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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누가복음 13장 원어 강해 및 주석

by 은총가득 2020. 11. 20.

누가복음 13장 원어 강해

 

 

눅 13:1~9 회개를 촉구하심

회개의 재촉을 위해 두 사건을 예로 들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 회개 할 것을 촉구하시며 이에 대한 교훈으로 세 가지의 예를 말씀하시며 경고하신다.

1. 갈릴리 사람들을 통한 교훈(1-3절)

1)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
(Parh'san dev tine" ejn aujtw'/ tw'/ kairw'/ ajpaggevllonte"...tw'n qusiw'n aujtw'n.파레산 데 티네스 엔 아우토 카이로 아팡겔론테스…톤뒤시온 아우톤;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예수께 고하니,1절)
파레산(Parh'san와서)은 파레이미(pavreimi곁에 있다. 가까이 있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의 곁으로 계속적으로 가까이 걸어오고 있음을 뜻한다(A.T.Robertson). 또한 예수께 전할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우토 토 카이로(aujrw'/ tw'/ kairw'//그때마침)는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실 바로 그때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표현은 숙명적인 사건의 암시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A.L.Willims), 카이로(kairw'/때)는 카이로스(kairov"시간)의 여격 명사로서 같은 그 시점의 시간을 나타낸다(F.Rien-ecker). 아팡겔론테스(ajpaggevllonte"고하니)는 아팡겔로(ajpaggevllw보고하다)의 현재 분사로서 그 특정한 시간에 몇 사람이 예수께 와서 근래에 발생한 숙명적인 사건의 전말을 보고한 것을 말한다(J.A.Bengel). 이들은 이 사건을 때의 징후로 짐작했을 수 있다(A.Plummer). 즉 이들은 예수가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로마의 탄압 세력을 몰아내고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려는 반항심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보고하였을 것이다(F.W.Farrar).
에미크센(e[mixen섞은 일로)은 미그뉘미(mivgnumi섞다)의 부정과거형으로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가 빌라도에 의해 살해되어 그들의 피가 희생 제물과 섞인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W.S.Lewis, H.M.Booth). 쉬임없는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인들은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폈다. 이러한 역사적 학살 사건은 초대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2) 유대인들이 가진 그릇된 관념
(kai; ajpokriqei;" ei&pen aujtoi'", Dokei'te o{ti oiJ Galilai'oi ou|toi aJmartwloi; para; pavnta" tou;" Galilaivou" ejgevnonto, o{ti tau'ta pepovnqasin_카이 아포 크리데이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도케이테 호티 호 랄릴라이 오이 오우토이 아마르토로이 파라 판타스 투스 랄릴라이우스 에게논토 호티 타우타 페폰다신;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2절)
아포크리데이스(ajpokriqei;"대답하여)는 아포크리노마이(ajpokrivnomai대답하다)의 부정과거 분사로 동시 동작을 나타내며, 유대인들의 그릇된 일과 관계에 대한 개념을 시정키 위해서 예수께서 대답하신 가르침의 말씀을 의미한다.초케이테(Dokei'te아느냐)는 도케오(doke;w알다, 생각하다, 믿다)의 현재 직설법으로 유대인들이 당시 계속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죄관을 지적하신 것을 나타낸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고치 않는 재난을 죄에 대한 대가로 간주하였던 것이다(W.S.Lewis, H.M.Booth).
페폰다신(pepovnqasin해받음)은 파스코(pavscw고난받다, 시달리다)의 현재 완료로 이들이 고통을 경험하는 것과 죽음을 당하는 것이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엄염한 사실인 것을 밝히고 있다(A.B.Bruce). 파라(parav보다 더)는 소유격 전치사이며, '곁에 비교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는 '갈릴리의 모든 사람들을 곁에 놓고 비교하여 볼 때'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죄의 형벌관을 고치시고자 교훈의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이다.

3) 회개치 않으면 망할 것을 가르치심
(oujciv, levgw uJmi'n, ajll! eja;n mh; metanoh'te pavnte" oJmoivw" ajpolei'sqe.우키레고 휘민 알르 에안 메 메타노에테 판테스 호모이오스 아폴레이스데;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며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3절)
메타노에테(metanoh'te회개하지)는 메타노에오(metanoevw회개하다)의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계속적으로 마음의 상태를 고치고 바꾸는 회개의 행위를 의미한다. 즉 계속적으로 마음과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직선적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A.T.Robertson). 호모이오스(oJmoivw"이와 같이)는 부사로서, 여기에는 두가지 해석을 가져울 수 있다.(1) '똑같은 방법으로'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A.D 70년 유대인 대학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이다.(F.W.Farrar,F.L.Godet). (2) '또한, 역시'라는 의미로서 회개치 않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구나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W.
Hendriksen). 두 견해를 고찰해 보면 예수께서 본문에서 강조하신 말씀과 연관해 볼 때 두번째 견해를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타당한 일임을 제시하신 것이다.(H.Alford).
아폴레이스데(ajpolei;sqe망하리라)는 아폴뤼미(ajpolumi파괴하다, 멸망하다)의 미래 직설법으로 회개치 않은 자들 역시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말이다. 그런데 이 멸망의 예고에 대해서는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대학살을 가리키신 것이라는 주장(F.L.Godet, F.W.Farrar)과 인류 모두에게 임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는 주장(Lenski, Maeshall)이 있다. 모든 인류가 예수 재림시에 누구나 심판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후자의 견해를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다.

2.실로암 망대의 교훈(4,5절)

1) 열여덟 사람의 희생자
(h] ejkei'noi oiJ dekaoktw; ejf! ou}" e[pesen에 에케이노이 호이 데카오크토 에프 후스 에페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4a절)
에페센(e[pesen무너져)은 피프토(pivptw떨어지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실로암을 지키기 위해서 건축한 망대가 무너진 사건을 나타낸다. 아페크테이넨(ajpevkteinen치어 죽은)은 아포크데이노(ajpoktevinw죽이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2)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tou;" katoikou'nta" !Ierousalhvm_ 투스 카토이쿤타스 예루살렘;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4b절)
오페일레타이(ojfeilevtai죄가)는 오페일레테스(ojfeilevth"채무자)의 복수 주격으로 '빚진 자'라는 의미이다.(A.T.Robertson). 여기서 '빚진 자'에 대해서 곧 '죄인' 이라고 주장하는 견해(Marshall)와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이 성전에 대하여 빚을 지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G.H.A.Ewald, W.Baeclay)가 있다. 즉 이들은 실로암 공사 때에 사고로 죽었고, 빌라도는 공사 비용을 성전에 바쳐진 돈을 도용하여 사용하였다.그러므로 이 돈을 받은 일꾼들은 성전에 바쳐진 돈을 쓴 것이기에, 다시 그 돈을 성전에 돌려주어야 할 빚을 지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3)다시 한번 더 회개를 촉구하심
(oujciv, ... ajll! eja;n mh; metanoh'te pavnte" wJsauvtw" ajpolei'sqe.우키-알르 에안 메 메타노에테 판테스 호사우토스 아폴레이스데;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
본 절은 3절과 같은 내용이 반복되 말씀이다. 즉 실로암 망대로 죽은 열여덟 명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메타노에테(metanoh'te회개하지)는 2인칭 복수 현재 가정법으로 계속적인 회개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인데, 알렉산드리아(A) 사본, 베자(D) 사본, 코리데티(H) 사본에서는 메타노에세테(metanoh'sete회개하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는 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으로서 '단회적인 회개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A.T.Robertson). 이 두 해석상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예수께서 윤리적인 문제를 꼬집어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A.T.Robertson).
호사우토스(wJsauvtw"이와 같이)는 3절의 호모이오스(oJmoivw"이와 같이)와 의미를 달리한다. 즉 호모이오스(oJmoivw")는 '비슷한 방식으로'를 의미하며, 호사우토스(wJsauvtw")는 '같은(동일한) 방식으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J.A.Bengel)

3.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비유(6-9절)

1)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Elegen de; tauvthn th;n parabolhvn: Sukh'n ei&cevn ti" pefuteumevnhn... kai; oujc eu|ren.엘레겐 데 타우텐 텐 파라볼렌 쉬켄 에이켄 티스 페퓌튜메넨-카이 우크 휴렌;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 얻지 못한지라, 6절)
예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치 않는 자는 진노를 알게 될 것을 가르치신다.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할 것을 재촉하시고 있다(J.A.Bengel).
파라볼렌(parabolhvn비유로)은 파라볼레(parabolhv비교, 모형, 상징)는 파라발로(parabavllw옆에 세우다, 비교하다)의 파생어이다. 즉 이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들을 통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분야의 두 가지를 비교하여 설명하는 말이다.
페퓌튜메넨(pefuteumevnhn심은 것이)은 퓌튜오(futeuvw나무를 심다)의 현재 완료 수동형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에이켄(eicevn있더니)과 함께 사용되어 '포도원에 심어진 무화과나무가 있었다'는 의미로 전달되다(A.T.Robertson).제톤(zhtw'n구하였으나)은 제테오(zhtevw시도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려고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주인의 동작을 묘사해준다. 휴렌(eureu얻지~한지라)은 휴리스코(euJriskw찾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열매를 구하고자 찾는 주인의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단회적으로 찾은 주인의 동작을 나타낸다. 당시에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일이 흔치 않았기에, 주인의 무화과나무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W.Hendriksen).

2) 열매 맺지 못한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함
(ei&pen de; pro;" to;n ajmpelourgovn, ...th;n gh'n katargei'_ 에이펜 데 프로스 톤 암펠루르곤-텐 겐 카타르게이;과원지기에게 이르되-어찌 땅만 버리느냐,7절)
트리아 에테(triva e[th삼 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공생애 기간인 3년(J.A.Bengdl)을 나타낸다. (2)아브라함, 모세,마리아 시대를 가리킨다.(Ambrose).(3) 모세(율법), 사사, 선지자를 말한다(Cyril). 그 외에도 다양한 견해가 등장하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문자적으로 뜻을 취한다(F.W.Farrar, A.Plummer, S.M.Gilmour). 여기서 삼 년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때로부터의 기간을 말한다(A.T.Robertson). 엑콥손(e[kkoyon찍어 버리라)은 엑콥토(e[kkovptw베어 넘기다)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결과적인 완료 동작을 나타낸다. 한편 원문에 의하면 '내가'라는 말 앞에는 감탄을 나타내는 불변사 이두( jIdou보라)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뒷 내용을 환기시킨다.

