록했다(마 26:6-13 ; 막 14:3-9).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자 돈을 좋아하는 가룟 유다의 성향을 잘 보여 주는 사건으로 향유 도유 사건을 제시했지만, 누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이유조차 제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 즉 누가는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공관 복음은 모두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마치 유다가 인간적 동기로서 스스로 산헤드린에 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마 26:14 ; 막 14:10), 누가는 사단이 산헤드린으로 가도록 원인 제공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들어가니’로 번역된 ‘에이셀멘’의 원형 ‘에이세르코마이’는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나타내는 단어로서(눅 9:46), 본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단의 영향력을 가리킨다(행 5:3). 누가는 유다의 배신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단에게 있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이러한 기록은 요한복음에 더 자세하게 나타난다.

요한은 사단이 마음속에 들어가는 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첫번째 단계는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고’(요 13:2)이며, 두 번째 단계는 ‘사단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요 13:27)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이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유다 배후에 있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단지 유다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사단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 광야에서의 유혹이 실패한 후(눅 4:13) 다시 본절에서 예수님을 향한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다. 광야에서 실패한 뒤 사단은 자신이 부리는 종 귀신들을 통해 역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은 날로 쇠약해져만 갔고(눅 13:16),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왕성해져 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름 받은 자라 하더라도 전심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사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엄청난 반역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수한 동기를 저버리고 탐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요 12:6) 사단은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

아마도 마태의 기록처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는 식의 유다의 흥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마 26:15). 그리고 산헤드린의 주된 고민거리였던 민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 주위에 무리가 없을 때를 포착해 잡기로 의논했을 것이고(6절), 잡을 때에는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로 삼기로 정했을 것이다(48절). 물론 이 모든 일은 사단에 사로잡힌 유다가 능동적으로 주도하여 나갔을 것이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은전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어 스승 예수를 원수의 손에 넘긴 탐욕에 눈이 먼 유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데에는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진 것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가 있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유다에게 접근 했을 것이지만 탐욕도 주된 원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구약에서 발람이 그랬던 것처럼 가룟 유다 또한 동일하게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단의 도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값비싼 향유로 헌신하는 마리아의 향유를 아까워했던(요 12:6) 유다는 결국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가지는 것은 마음의 열쇠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테르 오클 루’는 ‘무리가 없을 때’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에 나오는 바대로 ‘민란’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직접 ‘민란이나 소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시적 언어와 중의적 단어를 결합시켜 독자로 하여금 동일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문학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이유는 많은 무리로 인하여 일어 날 수 있는 민요를 두려워했기 때문임이 본절의 묘사 가운데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 ( 22:1-6 )

무교절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를 넘겨 주었다(1절)

1. 원수들의 음모(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음 먹기만 하면 곧 실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 했다.

2.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 가롯 유다(3,4)

가롯 유다는 열 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열 둘 중의 하나가 비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다. 즉 사단이 들어간 것이다(3절). 그것은 마귀의 소행이었다. 그리스도나 그의 진리나 그의 길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를 유다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4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3. 그들 사이에 맺은 협정(5,6)

1)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틀림없이 넘겨주기로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기뻐했다.

2) 그 대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했으며 유다는 이를 기뻐했다(5절). 저희가…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유다는 찾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일을 행할 시간과 장소 즉 무리가 없을 때 소동 없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가룟 사람 유다’란 뜻. 예수님를 배신한 제자 유다를 말한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양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 중 ‘다대오’라 불리는 유다(야고보의 아들, 마 10:3)와 구별하기 위해(요 14:22) ‘가룟 유다’라 칭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았고(마 10:1-2; 막 3:19; 눅 6:13), 회계 관리자(요 12:6; 13:29)로 재정 일을 맡아보았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마 27:3).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그러나 진실된 회개는 하지 않았다)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 30을 성소에 던진 뒤(마 27:3-5) 자살하였다(마 27:5; 행 1:18). 마태는 그가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마 27:5), 누가는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한다(행 1:18).<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