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도래 시기(누가복음 17:20-37)
[ 성경묵상 ] -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준엄하고도 신속한 심판과 더불어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나라의 편에서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이것입니다.
[ 질문 1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이 무엇인가?(20-21절)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20-21) 하나님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너희 가운데 이미 와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나라가 시작되는 징조가 무엇인가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시작된 징조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나라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그분의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은 오늘 우리 가운데 능력으로 침투해 오는 하나님나라를 맛보고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는 무시한 채 머나먼 곳에서 '나의 천국'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과 동행하는 그 곳에 천국이 있음을 믿고 주님을 무엇보다 사모합니까?
[ 질문 2 ] '인자의 날'이 영광으로 이르기 전에 인자와 그의 성도는 무엇을 겪어야 하는가?(25,33절)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장차 '속히' 임할 하나님나라 (22-30)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과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나라는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악에 대한 신속한 심판과 더불어 완성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와 소돔의 멸망 때처럼, 사람들이 태평하게 먹고 마시고 인생을 즐기고 땅의 소유를 쌓아 두기 여념이 없을 때 심판이 '순식간'에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너무 늦습니다. 심판을 '먼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면 영영 기회를놓칠지 모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광'은 당장 나타나길 바라면서 '심판'은 먼 미래로만 여기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의 '신속성'은 오늘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과 회개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까?
하나님나라 편에 선 자와 아닌 자(31-37)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나라 편에 서서 고난 받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십자가가 두려워서 주님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은 영원한 나라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은 인류가 두 편으로 영영히 갈리는 날입니다. 한 편은 구원과 영생을 얻을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편에 서 있습니까?
고난과 희생이 두려워서 주님 따르며 순종하기를 주저하는 모습이 오늘 나에게는 없습니까? 이런 두려움과 주저함이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본문 개요 ]
17:20-37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20절)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신다. 이 선언이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임을 고려할 때, 문맥상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內在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위격 속에서(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영성(靈性) 및 현재성(現在性)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 자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는 것을 선언하심으로써 가시적이고도 정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오류를 시정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 문단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인자의 날’을 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시며,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자세에 관해 교훈하신다. 여기서 인자의 날이란 예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완성될 때인 그 날을 가리킨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12신조의 12번째 답과 관련이 있는 성경구절이다.
죽은 자가 끝날에 부활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심판하시는 보좌 앞에서 이 세상에서 선악 간 행한 바를 따라 보응(報應)을 받을 것이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한 자는 현저히 사(赦) 함을 얻고 영광중에 영접을 받으려니와, 오직 믿지 아니하고 악을 행한 자는 정죄함을 입어 그 죄에 적당한 형벌을 받는다.
17:20-21 ;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현세적인 천국관을 부인하시면서,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영적 실체로서 가루 속의 누룩처럼 내적으로 스며들어 큰 영향력을 주면서 성장하고 있다고 가르치셨다(13:20-21).
17:24 ;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주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번개는 '갑작스럽게, 우주적으로'라는 뜻이다.
17:26-30 ; 세상 사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다. 그것은 영적인 음행이요, 패역이다. 인자의 심판은 그러한 때에 나타날 것이며, 죄악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서나 일어날 것이다(37절).
17:34-35 ; 심판 날에 회개한 이는 구원 받고 회개하지 않은 자는 멸망한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포테 에르케타이).
20-21절은 바리새인의 질문에 예수께서 답변하시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요지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시점이다. ‘포테’는 ‘언제’, ‘어떤 시간에’라는 뜻의 시점을 묻는 의문 부사이다.
왜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점이 그토록 궁금하였던 것일까?
이는 본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눅 9:27)고 하셨으며 칠십인을 파송하실 때에도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눅 10:9).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눅 10:11)고 말씀하셨다. 또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며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회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고 하셨다.
예수의 이런 말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바라던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도 않는데 도대체 언제쯤이나 임한다는 건가’라는 뉘앙스로 예수님의 말씀을 비꼬며 질문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전자는 로마의 압제 체제를 전복하고 이루어지는 메시야의 정치적 통치로,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적 통치로 본 것이다.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우크 에르케타이…메타 파라테레세오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때에 대하여는 아무 대답도 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대한 대답을 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대하여는 모른 채 하나님 나라의 도래 시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을 잘못하고 있음을 먼저 가르쳐 주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하여 선민 이스라엘 가운데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죽은 자를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시며, 땅과 하늘을 새롭게 할 가장 큰 지복의 나라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인간의 육적인 시각으로 확인되는 세상적인 나라가 아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신다.
이는 미래에 당신의 재림으로 온전히 완성되어져 나타나게 될 하나님 나라의 가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래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 가운데 영적인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영적 무지와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해 주고 계신 것이다.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이두 가르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엔토스 휘몬 에스틴).
20절의 말씀에 이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신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 이유에 대해 청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보라! ~이기 때문이다’는 의미를 지니는 ‘이두 가르’를 기록하였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번역하지 않아 원문이 주는 생동감과 강조적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만약 원문의 자구적 의미를 잘 살려서 번역하였다면 20절과 21절에서 예수께서 무엇을 강조하시고자 하는지 더욱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문장에서 핵심 단어는 바로 ‘안에’에 해당하는 ‘엔토스’이다. ‘엔토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번째는 ‘안에(within)’라는 뜻이고 두번째는 ‘가운데(in the midst of, among) 라는 뜻이다. 이 둘 중 본문에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불명확하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엔토스’를 전자의 의미로 보아 하나님 나라가 개인의 내부에 있다는 것으로 본문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답변이 바라새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렇게 번역하게 된다면 ‘너희 안에’는 ‘바리새인의 마음 안에’라는 의미가 되므로 납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엔토스'를 '가운데'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겠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을지라도 당시 예수님 앞에는 함께 동행한 제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 혹은 ‘이 세상 가운데’라는 의미는 성립된다.
‘있느니라’에 해당하는 ‘에스틴’은 ‘에이미’의 현재 시제이다. 이러한 시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 즉 현존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하여 현재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나라는 틀림없이 바리새인들 안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마 21:13) 그것도 부족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까지 훼방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인정하며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자들 가운데 이미 임한 것으로, 바로 이 순간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인자의 날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할 때가 오겠으나, 보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에게…때가 이르리니(프로스투스 마데타스 엘류손타이 헤메라이)
예수께서 20절부터 21절까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면 22-37절까지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 ‘인자의 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긴
가르침을 주신다.
앞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질문하였고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가 아니라 먼저 그 실체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러나 22절 이하에서는 ‘때’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물론 ‘때’에 관한 가르침이기는 하나 이것 역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정확한 시점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의 양상에 대한 가르침에 초점이 모아진다.
