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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요한복음 2장 캐논주석

by 은총가득 2020. 11. 30.

요한복음 2장

 

 

갈릴리 가나와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한 메시야

요한복음2장 그리스도의 첫 표적과 성전 정화

 

예수는 첫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로 돌아간다. 그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적 첫 표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그의 표적을 아는 자들은 예수에 속한 가족과 제자들뿐이며 유대교를 상징하는 혼인 잔치의 주역들은 그 표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불신앙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한다. 요한은 첫 표적들을 통해서 여전히 유대교에 미련을 두고 돌아가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변증하는 성격을 가진다.

갈릴리에서의 첫 표적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격적인 사역의 핵심은 유대교의 성전 신학을 성취하는 데 있다. 당시 유대교는 헤롯 대왕의 덕을 입어 46년 동안 건설된 성전 건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 유대교를 향해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전의 참된 기능을 성취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성전은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기능을 다해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해오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 다른 메시야적 표적을 구하고 그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더 이상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1. 첫 표적 : 물을 포도주로 만듬(1-11절)

1) 포도주가 없는 혼인 잔치

1절의 '사흘'은 베다니에서 가나까지 여행한 기간을 암시한다. 2절의 '제자들도'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은 이전에 요한과 함께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서(눅7:31-34) 예수는 그들에게 메시야적 시대를 여는 첫 표적을 제시하는 것이다. 3절의 '포도주가 모자란지라'와 '포도주가 없다'는 세례 요한에서 그 절정에 이른 유대교가 혼인 잔치의 핵심 요소인 포도주, 즉 예수 없이는 전혀 무가치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2) 메시야를 알아보는 자들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

4절의 '여자여'는 헬라어 배경에서는 아주 부드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가 이 첫 표적으로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나와 무슨상관'은 마리아와 메시야인 예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을 암시한다. '내 때'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으로 메시야됨을 완전히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속적 죽음으로 비로소 자신의 메시야적 신분이 완전히 드러날 것을 암시한다. 5절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그는 마리아가 그의 아들 예수의 신적 권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6절의 '유대인의 결례'와 커다란 '돌항아리'는 포도주가 없는 유대교가 빈껍데기 정도임을 암시한다. 7절의 '아구까지'는 종들의 전폭적인 믿음을 보여 준다. 9절에서 첫 표적을 알지 못하는 연회장과 아는 종들이 대조된다. 10절에서 첫 표적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는 연회장의 모습은 표적을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됨을 알아 차리지 못하는 유대교의 오해를 대변한다.

 

3) 표적의 목적

11절에서 표적의 목적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냄으로 사람들이 믿게 하는데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는 요한복음에서 표적들의 일차적 대상이 누구인지를 잘보여 준다. 사도 요한은 본서의 후반부에서 본서 기록 목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요20:31)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과 사도 요한의 주요 사역의 목적 중 하나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 믿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함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문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 하겠다.

 

2. 둘째 표적 :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시는 메시야적 행동(12-17절)

1) 가버나움에 거하심

12절의 '가버나움에 내려가'는 요한의 어느 정도 역사적 정확성을 추구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는 예수 사역의 절정이 유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요한의 의도를 암시한다. 가버나움 사역은 어머니, 형제들,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것뿐이다.

 

2)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는 메시야적 행동

13절의 '유대인의 유월절'에서 '유대인'은 핵심인 메시야를 소외시키고 믿지 않는 육신적인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따라서 '유월절'도 혼인 잔치와 같은 단지 명분뿐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더니'와 14절의 '성전 안에서'는 예수께서 공식적으로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는 배경(말3:1-3)을 암시한다. 즉 예수가 말라기의 예언을 성취하고 성전에 메시야로서 등장하셨음을 보여 준다.

14절의 '보시고'는 이전에 제자들을 택하기 위해 보시는 긍정적인 면과 대조적이다. 14절의 그러한 매매 행위는 예배자들을 돕는 기능을 하지만, 예수가 노하신 이유는 그런 행위가 '성전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데 있다. 15절의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와 16절의 '여기서 가져가라'는 예수께서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준다. 한편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당시 교회에 의식적인 부류들과 그 의식을 악용하는 상황에서 부정한 자들을 내쫓을 것을 암시할 수 있다.

 

3) 제자들의 깨달음

17절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시69:9)는 예수의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는 메시야적 행동을 제자들이 깨닫게 됨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분의 거룩성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3. 성전의 기능을 성취하신 표적(18-25절)

1)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오해

18절의 '이런 일'과 '무슨 표적'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동을 메시야적 행동으로 이해하고 메시야적 표적을 요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19절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거하는 처소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헐라'고 하셨고,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성전은 그의 몸이 죽고 부활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20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예언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 그 참된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한다. '46년'은 헤롯 대왕이 B.C.20년에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당시는 A.D.26년으로서 어느 정도 주요 건물들은 완성되었을 것이다.

 

2) 부활과 제자들의 성전에 대한 믿음

21절에서 저자는 예수가 '자기 육체'가 성전인 것을 독자들에게 깨닫게 한다. 22절의 '살아나신 후에야'는 제자들이 결정적인 믿음에 이르게 된 시점과 우리의 믿음의 핵심을 소개한다. 즉 20절에서 유대인들은 '지었거늘'과 '일으키겠느뇨'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지만 전자는 성전 건물에 적용되어야 하고 후자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기 육체'에 적용되어야 했다. '예수의 하신 말씀'은 눅24:27시16:10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3)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을 거절하심

23절에서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는 22절에서 '제자들이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와 대조된다. 특히 그 '행하시는 표적'들은 22절의 '살아나신 후에야'에 못미치는 표적들인 것을 암시한다.

24절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는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불완전함을 암시하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거절함을 암시한다. 25절의 '사람의 속에 있는 것 '은 23절의 '믿었으나' 형식적인 믿음을 신적 진지함으로 아신 것을 반영한다.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는 표적을 구하면서 예수의 참된 표적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불신앙에 유기하실 것을 암시한다.

 

혼인 잔치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기적(요2:1-12)

 

◈ 원문강해 ◈

 

초자연적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아들의 권세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임을 세상에 알리셨다. 동시에 그의 공생애가 메시야적 사건임을 예고하셨다.

 

1. 문제 해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1-5절)

1)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으신 예수

(Kai; th'/ hJmevra/ th'/ trivth/ gavmo" ejgevneto ejn Kana; th'" Galilaiva", kai; h\n hJ mhvthr tou' jIhsou' 카이 테 헤메라 테 트리테…에클레데 데 카이 호 예수스 카이 호스 마데타이 아우투; 사흘 되던 날에…예수와 그 제자들도 청함을 받았더니, 12,2절)

테 헤메라 테 트리테(th'/ hJmevra/ th'/ trivth/사흘 되던 날에)가 지시하는 그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요1:43) 살건 이후부터 계수해서 셋째 날이다(R.C.H. Lenski, A.T.Robertson). 그리고 이 어구는 헬라어 용법에 따르면 아우리온(au[rion모레)과 동일하다(C.K.Barrett).

에게네도(ejgevneto있어)는 결혼식이 이미 시작되었거나, 이제 막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기노마이(ginomai있다)의 부정과거형으로 결혼식이 이미 예수와 그 제자들이 참석하기 이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엔(h\n계시고)은 미완료 과거로서 에클레테(ejklhvqh청함을 받았더니)가 부정과거 수동태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잔치를 돕기 위하여 참석한 사람이었으므로, 마리아는 예수께서 청함을 받기 이전에 벌써 오셔서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R.C.H.Lenski).

