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 성 고난주간 중 월,화요일 사건(누가복음 19:28-21:4)
19:28-23:56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마지막 한 주간인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도하고 있다.
그 중 19:28-21:4은 성 고난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서부터 화요일의 전반기 동안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대로(눅 9:51 ; 13:22 ; 17:11 ; 18:31), 드디어 오랜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Jerusalem)에 입성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무리들로부터 잠시 환영을 받기는 하셨지만, 이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며 급기야 그들의 음모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
19:28-21:4은 이렇게 예수께서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순간부터 화요일에 있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일련의 충돌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19:28-44은 성 고난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장면을 다루고 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의 환영 속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그런데 환영하는 무리들의 찬송 내용처럼(38절), 예수님은 왕으로서 자신의 왕도(王都)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진정 왕이시지만 세상 왕들과 다른 겸손과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며, 한편으로 그분의 나라는 무력과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상 왕국과 다른 나라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대목에서 누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록으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며 탄식하시고 그 멸망을 예언하셨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41-44절) . 이는 예수께서 비록 무리들의 일시적인 환영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죽게 될 자신의 미래를 미리 예견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한편으로 메시야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이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 입성 / 지오토 / 1303~1306 / 프레스코화 / 스크로베니 예배당 / 파도바
예루살렘 입성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의 무리들 속, 나귀를 탄 예수에게 종려가지와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는 군중들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마태,21.10)라며 크게 환호한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으로, 유다인들의 정치적인 수도이며, 그리스도의 수난이 일어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영원한 도시, 즉 그리스도교적인 천국의 성도(聖都)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사건은 예수 수난의 시작이며, 동시에 죽음을 통한 그의 승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4대 복음서 모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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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45-48은 짧은 기사이지만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직접적인 도화선 역할을 하였던 성전 정화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구심점으로서, 성전의 타락은 곧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영적 타락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성전은 유대의 최고 종교 회의 기구이자 의결 기관이었던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의 직접적 관할하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곧 유대 종교 지도 그룹인 산헤드린의 타락을 직접 고발한 것이며, 그 권위에 정면 도전한 것이므로 그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산헤드린은 이 사건을 그냥 묵과할 경우 자신들의 교권(敎權)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산헤드린은 예수를 죽일 방안을 찾기에 골몰하게 되는데(47절), 이하에 거듭해서 언급되는 일련의 논쟁 사건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성전의 정화 / 에스파냐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의 작품.
이어 20:1-8의 내용은 권위 논쟁에 관한 기사이다.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그 권위의 출처를 따져 물었다.
사실 성전 정화 사건은 곧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권위(Messianic Authority)를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예배의 장소이자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정화하셨다는 것은 하늘로부터의 권세를 받지 않고서는 일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던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대답을 빌미로 예수를 해하려 하였으나, 세례 요한의 권위의 출처를 역으로 질문하시는 예수님의 지혜로 그 음모는 일차 무산되고 말았다.
이어 20:9-18과 20:19-26의 두 문단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와 그에 연속되어 발생한 납세 논쟁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에서 악한 포도원 농부들은 넓게는 메시야를 거부하는 완악한 유대인 모두를 가리키고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19절). 그리하여 이를 알아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즉시 체포하려 하였으나 예수를 추종하던 많은 무리들을 의식하여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즉, 무리들이 두려워 직접 예수를 잡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권력을 빌어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납세(納稅)에 관한 논쟁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대답하신 예수님의 지혜에 그들의 음모는 역시 무산되고 만다.
이어지는 20:27-40은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부활 논쟁에 관한 기사이다.
납세 논쟁과 같은 정치적 질문으로 예수를 음해하려 하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음모가 예수의 역공으로 무산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당시 신학적으로 민감한 논쟁거리가 되었던 부활에 관한 질문으로 예수를 논쟁과 시비의 와중으로 몰아넣으려 하였던 것이다. 사두개파(the Sadducees)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다수파를 구성하고 있던 종파로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라새파(the Pharisees)와는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던 또 하나의 강력한 종교 집단이었다. 여기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연합 전선을 편 것은, 당시 종교 지도층에 있어서 예수님의 존재가 얼마나 커다란 위협 요소로 작용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교권 및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 유지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힘을 합쳐 예수를 제거하려고 총력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성경에 관한 정확한 해석을 근거로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시는 예수께 다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20:41-47에서는 메시야의 신분에 관한 논쟁 및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계의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각각의 논쟁에 지혜롭게 대처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음해하려는 일련의 논쟁을 종결지으시며, 이번에는 역으로 예수님 자신이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고백한 시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이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단지 다윗의 혈통적 후손으로서 그의 정치적 왕위를 회복할 것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야관의 오류를 지적하실 뿐 아니라,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선재성(先在性)과 신성(神性)을 강하게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이 문단의 말미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의 외식(外飾)을 경계하신 내용은 문맥적으로 바로 다음 문단의 내용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즉 예수께서는 21:1-4에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칭찬하심으로써, 서기관으로 대표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신앙 행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사람의 삶과 중심을 다 아시는 주님 앞에 거짓 없이 진실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과 유대의 최고 종교 기관인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께 대한 배척에는 예수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려는 사단의 배후 조종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예수께 대한 산헤드린의 총력 공세는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구속 사역을 필사적으로 훼방하고 중단시키려는 사단의 간교한 배후 조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사단의 대적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는 과정의 일부가 될지언정 결코 그 흐름을 멈추거나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예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배척과 모함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류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택하신 길이지 결코 원수의 세력에 패배한 결과에 따른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반대자들의 계략을 완전히 패퇴시킨 일련의 논쟁 과정은 이 점을 명백하게 부각시켜 준다.