그리고 ‘때’에 있어서도 앞선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에서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금부터 시작되는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에서는 미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한편 ‘때가 이르리니’에 해당하는 ‘옐류손타이 헤메라이’는 직역하자면 ‘날들이 올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 또한 미래의 ‘어느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인자의 날 하루를(미안 톤 헤메론투 휘우 투 안드로푸)
앞서도 말했지만 본단락의 시점 혼재 사실은 ‘인자의 날 하루를’이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를 직역하면 ‘인자의 날들 중에 하루를’이 된다. 즉 ‘인자의 날들’은 복수로 되어 있고 ‘하루’는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자의 날들’이라는 표현은 ‘메시야의 날들’을 의미하고 있다. 즉 모든 적대적 세력이 인자의 권위 아래 굴복하고 메시야가 의와 사랑으로 예수의 부활 이후 통치하는 복된 그 미래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는 먼저 메시야의 여러 날들 가운데 하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루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과 달리 예수의 제자들은 메시야로 인하여 시작된 영광의 날들, 즉 예수의 부활과 승천 및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 교회의 왕성한 부흥 등을 경험하게 되므로 이러한 입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이 ‘하루’는 메시야의 통치가 완성되는 결정적 시점, 즉 재림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인자의 재림으로 인해 완성될 그 나라를 갈망하며 그 나라가 성취되는 미래를 보길 원하지만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곧 그 나라가 그들의 갈망하는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재림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은 가시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절 이하에 나오는 ‘인자의 날들’에 해당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에 대한 양상과 관련된 언급들은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과 관계된 것도 있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결정적으로 도래케 할 그리스도 재림의 바로 그 시점과 관계된 것일 수도 있다. 즉 예수께서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예언을 했으므로 그 시점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사람들이 너희더러 말하기를 보아라, 저기에 있다 또는 보아라,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따라 나서지도 말고, 찾아다니지도 말아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메 아펠데테 메데 디옥세테)
22절에서 예수께서는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재림으로 임하게 되는 메시야의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이 재림 약속을 이용하여 이미 그 날이 도래하였다고 하면서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고 하며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께서는 성도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본절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하면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메시야, 즉 인자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하여도 절대 미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에서 부정어 ‘메’와 ‘메테’가 상관적으로 쓰여 강한 금지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바울도 믿는 자들에게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살후 2:8-12).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마치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번쩍하여 하늘 저 끝까지 비치는 것처럼, 인자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번뜻하여 ... 비췸같이 ... 그러하리라(호스페르 가르…아스트랍투사 ... 람페이 후토스 에스타이).
이유 접속사 ‘가르’로 시작되는 본절은 사람들이 왜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서는 안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여 준다.
그것은 장차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초림할 때와 달리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그것도 순식간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는 이를 자연 현상 중 하나인 번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번개의 특정으로 두 가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번쩍거리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비췬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번개가 내리 칠 때의 현상을 표현한 것으로 하늘 아래의 한 곳에서부터 다른 곳으로 번쩍거리며 비취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번개의 그러한 현상은 전광 석화처럼 매우 순식간으로 끝나지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도 순식간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임하실 것이다. 예수 재림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목격하는 가운데 이루어 질 것을 예언하는 이 내용은 마 24:27에도 나오는 바 자세한 것은 그곳의 설명을 참조하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고,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할지니라(프로톤 데 데이 아우톤 폴라 파데인).
‘그러나’에 해당하는 후접사인 ‘데’가 사용되었다. 이는 24절에서 인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예언이 사실이기는 하나 그 전에 무엇인가 반드시 선행되어 일어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 준다.
즉 본절에서는 ‘먼저’에 해당하는 ‘프로톤’이 사용되어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는 것과 그 세대의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임을 명백히 보여 준다.
인자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할지니라’에 해당하는 ‘데이’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데이’는 ‘당연히 ... 하다’, ‘~ 할 필요가 있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역사적인 행동의 불가피성을 표현한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고난을 당하게 될 자도 자신이요, 다시 심판자와 구원자로 오실 인자도 예수 자신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부각시키시며 동시에 툴림없이 인자가 재림을 하기는 하지만 그 영광에 앞서 그가 필연적으로 수난을 당해야만 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인자가 고난받는 것, 즉 이 세상에서 배척을 받으시다가 끝내는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것 역시 영육간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주님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 날에는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성도들을 온전히 구원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 전에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온 인류를 구원할 기반을 먼저 마련해 놓아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 승천이었 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의 재림으로 인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결정적인 인자의 날이 도래하기 전, 즉 그리스도 재림으로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소멸되기 이전 동안 예수를 믿고 따를 제자들 또한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고난당할 수밖에 없다.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 시대에 일이 벌어진 것과 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카이 카도스 에게네토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노에)
‘같이’에 해당하는 ‘카도스’는 ‘바로(꼭)-처럼’이라는 뜻을 가진 불변사로 비교 구문의 서두에서 나타나 그 성격이 비슷함을 보여 준다.
‘노아의 때에 된 것’이 무엇이길래 인자의 때와 비교되고 있는 것인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타이스 혜메라이스 노에’를 직역하면 ‘노아의 날들에’로서 노아의 살아 생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의 때에 된 것’은 바로 노아의 생애에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인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물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아 때의 홍수 심판과 인자의 때를 비교하는 본문의 의도를 살펴보려면 번개와 인자의 날을 비교한 24절을 보면 된다. 24절에서는 번개의 번쩍임과 비추임에 대한 것을 인자의 날에 비교하여 그 날의 예수 재림은 매우 급작스러울 것임과 동시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확연하게 볼 수 있을 것임을 예언하였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분명 심판에 대한 하나님으로부터의 경고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노아의 경고를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함으로 거절하였다. 결국 심판은 그들에게 임하였고 경고를 무시한 자들은 심판을 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멸망 당한 자들에게 있어서 그 심판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심판의 경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아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인자의 날도 사람들이 여러 경고들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러한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돌연히 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리스도 재림의 정확한 때를 알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경고를 통하여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 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 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롯이 소돔에서 떠나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그 날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 물건들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들을 꺼내려고 내려가지 말아라. 또한 들에 있는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목숨을 잃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잠자리에 누워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36. (없음)
(36절 없음)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어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엄숙함을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섬뜩한 이미지로 그리신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유대인들의 기대처럼 찬란한 영광만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크고 두려운 심판이 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 편에 서지 않으면 누구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말씀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아포크리덴테스 레구신 아우토 푸 퀴리에) .
