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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눅 12:13 -59)

by 은총가득 2020. 11. 18.

부자의 어리석음, 성도의 관심 대상(눅 12:13-34)

[ 성경묵상 ]

12:13-34의 두 문단은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 유산으로 인한 형제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실 것을 요청한 사건(13,14절)에 즈음하여 주신 교훈을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교훈은 주신 대상과 내용이 각각 다르지만 그 근본 주제에 있어서는 사람이 세속적인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추구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먼저 12:15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대상으로 하여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므로 탐심을 물리칠 것을 직설적으로 교훈하시고 이어 12:16-21에서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인간이 이 세상에 가치를 두고 유한한 물질을 의존할 때 맞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지적하심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영원한 것에 두도록 촉구하신다.

다음으로 12:22-34에서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으로 먹고 입는 것과 같은 문제로 염려하는 것을 극복할 것을 교훈하신다. 사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처럼 세상의 물질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질 문제에 대한 염려를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백성들의 삶의 방식과 대조시키며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권고하신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12:22-34 ;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물질에 대한 염려를 버리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예비해 주실 것이다. 큰 것을 능히 하시는 이가 작은 일을 못하실 깨닭이 없지 않은가?[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 질문 1 ] 미래를 위해 풍성한 곡식을 저장하는 부자를 두고, 하나님은 어떻게 부르시는가?(20절)

[ 질문 2 ] 들에 핀 백합화와 이름 모를 잡초를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실은 무엇인가?(27-28절)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해서, 유업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물려 준 유산을 형이 독차지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자기 몫을 따로 떼어 받아 독립하기를 원했다. 당시에 이러한 싸움이 야기될 때는 기존법에 의거하여 '선생(랍비)'에게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우리는 이 대답에서 주께서는 세상 법에 속한 일을 무시하시거나 나라 법으로 지정한 관리의 직무를 부정하실 뜻이 없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 앞에 나와서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이 사람을 거절치 않으시고, 더욱 근본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늘의 지혜로 권고하신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삶에서 모든 일을 공의롭게 결정할 수 있는 원리를 가르쳐 준다.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소출'이란 논밭에서 생산되는 곡식 또는 그 곡식의 양을 말한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

우리가 음식을 염려하는 것은 사실 목숨을 위함이다. 그런데 주님은 일종의 언어유희를 써서, 음식을 염려하는 것이 결코 우리의 몸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고 일갈하신다. 정말로 몸을 위한다면 의복을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그의 나라를 추구하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너희가 가장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은 차려 입지 못하였다.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애쓰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이 모든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히려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들아,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는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낡아지지 아니하는’이란 표현은 다음에 이어지는 ‘다함이 없는’과 대구를 이루며 ‘주머니’는 ‘보물’과 대구를 이룬다. 한글 개역 성경에 ‘주머니’로 번역된 ‘발란티아’는 ‘돈 자루’를 뜻하는 ‘발란티온’의 복수형으로 ‘돈을 넣어 두는 자루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많은 구제가 이루어져야 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많은 구제로 만들어진 낡아지지 않는 이 ‘돈 자루들’이 바로 하늘에 있는 보물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 보물을 하늘에 두는 구체적 방법은 자기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는 앞선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부자가 물질을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이 지상의 창고에만 쌓아두는 것과 대조되는 표현이다(18,19절). 실로 구제가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치있는 일로 여겨질 뿐 아니라 하늘에 보관되는 불변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란 표현에서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이는 이 세상에서 재물은 낡아지는 주머니에 보관되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란 점을 전제한다. 반면 구제는 그 재물의 가치를 영원하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성도는 구제를 통하여 바로 이와 같은 불변하는 가치를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탐심을 물리칠 것을 교훈하심 ( 12:13-21 )

1. 어떤 사람의 청(13)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던 무리 중 한사람이 그리스도께 청을 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유업에 관한 일에 대해 그와 그 형 사이를 중재하여 주시기를 청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절). 혹 자는 그의 형이 그에게 부당하게 했기에 그가 그리스도께 이의 시정을 호소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혈육간의 당연한 공평함이나 우애 따위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형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부당함을 당한 자들에게는 찾아 갈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압제 받는 자들을 위해 공평과 정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또 다른 자들은 이 사람이 자기 형에게 부당한 짓을 하려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도우시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실 율법은 장자에게 두배 몫의 유산을 주도록 유산을 주도록 되어 있으므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변개하사 어쩔 수 없이 자기 형으로 하여금 그와 유산을 똑같이 나눌 수 밖에 없도록 하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를 얻고자 하는 합법적인 소망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 이상의 것을 얻고자 하는 탐심 즉 죄에 물든 욕망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 거절하심(14)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신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일에 있어 입법권이나 사법권 그 어느 쪽도 행사하려 하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의 잘못을 시정하실 뿐 그의 호소를 용납하려고 하시지 않으신다. 만일 그 사람이 하늘의 유업을 추구함으로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원하여 그에게 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최상의 도움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재산 나누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시든지 그가 무슨 권리로 그 일을 행하며, 누가 그 권세를 그에게 주었는지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여기서 이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속성과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영적인 나라이다.

(1) 그 나라는 세속의 권력에 간섭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세속의 권력에 대한 사항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
(2) 그 나라는 세속의 권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정해진 공평의 법에 따라 정직하게 행하게 한다.
(3) 그 나라는 신앙을 수단으로 한 세상 이익에의 우리의 기대를 고무시키지 않는다.
(4) 그 나라는 형제와의 경쟁이나 엄격하고 고자세의 권리주장을 고무시키지 않는다.

3. 필요한 주의를 주심 (15-21)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기회로 그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에게 필요한 주의를 주신다.

(1) 주의의 내용(15절) :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즉 탐욕의 본질이 너희 마음에 몰래 스며들지 않도록 너희 마음을 경계시키고, 탐욕의 원리가 너희 마음을 지배하고 복종시키지 않도록 네 마음을 굳게 지켜라.

(2) 이 주의를 강력히 주장해 주는 논지 :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 즉, 우리의 행복과 안락은 이 세상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데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혼의 생명이 재물에 의존하지 않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영혼의 본질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것은 필요를 채우지도 못하고 그것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한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명과 행복까지도 세상 재물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적은 재물을 가지고서도 매우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자도 많기 때문이다(거룩한 사랑을 가지고 채소를 먹는 것이 기름진 것이 가득한 잔치상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반면에 이 세상 재물을 굉장히 많이 소유하고서 매우 불행하게 사는 자들도 많이 있다.