 

2) 포도주의 모자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kai; uJsterhvsanto" oi[nou ... ou[pw h{kei hJ w{ra mou. 카이 휘스테레산토스 오니누…우포 헤케이 해 호라 무; 포도주가 모자란지라…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3,4절)

휘스테레산토스(uJsterhvsanto"모자란지라)는 휘스테레오(uJsterevw모자라는)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포도주가 다 없어지기 전에 발견되었음을 암시한다. 포도주가 부족해진 이유에 대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설(Robertson)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에 포도주가 풍성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주가 모자라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예수님에게 '때'를 제공하신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 듯하다(R.C.H.Lenski). 마리아가 포도주의 부족함에 대해 예수님께 말한 것은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과 관련된 기현상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A.T.Robertson). 귀나이(gunaiv여자여)는 귀네(gunhv여자)의 호격으로서 경멸이나 무례함, 또는 책망의 의미가 아니라(C.K.Barrett, W.Hendriksen, A.T.Robertson), 높은 사람에 대한 존칭어로서 왕후를 부를 때 사용된 용어이다(Vincent). 예수께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마리아가 어머니로서의 권위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으며, 동시에 예수님의 메시야적 임무에 대해 간섭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A.T.Robertson).

헤 호라 무(hJ w{ra mou내 때)는 단순한 시간적 표현이 아님을 볼 수 있는데, 이 용어가 소유격으로 표현된 것에 대해 주지해야 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메시야의 수난의 시기를 나타내지만(요8:2012:23;13:1), 본 절에서는 예수께서 그의 메시야됨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최초의 표적을 나타내실 그때를 말한다(R.C.H.Lenski).

 

3)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

(levgei hJ mhvthr aujtou' toi'" diakovnoi", {O ti a]n levgh/ uJmi'n poihvsate. 레게이 헤 메테르 아우투 토이스 디아코노이스 호 티 안 레게 휘민 포이에사테;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5절)

디아코노이스(diakovnoi"하인들에게)는 둘로스(dou'lo"종)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로스는 일반적으로 신분이 낮은 노예를 가리키지만, 디아코노이스가 의미하는 것은 잔치에 와서 친구나 친척을 위하여 일을 돕는 사람들이다. 그 하인들은 잔치에 와서 손님을 접대하며, 잔치를 관리하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R.C.H.Lenski). 포이에사테(poihvsate그대로 하라)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용어를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실행해야 함을 강력한 어조로 표현하려는 마리아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A.T.Robertson).

 

2. 예수님의 말씀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함(6-9a절)

1) 유대인의 정결 예법

(kata; to;n kaqarismo;n tw'n jIoudaivwn 카다 톤 카다리스몬 톤 유다이온;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6절)

휘드리아이(u;drivai항아리)는 휘도르(u}dwr물)에서 유래한 고대어로서 음료수 외에도 빵이나 돈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와 냄비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바로 이 항아리들이 축제 중 손을 씻는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가까이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A.T.Robertson). 여기에서 '놓였는지라'(h|san ... keivmenai에산 케이메아니)가 미완료인지 과거완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완료 수동형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확실하다, 이 여섯 개의 돌항아리들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그 장소의 주변에 놓여 있었는데, 옛 율법 의식의 엄위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새로운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메트레타스(metrhta;"통)는 메트레오(metrevw측량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액체를 측정하기 위한 측량 단위이며, 히브리어 '밧'(bath:약 8과1/2갤론에 해당하는 측량 단위)에 해당된다(R.C.H.Lenski). 따라서 이 혼인 잔치에서 정결 예식을 위해 사용된 물항아리는 약 120갤론이상의 용량이었다(C.K.Barrett). 이렇게 많은 물이 필요한 이유는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의 수가 매우 많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R.C.H.Lenski),그리스도의 선물로 주어지는 풍성한 은혜로 이해하는 것이(W.Hendriksen)더 타당하다.

 

2) 예수님의 말씀에 하인들이 순종함

(Gemivsate ta;" uJdriva" u{dato" ... jAntlhvsate nu'n kai; fevrete tw'/ ajrcitriklivnw/: 게미사테 타스 휘드라이스 휘다토스…안틀레사 테 뉜 카이 페레테 토 알키트리클리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7,8절)

게미사테(Gemivsate채우다)는 게미조(Gemivzw가득하게 하다)의 부정과거 능동태 명령으로서 '가득 채운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기에 휘다토스(u{dato"물을)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찼기 때문에 다른 어떤 물질도 포함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W.Hendriksen). 물이 아구까지 가득하게 채워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해오스 아노(e}w" a]nw아구까지)는 '꼭대기까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A.T.Robertson).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웠다는 것은 안틀레사테( jAntlhvsate떠서)라는 단어가 입증한다. 이 용어는 어떤 일정 크기의 그릇 속에 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R.C.H.Lenski). 페레테(fevrete갖다 주라)는 페로(fevrw가져가다)의 현재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술을 손님들에게 필요한 대로 계속 운반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W.Hendriksen, R.C.H.Lenski).

 

3) 연회장이 물이 변하여 된 포도주의 출처를 알지 못함

(ejgeuvsato oJ ajrcitrivklino" to; u{dwr oi\non gegenhmevnon, kai; oujk h[/dei povqen ejstivn 에규사토 호 알키트리클 리노스 토 휘도르…우크 에데이 포덴 에스틴;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알지 못하되, 9a절)

토 휘도르 오이논 게게네메논(to; u{dwr oi\non gegenhmevnon물로 된 포도주를)은 한글 개역성경과는 달리'포도주가 된 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이노(oi\non포도주)은 정관사가 없는 완료 분사의 형태를 취한 반면에, 휘도르(u{dwr물)는 대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회장이 맛본 그 좋은 포도주는 바로 예수께서 사용하신 그 물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한다(R.C.H.Lenski). 포덴 에스틴(povqen ejstivn어디에서 났는지)은 간접적인 의문의 형태를 취한 현재 직설법으로서, 연회장이 그 기적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현재의 상황 속에서 표현하였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음식의 전문가이며, 잔치의 관리자인 연회장이 모르는 사실을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 하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3.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받으신 영광(9b-12절)

1) 새로운 포도주에 대한 연회장의 소감

(fwnei' to;n numfivon oJ ajrcitrivklino" ... su; tethvrhka" to;n kalo;n oi\non e{w" a[rti 포네이 톤 뉨피온 호 알키트리클리노스…쉬 테테레카스 톤 칼론 오이논 헤오스 아르티; 연회장이 신랑을 볼러…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9b,10절)

메뒤스도신(mequsqw'sin위한)은 부정과거 수동태 주격으로서 '마시게 된다'로 해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한정된 미래의 사실에 대하여 지시하고 있으므로,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이 새 포도주를 다 마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잔치의 일반적 규칙에 대한 연회장의 진술을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R.C.H.Lenski, A.T.Robertson).

엘랏소(ejlavssw낮은 것)는 남성 비교급으로 사용되어 칼론 오이논(kalo;n좋은 포도주)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당시의 관습은 잔치가 시작될 때 좋은 포도주를 대접하고 손님들이 취한 후에 질이 떨어지는 술을 제공했지만 예수님은 그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보여 주셨다. 이러한 상활에 직면하여 연회장이 신랑에게 불평을 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R.C.H.Lensik). 그것보다는 오히려 특산품 포도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W.Hendriksen), 이상근).

