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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예수님의 발에 기름부은 여인/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눅 8:1-15)

by 은총가득 2020. 11. 18.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도유(途油) 사건(눅 7:36-50)

[ 성경묵상 ]

7:36-50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도유(途油)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초대받으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기고 향유를 부은 것에 대해 시몬이 이를 비난하자, 예수께서 여인의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심으로써 반대로 시몬의 태도가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에 있음을 지적해 주시는 내용이다. 이 문단 역시 윗문단과 마찬 가지로 죄인들 및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대조적인 반응을 예시해 주는 기사라는 점에서 문맥적인 연결성을 보여 주고 있다.

36-50절에는 시몬의 집에서 발생한 한 여인의 도유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 한 여인에 의하여 기름부음 받으신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마 26:6-13 ; 막 14:3-9 ; 요 12:1-8) 이는 본단락과는 다른 사건이다. 즉 다른 복음서는 예수께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마지막 안식일에 유대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본단락은 그보다 시간적으로 훨씬 앞서는 갈릴리 전기 사역 중에 있었던 일이다. 이처럼 시간과 지역이 다를 뿐 아니라 등장 인물과 예수께서 주시는 교훈에 있 어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다른 세 복음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신앙과 그녀의 기름부음으로 예수의 죽음이 준비되어지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본단락은 어느 한 여인의 헌신적 태도와 더불어 죄인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죄 용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당시 유대인들은 집에 귀한 손님을 초청하면, 맨 먼저 손님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을 하고, 다음 발을 씻기며, 향로를 피우거나 향유를 손님의 머리에 부어 발랐다. 바리새인인 시몬은 위와 같은 일을 예수님께 하나도 시행하지 않은 듯 하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 질문 1 ]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 예수님께 드린 것이 무엇인가?(37,38절)

[ 질문 2 ]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한 비유는 무엇인가?(41,42절)

 

 

향유를 발에 부음

[ 성경대조 및 주해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밥상 앞에 앉으셨다.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玉盒)이란 옥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작은 그릇을 말한다.

이 여인이 가지고 나온 옥합에 담은 향유는 일반적인 기름이 아니라 매우 값비싼 것으로서 석회석의 일종인 알라바스터(alabaster)라는 석재로 만든 용기에 담겨져 밀봉되어 있었다. 이러한 향유는 당시 부유한 여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구하기도 어렵고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한번 개봉하면 그 자리에서 다 소모하여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개봉하지 않았다.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의 등 뒤로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씻다’라는 말로 번역된 ‘엑세맛센’은 ‘에크맛소’의 미완료 형태이다. 앞절에서 여인의 행동을 묘사하는 세 단어가 모두 과거분사형으로 쓰였는데 이곳에서는 ‘엑세맛센’을 포함하여 여인의 행동을 묘사하는 세 단어 모두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여인의 행동 묘사에 있어서 이렇게 대조적으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반복’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붓고 그 발에 입맞추는 행위를 미완료 시제를 통하여 묘사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씻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크맛소’는 그 원래적 의미가 ‘깨끗이 닦아 내다’라는 의미로 이 어휘는 예수에 대한 여인의 애뜻한 행위를 부각시켜 준다. 건조한 팔레스틴의 기후하에서 매우 많은 먼지가 묻었을 예수의 더러운 발을 깨끗이 닦았다는 표현으로 보아 그 여인은 아마 지금까지 흘린 눈물을 모아 두었던 눈물병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먼지를 씻어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여인이 머리 ‘털’, 곧 ‘드릭스’로 닦아냈다는 것은 그녀가 머리를 풀고 자신의 눈물로 발을 닦았다는 표현이 된다. 당시 여인이 머리를 풀고 우는 것은 장례식 때만 허용되는 것으로 이 표현 역시 예수를 향한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잘 나타내준다.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리기를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저 여자는 죄인인데!" 하였다.

