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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눅 24:50-51)

by 은총가득 2020. 11. 18.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누가복음 24:50-51)

 

[ 성경묵상 ]

24:50-53은 예수의 승천 및 남은 제자들의 반응을 보도하고 있다.

[ 질문 ] 승천을 목격한 후 제자들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는가?(52-53절)

승천하시는 주님 (50-53)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까지도 제자들을 축복하십니다(50, 51), 승천 이후에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제자들을 위해 계속 축복의 기도를 하십니다(롬 8:34).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고 승천을 목격했습니다. 하늘에 오르시는 주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주님이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 하늘과 온 땅의 왕이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 기뻐합니다(52). 은둔 생활을 끝내고 당당히 성전에 나아갑니다(53a). 하나님을 찬송합니다(53b). 예수님은 승천을 통해 제자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은혜의 사건을 주셨습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 지금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계심을 믿습니까?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나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베다니’는 ‘날짜의 집(House of dates)’이란 의미로서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감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베다니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고향인 동시 에 문둥이 시몬 집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 의해 향유를 부음받은 곳이기도 하다(막 14:3-9 ; 요 11장).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냈다.

 

그리스도의 승천 ( 24:50-53 )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매우 엄숙하게 제자들을 떠나셨다.

주님에게는 양쪽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으셨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부터 땅에 오심으로써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온전히 마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다 이루신 후에는 하늘로 돌아가셔서 그곳에 거하고 계신 것이다.

1) 주님이 승천하신 곳: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과 인접한 베다니에서였다.

그곳에는 주님의 수난이 시작된 동산이 있으며 거기서 주님은 매우 고민하고 계셨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이란 뜻이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고난과 슬픔의 집에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고난과 슬픔의 집에서 천국에 오르게 된다. 또한 여기서 주님은 얼마 전에 당당한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하셨었다(눅 19:20)

2)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목격한 사람들: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볼 수 있게 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살아계신 주님을 본 것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이 승천하시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달리는 주님의 승천을 증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3) 주님의 작별 인사: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주님은 기분 나쁘게 떠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기쁘게 떠나셨다. 주님은 축복을 남기셨다. 주님은 그들을 축복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보여 주셨다.

4) 주님이 떠나신 방법: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51절).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들을 떠나신다고 해서 그들을 축복하는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셨다.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으며 하늘에 가셔서도 그것을 계속하고 계신다.

5) 주님의 승천에 대한 표현:

① 주님은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반드시 우리를 떠날 날이 있다. 세상적으로 그를 알던 자들도 이제부터는 더 이상 그를 그렇게 알지 않는다.

② 주님은 하늘로 올리우셨다. 불병거나 불말이 필요 없었다. 주님은 그 길을 아시기 때문이다.

(2) 제자들은 계속해서 명랑하게 주님을 섬겼다.

주님이 떠나실 때 그들은 주님께 대한 경의를 표했다. 즉 그들은 주님께 경배했다(52절). 주님이 그들을 축복하자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은 주님께 경배했다. 그들이 부지 못하도록 구름이 주님을 가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의 예배를 보지 못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큰 기쁨으로 그곳에 머물렀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변화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슬픔이 마음에 가득하던 그들이었건만 그분이 떠나는 것을 본 지금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기대하는 동안 신앙심에 가득차 있었다(53절). 그들은 기도 시간에 성전 예배에 참석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계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계속해서 성전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대신한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성전에서 부르는 찬양을 함께 드렸다. 거룩한 기쁨과 찬양보다 더 성령받을 마음의 준비를 훌륭히 시키는 것은 없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슬픔은 가라앉으며 소망만이 남는다. 아멘. 계속해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예수승천 / 장 주브네(Jean Jouvenet) / 프랑스 / 1644~1717년

부활절 단상(斷想) ☆☆☆☆☆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르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들이 말씀을 듣고 지키게 하는 것은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가르치기기만 하면 되는 걸로 판단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가르치믄 자는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지키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가르쳐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그들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을 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에게 부활을 가르치는 것, 증거하는 일은 더 힘든 일이다.
이들을 믿게 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다.


