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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지혜로운 청지기와 불의한 청지기

by 은총가득 2020. 11. 18.

하나님 나라 제자의 기준, 불의한 청지기(눅 16:10-18)

[ 성경묵상 ]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제자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과 권위를 우선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다.

재물과 소유에 대한 태도를 하나님 나라 제자는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됨이 없이 똑 같은 삶을 산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이 땅에서 복을 받아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기를 원하는 데 있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 나라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맡겨진 소유는 절대적인 아니라, 청지기로서 사용권을 위임받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많은 물질을 가져 풍요로움을 갖기를 원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물질을 어떻게 선용해야 하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유한하고 일시적인 세상 재물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충성되게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두 번째 기준은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데 있다.

주님의 복음에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천국 문이 열려 있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더라도 여전히 천국 바깥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제자가 되는 길은, 먼저 세상 물질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느냐 가지지 못하느냐에 있으며, 다음으로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질문 1 ] 천국의 제자는 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10-13절)

[ 질문 2 ] 천국의 제자는 주님의 말씀과 권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14-17절)

나라를 제자 삼는 하나님의 8가지 영역 / 란다콥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자신이 사는 지역 사회와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 왔다...

 

 

[ 본문 개요 ]

16:11-12 ; 불의한 재물과 남의 것, 참된 것과 너희의 것이 서로 대치된다. 이것은 '너희가 만일 궁극적으로 너희의 것이 아닌 남의 것, 즉 하나님께 속한 물질적 재산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충성되지 못했다면, 하늘의 풍성하고 참된 너희의 것, 즉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누가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는 의미(마 25:34)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16:14-18은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및 메시야 시대에 대한 선포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바라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 대한 그들의 완악한 반응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것을 듣고 예수님을 도리어 비웃었다(14절). 여기서 ‘이 모든 것(all these things)’은 원어상 복수로서 단지 바로 앞 문단의 내용만이 아니라, 넓게는 15장의 비유들 모두를 포함한다고 하겠다. 즉 돈을 좋아한 바리새인들은 직접적으로 재물 문제에 관한 예수의 교훈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세리 및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는 모든 교훈들을 다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람의 중심(中心)을 살피시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다. 또한 세례 요한의 때까지와 그 이후의 시대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선언하신다. 즉 세례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였으나, 그 이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선언하신다(16절). 이는 결국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내용으로서, 비록 바리새인들이 율법주의적 편견과 아집으로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로부터 배격받고 있는 자신이 곧 메시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계신 셈인 것이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이란 '맘몬'이라는 단어로, 돈을 하나님과 대등한 절대적 위치에 두고 인격적 힘을 지닌 존재로 우상화시킨 것을 말한다. 맘몬이 불의한 이유는 재물이나 소유 자체가 불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기심과 하나님께 대한 불충, 이웃에 대한 압제와 권리 침해 등 불의한 태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딤전 6:10 말씀처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 되기에 맘몬은 불의하다. 그러나 그 불의한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때 맘몬의 힘을 상실된다. 따라서 천국 제자는 불의한 재물도 '신실하고 충성되게' 사용해야 한다.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너희에게 내주겠느냐?

10절에서 12절까지 각절의 내용들은 표현만 약간씩 다를 뿐 매우 긴밀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즉 어떠한 것에 ‘충성’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10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 에, 11절에서는 ‘불의한 재물’ 에, 그리고 본절에서는 ‘남의 것’에 충성해야 한다는 교훈이 주어진다.

여기서 ‘남의 것', 즉 ‘알로트리오’ 란 청지기의 기본적 자세와 연관이 되는 표현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것을 관리하는 자이다. 그리고 위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으며 본절의 ‘남의 것’에 병행을 이루는 지극히 작은 것, 불의한 것 둥은 세상 재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남의 것’ 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이러한 재물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닌, 단지 청지기로서 관리해야 하는 하나의 대상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바로 물질을 포함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소유자가 아닌, 관리자라는 인식은 청지기가 지녀야 하는 기본 자세이다. 그러므로 ‘남의 것’은 청지기직의 성격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므나의 비유(눅 9: 11-27) 와 달란트 비유(마 25: 14-30) 를 통해도 재물 및 소유가 본인의 것이 아닌 타인, 곧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거듭하여 재물에 대한 성실한 관리, 즉 주인에 대한 충성을 요청하고 있다.

여기서 ‘너희의 것’, 즉 ‘토 휘메테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10-12절에서 작은 것과 큰 것(10절), 불의의 재물과 참된 것(11절), 그리고 남의 것과 너희의 것(12절)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맥락으로 보아 결국 ‘너희 것’이란 문장 구조적으로는 큰 것이며, 참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언어학적으로는 ‘너희의 것’으로 번역된 ‘휘메테론’이 ‘너희에게 할당된(allotted to you)' 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너회의 것’이란 세상에서는 아직 소유하지 못하고 장차 하늘에서 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상급, 세상의 재물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위탁된 것을 충성되게 관리하지 않으면, 우리 각자의 몫으로 할당되어 장차 천국에서 받기로 되어 있는 것도 결국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본절의 주된 메시지이다.