3) 중보의 간구
(oJ de; ajpokriqei;"...ejkkovyei" aujthvn.호 데 아포크리데이스-엑콥세이스 아우텐;대답하여 가로되-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다, 8,9절)
본문에서는 문장을 갑작스럽게 끊어버려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돈절법(aposiopesis)을 사용하고 있다(A.T.Robertson). 또 엑콥세이스(ejkkovyei"찍어 버리소서)는 엑콥토(ejkkovptw베어 버리다)의 미래 능동태형으로 이 말은 앞으로 있게 될 심판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말들은 중동 지방의 아랍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Trench).

 

 

눅 13:1~9 회개를 촉구하심

회개의 재촉을 위해 두 사건을 예로 들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 회개 할 것을 촉구하시며 이에 대한 교훈으로 세 가지의 예를 말씀하시며 경고하신다.

1. 갈릴리 사람들을 통한 교훈(1-3절)

1)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
(Parh'san dev tine" ejn aujtw'/ tw'/ kairw'/ ajpaggevllonte"...tw'n qusiw'n aujtw'n.파레산 데 티네스 엔 아우토 카이로 아팡겔론테스…톤뒤시온 아우톤;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예수께 고하니,1절)
파레산(Parh'san와서)은 파레이미(pavreimi곁에 있다. 가까이 있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의 곁으로 계속적으로 가까이 걸어오고 있음을 뜻한다(A.T.Robertson). 또한 예수께 전할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우토 토 카이로(aujrw'/ tw'/ kairw'//그때마침)는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실 바로 그때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표현은 숙명적인 사건의 암시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A.L.Willims), 카이로(kairw'/때)는 카이로스(kairov"시간)의 여격 명사로서 같은 그 시점의 시간을 나타낸다(F.Rien-ecker). 아팡겔론테스(ajpaggevllonte"고하니)는 아팡겔로(ajpaggevllw보고하다)의 현재 분사로서 그 특정한 시간에 몇 사람이 예수께 와서 근래에 발생한 숙명적인 사건의 전말을 보고한 것을 말한다(J.A.Bengel). 이들은 이 사건을 때의 징후로 짐작했을 수 있다(A.Plummer). 즉 이들은 예수가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로마의 탄압 세력을 몰아내고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려는 반항심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보고하였을 것이다(F.W.Farrar).
에미크센(e[mixen섞은 일로)은 미그뉘미(mivgnumi섞다)의 부정과거형으로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가 빌라도에 의해 살해되어 그들의 피가 희생 제물과 섞인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W.S.Lewis, H.M.Booth). 쉬임없는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인들은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폈다. 이러한 역사적 학살 사건은 초대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2) 유대인들이 가진 그릇된 관념
(kai; ajpokriqei;" ei&pen aujtoi'", Dokei'te o{ti oiJ Galilai'oi ou|toi aJmartwloi; para; pavnta" tou;" Galilaivou" ejgevnonto, o{ti tau'ta pepovnqasin_카이 아포 크리데이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도케이테 호티 호 랄릴라이 오이 오우토이 아마르토로이 파라 판타스 투스 랄릴라이우스 에게논토 호티 타우타 페폰다신;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2절)
아포크리데이스(ajpokriqei;"대답하여)는 아포크리노마이(ajpokrivnomai대답하다)의 부정과거 분사로 동시 동작을 나타내며, 유대인들의 그릇된 일과 관계에 대한 개념을 시정키 위해서 예수께서 대답하신 가르침의 말씀을 의미한다.초케이테(Dokei'te아느냐)는 도케오(doke;w알다, 생각하다, 믿다)의 현재 직설법으로 유대인들이 당시 계속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죄관을 지적하신 것을 나타낸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고치 않는 재난을 죄에 대한 대가로 간주하였던 것이다(W.S.Lewis, H.M.Booth).
페폰다신(pepovnqasin해받음)은 파스코(pavscw고난받다, 시달리다)의 현재 완료로 이들이 고통을 경험하는 것과 죽음을 당하는 것이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엄염한 사실인 것을 밝히고 있다(A.B.Bruce). 파라(parav보다 더)는 소유격 전치사이며, '곁에 비교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는 '갈릴리의 모든 사람들을 곁에 놓고 비교하여 볼 때'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A.T.Robertson).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죄의 형벌관을 고치시고자 교훈의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이다.

3) 회개치 않으면 망할 것을 가르치심
(oujciv, levgw uJmi'n, ajll! eja;n mh; metanoh'te pavnte" oJmoivw" ajpolei'sqe.우키레고 휘민 알르 에안 메 메타노에테 판테스 호모이오스 아폴레이스데;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며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3절)
메타노에테(metanoh'te회개하지)는 메타노에오(metanoevw회개하다)의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계속적으로 마음의 상태를 고치고 바꾸는 회개의 행위를 의미한다. 즉 계속적으로 마음과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직선적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A.T.Robertson). 호모이오스(oJmoivw"이와 같이)는 부사로서, 여기에는 두가지 해석을 가져울 수 있다.(1) '똑같은 방법으로'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A.D 70년 유대인 대학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이다.(F.W.Farrar,F.L.Godet). (2) '또한, 역시'라는 의미로서 회개치 않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구나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W.
Hendriksen). 두 견해를 고찰해 보면 예수께서 본문에서 강조하신 말씀과 연관해 볼 때 두번째 견해를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타당한 일임을 제시하신 것이다.(H.Alford).
아폴레이스데(ajpolei;sqe망하리라)는 아폴뤼미(ajpolumi파괴하다, 멸망하다)의 미래 직설법으로 회개치 않은 자들 역시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말이다. 그런데 이 멸망의 예고에 대해서는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대학살을 가리키신 것이라는 주장(F.L.Godet, F.W.Farrar)과 인류 모두에게 임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는 주장(Lenski, Maeshall)이 있다. 모든 인류가 예수 재림시에 누구나 심판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후자의 견해를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다.

2.실로암 망대의 교훈(4,5절)

1) 열여덟 사람의 희생자
(h] ejkei'noi oiJ dekaoktw; ejf! ou}" e[pesen에 에케이노이 호이 데카오크토 에프 후스 에페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4a절)
에페센(e[pesen무너져)은 피프토(pivptw떨어지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실로암을 지키기 위해서 건축한 망대가 무너진 사건을 나타낸다. 아페크테이넨(ajpevkteinen치어 죽은)은 아포크데이노(ajpoktevinw죽이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2)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tou;" katoikou'nta" !Ierousalhvm_ 투스 카토이쿤타스 예루살렘;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4b절)
오페일레타이(ojfeilevtai죄가)는 오페일레테스(ojfeilevth"채무자)의 복수 주격으로 '빚진 자'라는 의미이다.(A.T.Robertson). 여기서 '빚진 자'에 대해서 곧 '죄인' 이라고 주장하는 견해(Marshall)와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이 성전에 대하여 빚을 지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G.H.A.Ewald, W.Baeclay)가 있다. 즉 이들은 실로암 공사 때에 사고로 죽었고, 빌라도는 공사 비용을 성전에 바쳐진 돈을 도용하여 사용하였다.그러므로 이 돈을 받은 일꾼들은 성전에 바쳐진 돈을 쓴 것이기에, 다시 그 돈을 성전에 돌려주어야 할 빚을 지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3)다시 한번 더 회개를 촉구하심
(oujciv, ... ajll! eja;n mh; metanoh'te pavnte" wJsauvtw" ajpolei'sqe.우키-알르 에안 메 메타노에테 판테스 호사우토스 아폴레이스데;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
본 절은 3절과 같은 내용이 반복되 말씀이다. 즉 실로암 망대로 죽은 열여덟 명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메타노에테(metanoh'te회개하지)는 2인칭 복수 현재 가정법으로 계속적인 회개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인데, 알렉산드리아(A) 사본, 베자(D) 사본, 코리데티(H) 사본에서는 메타노에세테(metanoh'sete회개하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는 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으로서 '단회적인 회개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A.T.Robertson). 이 두 해석상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예수께서 윤리적인 문제를 꼬집어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A.T.Robertson).
호사우토스(wJsauvtw"이와 같이)는 3절의 호모이오스(oJmoivw"이와 같이)와 의미를 달리한다. 즉 호모이오스(oJmoivw")는 '비슷한 방식으로'를 의미하며, 호사우토스(wJsauvtw")는 '같은(동일한) 방식으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J.A.Bengel)

3.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비유(6-9절)

1)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Elegen de; tauvthn th;n parabolhvn: Sukh'n ei&cevn ti" pefuteumevnhn... kai; oujc eu|ren.엘레겐 데 타우텐 텐 파라볼렌 쉬켄 에이켄 티스 페퓌튜메넨-카이 우크 휴렌;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 얻지 못한지라, 6절)
예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치 않는 자는 진노를 알게 될 것을 가르치신다.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할 것을 재촉하시고 있다(J.A.Bengel).
파라볼렌(parabolhvn비유로)은 파라볼레(parabolhv비교, 모형, 상징)는 파라발로(parabavllw옆에 세우다, 비교하다)의 파생어이다. 즉 이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들을 통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분야의 두 가지를 비교하여 설명하는 말이다.
페퓌튜메넨(pefuteumevnhn심은 것이)은 퓌튜오(futeuvw나무를 심다)의 현재 완료 수동형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에이켄(eicevn있더니)과 함께 사용되어 '포도원에 심어진 무화과나무가 있었다'는 의미로 전달되다(A.T.Robertson).제톤(zhtw'n구하였으나)은 제테오(zhtevw시도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려고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주인의 동작을 묘사해준다. 휴렌(eureu얻지~한지라)은 휴리스코(euJriskw찾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열매를 구하고자 찾는 주인의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단회적으로 찾은 주인의 동작을 나타낸다. 당시에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일이 흔치 않았기에, 주인의 무화과나무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W.Hendriksen).