 

2) 표적으로 나타난 영광과 제자들의 믿음

(Tauvthn ejpoivhsen ajrch;n tw'n shmeivwn oJ jIhsou'" 타우테…에포이에센 아르켄 톤 세메이온 호 예수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1절)

본 절에서는 타우텐(Tauvthn이)과 아르켄(ajrch;n처음) 사이에 관사가 없다. 따라서 타우텐은 아르켄의 성에 속한 것이므로 투토(tou'to이것)로 읽어야 한다(R.C.H.Lenski). 개역성경은 '이 처음 표적을 행하여'호 번역하였지만, 오히려 '이것은 표적의 처음으로서', 혹은 '표적의 시작으로써 행하신 이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A.T.Robertson, R.C.H.Lenski). 세메이온(shmeivwn표적)은 세마이노(shmeivw)에서 유래한 고어로서 문자적으로 '표적을 보여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C.K.Barrett). 에피스튜산(sjpivsteusan믿으니라)은 직설법 제1부정과거 능동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확신하였다는 면에서 그들의 신앙이 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심

(aujto;" ... kai; ejkei' e[meinan ouj polla;" hJmevra". 아우토스…카이 에케이 에메이난 우 플라스 헤메라스; 예수께서…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12절)

메타 투노(Meta; tou'to그 후에)는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전환했다는 표시로서(C.K.Barrett), 시간적인 면을 암시한다(R.C.H.Lenski). 그러나 이것이 시간적인 간격인지 공간적인 의미의 간격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C.K.Barrett). 분명한 것은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나의 이적을 행하신 그 이후라는 것이다.

카테베(katevbh내려가)는 카타바이노(ka\tabainw내려가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예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간 것을 묘사하는데, 이것이 에메이나(e[meinan계시지)과 같은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의 가족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거주지를 변경하셨고(R.C.H.Lenski), 자신의 공생애를 위해 가족을 두고 그곳을 다시 떠나셨던 것이다(C.K.Barrett).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혼인 잔치에 초대된 예수와 모자라는 포도주(1-5절)

1절의 '사흘되던 날에'라는 언급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제 삼 일은 부활절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적은 부활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제시해 준다(Dodd). '갈릴리 가나'는 요한복음에서 이 기사 외에 두구절(요4:4621:2)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나의 정확한 위치는 부정확하다. 전통적으로 그곳은 나사렛 북동쪽으로 3.5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케프르켄나(Kefrkenna)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나사렛에서 더 가까운 아인카나(Ainkana)라는 견해도 있다(Bernard).

2절의 '그 제자들'은 대개 열두 사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드시 열두 제자를 지적한다고 볼 수는 없고(Bernard). 좀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

3절에서는 '포도주가 모자란지라'고 나와 있다. 포도주는 항상 기쁨의 사건에서 제공되었다. 유대 속담에 '포도주가 없이는 기쁨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Bernard). 유대의 축제에서는 포도주가 항상 제공되었는데,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것은 축제를 망치고 잔치를 주관하는 온 가문이 망신을 당할 일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께 급하게 요청했던 것이다(M.C.Tenney).

4절은 요한복음의 기자에 의해 '표적 자료'에서 삽입된 것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tiv evmoiv kaiv soiv티 에모이 카이 소이)는 적대적 태도인지 혹은 호의적 태도를 표현하는지 모호하다(R.P.Martin). 여기서는 이해하지 못함에 대한 공손한 제의이다, 즉 '내가 그것을 보고자 하나이다' 혹은 '내게 이 일을 맡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Bernard). '내 때가 하였나이다'에서 주님의 때는 신적 주권 행사의 때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절정에 이른다(Schnackenburg).

5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는다. 그녀는 이 기사에서 예수께서 그가 누구신지를 어떤 '표적'을 통해 나타내시길 기대했던 듯하다. 즉 그녀는 주님의 때가 임하였기에 주께서 간섭하신다는 것을 확신한 듯하다(Bernard).

 

2. 물이 포도주가 됨(6-11절)

6절의 '결례'는 유대인의 정결 의식을 뜻한다. 거기 있던 물통은 돌항아리였는데, 결례를 행하는 물을 담는데 알맞았다. 왜냐하면 돌항아리에는 부정한 것을 담지 않았기 때문이다(R.P.Martin). 7절의 '아구까지 채우니'는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이 율법의 제약들과 대조됨을 말한다(요1:16,17,R.P.Martin). 8절의 '연회장'은 손님 가운데서 연회를 주관하도록 선발된 자 혹은 그 직무를 위해 정해진 종을 뜻한다(Bernard). 9절에서 기적이 발생한 사실을 몰랐던 연회장은 어디서 좋은 포도주가 나왔는지 알지 못했으나 종들은 기적의 기원을 알았다(M.C.Tenney).

10절에서 연회장이 신랑에게 언급한 말은 격언이나 규칙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은 역설적 혹은 영민한 이 구절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논평이었다. 기자는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의 완전함을 증거하고 있다(R.P.Martin). 11절에서 포도주의 기적은 예수의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사나 징표가 아니라 표적이었다. 이것에 의해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표적들은 예수의 영광을 증거하는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Bernard). '제자들이…믿으니라'는 예수께서 가나에서 행하신 기적의 결과를 보여 준다. 예수께서 여기서 행하신 것은 창조적 능력이었다(Bernard,Martin).

 

3. 가버나움에 가신 예수(12절)

12절의 '그 후에'는 빈번하게 등장하며, 한기사에서 다른 기사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가나가 고지에 위치하므로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을 것이다. 가버나움은 공관복음 전승에 따라 예수의 사역이 잠깐 지체되는 곳으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본 절은 마4:13눅4:31의 전승을 따라 예수께서 사역의 일정 기간에 가버나움에 머물렀음을 인정한다(C.H.Dodd).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가나의 혼인 잔치와 포도주(1-10절)

1절에 나타나는 '혼인'은 유대 가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즐거운 행사 중의 하나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결혼식들은 미리 잘 준비되었기 때문에, 나사렛 북동 약 4마일에위치한 갈릴리 가나의 작은 마을(F.F.Bruce)은 오랫동안 이 예식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J.W.Stallings).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이 초대되었고, 이들 중에는 나사랫 예수님의 모친도 포함되어 있었다(W.E.Hull, F.F.Bruce).

2절에서는 예수께서도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유대에서 돌아온 후이다(B.F.Westcott).

3절의 '포도주가 모자란지라'는 혼인식의 흥이 깨어질 위험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당시 유대교의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F.F.Bruce).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녀 자신의 방법으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보이도록 촉구한다(J.H.Bernard. L.Morris).

4절에서 '여자여'라고 말한 것은 그분이 냉담하고 무뚝뚝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말은 요19:26처럼 분명히 애정과 존경이 담긴 말이었다(F.F.Bruce).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는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에서 들려 올리는 것과 맞물려야 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W.E.Hull, F.F.Bruce).

5절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 문제를 그에게 맡긴다. 그녀는 그의 아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옳은 일을 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F.F.Bruce). 하인들에게 그녀가 한 말은 아들에 대한 그녀의 믿음과 복종을 반영하는 것(J.W.Stallings)이며, 그녀가 그 연회와 관계가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F.F.Bruce).

7절에서 여섯 개의 돌항아리를 아구까지 채운 것은 아마도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의도로 된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정결 의식은 두 팔을 온전히 물에 담그기 때문에(막7:3,4에 의미가 분명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관습적이 아니다(W.E.Hull).

8절에서 7절의 항아리에 채운 물은 돌단지에서라기보다는 우물에서 떠온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① 본래 항아리에 있는 물은 아마도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사용했으므로 더러워졌을 것이고, ② 동사 '뜨다'(ajntlevw안틀레오)는 일반적으로 우물에서 떠옴을 의하고 요한복음에서도 이 뜻으로 사용되었다(요4:7,15). 그러나 W.E.Hull, B.F,Westcott, F.F.Bruce, C.F.Barrett은 이 의견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9절에서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 지켜 볼 때 가르쳐진 배경을 통해 보여진다. 연회장이 그것을 맛보고 진짜 포도주가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즉시 신랑을 부른다. 연회장도 신랑도 그 일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 이적 자체는 무대 밖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났다. 종들은 그들이 그 물을 어디에서 떠왔는지 알고 있었다.

