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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표적을 구하는 세대 /하나님 나라를 놓친사람/제자의 삶

by 은총가득 2020. 11. 18.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향한 책망(눅 11:29-41)

[ 성경묵상 ]

11:14-54의 세 문단은 벙어리 귀신 축사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바알세불 논쟁(11:14-28), 표적만 구하는 세대를 향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 및 복음의 진리의 빛을 밝히 볼 것을 촉구하는 등불과 눈의 비유(11:29-36), 그리고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내적 부패성을 폭로하시고 그들에게 거듭 화(禍)를 선언하시는 내용(11:37-54) 등을 연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 내용들은 마태복음에서는 6:22,23 ; 9:32-34 ; 12:38-45 ; 23:13-26 등에 흩어져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이 내용들이 한 곳에 결집되어 있는 것은 기록자 누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누가는 이를 한 곳에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적대적(敵對的) 기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갈릴리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아니다. 비록 본문에 기록된 사건들의 일부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갈릴리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과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나 본문의 사건들은 주님의 후기 유대 사역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실제로 본문과 마태복음의 갈릴리 사역 기간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11:33-36 ;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은 집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비추어 주는 빛과도 같다(33절). 그 빛이 밝게 보이지 않는 것은 순전히 그 빛을 받는 이에게 달려 있다. 내적 상태가 깨끗할 때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다.(아가페 큰글성경)

[ 질문 1 ]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보이실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29절)

[ 질문 2 ] 눈 앞에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알아 보지 못한 이유를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34-35절)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무리가 모여들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듯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돌아오신 주님을 부활을 가리킨다. 믿음으로 마음을 열면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적만으로 충분하다.

왜 예수께서는 이들을 향해서 음란하고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기 때문이었다. 표적을 구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여러 가지 이적들을 일으키셨다(14,20절 ; 4:38-44; 8:22-25,40-56). 이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밝히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그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불순종하고 또 다른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15,53,54절). 즉 예수 께서는 표적만을 구하는 것을 진실된 마음의 결여로 보고 진실된 마음의 결여는 하나님만을 바라 보는 신실함의 상실이므로 이를 영적 간음, 즉 음란함으로 규정하시며 악하다고 질책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귀신의 힘을 벌어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판별할 수 있는 ‘표적’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수차례 보여 주신 예수의 표적과 능력있는 말씀을 수용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패역한 무리들임에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어떤 표적도 그들에게 보이기를 원치 않으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난하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패역한 마음에서 표적을 구했기 때문이다.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할 것이다.

불신앙의 마음으로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과거 구약 시대의 요나가 니느혜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이 예수 자신의 메시야 되심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30절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아주 훌륭한 표적이 되었다는 것과 더불어 이는 예수 자신이 보일 표적과도 관계될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마 12:40이 명시하듯이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나는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머물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된 후에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적이 되었다. 예수께서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가 그리스도, 곧 약속된 구속자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의 사흘 만의 부활로서 명확하게 입증하겠다는 것이다(행 1:3 ; 17:31).

즉, 30절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사건이 메시야되심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적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본절을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이것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9:22의 수난 예고에 이은 또 하나의 간접적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또한 30절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을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났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해야 함을 촉구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인입에도 일개 선지자 요나가 회개 선포를 했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했는데,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직접 회개를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이런 악한 세대는 분명 니느웨 사람들보다 훨씬 완악하기 그지없으며, 최후 종말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32절).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본절에 등장하는 남방 여왕은 왕상 10:1-13의 스바 여왕을 가리킨다. ‘남방’은 유대 남부에 위치한 ‘네게브’ 사막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오늘날의 예멘(Jemen)을 가리킨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찾아왔다. 2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는 당시의 인식 수준에서는 ‘땅 끝’으로 여겨지던 거리였다(마 12:42). 즉, 그녀는 땅 끝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지혜의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바로 그들 곁에 있어 찾아갈 수고를 조금도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49절). 이런 완악함 때문에 예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스바 여왕이 살아나서 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신 것이다.

한편, ‘일어나’는 스바의 여왕이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과 함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나타날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그 당시 랍비들의 일반적인 종말관은 사후 부활과 관련 죽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즉 악하기 때문에 부활하지 않고 죽은 후 계속 음부 즉 게헨나에 머물러 있는 사람과 선하기 때문에 부활하는 사람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관에 의하면, 선언은 물론 악인도 종말의 때에 부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는 목적은 각각 다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반면,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요 5:29). 본절은 최후 심판 때에 죽었던 스바 여왕이 예수 당시 유대인들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를 대적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그리고 당시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하리라는 의미이다.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됫박 아래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다가 놓아 두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도 밝을 것이요,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네 온몸이 밝아서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마치 등불이 그 빛으로 너를 환하게 비출 때와 같이, 네 몸은 온전히 밝을 것이다."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예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자기 집에서 잡수시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들어가서 앉으셨다.

‘아리스테세’의 원형 ‘아리스타오는 아침 식사, 즉 조반 먹는 것을 가리킨다(요 21:12). 따라서 이 바리새인이 초청한 식사는 점심이 아니라 보통 회당 기도가 끝난 후에 먹는 가벼운 아침 식사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언급된 바리새인의 태도는 상당히 집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청하므로’로 번역된 ‘에로타’가 미완료형으로서 ‘거듭하여 요청했다’란 의미를 지닌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계속해서 예수께 식사를 같이하자고 집요하게 요청한 것은 아마도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와 함께’로 번역된 ‘파르 아우토’란 표현이 잘 드러내 준다. 즉 본절은 바리새인이 ‘그와 함께’ 식사하기를 요청한 사실을 강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동류의 관계를 의미한다(눅 15:2). 즉,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식사는 용서(삼하 9:7 ; 왕하 25:27-30)와 보호(삿 19:15이하) 그리고 평화(창 43:25) 등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절에 언급된 바리새인은 예수와 자신이 같은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혹시 과시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즉, 많은 민중들이 예수를 따랐고 그의 가르침을 신뢰했고, 또 그가 베푸는 이적으로 인해 소문들이 무성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한마디로 대단했을 것이다.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그런데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께서 잡수시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서, 이상히 여겼다.

손을 씻는 것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 오는 규례였다.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었으며 식사 도중에 다른 음식으로 바꾸어 먹을 때에도 손을 씻었다. 이러한 규례를 만든 처음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더 철저하게 순종하기 위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것이 그들의 올무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지키는 모든 의식과 절차는 그 자체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의식과 절차를 지켜야 하는 근본 목적을 바르게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바리새인들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외적 행위만 깨끗하고 거룩하게 잘 꾸미면 타인이 그들의 내면 세계도 아름답게 보아 줄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같다.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바리새인들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들아’로 번역 된 ‘아프로네스’는 ‘어리석은’, ‘지각이 없는’을 뜻하는 ‘아프론’의 호격 복수이다. 즉 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그리고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으며 영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이러한 진지한 깨달음이 없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형식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상의 유전을 따르는 결례를 통해서 그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죄인들이나 세리들을 배척하였으며 종교적 외양과 형식으로 스스로를 치장했다(눅 18:9-14). 즉 그들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그들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감추기에 매우 적절한 시도이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을 향해서 겉을 만드신 하나님이 안까지 모두 만들지 않았느냐라고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셔서 질책하셨다. 즉 본절은 자칭 타칭 의인이요(눅 15:7 ; 18:9-14), 또 존경받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이(43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겉 뿐만 아니라 속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보이지 않는 속의 정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적 형식 준수를 통하여 외양만 거룩하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이다. 이로 보건대 그들은 단연코 어리석은 자요, 눈먼 자요, 그리고 영적 소경들이었다.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번역된 ‘타 에논타’는 ‘너희 안에 있는 것들’이란 의미인데, 이것이 가리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첫째, 39절에 나오는 잔과 접시란 표현과 연관지어 그 속에 있는 것, 곧 음식으로 보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지 말고 그 음식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뜻이 된다.

