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비유(눅 15:11-32)
[ 성경묵상 ]
제15장의 두 문단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의 세 가지 비유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1-2절에서 이 비유들이 주어진 배경이 설명되고 있다. 즉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께 몰려드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미워하시므로 의인(義人)이라면 죄인들과 함께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하는 명칭처럼 철저히 죄인들을 멀리하고 자신들을 그들과 분리시키는 삶을 살았으며, 또한 세리 및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를 비난하고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세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죄인들(Lost Sinners)’이 회복되었을 때의 하나님의 기쁨을 제시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시는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주석)
눅 15:11-32 ;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이다. 앞의 두 비유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준다.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좀더 사실적이며 인상 깊게 전개되고 있다.
15:28-30 ' 다음 몇 가지 항목들이 주의를 요한다. 첫째,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라는 투덜거림은 여러 해 동안 그가 일을 해 온 기본적인 자세와 정신을 말해 준다. 그는 불행했음에 틀림없다. 둘째, "명을 어김이 없거늘"에서 볼 때 맏아들은 내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표면적인 복종 이상이 기대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셋째, 큰 아들은 '내 동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어투가 경멸적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장자를 이스라엘 유대인으로, 탕자를 이방인으로 대치시켜 묵상해 보자.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 질문 1 ]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가?(12절)
[ 질문 2 ] 비록 못난 아들이지만,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잘 드러낸 단어를 찾아보세요.(20,22절)
[ 성경대조 및 주해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그가 그것을 다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래서 그는 그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쥐엄 열매'란 '작은 뿔'이란 뜻으로, 팔레스타인 및 지중해 연안, 이탈리아에서 자라는 가릅나무를 뜻한다. 주로 가축의 사료로 사용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도 되었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며, 은혜의 보좌 앞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절)라고 말하려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였다. 어서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가락지'란 권위를 상징한다.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종이 그에게 말하기를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하였다.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으나,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기를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 네 동생은'이란 표현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을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호칭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그의 동생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 ]
탕자의 비유 ( 15:11-32 )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11,12)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공통의 아버지가 되심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길러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멸시한 이 세리들과 죄인들은 그들의 형제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어떤 친절과 자비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 이 교만한 바리새인들에게 알려 주고 있다.
2. 서로 다른 특성의 두 자녀(13-32)
이 비유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구분하고 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 두 아들 중 하나는 견실하고 의젓한 청년인데, 과묵하고 검소하며 냉정한 사람이었으나 그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람은 그가 받은 교육에 집착하며 쉽게 거기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변덕스럽고 민첩하며, 구속을 참지 못하고 방황하며 기꺼이 모험을 즐긴다. 그리고 한번 악한 손에 빠지게 되면 방탕아가 되기 쉽다. 여기서 후자는 세리와 죄인 그리고 이방인들을 나타내는 것이며, 전자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을 가리키나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말한다.
(1) 둘째 아들이 방탕한 아들로 나타나고 있다.
1)그는 탕아가 되자 난봉과 방황, 그리고 낭비와 불행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① 아버지에게 그가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12절).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아버지여…네게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좀더 정중하게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부디 나에게 주십시오." 또는 "만일 좋으시다면 저에게 주십시요"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한다. 곧 그것은 당연히 내 몫으로서 내게 속한 것으므로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것이며, 더 악한 것으로의 출발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빚으로써 여긴다. 이 둘째 아들은 곧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주소서 그러면 이후에는 돌아와서 절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들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손에 그 분깃을 가지고 지금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이는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현재의 만족에만 탐닉하고 있지만 미래의 지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싶어 했을까?
㉠ 그는 그의 아버지의 통치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소위 거짓된 자유를 좋아 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의 띠를 산산히 부셔버리고, 대신에 자기의 육욕의 줄로 자신을 묶어 매기까지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체자인 것으로 결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죄인들이 변절하는 시초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지배에 매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스스로 신인 것처럼, 자신들이 즐기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선악을 알려 하지 않는다.
㉡ 그는 그의 아버지의 눈 앞에서 피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과 그의 전능을 불신하려는 마음이 악한 자의 사악함 밑바닥에 깔려 있다.
㉢ 그는 그의 아버지의 경영을 불신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물의 분깃을 갖고 싶어했다. 이는 그의 아버지께서 그가 현재 쓰는 비용에 제한을 두셨던 것을 그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는 스스로 자만하였고 충족감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만일 분깃을 받게 되면 그의 아버지가 하신 것보다 더 잘 경영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더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탐욕에 의해서 보다는 교만으로 망하는 젊은이가 더 많다.
