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신성 (요1:1-5)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에서, 자기 친구 심플리시우스가 들려 준 한 철학자 플라톤의 이야기기를 들려주고 있다.(신국 10권 29장). 그에 의하면, 그 철학자는 요한복음의 이 첫 구절은 "황금으로 기록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했다. 해박한 주니어스(Fhancis Junius)는 자기의 일생을 묘사하면서, 자기가 젊었을 때는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어설픈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 아버지가 건네 준 성경에서 우연히 이 대목을 읽고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의 논법에서 신비를, 그의 문체에서 권위와 위엄을 발견하고는, 그의 몸이 떨렸다고 했다. 그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온종일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그의 종교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귀에서 무엇이 숨겨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다. 여기서 기자는 그가 증명해야 할 위대한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계시다는 점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자.
Ⅰ.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말씀"이란 단어가 특별한 뜻이 있다(1:1, 7; 계 19:13 참조). 그러나 어떤 사람은"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한다(행 20:32; 히 4:12; 눅 1:2). 갈대아판은 아주 빈번히 메시야를 Memra -즉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의역(意譯)하고 있으며, 구약에서 많은 일은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서 뿐 아니라 "여호와"(주님)에 의해서 된 일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일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같은 뜻으로 알고 있다. 요한 기자는 자기의 언설 끝에서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호칭하는 이유를 간결하게 말하고 있다(18절). 그것은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로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였기"떄문이다. "말(씀)"이란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lo,goj evgdia,qetoj - 즉 생각된 말과 lo,goj profo,rikoj - 즉 발설된 말이다. ove[sw와o,e[szw - 즉 이성으로써의 말과 언어로써의 말이 있다.
1. 생각된 말, 즉 "사고"로써의 말이 있는데, 이것은 영혼(사고의 모든 작용)의 유일하고 직접적인 산물과 개념이며, 영혼과 한가지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있어서 제 2 격을 "말씀"으로 부른다. 그가 "하나님의 첫 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영혼이 사고를 가지고 있듯이, "주(여호와)께서 태초에 지니셨던"(잠 8:22) 영원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고한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지만, "어떻게" 사고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누가 영혼 속에서 어떻게 사고가 발생하는지를 말하리요?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정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신비로 덮어 둔 채 그 깊이를 더욱 존중하게 된다.
"발설된 말" 즉 "언어"가 있다. 이것은 정신의 가장 중요하고 자연스러운 지표이다. 그리스도도 그와 같은 "말씀"으로써,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셨고(히 1:2), "그에게 들으라"고 명하셨다(마 17: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정신)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들을 놀랄 만큼 훌륭하게 드러내신다. 그래서 그는 "놀라운 담화자"이다(단 8:13 의 주석 참조).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하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은 "음성"이고, 그리스도는 "말"이다. "말"이기에 그는 "진리"이시며, "아멘"이시며,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신실한 증언"이시다.
Ⅱ. 이와 같은 말은 "그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조금도 모순 없이 입증해 준다.
1.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은, 말씀이 성육 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물이 창조되어 존재하기 시작하던 시간의 처음에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있었다. 세상은 "태초부터" 있었지만, 말씀은 태초 "안에"(in) 있었다. 영원이란 것을 흔히 "창세 전"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님도 영원하심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즉 "산들이 생기기 전에"라고 했다(시 90:2).고로 "말씀"은 태초 전에도 계셨다(잠 8:23). 태초에도 있었던 분은 "때의 시작이 없으며," "영원하시다."
2.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공존하였음을 주장했다. "말씀이 하나님과 더불어 계셨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 그 사람을 인도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이 계시며,"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2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는 영원부터 그러하시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지만,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1) 그것은 "본질"과 "실체"에 있어서 그러하다. "말씀은 하나님이었다." 별개의 인격 혹은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실체이셨다. 그는 "하나님이었기"때문이다(히 1:3).
(2) "자기 만족"과 "지복"(至福)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 과 더불어 " 영광과 영화를 지니셨다(17:5).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 품에 계셔서 무한히 행복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즐거움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잠 8:30).
(3)"뜻"과 "계획"이란 관점에서 그러하다. 성육된 하나님 말씀이 인간을 구원하는 신비는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 숨어" 있었다(엡 3:9).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는(벧전 3:18). 하나님과 "영원부터"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그 위대한 일은 영원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련되어 있었으며, 서로도 완전히 그 일에 대한 이 해가 있었다(슥 6:13; 마 11:27). 즉 그리스도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처럼 그 옆에" 계셨다.(잠 8:30)
3. 세상을 창조할 때의 말씀의 직능을 주장했다(3절).
(1) 그것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만물이 말씀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는데, 영원부터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참여하고"있었다. "그 때 내가 그분 옆에 있었도다"(잠 8:30).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지으셨으며 (시 33:6),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그 말씀"이시다. 즉 종족의 도구로써가 아니라, 상호협력자로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다"(히 1:2).
(2) 모순이 없다고 했다. 가장 높은 천사로부터 미천한 벌레까지, "만들어진 모든 것은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즉 하나님은 말씀과 더불어서만 일하셨다.
[1] 이것은 그가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히 3:4).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자기 자신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드러내고 있다.(사 40:12, 28; 41:4; 렘 10:11, 12).
[2] 기독교의 탁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기독교의 창시자가 이 세상의 창조자시라는 것이다. 모든 탁월성의 근본인 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얼마나 위대할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경배할 때, 우리는 족장들이 창조주라고 하던 분, 만물이 그에게 의존된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3]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만물을 지으신 전능한 자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만이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의 근원이요,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4. 안에 생명과 빛의 근원이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4절). 이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모든 사업에 자격을 구비해 주는 것이다.
(1)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그래서 맹세할 때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한다고 하신다.
(2) 만물은 그 안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만물이 그에 의해 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해서 생명을 받았다. 움직이는 생명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창 1:20; 행 17:25). 사람이 떡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의 그 말씀이 바로 이분이다(마 4:4).
(3) 이성적인 동물은 그로부터 "빛"을 받는다. "인간의 빛"인 "생명"은 그에게서 나온다. 인간의 생명은 다른 동물의 생명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한 것으로써, 인간은 단순히 "동물적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생명"이 있을 때, 그의 생명은 "빛"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들과 구별되는 고귀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주님의 촛불"이다. 이 촛불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영원한 말씀이다. 이성의 빛도 말씀에서 나오며, 또한 말씀에 의존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과 빛은, 타락해서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성의 빛을 주신 분이 아니고 보다 더 나은 계시의 빛을 누구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5. 그가 인생들에게 나타났음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는데 그가 세상에 왔다면 그를 무시하는 것은 어째서 일까? 여기에 대한 성서의 대답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이다. 관찰해 보자.
(1) 영원한 말씀은 성육 이전에도, 타락된 세상에 있었다. "빛이 어두움에서 비치다." 빛은 자기를 증거하며, 그 자체를 알도록 한다. 이 빛은 어두움을 비추고 있었다.
[1} "하나님이신" 영원한 말씀이 "본성적 양심의 어두움" 속에서 빛나고 있다. 비록 인간이 타락되어 "암흑" 속에 있지만,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었다.(롬 1:19, 20 참조). 본성의 빛이 암흑에서 빛나는 이 빛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어떤 능력 즉 "창조"하고 "지배"하는 능력을 알 만한 내적 소질을 가자고 있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이 세상은 완전한 지옥으로 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아직 그렇게 괴어지지는 않고 있다.
[2] 중보자인 영원한 말씀이 구약 성서의 예형과 상징이라는 어두움 속에서도, 즉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약속 안에서도 빛을 비추고 있다. 어두움을 쫓으려고 이 세상에 빛을 명하신 그분이 여전히 어두움의 이 세상을 비추시고 있는 빛이다. 그러나 이 빛은 얼굴에 수건을 쓴 것같이 가리어져 있다(고후 3:13).
(2) 타락한 세상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자. "어두움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두움을 비추는 이런 빛 곧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다.