2) 열매 맺지 못한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함
(ei&pen de; pro;" to;n ajmpelourgovn, ...th;n gh'n katargei'_ 에이펜 데 프로스 톤 암펠루르곤-텐 겐 카타르게이;과원지기에게 이르되-어찌 땅만 버리느냐,7절)
트리아 에테(triva e[th삼 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공생애 기간인 3년(J.A.Bengdl)을 나타낸다. (2)아브라함, 모세,마리아 시대를 가리킨다.(Ambrose).(3) 모세(율법), 사사, 선지자를 말한다(Cyril). 그 외에도 다양한 견해가 등장하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문자적으로 뜻을 취한다(F.W.Farrar, A.Plummer, S.M.Gilmour). 여기서 삼 년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때로부터의 기간을 말한다(A.T.Robertson). 엑콥손(e[kkoyon찍어 버리라)은 엑콥토(e[kkovptw베어 넘기다)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결과적인 완료 동작을 나타낸다. 한편 원문에 의하면 '내가'라는 말 앞에는 감탄을 나타내는 불변사 이두( jIdou보라)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뒷 내용을 환기시킨다.

3) 중보의 간구
(oJ de; ajpokriqei;"...ejkkovyei" aujthvn.호 데 아포크리데이스-엑콥세이스 아우텐;대답하여 가로되-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다, 8,9절)
본문에서는 문장을 갑작스럽게 끊어버려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돈절법(aposiopesis)을 사용하고 있다(A.T.Robertson). 또 엑콥세이스(ejkkovyei"찍어 버리소서)는 엑콥토(ejkkovptw베어 버리다)의 미래 능동태형으로 이 말은 앞으로 있게 될 심판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말들은 중동 지방의 아랍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Trench).

 

 

눅 13:10~21 안식일 논쟁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

귀중한 생명을 통해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회개치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날에 한 회당에서 병을 고치신 것으로부터 안식일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정신과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교훈하셨다.

1. 안식일에 병 고치신 예수(10-14절)

1) 귀신들린 여자
(!'Hn de; didavskwn ejn mia'/...mh; dunamevnh ajnakuvyai eij" to; pantelev".엔 데 디다스콘 엔 미아…카이 메 뒤나메네 아나큅사이 에이스 토 판텔레스;안식일에 한 회당에서…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0,11절)
디다스콘(didavskwn가르치실)은 디다스코(eidavskw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예수께서 외당 안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를 나타내고 있다. 본 절에 나타난 회당은 어느 지역에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공생애 말기에 갈릴리 회당에서 가르치신 유일한 경우라는 것(A.Plummer, F.W.Farrar)과 베뢰아 지역일 것이라는 견해(W.Hendriksen, Lenski)가 있다.
11절 서두에 이두(ijdou보라)는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 사용되는 불변사로 한글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성경에서는 이 접두어를 사용하여 십팔 년 동안 병든 여인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며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행하실 이적을 통해 커다란 교훈을 주실 것을 예고하고 있다.
프뉴마(pneu'ma귀신)는 프네오(pnevw숨을 쉬다, 바람이 불다)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여러 다양한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악한 영인 귀신의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에쿠사(e[vxousa들려)는 에코(e[cw소유하다, 가지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 '십팔 년 동안 병을 소유하고 있는'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스데테이아스(ajsqeneiva"앓으며)는 아스데네이아(ajsqevneia약함, 질병)의 변형으로 소유격 명사형이다. 이 말은 곧 악한 귀신의 세력으로 인해 질병이 발생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H.Alford).
슁큅투사(sugkuvptousa꼬부라져)는 슁큅토(sugkuvptw이중으로 완전히 구부러지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 척추가 흰 것을 말하는데(A.T.Robertson), 심한 꼽추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나큅사이(ajnakuvyai펴지)는 아나큅토(ajnakuvptw쭉 뻗다, 일어나다, 똑바로 세우다)의 부정과거 부정사로서 몸을 펴거나 뒤로 젖힐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부정어 메(mh;못하는 )와 함께 쓰여 온몸이 꼬부라진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 능력과 은총을 베푸심
(ijdw;n de; aujth;n oJ !Ihsou'" prosefwvnhsen...kai; ejdovxazen to;n qeovn.이돈데 아우텐 호 예수스 프로세포네센…카이 에독사젠 톤 데온;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2,13절)
아폴렐사이(ajpolevlusai놓였다)는 아폴뤼오(ajpoluvw자유롭게 하다)의 완료 수동태형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풀려 놓임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나타난 질병을 치유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용법이다(A.T.Robertson). 곧 여인의 근육을 묶고 있던 세력에게서 자유롭게 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H.Alford).
아노르도데(ajnwrqwvqh펴고)는 아노르도오(ajnwrqovw다시 바로 펴다)의 부정과거 수동형으로 비정상적인 신체의 탈난 부분을 바로잡는 것을 가리키는 아람 술어이다(Hobart).
에독사젠(ejdovxazen영광을 돌리는지라)은 독사조(doxavzw영광 돌리다, 찬양하다)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병고침을 받은 여인이 계속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3) 회당장이 분내어 비난함
(ajpokriqei;" de; oJ ajrcisunavgwgo", ... th'/ hJmevra/ tou' sabbavtou.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알키쉬나고고스…테 헤메라 투 삽바투;회당장이…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아포크리데이스(ajpokreqei;"내어)는 아포프리노마이(ajpokrivnomai대답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서 자기 스스로 예수께 분노로 응답한 것을 나타낸다.
아가낙톤(ajganaktw'n분내어)은 아가낙테오(ajganaktevw분개하다, 언짢아하다)의 현재분사형으로 율법적 선입과에 사로잡힌 회당장이 예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스스로 분내어 무리를 충동한 것을 말해 준다. 당시 랍비들의 율법적 해석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의사들로 하여금 급박한 병자만을 치료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A.L.Williams).
에데라퓨센(ejqeravpeusen고치시는 것을)은 데라퓨오(qerapeuvw환자를 고치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말씀 한마디로 단번에 병을 고치신 것을 나타낸다.
데이(dei; 을 것이요)는 비인칭 동사로서 율법이나 관습의 강제성을 나타내는 말로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안식일에 율법을 어기고 일을 하신 예수께 대한 논박의 말인 것이다(A.T.Robertson).

2. 안식일의 바른 정신(15-17절)

1) 외식하는 자들을 향한 책망
(ajpekrivqh de; aujtw'/ oJ kuvrio" kai; ei&pen, bavllwUpokritaiv, ... kai; ajpagagw;n potivzei_ 아페크리데 데 아우토 호 퀴리오스 카이 에이펜 휘포크리타이…카이 아파가곤 포티제이;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아페크리데(ajpekrivqh대답하여)는 아포크리노마이(ajpokrivnomai대답하다)의 부정과거형으로 무리를 향하여 말했지만 실상은 예수를 향해 반박한 회당장에게 대답하신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A.T.Robetson).
휘포크리타이( JUpokritaiv외식하는 자들아)는 호격 명사형으로 예수를 논박한 회당장과 이에 동조한 무리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다. 탈무드(Talmud)를 보면, 안식일에 동물을 통해 짐을 운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동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용납되었다. 그러면 동물보다 더 귀중한 인간의 생명을 위해 어떤 날이라도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이다(W.Hendriksen).
헤카스토스(e{kasto"각각)는 주격 명사형으로 예수를 비난한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이들 외식주의자들은 소유한 짐승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안식일에도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돌보았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의 짐승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규례를 범했던 것이다(W.S.Lew-is, H.M.Booth).

2) 더 귀중한 아브라함의 딸
(tauvthn de; qugatevra...th'/ hJmevra/ tou' sabbavtou_타우텐 데 뒤가테라…테 헤메라 투 삽바투;그러면…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합당치 아니하냐, 16절)
뒤가테라(qugatevra딸을)는 뒤가테르(qugavthr딸)에서 변형된 목적격 명사이다. 본문에서 귀신들린 여자가 아브라함의 딸로 소개된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짐승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임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에데센(e[dhsen매인 바)은 데오(devw매다, 묶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여인의 질병이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는 명백한 선포의 말씀이다(A.T.Robertson).
에데이(e[dei합당치 하냐)는 데이(dei;반드시 해야 한다)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여인의 병을 고쳐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 표현한 말이다. 즉 짐승에게 매일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이나 절박한 병자의 병을 고치는 것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J.A.Bengel).

3) 상반된 두 무리들
(kai; tau'ta levgonto" aujtou' kath/scuvnonto...toi'" ginomevnoi" uJp! aujtou'.카이 타우타 레곤토스 아우투 카테스퀴논토…토이스 기노메노이스 휘프 아우투;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부끄러워 하고…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7절)
카테스퀴논토(kath/scuvnonto부끄러워하고)는 카타이스퀴노마이(kataiscuvnomai부끄러워하다)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이다. 예수의 말을 들은 외식주의 자들은 궁지에 몰려 당황해하며 부끄러워 한다(A.B.Bruce).
에카이렌(e[cairen기뻐하니라)은 카이로(caivrw기뻐하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의 말에 동의하는 무리들이 진지한 기쁨을 계속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J.A.Bengel). 이 말을 통하여 두 부류로 나뉘어진 사람들의 날카로운 감정 대립을 알 수 있다(A.T.Robe-rtson). 기노메노이스(ginomevnoi"하시는)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예수께서 말씀과 이적으로 계속하여 이루시는 일을 뜻한다.

3. 확장하고 성장될 하나님 나라(18-21절)

1) 하나님 나라의 비유
(#Elegen ou&n, Tivni oJmoiva ejsti;n hJ basileiva tou' qeou' kai; tivni oJmoiwvsw aujthvn_ 엘레겐 운 티니 호모이아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투데우 카이 티니 호모이오소 아우텐;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8절)
운(oun그러므로)은 시간적으로 계속을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앞 절과 연관성을 가진다(H.Alford). 호모이오소(oJmoiwvsw비할꼬)는 호모이오옹(oJmoiovw같게 하다)의 미래 능동태형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을 나타내고 있다.