(3) 비유로 이 말씀을 설명하시는데 이는 우리 모두에게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필요한 경계를 강조해 주기 위해서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부자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고 나서 과연 그가 행복한 자이었는지는 우리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1) 여기에는 부자의 재산과 소유의 넉넉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16절). 그의 재물은 대부분 땅의 소출에 있었다. 그는 매우 많은 밭을 소유했고 그의 밭은 소출이 풍성했다. 부는 부를 가져오기 마련이어서 그는 상당한 부를 소유했다.

2) 여기에는 부자의 마음의 움직임이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심중에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17절).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중에 무엇을 생각하든지 알고 지켜 보시며 하나님 앞에 그 생각에 대한 책임을 진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① 부자의 유일한 관심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기 밭의 소출이 굉장함을 보자 이로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보다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된 기회를 기뻐하기는커녕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라는 생각으로 고민한다 그는 큰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제 어찌할꼬?" 한끼의 끼니를 어디서 때워야 할지 모르는 그 지방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조차도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자의 소유가 아무리 넉넉하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넉넉함이 그들을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고심하기 때문이다. 부자는 "내가 어찌할꼬"라는 말을 한탄하듯이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왜, 무슨 일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실로 그는 재물이 넉넉하여 그것을 쌓을 장소를 원하는 것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② 그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이었는가(18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절). 그러면 내가 안심하리라.

이제 그의 어리석음을 살펴 보자.

첫째, 그가 땅의 소산을 '내 곡식', '내 물건'이라고 부른 것이 어리석은 점이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소용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빌려 주신 것이므로 그 소유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물건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쌓아 두고' 그리고 나서 잘 보관해 두었다고 생각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거기에다 모든 것을 쌓아 놓겠다". 즉 한 치도 가난한 자나 이방인, 아비없는 자나 과부를 위해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저 거대한 창고 안에 쌓아 두려했던 그의 생각이 어리석은 것이었다.

셋째, 이러한 조건으로 그의 마음이 드높아진 것이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마치 내년에도 올해만큼의 많은 소출을, 아니 훨씬 더 풍성한 수확을 걷으리라 여겨 더 큰 창고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창고는 틀림없이 내년에 소출이 너무 적음으로 인해 너무나 큰 것이 될 것이다.

넷째, 새 창고를 지음으로 자신의 근심이 가벼워 질 줄 생각한 것이 또한 어리석었다. 왜냐하면 창고를 지음으로 오히려 그의 걱정이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영적인 집을 알고 있는 자들은 이 사실을 안다.

다섯째,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결정하는 데 자제하지 않고 무조건 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즉 '주의 뜻이면 내가 살리라'(약 4:13-15) 함과 같은 필연적인 단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내가 하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독단적인 계획은 어리석은 것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이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는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아닌가.

③ 그의 즐거운 희망과 기대는 무엇이었는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9절). 여기에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 드러나 있다.

첫째, 그가 풍요로 인해 얻은 위안을 그 풍요와 관련된 계획을 이루기까지 뒤로 미룬 것이 어리석은 점이었다. 더 큰 곡간을 짓고서야 그는 마음을 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전에 위안을 가질 수는 없었던가?

둘째, 자기 재물이 여러해 동안 비축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실은 번갯불같이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에 의해 곡간과 그 안에 쌓아 두었던 물건들이 모두 순식간에 타서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수년 동안이라면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는 기간이다. 즉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할 것이다.

셋째, 세상의 풍성한 재물을 쌓아 두고 이에 안심한 것이 어리석었다. 사실은 세상의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많은 요인을 지니고 있다. 한 마리의 죽은 파리가 한 단지나 되는 값비싼 향수를 상하게도 하며, 불씨 하나로 인해 깃털 이불 전체를 버릴 수도 있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질병, 친척간의 불화, 특히 양심의 가책 등으로 사람들은 불안에 빠지며 이런 자들은 항상 이 세상의 재물을 탐하며 사는 것이다.

넷째,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외엔 자신의 재물의 용도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 또한 그의 어리석은 점이었다. 그 재물로 남에게 선을 행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그저 육체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기려 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마치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것과도 같았다고 하겠다.

다섯째, 자기 영혼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이 무엇보다 가장 어리석은 점이었다. 만일 그가 "내 몸아, 편안히 쉬자. 너는 수년 동안 재물을 쌓느라 수고하였다"라고 했다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창고에 아무리 곡식이 가득차 있거나 또는 황금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전혀 이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가 차라리 돼지의 영혼을 지녔다면, 먹고 마시는 만족감으로 그것을 마음껏 기뻐했을 것이리라. 이 세상의 자식들이 범하는 가장 큰 어리석음이 바로 세상의 부와 감각의 향락 등으로 그들의 영혼을 분할하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이 뒤따르고 있다.

부자는 스스로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평안히 쉬자'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말씀하셨더라면 그 사람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신다. 그가 스스로를 해쳤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20절). 즉 그에 관하여 죽음을 선고하셨다. 이 말씀은 그가 충만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즉 곡간을 늘릴 걱정과 계획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들려졌다. 이 모든 것을 마음 속에 그리고 앞으로 수년간 누릴 풍요에 대한 즐거운 기대로 다시 잠들려할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선고를 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자.

①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자로 판정하셨다.

어리석었던 나발의 이야기를 암시하시면서 "너 나발같은 자여"라고 부르신 것이다(즉 나발이 그의 이름이 되고 따라서 어리석음이 그와 함께 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모두 어리석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 자신의 이름인 "너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실 날이, 그리고 그들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게 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② 그에게 내린 판결 : 그것은 죽음의 선고였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는 수년 동안은 마땅히 그의 것인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고 생각했으나 오늘 밤 그것들을 잃어야만 한다. 그는 그 재물로 인해 즐거움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자기도 모르는 그 어떤 자에게 이를 남기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고를 살펴 보자.

첫째, 하나님의 선고는 강제이고 체포이다. 즉 그것은 영혼을 거두어 가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었는데 너는 영혼으로 무엇을 했느냐? 네 영혼을 거두어 가리라." 선한 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기꺼이 자기 영혼을 맡기고 복종한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들은 강제로 거두어 가기까지 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이 너희 영혼을 거두어 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그 영혼의 업적을 거두실 것이다. "인간들아, 너희 영혼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그 한 일을 내보이라."

둘째, 그것은 불시의, 전혀 예기치 않던 강제 집행이다. 그것은 밤에 일어난다. 선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시간이 낮시간이다. 그 시간이 그의 새 아침인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밤, 아주 캄캄한 밤이다. 바로 오늘 밤이라고 했다. 즉 연기되지 않는 지금 이 밤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수년을 약속하던 바로 이 밤에 그대는 죽어야만 한다." 즉 모든 것 가운데에 바로 모든 것의 종말이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예비하였던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나는 것이다. 그들의 행복을 심었고, 희망을 걸었던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야만 한다.

