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아름다운 순종과 헌신(누가복음 19:28-36)
들어가며
순종과 헌신, 듣기 여하에 따라서 매우 고상하고 값지게 들릴 수도 있고 꺼림직 하고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는 단어들입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순종과 헌신의 가치가 왜곡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은 그 두 단어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순종과 헌신은 하나님나라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들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예수님과 그 일행들과 관련해서 매우 아름다운 순종과 헌신을 보여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순종과 헌신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에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순종과 헌신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아름다운 순종과 헌신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으로
1.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곳에서 두 명의 제자에게 어떤 일을 시키셨습니까? (28-31절)
30-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30-31절)
예수님은 두 명의 제자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의 주인이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한 후에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작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늘 이곳저곳을 다니셔야 했던 예수님에게 나귀 새끼 한 마리가 있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그 마을에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아시고 그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명을 받은 두 제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32-36절)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순종과 헌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순종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32절)
우선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갔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말씀하신(30절) 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32절에 있는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는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33-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33-34절)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본 두 제자는 이번에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는데(30절) 그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나귀새끼의 주인들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30절). 제자들은 나귀새끼의 임자들에게 주님이 말하게 하신 대로 말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의 순종은 매우 특별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맞은편 마을로 가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있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남의 나귀새끼를 무작정 끌고 오라니요? 그건 남의 것을 훔치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두 명의 제자들은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그처럼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과 그 분의 말씀을 철저하게 신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는 말씀을 받고서도 “뭔가 조처를 취해놓으셨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지금 당장에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주님과 그 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헌신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35-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35-36절)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실 때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아마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겉옷은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두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의 겉옷은 길에 폈다는 뜻일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이 깔고 앉으시라고, 주님이 가시는 걸음 밟고 가시라고 겉옷을 드린 그들의 헌신이 참 귀해 보입니다. 당시 주님의 뒤를 따랐던 제자들에게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겉옷은 그들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그들의 이러한 헌신이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주님의 그 섬김의 발걸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헌신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작은 것일망정 진정으로 주를 위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헌신 아니겠습니까? 주를 위한 헌신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한 그 두 제자들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32절)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32절)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한 그 두 제자들을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 보내심을 받았으니 그들을 보내신 분의 뜻대로 순종해야 했고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답게 순종한 것입니다.
그 두 명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은 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정으로, 교회로, 직장으로, 사회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의 세계로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저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그 두 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명령을 주셨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모두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두 명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전적으로 순종했듯이 말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에 얼마나 동의합니까? 주님이 나를 나의 삶의 현장으로 보내셨다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4. 자신들의 나귀 새끼를 데려가면서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한 두 제자의 말을 들은 주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3-35절)
33-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33-35절)
나귀 새끼의 주인들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해주지는 않습니다만,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에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어준 듯합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이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나귀 새끼를 주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린 것입니다.
당시 나귀 새끼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동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굉장히 가치가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임자들에게는 소중한 재산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들은 기꺼이 나귀 새끼를 주님께 내어드렸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리라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데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귀한 헌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광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함으로써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데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임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나귀 새끼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의 소유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임자들이란 부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부부 관계 이외의 사람들이 작은 나귀 새끼 한 마리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들이 부부라면, 그들은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 주를 위해 헌신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 부부가 한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다면 더욱 귀한 일일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백 점 만점에 몇 점 정도 될지 말해 보십시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한 주간의 실천/ ‘말씀에 대한 나의 자세’를 돌아보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에 대해서 가족이나 목장(구역) 식구에게 말하기
마무리하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던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마는 그런 중에도 아름다운 순종과 헌신을 통해서 주님께 위로와 기쁨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 많이 무거우실 것입니다. 우리도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와 나귀새끼의 임자들처럼 아름다운 순종과 헌신으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눔,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헌금의 원리(누가복음 21:1-4)
들어가며
헌금, 성도들에게는 무거운 주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SNS을 통해 헌금에 대한 자신만의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런 주장들은 대부분 헌금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교회는 헌금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정작 헌금을 해야 하는 성도들은 헌금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헌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헌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헌금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배울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한 사람의 헌금을 통해서 친히 가르쳐주신 헌금의 원리를 배움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생활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으로
1. 어느 날 예수님이 사람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헌금하는 것도 보셨는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3절)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3절) 렙돈은 데나리온의 1/128(128 분의 1)입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0만원 정도 된다고 보면 한 렙돈은 800원이 채 못 됩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이 두 렙돈이었으니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500~1,600원가량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많은 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얼핏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정성껏’ 헌금했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 그 여인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헌금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질문에서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예수님이 두 렙돈 드린 그 가난한 과부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2, 4절)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저들(부자들)’과 ‘이 과부’를 비교하십니다. 물론 그들이 풍족한 중에서 드린 헌금과 그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도 비교하십니다.
