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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무화과나무 비유 - 종말(누가복음 21:29-33)

by 은총가득 2020. 11. 18.

무화과나무 비유 - 종말(누가복음 21:29-33)

 

[ 본문개요 ]

21:29-38의 문단은 무화과나무의 비유 및 재림을 예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내용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예언 성취의 시기를 분별할 것을 권면하시며, 한편으로 주의 재림을 부끄러움 없이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는 권고를 하신다.

예수님의 종말 설교의 결말 부분에서 깨어 있으라고 하는 내용은 공관복음서 모두에서 공통된 요소이지만, 누가는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묘사함으로써 빈번히 기도를 강조하는 자신의 신학적 특징을 여기서도 나타내고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 질문 ]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는가?(31절) '이런 일' 즉 25-26절에서 제시한 재앙들을 의미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29-33)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는 자연 현상을 통해 우리가 영적인 교훈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는 것은 여름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유대 땅에서 무화과나무는 보통 유월절 즈음(3-4월경)에 잎을 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익숙한 이런 자연의 이치를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대비하는 법을 알려 주십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씀(31)은 무화과나무의 싹이 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이스라엘의 독립 사건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런 일들")로서 앞에서 말씀하신 천체의 변동들(25-26)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이 날을 대망하는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도록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영광 중에 오실 인자를 기쁨 중에 맞이하기 위하여 늘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본절부터 38절까지는 말세의 때를 살면서 종말을 기다리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영적 교육을 위하여 예수님의 비유를 소개하고 있는데 마태와 마가는 무화과나무만을 다루는 데 반해 누가는 ‘모든 나무’를 첨가시켜 기록하였다. 어떤 학자는 ‘무화과나무’는 ‘유대교’를, ‘모든 나무’는 ‘이방 교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J. Ryle).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잎이 돋으면, 너희는 스스로 보고서, 여름이 벌써 가까이 온 줄을 안다.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무서운 심판과 형벌의 날이 될 것이요,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그 날은 영광과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묘사함으로써 고난받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려고 했다.

인자의 도래는 확실히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의 날이고, 성도에 대해서는 구원의 날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묘사함으로 독자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준다. 그러므로 종말에 나타나는 징조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주는 서곡(序曲)과도 같다.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 일들이 일어나기까지 이 세대는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된다. 이 세대 안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는 계속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9:41)일 것이며, 예고된 환난을 결코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루살렘 멸망의 전조로 예언된 모든 일들이 당시 이 예언의 말씀들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대에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 예언이 A.D. 30년에 주어졌고 예루살렘의 멸망이 A.D. 70년에 있었으므로 그 사이 40년의 기간이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는 단지 예루살렘 멸망과 관계된 예언의 성취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그리스도 재림으로 임하게 되는 최후의 종말의 시기에 임박하여 나타날 전우주적인 징조들 역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고 비로소 그 뒤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는 것이다.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심판의 예언 ( 21:29-38 )

(1)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무의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듯이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시기의 징조를 잘 분간하라고 말씀하신다(29-31절).

자연 세계에 인과관계가 있듯이 섭리의 세계에도 사건들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 박해 세력이 급하게 몰락해간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이 확실히 일어날 것이며 곧 일어날 것으로 알라고 말씀하신다.

1) 유대나라의 멸망은 얼마 남지 않았다(32절). 이 세대가 지나가지 전에 모든 일이다 이루리라(32절). 살아서 그것을 보게 될 자들이 있었다.

2) 유대 나라의 멸망은 확실하다. 유대의 운명은 다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2절).

(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안일과 방탕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다(34,35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4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제자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방심하고 있는 한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 이 말씀에 항상 유의해야 하지만 특별히 조심해야 할 때가 있다.

1) 우리에게 있는 위험은 죽음과 심판의 날이 우리가 그날을 준비하지 못한 예기치 않은 때에 뜻밖에 임하게 된다.

2) 우리의 할 일은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두가지에 조심하자.

① 육체의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 즉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마음이 둔하여지리라." 방탕함과 술취함은 양심을 마비시키며 마음을 무디게 만들어서 매우 감동적인 것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든다.

② 이 세상의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진다. 이것은 부자가 되려는 사업자들이 빠지기 쉬운 덫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날에 대비하라고 권면하신다(36절).