넷째,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남겨 주어야 한다.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더 이상 네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그것들이 네가 원하는 자들, 네 자녀나 친척들을 위하여 쓰여지게 될지 그것도 알 수 없다. 그들이 슬기로운지 어리석은지 알 수 없으며(전 2:18,19), 그 재물로 너를 기억하며 축복할지 오히려 저주할지, 네 가족에게 유익이 될지 해가 될지도,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준 그 재물로 선을 행할지 악을 행할지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만일 자신이 죽은 후 자기의 집이 누구의 소유가 될 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집을 아름답게 장식하기보다는 차라리 태워 버리려 할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선고는 그의 어리석음을 밝히 드러냈다.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왜냐하면 죽고 나면 그가 허둥지둥 떠나야만 했던 이 세상에서 그토록 애써가며 쌓은 재물들이 이제 그가 서둘러 가야 할 그 세상에서는 전혀 소중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③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통한 교훈이 있다(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것이 그와 같은 자의 길이며 종말이다.

여기서 고찰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에 대한 묘사이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가운데서 자기를 위하여, 즉, 부정되어야만 하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자이다. 몸이 곧 인간의 전부인양 육체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생각한 것이 그의 과오인 것이다. 또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육체만을 위하여 쌓는 데 전념한 것이 그의 과오이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이 세상과 육체와 현재의 생활을 위하여 쌓아둔 것들을 자기의 보화로 여긴 것이 그의 과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과오는 그가 전혀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치 못한 자'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부요치 못한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재물을 탐하는 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부요케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부요케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의 어리석음과 불행이 '이와 같으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자의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여기서 말씀하셨다. 영혼이나 영원한 세계보다도 단지 육체와 이 세상에서의 시간만을 염려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하나님께만 모든 관심을 둘 것을 권고하심 ( 12:22-40 )

그러므로, 즉 탐욕으로 인해 파멸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즉 나의 제자들아 이것을 주의하라. 세상의 사람 뿐 아니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라'(딤전 6:11)

(1)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해 필요한 것들로 인한 근심으로 그들 자신을 괴롭하자 말라고 가르치신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염려하지 말라(22절). 앞서 행한 비유를 통하여 그는 우리에게 부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탐욕의 형상인 육적인 만족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그는 여기서 또 이 세상 제물이라고는 거의 가진 바 없는 제자들이 빠지기 쉬운 탐욕의 또 다른 형상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그것은 필요한 것들에 대해 걱정하는 근심이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마태복음 6:25이하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셨던 경계이다. 본문의 논지는 그와 매우 유사하다.

1) 우리를 위하여 더 큰 일도 하셨던 하나님께서 보다 작은 일 또한 당연히 담당하여 주실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목숨과 몸을 주신고로 우리는 그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과 그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의복을 기꺼이 그에게 의지할 수 있다.

2) 보잘 것 없는 피조물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또한 당연히 돌보아 주실 것이다. 먹을 것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까마귀조차 기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4절). 까마귀는 '심지도 하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되' 하나님께서 기르신다. 이제 너희는 새보다, 까마귀보다 얼마나 더 귀한가 생각해 보라. 의복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7,28절).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나 꽃이 되매 참으로 아름답게 입히신다.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28절). 그러므로 믿음이 적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무절제한 근심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넉넉하신 하나님께 대한 강하고 실질적인 믿음은 이들 마음의 안정을 깨뜨리는 불안의 장벽들을 하나님을 통해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3) 우리의 염려는 쓸모없고, 헛되고 그리고 의미없는 하찮은 것이다. 염려함으로 우리의 소망하는 것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우리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25절).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즉 너희 키도 바꿀 능력이 네게 없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그것들은 너희 능력 밖의 것이 아니냐? 우리의 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지혜이다. 후회나 조바심, 걱정과 근심으로 그것을 변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아무리 필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 재물에의 무절제한 열망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해롭다(29,30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절). 즉 번거로운 걱정으로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양식을 그렇게 구하지 말고 다만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불려 다니는 의심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게, 네 마음을 굳게 지키라. 마음을 졸이는 초조함으로 살지 말라. 괴로운 때가 닥칠지라도 희망과 절망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안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①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의 자녀들과 같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30절). 그들은 오직 이 세상에만 관심을 두고 다른 세상에는 눈도 돌리지 않으며,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전혀 구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너희에게 마땅한 바가 아니다. 무절제한 근심이 우리를 덮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과연 이방인들과 같이 되어 그들이 구하는 것에 함께 참여해서야 되겠는가?"

②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먹고 살 필요한 것들에 대한 근심으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그리고 영광중에 있는 그의 부요하신 은혜에 따라서 너희 필요한 것을 채우시리라. 왜냐하면 그는 너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너희가 좋은 것으로 구하지 않음에 근심하시리라.

③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염두에 두고 추구해야 할 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제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명심하라.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자들이다. 영혼을 지닌 자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라. 그곳에서만이 쉼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부지런히 그리고 신중하게 너희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라. 그리고 나서 너희의 다른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의뢰하라.

④ 하나님의 제자들에게는 기대하고 소망할 더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32절). 나쁜 것이 닥쳐올 것 같은 염려로 두려워질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라는 근심 걱정에 빠진다. 결국 그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의 상상에 불과한 염려였다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걱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거 하신다. 왜냐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신 것이야말로 너희 아버지의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위안의 말씀이 없었다.

이 사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첫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무리는 적은 무리이다. 이 세상의 황야와 비교해 볼 때 교회는 포도원이며 동산이며 작은 정원이다.
둘째, 수적으로 아주 많은 그의 적에 비해 비록 적은 무리라 할지라도 그 적은 무리가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뜻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가 위대하고 선하신 목자의 보호와 인도아래 안전히 거함을 보라."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고자 한 나라를 예비해 놓으셨다(벧전 5:4).
넷째, 그 나라는 아버지의 기뻐하심에 따라 주어진다. 너희 아버지께서…기뻐하시느니라. 그것은 빚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다섯째, 그 나라를 믿는 소망과 기대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가 가지는 두려움을 침묵하게 하고 막아준다. "아무 걱정도 말아라. 근심이 생길지라도 그 근심이 너희와 그 나라 사이에 서지 못하리라."(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워 떠는 그것은 악이 아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그들의 보화를 쌓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일을 할 것을 가르치셨다.(33,34절).