바리새인 시몬은 지금까지는 예수가 실제 선지자일 수도 있다는 약간의 가농성을 열어 두었지만 그가 죄인인 여자와 아무런 거부 반웅없이 접촉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조차 거두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하시니, 시몬이 말하기를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는 헬라어로 '아포크리노마이'인데, 여기서는 시몬의 내적인 비난의 심정에 '반응하여'라는 의미로 쓰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읽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시몬의 생각을 알고 대응하신 것이다.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데나리온'이란 무게가 3.8g인 로마의 은 동전이며, 한 데나리온은 인부가 하루 일한 노임 정도의 금액이다.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나?"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시몬이 대답하기를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판단이 옳다."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그런 다음에, 그 여자에게로 몸을 돌리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거니와,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그 원인은) 그녀가 주님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더 좋다. '그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그 결과)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그러자 밥상 앞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한글 개역 성경은 ‘카이’를 ‘…도’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카이 하마르티아스’를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죄까지도’라는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까지도’라는 표현 속에 포함되는 예수의 또 다른 행적은 무엇인가? 우선 여기에 나오는 표현은 바리새인의 생각이 아니라 ‘함께 앉은 자들’의 생각이다. 이들은 예수를 따라 움직이는 무리들일 수도 있고 바리새인인 시몬이 사는 동네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들은 예수의 ‘죄사함’에 비길 만한 행적 중 어떤 것을 보았기에 ‘죄까지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본단락 안에서는 죄사함과 비길 만한 예수의 행적이 드러나 있지 않다. 좀더 넓게 보아 본장에서 이와 비길 만한 행적은 말씀으로 백부장의 종을 고친 사건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사건이 있다. 따라서 이는 이 두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치유 이적을 베푼 곳에서는 이미 장소 이동(11절)을 하였기 때문에 본절에 나오는 죄사함에 비길 만한 사건은 보다 직접적으로는 죽은 자를 일으킨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11절에서 장소 이동을 한 후 본절에는 어느 곳으로도 예수께서 이동하셨다는 언급이 없다. 셜령 이 동하셨더라도 성경이 예수의 행적을 기록할 때 어떠한 성이나 동네를 떠나 먼 곳에 있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경우는 반드시 거론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앉은 무리들이 경험했던 예수의 또 다른 행적은 죽은 자를 살린 사건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맥락에서 ‘죄까지도 사하는가'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죄사함까지 선포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예수에 대한 신뢰의 감정에서 나옹 경탄의 소리가 아니라, 어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을 선언하는가 하는 의아심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므로 더 이상 괴로움 속에서 지내지 말고 평안히 지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포류우 에이스 에이레넨’을 직역하면 ‘평안 속으로 가라’가 된다. 전치사 ‘에이스’를 사용하여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은 헬라어가 가지는 독특한 언어 구조이다.

이를테면 ‘어떠한 대상을 종교적으로 믿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피스튜오 에이스’는 ‘믿음으로 자신을 바친다’는 매우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의미를 내포한 표현이다. 본문의 ‘에이스’ 가운데도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평안’을 의미하는 ‘에이레넨’의 원형 ‘에이레네’에도 적극적 의미가 담겨 있다. ‘에이레네’는 70인역(LXX)이 보여 주듯이 구약 히브리어의 ‘솰롬’과 상응하는 어휘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솰롬’의 의미는 단지 심리적 안정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완성’, ‘충실’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이 ‘솰롬’을 ‘평안’으로 인식할 때는 구약 역사가 보여 주는 ‘애굽의 종살이’, ‘광야의 방황’, ‘가나안에서의 전쟁’과 같은 고난과 역경의 삶 가운데서 얻어진 ‘평안’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주고 싶은 ‘평안(에이레네)’ 또한 이러한 것이었다. 예수의 말씀 가운데서 이러한 ‘평안’을 얻은 여인은 더 이상 죄책감 가운데서 소극적으로 도피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참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 ]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의 발에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음 ( 7:36-50 )

이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리스도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받으시던 때를 즈음하여 본문의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여 준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1) 한 바리새인이 그리스도를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36절). 이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바리새인은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9절). 그런데도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에 응하여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그리스도에 대해 편견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담대하게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2) 불쌍한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큰 경의를 표하였다.

