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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누구인가?

by 은총가득 2020. 11. 24.

 

 

성경에 예수님과 관련된 향유에 대하여,

 

예수님의 머리(마26:7, 베다니; 막14:3, 베다니),

예수님의 발(눅7:38, 나인; 요11:2,베다니)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눅23:55,56).

 

그런데 '옥합을 깨뜨렸다'는 구체적인 표현은 마가복음(막14:3)에서만 나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14:3).


따라서,

옥합을 깨뜨린 횟수는 1회이며,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리아'입니다.

 

참고로 동명이인 '마리아'와 '베다니'에 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1. 동명이인 '마리아'

마리아(Maria: 가장 높으신 분. 귀부인). 신약성경에는 7명의 여자에게 쓰이고 있다.

 

1)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글로바(요19:25)는 알페오(마10:3;막3:18;눅6:15)와 동일인이다.

 

2) 로마 교회의 마리아

바울이 문안 인사를 보낸 로마의 여 성도이다(롬16:6).

 

3)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헤롯 아그랍바 왕에 의해 베드로가 투옥했을 때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곳이 바로 이 마리아의 집이었다(행12:12). 복음서 기자 마가의 어머니인데, 그녀는 유복하였다(행12:13).->마리아의 집.

 

4) 막달라의 마리아

예수와 12사도를 따라 갈릴리 지방을 순회한 부인인데,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인으로서 특기하고 있다(마27:56;막16:9;눅8:2).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겼다(마27:56;눅8:1-3).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다(막16:9;요20:11-18).

 

5) 베다니의 마리아

예수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음으로 칭찬을 받은 부인이다(눅10:38-42).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와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할 때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음으로써 참 감사와 헌신을 표명했다(마26:7-13;막14:3-9;요12:1-8).

 

6)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정혼하기만 한 처녀인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성령에 의한다(눅1:35).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은혜 받은 자라고 하였다(눅1:28).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십자가 옆에 있던 그녀는 예수의 형제들과는 달리(요7:3) 항상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확신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그녀를 부탁했다(요19:25-27). 예수의 승천 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마음을 합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었다(행1:14).

 

7)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막15:40,41;눅8:3).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그곳에 있었고(마27:55,56;막15:40;눅23:49) 무덤을 지켜 보았다(막15:47;마28:1-7;눅24:1-7).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기독교 사전 <전신갑주>

 

2. 베다니

 

베다니는 아람어로 베트 아냐(Beth anya)라고 한다.‘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나병에 걸린 시몬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베다니에 와서 묵었다.
부활한후 제자들과 지내다가 작별하고 승천한 곳도 베다니라고 한다.
베다니는 아랍어로 알-에이자리야(Al-Eizariya)라고 하며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마을이다.
베다니의 동남쪽에는 감람산(올리브산)의 자락이 이어져 있다.
알-에이자리야라는 말은 아랍어로 ‘나사로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에는 2천년 이상된 오래된 집이 있다.


순례자들은 이 집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살던 집이라고 믿어서 발길을 향하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베다니가 아나냐(Ananiah)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한 명칭으로 구약성경 느헤미아(11장 32절)에 나오는 아나냐, 즉 베델(Bethel)이 베다니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베다니가 베트파게(Bethphage)에서 나온 말로서 ‘익지않은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아람어로 베이트 히니(Beit hini)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베이트 히니가 베다니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The Holy Land(성지: 1866)라는 책의 저자인 윌렴 딕슨(William Dixon)과 같은 저명한 학자는 베다니가 무화과 또는 대추야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더구나 탈무드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그런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딕슨은 오히려 베다니가 시리아어로서‘가난한 집',‘가난한 자의 집’,‘구두쇠의 집’이라는 뜻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람어의 베트 아냐(Beth anya)에서 비롯했다고 내세웠다.

 


신약성경에는 베다니라고 생각되는 장소가 네 번 등장한다.