10절은 혼인식에서 분위기가 바뀐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변화였음을 말한다. 그들은 가나에서 펼쳐진 이 새로운 기쁨은 예수님 자신의 영광(신적인 중요성)의 표적 내지는 지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행동에서 제자들은 메시야 시대의 종말론적 즐거움이 최초의 결정적이며 새로운 시작으로 나타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다(W.E,Hull).

 

2. 영광을 보고 믿는 제자들(11절)

11절의 기사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데 사용된 방법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의 변화의 효과에만 관심을 기울인다(C.H.Dodd). 이 기사로부터 드러나는 세 가지 주제는 신학적 설명과 합치된다. ① 포도주는 육체적,영적 즐거움과 결합되었다. ② 즐거움으로써 포도주에 대한 강조는 풍성함의 주제와 연결되었다. ③ 풍성한 즐거움에 관한 이러한 강조에 비추어 볼 때, 포도주는 고난과 죽음과도 연결되었다(W.E.Hull).

 

3. 가버나움으로 가심(12절)

12절의 '가버나움'은 나훔의 동네를 의미한다. 그곳은 갈리리 호수 북서 해변에 위치한다. 가나의 북동북 약16마일지점에 있다(F.F.Bruce).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처음 행하신 기적-물질의 변화

 

창조주만이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 있다. 과학은 두 개 이상의 물질로 제3의 물질을 합성할 수 있으나 그것은 본래적 물질이 아닌 합성물일 뿐이다. 물이 순식간에 그것도 어느 순간이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사이에 포도주로 변해 버렸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에만 기록된 예수그리스도의 최초의 기적 행하심이다.

 

1.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요한 복음이 증언하는 기독론에 의하면 그는 태초부터 계셨고, 그가 곧 천지를 지으신 '가라사다'의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1:1-3).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서 생명체의 역사를 되돌리셨고(요11:1-44), 물 위를 걸으심으로 지구 중력에 의한 만유 인력을 차단시켰다(요6:16-21).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을 입으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밝히신 것은 앞선 세 복음서와 구별되는 제4복음서로서의 특징이다. 처음 행하신 기적이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창조주로서의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실 때에 창조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하인들(5절)이 다만 순종했을 때 창조에 버금가는 변성(물질의 성상이 바뀌어짐)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선포하시든지 결단하시든지 그대로 성취되는 것은 그가 만물 위에 계신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2. 아직 이르지 못한 예수그리스도의 때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로서 그녀에게 순종할 때는 이미 지났다(눅2:49). 왜냐하면 세상 것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회개케 할 복음 사역에 돌입하셨기 때문이다(막1:5).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나 육신을 입고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신 후 어렸을 때는 육신적 부모께 순종하며 자라셨다(눅2:51). 이후 예수님은 성년이 되시어 사역의 때가 되매 하나님 사역에 전념하셨다. 그러므로 마리아라 할지라도 예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막3:35). 마리아가 예수그리스도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였던 것은(5절) 예수에 대해 순종하였고 믿음에 바탕 위에서 소망을 가졌다는 증거이며, 그녀는 기적의 모태가 되었다.

 

 

결혼식 때 정결을 위한 의식(2:1-12)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 사회에 있어서 결혼은 가장 신성한 제도이며, 누구나 다 성년이 되면 이 제도에 따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신성하고 거룩한 결혼을 하기 위해 일정한 형태의 정결 의식을 행해야만 했다.

 

동양/중국 : 중국 사회의 고사에 의하면 결혼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즉「고사고(古史考)」에 의하면 "복희가 남녀의 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사슴 가죽을 사용하는 결혼 제도를 만들었다."라는 설과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여와는 결혼 중매인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결혼을 제도화하였다."라는 설이 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의 목적은 "사당에서 조상들을 받들기 위함이요, 후손을 영원히 존속시키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독이지(獨異志)」에 보면, "우주가 처음 열렸을 때 곤륜산에는 오누이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부부가 되기를 원하여 신에게 물었다. 하늘이시여 만약 우리 오누이로 하여금 부부가 되게 하신다면 연기가 합하도록 하시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연기가 흩어지게 하십시오 하니 연기가 곧 합쳤다 그 여동생이 곧 다가오니 오빠는 이에 풀을 엮어 부채를 만들어 그들 얼굴을 가렸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중국의 「예기(禮記)」에 "혼인식 날에는 신부가 목욕을 하고, 결혼 예복을 갈아 입고, 용을 수놓은 붉은 외투를 걸치는 동안 악사들은 음강을 연주하며 축하한다"고 씌여 있다.

 

한국 :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결혼 전에 행하는 정결 의식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고구려의 혼인 풍습 중에 남자가 여자 집 대문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세 번 정도 대고 혼인할 것을 요청하면, 여자의 아버지는 그 남자를 보고 판단하여 마음에 들면 집 뒷칸에 서옥이란 조그마한 집을 지어 그곳에 살도록 한다, 첫날밤 신혼 방에는 돈을 함께 넣어 주는데, 이는 잡귀를 물리치는 효과와 아울러 이들 부부의 앞날에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그리고 혼인식 때는 남자 집에서 고기와 술을 여자 집으로 보내는데 재물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재물을 받고 딸을 보내면 마치 종을 파는 것과 같이 여겼기 때문이다.

인도 : 인도에서 결혼에 관한 예를 보면 결혼식날에 신랑이 먼저 신부 집으로 가는데, 이때 긴 축하 행렬이 뒤따른다. 방으로 인도된 신랑은 주홍색의 주단 방석에 앉는다. 그리고 진홍색 명주옷으로 갈아 입은 신랑은 높은 자리로 옮겨 앉고, 신부는 좌측에 앉게 된다. 결혼은 "제단에 올라가 있던 승려가 신랑의 손가락을 길상초로 감고 갠지스 강의 성수를 조금 떠서 신랑 손바닥에 붓는다. 신랑이 성수가 든 그룻 위에 올리고 이때 승려가 화환으로 신랑 신부의 손을 함께 묶는다. 의식이 끝나면 신부 아버지가 신랑을 향해 '너는 이제 자네에게 내 딸을 주겠네"라고 하며, 신랑은 '저는 지금 따님을 제 신부로 확실히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장인은 두 남녀의 손을 함께 잡고 성수 몇 방울을 신랑과 신부의 머리 위에 붓는다. 이로써 혼인식을 마치게 된다.

 

서양/희랍 : 당시 희랍 지역은 약혼을 한 다음에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신부는 결혼을 위해 정결하게 목욕하고 특별히 마련된 혼인 예복을 입었다. 그리고 결혼식을 할 때 신랑과 신부의 머리에는 꽃으로 장식된 화관을 썼으며,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갈 때 횃불 행진을 했는데, 이는 횃불을 밝힘으로써 마귀가 물러가고 축복이 임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공식적인 결혼을 마치면 신부는 자신의 어머니의 팔에서 떨어져 새로운 집으로 신랑측 식구들의 호의를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성경적 접근 : 결혼 제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제도이다(창2:18). 따라서 결혼은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의미하며, 후손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순결을 위해서 결혼하라고 인간에게 명하고 있다(고전7:1-7). 따라서 하나님은 정결히 못한 결혼은 금하셨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그리스도 없는 세상 즐거움(2:1-12)

 

그리스도께서 참석하여 첫 이적을 베풀어 주신 가나의 혼인 잔치는 이 세상의 즐거움과 행복의 단면을 생각하게 해준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이 세상에도 일시적인 행복과 즐거움의 내용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도, 또 참되지도 못한 즐거움이다.