고난 없는 부활은 빈껍데기일 뿐

 부활절의 의미를 찾는다면?

“부활절 앞엔 반드시 고난주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도 가능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부활의 영광만 강조했지 부활 전의 고난은 소홀히 해왔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실체가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먼저 희생하고 먼저 낮아지는 일상의 삶을 통해 고난을 감내해 나갈 때 부활도 의미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죽어야 한다.
죽어야 부활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죽을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피할려고 한다.
개척교회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
대형교회를 쫓아 다닌다.
그곳에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그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죽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다.
이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좋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를 경영하는 중에 좋은 것을 준비하여 제공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불만을 표시하는 학부모를 바라볼 때가 많다.
하나님의 심정이 이러할 것이다.
시편 78편의 내용이 그러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푼 사랑과 긍휼을 깨닫지 못하고 탐심으로 가득찼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러한 이스라엘에 다윗을 택하여 인도하게 하셨다고 한다(78편 마지막절).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나를 지금까지 인도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 베푸신 축복이 무엇이었는지 깩닫게 하옵소서.
그동안 우리 교회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무엇인지 바라보게 하옵소서.
깨닫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탐심을 뉘우쳐 깨닫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맡기는 자의 삶
자신이 다 처리한 나의 인생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내 자신은 언제나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그것이 상관들을 잘 모시는 일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힘든 일만 계속되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인생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 맡겨 버려라.
던져야 한다.
되가져오면 안된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요? (퍼온 글)

[질문]

신약시대에 와서 안식일이 신자들에게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요?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전에는 안식일이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로 지켜졌는데 지금 신자들은 일요일을 "주일" 이라고 하여 그날 일도 쉬고 예배도 드립니다. 그런 면에서 달력상 일요일이 한 주의 첫날이지만 오히려 마지막 날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지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는 비록 예배는 주일날 드리지만, 성경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므로 그날 아무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쉼과 예배드림은 따로 구분되는 것인지요?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요?


또 제가 알기론 많은 목회자 분들께서 일요일은 교회 일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월요일이나 일주일의 다른 하루를 정해 휴식을 취한다고 합니다. 목회자 분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하고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로 주일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일요일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옳은 일이겠지요. 7일 중의 하루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율법을 떠나서 우리의 몸과 마음, 영적 건강에도 유익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렇다면 그 안식을 취한다는 것과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답변]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구분 및 참 안식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율법적인 규정이나 종교적인 의무 차원으로 너무 단순하게 접근합니다. 신앙 상의 모든 의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적 해석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라는 준거에 적합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몇 가지 부분적이고 문자적인 규정에 맞다고 다 옳은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진리에 비추어 보아야만 최종적이고도 바른 해석이 됩니다. 안식일에 관한 여러 의심들도 바로 이런 점에 비추어 분석되지 않으면 쉽게 그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1. 최초의 안식일 – 창조를 기념하라

