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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자신의 수난 예고 및 여리고 맹인 치유(누가복음 18:31-43)

by 은총가득 2020. 11. 18.

 

자신의 수난 예고 및 여리고 맹인 치유(누가복음 18:31-43)

 

31-34절은 영적 소경된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35-43절은 육적인 소경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영적 무지와 선입견 때문에 영적 소경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육적인 소경이 고치므받지 못함은 올마른 신앙고백의 부족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로 인식하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맹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로 고백하였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는가라큰 질문 앞에 올바른 고백이 있어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의미와 '다윗의 자손 예수'가 갖고 있는 의미에서 그들의 신앙관을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영적인 간절함'이다. 간절하게 구하는 기도와 외침이 있어야 한다. 간절하게 구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외치다', '크게 소리 질러' 등의 단어에서 간절함을 찾을 수 있다.

셋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 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해야 한다.

소경이 육적으로 어두워진 눈을 뜨게 된 비법은 올바른 신앙고백, 간절한 기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마음에 있다.

(눅 18:31-34)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후에 부활하실 것을 3차례에 걸쳐 예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였다.

영적인 무지와 선입견이 원인이다.

영적인 깨달음은 오직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칼빈의 5대 교리 중 '전적 무패'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들의 선입견이란 예수님을 정치작 메시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경제적인 메시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육체의 경제적인 문제 해결자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잘못된 선이해는 매사에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과 성자 예수킴과 성령에 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달아가는, 영적 지식이풍성한 자가 되어야 올바른 신앙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성경묵상 ]

주님이 자신에게 닥칠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눈이 가려져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면, 여리고의 맹인은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끈질긴 믿음으로 시력을 되찾고구원을 얻습니다.

[ 질문 1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어떻게 예고하고 있는가?(31-33절)

고난의 메시아를 이해 못하는 제자들(31-34)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수난 예언이 6번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에서 주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 말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메시아의 고난'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생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광의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기대 때문에 '고난의 메시아'에 대해서는 눈이 닫혀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이방인들로부터 영광과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지 능욕과 채찍질과 모욕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방인들이 메시아를 죽이다니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이해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거듭 고난을 예고하신 것은 나중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다 받아들일 수 없어도 나중에는 깨달으리라는 믿음, 주님의 이 믿음이 결국 제자들을 이끌고 갑니다.

나의 믿음이 부족하고, 때로 잘못되었을 때도 여전히 '주님의 믿음'이 나를 이끄심을 믿습니까? 나는 언제쯤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성숙한 믿음에 이를까요?

[ 질문 2 ] 여리고의 맹인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38-43절)

'나사렛 예수'를 권능의 메시아로 믿은 맹인(35-43) 제자들이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할 때, 여리고 성의 한 맹인이 빛나는 믿음을 보입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로 고백하며 도움을 간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면서, 그것이 걸림이 되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했습니다. 메시아가 나사렛처럼 가난한 촌구석에서 나올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맹인에게는 예수님의 '출신'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만류와 모욕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로 고백하며 부릅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능력의 메시아란 확신이 없었다면 그토록 끈질기게 주님을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소원대로 시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비록 '고난 받는 메시아'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분이 '권능의 메시아'이심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자리에서도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까? 권능의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나를 더 겸손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자리로 이끌고 있습니까?

[ 본문개요 ]

18:31-34 ; 제자들은 자신들의 헌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주목하실 것을 청하였다(28절).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이 치르셔야 할 거룩한 대속의 희생에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31-34절까지에는 제9장에 기록된 두 번의 예수의 수난 예고(9:18-22 ; 9:43-45)에 뒤이은 세번째 수난 예고가 기록되어 있다. 이 세번째 수난 예고는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이 땅에 오신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 주어진다.