‘대답하여’에 해당하는 ‘아포크리멘테스’는 문자 그대로 ‘답변하다'라는 뜻이지만 이것이 항상 어떤 질문에 대해서 대답한다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본문에서도 그렇게 쓰였다. 제자들은 예수께 직접적으로 ‘어디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어디오니아까’에 해당하는 ‘푸’는 ‘어디에?’, ‘어떤 장소에?’ 라는 뜻이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장소에 대해 궁금해하였던 것일까?
아마도 앞절에서 두 번씩 언급되었던 영원한 분리가 어느 곳에서 있게 될지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이들의 이러한 물음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그들에게 인자의 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이 어떠한 날이 될지 아직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호푸 토 소마 에케이 카이 호이 아에토이 에피쉬낙데손타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 대답을 피하시고 통속적 속담으로 대답을 대신하신다. 이 속담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병행 구절인 마 24:28에서도 나타나 있다. 마태가 ‘주검’에 해당하는 단어로 ‘프토마’를 사용한 데 반해, 누가는 헬라 문헌에서도 일반적으로 자주 나타나는 보다 넓은 범위의 의미를 지니는 ‘시체’라는 뜻의 ‘소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마태는 ‘함께 모으다’라는 뜻의 단어 ‘쉬나고’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를 사용한 반면, 누가는 ‘한 장소로 모으다’라는 뜻으로 ‘에피쉬나고’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를 사용하였다. 마태복음 문맥에서는 본 구절이 멸망받을 자들에게 주님의 심판이 눈깜짝할 틈도 없이 신속히 임한다는 의미로 쓰인 반면, 본 문맥에서는 죄악으로 부패되어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이 있는 곳마다 주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즉 마태복음 문맥에서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의 신속성이, 본 문맥에서는 주님의 재림으로 인한 심판의 보편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독수리는 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든지 모여들어서 시체를 물어먹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종말의 심판은 심판받을 죄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필연적으로 시행되어질 것이다.
[ 복있는사람, 2018년 3,4월호 ]
하나님의 나라가 이를 때에 대한 가르침 ( 17:20-37 )
1.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요구(20,21)
이것이 이 강화를 하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치셨고 그래서 제사들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널리 전파한 것으로 이해한 듯 싶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그 영화로운 때가 언제 있게 될 것입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2. 그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22-37)
예수께서는 먼저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그리고 곧 이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2절). 그가 양편에 대해 말씀하신 것, 곧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1) 메시야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어느 때에 이를 것인가를 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묻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그것이 임할 것이로되 너희는 그것의 임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왕국은 신문을 발전과 변혁에 관한 기사로 가득 메우는 세상 국가들과 같이 외적으로 보이는 왕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그 나라는 소리 없이 임할 것이다. 즉 '볼 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 시기에 대한 자신들의 궁금증이 풀어기지를 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실 것이다. 왕되신 메시야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 때는 어떤 왕이 자기 영토를 방문할 때 그렇듯이 '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과 함께 임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는 나라가 이 곳 혹은 저 곳 등으로 한정짓는 자들은 '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번영과 외적인 허식을 참된 교회의 징표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것은 영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영광은 사람들의 생각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영에 영향을 준다. 또한 그 나라의 능력은 사람들의 영혼과 의식을 지배한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외적 상태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교만하고 무익한 자들이 겸손하고 진지하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되어질 때 그 나라의 도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는 그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가를 물으면서도 너희 가운데서 이미 그 나라가 시작된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비록 너희 마음 안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너희 민족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가 임하게 될 시기에 관하여 궁금히 여긴 많은 질문자들의 어리석음은 곧 그들이 자기들 앞에 있는 것 즉 이미 자기들 가운데 있는 것을 고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이다.
(2) 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수 많은 반대와 방해에 부딪히게 된다(22절).
제자들은 자신들이 파죽지세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실상 처음에 너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둘 것이다(실제로 그들은 그랬었다. 한 때 하루에 수 천 명이 교회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점차 냉담해질 것이다." 이 일은 후대에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질 일이었다. 그들은 많은 실의를 각오해야만 했다. 사역자들과 교회들은 때때로 외적 압박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누렸던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자비를 적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자비의 가치를 알도록 가르치신다. 때때로 그들은 내적 압박에 처하게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 겪었던 그러한 승리에 가득 넘친 날이 오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그리고 항상 널리 파급되어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대의가 유실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3)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는 이 곳, 혹은 저 곳 등 어느 특정한 곳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며 그의 나타나심은 즉시 모든 곳에 보편적으로 있게 될 것이다(23,24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23절).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한 백성의 영광을 위해 예정된 것이 아니며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해 예정된 것이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갑자기 가눌 수 없게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가팅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복음은 번개같이 모든 민족에게로 날아갈 것이다. 메시야의 왕국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며 전 지상에 널리 산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목적은 하나의 거대한 민족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 민족을, 최소한 전 민족 가운데서 몇 민족이라도 선하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4) 메시야는 통치하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25절).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와 같이 대우받게 될 것이라면 그의 제자들 역시 그를 위해서 고난받을 것과 버림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고통, 수치, 죽음은 곧 이 많은 고난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세대, 즉 믿는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전에 이 세대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5)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는 일은 유대 민족의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1) 옛날에는 죄인들이 어떻게 되었던가를 주목하여 보라.
악함으로 주 앞에 지극히 죄인되었던 소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다음을 살펴 보자.
① 그들은 모두 적절한 경고를 받았었다. 노아는 옛 세상에 대한 의로운 전파자였다. 소돔 사람들에 대해서는 룻이 그러했다.
②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경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안일하였다. 그들은 모두 매우 즐겼을 뿐이며 그 즐기는 것에 여전히 분주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기도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킨 것처럼 그렇게 했어야 할 때에 계속해서 걱정 없이 육식을 하면서 포도주를 마시기만 하였다.
③ 그들은 두려운 심판이 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안일함과 성욕 가운데 있었다.
④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자들을 안전하게 돌아보셨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으며 그곳에 안전하게 있었다. 롯은 소돔에서 나와 안전한 곳으로 갔다.
⑤ 그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파멸에 대해서 놀랐다. '홍수가 났으며' 옛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멸망시켰다. 또한 '불과 유황'이 임하여 소돔의 모든 죄인들을 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음란하고 안일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두렵고도 놀라운 멸망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다.
