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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천국과 지옥(눅 16:19-31)/ 간절한 기도의 응답(눅 18:1-8)

by 은총가득 2020. 11. 18.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다!(누가복음 16:19-31)

 

들어가며

본 과의 제목이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다!”인데,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을까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준비할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어리석은 바보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직 이 세상에서의 삶을 즐기는 데만 몰입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오늘 본문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으로

1.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비유(혹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부자는 생전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9, 22-25절)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19절)

그 부자가 생전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나사로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 부자는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돌아보고 도와주는 데는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갔습니다. 부가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음부는 지옥이라고 생각합시다. 부자는 음부에서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 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절)라는 구절은 음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약하면, 그 부자는 땅 위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호의호식했지만 죽어서 음부에 내려간 후에는 실로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땅 위에서 살아있는 동안’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지만 음부에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채 백 년도 되지 않는 인생은 즐기며 살았지만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2. 그 비유에서 나사로는 생전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0-22절)

20-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0-21절)

나사로는 생전에 비극적으로 살았습니다. 우선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비유에서는 ‘헌데 투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헌데’란 사전적으로는 ‘살갗이 헐어서 상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온 몸이 헌데 투성이었다니 어쩌면 나사로는 심한 피부병에 시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나사로는 가난했습니다. ‘나사로 이름하는 한 거지’라고 말하니까 나사로는 거지입니다. 그의 몸이 헌데 투성이었다는 것도 그가 거지였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상처가 났을 때 제 때 치료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몸, 그것이 바로 나사로의 삶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핧더라.”라는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불쌍한 삶, 비극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22절) 1번 문제에서 음부를 그냥 지옥이라고 생각하자고 했듯이, 아브라함의 품도 천국으로 생각합시다. 그토록 불쌍하고 불행한 삶을 살던 나사로였지만 감사하게도 죽어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한 고통을 당했는데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 음부에서 고통 받던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부탁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왜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까? (23-26절)

23-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3-26절)

부자는 음부에서 지독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절규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음부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 고통이란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극심합니다. 문제는 그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끝날 고통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러니 음부는 얼마나 두려운 곳입니까?

그렇지만 음부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는 것입니다. 음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야말로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음부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일부 경험합니다. 이를 테면 햇빛과 공기, 물 등과 같은 자연적인 혜택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일부입니다. 따뜻한 마음씨나 정(情) 등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음부에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음부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우리는 결코 음부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절)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을 때 좋은 것을 받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괴로움을 받고, 살아있을 때 고난을 받으면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모순됩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것이 곧 천국이나 지옥에서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음 문제에서 살펴보겠지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부자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고 나사로는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 말씀은 부자가 음부에서 괴로움을 받는 것은 곧 그가 선택한 삶에 대한 결과로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음부에서 아무리 많은 괴로움을 받아도, 그 괴로움이 영원해도 누구도 부자를 그 음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부탁을 거절한 두 번째 이유는 2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천국과 지옥은 서로 왕래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음부에 떨어진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고, 한 번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결코 음부에 내려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는 철저하고도 영원히 단절된 곳입니다. 우리는 음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 원하셨던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4.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습니다. 무슨 부탁이었습니까? 그 부탁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27-31절)

27-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7-28절)

부자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의 다섯 형제들이 그 고통 받는 곳 음부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그들에게 찾아가서 말하면 그들이 듣고 음부에 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믿지 않고 돌아가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없다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럴 때 이 부자가 한 말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지옥에 간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곳에 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로 그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부자가 그런 부탁을 했더니 아브라함은 2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 여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모세오경을, 선지자들은 좁게는 선지서들을, 넓게는 모세오경을 제외한 구약성경의 나머지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음부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부자는 다시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절) 그렇지만 아브라함 역시 다시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31절)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는 것, 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사실은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를 말해줍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호의호식하며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사로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 것입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 줄 몰랐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나사로를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헌신했더라면 부자는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가지를 기억합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더욱 힘을 씁시다. 그냥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참된 믿음으로, 참된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둘째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말씀을 듣지도, 따라서 믿지도 못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부터 전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지옥에 가는 사람이 없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나는 그 가르침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한 주간의 실천/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생각하고 정리해 두기