②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얼마나 친절했는가.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절). 아버지는 그 두아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해야 할 것을 계산하여 둘째 아들에게 그 분깃을 주었고 맏아들의 분깃도 주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의 분깃을 계속 관리하기를 바랬던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맏아들이 그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었는지 보게 된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절).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요구한 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아마 그 이상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께서 그를 기꺼이 흡족케 하시고 편안하게 해 주시는, 아버지의 애정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해서 그는 짧은 시간에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신이 그렇게 지혜로운 관리인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③ 자신의 손에 자기의 분깃을 받았을 때 그는 스스로 어떻게 관리했는가.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소비하려고 힘썼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13절). 둘째 아들이 결정한 것은 즉시 떠나는 것이었으며, 그 목적을 위하여 그는 재산을 다 모았다. 이 둘째 아들의 방황 속에 있는 탕자의 상태는 타락한 인간의 죄악의 상태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다.
㉠ 죄악의 상태는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멀리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에게서의 변절이 죄이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 여행을 하였다. 죄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도망을 한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게서 피하려고 한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다는 것, 그리고 점점 더 그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 죄인들을 더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지옥이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죄악의 상태는 낭비하는 상태이다.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13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고(30절). 잠시 동안에 다 허비하였다(14절). 그는 좋은 옷을 입고 잠시 동안에 그의 재산을 탕진하도록 부추기는 무리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죄인들은 고의로 집안의 재산을 허비한다. 즉 그들은 자신의 지성과 영적인 모든 능력을 잘못 이용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맡겨진 재능을 묻어둘 뿐만 아니라 횡령하여 다른 곳에 사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선한 일을 위하여 쓰도록 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그들의 욕망의 양식과 연료로 삼는다. 세상과 육신에 노예가 된 영혼은 그 재산을 '허비'하며 '허랑방탕'하게 살아간다.
㉢ 죄악의 상태는 궁핍한 상태이다.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4절). 낭비는 고의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방탕한 생활은 때가 이르면, 잠간 사이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특별히 이때 불황이 무절제한 생활의 파국을 재촉한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은혜를 내동댕이 친 죄인들의 비극을 나타낸 것이다. 그들은 감각적인 쾌락과 세상의 부를 위하여 은혜를 저버렸으며, 따라서 은혜가 없어 멸망에 이르게 된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원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위한 의복이 없으며, 내세를 위해 예비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죄악의 상태는 흉년이 든 땅과 같다. 죄인들은 지독하고 비참하게 가난하면서도 그것을 악화시키기를 자초한다.
㉣ 죄악의 상태는 수치스러운 노예의 상태이다.
이 젊은이의 방탕은 그를 가난하게 만들었으며, 그이 궁핍은 그를 노예로 만들었다. 저가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15절). 전에는 방탕한 생활로 나타났던 동일한 사악한 생활이 여기에서는 노예의 생활로 나타났다. 이 젊은 신사가 종으로 고용되었을 때 얼마나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낙담하였겠는가! 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양을 치게 한 것이 아니라 돼지를 치게 하였다. 마귀의 종이 하는 일은 육신을 위해 준비하고 그 욕망을 채우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먹기를 탐하고 더러우며 시끄러운 돼지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성적이고 불멸의 영혼이 스스로 어떻게 이보다 더 수치를 당할 수 있을까?
㉤ 죄악의 상태는 끊임없는 불만족의 상태이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절). 불행하게도 젊은 귀공자는 스스로 돼지의 동료가 되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날 때 스스로 만족을 기대한 것에서 그들은 확실히 실망할 것이다. 그들은 '배 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사 55:2). 쥐엄열매는 돼지의 양식은 되지만 사람의 양식은 못된다. 세상의 부귀와 감각적인 즐거움은 육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귀중한 영혼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귀중한 영혼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그것들은 영혼의 본성에 맞지도 않으며, 영혼의 바램을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그 필요를 공급해 주지도 못한다.
㉥죄악의 상태는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서 위안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탕자가 수고하여 빵을 얻지 못하자 구걸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은 어느 피조물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세상과 육체에 헛되이 호소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혼에 해를 줄 것은 갖고 있으나 영혼의 양식이 되고 영혼을 기름지게 할 것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 죄악의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23,32절). 죄인은 사형 선고 아래 있는 것처럼 율법에서 죽은 자일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영적 생명이 결여되어 죽은 자이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지 않으므로 죽은 것이다. 먼 나라에 있는 탕자는 그의 아버지와 가족을 향해서 죽었고,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죄악의 상태는 잃은 상태이다. 이 내 아들은 잃었다가(24절). 그것은 좋은 모든 것이 있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잃어버린 바 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영혼은 제 길을 벗어난 여행자처럼 잃어진 자이다. 만일 무한한 자비가 보호하여 주지 않는다면 돌이키지 못한 채 곧 멸망될 것이다.