2) 겨자씨 한 알같은 하나님 나라
(oJmoiva ejsti;n kovkkw/ sinavpew",...kai; ta; peteina; tou' oujranou' kateskhvnwsen ejn toi'" klavdoi" aujtou'. 호모이아 에스틴 콕코 시나페오스…카이 타 페테이나 투 우라누 카테스케노센 엔토이스 클라도이스 아우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심은…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19절)
라본(labw;n갖다)은 람바노(lambavnw취하다, 받다)의 부정과거 분사로서 준비되고 계획되어진 결과를 보여 준다. 에발렌(e[balen심은)은 발로(bavllw던지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심어 놓은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 준다.
카테스케노센(kateskhvnwsen깃들였느니라)은 카타스케노오(kataskhnow거주하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천막을 치다, 둥지를 틀다'의 뜻이다(A.T.Robertson). 이것은 새가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W.S.Lewis, H.M.Booth).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히 통용되는 '겨자씨만큼 작다'라는 속담을 사용하시어 천국을 작은 씨에 비유하신 것이다(A.L.Williams). 즉 처음에는 극히 작고 미미한 것이지만 이것이 자라 새들이 앉을 만큼 큰 나무가 되듯이 천국 복음도 이와 같이 온 세계에 널리 확장되고 전파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사본에는 이런 면을 강조하기 위해 메가(me;ga큰)를 첨가시키기도 했다.

3) 누룩과 같은 하나님 나라
(Kai; pavlin ei&pen, Tivni oJmoiwvsw...e{w" ou| ejzumwvqh o{lon.카이 팔린 에이펜 티니 호모이오소…헤오스 후 에쥐모데 호론;또 가라사대…무엇으로 비할꼬…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20,21절)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한 겨자씨 비유에 이어 이번에는 내적 확장에 대해서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라부사(labou'sa갖다)는 람바노(lambavnw취하다, 받다)의 부정과거형으로 가루를 취하여서 가져간 것을 의미한다.
에크립센(e[kruyen넣어)은 크립토(kruvptw숨기다)의 부정과거형으로 단회적인 동작을 말한다. 알류루 사타 트리아(ajleuvrou savtatriva가루 서 말)에 대해서 노아의 세 자손을 가리킨다는 견해와(J.A.Bengel) 인간의 영 혼 몸의 세 요소를 가리킨다(Olshausen)는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에쥐모데(ejzumwvqh부풀게 한)는 쥐모오(zumovw부풀게 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형으로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변화된 것을 나타낸다(W.S.Lewis, H.M.Booth). 이러한 현상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 내 외적의 상황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W.Hendriksen).

 

 

눅 13:22~30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

구원에 이르는 바른 삶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함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 늦게 온 자, 쫓겨난 자 등의 내용으로 이를 설명하신 것이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22-24절)

1)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
(Kai; dieporeuveto kata; povlei" kai; kwvma" didavskwn...eij" @Ierosovluma.카이 디에포류에토 카타 폴레이스 카이 코마스 디다스콘…에이스 헤로솔뤼마;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2절)
디에포류에토(dieporeuveto다니사)는 디에포류오마이(dieporeuvomai돌아다니다)의 미완료과거형으로 예수께서 계속족인 여행의 길을 행하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폴레이스(povlei"각 성)와 코마스(kwvma"각 촌)는 예수께서 행하신 전도 사역이 어떤 특정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디다스콘(didavskwn가르치시며)은 디다스코(didavskw가르치다)의 현재 분사형으로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사역을 쉬지 않으셨음을 알려 준다. 포이우메노스(poiouvmeno"하시더니)는 포이에오 (poievw수고하다, 일하다, 활동하다)의 현재 분사로서,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정하시고 길을 떠나신다는 의미이다(A.T.Robertson). 그런데 이 여행이 눅9:51에서 언급된 여행인지 아니면 다른 여행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게 받아들여진다(F.L.Godet).

2) 구원얻는 자에 대한 질문
(ei&pen dev ti" aujtw'/, Kuvrie, eij ojlivgoi oiJ sw/zovmenoi_ oJ de; ei&pen pro;" aujtouv", 에이펜 데 티스 아우토 퀴리에 에이 올리고이 호이 소조메노이 호 데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3절)
에이(ei; 이까)는 의문 접두어이고 올리고이(ojlivgoi적으니)는 형용사이다. 이 말은 멸망받을 자보다 구원얻을 자가 훨씬 더 적을 것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인 생각(제2 에스드라서8:1-9:15)과 당시의 통념대로 유대인만이 구원 받는다는 생각(J.A.Bengel, A.Plummer)의 두 측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소조메노이(sw/zovmenoi구원을 얻는)는 소조(swv/zw구원하다, 생명을 건지다)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구원을 얻는 자들'이라는 견해(H.Alford)와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라는 견해(A.T.Robertson) 등이 제기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질문을 한 사람은 결국에 가서 '구원을 얻을 자들의 총계'를 생각하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W.Hendriksen). 본문이 말하는 분명한 사실은 구원에 의해 하나님이 열납받으시고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W.S.Lewis, H.M.Booth).

3) 힘써서 들어갈 좁은 문
(!Agwnivzesqe... eijselqei'n kai; oujk ijscuvsousin. 아고니제스데 에이셀데인 카이 우크 이스퀴수신;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4절)
아고니제스데(jAgwnivzesqe힘쓰라)는 아고니조마이(ajgwnivzomai적과 다투다, 고나이나 위험에 대해 투쟁하다)의 명령형으로 이 말은 고대의 경기장이나 투기장에서 격렬하게 힘써서 시합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죽을힘을 다해 투쟁하고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W.Hendriksen).
그러므로 이 말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서 싸우는 모습을 나타냄으로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단어가 현재형으로 나타난 것은 신앙 생활의 현재적 의미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 기도 생활, 경건 생활, 믿음 생활에 적극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J.A.Bengel).
제테수신(zhthsousin구하여도)은 제테오(zhtevw시도하다)의 미래 능동태형으로 앞으로 계속 구하려고 시도하다의 뜻이다. 에이셀데인(eijselqei'n들어가기를)은 에이셀코마이(eijsevrcomai들어오다)의 부정과거 부정사이다. 그리하여 '들어가기를 구하여도'란 말은 회개와 믿음, 구하는 것과 힘쓰는 것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W.S.Lewis, H.M.Booth). 이 말씀을 다음 절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구원의 문을 통과하기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닫혀진 구원의 문(25-27절)

1) 내려진 심판의 선고
(ajf! ou| a]n ejgerqh'/ oJ oijkodespovth" kai; ajpokleivsh/...Oujk oi&da uJma'" povqen ejstev.아프 후 안 에게르데 호 오이코데스포테스 카이 아포클레이세…우크 오이다 휘마스 포덴 에스테;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5절)
에게르데(ejgerqh'/일어나)는 에게이로(ejgeivrw일으키다. 죽은 자를 소생시키다)의 부정과거 수동형으로 '일어났다, 깼다'의 뜻이다. 아포클레이세(ajpvokleivsh닫은)는 아포클레이오(ajpokleivw닫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결과적인 행동을 나타내는데, 세차게 문을 닫았다는 의미이다(A.T.Robertson). 아르크세스데(a[rxhsqe/ 하며)는 알코마이(a[rcomai시작하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본문에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던 행동을 나타내 준다.
크루에인(krouvein두드리며)은 크루오(krouvw두드리다)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서 계속적으로 두드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노익소니(a[noixoni;열어 주소서)는 아노이그뉘미(ajnoignumi열다)의 부정과거 명령법으로 빨리 열어 달라는 행동을 요구하는 의미이다. 결국 본문은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지 않은 자는 심판주 그리스도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2) 참된 구원의 조건
(tovte a[rxesqe levgein, !Efavgomen ejnwvpiovn...ejdivdaxa":토테 알크세스데 레게인 에파고멘 에노피온…에디닥사스;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먹고…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6절)
알크세스데(a[rxesqe 하되)는 알코마이(a[rcomai시작하다)의 미래 중간태형이고, 레게인(levgein말하다)은 레고(levgw이야기 하다, 말하다)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말하되'는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를 알아보지 못합니까?'라는 뜻을 담고 있다(J.A.Bengel). 에노피온(ejmwvpiovn앞에서)은 ' 면전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면전에서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받을 조건은 결코 아니다. 구원은 외적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신앙과 믿음에 있는 것이다. 에피오멘(ejpiomen마셨으며)은 피노(pivnw마시다)의 부정과거형으로 마셨던 단순한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에디닥사스(ejdivdaxa"가르치셨나이다)는 디다스코(didavskw가르치다)의 부정과거형으로 단순히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 예수께서는 모였던 수많은 무리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기도 하셨고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단순히 음식을 먹고 말씀을 들었다고 다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참된 믿음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J.A.Bengel).