1) 우리의 목표는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을 피하는 것 뿐 아니라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자. 심판자이신 그분 앞에 서서 주님으로 모시고 밤낮 섬기며 늘 그의 얼굴을 뵈옵게 되도록 하자. 눅 20:35에서 이미 말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성도들은 능히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성도들을 향하신 은혜롭고 선하신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능해 그럴 만한 자로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란 주로 무가치함을 인식하는데 있다.

2) 이런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6절).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공존하는 것이 확실하다. 장차 다가올 기쁨을 확신하는 자는 반드시 깨어 도한다.

① 자신을 지키려면 "죄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그리고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깨어라. 그리고 계속 깨어 있으라."

②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려면 '항상 기도하라' 이 세상에서 기도의 삶을 산 자들은 저 세상에서 찬양의 삶을 살 만한 자가 될 것이다.

(5) 마지막 두 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영광 중에 입성하셨다가 배반당하여 붙잡히신 밤까지 삼십일 동안을 어떻게 보내셨는가를 보여준다.

1) 그리스도께서는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끈기있게 설교하셨다. 그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설교하셨으며 자기를 해칠 기회만 엿보는 자들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설교하셨다.

2) 밤에는 나가서 감람산에 있는 친구의 집에 묵으셨다.

3) 아침 일찍 그는 다시 성전에 계셨다. 사람들은 앞에서 설교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갔다(38절). 모든 사람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아왔다. 때로 진지하고 솔직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좋은 설교를 듣고 느끼는 맛과 향취가 유식한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보다 훨씬 나을 경우가 있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재림을 예비하는 성도의 자세(누가복음 21:34-38)

 

[ 나의 묵상 ]

재림을 예비하는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살아야 한다.

먼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된다(34절).

둘째는 깨어 있는 삶이다. ‘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아그휩네이테’의 원형 ‘아그휩네오’는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잠에 들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전쟁터에서 자신의 진영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은 절대 잠들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마귀와 더불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성도는 말세에 발생하는 많은 미혹들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 졸음을 이겨내고 깨어 있어야 한다(살전 5:6).

셋째는 기도하는 생활이다. 본절에서 ‘항상 기도하라’는 구절은 기도가 삶의 일부가 되어 늘 기도해야 함을 가리킨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가 늘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그 때를 결코 알 수 없기에 영적으로 늘 깨어 사단의 유혹들을 대적하고 항상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종말에 대하여 믿는 이들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언제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인지가 아니라, 내 자신이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향락과 생계의 걱정 때문에 믿음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과 같이(12:35-40) 성실한 마음의 자세로 믿음의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아가페 큰글성경)

[ 성경 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오심의 날 앞에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믿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 질문 1 ] 우리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36절)

인자 앞에 설사람의 구별된 삶의 자세(34-36)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 언정 예수님의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그 약속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을 가진 우리는 이 약속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약속의 말은 우리의 삶과 시간 스케줄을 재구성하는 효력을 가집니다. "내일 두 시에 만나자"라고 약속을 했으면 내일의 나의 시간 스케줄은 그 말에 따라 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약속을 약속으로 받은 우리는 소망없는 사람의 특징인 방종과 술취함과 세상사의 염려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주님을 맞아 그 앞에 당당히 서도록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 시대를 사는 구별된 제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나는 나의 마지막 날을 살듯이 이 하루를 깨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 질문 2 ]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37절)

성전에서의 가르침과 백성의 반응(37-38)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을 성전에서의 가르침으로 채우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을 포함하여 권세자들의 험악한 도전과 간계를 물리치시기도 하였지만, 그의 말씀 듣기를 기뻐하는 수많은 무리들과 함께 풍성한 말씀의 잔치를 누리기도 하셨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나아와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히 유월절을 맞아 온 사방에서 몰려온 순례객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편안한 잠자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밤이 되면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겨우 눈을 붙이고 쉬는 정도였지만,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땅 위에서의 시간을 말씀을 사모하는 무리들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삶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하다가 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큰 축복이며 영광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삶을 채우다가 죽을 나의 필생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방탕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크라이팔레'는 술에 취하여 도덕적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고주망태가 되어 개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온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사항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이 둔해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방탕함’으로 번역된 ‘크라이팔레’는 ‘머리가 이리저리 뒤흔들리다’는 뜻으로 라틴어로 ‘크라풀라(crapula)’로 번역된다. ‘크라풀라’는 ‘포도주를 지나치게 마심으로써 일어나는 현기증과 두통’을 가리킨다.