2) 지금은 죄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주목하여 보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절).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에 의해 경고를 받고 있다. 후에 그들은 사도들에 의해 그 경고를 반복해서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소용없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중에게 공표된 우리 구주의 이 강화가 죄인들을 깨닫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6) 그 날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것, 그리고 그들을 떠나서 주어진 지시에 따라 정해진 곳으로 도피하는 것이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관심사가 되어야 했다.
예루살렘에서부터의 그들의 이동은 반드시 신속해야 하며, 세상적인 어떤일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결코 지체되어서는 안되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위에 있고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31절). 그 세강에 유의하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멸망하는 것보다 그것을 뒤에 남겨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롯과 그의 가족이 명령 받은대로 그들도 그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네 생명을 보존키 위해 피하라. 이 패역한 세대에서 네 자신을 구원하라." 그들이 도피하게 될 때 그들은 뒤로 돌이킬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32절).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 멸망의 처소를 버리는 것을 아쉬워 하지 말라." 그들은 되돌아갈 유혹을 받지 않도록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다. 아니, 마음 속에 되돌아가는 것으로 인상지어지지 않도록, 혹은 마음이 뒤에 남아 있다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다른 방법은 결코 없는 것이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33절). 자기 목숨을 과감히 내어 놓고자 하는 자는 보존할 것이다. 이는 그가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모든 복된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매우 가까스로 피하게 될 것이다(34-36절).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쓸모 없는 자들을 치실 때 그는 자기 백성된 자들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존하실 것이다. 즉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 그의 백성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아시는 것은 조만간에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8) 구별하고 분리하며 식별하는 일은 하나님의 왕국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주여, 어디오니이까(37절). 그들은 그 시기에 관해서 질문했었다. 그러나 그가 만족하게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 않자 그들은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시도하였다. '주여 어디오니이까'가 그것이었다. 그 답변은 속담식이었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①악한 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즉 죽은 송장이 있는 곳마다 새들은 그것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독수리가 그 먹이에게 행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공격할 것이다. ②보존되어야 할 경건한 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즐거움 가운데서 복된 자들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마다 신자들은 마치 독수리가 본능적으로 먹이 주위에 모이듯이 그에게 모일 것이며 그를 대하게 될 것이다. '주검 있는 것에는' 즉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경건한 영혼들이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나타내신 곳에서 그는 그의 백성들을 만나실 것이며 그들에게 복주실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1)(누가복음 18:1-14)
9-14절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본문에 등장하는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 중예서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는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들은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이다. 이는 고전 4:6-8의 말씀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물질과 능력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식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인정하는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 세리는 교회 앞에서 행한 일들이 없는 자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부족함을 깨닫고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죄인임을 깨닫고 나아가야 한다.
[ 성경묵상 ]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
첫째, 구하는 자의 것이다(1-8절).
둘째, 낮은 자의 것이다(9-14절).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하나님나라는 그 분의 공의를 인내로 간절히 구하는 자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의와 긍홀을 겸손히 구하는 자의 것입니다.
[ 질문 1 ]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이 무엇인가?(8절)
하나님나라는 '구하는자'의 것이다(1-8) 하나님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도 그분의 응답과 행동이 지체되는 듯 여겨질 때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와 거기에 결국 항복하고 마는 불의한 재판장의 이야기를 통해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신속하고 신실하게 공의를 시행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끈질기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시행되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우리가 애써 기도하지 않아도 그 분의 정의를 시행하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원리는 인내하며 기다리고 간절히 구함으로써 받는 원리입니다. 우주의 통치자께서는 기계적인 법칙보다 관계적인 신뢰 속에 그 분의 나라와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와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간절함이 나에게 있습니까? 그저 오늘 편안하고 배부른 것에 만족해서 너무 쉽게 그 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 질문 2 ]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13절)
하나님나라는 '낮은 자'의 것이다(9-14) 예수님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겨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이들을 겨냥해 예화를 드십니다. 존경받고 덕망 높은 바리새인과 죄인으로 비난 받는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세리는 자기 죄를 참회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닌, '죄인'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고 충격 선언을 하십니다. 자신의 의로움으로 천국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교만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고상해봐야 거기서 거깁니다. 그러나 고상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일수록 쉽게 착각과 오만에 빠집니다. 도덕적인 실패자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빈손 들고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는 낮은자가 의롭게 되고 높임 받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역설입니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자부심이 지나쳐 하나님과 멀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무능하고 연약한 죄인임을 인정합니까?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공의를 인내로 간절히 구하는 자의 것이다. 또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의와 긍휼을 겸손히 구하는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다. 우리가 끈질기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시행되기를 구하는 자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인내하며 기다리고 간절히 간구하는 자의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세리와 같이 자신을 의롭다 여기지 않고 자기 죄를 참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의 것이다. 자신의 고상한 삶이나 교양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실패자들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낮은 자가 의롭게 되고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기도 하다.(복있는사람, 2018년 3,4월호)
18장 요약 ; 불의한 재판관 비유의 주제는 기도 생활에 있어서의 인내와 확신이다. 거듭되는 교훈에도 영적인 우매함을 떨치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천국 시민의 생활 원리를 역설하였다. 구원은 인간의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8:9-14 ; 이 비유는 기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판단한 일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에 겸손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형식의 종교와 마음의 종교를 비교하여 통회만이 사죄와 화평의 유일한 길로 제시하고 있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18:1-8과 18:9-14의 두 문단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및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기도에 관해 교훈하는 비유로서, 각각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 및 겸손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18:1-8은 기도에 관한 교훈이지만 이는 8절의 ‘인자가 올 때'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인자의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관련하여 교훈을 주고 있는 앞 문단 17:20-37과 밀접한 연관하에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1-14절은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공관복음서가 기자 중 누가만이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수록한 1-8절까지의 내용을 보게 되면 앞선 17:20-37의 하나님 나라와 인자의 날에 관한 내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앞단락에서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예수 재림 이전에 성도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될 각종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후 이제 본 단락에서는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낙망하지 말고 항상 기도로 그 날을 준비할 것을 교훈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있는 대상이 동일하게 제자들이라는 것과(눅 17:22 ; 18: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17:22-37에서 ‘인자의 날’에 관한 언급을 하셨듯이 18:8에서도 ‘인자가 올 때’라는 동일한 시점을 기록하고 있다는 데서 분명히 밝혀진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인자의 날, 즉 재림의 날과 관련하여서 그 때까지는 소망을 놓지 말고 기도하라는 동일한 교훈이 나온다.
이렇게 본단락은 앞의 17:22-37의 내용과 이어지면서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그 날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도할 것에 대한 예수의 권면이 나온다.
한편 본문은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구문이다.