1)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33절). 즉 "진짜로 너희에게 꼭 있어야 할 것으로 구제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여분의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라.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네 가진 것을 팔아라. 돈을 쌓아 두기 위해서나 이자로 그것을 더 하기 위해서 소유를 파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 팔아라. 옳은 방법으로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보장으로 최선의 저축을 하는 것이다."

2) 너희의 마음을 저 세상에 두라.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은혜는 영혼과 같이 짜여져 있으므로 저 세상까지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행위도 우리를 부요하게 할 하늘 나라의 보화이리라.

① 그것은 소멸해 없어지지 아니할 보화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닥이 드러날 염려가 없다.

② 그것은 도둑맞을 위험이 없는 보화이다. 하늘에 쌓아지는 것은 적들이 어찌할 수 없다.

③ 그것은 쌓아둠으로 상할 것이 아니고, 더욱이 쓴다고 없어질 것이 아닌 보화이다. 좀도 그것을 해하지 못한다. 비록 이곳에 살지만 우리의 마음을 그곳에 둠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고 있는 것이다(34절). 그러나 만일 너희 마음이 세상과 세상의 재물에 있다면 세상에서의 재물과 지위로 마음이 두려워지며 또한 이 세상을 떠날 때 너희는 파멸케 될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해 깨어 있을 것을, 즉 준비하고 있을 것을 가르치신다(35절 이하).

1)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종이다.

단순히 일하는 종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기다리는 종이다. 우리는 마치 아무리 밤이 늦었다 할지라도 자지 않고 주인을 맞기위해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2) 그리스도는 비록 지금은 우리를 떠나셨으나 다시 돌아오실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지금 자기의 주인이 영광 중에 나타나시기를 고대하며 기대 속에 있다. 그는 오셔서 자기 종들을 살필 것이므로 그들은 그날에 나타난 바에 따라 그와 함께 머물거나 혹은 문 밖으로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3) 우리의 주인이 돌아오시는 그 시간은 확실하지 않다.

혹 자정 바로 전인 이경이나 혹 자정 바로 후인 삼경일 것이다(38절). 너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함과 같다(40절). 이 말씀은 그가 언제 오실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유력한 증거이다. 즉 그것은 그들이 생각지 않은 때일 수밖에 없다.

4) 그가 종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그가 언제 오더라도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것이다(36절).

즉 주인은 자기 종들이 그들의 긴 옷을 잘라(사실 거추장스럽게 늘어져 그들을 방해하므로) 띠를 띠고, 주인을 집으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등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기대한다.

5) 주님이 오셨을 때 준비를 갖추고 있던 종들은 행복한 것이다(37절).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그가 처음 두드릴 때 이를 알고 맞이하는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그리고 다시 38절에서도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주인이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신부가 신랑을 식탁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주인이 종들의 시중을 드는 것은 인간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그의 겸손을 보이사,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요 13:4,5) 띠를 띠고 그들을 수종하리라.

6)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언제 오실지 정확한 시간을 모른다. 할지라도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가 아무리 부주의한 자라 할지라도 깨어 있다가 물리칠 것이다(39절). 그러나 우리는 언제 경고의 시간이 우리에게 임할지 알지 못하는 고로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말씀은 이 큰 일에 대해 부주의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임할 불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이 밤중에 도적처럼 임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집에 대해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위해 이처럼 하는 것이 또한 현명하지 않은가.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고 대비하듯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40절).'

출처 ; 메튜헨리주석


어리석은 부자의 가지지 못한 것 네 가지! : 네이버 카페

어리석은 부자의 가지지 못한 것 네 가지!

어리석은 부자의 가지지 못한 것 네 가지! 누가복음 12:13~21 "여러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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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의 가지지 못한 것 네 가지!(눅 12:13~21)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한때 유행하던 말입니다.

지금도 그냥 지나간 유행어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관심사로써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보다 더 큰 축복의 인사는 없습니다.

물론 부자가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과 물질이 많은 부자, 좋습니다.
돈이 많이 있으면 좋은 예배당도 짓고 가난한 사람도 많이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통 크게 헌금하여 큰 일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서 꼭 헌금도 많이하고 구제도 많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헌금도 힘에 지나도록 많이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경우도 더 많이 보았습니다.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 K라는 가난한 장로님은 자갈논 몇 마지기를 팔아서 헌금을 내는 바람에 제가 예배당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누님 권사님은 쥐뿔이나 아무것도 없이 아파트 전세를 살면서도 누가 왔다가 돌아 갈때면 아무 것도 없는 집안을 휙 돌아 보면서 "뭐 줄 것이 없나"하고 찾아서 작은 것 하나라도 꼭 손에 들려서 보내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꼭 많이 있어서만 헌금들을 많이 드리고 남에게 베풀거나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시무하던 또 다른 K라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경찰 출신으로써 자수성가하여 아주 부자가 된 장로님입니다.
그 교회에 부임하여 보니 교회의 헌금의 출납을 관장하는 재정부장이었습니다.
막 부임한 목사인 저에게 재정부장 장로님이 처음 하는 소리가 "목사님! 경제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은 우리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100원이 수입되면 10원을 쓰고 90원을 저축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그러한 경제관으로 돈을 모으는데 초점을 맞추어 살았던지 상당한 재력가로 살고 있었고 그 뒤로도 계속하여 돈을 모으는데 힘을 쏟은 결과로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돈을 어떻게 사용을 하느냐?는 생각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돈은 어떻게 모으느냐?에만 전심전력을 하여 인생을 살았습니다.
날마다 재산이 모여지는 보람과 즐거움으로 허리 띠를 졸라매고 더 더욱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몸에 이상 신호가 생겨서 병원에 갔더니 급성 간경화 진단이 나왔습니다.
손을 써 볼 사이도 없이 병원에 입원한지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써 보지도 못하고 재혼한 부인에게 끼처두고 죽었습니다.

생전에 예배당 건축 헌금도 건축을 완성한 다음에 목사의 마음을 다 썩혀가면서 내 놓았습니다.
그 헌금 때문에 담임 목사의 마음이 상할때로 상했는데 하나님은 너그러이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생을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살다가 부자라는 이름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후일에 장로님의 부인이 저에게 지난 날 남편과의 신앙생활이 너무 잘못했다고 고백하는데 그 권사님이 아마 남편의 죽음을 통해 너무도 짧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는지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이 부모 유산 상속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물론 주님께 유산 문제로 기도 할 수도 있습니다.
더 소소한 문제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기도의 제목으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자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땅의 것으로 배불러서 만족하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나아오지 않는도다"라고 한탄 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부자가 되는 것, 좋습니다.
심지어 부자되라는 축복의 설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느 교회 설교하러 갔다가 강단에 올려 놓은 헌금 봉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많은 돈을 주셔서 부자되게 해 주옵소서"라는 헌금 봉투를 보고 축북하기를 "주님, 이 분에게 부자보다는 많은 돈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을 먼저 주시옵소서"라고 축복을 했더니 설교가 끝났어도 그 분은 인사도 안합니다.