그 동네에 사는 그 여인은 '죄인이요 창기로' 불명예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시기 위해)앉으셨음을 알고(37절) 그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왔다.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는 감사를 드릴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고, 가지고 온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여기서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정면에서 보지 않고, 그 뒤로 가서 여종의 일을 감당하였다.

이 선한 여인이 행한 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 함:그녀는 울며 그리스도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죄가 들고 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눈물의 샘이 되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화장 되어 있었을 그녀의 얼굴은 지금 눈물로 얼룩져 있다. 전에는 예쁘게 땋아 치장되었던 그녀의 머리털은 이제 수건이 되었다. 그녀가 전에는 죄 때문에 슬퍼했지만, 이제 그리스도에게로 올 기회를 얻어 그 슬픔을 이기게 되었다고 우리는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

2) 주 예수에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그녀가 사랑이 많다는 사실은 주 예수께서 주목하신 점이었다(42,47절).

그녀는 그의 발을 씻겼다. 눈물 곧 기쁨의 눈물로 씻겼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사모하는 구주와 그토록 가깝게 있다는 것을 느끼며 도취경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사랑의 입맞춤인 동시에 경모의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그의 발을 자기의 머리털로 닦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 발을 씻길 물이 나왔으며 그녀의 머리털은 그것을 닦을 수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진한 사랑이 있다.

(3) 그리스도가 이 불쌍한 여인이 표하는 경의를 받아들인 데 대해 그 바리새인들은 화가 났다(39절).

그는 그 마음에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만큼 지식이 있고, 성결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가 자기에게 그토록 가까이 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교만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거만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에 주목하자.

(4) 그리스도는 그 여인이 자기에게 행한 일과 자신이 그 일을 받아들였던 것이 정당하다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바리새인이 마음 속으로 말한 것을 알고 그에 대해 답변하였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말이 있다(40절). 시몬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였다.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제 그리스도는, 그 바리새인에게 답변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이치를 따져 설득하셨다.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용서받은 죄인이며, 이러한 사실은 그녀가 회개한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그에게 행한 일은 구세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만약 그토록 큰 죄인이었던 그녀가 용서받았다면,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신의 구주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고 그녀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며 바리새인이 그 일에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1) 그리스도는 하나의 이유를 들어, 이 여인의 죄가 컷으면 컷을수록, 그녀가 죄사함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에게 보여주는 사랑도 그만큼 커야 마땅하다는 것을 시몬이 인정하도록 설득하셨다(41-43절).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열 배를 빚지고 있었다. 빚을 준 사람은 아주 너그럽게 그 두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며, 그들을 대상으로 소송하지도 않았다. 이제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큰 호의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는가? 그 바리새인은 분명히 대답하였다.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자와 빚을 준 자 간의 도리를 배우게 된다.

① 빚진 자는 갚을 것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
② 하나님의 섭리로 빚진 자가 그의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빚을 준 자는 빚진 자를 혹독하게 대하지 말고 너그럽게 그를 용서해야 한다.
③ 채권자가 자비롭다는 것을 깨닫은 채무자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를 사랑해야 한다. 빚을 갚을 수 없게 된 채무자들 중에는, 자기들 때문에 손해를 입은 채권자들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원한을 품고, 그들을 좋게 대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채권자로 (또는 주 예수 자신을 채권자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탕감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인은 채무자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 죄는 빚이요 죄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빚, 곧 순종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우리 주의 소유물을 허비하였고, 그럼으로써 채무자가 되었다.
㉡ 어떤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41절). 그 바리새인은 보다 조금 빚진 자였지만, 그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빚진 자였지만, 그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빚진 자였다. 이 여인은 많이 빚진 자였다. 어떤 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빚을 짊어지고 있다.
㉢ 우리의 빚이 많건 적건 간에, 그것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었으며 타협할 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우리 자신이 행한 의로도 우리의 빚을 갚을 수는 없다. 아니, 앞으로 회개하고 복종한다 해도 갚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빚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을 숨김없이 용서하시고자 하신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저지른 죄악은 우리의 책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으로써, 그리고 기꺼이 죄를 사해 주시는 분으로써 선포하였다.
㉤ 죄를 용서받은 자들은 그들을 사해 주신 분을 사랑해야 한다. 많이 용서받은 자일수록 그를 많이 사랑하는 것을 당연하다. 회개하기 전에 죄가 많았던 자일수록 나중에 더 훌륭한 성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핍박하던 사울이 전도하는 바울이 되었을 때, 그는 더욱 많은 수고를 담당하였다.