 

1. 참된 기쁨과 요소가 결핍되었음

성경은 술을 맹목적으로 악한 것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104:15)라고 했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혼인 잔치와 같은 시기에는 포도주를 적당히 마시며 축하해 주고 즐거워하도록 용인하셨다(전10:19). 그러므로 포도주는 즐거움과 기쁨의 상징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인생의 행복과 즐거움에 참된 기쁨의 요소가 결핍되어 있음을 의미해 주는 것이다. 죄와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치 못한 인생들에게는 어떤 즐거움도, 행복도 영원한 기쁨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결핍된 인생에게는 참된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2. 기만적인 속성이 있음

세상의 행복과 즐거움에는 기만적인 속성이 있다, 첫째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점점 고갈되어 간다. 건강, 부, 명예로 인한 행복과 즐거움은 영원할 수가 없다. 시간과 환경이 바뀌면서 고갈되어 간다, 마치 잔칫집의 포도주가 점점 고갈되어 가다가 바닥이 나듯,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된 인생의 행복은 고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좋은 포도주를 내고 위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10절)이라는 연회장의 고백은 인생 행복의 기만성에 대한 넋두리라고 볼 수 있다. 우정도, 연정도, 인기도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질된다. 그와 같이 세상적인 것을 삶의 행복의 근거로 삼은 사람들로 하여금 허망함과 배신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사단이 주는 세상의 행복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풍요를 누리는 생활의 원리(2:1-12)

 

주님께서 첫 이적을 베푸신 가나의 혼인 잔치는 주님의 은총으로 인해 풍요로움이 넘치는 즐거운 잔치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 안에서 풍요를 누리는 삶의 원리를 교훈해 준다.

 

1. 이웃에게 베푸는 생활을 해야 함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은 '빈 포도주 항아리'가 있었기에 맛볼 수가 있었음을 기억하자. 혼인 잔치의 주인이 그 손님과 이웃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도주를 아낌없이 베푼 결과 포도주가 떨어졌으며, 그로 인해 주께서 기적을 베푸시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아끼고 저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도들은 아끼고 저축한 것을 이웃을 위해 베품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더 풍성하게 얻어 누리게 되는 것이다.

 

2. 기도하는 생활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가 포도주가 없다 하니'(3절)라고 했듯 기적은 마리아의 간원에 의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성도의 풍요로운 생활은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의 공급자이신 주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얻어야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했다. 이 언약을 부여잡고 성도의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며 사는 성도가 참된 풍요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3. 주의 뜻대로 노력하는 생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7절), 기적은 인간의 모든 수고 뒤에 일어났다.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으로 힘쓴 결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축복을 얻었던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축복과 기적의 참된 의미이다. 진리에 순종하고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힘쓰는 성도만이 진정 주님의 축복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요2:13-25)

 

◈ 원문강해 ◈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예표된 성전 회복

 

유월절에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예배의 질서를 세우셨고, 이 사건으로 자신의 메시야적 권위를 성전에 비유하여 증거하셨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심(13-17절)

1) 성전의 오염을 목격하신 예수

(Kai; ejggu;" h\n to; pavsca tw'n jIoudaivwn, kai; eu|ren ejn tw'/ iJerw'/ tou;" 카이 엥귀스 엔 토 파스카 톤 유다이온…카이 휴렌 엔 토 히에로 투스 플룬타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성전 안에서…파는 사람들과…보시고, 13,14절)

엥귀스 엔(ejggu;" h\n가까운지라)은 엥귀스(ejggu;")가 부사어로, '가까이'이며, 엔(h\n)이 에이미(eijmiv이다, 되다)의 직설법 미완료과거로서, 문자적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마치 예수께서 유월절에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네베(ajnevbh올라가셨더니)는 아나바이노(abaivnw올가가다)의 부정과거형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동사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을 표현하는 고정된 형식을 가진 전문 용어이기도 하다(C.K.Barrett). 플룬타스(pwlou'nta"파는)는 폴레오(pwlevw팔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이 동사는 정관사 투스(tou;")와 함께 사용되어 독립적 용법으로 '파는 사람들'로 번역되었다.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 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일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2) 예수께서 모든 상인들과 짐승들을 쫓아냄

(poihvsa" fragevllion ejk scoinivwn ... mh; poiei'te to;n oi\kon tou' patrov" mou oi\kon ejmporivou. 포이에사스 프라겔리온 에크 스코이니온…메 포이에이테 톤 오이콘 투 파트로스 무 오이콘 엠포리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5,16절)

프라겔리온(fragevllion채찍)은 어원적으로 라틴어 플라겔룸(Flagellum;채찍)에서 유래하였으며, 스쿠티카(Scutica;매)보다 더 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소를 모든 채찍을 가리키기도 하였는데(C.K.Barrett), 예수께서는 이 채찍으로 모든 짐승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다. 본 절에서 사용된 엑세발렌(ejxevbalen내어 쫓으시고)은 에크발로(bavllw내어 쫓다)의 제2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강한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예수께서 짐승들을 때렸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채찍을 휘두르신 일을 결과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A.T.Robertson). 톤 오이콘 투 파트로스 무(to;n oi\kon tou' patrov" mou내 아버지의 집)는 오이콘 엠포리우(oi\kon ejmporivou장사하는 집)와 대조를 이루면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과 메시야직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R.C.H.Lenski,A.T.Robertson).

 

3) 제자들이 성경의 예언을 기억함

( jEmnhvsqhsan oiJ maqhtai; aujtou' o{ti gegrammevnon ejstivn, JO zh'lo" tou' oi[kou sou katafavgetaiv me. 엠네스테산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호 젤로스 투 오이쿠쉬 카타파게타이 메; 제자들이…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7절)

엠네스데산( jEmnhvsqhsan기억하더라)은 밈네스코(mimnhvskw기억하다)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문자적으로는 '기억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A.T.Robertson). 이 용어는 예수의 행동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침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이 성경을 기억한 것이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왔음을 묘사하고 있다. 호티 게그람메논 에스틴(o{ti gegrammevnon ejstivn성경 말씀에)은 그라포(gravfw쓰다)의 현재 완료 분사 수동형으로서 본 절에서는 간접 화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문자적으로는 '…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기억한 것은 바로 현재 기록되어져 있는 말씀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카타파게타니(katafavgetaiv삼키리라)는 카테스디오(katesfivw삼키다)의 직설법 미래 중간태로서 '먹어 치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A.T.Robertson). 이 용어가 70인역(LXX)에서는 카네파겐(katevfagen삼켰다)이라는 과거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미래로 변화된 이유가 구약의 시편 69편에서 언급한 대로 다윗의 열심히 오히려 회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의 행동이 그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제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W.Hendriksen, Lenski).

 

2. 포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참성전을 계시하심(18-2절)

1) 예수의 메시야직 권위에 대한 증명 요구

(ajpekrivqhsan ou\n oiJ jIoudai'oi ... Tiv shmei'on deiknuvei" hJmi'n, o{ti tau'ta poiei'" 아페크리데산 운 호이 유다이오이…티 세메이온 데이크뉘에이스 헤민 호티 타우타 포이에이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8절)

아페크리데산(ajpekrivqhsan대답하여)은 아포크리노마이(ajpokirivwmai대답하다)의 부정과거 현재 능동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대답했다'는 뜻의 완곡어로 볼 수 있다. 이 동사는 주로 어떤 반대와 비평에 대한 변론이나 또는 남의 마음에 어떤 내용을 상기시키려고 할때 주로 사용되었는데(Vincent).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를 대적하던 유대인들은 또한 예수에게 표적을 요구했는데, 여기에서 세메이온(shmei'on표적)은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예수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가라키며(F.Reinecker), 요한은 성전 청결 그 자체가 바로 하나의 표적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W.Hendriksen). 헤민(hJmi'n우리에게)은 에고(ejgwv나)의 복수여격으로서 유대인들 자신을 가리키는데, 특히 성전을 관리하던 산헤드린 당국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고, 상대적으로 예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R.C.H.Lenski).