둘째, 마음으로 보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마음으로 가난한 자들을 긍흘히 여기라’는 의미가 된다.

셋째, 재물로 보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제39절의 내용이 겉치레에 대한 질책의 비유적 의미로 ‘잔과 대접’이 사용되었으므로 첫번째 견해는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39절 즉,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라는 구절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두, 세번째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가진 결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부정한 재물을 모두 되돌려주는 것이며(19:1-10),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회에게 깨끗하리라’는 말씀은 구제 결과 그들 자신이 깨끗해진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것들이 깨끗해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판타)’이란 무엇인가?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했다는 죄의식을 비롯한 하나님과의 껄끄러운 관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제하게 되면 재물을 옳게 사용하게 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와 양심의 자유가 그를 더러운 탐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 11:29-36 )

(1) 우리가 우리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유력한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다는 사실이다.

1) 예수께서 이미 많은 표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무리가 모였다(29절). 많은 무리가 모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많은 무리가 왜 모였는지를 아셨다. 즉 그들은 표적을 구하기 위해서 왔고 구경하기 위해서 왔으며 집에 돌아가서 할 이야기거리를 얻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이제까지 본 표적과는 다른 한 가지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곧 선지자 요나의 표적으로, 마태복음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극도의 파멸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인자는 이 세대의 표적이니라(30절).

3) 예수께서는 이러한 표적을 믿으라고 경고하셨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1절). 남방의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 생소했으나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다. 그너는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예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 조금도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2절).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설교는 요나의 설교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듣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니느웨 백성처럼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도 않았다.

(2)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 그들은 등불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의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석에서 전파하지 않으셨다. 복음의 빛이 등경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큰 특혜이다. 그러므로 들어오는 자마다 그것을 볼 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볼 수 있다.

2) 등불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을 보는 것이었다.

사물을 아주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만약 몸의 기관이 건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건강한 것이 아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라(34절). 영혼의 등불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의 계시의 등불이 우리에게 비치면 그것이 곧 축복이다.

① 만일 영혼의 눈이 성실하고 분명하게 보며 오로지 진리만을 목적으로 하여 자체를 추구한다면, 온 몸 즉 온 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충만한 빛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영혼을 채운다. 우리의 영혼이 복음의 빛으로 채워져서 어두운 부분이 없다면 모든 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영혼은 어두움 그 자체였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36절). 복음은 그것을 받기 위해 대문과 창문을 열어 놓은 자의 영혼으로 들어올 것이다.

② 영혼의 눈이 약하다면 온 몸, 온 영혼이 어두움으로 가득찰 것이다(34절).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성실함과 진리를 탐구하고 거기서 사랑, 빛, 능력을 받을 준비를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 세대의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 그들이 어둠 속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하나님 나라를 놓쳐버린 바리새인, 율법교사, 서기관(눅 11:42-54)

[ 성경묵상 ]

14-36절의 바알세불 논쟁과 표적 논쟁에서는 예수께서 바라새인 등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신 후 그들에게 대답을 해주셨는데, 여기서부터는 예수께서 오히려 먼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향해 그들의 외식에 대해 책망하시며 공격적으로 저주 선언을 퍼붓는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본단락에서 저주 선언은 모두 여섯 번 등장하는데, 그 중 세 번은 바리새인들에게(42-44절), 그리고 나머지 세 번은 율법사들에게(46-52절) 주어지고 있다. 따라서 본 단락에서의 저주 선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한편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의 공격적인 말씀이 막 12:38-40에서도 나오지만, 거기서는 저주 선언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마 23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 선언’이 모두 일곱 번 나오는데, 본 단락에 나오는 저주 선언의 내용과 상당 부분 중복된다.

그러나 본 단락에서의 저주 선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마태복음의 저주 선언과 구별된다.

첫째, 마태복음에서는 저주 선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그 곳에서 주어지고 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유대 지역 여행 중에 저주 선언이 주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각기 다른 기사이다.
둘째, 마태는 수난주간 화요일 성전 뜰에서 저주 선언을 하시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저주 선언이 어떤 바리새인이 초대했던 만찬 석상에서 주어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질문 1 ] 종교인 바리새인이 열심히 실천한 것은 무엇이며, 반면에 소홀히 한 것은 무엇인가?(42절)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 질문 2 ] 또 다른 종교인 율법교사들이 열심히 한 것과 소홀히 한 것은 각각 무엇인가?(46절) 율법교사들은 자신들이 지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짐에 대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다. 즉 그들은 율법은 잘 가르쳤지만 자신들은 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소홀히 함이 없이 하고, 이것들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이 세 가지의 항목이 율법에 정해진 십일조의 대상인가 하는 문제이다. 마살(H. Marshall)은 본절에 기록된 세 가지의 항목이 십일조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즉, 마태와 누가는 동시에 ‘박하’를 거론하지만 박하가 십일조의 대상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또한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회향’, 곧 ‘아네돈 향료’는 십일조의 대상이었으나 본절에 언급된 ‘운향’은 십일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랍비 문헌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마태가 기록한 ‘근채’는 명백히 십일조의 대상이었으나 누가가 사용한 모든 채소를 의미하는 ‘라카논’은 그 대상을 정확하게 지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의도적으로 이것이 십일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언급하는 박하, 운향, 그리고 모든 채소는 엄밀한 의미에서 십일조의 대상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로 규정된 요구 이상의 것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 생활은 바로 그들의 지나친 형식주의와 외식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공의’로 번역된 ‘크리 신’은 ‘크리시스’의 목적격이다. ‘크리시스’는 ‘정의’, ‘의로움’이라는 의미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용어이다(암 5:24).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의해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단어이다. 즉, 그들의 ‘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사회 정의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다(39절).

한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번역된 ‘텐 아가펜 투 데우’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등위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공의를 베푸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소중한 가치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단적으로 십일조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엄격하게 준수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과 공의에 대해서는 한치의 관심도 없었다. 이들의 무관심한 태도는 ‘버리는도다’로 번역된 ‘파레르케스테’가 잘 보여 준다. ‘파레르케스테’ 의 원형 ‘파레르코마이 (πa야PXOμat)’ 는 ‘지나치다’, ‘비켜가다’란 의미이다. 이로 보건대 바리새인들은 참된 진리의 핵심, 즉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에는 주의하지 않고 비켜가면서 외적 형식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파레르코마이’가 현재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마치 관행처럼 계속해서 하고 있었음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율법은 열심히 지켰으나,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 곧 공의와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공의도 행하고 사랑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평토장한 무덤'이란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만들어둔 무덤이다. 그래서 무덤인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겉은 그럴듯해도 속은 썩어가고 있는 허망한 종교인을 꾸짖는 말씀이다.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율법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였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도, 너희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의 수많은 세칙을 가리킨다(마 23:4). 당시의 율법교사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구전(口傳) 율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민다.