2) 그는 이 비유를 그 바리새인과 그 죄인의 상이한 태도와 행동에 적용하였다.

그리스도는 그가 적게 탕감받기는 했지만, 탕감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케 하시려는 것 같다. 물론 그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지만, 이 불쌍한 여인이 보여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펴보라"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많이 탕감받은 자이기 때문에 너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또 그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44절). "이 여자가 내게는 너보다 얼마나 더 친절한 친구인지를 보라. 내가 너의 친절은 받아들이고 그녀의 친절은 거절해야 하겠느냐? 너는 내 발을 씻을 물 대야조차 가져오라고 명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더 많은 일을 하였다. 이 여자는 나를 크게 사랑한다는 표시로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너는 나에게 입맞추지 않았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평소 머리에 바르는 보통의 기름조차 내게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옥합에 든 값진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수고하고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을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은 그런 데까지 도달하기를 원치 않으며 값싸고 안일한 신앙생활에 안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바리새인이 트집잡는 것을 잠잠하게 하셨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그리스도는 그 여인이 죄 많은 자라는 것을 시인하셨다. 그러나 저의 사랑이 많으므로 그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저가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랑이 많음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사함받은 일이 너처럼 적은 자는 네가 하듯이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큰 죄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얻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그들의 본보기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우리도 진정으로 죄사함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4) 그리스도는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 주셨다.

그는 그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그녀는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더불어 사죄를 받은 것이다. 이 말은 그녀가 다시 죄 짓지 않게 하는 얼마나 효과적인 예방책인가. 그 자리에는 그리스도가 죄를 사해 주고 죄인들을 용서한다고 선언한 데 대해 마음 속으로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49절),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고수하셨다. 이제 그는 기쁨을 가지고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는 참회하는 자들에게 즐겨 용서와 평안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50절). 죄에 대한 슬픔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모든 표현들은 믿음의 결과요 그 소산물이었다. 모든 은혜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을 지극히 영예롭게 하듯이, 그리스도도 그 믿음을 지극히 존귀하게 여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눅 8:1-15)

[ 성경묵상 ]

누가복음 8장 요약 ;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자신의 교훈을 상당수 가르치셨다. 또한 귀신 들린 광인과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유하신 사건은 인간의 절망적인 정황을 해결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풍랑을 잠재우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메시아의 초자연적 권능을 드러내 준다.

8:4-15 ;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밭의 상태"에 주안점을 두어 해석했으나 이런 식의 해석은 풍유가 된다. 여기서는 씨 뿌리는 자와 씨의 운명, 그리고 그 씨에 대한 반응에 그 초점이 있다. 곧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됨을 뜻한디. 씨가 열매를 맺는 경우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이, 그 말씀도 많은 소실을 경험하지만 그 말씀에 복종하는 이들을 통해서 커다란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 질문 1 ] 예수님이 이끄는 복음 전파 팀에 속한 여인들은 누구입니까?(2,3절)

[ 질문 2 ] 복음을 전파할 때 반드시 가져야 할 확신은 무엇입니까(8절)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그 뒤에 예수께서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것을 복음으로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예수와 동행하였다.

1절은 제2차 갈릴리 순회 전도 여행을 서술하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나타나는 전도 방식은 계속적으로 여러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순회 전도 방식이었다.

1절 이전에 나오는 ‘갈릴리 나사렛’(눅 4:14), ‘가버나움’(눅 4:31 ; 7:1), ‘나인’(눅 7:11) 등과 같은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다양한 지명들이 보여 주듯이 8장 이전의 갈릴리 전기 사역 대부분이 순회 전도 양태를 띠고 있었다.