㉨ 죄악의 상태는 광기와 착란의 상태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17절). 이 말에서 위의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이 표현은 그가 정신이 나갔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확실히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러하였으며, 그가 먼 나라의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 때는 정말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사람처럼 죄인들은 어리석은 욕망 때문에 자신을 망친다. 그러나 동시에 어리석은 희망으로 자신을 속인다.
2) 우리는 이제 그가 이 방탕으로부터 되돌아 오는 것을 보게 된다.
① 그가 되돌아 오고 회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고난이었다. 그가 궁핍하게 되었을 때, 그는 정신이 들었다. 고난이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이해 거룩하게 될 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좋은 수단으로 판명된다. 피조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의 가련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체의 모든 방법은 헛될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게 된다. 위로자가 쓸 데 없고, 의사가 소용없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칠 것이다.
② 그것을 위한 준비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가 올바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혼잣말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하고 중얼거렸다. 회심하는 데 대한 첫 단계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생각하였다. 나는…주려 죽는구나(18절). 단지 배고프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주려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죄인들은 죄의 길에서 스스로 죽게 된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온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이 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왔다 할지라도 그는 스스로 불쾌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실 것이다.
돌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훨씬 더 좋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그는 좋은 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버지 집에는 모든 가족을 위한 양식이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충분하며, 각 개인을 위하여서도 충분하다. 그리고 자선을 베풀기에도 충분하며 저장해 둘 정도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고용된 종이라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이 기뻐해 하며 감사해 하는 것으로 좋은 대접을 받는다. 이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곁길로 나갔던 죄인들을 다시 되돌아 오도록 용기를 북돋아 줄 것임에 틀림없다.
③ 돌아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의 생각은 드디어 이 결론에 도달하였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18절). 선한 목적도 선한 일이지만 역시 선한 실행을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즉 일어나 아버지께 갈 것을 결정했다. 그가 비록 먼 나라에 있고, 그의 아버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되돌아 가려 한다. 하나님에게서 뒷걸음질쳐 나온 모든 발걸음을 다시 되돌려 그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그의 말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결심을 주의해 보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즉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아버지께 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진정한 회개는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할 말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말씀 드릴 때에 그 분 앞에서 우리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우리가 말할 바를 미리 스스로 심사숙고 하는 것이 좋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자.
첫째, 그는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고백하려 했다. 죄를 얻었사오니.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였으므로 마땅히 죄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 죄의 고백은 평화와 용서의 필요 조건으로서 요구되고 주장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주장한다면 스스로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참회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죄를 얻었사오니"하고 자백한다면 죄를 자백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주시는 은혜의 약속을 받게 된다.
둘째, 그는 그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그 죄값을 받으려 했다. 즉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읍니다"라고 말하였다. 세상의 부모들께 불효한 자들은 이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하늘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 부모님께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다. 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경별하는 데서 범해진다. 이것이 하늘에 죄를 범한 것이다. 죄가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것이 하늘에 대한 죄이다. 그러나 하늘에 해를 끼찰 수 없기 때문에 그 죄는 무력한 약의에 불과하다. 아니, 그것은 어리석은 악의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침을 뱉으면 뱉은 자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경멸한 죄이다. 즉 "나는 하늘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 앞에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셋째, 그는 스스로 가족의 모든 특권을 인정하려 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19절). 그는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것이 그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께서 관계를 부인해도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요구대로 자기에게 속한 재산의 몫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기대할 몫이 없었다.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자인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록 가족 중에서 가장 미천한 자리라고 할지라도 가족으로 승인해 주기를 간청하려 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19절). 곧 "그것만으로 충분하며, 나에게 과분합니다"라는 말이다. 비록 종들과 함께 앉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거나 부과될지라도, 그는 그것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태와 비교하여 그것을 특혜로 생각할 것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그리하여 내가 이제까지 경홀히 여겼던 만큼 내 아버지의 집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다섯째, 위의 모든 것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바라보려 하고 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18절).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그것도 우리 아버지로서 본다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여 그 분께 되돌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우리의 슬픔을 진실되게 하며, 죄와 대항하여 싸우는 우리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 할 것이며, 우리가 용서받으리라는 소망에 용기를 줄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자와 간청하는 자들에 의해서 아버지라 불리우기를 기뻐하신다.
④ 그는 이 결의를 어떻게 실행했는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절). 그는 그의 선한 결의를 지체 없이 실행하였다. 그는 쇠뿔을 단김에 빼듯이 지체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갈 것이라고 말했었다면 즉시 일어나서 가라. 그는 절반도 채 가지 못해서 피곤하여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지 않고 약하고 지쳤지만 그 어려운 일을 온전히 해내었다.