무덤을 만드는 것은 형식적인 경건에 불과하며, 내면에서는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배척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 또한 예언자들을 배척하고 죽였던 그들의 조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증인이 되며, 그들이 저지른 소행에 동조하는 것이다.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였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도 말하기를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겠는데, 그들은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였다.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창세 이래로 흘린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대하여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아벨의 피에서 비롯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0절에서 거론한 모든 선지자의 피는 구체적으로 누구에서부터 누구에게 이르는 것인가? 본절은 ‘~로부터’란 뜻을 지닌 ‘아포’와, ‘~까지’란 뜻인 ‘헤오스’ 구문을 사용하여 그것을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성경 분류상 처음 책인 창세기로부터 마지막 책인 역대기하에 이르기까지의 등장 인물 가운데 의로운 첫번째 죽음(창 4:8)과 마지막 죽음(대하 24:20-22)을 표현한 것으로 불 수 있다. 즉,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칭함을 받았으나 그의 형인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가랴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다가 죽임을 당한 의인이었다.

‘사가랴’ 즉 ‘자카리아스’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Origen, 185-254)에 의하면 본문의 사가랴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가 아니었으며 순교당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본문의 사가랴가 구약의 소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스가랴’(슥 1:1)였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는 베레가의 아들이었으며, 그 역시 순교당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37-100)에 의하면 바룩의 아들 스가랴가 성전에서 열심당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A.D.68년에 일어났으므로 이 일을 과거에 일어난 일로 묘사한 본문의 시제와 맞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스가랴가 역대기하 24장에 기록된 스가랴라는 주장이 있다. 스가랴는 요아스왕에게 의로운 직언(直言)을 함으로써,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대하 24:20-22). 그러나 대하 24장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바라가’가 아닌 ‘여호야다’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 주장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 기록이 3대 이상의 할아버지를 아버지의 위치로 기록하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마지막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여호야다는 사가랴의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호야다는 130세라는 고령에 죽었으므로(대하 24:15) 사가랴의 조부(祖父)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사실 사가랴의 아버지는 조부 여호야다처럼 유명한 제사장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었으므로, 성경 기자가 그를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다와 사가랴를 부자 관계인 것처럼 기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지식의 열쇠' ; 율법교사들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직무를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그릇되이 해석하고 정의와 사랑을 등한시 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예수께서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몹시 앙심을 품고서, 여러 가지 물음으로 예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렸다.

 

바리새인을 책망하심 ( 11:37-54 )

그리스도께서는 본문과 한 바리새인과 그의 손님에게 식사중에 사적인 대화로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이 말씀을 성전에서 공적인 설교룰 통해서 하셨다(마 23장). 예수께서 공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사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일치한다.

1. 바리새인 집에 식사하러 가심(37)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정중하게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한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하러 갔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기를 청하므로(37절). 우리는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아셨다. 만일 그가 좋지 못한 의도를 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한 의도를 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들어가 앉으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에게서 무뚝뚝하지 않고 사교적인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조심해야 되지만 경직될 필요는 없다.

2. 바리새인의 범죄(38)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보고 좋지 않게 여겼다. 그는 거룩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식사하시기 위해 앉으시고서 먼저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상하게 여겼다. 바리새인과 다른 손님들은 물론 손을 씻었다. 의식법에는 씻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손을 씻는 규정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손을 씻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셨다.

3. 그리스도의 책망(39-44)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1) 그리스도께는 바리새인들이 신앙을 의식적이며 사람의 눈에 잘 보이는 것으로 대치하고, 반면에 영혼에 관한 것이나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는 일은 미루거나 아주 잊어버리는 데 대해 책망하셨다(39,40절).

1) 그들은 어리석음을 범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39절). "너희는 물로 손은 씻지만 너희 마음의 사악함은 씻지 않는다." 잔이나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고 속은 깨끗이 하지 않는 자는 결코 청결한 종이 될 수 없다. 모든 신앙적인 헌신에 있어서 마음의 상태는 잔과 대접의 속과 같다. 마음이 더러우면 예배를 더럽힌다. 영적인 죄악의 지배하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모욕이다. 그것은 마치 종이 잔 겉의 먼지는 씻었으나 속은 거미집과 거미로 찬 잔을 그의 주인의 손에 쥐어주는 것과 같다. 원한과 사악은 더 크고 더럽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음란의 죄등을 잔의 겉에서 씻어낸 자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한 죄이다.

2)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가 본문에 나와 있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 즉 모세의 율법에 여러 가지 씻는 일들을 지시해 주신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화시키지 아니하시겠느냐. 밖을 위해서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속을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것을 만들지 않았겠는가. 이 육체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더욱 놀랍고도 기이하게 만들어진 이 영혼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다 만드셨다면, 그는 당연히 우리가 그 둘 다 돌보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영혼도 씻어 마음의 문둥병을 치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다 우리 음식물이 우리를 깨끗케 하는 규정을 추가하고 있다(41절). "먹기 전에 너희 손을 씻는 대신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여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몫을 가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할 것이며 너희도 그것들을 안전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의 분명한 의미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들의 소산물의 일정한 양을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깨끗한 것이 되었다(신 26:12-15). 우리가 예비치 못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편안히 누릴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몫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가진 것 역시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품으로써 음식을 사용할 우리의 자유를 유리 자신에게 분명히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소한 일에는 관심을 두면서 율법의 중요한 부분은 소홀히 하는데 대해 책망하셨다(42절).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수단에 관계되는 율법은 아주 정확하게 지켰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즉 종류대로 완전하게 드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는 일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데 대한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계되는 율법을 무시하였다. 너희가…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몫을 주면서도 하나님께는 너희 마음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허영을 책망하셨다.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절).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자리에 앉거나 문안받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들을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이 바리새인들의 내부는 부패한 무덤처럼 혐오, 교만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은 예배라는 미명하에 교묘하게 그것을 감춘다. 그러므로 그들과 얘기하고 그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은 죄로 더럽혀지고, 그들의 부패상과 악한 교훈에 감염되게 된다. 전염병은 서서히 침투하여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고 만다. 그러나 병에 걸린 자들은 결코 자신이 악화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 율법사와 서기관들에 대한 책망(45-54)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율법사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을 가졌지만, 율법사와 서기관들의 임무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분개한 율법사 한 사람이 있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절). 충실하고 우정깊은 충고를 악용하는 것은 죄와 영합하여 거기서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어리석은 소행이다. 그들은 충고자들이 자기들을 비난하려 한다며 화를 내고 자신들을 합리화시킨다. 이 율법사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지지하면서 그의 죄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

(2)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화 있을 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46절). 그리고 또 '화 있을 진저 너희 율법사여'라고 말씀하셨다(52절).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평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들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항의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화를 자초할 뿐이다.