 

마무리하며

성경에 예수님의 비유가 많이 있지만 등장인물의 실명이 언급된 비유는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비유밖에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비유에서 ‘나사로’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셨을까요? 그것은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해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결국 지옥에 간 부자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관해 말씀으로 가르쳐주시는 것을 잘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천국의 삶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누가복음 18:1-8)

 

 

들어가며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고 성도들의 삶에서 기도 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도에 담긴 하나님의 크나큰 약속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간절함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간절한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간절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실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 속으로

1. 예수님의 비유에는 한 재판장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4절)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2절) 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재판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공의롭게 재판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따라 재판하는 불의한 재판장이었습니다.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3-4절)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그 재판장은 원한을 가진 한 과부가 몇 차례나 찾아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과부가 뇌물을 주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과부는 대다수가 가난했습니다. 그러니 뇌물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그 재판장은 그 과부의 호소를 외면했습니다. 아니, 그 과부를 무시한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외면한 재판장, 거저 자신에게 뭐든지 갖다 바쳐야 유리하게 재판을 하는 재판장, 그는 정말 나쁜 재판장이었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장은 ‘현실’을 보여줍니다. 과부에게는 너무나 벅찬 현실이었습니다. 원수에 대한 원한이 생겼다니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사자들 간에 해결이 되지 않으면 법정에 호소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법정을 주관하는 재판장마저 자신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현실의 벽이 높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하지 않고 정의로운 재판장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세상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고 내가 일한 만큼 정당한 결과를 누리고 예상치 않은 사고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 곳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불의한 재판장처럼 우리에게 커다란 벽으로 다가오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 재판장은 처음에는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결국 들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절)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5절) 재판장이 혼자 한 이 말이 보여주듯이 재판장에게는 그 과부를 도와줄 마음이 여전히 없어 보입니다. 재판장이 그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유일한 이유는 귀찮아서입니다. 과부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귀찮게 하니까 재판장은 어쩔 수 없이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과부를 도와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조금이라도 편하려고 도와주려고 한 것입니다.

과부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간절한 호소가 통했습니다. 한두 번 찾아가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재판장이 못 견딜 정도로 귀찮을 만큼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 여인이 기댈 것은 정당한 법 집행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3. 과부와 재판장이 등장하는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셨던 핵심은 무엇입니까? (1, 7-8a절)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1절)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8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7-8절) 불의한 재판장이라 할지라도 간절하게 애원하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는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는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는가? 하나님이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1,2번 문제를 토대로 해서 왜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단순하거나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쉬운 일은 없습니다.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얻는 것도, 미혼의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을 잡는 것도, 장사하는 사람이 이윤을 남기는 것도, 은퇴와 퇴직 이후를 준비하는 것도 하나같이 쉬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 일이 쉽지 않은데 어찌 기도의 응답이 쉽겠습니까? 현실이 어렵고 벅차기 때문에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한두 마디 했다고 해서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결코 이 세상의 불의한 재판장 같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 응답의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 것을 우리 스스로가 알고 감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일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고도 기도가 응답된다면, 거저 몇 마디 말만 해도 기도가 응답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4. 예수님은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염려를 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염려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8b절)

8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것이 예수님이 염려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결국 간절함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데, 그 간절함이란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대상에 대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2번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가난한 과부가 재판장을 귀찮을 정도로 찾아가서 간구했던 것은 자신이 기댈 곳이 그래도 정당한 법 집행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고, 아무리 불의한 재판장이라도 그 사람만이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상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대상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간절한 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대상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없다면 어찌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데, 과연 인자가 이 땅에 올 때 이 세상에서 그만한 믿음을 볼 수 있겠는지를 염려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만일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내려놓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 응답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간절하게 기도해 보았습니까? 간절하게 기도해 보지 않았다면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 주간의 실천/ 간절하게 기도해 보기. 간절하게 기도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보기

 

마무리하며

이 비유가 가르쳐주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현실의 벽이 높기 때문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아도 쉽게 응답될 정도로 현실이 쉽고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진다면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고 믿는다면 어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이유를 마음에 새기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