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와 베레아 사역 후반부(눅 15:1-17:10)
15:1-17:10은 넓게는 9:51-19:27로 이어지는 유대 및 베레아 사역을 다루는 기사의 연속이다. 그리고 좁게는 13:22-17:10까지 이어지는 베레아 사역을 다루고 있는 기사의 후반부이다. 예수님의 유대 및 베레아 사역은 사건(Events)보다는 강화(Discourses)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는 바,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총 23개의 비유(Parables) 중 16개가 이 부분에서 발견되며, 반대로 기적(Miracles)은 총 20개 중 단 4개만이 이 부분에 기록되었을 정도이다. 특히 15:1-17:10에 나오는 드라크마 비유, 탕자 비유, 불의한 청지기 비유, 부자와 나사로 비유 등 유명한 비유들은 누가복음에만 고유하게 등장하는 비유들이다. 이러한 비유들은 한편으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이 지녀야 할 합당한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제15장의 두 문단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의 세 가지 비유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1-2절에서 이 비유들이 주어진 배경이 설명되고 있다. 즉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께 몰려드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미워하시므로 의인(義人)이라면 죄인들과 함께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하는 명칭처럼 철저히 죄인들을 멀리하고 자신들을 그들과 분리시키는 삶을 살았으며, 또한 세리 및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를 비난하고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세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죄인들(Lost Sinners)’이 회복되었을 때의 하나님의 기쁨을 제시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시는 것이다.
《탕자의 귀향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619),/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당시 주요 화파였던 볼로냐파의 작품을 거의 독학으로 익히고, 특히 루도비코 카라치의 자연주의적인 회화에 영향을 받아 고전적인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구이도 레니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그의 사후 볼로냐파를 이끌었다.
이어 16:1-13은 올바른 물질관에 관해 교훈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제자 들에게 직접 주신 것이지만(1절), 바리새인들이 듣고 있는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므로(16:14)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물질관을 간접적으로 꼬집은 것이기도 하다. 이 비유를 통한 교훈에서 예수께서는 충성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해 주시는데, 곧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되다는 것이다(10절). 그리고 곧이어 그 ‘작은 일'이란 바로 재물이라는 것을 시사하신다(11절). 결국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재물에 대한 자세가 올바른 믿음의 시금석(試金石)이며,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줄 아는 자만이 다른 일에도 충성될 수 있음을 교훈하시는 것이다.
이어 16:14-18은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및 메시야 시대에 대한 선포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바라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 대한 그들의 완악한 반응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것을 듣고 예수님을 도리어 비웃었다(14절). 여기서 ‘이 모든 것(all these things)’은 원어상 복수로서 단지 바로 앞 문단의 내용만이 아니라, 넓게는 15장의 비유들 모두를 포함한다고 하겠다. 즉 돈을 좋아한 바리새인들은 직접적으로 재물 문제에 관한 예수의 교훈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세리 및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는 모든 교훈들을 다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람의 중심(中心)을 살피시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다. 또한 세례 요한의 때까지와 그 이후의 시대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선언하신다. 즉 세례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였으나, 그 이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선언하신다(16절). 이는 결국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내용으로서, 비록 바리새인들이 율법주의적 편견과 아집으로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로부터 배격받고 있는 자신이 곧 메시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계신 셈인 것이다.
이어 16:19-31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서, 문맥적으로 재물에 관한 앞 문단의 비유와 교훈의 내용에 있어서 유사하면서도 그 교훈을 보다 강렬하고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이 내세에서 극적으로 역전됨을 보여 줌으로써, 부(富)를 하나님의 축복의 필수적 상징으로 여기며 가난과 질병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만 여기던 유대적 사고 방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있다.
마지막 17:1-10의 내용은 제자도와 관련한 내용으로서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문맥상 이 문단은 위에서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자세와 대조시키는 가운데 주어진 교훈들임을 알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한 자들이었다. 또한 자신들은 교만과 탐욕의 심각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개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용서하기는커녕 정죄하기에만 골몰하였으며, 엄격한 율법의 굴레를 씌워 수많은 백성들을 실족게 만드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의 제자들은 작은 자 하나라도 결코 실족게 해서는 안되며, 회개하는 형제를 진정으로 용서해야 하며, 외식하는 자가 아니라 진실한 믿음을 간직한 자들이 되어야 하며, 무익한 종으로서의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계신 것이다.