 

2) 예수와 유대인의 성전 이해

(Luvsate to;n nao;n tou'ton kai; ejn trisi;n hJmevrai" ejgerw' aujtovn. 뤼시테 톤 나온 투톤… 쉬 엔 트리신 헤메라이스 에게레이스 아우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19,20절)

뤼사테(Luvsate헐라)는 귀오(luvw헐다)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조건절을 나타내기 위한 명령형이다. 따라서 관련된 본문의 뜻은 '만일 너희가 허물…내가 세울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C.K.Barrett). 예수께서 이렇게 조건적으로 명령하신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실 사건을 십자가에서 그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실 사건을 미리 예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진 것이라고 말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했다. 여기에서 오이코도메데(oijkodomhvqh지었거늘)은 오이코도메오(oijkodomhvw짓다)의 부정과거 수동형으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이 동사의 문자적 의미는 '지었었다'라는 뜻이며, 계속적 부정과거 형태로서, 성전 공사 과정의 모든 시간의 길이를 과거에 있었던 어떤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C.H.Lenski). 쉬(su;네가)는 이 구절에서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조소를 나타낸다. 이것은 18절의 헤민(hJmi'n우리에게)과 대조를 이루면서 아무런 지위도 갖추지 못한 예수에 대한 조롱의 표현이다(A.T.Robertson).

 

3) 예수의 성전 재건의 의미

(peri; tou' naou' tou' swvmato" aujtou'. ... ejmnhvsqhsan oiJ maqhtai; aujtou' o{ti tou'to e[legen 페리 투 나우 투 소마토스 아우투…엠네스데산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호티 투토 엘레겐;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21,22절)

에케이노스 데 엘레겐(ejkei'no" de; e\legen그러나 말씀하신 것이라)은 에케이노스(3)가 지시대명사로서 '저'를 뜻하며, 데(ejkei'o")가 역접접속사, 엘게겐(e[legen)의 레고(levgw말하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강조적 용법이며, 미완료 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므로 '말씀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22절의 에이펜(ei\pen하신 말씀)과 대조의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R.C.H.Lenski), 예수께서 말씀하신 당시에 요한이 이해한 것이 아닌,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의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에게르데(hjgevrqh살아나신)는 에게이로(ejgeivrw일으키다)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예수의 부활이 과거에 일어난 실제적 사건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 용어는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이 그 하신 말씀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A.T.Robertson).

 

3. 사람의 증거가 필요치 않은 예수의 표적(23-25절)

1) 많은 사람이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를 믿음

(polloi; ejpivsteusan eij" to; o[noma aujtou', qewrou'nte" aujtou' ta; shmei'a a} ejpoivei 폴로이 에피스튜산 에이스 토 오노마 아우투 데오륜 테스 아우투 타 세메이아 하 에포이에이;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3절)

하 에포이에이(a} ejpoivei그 행하시는)는 포이에오(poivw행하다)의 미완료 과거시제로서, '그가 행하고 계셨던 것'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르다. 곧 예수의 표적이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이 그 표적을 본 것이다. 여기에서 데오룬테스(qewrou'nte"보고)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인과적 용법으로 사용되어 예수의 표적을 '보는 것으로써'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은 것은 순수한 신앙의 차원이라기보다 표적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한 불완전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2)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시는 예수

(aujto;" de; j jIhsou'" oujk ejpivsteuen aujto;n aujtoi'" 아우토스 데 예수스 우크 에피스튜엔 아우톤 아우토이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나, 24절)

아우토스 데 예수스(aujto;" de; j jIhsou'"예수는)는 강조 용법이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으로 번역되어야 한다(A.T.Robertson). 이는 주어인 예수님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피스튜엔(ejpivsteuen의탁치)은 피스튜오(pisteuvw믿다)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23절은 '믿었으나'라는 과거형을 사용하여 본 절과 시제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두 절을 종합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으나 예수는 자신을 그들에게 내맡기지 않고 있었다'로 볼 수 있으며, 이 미완료형을 통하여 예수께서 군중들의 신앙상태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C.H.Lenski).

디아 토 아우톤 기노스케인(dia; to; aujto;n ginwvskein친히 아심이요)에서 디아…때문에)가 인과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알기 때문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예수는 이미 군중들의 불완전한 신앙을 알고 있었음을 요한은 암시하고 있다.

 

3) 사람의 증거가 필요없는 예수의 권위

(o{ti ouj creivan ei\cen i{na ti" marturhvsh/ peri; tou' ajnqrwvpou: 호티 우 크레이안 에이켄 히나 티스 마르퀴레세 페리 투 안드로푸;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라, 25절)

아우토스 가르 에기노스켄(aujto;" ga;r ejgivnwsken친히…아시므로)은 강조 용법과 함께 미완료 과거 능동태가 사용되어 문자적으로 '그분 자신이 계속하여 알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지식은 보통 사람들과 같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튀레세(marturhvsh/증거도)는 마르퉤레오(marturhvw증거하다)의 가정법 제1부정과거 능동태를 취하였고, 부정대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어떤 증거함들조차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투 안드로푸(tou' ajnqrwvpou:사람에)는 총칭 관사가 사용되었으므로, 그 의미가 예수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기보다는(R.C.H.Lenski). '인류에 대하여'라는 의미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A.T.Robertson). 따라서 예수는 그 자신이 메시야적 권위를 갖고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예수의 성전 정화(13-17절)

13절의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요한이 기록한 것은 교회가 더 이상 이 명절을 지키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14절 '성전 안에서'(ejn tw'/ iJerw'/엔 토 히에로)란 말의 뜻은 신성한 영역에서란 뜻으로 '성전 그 자체'의 의미와는 구별되며 성전의 '바깥뜰' 혹은 '이방인의 뜰'을 의미한다.

15절의 '채찍(fragellion프라겔리온)은 '매, 채찍'을 의미한다. 이것은 소를 몰 때 사용되는 것이다(Barrett). 이 채찍은 공관복음에서는 언급이 없으며, 요한복음의 세부적 기록은 증인들의 회상에서 비롯된 것이다(Bernard).

16절의 '내 아버지의 집'(ton oi|kon ton' patrv"톤 오이콘 투 파트로스)은 이 땅의 성전을 뜻한다. 성전은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된다. 예수께서는 이 표현을 사용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증명 하신다(Bernard). 성전에서 환전하고 장사하는 행위는 신성모독 행위였다(Tenney).

17절에서 예수님의 성전 청결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특징지워진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심은 하나님의 진정한 경배를 위해 모든 장애들을 제거하는 행위이다(E.F.Scott). 즉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의 길을 열어 보이셨다는 것이다(Martin).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심에 대하여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를 보았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나타내시는 성전에 대한 불같은 열심히 마침내 그를 불태워 십자가에서 달리실 것을 예견하였으므로, 시편 기자가 과거 완료시제를 사용해 '나를 삼켰다'(katafavgetaivme카테파게메)한 것을 미래 시제로 대체시켜 '나를 삼키리라'(katafgetaivme카타파게타이 메)로 사용하였다(Bernard).

 

2.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표적 요규(18-21절)

마가복음 병행구에서는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라고 되어 있다(막11:28). 요한은 마가복음의 구절을 고려했음이 분명하다(Barrett). 유대인 질문자들의 예수님의 폭발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표적에 대한 요구는 선지자들을 시험하는 유대인의 방법과 일치한다(Martin). 유대인의 이런 요규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반영한다(Tenney).

