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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누가복음 19:1-10)

by 은총가득 2020. 11. 18.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누가복음 19:1-10)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불렀을 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에게는 키가 작은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좌절하였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아갔다.

1. 급히 내려왔다.

2. 즐거워했다.

3.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찾아가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나의 모든 사역의 방향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는 일에 전념하도록 기도하자.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고 부자였지만 사람들에게 멸시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잃어버린 자'로 여겨 찾아가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 질문 1 ] 삭개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가?(2-4,7절)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삭개오(1-5) 삭개오는 양면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는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늘 은혜로우십니다. 반면,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앞선 부자 관원이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자 했고, 그 간절함이 얼마나 컸던지 나무 위에 올라가는 수치를 무릅씁니다. 보통 부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절박함'입니다. 주님은 그런 삭개오를 불러 주시고,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 머무르십니다. 단순히 부자냐 아니냐보다, 주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영혼의 가난함에 주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궁핍하든지 풍족하든지, 주님을 '절실히' 찾는 가난한 마음이 있습니까? 부족할 때는 시험이 들어 주님께 냉담하고, 풍족할 때는 마음의 기름에 잠겨 주님과 멀어지지 않습니까?

[ 질문 2 ] 예수님은 삭개오를 어떤 눈으로 보셨고, 어떻게 변화시켜 주셨는가?(5,9,10절)

삭개오를 변화시키는 예수님 (6-10)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무시겠다는 말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저런 죄인을 용납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부당하게 취했다면 율법에서 규정한 최고의 보상인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삭개오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나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변화된 삭개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최고의 신앙적 명예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야말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된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과 그분을 향한 삭개오의 믿음이 이 어려운 일을 가능케 했습니다. 물질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삭개오의 변화는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큰 도전과 묵직한 울림이 됩니다.

주님을 만난 후 '돈의 사용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돈에 지배받지 않고, 주님의 긍휼과 사랑에 지배 받는 자로서, 돈 주머니를 어떻게 관리하고 변화시켜야 하겠습니까?

[ 본문 개요 ]

19:1-27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숭리의 입성을 하심으로(28-44절) 고난 주간이 시작되기 직전, 예수의 마지막 순회 전도 기간(눅 17:11-19:27) 막바지에 있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지리적 배경을 이루는 ‘여리고’ 라는 장소는 이미 18:35에서 한 번 언급되었던 장소이다. 즉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소경 바디매오가 구걸하고 있는 장면에서 여리고란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19:1-10의 삭개오 관련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일어난 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눅 18:35-43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와 내용상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두 이야기 모두 ‘여리고’라는 장소를 둘러싸고 일어나며 ‘구원의 문제 를 다루고 있고(9절 ; 18:42), 또한 이 둘 모두에게 회심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8절 ; 18:43).

이렇게 누가는 두 이야기를 하나의 흐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질시받던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 사건을 단독으로 기록함으로써 소외받는 계층에 대한 인자 되신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을 부각시켜 드러내고 있다.

19:1-10은 예수께서 여리고의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하신 사건이다. 이는 누가복음의 주제를 매우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사건이면서, 초림(初臨)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가장 잘 함축적으로 제시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즉 인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삭개오와 같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10절).(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서, 그 곳을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런데 마침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가 당시 사회에서 어떠한 직위에 있었는지 또한 그의 경제적 형편은 어떠했는지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세리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키텔로네스’는 신약 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바로 본절에서이다. 당시 여리고는 세금을 거두는 관리들이 로마로부터 파견되어 늘 머물러 있었다. 그 세관원들은 요단 강 동편 지역에서 유대 땅으로 들어오는 물품에 대해 통관세를 받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아르키텔로네스’는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아르코’와 ‘세금 징수자’라는 의미의 명사 ‘텔로네스’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이는 삭개오가 그런 일을 하는 자들 중에 우두머리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삭개오 세리장이 ‘부자(플루시오스)’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부자’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단지 잘먹고 잘사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 대부분이 식민 생활로 인해 가난한 생활을 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재산은 아주 많았음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이는 그가 부정직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였음을 짐작게 한다.

삭개오가 부자라는 사실은 또한 앞선 18:18-30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듣고 있던 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냐고 한 질문과 연결되고 있다. 실제 부자였던 삭개오도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자 관원과 달리 예수를 만나 전인격적 회개를 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로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올라간 나무 ‘쉬코모레안’은 17:6 에 나온 ‘뽕나무(모폰)’와는 다른 나무로서 일명 ‘애굽 무화과 나무’, ‘시카모어 무화과 나무’ 또는 ‘백뽕나무’라고 불리운다. 이 나무의 잎사귀는 뽕나무와, 열매는 무화과와 비슷하고 가지가 사람이 올라가기 쉬운 형태로 뻗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하였다.

그들이 불평했던 이유는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서 죄인과 함께 숙박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비난은 여리고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눅 5:30과 15:2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비판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람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이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하였으며 상종 못할 인간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들 모두는 세리를 자신의 사리 사욕을 위해 동족의 피를 빠는 로마 수탈의 하수인으로서 로마가 유대언을 영속적으로 지배하는 데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반역자 내지는 변절자로 여겼고, 또한 세리들이 이교도들과 자주 접촉함으로서 의식적으로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들과 어올리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예수께서 세리의 집에 머무르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기에 사람들이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유대 사회에서 죄인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곧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죄인의 집에 그들의 지도자인 랍비나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머물며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사이에서 랍비라고 불리웠던 예수께서 죄인인 세리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시니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4배 보상은 출 22장에 나온다. 양을 도둑질한 사람이 양을 잡아 먹거나 팔았다면 4배로, 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2배로 갚게 하였다. 만약 도둑질한 사람이 잘못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돌려주면 20%만 더해주도록 하였다(레 6:1-7).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돌려주면서도 4배 보상을 스스로 적용하였다. 그만큼 그의 회개와 변화가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삭개오가 진정으로 회개하였음을 확인한 예수께서는 삭개오와 그 가정에 구원이 임하였음을 선포하신다. ‘이 집에’로 번역된 ‘토 오이코 투토’는 ‘삭개오의 집에’라는 말이며, 이는 회개한 ‘삭개오 개인에게’라는 의미와 더불어 삭개오가 거느리고 있는 ‘그 가족 모두에게’라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또한 ‘이르렀으니’로 번역된 ‘에게네토’는 ‘되다’, ‘일어나다’, ‘행해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기노마이’의 부정과거로서 순간적으로 ‘일어났다(happened)’는 뜻이다. 삭개오가 회개한 바로 그날 그의 집에는 구원이라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개인의 회개는 그 개인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그 가정에도 구원을 가져온다. 이와 같은 개인의 구원이 가정의 구원으로 확장되는 기사는 행 16:31-34에도 나와 있다.