3) 비극적인 결론
(kai; ejrei' levgwn uJmi'n, Oujk oi&da 퍂Jma'"■povqen ejstev: ajpovsthte...ejrgavtai ajdikiva".카이 에레이 레곤 휘민 우크 오이다[휘마스]포덴 에스테 아포스테데…에가타이 아디키아스;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떠나가라 하리라, 27절)
에레이(ejrei'일러)는 에이폰(ei;pon말하다, 이야기하다)의 미래 능동태형이고, 레곤(legwn가로되)은 레고(legwv말하다)의 현재 능동태 가정법이다. 이같이 같은 말을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하시는 말씀에 대한 강조의 뜻이 담겨 있다(J.A.Bengel). 오이다(oida알지)는 현재형인 에이도(ei[dw) 대신에 쓰여진 말이다. 때문에 오이다(oida)는 현재 완료 시상을 나타내 주며, '사귀어 안다. 경험하여 알게 된다'의 뜻이다. 본문에서는 부정어 우쿠(oujk못하노라)와 함께 사용되어 냉혹한 심판의 판결을 강조하고 있다(J.A.Bengel).
아포스테데(ajpovsthte떠나가라)는 아피스타마이(ajfovstamai떠나가다)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엄중한 심판의 명령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디키아스(ajdikiva"행악하는)는 아디키아(ajdikiva악행, 불의)의 소유격으로 이 단어는 엘가타이(ejrgavtai자들아)와 함께 쓰여 불의한 일에 종사하면서 불의의 삯을 받는 사람들을 의미한다(H.Alford, W.S.Lewis, H.M.Booth). 본문의 이 말을 마태복음에서는 호이 에르가조메노이 텐 아노미안(oiJ ejrgazovmenoi th;n ajnomivan불법을 행하는 자들아)으로 표현하였다(마7:23). 불신앙의 결과는 결국 주님으로부터 완전한 분리의 선고를 받는다는 경고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28-30절)

1) 밖으로 쫓겨난 자들
(ejkei' e[stai oJ klauqmo;" kai; oJ brugmo;"...uJma'" de; ejkballomevnou" e[xw.에케이 에스타이 호 클라우드모스 카이 호 브뤼그모스…휘마스데 에크발로메누수 엑소;너희가…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8절)
에케이(ejkei'거기서)는 형용사로서 악행을 행한 자들이 '쫓겨난 그 곳'을 가리킨다(J.A.Bengerl, A.T.Robertson). 클라우드모스(klauqmo;"슬피 울며)는 주격 명사로서 어떠한 위로도 통하지 않을 절망적인 상황하에서 비참하게 우는 것을 나타낸다. 브뤼그모스(brugmo"이를 갊이)는 주격 명사로 극한 분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말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쫓겨난 자들이 보이는 최악의 적개심인 것이다. 에크발로메노스(ejkballomevno"쫓겨난 것을)는 에크발로(ejkballw던져 버리다. 쫓아내다)의 현재 분사 수동형으로 '문이 잠긴채 밖에 계속 쫓겨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A.T.Robertson).

2)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
(kai; h{xousin ajpo; ajnatolw'n kai; dusmw'n kai; ajpo; borra' kai; novtou kai; ajnakliqhvsontai카이 헥수신 아포 아나톨론 카이 뒤스몬 카이 아포 볼라 카이 노투 카이 아나클리데손타이;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참석하리니, 29절)
헥수신(h{xousin사람들이 와서)은 헤코(h{kw오다)의 미래 능동태형으로 선택받은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려 올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아나클리데손타이(ajnakliqhvsontai참석하리니)는 아나클리노(ajnaklivnw거주하다, 식탁에 기대다)의 미래 수동태형으로 잔치에서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자세를 서술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교훈에서 알려진 말로서 천국의 생활상을 비유하여 하신 말씀이다(A.L.Williams). 예수께서 동서남북으로부터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천국 잔치에 초대될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3) 순서 없이 들어갈 천국문
(kai; ijdou; eijsi;n e[scatoi oi} e[sontai prw'toi kai; eijsi;n prw'toi oi} e[sontai e[scatoi.카이 이두 에이신 에스카토이 호이 에손타이 프로토이 카이 에이신 프로토이 호이 에손타이 에스카토이;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30절)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자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시면서 구원에는 순서가 저해져 있지 않았음을 말씀하신다.
에스카토이(e[scatoi나중)는 에스카토스(e[scato"마지막 때, 제일 나중의)의 변화형으로 가장 마지막이란 뜻을 나타낸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제시되는데, 세상에서의 명성의 위치(W.Hendriksen), 낮은 자들과 교만한 자들의 위치(Marshall), 선택된 유대인과 이방인들과의 위치(Tyndale) 등의 견해이다. 본문은 교만과 불신의 유대인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겸손하게 회개하고 믿음을 받는다면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눅 13:31~35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애통해 하심

진리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애통해 하심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러 오신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멸망의 심판이 내려질 것을 예지하신 예수께서 탄식하시는 모습을 본문은 전해 준다.

1.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헤롯의 위협(31-33절)

1) 헤롯이 품고 있는 음모를 들음
(!En aujth'/ th'/ w{ra/ prosh'lqavn tine"...#Exelqe kai; poreuvou ejnteu'qen, ... qevlei se ajpoktei'nai.엔 아우테 테 호라 프로셀단 티네스…엑셀데 카이 포류우 엔튜덴…델레이 세 아포크테이나이;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죽이고자 하나이다, 31절)
엔 아우테 테 호라( jEn aujth'/ th'/ w{ra//곧 그때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말로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계실 때를 나타내고 있다. 프로셀단(prosh'lqavn나아와서)은 프로셀코마이(prosevrcomai오다)의 부정과 거형으로 예수께 알려 줄 말을 가지고 나아온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께나와 알린 행위는 악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A.Plummer, C.J.Ellicott, H.Alford)과 선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S.M.Gilmour)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예수의 냉정한 태도를 생각해 볼 때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하겠다(W.Hendriksen). 엑셀데( [Exelqe나가서)는 엑셀코마이(exevrcomai나가다)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예수께로 온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가기를 청한 것을 말해 준다. 포류우(poreuvou떠나소서)는 포류오마이(poreuvomai나아가다, 떠나다)의 현재 명령형으로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청을 알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헤롯의 청탁을 받아 예수를 그 땅에서 떠나도록 훈계를 꾸민 것이다(J.A.Bengel).

2) 교활한 헤롯을 책망
(Poreuqevnte" ei[pate th'/ ajlwvpeki... ajpotelw' shvmeron kai; au[rion kai; th'/ trivth/ teleiou'mai.포류덴테스 에이파테 테 알로페키…아포텔로 세메론 카이 아우리온 카이 테 트리테 텔레이우마이;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32절)
알로페키(ajlwvpeki여우에게)는 헤롯의 교활한 면과 간교함을 지적하여 하신 말씀이다(A.T.Robertson, W.Hendriksen). 예수께서는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헤롯의 계략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속 사역이 결국에는 완성될 것을 명백히 밝히셨다. 트리테(trivth/제삼 일에는)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들이 있다. ① 문자적인 삼 일을 가리킨다(Myter, B-leek, H.Alford, A.T.Robertson). ②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사역을 완성하시고 죽으실 때까지의 기간이다(J.A.Bengel, F.W.Farrar). ③ 예수의 3년 공생애 기간이다. 이들 견해 중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때, ②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받아들여진다. 즉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텔레이우마이(teleiou'mai완전하여지리라)는 텔레이오오(teleiovw성취하다, 완성하다, 작정된 목표에 도달하다)의 현재 수동태형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국 그 구속 사역이 완성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발견된다. ① 갈릴리에서 구속 사역을 마치신다(A.B.Bruce). ②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n, F.W.Farrar, S.M.Gil-mour). ③ 지상 사역의 일을 끝내고 윤리적으로 자신을 완성시킨다(F.L.Godet, B.F.Eestcott). ④ 병을 고치고 귀신을 축출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이 중에서 다음 33절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②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받아들여진다.

3) 변동할 수 없는 지상 사역
(plh;n dei' me shvmeron kai; au[rion kai; th'/ ejcomevnh/ poreuvesqai, o{ti oujk ejndevcetai profhvthn ajpolevsqai e[xw !Ierousalhvm.플렌 데이 메 세메론 카이 아우리온 카이 테 에코메네 포류에스다이 호티 우크 엔데케타이 프로페텐 아폴레스다이 엑소 예루살렘;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3절)
플렌(plh;n그러나)은 앞 32절과 대조되는 말로, 구속 사역을 완성할 때까지는 누구도 위협할 수 없고 변동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에코메네(ejcomevnh/모레)는 32절의 '제3일'이라는 표현과 같은 말이다(H.Alford). 데이(dei'하리니)는 현재 능동태형으로, ' 해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뜻으로 예수의 구속 사역은 꼭 완성되어야만 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포류에스다이(poreuvesqai갈 것을 가야)는 포류오마이(poreuvomai나아가다, 떠나다)의 현재 부정사형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예수께서 세상에 구세주 메시야로 오셔서 하셔야 할 모든 사역의 뜻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엔데케타이(ejndevcetai 하느니라)는 현재 직설법으로 부정어 우크(oujk없다)와 함께 사용되어 '용납되지 않는다,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A.T.Robertson). 이것은 심한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통한 풍자인 것이다(F.W.Farrar). 즉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대적자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을 표현하신 것이다(A.Plummer). 아폴레스다이(ajpolevsqai죽는 법이)는 아폴뤼미(ajpovllumi망하다, 파괴하다)의 부정과거 부정사로서, 공개적인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J.A.Bengel).

2. 예루살렘에 대한 통곡(34절)

1)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
(!Ierousalh;m !Ierousalhvm,예루살렘 예루살렘;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34a절)
예루살렘 예루살렘( jIerousalh;m jIerousalh;m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이라고 부르신 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의 말씀을 하신것인데, 여기에서는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J.A.Bengel). 또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대표적인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W.He-ndriksen).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바리새인들과 세관들은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기득권을 장악하기 위해 예수를 흠잡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한 도시가 하나님의 공의를 팽개쳐 버리고 악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선지자들을 죽이는 악독한 성
(hJ ajpokteivnousa tou;" profhvta" kai; liqobolou'sa tou;" ajpestalmevnou" pro;" aujthvn,헤 아포크테이누사 투스 프로페타스 카이 리도볼루사 투스 아페스탈메누스 프로스 아우텐;선지자를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34b절)
아포크테이누사(ajpokteivnousa죽이고)는 아포크테이노(ajpokteivnw죽이다)의 현재 분사이고, 리도볼루사(liqobolu'sa돌로 치는)는 리도볼레오(liqobolevw돌로 치다)의 현재분사이다. 이 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진리에 대적한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선지자들에게 인간들이 저주의 형벌을 내린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인 것이다. 아페스탈메누스(ajpestalmevnou"파송된)는 아포스텔로(ajpistevllw보내다, 지정된 장소로 갈 것을 명하다)의 현재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3)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
(posavki" hjqevlhsa ejpisunavxai ta; tevkna...kai; oujk hjqelhvsate.포사키스 에델레사 에페쉬낙사이 타 테크나…카이 우크 에델레사테;임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4c절)
포사키스(posavki"몇 번이냐)는 의문사로서 '얼마나 자주 그러하기를 원하였느냐'란 의미이다)A.T.Robertson). 이 말에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랑의 뜻을 담고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가는 횟수를 말하고 있다(J.A.Bengel, F.W.Farrar, W.Barcl-ay).에피쉬낙사이(ejpisunaxai모으려)는 에피쉬나고(ejpisunavgw 모으다)의 부정과거 부정사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은 구약성경에서는 독수리의 비유를(신32:11,12), 신약성경에서는 암탉의 비유를 나타내 준다(W.S.Lewis, H.M.Booth). 에델레사테(hjqelhvsate너희가 원하다)는 델로(qevlw원하다,결심하다)의 부정과거형인데, 부정어 우크(ouvk아니하다)와 함께 '결코 원하지 않다'의 의미이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은혜를 거부한 유태인들의 자유의지를 지적하신 것이다(A.L.Williams). 결국 '암탉이 제 새끼를 모음같이 했다'는 것과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라는 말은 서로 극심한 대조를 나타내어 하나님의 자비롭고 강한 사랑과 이것을 거부하고 반대한 유대인들의 우둔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의 역사는 긍극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완성되었다.