축복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또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이 전제되지 않은 축복과 부자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부모 유산 문제 해결을 위해 나온 사람에게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왜? 이런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셨습니까?
돈은 있었지만 정말 있어야 할 귀중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 부자의 의식 속에 하나님이 아예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자기 밭에 소출이 풍성한 곡식을 처다보고 이것만 더 많으면 인생 살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심중(心中)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
"내가 헐고" "내가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
"내 영혼에게"

이 부자는 돈도, 자기 몸도, 자기 영혼도 자기 처자식도 다 자기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는 자기를 만드시고 자기에게 모든 것을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은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내 인생 가운데 주인이고, 소유자이고, 주권자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사를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움직이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눅 12:35-48)

[ 성경묵상 ]

12:35-48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교훈인데, 주제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을 교훈한 전(前) 문단과 문맥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하겠다.

35-48절은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세 가지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즉 앞선 단락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했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함을 교훈했지만(31,34절) 35절 이하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인 주의 재림을 긴장 속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더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12:35-40 ; 집 주인과 종의 비유(39-40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자들은 밤 중에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깨어 있는 생활, 곧 하나님을 신뢰하고 지칠 줄 모르는 건실한 신앙 생활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제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 그분이 베푸시는 잔치에서 주님으로부터 접대를 받게 될 것이다.

12:42-48 ;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과 종들과 그 자녀들의 교육까지도 관장하는 직무였다. 따라서 청지기는 무엇보다도 신실해야 하며(고전 4:2) 지혜롭고 슬기로워야 한다(16:8). 많은 은혜를 받은 주의 집의 청지기들은 더 많은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다(48절).(아가페 큰글성경)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5-48절은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세 가지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즉 앞선 단락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했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함을 교훈했지만(31,34절) 35절 이하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인 주의 재림을 긴장 속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더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35-38절은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인데 본절에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띠가 허리에 매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허리띠를 지금 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맬 것도 아니고 이미 허리띠를 맨 상태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상태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이었다. 그래서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시에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매야만 했다. 35절에서 종들이 허리에 띠를 띤 이유는 문맥적으로 혼인 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36절). 즉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성도들도 혹여라도 나태해져 방심하고 있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는 자가 되도록 항상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재렴하실 때 등불을 켠 상태로 있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켜고’로 번역된 ‘카이오메노이’는 ‘불을 켜다’(계 4:5)는 뜻의 동사 ‘카이오’의 현재 분사 수동형으로 ‘계속적으로 불이 켜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불을 켜는 목적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영접하기 위함이다(마 25:1-13). 그러므로 본절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감당하며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고 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되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이 밤중에나 새벽에 오더라도,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되다.

이경, 삼경 ; 로마인은 밤을 4경으로 나누었고(6-9시, 9-12시, 12-3시, 3-6시),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나누었다. 여기에서는 로마식을 따른 것이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언제 들지를 안다면, 그는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또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이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종들을 맡기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그러나 그 종이 마음 속으로, 주인이 늦게 온다고 생각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기 시작한다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생각하지도 않은 날, 뜻밖의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 종을 몹시 때리고, 신실하지 않은 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엄히 때리고'를 70인역에서는 재물을 토막낼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곧 준엄한 심판을 뜻한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도 않고, 그 뜻대로 행하지도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러나 알지 못하고 매맞을 일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서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이 맡긴 사람에게서는 많은 것을 요청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해 깨어 있을 것을, 즉 준비하고 있을 것을 가르치신다(35절 이하).

1)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종이다.

단순히 일하는 종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기다리는 종이다. 우리는 마치 아무리 밤이 늦었다 할지라도 자지 않고 주인을 맞기위해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2) 그리스도는 비록 지금은 우리를 떠나셨으나 다시 돌아오실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지금 자기의 주인이 영광 중에 나타나시기를 고대하며 기대 속에 있다. 그는 오셔서 자기 종들을 살필 것이므로 그들은 그날에 나타난 바에 따라 그와 함께 머물거나 혹은 문 밖으로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3) 우리의 주인이 돌아오시는 그 시간은 확실하지 않다.

혹 자정 바로 전인 이경이나 혹 자정 바로 후인 삼경일 것이다(38절). 너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함과 같다(40절). 이 말씀은 그가 언제 오실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유력한 증거이다. 즉 그것은 그들이 생각지 않은 때일 수밖에 없다.

4) 그가 종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그가 언제 오더라도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것이다(36절).

즉 주인은 자기 종들이 그들의 긴 옷을 잘라(사실 거추장스럽게 늘어져 그들을 방해하므로) 띠를 띠고, 주인을 집으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등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기대한다.

5) 주님이 오셨을 때 준비를 갖추고 있던 종들은 행복한 것이다(37절).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그가 처음 두드릴 때 이를 알고 맞이하는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그리고 다시 38절에서도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주인이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신부가 신랑을 식탁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주인이 종들의 시중을 드는 것은 인간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그의 겸손을 보이사,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요 13:4,5) 띠를 띠고 그들을 수종하리라.

6)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언제 오실지 정확한 시간을 모른다. 할지라도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가 아무리 부주의한 자라 할지라도 깨어 있다가 물리칠 것이다(39절). 그러나 우리는 언제 경고의 시간이 우리에게 임할지 알지 못하는 고로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말씀은 이 큰 일에 대해 부주의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임할 불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이 밤중에 도적처럼 임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집에 대해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위해 이처럼 하는 것이 또한 현명하지 않은가.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고 대비하듯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40절).'


종들과의 회계와 세상 분쟁이 되심 ( 12:41-53 )

1. 베드로와 질문(41)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까. 베드로는 자주 그래왔듯이 여기서도 제자들의 대변인이었다. 이렇게 자진하여 의문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그가 직접 하신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주여, 이 말씀은 우리를 의미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을 의미하신 것입니까"하고 베드로는 질문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답을 주셨다(막 13: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그런데 여기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선 제자들이 그 말씀에 깊게 관계하기를 지시하시려는 것 같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바로 제게 하심이니이까? 내 심중에 말씀하소서."