그런데 누가는 마태와 마가의 세번째 수난 예고 기록과(마 10:17-19 ; 막 10:32-34)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본절에서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하지 않은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메시야 사역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에 대한 표현은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며(1:22 ; 2:5 ; 8:17 등),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본서에는 본절 이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본절의 이 표현은 본서 저자 누가의 강조 의지가 짙게 배어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이 결코 세상 권력자들의 힘에 의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종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하신 구약 성경의 예언에 따라 구속사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18:31-34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제3차로 예고하신 내용을, 그리고 18:35-43절에서는 여리고에서 한 거지 소경을 치유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이 두 문단은 별개의 사건 이지만 문맥적으로는 ‘소경됨(blindness)’이라는 주제로 서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거듭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34절), 그들이 영적으로는 소경 상태로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였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그만큼 무지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예수께서 장차 영적 소경된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임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예리고의 맹인들 (맹인들을 치유하는 예수) /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프랑스 / 1594~1665년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인자가 이방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할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일차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운 이후에 다시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라고 기록하였는데(마 20:19 ; 막 10:33), 누가는 예수께서 곧바로 이방인들에게 넘기울 것이라는 사실만 기록하였다. 즉 누가는 예수의 수난의 직접적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에는 마태와 마가복음과 달리(마 26:65,66 ; 막 14:64) 유대 산헤드린 공회에 의한 예수의 사형 판결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과도 일맥 상통한다 하겠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을 면해 주기 위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다만 누가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이방인들도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 죽음에 대한 유대인의 관여 사실은 축소하는 대신 이방인의 관여 사실을 확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본서가 데오빌로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본 단락의 세번째 수난 예언을 첫번째(눅 9:22-27)와 두번째 수난 예언(눅 9:43-45)과 비교해 볼 때, 예수님은 그의 수난과 죽음의 모습을 단계적으로 점점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즉 첫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단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리울 것’(눅 9:22)이라고만 예언하신 예수님이 세번째인 마지막 수난 예고에서는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뱉음을 받고 채찍질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수난의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예언하셨다. 또한 두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자신이 사람들에 의해 ‘넘기울 것’(눅 9:44)이라고만 예언하신 예수님이 세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넘기울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최종적으로 누구 앞에 서서 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해 죽을 것인지에 대해 예언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세번째 수난 예고를 매우 상세하게 하신 목적은 이제 임박해진 그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이 명확히 알고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도록 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그들은 채찍질한 뒤에,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영원히 매장시켜 버리기 위해 죽일 것이지만, 예수는 그들의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또한 자신은 죽음의 법칙에 매이지 않는 생명의 주라는 것을 입증하며 죽음에서 살아나실 것이 대조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도 부활에의 소망을 주셨다(고전 15:20). 혹자는 예수가 그의 구속 사역을 수행하려다가 좌절되자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스스로 십자가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자신의 몸을 던져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 완성(요 19:30)을 모독하는 신성 모독적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저는 살아나리라’로 번역된 ‘아나스테세타이’는 ‘아니스테미’의 직설법 미래 중간태 3인칭 단수로서 예수께서 능동적으로 살아날 것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부활의 권능은 성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더 합당하다. 물론 예수님께 생명이 있지만(요 1:4), 그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주도권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행 2:24)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살리신 이유는 그는 죄가 없으므로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행 2:24 ; 히 4:15), 그를 믿는 자들을 죄 가운데서 해방시키기 위함이다(고전 15:17).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들은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본절의 내용은 다른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제자들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 말씀이 그들로부터 은폐되어 있었다’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본문을 이유 부사절로 번역했지만, 원어상으로는 각각 '카이'로 연결된 세 개의 주문장으로 되어 있는 본절 중 하나의 구절이다.

본문에서 ‘감취었다’는 의미로 번역된 ‘엔…케크휩메논’은 미완료 과거 동사와 완료 분사가 함께 쓰인 형태로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주님의 수난 예고의 말씀이 이해된 적이 없이 은폐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왜 그 말씀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일까? 또 언제까지 감추어져 있게 된다는 말인가? 비록 그 말씀은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것은 멀지 않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해 비로소 제자들에게 그 말씀이 조명됨으로 이해를 가져오게 된다. 그들은 분명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였다고 누가는 이중적인 강조를 하고 있다.

당시 제자들 역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영광의 메시야, 즉 가시적으로 보이는 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의 수난에 관한 말씀은 이해가 될 리 만무했을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체험한 후에나 왜 메시야에게 고난이 있게 되었는지를 바로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어떤 눈먼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다가,

누가는 예수의 세번째 수난 예고 이후 야고보와 요한이 이기적 야망을 갖고 주의 나라에서 높아지기를 구한 일과 이를 계기로 주신 예수의 섬김에 관한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마 20:20-28 ; 막 10:35-45). 아마도 본서 9:46과 22:24-27에서 누가는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누가는 본절부터 43절까지 한 소경이 고침 받은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 20 : 29-34과 막 10 : 46-52과 병행을 이룬다. 누가복음 속에는 누가가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흔적이 많이 있다(눅 4:18 ; 7:22 ; 18:14-15). 이것은 인자이신 예수께서 힘없고 소외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아시고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시며 함께하시는 분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 전함은 바로 이런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누가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 단락에 있어서도 누가는 예수와 그의 일행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마태나 마가의 기록과 달리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소경에 대한 묘사를 보다 자세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소경은 ‘바디매오’란 이름을 가진 거지였다(막 10:46).