3. 유대인들을 향한 멸망의 선언(35절)

1) 멸망당할 예루살렘
(ijdou; ajfivetai uJmi'n oJ oiko" uJmw'n.이두 아피에타이 휘민 호 오이코스 휘몬;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35a절)
본 절에서는 예수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유대 백성들이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두(idou;보라)는 문장 접두어인 불변사로서 예수께서 다시 한번 더 주의를 집중시키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다음에 하는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말의 뜻을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하시기 위해 서두에 꺼내신 말인 것이다. 아피에타이(ajfivetai버린바 되리라)는 아피에미(ajfivhmi재산을 남겨두고 떠나다, 포기하다)의 현재 수동태형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집이 버려짐을 나타낸다. 에레모스(e[rhmo"황폐하여)는 주격 형용사인데, 여러 많은 사본에서는 이 말을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의미의 완전한 뜻을 전달받기 위해서 이 말은 필요하다(W.S.Lewis, H.M.Booth). 오이코스(oiko"집)에 대해서는 ①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J.A.Bengel, C.J.Ellicott). ② 예루살렘의 도시들을 가리킨다(F.L.Godet). ③ 이스라엘 국가를 가리킨다 등의 견해들이 있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같은 의미로 전달된다. 즉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도시들이 파괴되어 황폐해지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국가가 멸망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예수의 예언은 A.D.70년 로마의 이방인에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게 되고 도시들은 짓 밟히게 된다(H.Alford).

2) 백성들의 찬송
(levgw 팪e;■uJmi'n, ouj mh; i[dhtev me e{w" 팯{xei o{te ■ei[phte, Eujloghmevmo" oJ ejrcovmeno" ejn ojnovmati kurivou레고 [데] 휘민 우메 이데테 메 헤오스 [헥세이 호테] 에이페테 율로게메노스 호 엘코메노스 엔 오노마티 퀴리우;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보지 못하리라, 35b절)
레고(levgw이르노니)는 현재 능동태형으로 계속 반복해서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이데테(i[dhtev보지 하리라)는 호라오(ovraw보다, 알다, 인식하다)의 부정과거 능동태형으로 부정어 메(mh;못)와 함께 '보지 못하게 된다'는 완료의 의미를 나타내 준다.

3)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Eujloghmevno" oJ ejrcovmeno" ejn ojnovmati kurivou. 율로게메노스 호 엘코메노스 엔 오노마티 퀴리우;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35c절)
율로게메노스(Eujloghmevno"찬송하리로다)는 율로게오(Eujlogevw찬양하다)의 현재 완료형으로 계속적으로 찬양함을 보여 준다. 엘코메노스(ejrcovmeno"오시는)는 엘코마이(ejrcovmai오다)의 현재 분사인데, 이에 대해서 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D.Erasmus), ② 유대인들의 뉘우침(A.Plummer), ③ 예수의 재림(C.J.Ellicott, F.W.Farrar)을 뜻한다는 설 등이 있는데, 역사의 종말인 주님의 재림의 날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받아들여진다.

 

성 경: [눅13: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ꃨ 빌라도가...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행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23:12).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성 경: [눅13: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 4:7;8:20;22:4-5;요 9:1,2).

성 경: [눅13: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회개치 아니하면...망하리라 - '아니라'(*, 우키)고 하는 단정적인 부정의 표연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 여기서 '회개'(*, 메타노에오)는 지난 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마7:1-5;롬 3:10-12).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arshall,Lenski).

성 경: [눅13: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실로암에서...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 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 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성 경: [눅13: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너희도 만일...망하리라 - 3절 말씀을 반복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세한 주해는 3절 주석을 보라.

성 경: [눅13:6]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 촉구]
ꃨ 포도원에...얻지 못한지라 - 앞부분에서는 다분히 회개하지 않을 때 내려지는 심판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비유에는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동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포도나(시 80:8-11; 사 5:2) 무화과 나무(렘 24:3;호 9:10)로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하며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참된 회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포도원에는 여러가지 과실수들이 함께 심어졌다(왕하 18:31;미 4:4).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성 경: [눅13:7]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과원지기에게 ...버리느냐 - 여기서 과원지기는 예수라고 보아야 하며 이 과원지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화과 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이에 주인은 그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果實樹)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으며,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 쓸모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서 '찍어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Marshall),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마 3:10;7:19;21:18-20).

성 경: [눅13:8]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금년에도...두루 파고 거름을 -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자적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창 18:22-32) 예수가 지니고 있는 신적인 인내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 '두루 파고'에서 '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캐토'(*)는 뿌리 주변에 있는 흙을 긁어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다. 뿌리 주변의 흙을 부드럽게 해주고 거름을 주는 이 특별한 배려(配慮)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기간이 3년이나 지나도록 전혀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음으로써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보여준다(23:34).

성 경: [눅13:9]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만일 실과가...찍어 버리소서 -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 강조하기 위하여 문장을 완결짓지 않고 중간에 끝맺는 돈절법(頓絶法)적인 표현이다. 과원지기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상태에 달린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 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회개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결정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도록 유보(留保)해둔 심판까지의 기한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 경: [눅13:10]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 안식일이라는 시점을 명시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 전개 되는사건이 안식일과 관계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안식일'(Sabbath, NIV)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마지막 날에 안식하신 것과(창2:1-3), 십계명(출 20:8)의 명령에 근거한 것으로 매우 엄격히 지켜지는 율법 조항이었다. 본문에서 언급된 '한 회당'(one of the synagogues,NIV)이 구체적으로 위치한 지역에 대해서는 '베뢰아'일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하다(Hendriksen,Lenski).

성 경: [눅13:1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보라'는 의미의 명령형 어구가(*, 이두) 본절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어 독자들의 관심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집중되는 관심의 대상은 십 팔 년 동안 병 중에 고통을 당해 온 한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허리가 '굽어져'(*, 쇼큐토) 혼자 일어서거나 머리를 들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병은 현대 의학적 용어로 말하면 척추교착염과 유사하다(Marshall). 누가는 이 여인의 병이 귀신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십 팔 년이라는 세월의 병고는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는 최악의 상태를 말해준다.

성 경: [눅13:1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여자여...병에서 놓였다 - 이 여인이 이미 회당 안에 들어와 있었는지 아니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들어왔는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 다른 경우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요청이 있기 전에 자의적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있다. 예수께서 그녀의 병을 즉각 고쳐주신 것은, 그녀의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녀의 비참함에 대한 연민 때문일 수도 있는데, 본문상 그녀의 믿음이나 신앙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병을 고쳐주는 것으로 보아 전적인 예수의 자유 의사에 의한 은총이라 할수 있다.

성 경: [눅13:1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안수(按手)하시매 - 아마 이 행동은 앞절의 "여자여 네가 네병에서 놓였다"는 선언과 동시적으로 취해졌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안수'에 대해서는 그 원인이 구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창 48:13,14,17-19) 매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일반적으로 안수가 갖는 의미는, 수여자가 가진 그 무엇을 피수여자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다. 한편 안수는 여러 가지 효과를 위하여 사용되는데 그 구체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제사법에 나타나는 것으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에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이 범한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는 상징적 행위로 행해졌다(레 1:4;4:4;8:14 민 8:10,12). (2) 신성 모독자를 돌로 칠 때 나타난다. 이것은 신성 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부정과 더러워진 인격, 나아가 장차 당할 심판등 신성 모독자에게 돌리는 의미가 있다(레 24:14). (3) 병을 고치는 행위로 안수를 한다. 이것은 예수나 사도들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에게 전이시킴으로써 병을 낫게하는 것이다(눅 4:40;행 28:8). (4) 성령을 받게 하는 데 행해진다.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지 않은 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증거해보였다(행 8:18-19;16:6). (5) 직분을 위임할 때 안수한다. 이것은 안수하는 자가 자신의 권위, 직분, 능력을 피안수자에게 전그시켜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역을 담당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행 6:6;13:3).
ꃨ 곧 펴고 - '펴고'(*, 아노르도데)는 '회복하다' '재건하다'의 뜻으로(행 15:16;히 12:12) 여인이 완전히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뜻한다.
ꃨ 영광을 돌리는지라 - (*, 에돝)는 문법상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여인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일회적으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병을 고쳐주신 분은 예수인데 찬양은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다. 이는 예수의 병 고침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눅13:1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회당장이...분내어 - 드디어 안식일에 병 고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회당장(synagogue ruler,NIV)이 분을 낸 표면적인 이유는 예수께서 병을 고침으로써 안식일에 노동을 금한 율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븐노이면에는 회당의 최고 수반(首班)으로서 회당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를 주도적으로 관장하는 그의 권위가 완전히 소외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열등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자그마치 십 팔 년 동안이나 고통스러운 병을 앓던 여인이 치유된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율법을 범했다고 비판하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폐기자의 모습인 것이다. 한편 회당장이 말하는 대상이 '여인'이 아니라 '무리'로 되어있는 것은 여기서 병 고침을 받은 여인 말고도 병 고침 받기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는 추축을 가능하게 한다.