1. 누가복음 10: 38-42에는 예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된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이다.
여기에는 그저 '한 마을'이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복음서에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는 마을이 베다니라고 되어 있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이 베다니에 들어 가신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2. 요한복음 11: 1-46에는 나사로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로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 구절로 보아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사건이 먼저 일어났고 그 후에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수 있다.
또한 베다니의 시몬이라는 바리새인 겸 나병환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죄 지은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되어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같은 내용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베다니 마을에 가면 나사로의 무덤이 있어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3. 마태복음 26: 6-13, 마가복음 14: 3-9, 요한복음 12: 1-9에는 예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마리아가 와서 예수의 머리(어떤 기록에는 발)에 향유를 바른 일이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에도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4. 누가복음 24: 50-53에는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승천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왜 베다니에서 승천하셨을까?
고향인 나사렛이 아니고?
더구나 예수께서는 부활후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았던가?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베다니의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막달라라는 마을과 베다니라는 마을은 같은 곳이어야 앞뒤가 맞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동편에 있는 어촌이며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데에 있는 마을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마을이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에서 막달라는 마리아가 태어난 곳이며 그후 베다니로 이사와서 살았다면 얘기는 된다.

다음으로 죄 지은 여인의 주소지에 대한 사항이다.
죄 지은 여인은 막달라와 같은 어촌에 살면서 영업을 했을리가 없다.
예루살렘 부근인 베다니에 살면서 영업을 했다면 얘기는 된다.

그건 그렇고 베다니라는 명칭은 성경에서 또 한군데 더 나온다.
요한복음 1장 28절이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라는 구절로서 세례 요한이 베다니에서 세례를 베푼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영역본에는 베다니가 아니라 베타바라(Bethabara)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 성경들은 베타바라를 베다니로 번역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마가복음 14:1-21 /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며 옥합을 깬 마리아입니다. 성도님들 대부분이 옥합을 깬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알고 있는데 이는 누가복음 7장의 마리아이고요 요한복음 12장, 마태복음 26장,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 14장의 마리아는 베다니 마리아입니다.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베다니 마을이라고 분명히 기록됨.

누가복음 7장의 마리아도 정확히 막달라 마리아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황인 그레고리 1세가 591년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고 예수님의 발 앞에 향유를 부었다고 강론한 것에 기인해서 모두들 막달라 마리아가 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다음 장인 누가복음 8장에서 나오듯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낸 여인이고, 나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연배이며, 일찍 과부가 된 귀족 부인으로 예수님을 재력으로 도와준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다, 예수님과 연애를 했다, 이렇게는 전혀 볼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단지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이 찬송을 성도님들이 다들 좋아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다보니 베다니 마리아보다 막달라 마리아가 더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실제 옥합을 깨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인생을 드려서 예수님의 조력자가 되었으니 둘 다 인생의 옥합을 깬 것은 사실입니다.

 

옥합(알라바스트론)은 희고 매끄러운 설화석고로 만든 병으로서 몸체가 둥글고 넓으며 입구와 목이 가늘고 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안에는 순전한 나드가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순전한’이란 믿을만한 즉, 정품이라는 뜻이고요 나드란 히말라야산 감송향의 뿌리에서 추출한 향료랍니다. 그러니까 최고급 정품 향수병을 깨어서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여라

오고 오는 세대에 꼭 기념하고 기억하고 증거해야 할 사건이 바로 이 마리아가 옥합을 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절인 오늘 베다니 마을에서 있었던 마리아 여인의 예물처럼 하늘에서 기뻐하시고 기억하실 만한 복된 감사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포기에서 시작한 예물이었습니다.

가격은 약 3백데나리온 정도. 노동자들 1년치 품삯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시가 2천만 원이 넘는 것입니다. 사막기후에 사는 사람들이라서 잘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시간에 한 방울씩 쓰는 것이 이 향유(향수)입니다. 그런데 그걸 깨버렸습니다. 주로 여자들은 자기 결혼식을 위해 준비하고요, 중요한 손님이 오면 향수를 씁니다. 그렇다면 베다니 마리아는 자기의 결혼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을 ‘포기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는 ‘결혼을 포기했다’라는 말까지 됩니다. 마리아라고 꿈이 없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겠습니까? 누구나 “결혼하여 아기자기하게 살고 싶다.” 사실 이 평범한 마음의 소망 때문에 일생 돈을 모아 향유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자기 삶의 꿈을 포기하고 드렸던 것입니다.

