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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부자와 나사로 비유 - 대 반전(누가복음 16:19-31)

by 은총가득 2020. 11. 18.

부자와 나사로 비유 - 대 반전(누가복음 16:19-31) ☆☆☆☆

 

[ 2019년 10월 30일 묵상 ]

부자가 음부에 가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부자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부자가 음부에 간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은 모두 가난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다양한 관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형제 사랑의 관점에서 살펴 보자. 그는 사랑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형제 다섯을 위해 나사로를 보내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의 형제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해야 할 대상자를 바로 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들도 많은 사랑을 베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가족, 나의 자녀,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자들, 소위 '내 편'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나에게 유익을 끼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배려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원하지 않으신다.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자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도 함께 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음을 종종 발견하기도 한다. 나와 상관이 없는 자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자들이 되어 음부에 처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자들이 되도록 하자.

[ 성경묵상 ]

[ 질문 1 ] 부자와 나사로는 살아 있는 동안 현실에서의 삶이 각각 어떠했는가?(19-21절)

[ 질문 2 ]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 후 그들의 영원한 삶은 어떻게 반전되었는가?(22-26절)

거지와 마찬가지로 부자도 때가 되어 죽게 되었다. 그런데 부자의 죽음은 먼저 서술된 거지와 상황이 다르게 전개된다. 거지 나사로는 그의 죽음 이후 시체가 매장되지도 못하고 동네 밖 들판에 널부러졌을지 모르나 그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부자는 죽어 그의 시체가 좋은 묘실에 고이 장사되었으나 그의 영혼은 어두움과 고통만이 존재하는 음부로 떨어지고 만다.

16장 앞 부분에서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어서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물질의 축복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것(15절)이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돈을 좋아하는 그들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나타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하지 아니한 자는 영원한 불에 들어간다고 하는 구절과 비교해 보면서 묵상해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나사로 비유에는 이중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번째는 현세의 재물을 자신의 배와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는 교훈이다. 두번째는 부자의 가족들을 빗대어 바리새인들의 강팍함을 책망하는 것이다. 표적만을 구하는 악한 세대(눅 11:16 ; 마 12:38 ; 16:1-4 ; 막 8:11-12 ; 요 2:18)를 질책함과 동시에 그 표적을 보임에도 도무지 믿지 않는 악한 세대를 동시에 책망하고 있다.

본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특히 당시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소외되었던 계층이었던 여자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반전된 구원(눅 6:21 ; 14:13)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 누가의 독특한 관점에 대한 일면이 잘 드러난다. 이 비유를 통해서 부자와 대조적으로 경건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측면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배만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부자와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나 도움을 받지 못했던 거지 나사로를 비유로 하여 이기적 탐심에 가득 차 그릇된 재물관을 갖고 있던 바라새인들을 책망하고자 하셨으며, 소외 당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으며 경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하셨다.

이 비유는 13절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신 15:11 ; 잠 14:21)을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경히 여기며 무시하는 것은 곧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태도이며, 경홀히 여기는 태도이다. 그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었으며, 섬김의 대상으로 재물을 택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이 비유는 앞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데, 바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9절)라는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재물로 지혜롭게 친구를 사권 자는 하늘의 영원한 복에 참여한 바 되어 영접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에 대하여 성실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인색한 가운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산 사람들은 영원한 복에 참여하지 못하고 음부 가운데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눅 13:28 ; 마 22:13 ; 24:51 ; 25:30).

이처럼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실로 다양한 의미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어 예수님의 여러 비유 중 가장 사랑받는 비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본문 개요 ]

16:19-31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서, 문맥적으로 재물에 관한 앞 문단의 비유와 교훈의 내용에 있어서 유사하면서도 그 교훈을 보다 강렬하고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이 내세에서 극적으로 역전됨을 보여 줌으로써, 부(富)를 하나님의 축복의 필수적 상징으로 여기며 가난과 질병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만 여기던 유대적 사고 방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있다.

1-13절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하여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함으로써 장래 영원한 삶을 대비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이제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하여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종국을 가져다 주는지 경고하신다. 앞선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제자들을 향한 메시지인 반면 이 비유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정죄하며 상종하지 않은 바리새인들(5:30)을 향한 메시지이다.