이상에서 제자도(Discipleship)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의 자세와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통해 비쳐진 자신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살펴볼 때, 바로 우리가 많은 면에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특히 교회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은 성경의 바리새인들을 본받아서는 안될 반면 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고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며, 가장 거룩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속으로는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가장 극심하게 배척하고 죽인 자들이 바로 종교 지도 계층을 형성한 그들이었던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장 거룩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하고 위험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진정한 제자의 도를 실천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 차원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그들을 잃어버린 자들, 동시에 다시 찾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영접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어느덧 상류층과 중산층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 버렸다. 웅장한 교회 건물,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 세련되고 지적인 계층들을 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 등은 많은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교회 문안으로 들어올 용기를 잃게 한다. 바리새인들의 공동체처럼, 오늘날 교회는 적당한 지식과 교양과 재물을 가지고 있는 자들만이 환영받고 있는 곳으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는가? 복음서는 예수께서 기꺼이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가까이하셨고 그들 또한 예수께 주저함 없이 나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일 뿐 아니라 소외된 자(the Outcast)를 위한 복음서이다. 교회는 진정 성경으로 돌아가 세리와 죄인같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이 기꺼이 몰려들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교회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께서 지향하신 그런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잃은 양, 열 드라크마 비유(누가복음 15:1-10)
[ 성경묵상 ]
15장 요약 ;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는 죄인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그 일이 성공했을 때의 기쁨이다. 죄인된 아담을 먼저 찾으시고(창 3:9), 끊임없이 반역했던 이스라엘을 어루만지사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여기서도 엿보인다.
15:4-7 ;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의인 아흔아홉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한 사람의 죄인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죄인을 회개하게 하시는 것이다(5:32).
15:8-10 ; 잃었던 은전의 비유이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 은혜를 읽을 수 있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제15장의 두 문단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의 세 가지 비유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1-2절에서 이 비유들이 주어진 배경이 설명되고 있다.
즉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께 몰려드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미워하시므로 의인(義人)이라면 죄인들과 함께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하는 명칭처럼 철저히 죄인들을 멀리하고 자신들을 그들과 분리시키는 삶을 살았으며, 또한 세리 및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를 비난하고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세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죄인들(Lost Sinners)’이 회복되었을 때의 하나님의 기쁨을 제시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시는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질문 1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린 이유가 무엇인가?(2절)
[ 질문 2 ] 바리새인의 눈에는 단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은 누구였는가?(4-6절)
유대 사회에서는 결혼할 때 신랑 되는 남자가 아내로 맞이하는 여자에게 사랑의 표시로 열 드라크마를 주었다. 결혼한 여자에게 이 드라크마는 결혼반지와 같은 의미를 지닌 소중한 것이었다. 남편이 준 열 드라크마는 줄로 꿰어 머리를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열 드라크마가 한 세트여서 그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남아 있는 9개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린 여자는 이런 이유 때문에 어두운 집 안에 불을 밝히고 샅샅이 훑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잔치를 벌일만큼 기뻐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찾은 한 드라크마는 구원받은 한 영혼을 말한다.(두란노서원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고 있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는 것 때문에 자기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다. 4-32절에 있는 이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대표적인 소외 계층이었던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께서 왜 그토록 지대한 관심을 쏟고 계신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본절에서 ‘이 비유’로 번역된 ‘텐 파라볼렌 타우탠’은 단수형이므로 한 가지 비유를 뜻한다. 그러나 사실 4-32절에 등장하는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4-7절),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절), 그리고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잃은 아들의 비유(11-32절) 세 가지이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이 세 가지를 단수로써 표시하는 것일까? 그것은 비유는 세 가지이지만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고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본장의 비유는 동일한 형식의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주제는 바로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 비유의 결론이 거의 동일한 문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쉽게 발견된다(7,10,32절).