3)그는 아버지에게서 환영받고 영접받는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20절). 그러면 그는 환영받았는가? 그렇다. 진심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리석고 불순종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자녀들이 뉘우친다면 그들에 대해 무정하고 엄하게 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지혜, 즉 온유함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비유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실 것이며, 용서하실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데 있다. 이제 다음 내용을 살펴 보자.
① 아버지는 큰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아들을 영접한다.
아직도 상거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20절). 아들이 회개를 보여주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자비를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응답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마음에 원하는 바를 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것이 얼마나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보자.
㉠ 자비의 눈을 볼 수가 있다.
그 눈은 재빨리 보았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았다. 마치 어떤 높은 망대의 꼭데기에서 자기 아들이 나간 길을 지켜 보면서, "나의 불쌍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저기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이것은 죄인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과 자기에게 나아오는 죄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분은 그에게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과 첫 번째 움직임까지도 알고 계신다.
㉡ 자비의 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자기 아들을 볼 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다(20절). 비참한 모습은 죄인의 경우라 할지라도 동정의 대상이 된다. 비록 죄인이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동정하신다.
㉢ 자비의 팔을 볼 수가 있다.
이 발은 빨리 달려갔다. 달려가(20절). 탕자는 수치와 두려움의 짐에 눌려 천천히 왔지만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달려 갔다.
㉣ 자비의 팔을 볼 수가 있다.
그는 팔을 뻗어 아들을 포옹하였다. 목을 안고(20절). 정죄받고 체형을 받아 마땅하지만, 금방 돼지를 치다가 온 더럽고 추한 자식이지만 그는 그를 팔로 안아 가슴에 품었다. 이와 같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께 환영을 받는다.
㉤ 자비의 입술을 볼 수가 있다.
입을 맞추니(20절). 이 입맞춤은 아버지가 그를 환영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줄 뿐만 아니라 용서를 확증해 주는 것이다. 이전의 그의 어리석음을 모두 용서하고 꾸짖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표시였다.
② 불쌍한 탕자는 아버지께 겸손한 참회를 하였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21절). 탕자가 회개를 보여 주기 전에 아버지가 보여 주신 자비가 훌륭한 것처럼 아버지가 그에게 많은 자비를 보여 준 후에 나타난 탕자의 회개도 칭찬할 만한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가 용서를 확증해 주는 입맞춤을 하자 '아버지여 내가 죄를 얻었나이다'고 말하였다. 죄를 용서받은 자들도 마음 속에 자기 죄에 대한 진지한 통회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려는 것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일을 더욱 어려워하여야 한다.
③ 이 친절한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놀라운 준비를 하였다.
탕자가 말하려고 마음 먹은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19절)라는 말이 21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탕자가 그 말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 "아들아 그만 해라. 너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비록 네가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나의 사랑하는 아들로 삼겠다."이와 같이 처음부터 환대받은 탕자는 품군의 하나로 써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한 점은 여기서 꾸짖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네가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너는 결코 집에 돌아올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 같은 말이 전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실 때,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시고, 더 이상 기억지 않으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가 기대했고 기대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풍성하고 훌륭한 음식이 그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만일 그의 아버지가 그를 알아 보고 부엌으로 가게 해서 종들과 식사를 해게 했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만족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비에 의지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이 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주신다. 탕자는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용납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소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두려워했던 것보다는 그에게 훨씬 더 잘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바랐던 것보다도 훨씬 잘 해 주었다.
㉠ 그는 누더기를 입고 집에 왔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옷을 입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단장까지 해주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22절). 아버지는 집에 있는 가장 낡은 옷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겉옷을 말하지 않고 가장 좋은 옷인 예복을 가져오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어느 것인지 너희는 알지. 그 예복, 가장 훌륭한 예복 말이다. 그 옷을 이리로 가져와서 그에게 입혀라. 그는 더럽고 땀으로 절은 옷을 입고 온 자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옷 입기를 부끄러워 할 것이나 그 옷을 입혀라. 그리고나서 가족의 식구로 인정한다는 표시로 가문의 권력의 상징인 반지를 그 손에 끼우라". 그는 맨발로 집에 왔으며, 아마 그의 발이 여행으로 부르텄을 것이다. 그러므로 '발에 신을 신기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첫째, 그들이 입은 옷은 그리스도의 의인데, 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새로운 성품은 바로 이 가장 좋은 옷인데 이 옷은 참 회개자만이 입을 수 있다.
둘째, '손에 가락지를 끼운 것'은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 즉 손에 가락지를 끼운 것은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여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한 것이다.
