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을 대비한 회개의 촉구(눅 13:1-17
[ 성경묵상 ]
[ 질문 ] 예수님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먼저 보았다면, 회당장은 무얼 먼저 보았는가?(14절) 안식을 지키는 계명, 즉 율법 준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보다 남을 정죄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3:1-9은 시대의 징조 및 진리를 분별하여 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전 문단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내용으로, 당시에 발생하였던 두 사건 곧 유대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 및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과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를 거부하였을 때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13:10-17은 장면이 바뀌어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곱추병을 앓은 여인을 치유하신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안식일 논쟁이 보도되고 있다.(옥스포드 주석)
13장 요약 ; 죄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치 않는 모든 죄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뿐이다(1-5절). 한편, 주님께서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안식일을 택하여 병자를 치유하신 것은 이제 그들과의 결전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까지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13:1-5 ; 당시 바리새인들은 사고와 불행으로 죽은 사람은 자신보다 더 죄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치 않으면 누구나 종말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3:6-9 ;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 비유의 초점은 심판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총 기간을 놓치지 말고 회개하라는 내용에 있다(고후 6:2).
13:10-17 ; 이것은 자기 백성들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출하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능력을 예시해 주는 사건이다.(아가페 큰글성경)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과 뒤섞이게 하였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 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는 표현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주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 났소"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인은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으므로,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마시오."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 복있는 사람, 2018년 1,2월호 ]
Ⅰ. 갈릴리인의 죽음과 회개에의 부르심 13:1-5
(1) 최근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소식이 그리스도에게 고해졌다(1절).
1) 이것은 실로 비통한 소식이었다.
이 사실은 이곳에 간단하게 언급되었을 뿐 그 당시의 어떠한 역사 기록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구역이었으므로, 빌라도에 의하여 저질러진 이 불법 살인으로 인해 누가복음 23:12에서 볼 수 있는 빌라도와 헤롯사이의 분쟁이 일어났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살해된 갈릴리인들의 수는 얼마인지 기록이 없고 다만 '어떤'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 상황은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것이었다. 비록 그들은 빌라도의 학살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율법은 그들에게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이나 제사의 성스러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인간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의 광포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성역이고 안식처였던 제단이 이제 함정이 되고 위험과 살육의 장소로 변하였다.
2) 왜 지금 "이 시각에" 그 이야기가 우리 주 예수께 보고되었는가.
아마도 단순히 그가 전에 이 사건을 듣지 못했으며 그들이 애통해하는 일이었으므로 그 역시 애통해 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적당한 시간에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성에 관해 앞장 끝부분에서 말씀하셨던 것의 한 증거로서 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선생님 갑자기 '관속에 넘겨져' 전혀 예기치 못한 죽임을 당한 산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준비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봄으로 우리 자신이 힘을 얻게 됨은 참으로 유익하다. 혹은 그 자신이 갈릴리인이고 예언자인고로 그를 충동시켜, 이 갈릴리인들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보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빌라도가 앞서 그들 갈릴리인들에게 했듯이 그리스도를 해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가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누그러진 빌라도가 더 이상 진노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잠깐동안 그 길에서 피하시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의에 차서 빗대어 이것을 그에게 말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살해된 갈릴리인들은 남모르게 죄를 지은 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혹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빌라도가 그들을 그처럼 잔인하게 죽이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는 대신 뚜렷한 증거 없이 행악자라고 낙인찍어 버렸던 것이다. 갈릴리인들의 이러한 운명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본이었다.
(2) 이 보고를 들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2-5절).
1) 그는 이 사건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또 다른 사건을 말씀하셨다.
당시는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사람이 치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사건 역시 슬픈 것으로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이 침울한 얘기를 듣는다. 안전을 위해 세운 망대가 때로는 인간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사건들을 악용하지 말 것을, 그리하여 마치 그들이 받는 큰 고통으로 보아 그들을 흉악한 죄를 지은 자들로 단정하여 그러한 큰 고통받는 저들을 비난할 기회로 삼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2,3절). 아마도 그리스도께 갈릴리인들의 이야기를 한 자들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이처럼 갈릴리인들을 비난할 그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을 기뻐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아닌 결말을 가져온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응수하셨던 것이다. "이제 너희는 실로암 연못가에서 치료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임을 당한 그들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빚진 자들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받는 고난으로 그 사람들의 죄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없어질 가치없는 찌꺼기나 쓰레기로서가 아니라 불에 단련되어지는 정금으로서 용광로에 던지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슬픔을 더하지 않도록, 이웃보다 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심판할 능력이 있다면 바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것으로 충분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을 소유한 박해자들과 성공한 자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반면 박해받는 자들을 흉악한 죄인들로 단정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바로 그 비난으로 우리 자신도 비난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3) 이 이야기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각성의 말씀을 더하여 회개에의 부름을 선포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3-5절).