이 두 비유에는 똑같이 ‘부자’가 등장하나 각 비유에서 부자가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첫번째 부자(1-8절)는 모든 재산을 소유한 자임과 동시에 아랫 사람들을 마음대로 고용하거나 파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로서 하나님을 상징한다. 반면, 두번째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19-31절)는 재물을 그릇 사용하다 심판을 받는 죄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이 두 비유는 각기 가리키는 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비유의 주요 인물로 등장함으로써 이미 부자였고 더 큰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당시 바리새인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하였을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16:19-31 ; 이 비유는 15장에 나타나는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주님의 영접과 16장 초반부의 '재물'에 대한 교훈이 묘하게 결합된 대단원의 결론이다.

16:28-30 ; 부자가 과연 어떤 죄를 지었기에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가? 단적으로, 모세와 선지자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으며(29절),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30절). 모세와 선지자가 말한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궁핍한 자를 도우며, 과부와 고아와 비천한 자들을 도우라고 전반에 걸쳐서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참조, 신 10:18 ; 14:29 ; 사 58:7 ; 겔 18:7-9).(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 ; 자색옷은 당시 왕족들이 입는 매우 값비싼 옷으로 부유층의 상징이었고, 고운 베옷 역시 값비싼 옷을 암시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최신 명품 럭셔리 패션을 몸에 감고 살았다는 말이다. 부자의 삶이 얼마나 화려하고 풍요로웠지를 보여준다.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내세에서의 부자와 거지의 상황은 이생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에’로 번역된 접속사 ‘데’는 전환이나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그러나’, ‘그런데’로 번역함이 더 좋다. 이 접속사를 통해 상황이 완전히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고독으로 점철된 이생의 생을 마감한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 그의 시체는 동네 밖 들판에 버려졌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맞아들이신 것이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은 곧 천국을 상징한다(눅 3:8 ; 13:16 ; 19:9 ; 창 12:1-3). 또한 특별한 은총과 사랑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품’이라는 단어를 통해 천국에서 나사로는 상당한 영접을 받았고 아브라함과 같은 동일한 행복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생에서 그 누구도 영접하지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영접을 받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김으로써 더 이상 비천과 궁핍의 신분을 나타내는 ‘거지’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의 이름 ‘나사로’의 뜻처럼 ‘하나님이 돕는 자’가 되었다. 나사로는 이생에서는 비록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이제 영원한 천국의 즐거움에 참예한 바 되었다는 점에서 추론할 때 나사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지와 마찬가지로 부자도 때가 되어 죽게 되었다. 그런데 부자의 죽음은 먼저 서술된 거지와 상황이 다르게 전개된다. 거지 나사로는 그의 죽음 이후 시체가 매장되지도 못하고 동네 밖 들판에 널부러졌을지 모르나 그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부자는 죽어 그의 시체가 좋은 묘실에 고이 장사되었으나 그의 영혼은 어두움과 고통만이 존재하는 음부로 떨어지고 만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렇다면 왜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아비의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는가?

부자는 아직도 이 생의 사고 방식에 젖어 나사로를 자기 수하의 사람처럼 여기고 자기를 위한 전령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아브라함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부탁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현세에 살고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일깨우기 위한 전령으로서는 나사로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형제들이 나사로의 정체와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다시 가게 된다면, 즉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자신과 관련하여 내세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리게 된다면 자기의 형제들이 회개하고 내세를 준비하는 삶으로 돌이킬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지 않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부자의 가족들을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는 당시 예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마음이 강팍한 바래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들이 듣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듣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은 마음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이다. 글이나 육성을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말도 결단코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수많은 이적을 베풀어도 마음에 회개치 않는 사람들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이웃을 돌보며 긍휼을 베풀라는 하나님의 말씀(레 19:18 ; 신 15:11 ; 잠 14:21)을 듣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큰 일조차도 믿지 못한다. 이는 예수께서 죽었던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힐난하며 죽이려 했던 모습을 상기시킨다(요 11:53). 또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눅 24:11,25).

예수님의 이 나사로 비유에는 이중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번째는 현세의 재물을 자신의 배와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는 교훈이다. 두번째는 부자의 가족들을 빗대어 바라새인들의 강팍함을 책망하는 것이다. 표적만을 구하는 악한 세대(눅 11:16 ; 마 12:38 ; 16:1-4 ; 막 8:11-12 ; 요 2:18)를 질책함과 동시에 그 표적을 보임에도 도무지 믿지 않는 악한 세대를 동시에 책망하고 있다.