한편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정죄하였지만 예수의 구원의 선포로 말미암아 그는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과거 삭개오는 세리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죄인, 창기,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왔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그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덧붙이고 계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매우 과시해 왔다. 그런데 삭개오는 자기 민족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지 못했으니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처럼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익히 아시고 그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임을 확인시켜 주신다.

본문에서 ‘카도티’는 ‘~때문에 ’라는 뜻인데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것을 명확히 번역하지 않았다. 이 ‘카도티’의 의미를 살려서 본문을 직역해 보면 ‘그리고 이 사람까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가 된다. 즉 이 의미는 이 세리까지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원이 이 사람에게도 있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생각하였던 것과 같이 혈통적 측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건 아니다. 예수는 유대인의 생각처럼 혈통에 따른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롬 4:11,12 ; 갈 3:7). 예수께서는 삭개오야말로 참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라고 선언하심으로 그가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한편 초대 교회 교부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그리고 암브로우스 등은 본문을 오해하여 삭개오가 이방인이었다가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타당치 않다. ‘삭개오’라는 이름이 정통 히브리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이를 더욱 확실히 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의 소명 사건 때처럼(눅 5:32) 세리 삭개오의 구원 때에도 자기가 이 땅에 온 목적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찾아’와 ‘구원하려’에 해당하는 원어는 모두 부정사로서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며 주동사는 직설법 부정 과거 동사인 ‘엘덴’이다. 따라서 본문은 ‘단언컨대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목적은 바로 세리와 같이 잃어버린 자, 즉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는 분명 세리 삭개오에게 찾아가셔서 먼저 그를 부르셨으며 (5절) 그를 구원해 주셨다(9절).

이렇게 잃어버린 자에 대한 예수의 구체적 관심은 본서의 15장에 중점적으로 나타나 있다. 누가는 본서를 통해 당시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세리와 죄인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 복있는사람, 2018년 3,4월호 ]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 ( 19:1-10 )

의심할 것 없이 복음서 안에는 비록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의 경우처럼 특별한 무엇이 있는 사람의 회심은 기록이 되어져 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를 지나가시고 계셨다(1절). 이 도시는 저주 하에서 세워졌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곳을 찾아 오심으로 이곳에 명예를 주셨다. 복음은 저주를 없애 주기 때문이다.

(1) 삭개오는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이었는가?

그의 이름은 그가 유대인임을 나타내 준다.

1) 그의 직업과 그가 맡은 직책:

그는 세리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구원하실 자를 찾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괴수까지도 구원하시고자 오셨으며 따라서 이 세리장조차 구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2) 세상에서 그의 환경은 매우 상당한 것이었다.

즉 그는 부자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방금 전에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그러나 현재는 잃었다가 찾은 바 된 한 부자의 경우를 보여 주고 있다.

(2)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도에 들어 왔는가?

1) 그는 예수를 보고자 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3절).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을 보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최소한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이러한 대단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자, 즉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힘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

2) 그는 키가 작았고, 사람은 많았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보이시려 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 중 한 사람으로 무리 가운데 보이지 않게 계신다. 키는 작지만 큰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영적으로 활발한 자들이 많이 있다.

3) 그는 자기의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품위도 잊은 채 앞으로 달려가 그를 보기 위하여 어린아이같이 뽕나무로 올라갔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보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그를 보기 위해 적합한 모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자신이 작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보는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난쟁이들은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하여 선한 도우심과 함께 큰 뜻을 품음으로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주목하셨다.

즉 그와의 더 깊은 교제를 하시기 위해서 그를 부르셨다(5절). 그리고 그 부르심은 즉시 선한 결과를 낳았다(6절).

1)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무를 올려다 보셨으며 삭개오의 보셨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서 왔을 뿐 그리스도께 환대 받으리라고는 거의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를 좋은 복들로 인도하시며 어떻게 그의 생각을 능가시는가를 보라. 또한 매우 미미한 시작을 그가 어떻게 크게 하시는가를 보라. 그리스도를 알고자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는 그를 알게 되었다. 단지 그를 보고자 원했던 그는 그와 대화하도록까지 허락을 얻었다. 때때로 삭개오처럼 단지 호기심만을 가진 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오는 자들이 그들의 양심의 깨어짐을 갖게 되며 그들의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야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는 '속히 내려오라'고 그에게 명하셨다. 삭개오는 주저하지 말고 서둘어야 했다. 그는 내려와야 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날 그의 집에서 쉬시며 그와 함께 한 두 시간 유하시려 하시기 때문이었다.

2) 삭개오는 자기 집에 있게되는 그러한 영광에 대해서 '즐거워 하였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또한 자기 집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그를 영접하는 것의 암시이자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가 마음 문을 닫고 변명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나에게 열어 보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삭개오가 주저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4) 옹졸한 영혼을 가진 비판적인 유대인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말하면서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은 죄인된 자들이 아니란 말인가? 또한 죄인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하실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의 집에 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을 매우 부당한 처사였다.

1) 그가 비록 세리였고, 대다수의 세리들이 악한 자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정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가 죄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전처럼 악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여지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3) 그 당시에 그가 죄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가시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의사가 병자에게 안가고 어디로 가겠는가?

(5) 삭개오가 이제 회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들이 진술되고 있다(8절).