안식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창세기 2:1-3에 나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이때는 아직 인간에게 안식일을 지켜라는 명시적 계명은 없었고 하나님 당신이 안식하셨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 주일 중의 하루를 분명히 안식일로 따로 떼어 제정했습니다. 이 안식일 제정의 뜻은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안식하셨지만 하시던 모든 일에 완전히 손을 놓고 쉬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드시던 모든 일 즉 창조 사역은 마치고 쉬셨지만 바로 그 날부터 모든 피조세계를 영원토록 다스리는 운행과 섭리의 사역은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이 모든 일에 손을 떼고 무조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 날에도 일상적인 일과 주일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서 이뤄지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아무 생각 없이 단순히 휴식을 취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그 중에서도 인간을 바라 보시며 하루 종일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자도 자신이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임을 심히 기뻐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 대신에 이땅을 다스릴 청지기 직분을 받았음(창1:28)을 두렵고 떨림으로 되새겨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일생의 완전한 주인이 되시고 신자는 그 분의 품 안에 거하며 당신의 뜻대로 행할 때에만 참 안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창조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창조를 기념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자 유지 보존하는 능력 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된 생명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안식일 준수를 형식적 문자적 율법주의로만 주장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6:9)고 꾸짖으셨습니다. 안식이란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 즉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를 기념하기 위해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되새겨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 창조의 목적을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13)고 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이야기하는 이 백성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으로 오늘 날로 따지면 신자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백성에게만 해당되지 불신자에겐 단지 하루를 쉰다는 의미 말고는 없습니다. 신자가 창조를 기념하려면 하나님에게 당연히 경배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일 날 예배와 안식을 따로 구분해서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 안에서 참 안식을 구하고 안식하면서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그 날을 복 주셨다고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뜻에 비추어 보면 질문자님이 지적한 대로 인간은 일주일 중에 하루를 따로 떼어 쉬어야 영육간의 조화를 제대로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모르는 불신자에게도 허락하신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당신들은 일주일의 다른 날을 택해 쉬는데 반해 주일 내내 일한 평신도 봉사자들을 주일날 교회에 너무 종일 붙들어 놓는 조금 잘못된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허락하신 생명을 귀하게 가꾼다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하루는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또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거룩의 의미에 관해선 별도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안식일에 대한 최초의 계명 – 더 확장된 창조의 개념

신자더러 안식일을 지키라는 최초의 계명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나타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창조시의 하나님의 안식을 기념하고 동참하는 의미에서 안식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고 해서 무조건 무슨 일이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마음 속으로 여러 가지 궁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일이지 않습니까?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엿새 동안에 힘써 일한 일과 대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에 자기 직업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조달한 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이 예배를 비롯하여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안식일에 쉬어야 할 일과 달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므로 주일날 일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일반인과 달리 안식일에 그만 두어야 할 생업이 따로 없습니다. 교회 일 자체가 일용할 양식을 조달하는 생업이자 하나님에게 받은 소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천직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생업을 쉬고 안식하는 날에 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개 월요일을 택해 쉬는데 이야말로 육신의 안식을 위한 날입니다. 월요일을 택한 것은 주일을 지낸 다음 날이라 특별한 교회 행사가 거의 없으며 주일 날 혼신의 힘을 다해 설교하고 가르쳤기에 가장 피곤이 쌓인 날이라는 순전히 현실적 이유 때문입니다.

본 계명에서는 창조를 기념하라는 안식의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된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집안의 남종, 여종, 심지어 육축과 유하는 객이라도 쉬게 하라고 합니다. 유대인들끼리는 서로 노예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유하는 객 가운데 이방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육축은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다 안식을 취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칠일 중에 하루를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편익을 주는 동물마저 일주일 내내 주인을 위해 섬기느라 육신적 피로가 쌓이니까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땅도 7년에 한 번씩 일년간 경작을 쉬는 안식년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찌니라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0-12) 특별히 가난한 자의 구제와 들짐승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안식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이땅을 다스려야 하는 신자는 하나님과 동료 신자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모든 피조물을 다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안식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모습을 불신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가 따로 있으며 상천하지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경배와 찬양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만천하에 선포해야 합니다. 간혹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 보고 혼자 안식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병에 걸려 운신을 못하든지 아주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그렇게 해선 안됩니다.

나아가 성경은 자기 집안의 모든 사람과 육축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 가정부터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원리로 운영하라는 것입니다. 종이나 주인이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안식의 또 다른 개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뿐 아니라 이웃도 함께 내 몸같이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를 하나님의 신령한 공동체로 변화 시킬 책임이 신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모든 강령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다 이루어지며(마 22:37-40) 또 신자라면 안식일에 교회라는 공동체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언약으로서의 안식의 개념 – 출애굽의 구원을 기억하라