한편 ‘누가’로 번역된 의문사 ‘티스’는 일차적으로는 청지기에게 일을 일을 맡기는 주인을 가리키나,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맡기신 분이며, 크고 참되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비웃었다.

14-18절에는 앞선 1-13절 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적 말씀을 바리새인들이 거부하는 내용과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15장에서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던 사람들이다(눅 15:12).

‘돈을 좋아하는’이라 번역된 ‘필라 르귀로이’의 원형 ‘필라르귀로스'는 ‘벗’이란 뜻이 있는 ‘필로스’와 ‘은’, ‘은제품’, ‘은전’ 등(마 10:9 ; 행 17:29 ; 고전 3:12)을 나타내는 ‘아르귀로스'의 합성어로 ‘돈을 사랑하는’, ‘탐욕적인’(딤후 3:2)이란 뜻을 갖는다. 돈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탐욕은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어려운 가난한 과부의 가산조차 삼킬 정도로 대단하였다(눅 20:47).

‘자들이라’로 번역된 ‘휘파르콘테스’는 ‘존재하다’, ‘살아가다’, ‘속하다’라는 뜻을 지닌 ‘휘파르코’의 현재분사로서 지속적으로 돈을 좋아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어서 돈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탐욕의 모습을 더욱더 생생하게 보여 준다.

‘비웃거늘’로 번역된 ‘엑세력테리존’ 은 ‘코웃음치다’, ‘조롱하다’라는 뜻이 있는 ‘에크랙테리조’의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해서 예수를 조롱하며 비웃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바리새인들의 비웃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지적하신 말로 인해 그들 마음에 걸림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이 동시에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들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물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류들이었 다. 그들은 구약에 기록된 물질적 축복에 대한 일부 내용(창 18:18 ; 24:35 ; 26:12 ; 신 5:33 ; 6:3 ; 7:13 ; 15:10)에 근거하여 재물은 곧 하나님을 잘 섬긴 하나의 징표로까지 여겼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돈을 사랑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너희는…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휘메 이스 에스테 호이 디카이운테스 헤아우투스) .

예수께서는 이제 그의 교훈의 참뜻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직접 책망하기 시작한다.

14절의 ‘돈을 좋아함’과 본절의 ‘옳다 함’이 무슨 연관이 있는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재산은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재물관을 가졌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으며, 그들의 재산이 바로 그들의 의로움과 연관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돈을 좋아함’을 지적하신 데 이어 ‘스스로 옳다 하는 자’로 말씀을 이어가시는 것이다.

‘옳다 하는’이라고 번역된 ‘디카이운테스’는 ‘의롭게 하다’, ‘의롭다고 선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디카이오오’의 현재 분사로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의 교만한 태도가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양으로 나타나는 교만과 자랑, 그리고 그들의 심중을 파악하는 자신의 신적 통찰력을 통해 그들의 위선을 정확하게 지적하셨다.

‘헤아우투스’ 바로 뒤에 나오는 ‘앞에서’로 번역된 ‘에노피온’은 ‘~의 면전에서’, 혹은 ‘~의 눈에’라는 뜻의 전치사로서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가증된 행동을 해 왔음을 단적으로 지적한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짐짓 구제 행위를 하고 떠들어댔으며(마 6:1, 2), 역시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마 6:5 ; 눅 18:11,12).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미움을 받는 것이니라(호티 토 엔 안드로포이스 휩셀론 브델리그마).

본절에서는 사람과 하나님, 높임과 미움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의 가치 기준 및 가치 판단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높임을 받는’이라 번역된 ‘휩셀론’의 원형 ‘휩셀로스’는 ‘높은’(눅 4:5 ; 마 4:8 ; 17:1), ‘고귀한’(눅 16:15), ‘높이 올려진’(히 1:3 ; 7:26)이라는 뜻을 갖는 형용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높임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바라새인들을 진정으로 존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사람들 사이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의인인 체하며 높임을 받으려는 교만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께 반드시 정죄받는다. 이것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로 번역된 ‘브델리그마’는 ‘미움’, ‘가증한 것’, ‘더러운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와 관계하여 사용되었으며(왕상 11:6 ; 왕하 16:3 ; 단 12:11), 신약에서도 우상 숭배와 부정 행위 등을 묘 사하는 데 사용되었다(마 24:15 ; 막 13:14 ; 계 17:4), 이러한 원어적 의미로 볼 때 이 단어는 단순한 미움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타락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것 같은 그런 혐오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들의 영적 교만을, 그가 가장 혐오하시는 우상 숭배의 더러움을 미워하는 정도로 크게 가증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인 것’(잠 16:18)이다.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은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는데, 모두 거기에 힘으로 밀고 들어가려고 애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호 노모스 카이 호이 프로페타이 메크리 이오안누)