이는 ‘~을 목적으로’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프로스’가 ‘기도하다’는 의미를 지닌 ‘프로슈케스 다이’와 ‘낙망하다’는 의미를 지닌 ‘앵카케인’이 두 개의 부정사와 상관적으로 쓰이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교훈할 목적으로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낙망치’로 번역된 ‘앵카케인’의 원형 ‘앵카케오’는 ‘완전히 정신을 잃다’, ‘녹초가 되다’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를 살려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 본다면 낙심하였다는 것은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흔비백산하였으며 완전히 지쳤다는 것을 의미한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께서 그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본절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17장에서 인자의 고난과 인자의 날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제 곧 다가올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될 제자들을 향한 간곡한 당부의 말씀이기도 하다.
신자는 어떠한 시련이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오히려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한다. 여기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의미는 시간적으로 쉬지 않고 장시간 동안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선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어떤 재판관이 있었다.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 도시에 과부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원한을 풀어 주소서'로 번역된 ‘액디케손’의 원형 ‘엑디케오’는
/ ‘복수하다’는 의미와 더불어 ‘재판을 집행하다’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 따라서 원어적 의미로 볼 때 그 과부는 재판관에게 부당하게 복수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기보다는 시시비비를 가려 공평하게 재판을 집행하여 줄 것을 바랐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따라서 NIV와 LB는 이를 ‘정의를 베풀다(NIV, Grant me justice ; LB, to appeal for justice)’란 의미로 번역하였습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원한을 풀어 주소서’로 번역하여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는 왜곡된 의미도 전달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 비유가 궁극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이 기도에 있어서도 자신의 한풀이가 아니라 정당한 공의의 실현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점임을 보아서도 이것은 공의로운 재판을 베풀어 달라는 요청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재판관은 그런 그녀의 정당한 간청을 계속적으로 외면하며 묵살하여 버렸던 것으로 보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공의로운 재판관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 및 로마 통치하에 있었던 나라들에는 뇌물을 받고 그릇된 재판을 하거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재판을 소흘히 하는 둥 부패한 재판관들이 많았으므 로 이 비유는 많은 유대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견디게 할 것이다."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무어라 말하였는지 귀담아 들어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물며 하나님께서…아니하시겠느냐(호 데 데오스 우 메).
예수님은 이제 불의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 비유의 결론을 맺으면서 불의한 재판관과 의로우신 하나님, 과부의 끈질긴 탄원과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비교하고 계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요청이 귀찮아서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반어법을 사용하여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강조하신 것이다(시 140:12).
즉 여기서 ‘아니하시겠느냐’에 해당하는 ‘우 메’는 이중 부정어로 강한 긍정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밤낮 그에게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 자들의 답변은 당연히 ‘하나님은 원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시다'라는 긍정의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마크로뒤메이 에프 아우토 이스).
‘오래 참으시겠느냐’에 해당하는 ‘마크로뒤메이’의 원형 ‘마크로뒤메오’는 시간이 길거나(막 12:40 ; 눅 20:47) 거리가 먼(눅 15:13; 19:12) 것을 가리키는 ‘마크로스'와 ‘진노’(계 14:8 ; 15:1)를 가리키는 ‘뒤모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오랫동안 ‘분노’나 ‘진노’를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 용례에서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의 오래 참음을 나타낼 때도 자주 사용된다(마 18:26 ; 고전 13:4).
본절에서 ‘마크로뒤메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이 단어 뒤에 오는 ‘저희에게(에프 아우토이스)’가 ‘원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택자’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저희’가 ‘원수’가 된다면 ‘오래 참으시겠느냐’는 분노를 오래 참지 않는다는 말로서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공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원수에게 오래 참으시지 않고 보응하시겠다는 의미이다. 반면 만약에 ‘저희’가 ‘택하신 자들’이 된다면 긍정적 의미로 하나님께서 택자들의 신원에 대해 오래 참지 않고 속히 들어주시겠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는 앞뒤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의 의미가 더 타당 하다고 볼 수 있다.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본문은 해석하기에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인자가 올 때’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해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원문에서는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여기서 믿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실천적인 믿음이다. 즉 앞선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 등장하는 한 과부에게서 나타났던 것처럼 어떠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낙심치 않고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보겠느냐’는 ‘아라 휴레세이’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아라’는 부정적 대답이 기대되는 추론적 질문을 의미한다. 그리고 ‘휴레세이’의 원형 ‘휴리스코’의 본래적 의미는 ‘만나다’, ‘마주치다’, ‘(우연히) 발견하다’이다. 따라서 ‘아라 휴레세이'에는 세상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믿음을 발견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조차 거부하며 그들의 마음에 의보다는 악이 가득 차서 간구조차 하지 않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을 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앞서 17장에 나온 노아와 롯의 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실로 택자들은 이러한 패역한 세대 가운데 산다 할지라도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신뢰하며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며 인내로써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9-14절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본문에 등장하는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 중예서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는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시편에서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는 감사시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로 인해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반면, 바리새인은 자신이 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형식은 감사기도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어떤 영광과 간구도 드리지 않는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기도'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 복있는사람, 2018년 3,4월호 ]
Ⅰ. 끈질긴 과부의 비유 18:1-8
이 비유는 초두에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1절).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백성이어야 함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정기적으로 그에게 기도해야 하며 또한 모든 위급할 때에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되, 그것이 영원히 찬양하는 수준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결코 기도하는 일에 물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특별히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든 혹은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것이든 우리가 추구하는 계속적으로 인내하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이나 우리의 정욕, 그리고 우리의 부패에 대하여 강해지고자 기도해야 하며 낙망치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헛되이 하나님의 면전을 찾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비유로써 끈질김의 힘을 보여 주심(1-5)
그는 우리에게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측은히 여기거나 공평한 처사로써가 아니라 끈질김의 힘으로 승소한 한 정당한 주장의 예를 제시해 주신다.
(1) 어떤 도시에 있었던 재판관의 악한 특성: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나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은 채 자기의 의무를 행했다. 즉 그는 경건이나 존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였다. 조물주에 대한 두려움을 내팽개친 자들이 또한 피조물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아무런 선도 기대할 수 없다. 불신앙과 몰인정이 널리 횡행하게 되면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렇겠거니와 특히 재판에 있어서 더욱 악하게 된다. 재판관은 자기의 직권으로 선을 행하는 대신에 해를 행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2) 한 가난한 과부의 비참한 처지:
그녀는 틀림없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법의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날마다 그 재판관에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즉 내 원수에 대하여 나를 공정히 재판하소서하고 개인적으로 간청을 드렸다. 재판관들은 특별히 과부를 압박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렘 22:3),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할(사 1:17) 책임이 있다.