[1] 인간은 자기 오성 속에 있는 본성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 생각이 미련해지고 허망하여졌다(롬 1:21, 28). 죄와 악이 이런 참빛을 가리워서 하나님이 거듭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욥 33:4).
[2] 구약이라는 빛을 지녔던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베일이 모세의 얼굴을 가린 것처럼 그들의 마음이 구약의 빛에 대해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빛은 예형과 그림자들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련하므로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방 세계의 잘못을 고쳐 주고, 유대 교회의 진리를 개선해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필히 오셔야 했다.
세례 요한의 증언(1)(요1:6-14)
복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예롭게 할 증언하는 일을 세례 요한에게 부과시키고 있다.
Ⅰ. 기자는 그가 내세우려는 증인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고 잇다. 그의 이름은 "은혜로운"이라는 뜻을 지닌 "요한"이다. 그의 말은 엄하지만 그의 인격은 은혜스럽다.
1.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는 "하나님과 같이" 계셨고 "하나님이었다"고 했지만, 요한은 단지 "인간"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을 통해서 말씀하시길 기뻐하신다. 요한은 "위대한 인간"이지만, 그는 한 사람이며, 인간의 아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인간이며, 하나님의 "사자"로 불리워진다(말 3:1). 하나님은 요한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신임장을 주셨다. 요한은 기적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그가 환상이나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과 교훈은 엄격하고 순수했다. 그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를 통해서 세상을 개혁시키고, 인간들에게 천국에 관한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2. 요한의 직능에 대한 말을 들어보자(7절). "그는 증인으로 왔다." 즉 목격자, 주요 증인이었다. 그는(evij rc rturtau)-즉 증거를 위해서 왔다. 유대 교회에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위한 증거에 대한 법적 제도가 있어 왔다. 그래서 "증거의 회막," "증거궤," "율법과 증거"라는 등등의 말이 있어 왔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계시는 또 하나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증거요, 또한 하나님의 증거이다(고전 1:6; 2:1). 사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다.(행 14:17). 그러나 구원주는 이방인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요한이 오기까지는 그에 대해서 깊은 침묵이 있었다.
(1) 이제 요한의 증거 내용을 보자. "그는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왔다." 그러나 빛을 증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빛에 대하여 눈을 감는 사람에게는 빛을 증거 할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빛이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두움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 요한은 잠자는 사람들에게,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새벽을 알려 주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야경군과 같았다. 또는 "밤이 어떻게 되었으며," "아침이 언제 오는지"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하는 파수군과 같았다(사 21:11, 12). 요한은 오랫동안 대망하던 메시야가 지금 오고있다고 세상에 증거 하려고, 또 그가 증거 하는 메시야는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며,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 말하며, 또한 그는 생명과 영광으로 인도해 줄 시대가 왔다고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2) 그의 증거의 목표를 보자.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듣고 믿게 하려 함이다." 물론 그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단지 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말해야 한다. 즉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를 보고, 듣고, 깨닫게 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토록 했다. 이 사람의 증거를 받으려는 자는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게 되리라(요일 5:9; 요 10:41).
3. 그는 빛이 아니라 곧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8절)라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즉 요한은 우리가 기대했고 약속 받은 그 빛이 아니라 단지 참된 빛을 증거 하러 왔다. 그는 동방박사들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새벽 별이지 태양은 아니다. 그는 신랑의 친구이지 신랑은 아니다. 그는 왕자의 선발자(先發者)이지 왕자가 아니다. 에베소 교인들처럼 요한의 세례 외에는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행 19:3). 여기에서 복음서 기자가 이러한 잘못을 고치려고, 비록 그에 관해서 매우 명예롭게 말하지만, 아직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준비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한은 최고의 예언자만큼 위대하지만 그 에언자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사역자들을 과소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주인도 아니고 우리의 신앙을 지배하는 자들도 아니며, 단지 우리 주님의 집의 청지기이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서 그들의 행위에 우리 자신을 맡겨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유의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존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빛을 증거 하도록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요한이 자기를 참빛이라고 주장했다면, 그는 그 빛에 대한 착실한 증언을 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강탈하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명예를 잃는 자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가 참 빛은 아니지만, 참 빛의 증거자로서 매우 충성스러운 자였다. 요한은 빛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유익한 빛의 증언자였다.
Ⅱ. 기자는 요한의 증언을 계속하기 전에 요한이 증거 하는 그 예수를 다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기자는 이미 예수의 신성의 영광을 말했고, 여기서는 그의 화육의 은총과 중재자로서 인간에게 대한 호의를 나타내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참 빛"이었다.(9절). 그러나 세례 요한이 거짓된 빛이라는 말은 아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하나의 아주 작은 빛이었다. 여기에 비해서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 불리 울 만한 위대한 빛이었다. 다른 빛(광명체)들은 오직 상징적으로만 빛이라 불릴 수 있다. 참 빛만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요, 모든 위로의 근본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빛이 이 세상에 있는 각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
(1) 그는 창조의 능력에 의하여, 각 사람을 이성의 빛을 가지고 비추고 있다. 인간의 빛인 생명은 그에게서 나오며, 모든 이성의 발견과 지시, 그리고 이성이 주는 모든 위로, 모든 아름다움은 그로부터 나온다.,
(2) 그의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파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만민에게 빛을 비추신다. 세례 요한은 하나의 빛이다. 그는 하나의 방을 비추는 촛불처럼, 단지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요단 주위를 비추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써 이방 세계까지 비추신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은 모든 나라에 모든 언어로 전파된 것이다(계 14:6). 마치 태양처럼 그리고 향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빛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시 19:6 참조; 롬 10:18).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전처럼 한 민족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나타나 있다.(마 5:15).
(3) 그리스도는 그의 영광과 은총의 작용에 의해서 구원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있다. 그의 빛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다고 했다. 또 그 빛은 태초에 어두움 속에서 빛나라고 말씀하신 그 빛과 비교가 되는데, 이 빛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광명)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빛을 받건간에, 즉 그 빛이 자연적인 빛이든 초자연적 빛이든간에, 그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2.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셨다"(10절). 그는 본질적인 말씀으로써 세상에 계셨으니, 성육되기 전에도 만물을 주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존재하셨다는 이 말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계셨던 일을 말한다(16:28 참조). "내가 세상에 왔다." 독생자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세상으로, "빛"에서 "어두움"으로, "거룩"에서 "죄"로 물든 세상으로 왔다. 그는 축복과 영광의 세계를 떠나 우울하고 비참한 이 세계에 있었다. 그는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이 세상에" 와 애썼으며, 결국 화해시켰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도록 했다. 그는 세상에 있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승리의 기쁨으로 말하기를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다"(17:11)고 하셨다.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우주의 한 부분으로써의 이 세상이 이제까지 지닌 최대의 영광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한 번 이 세상에 육으로 계셨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것 이상의 것에 관심을 갖게 하며, 그리스도가 육으로서 현재 우리의 거하는 세상에 계셨음을 알게 한다. 그가 잠시 동안 세상에 계셨다는 것은 잠시 지나간 일처럼 들려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간단히 세상에 들렸다 가게 된다.
(1) 그리스도를 논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능한 가장 자애롭고 존경심에 가득찬 환영의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 이유로는 "그가 세상을 만드셨고," 그런고로 그가 오신 것은 잃어버린 세상을 다시 찾기 위해서이다. 그 자신의 본래의 형상을 다시 찾으려 관심을 쏟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가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그를 존경해야 한다.
(2) 예수는 하나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냉대를 받았다. 그것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이고 구원자이신 예수가 세상에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거의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는 자기 주인을 알지만, 사람들은 자기 창조자를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를 섬기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 즉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했던 외적인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무시했다. 그의 나라는 "눈으로 봐서" 알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시험을 통해서 온다. 예수가 심판자로 올 때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 게 될 것이다.