성경은 또 안식일을 여호와와 이스라엘 상호간의 위탁을 기념하는 언약 관계의 상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출31:16,17)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은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면서 하나님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고 하셨던 약속을 말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또 다른 의미는 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5) 하나님이 애굽의 육축을 비롯한 모든 장자를 죽일 때에 어린양의 피로 문의 인방과 설주에 바른 후에 집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하여 살려 주었고 홍해의 물을 가르는 기적을 통해 애굽 군대의 추격으로부터 지켜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구원을 받을 만큼 도덕적으로 선한 것도 아니요 자기들이 특별한 노력을 한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사실 출애굽 때에 처음 맺은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과 맺은 것을 다시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그의 자손을 하늘의 뭇 별처럼 번성케 하며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되 그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 년간 그들을 섬긴 후에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동물 희생 제물을 반으로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놓은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갔습니다. 바로 그 약속이 출애굽 사건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와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을 그 후손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움으로써 재확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의미는 그들의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여 재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 받았고 불신자들과 세상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서 있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안식일마다 새삼 인식해야 합니다. 이웃의 죄를 위해 기도해 주며 그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 일해야 하는 만인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 앞에 빛과 소금으로 서기 위하여 안식일에 교회에서 예배와 교육을 통해 열심히 훈련 받고 준비해야 합니다.

4. 안식일이 토요일인가?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안식일은 태양력으로 치면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간혹 안식일을 성경대로 제대로 지키려면 토요일에 예배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너무 부분적, 문자적으로 해석한 예에 불과합니다.

만약 꼭 그렇게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따르려면 유대인들의 일력 계산 법에 따라 금요일 저녁 해질 무렵부터 그 다음 날 토요일 해 질 때까지를 안식일로 지켜야 합니다. 단순하게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할 것이 못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창조 시에 제정한 최초 안식일인 마지막 일곱째 날이 과연 지금 달력으로 치면 어느 요일에 해당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구약대로 토요일을 꼭 안식일로 고집하겠다는 것은 자칫 유대인들의 관습법만 염두에 두겠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마르틴 루터는 모든 시간이 거룩하기 때문에 안식일도 주일도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휴식하는 날과 예배 드리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일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대로 반드시 토요일만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율법적 형식주의의 잘못을 되풀이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신자는 일주일 내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감사와 경배가 넘치는 삶을 살 때에 언제나 안식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5. 주님의 날(the Lord’s Day)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중요하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 와선 오히려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인 한 주일의 첫번 째 날에 모여 주님을 기념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왓더니…”(마28:1)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여덟 번 제자들에게 나타났는데 그 중 여섯 번이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안식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 확장되고 완전해졌다는 것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줄애굽에 나타난 구원의 의미가 완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세례 요한이 지적한 대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예식에 따르면 무교절 첫날인 유월절 하루 전날에- 지금으로 치면 목요일 밤에 - 양을 잡아서 무교병과 함께 식사합니다. 주님도 그 예식에 따라 무교절 첫날(마26:17)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신 후에 잡혀가 수난을 당합니다. 그 때가 목요일 밤 12시를 막 넘긴 새벽으로 유월절 전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Passover) 명절에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주님을 그 하루 전날 밤에 붙들어 꼬박 밤을 새우며 재판 절차를 급하게 서둘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다음날 오후 세시(금요일)에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유대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 때에 어린 양을 죽이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애굽시에 하나님이 유월절을 제정하신 과정을 다시 살펴 봅시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 취하고 이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한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pass-over)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5,6,13)

먼저 구원 받을 자들은 집 안에 있고 어린 양의 피로 문 밖에 가로 세로로 바릅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만 보고 죽음의 벌을 내리지 않고 넘어갑니다. 피를 가로와 세로로 바르는 것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집 안에 있었을 뿐입니다. 구원 받을 아무런 공적이나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은혜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유월절 어린 양이었고 출애굽은 십자가 구원의 표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성찬 예식을 지키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3-25) 또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도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부활하신 날로부터 7일씩 일곱 주일이 지난 오십일 째도 당연히 유월절 후 첫날 즉 일요일이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성찬을 나누면서 주님을 기념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0:7),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16:2),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계1:9,10) 같은 성경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또 초대교부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우리의 생명 역시도 주님과 그 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소생케 된 날인 주일(주님의 날)을 지킴으로써 새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이 AD 250년에 “일요일(Sunday)이라고 부르는 날”에 드린 교회 예배를 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시대 율법에 따른 안식일 관습을 버리고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믿음으로 붙들게 된 것입니다.