한편, 또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점은 메시야를 대적하는 사단의 하수인들이 바로 유대의 최고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구약 이래로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이며, 산헤드린은 오랜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지도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 종교 기관이며 예루살렘 성전을 관할하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를 해치려는 데 앞장섰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 지도자조차도 종교를 통해 누리는 기득권에 집착할 때,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교권(敎權)과 이권(利權)에 눈이 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직책과 권세로써 그들이 섬긴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을 오히려 대적하는 원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서기관들의 외식(外飾)을 삼가라고 하시고, 보잘것없는 두 렙돈 헌금을 드린 과부의 소박하고도 진실한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의 교훈의 의도를 오늘날의 제자들은 두고두고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옥스퍼드 주석. pp. 205-207.
예루살렘 입성 - 호산나(누가복음 19:28-40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입성하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을 잘 모르고 판단하여 환호할 때도 있고, 비난할 때로 있다. 그 분의 상황이 어떠한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환호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처형하라고 외치는 군중으로 변한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변치 않는 신실한 자로 충성되이 살아가자.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예수님은 스가랴 9:9의 말씀을 따라 어린 나귀를 타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분의 왕 되심을 믿는 사람들 속에는 기쁨의 찬양이 넘칩니다.
[ 질문 1 ]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는 이유는 무엇인가?(30,35절)
어린 나귀를 타신 왕(28-36)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예언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말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시는 행동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스가랴 9:9의 성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뼈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왜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시는지 제자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츰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펼치곤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나귀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들이나, 자기들의 겉옷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왕 되심을 진심으로 기뼈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내 삶의 왕으로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나는 내 삶의 왕으로 임하시는 주님 앞에 무엇을 드려서 맞이하고 있습니까?
[ 질문 2 ]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39절)
찬양하는 무리와 시기하는 무리 (37-40) 예수님의 행동 언어는 대단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반응합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길 위에 펼칠 뿐만 아니라 나귀 뒤를 따르면서 기쁨으로 소리를 지르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반응은 때로 우리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듭니다. 이런 행동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전혀 없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기쁨을 주체 못하고 있는 반면 바리새인들은 평소보다 더 냉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못마땅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이들을 말리라고 강하게 어필합니다. 그러나 말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를 것입니다. 진실은 거짓을 이기며 기쁨은 비판을 이기는 법입니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은 기쁨을 삶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 본문 개요 ]
19:28-21:4은 이렇게 예수께서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순간부터 화요일에 있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일련의 충돌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19:28-44은 성 고난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장면을 다루고 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의 환영 속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그런데 환영하는 무리들의 찬송 내용처럼(38절), 예수님은 왕으로서 자신의 왕도(王都)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진정 왕이시지만 세상 왕들과 다른 겸손과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며, 한편으로 그분의 나라는 무력과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상 왕국과 다른 나라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대목에서 누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록으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며 탄식하시고 그 멸망을 예언하셨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41-44절) .