제2차 갈릴리 순회 전도를 기록하고 있는 본 단락(1-3절) 이후의 내용 역시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는 치열한 예수의 삶의 일면을 잘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실로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셔서 가능한 많은 지역, 많은 사랍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쉼없이 돌아다니셨던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삶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그분 스스로의 토로(눅 9:58 ; 마 8:20)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한편 ‘그후’에 해당하는 ‘카텍세스’는 ‘잇따라’, ‘연달아’, ‘차례대로’란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서 순차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 누가만이 사용한 독특한 단어로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용례 역시 순차적 의미에 역점을 둔다(눅 1:3 ; 행 11:4 ; 18:23). 본절에서 ‘엔 토 카 텍세스’란 표현은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하시고자 계획하셨던 일들이 차질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이처럼 효과적이며 또한 열심으로 수행하셨던 것이다.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한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본절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막달라인’으로 불리웠는데, 이에 해당하는 ‘막달레네’는 ‘막달라 출신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서편, 디베랴 북쪽 약 4.8km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하나님의 탑(the tower of God)’이란 뜻이 다. 이 막달라 출신의 여인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려 오랫동안 고생하던 중 예수님에 의해 치유받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어 장사지낼 때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막 15:47), 안식 후 첫날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까지 갔으며(막 16: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먼저 본 영광스러운 증인이 되었다(막 16:9). 주님에 의해 치유받은 은혜가 그녀의 가슴 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잡았으면 일생 동안의 삶을 통하여 그토록 일관되게 헌신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한 번 치유받은 감격과 감사를 잊지 않고 남은 일평생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해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2절과 3절은 예수를 섬겼던 여인들에 대한 소개이며, 이들 가운데 특별히 두 여인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나온다. 그 중 한 여인은 2절에서 살펴본 막달라 마리아이고 다른 한 여인은 요안나이다. 이 두 여인은 매우 대조적인 인물인데, 이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본서 기자 누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요안나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였다.

‘청지기’에 해당하는 ‘에피트로푸’의 원형 ‘에피트로 포스’는 ‘돌보다’ 또는 ‘위탁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사 ‘에피트레포’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떤 것을 돌보도록 위탁받거나 그러한 영예를 얻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 단어는 관직 이름으로 쓰였으며, 이는 헤롯왕의 ‘행정 장관’ 정도의 높은 직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고관의 아내 요안나는 바로 앞에서 소개된 일곱 귀신들린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신분적으로 현격하게 구분된다. 누가가 예수의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특별히 이 두 여인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대표적으로 헌신한 여인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변에는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를 섬기게 되는 데는 지위 고하, 신분의 귀천이 문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섬기며 동역하게 됨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도도 엿보인다.

헬라어에는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다양한 단어가 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예로서의 맹목적 섬김’을 의미하는 ‘둘류오’, ‘자상하게 봉사함’을 의미하는 ‘데라퓨오’, ‘급료를 벌기 위해 봉사함’을 의미하는 ‘라트류오’, ‘공무에 봉사함’을 의미하는 ‘레이투르게오’가 있다.

그러나 본절에 사용된 ‘디아코네오’는 특별히 ‘자원하여 봉사한다’는 기본 의미를 가진다. 본문에 나타나는 ‘디에코눈’은 ‘디아코네오’의 미완료 형태로 여인들의 섬김은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희생적 봉사였으며,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었음이 잘 드러난다.