본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특히 당시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소외되었던 계층이었던 여자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반전된 구원(눅 6:21 ; 14:13)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 누가의 독특한 관점에 대한 일면이 잘 드러난다. 이 비유를 통해서 부자와 대조적으로 경건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측면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배만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부자와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나 도움을 받지 못했던 거지 나사로를 비유로 하여 이기적 탐심에 가득 차 그릇된 재물관을 갖고 있던 바라새인들을 책망하고자 하셨으며, 소외 당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으며 경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하셨다.

이 비유는 13절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신 15:11 ; 잠 14:21)을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경히 여기며 무시하는 것은 곧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태도이며, 경홀히 여기는 태도이다. 그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었으며, 섬김의 대상으로 재물을 택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이 비유는 앞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데, 바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9절)라는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재물로 지혜롭게 친구를 사권 자는 하늘의 영원한 복에 참여한 바 되어 영접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에 대하여 성실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인색한 가운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산 사람들은 영원한 복에 참여하지 못하고 음부 가운데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눅 13:28 ; 마 22:13 ; 24:51 ; 25:30).

이처럼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실로 다양한 의미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어 예수님의 여러 비유 중 가장 사랑받는 비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코덱스 아우레우스 엡테르나켄시스 (황금의 성복음서), 호화필사본 : 방탕한 부자들과 가난한 나사로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 ( 16:19-31 )

탕자의 비유가 우리 앞에 복음의 은혜로 보여 주려고 하였다면 이 비유는 우리에게 장차 올 진노를 나타내어 우리를 일깨우고자 의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로 가난과 고난을 감내하게 하고, 세상과 호색에 빠질 유혹에 대항하여 우리를 무장시키고자 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지금 이 비유는 이 두 가지 큰 목적은 매우 잘 달성하고 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나 겨자 씨 비유에서 처럼 영적인 일을 세상적인 사물에서 빌어와 그 유사성을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다른 비유들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본문의 영적인 일 그 자체는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선악의 다른 상태에 대한 서술이나 묘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은 불행에서 벗어나 죽어서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누린다. 호화롭게 살면서도 가난한 자에게 냉혹과 부유한 향락주의자들은 죽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언제나 진리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가? 그러면 여기에 있는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 구세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세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는 본문에서 그 일을 하고 계시다.

1. 서로 다른 두 신분(19-21)

이 세상에는 악한 부자와 경건한 빈자라는 서로 다른 두 신분이 있다. 옛날 유대인들은 번영하는 것은 선한 사람이라는 표시 가운데 하나라고 여길 정도이었으므로, 가난한 자에게 어떤 호의를 베푸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 충분히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잘못을 시정해 주시고자 노력하신다.

(1) 악한 인간, 즉 행복의 절정에서 영원히 불행에 있을 사람(19절) :

한 부자가 있어. 라틴어에서는 흔히 어떤 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자는 가난한 자의 이름이 주어진 것처럼 나타나 있지 않다. 이제 이 부자에 대하여 살펴 보자.

1)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그가 다닐 때의 행장이었다. 그는 쾌락을 위하여 고운 베옷을 입었으며, 매일 세탁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밤에 입는 옷과 낮에 입는 옷이 있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자색 옷이 있었다. 그는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2) 그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

그의 식탁에는 자연과 인력이 제공할 수 있는 각종 진귀한 음식들로 가득 차려졌으며, 보조 식탁에는 요리 접시로 가득 쌓여 있고, 비싼 정복을 입은 종들은 식탁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그는 그것이 그 자리를 빛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무슨 악한 것이 있는가? 비록 어떤 사람이 재산이 넉넉하여 부유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으며, 또한 풍성한 식탁을 먹게 된다고 해도 아무런 죄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 재산을 사기, 압제, 또는 착취로 모았다는 말도 없다. 그리고 그가 술 취했다거나 다른 사람을 술 취하게 했다는 말도 없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사람이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영원히 놓여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사는 형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것만큼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추리할 수 없다.

② 풍요와 쾌락은 매우 위험스럽다. 차라리 이 사람은 많은 재산과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행복하였을 것이다.

③ 육체의 방종, 그리고 육체의 안락과 쾌락은 많은 사람을 파멸시킨다. 좋은 고기를 먹고 좋은 의복을 입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종 교만과 사치의 재료와 연료가 되어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한다. ④우리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 동시에 가난한 자의 슬픔과 고통을 잊어 버린다면 하나님께 매우 진노를 살 것이며, 그 영혼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2) 여기에 불행과 고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한 사람이 있다(20절).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최악의 궁지에 몰려 있었다.