그는 자신의 선행으로 그의 믿음과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하였다. 그는 서서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말이 신중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는 그리스도께 말하였다. 즉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주께 말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생활의 변화를 통하여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즉 그가 회개하였음을 명백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1) 삭개오는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차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데 쓸 것을 결심하고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8절). 즉 삭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제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것을 하겠습니다. 즉 이제 나는 그들을 구제하되 오랫동안 의무를 무시해온 만큼이나 아주 많이, 내 소유의 절반까지라도 들일 것입니다."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쓸모 없는 낭비를 줄이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이것을 그의 회개의 열매로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 삭개오는 자기의소유 모두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얻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상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정해진 것보다 사 배나 더하여 그에게 갚아 주겠습니다."

① 그는 자신이 악을 행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참으로 회개한 자들이라면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실을 시인할 뿐 아니라 특별히 세상에서의 사업과 직업으로 인하여 아주 쉽사리 죄를 범해 왔음을 뉘우치게 될 것이다.

② 그는 자신이 토색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세리들은 정부로부터 후대를 받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만일 그들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가질 경우 해를 입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③ 그는 사배나 갚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는 만일 내가 고소 당하므로서 그래야 하도록 강요 받는다면 나는 보상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게 될 때에야 비로소 정직해 진다. 그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행하려는 것이다. 나쁜 일을 행했음을 확신하는 자들은 갚아 주는 것 외에 달리 자신들의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할 길이 없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주는 것으로 자신이 행한 악한 일이 보상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주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위선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정직하게 벌지 않은 것을 우리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6)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회개를 인정하시고 받으심(9,10절).

1) 삭개오는 이제 복된 사람으로 공포되고 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9절). 이제 그의 회개는 결과적으로 그의 구원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은 어디든 구원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늘 구원이 그의 집에 있게 된 것이다.

① 삭개오가 회개했을 때 이전 보다 더욱더 그의 집에 축복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 은혜와 구원의 방편을 가져온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 그는 그 자신의 집에 선행을 행한 것이며 복을 가져다 준 것이다.

② 삭개오가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갔을 때 그의 가족 역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따라서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리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있게 된 아브라함의 축복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출생하였으나 세리였기에 이방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참으로 회개한 자는 마치 전에 결코 세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선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져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큰 목적과 의도에 일치하는 것이었다(10절).

그가 전에 가진 적이 있었던 똑같은 논쟁에서 그는 세리들과 교제하는 것을 정당화 하셨다(마 9:13). 거기서 그는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다고 변론하셨다. 여기서도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① 사람들의 비참한 형편 :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온 세상의 인류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파멸된 세상에 어울리는 자들이 된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길을 잃어 죽은 여행자와도 같고, 치료할 수 없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은 병자와도 같다고 하겠다.

② 하나님의 아들의 자비로 우신 목적 :

그는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오셨다. 즉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 버린 자를 위해서 그 대의를 맡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잃어 버린 세상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의 목적은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목적을 수행하시는 가운데 그는 그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온갖 가능한 방법을 찾으셨으며 취하셨다. 그는 여기 삭개오처럼 그를 찾지 않은 자들, 그를 요청하지 않은 자들을 찾고 계시다.

 

열 종과 열 므나 비유(누가복음 19:11-27) ☆☆☆☆☆

 

1. 왕위를 받으러 간다는 비유의 배경

2. 한 므나를 맡긴다는 것은 재림 때까지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라는 의미

3. 멀리 떠났다.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 도래 시기와 관련성

4.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

5. 차등 배분이 아닌 균등 배분 / 달란트 비유와의 차이점

악한 종은?

/ 왕 됨을 인정하지 않았다.

/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였다.

/ 주인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22절). 주인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그의 뜻을 제대로,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분별해야 한다.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지 못했다.

결과 ; 왕 됨을 인정하지 아니하던 원수라고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26절).

[ 본문 개요 ]

19:11-27은 열 종과 열 므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계실 때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 비유가 베풀어지는 주 대상은 삭개오의 집에 동행하였던 제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 비유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의 오해를 풀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질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본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未來性)을 강조하고 아울러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 마지막 날 곧 당신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맡겨 주신 사명 특히 복음 전파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달란트 비유와의 차이점>

이 비유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유사하다(마 25:14-30). 그렇지만 화폐의 단위 사용이라든지 등장 인물의 숫자, 누가만이 사람들이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않는다는 보고를 한 것을 첨가하고 있는 것, 그리고 비유가 베풀어진 시기가 마태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후이지만 누가복음은 입성 직전이라는 것들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달란트 비유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은사에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에 대해 충성을 다하면 동일한 상급, 즉 구원이 주어질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면, 열 므나 비유는 최종적으로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한다면 그 선용한 결과에 따라 상급도 차등있게 주어질 것 임을 가르친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따라서 양자는 예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주신 다른 비유이다. (출처 ; 옥스포드 주석)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이제 그분이 예루살렘에 가시기만 하면 로마를 멸망시키고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11절). 예수님은 이러한 무리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셨다.

비유 중에 귀인이 먼 나라로 떠났다고 상징되었듯이, 예수님은 고난을 다 받으신 후,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셔서 그 중보 사역을 성취하신 대가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신다. 또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시게 되며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오신다. 인자가 즉시 돌아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은 다른 구절에서도 강조하고 있다.(아가페 큰글 성경)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종들은 믿음과 신실함으로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신실한 종들에게는 칭찬과 상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엄중한 책망과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질문 1 ] 열 므나,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은 왕이 돌아왔을 때 어떤 칭찬과 상을 받았는가?(17-19,24절)

믿음과 신실함으로 왕의 귀환을 준비한 사람들(11-19) 주님의 오심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는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이들은 주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반역을 도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종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리며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신실한 종들은 왕이 맡겨주신 '한 므나'로 '열 므나, 다섯 므나'를 남겨 그들의 충성을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왕으로부터 큰 칭찬과 함께 더 '많은 책임과 권세'를 상으로 받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주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악한 시대 속에 '한 므나'와 같은 작고 평범한 모습으로 침투하고 시작됩니다. 그 '한 므나'가 신실하고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 열배, 백배로 확장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오늘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한 므나'의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작은 '한 므나'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불신의 시대 속에서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신실함을 무엇으로 증명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내게 주신 작은 자원, 평범한 일들에 충실함으로 오늘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고 있습니까?