19절의 '너희가 헐라'에서 '헐라'(gnvsate뤼사테)는 조건적 명령법이다. '성전(naov"나오스)은' '중심된 성전'을 뜻한다.(Barret). '내가 일으키리라'는 비유적 표현이다. '사흘동안에'(evn trsin hJmevpai"엔 트리신 헤메라이스)의 뜻은 '사흘 안에'를 뜻한다(Haenchen).

20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을 가리켜 말한다고 여겼다(Tenney).

21절에서 예수께서는 성전인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육체'(sw'ma소마)는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 죽은 몸을 뜻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 함축된 다른 뜻은 이 예수의 몸이 기독교 신자들의 영적인 집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집합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12:27,Bernard).

 

3. 제자들이 예수를 믿음(22절)

22절에서 제자들이 부활후에 믿었던 '성경'은 아마도 예수의 죽으심과 성전 정화 기사를 연결시켜 주는 17절에 인용된 시69:9과 19절의 성전과 관련된 그의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일 것이다(Martin). 그러나 이 해석이 무리하다고 보는 자로 있다. 왜냐하면 '성경'(thgah테 그라페)에 대한 병행 구절인 요20:9을 보면 제자들은 부활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Barrett).

 

4. 예루살렘으로의 여행(23-25절)

23절에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믿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오히려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Tenney).

24절의 '예수는 …아니하셨으니'('Ihson'"on;k e;piotenen an;ton an;toi"예수스 우크 에피스튜엔 아우톤 아우토이스)는 '그는 스스로 그들을 신뢰치 않았다'는 뜻으로 표적으로 말미암아 생긴 신앙이 안전치 못함을 뜻하고 있다(요4:488:14,15)

'친히 모든 사람들 아심이요'(삼상16:7)는 예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결코 겉모습에 따라 사람을 판단치 않으신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의 신적 지식에 대해 단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요1:47,48에서도 나다나엘에 대한 그의 신적 지식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Barett).

25절에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증언할 필요는 없었다. 인간이 소유치 못한 신적인 지식을 그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15:33에 일곱 가지의 신적 지식이 인간에게 숨기워져 있다. 사망의 날, 위로의 날, 심판의 깊이, 상급, 다윗 왕국의 회복이다. 이것은 인간의 유한함을 말해 주고 있다(Martin).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예수의 성전 정화 사역(13-18절)

14절의 '돈 바꾸는 사람들'은 수수료를 받고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가이사의 화상이 주조된 로마 동전을 반 세겔의 성전세로 바칠 수 있는 동전으로 환전해 주었다(W.E.Hull, L.Morris, F.F.Bruce).

15절의 예수님이 당신의 손에 채찍을 갖고 있는 모습은 복음서에 나오는 가장 화나 있는 모습 중의 하나이다. 비평가들은 예수님이 화를 낸 행동은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반증의 하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될 수 있다. 노끈으로 만든 채찍은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잔인한 가죽 채찍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자들은 막대기나 무기등을 성전 지역 안으로 가져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채찍은 그 지역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 서둘러서 엮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손에 채찍을 가진 것은 정복이 아니라, 청결을 위해서 갖고 있는 것이었다.

16절에서 이 기사를 연결하는 요한의 전체적 초점은 예수님의 행동은 메시야로서 행했다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데 있다(J.W.Stallings). 17절의 '삼키리라'는 안에서의 거룩한 열심의 강렬함뿐만 아니라 그러한 열심히 밖에서(시69편)촉발될 수 있는 적의를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파괴하다'(destroy)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NEB).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말3:1벧전4:17)으로서 성전을 채찍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는 (19a절) 살아 있는 성전으로서 자신이 기꺼이 채찍을 받고 파괴되었다(W.E.Hull).

18절에서 유대인들은 시69편의성경적 조망이 없으므로, 그들은 성전 청결을 이해하는 데 너무 난처해서 고압적인 행동을 증명할 표적을 요구했다(W.E.Hull).

 

2. 성전되신 몸(19-22절)

19절에서 예수님은 표적의 요구에 대하여 그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수수께끼 같은 예언으로 대답한다. 예수께서 성전이라는 말을 사용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거하실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그의 몸을 말하는 것이다(J.W.Stallings).

20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려진 그의 부활에 대한 언급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J.W.Stallings). 요세푸스(Josephus)의 의하면 헤롯대왕은 B.C.20, 19년에 국가적 예배 중심지의 웅대한 확장을 시작했다(Josephus). 46년이라는 말은 이때가 A.D. 26,27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때는 건축의 주요 부분이 이미 완성되었다(W.E.Hull, L.Morries, J.W.Stallings). 이것과 연관하여 요2:14,15에서 언급된 성전(iJerovn히에론)과 19,20절에서 언급되는 성전(naov"나오스)은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건물과 마당'을 의미하고, 후자는 '성소' 혹은 '본래의 성전'을 의미한다. 그래서 히에론보다는 오히려 나오스가 하나님의 처소로 여겨졌다(F.F.Bruce). 21절에서 유대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자기 몸을 가리킨 것이다. 유대인 대적자들은 그 몸을 파괴했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땅위에 거하는(요1:14) 참된 성전을 파괴한 것이다(W.E.Hull). 22절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세 가지 자료에서 나온 것을 혼합된 통찰력 위에 세운 것이다. ①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가 육체가운데 계실 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였다. ② 그들은 구약을 찾아보았고 이런 변형을 예비했던(사2:2-466:1-4;렘7:1-15겔40-48;암5:21-25) 성경을 믿었다. ③ 그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성령이 주신 해석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요14:16,17,26;15:26;16:13,14, W.E.Hull).

 

3.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심(23-25절)

23절 이하부터는 성전 정화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로 바뀌는 중간 역할을 한다(J.W.Stallings, F.F.Bruce). 많은 사람들이 믿는 믿음의 종류는 가나에서 제자들이 보인 참된 믿음과 예루살렘에서 성전 당국자들 가운데서 만난 완전하지 못한 믿음 사이의 어디엔가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한복음은 믿음의 다양한 수준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있다(W.E.Hull).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겸양의 인격적 헌신이나 혹은 예수님을 주로서 실제적으로 알아보았다는 의미에서 신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F.F.Bruce, J.W.Stallings).

24절의 '아심이요'는 그들의 믿음이 매우 피상적임을 알고서 그는 그들을 그의 제자들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은 것이다. 예수님은 이적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괴롭힘을 받는다(J.W.Stallings). 25절의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는 것은 성육신하신 말씀이 인간성의 비밀들과 복잡함을 꿰뚫어 이해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내면적 사고의 지시어로서 언급된 말들과 느낌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숨겨진 것을 꿰뚫는 통찰력에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F.F.Bruce). 이런 것은 이후의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들에서 나타난다(J.W.Stallings).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두 차례 성전정화 행사

 

공관복음에 기록된 성전 정화 사건은 모두 한 가지 사건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전, 곧 고난 주간의 월요일에 예루살렘에서 입성했을 때 일어난 나중의 것임을 알 수 있다(마21:12,17막11:15-18눅19:45,46). 그러나 요한복음의 본 문단에 기록된 성전 청결 사건은 공생애가 시작된 초기에 발생된 먼저의 것으로 볼 때, 상호간 비교해 봐야 할 것이다.