(3)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하는 가운데서 부딪힌 어려움과 낙심: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 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자신의 평상시의 행위대로 그녀의 주장에 대해서 아무 주목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그에게 줄 뇌물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호소를 전혀 돌아보고자 하지 않았다.
(4)계속해서 그 불의한 재판관을 성가시게 함으로 목적을 달성함: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5절) 내가 그녀의 주자을 들어 주리라. 그리고 그녀가 내가 그녀의 주장을 들어 주리라. 그리고 그녀가 나를 질리게 하는 부르짖음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공정히 행하리라. 이는 그녀가 그것이 해결되기까지 나를 편히 내버려 두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더 이상 번거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행할 것이다. 즉 이제 처음으로 선하게 행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녀는 계속해서 간청함으로 공의를 행하게 하였다.
2.예수께서 이것을 기도하는 자에 대한 격려로 적용하심(6-13)
(1)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충분히 자비로우실 것을 역설하신다.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6,7절). 다음 내용을 생각하여 보자.
1) 그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 즉 그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그들을 이 세상에서 큰 반대와 환난을 만나게 된다. 즉 많은 대적들이 있게 된다. 바라고 기대되어지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밤낮 그에게 부르짖어야'한다. 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의무로 주신 것이며 그럴 때 그는 긍휼을 약속해 주셨다. 우리는 이 끈질긴 과부처럼 우리의 영적인 적들에 대항하여 특별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주여, 이러한 패단을 극복하게 하소서. 주여, 나로 이러한 시험에 대하여 무장케 하소서." 우리는 압제받고 핍박받는 교회들을 위해서 스스로 염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정히 처리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하며, 밤낮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여야 한다'(사 62:6,7)
3) 그들이 기도하는 중에 어쩌면 직면하게 될 낙심 :
그는 그들에 대해 오래 참으실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그 대적자들에 대한 자기 백성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며 자기 백성의 인내를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4) 비록 자비하심이 지체되기는 하나 결국 그것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 과부가 끈질김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선택한 자들은 더욱더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이 과부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그가 알뿐 아니라 사랑하는 그의 택하신 자들이다.
② 그녀는 단지 혼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을 많다.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합치된 기도로 은혜의 보좌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③ 그녀는 자기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재판관에게 갔었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로 담대히 그에게 오도록 명하시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④ 그녀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갔었다.
⑤ 그녀는 순전히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재판관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간청하는 그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관계하시는 일이다.
⑥ 그녀는 자기를 위해서 말해 줄 아무 벗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신 예언자 즉 그의 아들이 되시며 항상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시는 이를 모시고 있다.
⑦ 그녀는 위로 받을 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다.
⑧ 그녀는 단지 어떤 정해진 시간에만 그 재판관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밤낮, 즉 언제든지 부르짖을 수 있다.
⑨ 그녀의 끈질김은 재판관을 성나게 했다. 그러나 우리의 끈질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효과있게 뜨거운 기도일 경우 우리는 많은 유익이 있을 것으로 바라게 되며 또 그렇게 될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기다리기를 진력내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넌즈시 암시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 그가 오실 때 과연 그는 세상에서 믿음을 보실 것인가? 이 물음은 강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천만에, 그는 보시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것을 내다 보고 계신 것이다.
1) 이 말씀은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가장 큰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무죄가 있겠는가라고 묻지 않으시고 믿음이 있겠는가라고 물으셨다.
2) 이 말씀은 만일 아무리 적을지라도 믿음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을 보았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3)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거의 믿음을 보시지 못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① 대체로 그는 선한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하실 것이다. 경건의 모양과 형태를 가진 자는 많겠으나 신실하고 정직한 자, 곧 믿음을 가진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② 특별한 것으로, 그는 그의 오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를 거의 보지 못하실 것이다. 그것은 다음 경우들에 한해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지체될 수도, 아니 지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첫째로 악한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의 지체하심이 그들의 악함을 더욱 굳게 할 것이다. 둘째로 그의 백성들조차도 그것에 대해서 낙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한 때가 오면 믿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Ⅱ.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18:9-14
이 비유의 의도 역시 먼저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을 판결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들은 스스로 큰 자만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자신들이 바라는 만큼 거룩한 자들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만만해 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빚을 진 자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비록 이 이야기에는 비유로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지만 이것은 비유로서 불리고 있다. 이같이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1. 두 사람이 같은 시각과 장소에서 기도의 의무를 행함(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그 때는 공적인 기도의 시간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헌신을 드리고자 그곳에 갔다.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간 그 두 사람은 바리새인과 세리였다. 하나님을 경배드리는 자들 가운데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 있는 법이다 바리새인이 스스로에 대해 긍지가 있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자일 수는 없었으며 세리 또한 천한 자이었으나 기도하는 은혜에서 제외되는 자일 수는 없었다. 바리새인은 성전이 공공 장소였기 때문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갔던 것이며 따라서 그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에게서 보셨던 특성, 즉 '그들의 모든 선행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즉, 성전에서는 매일 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우편 손에 달린 마지막 날에는 두렵게도 볼 수 없는 많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위해 성전으로 갔으나 세리는 할 일이 있어 갔다. 즉 바리새인은 그의 외모를 나타내기 위해서, 세리는 그의 간구를 위해서 성전에 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의향과 의도로 자신을 섬기고 있는가를 보신다.
2. 하나님께 향한 바리새인의 발언(11,12)
그것은 기도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따로 서서 기도하였다. 어떤 이는 이것을 그는 혼자 서서 기도하였다라고 읽기도 한다(11,12절). 그는 전적으로 혼자 도취되어 있었으며 단지 자신 외에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아무 것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말하고자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1) 그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스스로 믿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한 많은 선행들이 사실임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토색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또한 불의한 처사를 행하지 않았다. 즉 그는 누구에게도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간음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 육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세상의 재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으시지 않으셨다. 그러면 그는 왜 받아 들여지지 않았는가?
1) 이상의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감사는 단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는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잠간 슬쩍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라고 비껴 말했을 뿐이었다.
2) 그는 마치 성전에 온 모든 이유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기가 얼마나 선한가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기나 한 것처럼 위와 같은 자랑을 일삼고 있었다.
3) 그가 말한 것 가운데에는 기도말이 한 마디도 없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 갔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할 일을 잊어 버렸다. 그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도 은총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간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2) 그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였다.
1) 그는 자신 외에 모든 사람을 경멸하였다.
즉 그는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치 단지 우리만 선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2) 그는 특별히 이 세리를 경멸하였다.