[ 질문 2 ] 한 므나를 그대로 묻어 둔 종은 왕이 왔을 때 왜 책망을 받았는가?(20-23절)

불신과 불충으로 왕의 귀환을 무시한 사람들(20-27) 어떤 종은 동일하게 '한 므나'를 받았지만, 그 '한 므나'를 하찮게 여겨 그냥 감춰둡니다. 그의 변명 속에는 주인에 대한 불신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 주인이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지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을 불신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주인을 위해 충성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왜 그는 주인을 불신하고 주인이 맡긴 '한 므나'를 하찮게 여겼을까요? (주인에 대한 평가 오류)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거부했던 그 시대의 영향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불신과 냉소의 시대를 살아 갑니다. 세상의 화려하고 대단한 것들을 쫓다보면, 작고 평범해 보이는 하나님 나라에 주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충한 종과 왕의 귀환을 거부한 사람들의 최후는 책망과 심판 뿐입니다. 무엇이 중한지, 세상이 아닌 영원한 나라의 관점에서 보는 눈을 길러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냉소와 불신의 시대 속에서 '종말의식'을 가지고 깨어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까? 시대를 쫓아가다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그냥 묻어두는 불충함과 불신이 나에게는 없습니까?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덧붙여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드신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주신 이유는 첫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를 통해서 신속하게 나타나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생각하다’는

/ 기존의 지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아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 즉 본절은 당시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들은 메시야가 정치적 왕권을 가지고 그들 앞에 등장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들이 메시야라고 생각하였던 사람은 바로 예수였고, 그러기에 예수께서 예루살햄에 도착하게 되면 곧 세상을 뒤엎고 영광 가운데 왕으로 등극하여 메시야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그들의 모든 원수를 물리쳐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음을 보여 준다.

/ 그러나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바람은 잘못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그릇된 메시야 사상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주신 것이다.

/ 즉 예수께서는 메시야의 심판과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즉시로 임하는 것이 아니며 그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기까지 제자들은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함을 본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그 때에 충성스럽게 일한 자들은 그 일한 바에 따라 각기 다른 상급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최후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누가는 앞에 나온 삭개오의 이야기와 이 비유를 연관시킴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재물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책임감을 가지고 선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이 사람이 먼 나라로 가 왕위를 받아 올 때까지는 아직 왕이 아니다.

그러면 ‘먼 나라로 간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께 가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음, 곧 그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귀인이 가는 목적은 왕위를 받아 다시 오기 위함이다.

본절에서 ‘오려고’는 영광과 존귀로 자신의 본래의 지위를 받아 가지고 다시 되돌아오려고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이 용어는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재림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심판자와 통치자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오실 것이다(마 24:30).

한편 이 비유의 배경을 아켈라오(Archelaus)의 왕위 계승 사건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유대 전역을 다스리던 헤롯이 죽은 다음 아켈라오는 아버지 헤롯의 유언을 따라 헤롯 대왕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로마 황제의 인준을 받으러 로마로 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포악스럽다는 이유로 그가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여 아켈라오 몰래 수십 명의 사절을 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탄원은 로마의 황실에 수락되어졌다. 그래서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은 인정받았지만 왕권은 얻지 못하였다. 이같은 아켈라오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사건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 비유는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아켈라오는 왕권을 얻지 못하였지만 본 비유에 나오는 귀인은 왕권을 얻었으며, 이는 예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심판권을 가지고 재림하실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차등을 두어 종들에게 달란트를 분배한 것과는 다르게 본절에서 귀인은 열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 균둥하게 배분해 주었다.

두 복음서에서는 다른 화폐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가 사용한 화폐 단위가 ‘므나’인데 비해 마태가 사용한 화폐 단위는 ‘달란트’이다. ‘달란트’는 분명 ‘므나’의 화폐 단위보다 더 높은 단위의 화폐이다.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의 가치이므로 100데나리온의 가치인 므나는 달란트의 1/60 정도의 가치이다.

귀인은 종들에게 그것을 주며 ‘장사하라’고 명령한다. ‘장사하라’는 ‘사업하다’라는 뜻으로 상업적 거래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귀인은 약간의 돈을 종들에게 주며 먼 나라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그 때까지 이 돈을 활용하여 사업을 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명한다. 여기서 사업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귀인이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있을 것에 대한 암시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마 25:14-30) 차등있게 달란트가 주어진 것은 사람에 따라 소명과 은사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여 주는 반면, 여기서 동일하게 한 므나씩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재능과 시간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이윤을 최대한 남기기를 바라신다.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그런데 그의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왕위를 줄 이에게 말하게 하였다.

귀인의 휘하에 있는 그 백성들은 귀인을 미워한다. 그런데 왜 그들이 귀인을 미워했는지에 관한 이유는 뚜렷이 밝히고 있지 않다. ‘미워하여’에 해당하는 ‘에미순’은 ‘미세오'의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그를 미워했음을 의미한다.

아켈라오의 이야기를 보면 유대인들이 아켈라오가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여 그의 뒤로 오십인을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로 보내었다. 유대인들은 아켈라오가 왕됨을 반대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자신들의 왕되는 것 역시 극렬히 반대하였다(요 19:15).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러한 영적 완고함과 패역함을 지적하시기 위해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러나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은화를 준 종들의(투스 둘루스 투투스 호이스 데도케이 토 아르귀리온)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만왕의 왕으로서 심판자의 권세를 가지고 재림하는 것을 상징한다. 본 비유에 나오는 왕은 돌아온 후 바로 종들을 불러 자신이 떠나기 전 지시한 것을 잘 수행했는지 알아본다.