한글 개역 성경에서 단수 ‘선지자’로 번역된 ‘호이 프로페타이’가 실제로는 복수이므로 ‘선지자들’로 번역해야 한다. 원문으로 볼 때 ‘율법’은 단수로, ‘선지자들’은 복수로 표기되는 것은 성경 다른 곳의 표현과 일치되는 것 이다(마 5:17 ; 행 13:15). 이는 율법은 모세 한 사람의 저작이기 때문이며(눅 24:44), 선지서는 다수의 저작이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 성경을 포괄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본문은 구약은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마감되며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즉 구약 예언의 초점이었던 메시야 시대가 도래함으로 인하여 구약은 보다 역동적인 신약의 복음으로 대체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한편 본문은 마 11:12,13과 유사하지만, 마태의 문맥은 예수께서 ‘무리’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인 반면, 본문은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란 점에서 다른 시기에 선포된 별도의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이유는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한 요한의 때가 이미 지나 메시야께서 오셔서 친히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복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형식적 준수에만 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이며 완악함을 지적하고 율법의 근본이며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침입하느니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유앙겔리제타이---비아제타이).

본절 상반절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의 때까지라면 복음의 시대는 그 이후부터이다. 그렇 다면 이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는 요한은 이 양자 중 어디에 해당되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그 후부터는’이라고 번역된 ‘아포 토테’는 자구적으로는 ‘그 때부터’라는 의미이다. 이로 보아 요한은 율법의 마지막 시대의 막을 내리고 복음의 시대에 돌입되는 그 서두에 서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누가가 요한을 복음을 선포하는 이로 말하고 있고(눅 3:18)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의 활동이 복음의 시작과 관계된 것으로 기록한 것(행 1:21,22)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따르고 있는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는데 왜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는가를 그들에게 묻기 위해 덧붙여진 것이다.

‘침입하느니라’로 번역된 ‘비아제타이’는 ‘비아조’의 중간태로서 ‘자기 자신을 그 안에 밀어 넣다’ 혹은 ‘모든 사람이 힘써서 그리로 향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다른 사람이 천국으로 밀어 넣는다는 의미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자신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글 개역 성경은 사람이 침입하는 대상이 ‘복음’인 것처럼 번역하였으나 원어 성경으로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이다. 즉 ‘그리로’에 해당하는 ‘에이스 아우텐’에서 ‘아우텐’은 여성 3인칭 단수 지시 대명사이며, 여성 단수 명사로서 ‘나라의’로 번역된 ‘헤 바실레이아’를 받는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어’로 번역된 ‘유앙겔리제타이’는 동사이므로 지시 대명사로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침입하는 ‘그리로’는 ‘하나님 나라로’를 의미한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선민이라는 사상 때문에 자신의 어떤 열망이나 믿음없이 육신적 혈통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들을 오히려 깨고 있다. 혈통적인 태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믿음, 즉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더 쉽다.

'그러나'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인 구약 시대는 갔지만,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서도 율법은 여전히 그 효용성을 인정받을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곧 이 율법은 새 시대의 삶의 원리인 믿음의 빛 아래에서 사랑의 정신으로 지켜야 한다.

앞선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율법의 항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16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파기하고 부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복음으로 완성함으로써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바라새인들이 율법을 이해하되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글자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그 권위가 상실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변경되지 않으나 자구와 전통에 입각한 편협한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은 율법 자체와 결코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을 포함한 율법주의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 모두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여기서 말하는 말씀의 권위, 율법의 권위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권위와도 직결된다. “천지는 없어 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드는 남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 드는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율법의 항구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간음 이야기로 전환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 말씀은 앞의 말씀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본절의 말씀은 인간의 율법 파기의 일들이 성행함에도 불구하고 율법 자체는 영원하다는 실례를 제시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당시 유대인들은 많은 율법을 곡해하였으나 대표적 실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혼에 관한 것이다. 원래 율법에 따르자면 아내가 수치가 되는 일이 있으며 그것이 법적 증거를 갖게 되면 비로소 이혼이 가능하였다(신 24:1-4). 그러나 당시 바라새인들은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정당한 이유 없이도 이흔 증서만 써 주면 이혼해도 좋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마 19:3,7). 본 절에서 ‘버리고’로 번역된 ‘아폴뤼온’은 정당한 이유 없이 결혼 관계를 파기하고 아내를 내쫓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결혼을 영구적인 관계로서 간주하지 않고 임의로 파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며 다시 한번 구약 율법이 말하는 바 이혼 규례를 상기시킴으로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그릇된 이혼관, 더 나아 가서 잘못된 율법관을 질타하셨다.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눅 16:1-9)

[ 성경묵상 ]

우리는 청지기인데, 우리 자신들이 불의한 청지기의 입장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들은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지혜 있는 청지기의 모습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작은 자들을 위해 구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까?