셋째, 우리의 '발에 신을 신기운 것'은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것이다(엡 6:15). 이것은 죄인들의 신앙 생활에 들어서서 얻는 기쁨과 확신을 암시한다. 마치 맨발로 행할 때보다 신을 신고 행할 때 더 즐겁고 안전한 것과 같다.
㉡ 그가 굶주려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먹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23절). 그리하여 내 아들을 우리가 가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라. 조금 전만 해도 할 수만 있으면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던 탕자에게 이것은 얼마나 큰 변화인가! 피조물에게서 헛되이 만족을 찾으려 애쓰던 자들에게 새 언약이 공급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이제 그는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고도 남는다"고 했던 자기의 말이 입증된 것을 깨달았다.
④ 그가 돌아옴으로 큰 기쁨과 즐거움이 생겼다.
살진 송아지를 가져온 것은 아들을 위한 잔치일 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한 축제로 계획되어진 것이었다. "이날은 복된 날이므로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는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한 것은 그 영혼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며, 잃은 것으로 여긴 그 어떤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크고 놀랍고 행복한 변화이다. 그것은 봄이 돌아올 때 지면 위에 일어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변화이다. 죄인의 회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큰 기쁨이며, 그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도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다. 하늘에서 하면 땅에서도 해야 한다. 기쁨을 시작하신 분은 아버지였다. 또한 남은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신 분은 아버지였다. 또한 남은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도록 부추긴 자도 아버지시다. 그 가족들은 주인의 권위에 순응하여 즐거워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와 종들은 그가 기뻐하는 일에 함께 기뻐해야 한다.
4) 여기에 맏아들의 불평과 시기가 나타났다.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 사건을 악화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의 특권이 여전히 그들에게 있음을 인정하려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저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을 꾸짖었을 때 오히려 부드럽게 그들에게 권유하였으며, 불쌍한 세리들에 대해 그들이 좋은 감정을 갖도록 진정시켰다. 그러나 본문의 맏아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선하고, 절대 그릇된 길로 가지 아니했으며, 비교적 회개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라고 한 말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2) 이제 맏아들에 관해 살펴 보자.
1) 그는 자기 동생을 맞아들이는 일에 얼마나 바보스럽게 화를 내고 불쾌해 했는가!
동생이 집에 왔을 때 그는 멀리 들에 나가 있었고 그가 집에 돌아 왔을 때는 환희의 잔치가 시작되었던 것같다. 그는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25절), '이 무슨 일인가'(26절) 물었다. 이어 그는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환영하는 잔치를 베풀었으며, 그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옴을 인하여 매우 기뻐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27절). 아버지는 아들을, 몸에 있어서 온전할 뿐만 아니라 회개한 자, 즉 자기의 못된 성품을 고치고 바른 정신으로 돌아온 자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무사히 영접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맏아들을 극도로 성나게 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28절). 왜냐하면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동생을 못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흔히 범하고 있는 실수라는 것을 보여 준다.
① 사람들이 가족 사이에서 이런 경우가 나타난다. 항상 자신의 부모들께 위안이 되어온 사람들은 부모의 총애를 독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매섭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② 하나님의 가족에서도 이런 경우가 나타난다. 흔히 비교적 흠없는 사람들이 명백히 회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데 인색하다. 우리는 본문에서 맏아들로부터 그러한 말을 볼 수 있다(29,30절).
첫째, 그는 자신과 덕과 순종을 자랑했다.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절). 자기 이웃보다 더 나은 사람들은 더 나은 사실을 자랑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이 맏아들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다"고 말한 것은 사실을 과장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그렇게 완강하지 말았어야 옳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큰 죄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겸손히 큰 감사를 드리되 교만하게 어떤 자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그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 불평했다.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 그는 지금 기분이 상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러한 불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만일 그가 언제라도 그러한 것을 요청했다면 첫 마디에 그것을 받았을 것이다. 살진 송아지를 잡은 사실이 그가 이같이 역정을 내게 된 이유라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평상시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을 때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화가 나 있을 때는 하기 쉽다. 그는 여러 번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지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에 비교할 때 하찮은 사랑의 표시에 불과한 염소 새끼같은 것도 그에게 준 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인을 나쁘게 생각하고 그의 은혜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생각하신 은혜에 비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맏아들은 밖에서 자기 친구들과 즐기기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를 갖기 원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살진 송아지가 밖에 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집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자기 동생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은 그들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그는 자기 동생에 대해 매우 기분이 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회개하고 개심한 사실에 대해 매우 선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들처럼 깨끗한 평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멸시하는 잘못을 범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정신이다. 이제 그러한 실례를 살펴 보자.