본절에서 ‘준’으로 번역된 ‘디도케이’는 어떤 것을 타인의 사용권하에 내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디도미’의 직설법 완료로서 왕이 그의 종들에게 므나를 잘 활용하여 장사하라고 맡겼던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종들의’로 번역된 ‘투스 둘루스 투투스’는 지시 형용사 ‘투투스’가 사용된 목적격 명사구로서 ‘이 종들을’이라는 뜻이며, 왕이 소환한(포네데나이) 대상이다. 이들이 ‘은화를 준’으로 번역된 ‘호이스 데도케이 토 아르귀리온’이라는 관계 형용사구로 수식되고 있는데, 이는 왕이 자신의 종들 모두에게 므나를 준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즉 그는 많은 종들 중에 열 명만을 선택해서 각각 한 므나의 은을 맡겼던 것이다.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히나 그노이 티 디에프라그마튜산토)

‘히나’ 가정법으로 시작되는 본문은 왕위를 받아 자기의 나라로 다시 돌아온 귀인이 종들을 소환한 목적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한글 개역 성경에 ‘각각 어떻게’로 번역된 ‘티’는 ‘무엇?’을 의미하는 의문사이며, ‘장사한 것을’로 번역된 ‘디에프라그마튜산토’는 ‘그들이 철저히 장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직설법 동사이다. 따라서 ‘티 디에프라그마튜산토’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철저히 장사한 것이 무엇?’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그들이 철저히 장사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남겼는가?’라는 의미로 의역된다. 즉 왕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종들이 장사한 방법을 알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히 장사하여 무슨 이윤을 남겼는지 그 결과를 알고자 하였다.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첫째가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하였다.

므나를 맡길 때는 종이 열 명이었으나 귀인이 돌아와 그의 종을 불렀을 때는 세 명의 종만 나아오고 있다. 이는 세 명의 종만 불렀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표적으로 세 종의 경우만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귀인은 열 명의 종 전부를 불러 결산 회개를 하였을 것이다. 본절에 나오는 첫째 종은 귀인에게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고 아뢴다.

본절에서 ‘남겼나이다’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일하거나 장사하여 그 밖에 더 획득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첫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를 하여 처음의 것에서 열 배를 더 늘려 놓았다.

첫째 종의 대답 중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그가 ‘주의 한 므나’라고 말할 때 원어적으로는 ‘당신의 그 므나’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으로 번역된 ‘헤’는 정관사로서 ‘그(the)'라는 의미이며, 이는 이 사람이 열 배로 더 남긴 므나는 바로 주인이 예전에 주었던 바로 그 한 므나로 인한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당신의 그 므나’라는 표현은 자본금이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남긴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귀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 첫번째 종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주인이 맡긴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남겼으며, 이를 모두 주인에게 돌리는 선한 청지기였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네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

주인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첫째 종에게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착한’에 해당하는 ‘아가데’는 마음씨가 착하다는 의미보다는 직임에 합당하고 쓰임새에 적합하다는 의미이다.

이 첫번째 종은 주인의 기대를 충족시킨 선한 종이었던 것이다. 주인은 그가 종에게 맡긴 한 므나, 또는 그것으로 장사하는 일을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지극히 작은’으로 번역된 ‘엘라키스토’의 기본형 ‘엘라키스토스’는 ‘작은(small)'을 뜻하는 형용사 ‘미크로스’의 최상급으로서 ‘가장 작은(the smallest)’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에 대한 과장된 표현이다.

주인이 맡긴 한 므나는, 또는 그 한 므나로 장사하는 것은 사실 그것 자체로서는 경시하여 소흘히 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종은 주인이 어떠한 일을 맡기든지, 그것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관계치 않고 모두 귀중한 일로 여겨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주인은 남긴 이윤을 수거해 가지 않고, 또한 그가 남긴 이윤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보상으로 준다.

주인은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열 고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라’고 명령한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위에(over)’라는 뜻을 가진 ‘에파노'를 번역하지 않았다. ‘에파노’는 ‘엑수시안’, 즉 ‘권세’가 열 고을 위에 있게 되는 것을 강조해 주는 전치사이다.

주인은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성실히 감당한 종에게 자신이 새롭게 다스릴 나라의 일부분을 통치할 수 있도록 그 통치권을 위임한다. 이는 분명히 놀라운 보상이며 과분한 상급이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주가 맡긴 사명에 충성한 자들에게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상급이 주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둘째가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벌었습니다 하였다.

계속해서 두번째 종도 첫번째 종과 같은 양식으로 주인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고 대답한다. 즉 첫번째 종은 ‘남겼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반해, 두번째 종은 ‘만들었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만들었나이다’에 해당하는 ‘에포이에센’은 ‘만들다’, ‘얻다’의 뜻을 가진 ‘포이에오’의 과거형으로 ‘남겼나이다’에 해당하는 ‘프로세르가사토' 동사보다 행위적 요소가 더 강하다(요 3:2,21). 그래서 이 동사는 상인들이 이윤을 ‘얻다’, ‘벌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마 25:16 ; 약 4:15).

누가는 ‘만들었나이다'라는 뜻의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이 담겨져 있는 행위를 드러내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 재림 이후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구원과는 별개로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상급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의미를 지닌다(마 16:27 ; 고후 5:10 ; 계 22:12).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주인이 이 종에게도 말하기를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 하였다.

첫번째 종보다는 두 번째 종이 같은 액수인 한 므나를 가지고서 더 적은 이윤을 남겼지만 분명 그에게도 보상은 있었다. 주인은 처음과 같이 두번째 종에게 이윤에 상웅하는 보상으로 ‘다섯 므나’를 벌었으니 ‘다섯 고을’을 그에게 맡기었다. 이같이 주인은 남긴 액수에 따라 보상에 공정하게 차등을 두고 있다.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또 다른 하나가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한 므나는 100드라크마이고, 1/60달란트에 해당하는 화폐이다. 당시 노동자 품삯으로 3개월치 월급이었다고 하니,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900만원으로, 많다고도 할 수 없지만 결코 적다고도 할 수 없는 액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므나를 하찮게 여겨 은행에도 맡겨두지 않고, 위험부담을 지기 싫어서 그냥 수건에 싸둔 종의 태도는 주인에 대한 불신과 줄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인에게 온 사람을 누가는 ‘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본절에서 ‘이 사람’은 첫번째와 두번째 사람에 이어서 세번째 사람이라고 소개되지 않고 ‘호 헤테로스', 즉 ‘다른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누가는 첫번째와 두번째 사람과 다르게 행동한 세번째 사람을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이 ‘한 사람’은 앞의 두 사람이 취한 행동과는 사뭇 다르게 주인이 준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다’고 대답한다.

