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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눅-16,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까지의 사역(누가복음 17:11-19:27

by 은총가득 2020. 11. 18.

눅-16,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까지의 사역(누가복음 17:11-19:27)

 

17:11에서 시작하여 19:27까지는 넓게는 9:51-19:27의 유대 및 베레아 사역에 관한 기사의 연속 부분으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까지의 최후 순회 전도 사역을 보도하고 있다.

먼저 누가는 누차 반복하여 언급한 대로(9:51 ; 13:22) 여기서도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17:11). 이로써 누가는 예수께서 유대 및 베레아 사역을 수행 하시면서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구속 사역을 완성할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늘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누가는 현 시점에서의 예수께서 계신 위치와 관련하여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로 지나 시고 있는 중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the Valley of Jezreel)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볼 때, 예수께서는 유대 및 베레아 사역 기간 중에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셨다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난 길인 이스르엘 골짜기를 통해 동남쪽으로 향하여 요단강 동편의 베레아(Perea)를 지나고, 여리고(Jericho)를 통과하여 예루살렘(Jerusalem)으로 입성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 최후 순회 전도 기간에 관한 기록 부분은 각 문단별로 독립적인 사건 및 교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 문단의 내용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각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작은 주제들이 서로 공통된 요소로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그 작은 주제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성격을 여러 각도에서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17:11-19의 첫 문단은 이스르옐 골짜기를 여행하시던 예수께서 열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치유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아홉 명의 유대 출신 문둥병자들은 모두 제 길로 가고 오직 사마리아 출신의 한 문둥병자만이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와 경배를 드린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며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는데,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매우 상징성이 강한 사건이다. 즉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를 먼저 받은 유대인이 육적 선민(選民)이라는 지위에 연연하여 그 구약의 성취로 오사 새로이 신약의 복음(福音)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거나 순종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이방인은 주께 감사하며 경배함으로 결국 최종적인 구원을 먼저 얻게 될 것을 예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단 모두 복음의 은혜에 접하게 될 것이지만 그 중의 대다수가 육적 차원에서만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최종 구원의 가치를 깨닫지 못함으로 주님께 나아오지 않을 것과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주님의 복음의 참된 가치를 깨달아 주께 나아옴으로 영원한 천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보여 준다.

 

이어 17:20-37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20절)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신다. 이 선언이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임을 고려할 때, 문맥상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內在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위격 속에서(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영성(靈性) 및 현재성(現在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 자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는 것을 선언하심으로써 가시적이고도 정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오류를 시정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 문단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인자의 날’을 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시며,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자세에 관해 교훈하신다. 여기서 인자의 날이란 예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완성될 때인 그 날을 가리킨다.

 

이어 18:1-8과 18:9-14의 두 문단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기도에 관해 교훈하는 비유로서, 각각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 및 겸손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18:1-8은 기도에 관한 교훈이지만 이는 8절의 ‘인자가 올 때'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인자의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관련하여 교훈을 주고 있는 앞 문단 17:20-37과 밀접한 연관하에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음 18:15-17의 문단은 겸손(Humility)을 고리로 하여 앞 문단 18:9-14과 이어지고 있다. 즉 기도에 있어서 겸손한 자세의 중요성을 가르친 앞 문단에 이어, 본 문단에서는 어린아이와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 제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또 18:18-30의 문단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고리로 하여 앞 문단 18:15-17과 연결되고 있다. 앞 문단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아이와의 상관 관계를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본 문단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부자와의 상관 관계를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는 열려진(open) 반면, 재물에 집착하는 부자들에게는 결코 들어갈 수 없도록 닫혀진(closed)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대비 시키며 교훈하시는 것이다.

 

이어 18:31-34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제3차로 예고하신 내용을, 그리고 18:35-43절 에서는 여리고에서 한 거지 소경을 치유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이 두 문단은 별개의 사건 이지만 문맥적으로는 ‘소경됨(blindness)’이라는 주제로 서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거듭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34절), 그들이 영적으로는 소경 상태로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였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그만큼 무지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예수께서 장차 영적 소경된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임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19:1-10은 예수께서 여리고의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하신 사건이다. 이는 누가복음의 주제를 매우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사건이면서, 초림(初臨)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가장 잘 함축적으로 제시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즉 인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삭개오와 같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10절).

 

마지막으로 19:11-27은 열 종과 열 므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계실 때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 비유가 베풀어지는 주 대상은 삭개오의 집에 동행하였던 제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 비유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의 오해를 풀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질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본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未來性)을 강조하고 아울러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 마지막 날 곧 당신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맡겨 주신 사명 특히 복음 전파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기도 하시고(17:20,21), 미래성을 강조하기도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으므로 예수의 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하였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야 되신다는 사실은 믿었으나 예수께서 건설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단지 정치 적인 것으로 오해했다. 즉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는 하였지만 ‘아직(not yet)’ 완성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 즉 예수님의 초림(初臨)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였으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미’와 ‘아직'사이에 긴장(tension)의 관계가 형성 되어 있으며, 이 긴장 속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교훈하시는 데 주안점을 두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의 문맥들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 및 제자들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리와 같은 죄인들도 회개하면 들어올 수 있는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는 개방되어 있으나 재물에 집착하는 부자들에게는 폐쇄되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이다. 그 나라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나라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고 맛보면서 동시에 그 나라의 완성을 갈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제자들은 늘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pp.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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