6. 참 안식의 의미

오늘날의 신자가 안식일로 토요일 혹은 주일 중 어느 날을 지켜야 하는가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보다는 신자가 누리는 참 안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단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육신의 쉼만을 얻는 것은 신자가 누릴 안식이 아닙니다. 불신자도 일주일 중 하루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풀고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도덕적으로 반성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안식은 달라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은 무엇입니까?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4-6,9) 가장 먼저 안식의 계명을 받았고 또 출애굽을 통해 언약을 재확인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범죄하고 불순종하여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히3:17-19)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하신 안식의 약속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언젠가 이루어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 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10,14)

죄가 많은 인간 대제사장이 동물의 피로 드리는 율법이 규정한 속죄제로는 인간의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히9:12) 즉 하나님 당신이신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분(히4:15)이었습니다. 그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once-for-all)”(히9:12)를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인간이 누리는 참 안식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는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언약을 받고 안식일을 율법대로 지키며 동물의 희생제사를 드려도 완전한 속죄가 이뤄지지 않아 불완전한 안식이었을 뿐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된 불순종과 배교로 그 언약을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31:32-34)

새 언약의 내용은 여전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옛 언약과 동일합니다. 달라진 것은 언약이 돌 판이 아닌 “마음에 기록”했고 또 동물 희생 제사로 매년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선 "성령이 우리에게 (이 언약을) 증거하시되” (15절) 예수님이 “이것을 사하셨은즉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8절)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역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음을 신자의 마음 속에 기록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일차적인 이유는 불순종으로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들은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경배했으며, 언약 백성이라는 인식도 있었으며, 율법의 제사도 드렸고,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아주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3:18,19) 온전한 믿음이 없었기에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받은 선민이기에 혈통으로 당연히 구원 받는다고 잘못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성경에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1,2)고 했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완전한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만 새 언약에 따른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안식은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항상 교제할 때에 가능합니다. 이 땅에서부터 성령으로 거듭나 지나간 모든 죄와 현재와 장래의 죄까지 주님의 보혈로 사하심을 얻었다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에 있던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고”((히10:19)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8:2)시켜 주어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감사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신자 본인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없었다는 온전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엡4:22-24)

그래서 신자는 바울 사도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고전15: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동일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이 없다면 아직은 참 안식 안에 들어 온 것이 아닙니다.

7.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거룩의 의미

따라서 신자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참 안식을 얻는데 실패했던 토요일이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을 지키야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이는 인간이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절대 얻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로 참 안식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 날을 어떻게 지키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까? 한 마디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거룩’의 뜻을 너무 종교적 도덕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아주 엄숙하게 교회 행사로 하루 종일 보내고 세속적인 쾌락이나 풍조가 조금이라도 끼어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던 태도 이상으로 경직된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쇼핑이나 음식 사 먹는 것도 안되고 극장 구경 심지어 테레비 시청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거룩의 의미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거룩(holy)’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용어입니다. 그것도 인격적으로 완벽한 선하심이나 아주 신령하고 고상한 용모, 태도, 분위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되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딤전1:17)이십니다. 피조물이 아니며 물질이 아니며 스스로 자존하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도록 구별된 존재이기에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려면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 외에 맞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을 제외한 모든 것과는 완전히 다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 되신 그 분을 제대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바로 그것이 거룩의 본질입니다. 그 거룩의 본질 안에 인간이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전지전능, 절대주권, 완전하신 선과 공평과 정의와 사랑, 초월성, 무소부재성 등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처음 제정할 때에 바로 그 거룩의 의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창2:3) 하셨습니다. 일곱째 날을 다른 여섯 날과 완전히 다르게 구별했다는 뜻입니다. 따로 완전히 떼어 놓은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도 주일은 완전히 따로 떼어서 다른 날과 다르게 지키는 것이 거룩의 첫째 의미입니다. 특별히 앞에서 살펴 본 대로 하나님은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을 보고 심히 기뻐하심으로 구별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인해 기뻐하고 신자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날이 주일입니다.