3. 그는 "자기 백성에게 왔다"(11절). 그는 "자기의"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특별히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다. 즉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살았으며, 그들에게 먼저 파견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볼품없는 민족으로, "그들의 왕관이 그 머리에서 떨어졌었다." 옛 계약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범죄 했고 초라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자기가 택한 선민으로 인정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taidia - 즉 그의 것들을 말한다. 이것은 참된 신자들을 touvz;di,ouj - 즉 그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13:1). 그의 집, 그의 땅, 그의 가구들처럼 유대인들은 예수가 사용하시고 소유하신 "그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부인과 자녀들처럼 사랑 받는 그의 사람들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기 것이기 때문에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즉 예수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에게로 보내어졌는데, 그것은 그 양들이 예수의 양들이기 때문이다.
(1)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또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그의 백성들이 그를 영접해 주리라고 기대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구세주가 나타날 시기와 장소, 그리고 어느 부족과 가문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신탁을 사전에 받고 있었다. 예수는 징조와 기적들과 더불어 그리고 가장 위대한 존재로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한" 것은(10절) 그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를 알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메시야로서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 자신을 더 공고히 해서 그를 공격했다. 레위지파인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경멸하고 핍박하는 장본인들이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는 매우 "부당한" 행위였다. 그들은 "그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아야 했다. 또 그것은 예수에게는 매우 "불친절하고," "무례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찾아 구원하려 왔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죄에서 떠나지도 않았고, "예수가 자기들을 다스리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를 "인정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신실한 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를 "영접한" 자들이 있었다(12절). "이런 자들도 많이 있다." "비라엘 나라는 불신앙을 고집하다가 멸망했지만, 그리스도에 복종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1] 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와 특성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다.
첫째,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먼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임을 명심하라.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사실을 동의하며, 그리스도에 관계된 복음의 계획에 동의하는 자이다. 예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만왕의 왕"이며, "의(義)의 주"이며 "구원자"이시다. 또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들이 나타내는 위대함을 "알고"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그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의 선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교훈을 참되고 선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즉 그의 계명을 옳고 거룩하게, 그의 선물을 친절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행위를 지배하는 원리는 그의 은총과 사랑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2]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위엄과 특권은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 중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지금까지는 자녀직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이스라엘은 나의 아들이며, 첫 아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갈 3:26). 그들도 "권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도 스스로가 이런 능력을 취할 수는 없지만 복음의 특허장에 의하여 "허락 받은" 자는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나의 "권리"를 준다. 그들에게 고귀한 지위를 준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이 고귀성을 지니고 있다." 다음을 명심하자.
a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말할 수 없는 특권이다. 그들은 원래 비참한 이 세상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그러한 특권을 얻는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가!"(요일 3:1)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자녀"라 부르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이러한 것들은 자녀의 특권, 곧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b 양자가 되는 특권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믿고, 그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자로 예정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양자의 성품과 영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들 중에서 처음 난자"(맏이)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이 되며, 인간의 자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다.
둘째, "중생의 특권"(13절)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듭난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양자가 된 모든 자들은 중생 한다. 더욱이 이러한 "참" 변화는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함을 주는 곳에서 자녀의 본성과 특성을 새롭게 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양자로 삼았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새 삶의 원천을 보아야 한다.
a 소극적으로 본다면
(a) 그것은 우리의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태어난 탄생이 아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혈육의 의지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다"(벧전 1:23). 인간을 혈육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이 거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혈육을 가진 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같지 않다. 은총은 혈육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타락한 인간은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창 5:3). 그러나 성화 되고 거듭되고 거듭난 사람이 자기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을 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을 대단히 자랑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에게는 거룩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은 때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양자라 불리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서에서 말하는 양자됨은 유대인과 같은 천재적인 관계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b)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력으로 "탄생되는" 것도 아니다. 거듭남은 "혈"이나 "육"의 의지가 아니듯, "사람의 의지"로도 아니란 뜻이다. 이것은 인간은 어느 것이 선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도덕적 무력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거듭난 생활의 원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떤 인간의 법이나 사상들이 한 영혼을 거룩하게 그리고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b 그러나 적극적으로 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 이 거듭남은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된 것이고 (벧전 1:23),위대하고 유일한 창조자인 성령으로 된 것이다. 진실 된 신도들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다(요일 3:9; 5:1). 하나님의 자녀란 꼭 거듭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어떤 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날 수 없다면 자녀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말씀이 육이 되었다"(14). 이것은 그리스도의 화육을 전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의 거룩한 현존을 통해서 항상 "세상에 계셨고," 자기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왔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 의인 욥의 믿음과 소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육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나 나는 내 육체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1) 그리스도를 감싸고 있는 "인간성"이다. 그 인간성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자녀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히 2:14). 소시니안주의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며 인간임을 인정하지만, 예수는 "인간이었으되" 모세처럼 "신(神)이 되었다"고 말한다(출 7:1). 이것은 요한의 말과 정반대다.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이었으나," "육체가 되셨다"고 했다. 이것을 요한복음1장 1절과 비교해 보자. 1장 1절은 예수가 진정으로 인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인간의 불행과 비참에 종속시키었음을 말한다. 그는 "육"으로서, 가장 비천한 인간이 되었다. 육이 인간을 "약하게" 하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후 13:4). "육체"가 인간을 "멸망"으로, 죽음으로 이끈다(시 78:39). 그리스도는 "육체로 죽으심을" 당하셨다(벧전 3:18). 아니 육체가 사람을 "죄악으로 더럽히게"했다(창 6:3). 그리고 그리스도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이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사"(롬 8:3),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고후 5:21).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너는 흙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흙 속에 묻힌다는 말이다. 인간의 타락은 마치 인간을 세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그리스도도 "육신"이 되셨고,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육신이 그와 같이 나쁜 이름으로 변할 때에 영원한 말씀이 육신으로 되셨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만물을 창조한 그 자신이 가장 비천한 상태인 육신이 되어야 했고, 또한 전혀 거리가 먼 육신에 복종케 되었다니 말이다. 복음서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어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시 40:6), 그것은 오히려 구속주의 사랑을 더 훌륭하게 표시한다. 우리를 되찾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셨으며, 풀과 같이 시들었지만, 주의 말씀은 그치지 아니하셨다.
[2]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그는 인간성을 취함으로써 자기를 사람의 위치에 처하게 하셨다. 말씀은 육신이 되셨어도 천사들 사이에 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와 같은 성질의 "몸"을 취하사, 우리와 같은 세상에 오셨고 살으셨다. 그는 벌레 같은 인간들, 필요나 쓸모가 없는 인간들, 부패하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 또한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들과 같이 사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셔서 심지어 "반역한 자들과 더불어 사셨다"(시 68:18). 고상하고 뛰어난 존재들인 천사들과 거주하시던 그리스도께서 "독사의 자식"들과 "죄인"들인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우리들은 다윗에게 대한 메섹과 게달, 혹은 에스겔에 대한 전갈, 혹은 "사탄의 세력이 들끓는" 버가모 교회보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못마땅한 자들이다. 하늘나라 즉 영의 세계를 볼 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육신이 그리고 인간의 운명이 던져진 이 세상이 얼마나 비천하고 경멸스럽게 보일까! 또한 깊이 생각해 보면 하늘 나라와 화해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나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육신과 이 세상을 모두 존귀하게 해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 일을 맡기시는 동안은 우리도 기꺼이 육신에 살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룰 때까지는 이 악한 세상에서 거주하셨기 때문이다(17:4). 예수는 유대인들 중에 증거 하셨다. 그것은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다(창 9:27).유대인들이 예수를 냉대했지만, 예수는 여전히 그들과 같이 거했다. 몇몇의 고대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는 에뎃사(Abgarus)의 압가루스(Abgarus)왕에 의하여 좋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청을 받았지만, 다른 어느 나라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그는 단지 방에만 머무는 도보 여행자로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거주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거주하셨다." eskh,nwwn eu, h,mi/n - 즉 그가 우리와 함께 거주했다는 뜻이다. 즉 "회막 안에서 처럼" 거주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다음을 암시한다.
첫째, 장막에 거하는 목자들처럼 아주 "누추한" 환경에 거하였다는 것이다. "궁정에서처럼"이 아니라 장막에서 처럼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머리 둘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국가는 "군정치하"에 있었다. 군인들은 "장막에 거하였다." 예수는 오래 전에 "독사의 새끼"들과 전쟁을 선포한 이래 이제 몸소 "출전"했다. 그래서 군기를 세우고, 천막을 쳐, 전쟁을 시행하려 한다.