①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그들이 당했던 만큼 당연히 멸망하여야함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도 죄인일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큰 죄인으로 그들이 고난받은 것 못지 않게 회개해야 할 큰 죄를 지은 자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누그러뜨릴 수 있어야 한다.
②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기를 힘써 잘못했던 모든 것을 뉘우치고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큰 소리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③ 이 회개만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며 가장 확실한 길이다.
④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않으면 우리 전에 당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멸망당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죽은 것처럼 우리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바로 그 예수께서 또한 우리에게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명하시고 계시다. 이처럼 그는 우리 앞에 죽음과 생명, 선과 악을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요구하신다.
Ⅱ.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13:6-9
이 비유는 바로 앞서 하신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행해졌다.
(1) 이 비유는 본래 유대 민족과 백성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소유로 택하시어 자기 백성으로 삼아 곁에 가까이 두셨으며 그들로부터 의무와 순종이라는 합당한 보답을 기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들의 이러한 의무를 다하는 대신 오히려 책망을 들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들을 포기하시려고 작정하셨으나 그리스도의 중재로 인해 그들에게 더 크신 자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시간적 여유를 은혜롭게 베푸셨다. 말하자면 또 다른 유예기간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 가운데 자신의 사도들을 보내어 회개하도록 권고하시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시려고 그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회개하고 돌아와 열매를 맺었으며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다수는 계속해서 뉘우치지 않고 열매맺지 못한고로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만이 있었던 것이다.
(2) 그러나 이 비유는 다음과 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즉 은혜의 덕을 누리는 모든 자들을 깨우쳐 그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마음의 온유함과 삶의 방향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요구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1) 이 무화과 나무는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보다 비옥한 땅인, 그리고 보통 길가에서 자라는 다른 무화과 나무들(마 21:19)과는 달리 알뜰한 보살핌을 받는 포도원의 심겨진 것이었다(6절). 이 무화과 나무는 어떤 '한 사람'의 소유였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포도원'이다 우리는 이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들인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2) 무화과 나무로부터 주인의 기대는 어떠했나.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으로, 열매를 구하려 그 자신의 백성에게 직접 오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포도원에 심겨진 그들로부터 '열매'를 요구하시며 기대하고 계시다. "주여, 주여"라고 울부짖는 잎들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처음이 좋고 장래 유망해 보이는 꽃들로도 안된다. 열매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복음과 빛과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3) 주인의 기대에 대한 실망은 어떠했나.
얻지 못한지라. 단 한 개도 없었다. 복음의 특권을 누리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전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못함을 생각할 때 참으로 슬픈 일이다.
① 주인은 여기서 포도원 지기에게 열매 없음을 책망하고 있다. "열매를 구하러 내가 왔지만 그러나 실망하고 말았다. 즉 하나도 얻지 못했다."
② 주인은 두가지 이유로 열매 없음을 더욱 책망하고 있다.
첫째,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그것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열매를 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열매 맺기만을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가 그처럼 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매년 '삼년'을 급하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았지만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삼년동안 우리를 찾아 오시어 열매를 구하셨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둘째,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손해를 끼쳤다. 즉 그것은 '땅만 버렸던' 것이다(7절). 그것은 과실을 맺는 나무가 들어설 자리를 차지하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나무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었다. 선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나쁜 행실로 영향을 끼쳐 해를 입힌다. 그러한 나무가 높고 크며 넓게 퍼져 있을수록 그리고 그 나무의 수명이 길수록 손해는 커지며 땅은 더욱 버려지는 것이다.
4) 그 무화과 나무에 대한 판결은 내려졌다. 찍어버리라.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가 기대할 것은 찍혀버림을 당하는 것밖에는 없다.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는 마땅한 바로, 아무 목적 없이 포도원 안에 자리해야할 이유가 없다.
5) 이에 대해 과원지기가 중재하고 나섰다.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중보자이시다. 목회자들도 중보자들이다. 우리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① 그가 기도한 것은 집행유예이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8절). 이것은 "주인이여 결코 찍어버려서는 안됩니다"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인이여, 지금 찍어버리지 마소서"라는 기도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는 잠시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아직 회개의 은총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 회개할 여유를 주는 것이 자비롭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된 우리가 즉시 찍혀버리우지 않는 것은 위대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덕택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들을 다시 얼마 동안 유예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주인이여 그들을 그대로 두소서. 조금만 더 그들을 참으시고 그들이 은혜를 입기까지 기다리소서." 이와같이 우리는 진노를 돌이키도록 몸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자비의 집행유예도 잠간 뿐이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가 조금 더 참으실 것과, 그가 항상 참으시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를 위하여 다른 사람이 기도해줌으로 유예는 가능할지 모르나 용서만은 얻을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의 믿음과 회개 그리고 기도로써만 용서함 받을 수 있는 것이다.