'불의한 재물'과 '작은 것(10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의미하며, '큰 것(10절)'과 '참된 것(11절)', '너희의 것(12절)'은 '하늘나라의 것,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리기 위해 받을 것'으로 보고 해석하면 진정한 뜻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본문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청지기의 신분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잘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재물을 나눠 주는 일에 충실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것, 참된 것(11절)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본문 개요 ]

16장 요약 ; 재물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교훈한다.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강력한 유혹거리인 만큼 어떻게 다루고 대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이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하신 예수님은 미래의 삶과 영적 삶을 위해서 재물을 선용할 것을 교훈하신다.

16:11-12 ; 불의한 재물과 남의 것, 참된 것과 너희의 것이 서로 대치된다. 이것은 '너희가 만일 궁극적으로 너희의 것이 아닌 남의 것, 즉 하나님께 속한 물질적 재산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충성되지 못했다면, 하늘의 풍성하고 참된 너희의 것, 즉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누가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는 의미(마 25:34)이다.(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16:1-13은 올바른 물질관에 관해 교훈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제자 들에게 직접 주신 것이지만(1절), 바리새인들이 듣고 있는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므로(16:14)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물질관을 간접적으로 꼬집은 것이기도 하다. 이 비유를 통한 교훈에서 예수께서는 충성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해 주시는데, 곧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되다는 것이다(10절). 그리고 곧이어 그 ‘작은 일'이란 바로 재물이라는 것을 시사하신다(11절). 결국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재물에 대한 자세가 올바른 믿음의 시금석(試金石)이며,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줄 아는 자만이 다른 일에도 충성될 수 있음을 교훈하시는 것이다.

이어 16:14-18은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및 메시야 시대에 대한 선포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바라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 대한 그들의 완악한 반응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것을 듣고 예수님을 도리어 비웃었다(14절). 여기서 ‘이 모든 것(all these things)’은 원어상 복수로서 단지 바로 앞 문단의 내용만이 아니라, 넓게는 15장의 비유들 모두를 포함한다고 하겠다. 즉 돈을 좋아한 바리새인들은 직접적으로 재물 문제에 관한 예수의 교훈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세리 및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는 모든 교훈들을 다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람의 중심(中心)을 살피시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다. 또한 세례 요한의 때까지와 그 이후의 시대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선언하신다. 즉 세례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였으나, 그 이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선언하신다(16절). 이는 결국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내용으로서, 비록 바리새인들이 율법주의적 편견과 아집으로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로부터 배격받고 있는 자신이 곧 메시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계신 셈인 것이다.

이어 16:19-31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서, 문맥적으로 재물에 관한 앞 문단의 비유와 교훈의 내용에 있어서 유사하면서도 그 교훈을 보다 강렬하고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이 내세에서 극적으로 역전됨을 보여 줌으로써, 부(富)를 하나님의 축복의 필수적 상징으로 여기며 가난과 질병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만 여기던 유대적 사고 방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있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는 청지기를 하나 두었다. 이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고발이 들어와서,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엘레겐 데 카이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본장에는 앞선 제15장의 세 가지 비유에 이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13절)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9-31절)가 제시되고 있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는 비유이다. 예수님은 교훈하고자 하는 의미를 한층 더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과 함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 눅 14:35)는 말씀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교훈하고자 하는 대상을 한정시키기 위한 의도로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본장의 두 비유 역시 제자들(1절)과 바리새인들(14절)을 대상으로 효과적으로 교훈하시고자 하는 의도로 말씀된 것이다.

한편 ‘또한’으로 번역된 접속사 ‘데 카이’는 ‘그리고 역시(KJV, And also)’라는 의미로서 누가가 어떤 교훈에서 다른 교훈으로 넘어갈 때 자주 사용하는 어구이다. 이것은 1-13절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시간상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15:1-7)와 드라크마의 비유(15:8-10) 및 잃은 아들의 비유(15:11-32)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 말씀을 듣는 청중은 예수님의 제자들(1절) 뿐만 아니라 세리와 죄인, 바리새인과 서기관(15:1,2)이 포함되어 있지만 누가가 서두에 ‘제자들에게’라고 대상을 국한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유는 특히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제자들’로 번역된 ‘마데타스’라는 단어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무려 261회나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복음서에 제시된 ‘제자’라는 단어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좁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눅 8:9 ; 마 1:1 ; 11:1 ; 막 8:27 ; 요 2:2)를 가리키는 반면 넓게는 예수님을 추종하며 따르는 무리들(요 6:66 ; 7:3 ; 19:38)을 지칭할 때 쓰였다. 여기서는 ‘열둘’이라 지적하지 않은 점과 교훈하고자 하시는 내용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철저한 준비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제자들’에는 열두 제자들 외에도 예수를 믿고 추종하는 보편적인 제자들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안드로포스 티스 엔 플루시오스 호스 에이켄 오이코노몬) .