1) 그의 몸은 욥처럼 '헌데' 투성이었다.

몸이 병들고 쇠약한 것도 큰 고통이지만 헌데는 환자에게 훨씬 더 큰 고통을 줍며,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훨씬 더 혐오감을 준다.

2) 그는 먹고 살기 위해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헌데 투성이요 절름발이였지만 몇몇 동정어린 손길과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부자의 문간에 놓여졌다.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푼을 그들에게 빌려줄 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 푼을 그들에게 빌려줄 수 없는 자들은 한 손이라도 빌려주어야 한다. 고난 중에 처한 나사로는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①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21절). 그는 마땅히 부자의 식탁에서 한 그릇의 음식이라도 대접받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아니 부자의 개가 먹고 남긴 것들일지라도 고마워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한다.

첫째, 가난한 나사로의 곤경과 성품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마음이 가난하였다. 그는 안빈낙도하는 자였다. 그는 불평하고 울부짖으면서 부자의 문에 누워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온순하게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였다. 본문에서 진노의 자녀이며 지옥의 상속자 된 자는 집 안에 앉아서 호화로이 지내고 있다. 반면에 사랑의 자녀이며 천국의 상속자 된 자는 문가에 누어서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그때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판단되어질 수 있을까?

둘째,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는 부자가 나사로를 학대하였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본문에서 그를 무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은 그가 참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며, 매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말해 주고 있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나사로에게는 큰 친절이 될 수 있었으나 그는 나사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고 거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유린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돕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의 소유에 대하여 불충실한 청지기로 밝혀질 것이다. 가장 무서운 운명에 놓이게 되는 이유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말하는 부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궁핍과 불행에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다.

② 그가 개로부터 받은 대우 :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절). 그 부자는 한 떼의 사냥개, 아니면 다른 종류의 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개들은 충분히 배부르도록 먹을 수 있었다. 그때 가난한 나사로는 연명할 수 있을 만큼도 먹을 수 없었다. 그들의 개는 먹이고 가난한 자는 소홀히 한 사람들은 내세에 답변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개와 말을 배불리 먹이면서 가난한 이웃 가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륜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들이 와서 불쌍한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그의 불행을 악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헌데는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개로 하여금 그 헌데를 핥도록 유혹했다. 그 개들은 주인처럼 인간의 피덩이를 즐겨 먹으면서 호화롭게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둘째로 얼마는 그의 불행에 대해서 그를 위로해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인은 그에게 냉담하였지만 개들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고통을 덜어 주었다. 개들은 그 주인보다 훨씬 그에게 친절하였다.

2. 서로 다른 두 상태(22-23)

죽음에 임해서와 그 후의 생에 있어서 이 경건한 빈자와 악한 부자의 서로 다른 상태를 살펴 보자.

(1) 그들은 모두 죽었다(22절).

그 거지가 죽어…부자도 죽어. 부자와 가난한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에게 죽음은 공통의 운명이다. 거기서 그들은 함께 만난다. 성도들은 죽어서 그들의 슬픔이 끝나게 되고 기쁨에 들어갈 것이다. 죄인들은 죽어서 그들의 책임에 대해 답변하러 갈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관계된 것이다. 이는 그것이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 거지가 먼저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여전히 번창하게 내버려두시면서 경건한 자를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가 종종 있다 그는 다른 아무 피난처나 쉴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덤 속에 숨은 것이다.

(3)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가난한 자의 매장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 사람들ㅇ느 아무 곳에나 구덩이를 파고 그의 시신을 묻었다. 그러나 부자는 화려한 장례식을 가졌다. 부자가 지닌 관대한 인생 그리고 그가 베푼 좋은 식탁에 대하여 찬양하는 장례식사가 있었을 것인데, 그것은 연회에 참석했던 자들이 맡았을 것이다. 장례식은 그 사람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천사에게 받들려 안식에 들어간 그의 영혼에게 주어진 영예는 얼마나 큰 것이며, 매우 거창하게 부자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긴 영예보다 얼마나 월등한 것인가!

1) 그의 영혼은 육체와는 분리된 상태에 존재했다. 죽지는 않았으며 육체와 함께 잠들어 있다.