그러나 좀더 유심히 관찰해 보면 본장 뿐 아니라 16장도 동일한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 단수로 표현된 ‘비유’는 16:1-13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19-31절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까지 포함하는 다섯 비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편 본장에 등장하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나 ‘탕자의 비유'는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잃은 양의 비유’는 마 18:12-14에 병행 본문을 가지고 있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태복음의 경우 제자들을 대상으로 비유가 베풀어지는 반면(마 18:1), 본서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비유가 베풀어진다(1-2절).
둘째, 비유의 문맥도 서로 상이하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는 문맥(마 18:6.10.14)에서 사용된 반면, 본서에서는 ‘잃어버린 죄언을 한 명이라도 찾아 구원해야 한다’는 문맥(7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목적하고 있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형태의 비유라 하더라도 그 결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이 양을 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첫째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가운데 한 사람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세리들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를 비난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베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중의 어느 사람’은 바로 이 비유가 베풀어진 대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흔히 양을 기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은 마 12:11이 잘 증거해 주고 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해 송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마 12:2,14)을 향해서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변 붙잡아내지 않겠느냐?"라고 질문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 이 양을 키웠다는 사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안식을 포기하면서라도 구해 낼 정도로 그들이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은 일차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이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이 없어지자 그 양을 찾도록 찾기까지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그 양의 진짜 소유자가 아니라 양을 위탁받아 치는 ‘품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품꾼은 양을 잃어버리면 주인에 의해 큰 책망과 정계를 받기에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아 헤댔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품꾼으로 양을 쳤던 일을 상기시켜 준다. 이때 야곱은 맡아 치던 양들 가운데 물려찢긴 것은 스스로 보충했고, 도적질당한 것은 물어냈다(창 31:38,39).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본절에 등장하는 이 남자도 양을 위탁받아 치는 품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셋째로, 그는 양을 직접 쳐야만 하는 영세한 목양자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준에 따르면 양 300마리를 목양하면 대규모 목축에 속했다. 그런데 본절에 동장하는 사람은 100마리의 양을 치는 사람이었다. 만약 이 사람이 양의 실제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치는 양의 규모를 볼 때 그는 그리 많은 양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즉, 그는 대규모로 방목하는 부자가 아니라 영세한 목양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로, 이 잃은 양의 비유가 궁극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죄인들을 찾기까지 계속 찾아다니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목자는 최종적으로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세리와 죄인들을 구원하시며 당대의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으시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의도를 이미 충분히 나타내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마태복음에서는 동일하게 양을 잃어버린 사실을 설명하면서도 ‘미혹되다’(마 18:12,13)는 의미를 가진 ‘플라나오’ 동사를 사용하여 양이 미혹되어 길을 잘못 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3절에서 밝힌 대로 이 양자의 차이는 비유의 대상과 문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가 ‘플라나오’ 동사를 사용하여 설명하고자 한 것은 믿음 가운데 있는 작은 소자 하나라도 그 믿음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으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양은 형제에게 상처를 받아, 또는 미혹을 당해서 공동체를 떠나게 될 사정에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아예 믿음으로 들어오지 않은 완전히 내어쫓긴(눅 17:27) 죄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본절의 잃어버린 양은 아직도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이며 ‘길에서 완전히 내쫓긴 자들’을 암시한다(마 10:28 ; 약 4:12). 이는 틀림없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한다.
‘두고’로 번역 된 ‘카탈레이페이’는 ‘내버려두다’, ‘방임하다’(5:28 ; 15:4 ; 막 14:52)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의미로 보아 본절의 목자는 99마리의 양에 대해 아무런 안전 조치도 해 두지 않은 채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유명한 신약 신학자 페린(N. Perrin)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데서 오는 기쁨이 남은 양을 보호하는 것을 능가하므로 정상적으로 취해야 할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급하게 나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일면 일리가 있긴 하지만,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99마리의 양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마살(H Marshall)이 이해하고 있는 대로 본절은 목자가 조수나 동료 목자에게 99마리 양을 돌봐 줄 것을 부탁하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돌아다닌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요 10:3). 또한 ‘들’로 번역된 ‘에레모’는 양들이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목초지를 말하므로 그렇게 위험한 장소도 아니다. 그러므로 99마리의 양이 아무런 조치도 없이 방치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당시의 유대 풍습을 고려할 때 99마리의 양을 돌보는 것은 조수나 동료 목자가 시간을 잘 조절해서 그리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기의 양과 부탁받은 양을 돌보면 충분히 가능했다.