세째, 우리 중에 머무름은 영구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서처럼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막에서처럼 머물렀다. 족장들은 회막에 거하면서, "자기들이 지상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들이라"고 말하면서, 더 좋은 나라를 사모했다. 그리스도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히 13:13, 14).
네째, 옛날 모세의 회막에서 그룹들 사이에 쉐키나에 의하여 하나님이 거하셨듯이,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 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상징인 진정한 쉐키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청원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2) "육의 베일"을 통하여 나타난 "그리스도 영광의 광채"를 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다." 그 태양은 구름으로 가리워지건 일식을 만날 때건 여전히 빛의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그가 이 세상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지만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여왕의 광채이다. 유대인들은 그를 사소하게 생각했다. 그것을 베일을 통하여 보았던 때문이다.
[1] 이러한 영광의 증인들을 보자. 그와 더불어 가장 솔직하고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인, 바로 "우리들"이 있다. 사람들과 가장 친했던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결점을 발견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와 가장 친했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제자들은 그의 교훈을 통해서 영광의 신비들을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의 인간성의 베일만 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세상이 아니라," 그들에게 나타냈다. 12명은 증언자로서는 완전한 숫자이다. 그들은 솔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며, 어떠한 계획이나 음모에서도 떠난 사람들이다.
[2] 그들의 증거의 내용을 보자. "우리가 그것을 보았다." 기록에 의하여, 간접으로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목격한 자들이다. "우리는 보았다." 이 말은 확고하고 영속적인 증거를 뜻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를 본 제자들 자신이 증거하기를,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바요,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요일 1:1).
[3] 그 영광은 무엇인가?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즉 말씀이 육이 된" 영광이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난" 영광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다음을 염두에 두자.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독생자이다. 믿는 자들은 양자라는 특별한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dmoiou,sioi - 즉 비슷한 본성을 지닌 자이다.(벧후 1:4).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ovmouvsioi - 즉 같은 본성을 지닌 자이다. 하나님의 인격의 표현이며, 영원한 출생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그들의 어느 누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히 1:5).
둘째, 그리스도는 분명히 아버지의 독생자로 증거 되는데, 그 때문에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실 때 그의 영광이 나타났다. 외적(外的)으로는 "종의 모양"으로 태어났지만, 은총의 면에서는 그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처럼," 불타는 풀무 중에 나타났던 "제4의" 인물이다. 그의 영광은 그의 가르침의 거룩함과 장엄에서도 나타났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그의 기적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모든 생활에서 순결, 선함, 그리고 자비가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는 선을 베풀려고 돌아다니셨다. 그는 매사에 성육신 된 신으로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특히 복음서 기자는 "변화산상"의 사건을 염두에 둔 것 같다(벧후 1:16-18 을 보라).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부르셨다. 그러나 이런 모든 증거는 그의 부활에서 더 온전히 드러났다.
[4]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거했다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충만한 은혜와 진리로써" 거했다. 하나님이 옛 회막에서는 "율법"이었고, 지금은 "은혜"이시다. 즉 구약 시대에는 "예형"으로 계셨으나 지금은 "진리"로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케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 타락한 인간은 이 두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능력과 위엄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했다.
첫째, 그는 그 자신에 있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무한한 성령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에게 허락 받은 넘치는 은총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탄원할 자격을 갖추었다. 또한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 줄 넘치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을 가르쳐 주시기에 적합하다. 그는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시다.
둘째, "우리를 위해서"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시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와 같이 기뻐하실 것이다. 이런 관계는 율법적인 "예형"에 대해서도 "진리"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 2 (요1:15-18)
Ⅰ.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다시 전하고 있다(15절). 세례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8절).
1. 세례 요한은 증언을 뭐라고 했는가? 그는 예언을 통하여 자기는 "외치는 자의 목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백성의 "죄"를 외치고 있으며, 신약의 이 예언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백성의 "구원자"를 외치고 있다. 여기에는 숨은 뜻이 있다.
(1) 이 외침은 공적인 증언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거짓 선지자는 이 외침을 은밀히 감추나, 참 선지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널리 알린다.
(2) 세례 요한은 메시야에 대한 증언을 거침없이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자기가 증거 할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열정적인 사람처럼 외치고 있었다. 태어날 때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기쁨으로 어머니의 배속에서 뛰었던 요한이 이제는 기쁨에 넘쳐서 그리스도의 공적 출현을 영접하고 있다.
2. 세례 요한의 "증언" 내용을 보자. 세례 요한은 증거하기 시작할 때, 자기는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영접하도록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것을 알리고 있었다. 세례 요한처럼 곧은 원칙과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엄에 대한 변함없는 안목을 가지고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증언을 해야 하는 사역자들에게 매우 어울리는 일이다. 세례 요한은 얼마 전에 자기가 세례를 준 예수에게 충성했으며, 예수는 하늘로부터 놀랄 만한 인정을 받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다." 요한은 사람들 중에서 그분이 잠시 후에 나타나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요한은 구약을 믿는 모든 예언자들을 능가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분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전에 말한 사람이 바로 이분이다. 우리 모두를 화해시킬 사람이다." 이제 요한의 말을 들어보자.
(1) 세례 요한은 이 예수를 선택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탄생과 공적 출현에서는 나보다 늦으나 나보다 먼저 선택되었다. 내 "뒤를 이어" 가르치고 제자들을 택할 그 분은 모든 점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이다. 즉 뒤에 따라오는 왕자나 귀족처럼 그 앞에서 길을 예비하는 선발자(選拔者)나 궁내관(宮內官)보다 월등함과 같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는 (눅 1:32)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만 일컬음을 받는 세례 요한보다 먼저 택해졌다(눅 1:76). 요한은 신약 성서의 사역자지만, 그리스도는 신약의 중보자이다. 요한은 위대한 사람이고 큰 자이지만, 그리스도를 인정하는데 주저치 않았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관심사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일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은 나쁜 심판을 받으리라(빌 2:21). 그리스도는 나보다 이후에 오셨지만, 나보다 먼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서 은사를 주신다. 야곱이 행한 것처럼, 흔히 연장자보다 연소자를 앞세우신다. 바울은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을 훨씬 능가했다.
(2) 요한은 그렇게 된 데 대한 하나의 좋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나보다 전에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이다." 즉 그분은 나의 제1원인이며, 나의 근원이다. 처음이란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이다(사 44:6). "그분은 나보다 이전에 계셨고," 나의 "처음이시다."
[1] 연장자 순으로 볼 때도, 그분은 아브라함 전에 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계셨다"(8:58). 아니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계셨다(골 1:17). 그분은 이전에도 계셨고 영원히 존재하신다. 세례 요한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뿐이지만(마 3:1), 우리 주 예수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이 말은 그리스도안에 두 본성이 있음을 입증한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의 공적 출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요한 이전에 계셨던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요한보다 이전에 계시고, 또 어떻게 영원히 존재하시겠는가?
[2] 고참순으로 볼 때도 그리스도는 "나의 군주"이다. 왜냐하면 흔히 군주를 "제일인가"라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보냄을 받은 그를 받들기 위해서이다. 즉 그리스도는 주인이시오, 나는 그의 일군이요 전령이다."
Ⅱ. 복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하려 했으나, 19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끌어낼 수 없었다. 16절은 14절,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과 감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충만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들을 위하여 은사를 받아"(시 68:18), 인간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엡 4:8). 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자신이 충만하셨다(엡 1:23). 그는 "우리의 보물을 채워 주시려" 하신다(잠 8:21). 그분은 충만함의 근원이시다. "우리 모두는 받았다.""모든 사도들"과 그 밖의 어떤 사람이 그러하다. 우리들은 이런 사도직의 총애, 즉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사도직의 적격은 "진리"이다. 또는 "우리 믿는 모든" 자가 그렇다. 많은 자들이 그로부터 충만함을 받는다(16절).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참 신도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위대한 성도들도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었고, 가장 비천하고 연약한 자들도 그에 의지해서 산다. 이 은사는 자랑하고 교만하는 자 이외의 모두에게 주신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은사를 받기 바랄 뿐이다. 이제 우리가 받은 은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우리들은 "은혜에 은혜"를 받았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받은 것들은 "은혜"라는 한 마디의 말로 요약되어진다. 우리들은 은혜뿐 아니라 아주 큰 은사와 부와 매우 귀중한 것들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에 은혜"라고 말이 반복되어 있다. 그것은 이 건물의 주춧돌에서부터 꼭대기 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은혜, 은혜"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것을 찾아보자.