 

2. 미래를 대비한 행동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향유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반복해서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어서 부활할 것”을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8장 31절을 읽어봅시다.

누구도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기적, 이사, 병 고침,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만 바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알았고,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너무나도 잘 예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마가복음 13장을 통해서 말세와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코로나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는데 그것은 다가올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한 방에 훅 가벼렸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순식간에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당시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깨닫지도 못했고 대비하지도 못했던 예수님의 죽음을 마리아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서 미리 알았고 이를 준비한 자였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세상 무엇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죽음을 옥합을 깨어서 예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 여자가 행한 일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베다니 마리아를 통해서 배웁니다. 그리고 코로나 한 방으로 훅 가버린 오늘의 교회를 통해서 더욱 깨닫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탄식하며 외쳤던 말씀, 너희들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한 적이 있느냐?

 

예레미야 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현대사회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계인 혼과 자기 육체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투자합니다. 웰빙, 웰에이징, 웰다이닝... 그런데요 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도 이길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준비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비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으며 오고 오는 세대에 기억해야할 거룩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영적인 마리아의 길에 들어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영적인 행동에는 기회가 있습니다.(7절)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그때에 드리지 않았다면 영원히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가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송별식입니다. 작별인사였고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사탄이 인간을 이기는 비결은 ‘다음에’라는 단어랍니다. 영에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예배에 기도에 항상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무엇을 하더라도 먼저 기도하고 시작하고, 예배드리는 시간을 사모하십시오.

 

2. 영적인 일은 자발적으로(6절)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가치가 적습니다. 요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무책임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해야 할 당위성도 없었습니다. 시켜도 못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해도 못하는데, 시키지도 않아도, 요구한 일도 아닌데 드렸던 것입니다. 스스로 드렸고 스스로 드려야 할 책임을 느꼈던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자기 스스로 마음에서부터 기쁨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도 기뻐하십니다. 교회 오는 것이 뭐 소가 도살장에 끌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와서도 입이 대자로 나와서 불평만 가득합니다. “왜 날 데리고 왔냐?” 이러면 영이 자라지 않습니다. 코로나 때 성도들이 한 가지 배운 것은 교회 오고 싶어도 못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배드리게 허락만 해준 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에 관해 간절성, 절박성이 있어야 영의 사람인 것입니다.

 

3. 동기는 항상 순수해야 합니다.(8절)

무엇을 기대하거나 어떤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순수한 동기에서 헌신했습니다. 예수님한테 인정을 받기 위함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감사가 동기요, 사랑이 원인이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죽으시기에 옥합 값 2천만 원 누가 갚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돈을 수천만 원 빌려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망해 가는 사람에게 돈을 대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죽는 사람에게 주면 받을 길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보상받을 길이 없는 투자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순수한 동기를 계속 유발해야 하는 것이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ex1) 다니엘 기도회 유감:작은교회 동참을 위해서 경품 추첨을 한다. 경품 받으려고 이 기도회에 참여하는 교회들이 많다. -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ex2) 달란트 유감:예전에 교회학교의 부흥을 위해 달란트 시장을 했다. 동기유발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옥합을 깬 베다니 마리아를 통해서 많은 부끄러움을 갖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었을 것이고, 문둥병 형제를 데리고 사는 가난한 여인이었으며, 자기 몸 드려서 가족 하나 살리는 것이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다보니 누구보다 주님께 아름다운 헌신을 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헌신이 제자들을 부끄럽게 했고, 각성하게 했으며 다시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기념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었으며, 그 아름답고 순수한 동기는 자발적 헌신 그리고 과감한 행동으로 나아가서 모든 이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한 해의 결실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절,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라서 내 모든 것 드리는 마음으로 감사예배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드리는 우리 모두는, 옥합을 깬 베다니 마리아처럼 이미 영의 사람인줄 믿습니다.✞ 강순욱 목사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옥합을 깨뜨린 여자

마26:1-16

 