‘있는데’로 번역된 ‘에이켄’은 ‘소유하다(have)’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코’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계속 소유하다’라는 뜻이다. 이로 보아 청지기는 오랫동안 이 부자의 집에서 일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지기’로 번역된 ‘오이코노몬’의 원형 ‘오이코노모스’는 ‘집’이라는 뜻이 있는 명사 ‘오이코스’와 ‘관리하다’, ‘경영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네모’의 합성어로 ‘집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로 보디발의 집에서 그 집안의 소유를 관리하던 요셉과 같은 직무를 가리킨다(창 39장). 이들은 태생적 자유인이거나 혹은 해방된 노예로 주로 주인의 농장이나 토지의 관리(눅 12:42 ; 고전 4:2 ; 갈 4:2), 혹은 수입과 지출 등 재정 전반을 감독(롬 16:23)하였다. 따라서 롬 16:23에서는 ‘재무’로 번역되었다. 문맥상 본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재정 관리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이코노모스’는 서신서에서 그 의미가 보다 확장되어 사용되는데 고전 4:1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딛 1:7에서는 ‘감독’의 또다른 별칭으로 쓰여 하나님의 복음과 교회에 관계된 직분을 나타낸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는 청지기직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관리하며 양육하는 제자도와 연결된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제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는 주어가 ‘청지기’로 제시되었지만 원문을 직역하면 ‘한 청지기를 소유하고 있는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있었다’로서 주어는 ‘주인’이다. 즉 원문을 통해 볼 때 부자가 청지기를 ‘소유’하고 있는 주종의 관계가 명시되고 있다. 따라서 청지기는 주인과 맺은 계약 관계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주인의 뜻에 따라 언제라도 해고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호스 디아스코르피존 타 휘파르콘타 아우투)

‘허비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디아스코르피존’은 ‘디아스코르피조’의 현재 분사이다. ‘디아스코르피조’는 합성어가 될 때 ‘분리’(separate)의 의미로 쓰이는 전치사 ‘디아’와 ‘흩뿌리다’, ‘분산시키다’라는 뜻의 동사 ‘스코르피조’의 합성어로서 모아 있는 사람이나 물건들을 흩어지게 할 때(마 26:31 ; 막 14:27 ; 요 11:52), 혹은 재산을 탕진하거나 낭비할 때(15:13)에 쓰인다. 본절에서 이 단어가 현재 분사로 쓰인 것으로 보아 청지기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재산을 허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청지기는 무엇보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에 충실해야 하는데 오히려 재산을 허비하는 일을 지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직책을 소홀히 해 온 자였다.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카이 후토스 디에블레데 아우 토)

‘들린지라’란 표현을 통해서 볼 때 주인은 청지기의 소행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고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들린지라’로 번역된 ‘디에블레데’는 ‘디아발로’의 수동태로 ‘밀고되었다’, ‘고발되었다(was accused)’라는 뜻이다. ‘디아발로’는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 ‘디아’와 ‘던지다’라는 뜻의 동사 ‘발로’의 합성어로 허위로 고발하거나 적대감을 가지고 고소하여 이간질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로, 신약에서는 이 곳에만 유일하게 쓰였다.

본절에서 ‘듣다’는 의미의 동사인 ‘아쿠오’를 쓰지 않고 ‘디아발로’ 동사를 쓴 것으로 보아 부자에게 고해진 청지기에 대한 제3자의 말에 비방이나 참소의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동사에서 ‘마귀’(마 4:1), ‘참소자’(딤전 3:11)란 의미로 쓰이는 ‘디아볼로스’가 유래되었고, 구약 철십인역(LXX)에서 사단이 하나님 앞에 욥을 참소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욥 1:9).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번역이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카이’와 지시 대명사 ‘후토스’를 살려 직역하면 ‘그런데 이 사람이 그에게 고발되었다’이다. 원문상에도 고발자가 누구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주인이 청지기를 파면하기로 한 것과(2절) 청지기 또한 가부간 변명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고발된 내용은 주인이 수긍할 정도로 상당한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지기의 불의는 결국 주인에게 알려졌다. 이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불의를 감추려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 심판 날에 그 어떤 것도 숨김 없이 모든 것이 선악간에 밝히 드러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딤전 5:24,25).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이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 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청지기 일을 볼 수 없네.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러자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 날 때에,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이해 줄 사람들을 미리 마련해야 하겠다.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본절부터 7절까지 기록된 청지기의 행위는 일전에 주인에게 재정적 손해를 입힌 것에 계속해서 더 큰 재정적 손해를 입히는 매우 비열한 행위이다. 그러나 해고된 이후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을 얻기 위하여, 즉 자기 자신의 미래를 안전하게 준비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매우 지혜로운 행위이다. 그는 결심하자마자 그것을 즉각 행위로 옮김으로써 우유부단하지 않은 단호한 기질의 소유자임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쁘고 급한 상황에서도 벚진 자들을 ‘낱낱이(헤나 헤카스톤)’ 부르고 있다. 즉 본단락에는 기름 백 말 빚진 자와 밀 백 석 빚진 자만이 실례로 나오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밖의 많은 채무자들의 빚도 줄여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 청지기가 급한 상황 속에서도 일처리를 얼마나 꼼꼼하게 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빚진 자’는 청지기의 ‘주인에게’ 땅을 할당받아 일하고 있는 소작인으로서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이나 상업상의 목적으로 돈을 빌린 자이거나 기타 다른 채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기름 백 말'에서 '말'은 약 41리터, 여기서 기름은 '감람유'를 뜻한다. 또한 백 말은 약 1,000데나리온의 가격을 말한다.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

주인이 ... 칭찬하였으니(카이 에페네센 호 퀴리오스).