㉠ 그는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과 한 집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그 집이 자기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자기 집인 것처럼 말이다. 비록 우리가 죄인들과 관계를 가짐으로 물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피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회개한 죄인의 무리를 피해서는 안된다.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선한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인 것을 보고 나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만일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와의 사귐 가운데로 참여케 하신 자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된다.
㉡ 그는 아우를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 아버지에게 퉁명스럽고 경솔하기 짝이 없는 말로 '이 아들'이라고 하였다. 우리와 관계있는 자들에게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자격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형제"라고 부르고, 순결한 자도 회개한 자에게 그렇게 불러야 한다.
㉢ 그는 자기 동생의 잘못을 더 무겁게 하여, 가장 악한 자로 몰아 부쳤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30절). 그는 아주 바보스럽게 자신의 몫을 낭비해 버렸다(창기와 함께 써 버렸는지 아닌지는 앞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단지 맏아들의 질투와 악의에 찬 말일 것이다). 그러나 동생이 아버지의 전 재산을 먹어버렸다는 말은 거짓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튼 소유지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가 모든 것을 가장 나쁘게 말하려고 하고 , 완전히 먹칠하려는 경향이 있는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라 아니며,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보여 준 친절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절). 회개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시기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현재 가장 악한 죄인에게 일반 섭리의 은총이 있다고 하여 시기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과거에 가장 죄인이었던 자들에게 회개를 통하여 주시는 언약의 사랑의 선물을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어떤 특별한 은총을 시기해서는 안된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은 탕자이었으나, 회심한 후에 다른 사도들 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받았었다. 맏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도들은 그가 받은 환상이나 계시들을 시기하지 않고, 훨씬 크게 쓰임받는 것을 투기하지도 않고 다만 바울 안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이 맏아들과 반대되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2) 맏아들이 이와 같이 질투함으로 불쾌해 있을 때, 그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아버지는 얼마나 호의를 갖고 친절하였는가를 이제 살펴 보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앞서 방랑한 죄인이 회개하였을 때 용서하여 준 것처럼 질투하는 성도들을 용서하시는 그의 자비하심과 온유하심 속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많은 결점들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흥분하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참으셨다.
① 맏아들이 들어오려 하지 않자, 그의 아버지는 나가서 그가 들어오기를 원하여 좋은 말과 부드러운 말로 그에게 간청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즉 "그가 들어오지 않으려 하면 밖에 그대로 두어라. 이것은 내 집이 아니냐? 따라서 내가 기뻐하는 일을 내 것이 아니냐? 살진 송아지는 내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내 집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이냐?"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동생을 마중 나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맏아들을 마중 나가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괴팍스럽게 고집세고 비위를 거스리는 사람들에 대해 그는 얼마나 놀라울 만큼 부드럽고 매력적이셨는가. 보다 열등한 자들이 실수하고 감정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도 보다 성숙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온유하고 너그러이 대할 것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경우에 처하여 있을 때라도 아버지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더 분노하도록 노엽게 하지 말며, 주인들은 공갈을 그치라. 그리고 모두에게 온유함을 보여 주라.
② 아버지가 동생에게 베푼 친절한 환대는 형에 대한 어떤 비방이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님을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확신시켰다(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니, 네 동생을 맞아들인 것은 너를 거절한 것이 아니며, 또한 네게 돌아갈 몫이 현저히 감소되는 것도 아니다. 파기할 수 없는 권리에 의해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즉 아버지가 맏아들이 그리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었다 할지라도 그는 계속해서 아버지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친구들과 즐기는 것보다 하늘에서 우리 아버지와 복락을 누리는 것이 더욱 나은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은 그들의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니'(롬 8:17).
둘째,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다고 해서 우리의 몫이 절대로 적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참 신자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신자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람들이 참 신자가 된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또한 그들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몫이 적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태양의 빛과 온기를 최대한 누린다고 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③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기뻐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신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절). 그는 "가족이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말함으로 자기의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사에 권위를 주장하고, 그것에 호소하는 것은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좋지 않다. 그것은 다만 권위를 값싸고 천하게 만들 뿐이다. 아버지가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주는 것이 더 좋다. 즉 충성된 자식이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있었던 것 이상으로 탕자가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가 가족에게 더 큰 축복이기는 하지만 후자는 더욱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어느 가정이라도 여러 아이들이 잘 자라고 건강할 때보다 죽은 한 아이가 다시 살아났을 때 훨씬 더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어떤 응답을 보였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탕자인 동생에게 친밀하게 화해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 네 동생'이라고 하여 그가 바로 그의 동생됨을 상기시켜 준다. 선한 사람은 비록 그가 잘 참도록 항상 자신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냉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탕자의 귀환 / 에스파냐의 화가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의 작품.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8)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하니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해이다. 복음 안에서 이 양자를 밝히신 하나님의 계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의무, 즉 자선을 베풀고 선행을 하는 일에 참여시키고 고무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수 많은 은혜의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선하게 이용할까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있는 태도이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세상적인 사람들이 가장 순간적인 이익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투자하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와 영원한 복지를 도모하기 위하여 경건과 자선의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우리의 재산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1. 청지기의 비유(1-8)
이 비유 자체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의 청지기로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 청지기의 불성실 :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으로 인하여 그의 주인에게 고소당하였다(1절). 우리는 모두 동일한 고소를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셔서 이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진보를 우리는 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데 힘써야 한다.