2) 그의 영혼은 다른 세계로 옮기웠다. 즉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그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

3) 천사들이 그 영혼을 돌본다. 그것은 천사들에 의해서 옮겨졌다. 천사들은 구원의 후사들에게 봉사하는 영들인데,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뿐 아니라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영혼은 성화되지 못한 영혼처럼 이 땅에 얽매이거나 방해받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에 탄성을 가지고 있어 육체를 멀리하자마자 그것에 의하여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그들을 데리고 올 특별한 사신을 보내시는 것이다. 성도들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집에 인도될 것이다. 부자의 장례식에 있었던 상여군들은 아마도 일류급 인사들이었겠지만 어떻게 나사로의 상여군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인가?

4)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의 조상이다. 신실한 자의 영혼은 그에게로만 모이게 되어 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즉 그와 함께 잔치를 갖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는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부자이었으나 하늘에서 그의 품에 가난한 나사로를 안기를 꺼리지 않았다. 부한 성도들과 가난한 성도들이 하늘에서는 다 같이 만난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대식가인 부자는 그를 개의 무리와 함께 두기도 싫어하였던 것이다.

(5) 부자에 대해 들은 다음의 소식은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었다'는 것이다(23절).

1) 그의 처지가 매우 비참하다.

그는 지옥, 저 음부, 즉 분리된 영혼의 상태에 있다. 거기서 그는 불행의 극한에서 극도의 고통 중에 있었다. 신실한 자의 영혼들이 육체의 짐에서 벗어나자마자 즉시 기쁨과 행복에 들어가는 것처럼 악하고 성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죽음에 의해 육체의 쾌락에서 끌려나오자마자 끝 없고 무익한 치료 불가능한 고통과 불행에 머무르게 된다. 이 부자는 전적으로 감각 세계의 쾌락에 몰두하였으므로 영혼의 세계의 기쁨에 대하여는 전혀 적합치 않았다. 부자의 마음 같은 속세적인 마음에 영혼 세계의 기쁨 같은 것은 진실로 아무런 기쁨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것들을 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2) 그의 처지가 비참하게 된 것은 나사로가 행복한 것을 그가 알게 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저가…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23절). 그는 그때 나사로가 어떻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① 그는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다. 아브라함을 쳐다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멀리서 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② 그는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나사로를 보자 자신이 그에게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행하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행복에 젖어있는 그를 보자 자신의 불행이 훨씬 고통스러워졌다.

3.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24-31)

(1)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현재의 불행을 경감해달라는 요청(24절).

멀리 있는 아브라함을 보자 부자는 그에게 울부짖었다. 큰 소리로 명령하던 그는 이제 큰 소리로 애걸한다. 술 마시고 떠들며 흥얼거리던 노래가 탄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졌다. 여기서 다음 내용을 살펴 보자.

1) 그가 아브라함에게 붙인 칭호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옥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육체적인 환락에 젖어 있을 때 이 부자는 오늘날 종교를 경멸하는 자들이 하듯이 아브라함과 그 이야기를 비웃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브라함에게 존경의 칭호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의인들을 업신여기지만 의인들에게 억지로 가까워지려 하고 그들과 혈연 관계가 있는 양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2) 그는 현재의 비참한 처지를 아브라함에게 표현한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4절). 그가 하소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의 고통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그러한 불꽃인데, 죄를 범한 양심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즉 스스로를 고소하고 정죄하는 마음의 무서운 불꽃이다.

3) 이러한 불행을 생각하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함 :

나를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자비를 업신여기던 자들이 그것을 간절히 구할 날이 이를 것이다. 나사로에게 아무런 동정도 베풀지 않았던 그는 이제 나사로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일찍이 자기보다는 훨씬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간청한 특별한 은총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① 여기서 그는 특히 그의 혀의 고통을 하소연했다. 그 혀는 말하는 기관 중의 하나이며, 그 고통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려 말했던 모든 악한 말, 즉 모든 완악하고 불결한 말들을 기억한다. 그가 말들에 의해 정죄받았으므로 혀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혀는 또한 맛보는 기관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 고통은 그가 감각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② 그는 자기 혀를 시원하게 할 한 방울의 물을 원한다. 그는 구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것으로서 한 순간 그의 혀를 시원하게 할 한 방울의 물을 요청한다. ③그는 나사로가 그 물을 가져오기를 바란다.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나사로를 알고 있고, 나사로는 옛날에 알고 지내던 자를 위하여 이 선한 일을 자기에게 해 주는 데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경멸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기꺼이 친절을 얻고자 할 날이 이를 것이다.

(2) 이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

그는 그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부자가 얼마나 정확하게 보응을 받고 있는가를 보라. 빵 한조각을 거절하였던 그는 한 방울의 물을 거절당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나게 한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늦게 구한다면 받지 못할 것이다.