주인은 또다시 청지기의 불의한 소행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주인은 청지기가 주인을 위해 일하지 않았음에도, 더구나 그를 해고하기 전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재정 손실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하였다.

어떤 주석가들은 청지기가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주인의 이미지와 평판을 좋게 만들어 주인의 마음을 돌이켜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해고를 면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4절에 근거해 볼 때에 청지기는 주인에게 직분을 빼앗긴 이후에 자기가 탕감해 준 사람들 덕택으로 살기 위해 빚을 탕감한 것이 분명하므로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청지기는 여전히 불의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오히려 더 큰 불의를 저질렀지만 주인은 이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런 점에서 주인이 칭찬한 것은 청지기의 도덕적 부분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하고 지혜롭게 처신한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단락의 의미를 극히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는 잠언에서 마치 뇌물이 사람의 앞길을 형통케 하고(잠 17:8) 다른 사람의 분노를 잠재우고 호의를 얻게 하는(잠 21:14) 마치 좋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뇌물 사용자의 부정한 목적인 한 가지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므로 제한적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본단락에서도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중요한 요지만을 파악하여 이를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도 연관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준비를 위한 지혜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비유에서 초점이 되고 있는 물질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혜롭게 잘 사용하라는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롭게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앞으로 다가올 앞날을 바라보며 대처하는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는 일에 인색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있다. 이 땅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외에는 관심없는 ‘세상의’ 청지기들도 이렇게 교활할 정도로 민첩하고 지혜롭게 미래의 상황을 대처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은 적어도 이 정도의 지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책망과 아울러 교훈이 본절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톤 오이코노몬 테스 아디키아스 호티 프로니모스 에포이에센) .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유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 ‘호티’ 이하에 나타나고 있다. 즉 그가 비록 불의하나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지혜 있게’로 번역된 ‘프로니모스’는 ‘신중하게’, ‘사려깊게’라는 뜻이며, 어떤 이익 등을 위해 약삭빠르고 신중하게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 복음서에 사용되고 있다(마 10:16 ; 24:45). 불의한 청지기는 위기에 직면하여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지혜를 보였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여기에 쓰인 ‘프로니모스’라는 단어에 종말론적인 뜻이 있음을 말하면서 청지기는 위기에 봉착해 있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은 심판 이후에 거하게 될 복된 처소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 주어진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신속하게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 청지기를 수식하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본절에 이르러 ‘옳지 않은’이라 번역된 ‘아디키아스’라는 단어를 쓴 것은 오히려 청지기의 지혜를 더 부각시키기 위함이라 말할 수 있다. 원형 ‘아디키아’는 주로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롬 1:18),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죄(요일 1:9 ; 5:17)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 청지기의 불의는 그의 직책과 관련하여 나온 것으로 곧 마땅히 행해야 할 청지기직을 소홀히 함으로써 주인의 뜻에 불순종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청지기의 불의는 이미 확인된 바 있다(1절) . 이번 사건도 빚을 탕감받은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 될 수 있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물이 예전처럼 낭비되고 있으므로 주인에게 청지기는 여전히 불의한 사람이다. 하지만 청지기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앞날을 대비하여 민첩하게 처신하고 있는 그 모습만큼은 지혜로워 칭찬 받을 만한 것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더 지혜로움이니라(호티 호이 휘오이 투 아이오노스 투투 프로니모테로이 ... 에이신).

‘세대’라고 번역된 ‘아이오노스’는 ‘시대’, ‘세상’이라는 뜻을 지니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것과 반대되는 세속적인 것을 가리킨다(롬 12:2 ; 엡 2:2 ; 딤후 4:10).

‘아들들’로 번역된 ‘휘오이’의 원형 ‘휘오스’는 사람을 지칭하는 완곡어법이며, 특히 법적 신분과 상속을 강조할 때 쓰인다(마 1:1). 그러므로 ‘이 세대의 아들들’은 세상의 것을, ‘빛의 아들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것을 상속받은 자를 가리킨다.