이는 예수께서 비록 무리들의 일시적인 환영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죽게 될 자신의 미래를 미리 예견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한편으로 메시야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이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보여 준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의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니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였다. 그 뜻인즉, 예수님은 다윗의 나라를 재건함으로써 종말을 초래하는 분으로 오심이 아닌 그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서 섬기시는 '겸손하신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곧 정치적인 임금이 아닌 십자가에 처형되실 임금으로 오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를 로마의 압제하에서 구원하여 주실 분으로 빋었던 것이다.(아가페 큰글성경)
28-44절까지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 나라가 당장 세워질 것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에게 므나 비유(11-27절)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이루어짐을 밝히신 바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자발적으로 맞이하시기 위하여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고 있음이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28절 이후부터 끝까지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동안의 모든 순회 전도 사역을 마치신 후 예루살렘에 영광스럽게 입성하신 사건과 수난 및 죽음의 사건들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마 21:1-17 ; 막 11:1-11 ; 요 12:12-19와 병행을 이룬다.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제자들을 의미하는 남성 3인칭 복수 ‘저희가’를 주어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마 21:1 ; 막 11:1) 본문은 ‘예수님’이 행동의 주체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기록자 누가가 생애의 마지막에 다다른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에 있어 독자들의 관심을 오직 그분께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 서서 걸으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단어 ‘아라바이논’은 ‘올라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바이노’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미완료 과거 동사 ‘에포류에토’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앞서서’로 번역된 ‘엠프로스멘’은 장소 부사로서 ‘~의 앞에’라는 의미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앞장 서서 예루살햄으로 올라가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는 리더(leader)로서 매우 적극적인 자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한 주간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늠해 볼 때, 또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는 이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닌 수난의 길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을 것을 생각해 볼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을 내딛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의 수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이끌고 앞서 걸어가고 계신 것이다(18:31-33). 이러한 예수님의 적극적인 자세는 조그만 고난이 와도 쉽게 전도와 봉사의 의무를 포기해 버리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큰 귀감이 아닐 수없다.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수께서 올리브 산이라 불리는 산 턱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공관복음서의 기록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이전의 상황에 대한 약간의 기록이 나온다. 먼저 당시 유월절 축제 기간을 당하여 예루살렘에는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 들었고 이들은 이미 유명하여진 예수께서 과연 유월절 축제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올라올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죽이려 하였음이 공공연한 비밀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요 11:55-57). 그리고 승리의 입성에 앞서 예수께서는 과거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에 머물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향유 도유 사건을 경험하셨다. 이는 예수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요한은 대제사장 무리들의 살해 음모를 다시 한번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수에 대한 배척과 살해 음모가 점차 확산되어 예수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뱃바게’는
/ 신약성경에서 본 병행 기사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마을로서 ‘아직 익지 않은 무화과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 정확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감람산 부근의 한 마을 혹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베다니 근처의 한 마을로 추정된다.
‘베다니’는
/ ‘날짜의 집(House of dates)’이란 의미로서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km떨어진, 감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 베다니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고향인 동시에 문둥이 시몬 집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 의해 향유를 부음받은 곳이기도 하다(막 14:3-9 ; 요 11장).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는
/ 신성한 목적을 위해 예비한 짐승을 의미한다(민 19:2 ; 삼상 6:7).
/ 이로 보건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시고자 하는 정치적, 혁명적 목적이 아닌 신성하고 거룩한 평화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 이전의 사역에서 예수께서는 공공연하게 메시야로서 칭송받는 것을 거절하셨다.
/ 그러나 이제 공생애 사역에 있어 일대 전환을 이루는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게 되자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 하지만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냄에 있어서도 자신의 외적 능력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거룩한 예루살랩 성에 평화의 왕으로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겸손의 모습으로 나타내려 하신다.
/ 이는 스가랴 예언의 성취로서 ‘아직 아무 사랍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예수께서 전쟁을 통해 오시는 무력의 왕이 아닌 구원을 베풀며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실 평강의 왕으로 오셨음을 더욱 분명히 하신 것이다(슥 9:9,10).
‘보리니’에 해당하는 ‘휴레세테’는
/ ‘만나다’(마 8:10), ‘발견하다’(마 13:44)라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의 미래 능동태이다.
/ 이는 제자들이 비록 나귀 새끼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발견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 예수께서는 앞날에 일어날 사건을 정확히 예언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의 승리의 입성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예비된 엄숙한 평화의 왕으로의 행진임을 강력히 보여 주고 있다.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누가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본문을 직역하면 ‘그것(나귀 새끼)의 주께서 필요성을 가지신다’가 된다.
/ 즉 ‘나귀의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의미이다.
/ NASB와 RSV 등 대표적인 영역본들은 ‘아우투’를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본문을 ‘주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The Lord has need of i t)’로 번역하였으나 ‘아우투’는 분명히 소유격 대명사로서 앞의 단어 ‘호 퀴리오스’를 수식한다.
/ 따라서 본문에서 ‘아우투’는 ‘그것을’이 아닌 ‘그것의’로 번역되어야 한다.
/ 저명한 주석가 마살(M Marshall)도 이를 지지한다.
/ 즉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으로 추정되는 두 제자에게 나귀 새끼의 진짜 주인은 그것을 기른 외형상의 주인(33절)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지신 자기 자신임을 밝히신 것이다.
/ 예수께서는 세상의 주인 되시는 메시야의 권위로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 예비해 두셨던 나귀 새끼를 당당히 요구하셨던 것이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그들이 새끼 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들이 "그 새끼 나귀는 왜 푸는 거요?"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제자들이 임의로 나귀 새끼를 풀자 그 주인들이 일단 제지하였다.
병행 구절 마가의 기록(막 11:5)과 본절 누가의 기록은 다르다.
/ 마가는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라고 기록하였다. 즉 마가는 제자들의 행동에 제동을 건 사람들을 나귀 새끼의 주인들이라 직접 밝히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타기에 적합하지도 않은 나귀 새끼를 푸느냐?’는 식으로 물었다고 기록한 반면,
/ 누가는 제자들의 행동에 제동을 건 사람들을 나귀 새끼의 주인들이라 직접 밝히면서 그들이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허락으로 남의 나귀 새끼를 푸느냐?’는 식으로 항의한 것으로 기록했다.