원어 성경에는 ‘찾는다’는 말이 한글 개역 성경처럼 두 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처럼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원어 성경에 부합한다. ‘헤오스 휴레 아우토’는 ‘그것을 찾을 때까지’라는 의미로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까지 계속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찾아다니지’로 번역된 ‘포류에타이’는 ‘찾다’라는 의미 보다는 ‘가다’라는 뜻을 지닌 ‘포류오마이’의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나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목자가 양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들판을 헤맸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단어는 중간태로서 ‘자신이 직접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가 다른 사람을 시켜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되 자신이 직접 찾아나선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부정어 ‘우’는 이와 같은 목자의 단호한 태도를 수사적으로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와 같은 목자의 ‘안타까운 심정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하나하나 너무도 소중히 여기시며 깊은 관심을 쏟으신다. 그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존재들이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찾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할 때까지 그 들을 찾으시며, 다른 이의 손을 통해서 죄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직접 나아오신다. 죄인들을 직접 찾으시는 그의 사랑이 역사 가운데 실증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눅 11:20 ; 요 1:14 ; 10:11). 그런 의미에서 세리와 죄인들의 회개는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찾으신 것에 대한 응답이다.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찾으면,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이 목가적 묘사는 마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고 누가복음에만 나타난다. 왜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것일까? 예수 시대의 유대 풍습에 대해 정통한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양이 기진맥진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목자가 어깨에 메고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양을 운반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양을 어깨에 가로질러 메고 다리를 목자의 가슴 위로 늘어뜨려 잡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시 28:9 ; 사 40:11).
한편 ‘어깨’를 뜻하는 ‘오무스’가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서 보면 이 양이 목자의 뒷목에 가로질러 얹혀져 있기 때문에 양 어깨에 걸치고 또한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을 어깨에 멘 이러한 행동이 단순히 이동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가는 ‘즐거워 어깨에 메고’라고 표현한 것이다. 누가만의 이러한 독특한 회화적 묘사는 자기 발로 걸어나가서 양떼 가운데서 이탈되었던 양이 이제 목자의 어깨에 의지하여 돌아오고 있는 모습을 매우 정겹게 보여 준다. 그것은 또한 고집불통인 죄인들이 자기 스스로 죄악과 방탕의 길로 나갔다가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목자의 힘에 의지하여 돌아오는 애처롭지만 승리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유대 격언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가 이 세상에서 멸망하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이런 사실은 ‘나와 함께 즐기자’란 표현에서 잘 보여진다.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은 개인만의 기쁨으로 그치지 않고 곧이어 공동체의 잔치로 이어진 것이다. 기쁨은 함께 나누었을 때 더욱 커진다(빌 2:17).