1) 율법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시키신 것보다 더 부담이되게 신앙의 봉사를 하게 하고 자신들에게는 더 가벼운 짐이 되게 한 것에 대해 책망받았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절). 다시 말해서, ①"너희는 그들과 함께 짐을 지지도 않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그 속박에 구속받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②"너희는 너희가 다스리는 자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지 않을 것이며 손을 대지도 않을 것이다. 즉 너희는 무겁고 어려운 짐을 진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짐을 없애 주거나 덜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두 손을 가지고 나오나 장로들의 엄격한 전통을 완화시키는 일에는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2)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죽였던 선지자들을 존경하는 척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그들의 조상들은 똑같은 임무를 띠고 그들에게 보내진 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다(47-49절).

① 이 위선자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았다'(47절).

즉 그들은 선지자들을 찬양하며 그들의 무덤에 비문을 세웠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유물을 무덤 속에 넣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선지자들의 자손인 양 그들의 경건을 추모하고자 그 무덤들을 수선하고 아름답게 꾸며 신성하게 하였다.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선지자들의 영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온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 철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에게 보내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것이다. "내가 선지자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저희는 선지자들을 모함하고 반대할 뿐만 아니라 죽이고 핍박할 것이다."

③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일을 아주 다르게 해석하실 것이다.

즉 그 일은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45절):그들의 조상들이 이곳에 매장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일은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다. ④그들의 박해가 다하면 그들은 심판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50,51절).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박해한 죄는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어떤 죄보다 더한 것이므로 진노가 그들에게 가장 심하게 내려질 것이다. 사실 로마인에 의한 그들의 멸망은 너무 가공할 만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선지자들을 박해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보복으로 여겨졌다.

3)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한 것에 대한 책망을 받았다(52절).

그들은 자기들의 임무에 따라,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성경을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혼돈시켰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그 열쇠를 사용하거나 그들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대신에 그것을 그들에게서 감추었다. 이러한 일을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문을 닫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마 23:14). 그들은 구약의 지식을 통해 때가 찼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안내나 도움을 받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쫓아내겠다고 위협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방해하고 좌절시켰다.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더 나쁘다.

끝으로 본 장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는가를 볼 수 있다(53,54절).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책망이 심하기 때문에 그를 저지시키기 위해 격분하여 대든다는 듯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밉게 보거나 정부가 그를 불쾌하게 생각하도록 만들만한 것을 책잡고자 '목을 지켰다.'

죄를 충실하게 책하는 자는 많은 대적들을 예상해야 한다. 인내로써 이러한 종류의 시험을 견디고 신중하게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죄인들의 반대를 견디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자. 출처 ; 메튜헨리주석


예수 당시의 종교적 상황


1. 배타적 유일신 신앙

━ 주전 587년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바빌론의 식민지가 되었고, 지도자들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은 이러한 그들의 재난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불순종에 대한 그의 심판의 수단이라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경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 생활은 이 예언이 진리임을 입증하였습니다. 그 반면 제2이사야(이사야서 40-66장)는 바빌론을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한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유대인에게 귀향을 허락한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의 징표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온 우주의 유일한 주권자임을 바빌론 포로기의 예언자들은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 온 우주의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은 왜 자기가 선택한 백성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을 허용했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무력함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이라 답변되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첫째, 유대인은 여호와만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에 빠졌으며 이방 신들을 섬겼습니다. 둘째, 그들은 여호와를 순결한 가운데 예배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이방적 관행으로 예배를 타락시켰습니다. 셋째, 그들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준 도덕적, 제의적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을 정화하기 위해 그들을 포로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반성과 함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배타적 유대주의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기초를 회복한 셈입니다.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모든 다른 백성들과 구별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며, 외국인과 결혼해서도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러한 배타주의의 형성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미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은 민족의 "배신자"로 간주되었으며(스 10: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 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방인 배우자와 이혼하고 그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평일과 구별되는 여호와의 날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타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철저하고 증오하는 구실로 발전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생존하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로마의 헬레니즘화와 로마 황제의 통치를 끝까지 거부하였던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배타적 신앙에 있었습니다.


2. 율법과 성전

━ 예수 당시 유대인의 사회는 여러 종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파에 속하든 모든 유대인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습니다. 율법(영어의 Law)은 히브리어 토라(Torah)의 적절한 번역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계약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좁은 의미의 "계명"은 물론 구약에 포함된 모든 책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토라는 오경(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을 가리키며,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킵니다.

━ 율법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표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유대인 공통의 신앙과 행위의 기반을 제공해 주었으며,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을 결속시키는 내적 지주(支柱)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지식은 그들에게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써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5경의 613가지 율법으로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과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자가 필요하였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초기에는 학식 있는 제사장들이 권위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주전 3세기 말에는 평신도 가운데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토라의 문서들을 보존하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서기관 내지 율법 학자들의 계층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은 더이상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뜻은 율법에 충분히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이 서기관 내지 율법 학자에게 위임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들은 자연히 스스로를 예언자의 계승자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주요 기관은 회당이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오경에 기록된 율법 외에 그것의 해석 곧 할라카(Hallach)도 오경의 율법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 율법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을 형성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집"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해마다 성전으로 헌금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일생에 한번이라도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키(Kee) 교수에 의하면, "예배의 중심은 희생 제물의 봉헌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제물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바쳐졌으며 특별한 절기에는 특별한 제물이 바쳐졌고 제사 의식도 훨씬 복잡했습니다. 각 개인이 바치는 제물이 매일 줄을 이었기 때문에 토라가 요구하는 수많은 제물이 빠짐없이 다 바쳐졌습니다. 성전 지역은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과 일반인, 희생에 쓰일 짐승과 그것을 파는 사람들로 늘 붐볐습니다." 게다가 제사장들은 로마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로마 제국의 동전을 성전 안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유대인 전용 동전만 성전 안에서 사용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는 언제나 환전상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제사용 헌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예수 당시 몇 배의 이익을 취하였으며, 이익 중 상당 부분은 제사장들과 레위인에게 뇌물로 바쳐졌습니다.

━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레위의 자손은 제사장들을 수행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평신도가 바치는 제물에 의지하여 살도록 율법은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먼저 이스라엘의 종교적 대표자였습니다. 그는 속죄일에 유대인의 대표로서 하나님 자신이 임재하는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백성이 그 해에 저지른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바쳤으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와 자비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대표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명목상의 수장으로(실질적 수장은 로마 황제였다) 산헤드린의 의장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로마에 대한 반역죄 등 무거운 범죄에 대한 판결을 제외한 유대인의 자율적 통치기관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세속법과 종교법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이스라엘 민족 일상생활의 거의 전 부분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산헤드린의 의장인 대제사장은 유대인의 사회에서 상당한 권한과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예외 없이 부유하고 귀족적인 가문의 출신이었고 지배 세력과 타협하였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3. 사두개파

━ 예수가 생존하던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일군의 사람들은 사두개파였습니다. 사두개라는 명칭은 솔로몬 왕에 의하여 대재상으로 임명되었던 사독으로부터 유래함이 거의 확실합니다(왕상 2:35참조). 에스겔서 40∼48장에 의하면, 사독의 후손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겔 40:46, 43:19, 44:15, 48:11 참조). 이에 근거하여 사독의 후손들은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법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제사를 집행하였습니다.