본문에서 ‘에이콘’은 ‘가지다(have)'란 의미를 지닌 ‘에코’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가 사용된 것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한 므나를 받고서도 그 종은 주인의 ‘장사하라’고 명한 것을 한 번도 행해 보지 않은 채 받은 그 때부터 주인이 먼 나라에서 돌아올 그 때까지 줄곧 그대로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종’은 한 므나를 활용하여 이윤을 남기라는 주인의 명령에 순종치 않고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 두었다. 이런 표현은 랍비 문서에도 나타나는데, 수건으로 싸는 것은 당시 돈을 보관하는 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와 달리 ‘땅에’ 감추어 두었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마 25:25). 그러나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맡겨진 일을 하길 바랬던 주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님은 엄하신 분이라,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 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므로, 나는 주인님이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본절에는 이 종이 왜 수건에다 돈을 싸 둘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모두 주인 때문이라고 하며, 모든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주인이 엄한 사람인 관계로 그가 주인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한’은 음식의 맛과 관련하여서는 ‘맵다’라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관련하여서는 ‘거친’, ‘가혹한’, ‘굳은’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물론 본문에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내가 무서워함이라’에 해당되는 ‘에포부벤’은 ‘포베오’의 데포넌트 동사(Deponent Verbs)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먼저 미완료 과거 시제라는 것은 한 므나를 받았을 때부터 계속해서 무서워해 왔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또한 데포넌트 동사가 사용된 것은 자기 주인이 실제로 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무서워서 수건으로 돈을 싸 두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주인을 무서운 사람이라 여기고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것을 나타낸다. 즉 그는 주인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으며, 돈을 수건에 싸둔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돈을 준 주인에게 있다는 식으로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종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를 부정직한 사람으로 매도한다.

먼저 종은 주인이 두지 않은 것을 ‘취한다’고 한다. ‘당신은 ... 취하고’에 해당되는 ‘아이레이스’의 원형 ‘아이로’는 ‘끌어올려진 것을 가져 가 버린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그 주인이 자신의 노력 없이 자신의 몫도 아닌 남의 것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고리대금업자들의 착취를 빗대어 한 말이다. 그 종은 또한 자신의 주인이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둔다’고 매도한다.

‘거둔다’는 ‘수확하다’, ‘추수하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농경 문화권에서 지주들이 부당하게 소작인들을 수탈하며 소작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착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 사람은 자신이 한 므나를 활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 주인의 명령대로 장사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수고의 몫은 주인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며, 만약 장사를 하다가 있는 것까지 없얘게 된다면 주인에게 원금까지 갚아 주어야 한다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를 심판하겠다. 너는, 내가 엄한 사람이어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변명만 늘어 놓는 종을 향해 주인은 ‘악한 종아’라고 부르며, 그가 스스로 변명한 말로 충분히 그가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의 배열과 달리 ‘악한 종아’란 호칭이 아니라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에 해당하는 표현이 맨 먼저 나온다. 이는 주인이 그 종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바로 그가 한 말임을 보여 준다.

또한 ‘~로’라고 번역된 전치사 ‘에크’는 ‘~로부터(out of)’라는 뜻으로 주인이 종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바로 ‘네 자신의 입으로부터’ 즉 ‘방금 네가 말한 것으로부터’가 그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주인은 종의 말을 그대로 다시 인용함으로써 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자기 스스로 한 말을 통해 깨닫도록 유도하고 있다.

한편 ‘너는 ... 알았느냐’에 해당되는 ‘에데이스’는 ‘알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오이다’의 과거 완료이다.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과거 완료의 시제는 문맥 속에서 암시되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행위가 완결된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본문처럼 ‘오이다’ 동사가 과거 완료 시제로 쓰이게 되면 미완료 시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종이 주인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바를 말한 당시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주인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즉 종은 아직까지도 주인을,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으로 계속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오해를 하고 있는 한 그 종은 주언이 의도하는 일을 바로 수행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 종은 주인에 대한 오해 때문에 있는 것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였다(27절).

우리는 본 비유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하여 이 세번째 종의 변명은 자신이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이 종은 자신의 불충성과 게으름을 숨기기 위하여 주인의 성품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종은 자신의 이러한 완악한 의도를 자신의 말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게 되었고 이에 대해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화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앞서 종은 자신이 주인을 수고도 않고서 다른 사람의 노동의 대가를 착취하는 사람으로 이해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주인이 명령한 대로 장사하였다가 혹 최악의 경우로 원금을 잃는 것은 물론 손해까지 보게 된다면 그 손해 분까지 변상하게 될까 봐 최선책으로 돈을 수건에 쌓아 두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이 종에게 진정 자신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너는 은행에 그 돈을 넣고서 이자를 받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조차 취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고 있다.