‘나와 함께 즐기자’로 번역된 ‘쉽카레테 모이’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의 결론인 9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잃은 것을 찾은 뒤 공동체와 함께 즐긴다는 설정은 잃은 양의 비유 뿐만 아니라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6,9,23절).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들 가운데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와 함께 즐기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비유의 대상이며 예수님에 대한 적대적 비평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온 것을 같이 기뻐하자고 암시적, 우회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목자의 이런 기쁨의 외침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우리 하나님은 혼자서만 기뻐하시지 않고 천군천사와 더불어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그 기쁨은 하늘나라 전체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10절).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
과연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있을 수 있을까? 원어로 살펴볼 때 이러한 질문은 우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것’으로 번역된 ‘크레이안’의 원형 ‘크레이아’는 ‘필요(need)'를 의미하므로 본문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란 의미이며, 이는 곧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의인이라는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효과적 논증을 위해서 그들 스스로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런 후에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오신 예수님의 노력에 대한 그들의 비평을 그들 스스로의 논리로 논파하신 것이다. 본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레위인의 잔치에 참석했을 때에 그것을 비난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유사하다(5:31,32). 그러므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는 말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관적 판단을 단순히 소개한 데 불과하다.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단정할 순 없지만, 당시 풍습에 따라 결혼 지참금으로 머리에 두른 열 드라크마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단지 돈 이상의 의미가 있는 소중한 물건이다.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쓰는 여인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의 두 번째 비유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이다(8-10절). 이 비유는 잃은 양 비유와 같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주인의 열심과 함께 그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주인의 기쁨이 대단하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잃은 양의 비유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과 병행되게 본절은 ‘어느 여자가’로 시작하고 있다. 잃은 양 비유에서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 혹은 품꾼이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남자가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평범한 아낙네가 등장하여 이 비유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여자’로 번역된 ‘귀네’는 처녀든 기혼자든 과부든 모든 연령의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다(마 13:33 ; 눅 13:11 ; 행 5:14). 그런데 여자들은 구약 시대를 비롯한 헬라 시대에 있어서도 거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남자들의 소유물 정도로 여겨졌고, 그들의 의사는 아버지나 남편에 의해 좌우되기 일쑤였다(삼상 1:4, 5). 헬라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인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당시의 여인들이 받았던 처우들은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문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들은 항상 아침 기도 시간에 “이방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시의 대표적 소외 계층이었던 한 여인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심으로 두번째 비유를 시작하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의도하신 ‘잃은 자의 구원’이라는 구속사적 계획과 결부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 의도하시기로는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14:21). 즉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천시되는 자들의 것이며, 여기에는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한 여인을 거론하심으로 당시의 소외되고 천대받던 이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신 것이다.
한편, 여인이 소유하고 있었던 열 드라크마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학자들간에 일치된 견해는 없다. 그러나 물론 드라크마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샀에 해당하는 로마의 화폐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헬라의 화폐 단위이지만 이를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열 드라크마는 보통 한 세트로 이루어져서 결혼할 때에 남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주는 사랑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아마 여인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머리에 장식용으로 꽂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중 하나라도 잃어버릴 경우 그것은 온전한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즉, 10개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그것은 남편에 대한 불경을 의미하여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할 충분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잃어버린 여인의 마음은 몹시 초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런 이유로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여인들은 잘 때조차도 열 드라크마를 엮어서 만든 장식품을 풀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빚을 갚을 때도 열 드라크마만큼은 차압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에게는 그것을 만져보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열 드라크마는 결혼한 여자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본절에 등장하는 여인은 그 중의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여기 나오는 세 동사는 모두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는 현재 직설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찾다’라는 의미를 지닌 ‘제테이’는 ‘발견할 때까지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제테오’ 동사의 현재 직설법이다. 이는 이 여인이 앓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으려고 쉬지 않고 집을 쓸고 또 쓸었다는 사실과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집념으로 끈질기게 찾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유대의 서민들 가옥은 창문이 없거나 또한 있다 하더라도 환기를 위한 조그마한 것 하나 정도만 겨우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가난한 집에는 아예 창문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인 역시 가난한 여자였을 것이다. 낮에도 물건을 찾으려면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집이 어두웠던 것으로 보아 창문이 없는 가난한 집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한 서민의 집은 일반적으로 흙마루가 있었으므로, 누군가가 그 곳을 빗자루로 쓴다면 얼마나 많은 먼지가 일어났을지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많은 먼지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그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기 위해서 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았다. 마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 목자와도 같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다시 찾기 위해서 이 여인은 계속하여 찾았다. 이는 잃어버린 한 명의 죄인이라도 끝까지 찾고 또 찾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절실한 심정을 너무나 잘 묘사해 주고 있다.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9절에서 언급된 ‘벗과 이웃’은 잃은 양의 비유에 등장하는 6절의 ‘벗과 이웃’과는 다르다. 잃은 양의 비유의 벗과 이웃들은 모두 남성 명사로 사용되어 그들이 남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벗과 이웃은 모두 여성 명사 복수로 사용되었으므로 이 잔치는 여자들만의 잔치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당시에 여자들만의 잔치가 가능했을까? 남성들의 잔치는 당대의 가부장제를 고려할 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여자들만의 잔치라니 다소 비현실적인 표현처럼 여겨지는 본문은 누가복음이 ‘여인의 복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연관된다. 유대인 사회에서 여인들은 남자들의 부속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여인들에 대한 진술이 서론부에서 결론부까지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1장에 등장하는가 하면(13절), 이런 예수를 목격하는 안나의 이야기는 2장에 등장한다(36절). 나인성 과부에 대한 언급이 7장에(11절), 그리고 혈루증 여인의 기사가 8장에 등장한다(43절). 불의한 재판관을 설득하는 과부가 18장에 등장하는가 하면(3절) 두 랩돈을 바친 과부도 21장에 등장한다(2절). 비겁한 남자 제자들이 물러간 다음에도 십자가를 지키고 있었던 이 들은 여인들이었고(23:55),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이들도 여인들이었다(24:1). 이처럼 누가는 독자적인 내용들이나 혹은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여인들에 대한 보다 다양한 행적들과 진술들을 자신의 언어로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하여 누가복음은 ‘여인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진다.