━ 하스몬 왕가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겸하고 있을 때, 하스몬 왕가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의 협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일군의 제사장들은 하스몬 왕가의 요구에 응하여 그에게 협조하고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반면, 다른 일군의 제사장들은 하스몬 왕가의 유혹을 거부하고 끝까지 율법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이 의로운 제사장들 가운데 일부는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고 사해 서쪽에 은거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복음서에 나오는 사두개인들은 하스몬 왕가에 협조한 제사장들의 자손들입니다. 부유하고 귀족적인 제사장 가문 출신인 사두개파 사람들은 현실주의자요 타협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상황에 잘 적응함으로써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스몬 왕가에 속한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을 산헤드린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 산헤드린의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산헤드린의 최고 의장인 대제사장은 사두개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두개파 사람들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의 정치권력은 사실상 그들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제사권을 장악하면서 외세와 영합하고, 정치권력자의 편에 서서 백성을 억압하는 일에 동조하는 동시에 로마 제국의 희랍화 정책에 협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그들은 로마와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정치권력이 대제사장의 임무를 조종하거나 성전의 보물을 약탈할 때, 그들은 로마에 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 사두개파는 율법의 글자 자체의 뜻을 고집하였고, 바리새파가 높이 평가하는 구전(oral tradition)을 율법과 같은 위치에 두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의 냉철한 사고는 천사와 사탄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행 23:8). 그들은 "최후의 심판" 때 일어날 죽은 자들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막 12:18).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정치 권력자들을 인정하였으며,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젤롯당원들의 적이었을 뿐 아니라, 마음 속으로 외세를 거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도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주후 66년 반 로마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혁명을 무마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파괴될 때, 그들도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사두개파의 소멸은 그들의 경쟁자였던 바리새파의 승리를 뜻하였습니다. 이 재난에서 살아남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1차 혁명 이후 유대교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4. 바리새파


━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peruschim, 아랍어로 perischajja 곧 "구별된 자"를 뜻합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마카비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카비 일가가 반 로마 혁명을 일으켰을 때, 율법에 충성하는 "경건한 자들" 곧 "하시딤"이 혁명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들이 혁명에 가담한 것은 정치적 권력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마카비 일가가 하스몬 왕가를 세우고 정권에 눈이 어두워져 대제사장의 직분까지 찬탈했을 때, 하시딤 일파는 하스몬 왕가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였습니다. 특히 하스몬 왕가의 마지막 왕녀 마리암네가 로마 황제가 팔레스틴의 왕으로 임명한 헤롯과 결혼하자, 그들은 하스몬 왕가와 결별하였습니다. 이 때 세속을 버리고 은둔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엣세네파이고, 세속 안에 살면서 경건과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대 변혁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들은 무력을 통하여 정치적 변혁을 변화시키려는 일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젤롯당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 바리새파는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정결과 십일조의 계명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였거나 신체에서 부정한 것이 유출된 사람은 종교적 정결을 상실하였으므로, 정결의 목욕을 하거나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사 기도를 드리는 손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식사시간마다 손을 씻었습니다(막 7:3 이하 참조). 그들은 사람의 정결뿐 아니라 식사에 사용되는 그릇의 정결도 유의하였습니다. 쥐가 접시로 지나가거나 생선 뼈 하나가 그릇에 떨어져도 부정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잔과 접시도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했습니다(마 23:25 참조). 레위인이 먹고살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십일조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땅에서 나는 소산물은 물론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하며, 조미료와 채소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그들은 매주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자발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구제금을 희사하였으며, 하루에 세번씩 기도의 시간을 지켰습니다. 길을 가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길가에서 몸을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돌리고 기도하였습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규정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얼마나 먼 길을 가도 좋은가, 무엇을 운반해도 좋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며 해서는 안되는 일은 무엇인가, 안식일에 결혼식을 집행할 수 있는가,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먹어도 좋은가, 손을 어떻게 씻어야 하는가 등을 규정하고 이를 정확하게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리새파의 모습을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이와 같이 바리새파는 소위 경건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별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바쁜 일반 서민들이 구약의 율법은 물론 율법의 해석(Hallach)까지 외우고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 "율법 없는 자들"이 양산되었습니다. 그 당시 "죄인"이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율법과 마찰을 일으키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죄인에 속하였습니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병자와 불구자들도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러한 죄인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막 2:14∼17). 바리새파는 이러한 사람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였습니다.

━ 바리새파에는 소수의 제사장도 있었지만, 도시와 시골에 사는 농민들, 상인들, 수공업자들도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회당장의 대다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정결에 관한 계명을 보다 더 철저히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습니다(눅 7:36, 11:37 이하 참조). 십일조의 규정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회원 상호 간에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당시 바리새파의 수는 약 6,000명이었습니다(Jüdische Altertümer XVIII, 42).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과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날라 준다든지, 남의 집 장작을 쪼개어 주는 등 선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상쇄 받고 의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5. 젤롯당원

━ 주후 6년 유다 지역의 분봉왕 아켈라우스가 로마 황제에 의하여 직위를 잃고 갈리아 지역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유다 지역의 통치자로 파견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세금 징수를 위하여 유다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호적 등록을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일군의 유대인들은 분개하면서 저항하였습니다. 일군의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치적 행동은 하지 않았으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로마 총독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에 "열심 하는 자들"(그리스어로 Zeloten)은 모든 이론에 있어 바리새파와 일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자유를 지켜야 하며 하나님만을 그들의 주와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를 주로 인정하며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제1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젤롯당원 곧 열심당원들은 로마 황제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를 퀴리오스(주)라 부르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처럼 메시야의 구원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을 불사하는 적극적 행동을 통하여 역사를 변혁해야 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리한 단검을 숨기고 다니면서 로마 군인이나 매국노를 찔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단검(라틴어로 sica)을 지니고 다녔으므로, 로마인들은 그들은 "시카리"(Sikarier)라 불렀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가 예수가 태어난 직후 젤롯당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행 5:37 참조). 로마 점령군에 대하여 그들이 공개적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 군대가 공격하기 어려운 유다 광야에 은신처를 정하고 산발적으로 로마 점령군에 대항하였습니다. 로마에 협력하는 자들을 증오하고 끊임없이 민란을 꾀하였습니다. 로마 점령군에게 그들은 도적이나 노상강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민층 유대인들에게서 그들은 점점 더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 주후 66년 제1차 반 로마 혁명의 주동자들은 젤롯당원이었습니다. 5년이나 계속된 반란은 주후 70년 8월 로마 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진압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두 번째 성전)이 불에 타 파괴되었습니다. 이 때 끝까지 저항하던 약 960명의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젤롯당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유다 광야에 있는 마사다 요새(정상 부분의 크기는 길이가 약 600m, 가운데 폭은 약 250m)로 피신하였습니다. 엘리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을 지도자로 하는 이들은 마사다 요새에 올라가 진을 치고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실바(Silva) 장군이 이끄는 제10군단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마사다 요새를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3년간 포위 공격 끝에 마사다 정상까지 이르는 토담 경사로를 만들어 주후 73년 5월 로마 군대가 마사다 요새 안으로 진격했을 때, 그들은 놀랍게도 아무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요새 안에는 무서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요새에서 저항하던 960명의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가 진격하기 전, 모두 자결하였던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 "로마 군대가 마사다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밤,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960여 명의 동지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의 칼에 의한 죽음이냐. 벤 야일은 제3의 선택을 제시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데 모아 불살랐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가족 중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끊게 했다.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열 사람을 뽑아 나머지 남자들을 죽이게 했다. 뽑히지 못한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 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아홉 명을 죽인 뒤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이렇게 계속된다: "로마 군대가 마사다를 함락시켰을 때, 동굴 속에 숨어 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마사다 최후의 증인들이었다."