1) 아브라함은 부자로 하여금 생전에 나사로의 사정과 그의 사정이 어떠했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얘…기억하라. 이것은 날카로운 말이다. 그때 죄인들은 기억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너의 창조주, 구세주를 기억하라. 너의 최후를 생각하라." 그러나 그들은 이 지난 일을 상기시키는 말에 귀를 막고 기억할 수 있는 말도 잊어버리려 한다. "아들아, 너에게 주어진 많은 경고를 기억하라,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도록 좋은 기회를 주었으나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자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부자가 그것을 오용했다고 말하지 않고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네게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주셨는가를 기억하라. 따라서 너는 하나님께서 빚진 것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너는 그가 너에게 주신 것을 받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묻어버리는 무덤이었고, 씨를 뿌려도 수확이 없는 밭이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다. 그것은 네 눈으로 보아 네 몫으로 삼아 스스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서, 네가 선택한 것들이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이 좋은 것을 받았고 내세에서 더 좋은 날은 다 지나가 버렸으며, 그것은 지난 과거이다.

② 나사로가 받은 고난 : 그가 생전에 받은 불행과 비참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너는 네 악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좋은 것을 많이 가졌고, 나사로는 그의 선에 비해 지나치게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그것들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어진 약으로 받아 들였으며, 그 약은 결과가 나타났다. 악한 사람들은 이 세사에서만 좋은 것을 가지는 것처럼, 경건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만 나쁜 것을 가진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의 양심을 일깨워 그가 나사로에게 어떻게 대했었는가를 상기시킨다. 그 때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지금 나사로가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라겠는가?

3)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현재의 축복과 그의 비참함을 상기시킨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천국은 위로요, 지옥은 고통이다. 천국은 기쁨이고, 지옥은 통곡이요, 아픔이다. 이 세상에서 많고 큰 재앙을 거쳐가는 사람에게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될 것이다. 고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잠들면 그들은 위로를 받고 그들의 모든 눈물은 씻기워질 것이다. 천국에서는 영원한 위로가 있다. 반면에 지옥은 세상의 열락과 쾌락을 즐기다가 가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지옥이 될 것이다.

4)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도움을 입어 어떤 구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26절). 천국에서는 가장 친절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한 때 그들의 친구였던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해 죽어 저주 받은 무리를 방문할 수 없다. 여기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지옥에서 가장 용감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지옥을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연과 은총의 상태에 고정된 아무런 구렁이 없다. 우리는 전자에서 후자로 즉 죄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시간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돌이 구렁의 문에 굴려졌는데, 그것은 다시는 굴려낼 수 없는 돌인 것이다.

(3)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행한 더 큰 요청 :

아브라함에게 말할 기회를 얻자 그는 뒤에 남겨 둔 자기 친척들을 위해 간청하려 한다.

1) 그는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27절). 그는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 요청한다. "당신이 이것만은 다시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동정심이 많으신 줄 확신합니다. 그를 나의 아버지 집에 돌려 보내소서. 그는 거기에 여러 번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알아 볼 것이며, 그가 말하는 것을 존중할 것입니다. 나사로가 그들에게 증가하게 하소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게 하소서. 그들이 내 전철을 밟지 않고,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도록 그들에게 경고하게 하소서"(28절). 그는 "내가 그들에게 증거하도록 나를 그들에게 보내 주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나갈 수만 있다면 형제들이 정신을 잃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사로를 보내소서. 그의 설명은 약간 무서울 것이나 충분히 그들을 죄에서 놀라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지금 그들의 파멸을 막고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 대한 배려였다.

2) 아브라함은 이 간청도 거절한다.

지옥에서는 어떤 요청도 수락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에 맡겼다. 여기에 그들의 특권이 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 이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그들을 믿으면 이 고통의 장소에 빠지지 않게 막는 데 충분할 것이다.

3) 그는 가시 한 번 간절히 강청한다(30절).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즉 이 말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들을 존중한다면 그럴 수 있겠으나 죽은 자가 살아 그들에게 간다면 훨씬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익히 알고 있지만, 이것은 새로운 일이요, 놀라운 일이기에 분명히 그들을 회개시킬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정하신 것보다 다른 방법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4) 아브라함은 그것을 계속하여 부정한다(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부수고 타락하게 만드는 힘은 죽은 자로부터 들은 증거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므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