/ 이는 당시 그곳에는 나귀의 주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각기 사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의 행동에 대하여 당황해하며 항의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 임자들’로 번역된 ‘호이 퀴리오이 아우투’는
/ ‘그것의 주인들’이라는 뜻이다.
/ 앞서 예수님은 나귀 새끼가 자기 자신의 소유라고 말씀하셨는데(31절), 여기에서 누가는 이와는 별개로 사실(fact)의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 모리스(L. Morris)는 나귀의 주인이 두 명 이상으로 소개 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들을 매우 가난한 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들은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그리고 그들이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걸쳐 놓고서, 예수를 올라 타시게 하였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직접 나귀 새끼의 동에 타셨다’고 기록한 반면(마 21:7 ; 막 11:7),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를 그 위에 태웠다고 기록했다.
/ 예수께서 스스로 어린 나귀의 등에 올라타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며, 특별히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치도 않았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예수께서 제자들의 도움으로 나귀 새끼의 등에 올라탔다고 기록한 것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일에 대한 제자들의 고조된 감정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일 것이다.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예수께서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가시는 그 길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깔아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께서 그 위로 지나가실 수 있도록 하였다.
/ 이와 같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는 행위는 왕위에 즉위하는 자에 대한 존경과 환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 실제로 과거 예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할 것을 의미하는 뜻에서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였었다(왕하 9:13).
/ 이제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진이 드디어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이었던 다윗 이래로 계속 왕도(王都)였던 예루살렘으로 다가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수난 예고(눅 18:31-33)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왕되신 메시야로서 그의 충만한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실 것으로 기대하여 왕의 즉위식을 알리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동일한 사건을 묘사하는 마태와 마가, 요한은
/ 마가와 마태는 많은 사람들이 겉옷 뿐 아니라 나뭇가지도 베어 길에 펼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 21:8 ; 막 11:8).
/ 이에 대해 요한은 이 나뭇가지가 은총과 고결함을 상징하는(시 92:12) 종려나무 가지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요 12:13).
/ 또한 요한은 여기에 덧붙여 환영의 무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12:12,13) 이 무리들은 대체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여러 지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미리 와 있던 순례자들이었다.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하여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는 시 118:26에 나오는 문구로, 과거 다윗을 맞으며 외쳤던 이 축복문을 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 왕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에서
/ ‘오시는’으로 번역된 ‘에르코메노스’는 현재 분사로서 앞으로 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오고 있는’이라는 의미이다.
/ 또한 ‘퀴리우’는 이스라엘이 믿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 또한 ‘이름으로’로 번역된 ‘엔 오노마티’는 ‘~의 대리인으로’, ‘~의 권위를 입고’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히브리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 따라서 ‘주의 이름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의 자격으로’라는 의미이다.
/ 이로 보건대 본 찬양의 내용은 예수님이 바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토록 기대하여 왔던 바로 그 메시야이시며 이제 이 곳에 오고 있음을 뜻한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와 마가가 이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 ; 막 11:9)로만 기록하고 있는 것과 달리 누가는 ‘왕’이라는 단어를 추가로 기록하였다.
/ 이는 누가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왕적 권위를 지니신 자이심을 강조하고자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오시는 왕적 메시야이심을 확신한 군중들의 고조되는 기대감 속에 당시의 분위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에서
/ ‘하늘에는 평화요’는 누가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즉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와 마가는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 또한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호산나’를 생략하고 이를 ‘영광’이라는 단어로 대치하여 기록하고 있다(마 21:9 ; 막 11:10).
‘하늘’ 즉 ‘우라노’와 ‘가장 높은 곳’ 즉 ‘휩시스토이스’는
/ 모두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단어이다.
/ ‘하나님께 평화’라는 표현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인간과 원수되었던 하나님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인간과 화해하여 화평의 길이 열린다는 의미이다(롬 5:1,10).
/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표현은 이와 같은 사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의미이다(고후 1:20 ; 롬 5:2).
/ 그러나 당시 이 찬송을 하는 자들은 이러한 오묘한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단지 홍분된 감정으로 최고의 찬사만을 보내고 있었다.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백성들을 저만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그러한 행위가 내심으로는 몹시 못마땅했다.
/ 백성들의 환호와 찬송대로 예수가 유대의 왕이 되면,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신들의 입지가 곤란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열광하며 환호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인 예수께로 다가가 환호하는 무리들을 책망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호청은
/ ‘선생’을 의미하는 ‘디다스칼로스’의 호격으로서 ‘랍비(rabbi)’와 동일한 의미이다.