②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유예를 개선시키기 위해 무엇을 약속하셨나.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간단히 말해 우리의 기도는 항상 우리의 수고한 바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처럼 최선을 다하겠다는 겸허한 결심으로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며 또한 우리가 간구한 자비를 스스로 정당하게 받을 가치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 된다. 포도원의 과원지기는 자기의 본분에 충실한 것을 약속하였고 이점에서 목회자들 또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성해야 할 것을 배운다. 그는 나무 주위를 파고 그곳에 거름을 줄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묵힌 땅을 파서 일으키는 율법의 엄중함에 의해 각성되어져야 하며 그리고나서 나무에 거름을 주듯이 따뜻하게 하고 기름지게 감싸주는 복음의 약속들에 의해 힘을 얻어야 한다. 이 두가지 방법은 모두 시도되어야 한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준비이며 둘로써 모두 충분하다.
③ 유예 후에 남겨진 조건은 무엇인가.
"일년만 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보도록 하지요(9절)." '이어니와'라는 단어는 원본에는 없으나 그 표현은 뜻밖이다. '만일 실과가 열면.' 이 말은 주인과 과원지기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열매 맺지 못하던 신앙인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열매 없음을 회개하고 치유받아 열매를 맺게 된다면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고 목회자들의 손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하늘에서는 즐거워할 것이고 땅도 더 이상 버려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옥토가 되어 포도원은 아름다워지고 좋은 나무들로 가득차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나무 그 자신으로도 참으로 잘 된 일이다. 그 나무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히 6:7) 될 것이며 깨끗해져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비록 하나님께서는 오래 기다리시면 기다릴수록 그들이 당할 멸망도 더욱 클 것이다. '이 후에' 찍혀버림을 당하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일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직접 찍어버린다 하실지라도 그일 자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다. 지금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도 그들이 끝까지 열매를 맺지 못해 결국 찍혀버림을 당할 그때에는 오히려 그들의 찍힘을 보고 만족해 할 것이다.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묵묵히 따를 것이다.
Ⅲ. 안식일에 한 여자을 고치심 13:10-17
1. 한 여인을 고치심(10-1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있던 한 여인을 치료하시는 기적을 베푸셨다. 그는 그의 안식일을 회당에서 보내고 계셨다(10절). 우리도 이와같이 하도록 명심해야 하며 집에서 성경을 읽음으로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계시면서 거기서 가르치셨다. 가르치시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바를 확증시키기 위해 이제 하나의 이적, 자비 이적을 행하셨다.
(1) 이 자비의 대상은 회당 안에 있던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던' 한 여인이었다(11절).
그 여인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할'만큼 병약했으며 따라서 바로 설 수가 없었다. 비록 그 여인은 이런 질병에 걸려 있었지만 안식일마다 회당에 갔다. 육체적인 질병조차도 그렇게 심하지 않는 한 안식일에 공중 예배를 빠지게 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2) 치유를 구하지도 않은 자에게 이처럼 치유해 주심은 항상 인간들의 소망에 앞서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를 잘 나타내준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20절). 그녀가 호소하기 전에 그가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 여인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리고 영혼에 유익을 얻기 위해 그에게 갔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놓임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에게는 이와같이 그들의 육체에 대해서도 진정한 보살핌이 따르게 된다.
(3) 완전하고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그 치유는 그의 전능하신 권세를 말해준다.
그는 '안수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하셨다(13절). 비록 그녀는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셔서 그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실 수 있었다. 꼬부라져 있던 여인이 곧 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치유는 죄인들의 회개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사역을 나타내고 있다 죄를 씻음받지 못한 마음은 이러한 사단의 영의 지배를 받아 왜곡된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하늘을 향해 전혀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들이다. 영혼의 구부러짐은 전혀 어긋난 길을 낳는다. 이처럼 뒤틀린 영혼은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부르시고 치유의 말씀을 들려주시어 그들이 그들의 병에서 놓임을 얻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바르게 하신다. 인간의 죄로 구부러졌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바르게 할 수 있다. 또한 선한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위안으로, 그의 사역을 말해주고 있다. 대단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랫동안 노예의 영인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양자의 영으로 이러한 질병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4) 이 치유의 효과는 그녀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나타났다.