6. 엣세네파

━ 요세푸스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외에 엣세네파가 제3의 그룹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이름은 복음서에 나타나지만, 엣세네파의 이름은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와 요세푸스의 저서에서(Jüdischer Krieg II, 119∼161, Jüdische Altertümer XVII, 18∼12) 우리는 엣세네파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엣세네라는 이름은 아랍어 hasayya 곧 "경건한 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엣세네파도 바리새파와 같이 하시딤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하시딤이 하스몬 왕가를 떠날 때, 바리새파는 세속 안에 살면서 세속의 개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꾀하였던 반면, 엣세네파는 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엣세네파는 세속과의 관계를 피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필로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약 4,000명의 엣세네파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로 작은 마을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공동체에 바치고 공동체가 나누어주는 것으로 생활하였습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으며 여자들과의 관계를 피하였습니다. 결혼한 엣세네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후손의 존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임산부의 임신 기간 동안 성관계는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공동체에 입단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1년간의 시험 기간을 거쳐야 했고, 2년 후에야 완전한 멤버가 되어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 하루의 일과는 아침 기도회로 시작하였습니다. 오전에는 들에서 노동을 하였고, 점심 때가 되면 모두 찬물로 몸을 씻고 흰옷을 갈아입은 후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오후에도 들에서 저녁 시간까지 노동하였습니다. 굶주림을 피할 정도만큼만 먹었습니다. 함께 모여 있을 때에는 침묵을 지켜야 했고,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한 사람씩 말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엣세네파의 회원은 불의한 자를 증오하고 의로운 자의 편에 서야 했습니다. 상급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했습니다. 안식일의 계명들과 정결에 관한 계명들이 엄격하게 준수되었습니다. 계명을 어긴 자는 벌을 받았고 중요한 계명을 어긴 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이 그 안에 갇혀 있는 감옥입니다. 인간이 죽을 때 영혼은 지옥으로 내려갑니다. 엣세네파의 중심지는 사해 언덕에 있었습니다. 일부 엣세네파 사람들은 반 로마 혁명에 가담하였고 생포되어 죽음의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늠름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Josephus, Jüdischer Krieg II, 152 f.). 반 로마 혁명의 실패와 함께 엣세네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쿰란 문서에 엣세네파라는 이름이 아무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쿰란 공동체가 엣세네파의 중심지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7. 쿰란 공동체

━ 쿰란은 사해 서북쪽에 위치한 고원 지대로서, 예수 당시 이 지역에 은둔하면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집단을 가리켜 우리는 쿰란 공동체라 부릅니다. 유대인의 제1차 반 로마 혁명 때에 로마의 베스파시안 황제의 제10군단이 사해에까지 진군하였고, 이 때 쿰란의 수도사들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부 몰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몰살당하기 직전 그들이 동굴에 숨겨 둔 문헌들이 1947년 한 아랍인 목자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헌이 유명한 쿰란 사본 혹은 쿰란 문헌입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동전을 추적할 때, 쿰란 공동체는 주전 약 150∼140년에 세워졌으며, 동전이 심하게 불에 탄 흔적을 보아 무참히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로 30m 세로 37m의 크기를 가진 중심 건물, 함께 식사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큰 강당, 그릇들, 서재실, 작업실, 도서실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침실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수도사들은 그 주변에 널리 퍼져 있던 동굴에서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 쿰란 공동체의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습니다:

━ 1. 속세로부터 도피와 은둔생활: 바리새인들은 속세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의 개혁을 꾀하였던 반면, 쿰란의 수도사들은 속세와의 모든 관련을 철저히 끊어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그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던 묵시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는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쿰란의 수도사들은 세속을 떠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종말의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 2.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의 이원론: 쿰란 공동체의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실 때 선한 영과 악한 영, 진리의 세력과 거짓의 세력을 있게 하셨습니다. 역사는 두 영의 싸움의 과정입니다. 쿰란의 수도사들은 진리의 영에 가담하여 거짓의 영을 싸워 이겨야 합니다. 각 사람의 삶은 결국 하나님의 인도 하에 이루어지지만 각 사람은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는 회개하여 바른 길을 걸어야 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 3. 엄격한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현실의 삶에 적응될 수 있도록 해석하였던 반면, 쿰란 공동체는 율법 전부를 조금도 타협 없이 있는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안식일 법에 나타납니다: 해가 뜬 다음 햇빛의 지름 길이만큼 햇빛이 문에서 떨어져 비치는 순간부터 일을 해서는 안된다(Damaskusschrift X, 15 f.). 어리석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 마을로부터 반팔 천번의 거리를 나가서는 안된다(바리새인들의 규정에 의하면 반팔 이 천번의 거리). 우물이나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건져 주어서는 안된다(XI, 13 f.).

━ 4. 금욕 생활: 쿰란의 수도사들은 성 관계를 불결하다고 생각하여 일체의 성 관계를 피하였으며 따라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소유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유를 공동체에 바치고 함께 나누어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였습니다. 쓸데없이 많이 먹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배고픔을 해석하는 데에 필요한 양의 음식만 먹었습니다.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말, 예를 들어 농담도 금지되었습니다. 큰 소리로 웃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 5. 엄격한 계급 제도와 상급자에 대한 복종: 어둠의 자녀들과 싸우기 위하여 공동체는 엄격한 계급 제도와 질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독의 후손들인 제사장이 가장 윗 자리에 있었고 그 아래에 레위인, 그 아래에 평신도 출신의 수도사, 그 아래에 수도사 지망생이 있었습니다. 공동체에 입단하기 위하여 2년의 시험 기간을 거친 다음, 상위급 수도사들이 입단 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입단하는 사람은 입단식 때에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기로 맹세하였으며 그의 모든 소유를 공동체에 바쳤습니다. 식사할 때에 제사장들이 상석에 앉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상급자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엄한 벌을 받았습니다.자기의 소유를 거짓 신고하면 일년 동안 매끼니 음식량의 4분의 1을 받지 못했고, 필요 없이 옷을 벗고 다니면 반년 동안, 어리석은 말을 하면 3개월 동안, 침묵의 시간에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10일 동안, 회의 시간에 졸거나 크게 웃으면 30일 동안 음식물의 4분의 1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추방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추방당한 자는 공동체의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지만, 바깥 세계로부터 음식물을 얻는 일도 그에게 금지되었습니다. 그것은 세속과의 불결한 접촉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남은 길은 공동체가 그를 다시 부를 때까지 광야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 소유도 없이 아주 속세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 이러한 특징을 가진 쿰란 공동체는 엣세네파와 많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이 공동체를 지도하며, 제사장적인 정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일 몸을 씻으며, 의로운 자들의 공동체로서 종말의 구원자를 대망 하고자 일반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며, 사유재산이 없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은 쿰란 공동체와 엣세네파의 공통된 요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엣세네파"라는 이름이 쿰란 사본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엣세네파라는 명칭이 외부인들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쿰란 공동체와 엣세네파는 자신을 참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그의 비밀을 계시한 거룩한 자, 선택된 자로 이해하였습니다.