고대 순회 설교자들이 부유한 여인들로부터 재정 도움을 받은 경우는 흔히 있었다. 하지만 원문상으로 보다 잘 드러나는 것처럼 자신의 소유 중 일부를 떼어 아무런 대가 없이 자원하여 지속적으로 섬기는 것은 그리 혼한 일이 아니다. 즉 이는 자기 과시적으로 기분에 따라 일시적으로 재정적 도움을 준 일반적 경우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3절의 여인들에게 있어 그들의 재산은 자신의 배만 채우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는 수단도 아니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었다. 예수님과 그의 열두 제자들은 복음 사역에 전념하느라 생계 수단을 갖지 못했으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에 의해 구원받고 은혜받은 사람들의 재정적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바울 사도 역시 롬 15:27에서 신령한 것을 나눠 가진 자들은 그것을 나눠 준 자들에게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며, 갈 6:6에서는 가르침을 받은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헤롯의 청지기은 헤롯 안디바의 청지기를 말한다. 청지기는 관리인, 문지기, 행정 장관 등을 뜻한다.

요안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부활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듣게 되는 여인이다(눅 24:10).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복수형)'이라는 표현을 보면 요안나는 예수님으로부터 결정적인 치유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큰 무리가 모여들고,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또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니,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돋아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예수의 제자들이,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를 그에게 물었다.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 이다."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가에 떨어지는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돌짝밭에 떨어지는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결실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현재 진행되는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마음의 분열과 쓸데없는 사치와 낭비, 육신의 쾌락을 쫓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참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라는 표현은 병행 구절인 마 13:23과 막 4:20에는 없는 구절이나 말씀을 듣고 결실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5절 에서 ‘착하고’로 번역된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또한 ‘좋은’으로 번역된 ‘아가데’의 원형 ‘아가도스’는 선하고 유익한 것을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포기할 줄 아는 내면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결국 두 단어 모두 진리를 수용하려는 겸손한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표현이다.

한편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는 사람의 감정과 인격의 좌소로서 말씀을 이해하는 지성과 말씀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성, 그리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의지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중심체인 마음이 완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세상적인 염려와 유혹에 빠져 있지 않으며, 진리에 대해 적극적이고 겸손한 상태에 있을 때, 그 마음 속에 떨어진 말씀은 견고한 뿌리를 내려 삶을 변화시키며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좋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인내로 결실하는 자 ; 말씀의 씨앗으로 하여금 좋은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받은 그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지키며 인내로 성숙시켜야 한다. 본문에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네’는 ‘~아래에 머무르면서 버티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미래에 이루어질 소망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자리를 견고하고 참을성 있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휘포모네’는 선한 소망으로 견고하게 유지되는 마음의 힘을 말한다. 결국 10절 이하부터 본절까지 계속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굳게 지키며, 결실에 대한 선한 소망으로 자기의 신앙의 자리를 견고히 지키는 자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예수님을 돕는 여인들 ( 8:1-3 )

(1) 그리스도의 필생의 사업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그는 지칠 줄 몰랐으며, 선을 행하면서 두루 다니셨다(1절).

1) 그가 전파한 장소 : 그는 두루 다니셨다.

그는 순회 설교자이셨으므로 한 장소에서만 설교하지 않고 그의 빛을 사방에 퍼뜨리셨다. 그는 각 성에 두루 다니셨으므로, 그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모든 성과 촌을 다니셨듯이, 제자들도 이 땅의 모든 나라에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그는 성(도시)에만 간 것이 아니라, 시골 주민들이 사는 촌에도 가셨다.

2) 그가 전파한 내용 :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반포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은 기쁜 소식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전하러 오신 것이다. 구제와 화해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3)그를 따르던 자들 : 후에 어떻게 전파할 것이며 무엇을 전파할 것인지를 배우고자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다.

(2) 그는 생활 필수품을 어떻게 조달하셨나:

그는 그의 친구들의 호의에 힘입어 살으셨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 섬긴 여인들이 있었다(2,3절). 그들 중 몇몇의 이름은 나와 있지만,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1) 그들 대부분은 그의 능력과 자비의 기념비 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었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섬겨야 하며, 그렇게 하여 우리가 곤경에 빠질 때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을 섬겨야 하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그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2)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 마리아였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매우 사악했던 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가 바로 앞에서(7:37) 언급된 죄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녀는 회개와 개심으로 자비를 얻었으며 그리스도의 열심있는 제자가 되었다. 개심하기 전에 사악했던 자일수록 개심한 후에는 더욱더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자 애쓰게 된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실 때와 무덤에 들어가실 때 함께 있었던 여인이었다.