그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절). 구부러진 영혼들이 바르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그것을 드러낼 것이다.
2. 회당장의 공격(14)
그는 이것을 보고 '분내었다.' 그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었다(14절). 그는 그리스도를 비난하면서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 일이 일상적인 일이듯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 엿새 중 어느 날이라도 와서 치료받으라고 하였다. 그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치유가 값싸고 평범한 것으로 비춰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를 풀어주셨는데 그가 스스로 묶을 수 있겠는가? 히브리어에서는 경건함과 자비로움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한 단어에 같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자비와 자선 행위가 어느 의미에서는 경건한 일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와 같은 일은 안식일에 매우 알맞는 일인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 정당성을 변호하심(15,16)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15절).
우리는 관대하게 심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회당장이 그와 그의 복음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안식일에의 거짓 열심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이러한 속마음을 지적하실 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와 논쟁하여 주셨다.
(1)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인정되지 않으나 유대인들 사이에 보통 행하고 있는 일, 즉 안식일에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사실에 호소하고 계시다. 우리 안에 가두어 두었던 가축들을 안식일에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고는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짓일 것이다. 만일 그날이 안식일이라고해서 가축을 굶겨야 한다면, 가축을 쉬도록 가두어 두는 것이 차라리 일을 시키는 것보다 더욱 못할 짓일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실례를 바로 지금의 상황에 적용시키고 계시다(16절). "소나 나귀같은 짐승에게도 안식일에 자비를 베풀어야 하거늘, 하물며 이 여인을 훨씬 더 큰 고통에서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로서 너희의 누이라. 그러한 딸에게 너희가 소나 나귀에게도 당연히 베푸는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여인은 사단에 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그 불쌍한 여인에게 자비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여인은 이와같이 비참한 상태에 무려 십 팔년이나 매여 있었다. 이제 그녀를 풀어 줄 기회가 왔는 데 다시 하루라도 그 일을 연기시키겠는가. 십 팔년간의 고통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너희는 생각지 않는가?"
4. 무리의 서로 다른 반응(17)
(1) 이 말씀은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적의를 당황하게 했는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17절).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회개로 인함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2) 이 말씀은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얼마나 굳게 하렸는가.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그의 적들의 부끄러움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기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므로 우리는 그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하나님 나라(눅 13:18-21)
[ 성경묵상 ]
13:18-21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문맥적으로 후기 유대 사역을 보도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안식일 논쟁과 겨자씨 및 누룩의 비유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종교 지도자 세력의 반대와 배척이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권력의 반대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확장되고 성장해 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옥스포드 주석)
[ 질문 ]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일까?(18-21절)
13:18-21 ;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활동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이 보기에 미약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도록 성장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상징하고, 누룩의 비유는 내적 성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아가페 큰글성경).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내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가르치시면서 각 성읍과 마을을 지나가셨다.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못 볼 것이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 ]
Ⅳ. 하나님 나라의 비유 13:18-22
(1)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13:31-34에서 보았던 두 가지 비유 안에 복음이 점진적으로 진척되어 가는 것이 예언되어져 있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보이기 위해 시도하신다(18절).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20절). 그 나라는 너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리라. 너희는 그 나라가 굉장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불시에 완성될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마치…겨자씨 한 일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즉 아주 작은 것으로 보잘 것 없고 거의 기대할 만한 것이 없으나 그것이 뿌려졌을 때 큰 나무로 자라리라(19절).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시작이 너무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아마도 복음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그 시작은 보잘 것 없이 작으나 나중은 엄청나게 큰 것이 되어, 많은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증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려 하셨다. "너희는 그나라가 외형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나 그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어떠한 힘이나 격력함없이 임할 것이다(21절)." 누룩 조금이 가루 덩어리 전부를 부풀게 하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기하게도 그 향기를 전 인루에 퍼뜨릴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하면 그것이 즉 복음이 기적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점점 '전부 부풀게' 되리라.
(2)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22절). 여기서 우리는 그 길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겨울에 있을 자신의 희생제를 치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유대와 베레아 사역 전반부(누가복음 13:22-14:35)
13:18-14:35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유대 및 베레아 사역에 관한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13:22-17:10까지 이어지는 베레아(Perea) 사역에 관한 기사의 전반부이다.