그리고 ‘술취함’으로 번역된 ‘메데’는 ‘너무나 많은 술에 만취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방탕’과 ‘술취함’은 성령에 충만한 상태와 대조적으로 세상의 쾌락과 관심에 취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또한 세상의 ‘염려’로 번역된 ‘메림나이스’의 원형 ‘메림나’는 어원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다’는 뜻으로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나뉘어져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상태를 가리킨다. 즉 마음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인하여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마음이 둔하여진 상태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둔하여지고’로 번역된 ‘바레도신’의 원형 ‘바뤼노’는 무거운 것으로 ‘내리 누리다’는 뜻으로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자신의 관심과 쾌락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을 누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각자의 마음 상태는 과연 어떠한가?

본절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영적 상태를 점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가운데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늘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덫과 같이’가 34절에 기록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35절에 기록되어 있다. ‘덫’으로 번역된 ‘파기스’는 문자적으로 ‘함정’, ‘올가미’와 같은 뜻이지만 비유적으로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위험’을 나타낸다(롬 11:9 ; 시 68:23).

따라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로 이 ‘덫’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가리킬 수 있다. 덫이 동물을 강하게 붙잡아 놓듯이 사람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주님의 때를 준비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적으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다.

둘째는 비유적으로 갑작스럽게 입하게 될 심판을 가리킨다. 평상시 동물들이 잘 다니는 길에 놓여져 있던 덫이 어느 순간 갑자기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닥치듯이 여기에서의 덫은 일상 삶 속에 갑자기 찾아오는 재난 곧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이처럼 마지막 심판의 날은 아무도 예기치 못한 때에 엄습한다. 본절은 ‘뜻밖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심판의 갑작스러움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그 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흑자는 본장에 나오는 종말의 예언이나 신약 성경에 나오는 종말의 묘사가 구약 묵시 문학 전통을 이어받은 유대인 특유의 종말관을 반영한 것이며, 객관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세상의 종말이 전우주적인 사건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일어날 보편적 사건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즉 종말은 특정한 사람에게 부분적으로 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일시에 모든 사람에게 임하므로 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와 의무를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깨어 있는 삶이다. ‘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아그휩네이테’의 원형 ‘아그휩네오’는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잠에 들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전쟁터에서 자신의 진영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은 절대 잠들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마귀와 더불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성도는 말세에 발생하는 많은 미혹들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 졸음을 이겨내고 깨어 있어야 한다(살전 5:6).

둘째는 기도하는 생활이다. 본절에서 ‘항상 기도하라’는 구절은 기도가 삶의 일부가 되어 늘 기도해야 함을 가리킨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가 늘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그 때를 결코 알 수 없기에 영적으로 늘 깨어 사단의 유혹들을 대적하고 항상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예수께서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와서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산에서 지내셨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주간 가운데 처음 3일 동안의 예수님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밤에는 감람원에서 쉬셨다.

여기서 ‘낮이면’으로 번역된 ‘타스 헤메라스’는 ‘매일같이’라는 뜻을 가진다. 예수님은 매일같이 낮에 성전에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며칠 뒤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아시면서도 하루하루 충실하게 생활하셨다. 이 세상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생명을 살리는 진리의 말씀을 무리들에게 선포하셨던 것이다. 이 가르침의 기간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3일간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수요일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셨고(마 26:1-16), 목요일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고(마 26:17-46), 금요일에는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입성 후 3일을 지내시면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에서 쉬셨다.

여기서 ‘쉬시니’로 번역된 ‘에윌리제토’의 원형 ‘아윌리조마이’는 ‘유숙하다’, ‘옥외에서 밤을 지내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드시 산에서 노숙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당시 감람산 근처에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에서 유숙하셨기 때문이다(마 21:17 ; 막 11:11,12).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그런데 모든 백성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모여들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루 빨리 예수님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통해서도(눅 22:2) 널리 퍼진 소문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유명해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다. 특히 이 때가 유월절이 다가오는 시간이었기에 많은 순례의 인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성전은 더욱 붐볐을 것이고 무리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향했을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의 기록에서는 본절로서 고난 주간 화요일 예수의 사역은 완전히 끝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화요일에 성전에서 나가신 후 다시 성전을 찾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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