그는 그가 세리임을 알게 되자 아주 가혹하게 그가 토색하는 자이며 불의한 자이고 아주 무가치한 자로 단정지어 버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그것에 관해서 논평할 무슨 권한이 있단 말인가? 그가 자기 이웃을 비난하지 않고 기도할 수는 없었는가?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선을 기뻐한 만큼 세리의 악을 기뻐한 것이 되지 않는가?
3. 하나님께 드리는 세리의 고백(13)
세리의 고백은 바리새인의 것과는 정반대였다. 즉 바리새인의 기도가 교만과 허세로 가득 찼던 것임에 반해 세리의 기도는 겸손과 몸둘 바를 모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바리새인의 경우가 스스로 자만했던 것임에 반해 세리의 경우는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바램으로 가득찼다.
(1) 그는 자신의 처신으로 자기의 회개와 겸손을 보여 주었다.
1) 그는 멀리 섰다.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멀리에 섰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그를 멀리서 보시리라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가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신 것이 큰 은혜임을 인정하였다.
2)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들었으나,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으므로 '거룩한 확신과 용기'로서 행하는 행동인 그의 눈을 드는 것은 하지 못하였다. 그의 슬픈 표정은 자신의 죄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마음이 슬퍼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3) 그는 '그의 가슴을 쳤다.'
죄인의 마음이 먼저 회개하는 견책으로 그를 친다. "죄인된 자여,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그런 후 그는 회개하는 가책으로 자기의 가슴을 친다. '오, 나는 불쌍한 자로다!'
(2) 그는 자신의 말 가운데서 그것을 나타냈다.
그의 기도는 짧았다. 한숨과 탄식이 그의 말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분명하였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였다. 응답받은 기도로 기록된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된 자이겠는가?
1) 그는 자신이 본질상 죄인임을,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부인한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에 대하여 죄인된 것 외에 다른 어떤 특질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2) 그는 하나님의 자비외에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의 공로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가련한 세리는 공로에 대한 어떤 생각도 가지지 않은 채 자신의 피난처로 자비를 구하고 있다. "공의가 나를 심판하고 있다. 따라서 자비, 오직 자비 외에는 아무 것도 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3) 그는 열심히 그 자비의 은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사람이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구걸하는 거지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새롭게 된 상태로 이러한 기도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번이고 다음의 내용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4. 세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짐(14)
혹 바리새인을 추켜올리고 이 남의 눈을 피하여 눈물짓는 세리를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가련하고 회개하는 비탄에 잠긴 세리가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다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은 혹 자기들 중 하나가 의롭게 되어진다면 그 사람은 저 자가 아니라 틀림없이 자기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천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오히려 세리이다." 교만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거절되어 내어 쫓김을 당하였다. 즉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그가 자신의 눈에 너무 의로운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리는 죄의 사유하심을 얻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 그를 개처럼도 취급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녀로 대하여 주셨다. 교만한 자들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낮아지게 될 것이다. 겸손한 자들은 스스로를 낮추는 자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높아지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한 응답으로 어떤 형벌이 있게 되는가를 보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경의를 표하는 자에게 어떤 보상이 있게 되는가를 보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한 악에서 선을 낳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라. 즉 세리는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큰 죄는 큰 회개를 가져다 주었다. 바리새인이 토색하는 자도 불의한 자도 아니었다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귀는 이것으로 그를 교만하게 만들어 그를 파멸케 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누가복음 18장)
첫째, 구하는 자의 것이다(1-8절).
둘째, 낮은 자의 것이다(9-14절).
셋째,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다(15-17절).
넷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의 것이다(18-30절).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하나님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주님을 의존하는 겸손한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나라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주님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 질문 1 ] 어린 아이들을 맞아 주시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가?(15-17절) -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나라는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의 것이다(15-17) 고대 문화에서 아이들은 결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주십니다.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덜 중요한' 이들이 하나님나라에서는 중요한 존재로 환영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가신 아이들을 데려 온 것에 분개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제자도'를 교훈하십니다. 누군가를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나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종종 어린 아이들을 덜 중요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깁니다. 혹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분주하고 높아진' 마음 때문은 아닐까요?
어린아이들처럼 '작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 줄 만큼 낮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귀찮도록' 의존하는 가난한 마음이 있습니까?
[ 질문 2 ] 부자 관원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영생/하나님의 나라를 얻는다고 가르쳤는가?(22절) 하나님 나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나라는 전부를 거는 자의 것이다(18-30) 부자 관원은 영생에 관심이 많았고, 율법을 충실히 지켰다고 자부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경제력과 지위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나라도 얻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영생은 전부를 걸고 주님을 따파라야 얻을 수 있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전부를 걸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가진 것은 적었지만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제자는 주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차적으로 여겨야 합니다. 주님도 붙잡고 다른 것도 절대 놓치지 않겠다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분 안에 영생이 있고,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그분의 풍성하심 안에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무엇을 과감히 포기하고 미련 없이 버렸습니까?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해야 함에도 무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목매고 있습니까?
18:18-30 ; 회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나라, 곧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누가복음의 특징이 이곳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22절에서 부자인 그가 가장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곧 자기를 부인하고(회개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18:26-27 ; 제자들은 놀랐다. 하나님 축복의 상징인 율법을 잘 지키고 부를 잘 지닌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놀랄 필요 없다. 구원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고 말씀하셨다.(아가페 큰글성경)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이 아기들까지 예수께 데려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제자들이 보고서, 그들을 꾸짖었다.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러자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기에, 부모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어린 아이의 속성이 제자도의 중요한 본질을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어린 아이처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함으로써만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에 해당하는 ‘텍세타이’는
/ ‘받다’,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코마이’의 가정법이다.
/ 한글 개역 성경의 ‘받들다’는 표현은 ‘공경하다’, 또는 물건 따위를 ‘받쳐 들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적당하지 않다.
/ 그러므로 이는 공동 번역처럼 ‘받아들이다(KJV, RSV, NIV, receive) 로 번역해야 한다.
/ 그런데 ‘받아들이다’, ‘취하다’는 행동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어떤 것을 스스로 취할 때는 능동적 의미를 가지는 반면, 남이 주는 것을 취할 때는 수동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 본문에서 이 동사는 중간태 데포넌트 동사(Deponent Verbs)로 되어 있으므로 단순한 수통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 능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다시 말하자면, 일차적으로는 상대방이 주는 것을 받지만 그때 받는 자의 자세가 스스로 취하는 능동적 태도를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주어졌으며 또 어떤 조건이 있어야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일까?