(2) 청지기직의 박탈 :
그의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라고 말하였다(2절). 주인은 청지기에게 실망하게 되어 유감인 것을 말한다. 그 사실은 주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고 해결책이 없었으므로, 책임을 지고 잠시 후 물러나게 되었다(2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얼마 후에 청지기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죽음이 찾아와 우리를 청지기직에서 쫓아내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2) 죽을 때에 우리가 청지기직에서 박탈당하는 것은 틀림없으며, 또한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재산을 낭비하였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청지기직을 벗게 될 그 날에 우리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드려야 한다.
(3) 그 후 갖게 된 지혜 :
그러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3절). 그는 벌써부터 이점을 생각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다.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것인가?
1) 그는 노동으로 생계를 구한다는 데 대해서는 자기에게 그럴 만한 근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그러나 땅을 파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은 그의 게으름이다.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뜻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땅을 팔 힘이 없다는 것은 육체적인 능력 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인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따을 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땅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2) 그가 구걸하여 생계를 구한다는 데 대해서 그럴 만한 겸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말은 그가 앞에서 자신의 게으름을 보여 준 것처럼 교만에서 나온 말이다. 이 청지기는 구걸에서 얻게 될 수치보다 자기 주인을 속임으로 말미암은 수치가 더 큰 이유이었다.
3)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친구로 삼기로 결심한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가 내 주인의 채무자들을 알고 있고, 여러 번 친하게 대해 왔었다. 이제 한번 더 도움을 베풀어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반길 수 있도록 하자. 내가 혼자서 살아나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에게 숙소를 정하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신세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6절). 이와 같이 해서 그는 그 빚을 반으로 탕감하였다. "우리가 발각되거나 이심받지 않도록 빨리 앉아 고쳐 써라." 그는 자기 주인에게 밀 백석을 빚진 다른 사람을 불러 그에게 십으로 고쳐 쓰라고 했다(7절). 본문에서 우리의 세속적인 재산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보라.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그러하다. 그들은 그 재산에 관한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맡은 이들에게 주인인 자기도 속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신뢰하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배반당하는가를 보라. 이 청지기는 부정 거래한 것이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 잘못을 고치는 일은 드물다.
(4) 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칭찬 :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 그의 주인, 즉 그 종의 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이 자신을 위하여 기발한 생각과 계책을 세운 것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이 구절의 후반부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 전체가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청지기가 자기 주인을 속였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지혜롭게 했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에서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하여서도 잘 하였고, 채무자들과는 바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채무자들에게 빡빡한 거래를 했었으므로 저들은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떠나는 마당에서 그는 이제 공정과 자비를 모두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 주인을 위해서만 일하였다. 그러나 이제 자기 주인의 신을 잃어 버리자 채무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그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 청지기의 선견지명을 생각할 때, 내세를 위해 우리는 지각이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즉 빛의 아들들이 그들의 영혼과 영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곳 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세상적인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 데 있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1) 이 세상의 일에 관한 세속적인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는 우리 영혼의 일을 할 때 배울 필요가 있다. 가장 필요한 우선적인 일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착하여 이용한다는 원리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적인 일에 지혜롭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빛의 자녀들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참으로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있어서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 줄 아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서 살 것처럼, 그리고 이 후에는 다른 세계가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빛의 자녀로서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세계를 보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준비하거나 최선의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다른 세계에 최선의 애정을 쏟지도 아니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2. 비유의 적용과 결론(9-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즉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절). 이 비유의 직접적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즉 이 말은 "이 세상에 비록 얼마밖에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적은 것으로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권면하시는 것은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이 후에 자기 돈의 이익을 배당 받을 수 있도록 돈을 관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 후에 더 나은 유익을 얻을 목적으로 소망을 갖고 그들의 자본을 투자하듯이 우리도 다른 세상에서 장차 그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돈을 이용하는 법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주의 재산이지만, 우리 주의 채무자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재산을 사용한다면, 우리 주님께 손해를 끼치기는커녕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방편이자 주님께 대한 의무를 행한 것이 될 것이다.