/ ‘디다스칼로스’는 단순히 율법을 가르치는 스숭이란 의미를 넘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해설해 주는 자, 즉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지시해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 그러나 이 단어는 ‘주(主)’, ‘주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퀴리오스’와 같이 하나님께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자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 그러므로 본절에서 바라새인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선생님’으로 부른 것은 이들이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이들이 예수님의 므나 비유에서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않았던 바로 그 패역한 백성들임을 보여 준다(참조 19:12-27),
‘책망하소서’로 번역된 ‘에피티메손’의 원형 ‘에피티마오’는
/ ‘꾸짖다’(마 8:26), ‘경계하다’(마 12:16)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이는 강한 충고나 어떤 구체적 행동을 통해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을 저지 또는 좌절시키는 적극적 행동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제자들을 엄히 훈계함으로 그들의 경거망동한 행위를 즉각 중지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 명령형으로 쓰여서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항의가 사뭇 준엄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역사하시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께 모독을 일삼는 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렇듯 감히 그분에게 자기들의 악한 주장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 요한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직접 기록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 불편한 감정을 토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요 12:.19).
/ 이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그들끼리 서로 이 일의 부당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코 이러한 일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께 직접 항의했음을 알 수 있다.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셨다.
‘돌들이 소리지른다’는 이미지를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심판의 상징으로 사용한 바 있다(합 2:11). 이를 따를 때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메시야를 소망하는 군중의 찬송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더 나아가서는 장차 이스라엘 가운데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극적으로 상징화한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입성 ( 19:28-40 )
우리는 여기서 전에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서 보았던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일종의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에 대한 동일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셨다.
그는 거기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셨다. 그것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셨다(28절). 그는 무리 중에서 제일 앞서 가셨다. 그는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나아가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어떤 봉사를 함에 있어 주저하는 것인가?
(2) 그가 죽으시기 바로 전에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들어가신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이나 현재의 비하의 상태 모두에 합치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로써 그의 죽으심의 굴욕이 더욱 크게 나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나귀와 그 새끼를 그 필요하신 때에 그 임자들로부터 가져오도록 하셨다.
(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신다.
그는 나귀와 그 새끼의 임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가져오는 것을 허락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주께서 그것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듣자마자 가져가기를 허락하였다.
(5) 그리스도의 명을 수행하는 자들은 확신하고서 나아갔다(32절).
만일 참으로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그들이 찾는 것을 반드시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전파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6) 그를 위해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져온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자기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으로 그를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그 제자들은 그를 위해서 나귀 새끼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올려 놓았다.'
(7) 그리스도의 개선은 그의 제자들의 찬송의 제목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열 두 제자 뿐 아니라 전 제자들의 무리의 마음 가운데 갑자기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을 넣어 주셨다(37절).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는데'(36절) 이는 평상적인 기쁨의 표현이다. 그들의 기쁨과 찬양의 이유 혹은 제목이 무엇이었는가를 주목하여 보라. 그들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특별히 '나사로를 살리심'에 대해서 찬양했다(이것은 특별히 요 12:17,18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기쁨과 찬양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그는 또한 찬송받으실 분이시다. 그를 찬양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늘에는 평화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의 행하심에 평화와 성과를 주실 것이다. 그러면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이 성도들의 찬양을 천사들의 찬양과 비교해 보라(눅 2:14). 이 둘은 모두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일치하고 있다. 천사들은 '땅에서는 평화'라고 했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평화'를 기뻐함같이 그들 또한 땅에 있는 평화를 기뻐하는 이러한 것은 우리가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8) 그리스도의 개선과 그것을 찬양하는 제자들의 기쁜 찬양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에 대해 격분한 무리 가운데 바리새인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환호를 허락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가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대하였다(39절). 그는 교만한 자의 경멸을 멸시하시듯이 겸손한 자의 찬양을 받으신다.
(9)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찬양하든 안하든 그는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받게 될 것이고 또 받으셔야만 한다.
만일 이 사람들의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즉 이 사람들의 잠잠하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찬양을 못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들이 소리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잠잠케 하려 했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돌들로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듯이 그 자손의 입으로 능히 온전히 찬양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예루살렘 훼파 예고 및 성전 정화(누가복음 19:41-48)
헤롯 성전의 웅장하게 멋 있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감탄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성을 보시고 우셨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무엇인가?
1.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를 보고 울었다(42절).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기 때문이다. 영적 소경이디.
2. 닥칠 심판을 보고 우셨다(44절).
3. 성전의 세속회된 모습을 보고 우셨다(46절).
예루살렘 정화 사건은 산헤드린 공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를 단행한 것은 지금 나에게 어떤 점을 시사해 주는 것인가? 이를 통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던 예수님처럼 눈물의 기도를 드립니다. 교회와 나라를 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던 이유를 44절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살핌을 받는 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강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이다.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그 성의 운명을 내다보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고, 또한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질책하셨습니다.
[ 질문 1 ] 예루살렘의 파멸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44절)
예루살렘의 파멸 예고(41-44)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슬픔에 잠기셨습니다. 그 성이 당할 파멸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신 이유는 단지 그 성이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그 성이 평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평화를 가지고 오시는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핌의 날은 하나님의 방문의 날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만나고자 하시지만 그들은 이를 냉정히 거절합니다. 그 거절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따뜻한 은혜의 심방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와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심방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의 낮을 대하기를 거리끼는 일이 없는지 날마다 자신을 잘 살피고 있습니까?