/ 여기서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이는 결코 어떠한 조건이 만족되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 본문에서는 아무런 조건도 나타나 있지 않다. 본문은 이렇게 아무 조건 없이 주었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취하라는 의미이다.
/ 이때 하나님 나라를 줄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그 나라의 통치자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나라를 선물로 주시며 인간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초대하시지만 그 초대에 불응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가 주어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 하나는 긍정적 반응으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취하는 것이며
/ 다른 하나는 부정적 반응으로 그것을 배척하고 거절하는 것이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깊은 신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취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즉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태도를 가지며 자신의 전적무능력(全的無能力)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지도자가 예수께 묻기를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였다.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예수님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예수님은 십계명의 전반부를 인용하지 않고 후반부를 인용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관심을 갖고 있는 점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태도임을 밝혀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 감사, 존경의 표시는 인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 하는 문제를 통해서만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 3:17,18).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미처 실행하지 못한 것으로 곧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계명을 지켰던 그의 생활은 거짓이 되었다.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이 말씀을 듣고서, 그는 근심하였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다.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께서는, 그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베드로는 자기를 비롯하여 주님의 제자들로 한정하여 말하였는데, 예수님은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에게 축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에서 ‘버리다’는 의미로 번역된 ‘아페켄’의 원형 ‘아피에미’는 이탈이나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와 ‘보내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에미이’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 보내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버리는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지 못하도록 마음에 매여 방해가 되는 것들을 마음으로 부터 떠나 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의 마음에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고 또한 그런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마음 중심으로부터 떨쳐버려야 할 대상으로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집, 아내, 형제, 부모, 자녀 둥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엔 하나님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것도 다 포함된다. 이런 것들을 마음으로부터 떠나 보낸다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괴로웅도 감수하지 않고 평안한 삶을 영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29절에 대한 공관 복음서간의 차이 및 기타 의미에 대해서는 마 19:28 및 막 10:29의 설명을 참조하라.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
Ⅲ. 어린 아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호의 18:15-17
(1)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게 있는 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자녀들도 그 안에서 복되게 있기를 바라야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려 왔다. 어떤 이들은 그 아이들이 소아이며 매우 어려서 걸을 수도 없는 젖먹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 오지 못할 만큼 아주 어린아이란 없다.
(2) 그리스도께서 따스히 어루만져 주신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3)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15절).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간청하는 자들이 낙심할 만한 일에 부딪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4)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16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꾸짖은 많은 사람들을 부르신다.
(5) 어린아이들을 자기에게 오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각이셨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또한 곧 그들을 방해하는 일도 결코 하지 말라. 이는 그들도 다른이들처럼 환영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 나라에 속해 있다. 마치 자유인의 자녀가 자유인인 것과 같은 것이다.
(7) 어린아이의 기질을 가장 많이 지닌 자들이 그리스도께 가장 환영받는다(17절).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는 자'란 곧 자신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빚진 자로 고백하면서 겸손과 감사로 하나님의 은사를 받지 않는 자란 말이다. 만일 사람이 이러한 자기 부정의 상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그 나라에 들어갈 지혜를 가지지 못한 자가 될 것이다.
Ⅳ. 영생을 얻기를 원한 한 관원의 물음 18:18-30
1.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관한 그리스도와 관원과의 대화(18-23)
(1) 누가는 그 사람이 관원이었다고 적고 있다. 관원 중에서 그리스도를 존경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바로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2) 여기에 나오는 물음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큰 문제로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이었다(18절).
(3)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친히 자기들의 선생이 되신, 즉 가르치시는 선생이 되실 뿐 아니라 다스리시는 선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문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외에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배우는 곳은 달리 없다.
(4) 선생이 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가 신성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신성한 선을 가지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절).
(5) 우리의 선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그의 오시기 전의 상태에서 변경시키시지 않으셨으며 그것을 더욱 쉽고 평이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 놓으셨다. "너는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가? 계명을 지키라."
(6) 제 5계명에서 제 10계명까지의 의무들도 성실히 지켜져야만 한다. 이 계명들을 크게 위배하지 않는 것으로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이 계명들의 범위와 영적인 특질 속에서 '이 계명들을 알아야' 한다.
(7) 사람들은 무지하므로 자신이 무죄하다고 생각한다. 이 관원도 그러했다.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절). 그는 일찍부터 선한 삶을 시작했으며, 이날까지 계속해서 그러해 왔고 따라서 어떤 허물도 없다고 자만해 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본질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그 자신의 마음으로 행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면, 또한 잠시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그 반대로 말했을 것이다. 즉 나는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을 어겼습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8)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우리 형제들에 대해서, 그리고 금세와 내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어떻게든 그에게 와서 그를 좇을 것이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기꺼이 어린양을 좇고자 하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일 형제에 대해 참된 사랑을 가진 자라면 자기 있는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줄 것이다. 만일 금세를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팔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내세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라면 하늘나라에 보화를 두는 것 이상의 바램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9) 칭찬 받을 만한 것이 많이 있으면서 어떤 한 가지가 부족함으로 멸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여기 이 관원이 그러한 자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자기의 소유를 따로 구분한 이것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었던 것이다.
(10) 그리스도를 떠나기를 싫어하면서도 그를 떠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즉 그들의 타락한 본성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한 쪽을 버려야 할 때 그들은 그들의 이득이 아닌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2. 이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24-30)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내용을 찾아 보게된다.
(1)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있어서 부는 많은 사람에게 큰 방해가 된다. 그리스도는 그 사람이 매우 근심하는 것을 보셨으며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으나 이렇게 말씀하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24절). 어떤 사람이 큰 재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따라서 그는 자기 소유를 구제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입장을 취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떠나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자들의 구원받기가 어려움을 매우 강조하여 역설하신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2) 하늘나리에 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팔든지 혹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든지 해야 한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26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것에 대해 그것이 어려운 것이며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흠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이 이 세상에 얼마나 깊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기에 항상 이러한 자리에 떨어지는 자신들에 대해 심히 낙담한 것이다.
(3)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는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결코 다른 것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그러한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절).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에 역사함으로 그 영혼의 메마르고 삐뚤어진 것을 정반대의 모습으로 개조시킨다.
(4)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버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베드로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라고 했다. 그러한 태도를 능사로 여기게 될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자신과 자기 형제들의 사랑, 즉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을 무분별하게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5)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버렸든지 그것은 꼭 금세와 내세에 풍성한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29,30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소유의 좋은 것들을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을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기쁜 교제 속에서 그리고 선한 양심과 여러 유익된 것들로 자기들이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해 풍성하게 보상받을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그 관원이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원했던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cjdwl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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