여기에서 ‘은행’으로 번역된 ‘트라페산’의 기본형 ‘트라페자’는 ‘탁자’, ‘상(table)’을 의미하는 단어인데(마 15:27 ; 막 7:28), 이는 그 당시 환전상들이 돈을 올려 놓는 탁자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즉 이 단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 버리셨다는 기사(마 21:12 ; 요 2:15)에서 환전상들이 사용하던 탁자를 가리키는 용례로 나온다. 또한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은행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도 본절의 ‘트라페자’는 ‘은행’이 아니라 정확히는 ‘환전상들의 탁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트라페자’의 목적격 ‘트라페산’을 이끄는 전치사 ‘에피’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전치사는 ‘~위에(on)'라는 의미로서 환전상들의 탁자 위에 올려진 돈을 쉽게 연상케 한다. 주인은 종이 만약 조금만이라도 수고하여 한 므나를 환전상에게 맡겼더라도 원금에다가 그 원금의 이자까지 찾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 노력조차도 기울이지 않고 돈을 수건에 싸두기만 한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본절에서 ‘변리’로 번역된 ‘토코’는 ‘폭리’나 ‘고리대금’이 아니라 정당하게 늘어나는 ‘이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돈을 환전상에게 맡겨 안전하게 이자까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주인은 굳이 돈을 종들에게 맡겼겠는가? 이는 이 종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주인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종들에게 돈을 맡긴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돈을 맡기고서 장사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은 그들에게 장차 더 많은 것을 맡기기 위한, 즉 종들을 위한 처사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종은 이런 주인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키고 말았다. 결국 종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변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명령에 대한 불성실과 불충성의 죄는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었다.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리고 그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악한 종에게 냉혹한 처벌을 가한다.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전치사구 ‘아프 아우투가 ‘빼앗아’에 해당하는 ‘아라테’ 뒤에 있다. 이 전치사구는 ‘그로부터(from him)'라는 의미로서 므나를 박탈당하는 대상이 그 무책임하고 게으른 종임을 강조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그 한 므나를 받게 되는 대상은 한 므나로 장사하여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이다. 여기에서 ‘있는’으로 번역된 ‘에콘티’는 ‘소유하다(have)’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코’의 현재 분사로서 아직까지도 그 열 므나를 수중에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주인은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서 그 수익금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 원리에서 이렇게 할 주인은 없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하지 않은 자는 그에게 맡겨진 것까지도 다 빼앗길 것과 또한 충성하여 많은 것으로 남긴 자는 그가 맡은 것에 더해 남긴 것, 그리고 그 위에 더하여 다른 것까지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결산 원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론적으로 26절에서 하나의 격언 형식으로 선언된다.

한편 본절에서 주인의 명령을 듣고 이를 집행 하는 ‘곁에 섰는 자들’은 왕의 측근에 있는 신하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이 세상 종말의 날에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수종드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심판 사역에 동참하여 선한 자에게 상급을 주고 악한 자를 징벌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님, 그는 열 므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주인 곁에서 있던 자들이 그가 내린 명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의 대답은 상식적 논리에 준한 것이다. 이미 열 므나를 가진 자에게 무엇 때문에 한 므나까지 빼앗아 주라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유사한 비유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는(마 25:14-30)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베자 사본(D), 워싱턴 사본(W) 등도 본절의 내용을 생략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보다 권위 있는 사본인 시내 사본(N),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등에는 기록되어 있다. 다음 26절이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란 표현으로 시작되어 본절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히 원래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본절의 서두에 나오는 ‘저희가 가로되’에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다. 이를 24절에 나오는 ‘곁에 서 있는 자들’ 즉 왕의 측근에 있던 신하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1절에 나오는 ‘저회’ 즉 당시 예수님의 주위에서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로 보아 이들이 비유를 잠시 중단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문맥상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인 번역 성경들은(RSV, NIV, LB, 공동 번역)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포함된 말로 보아 왕의 신하들로 간주한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주인은 곁에 있는 자들의 말을 받아 왜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 한 므나를 더해 주는지에 대 한 까닭을 격언 형식의 말로 대신한다. 달란트 비유를 마무리하면서도 예수께서는 본절과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마 25:29).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원리를 담고 있는 본절의 전반적 의미에 대해서는 마 25:29의 설명을 보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달란트 비유에서는 예수님이 ‘무익한 종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는 이야기’로 끝을 맺으신 반면(마 25:30), 본 므나 비유에서는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였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으신다. 즉 달란트 비유는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은 악하고 무익한 종의 비참한 운명으로 끝을 맺지만 본 므나 비유는 악한 종에게서 가진 것을 빼앗는 데(24절) 이어 주인의 왕 됨을 원치 않던 자들이 비참한 운명을 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말하는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은 물론 제14절에 나오는 귀인을 미워하여 왕 되는 것을 반대하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그 게으른 종도 주인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무시한 자였으므로 이 부류에 포함될 수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말씀하신 므나 비유를 단순히 게으른 한 종에 대한 심판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이와 같이 주인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자들의 심판으로까지 확대하여 마무리하시는 것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있을 예수를 반대한 유대인들 및 그들의 터전인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 선언(41-44절)을 더욱더 확연히 전달하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한편 주인이 원수들을 향해 부르는 호칭을 한글 개역 성경은 ‘저 원수들을’이라 표현했으나, 원문에는 ‘엑드루스 무 투투스’로 표현되어 있다. ‘무’는 1인칭 단수 소유격 대명사이며, ‘투투스’는 가까운 사물을 지칭하는 지시 형용사 ‘후토스’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엑드루스 무 투 투스’는 ‘나의 이 원수들을(NASB, these enemies of mine)’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곧 처형당할 백성들(14절)이 다름아닌 귀인 자신의 원수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은 지금 그 귀인 가까이에 포박되어 와 있음을 보여 준다. 귀인이 왕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방해하였던 원수들의 끝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주인은 죽이라는 명령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아켈라오가 로마에서 영주, 즉 분봉왕이 되어 돌아와서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던 유대인들 팔천여 명을 아주 잔혹하게 학살하였던 사건을 상기시킨다. ‘죽이라’에 해당되는 ‘카타스팍사테’는 ‘멸절시키라’, ‘학살하라’는 뜻으로, 그 형벌이 참으로 참혹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예수를 거부하였던 모든 사람들의 종말이 예수의 재림시 완전한 멸망으로 끝날 것을 의미한다.

 

열 므나의 비유 ( 19:11-27 )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1. 이때 그와 함께 하던 자들에게 일어난 생각(11)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눅 17:20).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이 현세적인 영광과 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그의 나라의 보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결론내렸으며 따라서 이제 그가 곧바로 그곳에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잠시 후에 그가 거기서 보좌에 앉은 것을 보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선한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서 잘못을 범하기가 쉽다.

2. 그들의 잘못된 기대가 시정됨(12-27)

그는 다음 세 가지 면으로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정정해 주신다.