1) 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 또는 일시적인 재물이다. 부란 사라져가는 것이므로 그것에 기대를 거는 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2) 비록 이 불의의 재물이 행복을 위하여 맡겨진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무리가 그 재물에서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임종할 때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틀림없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상인이 파산에 이르게 될 때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조만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틀림없다. 즉 죽음은 상점을 폐쇄시키고 재산을 몰수해 버릴 것이다.
4) 우리가 쇠약하여 죽게 될 때 하늘에 있는 영원한 거처로 영접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먼저 가셔서 그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시다. 디모데전서 6:17-19을 보라.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그는 여러 말씀으로 이 권고를 더욱 강조하신다.
1)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을 옳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선물을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섭리의 선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불성실할 경우에 우리는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은혜를 상실한 자로 정확히 평가될 것이다(10-14절). 이 세상의 부는 보다 적은 반면에,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만일 우리가 적은 것에 불성실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있어서도 불성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10절). 자기 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고상하고 가치있는 지혜와 자비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할 것이나 이 세상의 부한 달란트를 묻어 두는 사람은 영적인 부 다섯 달란트를 절대로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부는 불의의 재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빨리 사라진다. 만일 우리가 그 재물을 이용하려 한다면 서둘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참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11절). 진실로 부유한 사람이란 믿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유한 사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향해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만일 다른 부가 우리에게 추가되어 진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부를 더 확고히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 큰 영적인 은혜를 받을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 이 세상의 부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여야 하며, 곧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원한 부는 우리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의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고, 하늘 나라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것들로 우리를 부요케 하실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2)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에게 유용한 세상적인 우리의 모든 소유를 그를 섬기는 일에 드릴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경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와 연합하게 되면 그만큼 더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과 그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이용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앞에 분명해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들의 관심이 나누어지므로 그들은 절대로 혼합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 보자.
1) 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 그의 말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부정할 수 없었지만 비웃었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탐욕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주로 범하는 죄이었다.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이나 헌신적으로 많은 실천을 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세상을 사랑한 것 때문에 멸망하였다. 이 탐욕적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욕망, 그들의 '들릴라', 즉 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코웃음쳤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극도의 경멸과 모멸의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이 세상의 견해와 방법에 반대가 되기 때문에 비웃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그것을 경멸하는 것은 예사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롱까지도 참으셨다. 그는 보통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으므로 야유를 받고 조롱을 받으셨다. 이 사실로 충성스러운 주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경멸당하는 것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 비웃음을 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선 수치가 아니라 비웃음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예수께서는 그들이 경건의 모양과 냄새로써 그들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들을 단호히 꾸짖으셨다(15절).
① 가장한 외모 :
첫째,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이 책임져야 할 어떤 잘못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너희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과제로 삼는 자들이며, 세상에 자신을 의로운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너희는 이런 일로 유명하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특별 취급하여 죄를 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선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② 추악한 내면 :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의 모습이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들 앞에 스스로 옳다 하는 것과 우리의 악한 것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충분히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악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는 사실을 숙지할 때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 속에 비천한 인격과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을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평가에 부응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람들 사이에 귀히 여김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미워하시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신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옳다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경우도 있다(고후 10:18).
3) 예수께서는 이 욕심 많고 자만에 가득찬 바리새인들보다 복음에 의해 훨씬 더 감화받을 수 있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구원이 유대인의 것이었을 때의 유대 조직과는 달리 오직 개개인을 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르치지 않도록 구원을 얻어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를 경멸한 것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였다. 이는 그들의 생각에 율법과 선지자에게 있었던 부에 대한 많은 약속과, 다른 현세적인 재물들에 대한 약속이 없었던 때문일까?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 율법과 선지자의 때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기 시작한 이제부터는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그리고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 복음이 전파된 이상 눈이 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한다." 하늘나라로 가려는 자들은 고통을 받아야 하며, 세상과 거스려 싸워야 하며, 정반대의 길로 가는 무리들을 밀어내야만 한다.
4)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효로 만들려는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정되고 재가되어진 것이다. 이 율법이 명하는 의무는 여전히 지켜야 할 본분이다. 그것이 금하는 죄는 여전히 죄로서 존재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에서 완전하여지며, 그 그림자는 복음의 색깔로 칠해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에서 인화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큰 부정을 막기 위하여 묵인한 몇 가지 사항들이 있었다. 복음은 그러한 허용을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마태복음 5:32, 19:9에서 이미 상고한 바 있는 이혼의 사례에서처럼(18절), 율법을 거스리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의 부패한 탐욕과 정열의 지독한 그 근원을 쳐서, 그것들을 죽이며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욕망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완고해지기 때문에 그들이 탐욕에 빠질 정도로 허용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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