(1) 받은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이다. 은혜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이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선한 역사를 낳는다. 그러면 그 선한 역사는 우리로 하나님의 선한 뜻에 더욱 합당하게 만든다. 저수지가 수원(水原)으로부터 물을 받고, 나뭇가지가 뿌리로부터 수액을 받듯이, 빛이 태양으로부터 나오듯이, 우리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고 있다.
(2)은혜를 받는 양식을 보자. ca,rinavnti, caritoj - 즉 은혜 위에 은혜 이 문장은 단수로써, 해석가들은 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나,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을 뜻한다고 본다. 이제 "은혜 위의 은혜"란 뜻을 알아보자.
[1] 이 은혜의 "값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은혜를 위한 은혜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은혜에 따른 선물"이다(롬 12:6).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난 은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뻐하시고, 따라서 그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기뻐하신다(엡 1:6)
[2] "넘치는 은혜이다." 은혜 위에 "은혜"란 하나의 은혜 위에 또 하나의 은혜가 쌓여 있다는 것으로써, 풍성한 은혜를 말한다. 또 그것은 쏟아지는 축복으로 더 이상 받아드릴 자리가 없는, "넘치는 구원"이다. 즉 한 은혜에 더 은혜를 주시겠다는 표시이다. 요셉은 갑절의 은혜를 받았다. 이런 은혜란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우리를 채워 주신다는 뜻이다.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품에서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면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없다.
[3] 넘치는 은혜의 "유용성." 이런 은혜는 은혜를 증진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은혜이다. 이 은혜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 "발휘되어질" 은혜이다. 은혜스러운 행위를 위한 은혜스러운 습관이다. 이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되어지는 은혜이다. 은혜스러운 행위를 위한 은혜스러운 습관이다. 이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되어지는 은혜이다. 또한 은혜스러운 성취를 위한 은혜스러운 허락들이며, 서로 교환될 하나의 재능이다. 사도들은 은혜를 받아(롬 1:5; 엡 3:8) 서로 교통하였다(벧전 4:10).
[4] 신약 성서의 은혜는 구약 성서의 은혜를 "대치"한다고 베자(Beza)는 말한다. 이 뜻은 17절에 의해서 확실하다. 왜냐하면 구약에서의 은혜는 율법 안에서 이지만 신약에서는 진리 안에서이다. 구약에도 은혜가 있다고 복음서는 가르치고 있는데(갈 3:8), 이 은혜가 신약에 와서는 대치되어 더 큰 영광이 이른다(고후 3:10). 이제는 신약의 은혜가 더 뜻이 명확하고, 더 풍성히 주어지고 있다.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이다.
[5] 또 그것은 은혜의 "지속"과 "증대"를 말해 준다. 은혜 위에 은혜란 한 은혜에 다른 은혜가 개선되고, 확인되고 완전케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거룩한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며, 한 은혜에서 다른 은혜에 이른다(고후 3:18). "진실한" 은혜를 가진 자에겐 "더 큰 은혜"를 주신다(약 4:6).
[6]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은혜와 성도들의 은혜가 "일치"함을 뜻한다고 클라크(Clark)는 말한다. 은혜 위의 은혜란 그리스도의 은혜에 상응하는, 우리 안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우리의 은혜가 우리를 "같은 형상으로 변하게 한다"(고후 3:18). 즉 "아들의 형상으로 변하게 한다"(롬 8:29). "하늘에 속한자의 형상으로 변케 한다"(고전 15:49).
2.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받았다(17절).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14절). 그래서 그에 의해서 은혜와 진리가 우리에게 왔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았다. 요한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기쁨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은혜에 관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그것이 모세 율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에 의해서 주어졌으며, 그 율법은 인간에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인간에 대한 그의 선한 의지를 찾을 수 있는 은혜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의무와 행복을 훨씬 더 확실하게 보여 준다.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은 두려움과 위협과 벌칙으로 묶여져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위협을 주었다(히 12: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복음은 또 다른 의미를 주는데, 그것은 율법의 온갖 유익한 용도를 내포하며, 두려움이 내포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은혜가 "가르치고"(딛 2:11) "다스리기" 때문이다(롬 5:21). 복음도 법이긴 하지만 "구제하는 법"이다. 사랑을 나타냄이 복음의 특징이지 법과 재앙의 두려움이 그 특징은 아니다.
(2) 이것은 진리와 결합되어 있다. "은혜와 진리"라 했다. 복음 속에서 우리는 의지와 애정으로 포용해야 할 "넘치는" 은혜뿐 아니라 오성으로 파악해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교훈"이면서, "모두가 받을 만한 가치"이다. 곧 "은혜와 진리"이다. 은혜 제공자는 "신실하다." 그에게 우리 영혼을 걸 수 있다. 또 "은혜와 진리"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과도 관계가 있다. 그 이유로서는,
[1] 이것은 모든 규약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우리는 흔히 "자비"와 "진리"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다. 즉 약속에 따른 자비이다. 여기서는 "은혜"와 진리"가 약속에 의한 "은혜"를 가리킨다.(눅 1:72; 왕상 8:56 참조).
{2] 그것은 구약 성서의 모든 예형과 그림자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된 규례(의식)나 이스라엘을 위해 베풀어진 섭리 속에는 다같이 다소 이 은혜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나타날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기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은혜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가 "참으로" 파스카 어린 양, 참 속죄 염소, 참 "만나"이시라. 구약은 그림 속에 있는 은총이나, 우리는 사람 속에 있는 은총을 지니고 있다. "은혜와 진리"이다. "은혜와 진리가 egeneto - 즉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지으셨다"고 했을 때 나오는 말(3절)과 같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알려졌을" 뿐이나, 이 은혜와 진리는 예수를 통해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존재"케 되었다. 이것은 그를 통해서, 세상 창조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그에 의해서 "은혜와 진리"가 "일하게 된다."
3.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또 한 가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이다(18절).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언"하셨고, 그분은 "아무도 일찍이 보지 못했던" 분이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져온 은혜와 진리이니,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분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다른 모든 지시물로는 불충분하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다음을 시사한다.
[1]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라서, 육신에는 안보이며, "아무도 볼 수 없는"(딤전 6:16)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으니, 그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본다"(히 11:27).
[2]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낸 계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낸 자기 계시보다 매우 짧고 불안전했다.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즉 그리스도의 서육 이전에 하나님을 보았고 알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 이후에 보고 안다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생명과 불멸성이 구약 시대에 비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3] 구약의 어떤 예언자들도 우리 주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보여 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나타내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결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았으나"(민 12:8), "여호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졌다(출 33:20). 그러나 하나님을 보았던 분에 의하여 이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를 우리에게 더 분명히 천거하는 것이다.
(2) 복음의 충족성이 그 저작자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자가 하나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관찰해 보자.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데 가장 "합당한" 자이다. 그리스도만이 "책을 취하시고 그 인봉을 열기에 합당한"자이시다(계 5:9). 기 이유는
첫째,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아들로서 아버지를 잘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누가 아버지를 아들보다 잘 아는 자가 있겠는가?(마 11:27) 그는 아버지와 똑같은 본성을 취했으므로,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14:9).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15:15). 모세는 신실한 종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둘째, 그는 "아버지의 품안에" 있기이다. 그는 영원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다. 그는 세상에 오기 전에는 여전히 하나님이셨으며, 아버지의 품속에 가셨다. 여기서 "아버지의 품안에"라는 뜻은
a.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항상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거하지만, 아들인 그는 품안에 거하신다. 즉 본성과 본질에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가장 최고인 하나이시다.
b. 아버지의 "은밀한 뜻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잘 알며 숨기는 것이 없다(마 11:27). 어떠한 사람도 그만큼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왜냐하면 아들만큼 아버지의 생각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대부분의 비밀을 "자기의 가슴에" 숨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은밀한 품속을 잘 알고 계신다. 예언자들은 학자들처럼 "그의 발 밑에" 앉지만, 그리스도는 친구처럼 하나님의 품안에 안긴다(엡 3:11 참조).