 

1. 먼저와 나중의 사건 비교

첫 번째 성전 정화 행위는 기사(본문단)에는 소와 양,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으나 두 번째 행위 시에는 매매하는 모든 자,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 장사하는 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또 첫 번째 사건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채찍질이나 내어 쫓으심이나 쏟으시거나 엎으시는 등 폭력을 행하지 않으셨으나 두 번째 사건에는 차별을 두지 아니하셨다. 첫 번째 사건은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이르신 내용이다. 구약 율법에서 성전은 출애굽 이후 장막 성전 이래(출25:8,9)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처로 존재해 왔다. 이곳은 거룩한 곳으로 속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장사 유익을 위한 경제 활동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에 예수님은 진노하신 것이다. 두 번째 사건 때 기도하는 집으로 강도의 굴혈로 만드셨다는 더욱 강화된 책망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오염 상태는 약화되었고, 청결의지는 강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두 사건의 배경 비교

공관복음서의 성전 정화 사건은 호산나 영광의 입성 이후 산헤드린 재판에 앞서 무화과 나무의 비유와 관련하여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종말론적으로 나타내신 돌출 행위였다. 성전 정화의 의미 있는 책망을 두 번째 또 당하셨다는 점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수치심을 주었고, 예수에 대한 적개심을 고양시켰을 것이다(마1:8). 제4복음서에는 성전 정화의 권세가 어디서 온 것인지 그 표적을 청구하는 도전을 하게 만들었다.

한편 제자들은 시편 기록과 예수의 과격함을 보고서 우려하였다(17절;시69:9). 예수는 사람들에게서나 환경 속에서 아무 증거 없이 하나님을 의탁하였다(23-25절).

 

 

농업 사회에서의 소의 가칭(2:13-25)

◈ 세계배경 문화사 ◈

 

농경에 소가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는 농업 혁명기라고 할 수 있는 신석기 시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소는 농경 사회에서 인간들에게 소중한 존재가 됨과 아울러 일부에서는 종교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소는 인간들의 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종교적 희생 제물로도 사용되었다.

 

동양/중국 : 중국은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한 민족이다. 따라서 농업에 소를 본격적으로 이용한 시기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소는 농경뿐만 아니라 전쟁에도 사용되었다 「풍속통의(風俗通義)」의 '일문(佚文)'편을 보면, "한의 건무 초기에 전쟁이 심했는데 소도 소실되어 농업이 자못 피폐하여 쌀 한 석이 만금(萬金)이나 되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는 당시 중국의 농업 사회에서 소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소는 농경 사회에서 농사의 점을 치는 데도 사용되었다. 즉 "소가 황색일 때 사람들은 금년엔 소출이 많고 수확이 클 것으로 기대했으며, 소가 붉은 색이면 화재와 재난이 빈번할 것이고, 흰색이면 상사가 많은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꼬리가 들려 있느냐 처져 있느냐에 따라 봄이 빨리 올 수도 더디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소가 드러 누워 있어도 봄이 늦을 것을 예고하였다"라고 중국인들은 믿었다.

 

한국 : 한국에서도 소는 농업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는 귀한 짐승이므로 일반 서민들이 소를 소유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따라서 농사를 지을 때도 3,4호가 한 단위가 되어 농경(農耕)을 하였는데 이를 '소겨리'라고 칭하였다. 이런 소겨리의 풍습은 함경도 일대에서 널리 불리었던 '농부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농부는 일생에 한가한 날이 없고 봄에 갈고 가을에 거두는 것은 해마다 있는 일이다. 남쪽 이웃에서는 어젯밤에 소겨리를 묶더니"이는 농민들의 자발적인 공동체로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본기(百濟本記)'편 온조왕(溫祚王) 25년 (A.D.7)조를 보면, "2월에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우물의 물이 넘쳐 나온 것은 대왕께서 번창할 징조요, 소의 머리가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징조입니다"라고 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소를 신성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책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보면 대무신왕 15년(A.D.32)에 대신인 구도(仇都), 일구(逸苟), 분구(焚求) 세명을 추방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탐욕으로 남의 처첩과 소, 말, 재화 등을 탈취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소의 소유가 부의 척도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동/팔레스틴 : 이집트에서 소는 풍년을 상징하는 농경 문화의 여신으로 믿어 신성시함과 아울러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도살은 금지법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들 여신에게 제사지낼 때는 도살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특히 이집트에서의 여신 이시스는 게브라라는 대지신(大地神)과 천공(天空)의 여신인 누트의 자식으로 태어난 신이다. 그는 오실리스라는 호르스를 온갖 역경 속에서도 잘 양육하여 아내와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런 이시스 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로서 소를 숭배했다. 이시스를 위한 제사에는 전국의 소 중에서 '아피스'라고 불리는 한 마리의 소를 선발하여 여신의 신전에서 일정 기간 사육되다가 제사 때 희생 제물로 바쳤다. 소가 신전에서 사육되는 기간 동안 소는 온갖 호화스러운 대접을 받음과 동시에 인간들은 이 소를 신성시하며 숭배하였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는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음식과 제물로 사용하도록 하셨다(레9:2,3). 이외에 나귀와 더불어 밭을 가는데 사용하도록 하셨다(왕상19:19신22:10). 그러나 인간은 이런 소를 우상으로 섬겨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예수가 불신하는 자들(2:13-25)

 

많은 유대인들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23절) 예수는 저희를 의탁하지 않았다고 본문은 증언한다. 의탁치 않았다는 것은 그들을 참제자로 인정치 않고 불신했다는 의미다. 예수가 불신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1. 표적만 보고 믿는 자들

초자연적인 기적과 표적만을 중히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그 진리의 말씀에는 관심없이 표적만 구하는 자들을 예수는 불신한다,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고 주님을 하늘로서 오신 선생님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신 적이 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 표적만 보고 믿는 자들은 참된 성도들도 아니요, 또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눅8:13)가 되기 쉽다.

 

2. 물질을 바라고 따르는 자들

요6:15에는 예수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자들을 예수께서 피해 산으로 가셨다는 증언이 있다. 그들은 예수의 '떡의 표적'을 보고 그 떡을 먹고 그 떡을 더 바라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도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세속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축복만을 얻고자 따르는 자들을 예수는 기피한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과 희생을 당하는 경우 곧잘 배신을 하기 때문이다.

 

3. 마음으로 사랑치 않는자들

요5:42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했고, 요6:64에는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했다. 주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과 믿음도 없이 성도 행세를 하는 자들이 많다. 그와 같은 자들을 주님은 아신다. 거듭나지 못한 자, 세속적 욕심으로 신앙 생활하는 자를 예수는 불신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성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2:13-25)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사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다. 요한복음은 그 사건에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인 교훈까지 첨가하고 있다. 성경에서 성전은 주님의 육체, 또는 교회, 또는 성도의 몸으로 상징된다. 그 중 성도의 육체를 성전으로 상징한 예가 많다(고전3:!6). 과연 그와 같은 성전과 관련된 주님의 사역은 무엇일까?

 

1. 정화하심

더럽고 추한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심으로 성전을 정화하신 주님은 성도의 몸도 정화하시는 분이시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고 한 것처럼 정욕과 음란과 불의로 부패했던 성도의 몸을 주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거룩하게 정화시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화사역은 성도가 저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징계와 회개를 통해 계속하신다.

 

2. 성전의 본질을 지킬 것을 명하심

성전은 본래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요, 그 임재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장소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절)고 하신 것은 그와 같은 성전의 본질을 지키라는 명령이다. 상징적으로 성도의 몸을 '성령의 전'이 되도록 지키라는 교훈인 것이다. 온갖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을 피하고'(고후7:1)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신령한 처소로 성도의 몸을 지켜야 한다(벧전2:5).

 

3. 성전을 일으키실 것임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이 말씀은 물론 부활하신 당신의 육체를 상징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성도의 육체에도 적용된다. 사단이 죽음과 죄로 성도의 몸을 허물지라도 끝내 주께서 그 부활의 권능으로 성도의 몸을 신령한 것으로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이처럼 귀한 성전임을 알자(고전3:16,17). cafe.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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