본절에 나타나는 여인들의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 성격을 너무나 잘 드러내 보여 준다. 당대의 잔치들이 남성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14:1,7-14)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당대의 소외된 계층들을 대표적으로 암시하는 여자들의 잔치 속에서 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가난한 자, 병신들, 소경들, 그리고 저는 자들이 참여하는 잔치요(14:21), 세리와 죄인들이 참여하는 잔치이다(2절). 누가는 여인들 만의 잔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특정징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한 명의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기뻐하신다. 이런 기쁨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찾고 찾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발견할 때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아온 죄인들로 인해 하늘에서는 반드시 놀라운 기쁨이 생겨난다(사 62:5 ; 렘 7:13 ; 겔 18:23 ; 호 11:8 ; 요 3:16 ; 롬 5:6-11). 특별히 본절의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는 표현은 죄인의 회개는 하나님께 속한 사자들도 기뻐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임을 나타낸다.
잃은 양과 열 드라크마의 비유 ( 15:1-10 )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1. 세리와 죄인들이 나아옴(1)
유대인의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눅 14:25) 했을 때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승인을 받을 확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망한 소망을 흔들 말씀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본문에 예수께 거절당하지나 않을까하는 낮고도 겸손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줄 필요성을 느끼셨다. 물론 세리들 중에는 약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악한 자들로만 여겨졌다. 그것은 그들의 직무에 대한 유대 민족의 편견 때문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창기'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마 21:32). 본문에서와 다른 곳에서는 죄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온 것은 어떤 이들처럼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이거나 혹 다른 이들처럼 치료를 간청하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놀라운 강론을 듣고자 해서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즉,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우리의 기도에 대한 그의 응답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분개함(2)
그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였다(2절). (1) 그들은 세리와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허용된 은혜의 도리를 소유하게 된 것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망에 용기를 얻은 것에 분노하였다. (2)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부류의 사람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과 함께 먹는 것은 그의 인격의 존엄성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체면상 정죄할 수 없었으므로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이것은 장로의 전통에 아주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다)으로 그리스도를 비난했다.
3. 두 가지 비유(3-10)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 더욱 영광이 될 것이며, 하늘에 기쁨이 더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도 좋지만 세리와 죄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된다면 하늘에서는 훨씬 더 기뻐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두가지 비유로써 이 사실을 설명하신다.