[2] 그는 하나님을 아주 "자유스럽게"(한 것)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그는 이제까지 어떤 사람도 보거나 알지 못한 하나님을 드러냈는데,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숨겨진 것도 드러내고 있다(엡 3:9). 그는 막연하거나 의심스러운 섬이 없이 분명한 설명에 의하여, 쉽고 명백하게, 그리고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길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은혜"와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언(3) (요1:19-28)
여기에 요한의 증언이 있다. 이것은 자기를 시험하러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자들에게 한 것이다.
Ⅰ. 요한에게 파송한 자들과 파송 된 자들은 누구인가?
1. 우선 사람을 보낸 자들은 누구인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로서, 유명한 산헤드린, 혹은 최고 재판관들이었으며,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들을 심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무리들을 심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지식의 원천이요, 교회의 안내자로서 성경에 의하여 메시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만큼 시대를 잘 분별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인도자로서 그리스도를 즉시 알아야 했고, 받들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받드는 대신에 요한과 "문답하려고" 사자들을 보냈다. 세속적 지식, 위엄, 그리고 권한은 거룩한 빛을 영접하려는 인간의 마음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2. 그들이 보낸 사자들은 누구인가?
(1)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서, 아마도 그 공의회의 회원들일 것이며, 현명하고, 중대하고 권위 있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도 아론 자손의 제사장이므로, 제사장 이외에 어떤 사람에게도 시험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케"해야 한다고 요한의 직무를 예언한 예언이 있었다.(말 3:3). 그러므로 그들이 요한과 그의 개혁을 시기했다.
(2)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서,"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들이며, 자기들은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일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자에게는 참을 수가 없는 자들이다.
Ⅱ. 그 사자들의 임무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요한과 "그의 세례"에 대해서 심문하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무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있는 곳의 무리들이 분노할까봐 겁이 났고, 또는 자기들 주변의 민중도 그를 잘 알게 될까봐 겁이 났고, 또는 자기들 주변의 민중도 그를 잘 알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을 무리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요한에게 질문했다.
1. 그것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해서이다. 아덴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교리에 관하여 물은 것처럼(행 17:19, 20) 그들도 물었다. 그들은 대단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개의 교리가 그들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심문한다는 것은 자기들을 "위대하게" 보이게 하리라 생각했다.
3. 그들은 요한의 교리에서 어떤 구실을 발견한다면, 그를 "억누르고" 잠잠케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들은 커가는 그의 인기를 시기했으며, 그의 전도가 그들이 오랫동안 영향받아 왔던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 왕국의 건설에도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Ⅲ. 요한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례에 대한 답변과 설명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
1. 그 자신에 설명을 보자. 그들은 "네가 누구냐?"하고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의 차림은 놀라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나타낼 때까지 광야에 살았다. 그의 정신, 외침, 그리고 교리는 이제까지 존경을 받던 그들에게 도전하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유혹자 처럼 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위대한 사도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하게 보이기" 보다는 "선한 일을 하려고" 애섰다. 그래서 정식으로 심문 받기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로서 요한은 자기의 업적들을 자기의 업적들을 자기의 입으로 사랑하지 아니했다. 요한은 그들의 심문에 대답하고 있다.
(1) 소극적인 면에서 보자. 요한은 자기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했다.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은 불공평한 경멸에 대해서 보다는 지나친 존경에 대해서 더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그저 바울이오"하고 타일렀다. 또 그를 과소평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육체는 연약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부르는 자가 있을 때 자기의 옷을 찢었다.
[1]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20절). 즉 "그는 나는" 지금 당신들이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특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자기 자신들을 그렇게 높여서도 안 된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특권을 지나치게 뽐내서도 안 되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주장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은혜와 평화를 창조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며, 회개나 중생이나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에 대해서 그 말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가를 유의하라. 여기 원문은 "그는 부인하지 않고, 고백했다"고 했다. 즉, 그는 자기의 단언에 대해 열렬히, 그리고 항구여일하게 나아갔음을 뜻한다. 교만해지려는 유혹,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명예를 취하려는 유혹은 많은 열정과 솔직성을 가지고 거절해야 한다.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로 인정되었을 때,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애매성의 여지도 없이 솔직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 표현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자신을 낮추어 보잘 것 없이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2] 그는 자기가 엘리야임도 부정한다(21절). 유대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엘리야 같은 사람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거하며, 자기들에게 위대한 일들을 약속해 주기를 바랬다. 요한의 성격, 교리, 그리고 세계를 보고 또한 엘리야가 승천한 바로 그 지점에서 내려 온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역시 이런 존경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엘리야의 이름으로 예언된 자이다.(말 4:5).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자이며(눅 1:17), 또 "오리라 한 엘리야" 이다(마 11:14). 그러나 한편 그는 엘리야가 아니다. 엘리야가 왔으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마 17:12). 그래서 그는 자기를 엘리야로서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결코 약속한 일이 없는 그런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 그는 자기가 "선지자"임을 부인했다.
첫째, 그는 모세가 말했던 "주께서 자기 형제들 위에 세우실" 그런 선지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그런 선지자는 바로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미 자기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
둘째, 그는 사무엘과 엘리야 같은 또는 공적인 사건에 끼어 들어 자기들을 로마의 명예로부터 구원해 주리라 기다리는 그런 선지자도 아니었다.
셋째, 그는 선지자들처럼 꿈이나 환상에 의한 선지자가 아니라 계시를 지닌 선지자였다. 그래서 그의 전도와 사명은 다른 한 선지자라고 말했다면 그의 말은 유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말을 조심을 하여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 긍정적으로 보자. 그에게 온 자들은 적극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무슨 권위"로 일하는지를 알려 했다(22절). "누군지 말하라. 우리는 너를 믿고 세례를 받진 않지만, 우리를 보낸 자에게 대답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요한은 신실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부러 애매한 답을 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분명하고 뚜렷한 답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그래서 요한은 그렇게 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여기서 다음을 관찰하자.
[1] 요한은 성서의 구절을 인용해, 자기에서 성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냈으며, 또 자기 임무가 신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된 것임을 말했다. 성서가 말하는 사역자의 사명은 고귀한 소명을 받은 사람에 의해 수행되며, 하나님 말씀만이 그렇게 만든다.
[2] 요한은 대답으로써 매우 보잘 것 없고 겸손한 그리고 자기 부정의 표현을 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낮추어, 자신의 관작이 아니라 의무와 의존에 의해 수행함을 나타내며,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나는 그저 "광야의 소리"라고 말한다.
[3] 요한은 자기에게 경청하도록 하고, 감명을 주고 깨우칠 수 있도록 설명했다. 그는 "소리"이다.(사 40:3 참조). 또 경성의 소리이며 지시하는 소리이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소리요 매개자이다. 바울과 아볼로도 단지 전달자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 요한은 한 "인간의" 소리였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천둥소리와 큰 나팔소리처럼 자기들을 두렵게 하는 소리로써 율법을 받을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때처럼 (왕상 19:12) 복음은 인간의 목소리로, "조용하고 작은 음성"으로 들을 준비를 해야 했다.
둘째, 그는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a.. 그의 "진지함"과 "집요함"이 사람들을 회개토록 부르고 있다. 즉 여유를 주지 않고 큰 소리고 외치었다. 사역자들은 진지함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열정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그것에 먼저 자신들이 감화를 받아야한다.
b. 그가 가르치는 교리는 아주 "공개적이다." 그는 "외치는" 소리로써 모든 사람들이 듣고 주목할 수 있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잠 8:1)
셋째, 목소리가 외치는 곳은 "광야이다." 광야는 조용하고 고적한 장소로써, 세상의 소음이나 분주한 일이 없는 곳이다. 세속적인 일의 시끄러움에서 떠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넷째, 그의 외침은 "주의 길을 곧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a) 하나님의 길에 대해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주의 길은 확실히 바르나, 율법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굽게 만들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본래의 법칙으로 돌아오도록 요구하고 있다.