사실 예수님의 유대 및 베레아 지역 사역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끝마치시기 전 약 6개월 동안에 행해진 것이라는 것만이 비교적 확실할 뿐, 정확하게 지역별로 구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9:51-19:27 부분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신 것을 7차례나(9:51 ; 13:22,33 : 17:11 ; 18:31 ; 19:1.11)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예수께서 유대와 베레아 사역을 수행하시는 도중에도 자신의 궁극적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늘 염두에 두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곧장 가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이 기간 동안 유대 및 베레아의 전역을 순회(巡廻)하시며 사역을 수행하고 계셨으며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다가도(눅 10:38 ; 요 11:1)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시곤 했다.
아무튼 누가는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과정을 보도함에 있어서, 공관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발자취를 가장 자세하게 추적하면서도, 유대 지역의 정확한 지리적 배경을 제공하는 데 역점을 두기보다는 예수께서 이 기간 동안 베푸신 교훈이나 비유들(Instructions and Parables)을 제시하는 데 보다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본서가 팔레스틴 밖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서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동 과정을 지역별로 정확히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첫 문단과 시간적으로 곧바로 연결된(13:31) 두번째 문단인 13:31-35에서 헤롯이 예수 살해 음모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본 문단에서부터 예수께서 베레아 지역을 다니시고 있었다는 것은 추정할 수 았다. 왜냐하면 바라새인들이 헤롯(Herod Antipas)이 예수를 살해할 음모를 예수께 알리며 그 곳을 떠나도록 권한 것은 예수께서 계시던 곳이 헤롯 관할하에 있던 베레아 지역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단별로 내용을 먼저 간략하게 개괄한 다음, 13:22-14:35까지의 내용이 주제면에서 어떤 연속성(Continuity)을 가지고 전개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 문단인 13:22-30에서는 구원얻을 자의 많고 적음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을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는 들어가기를 힘써도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시사하신다. 또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고 오히려 동서남북으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13:31-35의 짧은 문단에서는 갈릴라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의 예수 살해 위협 및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헤롯의 살해 위협을 전해들은 예수께서는 헤롯을 ‘저 여우(that fox)'라고 지칭하시며 에루살렘에서 완성될 자신의 사역이 누구에 의해서도 방해되지 않을 것임을 단호히 선언하고 계신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반대와 배척이 헤롯에게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역시 있을 것을 예견하시고, 메시야를 배척 하는 예루살렘 백성 및 전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무지와 완악함을 한탄하시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다.
이어 14:1-24의 세 문단의 내용은 한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 식탁(食卓)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먼저 14:1-6에서 예수께서는 한 고창병 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인본주의적 전통과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의 그릇된 안식일관을 시정하여 주신다.
14:7-14은 식사에 참석한 자들 및 초대한 주인을 향하여 겸손과 자비의 실천을 교훈하시는 내용이다. 식사에 초대받은 자들이 서로 자기를 높이려고 상좌(上座)를 택하여 앉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높아지리라는 교훈을 들려주신다. 또한 식사에 손님을 청한 주인을 향하여서는 다시 갚을 수 있는 형제 친척이나 부한 이웃들보다는,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와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는 것이 하늘의 상급이 있는 선한 행위임을 깨우쳐 주신다.
이어 14:15-24은 큰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어떤 자들이 참석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비유에서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이미 초청을 받은 자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잔치에 불참하자, 그들 대신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과 멀리 있는 자들을 청하여 잔치에 참석하게 한다.
이상의 문맥의 흐름들을 관찰할 때 전체적으로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Those who enter the Kingdom of God)’라고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주제를 연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의 자격에 관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먼저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고자 하여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13:22).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적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선민(選民)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결코 범상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쫓겨나고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는 것(13:29)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여기고 있던 바리새인들(14:15)을 향해, 이전에 초청되었던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하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 참석할 것을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실로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여겼던 다수 유대인들과, 스스로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자라고 여겼던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를 배척하고 죽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느꼈던 많은 이방인들과 절뚝발이, 소경, 불구자, 가난한 자들이 그 나라에 초청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멀고,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마지막 14:25-35의 문단은 다시 배경이 바뀌어 이동하시는 도중에, 예수께서 과연 어떤 자들이 자신의 진정한 제자들(Jesus’ Real Disciples)이 될 수 있는지를 교훈하시는 내용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오류를 깨는 점에서 이 부분은 위의 문맥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되는 것 역시 쉽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부모와 형제 자매와 처자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26절). 또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자도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33절).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며 제자임을 자처하였겠지만, 진정으로 제자의 길을 이해하고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실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역시 ‘좁은 문(the Narrow Door)’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 엄격한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부족함을 늘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까? 하나님 나라의 ‘좁은 문’을 인식함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게 되는 것처럼, 제자도의 엄격한 기준을 올바로 이해하는 그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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