성 경: [눅13:1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너희가 ...먹이지 아니하느냐 - 이 말씀의 베경에는 짐을 싣지 않는 한 안식일에도 짐승들을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있다는 미쉬나의 규정이 있고 안식일의 여행 제한을 어기기 않는 범위 내에서 가축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특별조치가 있었다. 또한 쿰란 종파에서는 안식일에 가축에게 풀을 뜯어 먹임에 있어서 이 천 규빗 그러니까 약 910m이상을 끌고가지 못하게 하는 제한 규정이 지켜졌었다(Marshall). 이와 같이 당시 관례상 동물들에 대해서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게 지켜졌지만, 오히려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의 융통성(融通性)도 허락되지 않았다.

성 경: [눅13:16]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아브라함의 딸...합당치 아니하냐 - 15절과 16절에서는, 짐승과 아브라함의 딸, 물먹이는 것과 병 고치는 것, 수 시간의 매임과 18년 동안의 매임, 마구에서 푸는 것과 사단에게서 푸는 것이 치밀하게 대비되면서 적대자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드는 예리한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짐승도 목이 마르면 물을 먹이는 법이거늘 하물며 18년 동안이나 고통 속에 살아온 여인을 치유하는 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지연될 수 없었다. 특히 "합당치 아니하냐"(*, 에데이)는 '반드시 해야한다'는 뜻을 가진 '데이'(*)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여인의 병을 고친 것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일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꼭 해야 할 당위성을 가진 일이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13:17]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ꃨ 부끄러워하고 ...기뻐하니라 - 이 부끄러움에 대한 표현은 사 45:16의 "...성을 내며 너에게 달려드는 자들은 모두 어이없이 창피를 당하리라"(공동번역)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누가는 메시야적 대망이 예수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하려 했었다고 볼 수 있다(Marshall), 한편 반대자들dmf 제외한 모든 무리들은 예수의 통쾌한 승리를 함께 기뻐하고 있다. 아마 이들도 회당장 이하 맹목적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지금 그들의 위선이 폭로되고 예수의 탁월한 가르침이 베풀어 졌을 때 매우 흡족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본문은 진리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들과 기뻐하는 자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성 경: [눅13:18]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ꃨ 그러므로 - '그러므로'(*, 운)는 시간의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말씀이 앞부분과 연속성을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치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관련되어져 이해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1) 예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과 같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ꃨ 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이 이중(二重)의 도입구는 사 40:18과 유형상 비슷하며 막 4:30 에 더 온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NIV)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여러번 언급이 있었고, 여러 교훈 및 치유 사건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기는 했지만(6:20;7:28;8:10;9:2,27,60;10:9,11;11:20), 여기서는 비유를 통해 그 성격이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성 경: [눅13:19]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ꃨ 겨자씨 한 알 - 유대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 속담이 있는데(Robertson) 이는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씨앗은 그렇게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 어떤 사본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커다란'(*, 메가)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도 있다. 본문에서도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나 그 마지막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눅13:20]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ꃨ 또 가라사대...무엇으로 비할꼬 - 이 비유는 내용상 마 13:33과 일치하지만 본문의 의문문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측면이 가르쳐지고 있다.

성 경: [눅13:2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ꃨ 가루 서 말 속에...누룩 - '가루 서말'에 대해서는 노아의 세 자손(Bengel), 사람의 몸, 혼, 영혼의 세 요소(Lange)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으나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숨겨겨 있다고 보기 보다는 그냥 일반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가루 서 말'은 대개 한 번 반죽할 때 사용하는 평균적인 양이라고 본다(창 18:6). '누룩'(*, 쥐메)은 빵을 굽기 위한 전 단계로 반죽을 부풀게하는 효소이다. 누룩은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파급 효과 때문에 흔히 악한 것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다(12:1;마 16:6;막8:15;고전 5:6;갈 5:9).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영향력을 표현한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가 '외적인 성장'을 표현한 것이라면 누룩의 비유는 '내재적인 능력의 확장'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경우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며, 특히 누룩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력을 파급시키는 방식이 스스로를 거창하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을 산화(酸化)시켜 대의를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지불식간에 실현되는 것이다.

성 경: [눅13:2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ꃨ 각 성 각 촌...예루살렘으로 - "각성 각 촌"이라는 표현은 누가에 의해 사용된 독특한 도입구로서(8:1) 어떤 특정한 지리적 정보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서술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라는 표현은 9:51의 예루살렘으로의 출발에 이어 예수의 행로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재확인 시키는 것으로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예루살렘이 가지는 중요성을 암시한다.

성 경: [눅13:2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ꃨ 구원을 얻는 자 - 시간과 장소에 대한 배경 설명 없이 하나의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질문의 요지는 '구원받을 사람'의 많고 적음에 관한 것으로 본문에 해당하는 문구 '호이 소조메노이(*)는 "구원을 받을 사람"이라는 미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종말론적 구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얻는 사람들의 수가 많으냐 적으냐에 대한 물음은 당시의 유대교 내에서 많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소수의 극악한 죄인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와 극소수의 사람들 만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견해가 엇갈렸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마22:14;요 8:31-47).

성 경: [눅13:2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ꃨ 좁은 문으로...힘쓰라 - 예수께서는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본절 후반절에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많지않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얼마 만큼의 수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로부터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려는 노력을 스스로 얼마나 하고 있는가에로 질문의 초점을 돌려놓고있다. 이 좁은 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바가 없다. 그러나 '힘쓰라'(*, 아고니제스데)는 단어가 '투기장'이나 '운동경기'에서 전력 투구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결코 안락한 것이 아니라 매우 고된 노역을 경주해야 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하기 위한 노력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내적, 외적 적들과의 영적인 싸움도 포함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9:23-25). 할편 '구원을 얻을 자'가 미래적인데 비해 '힘쓰라'가 현재형인것은 신앙의 현재적 삶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최종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구원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그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현재적인 신앙의 삶이라는 것이다.
ꃨ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 이 말씀은 구원의 문이 어려운 길이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정해진 기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한이 지난 뒤에는 들어가고자 하여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절과의 관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 경: [눅13:2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워에 이르는 길]
ꃨ 주인이...문을 한 번 닫은 후 - 본문에서는 비유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마7:22-23)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있다. 마태의 본문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집주인'은 심판 주이신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 번 닫혀진 문은 다시 열리기 않는다는 것은 성도들이 주어진 기회를 지나치게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여 결단을 유보하거나 다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 경: [눅13:26]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ꃨ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가르치셨나이다 - 문 밖에서 거절당한 무리들은 예수와 안면이 있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대인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와 친분이 있다는 것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으나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첫째로 그들이 제시한 사항은 "주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함께 식사하는 것을 친밀한 교제의 표현으로 여겼다. 하지만 본절의 무리들은 형식적으로 예수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밀한 교제를 나눈 것 같지는 않다. 둘째로 그들이 제시한 것은 주께서 그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응답(應答)한 흔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과 예수 사이에는 아무런 인격적 친분도 없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한편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7:22)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 조차도 구원을 보증해주는데 아무런 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하물며 본문의 조건들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 경: [눅13:27]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ꃨ 나는...알지 못하노라 - 무리들은 자신들과 예수 사이를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항들을 열거하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단호한 대답은 전혀 아는 바 없다(I don't Know you.NIV)는 것이다. 이 대답은 25절에 이어반복 되면서 그들이 당하는 외면을 더 비극적로 강화시키고 있다.
ꃨ 행악하는 모든 자들 -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들을 거부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 6:8의 인용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서 '행악'(*, 아디키아)은 '불의', '악행'을 뜻하며,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16:8-9;18:6;행 1:18;8:23). 이는 누가가 '불의'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ꃨ 나를 떠나 가라 - 단순히 알지 못한다는 차원을 넘어 여기서는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고 있다. 마태의 경우에는(7:23)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범죄자를 추방(追放)할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인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표현을 썼다.