3) 또 다른 한 사람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였다.

그녀의 남편은 비록 헤롯의 궁정에 기용되어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그의 아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를 섬기도록 기꺼이 허락하였다.

4) 자기들의 소유로 그리스도를 섬긴 자들이 많았다.

그는 부요했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셨으며 그에게 주어지는 자선금으로 살아가셨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제자들의 생계를 낯선 자들에게 부담지우기보다는 잘 아는 친구들에게 신세지고자 하셨다. '모든 좋은 것들로 가르쳐 준 자에게 자기 소유를 나누어 주는 것'은 말씀을 배운 자들의 의무이다.


씨뿌림의 비유 ( 8:4-21 )

앞 부분의 단락은 그리스도가 열성으로 말씀을 전파하시는 데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1절).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열심히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4절). 그리스도는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각 성에 가셨지만, 여기서는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왔다.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오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로 오시면 그를 만났고 그가 그들에게서 떠나시면 그를 쫓았다.
큰 무리를 이루니. 그가 그물을 던져 잡을 고기가 많아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가르침을 받으려 하자, 즉각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그들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는 말씀을 듣는 데 필요하고도 훌륭한 법칙과 주의사항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 비유의 의미에 관하여 물었다(9절).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씀의 내연과 외연을 알도록 애써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비밀과 의미를 알게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느니라(10절). 만약 똑같은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그침으로써 그들이 그저 흥미를 가질 뿐인데 반해, 우리는 진실로 알기 쉬운 진리로 받아들여 진다면, 우리는 진실로 행복한 자들이며 무상의 은혜에 영원토록 빚진자들이다.

이제 그 비유의 내용과 설명을 살펴보자.

1)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에 대해서 토양과 같다.

인간의 마음은 능히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토양에 씨를 뿌리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2) 씨뿌림의 성공의 여부는 토양의 성질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됨됨이에 따라 우리에게 생명의 향기도 되고 죽음의 냄새도 된다.

3) 마귀는 교활하고 악의에 찬 원수이다.

마귀는 부주의한 자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감으로써 그들이 믿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만든다(12절).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러한 설명이 본문에 부연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귀는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것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믿음을 방해할 만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당장은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잊어 버리게 하거나 흘러 떠나가게 한다(히 2:1). 또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할 때 조차도 우리 마음 속에 그것에 대한 나쁜 편견을 갖게 하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리게끔 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믿어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부주의하게 듣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경멸하기도 한다.

이 비유를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밟힌다고 덧붙이고 있다(5절).

5) 말씀에 어느 정도 감명은 받으나 그것들을 깊고 지속적으로 간직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한 자들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가 없다(13절). 이들은 잠깐 동안은 믿으며 그들의 고백을 통하여 뭔가를 약속하지만 시험의 때가 오면 처음에 했던 선한 약속을 배반하게 된다.

6) 이생의 쾌락은 위험하고 해로운 가시와 같아서 말씀의 선한 씨앗이 결실치 못하게 방해한다.

여기 덧붙여진 이 말씀은(14절) 다른 복음에서는 없는 것이다. 감각의 쾌락은 아무리 적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깊이 빠지면 영혼을 파멸시킨다.

7) 단지 열매를 맺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온전한 결실을 맺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결실치 못한'이라고 한 것을 여기서는 '온전히 결실치 못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8)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곧 착하고 좋은 마음이다(15절).

하나님과 자신의 의무에 열중하는 마음, 정직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등이 바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말씀을 들은 후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하기도 하는 것과 같다.

9) 말씀을 잘 지키는 자는 인내로써 결실하게 된다.