[ 질문 2 ] 본래 성전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46절)
성전을 청결케 하심(45-48)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보통 성전 구역 내 이방인의 뜰에서 순례객들을 위하여 제물로 드릴 짐승을 사고 팔거나 환전을 하곤 하였는데, 이런 일들이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말씀의 힘으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두 군데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사야 56:7에 근거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는 말씀과, 예레미야 7:11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입의 말이 비록 무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효력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장사치의 소굴 또는 강도의 소굴처럼 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본문 개요 ]
누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록으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며 탄식하시고 그 멸망을 예언하셨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41-44절) . 이는 예수께서 비록 무리들의 일시적인 환영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죽게 될 자신의 미래를 미리 예견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한편으로 메시야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이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보여 준다.
19:45-48은 짧은 기사이지만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직접적인 도화선 역할을 하였던 성전 정화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구심점으로서, 성전의 타락은 곧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영적 타락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성전은 유대의 최고 종교 회의 기구이자 의결 기관이었던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의 직접적 관할하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곧 유대 종교 지도 그룹인 산헤드린의 타락을 직접 고발한 것이며, 그 권위에 정면 도전한 것이므로 그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산헤드린은 이 사건을 그냥 묵과할 경우 자신들의 교권(敎權)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산헤드린은 예수를 죽일 방안을 찾기에 골몰하게 되는데(47절), 이하에 거듭해서 언급되는 일련의 논쟁 사건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41-44절까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기사 가운데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정치적 의미를 지닌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흥분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이와 반대로 멀지 않은 장래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고 우시며 애가를 부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평화에 관한 일'이란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가정법 ‘에이 에그노스’는 과거 사실에 대한 반대, 즉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주어의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는 데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예루살렘 성으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사람들 및 유대인들은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던 것이며, 예수께서는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에 관한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넨’의 원형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솰롬’과 같은 의미의 헬라어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생기는 ‘구원’과 충만한 ‘은혜’ 및 진정한 ‘희열’을 뜻한다.
또한 ‘관한 일’로 번역된 ‘타 프로스’에서 ‘타’는 관사 ‘호’의 목적격 복수형인데, 본절에서는 ‘~하는 것들(the things which)’을 의미하는 복합 관계 대명사의 기능을 한다.
또한 ‘프로스’는 원래 ‘~을 향하여(towards)’라는 의미의 전치사이나 여기에서는 ‘~에 속한(KJV, belong)’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타 프로스 에이레넨’은 ‘평화에 속해 있는 것들’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강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진정한 구원과 충만한 은혜를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를 거절하고 거역했으며, 이제 며칠 후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러한 모든 무지와 죄로 인해 크게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함으로 회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변 데 에크림베 아포 옵달몬 수).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그러나’라는 뜻을 가진 역접 접속사 ‘데’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숨기웠도다’에 해당하는 ‘에크뤼베’는 부정과거 수동태이다. 여기서 부정과거는 결과적 부정과거(Resultative Aorist)로서 현재 시제에서 노력의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이다. 따라서 영역본들은 대부분 이 동사를 현재 시제(KJV, RSV, NIV)나 현재 완료 시제(NASB)로 번역하였다. 즉 ‘에크뤼베’는 과거 어느 시점에 숨기워져 지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숨기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 효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 단어가 본절에서 수동태로 쓰였는데, 이는 일종의 신적 수동태이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해 강팍해진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하여 예수에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마치 숨겨진 보화(마 13:44)와 같은 천국의 비밀과 구원의 경륜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며 슬기롭다고 거만을 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은폐시키셨던 것과 같다(눅 10:21).
또 다른 한편, 본문은 예수께서 이제라도 유대 백성들이 평화의 왕 되신 자신을 영접함으로 구원 얻기를 갈망하셨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이 마지막 기회조차 보지 못하고 저버렸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유대 당국이 그를 대적할 것임을 선언하신 바 있다(눅 9:22 ; 13:33 이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계속해서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임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날이 이를지라…사면으로 가두고(호티 헥수신 헤메라이 에피 세 ... 쉬넥수신 세 판토덴).