(1) 잃은 양의 비유 :
마태복음 18:12에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는 성도들을 보존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죄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기쁨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사악한 길로 나아가는 죄인의 경우는 잃은 양, 즉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과 같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잃어버려지고, 무리에게서 잃어버려졌으며, 자신에게서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며, 끊임없이 맹수의 위협을 받아 놀랐고 공포에 떨며,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 푸른 초장을 찾아헤맨다. 그는 양떼로 되돌아 오는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
2) 이 잃어버린 어린 양, 즉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들에 대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극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비록 그는 일백 마리의 양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한 마리도 잃지 않으신다. 그는 잃어버린 한 마리라도 쫓아가심으로 그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 하시는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는 그 잃어버린 것을 쫓아가 찾을 때까지 사방을 두루 찾아 헤맨다.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마침내 뒤돌아 올 생각을 품게 될 때까지 타락한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는 납득시키는 일이 힘들고 참을 수 없을 지라도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깨에 매고' 튼 자비와 수고로 무리 가운데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시려' 자기 아들을 보내신다(눅 19:10),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동정과 온유함을 나타내시려는 뜻으로 그의 팔로 양떼를 모아 그의 품에 그것들을 안고 가시는 것을 말씀하셨다. 본문에서 그는 '어깨에 메고' 그들을 옮긴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어깨에 메고 온 자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3) 죄인들이 돌아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는 즐거워 어깨에 메고 오신다. 그것을 찾을 소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기쁨은 더욱 크다. 그리고 그는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고 하신다. 비록 그것이 곁길로 나가 방황하던 양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나의…양'이라고 부르신 사실을 주목하라. 그는 그것을 스스로 찾으셨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6절). 그는 종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자신의 아들, 즉 위대한 선한 목자를 보내셨다. 그는 자기가 찾는 자를 발견할 것이며, 그를 찾지 않는 자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2)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1) 본문에서는 잃어버린 자가 여자로 되어 있다.
그 여자는 은전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오직 한 드라크마를 잊어 버렸다. 인간 세상의 죄악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 그 순전성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욕을 돌리지 않는 것이 열에 아홉, 아니 바로 앞의 비유에 의하면 백에 아흔 아홉이 있다.
2) 잃어버린 것은 단 은전 한 드라크마이다.
철이나 납처럼 천한 금속이 아니라 은이었다. 영혼은 그 고유의 가치와 중요성에 있어 은과 같다. 인간의 영혼은 곧 은전이다. 그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은을 흙 속에 잃어 버렸다고 하였는데, 세상에 던져진 영혼은 흙 속에 섞여있는 은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 은전이 그 먼지속에 있다는 것에 애석해할 것이다.
3) 그 은전을 찾는데에 많은 수고와 고통이 든다.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발견하기까지 부지런히 찾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자신의 집으로 이끌기 위해 많은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는 우리에게 이르는 자신의 길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르는 우리의 길을 비추기 위한 복음의 등불을 켜신다.
4) 본문의 큰 기쁨은 은전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9절). 그것을 즐거워 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기뻐하기를 원한다. 은전을 찾은 놀라운 기쁨은 그녀를 당분간 일종의 황홀경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즉 "찾았노라, 찾았노라"라는 말은 기쁨을 보여주는 언어이다.
(3) 이 두 비유의 설명은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7,10절).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됨이 회개할 것 없는 많은 사람을 인함보다 더욱 크다.
1) 땅 위에서 죄인의 회개와 개심은 하늘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회개에 이를 수 있다.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소망이 있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라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다. 하늘에는 항상 기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일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기뻐하신다. 그는 회개한 죄인들에게 선을 행하시기를 즐거워 하신다. 그는 한 민족의 회개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죄인의 회개가지 기뻐하신다. 선한 천사들도 그들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인류의 구속은 천사들 앞에도 기쁨이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눅 2:14)하고 노래했었기 때문이다.
2)'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얻은 기쁨이 더 크다.
즉, 찬양과 헌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생활을 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다른 유대인들로 인한 기쁨 보다는 그때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복음을 들은 이방 죄인들과 세리들의 회개로 인한 기쁨이 더욱 크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중언 부언하는 긴 기도보다는 멸시받고 미움받는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의 통회하는 상한 심령을 더 기뻐하시며 칭찬하신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항상 예절 바르고 온전하게 행동하여 비교적으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의 의례적인 회개로 인한 것보다는 큰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인한 기쁨이 더 크다. 물론 곁길로 나가는 것이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곁길로 가지 않은 사람들을 이끄는 것보다 큰 죄인들을 감소시키는 것에 더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기 전에 큰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후에 더욱 뛰어나게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많이 용서받은 자들이 많이 사랑할 것이다. 우리들도, 늘 즐기는 것을 지속함으로보다는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음으로, 그리고 병이 없이 건강할 때 보다 병에서 나음을 입을 때 더욱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그 자체에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한 길과 죄악 생활에서 급히 돌이켜 새 생활을 하는 것은 더욱 놀라운 기쁨을 가져다 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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