한편 ‘구걸하다가’에 해당하는 ‘에파이톤’은 ‘반복하여 끈질기게 요구하다’는 의미, 즉 거렁뱅이들의 구걸 모습을 묘사하는 동사 ‘에파이테오’의 현재 분사이다. 특히 ‘에파이테오’는 신약 성경 중 본서 16:3과 본절에만 나온 독특한 단어로서 거지의 구걸하는 모습을 잘 표현한 동사이다. 따라서 본절에 등장하는 소경은 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그 소경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실로 이 소경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방치된 채 그렇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과 관계하여 마태는 마가와 누가와 달리 여리고에 이를 때가 아니라 떠나실 때 이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또한 마태는 한 소경이 아니라 ‘둘’이었다고 본절과 다르게 기록한다. 이에 대하여는 병행 구절인 마 20:29,30과 막 10:46 의 설명을 참조하라.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어 보았다.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그에게 일러주었다.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러자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앞서 가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여리고의 맹인이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믿음의 눈이 "밝은"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리라 약속된 메시아를 지칭하며, 그가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풍성한 지혜로써 사탄의 세력을 정복함으로, 모든 것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시대가 열릴 것으로 믿었다.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거듭 불렀다는 것은 그가 믿음과 기대를 나사렛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했다는 뜻이다.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오니,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말하였다. "주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구원하였느니라’에 해당하는 ‘세소켄’은 ‘소조’의 현재 완료형이다. 본문에서의 현재 완료형은 완료적 현재완료로서 어떤 행위가 말하는 순간의 시점에서 완결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완료적 현재완료가 의미하는 것은 그 즉시 소경에게 전과 같은 시력이 다시 돌아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소경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예수를 향한 그의 믿음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는 항상 환자의 믿음이 전제되고 있다. 이렇게 믿음은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를 받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믿음에는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과 구원 능력을 유효케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5:34 ; 마 9:22; 7:50 ; 눅 8:48).

한편, 바디매오는 눈이 나은 즉시 예수를 쫓았다. 복음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 이후 그는 예수를 열심히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를 따라갔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보고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Ⅴ.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심 18:31-34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임박한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의 영화로운 면에 대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를 보게 된다.

1)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이 성경의 성취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절).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정확하고도 완전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었다. 이는 성경이 그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십자가에서 죽게 한 죄의 원인을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이 기록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는 것은 마땅한 것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는 중에 당하신 수치와 치욕이 여기에 가장 잘 강조되어 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 것을 그가 조롱 당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가 능욕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모든 가능한 수치가 그에게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의 두려움과 수치를 씻어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다.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2) 이 결과로 제자들은 혼동을 겪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해서 가졌던 개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34절). 그들의 선입관이 너무 강했으므로 그들은 그 사실들을 문자 그대로는 이해하지 않으려 했으며 또한 달리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말한 예언들에 너무 정신을 판 나머지 그의 고난 당하심에 대해서 말한 것들은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성경을 한 쪽만 보았기 때문이며, 율법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들을 일부부만 편파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우리는 이미 성취된 선지서들을 읽는 가운데 곧 교회의 영광스러운 상태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에 잠기는 상태를 오래 지나가야 함을 못보고 있는 채로 그 후에 있어질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Ⅵ. 소경의 눈을 고쳐 주심 18:35-43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주심으로 우리가 보고 있는 물체들을 우리 앞에 보이도록 하시기 위해서 뿐 아니라 보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시력을 주심으로 그 물체들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는 이제 여리고 가까이에서 예수께서 보게 하신 어떤 사람에 대한 설명을 접하게 된다. 마가는 그 사람의 이름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그 사람을 고치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막 10:46). 마태는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두 명의 소경이 고치맏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마 20:30). 누가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로 말하고 있다.

(1) 이 불쌍한 소경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35절).

그는 소경이었을뿐 아니라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세사의 인간을 적절히 상징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고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앉아서 구걸하였다. 이는 그가 소경으로서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가에서 동냥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못본 체 지나쳐서는 안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비천한 거지를 향해 호의를 베푸신다.

(2)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그는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36절).

다른 복음서에는 이 대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자들은 언제고 유익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듣는 것을 보다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볼 수 없게 될 때에 물어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경은 그렇게 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37절).

(3) 그는 대단한 믿음과 열심으로 간구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절). 그 소경은 그가 자기를 도와 주고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열심으로 그의 은총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긍휼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4) 선한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은총과 축복을 바라는 자들은 비록 반대와 비난에 부딪히게 된다할지라도 자신들의 추구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갔던 자들은 주님을 성가시게 한다고, 그리고 소란하고 무례한 자라고 그를 꾸짖었으며 또한 잠잠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진 제재는 단지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는 둑처럼 그 외침을 더욱 크게 만들 뿐이었다.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39절).

(5) 그리스도께서 그 비천한 거지를 위로하시며, 그를 자신에게 오도록 부르신다.

예수께서…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40절).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어떤 자보다도 더욱 슬픔으로 간청하는 자에 대해 온유와 긍휼을 가지고 계시다. 그를 꾸짖은 자들은 이제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그에게 자신들의 손을 내어 밀어야만 했다.

(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궁핍을 알고 계시나 그는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듣고자 하신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41절). 이 사람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 놓았다.

(7) 믿음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42절).

그리스도께서는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셨다. 참된 믿음은 열심으로 기도하게 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낼 것이다.

(8) 그리스도의 은혜는 감사함으로 사례되어져야 한다(43절).

1) 자신의 시력을 회복한 그 비천한 거지는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를 좇았다.' 그가 고쳐 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그것은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그를 높일 때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 된다.

2) 그것을 본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게 될 때도 역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