43절에서 예수께서는 40 년 뒤에 이루어질 가슴 아픈 일을 내다보시며 매우 구체적으로 예언하신다. 본절의 예언은 구약 사 29:3과 겔 4:1-3에 예언되어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상기하게 한다. 구약의 이 예언들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함락되면서 모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런데 그와 거의 동일한 예언이 또다시 예수님의 입에서 발해지고 이는 또한 A.D. 70년에 성취되었다.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지 못하고 과거 조상들이 범한 죄를 동일하게 범하던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동일한 심판을 예언하셨고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날이 이를지라’에 해당하는 문구 중에서 한글 개역 성경은 ‘에피 세’, 즉 ‘네 위에(upon you)’를 번역하지 않았다. 또한 ‘이를지라’로 번역된 ‘헥수신’은 ‘오다(come)’, ‘도달하다(attain)’는 의미를 지닌 동사 ‘헤코’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미래 능동태는 반드시 임하게 됨을 나타낸다. 따라서 ‘헥수신 헤메라이 에피 세’는 ‘날이 네 위에 반드시 엄습할 것이다’는 정도로 의역할 수 있다. 이는 생각지도 않는 날에 뜻밖의 사건들이 훌연히 덮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히브리식 표현이다. 특히 ‘헤코’라는 동사는 구약 성경에서도 구원하거나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오시는 것(겔 7:2)을 주로 나타내었고, 신약 성경에서도 구원과 심판에 관계하여 하나님이 오시거나, 또는 종말론적으로 그의 날이 이르는 것을 주로 나타낸다. 본절의 ‘날’은 A.D. 70년에 임할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의 날이다. 그 날은 심판자 예수께서 도적같이 임하는 것처럼(계 3:3), 주의 심판의 날이 도적같이 오는 것처럼(벧후 3:10), 하나 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에 대한 심판이 모두 예수 당시의 세대에게 임한 것처럼(마 23:36), 그렇게 흘연히 운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덮칠 것이다.
한편 토성을 쌓고 사면으로 가둔다는 말씀은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의 전쟁 전략을 가리키는 예언의 말씀이다. 티투스는 A.D. 70년에 그의 직속 정예 부대인 제10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 사방으로 토둔과 방벽을 쌓고 단지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을 완전 봉쇄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성 출입을 완전히 차단했으며, 음식의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은 수천명의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곡성으로 가득 찼으며, 급기야 티투스와 그의 군대의 총공격으로 무력하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살핌'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페'는 방문 또는 심방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벧전 2:12에는 "모시는 날"로 번역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오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는 심판보다는 돌봄을 위하여 오심의 의미가 더 부각되고 있다.
'보살핌 받는 날'이란 '찾아 온 때', 곧 '방문의 때'라는 뜻으로서 문맥상 예수님의 입성으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는 현재를 뜻한다.
‘권고받는’에 해당하는 ‘에피스코페스’는
/ ‘~위에’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에 ‘주시하다’, ‘관찰하다’라는 뜻을 가진 ‘스코페오’가 결합된 동사 ‘에피스코페’에서 유래한 명사로, ‘방문’(visitation), ‘감찰’(inspection)이라는 뜻이다.
/ 이는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창 50:24)이나 혹은 은총, 심판, 형벌을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방문을 의미하기도 한다(레 19:20 ; 렘 6:15).
/ 본문에서 이 단어는 마지막 구원의 기회로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방문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음으로 이 기회는 심판의 방문이 되어 결국 멸망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날’로 번역된 ‘카이론’은
/ ‘카이로스’의 목적격으로, ‘카이로스’는 ‘때’(time), ‘시점’(point of tim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이는 ‘기간’(period of time)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대조적으로 ‘결정적인 순간’, ‘종말론적으로 찬 때’를 가리킨다.
/ 결국 본문에서 언급된 ‘날’은 시간의 개념을 가진 일상적인 날과는 다른, 구원의 결정적 순간을 가리킨다.
/ 이처럼 예수님의 방문은 언제나 결단을 요구하는 결정적 방문으로, 일상적인 날과는 달리 구원의 결정적 기회를 만나게 되는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날이다.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한 ‘보살핌(개역한글, 권고)’의 우리말 의미는 ‘보살펴서 도와주다’이다. 이는 심판을 당할 인간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돌아보심에 초점을 맞춘 번역이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구원의 기회란 뉘앙스로 사용된 원어의 뜻을 명확하게 밝혀주지 못하므로, 오히려 ‘방문’으로 번역함이 더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동 번역은 본문을 완전히 의역하여 ‘너는 하나님께서 구원하러 오실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로 번역하여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 그들이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임을 잘 부각시키고 있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예수님이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신 곳은 '이방인들의 뜰'이었다. 이 일은 고난 주간의 월요일에 발생하였다.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 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백성들의 지도자'는 '장로들'을 뜻한다(9:22).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는 공관복음 중 오직 누가복음만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갈릴리 활동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시작하셨는데(눅 4:15), 이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의 활동 역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시작하셨음을 볼 수 있다. 누가는 이처럼 성전 정결 사건에 바로 이어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음’을 기록함으로써, 성전이 예수에 의해 가르침의 장소로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꾀하되’로 번역된 ‘에제툰’의 원형 ‘제테오’는 ‘찾다’(마 2:20), ‘구하다’(마 6:33), ‘힘쓰다’(눅 9:9), ‘연구하다’(눅 22:2)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내적 욕망을 이루고자 애쓰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단어는 본절에서 미완료 과거 시제로 쓰였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없애고자 해하는 그들의 악의에 찬 모습 이 계속 지속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즉 미완료 과거형 ‘에제툰’은 예수님을 해하려는 이들의 음모가 목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호 라오스 가르 하파스 엑세크레마토 아우투 아쿠온).