8. 서기관들

━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치며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당시 율법은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종교적,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법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결혼과 이혼의 문제, 부동산 매매의 문제에 대하여 답변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매우 통달하였으므로 현자, 율법 교사 혹은 선생님(랍비)이라고 불렸습니다.

━ 서기관의 직책은 세습제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나 유력한 가문의 사람들 중에 서기관이 된 사람도 있었지만, 상업, 수공업 등 각종 직업 출신의 서기관도 있었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출신도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자신의 생업을 가지고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천막을 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한 바울의 모습이 그 당시에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서기관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선배 서기관 밑에서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도제의 생활을 하면서 율법을 외우고 율법의 해석을 배웠습니다. 질문과 답변의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생도가 선생에게 질문하면 선생은 학생에게 "너는 율법에서 무엇이라고 읽었느냐?"라고 되묻습니다(눅 10:25,26 참조). 생도가 자신이 율법에서 읽은 것을 답변하면, 선생은 그의 답변이 옳다고 말합니다(눅 10:27,28참조). 생도는 선생에게 계속 질문하여 더욱 깊은 통찰을 얻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도 자신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생이 생도에게 질문을 제기합니다(눅 10:36 참조). 생도가 성공적으로 수학을 끝내었다고 생각될 때, 선생은 그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생도가 선생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제 그는 "랍비"라는 존칭을 얻으며(마 23:7 이하) 긴 옷을 입고 사람들의 존경과 인사를 받습니다(막 12:38).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어 국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예수 당시에 가장 유명한 서기관은 힐렐(Hillel)과 샴마이(Schammai)였습니다. 바빌론의 디아스포라 생활에서 돌아 온 힐렐의 가르침은 온건하였던 반면, 샴마이의 가르침은 엄격하였습니다. 힐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가말리엘(Gamaliel)이었고, 바울은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행 22:3). 제1차 반 로마 혁명 이후 유대교의 공동체를 재건한 주도적 인물은 서기관이었으며, 그 중에 랍비 자카이(Rabbi Jochanan b. Zakkai)가 가장 유명합니다. 주후 2세기 발 코바(Bar Kochba)가 제2차 반 로마 혁명을 일으켰을 때, 랍비 아키바(R. Aqiba)는 그를 메시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발 코바가 살해됨으로 인하여 그의 선언이 잘못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발 코바의 죽음과 함께 아키바는 물론 많은 서기관들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인물은 랍비 이슈마엘(R. Jschmael)입니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유대교 공동체가 산산조각이 났을 때 랍비 예후다(R. Jehuda)는 율법 해석들을 정리하는 일에 전력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주후 2세기 말에 미슈나(Mischna)가 완성되어 모세의 율법과 함께 유대교 공동체 생활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9. 묵시 사상

━ 지금까지 고찰한 혼란스럽고 괴로운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 성취될 것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기는 고사하고 고난이 더욱 더 커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 안에서는 성취될 수 없고, 이 세상의 종말에 성취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 본래 묵시 사상(Apokalyptik)이란 apokalypsis 곧 묵시 또는 계시를 뜻합니다. 그것은 이 세계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게 되었다 하여 묵시 사상이라 불립니다. 묵시의 내용을 기록한 문헌을 우리는 묵시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묵시를 받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자기의 이름으로 기록하여 남기지 않고, 에녹, 아브라함, 야곱과 그의 아들들, 모세,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 다니엘, 에스라 등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묵시를 받은 것처럼 기록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열거한다면, 에디오피아어와 슬라브어로 기록된 에녹의 묵시록, 라틴어로 남겨진 "모세의 승천", 사리아어로 남겨진 바룩의 묵시록, 야곱의 12 아들에 대한 유서, 쿰란 문서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사망하고 부활한 후에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묵시 사상을 받아들이고, 예수가 묵시 사상이 기다리는 메시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시키고자 한 유대교는 묵시문학을 포기하였습니다. 유대교 회당은 그리스도인들이 읽는 묵시 문학서들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극히 일부의 묵시 문학서만이 히브리어로 남게 되었고, 대부분의 묵시 문학서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승되었습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서들의 주요 내용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습니다.

━ 1. 묵시 사상은 이원론적 역사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원론적 역사 이해는 두 에온(Aeon) 곧 두 시대에 대한 신앙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시대를 지으셨습니다(제4 에스라서 7:50). 이 시대는 악한 영이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죄악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종말이 가까우면, 무서운 병들이 사람들을 휩쓸 것이며, 어린 아이들이 노년의 흰 머리카락과 함께 태어날 것입니다. 기형아가 태어날 것이며 여자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땅은 더이상 열매를 맺지 않을 것이며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메마를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대항하여 싸울 것이며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형제가 서로 싸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 위에 어디에도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홍수, 전염병 등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며, 별들도 규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그 길을 이탈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대가 멸망으로 끝날 때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대가 올 것입니다.

━ 2. 묵시 사상은 비관론적이며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세계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간은 더욱 더 악하게 될 것이며 죄악이 세상에 가득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운명은 고통과 멸망으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열렬히 요구했던 반면, 묵시 사상가들은 회개를 별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을 사람과 멸망을 받을 불의한 사람이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3. 묵시 사상은 메시야의 오심과 최후 심판을 믿습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 메시야가 하늘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까지 무덤에서 부활시킬 것입니다(죽은 자들의 부활은 이러한 묵시 사상으로부터 유래함). 그러므로 죽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아무런 한계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최후의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의롭다고 판단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반면, 불의 하다고 판단되는 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 4. 묵시 사상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습니다. 죄악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시대의 세계가 최후의 심판과 함께 끝난 다음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세계,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피조물 안에 나타나는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정치적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 5. 시간의 수를 계산하는 것이 묵시 사상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경건한 자들에게 역사의 과정의 시간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6,000년 후에 안식일이 올 것인데, 이 안식일은 천년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억압은 7의 절반인 3.5년간 계속될 것입니다.