2.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심(42-48)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뒤따르는 이 말씀은 특히 그리스도의 집에서 '청지기'인 사역자들에게 적용 되어진다.

(1) '청지기'로서 그들의 의무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무엇인가(42절).

그들은 집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님의 가속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사역자들의 그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그들의 일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들에게 적합한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며 저마다의 분수에 맞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지혜있고 진실함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즉 그들의 주인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진실하고 지혜로와야하는 것이다. 사역자는 이 일에 숙련되어야 하며 진실해야 할 것이다.

(2) 그들이 진실하고 지혜롭다면 그들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3절).

1) 그 종은 게으르지 않고 행하는 종이다.
2) 그 종은 공중 설교와 개별적인 적용에 의해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그렇게 행하는 종이다.
3) 그 종은 주님이 오셨을 때에 그렇게 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된다.
이제 그의 행복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에 충성한 종이 승진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보다 크고 보다 높은 자리로 승진하게 될 것이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4절). 주님의 은혜로 충성한 사역자들은 마지막 주님의 날에 그들의 충성의 대가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

(3) 그들이 악하고 신실하지 못했을 때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벌은 무엇인가(45,46절).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에서 이 모든 것을 살펴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다음 몇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45절). 그리스도의 참으심은 매우 종종 더디 오시는 것으로 오해되어 그의 백성들에게는 낙담이 되고 그의 적들에게는 힘을 더해 주는 것이 되곤 한다.

2)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은 보통 방심과 환락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들 자신의 죄나 이웃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없이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한다.'

3) 모든 악한 자들에게 임할 죽음과 심판은 참으로 무시무시할 것이다. 악한 사역자에게는 특히 더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시에 임할 것이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46절).

(4) 자기의 할 일을 알고도 이를 행하지 않은 죄와 이에 따르는 벌은 얼마나 심할 것인가(47,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47절). 즉 보다 지독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즉 그의 형벌은 앞의 종에 비해 경감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무지로 인해 지은 죄와 의도적인 죄를 구분해서 벌하는 율법(민 15:29,30)을 암시하는 듯하다.

1)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면 죄가 경감된다.

그러나 이들도 즉 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자도 맞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도록 노력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적게 맞을뿐인 것이다. 몰랐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변명은 되나 전체적으로 죄를 탕감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지함으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지를 이유로 그들을 변호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죄를 더 무겁게 만든다.

주인의 뜻을 안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을 더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할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앎으로 인해 죄에 대해 극단의 고의성과 업수이 여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다음의 말씀이 부가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무릇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8절).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정신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 즉 보다 많은 지식과 학식을 지닌 자, 그리고 보다 성경 말씀에 친숙하고 이와 대화하는 자들에게 더 많이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책임 또한 클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눅 12:49-59)

[ 성경묵상 ]

12:49-59 역시 종말과 관련된 교훈이다.

이 가운데 전반부 12:49-53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까지는 주의 복음으로 인해 이 땅에서는 이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 복음에 대한 자체가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임을 선언하신다. 특히 이 복음의 분쟁적 성격에 관한 교훈은 위에서 주신 일련 의 교훈들, 즉 제자들은 근본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차별성을 나타내야 한다는 교훈들을 제유법으로 요약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12:54-59에서는 현역사에는 분명히 종말이 있을 것이며 또한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므로 늘 영적으로 각성하여 시대를 분별하는 동시에 그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에 대비하여 회개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신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12:49-53(마 10:34-36) ; 여기서 '불'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열망하신다(49절). 이러한 예수님의 열망은 '그가 받으실 세례',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50절).

12:54-56(마 5:25-26 ; 16:2-3) ;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신 '시대'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여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종말의 때임을 알지 못했다. 이를 책방하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 질문 1 ] 주님은 화평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분쟁을 의미할까?(51-53절)

[ 질문 2 ] 소나기와 더운 날씨를 예견하듯,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시는가?(56절)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49-53절은 복음이 확산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진리와 비진리의 처절한 투쟁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49,50절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전파에 수반되는 현상을 불과 세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전체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본표제어는 해석상 상당한 난점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의문대명사 ‘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티’를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무엇’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본문은 ‘내가 무엇을 바라겠느냐? 만일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이 된다. 이 해석은 아직 불이 붙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불이 붙도록 계속해서 바라고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다음으로 '티'를 '얼마나'로 해석하면 ‘이 불이 이제 붙어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가 된다. 이 해석은 이 불이 지금 현재 이미 붙어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티’를 ‘어찌’로 해석하면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요’가 되어 이 불이 붙지 않기를 바란다는 앞의 두 가지 해석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보다는 이미 불이 붙었으나 완전하게 붙어 더욱 잘 타오르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사실은 ‘불이 붙었다’는 의미를 지니는 ‘아냉데’가 부정과거형으로서 완전히 불붙은 상태를 나타낸다는데서도 암시된다. 왜냐하면 현재 시점에도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고난이 시작되었고, 예수께서는 더 극심한 고난이 있을 것을 예측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이러한 고난은 고난을 주는 자에 대한 심판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흑자는 이를 ‘성령’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문맥으로 볼 때 형별적 심판이나 신자와 불신자간에 조성되는 적대감이나 이로 인한 성도의 고난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 10:34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기 위해서이다. 즉 예수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진리와 비진리의 투쟁은 더욱 격화되고 진리에 대항하는 비진리의 세력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급격히 확산되는 속성과 심판과 고난의 이미지를 지닌 불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선포하신 것이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받을 세례'란 주님의 지실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일정 부분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분쟁일 수 있다. 분쟁을 조장해서는 안 되지만, 신앙으로 인한 분쟁을 각오할 필요는 있다.

50절은 실로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선 49절에서 ‘불’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진리와 비진리와의 투쟁 및 비진리에 대한 심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그 선봉에 서신 그리스도께서 장차 세례를 받아야 됨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공생애 시작 이전에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문자적 의미의 세례가 아니다. 세례가 죄에 대하여 죽음을 상징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여기서 세례는 일차적으로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셨으며 이를 이룰 날이 속히 오기를 답답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대속적 죽음을 당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한편 50절을 직역하면 ‘그러나 나는 세례받을 세례를 가지고 있다’이다. 즉 예수께서는 ‘세례’를 강조하기 위하여 ‘명사형(밥티스마)’과 ‘동사형(밥티스데나이)’을 중복하여 사용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왜 자신이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세례란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으며, 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세례가 갖는 씻음과 연합의 의미 가운데 연합의 의미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 된다는 영적 의미도 있다. 따라서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삶을 얻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구속사의 진행 과정을 미리 아시고 대속의 죽음을 이루기 위한 그날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이어 나오는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란 표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세례’란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에게 임할 십자가 고난과 그 고난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예수께서 감당하실 고난을 보여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그날까지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바와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51-53절에서 신자와 불신자간의 분쟁으로 인한 성도의 고난이 불가피함을 밝히기에 앞서 50절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밝히신 것이다.