(b)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사람들이 영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예비하러 왔다. 즉 왕자나 위대한 사람을 위해 "방을 예비하는" 선발자(先發者)들과 같은 격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영광의 왕이 들어가실 것이다.(시 24:7).
2. "세례"에 관한 그의 증언을 보자.
(1) 그것에 관한 사자들의 질문을 보자.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절).
[1] 그들도 세례가 거룩한 의식이나 행사로써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할 줄로 알고 있었다. 유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할례와 더불어 개종자의 입단식으로써, 죄로 더럽혀진 이전의 상태에서 씻음을 받는 표시로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됨으로써, 더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새로운 것을 즐겨 사용하진 않으셨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2] 사자들은 세례가 메시야의 도래 때에 사용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며"(슥 13:1), "맑은 물이 뿌려지리라"(겔 36:25)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엘리야, 그리고 "바로 그 예언자"는 죄로 "더러워진 세상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3] 그러므로 사자들은 요한이 어떠한 권위로 세례를 베푸는지를 알려했다. 그가 엘리야 혹은 그 예언자가 아니라는 자기 부인은 사자들에게 더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사람의 겸손이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또 나뿐 편견을 조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교만으로 유혹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선고해 우리의 교만한 사상을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하려고 우리 자신의 겸손한 사상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
(2) 거기에 대한 요한의 설명을 보자(26,27절).
[1] 요한은 자기 자신을 외형적인 세례를 주는 사역자라고만 나타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게 전부이다. 나는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이 아니다. 나는 세례 요한이란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없으며, 물이 상징하는 성령의 은사는 줄 수 없다."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후 12:6). 세례 요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인 체해서는 안 된다.
[2]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그들에게 지시했다. "나는 단지 물로 세례를 주며, 그것을 나의 최선의 사명으로 여긴다. 나는 단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안내할 따름이며, 그분에게 사람들을 넘겨 줄 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의 위대한 역할이란 바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을 그대로 일반인들에게 전해야 한다. "내가 전하려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15절).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였다. 그의 증언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요한을 시기했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자기를 능가할 사람이 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첫째, 요한은 이 때에 "사람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했다. 즉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는 무리들 사이에서 계셨으며, 그들 중의 한 사람처럼 보여졌다. 여기서 이 점을 살피자. 이 세상 안에는 참다운 가치가 숨겨져 있다. 여기서 이 점을 살피자. 이 세상 안에는 참다운 가치가 숨겨져 있다. 즉 참다운 탁월성은 흔히 가려져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숨겨놓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잘 모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주님이 바로 곁에 계셨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둘째,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분이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먼저 택하심을 받았다." 이 말에 이어서 그는 "나는 그의 신들에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며, 너무 위대하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명도 나는 감당할 수 없다"(삼상 25:41).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아는 자들은 그에 대한 봉사, 심지어 가장 낮은 문지기까지도 영광으로 알고 있다(시 84:10 참조). 만약에 요한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가까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감당치 못한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들은 얼마나 무가치하랴!
이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자. 메시야가 그들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다는 외침에, 그들은 메시야가 누구이며, 어디 있는지를 들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 사자들은 요한을 방해하러 왔기 때문에, 그에게서 어떠한 교훈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는 "고의적인"것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었으나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것이 행하여 진 장소에 주목된다. 이 장소는 "요단강 건너편의 베다니"이다(28절). 베다니는 "과객의 집"이란 뜻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장소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장소로 추측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길이 열려 복음이 들어간 곳이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 요단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다. 아마도 요한이 그 장소를 택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거의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모스 선지도 법정에서 먼 이 지역에서 외쳤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그의 평화"에 속한 길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주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증거 했고 그의 세례를 받으러 온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른다 할 수 없었다.
예수의 등장(요1:29-36)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으로서, 요한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이 증언을 했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즉시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았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시험받으시고 "자기에게로 나아오시는 예수를 보았다."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전도하며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즉시 돌아왔다. 그리스도가 아주 모범으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격려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1. 우리가 "어려운" 시험 상태에 있을 때는, 규례(의식)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한다(시 73:17). 사탄과의 싸움은 우리로 성도들과 더욱 밀접한 친교를 갖게 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더 낫기 때문이다.
2. "영예로운" 승리 때문에 "의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이긴 후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지만, 결구 전도하고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로 돌아 왔다. 우리가 하는 이쪽에 속해 있는 한,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은혜와 위로를 받는 일반적인 방법에 가까워져서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두 증언"이 나타나는데, 이 두 증언이 "하나로 일치"된다.
Ⅰ.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나온 첫 날, 그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있다. 즉 요한이 자기 앞에 있는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한 4가지가 있다.
1.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것을 배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는 인간의 죄 때문에 보상되어지고,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큰 희생 재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제사의 희생물로 쓰이는 어린양이 자기 자신이라고 암시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온유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자기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되어야 하고(사 53:7), 나아가 특별히 다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1] 아침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날마다의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이다(출 29:38). 이것은 영원한 속죄를 증거 해 주는 그리스도의 예형이다.
[2] "유월절의 어린 양"을 가리킨다. 그것은 문설주에 그의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인들을 멸망시키는 천사들로부터 구했던 양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다(고전 5:7).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고(롬 3:25), 하나님에게 바쳐졌고(17:19),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다. 그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속죄제로 드릴 염소를 뽑는 제비를 "주님(여호와)의 제비"라고 했다(레 15:8, 9). 그래서 죄의 대속물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불리 우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져다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히 9:26), 죄를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그것이 사명이었다. 세례 요한은 죄의 용서를 받도록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비록 우리의 회개가 죄에 대하여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죄의 용서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가능하며, 또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근거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 뿐 이다.
[1] 그리스도는 "죄를 짊어지신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증보자인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고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죄를 짊어지신다. 그가 오신 것은
첫째, 그의 죽으심으로써 죄를 제거하며 인간이 처해 있는 심판을 거두게 하시고, 박탈된 권리를 회복시키며, 그의 배상 행위로서 회개하고 순종하며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려는 것이다.
둘째, 은혜의 영으로 죄의 권세를 물리침으로써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롬 6:14).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 피 속에 있는 죄들을 깨끗이 씻기를 바라고 있다. 즉 그는 우리를 "의롭게"하시며 동시에 "성화 시킨다." 그는 죄를 짊어지신다
곧 그는 세상에서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 ovavi,rwn. - 이것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적인 제거를 뜻한다. 그 짊어지심은 그의 계속적인 활동이고 임무이며,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끝날 줄 모르는 "시간의 임무"이다. 하늘에서 그의 계속적인 피의 중재와, 땅에서 그의 계속적인 은혜의 감화를 통하여 그는 항상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2]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있다. 그는 어느 나라나 국가, 그리고 어느 언어를 가지고 있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하나님에게 구하고 있다. 율법의 제사는 이스라엘의 조에 대한 이스라엘만의 보상이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해 제물이다(요일 2:2 참조).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에 용기를 준다. 만일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짊어지신다면, 나의 죄를 짊어지시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자기 능력을 죄가 범람하는 중심 부분에 거누고서, 그 뿌리를 꺾으시며, "온 세상에" 편만한 "사악함"을 물리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셨다.
[3] 그는 "죄를 친히 담당하신다." 그는 "세상 죄를 담당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난외에는 그런 뜻으로 되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죄를 가져간다. 희생 염소가 자기 머리에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듯이(레 16:21),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다." 하나님은 엣 세상의 죄를 제거하셨던 식으로, 역시 죄인을 제거시킴으로써 죄를 제거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없애는 방법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죄"를 자기 아들에게 부담시킴으로써 죄인들을 살려두시고 계신다.