주일날 새 양복 입고 경건한 표정을 짓고 성경을 고이 모셔 들고 교회 갔다 와선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면서 보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날과 완전히 다르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외양적으로는 일을 안하고 쉬면서 교회 갔다 왔으니 다른 날과 다르게 보낸 것은 맞습니다. 솔직히 신자라도 다른 날은 세상에서 죄악의 시험과 유혹 앞에 노출되었고 사탄의 방해도 받으며 돈을 벌고 자존심을 세우려 산 적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간혹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일만은 하나님 외의 모든 세상의 것들을 끊고 그분만 전적으로 생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자신의 바뀌어진 신분, 소속, 특권들을 누리며 보내야 합니다.

주일 날 꼭 성스러운 내용이 아니라도 오랜 만에 가족과 함께 건전하고 재미 있는 영화를 보러 갈 수 있습니다. 자기 가정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다면 말입니다. 또 일주일 내내 일하느라 바빴던 사람들은 주일날 쇼핑도 가고 밀렸던 집안 일도 해야 합니다. 지난 일주일의 삶과 쇼핑갈 수 있는 여유도 전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면 됩니다. 또 불신자 친구가 찾아와 함께 외식하면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주중에는 그들과 세상 사업 일을 함께 도모하기 위해 만났더라도 주일만은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오직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복음 전할 기회를 달라고 속으로라도 기도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일초를 다투는 급한 환자가 있어 또 소방관이나 경찰관이 긴급사태가 나 주일을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도 하루 종일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다른 날 하루를 택해 예배 드리든지 아니면 주일 날 집에서 혼자서 잠시라도 주님께 예배 드리는 시간은 따로 떼내어 가져야 합니다. 일년에 몇 차례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빠지고 출장이나 휴가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도 가능한 여행지의 교회에 출석하든지 정 그럴 여유가 없으면 본인이 잠시 짬을 내어 개인적으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참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만 이뤄지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특별히 따로 떼어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따로 떼어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되 형식적 외양적으로 해선 안됩니다. 신자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예배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에게 모든 가치를 바친다(worth + ship = worship )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 주신 은혜에 완벽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예배드리는 것과 사실은 동의어(同意語)이며 또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내용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특별히 생업을 중지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과 존재와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고백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날 예배에 반드시 헌금이나 십일조가 따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주일은 달력대로 일주일의 첫 날이어야 합니다. 항상 지난 일주일을 보낸 후 안식을 취하고 그 주간의 잘못을 회개하는 날로만 보내는 데 잘못입니다. 아담이 이 땅에서 맞은 최초의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신 후에 인간에게 최초의 날로 당신 안에서의 안식을 선사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안식이 먼저였고 일은 뒤에 따랐습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먼저이며 그 후 세상에서 인간 관계를 맺고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신자는 주일 날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반드시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에 마련해 놓은 뜻과 계획을 재확인하셔야 합니다. 그 소명 안에서 새로운 주일을 출발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에 이르도록 있었던 지난 주의 은혜와 축복은 감사는 하되 사실 잊어 버려야 합니다. 물론 모든 죄와 실패와 낙심과 의심과 불평도 함께 묻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빌10-14)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부활로 초대하는 날입니다. 부활 신앙이 단지 죽은 후 천국 갈 수 있다는 확신을 붙드는 것으로 그쳐선 안됩니다. 중생할 때에 이미 부활했을 뿐 아니라 매주 새롭게 부활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신자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더 키워나가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신자가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으면 참 안식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갈수록 주일 성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종교적 계명으로 강조했던 것에 대한 반작용일 것입니다. 또 주일을 단지 육신의 쉼과 지은 죄의 회개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축복 받는 날이라는 것 즉 현실적 안식에 초점을 두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일은 예수님의 날입니다. 십자가 부활의 승리의 날입니다. 오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안에서 충만해지는 날입니다. 반드시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루를 완전히 따로 떼어 예수님과 함께 보내야 합니다. 신자의 참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선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