(1) 그들은 그가 영광중에 지금 당장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가 공적으로는 아직 오랫동안 그의 나라의 보좌에 앉지 않아야 됨을 말씀하신다. 그는 어떤 귀인과 같은 자로 그는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게 된다. 그는 왕국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돌아오셨다. 그 때 예루살렘이 멸망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주된 귀환은 아직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지막 심판날에 있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의 사도들과 그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자들이 영광과 위엄 가운데 나아가리라고 즉 그들 모두가 군주, 또는 고관대작이 되어질 것이며 왕궁과 도시의 고위직과 온갖 영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에게 이러한 것 대신에 그들을 일군된 자들로 계획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계시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장사하는 직 이 외에 어떤 다른 높은 자리를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들로 스스로 사람들 가운데서 그와 그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일에 종사케 하기 위해서 그들의 수중에 자본을 공급해 주셨다. 모든 현대적인 영광을 신앙심 깊은 경멸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의 참된 영예로움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의 나라에서 그의 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꿈꾸었으며 그로 인해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품게 하는 것들 대신에 진지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들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① 그들은 이제 해야 할 큰 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을 떠나가게 되며 떠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준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것을 보여 준다(마 26장). 그러나 그 비유에서는 그들을 더 겸손케 하고자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영예는 최고의 상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장사군이라는 데 있다. 그는 이러한 책임과 함께 그의 종들에게 므나를 나누어 주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부지런하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 직무를 기억하라. 그리고 그 일을 하라. 즉 열심을 가지고 그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그 일에 몰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할 일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전자나 후자 모두 게으르라고 세례받거나 임명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직무에 필요한 은사들을 공급하신다. 또한 그는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는 "가서 일하라 가서 장사하라"는 책임을 맡기며 므나들을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오기까지 우리의 일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② 그들은 최종 결산을 하게 된다.

이 종들은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하는 주인에게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부지런히 그리고 신실하게 장사한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많은, 수고한 장사군들이 손해보는 자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장사하는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회개한 영혼을 가진 자들은 이기는 자들이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확히 이익이 된다. 사역자들은 단지 그를 위해 일하는 자들로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의 그물로 잡은 고기, 즉 그들이 장사함으로 이득을 본 것을 그에게 회계해야 한다.

㉠ 몇몇 종들에게 있어진 선한 회계와 그들에 대한 주인의 인정:그 두 가지가 16절과 19절에 예시되어 있다.

첫째, 그들은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열 므나'를 남겼으며 다른 사람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 똑같이 충성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 모두가 함께 충성했다 할지라도 어느 한편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수고하고 자기 일에 더욱 열심으로 몰두했을 것이며 따라서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주인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인정하였다. 즉 "주여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남긴 모든 것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셋째, 그들은 모두 자신의 충성과 근면에 대해 칭찬을 들었다. 즉 17절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해선 19절에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잘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넷째, 그들은 자신들이 이룬 성과에 따라서 상급을 받았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 차지하라(17절). 별로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은 성공할 가망이 있는 자들이다. 이러한 비유로써 사도들은 두 가지 것을 약속받은 셈이 된다. 즉 그들이 많은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수고했을 때 그들은 큰 존대를 받게 될 것이며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존경 속에서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자신들의 세대를 섬겼을 때 그들은 내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로서 다스릴 수 있는 상급을 받은 천한 장사군의 경우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선한 사역자나 혹은 선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질 것이다. 다섯 므나를 남겼던 자는 다섯 등급이 있다. 즉 모든 그릇이 똑같이 쓸모 있는 것이나 다 똑같이 크지는 않다. 이와 같이 필요의 등급에 따라서 영광의 등급이 있게 될 것이다.

㉡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있어진 악한 회계와 그에게 내려진 선고(22절):

첫째, 그는 자신이 맡은 므나로 장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였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20절). 이는 곧 "내가 그것을 늘리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을 줄게도 아니했읍니다"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것은 은사를 받되 그것으로 도무지 선을 행하지 않은 자들의 무관심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이익이 줄건 말건 그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건, 후퇴하건 그들에게는 매 한가지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고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므나를 수건으로 싸두는 종들과 같은 자들이다.

둘째, 그 일을 더 좋게 만들지 못하고 나쁘게 만든 것을 변명함으로 자기를 정당화시켰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21절). '엄한'이란 곧 교활함을 뜻하는 말이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가 이것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는 그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으로 그는 심은 데서 거두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인의 엄함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단지 사기군에 불과한 자였다. 즉 자기의 게으름에 대해서 어리석고 근거 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였다.

셋째, 그의 변명이 그를 판단한 것이 되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22절).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반드시 심판받게 된 것이다. "만일 네가 내 이익에 대해 유의했었다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두어 나로 내 것 뿐 아니라 그 변리까지 가지도록 했어야 했다." 설사 그가 본전을 잃을까 두려워서 장사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아무 이익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 게으른 자들의 구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참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전적인 무관심인 것이다. 그들은 단지 편히 살게 되는 것 외에 신앙이 터전을 얻건 말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넷째, 그는 자기의 므나를 빼앗겼다(34절). 자기들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이 그것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에게서 그 한 므나를 빼앗아'라고 했다. 다섯째, 그것이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가 이미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25절)) '무릇 있는 자가 받을 것이다'(26절)라고 대답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이다. 즉 가장 부지런했던 자들이 가장 큰 격려를 받아야 한다. 또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마치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을 때 그들은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자기들의 가지고 있는 은혜를 더욱 증가시켜 가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은혜를 무시하거나 은혜가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버려 두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3) 그들이 기대했던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때 유대 민족이 곧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떠나신 후에 유대 민족이 완고하고 패역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1) 그의 백성이 그의 뒤에 보낸 전언에서 그것이 나타난다(14절).

그가 자기 나라에 왕위를 받으러 갔을 때 그들은 여전히 그의 대적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유대인들 속에서 널리 드러난 불신앙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들은 결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말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것에는 틀림없이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스리게는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2) 그가 돌아와 그들에게 내린 선고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27절). 그의 충성된 공복들이 상급을 받고 보상을 받을 때, 그는 그의 원수들에 대해서 원한을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에 대해서 대적한 그 분간할 수 없는 원수들에 대해서 보복이 행해졌다. 즉 그들은 '끌려와서 그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앙을 고집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비참한 멸망이 틀림없이 모든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대가가 될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은 변명을 파기하고 그들의 공로에 따라 선고하기 위해 '그들을 이리로 끌어오라'고 했다. 그리스도로 자기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그의 원수로 여겨져 처리될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은 자들로 여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잡힌 바 되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의 진노로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