━ 6. 하나님의 구원을 이 시대의 역사 내에서 기대하지 않고 이 시대의 역사 밖에서, 이 시대의 역사가 끝난 다음에 기다리는 것도 묵시 사상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전통적 역사 이해와 상치됩니다. 구약 성경의 전통적 역사 이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 시대의 역사 안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 7. 묵시 사상은 악한 영이 이 시대의 역사를 지배한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主)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인 동시에 온 세계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온 세계의 조물주입니다. 악한 영도 하나님의 허락과 계획 하에서 움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 시대는 물론 장차 올 시대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이시요 섭리자입니다.

━ 8. 이러한 생각과 함께 묵시 사상은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한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이 온 세계의 주이시라면,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에게 제한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도 그 근거를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서 온 세계와 모든 민족의 구원에 있습니다. 묵시 사상의 이러한 생각과 함께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 사상은 근거를 상실합니다. 출처 ; 예수의 역사적 배경

 

 

제자들의 삶(눅 12:1-12)

[ 성경묵상 ]

[ 질문 1 ] 제자들에게 외식하지 말라고, 위선을 떨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2-3절)

[ 질문 2 ] 제자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4-5절)

12:1-12에서는 제자 들을 향해 바라새인들의 외식에 대해 경계령을 내리시고, 또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에 대해 교훈하신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적대 관계가 형성 되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커다란 불안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확립된 종교적 질서 및 권위와 충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마땅히 두려워할 자가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킴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환난에 대비케 하신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그 동안에 수만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먼저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덮어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한 말을 사람들이 밝은 데서 들을 것이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선포할 것이다."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죽인 뒤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시지 않는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이다.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성령 모독에 비해 예수 부인의 죄가 가볍다는 말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에 대한 모독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죄라는 경고로 보인다.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가들 앞에 끌려갈 때에,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대답할까, 또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을 바로 그 시간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다."

 

외식하지 말 것과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심 ( 12:1-12 )


1. 많은 무리가 모임(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고소할 증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무리들은 아직 그를 따라 다니며 그를 찬미하고 존귀히 여겼다. 그 동안에(1절), 즉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있는 동안에 백성들은 오후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과 식사하신 후에 설교를 하셨다. 그는 모여든 무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비록 아침 설교에서 무리가 모였을 때에(눅 11:29), 악한 세대라고 심하게 그들을 꾸짖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 들었던 것이다. 그 무리들은 바리새인들 보다 훨씬 더 그러한 책망을 잘 참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무리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모여 들었다. 본문에는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무리들이 말씀을 듣기위해 앞으로 다가가려는 것을 보여 주는 흐뭇한 광경이다. 그러한 고기떼가 있는 곳에 그물을 던진다면 얼마라도 잡히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제자들에게 교훈하심 (1-12)

(1) 그는 외식을 경계하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는 이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하셨다. 이들은 그의 보다 특수한 보호아래 있었으므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듯이 특별히 그들을 경계시키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많은 신앙 고백을 하였는데, 신앙에서의 외식은 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죄이었다. 외식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다도 그들에게 있어서 더 악한 것이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었을 것이지만 여전히 외식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무리가 듣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경고에 대해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자 함이었으며, 세상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경계시킨 죄에 대한 묘사 :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했다(1절). 그것은 누룩이다. 즉 누룩처럼 퍼져나가 온전한 사람 속으로 그리고 그가 행하는 모든 것 속으로 교묘하게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것은 누룩처럼 부풀며 시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을 자만심으로 우쭐대게 하고 악의로 몹시 상하게 하며,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에게서 발견되는 죄이다. 그들을 닮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들이 유대교로 가장하듯이 너희들도 그리스도교로 위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2)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2,3절)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절). 조만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만일 너희가 공중앞에서 행한 너희의 신앙 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어두운데서'말한다면 그것은 '광명한 데서' 들릴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은 알려질 것이며 따라서 너희의 어리석음과 허위가 밝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의 신앙이 자기 마음의 악을 치유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언제까지나 가면으로 덮인 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위선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무화과 잎을 벗기게 될 그날을 오고 있다.

(2) 이에 덧붙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할 것과 비겁함이나 천박한 불안으로 인해 그 의무를 배신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든지 말든지, 용납하든지 않든지 간에 그들에게 진리, 곧 온전한 진리를 말하며 진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은밀히 전해졌던 그것을 전파하되 누가 성을 내든 안내든 너희는 그것을 널리 전파하라."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 결코 타락의 원인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난을 받게하는 원인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용기로 자기 자신을 무장해야 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그들의 일에 대해 거룩한 결의로 강하게 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설명을 들려 주신다.

1) 너희 원수들의 권세는 제한된 권세이다(4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친구이다. 그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며 그들에게 이 우정어린 충고를 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 친구로 인정하는 자들은 어떠한 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육신을 죽이는 것 이외에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근본적인 해를 결코 가할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육신을 보다 빨리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가게 하며, 영혼 또한 그의 영원한 희락으로 돌아가게 할 뿐인 것이다.

2) 하나님은 세상의 지극히 권세있는 사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5절). "너희는 그리스도를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분노를 살 것이나 그를 부인하고 거절함으로 말미암아서는 너희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축복받은 순교자인 후퍼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로 생명은 달고 죽음은 쓰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더욱 달고 영원한 죽음은 더욱 쓰다."

3) 선한 그리스도인과 선한 사역자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호아래 있다(6,7절).

하나님은 참새와 같은 지극히 하찮은 미물조차도 인식하고 계시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릴 정도로 그것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는 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그런고로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잊혀진 바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라."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속한 제자들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인식하고 계시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7절). 하물며 너희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흘리는 그 땀방울임이랴!

4) "너희가 현재 그리스도를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 저 큰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시인하심이나 부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8,9절).

그리스도를 지금 시인하는 자들이 저 큰 날에 얻을 것을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든지 간에 우리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그들을 위해 고난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했음을 시인하실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그들이 비록 그를 부인함으로 생명 그 자체를 구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결국은 대실패자가 될 것을 확신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부인하는 그들을 알지 못하시며 그들을 시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5) 그들이 곧 보내심을 받게 될 사명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었다(10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전파에 담대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자들 보다(회개의 최후 수단인 성령이 제자들에게 부은바 된 후) 이들을 배척하는 자들에게 더 한층 쓰리고 엄중한 심판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그럴 경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죄사함의 특권이 거부되어질 것이다. 그런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의한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이다."비록 처음에 그들을 통해 진리를 확신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기뻐하는 자는 소망이 있으나 거스려 말하는 자는 완전히 내버림을 당했다.

6) 그들은 어떠한 시험에 부름을 당할지라도 이를 충분히 감당할 힘을 공급받을 것이며 명예롭게 그 시험들을 극복할 것이다(11,12절).

그리스도의 충성된 순교자는 겪어야 할 고난 뿐만 아니라 전해야 할 증거 곧 증거를 위한 선한 고백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이를 잘 해 내려 힘쓰는 자이다. 따라서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고난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대의는 손상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그의 맡은 일이라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서, 너희 믿는 바 교리에 대하여 심문하려 하거든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지에 대해 염려치 말라"

① 너희 자신을 구하기 위해 염려치 말라. 너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너희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그일을 효과적으로 이루실 것이다.

② 너희 주인을 섬기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이것을 의중에 두되 당황하지 말라.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대의를 위하여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하며 어떻게 대답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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