이유를 나타내는 후치 접속사 ‘가르’가 사용된 본문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귀를 기울여’에 해당하는 ‘엑세크레마토’의 원형 ‘엑크레마마이’는 ‘~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에크’와 ‘매달다’라는 뜻을 가진 ‘크레만뉘미’가 결합된 형태로, ‘그의 입술에 매달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 백성 모두가 그에게 듣고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for all the people hung on him to hear)’이다. 이는 백성들이 능력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계속하여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더 듣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누가는 이를 과거 시점에서 동작이 계속되거나 반복되는 것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기록함으로, 예수님을 쫓는 백성들의 행동이 충동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 아닌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결국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백성들의 예수에 대한 지속적인 추종과 지지로 인해 감히 자신들의 계획을 쉽게 성사시킬 수 없었다.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쫓아내는 그리스도 / 도메니코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 Theotokopoulos) 필명 엘 그레코(El Greco) / 스페인 / 1541~1614년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과 성전을 깨끗케 하심 ( 19:41-48 )
하늘로부터 온 위대한 대사는 여기서 존대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절당하시고자 예루살렘에 공적으로 입성하시고 계시다. 그곳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근심을 보라.
1.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41-44)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가까운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아마도 그 때는 그가 감람산 언덕에서 내려오실 때였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그 성을 한눈에 내려다 보셨을 것이다. 그의 눈은 그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으며 그의 가슴은 다시 그의 눈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부드러운 심령을 지니신 분인가?
우리는 그가 종종 눈물을 흘리신 것을 볼 수 있을지언정 그가 웃으신 것은 결코 볼 수 없다.
(2)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서 기뻐하고 있었을 때 눈물을 흘리심으로, 그들의 환호와 갈채가 그를 높이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셨다.
(3) 그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실제로 비탄의 대상이 된 도시들이 있었으나 예루살렘보다 더 비탄의 대상이 된 도시는 없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는가? 그는 친히 우리에게 그 이유를 보여 주신다.
1) 예루살렘은 자신에게 주어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였다.
그는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2-44절). 말씀하시는 양식이 날카롭게 나타나고 있다. 너도…알았더라면.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13:9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의 형식으로 즉 "만일 네가 알았으면 좋겠거니와"라는 말씀으로 취하기도 한다. 그 말씀은 그들에게 얼마나 복된 말씀이었던가! 그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곧 예루살렘 자신에 있다는 것이다.
① '평화에 관한 일'이 있다.
우리는 그 일을 알고 이해하도록 모든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평화에 관한 일은 우리의 현제와 장래의 행복과 관계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이 일을 알아야만 한다.
② 평화에 관한 일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될 권고 받는 때가 있다.
우리가 기도나 예배 등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매우 풍성히 가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있게 지니게 될 그 때가 권고받는 때가 되는 것이다.
③ 권고받는 때를 오랫동안 무시해온 자들이 혹 눈이 열림으로 그 때를 깊이 숙고하게 된다면 그들 또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십일 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자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거절 당하지 않을 것이다.
④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누리는 사람들의 눈에는 놀랄만큼 어리석은 것으로 비쳐진다.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음에 두거나 중요시 하지 않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날과 영접할 시기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부주의함으로 말미암아 파멸케 되고 만다. 보지 않는 자의 앞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⑤ 복음의 은혜를 경멸하기를 고집하는 자들의 죄와 어리석음은 주 예수를 크게 슬프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땅히 우리의 슬픔이 되어야 한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 즉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을 눈물을 흘리시며 바라보고 계시다.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 죽게 되기 보다는 돌이켜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이는 한 사람이라도 멸망케 되는 것을 그가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이제 평화에 관한 일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사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그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층은 불신앙에 빠져 완고하고 무지한 판단에 빠지고 말았다. 큰 구원을 무시한 대가로 그 백성은 현세적인 심판을 받게 되었다. 즉 그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한 것이다. ①로마인들은 성을 포위하고 성 둘레에 토성을 쌓고 성을 둘러 예루살렘 성의 거주민들을 사면으로 가두었다. ②그들은 성에 메어쳤다. 황제 디도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도시를 파괴했으며 성 주변은 망루 세 개만 남은 채 폐허가 되었다. 성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포함한 시민들가지 잔인한 로마인들에 의해 땅에 메어쳐졌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2. 성전을 깨끗케 하심(45,46)
(1)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훼손하는 무리에게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45절). 성전의 영광은 그 물질적인 풍요보다 성결함에 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어 쫓으시는 이유를 말씀하신다(46절).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성별된 집이다. 사고 파는 자들이 그곳에서 물건을 부정한 방법으로 매매함으로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이 일은 틀림없이 성전에 기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소란스러운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서 가장 적합한 일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47절).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두 부류의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다.
1) 사악한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적했는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47절).
2)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존대했는가?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백성들은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으며 열심으로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학자들은 모든 백성들이 다 일심으로 그를 청종하였으므로 그의 적들이 그리스도께 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때가 올 때까지는 백성들이 그를 보호하는 일을 하였으나 그의 때가 이르자 백성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그를 넘겨 주었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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