이 말씀도 여기 누가복음에서만 덧붙여져 있다. 이는 끊임없이 인내하여 좋은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10)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야 한다'(18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삼가야 하며, 부주의하거나 가볍게 듣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들은 다음 우리가 얻은 것들을 잃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말씀을 전파하도록 임명된 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은 다음의 교훈을 명심하여야 한다.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만큼 베풀어야 한다 말씀으로 유익을 얻은 자들은 자신이 켜진 등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등불은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어서는 안된다(16절).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며 그 등불은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지금 은밀하게 행한 일이 머지않아 '알려지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17절). 우리 자신은 밝히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재능을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지속되든지 떠나든지 한다. 즉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게 되는 것이다(18절). 은사를 받아 그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 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는 '그 가진 것'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마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즉, '가진 줄로 알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버려지는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일 뿐 참된 은총은 아니다. 사람들은 단지 소용없는 것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보다 그의 제자들을 더 가까이 하며, 그들을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시다(19-21절).

이것은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말씀을 충실하게 듣는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자들에게 크나큰 격려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쫓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그에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가까운 친지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다지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자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를 보려고 밖에 서 있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친지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의 일을 하는데 더 분주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자기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척들이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


왜 내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눅 6:27-36)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과 크게 싸운 후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던 한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편과 싸운 이후로 몇 번의 설교를 통해서 “너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먼저 용서하라.”는 내용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고 남편에 대해 원망하고 있던 그 여집사님은 설교를 들을 때마다 불평했습니다.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데 왜 내가 그래야 돼?”라는 의문도 가졌습니다.

혹시 그 여집사님과 같이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잘못은 저 사람이 했는데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하는지 불편하게 생각했던 적은 없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속으로

1. 사람들과의 관계와 관련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27-30)

27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구절별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27절) 이 구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8절)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이 있을 때 똑같이 그 사람을 저주하기보다 그 사람을 축복하라고 하시고 우리를 모욕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로 도리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29절) 우리의 한 쪽 뺨을 치는 사람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시고 강제로 우리의 겉옷을 빼앗으려 하는 사람에게 속옷마저 주라고 하십니다.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30절)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는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주고 우리의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다시 달라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정에 치우쳐 살아갈 때가 많은 우리로서는 참 순종하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성경 말씀 가운데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들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명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들이 어떻게 들립니까? 혹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2. 나를 미워하거나 저주하는 사람,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 등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1)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부터 네 번째 문제에 대한 답까지 모두 세 가지 답은 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와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왜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자들에게 선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절) 관계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 나를 미워하거나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 내게 실수를 범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면 나도 실수를 범하거나 누군가를 힘들게 할 때 용서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거나 저주하는 사람, 모욕하는 사람,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대해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해주어야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야 주님께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라는 말씀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나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십니다.

결국, 우리도 누군가에게 실수를 하거나 부당하게 대하거나 죄를 지을 수 있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실수하거나 부당하게 대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와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자들에게 선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3.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그처럼 순종하기 어려워 보이는 명령들을 주셨겠습니까? 우리의 영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32-34, 36)

먼저 36절을 보십시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절) ‘너희 아버지’는 명백하게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 정체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희 아버지를 닮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니 그 분의 자녀인 우리도 우리의 아버지처럼 자비로와야 한다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32-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32-34절)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우리를 선대하는 사람을 선대하는 것,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주는 것, 모두 이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죄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정체성을 가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 ‘다름’이 바로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 우리를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거나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와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자들에게 선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어, 이건 너무 심한 요구인데?”라거나 “왜 내가 꼭 이렇게 해야 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그 정체성에 합당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각종 부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까지 말입니다.


4.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장차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35)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35절) 이 구절은 두 부분은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는 명령 부분입니다. 둘째는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는 약속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면 두 가지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라는 말씀이 말해주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게 됩니다. 가까운 미래에 그런 상이 주어질 수도 있고 장차 주님 나라에서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주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면 장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급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는 결과가 주어질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와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자들에게 선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내게는 원수 같은 사람, 나를 모욕하고 저주하는 사람,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한 주간의 실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서 한 주간 동안 축복하며 기도하기

마무리하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변화를 포함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히 나와 부정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기에, 내가 주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용서받고 용납되기 위해서, 그리고 장차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원수 같은 사람들, 참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까지 품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출처 ; 복있는사람, 2018년 1,2월호..<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