‘빛’이라는 뜻으로 쓰인 ‘포토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구원의 진리이다(요 1:4). 요 12:36에는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본절에서 예수님은 구원에 참여한 빛의 아들들이(요 12:36 ; 살전 5:5 ; 엡 5:8) 오히려 구원의 빛에 참여하지 못한 세상의 사람들보다 지혜가 없음을, 즉 위기의 순간에 신속하게 준비하고 대처하지 못함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의 것은 악하고 버려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만(요 7:7 ; 8:23 ; 15:19), 세상을 관리하고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세상의 사람들의 지혜와 민첩성을 취하라고 말씀하신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불의의 재물'이란 '부정직하게 획득한 재물'이라는 의미보다는 '세상적인 재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우리 인간들이 현재 이 땅에서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의미한다.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너희에게 내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8)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하니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해이다. 복음 안에서 이 양자를 밝히신 하나님의 계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의무, 즉 자선을 베풀고 선행을 하는 일에 참여시키고 고무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수 많은 은혜의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선하게 이용할까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있는 태도이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세상적인 사람들이 가장 순간적인 이익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투자하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와 영원한 복지를 도모하기 위하여 경건과 자선의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우리의 재산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1. 청지기의 비유(1-8)

이 비유 자체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의 청지기로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 청지기의 불성실 :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으로 인하여 그의 주인에게 고소당하였다(1절). 우리는 모두 동일한 고소를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셔서 이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진보를 우리는 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데 힘써야 한다.

(2) 청지기직의 박탈 :

그의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라고 말하였다(2절). 주인은 청지기에게 실망하게 되어 유감인 것을 말한다. 그 사실은 주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고 해결책이 없었으므로, 책임을 지고 잠시 후 물러나게 되었다(2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얼마 후에 청지기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죽음이 찾아와 우리를 청지기직에서 쫓아내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2) 죽을 때에 우리가 청지기직에서 박탈당하는 것은 틀림없으며, 또한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재산을 낭비하였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청지기직을 벗게 될 그 날에 우리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드려야 한다.

(3) 그 후 갖게 된 지혜 :

그러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3절). 그는 벌써부터 이점을 생각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다.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것인가?

1) 그는 노동으로 생계를 구한다는 데 대해서는 자기에게 그럴 만한 근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그러나 땅을 파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은 그의 게으름이다.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뜻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땅을 팔 힘이 없다는 것은 육체적인 능력 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인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따을 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땅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2) 그가 구걸하여 생계를 구한다는 데 대해서 그럴 만한 겸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말은 그가 앞에서 자신의 게으름을 보여 준 것처럼 교만에서 나온 말이다. 이 청지기는 구걸에서 얻게 될 수치보다 자기 주인을 속임으로 말미암은 수치가 더 큰 이유이었다.

3)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친구로 삼기로 결심한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가 내 주인의 채무자들을 알고 있고, 여러 번 친하게 대해 왔었다. 이제 한번 더 도움을 베풀어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반길 수 있도록 하자. 내가 혼자서 살아나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에게 숙소를 정하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신세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6절). 이와 같이 해서 그는 그 빚을 반으로 탕감하였다. "우리가 발각되거나 이심받지 않도록 빨리 앉아 고쳐 써라." 그는 자기 주인에게 밀 백석을 빚진 다른 사람을 불러 그에게 십으로 고쳐 쓰라고 했다(7절). 본문에서 우리의 세속적인 재산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보라.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그러하다. 그들은 그 재산에 관한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맡은 이들에게 주인인 자기도 속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신뢰하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배반당하는가를 보라. 이 청지기는 부정 거래한 것이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 잘못을 고치는 일은 드물다.

(4) 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칭찬 :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 그의 주인, 즉 그 종의 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이 자신을 위하여 기발한 생각과 계책을 세운 것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이 구절의 후반부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 전체가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청지기가 자기 주인을 속였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지혜롭게 했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에서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하여서도 잘 하였고, 채무자들과는 바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채무자들에게 빡빡한 거래를 했었으므로 저들은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떠나는 마당에서 그는 이제 공정과 자비를 모두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 주인을 위해서만 일하였다. 그러나 이제 자기 주인의 신을 잃어 버리자 채무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그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 청지기의 선견지명을 생각할 때, 내세를 위해 우리는 지각이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즉 빛의 아들들이 그들의 영혼과 영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곳 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세상적인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 데 있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1) 이 세상의 일에 관한 세속적인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는 우리 영혼의 일을 할 때 배울 필요가 있다. 가장 필요한 우선적인 일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착하여 이용한다는 원리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적인 일에 지혜롭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빛의 자녀들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참으로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있어서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 줄 아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서 살 것처럼, 그리고 이 후에는 다른 세계가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빛의 자녀로서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세계를 보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준비하거나 최선의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다른 세계에 최선의 애정을 쏟지도 아니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2. 비유의 적용과 결론(9-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즉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절). 이 비유의 직접적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즉 이 말은 "이 세상에 비록 얼마밖에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적은 것으로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권면하시는 것은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이 후에 자기 돈의 이익을 배당 받을 수 있도록 돈을 관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 후에 더 나은 유익을 얻을 목적으로 소망을 갖고 그들의 자본을 투자하듯이 우리도 다른 세상에서 장차 그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돈을 이용하는 법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주의 재산이지만, 우리 주의 채무자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재산을 사용한다면, 우리 주님께 손해를 끼치기는커녕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방편이자 주님께 대한 의무를 행한 것이 될 것이다.