성 경: [눅13:28]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ꃨ 아브라함과...나라에 있고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민(the chosen people)의식을 철폐시키는 말씀으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대 즉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서(29절) 열조들과 함께 하리라는 기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세 명의 선조들을 천국 잔치에서 언급을 한 것은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과 일치하나(마8:11) '선지자'에 대한 언급은 누가만의 기록이다. 그러나 '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의미는 아니다. 선지자와 선지자를 거역한 백성들의 대조는 이미 앞에서 나오기 때문이다(11:47-51).
ꃨ 슬피 울며 이를 갊이 - '슬피 울며'(*, 클라우드모스)는 위로할 길 없는 비참과 영원한 절망에 대한 울음이며(Hendriksen), '이를 갊'(*, 브리그모스)은 증오에 떠는 몸부림이다. 결국 본문이 표현하는 그들의 상태는 '절망적 후회'의 차원을 넘어 주를 향한 강한 적대감까지 표시하는 최악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13:29]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ꃨ 동서 남북으로부터 잔치에 - 이 장면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여러 문헌에서 이야기 해왔던 하늘에서의 잔치를 묘사한 것이다(사49:12). 이 잔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될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혼인잔치를 뜻한다(계 19:7). '동서 남북'은 '전세계'를 뜻하는 표현이며(사 59:91;말1:11;슥 8:7), '참여하리니'(*, 아나클리데손타이)는 만찬 석상에 비스듬히 누워 음식먹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본래 그 자리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는 유대인들은 밖에 쫓겨남을 당하고 그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겨져왔던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대신하여 참여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이(마8:11-12)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성 경: [눅13:30]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워에 이르는 길]
ꃨ 나중 된 자...먼저 된 자 - '좁은 문'의 비유는 이 말씀으로 결론에 이른다. '나중됨과 먼저 됨'의 처음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인데,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지옥에서의 고통이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12:47,48)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도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등급이 뒤 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본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천국과 지옥에 갈 자가 뒤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등급이 바뀐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2) 이 세상에서의 명성이 곧 하늘에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도 있다(Hendrikson).(3) 현재 억압 당하고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자신들만 합당하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은 거부당한다는 의미로 본다(Marshall,1:51-53). (4) 먼저 선택받은 선민으로서의 유대인들은 교만과 불신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하고, 멸시받던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본다(Yyndale). 이 가운데서 네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본문을 유대인과 이방인이 전체 집단으로서 뒤바뀐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모두가구원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성 경: [눅13:3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ꃨ 바리새인들이 ...떠나소서 -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헤롯의 음모(陰謨)를 알려주면서 혜롯의 영역을 떠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어떤 동기가 작용하고 있는지 여러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들도 있었던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7:36;11:37) 이 바리새인들은 선의로 예수를 염려하여 피신을 종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중립적인 입장에서 헤롯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 경험도 있고 해서(마14:1-12) 예수를 죽일 의사는 없었으나 혜롯 자신이 관할하던 갈릴리 베레아 지방의 사회적 안정을 원했으며 예수로 인하여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위협용 정보를 알리게 하여 예수 스스로 그 지역에서 떠나게 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3) 바리새인들이 단순히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적극적인 악의를 가지고 헤롯과 합세하여 예수를 쫓아내려는 의도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세번째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눅13:3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ꃨ 저 여우 - 여우는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예수께서 여기서 헤롯을 여우로 부르는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ꃨ 오늘과 내일...제 삼 일 - 헤롯의 협박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임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난해 구절인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1) 문자적인 의미에서 삼일을 가리킨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은 일을 더하고 제3일에 헤롯의 관할 지역을 떠나가겠다는 의미로 본다(Bleek,Meyer). (2) 출 19:10-11에 배경을 둔다고 보아 준비와 정결 기간인 이틀이 지나고 사홀째 되는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3) 제 삼 일이 절정에 이르는 결정적인 시간을 뜻한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즉 '이틀'은 그 시간에 이르기 까지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Marshall). (4) 상징적 의미로 보아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Bengel, Farrar).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4) 견해가 유력하다.
ꃨ 완전하여지리라 - '완전하여 지리라'(*, 텔레이우마이)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 문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헤롯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완료하신다(Bleek,Bruce). (2)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Farrar,Marshall,Gilmour). 이중 (3)의 견해가 유력하다.

성 경: [눅13:3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ꃨ 그러나...갈길을 가야 하리니 - ' 그러나'(*, 플렌)는'...완전하여지리라'와 대조대는 문구로 '완성의 때'까지는 예수의 길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음을 뜻한다. 여기서 '오늘과 내일과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의 왕성을 이루기까지 그가 계속 수행해야 할 사역의 기간을 뜻하는 문학적 표현이라 하겠다. 또한 '...해야만 한다'(must)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데이'(*)는 예수의 사역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필연적으로 완수되어야 할 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ꃨ 죽는 법이 없느니라 - 헤롯이나 바리새인이나 간에 그 누구도 예수를 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은 예수께서 부패한 종교와 타락의 상징인 에루살렘에서 자신의 생명이 끝나게 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능동적 결의가 넘치고 있다.

성 경: [눅13:3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ꃨ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예수의 관심이 해롯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뀌고 있으며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될 선민의 도시 예루살렘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통한 심정이 표현되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가리키며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선지자들과 사자들을 살해하고 돌로 쳐죽인 주체로 묘사되는것이다(삼상30:6;왕상12:18;18:4,13;19 :10;21:10-15;느 9:26).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이 탄식의 말씀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어(마23:13-36) 예루살렘 멸망의 책임이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는데 비해 본문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ꃨ 암탉이...몇 번이냐 - 어미 새가 새끼들을 둥지 속에 모아 보호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이 문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는가를 말해준다. 암탉과 그 새끼의 관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되는 경우는 구약에 흔히 나타난다(신 32:11-12;시 36:7;사31:5). '몇 번이냐'(*, 포사키스)는 '얼마나 자주'의 뜻으로 빈도 수가 한 두번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실제로 예루살렘을 여러차례 방문했었다(2:14;5:14;7:14, 28, 37;10:22, 23). 그러나 이 말씀이 예루살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전체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15장;마 9 :36;11:25-30;15:32).
ꃨ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거역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의 구원 사역도 거부하였다(13절;11:15).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이다(23:18,21,23).

성 경: [눅13:3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ꃨ 너희 집이 황폐(荒廢)하여 - 예수의 구원 사역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당할 결과가 서술되고 있다. 여기서 '집'(*, 오이코스)은 '신전'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곧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렘 12:7과 22:5의 반영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종국에는 저버리신다는 의미이다.
ꃨ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 이 말씀은 시 118:26의 인용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가리킨다고 본다(Danker, Erasmus). 이 견해는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이 외친 소리가 본문과 다르며, 환영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 더구나 마태의 평행본문에서는 입성후에 본문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2) 유대인들의 대회개를 뜻한다고 본다(plummer).(3) 주의 재림을 뜻한다고 본다(Godet,Farrar,Marshall). 즉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재림하기 까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주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그를 거부하였던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통절(痛切)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회개를 촉구하심[눅 13장]

[내용개요]
두어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에 대해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실로암 망대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셨다(1-5절). 또 무화과나무 비유도 들려주셨다(6-9절). 또 안식일에 십팔 년 동안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 주셨고(10-17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셨다(18-20절). 예루살렘 여행 중에 구원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 주셨다(21-30절). 어떤 바리새인들로부터 헤롯의 예수 체포 음모를 전해 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사역을 선포하시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애곡하신다(31-35절).


[강 해]
본장은 다섯 개의 작은 단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들 소단락들은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본장의 전개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감을 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1. 죄를 회개하라

 

1) 회개하라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있는 몇몇 갈릴리 사람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들의 죄악 때문에 당연히 죽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 사건을 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갈릴리인이 다른 갈릴리인보다 더 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며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a. 각양 더러운 악(고후12:21)
b. 화를 당함(마11:21)

 

2)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예수님은 빌라도가 제물에 피를 섞은 사건 및 실로암의 망대 파건 등 두 가지 실화를 들어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어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본서의 독특한 자료에 의한 것으로, 마21:18-22과 막11:12-14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병행합니다. 그 내용은 전연 다르나 취지는 같습니다. 주인이 관심을 갖고 사랑했던 무화과나무는 삼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열매를 맺지 못하고 땅만 버리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에 과원지기는 1년 만 더 기회를 주도록 간청했습니다. 과원지기의 간청을 들은 주인은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a. 과실을 있게 하려고 성도를 택하신 주님을 교훈해 줌(요15:16)
b. 심판을 유보시킴(출34:9)

 

3) 안식일의 치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그 곳에는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율법주의적 선입관에 얽매여 있는 회당장은 안식일에 치유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분을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과 그를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주셨습니다.
a.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임(막2:27-28)
b. 선행으로 무식한 말을 막음(벧전2:15)

 

2. 예수의 교훈

 

1) 겨자씨 비유
예수님께서는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겨자씨를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작은 겨자씨에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한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보잘것없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데 그 강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크게 자라서 나중에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a. 사람이 밭에 심은 씨(마13:31-32)
b. 거할 곳은 전능자의 그늘임(시91:1)

 

2) 누룩 비유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누룩 비유 역시 겨자씨 비유에서와 같이 큰 결과를 대조하는 의미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누룩은 대체로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누룩은 그 급속한 활동력으로 음식을 빨리 부패하게 하므로 악의 전염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급속한 활동력이 선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적은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부풀리듯이 그와 같은 역동적인 힘을 성도들이 발휘해야 합니다.
a. 잘못된 교훈(갈5:7-9)
b. 하나님의 나라(마13:33)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께서 각성과 각촌을 돌아다니시면서 전도 여행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원 얻는 자의 수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좁은 문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집주인이 한번 문을 닫게 되면 그 문은 절대로 다시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a.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함(마7:14)
b.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함(창7:15-16)

 

3. 탄식하시는 그리스도

 

1) 행악자들
예수님은 슬피 울며 이를 갈 자들은 행악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행악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의 악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행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비유를 통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 일찍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였지만 교만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a.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함(고전6:9)
b. 구원 축복을 이방인에게 넘겨주었음(롬11:11)

 

2) 고난을 각오하심
예수님께서 심판에 관하여 가르치시고 있을 때 한 바리새인이 나아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므로 여기를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전언 내용을 들으신 주님은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헤롯을 통렬하게 경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헤롯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을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역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 죄인의 손에 죽음당함(마17:22-23).
b. 미리 예언된 사실임(행3:18)

 

3) 탄식하시는 예수
주께서 예루살렘을 반복하여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며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극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이십니다. 더 나아가서는 전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의 탄식이십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간절한 초청과 호소를 거절한 채 의로운 피를 흘린 죄의 대가로 멸망당할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 선지자를 죽인 성(마23:37)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자들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을 하는 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단어해설]
3절. 회개. 전인격적인 변화 즉 결단하여 회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13절. 안수하시매. 손을 얹고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안수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편안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24절. 좁은 문. 이것은 진리를 따르는 자가 당할 당연한 고난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27절. 행악. 이 말은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무당 행위를 가리키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행위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33절 .여우. 교활함의 대명사인 짐승으로 여기서는 헤롯을 가리키고 있다.


[신학주제]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
예수께서 별다른 설명 없이 실로암 망대 사건을 언급하신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무척 알려진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이 언급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면,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실로암 망대 사건이나 성수대교 붕괴 사건 같은 대참사가 발생한 것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희생당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대리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희생자들의 죽음은 나의 죽음인 것이다. 그들은 내가 받을 고통을 받았고 내가 당할 죽음을 죽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희생자들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의 세상을 향하신 뜻을 깨닫고 우리의 죄악된 행실을 돌이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적교훈]
어떤 사람이 구원에 대하여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그와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와 성도 개개인의 책임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예수의 말씀을 요약하면 첫 째, 성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둘째, 준비되지 못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여기서 준비되지 못한 자란 주의 이름으로 일하였으되 악행을 즐겨 일 삼던 자들이다. 셋째, 지금은 나중된 자이지만 장차는 먼저 될 자도 있다는 내용이 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도리를 잘 깨닫고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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