<예수께서 영원한 속죄물이 된 마지막 유월절>

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히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3년 반의 마지막 사역은 유월절 어린양인 자기 피로써 백성들의 죄를 영원히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사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한 후 3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완성되기 위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 된다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기름을 예수의 머리에 부은 베다니 마리아>

6-7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께서 영원한 속죄제물로 번제단에 바쳐질 때 그 제물은 흠없고 점도 없는 거룩한 제물로 준비되었던 것처럼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음으로 예수께서 장사를 위하여 거룩한 제물로 준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날은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 곧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마26:막14:3) 그 집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를 마음에 모신 은혜 받은 한 여자 베다니 마리아가 믿음으로 자기 전부를 다 바친 산제물로 옥합을 깨뜨림으로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등과 기름을 준비한 것 같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은 장성한 자들은 성령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나온 기름(정수)은 착한 행실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주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름을 준비한 여자이기에 이 여자의 행한 일을 기념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고로 이 여자는 만민의 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사랑했던 제자로서 예수님을 위해 가장 소중한 기름을 담은 옥합을 깨드려 주님의 장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소중한 생명을 우리 죄인을 위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의 모습은 말씀에 목마른 갈급한 심령으로 예수의 발밑에서 항상 가르침을 받았으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오라버니 나사로의 부활을 체험하고 난 후에 향유를 바친 모습에는 자기 자아가 죽은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사는 기름을 준비한 현명한 신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리아는 온전한 헌신을 통해 영광을 예수께 돌린 귀한 그릇으로 사용되었으며, 예수님께 직접 확증을 받았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순교자의 피가 땅에 떨어지면 그 피(생명)가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 우리가 알 것은 예수님의 피(생명)는 죄를 사하는 대속의 피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 희생 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자기 전부를 헌신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된 육체에 채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향유 부음을 보고 분노하는 가룟 유다>

8-9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향유 사건을 지켜봤던 제자들(가룟유다)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분노했던 그 이유는 예수님 보다는 물질에 대한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죄의 뿌리는 욕심에서 비롯 됩니다.

 

가룟 유다만 그 일을 보고 분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같이 분노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곧 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었다는 말씀을 듣고 그 제자들은 자기들의 잘못된 생각을 버렸지만 가룟 유다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그 분노를 잉태함으로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결국 은삼십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엡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가룟 유다가 했던 말은 거짓말로 가난한 자를 핑계 삼아 자기의 악한 마음과 욕심을 숨기기 위한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삼백 데나리온 되는 비싼 향유를 보고 욕심이 생긴 가룟 유다의 감추어진 악한 마음이 적나라하게 들어났던 것입니다.

 

참으로 가룟유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자기 의지를 좇아 자기 생각대로 예수를 떠난 것입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의 책망과 칭찬>

10-11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사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께서 곧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에 대한 장사 준비를 위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귀머거리요 소경이 가룟유다였던 것입니다. 이 책망은 가룟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의 사랑이었습니다.

 

12-13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의 믿음 안에서 향기로운 산제물로 기름을 준비했던 베다니 마리아는 성령의 사랑 안에서 헌신과 섬김으로 예수의 장사를 준비하는 산제물로 영광에 참여하게 되어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제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사용되어진 귀한 그릇인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

14-16 “그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유다는 예수보다는 재물(맘몬)을 사랑하고 돈을 선택함으로 예수님의 책망을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과 분노인 악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므로 사단이 틈을 타서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어 사단의 도구로 전락되고 맙니다.

 

히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았음으로 예수님을 쉽게 버리고 쉽게 떠나서 적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배도를 저질르게 되는데, 예수의 목숨을 여자의 몸값인 은 삼십에 팔아 넘깁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슥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아멘. 마라나타.

 

 

옥합을 깨뜨린 감사

 

제 목 : 옥합을 깨뜨린 감사
구 절 : 막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3절).


마리아가 행한 행동은 예수께 대한 극진한 사랑을 가진 크리스천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대한 극진한 사랑은 입으로 표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옥합을 깨뜨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이상되는 향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반석'이 깨어질 때 물이 나왔고, 백성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9출 17:6,민20:7).