1) 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 또는 일시적인 재물이다. 부란 사라져가는 것이므로 그것에 기대를 거는 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2) 비록 이 불의의 재물이 행복을 위하여 맡겨진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무리가 그 재물에서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임종할 때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틀림없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상인이 파산에 이르게 될 때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조만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틀림없다. 즉 죽음은 상점을 폐쇄시키고 재산을 몰수해 버릴 것이다.

4) 우리가 쇠약하여 죽게 될 때 하늘에 있는 영원한 거처로 영접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먼저 가셔서 그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시다. 디모데전서 6:17-19을 보라.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그는 여러 말씀으로 이 권고를 더욱 강조하신다.

1)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을 옳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선물을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섭리의 선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불성실할 경우에 우리는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은혜를 상실한 자로 정확히 평가될 것이다(10-14절). 이 세상의 부는 보다 적은 반면에,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만일 우리가 적은 것에 불성실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있어서도 불성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10절). 자기 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고상하고 가치있는 지혜와 자비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할 것이나 이 세상의 부한 달란트를 묻어 두는 사람은 영적인 부 다섯 달란트를 절대로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부는 불의의 재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빨리 사라진다. 만일 우리가 그 재물을 이용하려 한다면 서둘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참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11절). 진실로 부유한 사람이란 믿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유한 사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향해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만일 다른 부가 우리에게 추가되어 진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부를 더 확고히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 큰 영적인 은혜를 받을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 이 세상의 부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여야 하며, 곧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원한 부는 우리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의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고, 하늘 나라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것들로 우리를 부요케 하실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2)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에게 유용한 세상적인 우리의 모든 소유를 그를 섬기는 일에 드릴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경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와 연합하게 되면 그만큼 더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과 그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이용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앞에 분명해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들의 관심이 나누어지므로 그들은 절대로 혼합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 보자.

1) 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 그의 말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부정할 수 없었지만 비웃었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탐욕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주로 범하는 죄이었다.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이나 헌신적으로 많은 실천을 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세상을 사랑한 것 때문에 멸망하였다. 이 탐욕적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욕망, 그들의 '들릴라', 즉 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코웃음쳤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극도의 경멸과 모멸의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이 세상의 견해와 방법에 반대가 되기 때문에 비웃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그것을 경멸하는 것은 예사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롱까지도 참으셨다. 그는 보통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으므로 야유를 받고 조롱을 받으셨다. 이 사실로 충성스러운 주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경멸당하는 것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 비웃음을 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선 수치가 아니라 비웃음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예수께서는 그들이 경건의 모양과 냄새로써 그들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들을 단호히 꾸짖으셨다(15절).

① 가장한 외모 :

첫째,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이 책임져야 할 어떤 잘못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너희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과제로 삼는 자들이며, 세상에 자신을 의로운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너희는 이런 일로 유명하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특별 취급하여 죄를 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선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② 추악한 내면 :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의 모습이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들 앞에 스스로 옳다 하는 것과 우리의 악한 것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충분히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악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는 사실을 숙지할 때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 속에 비천한 인격과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을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평가에 부응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람들 사이에 귀히 여김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미워하시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신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옳다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경우도 있다(고후 10:18).

3) 예수께서는 이 욕심 많고 자만에 가득찬 바리새인들보다 복음에 의해 훨씬 더 감화받을 수 있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구원이 유대인의 것이었을 때의 유대 조직과는 달리 오직 개개인을 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르치지 않도록 구원을 얻어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를 경멸한 것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였다. 이는 그들의 생각에 율법과 선지자에게 있었던 부에 대한 많은 약속과, 다른 현세적인 재물들에 대한 약속이 없었던 때문일까?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 율법과 선지자의 때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기 시작한 이제부터는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그리고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 복음이 전파된 이상 눈이 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한다." 하늘나라로 가려는 자들은 고통을 받아야 하며, 세상과 거스려 싸워야 하며, 정반대의 길로 가는 무리들을 밀어내야만 한다.

4)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효로 만들려는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정되고 재가되어진 것이다. 이 율법이 명하는 의무는 여전히 지켜야 할 본분이다. 그것이 금하는 죄는 여전히 죄로서 존재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에서 완전하여지며, 그 그림자는 복음의 색깔로 칠해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에서 인화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큰 부정을 막기 위하여 묵인한 몇 가지 사항들이 있었다. 복음은 그러한 허용을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마태복음 5:32, 19:9에서 이미 상고한 바 있는 이혼의 사례에서처럼(18절), 율법을 거스리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의 부패한 탐욕과 정열의 지독한 그 근원을 쳐서, 그것들을 죽이며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욕망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완고해지기 때문에 그들이 탐욕에 빠질 정도로 허용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청지기>