3) 믿음의 눈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죄를 담당하는 그를 보면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에 대항하는 새로운 결심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제거하러 오신 그런 금식에 매달리지 말라. 그는 우리의 죄나 우리 자신을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계 1:5)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도록 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라진다면 영리는 거기에 감사해야지 불평할 이유가 없다.
2. 요한이 전에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30,31절). 요한은 예수께서 서 계신 곳을 가리키면서, "내 뒤에 오신다고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말했다.
(1) 요한은 가장 영예로운 예언자였다. 많은 예언자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했지만, 요한은 이미 그분이 오신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이 그다." "지금" 내가 그를 보며, "가까이서" 보았다(민 24:17). 현재의 믿음과 장차의 기다림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우리는 보지 않은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장차에는 우리의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과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말하던 사람, "나의 그리스도," "나의 전부," "내가 사랑하는 이," "내 친구"가 이 사람이다.
(2) 요한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 했다. 자기 뒤에 "한 사람이" 올 것이라 했다. 곧 "강한 사람," "남자"다운 사람, "하나님의 오른 팔과 같은 사람"이다.
(3) 그는 자기가 전에 말한 것을 인용한다. "내가 말했던 그가 이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점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그것들을 철회해야 될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만큼 그를 더 존경하게 된다. 요한은 여전히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가 어떤 외적인 장관이나 위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요한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말한 그가 이분이며, 나 이전에 택함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그를 말하지 않았던들 지금까지 요한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가 이렇게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4) 그는 이러한 예수와 어떤 사건의 공모나 동맹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를 모른다." 비록 서로(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사촌간이다) 어떤 인척 관계는 있다 하더라도, 서로 사이에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 즉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것을 볼 때까지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서로의 삶의 양식이 달랐다. 즉 요한은 대부분을 광야에서 그리고 고적한 데서 보냈으며, 예수는 나사렛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지냈다. 그들 서로간에 연락이나 대화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서로간의 개인적 어떤, 계획이나 모의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늘의 지시나 처분에 따라 진행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모든 공모의 관련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일체의 편파성도 부정한다. 그는 예수를 친구로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서로 사이에 우정이나 친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예수가 정말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그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3:27).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그들이 보지 못했던 사람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복이 있다.
(5) 요한의 전도와 세례의 중요한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그를 드러내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1] 예수를 만나 본 일이 없었지만, 요한은 그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늘의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알려지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2] 요한은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 아직도 미궁에 있지만,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야 한다는 일반적인 확신만을 가지고도 결의를 가지고 일을 수행했다. 보이지 않는 일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의무를 능히 이행할 수 있다.
[3] 하나님은 점차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가 분명하게 드러내리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그런 확신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그가 그를 보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보지 않는 것을 멀지 않아서 보게 될 것이다.
[4] 말씀과 규례(의식)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서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는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5] 물로 주는 세례가 우리의 부패와 타락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길목이 된다.
3. 이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임하신" 그 사람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확실케 하기 위하여, 그는 세례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사명의 놀랄 만한 증거가 되었다. 이제 그것을 더 살펴보자.
(1) 세례 요한은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의 증거를 보았다. 그는 "기록을 가졌다." 그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말한 것이 아니라, 열정과 단호함을 가지고 아주 확고하게 목격자로서 증거하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맹세했다. 즉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보았다." 요한은 직접 성령을 표상하는 비둘기를 보았다. 이제 그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머물러,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스도는
도는 왕관이 내려졌거나 그의 형체가 변화됨으로써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옴으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갈 분 임이 알려 지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첫 증언도 성령이 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에 의해서 드러난다. 하나님 자녀로서 영광은 장차 주어지게 된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1]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모두 "하늘에서" 온다
[2] "비둘기같이" 임했다. 순종과 온화함, 그리고 온순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가 "가르치기에 적합함"을 나타낸다. 또 비둘기는 평화를 나타내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져 왔다.(창 8:11).
[3] 예언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임한 성령은 "그에게 남아 있다"(사 11:2). 성령은 그에게 삼손처럼 때때로가 아니고(삿 13:25) "내내" 계신다. 그에게는 성령이 "측량할 수 없도록" 주어졌다. 즉 그에게는 항상 성령이 계셔서, 어느 때고 일할 수 있었다.
(2) 요한은 증거를 아주 확실하게 해야 했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다들이란 사실을 예측에서가 아니고 순전히 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알았다. 그것은 "지정된" 약속이었다. "나는 그를 몰랐으나 전에 나에게 말씀하신 그가 표적이 나타나면 그리스도인 줄을 알라고 했다"(33절). 그는 이 계시가 없었더라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다.
[1] 요한이 전도하며 세례를 베풀었던 확신의 근거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만족으로써 증거 할 수 있었다.
첫째, 그는 "보냄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이 "세례를 베풀도록 그를 보냈다." 그는 자기가 정했던 것을 하늘로부터 보장받았다. 사역자로서의 부름이 명백하면 때때로 그의 사역이 성공치 못하더라도 확실한 위로가 있다.
둘째, "시급함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그가 "물로써 세례를" 주도록 보냄을 받았을 때,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줄" 사람을 지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의향에서,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주고 그를 기초로 해서 건물을 짓고 완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를 영접토록 가르쳤다. 밖으로 드러난 표적들이 봉사를 통해서 생명과 능력으로 나타난다. 사역자들은 귀에 말하지 말고 마음에다 말하라. 그러면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을 것이다.
[2] 그가 메시야란 인물을 말하는데 사용한 말의 확실한 근거를 알아보자. 하나님이 사울에 관해서 사무엘에게 지적했듯이 요한에게 전에 한 표적을 주었다.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거든, 그 사람이 그다." 이 말은 어떠한 잘못도 예방할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증언토록 했다. 이러한 말이 요한에게 주어짐으로써 담대하게 되었을 때는 기대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그 예언이 정확하게 사건으로 나타났을 때, 그의 믿음은 그만큼 더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우리로 믿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어졌다.
4.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이 요한의 증언의 결론이 되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도다"(33절).
(1) 외쳐진 진리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가 들리어 요한이 기록했는데, 그는 신의 능력을 가지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뿐만 아니라 신의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마 16:16). 이것은 사도신경의 한 내용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2) 요한의 증거를 보자. "내가 보고 증거 하였다. 내가 지금 그 사실을 증거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보는 순간에 증거 했었다(기록했다)."
[1] 그는 증거 할 것을 보았다. "우리는 보고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2] 그는 본 것을 증거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그래서 그만큼 더 신빙성이 있었다. "너희에게 전하려는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Ⅱ. 그 다음날에 그리스도에게 대해 요한이 한 증거가 있다(35,36절).
1. 요한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고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요한은 무리로부터 떨어져 자기의 두 제자와 함께 서서 이야기하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았으나, 직접 그에게로 가지는 아니했다. 그것은 가가 예수와 모의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의심도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즉 침착하게 그러면서 계속 눈길을 떼지 않았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때때로 그리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요한은 전에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지금은 그를 "주목"하고 있다(요일 1:1).
2. 그는 그리스도에 고나한 진리의 증언을 전날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의 증언은 한결같고 계속적이며 모순이 없었다. 그의 말은 바울처럼 공과 사가 일치되었다(행 20:20, 21). 사람들에게 들은 것을 반복하는게 좋다(빌 3:1). 훌륭한 사역자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속죄 교훈을 특히 강조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
3. 그는 자기와 같이 서 있던 두 제자들에게 이 교리를 특별히 주지시키고 있었다. 그는 기꺼이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자기 두 제자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자기 두 제자를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요한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택했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택했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했다(눅 1:17). 그는 그리스도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 이외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겸손하고 관용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낮추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장점들을 주려고 한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명성이란 자기 자신을 다 내 주도록 헌신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 천자문을 성경적 8자행시로! ~
@ 곤지갈석 거야동정 @
= 세례요한 =
昆蟲(메뚜기)을 먹으며
지내면서 曠野生活 해
渴症과 虛飢症 甚하여
石淸과 물을 마셨을까?
擧動과 行色의 모습은
野人같고 엘리야같아
東方의 燈불이라면서
正金같은 삶이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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