"그 옥합을 깨뜨림 이란?"
1. 마음의 옥합을 깨드렸습니다.


본문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를 괴롭게 하느냐"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눅 3:18,시56:8,막14:72,빌3:18,행20:19). 이것은 주님의 사랑에 감복하여 그 마음 속에 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주님의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 12:3). 그뿐만 아니라 그녀 또한 아낌없이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릴 만큼 주님을 사랑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행동은 언제나 적극적이고 두려움을 모릅니다 (일4:18).
그러므로 그녀가 자신이 소유 중 가장 귀한 향유를 남김없이 부어드린 것입니다.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를 자기의 것으로 속량해 버린 것입니다 (엡5:16).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마 16:21,17:22,20:18). 그 말씀이 믿어 질때 마음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을 깨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막 16:1-11).죄인이 의인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육체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본문 8절에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값진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옥합보다 그녀가 주님께 드리고자 하는 중심이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위선적이고 예배자들은 눈멀고 불완전한 양들을 가지고 성전에 와서 예물을 바칩니다. 건강하고 흠없는 양과 염소는 자기의 것으로 감추고,값이 없고 불완전한 것들로는 하나님께 생색내기를 지금도 여전히 행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하였으니 참된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눅 7:38).


그녀는 자신의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오르는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가장 고귀한 머리털로 걸레 삼아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인간에게 최우선 순위로 정해야 할 두가지 기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회개' 해야 할 기회이며, 하나님을 위해서는 '지금 이때'가 언제나 최우선인 기회입니다.


3.재물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예수를 궤계를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1절)여전히 악한 생각으로 가득찬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유월절 주인으로 오신 주님을 정치적 야먕의 희생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는 유월절 주인이신 주님을 위하여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을 공대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공대는 복음을 수용하지 않는 무심한 군중들의 열심과
위선적인 언행을 깨뜨렸습니다. 이들은 가장 가까이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
지 못한 영적 소경들이었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6절), 신앙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히 11:6).


예수님을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였습니다. 그녀는 전재산을 예수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런 행위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에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전체를 주어도 모자라는 것이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확증으로 목숨가지 버리셨습니다 (롬 5:8). 많이 사랑하는 자는 많은 것을 드리게 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전 소유를 바칠 만큼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향유 향기와 함께 그리스도의 이적 소문은 온 유대에 퍼졌습니다(요 12:11). 많은 재물을 가지게 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지게 하는데 있습니다 (고후 2:15,16).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위에 대해,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14:9)고 하셨다.주님을 위해 특별한 헌신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처럼 주님이 직접적으로 이렇게까지 언급하신 경우는 드물다.

 

옥합이란 우리의 자아의 상징이다. 우리의 천연적인 것이 깨어질 때, 거기에서 향기로운 나드 향이 나온다. 우리의 단단한 옥합 같은 자아가 파쇄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적인 나드 향이 나온다. 우리 안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나드 향처럼 아름다운 부활 생명이지만, 그 나드 향은 자아라는 단단한 옥합 속에 싸여 있다. 이 단단한 자아가 깨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생명/영)은 해방 될 수 없다. 이 생명이 매 순간 해방되어 영적 실재가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 순간 자아를 부인하고 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해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눅9:23)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다.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는 표면적인 옥합을 깬 사람일뿐만 아니라, 자아라는 단단한 자신의 선악의 옥합을 깨뜨리고 자신 안의 생명이신 하나님을 해방시킨 사람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는 하나님이 이 땅에 두시기로 했던 하나님의 형상인 바로 그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사람이 인격이 회복된 사람이고, 이 사람이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본이다. 그래서 주님은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마리아의 외적 행위를 통해 칭찬할 만한 아름다운 헌신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헌신을 가능케 한 생명의 능력을 반드시 꿰뚫어 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자아로써 이런 비슷한 헌신을 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그가 아무리 값진 것을 드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할 자아의 선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롯 유다의 자아적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속기 쉬운 함정이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렸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과 그 동기를 보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되, 자아가 부인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신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rkwudhsrm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