‘텔레스데’의 기본형 ‘텔레오’는 ‘이루다’(계 10:7)는 뜻으로 ‘완전한 성취’를 가리킨다. 이는 곧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예수 자신의 사명의 완성을 가리킨다. 요 19:30에서는 예수께서 운명 하실 때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텔레오’ 동사를 사용하여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자기의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한 길이 완전히 열려졌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예수의 십자가가 단순히 정해진 숙명에 따른 것이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고 그 정해진 때에 예수 자신의 완성을 향한 노력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 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명을 이루는 날을 답답한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기다리며 자발적으로 준비하고 계신 예수의 모습에서 잃은 양을 찾아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준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1-53절은 복음과 세상과의 투쟁을 분쟁하는 가족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절은 복음의 성격상 세상과 분쟁을 야기하는 측면이 있음을 역설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화평’으로 번역된 ‘에이레넨’의 기본형 ‘에이레네’와 ‘분쟁’으로 번역된 ‘디아 메리스몬’의 기본형 ‘디아메리스모스’가 선명하게 대조되어 있다.

신약 성경에서 ‘에이레네’는 주로 ‘평화’(19:42), 또는 ‘평안’(엡 4:3)을 가리키지만, ‘분리’(KJV, NASB, NIV, division)를 가리키는 ‘디아메리스모스’와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절에서는 ‘연합’ 또는 ‘화목’(행 7:26)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여기서 ‘디아메리스모스’는 병행 구절인 마 10:34에서는 ‘검’ 을 가리키는 ‘마카이라(μ.áxalpa)’ 로 대치되어 있다.

후자는 ‘검’으로 표현된 마태의 진술을 본래의 예수의 말씀에 대한 직접적 인용으로 보고 본절의 누가의 진술은 누가 자신의 편집적 진술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자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주어진 교훈이라면 예수께서 각기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비록 그 표현 자체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에 있어서는 누가와 마태는 둘 다 ‘분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여도 사실상 별 문제가 없다.

한편 ‘디아메리스모스’는 동사 ‘디아메리조’에서 유래하였다. ‘디아메리조’는 ‘~ 을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디아'와 ‘나누다’는 뜻의 동사 ‘메리조’가 합성된 것으로 ‘분배하다’, ‘조각으로 나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디아메리스모스’는 단순한 다툼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분쟁으로 인하여 둘 사이의 완전한 분리를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분리’는 ‘심판’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본절은 예수의 오심을 이 땅에서 분리를 가져다 주는 ‘심판주의 도래’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리를 가져다 줄 심판은 예수의 재림 때만이 아니라 50절에 근거하여 볼 때 그의 초림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성취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이미 초림에서부터 심판주로서의 오심이요 그의 재림은 그가 초림에서 성취하신 심판을 완성하고 확증하기 위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세상에’로 번역된 ‘엔 테 게’는 ‘~안에’를 뜻하는 전치사 ‘엔’과 ‘땅’을 가리키는 명사 ‘게’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원문대로 번역하면 ‘땅 가운데’가 된다. 여기서 ‘땅’은 ‘하늘’과 대조된 것으로 이러한 ‘분리’는 천상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질 일시적인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말한 분리는 최종적 하늘 나라가 완성되기 이전에 이 땅에서 있을 하나님의 백성과 땅의 백성과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그의 백성에게는 영원한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한편 본절의 기타 내용 및 의미에 대하여는 병행 구절인 마 10:34의 설명을 참조하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예수께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비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관원에게로 가게 되거든, 너는 도중에 그에게서 풀려 나도록 힘써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로 끌고 갈 것이고, 재판관은 간수에게 넘겨 주고, 간수는 너를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호스 가르’에 대한 번역이 생략되었다. ‘호스’는 ‘마치 ~처럼’이라는 뜻이며 ‘가르’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으로, 이에 따라 본문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너는 마치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가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이다. 원문은 접속사 ‘호스’를 사용하여 지금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의 상황을 하나의 비유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지금 이 시대를 분변치 못한 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본절에서는 재판장 앞에 서기 전에 화해하기를 힘써 옥에 갇히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는 최후 심판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심판주 앞에 서기 이전에 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안티디쿠’의 기본형 ‘안티디코스’는 법정적 용어로서 법정에 고발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적대자’ 또는 ‘고소 상대자’를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고소할 자’는 이 땅에 진리와 비진리와의 구별을 가져다 줄 불을 가지고 오신(49절) 그리스도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또한 ‘법관’으로 번역된 ‘아르콘타’의 기본형 ‘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왕’이라는 뜻이 있으나 본절에서는 당시 유대의 재판이 별도의 일반 법정에서가 아니라 회당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회당장’을 가리킨다(마 9:18,23 ; 눅 8:41 ; 18:18), 여기서 ‘법관’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비유하고 있다. 또한 본절의 ‘재판장’은 ‘법관’과 동일하게 최고의 통치자이자 근원적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비유하며(롬 14:10-12 ; 히 12:23,24), ‘관속’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집행하는 ‘천사들’을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지금 이들의 상황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에 있음을 가리켜 주고 있다.

한편 마 5:25에서도 본문과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그 곳에서는 ‘형제 화해’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본문에서는 구원자되시는 ‘예수님과의 화해’에 중점을 두고 있다.