사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부자들의 헌금과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셨다는 것을 집중해서 보여줍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1-2절) 분명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과 그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3절)라고 하심으로써 부자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그 과부의 헌금을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비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전에 이것부터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여인이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면, 예수님은 그 여인의 헌금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헌금의 본보기로 강조하셨을까요? 좀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정말 우리가 가진 모두를 주를 위해 드리기를 바라실까요? 그렇지는 않으실 겁니다. 물론 주님은 그 여인의 그 정성어린 헌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린 그 헌금에 감동은 하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여인처럼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리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의 모든 것을 ‘쥐어짜듯’ 헌금하기를 바라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자들의 헌금과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헌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코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정성으로 드리는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양’에 관심이 많습니다. “누가 제일 십일조를 많이 하나?” “우리 교회에서 누가 헌금을 제일 많이 하나?” 등이 관심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보시는 것은 양이 아니라 정성입니다. 얼마나 정성껏, 믿음으로 드리는가라는 것이 주님이 보시는 헌금의 핵심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 가난한 과부처럼 작은 물질을 드리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온전한 십일조는 드리지 못하지만 생활비의 십일조만이라도 드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양은 많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헌금입니다. 남들처럼 큰돈을 헌금으로 드리지는 못하지만 어려운 중에도 적은 금액일망정 감사헌금을 드리는 성도들의 헌금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헌금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정성과 마음’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헌금의 양’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 잔에 3~4천원 하는 커피는 쉽게 마시면서 주일헌금은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천 원 헌금한다면 그 헌금에 정성이 담겨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한 달에 한 번도 감사헌금을 드리지 않는다면 정성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이지만, 종종 돈, 혹은 돈을 쓰는 데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테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는 돈은 아깝지 않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일에는 천 원 하나 쓰는 것이 어렵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헌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헌금생할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헌금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실 것 같습니까?
3.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서기관들의 어떤 점을 삼가라고 하셨습니까? (20:45-47)
4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46절) 한 마디로 교만한 것, 으스대는 것,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것을 삼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4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46-47절)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들은 종교를 앞세워 백성들을 갈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백성들의 헌금과 헌물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처럼 악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그들은 길게 기도했습니다. 외형적 종교행위를 과시한 것이죠. 예수님은 그런 서기관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서기관들에 대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다룬 본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것은 명백하게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어렵게 드린 헌금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다면 그들 역시 예수님이 책망하신 서기관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은 46-47절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5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이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영적 지도자들은 서기관들처럼 행하면 안 됩니다. 특히, 성도들이 정성껏 드린 헌금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는 목회자에게 최대한 넉넉하게 사례를 드려야 하고 사역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부당한 이득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재정의 집행을 맡은 장로나 집사도 공정하고 투명하게 재정을 집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공의로움도 드러나고, 헌금하는 성도들에게도 기쁨과 보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있는 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엇에 관한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21:5-6)
21장 5-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5-6절) 예수님 시대의 성전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제자들이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훗날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훗날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만, 과부의 헌금과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근래에 한국 교회에 크고 웅장한 건물을 가진 교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눈에는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두 렙돈 드린 과부가 더 귀해 보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님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정성껏 헌신하는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거짓되고 교만한 종교 지도자들도, 교회와 지도자들을 비판만 할 뿐 자신들의 삶과 신앙은 돌아보지 않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도 않는 일부 성도들도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정성으로 주님께 드린 그 과부와 같은 사람이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렙돈 드린 과부의 모습을 통해서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오늘 배운 내용을 가지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십시오.
한 주간의 실천/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생활을 위해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한 가지 정하기
마무리하며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비록 적은 액수일망정 정성껏 드리는 헌금입니다. 주님은 헌금의 액수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헌금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헌금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 앞에서 정성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정성껏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도 유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도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나눔, 가상칠언 중 세 가지 말씀(누가복음 23:33-46)
들어가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가지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의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가상칠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부활하실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십자가에 달려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들이니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누가복음에는 가상칠언 중에서도 세 가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세 가지 말씀을 모두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세 가지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 속으로
1. 누가가 소개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첫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33-34절)
33-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33-34절)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는 곧 수치와 죽음을 뜻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용서야말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지만 십자가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받음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함을 받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의 귀한 발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용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큰 용서를 받고서도 작은 것 하나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용서에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 자신이 용서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용서를 잘 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가운데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두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39-43절)
43절에 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43절)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한 행악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명의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두 명의 행악자 중 하나는 십자가에 달렸으면서도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39절) 이것은 명백히 비방하고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행악자는 오히려 그 사람을 꾸짖었습니다. 그가 다른 행악자를 꾸짖은 내용이 40-4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40-41절) 그가 한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그가 예수님이 무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예수님이 무죄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4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42절)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과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행동과 말씀을 통해서 그 분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그의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향해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그 행악자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것은 십자가의 또 다른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오직 예수님을 영접한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 선을 행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도 십자가에 달린 몸으로 무슨 선을 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 행악자가 구원을 받은 것은 철저하게 믿음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자격이나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곧 감사입니다. 감사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요?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 보면서 구원과 행함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3.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가상칠언의 세 가지 말씀 가운데 마지막 말씀은 무엇입니까? (44-46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에서 오늘본문이 소개하는 마지막 말씀은 4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46절)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른 복음서를 참조해서 살펴보아도 이 말씀이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숨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면서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의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이 말해주듯이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물론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그 죄의 형벌이 어떨 지에 대해서 예수님조차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거나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의탁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우리의 영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삶과 죽음을 전적으로 아버지 손에 의탁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영혼을 영원토록 책임지실 것입니다.
내 삶을, 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한 주간의 실천/ 가상칠언 중 세 가지 말씀을 외우면서 그 의미 되새기기
마무리하며
가상칠언은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말씀이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이 소개하는 가상칠언 중 첫 번째는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달렸던 그 강도처럼 자격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의탁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말씀과 그 의미를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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