‘화해하기를’로 번역된 ‘아펠락 다이 아프 아우투’는 직역하면 ‘그로부터 벗어나 있기를’이다. ‘아펠락다이’의 기본형 ‘아팔핫소’는 ‘떠나다’(행 19:12), ‘놓아 주다’(히 2:15)는 뜻으로 특히 법적 관계에서 고소자로부터 벗어나 자유한 상태에 놓이게 됨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이 동사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속박으로부터 완전한 해방’, 즉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멸망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방법은 오직 원어 성경에서 ‘아우투’로 지목된 ‘고소할 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화해에 있다. 곧 지금까지 적대시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의 오심을 준비할 때 그 사람은 이 멸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해방의 시기는 ‘길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본절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에서’로 번역된 전치사 ‘엔’은 ‘~안에’, ‘~가운데’라는 뜻으로 법정에 도달하기 이전으로 그 시기와 장소를 한정시키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기 이전 아직 이 땅에서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 즉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화해함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본절의 전반적 의미에 대하여는 마 5:25의 설명을 보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절대로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호리’로 번역된 ‘랩톤’은 당시 유대에서 통용하는 화폐 단위로는 가장 작은 단위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심지어 마지막 랩톤까지도 네가 갚는다면’이다. 여기서 이처럼 보잘것없는 액수인 마지막 랩톤까지도 다 갚아야 된다는 것은 앞으로 당하게 될 심판이 조그마한 죄라도 넘어가지 않는 철저한 심판이 될 것이며, 끝까지 용서가 없는 영원한 멸망의 심판이 될 것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본절의 전반적 내용은 병행 구절인 마 5:26의 설명을 보라.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 ]

앞으로 맞게 될 고난을 말씀하심(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49절). 혹자는 이 말씀을 복음 전파, 성령 강림, 거룩한 불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미 그 불은 붙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연결되는 말씀으로 보아 이 불은 오히려 박해의 불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불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동자, 박해자들의 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는 그 불이 붙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다. 박해받는 이들의 시련을 통해 그들을 단련시키는 불로서 허락하실 뿐인 것이다.

(1) 그리스도 자신도 많은 수난도 당해야만 한다.

이미 붙은 이 불속으로 통과해야만 한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50절). 고난은 불과 물로 비유 되어진다(시 66:12).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고난을 모두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세례라 칭하시는데(마 20:22)이는 이스라엘이 바다 속에서 세례받았듯이 그 자신도 고난에 뿌림을 당하고나 적셔지고 또한 고난속에 잠겨져야 했기 때문이다(고전 10: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예견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는 받게 될 고난을 이와 같이 부름으로 그 고난을 완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홍수가 아니라 세례인 것이다. "나는 결코 박해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살짝 잠기려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받게 될 고난을 이와 같이 부름으로 고난을 성스럽게 만들고 있다. 세례는 성스러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향한 그리스도의 발걸음이 어떠한가 보라.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할 때를, 그리하여 자신의 고난으로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자취를 보게 될 때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가 참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영혼의 산고였다. 이처럼 그의 마음은 인간의 구원과 구속을 바라고 있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또한 이러한 고난을 감당해야할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51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러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넌즈시 비춰 주고 있다. 즉, 복음이 전세계적으로 환영을 받게 되고, 온 민족이 너나없이 이구동성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적어도 그들에게 화평을 주실 것이라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기대는 어긋날 것이며 결과는 정반대로 판명될 것이니 부질없는 기대로 기뻐하지 마라. 너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일 것이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강력한 통치자가 정국을 지배하면 백성들은 평화를 누리게 된다. 각 파의 철학자들도,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도 모두 매우 잘 화합한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함에 따라 소동이 일어났다. 즉 어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구별하게 되었고 다른이들은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에도 분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상호 관용을 배우고 행하게 하기 위하여 이를 허용하셨다.

2) 이러한 분쟁은 개인의 가정에까지 미칠 것이다.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분재하리라(53절). 한 가정 내에서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다른 사람은 이를 거부하였을 때 당연히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열심으로 설득하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앙 속에 계속 머무르는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신앙의 사람들로 인해 자극되어 이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다. 심지어 어미와 딸들까지도 종교로 인해 갈라설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친하고 사랑하는 자라 할지라도 믿는 자를 박해자의 손에 기꺼이 넘겨 주려 할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박해의 불길이 야기되는 것을 본다. 즉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 들려지는 곳마다 박해가 일어났으며 복음의 길에는 늘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자신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평화를 약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를 분변할 것을 가르치심 ( 12:54-59 )

그리스도께서는 앞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교훈을 말씀하신 후 이제 무리를 향하여 필요한 교훈을 말씀하신다(54절).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께서 무리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육적인 삶에 지혜롭듯이 그들의 영적인 삶에도 지혜로울 것을 말씀하셨다.


(1) 무리들은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길을 분변하고 이에따라 준비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54-57절).

그들은 날씨에는 민감한 자들이어서 바람이나 구름을 보고서도 소나기가 오리라는 것을, 혹은 심히 더우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54,55절). 이렇게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앞으로 닥칠 것을 경고해 주신다. 그리고 자연의 징후를 예견하는 인간의 기술은 날로 발달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되어진 것을 보고서 앞으로 되어질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의 유익함을 보라. 즉 눈여겨 봄으로써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고 배우는 자는 현명하다.

1) 경험으로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사실을 자연의 기후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계시다.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아마도 그것이 처음에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 (왕상 18:44)이라면 소나기가 오리라고 말할 것이며 또한 과연 그러할 것이다. 남풍이 붐을 보면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55절). 그러나 자연 그 자체는 그러한 틀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므로 때때로 우리의 예측은 어긋난다.

2) 이 예로부터 당연히 추론되어져야 할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신다(56절).

"외식하는 자여 스스로 지혜있는 척하나 실지로는 그러하지 못하다.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즉 어찌하여 너희는 지금 바로 그 기회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지금 주어진 이 기회는 너희가 결코 열망하지 않았음에도 너희 앞에 주어진, 그리고 결코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그 기회인 것이다. 즉 지금이야 말로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그 때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함이 인간의 비극이며 어리석음이다.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함' (눅 19:44)이 그 세대 사람들의 멸망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57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이 옳은가 분별할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한다면 곧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옳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본질적으로 더 공평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무리들은 너무 늦기 전에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서둘러야 한다(58,59절).

이와는 다른 경우로 마태복음 5:25,26에서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계시다.

1) 세상 일에 있으서도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자와는 화해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진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때에(58절). 만일 네가 감옥에 던지울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면 너희 스스로 서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이다.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현명한 자들은 자기들의 분쟁을 끝까지 몰고 가지 않으며 적절한 때에 그 분쟁을 화해시킨다.

2) 우리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우리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정의와 힘을 모두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모든 심판의 권한을 위임받으신 그리스도는 재판관이 되신 분으로 우리는 그 앞에 속히 나아가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재판은 분명히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어 재판장은 우리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그가 우리를 지옥이라는 옥에 던져 넣어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을 때가지'가두어 둘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갚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짧았으나 그 고난의 대가는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이것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적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손 안으로 들어가기에 힘써야 하며, 이것은 길에서 해야 하는, 지금 눈 앞에 놓여진 가장 긴급한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이 바로 '길에서'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써 지금까지 행해온 싸움을 더 늦기 전에 종식시켜야 할 그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에 넘치는 선물을 주시려 뻗치신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자. 그때 우리에게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